CAFE

가톨릭 이야기

[교회사]교회개혁(2) 라테란, 콘스탄츠 공의회 (12-15세기)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4.12.03|조회수730 목록 댓글 0

교회개혁(2) 라테란, 콘스탄츠 공의회 (12-15세기)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 1차 라테란 공의회(1123)

 

개혁과 정화를 추구하며

 

강대인 라이문도(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례서 편집 팀장)

 

 

그리스도는 잠들어 계시고

 

교황 레오 3세가 칼 대제(샤를 마뉴)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유럽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 새로운 부흥기를 맞았지만, 프랑크 왕국의 몰락과 함께 다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은 독일지방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부족 대공령(大公領)의 합성체라는 구도 속에서 탄탄한 왕권을 확립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오토 1세는 교회를 국가 통일의 지주로 삼아 제국교회 정책을 펼쳤다. 쉽게 말해서, 주교를 봉건영주로 삼아 국가 통치의 주요 임무를 부여한 것이다. 특히 하인리히 3세는 교회 개혁 운동을 주도하며 교황권 확립에 공헌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융성기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황제가 성직자를 임명하는 서임권을 전제로 하여, 세속의 권력다툼에 성직자들이 휩쓸려드는 교회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주교 임명이 일종의 성직매매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를테면 영주들 사이에서 주교좌성당을 사고파는 것과 같은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교황권 또한 황제나 로마 귀족들이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교회라는 배 안에 그리스도께서 잠들어 계시는 시대였다.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각성에서 각지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세계 공의회들은 물론 여러 차례의 지역 공의회에서도 이미 평신도(세속 권력)의 성직자 서임을 단죄하였다. 성속의 이러한 대립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 저 유명한 카노사 굴욕 사건(1077)이었다.

 

 

서임권 투쟁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교황 그레고리오 7(1073-1085년 재위) 성인은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주교 선출에 간섭하지 말라고 요구하였다. 황제는 보름스에 주교들을 불러 모아 제국의회를 열고 교황을 폐위시킨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교황도 황제의 파문과 폐위를 선언하였다.

 

그러자 제후들과 주교들이 황제에게 등을 돌렸다. 황제에 대한 교황의 파문이 취소되지 않으면 새 황제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황은 새 황제 선출을 주재하러 독일로 가는 도중에 카노사 성에 머물렀다. 황제의 자리를 지키려는 하인리히 4세는 참회자로서 사흘 동안을 꼬박 맨발로 눈 속에 서있었다. 교황은 마침내 그를 사면해 주었다. 황제가 다음 공의회에 출두하여 그 결정에 따른다는 조건이었다.

 

독일 제후들은 루돌프를 새 황제로 선출하였다. 교황은 중립을 지켰지만 양편에서는 불만이었다. 양측이 모두 공의회 소집을 방해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무력으로 새황제 루돌프를 패퇴시키고, 성직매매로 파문당한 라벤나의 대주교를 대립 교황으로 뽑아 클레멘스 3세로 내세우고, 로마로 진군하여 그레고리오 7세를 축출하였다.

 

바닷가 살레르노 성에서 숨을 거두며,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였다. 그래서 유배지에서 죽는다.

 

수도자 알도브란도(그레고리오 7)는 교황 그레고리오 6세의 시종으로서 그가 쾰른으로 추방되어 죽을 때까지 모셨다. 그 뒤로 여러 교황을 모시며 사도좌 재산 관리부터 시작하여 교황사절로서 교회와 국가 사이에서 빚어지는 온갖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니콜라오 2세가 교황 선출에 대한 세속권력의 개입을 배제하고 그 선거권을 추기경단에만 부여한 것도, 거기에 대한 반발을 무마한 것도 알도브란도의 노력이 거둔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는 부제 추기경이 되고 로마 교회의 대부제가 되었으며 마침내 교황 알렉산데르 2세의 상서원장이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교회와 수도원의 엄격한 개혁을 추구하며 성직자 기강 확립에 진력하였다.

