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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

[기본 교리]칠극(七克) - 칠죄종의 치유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6.02.24|조회수1,353 목록 댓글 1



◆ 칠극 ◆      

한자 七克

출처 : [가톨릭대사전]


   ≪칠극대전≫(七克大全)의 약칭(略稱). 저자는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 판토하(D. Pantoja, 龐迪我, 1571∼1618).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뿌리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 가지 덕행(德行)을 다룬 일종의 수덕서(修德書)이다. 1614년에 중국 북경에서 7권으로 간행된 이래, 여러 권 판을 거듭하였고, ≪천학초함≫(天學初函) 총서에도 수록되었으며, 이를 상 · 하 2권으로 요약하여 ≪칠극진훈≫(七克眞訓)이라는 책명으로도 간행되었다.


   이 책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함께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연구되었고, 남인학자(南人學者)들을 천주교에 귀의케 하는 데 기여한 책 중의 하나이다. 즉 이익(李瀷, 1681∼1763)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이 책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는 곧 유학의 극기설(克己說)과 한가지라고 전제한 다음, 죄악의 뿌리가 되는 탐욕, 오만, 음탕, 나태, 질투, 분노, 색과 더불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덕행으로 은혜,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인내의 일곱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이어 ≪칠극≫ 중에는 절목(節目)이 많고 처리의 순서가 정연하며 비유가 적절하여 간혹 유학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도 있는 만큼, 이는 극기복례(克己復禮)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천주교와 유교 사이에 윤리면에서 어느 정도 일치할 뿐 아니라, 때로는 천주교가 우월함을 은연중에 시인하였다. 그의 제자인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칠극≫이 공자의 이른바 사물(四勿)의 각주에 불과하며, 비록 심각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취할 바가 못 된다고 논평하였다.


   한편 ≪칠극≫은 1777년부터 1779년간의 소위 천진암 · 주어사(天眞菴 · 走魚寺) 강학에서 남인학자들에 의해 연구 검토되었음이 확실하며, 일찍부터 한글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혀져, 감화시켰음을 짐작 할 수 있다. 한글필사본이 절두산순교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L. Pfister, Notices Biographiques et Bibligraphiques sur ies Jesuites de l'ancienne Mission de Chine, 1552∼1773, Chanhai 1932 / 朴鍾鴻, 西歐思想의 導入批判과 攝取, 韓國天主敎會史論文選集, 第1輯,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 / M. Courant, Bibliographie Coreenne, Paris 1896. 



[유학따라 떠나는 신앙여행] 칠극(七克) 이야기 (최기섭, 평화신문)


26-칠극(七克) 이야기(1)  

   최기섭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학장, 동양철학) 

칠극에서의 그리스도교와 유학의 만남


이제 또 하나의 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얼마 전 일주일간 개인피정을 가졌다. 주제를 무엇으로 할까 생각하다가, 오래 전에 대충 읽어보고 '나중에 깊이 읽어봐야지' 하고는 잊어버린 「칠극」(七克)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 책을 피정주제로 삼아 매일 한 주제씩 읽고 그것을 내 삶에 비춰 묵상하며 기도했다. 시간도 부족했고 집중하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은혜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바로 이 '칠극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칠극」은 마태오 리치의 뒤를 이어 중국에 건너 온 예수회 선교사 빤또하가 자신이 배웠던 스콜라 신학의 윤리론, 특히 그 중에서 칠죄종(七罪宗)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7가지 덕을 역시 그 당시를 풍미했던 성리학의 수양체계와 조화시켜가면서 설명한 책이다. 그래서 부산교회사연구소에서 출판한 번역서에는 '그리스도교와 신유학의 초기 접촉에서 형성된 수양론'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실상 스콜라 신학과 성리학은 여러 관점에서 흡사한 면을 지니고 있다. 모든 학문들을 아우르는 방대한 통합체계, 그것을 집대성한 토마스 데 아퀴노와 주자(朱子),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형이상학적 개념과 실천적 수양론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서양 선교사들이 늘 걸림돌처럼 거북해 했던 문제는 역시 우주의 근원 즉 본체론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의도적으로 많은 저술과 대화를 통해 정립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 주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빤또하의 저술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던 중국의 많은 유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서문을 써 주었던 진량채(陳亮采)는 「칠극」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언제나 하느님(上帝)을 따르고 믿어서 하늘의 보답을 누릴 것을 바라고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날 것을 바라고 있으니, 이것은 유자(儒者)를 보좌해 주는 것이다"(其欲念念息息歸依上帝 以冀享天報 而永免沈淪 則儒門羽翼也. 「七克篇序」).


 빤또하 자신도 중국으로 오게 된 동기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사람들이 하느님(상제)이 인간과 사물의 참된 주인임을 알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오를 수 있는 참된 지름길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가련하게 여겼다"(원문생략 「七克自序」).


 더 나아가 그는 인간이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덕을 쌓지 못하는 이유로 세 가지를 들면서 역시 삶의 근원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욕망을 이기고 덕을 닦는 일을 종일토록 논의하고, 평생토록 힘쓰는데도 거만함, 질투, 분노, 방탕과 같은 여러 욕망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 겸손, 어짊, 곧음, 참음과 같은 여러 덕은 끝내 쌓여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세 가지 이치에 어둡기 때문인데, 근본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 첫째이고, 마음을 깨끗이 하지 않는 것이 둘째이며, 절차를 따르지 않는 것이 셋째이다"(然而克慾修德終日論之畢世務之 而傲?忿淫諸欲 卒不見消 謙仁貞忍諸德 卒不見積 其故云何 有三弊焉. 一曰不念本原 二曰 不淸志向 三曰 不循節次. 「七克自序」).


 하여튼 이 책은 인간 죄악의 7가지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교만, 질투, 인색함, 분노, 먹고 마심, 음란함, 게으름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7가지 덕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그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수양법이기도 한 이 주제들이 유학사상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또 유학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설명하는지 7가지 주제를 따라 설명하고 싶은 것이다. 독자들도 나와 함께 이 책을 읽으면서, 피정하는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면 어떨지…. 권해드리고 싶다.



27-칠극(七克)이야기(2)  

 

善이 커지면 惡은 작아지고

 

내가 칠극(七克)을 읽으면서 지향했던 것 중 하나는 이 글을 먼저 읽었던 우리 신앙선조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었다. 아마 나도 유학을 공부했기에 어느 정도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조선시대 말엽, 사회적 혼란과 함께 그동안 성리학의 이념으로 이상적 사회를 이루려고 했던 노력들이 학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을 즈음, 그들은 서학(西學)의 문물과 사상을 만난 것이다.

 

 유학도 본시 인간의 본질을 하늘이 부여한 도덕성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유학자들이 「칠극」 안에서 수많은 서양의 선비와 현자들의 수덕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놀랍고 반갑게 느꼈을까?

 

더 나아가 자신들이 마음속에 품어왔던 삶의 근본인 하늘과 하늘의 이치〔天理〕가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와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인격체로서 설명될 때, 혼란스러우면서도 또 한편 얼마나 커다란 희열을 느꼈을까? 내가 그들 안에서 느끼고 만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참된 진리에 대한 욕구, 근원적 존재에 대한 열망 그리고 어려운 결단을 통해 그것을 자신의 삶에 받아들였을 때의 기쁨 같은 것이었다.

 

 칠극(七克)에서 극(克)의 뜻은 무엇일까? 전주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번역본이 '일곱가지 승리의 길'이라는 부제를 붙인 것을 보면, '이기다' 또는 '극복하다'는 뜻으로 사용한 것 같다. 그러나 극복해가는 방식은 독특하다. 즉 일곱 가지 죄의 뿌리와 직접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대립되는 덕(德)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이기는 것이다.

 

이것은 스콜라 철학이 악(惡)을 그 자체로 규정하지 않고, 선(善)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또한 선의 결핍(缺乏) 혹은 완전성의 결여(缺如)로 해석하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마르틴 부버가 지은 「인간의 길」이라는 책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전해준다. 즉 서로 사돈관계인 두 랍비가 대화를 나누는데, 한 랍비가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아직 속죄하지 못했다"고 한탄하니 다른 랍비가 "그것에서 벗어나시지요"라고 답하는 내용이다. 그것에 이어 또 다른 랍비의 강론을 소개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줄곧 그 잘못에 대한 말만 하고 생각만 하는 자는 자기가 행한 저열한 그것을 마음에서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 자는 결코 돌아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 어쩌자는 말입니까. 똥을 이리 쓸고 저리 쓸어 본들 똥은 똥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는가 안지었는가 해봐야 하늘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꿍꿍거릴 겨를이 있으면 차라리 하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진주알을 꿰고 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에도 "악을 떠나 선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악에설랑 아예 돌아서서 더는 거기 마음을 쓰지 말고 선을 행하십시오. 그대는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그렇다면 선을 행함으로써 이에 대처하십시오."

 

 이것이 「칠극」의 특징이기도 하다. 죄의 7가지 뿌리를 분석하고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적할 수 있는 더욱 완전한 덕을 설정하고 매진하여 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의 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마음으로 신앙의 선조들과 함께 찬찬히 이 책을 읽어나가자.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정통 신앙의 보화들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28- 칠극(七克) 이야기(3)  

 

고개 숙일수록 주님과는 가까워져


칠극(七克)은 교만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것은 판토하가 성경을 인용해 말하고 있듯이, 교만이 모든 죄의 시작(집회 10,13)이며, 모든 악덕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교만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죄악이기도 하다.


 그래서 판토하는 교만의 실마리를 네 가지로 분류한다. "그 첫째는 선(善)이 자기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하느님(天主)께 돌리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선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공적으로 돌리는 것이고, 셋째는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고, 넷째는 남을 경멸하며 자신을 뭇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원문생략. 「七克」, 1권).


 유학에서도 교만은 결정적인 악덕(惡德)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공자는 「論語」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주공과 같은 아름다운 재능을 갖고 있어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子曰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 不足觀也已. '태백편' 11).


 공자는 늘 주(周)나라의 문물제도를 예찬하고, 그것을 이룩한 주공(周公)을 흠모해 이상적 인간으로 생각하며, 꿈에서라도 그를 만나고자 했다. 그런데 이러한 주공이 훌륭한 능력을 지녔다하더라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인간으로서 더 볼 것이 없다는 말이다. 놀랍다.


