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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

[성서]겨자 나무(?)와 레바논 백향목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5.12.06|조회수2,865 목록 댓글 1

'겨자 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찾아 봤습니다. 

성서에 나온 겨자는 검은겨자 Brassica nigra로 다년생이라는 이도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 해 살이 나무가 아닌 한해살이 풀로 최대 2.4 미터까지 자랍니다.

한편 조금 더 크게 자라는 담배나무가 히브리어로 겨자나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담배나무는 예수님 시대 중동지역에는 아직 수입되지 않은 식물입니다. (남미 원산)


그래서, 결론적으로 겨자는 나무가 아닙니다. 겨자는 과학... 아니 풀입니다, 겨자 풀!!! ^^;










Black Mustard (Brassica Nigra)




한편, 유대인이 그리는 영광의 역사를 상징하는 레바논 백향목(송백나무)은 해발 200미터 이상에서만 자라고

300살이 되어야 열매를 맺고, 높이가 40미터에 3천살까지 살 수 있다고 하니 스케일이 ㄷㄷㄷ 입니다. 

 


Cedar of Lebanon (Cidrus Libani)





예수님은 왜 굳이 하느님 나라를  일년생 잡초 겨자에 비유하셨을까요?


우리들은 왜 굳이 예수님 비유 속 일년생 잡초 겨자를 거목의 이미지로 그리곤 할까요?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8-21

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Jesús decía: «¿A qué es semejante el Reino de Dios? ¿A qué lo compararé? Es semejante a un grano de mostaza, que tomó un hombre y lo puso en su jardín, y creció hasta hacerse árbol, y las aves del cielo anidaron en sus ramas». Dijo también: «¿A qué compararé el Reino de Dios? Es semejante a la levadura que tomó una mujer y la metió en tres medidas de harina, hasta que fermentó todo».


http://cafe.daum.net/catolicamadrid/C5Os/264 



[이스라엘 이야기] 겨자씨

그리스도 왕국 이룰 ‘복음의 씨앗’으로 비유
예수님 시대 ‘가장 작은 씨’로 속담에 자주 등장
옆으로 자라며 순식간 번식하는 특성 때문
만민 향해 ‘말씀’ 퍼뜨려 온 세상 채우는 의미
발행일 : 2015-06-14 [제2948호, 18면]

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268336 가톨릭 신문




아니, 이스라엘에도 유채 꽃이 자라요?

겨 자 꽃이 보일 때마다 터지는 감탄사다. 특히 갈릴래아 호수는 봄마다 겨자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현무암도 많아서, 제주도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유채 같은 노란 꽃이 겨자라고 알게 되면, 겨자나무가 어쩜 저렇게 작냐고 또 한 번 감탄사가 터진다. 성경에서 겨자씨 비유를 읽을 때, 올리브나 소나무처럼 키 큰 나무들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자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갓 종류다. 맛도 쌉싸름하니, 갓 김치로 만들어 먹기 좋다. 겨자는 일 년 초로서, 2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꽃을 피운다. 크기는 무릎 높이부터 2미터까지 자라고, 무씨 크기의 씨앗을 송알송알 맺는다. 참 사소해 보이는 식물이지만, 성경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는 큰 관심거리다. 성지에서 누리는 기쁨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서 본 내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고(마태 13,31-32), 또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도 옮기리라 하셨다(마태 17,20). 그런데 겨자가 이렇게 지천에 피니, 예수님은 평범한 일상에도 배울 것이 있음을 깨우쳐 주신 셈이다. 그뿐인가? 밀알의 비유(요한 12,24),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3-30), 그물의 비유(47-50절) 등 모두 갈릴래아 호수에서 흔히 접하는 매우 예사로운 소재다.