 

알렉산데르 2세의 장례식을 거행하는 동안 신자들 사이에서 “알도브란도를 교황으로!”라는 외침이 일어났다. 온갖 만류와 고사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추기경회의에 ‘끌려가’ 민중의 함성 속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필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황제의 추인을 받은 다음에야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는 교황이 된 다음에 한 수도원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막중한 교황직에 대한 공포심을 드러내며 교회의 불행을 이렇게 개탄한다.

 

“동방교회가 신앙에서 떨어져 나간 지금 온통 이교도의 공격을 받고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거룩한 부르심과는 전혀 다르게 사는 주교들뿐이다. 자신의 야욕이나 이기심에 앞서 하느님의 영광을 내세우는 군주도 없다. 내가 늘 얘기해 왔지만, 나와 함께 사는 자들도 이교도보다 더 못하다.

 

 

새로운 시대

 

이러한 전환기에서 교회의 진정한 개혁과 정화를 힘겹게 추구해 온 결실이 제1차라테란 공의회에서 드러났다. 내란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이른바 서임권 투쟁을 단순히 황제와 교황의 권력 싸움만으로 보면 잘못이다. 그것은 세속 권력을 배제하는 정화를 통하여 교회의 자유를 얻으려는 개혁 운동이었다.

 

어떻든 내란은 보름스 협약(1122)으로 수습되었다. 이 협약은 황제가 주교 서임권을 포기하여 주교와 수도원장 선출을 교회 자유에 맡기고, 영혼의 문제와 세속 사안을 분리하며, 영적인 권위는 오로지 교회에서만 나온다는 원칙을 인정한 것이다.

 

교황은 그해 12월에 공의회를 소집하여 이듬해 3월에 로마 라테란 궁전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서방교회 거의 모든 지역에서 300명의 주교와 600여 명의 수도원장과 군주들이 참석한 공의회를 교황 갈리스토 2세가 직접 주재하여, 보름스 협약을 승인하였다. 마침내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공의회는 또한 22개 규정을 발표하였다. “거룩한 교부들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사도좌의 권위로 금전을 통한 서품이나 승품을 금지한다”(1). “사제, 부제, 차부제가 여자와 동거하는 것을 완전히 금지한다”(3). “평신도는 수도자라 하더라도 교회 재산을 소유할 권한이 없다. 영주나 평신도가 교회의 재산을 처분하거나 가로채면 신성모독이다”(4).

 

1054년 동서 교회의 공식적인 분열 이후, 세계 공의회의 권위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서방교회 전통은 독자적으로 이 공의회부터 세계 공의회로 인정해 왔다.

 

[경향잡지, 2007 11월호]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 2차 라테란 공의회


개혁과 정화를 추구하며

 

강대인 라이문도(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례서 편집 팀장)

 

 

이른바 서임권 투쟁에서 교회가 세속 권력을 배제하고, 영적인 권위는 오로지 교회에서만 나온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대립 교황의 출현으로 교회는 내적인 분열을 겪기도 하였다. 교황 호노리우스 2세가 죽은 다음 날 아침, 그레고리오 파파레스키 추기경이 교황선거위원회에서 뽑혀 인노첸시오 2세라 하였다(1130).

같은 날 세 시간 뒤에, 숫자로는 더 많은 추기경이 교황선거위원회의 교회법적 결함을 문제 삼아, 피에트로 피에르레오니 추기경을 교황으로 뽑았다.

 

유대계 가문 출신인 그는 교황 이름으로 아나클레투스 2세를 선택하였다. 아나클레투스는 레오 성벽으로 둘러싸인 바티칸을 차지하고, 로마 유력 가문들의 지지와 시칠리아 왕의 지원을 받았다. 인노첸시오2세는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갈라진 교황권

 

인노첸시오는 프랑스로 가 여러 시노드에서 주교들은 물론 프랑스와 독일 군주들의 지지를 받았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의 지지가 커다란 힘이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로타르 3세와 함께 인노첸시오 교황은 1133년에 로마로 들어와 라테란 대성전에서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바티칸에 버티고 있던 아나클레투스는 요지부동이었다.