 「大學」에서도 "군자에게는 큰 道가 있으니, 반드시 忠과 信으로써 얻고, 교만함과 방자함으로써 잃는다"(君子有大道 必忠信鎰之 驕泰以失之. 10장)고 경고한다.


 판토하가 겸손을 이야기하면서 인용한 또 하나의 중요한 성경구절은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 더 겸손하여라. 주님의 은총을 받으리라"(집회 3,18)는 말씀이다. 이것은 그가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마음 쓰지 말도록 권고하기도 하지만, 이미 높은 지위를 얻었다면 더 겸손하라는 충고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많은 예화들은 대부분 서양의 임금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더 나아가 성덕(聖德)에 출중한 서양의 현인들이 오히려 얼마나 겸손에 힘썼는지를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유학에서도 '크고 넉넉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는' 사람을 君子라고 말한다(子曰 君子 泰而不驕. 「論語」, 자로편). 이러한 사상은 주역(周易)의 흐름 안에서도 나타난다. 즉 정자(程子)는 주역의 겸괘(謙卦)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겸(謙)은 「서괘전」(序卦傳)에 '크게 소유한 자는 가득차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겸괘로써 받았다'고 했다. 그 소유한 것이 이미 크면 가득차는 데까지 이르게 할 수 없고, 반드시 겸손하고 덜어내야 하기에, '대유괘'(大有卦) 뒤에 '겸괘'로 받은 것이다"(謙 序卦 有大者 不可以盈 故受之以謙. 其有旣大 不可至於盈滿 必在謙損 故大有之後 受之以謙也. 「周易傳」, 謙卦).


 다시 말하면 주역의 64괘의 순서는 아무렇게나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와 성덕(成德)의 과정을 일러주는 것인데, '겸괘'가 '대유괘' 다음에 온 이유는 이미 충분히 가진 자는 반드시 겸손하고 덜어내야 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순리(順理)이며, 이상적 경지를 향해 가는 올바른 과정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교만의 시작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시편10,4;예레 13,5)이며,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데 기인한다. 그리고 더욱 높아지려는 욕심과 그것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자기의 것으로 착각함으로 교만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자, 어떻게 해야 할까?


29-칠극(七克) 이야기(4)  

 

자신과 하느님 아는 것, 선의 시작과 끝


「칠극」을 읽다보면 늘 만나게 되는 독특한 느낌들이 있다. 어떤 지혜로운 사람의 구수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편안함이다.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의 교리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소신학생 시절 영적 지도신부님의 훈화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게도 되며, 심지어는 한문을 가르쳐주셨던 여러 어르신들의 이야기들도 함께 어우러져 또 다른 세계를 여행하며 그것에 젖어 들어가는 행복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학자인 김승혜 수녀는 「칠극」의 특성으로 '지혜문학적 성격'을 지적하기도 한다. 판토하가 인용하는 많은 성경구절, 고대 문학의 가르침, 교부들의 말씀들은 대부분 지혜문학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동양 종교들의 지혜들도 함께 곁들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여튼 「칠극」은 '교만과 겸손'이라는 주제로 시작하면서 그것에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다. 이 주제가 수덕(修德)의 출발점이자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교만을 극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하고 나서, 경계해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제시한다. 즉 세상의 행복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戒以形福傲), 마음의 덕을 자랑하는 것(戒以心德伐), 자신이 남과 다르다고 여기기를 좋아하는 것(戒好異), 명예를 좋아하는 것(戒好名), 선을 가장하여 명예를 낚으려는 것(戒詐善釣名), 예찬을 듣는 것(戒聽譽), 귀해지기를 좋아하는 것(戒好貴)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학 뿐 아니라 동양의 모든 종교들이 그 수덕과정에서 강조하는 것들도 바로 이런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근본이 되는 것을 잊고 세속적 성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 가치있는 삶인가 하는 문제요, 이러한 경향들은 모두 교만이 빚어내는 결과라는 것이다.


 판토하는 교만을 극복하는 결정적인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을 알아 겸손을 지키는 것'(識己保謙)이다. 그리고 그것에 관한 핵심적인 설명으로 성 베르나르도의 말씀을 전해준다.


 "너희가 만약 두 가지 알아야 할 것을 지니고, 두 가지 알지 못하는 것에서 벗어난다면, 지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알면 겸손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은 모든 선(善)의 시작이다. 그리고 하느님(天主)을 알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것은 모든 선의 마지막이다. 이것이 두 가지 알아야 할 것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므로 교만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모든 죄(罪)의 시작이다. 그리고 하느님(天主)을 알지 못하므로 하느님에게 바라거나,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이것은 모든 악(惡)의 마지막이다. 이것이 두 가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爾持二知. 逃二不知. 則能成智. 知己則生謙爲衆善之始. 知天主故愛天主爲衆善之成. 此二知也. 不知己故生傲爲衆罪之始. 不知天主故無所畏望於天主爲衆惡之成. 此二不知也. 「七克」, '識己保謙').


 유학이라는 학문도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된다. 자신을 살피고, 가꾸고, 완성하는 것이 진정한 학문이다. 그래서 유학을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부른다.(「論語」 헌문편 25절 참조) 그리고 그 학문은 하늘의 뜻을 아는 지명(知命)에서 완성된다. 어쩌면 그런 까닭에 「論語」라는 책도 '學而時習之'(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면)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不知命無以爲君子'(하늘의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라는 말로 끝나는 지도 모르겠다.


 결국 겸손은 모든 수덕과정을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덕행이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따른다면 '원리와 기초'가 되는 셈이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30-칠극(七克)이야기(5)  

 

         하느님 사랑에 젖어들면 질투는 사라져


둘째 주제: 질투를 가라앉히다


처음 칠죄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질투가 과연 여기에 포함돼야 할 만큼 커다란 악덕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조금씩은 지니고 살지만 그렇게 해롭게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토하의 글을 읽으면 그것이 다른 덕에 비해 깊은 악의 뿌리이며 어리석은 악덕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의 대가로 주어지는 쾌락도 없으면서, 실제로 남에게 받는 피해도 없으면서 혼자 일으키고 혼자 고통을 받는 모습이란….


 무엇 때문일까? 질투의 원인은 많겠지만, 아마 가장 일반적인 것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論語」에서는 처음부터 '君子'를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人不知而不?)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즉 세상의 가치나 남들의 평가에서 자유로운 경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오랜 수련을 통해 올바르고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자기만의 세계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도 남의 잘잘못을 보고 그것들과 부딪히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과 연결시키며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수양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다. 그래서 공자는 이렇게 일러주곤 했다. "어진 사람을 보면 그와 같아질 것을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면 속으로 자신을 어질지 못한 사람을 반성해 보아야 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論語」, '里仁')


 뿐만 아니다. 또 말하기를 "착한 것을 보면 거기에 미치지 못할 듯이 여기고, 착하지 않은 것을 보면 끓는 물이 뜨거워서 손을 빼는 듯이"(見善如不及 見不善如探湯, 「論語」, '季氏') 하라는 것이다.

 

 판토하는 글머리에서 "질투는 마치 파도처럼 일어나는데, 이는 용서로서 가라앉혀야 한다"(妬如濤起 以恕平之)고 말한다. 이 서(恕)는 유교 대인윤리의 핵심적 개념이다.


 고대의 많은 종교가 그러하듯, 유학에서도 남을 사랑하는 기준은 바로 자기 자신이 된다. 그래서 주자는 恕를 '자신을 미루어 다른 사물에 미치는 것'(推己及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공자의 인(仁) 사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된다.


 언젠가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한 마디 말로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바로 恕이다.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이다."(己所不欲 勿施於人, 「論語」,'衛靈公')


 공자는 '顔淵篇'에서 仁을 설명하면서도 같은 말을 한다. 또한 그것을 적극적인 개념으로 확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도록 해 주고, 내가 이루고자하면 남도 이루게 해 주어야한다."(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論語」, '雍也') 마치 레위기에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판토하가 강조하는 것은 역시 하느님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는 자만이 질투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은 정직하고, 먼저 우리에게 주시며, 바라는 것이 없고, 맑으며, 헛된 말로써가 아니라 실제로 베풀어주시는 사랑이다. 이것이 빤또하가 늘 말하는 근본을 아는 것(知本)이고, 모든 덕행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질투하는가? 왜 질투하는가?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안에 잠겨보자. 그것이 답이다.




31-칠극(七克) 이야기(6)


가난을 즐기고 부를 베풀라

 칠극(七克)과 함께하는 사순

셋째주제: 탐욕을 풀다


칠극(七克)을 읽다보면 같은 주제를 반복하다보니 사실 지루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한 주제를 이렇게 다양하고 꼼꼼하게 설명할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탐욕의 의미, 그 해로움, 다양한 실상, 풍부한 예화, 끊임없이 쏟아내는 성인과 현자들의 명언들 그

리고 성경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들….

 

무엇보다도 해탐(解貪)이라는 단어가 깊이 와 닿는다.

나는 앞의 글들에서 유학의 수양론이 보편적이고 공정한 하늘의 뜻(天理之公)을 어떻게 잘 보존하는가

그리고 사사로운 인간의 욕심(人慾之私)을 어떻게 막는가 하는 두 방면으로 전개됨을 설명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유학은 '인간의 사사로운 욕심'에 대해 전쟁을 치르듯이 막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빤또하는 그 욕심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즉 세상과 재물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 욕심이 되지만, 그것을 놓거나 밖을 향해

풀어헤치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결국 문제와 답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느 종교가 탐욕을 탐탁하게 여기겠는가?

불교에서도 수도(修道)에 가장 큰 걸림돌(三毒)은 욕심(貪), 성냄(瞋), 어리석음(痴)이라고 말한다.

도가(道家)에서도 수도(修道)의 핵심으로 덜어냄(損)이나 비움(虛)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 점은 유학도 마찬가지다.

