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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

[성서]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네 개의 복음서가 - 헤르만 헨드릭스 (지금여기)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6.07.29|조회수865 목록 댓글 0

<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네 개의 복음서가> 헤르만 헨드릭스 지음


(가) 네 복음서의 기원  

(나) 팔레스티나에서의 예수님의 삶 

(다)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복음 전수  

(라) 복음사가들의 복음 기록 

(마) 마르꼬에 의한 복음서 

(바) 마태오에 의한 복음서 

(사) 루가에 의한 복음서  

(아) 요한에 의한 복음서 



네 복음서의 기원

 1. 네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어떤 사람이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친척을 만나게 된다면 그 친척이 누구이며,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알아보게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며, 어디에 살고, 결혼은 했는지, 했다면 누구와 했고, 자녀는 얼마나 두었는지, 성격은 어떻고 기호나 취미는 무엇인지까지도 알아보려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 친척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에도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복음서를 접하게 될 사람들도 이와 유사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복음서를 통하여 만나게 되는 예수님에 대하여는 특히 그러하다. 예수님이 살던 시대 배경은 어떻고, 역사적 맥락은 어떠하며 어떻게 한 예수님에 대해 상이한 기록 (공통된 기록도 많지만)이 있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어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시대를 살던 그 시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서의 기원과 기록의 발전을 규정하는 사회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복음서의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2. 복음서는 예수님의 전기인가 아니면 말씀의 선포인가? 

성서학자들은 특별히 지난 한세기동안 복음서의 기원과 형성과정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왔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리이며 사도였던 마태오가 첫번째 복음서를 썼고 마르코는 베드로사도의 가르침을 기초로한 두번째 복음서를 썼으며, 루가는 “목격하고 말씀의 시종이 된 사람들이 전해 준”(루가 1:2) 것을 정리한 세번째 복음서를 썼고 마지막으로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영성적”으로 묵상한 복음서를 썼다는 것을 통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성서학자들은 복음사가들이 글로써 기록을 남기기 전에 무슨 일들이 있었으며 예수님 사후 몇십년이 지난 후인 초세기 후반부에 기록으로 남겨진 복음서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연구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공관복음서에 기술된 예수님 생애에 대한 여러 사건들의 기록을 토대로 예수님의 전기가 완전히 쓰여질 수 있다는 것을 믿은 때도 있었다. 즉 복음서에 기록된 모든 기록들을 순서대로 잘 짜집기를 한다면 예수님 일생의 전기를 재 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를 해 보면서 발견한 것은 예수님의 전기를 완성하는데에는 너무나도 많은 기록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열두살의 성전방문(루가 2;41-51) 이후 “서른 살 가량되어 전도하기 시작”(루가 3;23) 한 기간 사이에 예수님 생활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없으며, 마태오,마르코,루가의 복음서 사이에는 여러가지 사건기술에 관한 구체적인 면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음이 발견되고 있고, 특히 요한복음에 이르러서는 다른 공관복음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성서학자들이 취한 태도는 두가지로 정리될 수 있겠는데, 첫째는 복음기술 내용을 논리적으로 추출하여 기록이 빠진 부분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복원하는 것이었으며 두번째로 복음사가들이 예수님의 삶을 이야기하며 무엇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였던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두번째 태도가 설득력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즉 예수님에 대한 전기를 만드는 대신, 복음서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고자 했던 의도를 선포하는 기록으로 받아들이는 추세가 강하다. 

3. 복음서 전승의 세 단계는 무엇인가 ? 

신약성서의 구성은 네 복음서를 항상 앞 부분에 두고 있는데, 이 배열이 신약성서에 있어서 복음서가 가장 먼저 쓰여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컨데, 바오로 사도의 편지는 네복음서 보다 먼저 기록으로 쓰였으며(기원후 50-60년) 비록 네 복음서의 기초가 될 기록이 있긴 했지만 실제로 네 복음서가 쓰여진 것은 기원 후 65년에서 100년 사이인 것이다.

즉 신약성서를 연대순으로 배열코자 한다면 적어도 네 복음서는 바오로사도의 편지 다음에 배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네 복음서를 제대로 이해 하려면 이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즉 신약성서의 구성은 연대순이 아니란 점이다. 실제로 네 복음서가 쓰여지기 전, 약 35년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복음서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에 대한 가르침과 선교활동이 있어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네 복음서가 쓰여지기까지의 과정은 어떠하였는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대략 기원 후 30년경에 이루어졌다면 최초의 이 기간과 복음서가 나타난 65년에서 70년 사이에는 어떻게 예수님에 관한 내용이 전승되었는가? 적어도 35년간 네복음서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의 의미는 무엇인가 ? 이에 대하여 1964년에 교황청 성서위원회가 발표한 문서 “복음서의 역사적 진리에 대한 교서”는 중요한 해답을 주고 있다. 

“복음서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내용의 신빙성에 관해 올바른 판단을 하려면 해석자는 특히 전승의 세 단계, 예수의 가르침과 생애가 우리 에게 전달되는 과정의 3단계에 주의를 쏟아야 할 것이다(6항2)....성서를 해석할 때 복음서의 구성이나 그 근원에 관계되는 사실들에 주의를 쏟으며 근대적 조사 방법에서 얻을 수긍할 만한 결론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복음서 저자들의 진의와 그들이 사실상 무엇을 말했는가 밝히는 의무를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다”(10항) 

교황청 성서위원회가 지적한 전승의 세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팔레스타인에서의 예수님의 삶의 단계 
2) 부활사건 후 팔레스타인과 그 외 지역에 형성된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복음서를 형성케 한 단계 
3) 복음 사가들이 복음서를 기록한 단계 



팔레스티나에서의 예수님의 삶 : 말씀과 행적의 전수

[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네 개의 복음서가-2]


1.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 고갱(Gauguin, Paul 1848-1903) 황색의 그리스도(Yellow Christ) 1889년 캔버스에 유화 올브라이트 녹스갤러리
복음서를 이해하려면 통상적으로는 네 복음서를 쓴 네 분의 복음사가와 그들의 작품인 네 복음서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복음서가 완성되는데 네 분의 복음사가의 공헌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는 복음서가 완성되는데, 복음사가는 마지막 단계인 세번째 단계의 기록자일 뿐이라는 점이다. 

네 분의 복음사가가 복음서를 완성하기까지 그 전단계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자들이 상당기간 동안 말로써(구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적을 기쁜 소식(복음)으로써 전파하였다. 이 말로 전파된 단계를 구어 전승 단계라고 한다. 복음서에서 공부하기 전에 구어 전승 단계를 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당시 사회 문화 여건은 문자를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여건이 아니었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서의 배경이 된 구어 전승 단계를 연구할 때 구어 전승 단계와 기록으로 남겨진 복음서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드러남을 알게 된다. 즉 , 말로 전파한 내용과 기록으로 남겨진 내용 사이에 많은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사도들과 복음 선포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말로서 전파하기 이전에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 말씀과 행적으로 기쁜 소식을 직접 선포하셨다. 그렇기에 복음서를 읽을 때 반드시 유념해야 할 바는 복음사가의 기록이전 단계인 구어전승 단계와 더 올라가서 예수님 자신의 말씀과 행적 단계를 알아보아야 한다. 결국 이러한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완성된 복음서의 원천, 즉 시발점에는 예수님 자신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 자신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본다. 

2.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복음서는 한마디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기록이다. 즉 복음서는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만을 기록한 것만도 아니고 예수님의 행적만 기록한 것도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에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특별히 예수님과 삶을 같이 하였던 제자들의 입을 통하여 전해져왔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함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대로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과 표현을 썼었다.

이에 대하여 교황청 성서위원회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주님은 처음부터 어떤 이들을 제자로 선택하셨고 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듣고보며 따랐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증언하는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자격이 있는 이들이었다. 주님은 말씀으로써 당신 가르침을 펴 나가실 때에 그 시대에 흔히 사용하던 설명과 논리를 쓰셨다. 이러한 방법으로 주님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 구조에 당신 스스로를 부합시키셨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가르침이 그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지고 당신 제자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도록 하셨다.”(<복음서의 역사적 진리에 대한 교서> 7항) 

말씀 

흔히 복음이란 말을 들으면 얼핏 생각나는 것은 기록으로 남겨진 복음서를 가르키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복음이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란 뜻이다. 이 말은 희랍어의 evangelion이란 단어에서 연유된 말로 구원의 기쁜 소식이란 말과 동의어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의 선포이다. 따라서 복음은 원래 말씀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복음서를 쓰신적이 없으시고 기쁜 소식을 말로써 전하셨다. 이 기쁜 소식을 기록한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복음이란 말은 성서상으로는


1) 예수님 자신이 선포한 기쁜 소식, 예컨대 마르꼬 1:14-15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요.’”


2)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서의 구원에 관한 사도들의 설교, 예컨대 사도행전 15:7에 기록된 대로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내 입을 빌려 이방인들로 하여금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시려고 일찍부터 여러분 가운데서 나를 택하셨습니다.’”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두 가지 차원을 알게된다. 즉 예수님 자신의 선포, 예수님에 관한 사도들의 선포가 모두 복음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궁극적으로 '기쁜 소식'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본다면 복음은 말로 한 선포와 귀로 들음이지 문자로써의 기록과 눈으로 읽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복음서는 눈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입으로 선포되어져야 한다. 신약성서는 이러한 뜻에서 복음은 설교자의 활동과 관련된 것이었으며 복음사가라는 말도 기록자가 아니라 설교자로써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바오로 사도는 최초의 복음서가 기록으로 완성되기 전에 이미 복음사가라는 말로써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에 설교자가 있었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에페소서 4:11) (주:200주년 기념 신약성서에서는 ‘복음전파자’로 번역하고 있다. ) 이러한 사실로 보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사가는 반드시 글로써 기록한 자만을 지칭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말은 변하게 되고 또한 의미도 변하게 마련이다. 또는 보편적인 용어로 통용되던 것이 의미가 부여되고 강조되다 보면 전문 용어 또는 기술적 용어로 변질되게 마련이다. 이에따라 evangelion이란 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래의 뜻으로부터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글로써 기록한 것이란 뜻으로 변화되었다. 이에 따라 네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이 복음사가로 고착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은 대략 2세기 경이다. 이러한 변화가 있어왔긴 했지만 본래 예수님의 말씀이 본질적으로 뿌리채 변질된 것은 아니다. 

행적 

계시란 말을 들을때 우리는 흔히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은 말씀이 없으신 분이다. 다른 말로 하느님은 우리와 같은 입이 없으신 분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계시는 그렇다면 무엇인가?


계시는 주어진 여건 속에서 하느님께서 인간들, 특히 특정한 어떤 사람 (예컨대 아브라함, 모세 등등) 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아듣도록 하신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뜻과 계획을 알아듣도록 하는데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법을 가지고 계시다. 예수님은 참 인간이셨기에 우리처럼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전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알리시는데 있어서 말씀만으로만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여러 행적들이다. 말씀과 함께 행적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르치심뿐 아니라 행적을 통하여 인간역사에 개입하고 계신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즉 복음서는 종교적 사상의 개요를 증언할 뿐만 아니라 인간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개입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증언은 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야훼께서는 억센 손으로 치시며 팔을 뻗으시어 온갖 표적과 기적을 행하심으로 써 모두 두려워 떨게하시고는 우리를 에집트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신명기 26:7-8)


이 성서 말씀은 추수기에 첫번째 곡식을 감사의 뜻으로 하느님께 봉헌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백하는 신앙내용이다. 이 귀절을 보면 하느님은 행동으로써 자신을 들어내심으로써 인간 역사에 개입하고 있음을 당시 사람들은 신앙의 고백을 통하여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도 같은 방법으로 인간에게 가르치시는 한편 행동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일을 구체적으로 수행하셨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기쁜 소식(복음)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였는데 하느님 나라에 관한 수 많은 말씀과 함께 기적이나 행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어떠하다는 것을 행동으로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의 행적은 자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예수님으로 비롯된 새로운 질서인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알아듣도록 보여주는 방법이었다. 

말씀과 행적 

이렇게 볼때 말씀과 행적은 함께 계시를 드러내는 통합된 방법이다. 즉 하느님의 자기 현현(계시)은 말씀과 행적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다. 따라서 말씀과 행적은 복음서 안에서는 상호 분리 될 수 없는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의 행적과 연결시켜 보지 않는다면 그 심오한 뜻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마르꼬복음 2:5에 “네 죄가 사해졌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은 단순한 말의 기록이 아니라 이 말씀으로 죄사함이 이루어지는 행동이 함께한 기록이며 이 말로써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의 자비가 드러나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어떤 행적은 말씀없이 기록되었지만 그분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며 어떤 말씀은 행적없이 기록되었지만 그 행적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3. 예수님은 그 시대를 사시던 분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그 시대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를 살던 그 곳의 사람들에게 알맞게 말씀하셨고 행동하셨다는 뜻이다. 부활사건 이후에야 그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마르꼬 1:1)이라고 이해하고 믿었지 예수님 살아 계실때에는 그저 나자렛의 예수(요한1서 4;12 참조)라는 분의 말씀을 들었고 보았을 따름이다.


그들은 실제로 하느님을 보았거나 그분의 말씀을 예수님을 통하여 보고 들었다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모습을 하고 오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 부활후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거치고서야 예수님의 신분을 유추하여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그제서야 예수님이 육화하신 하느님이라고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그 시대를 산 분이셨다. 그 분은 세기 초 팔레스티나의 유대인과 꼭 같이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시면서 사신 분이셨다. 따라서 복음서 전승의 원초가 되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다음의 몆가지를 알아야 한다.


(1) 예수님이 쓰신 언어는 무엇인가 ? 
(2) 당시를 살던 사람들의 사회,경제와 정치적 상황은 어떠한가 ? 
(3)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문화적 배경은 어떠한가 ? 
(4)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은 어떠했는가 등등. 

(1) 예수님이 쓰신 언어 

예수님이 쓰시던 언어는 그 당시 그곳 사람들이 쓰던 언어로 셈족계통의 아라메아 말이었다. 이 언어 특징중의 하나는 비교형이 없는 것이었다. “보다 많은, 보다 적은”이란 표현은 존재치 않았다.


마태오 복음 22:14절에 나오는 “불리운 사람은 많다. 그러나 선택된 사람은 적다.”라는 특이한 말투는 이 아라메아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 당시 어투속에서 천사와 마귀는 흔히 쓰여지는 용어였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 당시의 삶처럼 이런 용어들을 쓰시면서 표현을 하셨던 것이다. 교황청 성서위원회는 이렇게 기술한다.


“주님은 말씀으로써 당신 가르치심을 펴 나갈때에 그 시대의 흔히 사용하던 설명과 논리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한 방법으로 주님은 그 시대의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당신 스스로를 부합시키셨으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가르침이 그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지고 당신 제자들의 기억속에 오래 남도록 하셨다.” (위 교서 8항) 

(2) 당시의 사회 경제와 정치적 상황 

예수님이 사시던 때와 장소는 유대 역사 가운데에서도 가장 심각한 호전적인 분위기가 감돌던 거친 시기와 장소였다. 복음서 또한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쓰여졌고 팔레스티나 뿐만 아니라 복음서가 기록된 주변 여러나라의 상황도 혼란의 와중에 있었다. 이 당시의 사회 경제와 정치적 상황에 대하여는 많은 연구가 있어왔고 또 충분한 자료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이를 상세히 다루지 않고 개괄적인 것만 요약 한다.


- 외국의 지배와 외국군대의 점령 
- 계층간의 갈등, 특히 사제계급에 대한 저항적 분위기 
- 종교적 광신주의의 만연 
- 혁명적 예언자들과 사이비 메시아의 등장 
- 로마통치의 불의와 억압과 착취 
- 민족주의의 만연과 혁명세력간의 갈등 
- 현지인들의 로마 앞잡이 노릇(세금착취)에 대한 저항 
- 유대지방과 사마리아 지방간의 적대감 등등 

(3) 당시의 문화배경 

예수님 당시의 문화형태는 통합적문화였다. 오늘날 흔히 우리는 정치,경제,사회,종교, 교육등의 제 분야가 각기 제 기능을 갖는 문화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삶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 당시에는 이와같은 제 분야가 각기 제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구별없이 기능하던 사회였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복음서에도 이런 통합문화의 형태가 잘드러나 있다. 특히 근년에 이르러서는 그 당시와 관련된 여러 기록과 문헌이 연구되고 고고학적 발굴로 이러한 관점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문화형태의 차이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갈릴래아지역은 주로 마을 문화속에서 소작인과 농업노동자의 문화가 우세하였고 예루살렘을 비롯한 대 도시 지역에는 정치와 종교가 손을 잡고 사제문화가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가운데에 희랍문화가 영향을 끼치고 로마를 비롯한 외세문화의 풍조도 가미되어 가히 문화적 혼란기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시장의 발달로 인한 소비문화도 가중되어 일정부분 경제적 번영도 일어나고 있는데 특히 이로 인한 무산자 계층과의 갈등과 적대감도 일어나고 있었다. 

(4) 당시의 세계관 

모든 인간은 각자 나름대로 삶의 철학과 세계관을 갖게 마련이다. 그 당시를 사셨던 한 인간으로서 예수님도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과 삶의 철학을 지니셨다.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마른 땅과 물을 갈라(창세기 1:9-10) 하느님께서 혼돈 속에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셨으며 지구는 거대한 기둥이 떠 받치는 평평한 땅과 그 주변을 물이 감싸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지구 위를 덮고 있는 둥근 천궁은 그 안에 해와 달과 별이 박혀있고 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천궁으로부터 물이 떨어지는 것이 비였고 하느님의 옥좌는 이 천궁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땅 밑에는 악의 세력이 갇혀있고 천궁 안으로 평평한 땅위의 공간에는 선한 영이 날아다니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오늘날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 이후에 정립된 것인데 그 당시 사람들로서는 이와 같은 개념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을 것이다. 예전 사람들은 하느님은 ‘저 높은 곳에’, 악령은 ‘저 깊은 아래’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세계관을 가졌던 당시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세계관을 예수님도 가지셨을 것이다. 

4.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셨던 분, 예수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맞게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완전히 이해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 당시 사람들로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제대로 깨달아 알아듣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말씀을 듣고 행적을 본 당시 사람들의 수용과정의 어려움과 함께 예수님의 엄청난 요구를 실천하려 할때 나타나는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새로운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군중들, 반대자들, 친척들, 심지어는 어머니(마르꼬 3:20-21, 31-35, 루가 2:50)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복음서에는 이러한 제자들의 몰이해에 대하여 많은 기록을 수록하고 있다. 호수 위를 걸어갈때 제자들의 넋잃은 모습(마르꼬 6:52), 빵에 대한 몰이해(마르꼬 8:17), 수난 예고에 대한 제자들의 수용태도(루가18:34), 심지어는 예수님 사후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루가24:21, 요한21:3). 요한 복음을 보면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모든 것을 하나의 꿈으로 여기고 본래의 생업으로 돌아갈 생각까지 하게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반전이 이루어진 사건이 나타난다. 그때까지 움츠러들었던 제자들이 주님이 아니계신데도 떨쳐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는 목숨을 던져가며 주님이 하시던 일을 계속하게 된다. 무슨일이 있었던가? 가장 큰 사건은 주님의 부활이었다. 연이어 성령의 체험이 일어난다. 부활과 성령강림이라는 중대한 체험이 이들의 삶을 전적으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체험은 무엇을 가져왔던가? 바로 그때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이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생전에 하신 말씀, 하신 행적의 뜻을 홀연히 깨닫게 된 것이다. 이미 주님의 생전에 하신 이야기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 나는 이런 일들을 여러분에게 말했습니다. 협조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신 성령께서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고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요한 14:25-26) “내가 여러분에게 말할 것이 아직도 많지만 여러분이 지금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 그 분이 오시면 여러분을 모든 진리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 (요한 16:12-13) 이 두 성서 귀절은 예수님이 부활 후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살아생전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들었고 그 행적을 실제로 보았지만 그 깊은 의미를 모두 깨닫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음으로써 새로운 관점과 함께 눈을 뜨게 된 것이었다. 이 새로운 체험을 한 제자들은 이제는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되풀이 반복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첨가한 새로운 가르침을 널리 펼칠 수가 있었다.


예컨대 마태오 17장 9절의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인자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켜 질 때가지 이 현시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오’라고 명령하였다.”라는 말씀을 보면 부활사건 이후에야 예수의 변성용을 완전히 깨닫게 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요한 복음 2:22의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후에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는 성전 정화시의 말씀을 제자들은 부활 후에야 깨닫게 된다. 즉 “예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은 당신이 이렇게 말씀하시던 것을 상기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라고 기록했다. 이외에도 복음서 여러 곳에 이와 유사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에수님 생전에는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은 이후에는 이 새로운 체험을 토대로하여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이해하고 이를 전파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중요 요점 

☞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기록이다. 
☞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궁극적으로 “기쁜 소식”이시다. 
☞ 복음은 말로써의 선포와 귀로써의 들음이지 문자로써의 기록과 읽음이 아니다. 따라서 복음서는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선포되어야 한다. 
☞ 복음서는 인간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개입을 증언한다. 
☞ 하느님의 자기계시는 말씀과 행적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다. 따라서 말씀과 행적은 복음서 안에서는 상호 분리될 수 없는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의 행적과 연결시켜보지 않는다면 그 심오한 뜻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없게 된다. 
☞ 예수님은 그 시대를 사시던 분이었다. 즉 그 시대를 살던 그 곳의 사람들에게 알맞게 말씀하셨고 행동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이해하려면 다음의 몇가지를 알아야 한다 : 
* 예수님이 쓰신 언어는 무엇인가 ? 
* 당시를 살던 사람들의 사회, 경제, 정치적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 
*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문화적배경은 어떠하였는가 ? 
*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은 어떠하였는가 ? 
☞ 부활과 성령의 체험으로 제자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되풀이 반복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첨가한 새로운 가르침을 널리 펼칠 수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복음전수

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네 개의 복음서가-3


 

지금까지 우리는 한분 예수님으로 부터 4개의 다른 복음서가 기록되어 나온 배경의 일부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어떻게 전해져 왔는가를 보았다. 이번에는 특별히 예수님의 뜻을 이어받은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어떻게 복음을 이해하고 전했는지를 살펴본다. 우선 제자들의 복음 이해를 살펴보고 팔레스티나에 있던 초기 공동체 및 팔레스티나 밖의 헬레니즘 문화권 안에서의 공동체들의 복음 이해와 전수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제자들의 복음 이해와 전수 

예수님 사후 일시적으로 흩어졌던 제자들이 부활사건과 성령체험을 하고 난후 다시 모여 전도를 하게 되는데 이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하고 있는지 보기로 한다. 

우선 제자들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이들이었는가 ? 

"주님은 처음부터 어떤 이들을 제자로 선택하셨고 그들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듣고 따랐기 때문에 그 분의 생애와 가르침을 증언하는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성청 성서위원회 교서 7항) 

예수님은 마르코 복음 사가가 기록한 대로 “열둘을 선정하시고 (1) 그들을 당신과 함께 있게 하고 (2) 그들을 파견하여 (복음)을 선포하게 하려는”(마르꼬 3;14) 뜻으로 제자를 뽑으시고 훈련을 시키셨다.