 

황제의 회군과 함께 인노첸시오는 다시 로마를 떠나 피사로 갔다. 그곳에서 1135년에 시노드를 소집하여 주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1137년에 황제의 군대와 함께 로마에 다시 입성하였다. 이듬해 초 아나클레투스가 죽고 빅토리오 4세가 그 후계자로 뽑혔으나, 베르나르도 성인의 간곡한 권유로 그는 대립 교황의 자리를 버리고 인노첸시오 2세에게 순명을 서약하였다.

 

인노첸시오 2세는 그동안의 교회 분열을 치유하고 그 흔적을 지우고자 1139 4월에 전체 공의회(synodus plenaria)를 소집하였다. 라테란에서 열린 이 회의가 제10차 세계 공의회로 인정되고 있다. 서방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온, 1천 명에 이르는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교황은 아나클레투스의 분열로 생긴 교회의 혼란을 통탄하며, 그 추종자들을 파면하고 그를 지원했던 군주들을 파문하였다. 대립 교황이 서품한 주교들은 팔리움과 주교 지팡이와 반지를 반납해야 했다. 이 공의회에서는 또한 이단자들을 단죄하였다. 줄기찬 개혁운동에도 아랑곳없이 여전히 썩어있는 교회와 사회의 현실이 이단을 키울 토양이 되어버렸다. 이를테면 브레시아의 주교좌 참사였던 아르날도는 완덕에 이르는 수덕생활을 추구하였는데, 그는 주교의 세속 권력과 성직자의 재산이 부패를 조장한다고 여겼다.

 

“재산을 가진 성직자나 수도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한 그의 주장을 자기 주교가 이 공의회에 고발하였으나, 그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인 침묵을 지키라는 명령과 함께 그 도시에서 추방되었다.

 

 

대규모 이단운동

 

앞으로 교회를 적잖이 괴롭힐 대규모 이단운동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공의회는 페트로브루스파를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 피에르 드 브뤼스의 이름에 따라 부르는 이단이다.

 

피에르는 가톨릭 사제였으나 정통교리에 어긋나는 주장으로 파문을 당했다. 그는 복음서 이외에는 신약이나 구약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교부들의 권위는 물론 가톨릭교회 자체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성직자들을 경멸하고 사제 독신제를 비웃으며, 성직자들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의 주장은 대충 이랬다고 한다.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유아세례는 쓸모없는 짓이다. 하느님의 교회는 신자들의 일치에 있으므로 성당이나 성전을 건축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잔혹하게 살해된 도구로서 치욕의 상징이므로 부수거나 불태워 버려야 한다.

 

그는 또한 성사들의 은총을 부정하였다. 성체성사의 실체변화도 부정하였다. 미사를 드릴 필요도 없다. 사제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신자들을 선동하였다. 그리고 죽은 이들을 위하여 바치는 기도나 선행도 부질없는 짓이라고 설파하였다.

 

이미 죽은 이의 공로는 살아있는 사람이 보태거나 덜 수 없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 반기를 든 후대의 프로테스탄트들이 개혁의 예언자로 내세울 만한 주장들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이단의 움직임은 프랑스 남부에서 널리 번져나갔다. 그러나 피에르는 한 고을에서 공공연히 십자가를 불태우다가, 이에 분노한 군중에게 붙잡혀 십자가를 태우던 그 화톳불에 던져져 불타 죽었다고 한다.

 

공의회는 바로 이 페트로브루스파 이단을 겨냥하여 이렇게 선언한다. “종교의 형색을 가장하여, 주님의 몸과 피의 성사, 유아세례, 성품성사 그리고 적법한 혼인계약을 배척하는 자들을 하느님의 교회에서 제거하고 이단으로 단죄하며, 그들이 외부(세속) 권력의 강제를 받도록 명령한다. 우리는 또한 그들을 변호하는 자들도 똑같은 단죄의 사슬로 묶는다”(규정 23). 이제부터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를 받은 자들은 공권력으로 처단을 받게 된 것이다.