맹자도 일찍이 "수양하는데 욕망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養心 莫善於寡欲, 「孟子」 '盡心 下')고 했는데,

송대의 주렴계 선생은 더 나아가 "聖人은 배워서 이를 수 있는데, 그 핵심은 하나이고, 그것은 바로 무욕이다"

(聖可學乎 曰可 有要乎 曰有 請問焉 曰一爲要 一者 無慾也. 「通書」)고 말한다.

 

칠극을 원문으로 읽거나, 원문과 대조하며 읽노라면 이 글들이 과연 서학서(西學書)가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성경이나 교부들의 말씀을 번역하면서 선택한 용어들이 거의 유학의 용어들이요, 어떤 때는 그 내용까지 흡사하기 때문이다.

 

 

빤또하가 탐욕을 설명하면서 인용한 글들 중에, 유교의 가르침과 핵심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들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재물을 취할 때 그것이 의(義)에 합당한지 살펴야한다는 것이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어떤 부자에게 가르침을 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은 재물을 손에 넣을 기회를 만나면, '이것이 의로운 재물인가 아니면 의롭지 않은 재물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롭지 않은 재물은 그것을 하나라도 손에 넣으면 하느님(상제)에게 죄를 받기 때문입니다."

(聖厄勒臥略 勸一富者曰 爾値取財之勢 宜思非義之財 一取卽得罪於上帝也. 「七克」, '解貪')


또 하나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정신이다. 빤또하는 말한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아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가난을 즐기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가난과 궁핍을 즐기는 것은 바로 하늘로 올라가는 날개이기 때문이다."(平心受貧 忍也. 樂貧 大智也. 貧廬之樂 昇天之翼. 「七克」, '解貪')


그러나 빤또하는 탐욕의 문제 역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해석하고 있다.

"하느님(天主)이 너희를 가난하게 하였다면 이는 너희가 가난을 참고 견디는 공으로써 보답을 받기를 바란 것이고,

너희를 부유하게 해 주었다면 이는 너희가 가난한 이를 도와주는 공으로써 보답을 받기를 바란 것이다."

(원문생략. 「七克」, '解貪')

 

 

< 평화신문 : 2008. 09. 28발행 [987호] >



칠극(七克)이야기 (7)


주님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게 하시니



넷째 주제 : 분노를 없애다


꽤 많은 분들이 함께 칠극(七克)을 읽고 있노라고 전해왔다. 감사한 일이다.

이 가을에 그리스도교의 정통 수양서를 읽고, 그것에 빠져드는 것은 비록 바쁘고 힘들더라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많은 은총 받으시기를 기도한다.

 

탐욕과 함께 분노도 모든 종교의 수행에서 걸림돌이 되는 큰 악덕이다.

언젠가 산상설교를 묵상하면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렇게 큰 죄악인가?

 

유학에서도 분노는 수양에 있어 중요한 주제가 된다.

 

군자가 행동을 함에 있어 올바른 지향을 일러주는 이른바 '구사'(九思)에서도 '분사난'(忿思難)이라는 것이 있다.

화가 나면, 절제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행한 후에 어떤 어려움이 올지 미리 생각하라는 것이다.(「論語」, 季氏篇 참조) 

 

또한 「大學」에서는 수신(修身)의 요점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正心) 있는데,

몸이나 마음에 분노하는 바가 있으면 그 올바름을 얻을 수 없다고 깨우쳐준다.

(所謂修身 在正其心者 身心有所忿 則不得其正… 「大學章句」, 傳7章)

분노를 극복하지 못하면 수양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강력한 경고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유학에서는 이 분노를 극복하는 것이 수양의 최고의 경지로 칭송되기도 한다.

언젠가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제자 가운데 누가 학문을 가장 좋아하는지' 물었을 때, 공자는 '안회라는 사람이

학문을 좋아해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아니하고 잘못을 두 번 되풀이하지 않았다'고 답한 적이 있다.

(哀公 問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 好學 不遷怒 不貳過. 「論語」, 雍也) 

 

유학에서 '학문을 좋아한다'(好學)는 것은 이미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하고,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다'(不遷怒)는 것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不怨天), 남을 탓하지 않는다(不尤人)는 것을 말한다.

 

빤또하는 분노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한 후에,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첫 번째 방법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愛讐)이다. 이게 가능이나 한 일일까? 유학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덕으로 원한을 갚으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덕에는 무엇으로 갚겠는가? 곧음으로써 원한을 갚고 덕으로써 덕을 갚는 것이다'라고 하셨다."(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論語」, 憲問篇) 이것이 유학이 지닌 한계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이것을 뛰어넘는 차원을 요구하나 그것은 절대자와의 깊은 관계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우리가 남에게 대하듯 그대로 우리에게 대해 주심을 깨달아가며, 그분의 능력과 사랑

안에서 노력할 때 가능한 것이다. 즉 윤리도덕의 차원이 아니라 종교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행위인 것이다.

 

빤또하가 제시하는 또 다른 방법은,

참음으로써 어려움에 맞서는 것(以忍德敵難)과 고생과 어려움으로 덕을 늘이는(窘難益德)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며, 그분이 알아주시고 갚아주시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지닐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동양 현인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늘이 나에게 복을 박하게 준다면 나는 내 덕을 두텁게 쌓아 이를 맞이할 것이고,

하늘이 내 몸을 수고롭게 한다면 나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함으로써 이를 보완할 것이다.(원문 생략, 「채근담」, 전집)

 

 

최기섭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학장, 동양철학)

< 평화신문 : 2008. 10. 05발행 [988호] >



칠극(七克) 이야기 (8)


절제, 희생 아닌 주님 찬미의 한 방법



내가 학장이 된 후 제일 먼저 학생들에게 강력히 제안한 것은 '올바른 술자리 문화'였다. 다분히 협박성(?)이 강한 제안이기는 했지만…. 한때 유독 술 문제에 대해서는 관대했던 사회적 분위기와 군사문화의 영향이 남아 있어, 서로 술잔을 강권하기도 하고 또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마치 대단한 능력인 것처럼 무용담으로 회자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서로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술잔을 강권하지도 않고, 자신의 주량에 맞게 스스로 결정하며, 한풀이 하듯이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절제와 책임을 지니면서 화락한 분위기에서 마시는 것이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술자리 문화'인 것이다. 학생들은 아직도 관망하는 추세지만 나는 끝까지 밀고 나갈 심산이다. 왜냐면 이러한 자기통제의 능력이 훗날 그들이 보낼 건강하고 행복한 사제생활의 중요한 자산이 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빤또하가 칠극(七克)에서 다섯 번째로 제시하는 수양의 걸림돌도 바로 이 문제다. 즉 절도(節度) 없이 먹고 마심으로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도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이 주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빤또하가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었다. "사람들이 바라고 향하여 가고 싶어 하는 것은 다만 아름답고 좋은 것일 뿐이다. 그런데 아름답고 좋은 것에는 셋이 있는데, 하나는 이로움의 아름답고 좋음이고, 또 하나는 의로움의 아름답고 좋음이며, 다른 하나는 즐거움의 아름답고 좋음이다. 그런데 너희가 먹고 마시는 것을 절도에 맞게 한다면, 이로움과 의로움 그리고 즐거움의 셋을 모두 누리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모두 잃을 것이다. 그러니 먹고 마시는 것으로 즐거움을 꾀한다면, 이는 다만 몸을 해치고 덕을 없앨 뿐만이 아니라 그가 꾀한 즐거움마저 아울러 없애게 될 것이다."(聖奧斯定云 夫人有欲所趣向者美好而已. 美好有三 一曰利美好 一曰義美好 一曰樂美好 爾食飮以節 利義樂三咸亨也 否則咸亡焉 故食飮圖樂者 微獨傷身損德所圖樂竝消亡矣.「七克」, '塞 ') 정말 깊이 새겨둘만한 말씀이다.


 유학에서도 같은 의미로 절도 있는 삶을 강조한 경전 대목은 너무 많아 다 열거할 수 없을 지경이다. 「論語」에서 공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유익한 즐거움이 세 가지 있고 해로운 즐거움이 세 가지 있다. 예악을 절도있게 하기를 좋아하고 남의 좋은 점 말하기를 좋아하고 어진 벗 많은 것을 좋아하면 유익하다. 교만하고 편안하기를 좋아하고 태만하게 놀기를 좋아하고 잔치 벌이기를 좋아하면 해롭다."(孔子曰 益者 三樂 損者 三樂 樂節禮樂 樂道人之善 樂多賢友 益矣 樂驕樂 樂佚遊 樂宴樂 損矣. '季氏篇')


 내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줄곧 떠올린 것은 성 이냐시오의 '원리와 기초'였다. 빤또하는 역시 예수회 신부였다. 탐욕과 절도있는 삶을 언급하면서 먼저 인간이 창조된 목적을 상기시킨다.(그것은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고 섬기며 또 이로써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금지되지 않고 우리의 자유 의지에 맡겨져 있는 것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해 초연해지도록(indiferentia) 힘쓰고, 더 나아가 오직 창조된 목적으로 우리를 더욱 이끄는 것을 원하고 선택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도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절제가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참된 의미가 있음을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칠극(七克) 이야기(9)


사악함에 마음의 자리를 내주지 마세요



여섯째 주제: 음란함을 막다 


빤또하는 "음란은 마치 물이 넘쳐 나는 것과 같은데, 이는 마음을 곧고 바르게 하여서 막아야 한다"(淫如水溢, 以貞坊之)는 말로 이 주제를 시작한다. 물론 인간 수양과정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내면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도 인간을 더럽히는 것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15,18-19).


 유학에서는 의외로 이 주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부덕(婦德)을 이야기하면서 정절(貞節)을 요구하거나, 선비를 이야기하면서 지조(志操)와 절개(節槪)를 제시하기는 한다. 그러나 더 강조하는 것은 내면적 순수함과 깨끗함이다.