뽑힌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생활함으로써 양성을 받고 훈련을 쌓아 주님의 영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은 단순히 제자들이 자신들의 성화를 위한 준비에 머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이 지상에 전파하는 협조자로 훈련되어 파견되는 과정이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생전에 이 훈련을 받은 제자들을 파견하여 가르치고 치유하는 실습을 시키셨다. 일종의 현장실습을 시키신 것이었다. 마태오 복음은 이 과정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마태오 5장 1절에서 7장 9절까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것으로 제자들은 이 가르침에 친숙토록 훈련을 받았다. 이어서 8장1절부터 9장38절까지는 일련의 기적사화들인데 제자들은 친히 이 기적들을 목격한 현장에 있었다. 이런 준비를 거쳐 10장 1절부터 42절까지에는 파견이 기록되어 있다. 이 파견은 실습훈련으로 이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대신하는 자로 공인을 받았고 구세주의 사명을 말씀과 행적으로 대행하는 이들이 되었다. 따라서 이런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파견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명으로,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이렇게 후에 기록하고 있다.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모든 것을 다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시오” (마태오 28; 19-20) 

이런 뜻에서 제자들은 그리스도로 부터 파견을 받아 그 분을 증언하는 이들이 된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내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뿐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사도행전 1;8)


이처럼 자격있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 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부터 하늘에 오르시게 되기 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을 사람들에게 선포하여 전하게 되었고 특히 주님의 부활을 중언하는 일을 하였다. 유다스를 이을 새로운 사도를 선출하는 자리에서 으뜸 제자였던 베드로는 사도들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우리들 가운데 오고 가시던 그 시절, 곧 요한의 세례로부터 시작하여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줄곧 우리와 함께 다닌 이 사람들 중에서 하나가 우리와 더불어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21-22) 

제자들의 예수님 증언에 대하여 성청 성서위원회의 교시는 이렇게 요약 정리하고 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증언하는데 있어서 첫째로 그 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였고 듣는 이들의 처지를 참작하면서 그분 생애의 말씀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 해 주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그 분의 신성이 명확히 들어났을때 사도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망각하지않고 그 모두를 통합하여 정리하였던 것이다. 또한 사도들은 주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다고 해서 그 분을 어떤 신화적인 인물로 만든다거나 그 분의 가르침을 와전시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예수님 자신이 부활 후 구약성서와 그 분 자신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해석해 주셨듯이 사도들도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그 시대의 듣는 이들의 필요에 의해 해석해 주었던 것이다.... 즉 교리교육식 표현, 이야기 양식, 증언, 찬미가, 신앙고백, 기도 그리고 그 밖에도 그 시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문학적 표현 방식들을 썼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직접듣고 보았으며 예수님으로부터 파견에 걸맞는 훈련을 받았기에 가장 적절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한 체험을 부활 사건이후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한 이해를 더욱 명확히 하게 되었으며 이를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맞는 표현방법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수하게 되었다. 

2. 팔레스티나 공동체의 복음이해와 전수 

사도행전 2;41-42에는 예루살렘에 탄생한 초기 공동체의 형성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베드로는 열한 사도들과 함께 일어서서 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유대인과 예루살렘 시민 여러분.....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으니 그 날에 (믿는)사람들이 삼천 명 가량 늘어났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서로 친교를 맺고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루가 복음 사가는 예루살렘에 탄생된 최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의 특징을 (1) 사도들의 가르침 (2) 친교 (3) 빵을 떼어 나눔 (4) 기도로 요약하고 있다.


모든 공동체에는 공동체를 이루는 두개의 큰 기둥이 있다. 그하나는 일치를 증진시키는 요소이며 다른 하나는 다양성을 증진시키는 요소이다. 일치를 증진시키는 요소는 공동의 목표, 공동의 신념, 공동의 믿음, 공동의 동의 등이며 다양성을 증진시키는 요소는 공동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의 다른 형태들이다.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도 이 두가지 요소가 있었다. 예수님에대한 공통된 믿음, 신념, 목표와 동의가 일치를 이루는 요소라면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가는 방법에서의 다양성이다. 즉 다양한 임무분담, 책임의 다변화이다. 비록 같은 일치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외교인에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핵심 메세지를 전달할 임무를 가진이도 있었고, 공동체 구성원의 교육을 담당하는 이도 있었으며, 새로 세례받은 이들을 격려하는 이들도 있었고, 공동체 살림을 주관하는 이들, 그리스도인에 대한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는 변론과 변호및 호교를 담당하는 이들로 다양성이 존재했었다.


일치를 증진시키는 예수님께 대한 명확한 믿음 내용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는데 이는 복음선포의 본질적 내용(케리그마)에 관한 것이었다. 이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체안에서 명확해지고 일정한 틀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사도행전 전반부 10장까지와 바오로 사도의 여러 편지들에 나타나 있다. 이를 요약하면, 

1)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약속은 이제 실현되었다. 
2) 이로써 오랫동안 갈망하여 오던 다윗 가문의 메시아(구세주)가 오셨다. 
3) 그분은 바로 나자렛의 예수로서 
- 하느님의 능력으로 선한 일과 위대한 징표로써 오셨으나 
- 성서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 죽음으로 부터 들어올려져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4) 그분은 영광중에 다시 오셔서 인간을 심판하실 것이기에 
5) 이 메세지를 들은 이들은 회심하여 죄를 용서받을 세례를 받아야 한다.
 

이 복음선포의 핵심내용에서 파생된 것이 전승인데 복음선포의 본질적인 내용 뿐 아니라 이 내용을 설명하는 여러 가르침을 전파하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언행에 관한 이야기를 곁들이게 되었다. 예컨데 예수님의 선포하심과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현실적 구현을 설명키 위하여 구체적으로 치유에 관한 여러 기적사화를 덧붙였으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부활사화등이 곁들어 지게 되었다. 또한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는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당면한 여러 분쟁과 갈등을 해소 시키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인용한 훈계들도 곁들여 졌다.(고린토1 7;10; 11;22-25, 사도행전 20;35) 이런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의 언행이 전승으로 초기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게 되었다.


팔레스티나에 형성된 초기 공동체들은 예수님이 사시던 사회, 정치, 경제 현실을 살던 이들이었고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전승이 전달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비록 기본적인 사회현실은 같았어도 이 당시는 격변의 시기였기에 예수님이 떠나신후 몇년도 채 되지 않아 예수님이 생전에 겪으셨던 사회현실과는 다른 변화된 현실과 사건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예수님의 언행을 당시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듣게 하기 위하여는 변화된 현실에 맟추어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예컨데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당대 사람들은 급박한 현실로 알아들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종말이 가시화되지 않자 종말은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어투로 재설명을 하여야만 하게 되었다. (마태오 24; 45-51; 25;1-13) 이처럼 팔레스티나에 살던 이들은 비록 같은 언어로 예수님의 언행을 알아들을 수 있었으나 상황변화에 따른 변형된 전승을 듣게 되었다. 

우리가 유념해야할 바는 예수님에 관한 구어전승은, 단순히 예수님의 말마디가 그대로 반복해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시대변화에 맞게 설득력있는 논리체계를 가감한 변형의 과정에 따라 전파되고 전수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구어전승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는 다음 두가지점을 감안하여야 한다.


첫째로, 제자들이 설교할 때 제자들은 예수님 생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부활과 성령체험으로 인한 새로운 이해를 토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달했으며 이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마디 하나 하나를 그대로 반복해서 전달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체험을 통한 새로운 이해에 근거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였다는 점이다. 그렇다고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본질적으로 훼손된것은 물론 아니었다. 단지 부활과 성령체험으로 인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첨가한 전달이었기에 말마디 하나 하나를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둘째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은 예수님 생전의 상황에 맞는 것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도 변하게 되어 새로운 관심사와 문제에 대하여 이에 맞는 가르침과 행적을 두드러지게 전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즉 사도들은 새로운 상황에 대한 설명을 예수님의 말씀과 언행에 비추어서 재해석하여 전달할 필요성에 직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에서 예수님의 언행은 다른 상황에 맞는 형태의 표현으로 전달되게 되었다.


이러한 재해석과 재구성의 단계는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언행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지 않았을 때에는 새로운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는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게 하는 경우도 상정할 수가 있다. 예컨대 어떤 이들에게는 웃기는 이야기도 상황이 다른 이에게는 전혀 웃길 수 없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심지어는 웃음에 찬 이야기가 조소나 모욕으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다. 서양사람에게는 농담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나 같은 말이 한국 사람에게는 전연 의미없는 이야기일 수가 있듯이 말이다. 예전 프란치스꼬 성인은 가난한 삶을 상징하는 뜻에서 가장 흔하고 값싼 옷을 수도복으로 삼았는데 수백년이 지난 후에는 이러한 수도복을 지어 입으려면 보통 사람이 입는 옷의 몇배나 비싼 옷이 되어버려 더 이상 가난을 상징하는 옷이 아님과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 생전에 하신 말씀을 말마디 그대로 전달할 때 상황이 변한 때에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이 되어 버릴 수 있는 경우에, 복음전달자들은 상황에 맞게 말씀을 선택하여 재구성하여 전달하였던 것이다. 

구어전승이 전승으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또 하나 유념해야 할 바는 전승이 기록될 때 일관된 이야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형성되지 않았던 점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구어전승의 각 조각난 단락들이 단순 기록으로 나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마르꼬 10;12에서 10;17까지의 짧은 기록은 전혀 내용이 다른 세가지 다른 이야기가 단순나열되어 있다. 12절에는 이혼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간음한 것이란 내용인데 13절에는 전연 다른 이야기, 즉 어린이와 같아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세 이야기는 전혀 별개의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 일관된 맥락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성서에서 우리는 이런 전혀 다른 단락의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구어전승이 초기 공동체의 체험 속에서 기록된 과정을 살펴보면 구어전승은 당시 삶의 자리에 맞게 전수되었으며 필요에 따라 전수되었다는 점이다. ’삶의 자리‘는 복음서 전승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에따라 사용된 단어나 용어 및 표현 형태도 상황에 맞게 기록될 수 있도록 전수되었다. 

3. 헬레니즘 문화권의 공동체의 복음이해와 전수 

복음은 초기단계에서 벌써 팔레스티나 밖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데 다마스커스, 안티오키아, 에페소, 알렉산드리아 등지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이들 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 중심으로 복음이 전달되었는데, 이후 이들 지역의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달되었다. 그러나 특이한 상황은 팔레스티나와는 전혀 다른 이질 문화권인 헬레니즘 문화속에서의 복음의 전달이다.


우선은 이들 지역에서 통용되던 희랍말로 복음이 통역의 과정을 겪어야 했다. 아라메아 말에서 희랍말로 통역이 이루어진 과정에서 여러가지 미묘한 의미의 변화가 수반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여러 복음전달자가 여러 곳에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사람에 따라 다른 통역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희랍어로의 다양한 통역을 거쳐 문자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미묘한 통역상의 차이점이 생겨났고 이는 복음서에 그대로 전수되었다.


언어의 차이보다도 더욱 중요한 점은 다른 문화권에 알맞도록 용어와 함께 표현들이 변화된 점이다. 이미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도 이러한 상황변화에 따른 표현양식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질 문화권인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는 새로운 표현양식의 차이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문화권에서의 복음 수용과정에서 예수님의 언행은 또 한차례의 재해석과 재구성이 불가피해졌고 이는 공동체 삶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비록 이런 문화권에 살고는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덜 어려움을 겪었으나 희랍로마 문화속에서 살아온 이방인들에게는 팔레스티나의 문화속에서 형성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용하는데 여러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일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는 이들의 가치관, 의식구조, 행동양식에 저항이 되지 않는 범위속에서 복음의 정당성을 이들의 논리에 맞게 설명하여야만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걸맞는 신앙행위와 삶의 자세를 설명하여 납득시키려면 주님의 교훈적 말씀에 대한 전승이 강조될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전달된 복음이 초기 공동체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도록 전수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두번째의 단계인 이 전승단계가 최후의 전승단계인 복음사가들의 기록단계로 어떻게 전승되었는지는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중요 요점 

☞ 예수님은 생전에 제자들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이 세상에 전파하는 협조자로서 훈련하여 파견시키셨다. 뿐만 아니라 이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치유하는 현장실습까지 시키셨다. 
☞ 마태오 5장 1절 - 7장 9절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것이며, 마태오 8장 1절 - 9장 38절까지는 기적사화로써 제자들은 이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 그리고 10장 1절 - 42절까지는 파견이 기록되어 있다. 이 파견이 실습훈련이다. 이 과정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대신하는 자로 공인받고 구세주의 사명을 말씀과 행적으 
로 대행하는 이들이 되었다. 
☞ 제자들은 그리스도로 부터 파견을 받아 그분을 증언하는사람들이다. 
☞ 팔레스타인 초기공동체에는 다른 공동체들처럼 모든 일치를 증진시키는 요소와 다양성을 증진시키는 요소가 있다. 즉 공동의 목표와 다양한 그 추진방법들이다. 
☞ 예수님에 관한 구어전승은 단순히 예수님의 말마디가 그대로 반복되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변화에 맞게 설득력있는 논리체계를 가감한 변형의 과정에 따라 전파되고 전수되었다. 따라서 ”삶의 자리“는 복음서 전승에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복음사가들의 복음 기록

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네 개의 복음서가-4

지난번에는 팔레스티나와 헬레니즘 문화권 안에서 복음이 어떻게 구어전승으로 전달되어 내려왔는지를 보았다. 이번에는 이 구어전승이 어떤 과정으로 복음서로 기록 정착되는 지를 알아본다. 기록으로 남기까지에는 여러 단계가 있었다. 

1. 구전 자료 조각의 채집과 편집 

구어전승 기간 중에도 때때로 기록의 필요성은 느껴졌다. 특히 같은 주제에 대하여 여러 다른 표현 양식으로 된 구어전승이 있어 왔기에 이를 종합정리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여러 구전자료 조각을 채집한 것이 최종 기록이 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 종합 정리가 체계적으로나 연대순에 맞추어 예수님의 언행을 일관되게 정리하려는 시도도 아니었다. 오히려 어떻게하면 예수님의 언행을 당시 사람들에게 교훈적으로 서술하느냐에 더 주안점을 두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루가복음 11장 1절에서 13절까지는 5개의 다른 구전 조각자료를 채집하여 편집정리한 것이다. 

1. 루가 11장 1절 :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기록이다. 즉 주제의 제기이다. 기도하는 법이 주제이다. 제자들이 이 질문을 한 것은 어떤 때 어떤 장소였는데 이 기록은 시간과 장소에는 관심없이 주제만을 뽑아 왔다.
2절 - 4절 :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을 받고 ‘주의 기도’를 해답으로 제시한다. 
2. 루가 11장 5절 - 8절 : 이 기록은 다른 데에서 뽑아온 것이다. 따라서 앞절과는 전연 상관없어 보인다. 그 내용은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 부탁하는 비유의 말씀이다. 그 뜻은 기도는 당장 들어줄 수 없지만 계속 청하면 응답이 있으리라는 것을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3. 루가 11장 9절 - 10절: 이 귀절도 다른 곳에서 뽑아온 것인데 말씀 내용은 마태오 7:7-8과 같지만 상황은 전연 다르다. 이 귀절은 윗절에서 비유로 설명한 바를 직설법으로 풀이한 것으로 쉬지말고 항구하게 청하라는 뜻이다. 
4. 루가 11장 11절- 13절: 이 귀절도 다른 곳에서 뽑아온 것인데 같은 내용의 말씀이 마태오 7:9-11에 나오지만 주의 기도와는 상관없이 마태오에 삽입된 것이다. 이 귀절은 이 주제에 대한 결론 부분인데 자애로우신 아버지는 자녀들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내용이다.
 

하나의 예로 든 이 루가 복음서의 내용을 분석하고 구조를 살펴보면 내용은 일관되게 되어 있지만 구조상으로는 4개의 다른 이야기를 모아 재편집한 것이다. 이 네가지 다른 이야기는 물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이 네가지 말씀은 모두 다 다른 장소, 다른 시기에 하신 말씀을 짜깁기 한 것이다. 특이한 점은 루가 복음서가 이렇게 재구성된 이유는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당시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교리교수법의 원리를 따랐다는 점이다. 문제제기, 해답, 예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합적 결론으로 일관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이 작업은 루가 복음사가가 직접했는지 아니면 루가 복음사가가 기록하기 전에 루가 공동체의 무명의 다른 여러사람들이 기록하는데 참여했는지에 대하여는 판단키 힘들다는 사실이다.

같은 주제인 주의기도에 대한 마태오 복음서는 루가 복음서라는 다른 맥락을 따랐다. 즉 마태오 6장 5절에서 15절에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6절에서 13절까지로 기록을 하고 6장 1절에서 18절 전체가 재구성으로 되어있다. 마태오 복음서도 루가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교리교수법을 따라서 기록되어있다.

결론적으로 복음서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첫단계에서는 구어전승 자료를 모으고 재구성하여 재정리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복음서가 이렇게 자료의 채집과 재구성 단계에서 해당 공동체의 다양한 참여와 기여가 있었으리란 점이다. 

2. 복음서 기록이 늦어지게 된 배경 

지금까지 본 바에 의하면 기록으로 복음서가 완성되기까지는 오랜 기간과 여러 복잡한 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복음서는 단번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선 복음서를 이루는 내용들은 오랜기간 말로써 전해져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복음을 받아들인 일세대가 지나고 다음세대가 복음을 접하면서 말로써 전해진 내용들이 종합되어 기록으로 남길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복음서가 완성되기 까지에는 대략 40년이 걸린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에는 왜 기록 보전의 필요성이 심각하게 제기되지 않았던가?

1)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기록으로 남길 필요성을 전연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행적을 직접 볼 수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예수님이 지상을 떠나시고 난 직후에도 기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때에는 예수님의 언행을 직접 증언할 수 있는 사도들과 제자들이 살아있어서 직접 들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요한 요인은 셈족계통의 사람들의 문화는 죽은 기록보다는 살아있는 생생한 말로써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문화였기에 이 문화적 관행에 익숙한 이들에게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다.

2)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여러곳에 생기고 나서도 기록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이때에도 예수님을 실제 접했던 많은 이들이 살아있어서 예수님 언행에 관한 충분한 내용이 확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데 별반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었다.

3)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는 당대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터인데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불필요한 일이었다. 

3. 복음서를 기록으로 남겨야 할 절박성의 인식 

복음서를 기록으로 남길 필요성이 별반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복음서라는 기록이 나타나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다. 상황변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1) 우선 예수님 생전에 그분의 언행을 증언하여 줄 사도들과 제자들이 하나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게다가 공동체의 숫자는 증가하게 되고 예수님의 언행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의 숫자는 감소하게 되었다. 이에따라 예수님의 언행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문자로의 기록이었다.

2) 복음이 예루살렘 밖으로 또 팔레스티나 밖으로 퍼져 나가게 됨에 따라 증가한 공동체와 함께 많은 신도들이 늘어나게 되고 이들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따라서 단순한 증언으로만은 이 교육수요를 채울 수 없게되고 교육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절박성이 인식되었다. 복음서가 단순한 증언의 나열이 아니고 교육적인 측면을 고려하고 감안한 형태로 재구성되었던 이유도 이런 데 있었다.

3)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수님 당대를 살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리라는 믿음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게되었다. 특히 공동체의 2세와 3세들이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 싯점에 이르게 되자 예수님 재림에 대한 해석이 현실적으로 필요하게 되었고 이에따라 기록으로 남겨야 할 절박성이 인식되었다. 

4. 복음사가들의 작업 

“성서의 저자들은 교회를 위하여 처음에는 구전으로, 그리고 글로써 네 복음서를 기록했던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하여 네 사람이 제 나름대로 자기 목적을 위하여 최선의 방법을 썼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전해진 여러 사실 중에서 선택을 했고, 어떤 때는 이를 종합했으며, 어떤 때는 교회의 입장에서 진실을 설명했다. 그들은 전해받은 여러 자료들 중에서 믿는 이들의 상황과 자기들의 목적 달성에 적합한 자료들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 자료들을 목적과 상황에 맞추어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의 참 뜻도 그 말씀하신 곳과 순서에 따라 의미가 다르므로 해석할 때에는 어떤 사도는 같은 사실을 가지고 다른 방법이나 다른 배경에서 설명했는지 반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나 행적을 다른 말과 순서로 설명을 하고 문자 그대로 보다는 전체의 의미만을 설명했다 할지라도 그 이야기의 진리에는 변함이 없었기때문이었다.”(상기 교서 9항) 

복음사가들은 각기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구전 자료들을 풍부하게 확보하고 있었다. 이 자료들은 구전으로 전해온 자료, 구전 조각들을 모은 자료 상황에 따라 중요시 되어 전해진 다른 자료등이었다. 복음사가들은 이런 여러 자료들을 각자 목적에 맞게 재구성하였다. 이는 마치 각기 다른 크기와 색깔을 가진 묵주알들을 실에 꿰어 보기 좋은 묵주로 만드는 것과 같은 과정이었다. 복음사가들은 이토록 각기 다른 자료들을 각자 목적에 맞게 선택하고, 재배열하고, 편집구성하여 최종적으로 복음서를 완성하였다.

복음서를 자세히 분석하여 보면 각기 다른 저자들이 완성시킨 복음서들 사이에 상호연결과 보완, 또는 중복과 상호 참조한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편집과 재구성사이에 상호연관성이 있었다는 중요한 시사를 하여주는 점이다.

복음사가들은 자료를 모으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을 골라 독자적으로 각기 다른 복음서를 쓰고자 했던 것은 아닌듯하다. 즉 모든 자료들은 구어전승 자료들이었기에 크게는 한 근원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이렇게되니 복음사가들은 비록 차잇점은 가지고 있지만 서로 상충되지 않고 보완할 수 있는 통합적 기록을 고려치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복음사가들은 각기 전해진 자료들을 채택하고 해석하는데 자유로운 입장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작업은 개인적인 저술이 아니었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강한 공동체적 성격속에서 오랜동안 발전 계승되어 온 작업에 끝마무리를 기록하는 것이었기에 공동체적인 저술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복음사가들은 각기 공동체에 소속해 있었으며 공동체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복음메시지를 실제로 살고 있었던 이들이기도 하였다. 교회를 대신하여 복음전승을 기록으로 남기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오늘날 영감이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하느님의 영의 인도에 따라서 기록을 해나갔다. 이 성령의 인도는 공동체 안에서 권위를 지닌 대변인의 역활 속에서 확인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사가 개개인이 지녔던 개인적 특성이 무시되는 성령의 인도는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살아계셨던 주님의 가르침을 채택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각자 고유한 형태와 개성이 들어났던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교황청 성서위원회는 각 복음서의 다양한 차잇점, 특히 순서와 상황선정에 있어서의 차잇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기술에 있어서 마르꼬, 마태오, 루가 복음서의 기록은 예수님의 공생활 후반부에 기술되어 있으나 (마르꼬 11:15-14, 마태오 21:10-17, 루가 19:45-48) 요한 복음서에는 시작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다 (요한 2:13-22).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기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잃어버린 양에 관한 기록을 루가 복음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비난,“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구나”(루가 15-2)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으로 세가지 비유를 드시는 맥락 속에 기술하고있고 그 결론은 7절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하느님 자비에 대한 설명으로 기술되어 있다. 같은 잃어버린 양에 관한 기록이지만 마태오는 다른 맥락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태오 18:12-14) 즉 마태오는 이 비유의 말씀을 제자들, 특히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다. 루가는 같은 주제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비난에 대한 응답으로 쓰고있는데 반하여 마태오는 이 주제를 공동체 지도자들를 향하여 쓰고있는 점이 바로 이러한 상황 설정의 차잇점이다. 

5. 복음서의 형식과 상관관계 

문자의 형식으로 기록된 복음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특이한 문화적 산물로 그리스도를 추종하던 이들의 신앙을 명확하게 들어내는 성격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복음”은 이런 점에서 몇가지 문학유형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첫째로 초기 교회가르침의 핵심을 이루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 근거를 가진 이야기체로 낭송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둘째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공적 생활시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것으로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부활후에 부활사건에 비추어 취사선택한 형식을 취하였다.