 

 

공의회의 개혁 규정

 

2차 라테란 공의회가 발표한 30개 규정은 대부분 그레고리오 개혁 운동을 재확인한 것으로 그 주요 내용은 이렇다.

 

교회록이나 성직매매 또는 성유나 축성 등 거룩한 실재의 거래를 금지하며, 산 사람이나 판 사람은 물론 중개한 사람도 수치를 당할 것이다(2). 성직자는 사치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검소하고 단정한 복장을 하여야 한다(4). 사제, 부제, 남녀수도자의 혼인을 금지하고 단죄한다(6,7,11). 주교에게 불복하거나 십일조를 내지 않는 평신도는 파문한다(10). ‘하느님의 휴전’ 기간을 두어야 한다(12).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사람들을 단죄하고 그들에게 성사 수여를 금지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묘지에 묻힐 수 없다(13). 마상무술 시합을 금지하고 인간 생명을 위협하는 고문을 금지한다(14). 왕이나 군주는주교들에게 재판을 면제해야 한다(20). 신자들의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그릇된 참회를 단죄한다(22). 아무도 평신도의 손에서 교회록을 받을 수 없다(25). 주교가 죽은 뒤 3년 이상 주교좌를 비워둘 수 없다. 주교 선거에서 ‘경건한 사람들’ 곧 주교좌 참사들과 수도자들을 배제하는 (세속) 규정들을 단죄한다(28).

 

[경향잡지, 2007 12]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 콘스탄츠 공의회 2

 

개혁의 열망과 오류

 

강대인 라이문도

 

 

마르티노 5세가 새 교황으로 즉위하여, 서방 교회의 쓰라린 분열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아비뇽 교황 시대의 후유증 때문인지, 공의회장에서부터 시골 성당에 이르기까지 교회 개혁에 대한 열망이 넘쳐났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는 영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개혁의 후퇴를 염려하는 격론이 벌어지기도 하였지만, 일단 개혁 이행 문제를 새 교황에게 맡겼다. 실제로 교회 개혁의 장에는 교황권이 아니라 이른바 개혁론자들의 백가쟁명이었다. 공의회는 교황 선거 전에 이루어진 개혁 결의들에 만족하면서, 일곱 개의 개혁 교령과 정교조약을 채택하였다. 주요 사안들은 교황과 공의회 국가들 간의 5년 기한부 협정(영국은 무기한)으로 처리된 것이다.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한다

 

언제 어느 시대에나 쇄신과 개혁에 대한 열망은 그치지 않았다. 2차 바티칸 공의회도 이렇게 말한다.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한다”(교회헌장, 8). 그러나 개혁이라는 좋은 뜻은 흔히 세속 권력과 얽혀 분열과 파괴로 치닫기도 한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제8차 회의(1415)에서 영국의 위클리프가 주장한 45개 명제를 단죄하였다. 위클리프는 아비뇽 시대의 폐해를 들어, 교황을 적 그리스도라고 비난하였다. 교회나 수도회는 재산을 가져서는 안 된다.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 (교황이 아니라) 임금에게 나라와 그 재산을 다스릴 권력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세속에서 임금이나 통치자가 실제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권력을 행사한 적이 있는가? 단죄받은 그의 주요 명제들은 이렇다(신앙규정편람 DS 1151-1195).

 

 

위클리프의 오류

 

“빵과 포도주의 실체는 제단의 성사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 안에 실제로 현존하시지 않는다. 사제가 죽을 죄 중에 있으면, 성사를 집전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미사를 제정하셨다는 것은 복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악마(부당한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 통회만 하면 고해성사는 필요 없다. 성직자의 재산은 성경에 어긋난다. 현세의 통치자들은 교회에서 현세 재화를 박탈할 수 있다. 십일조는 순수한 자선이다. 형제들(탁발 수도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자는 파문된다. 형제들은 구걸이 아니라 노동으로 밥벌이를 해야 한다. 수도회를 세운 성인들은 죄를 지은 것이다. 로마 교회는 사탄의 회당이다. 교황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직접 대리자가 아니다. 추기경들의 교황 선출은 악마가 도입한 것이다. 대사를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수도회는 악마가 도입하였으며, 교황과 모든 수도자는 이단자들이다.