 공자는 제자교육에서 「詩經」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詩經」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시경」 삼백 편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다."(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論語」, 위정편) 


 즉 詩의 내용이 善한 것은 사람의 착한 마음을 감동시켜 분발하게 할 수 있고, 惡한 것은 사람의 방탕한 마음을 징계할 수 있으니, 그 효용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른 性情을 얻게 하는 데 있는데, 그 핵심이 바로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라 한 것이다. 정자(程子)는 이 '思無邪'를 성(誠)으로 해석하고 있다.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思無邪), 나도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숙제다. 얼마나 더 수련하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와 연관하여 빤또하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악한 감정 가운데 욕정(欲情)처럼 이겨내기 어려운 것은 없다. 따라서 사람이 이미 정결로써 그것을 이겨내었다면, 다른 사악한 감정을 이겨내는 일은 그다지 힘이 들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사악한 감정의 때를 이미 씻어내었다면, 속마음은 순수하고 환해질 것이다. 따라서 심오한 도덕과 오묘한 하늘의 일을 모두 비추어 볼 수 있을 것이며, 맑고 깨끗해질 것이다. 그러면 이 속에 하나의 작은 천국이 만들어질 것인데, 하느님(天主)은 그곳에 머무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원문생략, 「七克」, '坊淫')


 유학에서 사악함과 연관된 또 하나의 수양법은 「周易」에 보인다. 「周易」의 '乾卦 文言傳' 九二爻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평소의 말도 미덥게 하고 평소의 행실도 삼가며 邪를 막고 誠을 보존하여야 한다"했다.(易乾之九二 子曰 庸言之信 庸行之謹 閑邪存其誠)


 이 구절에 대한 정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평소의 말도 미덥게 하고 평소의 행실도 삼간다는 것은 어떤 급한 상황에서도 늘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邪를 막으면 誠이 저절로 보존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邪를 막는 것인가? 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으면 邪가 막아질 수 있을 것이다."


 사악함을 막고 誠(天道)을 보존하는 것(閑邪存誠), 이것 또한 내겐 중요한 명제였다. 그런데 나는 정자와 정 반대의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즉 誠을 보존하면서 邪를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은 소화데레사 성녀에 관한 책의 어떤 대목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었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하느님의 현존을 잃을 때가 있습니까?' 하고 내가 묻자 데레사는 솔직하게 '아니오.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단 3분도 그냥 지내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전념할 수 있는 것에 놀라니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권고와 추억)



칠극(七克) 이야기(10)


사랑이란 소명의 길, 끝까지 성실하게



이제 긴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인 것 같다. 처음에는 「칠극」이라는 책에서 일곱 가지 주제만 가져오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좋은 것들이 많아, 결국은 유학적 내용들과 섞어가면서 스케치하듯 그 책을 소개하는 형국이 돼버렸다.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이런 기회에 많은 이들이 「칠극」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이 책의 마지막 주제는 '게으름'(懈怠)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부지런함'(勤德)이다. 이 주제는 가장 평이한 주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주제일 수 있다. 왜냐면 '성실'과 '근면'을 빼놓고 인간됨이나 수행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성경을 묵상하면서 가끔 두려움에 빠지는 대목은 '탈렌트의 비유'에서이다. 내가 재주가 많아서가 아니다. 하느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사용하는 문제에서, 특히 시간 사용에 있어서는 정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일의 결과뿐 아니라 그 과정을 보시는 분이 아닌가! 그리고 그 과정은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언젠가 공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의 삶은 곧게 마련인데, 곧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요행히 화나 면하고 있는 것이다."(子曰 人之生也 直 罔之生也 幸而免. 「論語」, 雍也篇) 삶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 모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냐 하는 질책으로 들린다.


 그런 의미에서 빤또하가 말하는 게으름의 문제는 삶의 외적 태도만은 아니다. 오히려 삶의 참된 목표와 희망을 지니고 그것에 투신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한 번은 루카복음으로 피정을 하면서 피정 지도자로부터 '예수의 하루 일과표'를 작성해보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비록 단편적 장면들이었지만, 성전에서의 가르침, 세리와 죄인들과의 만남, 끝없는 병자치유 그리고 새벽까지의 기도와 다른 지방으로 떠나는 장면까지…. 그 하루는 정말 자신의 소명에 충실히 투신하는 모습이었다.


 공자 자신도 자신의 삶을 그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언젠가 섭공(葉公)이 제자 자로에게 공자의 사람됨에 대해 물었을 때, 자로가 대답을 못했다고 하자 이렇게 말하며 서운해 했다. "너는 왜 그 사람됨이 학문에 발분하면 밥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움으로 근심조차 잊어 버려서, 늙음이 장차 닥쳐오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亡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論語」, '述而') 대단한 경지이다.


 이러한 주제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새로이 다지며 떠올리는 구절이 있다. 증자(曾子)의 말이다. "선비는 포용력이 잇고 강인해야 할 것이니,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후에야 그칠 것이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論語」, '泰伯') 


 우리 그리스도교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랑하는 것으로 소명을 삼았으니, 그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가? 또한 죽은 다음에야 완성될 것이니, 얼마나 먼 길이 되겠는가? 강인한 의지와 큰 열정을 지녀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해 주고 계신다.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히브 6,11-12).





칠극(七克)과 함께하는 사순 (가톨릭신문)


[칠극(七克)과 함께하는 사순] (1)

신앙선조들의 삶처럼‘사순적 일상’ 살아가야
발행일 : 2012-02-26 [제2784호, 12면]

 ▲ 신대원 신부(안동교회사연구소장)
‘넉 사(四)’자와 ‘열흘 순(旬)’자를 쓰는 ‘사순’은 그 기간을 40일로 지정한다. 하지만 우리 신앙 선조들의 사순은 꼭 40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일상의 삶이었다. 예수의 고통을 함께하며 죄의 뿌리를 끊어내려고 했던 조상들의 의지는 삶을 수양하는 신앙 지침서, 「칠극」을 통해 계속됐다.

가톨릭신문은 사순을 맞아 신앙 선조들이 교리서로 삼았던 칠극의 정신을 되돌아보고, 사순 6주간 칠극의 일곱 가지 주제별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이웃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번 기획이 사순의 첫 단추를 꿰며, 매년 돌아오는 ‘일상적 사순’이 아닌, 신앙 선조가 살던 ‘사순적 일상’을 사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 칠극의 유래

칠극은 이러합니다. 교만을 이기기 위한 겸손, 질투를 이기기 위한 애덕, 분노를 이기기 위한 인내, 인색을 이기기 위한 희사의 너그러움, 탐식을 이기기 위한 절식, 음란을 이기기 위한 금욕, 게으름을 이기기 위한 근면, 이 모두가 덕을 닦는데 도움을 줌이 명백하고 정확합니다.”

하느님의 종 윤지충이 1791년 전주에서 심문을 당하며 남긴 확신에 찬 목소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칠극이 갖는 핵심과 의미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윤지충의 말대로칠극은 일곱 가지에 이르는 죄의 원인과 일곱 가지의 덕행을 가리킨다.

칠극」은 한문으로 적힌 400면의 수양서로서 ‘칠죄종을 극복해 극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주제로 교만, 질투, 인색, 분노, 탐욕, 음란, 게으름 등을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악으로 여긴다.

칠극」을 쓴 스페인 출신 디아고 데 판토하 신부(예수회)는 마태오 리치가 1601년부터 10여 년 간 중국 북경에서 전교 및 저술활동을 할 때 그를 보좌하던 사제다. 그를 보좌했기 때문에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판토하의 「칠극」은 시기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같은 학파의 특성을 띤 작품이 됐다.

「천주실의」가 중국인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개념을 소개하는데 주력했다면, 「칠극」은 그리스도교적 수양론을 유학자들을 위해 유교적 용어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판토하는 성경과 성인전, 그리스와 로마 철학 및 서양의 여러 대중적 이야기들을 책에 풍부하게 인용하며 사상을 전개해간다. 17세기 중국에서 최초로 만난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접촉을 통해, 인간의 이해와 수양론에 있어 매우 흥미로운 사상의 교류가 일어났던 것이다.

조광 교수(고려대학교 명예교수)는 경향잡지(1993)를 통해 “칠극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까지 신자들의 윤리생활과 수양의 길을 가르쳐 준 대표적 서적”이라며 “1850년대에 지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천주가사에서도 칠극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 「칠극」은 ‘칠죄종을 극복해 극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주제의 수양서다. 그림은 교만·질투·인색·분노·탐욕·음란·게으름 등의 칠죄종을 담은 것. 히에로니무스 보쉬 작(1480년 경, 패널 위에 유화, 120×150㎝,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 칠극과 신앙 선조

성인 최경환, 하느님의 종 윤지충, 이순이·유중철 부부, 홍유한 선생 등 수많은 신앙 선조들이 실제로 칠극을 통해 단점을 극복하고 모범적 신앙생활을 실천했다. 특히 최경환은 칠극을 통해 본래 가파르고 급하며 혹독한 성격을 이기고 억제해 후에는 도리어 유순한 성품이 됐다.

김수태 교수(충남대 국사학과)는 ‘최경환 성인의 천주신앙과 순교’라는 논문을 통해 “교만에 대한 경계는 최경환이 신심의 바탕으로 삼은 칠극의 정신이기도 했다”며 “서울을 떠나 산 속 교우촌에 머물 때도 칠극을 통해 수신입공에 전념했다”고 전한다.

이순이?유중철 부부의 신앙생활에도 칠극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칠극 4장, ‘정결’을 뜻하는 ‘정극음(貞克淫)’편에서 판토하가 든 사례를 이순이가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결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의 결혼, 동정서약, 이후 각자 홀로 살며 동정을 유지하자는 내용을 행하며 부부는 기나긴 사순의 시간을 살았다.

하태진 신부(전주교구)는 “이순이·유중철은 한문으로 적힌 칠극을 읽을 수 있는 소양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고 믿어지므로 이 책은 그들이 동정부부로서의 삶을 선택하고 지탱해 가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이해된다”고 전했다. 





◆ 기고 / 신대원 신부 (안동교회사 연구소장·우곡성지 담당) 

칠극(七克), 인간성 회복 위한 신앙인 지침서” 

또다시 사순절이 다가왔다. 사순절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 중의 하나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고, 주님이 가신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겠다고 다짐해보는 시기다. 일그러진 우리들의 본성을 주님께서 주신 원래 그 상태로 회복하고, 삶의 초점을 주님께 맞추어 나가야하는 시기다. 그래서 사순절을 ‘은혜의 시기’라고 부른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긴급한 사안이 있다면, 곧 ‘일그러진 인간성 회복’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 옛날, 신앙 선조들이 자신의 삶을 수양하기 위한 지침서로 삼았던 「칠극」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더 없는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일종의 ‘진복선언’과도 같은 책이다.