다만, 겨자나무에 새들이 깃들인다는 비유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마르 4,32 루카 13,19). 나무라 부르기엔, 겨자가 너무 작다. 하지만, 우리가 밀이나 쌀을 어떻게 부르는지 생각해 보자. 밀 풀, 쌀 풀 하지 않고, ‘밀 나무’, ‘쌀 나무’라 한다. 그렇다면, 겨자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구약성경에서 나무는 ‘왕조’나 ‘왕국’의 상징이었다. 에제키엘은(17,3.22-23 31장) 유다 왕실과 이집트 왕국을 향백나무에 견주었다. 이사야와(11,1) 예레미야는(23,5) 나무 모티프로 미래에 세워질 다윗 후손을 예언했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 새들이 깃든다는 비유도 구약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시편은(104,16-17) 주님이 심으신 향백나무에 새들이 깃들고 둥지를 튼다는 묘사로, 온 피조물들에게 닿는 하느님 은총을 찬양한다. 에제키엘은(31,6) 향백나무에 새들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짐승들이 새끼를 낳는다는 비유로, 파라오의 권세를 표현했다. 다니엘서는(4,9)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큰 나무로 묘사한다. 그리고 온갖 새와 짐승이 그 나무에 깃듦으로써, 네부카드네자르의 권력을 암시한다. 곧, 나무에 깃드는 새’는 번영을 상징하는 대표 모티프였던 셈이다. 물론 향백나무에 비하면, 겨자는 나무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은 겨자를 나무로 확장하고, 하늘나라 상징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나무는 향백나무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하늘나라를 찾을 수 있다. 겨자밭에 깃드는 새는 예수님에게 모여오는 세상 민족들을 상징한다.

겨자씨도 실제로는 가장 작은 씨앗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겨자씨가 가장 작은 씨의 대명사처럼 속담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고대 유다 법전 미쉬나는 정원에 겨자씨를 뿌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순식간에 자라 공간을 잠식해 버리므로, 다른 식물들이 맥을 못 추는 까닭이다. 곧, 씨앗 크기에 비해 번식력이 대단해서, 작은 씨의 대명사가 된 듯하다. 또한 이런 특성 때문에 겨자는 큰 나무에 비유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무는 위로 자라지만, 겨자는 옆으로 제 존재를 퍼뜨린다. 예수님이 뿌리신 말씀의 씨앗도 만민을 향해 수평으로 번성하여, 온 세상을 채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거대한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간다.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천국이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주변에 널린 겨자처럼 매일매일은 평범하다. 하지만, 그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면 내게는 천국이 된다. 겨자가 큰 들판을 메워가듯 내 인생에 천국들이 쌓이면, 마침내 하늘나라처럼 풍성해질 것이다. 게다가 새들까지 보듬는 너그러움과 풍요로움은, 다른 이들과 천국을 나눌 수 있는 이타적 아름다움도 비유해 주는 듯하다. 이런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볼 때, 겨자 꽃은 정말 하늘나라를 닮지 않았나?



김명숙(소피아)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김명숙(소피아




신학과 영성
그리스도교를 망치는 주범, 승리주의[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82
김근수  |  editor@catholicnews.co.kr

31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겨자씨를 뿌렸습니다. 32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식물보다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 33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여인이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습니다. 하늘나라는 이런 누룩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34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군중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그리하여 예언자를 시켜, “내가 말할 때에는 비유로 말하겠고 천지창조 때부터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마태 13,31-35)


   
▲ <성 마테오 복음사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1400년
이스라엘에 여러 종류의 겨자씨가 있지만 오늘의 단락에서는 검은 겨자씨를 가리키는 것 같다. 1년생 식물인 겨자씨는 지름이 1㎜도 못 되지만 2~3m 높이의 나무로 자란다. 그 잎은 익혀서 내가 좋아하는 샐러드의 재료로, 그 열매는 양념과 약재로 쓰이고, 새에게 먹이가 된다.

 

유다교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두 매체, 즉 ‘구전(口傳) 토라(율법)’와 ‘쓰인 토라’를 통해 하느님의 계시가 내렸다는 신화에 기초하는데, 서기 200년경 완성된 법률문서인 미쉬나(Mischna : ‘배우다’라는 뜻의 히브리어)가 구전 토라의 최초 문서다. 미쉬나에서 겨자는 정원 식물이 아니라 들판 식물로 언급되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여느 정원에나 흔히 보인다. 농부가 겨자씨를 ‘한 알’ 심었다는 본문 표현이 특이하다. 마르코처럼 마태오는 겨자씨와 다 자란 겨자나무의 엄청난 차이를 강조한다.


겨자씨의 비유를 처음 들었던 사람들과 마태오 복음서를 통해 그 비유를 알게 된 사람들의 반응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처음 겨자씨의 비유를 들었던 청중은 크게 놀랐을 것이다. 겨자씨는 이스라엘에 자유를 가져다줄 하느님 나라를 비유하는 소재로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큰 나무가 하느님 나라를 가리키는데 적당하다(에제 17,2-10; 다니 4,7-12).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는 모습은 커다란 송백나무에 비유되었다(에제 17,22-24). 레바논 계곡에서 자란 나무가 아니라 텃밭의 겨자나무를 예수가 비유에 사용한 것이 청중에게 놀라웠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유다인의 승리주의적 시각과 예수의 너무 약하고 소박한 겨자씨 비유가 대조적이다. 하느님 나라는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의 작은 일에 포함되어 있다는 지적인가.