 

위클리프는 자기가 주장한 대로 교회 재산이 국가로 귀속되지 않고 그 몰수된 재산이 영주들의 뱃속만 채우는 일을 실제로 목격하였다. 아비뇽에서 돌아온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1377년에 위클리프의 18개 명제가 교회와 국가에 위험한 오류라고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통보하였다. 그의 명제들은 런던에서 열린 두 차례의 교회회의에서도 단죄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파문을 당하지 않고 1384년 말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죽었다. 30년이 지난 뒤에 그의 명제들은 세계 공의회에서 단죄를 받았다. 다시 12년 뒤에 사람들은 그의 무덤을 파헤쳐 그 유골을 불태우고 뼛가루를 스위프트 강물에 버렸다.

 

 

얀 후스의 오류

 

위클리프의 주장은 영구보다는 보헤미아 지방에서 더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체코에서 교회 개혁을 외치던 대표적인 인물이 얀 후스였다. 사제로서 프라하 대학 교수였던 후스는 범죄를 점철된 교회를 떠나 하느님께 구원을 받도록 예정된 자들이 모이는 영()의 교회로 도피하였다. 사제직도 성사도 필요 없는 그곳에서는 오로지 영의 소유만이 구원을 보장한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주장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였다. 콘스탄츠 공의회가 단죄한 후스의 30개 명제는 이렇다(DS 1201-1230). “예정자들의 총체인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는 유일하다.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은 한 그리스도이시다. 베드로는 거룩한 가톨릭 교회의 머리가 아니었고 또 아니다. 교황의 품위는 황제에게서 자라났다. 교황제도는 황제의 권력에서 나왔다. 교회적 순종은 사제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성경의 권위에 어긋난다. 사제의 설교 직무는 파문에 상관없이 수행되어야 한다. 예정의 은총은 교회의 모든 지체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묶어 주는 끈이다. 죽을 죄 가운데 있는 한, 아무도 세속 군주일 수 없고, 주교일 수 없다.

 

얀 후스는 행동의 자유를 보장한 지기스문트 황제의 권유로 콘스탄츠 공의회에 출두하였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나는 어떠한 오류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항변하였으나, 주교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이단자로 단죄를 받았다. 1415 7 6, 공의회에서 단죄를 받은 바로 그날, 얀 후스는 이단의 수괴로서 화형을 당했다. 한 해 뒤에는 그의 친구 히에로니무스도 화형을 당했다.

 

공의회는 또 얀 후스를 단죄한 바로 그 회에서, “폭군은 누구나 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신앙과 도덕의 오류며 이단이라고 단죄하였다(DS 1235).

 

교황 마르티노 5세는 1417년에 모든 주교들과 재판관들에게 칙서(Inter Cunctas)를 보내 이러한 오류를 배척하는지 묻는 문항들을 수록하였다. 교황은 거룩한 보편 공의회가 영국의 위클리프, 보헤미아의 후스, 프라하의 히에로니무스를 이단자로 단죄하였으며, 그들의 주장은 명백히 이단이고 오류이며, 경박한 선동으로 신심 깊은 사람들의 귀를 괴롭힌다고 하였다(DS 1249-1251).

 

44차 회의까지 계속된 콘스탄츠 공의회는 1418 4 19일에 끝났지만, 교황은 공의회의 결의사항들을 공식 추인하지는 않았다. 공의회 우위설 때문인지, 교황은 모든 결의를 승인한다는 선언만 하였다.


강대인 라이문도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번역실에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8 7월호]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