칠극」은 17세기, 죽음을 무릅쓰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중국으로 들어온 판토하(1571~1618) 신부가 저술한 심신수양서(心身修養書)다. 

이 책은 마태오 리치(1552~1610) 신부가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와 더불어 신앙 선조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서적이기도 하다. 

천주교에 심취했던 소현세자와 사도세자, 온몸으로 천주신앙을 살고 선포했던 농은 홍유한 선생, 홍유한 선생의 제자들이었던 천진암 강학회 회원들, 박해시대 수많은 순교자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이 책을 읽고 일그러져가는 자신을 추스르며, 주님으로부터 멀어져가는 마음을 다잡고(求放心), 몸과 마음 등 삶의 안팎을 충실히 닦아나갔다. 또 「칠극」은 동양인의 심성에 맞게 쓰여 있어 책의 내용으로 충분히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할 수 있었다. 그 내용 하나하나가 교회의 정통 가르침이면서 당시 유행하던 ‘유가적(儒家的) 용어’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칠극」은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인간 본성을 해치는 일곱 가지 악한 행동의 실마리를 이겨내는(극복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복음서에 나오는 ‘진복팔단(마태5,1~12)’이 하느님나라의 대헌장이라면, 「칠극」은 대헌장을 수행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 실마리다.

실마리 가운데 첫째는 ‘교만을 누르는 것’, 둘째는 ‘질투를 가라앉히는 것’이다. 셋째는 ‘탐욕을 풀어버리는 것’, 넷째는 ‘분노를 삭이는 것’이다. 다섯째는 ‘탐을 내어 먹고 마시는 것(무절제)을 막아내는 것’, 여섯째는 ‘음란함을 막아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게으름을 채찍질 하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교만, 질투, 탐욕, 분노, 무절제, 음욕, 태만 등은 대체로 인간의 ‘참된 행복’을 빼앗는 일등공신이다. 빠지기는 쉬워도 벗어나기는 참으로 어렵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는 결코 ‘주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지 못한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신앙 선조들은 사순절뿐 아니라 1년 365일 이러한 ‘일곱 가지 죄의 뿌리(七罪宗)’를 이겨내는데 지극한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 사순절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사순시기처럼’ 사셨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칠극」을 교회 발전을 저해하는 구시대적이고 저급한 교리서일 뿐이라고 우습게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 말씀하는 그대가 바로 첫째로 이겨내야 할 ‘교만’에 빠져있음을 어찌 알지 못하는가? 참으로 「칠극」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유용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복음적 덕목인 셈이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다들 한 번쯤 “이번 사순절에는 ‘무엇’을 끊어버리겠다”하고 다짐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칠극」이 소개하는 일곱 가지를 제외시키며 외치는 신앙적 맹세는 ‘헛것’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 본성을 일그러뜨리는 죄의 뿌리를 이겨내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번 사순시기에는 첫날부터 마음을 가다듬고, 신앙 선조들이 살았던 삶의 방식을 살아보시기를 소망해본다. 신앙 선조들이 걸었던 그 길이 사도들이 걸었고, 주님께서 걸으셨던 길이 아니겠는가?

오혜민 기자


[칠극(七克)과 함께하는 사순] 평투(平妬) - 제2주, 우리누리 공부방 큰 이모 최수연씨

평투(平妬): 질투를 진정시키다
“가장 가난한 이들과 살며 자유·행복 찾았어요”
발행일 : 2012-03-04 [제2785호, 12면]

부산 감천동, 까치고개를 넘을 때까지만 해도 산동네 집들은 알록달록한 ‘지중해의 집’을 연상케 했다. 동네로 들어서자 산동네는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가파른 비탈길,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다니는 골목길에는 콘크리트로 외벽을 친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골목 끝, ‘우리누리 공부방’이 보인다. 25년간 공부방을 꾸려온 아이들의 큰 이모, 최수연씨를 만나기 위해 허리를 굽혀 공부방 작은 문을 넘어섰다. 



▧ 공부방 큰 이모

노동문제에 관심이 있던, 수녀를 꿈꾸던 33살의 작고 귀여운 처녀. 25년의 시간은 그를 ‘공부방 큰 이모’라는 애칭과 함께 중년의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부산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감천동 산동네, ‘우리누리 공부방’을 가꾸는 최수연(도미니카·57)씨다. 1988년 이곳에 들어와 공부방 문패를 붙여놓고 감천동 사람들과 삶의 터전을 함께한 사람. 

윤종일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수도회)의 제안으로 시작한 일이라지만 산동네 사람들과 울고 웃으며 나이를 먹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 사람들이 이곳을 찾으면 예쁘다고 말해요. 잘 모르니까 그런 거죠. 처음 우리누리공부방 문을 열 때만 해도 공간이 너무 좁아서 길에다가 돗자리랑 신문지 깔고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숙제라도 해야 하니까.”

가난한 아이들에게 교육은 사치에 가까웠고 가난은 대물림됐다. 우리누리 공부방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학교가 끝난 아이들은 갈 곳이 없어 동네 언저리에서 시간을 때웠다. 처음 아이들을 공부방에 초대한, ‘설마 올까’하는 조금의 기대도 없던 그날, 아이들 50여 명이 모였다.

“지금 같으면 인권문제다, 뭐다 난리 났을 거예요. 그런데 그때가 지금보다 어쩌면 아이들이 행복했던 것 같아요. 경제적으로 힘든 건 똑같은데, 지금은 한부모가정, 조손가정 같이 부모님이 안 계신 아이들이 많습니다.”

아이들은 상처 입은 날개를 안고 태어났다. 가정의 형태가 변화되며 단순히 돈뿐 아니라 마음도 가난해졌다. 사교육을 앞세워 예·복습을 마친 아이들에 대항해 가르쳐주어야할 것은 늘어났고, 주어야할 사랑은 배가 됐다.

“뉴스에는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때는 조금 있으면 모두 부자가 될 거니까 공부방을 그만 둬도 되겠다는 환상이 있었어요. 그런데 갈수록 더 힘들어지니 세상이 과연 좋아지는 걸까요.”

 ▲ 부산 감천동 산동네. 고개를 올라가다보면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해진 집들이 보인다.


▨ 주는 것에도 속도가 붙는다

그가 공부방만 운영했던 것은 아니다. ‘감천동 사람’이 되기 위해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 실밥따기, 신문배달, 장어껍질 펴기, 신발밑창 붙이기, 가정부. 학부모들을 따라 나선 부업전선은 가난한 이들의 일상을 온몸으로 함께하는데 도움이 됐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은 채, 내 집 한 번 마련해보지 못하고 공부방 아이들과 살아간다는 것, 그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한 10년까지는 갈등이 있었어요. 저도 사람인데, ‘보따리 싸서 집에 갈까’ 왜 생각이 없었겠어요. 제가 피아노를 엄청 좋아했는데 여기 올 때 돈을 구하려고 피아노를 팔고 왔어요. 너무 속상해서 한참을 울었죠.”

물질에 대한 포기는 차라리 쉬웠다. 결혼과 자녀, 터전, 노후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이 삶을 선택한 것에 대해 그는 ‘참 잘했다’는 점수를 줬다. 수도자도 아닌 평신도가 부산지역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자유와 행복을 찾은 것이다.

“내 욕심, 내 소유. 모두 중요하지만 어느 날 사라지더라고요. 없는 것에 대한 자유가 있어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익숙해지니까 주는 것에도 속도가 붙더라고요. 수녀원에서도 이렇게 못 살았을 것 같아요.”

혼자라는 외로움을 피해 굴뚝에서 쪽잠을 자던 한 아이는 지난해 박사학위를 달고 공부방을 찾아와 첫 월급을 내놓고 떠났다. 시장갈 때도 놓지 않았던 손, 장난감 조립을 잘 한다고 건네준 칭찬, 대학교 학비까지 내어줬던 큰 이모의 사랑을 아이는 잊지 못했다. 아이들은 사회 곳곳에서 건실한 땀을 흘리며 일하고, 어엿한 자녀들을 두었고, 몇몇은 공부방을 찾아와 교사로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다.

 ▲ 부산 감천동 산동네, 우리누리 공부방 아이들이 올망졸망 골목에 섰다. 앞에서 세번째가 최수연씨.


▨ ‘같이’의 가치를 믿는다

최씨는 ‘같이’의 가치를 굳게 믿는다. 공부방 아이들에게도 함께하는 법을 주로 가르친다. ‘내가 주었으니 너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

호칭도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모두가 삼촌, 이모다. 선생과 제자의 벽을 넘어 가슴으로 함께하는 가족이 되고 싶은 소망이다. 공부방에 들어오면 반드시 그 아이의 가정방문을 나서는 것도 그 때문이다.

2009년, 최씨는 ‘산동네 공부방, 그 사소하고 조용한 기적’이라는 책을 냈다. 조촐하게 이뤄졌던 출판기념회, 아이들을 들쳐 업고 찾아온 우리누리 공부방 졸업생들. 아버지가 된 한 아이가 ‘할 말이 있다’며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이모를 안 만났으면 저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요. 이모에게 배운 사랑을 지금 제 아이에게 줍니다. 이모가 없었다면 지금 제 아이들도 없었을 거니까요.”

감천동의 세월을 아는 이들이 진심으로 울었다. 최씨의 삶은 공부방의 이름대로 ‘우리누리’다. 뜻은 넉넉한 마음, 더불어 사는 세상이다. 오늘도 공부방의 시계가 돌아간다. 



◎ 칠극과 함께하는 사순

칠극, 제2편 ‘평투’는 남의 나쁜 점을 헤아리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고, 남을 어질게 대하고 남을 사랑하라고 이른다. 타인의 복된 것을 근심하고 남의 재앙을 기뻐하는 것, ‘질투’는 분노와 인색보다도 나쁘다. 타인에 대한 질투를 뛰어넘어 ‘원수마저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 사상은 유가의 인애사상을 더욱 깊게 한다.