세째로 마태오와 루가는 이 이야기의 앞 부분에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였는데 이 탄생이야기는 예수님이 어떤 상황하에서 어떻게 탄생하셨느냐는 관점보다는 예수님의 인간되심과 탄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데 촛점을 맞추었다. 네번째 복음서(요한)는 특이하게 “머릿말”의 형태로 예수님의 언행을 해석한 글을 앞부분에 기록하였다.

오늘날에 와서 성서학자들은 복음서가 예수님의 활동을 있었던 그대로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지 않다는데에 동의하고 있다. 오히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행했던 바를 입으로 전해내려오는 것 중에서 재구성하여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체험에 맞추어 증언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여러 다양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살아온 체험의 역사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른 연대기적 서술로 투영되었으며 이는 부분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예수님의 행적을 사실적으로 회상하는 형태로 기록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복음기록자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던 공동체의 상황과 관심을 염두에 두면서 복음내용을 구성하여 가는 가운데 자신들의 신학적 관점을 표현하였다.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네 복음서중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서가 마르꼬 복음서라는 데에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서가 신약성서의 첫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 복음서가 제일먼저 쓰여졌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이 복음서가 다른 복음서를 합친 것보다 초기 교회에 깊은 비중을 두고 쓰여졌다는 의미에서 네 복음서 중 가장 우월한 복음서라는 인식에서 첫째 자리에 둔 것이다.

마르꼬가 기록을 시작했을때 그는 주님의 핵심 가르침의 총체적 윤곽이 형성되어있는 싯점이었기에 비록 거칠기는 하나 이에따라 전체 골격을 세우고 여기에 예수님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살로 붙였다. 이렇게하여 마르꼬는 대략 65년에서 70년 사이에 자신의 복음서를 완성시켰다.

마르꼬 복음서가 쓰여진 후 대략 30년 사이에 편의상 마태오, 루가, 요한이라고 불리우는 다른 세사람이 마르꼬 복음서처럼 복음서를 써 나아갔다.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는 확실히 마르꼬 복음서를 참조하여 기록하였다. 마지막 복음서인 요한 복음서가 다른 복음서를 참조하였는지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 아직도 논란이 많다. 

6. 공관의 문제 

복음서 중 첫번째 의 세복음서 (마르꼬, 마태오, 루가)를 주의 깊게 읽어본 사람들은 이 세 복음서 사이에 놀랄만한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이 세 복음서를 장과 절을 따져 병렬로 배열하여 보면 이 세 복음서가 한 원전에서 파생되어 나왔거나 아니면 한 복음서를 참고하여 다른 두 복음서가 베꼈거나 참조했을 가능성을 쉽게 상정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이 세 복음서는 공통의 관점을 가졌다고 보아 공관복음서라고 부른다 세 복음서가 한 원전에서 파생되어 나왔을 개연성이 높은 것이 사실인데 그렇더라도 세 복음서 사이에는 또한 놀랄만한 상이점이 많다.

같은 주제를 세 복음서가 모두 다루고 있는 경우도 있고, 두 복음서는 다루고있는데 다른 한 복음서는 다루지 않고 있는 경우도 있고, 두 복음서는 전연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데도 한 복음서에는 다루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서술방법이나 상황설정과 배경이 전연 다른 경우도 있다. 결국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용상으로 많은 차잇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공관복음이다. 
바로 이점이 세 복음서의 공관의 문제이다. 즉 세 복음서 사이에는 공통점과 차잇점이 상존하고 있는데 공통점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으며 차잇점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

이를 설명하는 첫번째 시도로 제시된 것이 구어전승 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세 복음서는 한 구어전승에서 기록되었다는 설이다. 이 이론은 세 복음서의 차잇점을 설명해주는 데는 설득력이 있지만 말마디까지 같은 기록이 나타나고 있는 점은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어전승은 기록과정에서는 대단한 유연성을 띠게 되기에 차잇점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말로 전해온 것이 세 복음서가 기록에 모두 똑같은 문장으로 기록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태오 3:7-10과 루가 3:7-9 또한 마르꼬 2:10, 마태오 9:6 및 루가 5:24는 단어 한 자 틀리지 않은 같은 기록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한 구전을 기초로 세 복음서가 다른 장소 다른 시기에 써 내려왔다는 것을 상정하기는 힘들다.

설득력있는 이론은 기록원전의 이론이다. 이 이론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기록된 원전에서 세 복음서가 나왔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한층 발전하여 이원 출전설 (또는 쌍원설)로 정립되어 왔다 이 이론에 의하면 공관복음서는 두개의 기본 기록에서 파생되었다고 본다. 이 두 기본기록(출전기록)은 (1) 마르꼬에 의한 복음과 (2) 없어진 기록인 Q (Q는 독일어 Quelle의 머릿글자로 원전이란 뜻)이다. 여기서는 마르꼬 복음이 다른 두 복음서에 우선하여 쓰여졌다는 객관적 사실과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상정가능한 Q라는 원전이 있었으리라는 개연성을 전제로 이 이론은 성립된다.

우선 마르꼬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을 기록한 최초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성서학자들은 마태오와 루가의 복음서가 마르꼬의 복음서를 자료로하여 쓰여졌다고 믿게되었다. 그 몇가지 증거를 제시하면 첫째로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꼬 복음서가 다룬 공통의 주제를 다루고있다. 마태오 복음은 마르꼬 복음에 나온 거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는데 마르꼬 복음서의 660절 중에서 600절 가량을 그대로 담고있다. 또한 루가 복음서는 마르꼬 복음서의 절반 가량을 그대로 담고 있다. 두번째로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꼬복음서의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고 있는데 심지어는 많은 경우 베껴온 것처럼 똑같은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마태오는 51%의 내용을, 루가는 53%의 내용을 마르꼬에서 빌려쓰고 있다. 세째로 마태오와 루가는 일반적으로 마르꼬 복음서의 배열을 그대로 따라서 공통의 순서로 복음서를 쓰고있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볼때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꼬 복음을 원전으로 하여 복음서를 완성시켰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다.

그런데 마태오와 루가에는 마르꼬에는 없는 내용과 주제가 들어있다.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꼬말고도 다른 원전을 참조하였으리라는 시사를 하고 있는데 성서학자들은 이 다른 원전을 상정하여 편의상 Q라고 부르고 있다. 실제로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꼬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거의 같은 공통의 귀절을 250절이나 같이 사용하고 있다. 예컨데 마태오 3:7-10과 루가 3:7-9또는 마태오 11:25-27, 루가 10:21-22은 마르꼬에서 찾을 수 없는 구절인데 마태오와 루가에서는 같은 구절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마태오와 루가는 함께 앉아서 의논하며 복음서를 썼단 말인가? 연구결과 마태오 복음을 쓴 사람과 루가 복음을 쓴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마태오와 루가는 서로 참고하여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이런 여러 사실로 보아 마태오와 루가가 참고로 하였을, 마르꼬와는 다른 원전 Q가 상정되었다. 불행스럽게도 이 원전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오늘날에 와서 마태오와 루가가 참고했을 이 Q원전은 복원시킬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 Q원전에는 주로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Q가 작성된 것은 약 50년경으로 이는 당시 초대 교회의 신도들의 교육용‘교재’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Q원전이 작성된 시기는 바울로 사도가 데살로니카인에 보낸 첫째 편지를 쓴 무렵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Q원전은 주로 예수님의 말씀들을 수록한 것이였으며 마태오와 루가의 복음서에는 나오나 마르꼬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꼬와 Q원전을 참조하여 복음서를 썼다. 또한 이들 복음서들에는 마르꼬와 Q원전에는 포함되지 않은 독자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마태오에는 약 300절, 루가에는 약 600절이 있다. 
예를 들어보면 마태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탄생이야기 (1-2),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이야기 (14:23-31), 유다스의 최후(27:3-10), 빌라도가 손을 씻는 이야기(27:24-25) 등이 있고 루가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여행(9:51-19:44), 죄지은 여인 (7:36-50), 엠마오로 가던 두제자(24:13-35),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10:29-37), 돌아온 탕자(15:11-32), 바리사이파와 세리(18:9-14) 등등이다. 이들 자료는 각기 마태오와 루가에게서만 발견되는 독자적 자료들이다. 

7. 마르꼬 복음사가가 사용한 자료들 

마르꼬 복음서에 사용한 자료들을 형태별로 분류하여 보면 우선 선언적 말씀, 기적사화, 예수님 자신에 관한 이야기, 마르꼬의 삽입, 요약선언, 교훈적 말씀과 비유들이다.

선언적 말씀은 이야기 형태의 한부분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원칙적으로, 단언적으로 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형태는 간결하고 요약된 형태로 기술되었다. 이런 형태의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증언하는 기록이라기보다는 초기 공동체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말씀들이다. 예를 들면 마르꼬 복음 2:23-28에 나오는 사건이야기의 결론 부분에 기록된 말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는 않았습니다.”라는 말씀등이다.

기적 사화는 여러가지 기적에 관한 이야기들인데 주 논점은 기적자체에 있는 이야기들이다. 기적 사화를 서술하는데에는 일정한 틀이 있는데 (1) 상황설명 (2) 예수님의 행위 (3) 목격자들에 관한 서술로 구성되었거나 또는 (1) 질병에 관한 설명 (2) 믿음에 관한 서술 (3) 말씀 또는 행동으로의 예수님의 치유 (4) 즉각적 효력에 관한 서술 (5) 목격자의 반응으로 구성되어있다. 선언적 말씀과는 달리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일어난 것을 기술하고 있으며 선언적 말씀이 원칙적인 것에 비하여 기적사화는 생생한 현장기록의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선언적 말씀은 여러 과정을 거쳐 잘 다듬어진 형태이나 기적사화는 잘 다듬어지지 않은 형태의 생생한 구어전승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좋은 예로 마르꼬 1:23-28에 나오는 미친 사람에 대한 치유사화는 좋은 예이다.

예수님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기적 사화와는 달리 일정한 틀을 갖지않고 있으면서도 예수님 자신에 대한 생생한 증언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로 구어전승에서 전래된 것들로써 개인적 관점에서 예수님을 본 서술들이 많으며 풍부한 종합과 함께 생생한 점이 특징이다. 이 이야기들은 일견 통상적인 그리스도교의 전도와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나 실제로는 선언적 말씀을 끌어내는데 전초적인 기능을 하기도 한다. 예수님 자신에 관한 개인적 성격이 강한 내용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마르꼬가 사용한 예수님에 관한 개인적 기록들은 예수님과 함께 행동했던 이들, 특히 베드로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으나 확인할 수는 없다. 예로써 마르꼬 1:1-8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대표적 예이다.

마르꼬의 삽입구들은 마르꼬 또는 후계자의 손을 거쳐서 채집된 자료를 근거로 기록된 것으로써 전승적 자료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들이다. 물론 이를 구별하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다. 단지 삽입내용이나 형태를 보아 인위성이 높아보이는 것을 구별의 기준으로 삼는다. 마르꼬 3:13-19의 열두사도의 지명에 관한 이야기가 좋은 예이다.

요약선언은 말 그대로 주요 기록 말미에 그동안 기술된 것의 요약과 종합한 것을 선언문의 형태로 기술한 것이다. 마르고 1:14-15, 3:7-12, 6:6-13등은 중요한 요약선언이다. 이 외에도 주요기록이 끝나는 부분부분에 요약된 선언이 기록되어 있다.

교훈적 말씀과 비유들은 보통 이야기 서술과는 구별되는 것들로써 보통은 교훈적 내용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렇다고 이야기와 교훈적 말씀 및 비유들을 구별하기는 힘들다. 마르꼬에서 이러한 형태의 중요한 기록은 4장에 나오는 여러 비유말씀과 13장에 나오는 종말에 관한 말씀이다. 

복음사가들은 초기 그리스도공동체를 통하여 입으로 전해 내려온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취사선택하였고 이를 기초로 편집과정을 거쳐서 기록으로 남기었다. 또한 주로 마르꼬 복음과 없어진 Q 원전을 참조로 마태오와 루가 복음서를 완성해 나갔다. 이러한 이유로 복음서, 특히 공관복음서 간에는 공통점과 차잇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다음은 각개 복음서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중요 요점 

☞ 복음서는 구어전승 자료를 모으고 재구성하여 재정리를 통하여 기록되었으며 여기에는 해당 공동체의 다양한 참여와 기여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예수님 부활후 약 40년이 걸렸다. 
☞ 복음사가들은 구어전승자료라는 한 근원의 자료들을 소속 공동체와의 협의 아래 자유롭게 채택하고 해석하여 각자 고유한 형태와 개성이 드러나는 복음서들을 기록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복음사가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던 공동체의 상황과 관심을 염두에 두면서 복음내용을 구성하여 가는 가운데 자신들의 신학적 관점을 표현하였다. 
☞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꼬와 Q원전 (현재에는 남아있지 않음)을 참고하여 복음서를 썼다. 마르꼬복음서에 사용한 자료들은 선언적 말씀, 기적사화, 예수님 자신에 관한 이야기, 교훈적 말씀과 비유들이다. 선언적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원칙적으로, 단언적으로 하는 말씀으로써 초기 공동체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말씀들이다. 기적사화는 예수님의 기적에 관하여 생생한 현장기록의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예수님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님 자신에 대한 생생한 증언적 이야기들이다. 
☞ 참조자료가 다르기 때문에 마르꼬, 마태오, 루가의 공관복음서간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드러나고 있다.


마르꼬에 의한 복음서

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네 개의 복음서가-5

저자 

최근까지 마르꼬에 의한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진 마르꼬는 베드로의 동반자로서 베드로가 전한 예수님에 관한 가르침과 행적을 적은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이 복음서의 내재적 형태나 포함하고 있는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현실적으로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 요즈음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복음서의 저자는 단순히 가르침과 행적을 기록해 나갔다고 보기 보다는 창의적 저술을 할 수 있는 이로 판단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꼬의 복음서를 저술한 저자는 누구였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아마도 실제 저자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저자였을 것이고 이 복음서의 저자가 마르꼬라는 확언을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저술장소 

전승에 의하면 이 복음서는 로마에서 저술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은 전승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렇다고 이 주장을 번복시킬 수 있는 구체적 증거 또한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단지 이 복음서가 지닌 내재적 증거로 보아 이 복음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을 겨냥하여 쓰여졌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사실은 이 복음서의 저자가 유대인, 특히 팔레스티나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라면 이미 잘 알고 있을 법한 것들을 새롭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방인들을 상대로 썼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해준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 본다면 아마도 예수님 사후 30 - 40년 사이에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널리 퍼져있던 지역과, 예수님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이 갈릴래아 아라메아어로 통용되던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이 있는 지역에서 이 복음서가 쓰여졌다고 본다. 이 곳을, 팔레스티나의 해안지역, 예컨데 체사리아 지역을 상정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듯 하다. 마르꼬 복음서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주된 활동지역이 갈릴래아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곳은 예수님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러 상황을 감안한다면 갈릴래아 지역과 가까운 시리아 남쪽지역 어느곳에서 쓰여졌으리라는 가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술 시기 

서기 64년과 70년에는 대 사건이 일어난 때이다. 즉 64년 로마에서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최초로 대대적 박해속에서 처형을 받았고 또한 70년대에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파괴한 때이다. 여러 성서학자들은 마르꼬의 복음서가 쓰여진 때를 서기 65년에서 67년 사이로 보고 있는데, 70년의 로마 군대와의 싸움에 관한 이야기가 마르꼬 복음서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지 않고 있고 또 마르꼬 복음 13장의 이야기는 명확하지 않고 또 정확하게 이를 기술하고 있지 않다는 근거에서이다. 다른 가능한 일자는 65년에서 70년 사이로 보는 견해도 있고 근래에 와서는 70년 후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마르꼬 복음서의 골격 

서론 (1:1-13) 

I. 메시아에 관한 신비 (1:14 - 8:26) 
1. 예수님과 민중 (1:14 - 3:6) 
2. 예수님 자신 (3:7 - 6:6) 
3. 예수님과 제자들 (6:7 ; 8:26) 

대 전환 : 베드로의 고백 (8:27 - 30) 

II. 사람의 아들에 관한 신비 (8:31 - 16:8) 
1. 사람의 아들의 길 (8:31 - 16:8) 
2. 예루살렘의 심판 (11:1 - 13:37) 
3. 수난과 부활 (14:1 - 16:8) 

[ 부록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 (16:9 - 20) ] 

마르꼬 복음서의 부록 : 마르꼬 16:9 - 20 

마르꼬 16:9 - 20은 원 마르꼬 복음서에는 없었던 부분이다. 즉 이 부분이 마르꼬 본 복음서에 실제로 포함되었는지에 관하여는 의심의 여지가 많으며, 단지 이 부분은 교회의 공인으로 포함 된 것이다. 아마도 이 부분은 추후에 편집되었을 것이며 그 내용은 다른 복음서를 참고하여 작성되어 첨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긴 부록(16:9 - 20)은 다른 세 복음서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연대기적으로는 제 4복음서 이후에 이 긴 부록이 첨가되었어야 옳을 것이다. 이 부록의 신학적 입장은 실제로 본래 마르꼬 복음서와는 다른 것이며 실제로 이 부분은 네 복음서가 쓰여진 훨씬 후인 주후 150년 경에 정리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마 이 부분을 마르꼬 복음서 후에 붙여논 것은 마르꼬 16:8로 복음서가 완결된 것이 부자연스럽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부록(16:20 후반부)은 다른 필사본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 것인데, 긴 부록 뒷편에 붙여 결론적 마무리로 사용되었다. 아마 이 짧은 부록은 4세기경 에집트 지역에서 쓰여졌던 것을 따온 것 같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마르꼬 복음서의 원전은 마르꼬 16:8로 끝난 것으로 되어있다. 

마르꼬 복음서의 해설 

(1) 베드로의 고백 : 대 전환점 

지난 50여년간 마르꼬 복음서에 대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다양한 연구 결론들이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가지 모든 학자들이 일치된 결론을 내린 것은 마르꼬 8:27-30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이 마르꼬 복음서의 핵심 분기점이며 이 고백이 대 전환점이라는 사실이다. 즉 베드로의 고백으로 마르꼬 복음의 전반부가 결론적으로 완결되며 동시에 후반부가 시작된다고 본다. 이는 어떻게 보면 마르꼬 복음의 전반부는 베드로의 고백을 결론적으로 내기위한 준비 정지 단계이며, 후반부는 베드로의 고백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베드로의 고백은 마르꼬 복음서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시키는 고리인 샘이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우선적으로 베드로의 고백을 간단히 분석해 보자. 이 분석은 마르꼬 복음서가 무엇을 중심주제로 보고 있으며 왜 그렇게 보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르꼬 복음서가 지닌 신학 및 사목적 관심사가 무엇이었던가를 설명하기도 한다. 베드로의 고백은 마르꼬 복음서를 이해하는 열쇠이기에 왜 마르꼬 복음서는 이러한 편집과정을 거쳐서 작성되었으며 또 무엇을 중요시하고자 하였는가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필립보의 체사리아(가이사리아)로 가는 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 (8:27)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언자 중의 한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8:28). 예수님은 다시 질문하신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메시아 이십니다)”라고 대답한다 (8:29).

이 과정을 보면 베드로의 고백은 두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즉 첫째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모호하고 막연한 대답이 3가지 대답형태로 이루어져 있고 둘째로는 베드로가 명확하게 결론을 내린 부분이다. “바로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2) 마르꼬 복음서의 전반부 (마르꼬 1:1 - 8:26) 

베드로의 고백을 깃점으로 마르꼬 복음서의 전반부를 역으로 더듬어 가 보기로 한다. 

베싸이다 소경의 치유 (마르꼬 8:22 - 26) 

베드로의 고백 직전에 마르꼬는 베싸이다 소경의 치유를 배열하였다. 이 치유 이야기는 대단히 특별한 기적 이야기이다. (마태오와 루가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이 기적 사화는 신약성서를 통틀어 보았을때 예수님께서 두단계의 과정을 통하여 치유한 유일한 경유이다. 첫번째는 손을 얹으시자 이 소경은 희미하게 밖에는 보지를 못한다(8:24). 두번째는 다시 손을 대자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된다. 마르꼬는 의도적으로 이 기적 사화를 베드로의 고백 직전에 배열하였다. 베드로의 고백이 두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듯이 이 치유도 두 단계로 되어 있음은 대단한 의도가 개입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두 경우 모두 처음에는 희미하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희미한 답변이 나온것은 첫번 치유과정에서 소경이 희미하게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현상이다. 베드로의 고백으로 모든것이 명확해지듯이 두번째 단계에서 소경은 명확히 보게 된다. 이 두 이야기는 서로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베드로가 두번째 단계에서 스승 예수님의 신원을 명확히 보게 된 것은 바로 소경이 두번째 단계에서 사물을 명확히 볼 수 있었듯이, 예수님이 베드로의 눈을 뜨게 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소경의 치유 다음에 베드로의 고백을 배열한 것은 육체적 치유와 마찬가지로 영신적으로 치유를 통한 깨달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함이었다. 

두번째 빵의 기적 (마르꼬 8:1 - 10) 

베싸이다 소경의 치유는 두번째 빵의 기적 마지막 부분에 삽입되어 있다. 두번째 빵의 기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첫번째 빵의 기적이라는 전단계의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정하게 한다. 

첫번째 빵의 기적 (마르꼬 6:30 - 44) 

첫번째와 두번째의 빵의 기적은 중복된 빵의 기적인데, 첫번째 빵의 기적은 두번째 빵의 기적 처럼 귀먹은 반 벙어리를 고쳐주는 것으로 완결된다 (7:31 - 37) 

[종합] 

지금까지 보아온 것을 정리해 보면, 베드로의 고백을 끌어내기 위한 배열로 두가지 병렬 배열의 구성을 하였다. 즉 시작은 빵의 기적이고 결과는 치유 - 귀먹은 반 벙어리와 베싸이다 소경의 치유 - 로 되어있다. 
마르꼬가 이러한 배열 방법을 쓴 것은 어떤 연유였을까 ? 아마도 두번째 빵의 기적과 베싸이다의 소경의 치유사이에 누룩에 관한 말씀에서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누룩에 관한 말씀 (마르꼬 8:14 - 21) 

두번째 빵의 기적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호수를 건너 여행을 하시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의 잘못된 영향으로 상징화된 누룩에 대하여 경고로 말씀을 하신다 (8:15). 그러나 제자들은 누룩에 대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여행중에 빵을 가지고 오지 못한 것을 넌지시 귀뜸한 것으로 오해한다 (8:16). 이를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러한 몰이해를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면서 나무라신다. “너희는 눈이 있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면서도 알아듣지 못하느냐?” (이사야 6:9 - 10) 
이 이사야서의 인용은 마르꼬가 귀머거리와 소경의 치유를 이렇게 배열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보면 육체적인 귀머거리와 소경의 치유에 관한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귀머거리와 소경 상태의 치유에 촛점이 맞추어 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빵의 기적에 관한 장절 ( 마르꼬 6:30 - 8:26) 

두개의 병렬로 배열된 빵에 관한 이야기는 빵의 기적으로 시작되어 치유로 끝나게 되는데 이를 “빵의 기적에 관한 장절”로 부를 수 있다.

이 장절은 마르꼬 복음서를 이해 하는데 관건을 쥐고 있는 것으로 좀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명확한 것은, 마르꼬나 이 복음서를 읽는 독자, 심지어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이 빵의 기적은 주님이 행하신 최후의 만찬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거행하던 성체성사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이해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한편,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이 사건들을 실제로 예수님과 함께 했던 이들은 이를 어떤 징표로 받아 들였던가 하는 점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이들은 아마도 이들 사건을 성체성사와 연결시켜서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사건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 ?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위하여 예수님께서 보이신 이 징표들을 구약성서에서 고찰해 보기로 한다. 신명기 8:3을 보면 “이는 사람이 빵 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귀절은 마태오 4:4 루가 4:4에 그대로 인용된 것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잘 알려진 귀절이었다.