마태오 공동체 사람들에게 겨자씨의 비유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겨자씨의 비유에서 선교의 희망과 자신감을 얻었다. “새”는 유다교에서 이방인으로 비유되었는데, 겨자나무에 날아든 새에서 그리스도교로 몰려드는 이방인을 연상했다. 확대되는 이방인 선교를 하느님 나라와 연결시켰다. 마태오 공동체의 겨자씨 같은 자그만 노력이 겨자나무 같은 엄청난 성과를 거두리라는 희망에 부풀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 공동체는 승리주의에 빠지진 않았다.


누룩의 비유는 여인의 일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주부는 빵집에서 누룩을 사거나 스스로 만들었다. 누룩은 그리스인이나 유다인에게 잘 알려져 있다.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누룩의 엄청난 양이다. 누룩 “서 말”은 약 40리터에 해당하고 150명을 위한 한 끼 식사에 필요한 50㎏ 정도의 빵을 만들기에 충분한 양이다. 당시 유다인 주부가 그렇게 할 일은 거의 없다.

청중은 예수의 누룩 비유에 다시 놀랐을 것이다. 누룩이 하느님 나라 비유에 쓰인 적이 유다교에 없었기 때문이다. 해방절 축제에서 오히려 겨자씨는 희생제사에 쓰이지 못하도록 금지되었다. 그렇게 겨자씨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녔다. 서 말 밀가루의 성질을 바꾸는데 누룩보다 소금이 더 적격이다. 숨겨진, 그러나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는 누룩을 예수는 하느님 나라에 비유하는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교회 역사에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그 비유를 승리주의로 해석한 시초는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가 그리스도교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사건이다(서기 313년). 예수는 씨 뿌리는 분으로, 겨자씨는 교회로 여겨졌다.


그 후 놀라운 교회 확장으로 교회는 자신을 다 자란 겨자나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교회가 정치권력의 하녀가 되는 줄도 모르고 승리주의가 교회 몸에 밴 것이다. 한때 국가 안에 교회가 있었는데, 이제 국가가 교회 안에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루터는 교회를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된 지 50년 되는 지금도 ‘교회’를 가톨릭교회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하는 천주교 성직자들이 여전히 있다.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종교를 강화하려는 야심이 서양 그리스도교의 DNA처럼 우리에게 전해졌다.


승리주의는 그리스도교를 망치는 주범 중 하나다. 그 피해를 지금 그리스도교가 고스란히 겪고 있다. 오늘날 추락하는 유럽 교회는 병든 겨자나무 꼴이 되었다. 승리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고 승리주의 분위기가 만연한 한국 그리스도교의 분위기가 염려된다.


겨자씨는 예수의 말씀, 교회의 가르침, 복음, 신앙, 사랑 등으로도 해석되었다. 그러한 개인주의적 해석, 교회론적 승리주의 해석은 심판을 의식하는 마태오의 비유들의 본래 뜻과 거리가 멀다. 근대에 이르러 그러한 좁은 해석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신자 개인과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하느님 나라는 교회보다 훨씬 더 크고 넓다. 하느님 나라는 교회와 동일시될 수 없다. 예수는 교회 안에 갇혀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가 예수에 대한 독점 소유권을 지닌 것은 아니다. 예수는 교회 밖에도 당연히 계시다.


유다인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 사실은 마태오 공동체에 커다란 의문으로 남았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예언자의 말을 빌려 유다인의 완고함을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는 35절에서 예언자의 말이라 해놓고 엉뚱하게 시편 78,2을 인용해 버렸다. 이런 실수를 합리적으로 해명하긴 어렵다. 비슷한 실수가 마태오 복음서 27,9에서 또 보인다.


자그만 일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지켜본 예수의 안목이 놀랍다. 교회의 승리주의가 큰 잘못이라는 점을 오늘의 본문에서 또한 느꼈으면 좋겠다.


사족. 복음서는 예수의 활동을 생중계한 것이 아니라 녹화 중계하는 것이다. 촬영 후 방영을 기다리는 시간에 편집자가 촬영 장면을 새로 만들어 넣거나 빼기도 하였다. 복음서에 나타난 모든 장면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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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구스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12.07 겨자 꽃이 만발한 들판이 참 아름답네요. 겨자꽃과 같은 이웃과 함께 하는 일상을 묵상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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