[칠극(七克)과 함께하는 사순] 해탐(解貪)과 색도(塞饕) - 제3주, 평생 나누는 삶 살고 있는 김숙일 할머니

해탐(解貪)과 색도(塞饕) : 나눔과 절제
“모든 것이 주님 덕분… 남에게 주기 위해 일했습니다
발행일 : 2012-03-11 [제2786호, 12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김숙일(헬레나·90·서울 중앙동본당) 할머니의 삶을 되짚어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성경구절이다.

탐을 내어 먹고 마시고자 하는 욕구는 사람 몸에 가장 가까이 있는 적으로 꼽힌다. 또 하느님께서 재물을 주시지 않으면 달라고 청하고, 재물을 주시면 남이 아닌 나를 위해 먼저 쓰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 할머니의 삶에서는 욕심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초기 신앙선조들의 삶에서 삶으로 이어져온 가르침처럼 나눔과 절제를 머리와 마음, 몸으로 실천한 일상이었다. 누군가 권하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수십 년의 세월을 단 하루처럼 그렇게 살아왔다. 



“쾌락에 빠지지 말고, 그러한 무리에 섞이지도 말아라”

갓 20대에 접어든 새 색시는 북한 신의주본당에서 고(故) 오기선 신부에게 예비신자 교리를 받았다. 예비신자 교리를 받는 내내 “옳은 말씀입니다. 하느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예수님”하며 복음말씀을 익히는데 힘썼다. ‘헬레나’라는 세례명을 받은 그날 이후 입에서는 ‘감사’를 되뇌었고, 머릿속에서는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라는 말씀을 지운 적이 없었다.

6·25 한국전쟁 발발 직전, 김 할머니는 신의주를 떠나 서울로 피란했다. 그러나 빨리 오라고 재촉하던 남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김 할머니는 그야말로 맨 몸뚱이로 어린 딸을 안고 부산으로, 거제도로 떠돌며 모진 피란생활을 견뎌야 했다. 그 와중에도 묵주를 손에 꼭 쥐고 ‘곧 신의주로 돌아가 새 성당을 짓는데 힘을 보태야지’라고 생각했다. 

전쟁 후, 다행히 남들보다 뛰어난 손재주를 가진 덕분에 영원한도움의성모회 수녀들의 추천으로 제의를 만드는 성가소비녀회 양재소에서 일할 수 있었다. 서울 중림동약현성당 아래에 자리한 양재소에서 바느질 한 땀을 뜰 때마다 하느님을 한 번씩 부르며 성실하게 일했다. 당시 월급은 두 모녀가 살아가기에도 턱없이 부족해 고된 일상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단 한순간도 ‘내 삶은 왜 이럴까’, ‘하느님께서는 왜 나에게 더 좋은 삶을 주시지 않을까’ 등의 생각은 떠올리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살리려고 생명을 주셨다”는 믿음에 한 치의 티끌도 얹지 않았다. 

그러나 기어이 영양실조와 늑막염이 김 할머니를 덮쳤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 둔 딸이 휴학계를 내고 어머니를 돌봤지만,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야 했다. 병원에 갈 돈이면 이웃사람 몇몇의 입을 책임질 수 있다는 생각에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엔 미련할 정도였다.

생활 형편이 조금씩 나아져도 김 할머니는 간식을 사먹은 기억이 없다. 꽃놀이, 단풍놀이도 가보지 않았고, 옷과 이부자리도 대부분 만들어 쓰며 최소한의 생활비만 지출했다. 그 대신 하고 싶은 일이나 먹고 싶은 것이 떠오르면 그것을 똑같이 남에게 해줬다. 따지고 계산하지 않고, 이웃이 보이면 곧바로 나눔을 실천했다. 

“내가 좀 덜 먹고, 좀 아껴 입으면 되는걸 뭐….”

 ▲ 김숙일 할머니는 “하느님께 떼쓰고 욕심을 내면, 지금처럼 살 수 없다”며 매일 하느님의 가르침과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김 할머니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느님과 대화하는 기도를 잊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가난해야, 가난은 덕이 된다”

특히 양재소에 일하던 시절, 김 할머니는 출퇴근 때마다 서울역과 염천교 인근에서 마주치는 거지들에게 먹거리며 옷가지 등을 나눠 줬다.

“나야 다시 돈 모아 실을 살 수 있으면, 그때 새로 떠서 입으면 되죠.”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 날 입고 있던 날 구걸하고 있던 한 사람에게 털바지를 벗어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월급 100원을 받으면 20원은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떼어 놓고, 나머지 중 절반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떼어 놓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썼다. 먹다 남은 것을 이웃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에서 먼저 이웃의 몫을 챙기는 삶이었다. 

지금도 김 할머니의 소지품 중 가장 값나가는 것은 묵주와 성경, 각종 기도책들이었다. 그의 필수품인 기도대도 직접 주워온 널빤지에 못을 쳐서 만들었고, 덮개도 직접 바느질했다. 그것도 벌써 30여 년째 쓰고 있다고. 평생 모은 돈으로 마련한 작은 아파트가 재개발 되면서 값어치가 좀 올라가자 곧바로 평양교구 성당 재건을 위해 교회에 기부했다. 김 할머니가 평생 단 한 번 가져본 재산다운 재산이었지만, 그나마도 남북통일을 보지 못하고 선종할까 걱정스런 마음에 서둘러 봉헌했다.

“남에게 주기 위해 일해 왔습니다.”

김 할머니의 말을 듣는 이들은 대부분 귀를 의심했었다. 이웃에게 베푸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아까워하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인 듯하다.

 ▲ 김숙일 할머니가 딸 차영주(아녜스)씨에게 예전에 필사했던 성경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차씨 또한 김 할머니의 모범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절제와 나눔의 생활을 기쁘게 살아가는 신앙인이다.


“가난은 용기와 힘을 준다”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덕분입니다. 그분의 몸에 제 손자국이 생기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꼭꼭 그분의 손만 붙잡고 살아왔습니다.”

김 할머니는 그동안 살아 숨쉬고, 이웃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옆에 꼭 붙어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김 할머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집안의 가장으로서 우리를 늘 풍요롭게 돌보아 주셨다”며 “그분의 말씀만 따르면 언제나 기쁨과 행복이 넘친다”고 강조한다. 

이른 새벽 김 할머니가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잡는 것이 묵주다. 이어 기도상에 앉아 기도서에 담긴 기도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봉헌하고 이어 성무일도와 성경 묵상에 들어간다.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싶은 마음에 잠을 자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다.

게다가 김 할머니의 기도 지향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을 향한 적이 없다. 늘 성직자들과 교회를 위해, 이어 세계평화와 남북통일을 비롯해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도를 바친다. 

“남을 위해 기도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더 많이 기도하지 못해 아쉽지요. 저는 그 기도 안에서 덤으로 은총을 누렸습니다.”

김 할머니는 인터뷰를 한 날, 기자와 채 마주앉기 전부터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수차례 되뇌었다. ‘무엇이 그렇게도 감사한가’라는 질문에 오늘 아침 눈을 뜬 것부터 지난 세월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삶 전체에 대한 감사기도가 이어졌다. 특히 김 할머니는 수많은 종교 중에서 천주교 신앙을 갖도록 허락해준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가장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칠극 3편과 5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된다.

“사람들이 행한 일이 참으로 선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알고 싶다면, 그가 그 일을 하려는 생각을 살펴보아야 한다. 하느님의 명령을 존중하여 착한 일을 하거나 덕의 아름다움을 위해 덕을 행했다면 이는 참된 선이고 참된 덕일 것이다.”

김 할머니의 일생을 통해 드러난 신앙인으로서의 모범을 들여다볼 좋은 잣대다. 



◎ 칠극 ‘해탐(解貪)과 색도(塞饕)’

칠극의 제3편 ‘해탐(解貪)’과 제5편 ‘색도(塞饕)’는 나눔과 절제의 실천을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해탐(解貪)’에서는 탐욕은 베풂으로 풀어야 한다고 이른다. 또한 ‘색도(塞饕)’에서는 탐을 내어 먹고 마시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이른다. 

사람이 가진 감정 가운데 가장 빨리 일어날 뿐 아니라 가장 늦게 끝나는 것이 바로 재물을 욕심내는 탐욕이다. 하지만 재물은 사람이 가진 힘과 용기를 없애는 반면, 가난은 큰 괴로움도 견딜 수 있게 하고,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힘을 북돋운다. 

아울러 칠극에서는 재물을 좋아하고, 귀함을 좋아하고, 편안과 즐거움을 좋아하는 죄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색도는 특히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의 절제만이 아니라, 말이 많은 것과 시끄럽게 떠드는 것, 재물을 탐내는 것, 착한 일에 게으른 것 등의 여러 가지 감정과 행동들을 바로잡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주정아 기자


[칠극(七克)과 함께하는 사순] 식분(熄忿) - 제4주, 참음의 덕으로 어려움에 맞선 채영희씨

“십자가 예수님 떠올리면 인내 못할 것 있나요”
발행일 : 2012-03-18 [제2787호, 12면]

시계 바늘이 오후 3시를 가리킨다. 이것저것 집안 일을 하던 채영희(스콜라스티카·67·서울 해방촌본당)씨.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묵주와 기도책을 꺼내들었다.

“영원하신 아버지, 저희가 지은 죄와 온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을 바치나이다.”“예수님의 수난을 보시고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 지난해부터 매일 오후 3시에 바치고 있는 ‘자비를 구하는 기도’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어머니 고 유순흥(마리아)씨를 위한 위령기도. “시모 유마리아는 세상에서 주님을 바라고 믿었사오니 지옥 벌을 면하고 영원한 기쁨을 얻게 하소서.”

시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올리자니 어느새 마음 한쪽에 애잔함이 가득해 진다. 지난해 7월, 오랜 투병 끝에 9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시어머니는 채씨와 46년을 함께했다. 무던히도 모질고 차갑게 시집살이를 시켰던 시어머니. 그러나 거의 반백년을 함께했던 세월 속에서 이제는 ‘미운 정’보다 ‘고운 정’의 대상이 되었다.