성서에서 “빵”은 단순히 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 더나아가서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로 하는 모든것, 또한 요한이 이야기 하고 있는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이 삶은 한분이신 분, 영원하신 분, 즉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명기 8:3은 이렇게 해석되어야 한다. 즉 “사람은 물질적인 빵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이루는 ‘빵’에 의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통하여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은 하느님의 말씀, 즉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빵이 사람을 살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부터 나오는 계시를 나누는 분이셨으며, 그렇기에 그 분은 계시의 전달자이셨다.

예수님은 이 계시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워 온다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마르꼬 1:14-15). 동시에 그분의 사명은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데 있었으며 바로 그 분 자신이 하느님 나라임을 알려준 것이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바로 그 분 자신이 사람들의 귀와 (마르꼬 7:31 - 37) 사람들의 눈을 (마르꼬 8:23 - 26) 열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알도록 한 것이다. 

[전체 결론] 

마르꼬 복음서의 전반부는 “이 분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끌어 내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전반부의 핵심 주제에 대한 전개 과정에서 빵의 기적에 관한 기술 (마르꼬 6:30-8:26)은 이 해답을 이끌어 내는 마지막 단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질문은 복음서 시작에 최초로 나타나고 있는데 가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를 본 사람들이 한 말에서 찾아낼 수 있다. 즉 “이게 웬 일이냐 ? 권위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저 분이 더러운 영들에게 지시하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꼬 1:27)

이와 같은 맥락에서 풍랑을 가라 앉히시는 예수님을 보고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데 바람과 호수조차 이분에게 순종할까” (마르꼬 4:41)라는 귀절에서도 똑 같은 주제의 질문이 던져진다. 이렇게 보면 마르꼬 복음의 전반부 즉 1:1 - 8:26까지의 주제는 “이 분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끌어 내는 부분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첫번째 해답은 더러운 영이 해주고 있는데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입니다.” (마르꼬 1:24) 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마르꼬 5:7에도 더러운 영은 같은 해답을 주고 있는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읍니까 ?”라고 기술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예수님으로 부터 치유를 받은 반 벙어리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본 기록이 있으며 (마르꼬 7:37),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서 치유를 한 후에 (마르꼬 8:23)도 같은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공적인 고백으로 볼 수 없고 오직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공적인 고백으로 간주되기에 마르꼬 8:27 - 30에 나타난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란 선언이 바로 마르꼬 복음서의 전반부 주제인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해답으로 볼 수 있다. 

(3) 마르꼬 복음서의 후반부 (마르꼬 8:31 - 16:8) 

수난에 대한 예고 (마르꼬 8:31 ; 9:31 ; 10:32-34) 

베드로의 고백 직후에 예수님은 이 고백으로 확실하게 드러난 사실이 불러일으킬 결과에 대하여 또렷하게 언급하시기 시작한다. 바로 그것은 수난으로 첫번째 예고(8:31), 두번째 예고(9:31) 그리고 세번째 예고(10:32-34)로 이어진다. 이 예고를 통하여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님 자신에게 가져올 결과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받을 것임에 틀림없고 ...”(8:31).

이 예고에도 복음서 전반부에 우리가 고찰해 본 바 있는 점진적 과정이 유사성을 가지고 드러나 있다. 즉 이 예고는 횟수가 거듭되면서 명확해 진다. 특별히 세번째 예고에서는 대단히 구체성을 띄게 된다 (10:32 - 34).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것은 예수님의 예고 속에 십자가 형에 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단지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이었다. 

제자됨에 대한 훈계 (마르꼬 8:34 - 38 ; 9:33이하 ; 10:35-44) 

세번에 걸친 수난예고 사이에 베드로의 고백이 불러 일으킬 결과가 제자들에게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예수님이 설명한 부분을 마르꼬는 삽입시켜 놓았다. 즉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8:34).

예수님 자신의 수난에 관한 예고에는 십자가형이란 말이 나타나고 있지 않음을 보았는데 제자들에게 한 말씀에는 십자가형이란 말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고 의아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후자에 나타난 십자가형이란 말이 실제로 예수님이 쓰셨던 말이 었나 하는 점이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즉 “... 자기를 버리고 자신의 짐을 지고 따라야 한다.” (마태오 11:30, 루가 11:46, 갈라디아 6:5). 이것은 아마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십자가형을 받고 죽었던 베드로와 기타 제자들의 죽음을 알고 있었기에 마르꼬 복음서에는 “짐”대신 “십자가”로 바꾸었을 것이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마르꼬 10:35 - 45) 

마르꼬 복음서 8:34 이후 예수님은 계속하여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청을 하는데, “선생님이 영광스럽게 되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 오른편에, 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라고 한다 (10:37) 마르꼬는 이 두 아들들이 (아마도 모든 제자들이 그러 했으리라!) 예수님의 훈계와 부르심이 무엇이었는지를 전연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이래서 마르꼬는 10:35 - 45을 기술한 후에 바르티매오라는 소경의 이야기를 곁들여 대칭적 기술을 하고 있다. 이 두 대칭적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똑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주기 바랍니까 ?” (10:36과 10:51). 이는 마르꼬가 우리로 하여금 이 두가지 대칭되는 이야기의 뜻을 알아듣도록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소경 바르티매오 (마르꼬 10:46 - 52) 

세차례에 걸친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이와 상응한 제자됨에 대한 교훈 후에 소경에 대한 치유 이야기가 잇따라 나오는데, 이는 전반부의 베싸이다 소경에 대한 치유와 대비시키는 것과 같은 배열이다. 단지 베싸이다 소경에 대한 치유와는 달리 바르티매오의 치유는 절차 없는 간단한 과정을 통한 치유이다. 왜 그랬을까 ?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 치유를 받을 간절한 마음을 애닮게 호소한다. 아마도 그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훈계로 믿음을 강하게 가졌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또 한번 우리는 단순히 육체적인 치유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즉, 이 이야기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멈추어 서시어 ‘힘을 내시오, 어서 일어나시오, 그분이 당신을 부르십니다’ ” (10:49). 이 이야기는 부르심, 즉 제자에로의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이다. 실제로 이 이야기의 결말을 바르티매오가 눈을 뜬 다음에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 길을 나섰다는 말은 마르꼬 11:1에 나오듯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의미하며 이 길은 바로 십자가를 향한 길이었다. 이 이야기를 보면 국외자였던 바르티매오는 그 어느 기존 제자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제자됨의 훈계를 실제로 행하였던 이었다. 중요한 점은 이 국외자 (“길가에 앉아 있었던”)는 열두 제자중 하나가 아니었지만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점이다. 위에서 설명한 바 있거니와 마르꼬는 바르티매오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을 대비시키고자 했으며,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추종하겠다고 나섰으나 예수님의 말씀과 의도를 못 알아들은 반면 길가에 앉아 있었던 국외자 바르티매오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것이다.

( 어떤 성서학자는 마르꼬 8:22-26의 베싸이다의 소경이야기로 부터 10:46-52의 바르티매오 소경이야기 까지를 한 장절로 보는 이도 있다. 이들은 이 부분을 마르꼬 복음의 중심 장절로 간주하고 있으며 제자됨에 대한 가장 핵심 부분으로 결론짓고 있기도 하다. ) 

백인대장의 고백 (마르꼬 15:39) 

베싸이다 소경의 치유가 또 다른 소경의 치유로 이어지듯이 베드로의 고백 또한 다른 고백으로 이어진다. 또한 두번째 소경의 치유가 첫번에 비하여 보다 쉽게 이루어 지듯이 두번째의 고백 또한 베드로의 고백보다도 더 완벽하게 이루어 진다. “예수를 마주보고 곁에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 분이 그렇게 (외치면서) 숨지시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하고 말했다” (15:39).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책임지고 수행했던 로마 군인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을 그 때 그 자리에서 완벽하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아심이 있을 수 있다. 루가 복음 23:47을 보면 이 사람이 그 순간에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정말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 었다.” 우리가 여기서 잊어서는 아니되는 것은 마르꼬가 이 복음서를 쓴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였다는 사실이다. 이 40여년 세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수 많은 사람들, 즉 이 백인대장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선포되었고 또 받아들여졌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들은 수 많은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아마 이렇게 쉽게 고백했을 것이다.

“참으로 이 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셨구나 !” 이렇게 본다면 백인 대장의 고백은 바로 복음을 받아들인 수 많은 이방인들의 고백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르꼬 15:39의 “참으로 이 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말은 마르꼬 복음의 시작 1:1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라는 말을 상기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이 귀절은 마르꼬 복음서의 전체를 이루는 기본 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종합 결론을 내려본다. 마르꼬 복음서의 후반부 (8:31 - 16:8)는 바로 베드로의 고백이 불러온 여러 결과들을 서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를 단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베드로의 고백은 어떤 결과를 불러 왔는가 ?”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르꼬 복음서를 세 귀절의 단문으로 표현한다면 

“이 분은 누구신가 ?” 
“선생님은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렇다면 이는 어떤 의미와 결과를 가져왔는가 ?”
 

마르꼬 복음서에 나타난 주요 주제 

마르꼬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의 삶의 핵심 주제는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과 이에 대한 제자들의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꼬는 이 주제가 가장 중요했기에 복음서 한 복판에 이를 넣어 복음서 전체 흐름의 대 전환점으로 삼은 것이다. 

누구를 향하여 쓰여진 복음서인가 ? 

마르꼬의 복음서를 유심히 살펴보면 복음서의 반가량이 “수난과 죽음”에 할애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복음서는 16장으로 되어있는데 8장 이하는 전부 “수난과 죽음”에 관한 부분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복음서의 앞 부분 즉 3:6에 까지 이러한 관점에서 표현되고 있다 “바리사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즉시 헤로데 도당들과 함께 예수에 대한 모의를 하여 그분을 없애 버리기로 하였다 ”(3:6).

이렇게 보면 이 복음서는 확실히 “수난과 죽음”에 촛점을 맞춘것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이 복음서가 누구를 향하여 쓰여졌는지를 알 수 있게 하며 아마도 그들은 이 주제와 관련된 중요한 체험을 했던 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상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 확실히 그렇다. 마르꼬는 계속해서 “박해”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예컨데 4:17, 10:30, 또한 13:11등이 이와 관련된 언급들이다. 이러한 것은 바로 마르꼬 복음서가 겨냥한 사람들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오랜동안 초창기 교회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긴 박해가 있었는데 바로 그것은 주후 64년의 로마의 대 화재 이후 가해진 네로의 박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울 수 있는 가정은 로마에 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하여 대략 64년 부터 70년에 걸쳐 이 복음서가 쓰여졌던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내용은 마태오와 루가에는 나타나나 마르꼬에는 명확히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마르꼬 복음서가 갈릴래아에 유별난 관심을 표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예컨데 16:7) 이 박해는 로마가 아니라 팔레스티나라는 주장도 꽤나 설득력을 지니는 것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또한 근래에 이르러 예루살렘 멸망(70년)전 몇년 동안 갈릴래아에 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거의 파괴될 정도의 박해가 있었다는 증거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수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이 복음서는 갈릴래아에 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향하여 쓰여졌으리라는 점이 더욱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갈릴래아인들은 누구였나 ?

마르꼬의 복음서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향하여 쓰여졌다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면 이제 우리는 갈릴래아에 촛점을 맞출 필요가 있게 된다. 이미 우리는 갈릴래아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주로 열두제자에 관한 고찰을 해 본다. 열두제자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인데 이들은 “주님,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라는 말을 했던 이들이다 (루가 9:54). 이들 중 하나는 열혈당원이라는 시몬이었다 (루가 6:15, 마태오 10:4). 시몬은 한때 열혈당원이었는데, 열혈당이란 그 당시 팔레스티나의 혁명운동을 하던 조직이었다. (어떤이들은 열혈당이 실제 조직화된 것은 유대전쟁, 즉 66-70년 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른 제자는 이름이 이스가리옷이었는데 그 뜻은 ‘칼솜씨가 뛰어난 전사’라는 뜻이다. 그 당시 갈릴래아 출신들은 태어나면서 부터 골칫덩이로 인식되어 졌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아마 예루살렘의 빠스카 축제기간동안 갈릴래아인들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갈릴래아인들은 비록 광신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기대를 갖고 추종하는 지도자에 대하여는 특별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또한 틀림없이 권력과 영광에 대한 집착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러한 이들에게 수난과 고통, 십자가라는 복음적 말씀들을 받아들이라고 했을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전형적 갈릴래아인들인 제자들이 매력을 느꼈던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었을 것이며 또한 예수님의 영광이었을 것이다. 이 권능은 기적적인 치유와 부활로 예수님에게 나타났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르꼬의 복음서는 명확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우선 마르꼬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공표하는 것을 꺼리신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아마 이것은 예수님이 기적을 너무 과시하게 되면 이 갈릴래아인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권능에 지나치게 집착하리라는 점을 유념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부활로 예수님의 영광이 너무 강조되면 이들은 영광에만 집착하리라는 것을 유념했기에 무덤에 관한 간단한 서술과 함께 부활사건을 단순히 “그분은 부활하시었다”(16:6)로 간략히 기록했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이다.

(원래 마르꼬 복음서는 16:8로 끝나고 그 이후는 후대에 붙인 부록인데 그 내용은 다른 복음서를 참고로 작성되었다.)

갈릴래아 사람들이 위에서 설명한 대로 기적과 부활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을 잘알고 있던 마르꼬는 이와 관련된 기술은 가급적 축소하여 기술하고 그 대신 이들이 대면키 원치 않던 수난과 죽음을 더 강조하게 된 것이다. 

상황의 중요성을 강조 

마르꼬는 성서기술에 있어서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사람들의 관점을 대단히 중요시 하였다. 이 복음서를 접하는 이들은 이 복음서가 수난과 죽음에 대한 기술 못지 않게 기쁜 소식에 대한 기술이 강조되어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이 복음서를 기술한 저자의 의도를 오해한데서 비롯된다. 마르꼬는 그 당시의 사정과 복음서를 접할 당시 사람들의 처지를 고려했을때, 수난과 죽음에 대한 강조가 더 필요하다는 사목적 판단을 했던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의 죽음과 수난에 당시 사람들이 더욱 관심을 가졌었으리라고 판단했다면 마르꼬는 수난과 죽음에 관해서는 짧게 서술하고 부활에 관한 부분을 더욱 강조하여 기술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다른 관점에서 본 복음서 

이쯤되면 이제는 마르꼬의 복음서 전체를 다른 관점과 각도에서 고찰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미 우리는 이 복음서의 전반부가 “이 분은 누구신가?”라는 의문에 답을 하는 과정으로 기술되었음을 보았다. 또한 이 답은 점진적인 과정을 밟아 점차로 명확해지는 순서를 택하고 있음도 보았다. 이 점진적 과정은 여러 사건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은 치유를 베풀면서도 자신의 신원을 감추고자 했으며 사람들에게 치유의 기적을 널리 알리지 말것을 계속 당부하셨다. 이것을 요즈음에 와서는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예수님이 이런 태도를 보이신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원을 명확히 파악하기 전에 성급한 결론의 결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염려하셨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반부의 결론이 가까워 옴에 따라 빵의 기적이 기술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예수님 은 자신이 사람들의 귀와 눈을 열어 “이 분은 누구신가 ?”라는 해답을 깨닫도록 하는 계시의 전달자, 동시에 하느님 자신이심을 점진적으로 알도록 기술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마르꼬가 택했던 이유는 그 당시의 제자들의 눈과 귀를 열어 이를 깨닫도록 하는데 예수님께서 얼마나 어려움을 겪으셨는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데는 두번이나 눈에 손을 얹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또 하나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반 벙어리와 소경의 치유에 관한 서술을 함에 있어서 구체적인 사람을 거명치 않고 일반적인 모호한 서술을 했다는 점이다. 즉 “사람들이 귀먹은 반 벙어리 한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7:32) “사람들이 소경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 (8:22) “사람들이”, “한 사람을”이란 표현은 구체성이 없는 표현으로 일반적인 서술이다. 아마도 마르꼬는 이런 일반적인 표현을 씀으로써 독자들이나 우리들을 암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우리를 여기에 대입시킨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우리의 눈과 귀, 입이 열리지 않아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배대오의 두 아들, 즉 예수님의 제자였던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도 우리의 이야기 일 수가 있다. 오늘날에 와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우리도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 보다는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우리가 이러고 있는 사이에 제삼자일 수 있는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우리보다 먼저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그렇다면 오늘날에 있어서 소경 바르티매오는 누구일까?

예수님에 관하여 권능과 영광만을 생각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한 면만을 보고 있는 것이며 다른 한면인 수난과 십자가를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이해했기에 마르꼬는 제자됨을 수난과 십자가의 측면에서 이해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마르꼬는 이를 극명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십자가 사건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즉 백인대장은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했기에 “예수를 마주 보고 곁에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이 그렇게 숨지시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하고 말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15:39),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으며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아무런 관심과 지식도 없던 이방인 백인대장이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은, 예수님이 처참하게 십자가 형을 받고 숨을 거두는 현장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꼬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즉 예수님의 제자됨은 십자가를 제대로 받아들일 때야 비로소 진정으로 이루어 진다는 사실을 증언코자 한 것이다. 

메시아의 비밀 

마르꼬 복음서의 핵심을 이루는 가장 큰 의문은 소위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표현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며 권능을 가진 치유자이며 스승이셨던 예수님은 권능이 드러날 때마다 제자들이나 사람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하고 계신다. 이미 마르꼬 복음서 시작부분에서 예수님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즉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쳐주신후 치유의 기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것을 “엄히 경고하였다” (1:43).

또한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영광스런 변모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엄명하셨다” (9:9) 
예수님의 많은 가르침이 사람들에게는 물론 제자들에게 까지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예 4:10 - 13), 복음서의 중간부분에 이러한 현상을 여러형태로 마르꼬는 기록을 남겼다. 예수님이 하느님이 보내신 구세주이심을 깨달은 베드로도 이 사실을 즉시 모든이에게 말하지 말 것을 지시받고 있었다 (8:27 - 30).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런 태도를 보이신 것은 이런 사실을 공개적으로 널리 알림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결과를 아시고 이를 경계하신 것이라고 판단된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명을 이루어 가는데 피할 수 없는 것이 수난과 죽음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메시아의 비밀”은 예수님의 신원을 이해하는데 역설적 측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가지신 권능과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결과는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제자들에게 까지도 이해키 어려운 부분이다. 


[중요 요점] 

☞ 마르꼬 복음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을 겨냥하여 쓰여졌다. 저술시기는 서기 65년과 67년 사이, 로마의 대 박해시기 동안이라고 전해진다. 
☞ 마르꼬 8:27-30 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이 마르꼬 복음서의 핵심 분기점이며 이 고백이 대전환점이다. 즉 마르꼬 복음의 전반부는 베드로의 고백을 결론적으로 내기 위한 준비 정지 단계이며, 후반부는 베드로의 고백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거져오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 전반부는 베싸이다 소경의 치유, 두번째 빵의 기적, 첫번째 빵의 기적, 누룩에 관한 말씀등의 사건을 통하여 사람에게는 육체적 치유와 함께 영적치유가 필요하며, 특히 이 영적인 치유는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빵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우리도 예수님께서 치유해주셔야 영적으로 눈을 뜨고 베드로처럼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음을 서술하고 있다. 
☞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의 선언은 마르꼬 복음서 전반부 주제인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해답으로 볼 수 있다. 
☞ 마르꼬 복음서 후반부는 베드로의 고백이 불러온 여러 결과들을 서술한 것이다. 그것은 수난에 대한 예고, 제자됨에 대한 훈계, 여기에 대한 제자들의 태도와 소경 바르티매오의 따름 그리고 백인대장의 고백 등이다. 
☞ 마르꼬 복음서 전체를 세 구절의 단문으로 표현한다면 : 
” 이분은 누구신가 “ 
”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 
” 그렇다면 이는 어떤 의미와 결과를 가져왔는가? “라고 할 수 있다. 
☞ 마르꼬 복음서는 갈릴래아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쓰여졌을 것이다. 갈릴래아사람들이 기적과 부활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르꼬는 이와 관련된 부분을 가급적 축소하여 기술하고 그대신 그들이 대면키 원치 않던 수난과 죽음을 더 강조하였다. 
☞ 마르꼬사가는 예수의 제자됨은 십자가를 제대로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서 진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증언코자 하였다.



마태오에 의한 복음서

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네 개의 복음서가-6

1. 개 요 

저 자 

마태오에 의한 복음서는 이 복음서의 저자가 마태오라는 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또한 이 복음서의 저자가 누구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2세기말경부터 사도 마태오가 이 복음서의 저자라는 전승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즉 골지방(지금의 프랑스) 리옹의 주교였던 이레네오는 “마태오가 히브리어로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를 썼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이 기록은 두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둘째로 이 복음서는 히브리어(또는 아라메아어)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 복음서의 저자는 희랍어를 알고 있던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였을 것이며 그는 다른 많은 사람과 같이 예수님을 히브리어 성서에 나타난 구세주인 예언자로서, 성서의 예언을 성취시킨 분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직접 자신의 전도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나(참조: 마태오 10:5-6 ; 15:24), 모든 유대인들이 그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전도가 실패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사건 이후 새로운 (아니면 참된?) 유대인 공동체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마태 28:19). 이렇게 마태오란 이름으로 통칭되는 이 인물은 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며 아마도 랍비의 교육을 받은 것같이 보여진다. 아마도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율사였을 것이다(13:51-52).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예수님께 순종하던 초기 교회시기의 사람으로, 예수님은 그들과 항상 함께 계시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들과 함께 하시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28:20이하). 

저술 장소 

마태오라고 명명된 이 복음서의 저자는 희랍어를 쓰는 지역에 살았었고 유대인 출신으로 희랍어를 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향하여 복음서를 썼을 것이다. 이 복음서는 아마도 팔레스티나에서 저술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 복음서의 기록이 시리아 지역이 아닐까 하는 심증을 갖고 있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더 구체적으로 시리아 지역의 안티오키아를 지목하기도 하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몇가지 증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복음서는 안티오키아에서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2세기경 안티오키아 주교였던 이냐시오가 증언하고 있다. 