차가운 날씨지만 햇빛 속에 제법 봄기운이 느껴지는 요즘, 더 자주 시어머니의 생전 모습이 떠오른다. “나들이라도 좀 더 자주 시켜드릴걸.”하는 후회도 있고, “왜 그렇게 모질게 시집살이를 시키셨을까”라는 푸념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렵던 결혼생활 시모와의 갈등을 견디어 냈던 시간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고통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던 세월이었음을 안다. 그렇기에 시어머니 영혼의 영원 안식을 구하는 기도 한 구절 한 구절이 보다 절절해진다. 

 ▲ 생전의 시어머니와 함께 한 채영희씨.


모질었던 시집살이

21살에 5남매 장남이었던 서영환(마르티노)씨와 결혼, 시부모님과 시동생 시누이를 함께 돌보며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채씨. 결혼 당시 초등학교 입학도 하지 않았던 시동생과 시누이를 키우다시피 하면서 전체 살림을 도맡았던 그였지만 시어머니는 살갑지 않았다. 

바깥 출입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친정에 발걸음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친정’ 소리가 입에 나올라 치면 이불 홑청을 다 뜯어 놓고 빨래를 시키는 식이었다. 친정아버지가 뇌출혈로 위독하다는 소식에도 흔쾌히 친정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친정 집과 부모를 무시하는 모진 말도 계속됐다.

매일 술을 즐기시는 시아버지의 주사(酒邪) 수발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그런 와중에 시아버지가 병을 얻어 9년 동안 병치레를 했다. 그 뒤치다꺼리 역시 며느리 채씨가 해야 할 일이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시어머니는 49재를 하기도 전에 “남편 혼자 돈버는 고생 그만 시키라”면서 일자리 구할 것을 재촉, 상복 차림으로 일자리에 나가야 했던 그였다. 그럼에도 한 번도 큰소리로 불평을 표현한 적도, 가족들과 말다툼을 한 적도 없었다. “남편을 낳아주신 부모인데 말씀을 따르고 듣고 견뎌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속에만 그 어려움을 넣어 두었다. 

영세를 통해 진정한 인내를 배우다

채씨가 영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돌아가신 시아버지 유언 덕분이었다. 비록 신자는 아니었지만 가톨릭에 대해 좋은 인상을 지녔던 시아버지는 임종이 가까워오자 장례를 가톨릭 형식으로 치를 것과 남은 가족들이 가톨릭에 입교할 것을 원했다. 

‘사는 것이 하도 고달파서’ 해방촌 언덕 어디에 성당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성당에 나가고 싶었어도 시어머니 눈치를 살피느라 성당 찾아가는 것이 불가능했던 채씨에게 시아버지의 유언은 그야말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1986년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던 날, 펑펑 눈물 흘렸던 것을 기억하는 채씨. 그 눈물은 “하느님이 아니시면 누가 날 위로해 줄까”라는, 그간 어려웠던 세월에 대한 위로와 감사의 느낌 때문이었다. 성당을 다니게 되면서부터 채씨는 혹독한 시집 살이, 삶의 어려움을 신앙과 기도로 풀어 나갈 수 있었고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심적 위안도 찾았다. 

2005년경 노환으로 시어머니가 앓아 눕자 채씨는 직장도 그만두고 병간호에 몰두해야 했다.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는 아예 화장실 출입을 못했던 탓에 대소변을 받아내며 시어머니를 돌봤다. 기도할 시간조차 부족할 상황이었다. 그런 며느리인데도 시어머니는 대놓고 다정한 말을 건네지 않았다. “고맙다”라는 말은 가끔 들려주었지만 며느리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채씨는 구역반장 역할과 빈첸시오회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본당서 일손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마다하지 않고 간병 시간을 쪼개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집과 성당을 오갔다. 

인간적으로 미움과 원망만이 가득할 수 있었던 40여년의 세월에 대해, 채씨는 ‘특히 하느님을 알고 난 후에는 나 같은 이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셨던 예수님을 떠올렸다’고 그 소회를 밝힌다. 그리고 “십자가상 예수님을 바라보며 견뎌내야 한다”는 심정으로 마음을 다독였다고 했다. 또 자신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고 한다. ‘아픈 곳 없이 건강한 신체를 주신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이러한 채씨의 삶은 본당에서뿐 아니라 살고 있는 지역 안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2010년 10월 서울 용산구청은 ‘용산구민의 날’ 행사를 기해 채씨에게 ‘용산구민대상 효행상’을 수여했다. 

 ▲ 2010년 10월 18일 성장현 서울 용산구청장으로 부터 ‘용산구민대상 효행상’을 받고 있는 채영희씨.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요즘 채씨는 ‘십자가의 길 기도’ 등을 통해 그간의 세월 동안 인내의 힘을 주셨던 하느님께 더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시어머니의 선종 후 , “더 잘 모셨어야 했는데…”라는 죄송스런 심정에 한동안 무기력한 시간을 지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기운을 차렸다는 채씨. 빈첸시오회 활동의 일환으로 방문하는 독거 어르신들이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떠올리게 해서 남 같지 않게 여겨진다. 앞으로 건강이 허락되면 사정이 어려운 어르신들 돕는 일에 더 마음을 쓸 계획이다. 

“어려운 일을 참아 내는 것은 미력하나마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받아들이시고 견뎌 내셨던 예수님을 떠올리면 인내하지 못할 것이 없지 않을까 싶네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 기도를 드리고 있는 채영희씨. 채씨는 매일 오후 3시 ‘자비의 기도’와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영혼 안식을 위해 위령기도를 바친다. 지난해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해오고 있는 기도다.


◎ 칠극 ‘식분(熄忿)’

칠극, 제4편 ‘식분(熄忿)’은 분노를 삭이는 것이다. 참음의 덕목으로 어려움에 맞서는 것이며 곤궁함과 어려움으로 덕을 더하는 행위이다. 분노는 불이 타오르는 것과 같으니 참음으로써 꺼뜨려야 하며, 세상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고 두렵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참음으로써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것으로 바꿀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칠극(七克)과 함께하는 사순] 방음(坊淫) - 제5주, 혼인성사의 일치를 이뤄나가는 박영철·허은숙 부부

방음(坊淫) : 음란함을 막는다.
“매일 서로에게 편지 쓰며 사랑·행복 일구어요”
발행일 : 2012-03-25 [제2788호, 12면]

“천주께서는 다만 한 지아비가 한 지어미만을 짝하도록 명하셨다. 이것이 천주께서 사람을 만들어 내실 때 정해놓은 바른 길로 이외의 모든 것은 바르지 않은 음란함이다.”

칠극의 방음편이 말하는 음란함은 단순히 성(性)적인 음란함만을 이르지 않는다. ‘더러운 재미를 즐기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막지 못하는 것’이 음란이라 이르는 방음편은 저술 당시에 일부다처제에 맞서 일부일처제의 정결을 설명하며 혼인성사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가르쳐왔다. 칠극은 오늘날 성의 상업화, 이혼의 보편화 등으로 날마다 정결의 중요성을 상실해가는 우리 사회에도 일침을 놓는다. 인류 구원의 길을 걸은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사순시기, ‘하느님이 정하신 바른 길’을 걸으며 부부의 사랑을 키워가는 박영철(유스티노·60·춘천교구 동명동본당)·허은숙(유스티나·59)씨 부부를 만났다. 



“음란한 욕망이 너희를 공격해 올 때 자신의 덕의 힘을 믿는다면 결코 그것과 맞서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을 믿어서 도와주기를 빌고 다시 마음의 공을 더한다면 그제서야 그것과 맞설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도 부부는 펜을 손에 쥐고 편지지에 글을 채운다. 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서로에게 편지를 쓴 지 어느새 22년이다. 매일 서로에게 쓰는 부부의 편지는 서로에 대한 정결을 지키고 일치를 이루는데 큰 도움을 줘왔다. 어떻게 보면 별게 아닐 수 있는 편지쓰기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짧게는 일주일만에 그만두기도 했고, 100일 동안 꾸준히 쓰다가도 포기한 적이 있었다. 이들 부부의 의지만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 1990년 대림시기, 하느님 안에서 새해를 맞으며 부부는 매일 서로에게 편지를 쓰기로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약속하고 오늘 이 순간까지 지켜왔다.

“저희는 작은 걸 정해서 실천해요. 작게 하느님 뜻에 발을 들여놓고 실천하도록 노력하며 살다보면 그게 습관이 되고 몸에 배게 돼요. 결국은 그게 부부의 삶이 돼서 혼인생활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이들 부부는 해마다 목표를 3가지씩 정한다. 잘 사는 부부, 행복한 부부,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부부. 이런 이상적이고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정말로 사소하고 실천적인 목표다. 아침에 일어나 ‘찬미예수님’이라고 인사하며 안아주기, 미사 중 주님의 기도를 할 때는 서로 손잡기. 그리고 거기에 ‘매일 서로에게 편지쓰기’는 늘 빠지지 않는다. 이들 부부는 정말 사소하고 작은 실천이 부부생활을 이끄는 열쇠라 믿는다.

“음욕은 세찬 감정의 불길이다. 그런데 이 불길은 처음 일어날 때는 비록 미미하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소홀히 하면 반드시 거세게 타올라 참으로 끄기가 어렵게 된다.”

부부의 관계를 깊게 해주는 것이 작은 실천이었지만 반대로 부부를 갈라서게 하는 것도 사소하고 작은 일에서 나오곤 했다.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이 큰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또 남편은 쉬는데 나만 일할 때, 집안일을 도왔는데 알아주지 않을 때 상처를 받기도 했다. 나와 너무 가까운 사람이기에 나와 같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생각에서 상처가 시작됐다. 정말 사소한 일을 계기로 시작된 싸움이었지만 사랑하는 사이가 미워하는 사이로 변하고 함께 살면서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부부싸움 없이는 살 수 없어요. 부부싸움도 일종의 대화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면서 싸워야 한다는 거죠. 상대방을 나와 같이 만들려 하거나 무조건 참기만 한다면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매일의 편지와 대화로 늘 서로 소통하는 이들 부부는 이제 더 이상 이런 일들이 괴로운 일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물론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고, 다툼을 피할 수 있게 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편지를 쓰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받은 상처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다만 이제는 그 과정에서 치유를 얻게 됐다. 편지를 통해, 다툼을 통해 서로 소통하면서 아픔을 겪을 때마다 일치를 느꼈다.

 ▲ 박영철·허은숙씨 부부는 끊임없이 각자의 성을 성숙시키며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박영철·허은숙씨 부부가 편지를 읽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 박영철·허은숙씨 부부가 함께 기도하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이 상처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구나’하는 걸 느꼈을 때, 더 하나 되고 싶어서 노력하게 돼요. 이 사람이 너무 아프고 힘들 때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나도 마음의 아픔을 느끼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떤 때에도 사랑할 수 있게 되죠.”

“천주께서 사람들에게 결혼을 시키신 것은 그들이 부부가 되어, 서로를 돌보아주고 사랑하는 이로운 일을 가지게 하려는 때문이었다.”

이들 부부가 말하는 부부의 일치는 부부가 서로 똑같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남편은 남성으로서 남성스럽게, 아내는 여성으로서 여성스럽게, 각자 성숙해 나가는 가운데 부부로서 일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치를 위해서 절제하며 정결의 덕을 지킨다.

“성행위만을 따로 떼어 음란하게 여기곤 하는데 성은 부부, 즉 남성과 여성이 몸과 마음, 정신으로 소통해 일치할 수 있도록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에요. 대화나 다른 소통이 그렇듯 일방적이어서도 안 되고,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죠.”

또한 이렇게 절제 안에서 각자의 성을 충실히 키워나가는 일은 인성의 성장으로도 이어졌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성격이었던 박영철씨는 결혼생활을 통해 상대방이 스스로 정의로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기다려줄 수 있게 됐고, 자신을 포함한 주변이 늘 완벽해야 했던 허은숙씨는 조금 서툴고 불완전해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부부는 상대방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면서 지금까지 자신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자유로움을 느꼈다.

부부의 일치는 부부 안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이들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이 세상으로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깝게는 부부의 조언으로 화목해지는 부부의 수가 점차 늘어났고 2011년 5월에는 ‘가정의 달 및 부부의 날 기념식’에서 여성가족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올해부터는 법원에서 조정위원으로 초빙돼 이혼하려는 부부를 위한 상담과 조정활동도 하게 됐다. 이들 부부의 결혼생활이 혼인성사의 표지로서 향기처럼 퍼져나간 것이다.

“하느님은 혼인성사에서 배우자를 통해 하느님께 함께 오길 바라신다는 걸 느꼈어요.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건 아니죠. 예수님도 우리와 일치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노력하셨던 것처럼 저희 부부도 끊임없이 노력해 나갈 것 입니다.”

 ▲ ▼ 박영철·허은숙씨 부부가 함께 써온 편지들. 2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서로에게 부부는 일상에서 있었던 일, 독서와 복음말씀 등을 주제로 매일 편지를 써왔다.


■ 칠극 ‘방음(坊淫)’

칠극, 제5편 ‘방음’은 성욕이 가져오는 부정적 측면을 설명하고 그리스도교의 윤리관을 제시한다. 여기에서는 음란함을 극복하는 데는 마음의 정화가 선행되어야 하고 하느님의 은총이 전제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방음편은 사람이 지키는 정결에 부부 사이의 정결, 과부와 홀아비의 정결, 동정(童貞)자들의 정결을 말하면서 일부일처(一夫一妻)의 정결을 주장한다.



이승훈 기자




[칠극(七克)과 함께하는 사순] 책태(策怠) - 제6주, 열정으로 근면을 살아가는 김재현씨·끝

책태(策怠):게으름을 채찍질하다
“‘손’으로 나누는 대화 통해 보람·행복 체험합니다”
샘물회 통역봉사자 대표 맡아
청각장애인 어려움 해결 앞장
평생 이들과 친구로 지내고파
발행일 : 2012-04-01 [제2789호, 9면]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1980년대의 공장지대에는 어느덧 고층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섰다. 경기도 광명시 철산성당은 고층 아파트를 병풍 삼아 서 있다. 예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수화통역봉사자 김재현씨는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 지금껏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의 ‘손’을 통해 주님과 소통하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선택이다. 



■ 마음으로 이어지는 손 대화

벌써 20년이다. 남들은 대학진학을 꿈꾸며 공부가 한창인 고등학교 3학년 때, 김재현(안드레아ㆍ39)씨는 수화를 시작했다. 목적이나 이유가 없는 배움이었다. 그저 호기심 삼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배움이 김씨의 시각을 변화시켰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 둘 보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철산성당을 다녔지만 ‘수화미사’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공장지대가 근처에 있었던 성당에는 직장을 찾아 서울로 올라온 청각장애인들이 많았다. 본당에서는 이들을 위해 성당 한편에 청각장애인들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그들 앞에서 봉사자가 전례와 복음을 통역했던 것이다. 미사 때마다 김씨의 눈길은 수화봉사자의 손짓으로 향했다. 얼마나 집중을 했던지, 어느 날 청각장애인이 찾아와 “청각장애인이냐?”고 묻기도 했다. 그는 청각장애인에게 “아니요, 비장애인입니다”라고 답했다. 물론 수화로 표현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김씨는 철산본당 수화봉사모임 ‘샘물회’를 알게 됐고, 봉사자로서 활동하게 됐다. 1992년의 일이다. 그는 다른 수화봉사자들과 마찬가지로 전례와 복음, 강론을 통역했다. 미사가 끝나고 나면 청각장애인들과 어울려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고민도 듣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면서 점차 비장애인들의 평범한 일상이 청각장애인들에게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막 봉사를 시작했을 때였어요. 청각장애인이 가지고 있던 가습기가 고장이 났는데, 대화가 안 되니까 고칠 수 없어서 방치하고 있더라고요. 그걸 제가 같이 센터에 가서 통역을 해서 고쳤어요. 수화를 한지 얼마 안 돼서 어설펐지만 그렇게라도 도울 수 있었던 것에 보람과 뿌듯함이 느껴지더라고요.”

‘손’을 통해 나누는 대화가 그는 좋았다. 비장애인보다도 청각장애인들과 하는 대화가 더 즐거웠다. 수화를 할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희열이 느껴질 뿐이었다. 언어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국어와 영어 등 입으로 하는 언어와는 다른 수화에 매료됐다. 개인적으로 특강도 듣고, 공부를 했다. 1998년에는 ‘손사랑’이라는 수화 동호회도 만들어 자신이 맛본 수화의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했다. 점차 청각장애인 사이에서도 ‘김재현’이라는 이름이 알려져 그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요즘은 종교와 지역에 상관없이 청각장애인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해드리는 봉사도 하고 있어요. 사기, 집, 가정, 결혼문제 등등 수화통역을 하고 있죠. 저는 그런 통역을 해드리면서 보람을 느끼는 동시에 스스로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걸 느껴요.” 

 ▲ 미사 통역 봉사를 하고 있는 김재현씨.


■ 열정은 곧 근면

수화에 대한 열정은 그를 지금까지 활동하게 한 원동력이다. LG MC사업본부 해외교육 담당 과장으로서 바쁜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도 새벽에 청각장애인으로부터 전화가 오면 집과 거리가 먼 경기도 남양주, 광주까지 다녀오는 그다. 그런 열정이 있었기에 매주 성당에 나가 미사 통역도 하고, 다른 청각장애인들을 도울 수 있었다. 

수화통역 봉사를 시작한 이후 김씨는 한 번도 이 일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수화를 통해 청각장애인들의 어려움을 해결할 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20년 동안 철산본당 ‘샘물회’를 떠나지 않는 이유다. 

“저는 수화통역을 시작한 것도, 열심히 하도록 이끄신 건 주님이라고 늘 생각했어요. 그래서 항상 주님께 기도해요. 제가 잘 할 수 있는 수화통역을 평생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요.”

봉사를 하면서 많은 기억들이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보람을 느꼈던 것은 청각장애인들에게 전교한 일이다. 수화통역봉사자로서 그가 가지고 있는 목표도 종교와 맞닿아 있다.

“청각장애인을 성당으로 인도하고 영세까지 받게 하는 일은 비장애인의 10배 이상 힘든 일이에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청각장애인들에게도 신앙교육의 기회가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냉담하시는 분들을 찾아뵙고 다시 성당으로 인도하고 싶어요.”

현재 ‘샘물회’ 통역봉사자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봉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은 20년이 지났지만 마음만은 수화를 시작한 고3 때와 같다. 그를 필요로 하는 청각장애인이 있다면 언제라도 당장 달려 나간다. 그에게 청각장애인은 친구고 동반자다. 

“전 평생 청각장애인과 더불어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요. 이게 제 인생의 목표이자 꿈이에요.”

 ▲ 샘물회 수화학교 수료식 기념촬영. 김재현씨는 세 번째줄 맨 왼쪽.


 ▲ 샘물회 수화교실에서의 김재현씨.(오른쪽에서 두번째)


◎ 칠극 ‘책태(策怠)’

칠극 마지막 제7편 ‘책태’는 부지런함으로 ‘해타(懈惰)’ 즉 게으름을 극복하라고 이른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명령, 선과 덕, 도를 향해 정진하고 수양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게으름의 확장이다. 게으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하고 수고로워야 하며, 사악한 감정과 맞섰을 때 용감함과 굳셈으로 극복해야한다. 세상의 즐거움, 편안함을 멀리하며,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근덕(勤德)’은 하느님의 은혜, 보답, 영생을 가져오며, ‘해타’는 하느님의 분노, 재앙, 벌을 가져온다. 해타가 현세에서의 즐거움을 추구한다면, 근덕은 내세에서의 행복을 지향하는 차이를 보여준다. 


이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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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구스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2.28 자신을 바로 앎으로써 회개하고 감사하여 그 은혜를 나누고,
    인내하고 의로움에 기뻐하며 내면에 하느님을 모시면서
    사랑이라는 삶의 소명을 쉼없이 실천한다.

    자신을 알아 겸손을 지키고(교만-회개), 하느님을 알아 그 사랑에 젖어들며(질투-감사),
    가난을 즐기고 부를 베풀어 보답하고(탐욕-은혜나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어 덕을 쌓고(분노-인내),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과 함께(무절제-의화),
    마음안에 하느님이 머무시는 정결한 천국을 간직하며(음욕-정결),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삶의 목표와 희망을 향해 곧게 나아간다(나태-성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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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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