저술 시기 

마태오 복음 22:7의 “임금은 진노하여 자기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라는 귀절이 흔히 알려진대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마태오 복음서는 예루살렘이 파괴된 주후 70년 이후에 쓰여졌음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주후 100년까지로 잡는 것은 무리가 있는데 위에 언급했던 대로 이냐시오 주교(110-115)의 언급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마태오 복음서는 대략 85년에서 90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복음서의 골격 

많은 학자들은 이 복음서가 5개의 책으로 엮어졌다고 보는데 각 책은 마태오 특유의 강론이 들어있다. 즉 산상설교(5:1-7:29), 파견설교(10:1-42), 비유말씀(13:1-52), 공동체 설교(18:1-35), 그리고 종말설교(24:1-25:46)가 들어있다. 이 다섯가지 중심강론의 전반부에 서론 도입 부분이 있고(1:1-2:23), 마지막 부분에 결말 부분이 있다(26:1-28:20).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를 서술한 도입 부분과 결말부분인 수난과 부활 부분을 단순한 도입과 결말로 격하시키는 위의 골격에 동의하고 있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이 부분들이 5개의 책자로 골격을 갖춘 이 구분방법에 통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모세오경을 따라 5개의 책자로 마태오가 저술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견에 대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11장과 12장 또한 13장에 나오는 비유 말씀은 의심할 바 없이 이런 구분에 딱 들어 맞지만, 나머지는 이런 구분에 적합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시될 수도 있다. 8장과 9장의 기적사화는 산상설교와 파견설교에 연관된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여하간 이 복음서를 5개의 책자로 구분하는데 대하여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구분에 따라 이 복음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골격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개 요 
서 론 (1:1 - 2:23) 
Ⅰ. 예수에 관한 유대인들의 거부 (3:1 - 13:58) 
전도 준비 (3:1-4:11) 
말씀과 행적에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 (4:12-9:34) 
제자 파견 (9:35-10:42) 
선택 : 예수님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 (11:1-13:58) 
Ⅱ. 전환부분 : 누룩에 관한 것 (14:1 - 16:12) 
Ⅲ. 교회론적 부분 (16:13 - 20:16) 
Ⅳ. 예루살렘입성과 예루살렘에서의 언행 (20:17 - 25:46) 
Ⅴ. 수난과 부활 (26:1 - 28:20) 

2. 마태오 복음서의 해설 

마태오 복음서의 열쇠 : 28:16-20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일러주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올렸다. 그러나 몇몇은 의심을 품었다. 예수께서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것을 모두 다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시오. 보시오. 나는 세상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오늘날 마태오 복음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바로 이 마지막 귀절이 마태오 복음서를 푸는 열쇠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로 이 귀절은 마태오가 지녔던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을 축약해 놓은 것이며, 둘째로 이 귀절은 이복음서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생각과 사상들을 마지막으로 종합적으로 정리 요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서를 이해하려면 이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마태오의 그리스도론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습니다”란 말은 바로 마태오가 지녔던 그리스도론의 핵심을 표현한 것이다. 광야에서의 세번째 유혹에서 드러났듯이(4:8-10), 예수님은 높은 산에서 권세와 영광에 대한 이야기를 악마와 하게 되는데 이때의 권세와 영광은 오직 지상의 왕국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마태오의 귀절은 지상에서의 권세와 영광 뿐아니라 하늘에 대한 것, 즉 모든 것에 대한 권능을 말하고 있다. 이 권능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으로 28장 18절에 나타난 이 어귀는 이미 11장 27절에 기록된 “나의 아버지께서는 내게 모든 것을 넘겨 주셨습니다” 라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한다.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셨다. 이럼으로써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 즉 구원계획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분이셨다(6:10). 물론 28:18에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단어를 구체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이 귀절을 쓴 것은 틀림없이 다니엘서 7:14에서 영향을 받아 쓴 것이다.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지고 인종과 말이 다른 뭇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었다. 그의 주권은 스러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갈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이 다니엘서의 ’그‘는 바로 앞의 귀절 13절에 표현된 대로 ’사람 모습을 한 이‘로서 이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28:18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광스러운 사람의 아들이다. 

마태오의 교회론 

아버지로부터 받은 권능으로 사람의 아들은 열한명의 제자를 파견하여 모든 이들을 제자로 만들도록 하였다. 따라서 마태오에게 교회는 제자를 만드는 제자들의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는 평등성이 구현된 공동체로서 같은 제자라는 평등성위에 설립된 공동체이다. 18장의 공동체 설교를 보면 이 공동체는 형제애가 핵심이며 24:45-51을 보면 같은 동료 하인배(종)들을 돌보는 ‘종’이 되어야 하는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구약에 드러난 계약의 공동체처럼 그들 가운데에서나 하느님 앞에서나 평등한 이들의 공동체이다. 이렇게 교회를 파악하면서 마태오가 교회안의 권위를 소홀히 하거나 과소평가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마태오는 베드로의 역할과 열두사도들의 역할을 마르꼬보다도 오히려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야심에 의한 권위의 남용에 대하여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교회내에서의 여러 다른 직분에 따른 권위의 행사는 교회 공동체구성원들의 기본적인 평등성보다는 부차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권위나 구조는 이 기본적인 평등성이 훼손당하면서까지 강조되어서는 아니된다는 뜻이다. 오늘날 교회에 관한 많은 가르침이나 이론들이 복음서가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제자들은 파견되어 모든 이들을 사람의 아들 공동체, 즉 교회의 구성원으로 만드는데 이는 첫번째로 세례를 통하여 우선 이루어진다. 세례를 통하여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특정지파에 속하여 할례를 받는 것과 같은 제약을 깨뜨리는 새로운 절차를 도입한 것을 뜻한다. 이 구약의 제약은 심지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10:6, 15:24 또한 8:5-13)으로까지 확대시켜져서 깨뜨려진다.

두번째로 모든 이들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만드는 것은 세례와 함께 예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것으로 이루어진다.“내가 명한 모든 것”이란 표현은 산상설교(5:1-7:29)에서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면 이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이며 이 가르침이 구약의 여러 법들과 상충될지라도 따라야 한다고 명확히 단언하신다. “...옛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은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5:21-22)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산상설교는 마태오가 기록한 5가지 예수님의 강론 중 첫번째 것으로 다른 4가지 강론도 모두 “내가 명한 모든 것을”이라는 데에 해당된다.

이쯤되면 우리는 마태오 복음서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들이 그리스도와 교회라는 점을 이해하면서도 왜 사랑의 계명과 같은 다른 핵심적인 주제들이 강조되지 않고 있나하는 의아심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마태오가 이런 서술방법을 채택했던 것은 당시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있던 구약의 계약개념을 우선 교정시킬 필요에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부각시키고자 했을 것이며 이 대핵심주제에서 다른 중요한 핵심주제들을 다루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계약개념은 어떤 것이었나? 

계약에 대한 관점 

위에서 다룬 마태오의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은 구약의 계약이라는 관점에서도 합당한 논리를 갖추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 많은 성서학자들은 “나는 세상종말까지 어느날이나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란 말씀을 1:23의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라는 뜻)이란 단어로 계약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영광스러운 사람의 아들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 구약의 계약을 갱신하신 분이며 이 새로운 계약은 “세상종말까지”“우리와 함께 하시는”형태로 지속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은 관점은 18:20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둘이나 셋이 내이름으로 모여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습니다.”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마태오의 기록에는 마르꼬의 “예수님과 제자들이”란 표현을 “제자들과 함께 예수께서”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쓰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구약의 계약개념을 염두에 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약의 계약은 두 당사자를 상정한다. 즉 하느님과 계약의 백성이다. 구약에서는 이 두 당사자의 관계를 이렇게 설정한다. 즉 하느님은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은 하느님께 경배하고 복종하는 관계로 설정한다. 마태오 복음서의 28:16-20은 이와같은 관점을 명확히 가지고 있는데 첫째로는 하느님의 다스리심, 즉 왕권은 이제 구체적으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구현될 것이고(그리스도론), 둘째로 구약의 하느님 백성은 신약에 있어서는 사람의 아들의 백성, 즉 교회로 대치된다.(교회론)

마태오 복음서의 28:16-20에 나타난 결론들은 이와같은 결론들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기술된 수많은 귀절과 사상들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고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열쇠로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더 구체적으로 이 결론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에 연관되어 있는 가를 보기로한다. 

산 

예수님이 제자로 삼았던 이들은 갈릴래아 출신들이었다. 부활하신 후에도 갈릴래아로 가시겠다고 하셨는데(26:32), 사실 갈릴래아는 ‘이방인의 땅’(4:15)이라고까지 불리웠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에는 ‘산’이란 장소가 자주 등장한다. 또 제자들을 데리고 흔히 산으로 가셨다. 마태오 복음서에서의 ‘산’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장소를 지칭하기보다는 예수님 또는 하느님이 특별한 일을 하시는 곳으로 해석된다. 이런 관점에서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산은 대단히 중요한 계기를 만드는 때와 사건의 장이다.

우선 유혹사화에서 우리는 산을 만난다(4:8-10). 같은 유혹사화라도 루가복음서에는 산이란 표현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루까4:5-7) 이 산은 마태오복음의 결론부분(28:16-20)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추후에 상술한다). 둘째로 산상설교에서도 산이 등장한다(5:1). 같은 설교를 기록한 루가복음서와는 대조를 이룬다(루가6:17). 이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말씀의 권능을 지니신 분으로 묘사된다. “내가 명한 모든 것을”이라는 복음서 결론말씀은 대단한 권위를 지닌 말씀이다(추후에 상술한다). 세째로 거룩한 변모에서도 산이 나타난다(17:1). ‘사람의 아들’이란 그리스도론적 칭호가 쓰여지는 것도 이곳이다(17:9). 수난의 때를 맞을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이 거룩한 변모는 첫번째 수난 예고 직후에 일어난다(16:21). 이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은 복음서 결론 부분에 나타날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위와 영광에 대한 짧은 체험을 하게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를 어여삐 여겼노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17:5)라는 하늘에서의 소리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습니다”(28:18)라고 스스로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또한 “그의 말을 들어라”는 하늘에서의 소리는 바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란 결론부분의 예수님의 말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마지막 결론의 말씀은 거룩한 변모를 완결시키는 것으로 부활때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사건이 부활로써 구체화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시기 전(14:22-33) 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는데(14:23) 이는 “세상 종말까지 ...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28-20)란 말씀과 연관이 있으며 또한 15:29에 기록된 산도 5:1에 나타난 말씀의 권능을 지니신 메시아에 관한 언급과 연관이 있다.

자, 이렇게보면 산에서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복음서의 결론부분의 말씀과 깊은 연관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며 이러한 뜻에서 마태오 복음서에 나타난 산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혹 사화 (4:1-11) 

부활하신 예수께서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에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습니다’라고 단언하신 것은 유혹사화에서 “악마는 다시 예수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그분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내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4:8-9)라는 기록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이 두 이야기는 모두 산에서 권능과 영광을 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아마도 이 유혹사화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독자는 이 특별한 이야기에 관하여 의문이 있을 것이다. 복음사가는 이 사막에서의 유혹에 관한 사건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의 전도사업 마지막 단계에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면 - 몇몇 성서학자의 주장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 서술의 주어는 일인칭으로 되었을 것이다. 즉 “나는 영에 의해 광야로 인도되어...” 란 식으로 기술되었을 것이다. 또한 실제로 유혹이 악마와의 대면 상태에서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문도 생길 수 있다. 유혹을 당한다는 사실은 실제로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수 있다. 우선 이러한 여러 의문들은 잠시 덮어두고 유혹과 관련된 복음서의 다른 경우를 알아보자. 왜냐하면 복음서에는 유사한 유혹에 관한 기록이 여기저기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16장 1절에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시험을 받는데 이때 시험이란 단어는 유혹이란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은 예수께 하늘에서 내리는 표징을 자기들에게 보여달라고 청한다.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에게도 시험을 당하시는데 특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베드로에게 어떤 의미에서 유혹을 당하신다(16:23, 4:10 참조).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에 대하여 “내 뒤로 물러나라, 사탄아!”라고까지 질타하신다. 또한 예수님은 많은 군중으로부터도 유혹을 당하는데 특히 십자가의 죽음을 지켜본 이들은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네 자신이나 구하려므나,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므나.”라고 말한다(27:40). 이 말은 첫번째 유혹에서 악마가 쓴 말과 같은 말투다. 이외에도 여러곳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혹당하신 것을 알아볼 수 있다.

유혹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볼 때 광야에서의 유혹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3:13-17). 이 세례기록에는 하늘에서 소리가 울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란 귀절이 나온다. 이 귀절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4:1)와 시편에 나오는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2:7)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바로 종인 메시아를 말하고 있다. 다른 말로 종합하면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종인 메시아로써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신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유혹에 와서는, 이와같은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선택은 도전을 받는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4:3-6)이란 말로 시작되는 두가지 유혹은 바로 이를 뜻한다. 즉 종인 메시아로서 자신의 사명을 이루어가겠다는 예수님의 선택은 시험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유혹과 시험은 한번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즉 광야에서의 40일간의 단식중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때까지 예수님의 공생활 중 계속하여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이 유혹과 시험은 단지 악마로부터 온 것일 뿐만아니라,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제자들, 베드로 및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장에 있던 군중들로부터도 온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유혹과 시험을 당하시게 되는데,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나듯이 “...그분은 죄 이외에는 모든 일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다(히브 4:15).”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쓴 저자는 이 말 속에 단지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유혹사화에 나타난 예수님이 당하신 유혹은 예수님의 공생활 중 계속되었던 유혹을 종합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유혹사화를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부분에 삽입한 마태오의 의도는, 이 유혹자가 예수님을 유혹했던 강력한 힘으로 누구든지 유혹할 수 있다는 경고의 뜻을 담으려고 한 것이다. 특히 이 유혹을 예수님의 세례이후에 배열한 것은 세례받은 모든 이들에게 이와같은 유혹과 시험이 있으리라는 것을 암시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님의 세례시에 하늘로부터 들린 “아들”이란 말과 유혹사화에서 나오는 “아들”이란 말은 바로 이 연관을 이야기한 것이며 또한 우리도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이기에 이 모든 것이 우리와 연관이 있다. 유혹사화에서 우리는 또한 예수님과 이스라엘 및 모세를 연결시켜서 생각할 수 있는데 “40”이라는 숫자가 이를 의미한다. 또한 예수님이 유혹에 대한 거부의 응답을 신명기에서 인용한 것을 보아도 그렇다. 신명기 8:3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낼 때 하느님께서 시련을 주시는데 이때 만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고 굶기다가 너희가 일찌기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8:3). 예수님은 이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첫번째 유혹을 물리치신다. 또한 두번째 유혹은 신명기의 6:16을 인용하여 물리치시는데 “마싸아에서 처럼 너희 하느님 야훼를 시험하지 못한다”(6:16). 세번째 유혹은 6장 13절을 인용하시는데 “너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맹세할 일이 있으면 그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여라”(6:13).

광야에서의 단식후 예수님이 당하시는 세가지 유혹은 바로 예수님이 종인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시고 받아들이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 세가지 유혹은 한마디로 “권능에 대한” 유혹이다. 종인 메시아의 신분을 예수님이 받아들이신 것은 이 권능을 사용하여 자신의 일을 쉽게 이루시지 않으리라는 결단의 표시이다. 예수님 주위에 있던 반대자들, 제자들 심지어는 친척들까지도 예수님이 이와같은 결단보다는 쉽게 메시아 노릇을 하실 것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더욱 효율적이고 빠르게 특히 좀더 고통을 덜 받는 방법으로 자신의 사명을 이루시기를 바랬던 것이다.

왜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잘 이루기 위하여 자기 선전을 하지 않으셨던가? 왜 예수님은 산헤드린이나 로마인과의 관계에서 좀 더 부드럽고 유연한 태도를 취하시지 않으셨을까?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았다면 예수님께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예수님의 목표는 명확한 것이었는데 이 목표를 이루는 수단과 방법은 좀더 유연하고 타협적이었을 수는 없었던가? 예수님은 공생활 중 자신이 가진 권능을 사용하기를 원하는 유혹을 주위에서 끊임없이 받으셨다. 아버지께로 부터 받은 이 권능을 사용하여 목표를 이룬다면 그에게 더 좋을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유혹을 받으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권능의 사용은 결국 권력게임에 빠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최초의 유혹시에 단 한마디로 단호하게 “아니다”란 응답을 하신 것이다. 이런 지름길을 거부할 때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종말이 죽음으로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셨다. 예수님은 더디고 오랜 어려운 길을 택하셨다. 예수님은 이 길이 “자신을 낯추시어,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는” 길임을 아셨기 때문이다(필립 2:8). 예수님은 이 거절로 악마들의 도움이나 악마들의 손을 잡고 쉽게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것을 택하시지 않으셨다. 다른 말로 한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시기 위하여 권력을 주고받는 타협적인 자세를 취하시지 않으셨고 이와같은 자세를 단호히 거부하신 것이다. 즉 4:6에 나오듯이 악마는 자기자신이 이러한 권능을 받았으니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말을 하는데 예수님은 이를 거부한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권력과 영광을 갖지 않은 종의 신분으로 이루고자 하셨고 이에 따른 죽음을 감수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종의 신분으로 메시아가 되시어 죽음을 감수하신 이 분을 죽음으로부터 들어올리셨다(사도행전 2:32참조).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로는 이를 이렇게 기술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지극히 높이시어 어느 이름보다도 빼어난 이름을 그분에게 내리셨도다”(필립 2:9). 마태오복음서 28:18에는 이렇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나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습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신의 권능을 확인하고 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악마가 제안한 유혹을 거절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스도처럼, 교회처럼 

지금까지 살펴본 예수님에 관한 기록은 단지 예수님에 관한 기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마태오는 이것이 우리들에게까지 적용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선은 당시의 공동체를 향하여 기록으로 남겼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28:16-20에 나타난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은 상호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으며 그 다음으로 세례와 유혹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세례로 새로와진 공동체의 백성이 당할 유혹에 관한 이야기도 상정되었다. 예컨대 예수님의 세례에 관한 귀절 중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니....”(3:16)라는 기록은 “백성이 요르단강에서 나와...”(여호수아 4:19)와 같은 내용이다(올라오다. 나와라는 단어는 anebe란 단어로 같은 단어이다). 이 귀절은 출애굽을 연상시킨다. 유혹사화에서 예수님이 40일동안 광야에서 지낸 것은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와 유혹은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기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을 한 백성, 즉 하느님의 백성, 교회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권력의 유혹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하셨다면 교회 또한 권력의 유혹에 대하여 같이 “아니다”라고 해야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한 공생활 중에 권력과 권능을 이용하여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으셨듯이, 교회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 자신의 사명을 이루어가는 과정 속에서 여러가지 이익과 특권과 특혜를 이용하여야 하겠다는 끊임없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교회가 이러한 유혹에 빠질 때마다 - 흔히는 유혹에 빠진 것이 아니라고 자기변명을 늘어놓지만 - 보편교회뿐 아니라 지역교회는 예수님께서 “아니다”라고 거절하셨던 것을 “예”라고 받아들인 셈이 된다. 이런 경우 흔히 교회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큰 일을 이루었다고 사후 합리화를 해 대곤하지만 교회의 긴 역사를 보면 이는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었음을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짧은 안목으로 교회가 이득을 얻었다 할지라도 이것은 단지 “외교적” 게임으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수님이 종이신 메시아, 섬기는 메시아이셨듯이 교회도 종인 교회, 섬기는 교회여야 한다. 교회는 과격하다싶을 정도로 과감하게 아버지께 순명하여야 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 죽을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아니다”라고 하셨을 일을 “예”라고 한다면 교회는 자신의 존재와 사명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본질적인 문제이다. 많은 경우 교회의 권위는 본질적인 것에는 거역하면서도 신자들에게는 강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교회는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타하셨듯이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마태오 16:23). 교회가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섬기는 교회, 종인 교회가 아니라, 외교적 잔재주나 권력놀음에 빠진 교회가 될 때 이미 교회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교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강조하는 것은 어떤 특정개인이나 단체에 손가락질을 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교회안에는 권력놀음에 허약하게 빠질 수 있는 사람들이나 단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한두사람이나 몇몇 단체가 이러한 유혹에 빠져 전체교회가 마치 유혹에 빠진 것같은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특별히 교황청 기구에서 일하는 이들, 추기경, 주교, 본당신부, 수도회 장상, 평신도 단체의 장들은 교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이 이러한 유혹에 빠질때 전체교회가 함께 유혹에 빠진 것과 같은 인상을 줄 수 있다. 또한 누가 알겠는가? 교구청에 있는 이들이나, 수도회 장상의 비서와 같이 실질적 실무를 담당하는 이들이 이와같은 유혹에 빠져 자신들을 위한 자체 “왕국”(하느님의 왕국이 아니라)을 건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믿음 

이와같은 문제는 궁극적으로 신앙에 관한 문제이다. 교회를 신뢰하고 교회가 자랄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얄팍한 외교적 기술이나 세속의 힘을 믿고 있는지가 문제이다. 교회가 종이신 메시아처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고 자신의 사명을 이루어갈 때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필립보 2:8)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 교회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마태오 복음서의 핵심 결론부분에서 “몇몇은 의심을 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28:17). 즉 믿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의심했던 이들 - 믿음이 약한 사람들 

그렇다면 의심하는 이들은 누구였으며 믿음이 없던 이들은 누구였던가? 이 귀절에서 제자들이 의심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의심이었다(루가24:37, 요한 6:19참조). 이들은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만 보았으며 어떤 “영”으로 생각하고 믿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계속하여 나무라셨던 “믿음이 약한 사람들아!”라는 말씀을 연상시킨다(6:30, 8:26, 16:8). 이 말씀은 제자들을 겨냥한 것이었고 또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향한 나무램이기도 하였다(14:31). 특별히 14:31에는 “믿음이 약한 사람, 왜 의심을 하느냐?”라는 표현을 쓰고있는데 이때 쓴 의심이란 단어(distazein)는 신약성서에서 계속 쓰여지고 있는 단어이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란 말은 제자들을 항상 나무라는 말로 쓰여졌다. 마태오는 이 복음서에서 바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하여 나무라고 있다. “믿음이 약한”이란 말은 마태오가 복음서를 저술할 때 믿음이 부족한 이들을 지칭하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왔다. 이때 공동체는 위기에 처해있었고 불안과 두려움에 싸여 믿음을 잃어가고 있었다(6:25-30참조). 사실 마태오 공동체는 믿음이 약한 공동체였으며 이때 이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마태오 자신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공동체가 이러한 위기에 빠지게 된데 대하여 마태오 자신은 책임을 느끼고 있었으며 예수님이 베드로를 나무라시는 것처럼 자기자신을 나무라는 뜻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한 믿음 

그렇다면 “믿음이 약하다”는 말은 실제로 어떤 상황이었을까? 믿음이 약해지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믿음 약한 사람들”이란 귀절은 이 복음서에 네 번이나 나타나는데 그 중 두 번은 제자들이 배 위에 있을 때였다. 마태오는 배를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첫번째 경우를 보면 (8:23-27) 여기서 우리는 폭풍을 맞고있는 교회를 연상할 수 있다. 즉 현실적으로 태풍이나 요동, 또는 지진을 맞아 크게 어려움을 당하고 흔들리는 교회를 연상할 수 있다. 두번째 경우는 (14:22-33 특히 14:28-30)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를 것을 요구받고 있는데 베드로가 믿음이 약하여 따르기는 커녕 예수님의 걸림돌이 되어 버린 경우이다. 

바위 혹은 장애물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라야 할 베드로가 믿음을 버리고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복음서에서 가장 나중에 기록된 “믿음이 약한 사람”을 고찰하여 본다. 이 말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지방에서 베드로의 고백이 있기 직전에 나온다(16:8).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첫번째 수난예고 앞에 나온다(16:21-23). 베드로의 고백에 관한 기록에는 복음서에 2번밖에 나타나지 않는 교회(ekklesia)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난다.(두번째는 18:17). 이 베드로의 고백에서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하자 예수님은 “그대는 바위입니다. 나는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겠습니다”(16:18)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나 종인 메시아로서 자신이 받으실 수난을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시자 같은 베드로가 이 말씀을 거부했을때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신다. “내 뒤를 물러가라, 사탄아!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16:23). 이래서 베드로는 “바위”라고 불리고 또 동시에 “걸림돌”(skandalon)즉 “스캔달”로 불리운다.(“걸려넘어진다”는 뜻으로 사용된 이 단어는 예수님의 공동체 설교에도 (18장) 계속 쓰여진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바위”로 불리운 것은 어떤 때인가?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고백했을 때이다. 이때에도 예수님의 방식대로 되시는 메시아를 말하는 것이지 베드로가 원하는 메시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우리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때 우리가 바라는 메시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셨던 메시아를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 중심의, 우리 이익을 위한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고백할 수 있다. 우리의 고백은 그렇다면 어떠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고 메시아이시다 라고 큰 소리로, 또는 장엄하게 선언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교회가, 즉 우리모두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메시아이시다 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바로 종이신 메시아를 고백하는 것이며 이 고백은 우리, 즉 교회가 종인 교회, 섬기는 교회로 살면서 예수님을 ‘따라’사는 것을 말한다. 즉 우리의 고백은 삶으로 드러난다. 이 때에 ‘베드로’와 ‘교회’는 진정한 바위가 된다. 즉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갈 때 주춧돌의 역할을 하는 바위가 된다.

그러나 만약 ‘베드로’가, 교회가 종이신 메시아를 따라 살때 당할 수 있는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세속의 권력과 이권, 특권을 추구하는 권력놀음에 빠지거나 교묘한 자기보신적인 외교적 놀음에 빠진다면, 이때 교회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처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16:28). 권위나 제도나 구조자체가 최종 목표처럼 되어 이를 위하여는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위나 제도, 구조를 보존코자 할 때, 그럼으로써 인간을 희생으로 삼을때, 특별히 “보잘것없는 이들”을 희생으로 삼아서까지 권위와 제도와 구조를 보존하려고 할 때 바로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께서 교회에 성령의 보살피심을 약속했는데 그렇다면 교회는 항상 정당한가 라는 반문이 생길 수 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서 교회를 보살피시리라는 약속을 틀림없이 하셨다. 그러나 이 약속은 교회가 성령의 부추기심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약속이다.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살아갈 때 예수님의 약속은 교회자신의 약속 파기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고서야 성령께 순종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바르티매오처럼 공식적인 제자들보다 먼저 성령께 순종한 수많은 이들이 나타났음도 알 수 있다. 루가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70명의 제자들을 임명하고 파견하였음을 알 수 잇다(루가 10:1). 예수님의 제자는 단지 열두명만이 아니었다. 이때 파견된 70명의 제자들은 종이신 메시아를 따라 종이신 교회, 섬기는 교회를 대표했으며 제자들의 사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던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제자는 이미 제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교회의 권위 

그렇다면 교회의 권위는 무엇인가? 이는 특별한 것으로 바로 예수님께서 열두제자에게 하신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말씀은 제베대오의 아들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백성들의 통치자는 엄하게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억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이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인자도 봉사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봉사하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20:26-28).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 종인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셨고 제자들, 특히 권위를 가진 이들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함을 천명하신다. 섬기는 교회의 권위는 보다 잘 섬기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렇게 잘 섬길 때 인정되는 권위이다. 

무력한 교회 

그렇다면 섬기는 교회는 아무런 입장에 서지 않고 단지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내버려두고 세상의 일을 거부만 하는 교회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종인 메시아셨으나 침묵만 하신 분은 아니셨다. 그분은 갈릴래아의 최고 지배자였고 권력을 한 손에 쥔 헤로데를 여우라고 공언했으며 (루까13:32), 대 제사장의 심문을 받을때 “왜 나에게 물어봅니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시오”(요한 18:21).라고 받아쳤으며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면서 “당신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겁니까 ?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해서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습니까?”(요한 8:24) 또 “위로부터 당신에게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내게 대해서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19:11)라고 반문한다. 예수님은 세상의 권력이 받아들이건 아니 받아들이건 할 말을 하셨고 자신의 말을 침묵시키고자 하는 세상의 권력이나 종교의 권력을 받아들이지 않는 독립적인 입장에 섰던 분이셨다. 그분이 침묵을 지켰던 것은 외부의 압력을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침묵을 지키기로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은 의미심장한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섬기는 종인 교회는 종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침묵하기도 하고 아니하기도 해야한다.

둘째로 교회는 세상사람들이 빠지는 권력 놀음에 발을 디뎌서는 아니되고 이 권력 놀음에 빠진 이들처럼 보여서도 아니되고, 행동해서는 아니된다. 교회가 가진 진정한 힘은 바로 예언자들이 지녔던 힘과 같은 힘이다. 예언자들은 실제로 아무런 힘도 없었고 힘있는 배경에 의지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졌던 힘은 그 당시 왕들이 가졌던 힘을 능가하는 유일한 힘이었다. 그들이 지녔던 탁월한 도덕적 힘은 그들의 말이 오늘날에까지 들리게 하는 힘이다. 그들이 이토록 강한 힘을 지녔던 것은 왕들과의 힘 겨루기와 불의한 왕들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말과 입장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교회가 지녀야 할 힘은 세상의 권력에서 오는 힘이 아니라 예언적이고도 도덕적인 힘이어야 한다. 교회가 이러한 힘을 지니려면 이와 같은 힘겨루기와 권력의 게임에 참여하기를 거절해야 한다. 교회가 때때로 강력하고도 예언적인 힘을 갖게되는 것은 권력이나 특권에 집착하거나 적당한 타협을 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을 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과 명확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때로는 용감하게, 때로는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인간의 선익에 헌신하면서 침묵을 강요하는 모든 세력을 거부하고 당연히 할말을 해야 한다(사도행전 4:20, 31) 

가르침...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모든 것을’ 

교회가 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가르치는 것은 바로 모든 민족이 제자가 되도록 하는 일이다. 마태오에서는 산상설교(5:1-7:29)가 그 가르침의 핵심인데 이 산상설교는 5가지 설교말씀 중 첫번째 나오는 설교로, “내가 명한 모든 것”이란 말씀은 이 다섯가지 설교 말씀 전부를 가르친다. 이 다섯가지 설교말씀의 끝 부분에는 항상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셨을 때”라는 어귀를 삽입시켜 놓았다 (7:28 ; 11:1 ; 13:53 ; 14:1 ; 26:1)

이 다섯가지 설교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각기 다른 측면을 가르치고 있다 : 

1. 산상 설교 ( 5 - 7장) : 하느님 나라의 헌장 
2. 파견 선고 ( 10장) : 하느님 나라의 확장 
3. 비유 말씀 ( 13장) :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특성 
4. 공동체 설교 ( 18장) : 하느님 나라의 내적 모습 
5. 종말 설교 (24 - 25장) : 하느님 나라의 완성 

이제 이 각기 다른 설교말씀을 묵상해 본다. 

1) 산상 설교 (5:1-7:29) 

산상설교는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을 향하여 하신 첫번째 설교인데, 하느님 나라의 제자들에 관한 감동적인 선언을 담고 있다. 산상설교는 모든 이들에게 대단히 어려운 요구를 담고 있기에 이를 해석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게 한다. 어떤 이들은 이 설교를 율법으로까지 해석하고 있는데 이렇게 어려운 요구를 모든 이들이 빠짐없이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산상설교의 형식이나 정신이나 그 역동성으로 보아 엄밀한 의미에서 법으로 보기는 어렵고 지향해야 할 방향, 나아가서 목표로 삼아야할 명령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런 뜻에서 산상설교의 내용은 규정이나 규약을 모아놓은 것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방향과 지향해야할 목표를 제시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같은 급진적인 산상설교의 성격은 다가온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관련지어 볼 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4:17).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다”는 선포는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인간 삶의 차원에서 볼 때는, 즉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드디어, 그리고 결정적인 모습으로 모든 인간에게 무제한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사랑, 연민, 용서로 다가오심이며 이로 인하여 인간들 또한 무제한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민, 용서로 같은 인간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엄청난 도전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산상설교는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급진적 요구를 하게되는 근거를 가진다.

전통적으로 알려진 네가지 행복 요건(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슬퍼하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을 인간의 내면적이고 영성적인 것으로 기술하면서 이에 덧붙여 다른 네가지 행복 요건(온유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을 열거함으로써 마태오는 선포된 하느님 나라에 응답하기를 갈망하는 이들이 실천해야 할 덕목과 태도를 8가지로 간추려 놓았다. 이런 이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가 되어 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5:13-16). 이들 제자들은 누구보다도 의로움에 넘쳐서(5:20) 이제는 더 이상 “옛사람들에게 말한”(5:21) 것만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 즉 “내가 명한 모든 것”에 따라 살아야 함을 제시한다. 이러한 말씀 후에 제자들이 “의로움이 넘치는” 삶을 선행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여러가지 예로 설명한다. 즉 자선에 대한 가르침, 기도에 대한 가르침, 단식에 대한 가르침(6:1-18), 또한 재물에 대한 태도(6:19-34), 이웃과의 관계(7,1-12)에 대한 가르침이 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 짓는 사람들의 비유를 통하여 들은 말씀을 올바로 행할 것을 결론으로 내리고 있다(7:24-27). 

2) 파견 설교 (10:1-42) 

이 설교 부분의 결론 또한 마태오 복음서의 마지막 귀절에 축약되어 있다. (28:16-20).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 “모든 민족을 내 제자로 삼아”라는 말씀은 “여러분은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로도 들어가지 마시오, 오히려 이스라엘 가문의 잃은 양들에게로 가시오”(10:5-6)란 말씀의 한시성과 제한성을 깬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말씀하시면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가문의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습니다.’(15:24)라고 하셨지만 이 제한성을 때때로 넘어서신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백부장의 종을 낫게 한 일(8:5-13), 가나안 부인의 딸을 낫게 한 일(15:21-28) 등이다.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마태오 복음서의 마지막 귀절에 축약된 이 말씀으로 10:5-6이나 15:24에 말씀하신 좁고 제한적인 관점을 과감히 털어버리는 놀라운 새 지평을 여신다. 즉 지금까지의 이런 좁고 제한적인 관점이 전 세상적 사명을 궁극적으로 이루기 위하여 필요했던 한시적인 단계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에 이 파견설교를 삽입함으로써 복음사가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제자됨과 선교에 대한 관점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또한 5장에서부터 7장에 이르는 산상설교는 예수님, 말씀에 권위를 가지신 메시아에 대한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잇따라 8장과 9장에 10가지의 기적사화를 주로 나열함으로써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행적에 있어서는 권능을 가지신 메시아로 묘사한다. 이 여러 장에 있어서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이해하고 있는지도 함께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지난 후 복음서는 제자들의 파견을 기록해 놓았다. 특히 10장은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설교하는” 임무를 부여하여 파견하시는데 이 때에 제자들은 산상설교를 가르치고 설교하도록 사명을 받는다. 뿐만아니라 8장과 9장에 기록된 것과 마찬가지로 치유의 임무도 받는다. 마태오가 이해한 제자됨과 선교는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셨던 구원의 활동을 말과 행위로 확장하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비유 말씀 (13:1-52) 

이 비유의 말씀 부분은 하늘 나라의 “신비”또는 “비밀”, 다른 말로 하면 하늘 나라의 성격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비유는 이 하늘 나라의 역동적인 모습을 제시한다. 이 비유에서 나오는 씨뿌리는 사람, 겨자씨, 누룩, 보물, 그물등이 하느님 나라와 비견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 혹은 이들을 통한 활동과 일들의 총체가 하느님 나라와 비견되고 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습니다...”(13:24)에서 씨뿌리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와 비견되는 것이 아니라 씨뿌리는 행위, 그것도 좋은 씨를 뿌리는 행위를 하늘 나라와 비견한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밀과 가라지(13:36-43), 그물(13:47-50)의 비유에서 마태오는 교회내에 있는 죄와 악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드러낸다 (22:1-14참조). 마태오가 그리고 있는 교회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에 따른 “완전한 사회”로써의 교회가 아니다. 죄스러움은 그리스도인 각자 하나하나의 삶에 깃들여 있을 뿐 아니라 교회의 구조 속에도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에 교회 역시 정화와 회개를 필요로 한다. 

4) 공동체 설교 (18:1-35) 

이미 앞에서 교회 내에 있는 권위에 관하여 거론한 바 있거니와 흥미로운 것은 공동체에 관한 설교의 발단은 제자들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늘 나라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입니까?”(18:1). 명백한 것은 마태오가 이 부분을 복음서에 삽입하면서 의도했던 바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내의 권위나 명예로운 지위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교회지도자들은 형제성을 하위에 두는 어떤 상위 개념이나 구조도 시도해서는 아니되는 것이었다(23:9참조 “어느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마태오가 염려했던 것은 교회 내에서 이와같은 훈계가 필요한 이들이 틀림없이 있으리라는 사실이었다(18:2-4) “작은 이들”이란 말은 (18:6,10,14) 어린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이들, 남에게 쉽게 영향을 받는 착한 이들을 가리킨다(25:40 지극히 작은, 보잘 것 없는 이들과 같은 의미). 이렇게 보면 작은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이는 작은 어린이들에게 나쁜 표양을 보이는 어른들이 아니다. 많은 경우 강론에서는 항상 이런 식으로 이 귀절이 인용되나 여기서 작은 이들이 어린이가 아니라면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이들이 어른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작은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이다(18:1). 그렇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자는 “그 목에 나귀가 돌리는 연자맷돌을 달아맨 채 바다 깊숙히 빠지는 편이 오히려 그에게 이롭습니다”(18:6). 즉 작은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는 교회 안에서 섬김의 자세보다는 야심에 차 열심해지는 이들이다. 야심을 가진 이들은 바로 걸림돌이 된다(16:23), 야심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형제성을 파괴시킨다(18:6-10). 그렇기에 교회의 지도자는 그 무엇보다도 사목적 책임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어야 하고 항상 잃어버린 이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야하며 특별히 작은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18:11-14).

교회는 형제성의 공동체이다(18:15, 21, 35에서는 계속 형제란 단어를 쓴다). 형제성의 공동체에서 화해를 위한 직분은 가장 고귀한 직분이다 (18:15-19). 이러한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은 약속과 보장을 받는다 (18:20 참조 28:20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이 공동체의 원칙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18:23-35)에 나타나듯이 끊임없이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데 있다(18:21-22).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를 기억하면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동료, 종(18:28, 31)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자신들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는 것이 지도자들의 일이지 판단하는 것이 지도자의 일은 아닌 것이다. 이 공동체 설교에서 마태오는 이러한 점들을 강조하려고 했다. 

5) 종말 설교(24:1-25-46) 

이 설교는 종말론에 관한 본론(24:4-31)과 다가올 종말세상에 대한 일곱가지 비유로 구성되어 있다.(24:32-25:46)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마지막 네개의 비유로, 특별히 충실한 종의 비유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24:45:51).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습니까?” 이 질문은 명백히 오늘날 교회의 사목적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는 질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와서 보실 때 부지런히 자신의 사목적인 일을 하고 있는 교회 지도자는 복되도다“ 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48, 49절은 못된 종에 관한 내용인데 동료 종들을 때리고 술꾼들과 술을 먹는 사실을 묘사하면서 이런 때 주인이 온다면 “위선자들이 받을 몫을 줄 것”이다(25:51).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25:1-13)는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교회공동체는 때의 변함(여기서는 종말의 연기)에 적응해야 함을 말하고 있으며, 달란트의 비유(25:14-3)는 사람이 받은 만큼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사실 오늘날 교회가 저지르는 죄 중에서 큰 죄는 재능의 낭비라고 말할 수 있다. 양들과 염소에 관한 비유는 (25:31-46) 최후의 심판 기준, 즉 사랑의 계명을 말하고 있으며 이 계명은 지극히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이 기준임을 선언하고 있다. 

결 론 

자, 이제 마태오 복음의 요점을 정리해본다. 마태오 복음서는 교회에 대한 관점에 중요한 비중을 두고 쓰여졌는데, 이 교회는 종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종이 되어 섬기는 교회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세속의 권력과 권능을 거절하셨듯이 교회도 이러한 권력놀음에 빠져들어서는 아니된다. 교회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만들도록 파견되는 제자들의 형제성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 형제성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제자들이 평등한 새로운 계약의 공동체를 이루는 기본이 된다. 교회 안에 직위나 권리에 따른 구별이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교회라는 체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작은 이들”을 우선한 전체 하느님 백성에게 더욱 효과적인 섬김을 하고자 하는 뜻에서이다. 이 교회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사목적 관심과 화해의 사도직으로 이는 행정적 기술이나 교회법보다 우선하는 것이며 이 교회 공동체가 제대로 살아가는 공동체인가를 판별하는 궁극적 기준은 사랑의 계명으로, 이 사랑의 계명은 예수님께서 자신과 동일시하셨던 “작은 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다 (25:40, 45). 


[중요 요점]

☞ 마태오 복음서는 대략 주후 85년부터 90년 사이에 쓰여졌을 것이다. 
☞ 마태오 복음은 5개의 책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즉 산상설교(5:1-7:29), 파견설교(10:1-42), 비유말씀(13:1-52), 공동체설교(18:1-35), 그리고 종말설교(24:1-25:46)이다. 
☞ 마태오 복음서의 열쇠는 28:16-20에 있다. 이 귀절은 마태오가 지녔던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을 축약해 놓은 것이며, 마태도 복음서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생각과 사상들을 마지막으로 종합적으로 정리 요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 마태오의 그리스도론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광스러운 사람의 아들이라는 내용이다. 
☞ 마태오의 교회론에 의하면, 교회는 제자를 만드는 제자들의 공동체로써 평등성이 구현되는데 즉 같은 제자라는 평등성이다. 
이 공동체는 형제애가 핵심이며 같은 동료 하인배(종)들을 돌보는 ‘종’이 되어야 하는 공동체이다. 또한 이 공동체는 야심에 의한 권위의 남용을 끊임없이 주의해야 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내의 어떤 권위나 구조는 이 기본적인 평등성이 훼손당하면서까지 강조되어서는 안된다. 
☞ 모든 이들을 사람의 아들 공동체, 즉 교회의 구성원으로 만드는 것은 세례를 통하여, 또한 예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받으신 사막에서의 세가지 유혹은 한마디로 ”권능에 대한“ 유혹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권력과 영광을 갖지 않은 종의 신분으로 이루고자 하셨고 이에 따른 죽음을 감수하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종의 신분으로 메시아가 되시어 죽음을 감수하신 이분을 죽음으로부터 올리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주셨다. 
☞ 예수님이 종이신 메시아, 섬기는 메시아이셨듯이 교회도 종인 교회, 섬기는 교회여야 한다. 교회는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 아버지께 순명하여야 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 교회는 교회를 자랄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교회자신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참교회가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고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종이신 메시아를 고백하는 것이며, 이 고백은 우리, 즉 교회가 종인 교회, 섬기는 교회로 살면서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즉 우리의 고백은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 때에 베드로와 교회는 말 그대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주춧돌 역할을 하는 진정한 바위가 된다. 
☞ 그러나 만약 ‘베드로’가, 교회가 종이신 메시아를 따라 살 때 당할 수 있는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때 교회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 예수께서 약속하신 교회에 대한 성령의 보살핌은, 교회가 성령의 부추기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인도하심을 따랐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약속이다. 
☞ 섬기는 종인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라 침묵하기도 하고 선언할 수도 있다. 
☞ 또한 교회는 세상사람들의 권력놀음에 발을 디뎌서는 안되며, 권력에 의지하여 행동해서도 안된다. 교회가 지녀야 할 유일한 힘은 예언적이고도 도덕적인 힘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과 명확한 입장을 견지하며 때로는 용감하게, 때로는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 교회는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신자들이 지키도록 가르쳐야 한다. 마태오 복음의 산상설교는 이 복음서에서 가르침의 핵심이다. 
☞ 산상설교는 예수께서 군중을 향하여 하신 첫번째 설교로써, 하느님 나라의 제자들에 관한 감동적 선언이다. 내용은 신자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와 방향의 제시라고 할 수 있다. 즉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사람들이 무제한적, 무조건적 사랑과 연민, 용서로 같은 인간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엄청난 도전이다. 
☞ 파견설교(10장)는 마태오의 제자됨과 선교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셨던 구원의 활동을 말과 행위로 확장하도록 전 세상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비유말씀(13장)은 하늘나라의 역동적인 모습을 제시한다. 마태오가 그리고 있는 교회는 “완전한 사회”로써의 교회가 아니라, 정화와 회개를 필요로 하는 교회이다. 
☞ 공동체설교(18장)에서 마태오는 교회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교회내의 권위나 지위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한 교회는 형제성의 공동체이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를 기억하면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동료, 종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 즉 자신들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이 지도자들의 일이지, 판단하는 것이 지도자의 일은 아니다. 
☞ 종말설교(24-25)는 다가올 종말세상에 대한 일곱가지 비유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와서 보실 때 부지런히 자신의 사목적인 일을 하고 있는 교회지도자는 복되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저지르는 죄중에서 가장 큰 죄는 재능의 낭비이다. 또한 최후의 심판은 사랑의 계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 계명은 
지극히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이 기준임을 선언하고 있다. 
☞ 마태오 복음서는 교회에 대한 관점에 중요한 비중을 두고 쓰여졌는데, 이 교회는 종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섬기는 종으로서의 교회가 되고 세속의 권력놀음에 빠져들지 않으며, 모든 민족을 제자로 만들도록 파견되는 제자들의 형제성이 그 핵심을 이룬다. 교회안의 직위와 권리에 따른 구별이 있다면 이는 교회라는 체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작은 이들”을 우선한 전체 하느님 백성에게 더욱 효과적인 섬김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공동체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사랑의 계명이며 특히 예수께서 자신과 동일시 하셨던 “작은 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다.




루가에 의한 복음서

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네 개의 복음서가-7

1, 개요

저자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는 같은 사람이다. 두 책의 서문을 보면 이 사실은 명확하다. 또 이 두 책은 같은 사람, 데오필로에게 헌정되었다. 오래된 전승에 의하면 이 두 책은 루가에 의해 저술되었다 한다. 루가는 의사였으며 바오로 사도를 따라 함께 전도 여행을 다닌 것으로 되어 있다.

180년경 리옹의 주교였던 주교 이레네오에 의하면 바오로의 동반자였던 루가가 사도행전을 썼다고 한다. 저자를 루가라고 할 때 억지로 꿰어 맞춘 듯한 느낌을 덜 수 없다는 것이 요즈음의 정설이다. 바오로 사도가 루가라는 사람을 동반자로 데리고 다녔다는 것은 사실일지라도 바로 이 루가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라는 사실은 추측일 것이다.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쓴 저자는 바오로의 동반자(틀림없이 바오로를 흠모하던 이)일 수는 있으나 그의 저술에 관하여는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개연성이 희박하다. 비록 그의 저술에 관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가 맺었던 바오로와의 관계도 역시 모호하긴 마찬가지이다.

확실한 것은 이 저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향하여 이 저술을 하고 있기에 그리스도교 신자였음이 분명하다 (1:4). 희랍적 사고를 하고 있던 유대인이거나 아니면 이방인 출신이었을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성서에 정통한 이였으며 팔레스티나 밖의 여러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사용하고 있었던 희랍어 번역 성서인 70인 역 성서의 여러 귀절을 인용할 만큼 성서에 박식한 이였을 것이다. 

저술 시기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아마도 85년 부터 95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것이며 루가 복음서가 먼저 쓰여지고 후속편으로 사도행전이 쓰여졌다. 

저술 장소 

저술 장소는 명확치 않지만 팔레스티나 밖에서 쓰여졌고 희랍의 아케이아나 알렉산드리아 였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오늘날에는 이 지역 말고도 다른 지역에서 쓰여졌으리라는 설도 있다. 이렇게 명확치 않은 사실로 미루어 저술 장소가 어디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2. 구 성 

① 루가 복음서 

서론 (1:1 - 4) 
도입 : 탄생 설화 (1:5 - 2:52) 
Ⅰ. 예수님의 구세주적 활동 (3:1 - 9:50) 
A. 서론 (3:1 - 4:13) 
B. 갈릴래아에서의 예수님의 활동 ( 4:14 - 9:50) 
Ⅱ. 예수님의 승천을 향한 도정 (9:51 - 24:53) 
A. 예루살렘으로의 여정 (9:51 - 19:44) 
B. 성전에서의 가르침 (19:45 - 21:28) 
C. 수난, 죽으심, 부활, 승천 (22:1 - 24:53) 

② 사도 행전 

Ⅰ. 예루살렘 (1:1 - 5:42) 
Ⅱ. 유대아와 사마리아 (6:1 - 12:25) 
Ⅲ. 세상 끝까지 (13:1 - 28:31)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두 권으로 되어 있으나 한 책이다. 이렇게 분리된 것은 신약성서를 정리 하면서 복음서가 먼저 배열토록 하기 위하여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 사이에 요한 복음서를 끼워 넣었기 때문이다. 

3. 루가 복음서의 해설 

(1) 서론 (1:1 - 4) 

루가 복음서는 서론 부분을 4귀절로 저술했는데 희랍어 원전은 한 문장으로 구 서 성되어 있다. 이 서론은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합한 한 책의 서론으로 이해된다. 루가는 당시 여러 저술(예컨데 마르꼬, Q등)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신 하느님의 일을 기록한 이후에 저술되었으며 또한 “처음부터 목격하고 말씀의 시종이 된 사람들이 전해 준”(전승)것을 모아 저술했다. 또한 이 내용들은 초기 교회가 선포한 것들을 적어 나가는 것으로 서론을 삼았다. 그는 이렇게 전해지고 선포된 내용들을 면밀히 검토한 후에 “순서대로” 적었는데 이때에 순서대로란 말을 연대기 적이란 뜻이 아니라 신학적인 체계를 갖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며 비 그리스교인들에게 영향력을 가졌던 하느님을 두려워 하던 데오필로에게 헌정된다는 사실을 서론 부분에서 기술하였다. 

(2) 탄생 이야기 (1:5 - 2:52) 

여러 성서학자들은 이 탄생 이야기 부분은 일종의 서론부분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해석을 하고 있으나 그 보다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도입부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탄생 이야기는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예수님의 탄생 기술로 보여지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구도로 보아 마태오 1 - 2에 나타난 예수님 탄생에 관한 
기술을 원용하면서 초기 그리스도교 전승에 드러난 내용들을 자유롭게 취사 선택하여 구약에 나오는 서술 방식을 따라 재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루가가 다루고자  했던 것은 이 탄생 사건의 세밀한 사실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탄생이 의미했던 바와 예수님의 사명을 신학적으로 묘사하려 했다고 생각된다. 이 이야기를 재구성함에 있어서 예수님이 어머니이신 마리아로 부터 전해 받은 바를 기록했으리라는 심증은 찾아보기 어렵다. 

(3) 갈릴래아에서의 예수님의 구세주적 활동 (3:1 - 9:50) 

ㄱ. 서론 부분 (3:1 - 4:13) 
루가 복음서의 3:1 이하는 마르꼬 복음서의 시작 부분과 같은 맥락이다. 갈릴래아에서의 예수님의 활동은 네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ㄴ.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 (3:1 - 20) 
루가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그 당시 세계 현실 상황속에서 보았으며 로마황제 또한 그 당시 팔레스티나의 정치 상황(빌라도, 헤로데 등) 및 종교 상황(안나스. 가야파)에서 보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3:6, 참조 이사야서 40:5)는 말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사건을 전세계적이고도 구원사적 입장에서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례자 요한은 모든 사람의 진정한 회개와 참회를 소리 높여 외친다 (3:7 - 9, 참조 마태오 3:7-10). 루가가 제시하고 있는 회개와 참회는 실천에 관한 것이 었으며 (3:10, 12, 14) 나눔이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실천이었다. (3:11. 가진바의 절반을 나누라는 이야기는 나눔을 통하여 평등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참조 19:8의 자캐오가 재산의 반을 나누겠다는 의지 표명과 같은 맥이다.) 이러한 진정한 나눔을 통한 참회와 회개를 세리와 군인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3:12 - 14) 실제로 이들은 딴 부류가 아니라 한 부류였다.

즉 세리는 항상 세금 징수를 위하여 군인을 동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로마 제국을 위하여 강압적인 세금징수를 하고 있던 착취자들로서 그 당시 착취의 표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루가 복음서는 시작부터 압제와 이 압제에 눌린 백성들의 처지에 민감하였으며 이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출시키고 있다. 루가의 견해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사람이었는데 (16:16 참조) 예수님의 사명 수행 시작과 함께 성서무대에서 사라질 인물로 여겼다 (3:19 - 20). 

ㄷ. 예수님의 세례 (3:2 - 22) 
예수님의 세례는 그 당시의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과의 연대표시로 해석되어야 한다.(“모든 백성이 세례를 받았을 때”라는 과거형의 서술로 되어 있다)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신 것은 세례를 받는 동안이 아니라 (마르꼬 1:9 - 11, 마태오 3:13 - 17 과 비교해 볼 것) 세례를 받으신 후이다. 즉 세례를 받고 기도하실 때 이다. 루가는 이러한 서술 방법을 사도행전의 서두에서 병행적으로 쓰고 있는데, 예수님이 기도중에 성령을 받으시고 사명을 시작하신 것처럼 120명의 제자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을 받고 전도 사명을 시작한 것으로 사도행전도 서술하고 있다. 

ㄹ. 예수님의 족보 (3:23 - 38) 
마태오와는 달리 루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으로 서술하지 않고 인간의 최초의 선조인 아담까지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루가 복음서가 지닌 보편성, 즉 인간 전체와 전체를 보는 특이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ㅁ.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 (4:1 - 13) 
예수님은 아담의 자손인 모든 인간처럼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유혹에 직면하시게 되는데 이 관점 또한 마태오가 기술한 관점인 구약의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겪는 유혹과는 다른 인간 보편적인 관점에서의 유혹을 받으신다. 인간이 당하는 가장 큰 유혹들은 부와 권력에 대한 유혹인데 이 두 유혹의 현실은 바로 
악마적인 현실로써 제자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악마적이란 말은 이 유혹 이야기에서 악마가 스스로 고백하듯이 악마에게 “넘겨진 것이기”에 악마적이다. 예수님이 당하신 유혹의 마지막 유혹은 마태오가 서술한 같은 유혹사화와는 달리 예루살렘에 관한 것인데 예루살렘은 더 구체적으로 성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 성전과의 대결은 예수님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22:3 - 4 에서 “사탄이 유다스에게 들어가서 ” 대제관들과 합동으로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목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22:53에 나타나듯이 대제관의 “시간이요 어둠의 권세”가 예수님을 잡아 가는 사건으로 현실화 된다. 

(4) 갈릴래아에서의 예수님의 활동 (4:14 - 9:50) 

ㄱ. 나자렛에서의 예수님의 선언 (4:14 - 9:5) 
예수님의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은 나자렛 회당에서 현실적인 선언으로 시작된다. 루가의 이 서술은 마르꼬의 6:1 - 6 에 기반을 둔 것으로 나자렛 고향 방문시에 일어난 일이다. 루가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의 첫 부분에 배열하였다. 구약의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61:1 - 2, 58:6) 자신의 사명이 백성들을 짓누르는 짐과 억압으로 부터 총체적인 해방을 이루어 가는데 있음을 천명하고 이 사명이 “주님의 은혜로운 해” 즉 희년의 선포에 있다고 하심으로써 종교적일뿐 만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적인 현실에 대한 도전임을 암시 하셨다.

청중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나 (4:22) 이어서 구약의 예언자인 엘리야(열왕기 상 17:7 -16)와 엘리사(열왕기 하 5:1 - 9)의 예를 들면서 자신의 사명 또한 소외된 이들, 즉 가난한 과부와 사회에서 밀려난 나환자들과 같은 이들에게서 이루어 지리라는 소리를 듣자 그들은 자신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와 자신들이 원하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 한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서 가난한 이들과 압제 받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삶의 여정을 시작하신다. 

ㄴ. 갈릴래아에서의 활동 (4:31 - 9:50)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역을 여행하시면서 모든 고을에서 (4:43) “하느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파하시고 치유를 베푸신다. 그러나 한번 지나간 곳은 다시 들르지 않고 항상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신다. 루가는 마르꼬가 기술한 것과 유사한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들르셨던 장소의 이름은 기록치 않았다. 
단지 한가지 예외는 가파르나움 뿐이다. “평지에서” (6:17) 예수님은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을 하시는데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이들은 모두 궁핍한 사람이라는 한 부류를 다르게 표현한 뜻), 박해 받는 사람 (6:20 - 22) 들을 행복선언에 포함시키고 그 반대되는 이들은 불행선언으로 갈라놓으신다(6:24 - 26).

가난한 사람들이 복되다는 뜻은 그들이 당하는 가난이 좋은 것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때 이와 같은 변혁속에서 이들이 첫번째로 복을 입기 때문이다. 희랍 로마세계라는 맥락에서 두개의 극명한 다른 두 가치를 대비시켜서 강조점을 찾는 기술 방법을 쓴 전형적인 예인데 바로 이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은 루가에게서 아주 극명한 형태로 드러난다.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본격적인 전도 여행을 시작하는 중간에 예수님의 거룩한 변용을 삽입시켰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세상을) 떠나가실 일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떠나감이란 바로 출애굽 사건을 의미하는데 이후에 기록된 전 
도 여행은 예수님의 출애굽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 또한 교회에 해당하는 의미도 가진다.

(5) 예수님의 승천을 향한 도정 (9:51 - 24:53) 

이 기록의 전체적인 맥락은 9:51 첫 문장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예수께서 하늘에 맞아 들여질 날이 다가오자..”란 말은 바로 예수님의 승천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기록 부분의 전체 지향점은 승천이다. (24:50 - 53) 또한 이 부분은 복음서 전체로 보아 둘째번이며 마지막 부분이다. 이 부분은 다시 3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 예루살렘으로의 여정 (9:51 - 19:44) ㈁ 성전에서의 가르침(19:45 - 21:38) ㈂ 수난, 죽으심, 부활, 승천 (22:1 - 24:53) 으로 구성되어 있다. 

ㄱ. 예루살렘으로의 여정 (9:51 - 19:44) 
루가 복음 4:30에도 여행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초기여행은 주로 갈릴래아 지역에서의 여행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의 여행은 전자와 다른 목적지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여행으로 구별할 수 있다. 즉 전자의 초기 여행은 뚜렷한 여행의 목적이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후자의 여행은 예루살렘이라는 뚜렷한 목적지와 착실한 준비를 한 여행이라 볼 수 있다. “예루살렘에 올라 가기로 마음을 굳히셨다“란 기록과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을 보내어 그들이 그분을 모실 준비를 하셨다“라는 기록은 이를 의미한다. 이 여행의 뚜렷한 방향과 의도는 계속 반복되어 기록되었는데 13:22.33, 17:11, 19:28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성서 학자들은 이 여행에 관한 많은 연구들을 해 왔는데 이 여행을 기록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날 때 많은 추종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동행을 했다. 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추종)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추종하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은 이 과정을 밟아 가면서 제자들로서 양성되었던 것이다. 루가는 이에 촛점을 맞추어 제자 개개인 뿐만 아니라 제자(추종자)들의 공동체인 그리스도인들의 양성 훈련 계획이라는 틀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됨의 특성은 무엇인가 ? (9:57 - 62)
예수께서는 우선 스승을 따르는 길이란 스승이 가는 길이 어떠한 길이든지 따라가야 하기에 삶에 있어서 안전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즉 이말은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는 자는 예수가 가는 길이 험난한 길이기에 이를 감수해야하지 개인의 안위나 편함이나 이익을 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 자신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신다. “인자는 머리 기댈 곳 조차 없다” (9:58). 또한 제자된 이들은 오로지 하느님 나라만 생각할 것이지 다는 여타의 것을 염두에 두어서는 아니 된다고 가르친다. “누구든지 쟁기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9:62). 심지어는 아버지의 장사를 맞더라도 “죽은 자들이 자기네 죽은 자들의 장사를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 떠나라고까지 말씀하신다 (9:60) 

이렇게 양성될 제자들 70명을 파견하신다 (10:1 - 12) 
이와 같은 제자됨의 특성을 배우도록 일흔 두명을 파견하시면서 바로 이런 삶의 안전이 확보되지 못한 삶의 체험을 하도록 하신다. (10:3) 이런 삶의 체험을 위하여는 돈주머니도, 자루도, 신발도 들고 다니지 말 것이며 사람들과의 접촉도 하지말 것을 명령하신다 (10:4). 동양 종교에서 오늘날에도 발견할 수 있는 탁발 수행승의 고행과 수행, 방랑 생활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이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 10:25 - 37). 
이 이야기는 어느 율법학자의 질문에서 시작되는데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누릴 처지에 있는 사람이 흔히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이런 이들은 흔히 편한 삶 속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뽐내보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10:29). 이에 예수님은 하나의 예화를 든다. 이것이 저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예화이다. (10:30 - 37) 예수님은 이 예화를 마치면서 율법학자에게 되묻는다. “당신은 이 세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 (10:36) 이 예수님의 질문의 핵심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질문에 있지 않고 “누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인가 ?”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이웃이 된다는 것은 이론적인 이웃의 정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 주는 행위와 실천에 있음을 알 게 된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이웃이 되도록 달려갈 수 있는 자 만이 진정한 이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실천하는 자는 이웃을 발견할 수 있는 자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계속 “나의 이웃이 누구일까 ?”라고 이론적인 질문만 할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타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차원을 이야기 한다. (10:38 - 42) 
즉 착한 사마리아인이 피해를 입어 이의 구체적 필요에 응답함으로써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 보여 주었듯이 마르타도 사람을 맞아 들여 구체적인 실천을 보여준다. 마르타는 (착한 사마리아인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을 경청하는 것에서부터 실천이 뒤따라 나왔어야 함을 예수님은 환기시킨다. 마리아와 마르타를 비교해 본다면 마리아는 말을 들을 것도 없이 무엇을 행하고 있지만 그녀가 칭찬을 받아야 할 것은 행한 일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복됩니다” (11:28) 라는 말씀에서 나오듯이 하느님의 말씀에 모든 행동의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뜻에서이다. 이런 뜻에서 제자가 되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마르타가 못한 부분) 또 말씀에 따라 행동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마리아가 못한 부분). 즉. 마리아와 마르타가 완전한 제자가 되기 위하여는 이 부족함이 채워져야만 하겠기에 예수님은 이 작은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흔히 사람들은 이 성경 귀절을 놓고 제자들의 활동적 삶과 관상적 삶을 구분하고 있으나 예수님의 의도는 이 두가지 차원이 함께 하는 삶을 가르치려고 하신 것이다. 이 두가지 삶은 선택의 삶이 아니라 하나의 삶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열을 비교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었다. 

제자들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기도이다 (11:1 - 13) 
예수님은 이 부분을 주의 기도 속에서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표시를 드러낼 수 있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1:1)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11:2 - 4). 또한 기도에 항구 할 것을 덧 붙이신다 (11:5 - 8, 9 - 13).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와 성령의 선물이 긴밀한 상호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11:13) 

어리석은 부자에 관한 이야기 ( 12:13 - 21 )는 예수님의 전도 여행중에 나타나는 다섯개의 이야기중 첫번째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소유에 관한 태도를 설명하는 다른 이야기들 (예컨데 12:22 - 34, 14:25.33)과는 달리 부자를 “어리석은 자”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때 부자는 재물 밖에 모르는 무신론자와 같은 행위를 하는 이를 가르킨다 (예컨데 시편 14:1 에 나오는 “어리석은 자들, 제 속으로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 말들 하면서 썩은 일 추한 일에 모두 빠진 이들이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 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 이들은 갑자기 떼 부자가 되는 일에는 심혈을 기울이면서도 하느님과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추호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어서 치유, 가르침, 큰 잔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14:1 - 24). 
14:1 - 24 에서 예수님은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식사를 하러 가셨다” (여기서 지도자란 말은 8:41 에서의 뜻과는 달리 루가는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 안식일에 치유를 베풀었을때 긴장과 갈등이 나타난다 (14:2 - 6). 이 식사에 초대 받은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14:7 - 11) 집 주인에게도 한 말씀 하시는데 (14:12 - 13)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이들, 불구자들 , 절름발이들, 소경과 같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신다.

가난한 이들은 원래 당시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로서 취급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도 이에 포함시키셨다. 큰 잔치에서의 이야기에서 하느님 나라에서는 부자와 같이 초대는 받았지만 초대를 거절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특히 14:18 - 9 는 초대를 거절하는 이들의 이유를 직시하고 있다. 반면에 초대에 응한 이들은 가난한 이들, 이방인들 이었다. 여기서 “고을의 거리와 골목” (14:21)은 유대 사람을 가르키고 “행길과 울타리 쪽” (14:23)은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마태오 22:1 - 10에서는 초대를 거절한 이들은 유대 사람들이고 초대에 응한 이들은 이방인들로 되어 있다. 루가 14:25 - 35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치루어야 할 댓가와 희생에 대한 언급이다. 이는 제자 됨이 어려운 일이며 이와 같은 각오와 결단이 없이는 참다운 제자 노릇을 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루가 15장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가난하고 소외 받고 사회에서 천대 받는 이들을 돌보는 예수님 자신의 사명에 대한 설명인데 잃었던 양의 비유 (15:4 - 7), 잃었던 은전의 비유 (15:8 - 10) 그리고 잃었던 아들에 관한 비유는 루가 복음서의 백미로 예수님이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있던 이들을 감싸 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비난하던 종교 및 정치와 사회 지도자들을 향하여 한 비유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들의 비난에 대하여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단언하신다. (예컨데 “하늘에서”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는 표현은 이를 의미한다.) 이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은 사회에서 버려진 이들에게 우선적인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느님 나라가 구현되는 데에 장애물은 잃어버린 양이나, 잃어버린 아들이 아니라 이들을 받아 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큰 아들과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잃어버려진 이들이 하느님 나라 잔치의 주민들로서의 영광을 받은 일을 불평하거나, 비난하거나, 거부하는 이들이다. 

루가 복음 16장에서 18장은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장애 요소와 긍정적 요소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데 루가 복음서의 저자는 하느님 나라의 임박성을 확신하면서 이 부분을 기록하였다. 임박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가져올 갈등, 또한 이로 비롯된 열망, 즉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작은 양떼로서” (12:32) 이 세상 종말에 세상을 향한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면서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받아야 할 여러 어려움에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 지를 설명하고 있다. “인자가 올때에 땅위에서 과연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 (18:8)는 이를 웅변적으로 질문하고 있다.

루가는 세가지 중요한 사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희랍 로마 문명 사회에서 첨예화된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갈등, 세상의 부와 권력에 대하여 제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 그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백성으로 남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하여 설명한다. 물론 이 세가지 중요한 사안은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 전체를 흐르는 중요한 사안인데 루가는 세 사안을 통하여 이 문제를 극명하게 표출시키고 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16:1 - 13) 부자와 가난한 나자로의 비유를 통하여는 재물에 관한 것을, 재판관의 비유 (18:1 - 8)와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18:9 - 14)를 통하여는 기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부분은 중요하기에 자세히 살펴본다. 

재물 (16:1 - 13)에 관한 이야기는 불의한 청지기에 관한 오래된 이야기를 복원시킨 것인데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유행하던 경구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에 루가 자신의 말을 덧 붙였다 (16:8 - 13).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갈등에 관한 비유로 오랜동안 편안한 생활을 해 오던 청지기가 갑자기 위기를 맞게되는데 아마도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위기에 봉착한 청지기는 우선 사태를 심각히 분석하며 여러가지 타개책을 궁리한 끝에 위기를 넘길 방도를 찾아 내어 즉시 행동으로 옮긴다. 이 점에서 청지기는 “슬기로운  처신”에 대하여 주인으로 부터 칭찬을 받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던 이들은 실제로 하느님 나라의 임박성을 느끼고 위기감을 가졌던 이들로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분석하고 대처할 방안을 슬기롭게 찾아 내야 한다는 점을 깨우치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제대로된 결정을 하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염려를 하는 이들보다는 이 청지기 처럼 약은 자들이 재빠르게 사태를 감지하고 결단을 내리고 있다 (16:8) . 루가 복음사가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단순히 위기에 처한 상황과 이에 관한 대처의 슬기로움과 약삭 빠름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루가 복음사가는 이러한 위기 상황을 가져오게 한 재물의 소유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 것이다. 주인의 재산 관리를 맡은 청지기는 위기를 맞게 되자 자기에게 맡겨진 재물을 포기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고 재물 포기로 득을 보게 된 사람들이 자기가 자리를 물러 났을때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슬기로운 제자는 자신이 소유한 재산을 이런 방식으로 포기함으로써 위기의 순간인 죽음이 올 때 영원한 안식처인 하느님 나라를 확보하여 재물을 나눔으로써 은혜를 받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슬기로움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16:9). 이런 관점에서 재물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제자됨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된다.

제물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다(16:10).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느님을 선택하던가 하느님을 대신한다고 믿는 맘몬을 선택하던가 하는, 극단적인 선택에 항상 직면하는 이들이다. (마태오 6:24 참조) .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16:19 - 31)에서는 이러한 극단적 선택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16:25절 참조). 이는 이미 “마리아의 노래” (1:51 - 53)와 행복과 불행선언 (6:20 - 26) 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부자와 라자로를 갈라 놓은 “큰 구렁텅이”는 부자가 만든 것이다. 부자는 전 생애를 통하여 자신과 “대문 곁에” 누워있는 라자로 사이에 오갈 수 없는 깊은 간격을 스스로 만들어 왔다. 이제 죽음은 이 모든 것의 결말을 드러나게 한다. 이 결말은 바로 지금까지와는 정 반대의 사태를 몰고 온다. 만일 이와 같은 결말이 현실화 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부자들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킬 수 없게 된다.

믿음은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면 비록 겨자씨 만큼 작은 것일지라도 “불가능”을 “ 가능”으로 변화시킨다. 마찬가지로 회개하는 이에게는 하루에 일곱번도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공동체를 위하여 끊임 없이 봉사할 수 있는 실천적인 믿음을 의미한다. (17:7 - 10) 이러한 믿음은 인간을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며 단순히 육체적 치유를 넘어선 믿음이다. (17:11 - 19) 열명의 나환자가 치유를 받았지만 사마리아 사람만이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17:19)란 말을 들었던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기도에 대하여 18:1 - 18에는 
성가심을 당한 재판관이 과부의 요구에 굴복하고 만다는 예화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께서도 끈질긴 호소에는 어찌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끈질긴 과부가 재판관에게 끊이지 않고 호소하듯이 제자된 이들도 하느님께 끊임없이 기도 하면 인자가 올 때 믿음이 땅 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뜻이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는 서로 반대되는 모습이 드러나는데 (18:9 - 14) 
실제로 바리사이는 기도를 올린 것이 아니다. 그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기는 했으나 “나는”이란 말이 다섯번이나 나온 것을 보아서 하느님이나 다른 이들에게 무엇을 간구한다기 보다는 제 자랑하는데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세리는 비록 짧은 표현을 쓰긴 했어도 자신이 올리고 싶은 기도의 전부를 한 것이다. 진정한 기도는 자신의 일에 관한 중얼거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전달되는 그러한 기도이다. 

기도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자 루가는 다시 재물과 관련된 이야기로 돌아 가는 데 이 이야기는 어느 지도자에 관한 것이다 (18:18 - 30, 마르꼬 10:17 -31). 루가는 이 이야기를 마르꼬 복음서에서 따왔는데 이를 더욱 급진적으로 윤색하였다. 즉 마르꼬에서는 예수님께서 젋은이를 대견스럽게 여긴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루가에는 이런 관점이 생략되었다.

또한 마르꼬는 가진 것을 팔아서 주라고 (10:21) 기록을 했으나 루가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계속 나누어 주라는 식으로 기록하여 삶의 양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마르꼬는 이 젊은이가 슬픔에 잠겨물러가고 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참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미래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루가는 이 지도자는 물러가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면서 단지 이 말씀을 듣고 몹시 근심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매우 부유했던 때문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은 그를 보며 재산을 가진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고 있다. 루가는 이를 현재적이고도 단정적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부자는 스스로 들어가기 힘들지만 (18:25) 그러나 부자들에게도 기회는 마련되는데 그 기회는 오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기회 뿐이다. (18:27) 

그렇다면 이런 기회는 어떤 기회인가 ? 이 이야기는 19:1 - 10 에 나오는 자캐오의 이야기 이다. 자캐오는 부자로써 하느님께서 구원을 베푸심으로써 불가능한 일이 가능케된 전형이다 (19:8).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만들어 가는데 그가 반드시 했어야 할 일,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 지도록 한 일은 바로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선언을 하는 일이었다. (3:11 참조) 그러나 그가 이러한 결단을 내릴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하시는 치유가 있었기 때문이다.이 소경의 치유는 바로 자캐오의 이야기 앞에 배열되었는데 루가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18:35 - 43) 

예수님은 여행을 계속하시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19:28 - 38)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신다 (19:39 - 44). 그리고는 이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의 성전에 마침내 도착하신다. (19:45) 

ㄴ. 성전에서의 가르침 (19:45 - 21:38)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고 난 다음 (19:45 - 48)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 치신다. (20:1, 21:37) 이제 그 분은 아버지의 집에서 (2:49 참조) 가르치셨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원하시던 모든 것을 가르치실 수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당시의 지도자, 특히 성전에서의 지도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 긴장과 갈등을 자아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율사들과의 논쟁이었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한 비난을 늦추지 않으셨는데 이들의 위선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 먹고 또한 겉 꾸며 길게 기도하는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더욱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0:47) 이 비난 후에 가난한 과부에 관한 이야기를 루가는 배열하였다. 이 가난한 과부는 동전 두 닢이 전 재산 이었는데 그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헌금함에 넣었다 (21:1 - 4)

이 성전에서의 공적인 가르침은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 (21:5 - 7)과 종말에 관한 가르침(21:8 - 36)으로 끝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성전 밖에서는 예수를 잡아 죽일 음모가 반대자들 사이에서 착착 진행이 된다. 루가는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반대자들의 음모를 병행 서술함으로써 긴장과 갈등이 점차 고조되어 마지막 대결로 치닫는 가정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ㄷ. 수난, 죽음, 부활, 승천 (22:1 - 24:53) 
이 부분은 이스가리옷 유다의 배반으로 부터 시작된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다가 실패한 악마는 “다음 기회까지 그 분에게서 떠나 있었는데“ (4:13) 이제 악마가 “이스가리옷 유다에게 들어간” (22:3) 것이다. 물론 이스가리옷 유다는 당시 지배세력을 대표하던 대제관들과 수위대장들로 부터 돈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하느님 대신 맘몬을 택한 것이다. (16:13 참조) 

이어서 최후의 만찬이 나온다 (22:14 - 28). 예수는 이 최후의 만찬을 친구들과의 고별 식사로 지냈다. 마르꼬와 마태오 복음서에는 고별사가 없는데 루가는 고별사를 넣었고 이 서술의 마지막은 칼 두자루라는 이상스러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칼을 예수님 자신이 하신 말 처럼 이사야서 53:12의 기록과 연관이 있는데 “그는 무법자들과 함께 헤아려 졌다”는 이 기록은 그 당시 희랍 로마 사회에서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 포위시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단죄할 것이 아니라 마지막 재산인 겉옷까지라도 팔아서 칼을 사 그들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준비를 하라는 루가의 관점이 드러난 기록이다. 예루살렘 멸망시에 가진자들은 재산을 싸가지고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갈 수 있으나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할 수 없기에 칼을 마련하여서라도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준비가 필요했었다. 이들이 칼을 든다면 이들은 “무법자”로 간주될 수 밖에 없는데 “무법자들과 함께 헤아려 졌다”는 말은 가난하고 압제받는 사람들이 막다른 골목에 몰려 할 수 없이 무기를 들 때, 예수님도 그들 속에 함께 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게쎄마니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의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루가의 관점을 이야기한다 (22:40 - 46). 이 귀절에는 기도라는 단어가 다섯번이나 나온다. 제자들이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 기도의 힘 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 

체포와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 최고의회에서의 심문이 계속 서술되고 있는데 예수님이 잡히신 후 (22:47 - 53) 베드로는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신이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이 말은 예수님의 구세주 신원 부인이 아니라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부인이다. 그러나 즉시 뉘우친다 (22:62). 결국 예수님은 최고 회의에 끌려나가고 단죄를 받는다(22:66 - 71). 

이어서 예수님은 당시 총독인 빌라도에게 끌려가는데 고발사유는 세가지이다 (23:2 - 25). 즉 첫째로 예수님은 ‘민족 이간자’로 고발되는데 민족 이간자란 뜻은 국가 안보를 위협한 이라는 뜻이며 이때의 국가는 로마 제국에 편입된 팔레스티나, 즉 로마 제국을 말한다. 결국 이 고발사유는 정치적인 것이고 팔레스티나 편에서는 종교적인 것이다. 둘째 고발 사유는 로마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을 가로 막은 일인데 이는 “경제적 독립”을 의미하지만 로마 반역이라는 정치적 의미도 갖는다. 이와 같은 일을 하던 이들이 당시에는 “열혈당”이라는 무장 독립 게릴라들이었다. 마지막 고발 사유는 자칭 구세주인 왕이라는 사칭으로 이 또한 로마 제국에 반역하는 정치적인 행동이며 동시에 팔레스티나 편에서는 종교적인 신성모독행위였다. 그 당시 스스로 구세주 왕으로 자칭하던 여러 혁명지도자들이 있었다.

주후 6년 세포리스를 무력으로 점령하였던 혁명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갈릴래아의 유다스였다. 그는 후에 로마의 바로 군단에게 패하였다. 실제로 빌라도와 헤로데는 대사제와 지도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예수님으로 부터 아무런 죄목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사형선고를 내린다. 

이어서 십자가상의 죽음이 나온다 (23:26 - 49). 
예수님은 시외로 끌려 나가는데 키레네의 시몬 뿐 아니라 많은 군중이 그를 따라 간다. 예수님은 다른 두 “악인”과 함께 끌려간다. 여기서 “악인” (또는 범죄자)이란 말은 루가 자신의 말이 아니라 로마에 반항하던 이들에게 붙여진 말이다 (23:32). 백성들이 침묵속에서 보고 있는 가운데 지도자들과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한다. (22:25 - 36) “악인”중 하나가 예수께 얼굴을 돌리자 예수님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23:43). 성전 휘장은 하느님과 범죄한 인간을 갈라 놓는 상징물인데 이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인간은 다시 하느님께 다가 갈 수 있게 되었음을 상징하고 있다. (23:45). 예수님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운명하시는데 이 부르짖음은 고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품에 안기신다.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품에 안긴 첫번째 인간은 아마도 같은 십자가 형을 받았던 악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조금전에 예수님으로 부터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가난하고 억압 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죽음을 지켜본 백부장의 입을 통하여 확인되었는데 “정말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 었다” (23:47). 이 말은 지혜서 2:1 - 20 에 나타난 의로운 사람을 상기시키는데 의인은 항상 가난하고 억압 받는 이들 편에 섬으로써 불의한 권력을 잡은 이들로 부터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이들이다. 이 모든 일들은 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이루어 졌다 (23:48, 23:27). 이 십자가 처형의 전 과정은 이름 없는 수 많은 이들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는데 루가는 이 점을 특히 강조하면서 기록을 남겼다. 왜냐하면 그 수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이방인들 까지도 이 중요한 사건의 증인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십자가 형의 과정에서 두번에 걸친 기도에 관한 기록을 삽입함으로써 (23:34, 46) 이 십자가형 전체를 기도와 아버지께 대한 의탁으로 승화시켰다. 

여인들이 무덤이 빈 것을 발견하고, 이는 베드로에 의하여 확인됨으로써 부활사화가 시작된다 (24:1 - 53). 또한 엠마오로가던 두 제자들은 동행하던 이가 빵을 떼고 성서에 관한 설명을 하자 부활하신 주님임을 알아보게 된다 (24:13 - 35).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온 세상에 파견하여 죄를 용서하고 회개를 촉구토록한다 (24:36 - 49).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24:50 - 53) 루가 복음서의 둘째 부분이며 전체 복음서의 결론을 내린다. 

* * 사도행전에 관한 간단한 내용 분석 * * 

루가 저술의 두번째 책은 사도행전인데 사도행전 전체 내용에 관한 요약은 1:8 에 기술 되어 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내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뿐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 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 첫째 부분은 1:1 - 5:42 로 예루살렘에 있었던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관한 기록이고 ㈁ 둘째 부분은 6:1 - 12:25 로 주로 유대지역과 사마리아 지역에서 활동하신 스테파노, 필립보, 베드로의 전도를 다루고 있고 ㈂ 세째로 13:1 - 28:31 는 주로 바울로의 전도 여행을 기록했는데 그 당시 세계의 중심지 였던 로마까지의 전도 여행이 주제로 되어 있다. 루가 복음서는 사도행전이라는 두번째 책의 바울로의 로마에서의 복음 선포로 끝을 맺는다. 

(6)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요약 
루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기술하였다. 사도행전은 그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한 예루살렘으로 부터 로마로까지의 전도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여행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늘도 이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즉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당신의 제자들을 통하여 “세상 끝날때 까지” 여행을 하고 계신 것이기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여정이다. 이 여정은 세상 끝까지 예수님이 선포한 말씀이 전해지고 최종적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 끝날 여정이다. 루가가 이러한 예수님과 교회의 선교과정을 여행의 여정으로 표현한 것은 참으로 놀랍다. 바로 이길이 주님이 가셨던 길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라 그의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주님의 길을 가면서 세상 끝날까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할 것이다. 바로 이런 일을 하는 제자만이 주님의 길을 올바로 따라 가는 제자들이다. 

4. 루가 복음서의 중요한 주제와 특징 

㈀ 보편주의 : 이방인을 위한 복음 

루가는 비 팔레스티나 지역에 형성된 비 유대인 그리스도인 교회를 향하여 기 록을 했기 때문에 복음의 보편적 관점을 강조하였다. 그렇기에 루가가 의미한 이 보편적 관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루가의 기록이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전할 메시지가 모든 사람들을 향한 보편성을 띠고 있다 하더라도 구원사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특별한 역할까지를 간과한 것은 아니란 점이다. 확실히 루가의 기록은 시작부터 구약의 성서에 따라 작성되었으며 선교 명령에 동의한 이방인들은 이 구원에 참여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기록되어갔다. (예컨데 2:30 - 32, 3:6 참조)

구원에의 참여와 나눔은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하느님의 약속에의 참여와 나눔이기에 이스라엘적인 관점을 도외시 하지 않는다. (14:21 - 23 참조). 따라서 이방인에 대한 선교는 이방인들이 구원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성서에 약속된 구원사건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성취된 연후라야 한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성취는 사도행전 첫 장에서 보았듯이 수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으로 들어난다.

“먼저 이스라엘 그리고 이방인”이라는 이 관점은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복음 선포에서 나온 전략적인 방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루가는 많은 유대인의 참여를 기록하고 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선포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이들이 하느님의 잃어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단순히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구원활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을 이어 받은 사람들 속에서 계속되는 것이다. 요즈음에 와서 학자들은 최초로 초기교회에 들어온 비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하느님을 두려워 하는 이들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이들은 유대교에 매력을 느꼈으면서도 개종자와는 달리 할례나 식품 금기 등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기에 그리스도교로 들어온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자이루스와 크르넬리우스가 이들을 대표할 수 있는 이들이다. 

㈁ 구원자 : 연민과 자비의 복음 

복음서는 각기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따라 내용 또한 특징을 지닌다. 이런 특성과 특징은 서술방법에 있어서 복음사가들이 어떤 주님의 모습을 그려내느냐에 따라 나타난다. 루가에게 주님은 구원자로 서술된다. “여러분을 위해 구원자가 나셨으니 ...” (2:11) 구원자라는 단어가 계속 쓰여지고 있지는 않지만 할례시에 이름이 주어진 것을 기록한 것은 구원자라는 맥락으로 해석된다. “할례를 베풀게 되자 아기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 아기가 모태에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주었던 이름이다” (2:21). 이때 주어진 이름 예수는 하느님 야훼가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루가가 그려낸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는 따뜻한 정과 연민과 자비를 지니고 모든것을 용서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하기 위한 회개가 선포된다는 것입니다” (24:47) 라는 성서의 기록을 성취하는 분이다. 루가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 (15:3 - 7) 잃어버린 은전(15:8 - 10)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 (15:11 - 32)의 이야기를 통하여 루가는 하느님의 자비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당시 지도자들의 굳은 마음을 예수께서 깨뜨려 주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예화는 하느님의 자비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유명한 예화이다.

“그 고을에서 죄인으로 소문난 여자” (7:37)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루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예수님의 모습이다. 또한 마음이 부드러워진 악인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 (23:43)라는 예수님의 모습, 자신을 처형하는 이들에 대하여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23:34)라는 모습등에서 자비로운 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베드로의 부인에 대하여 루가만이 주님이 베드로를 눈여겨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윽한 눈으로 연민과 용서에 찬 눈길을 보내시는 주님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22:61). 복음서 여기저기에서 용서를 찾아 볼 수 있는 것도 루가 복음서의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루가의 복음서는 용서의 복음서라 할 만하다.

루가가 묘사한 예수님의 연민과 자비는 우선 불행한 상황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오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자비에 찬 행동이 뒤따른다. 마르꼬나 마태오에 비하여 루가는 이와 같은 모습을 더욱 극적으로 묘사한다. (참고로 루가 8:40 - 56과 마르꼬 5:21 - 43을 비교해 볼것, 특히 루가 8:4 - 42과 마르꼬 5:22 -23을 비교할 것). 또한 루가 7:11 - 17에도 나오듯이 하나뿐인 아이를 잃어 버린 안타까운 처지가 묘사된다. 루가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여인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언급을 하고 있다. 그 당시 여인들은 아주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루가의 이런 관점은 놀랍다. 예컨데 엘리사벳의 역활, 특히 탄생이야기 가운데 마리아에 대한 많은 언급등은 놀라운 관점이다. 몇가지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예 여성들로 되어 있기도 하고 (7:11 - 17, 15:8 - 10) 복음서중 유일하게 예수님을 따르던 여성제자들에 관한 언급이 있다 (8:2 - 3) 

㈂ 성령에 대한 복음 

루가 복음서 1장과 2장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은 성령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세례자 요한의 수태 (1:15, 8), 아버지 즈가리야 (1:67), 어머니 엘리사벳 (1:24), 시므온 (2:27), 안나 (2:36) 이 모든 인물들을 거느리는 성령은 예언의 성령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성령은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신적 능력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1:35은 “성령이 당신에게 내려 오실 터이니, 곧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당신을 감싸 주실 것입니다”란 표현은 성령에 대한 직설적인 표현을 달고 있다. 여기서 성령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으로 묘사되고 있어 루가는 자신보다도 성령의 능력과 활동에 더 촛점을 맞추고 있다. 루가는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성령과 함께 활동하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세례시 기도 중에 성령이 예수께 내려와 (3:21 - 22) 예수님은 “영에 의하여 ... 인도 되시어 ...” (4:1) 광야로 가신다. 예수님은 또한 “영의 능력을 지니시고 갈릴래아로 가” (4:14) 공생활을 시작하신다. 이때 첫번 공적 선언의 서두는 이사야서의 61:1을 인용하며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 로 되어 있다 (4:18)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는 성령의 표지하에 진행되었으며 예수님의 언행은 나자렛의 회당에서 선포된 선언의 맥락에서 보아야 하기에 성령의 활동으로 보아야 한다. 루가 복음서의 서두에는 성령이 자주 등장하나 뒷 부분에는 적게 기록되어 있다. 그럴지라도 성령에 관한 중요한 기록들이 나타난다. 예컨데 10:21에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명이 나서 말씀하신 것이 나타난다. 11:13에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에게 청하시는 이들에게 얼마나 후하게 성령을 주시겠습니까 ?”라는 언급이 나온다. 성령강림이후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에 의하여 교회에 임하게 되어 교회를 통하여 활동하신다. (사도행전 1:8,2:4) 

㈃ 기도에 대한 복음 

루가 복음서는 또한 기도의 복음서라 할 수 있는데 가장 훌륭한 기도의 전형은 예수님 자신이 가르쳐 준 기도이다. 물론 이점은 마르꼬와 마태오에도 나타나고 있긴 하다. 마태오와 마르꼬는 빵의 기적 이후 기도 이야기가 나온다 (마르꼬 6:46, 마태오 14:23). 그리고 공관복음 모두 예수님이 게세마니에서 기도한 것을 기록했다. (마르고 14:32 - 42, 마태오 26:36 - 46, 루가 22:40 - 46)

그러나 루가는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기록을 여덟번이나 더 언급하고 있다. 특히 중요한 사건 전후에는 반드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묘사했다. 예컨데 세례때 (3:21), 광야에서 (5:16), 제자를 선택하기 전날 밤새도록 기도를 하셨으며 (6:12), 베드로의 고백전 (9:28),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실때 (11:1) 베드로를 위한 기도 (22:32), 십자가상에서 사형집행인들을 위하여 (23:24),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상 죽음이 최고의 기도 (23:46)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는데 억지를 부리는 친구처럼 끊임없이 기도 할 것을 (11:5 - 13), 재판관을 성가시게 만든 과부 처럼 (18:1 - 8),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기도에서 보듯이 (18:9 - 14), 성령을 받기 위하여 (1:13) 그리고 항상 (21:36) 기도 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에도 기도에 대한 기록이 계속 나오고 있다. 

㈄ 기쁨과 평화의 복음 

구세주의 오심은 기쁨을 가져오는데 루가는 이 점을 특별히 묘사했다 (1:14, 2:10). 기쁨에 관한한 적어도 두가지 연관된 이야기가 있으며 여행이야기 안에서만 해도 기쁨이 주제가 된 이야기가 적어도 열개는 된다. 즐거움과 기쁨은 평화를 불러 오는데 제자들은 평화를 주러 파견된다 (10:5 - 6). 천사들의 노래는 후에 제자들과 예수 추종자들에게서도 나오는데 평화의 왕으로, 승리자로서 예루살렘 입성시(19:38) 나오지만, 이 도시는 평화의 메시지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19:42).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같은 평화를 주고 있는데 (24:36) 이 평화를 받은 제자들은 전 세계를 향하여 이 평화를 전달토록 파견된다 (사도행전 7:26, 9:31, 15:33).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평화와 기쁨은 기도의 열매로써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인격적 일치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 주님의 길 

루가는 구원사의 지속을 길 또는 여정으로 파악한듯 하다. 그가 사용한 단어들을 살펴보면 구원사의 여러 단계들이 하느님이 정하시는 때와 역할을 담당한 이들의 여정에 관련된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예수님의 공생활도 길로써 묘사되고 있는데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나는 내 길를 가야만 한다” (13:33)라고 기록하였고, “인자는 정해진 대로 갑니다” (22:22)라고 기술하였다. 거룩한 변용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면서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출애굽”이라는 여정을 말한다 (9:21). 그리스도교 운동도 길로 표현하고 있다 (사도행전 9:2, 19:9, 19:23, 22:4, 24:14, 24:22). 제자됨 또한 여행으로 묘사된다 (사도행전 1:21). 사도 바울로가 밀레도스에서 고별사를 하면서 자신의 전도 사명을 여행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제자는 당연히 여행하는 자들로서 한곳에 머물러서 안주해서는 안되었다. 주님의 길은 예수께서 백성의 지도자로서 가신 길을 의미한다. 루가 복음서를 쓴 저자는 이 길을 하느님 구원 목적의 구체적 실현으로 보았다. 즉 사람의 아들, 예수는 아버지가 정해 놓은 길을 따라간 것이다. (22:22) 성령은 이 길을 인도하였으며 (루가 4:1, 4:14, 사도행전 6:6 - 10), 이 인도를 받아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이루실 수 있었다. 이제 같은 성령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도하여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도구가 되게 하신다. 

㈆ 가난한 이들의 복음 

루가 복음서를 현대적인 용어로 규정한다면 “사회적”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의 탄생을 보면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 났다. 루가 2:24에 기록되었듯이 “산 비둘기 한 쌍이나 집 비둘기 새끼 두마리” 밖에는 성전에 바칠 수 없었다 (레위기 12:6 참조). 정결례에 가난한 사람들은 이것들을 바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루가가 세례자 요한을 상세히 기록으로 남긴 것을 보면 “사회적”성격을 지닌 이였음이 명백하다. 이 기록을 통하여 루가는 나눔을 강조하는데 “속옷 두벌을 가진 사람은 갖지 못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란 표현을 보아도 그렇다 (3:11). 또한 세리와 군인들도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요한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3:10 -14). 특별히 이사야서를 인용한 예수님의 자기 사명 선언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사회적 성격을 뚜렷히 부각시킨 예이다 (4:18 - 19). 또한 행복선언과 불행선언 (6:20 - 26)은 마태오와는 달리 사회적 성격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마태오는 이 같은 선언에서 “영으로 가난한 사람 (마태오 5:3)”이란 표현을 썼으나 루가는 “가난한 사람 (루가 6:21)”이란 직설적 표현을 쓰고 있다. 또한 마태오는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마태오 6:21) 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같은 맥락의 행복선언에서 마태오는 “가난”과 “굶주림”을 영성화된 은유로 쓰나 루가는 실제로 “가난함”과 “굶주림”이란 현실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부자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과 압제속에서 사는 이들은 돌보아 주는 이들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택하기로 결정하셨다는 뜻에서 이다. 즉 가난한 이들은 보호자가 없기에 하느님이 보호자로 나서시기로 했다는 의미이다. 

루가는 또한 재물과 권력의 위험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다. 이점에서 다른 복음사가보다 더욱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유혹사화에서(4:1-13) 루가는 지상왕국에서의 재물과 권력에 대한 유혹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데 이 때의 부와 권력은 우선적으로 로마제국의 부와 권력을 말하는 것이다. 루가는 이를 악마적 현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4:6-7). 이에 대하여 예수님의 계획을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압제받는 이들을 자유케 하는데 있었다.(4:18) 이를 위하여 예수 추종자들은 당연히 모든 재물과 권력을 포기하여야만 하였다(5:11,28). 하느님과 이웃을 외면한 부자는 이런 맥락에서 “어리석은 자”로 지칭될 수 밖에 없었다(12:20). 당신의 초대에 응할 수 있는 이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이라 예수님은 단언하신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이처럼 자기 소유를 모두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14:33). 이 가르침은 부자와 라자로(16:19-31) 부자 지도자(18:18-30) 및 자캐오(19:1-10)에게서 명백히 드러난다. 

루가가 제시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들의 폭력적 혁명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역사에 관여하여 권세있는 자들을 굴복시켜 가난하고 압제받는 이들이 해방되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당시에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았던 루가는 그리스도가 추구하고자 했던 바가 이 점이라는 것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예수가 이러한 관점을 설파했을 때 현세적 구세주를 원했던 많은 이들이 예수를 제거하려고 했었다(4:29). 예수님은 이들을 피하여 몸을 감추신다(4:30). 루가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무기를 들고 폭력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던 이들과 함께, 또 이들을 위하여 다른 대안으로 십자가 형을 받았다고까지 말한다(22:35-38). 그렇기에 그는 “무법자”로 간주되기도 했다(22:37). 예수님은 범죄자로 낙인찍힌 이들 가운데서 십자형을 받음으로써 그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함께 하신 것이다.

십자가 형중 십자가에 달린 한“범죄자”는 애초의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예수님께 동조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된 영광을 받았다(23:43).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가난한 이, 의로운 이(23:47)로 새로이 부활하셨으며 그분은 가난한 이, 압제받는 이들과 함께 하시게 된 것이다(이사야 53:11, 지혜서 2:1-20).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하고 죽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이 사명, 즉 가난한 이들을 해방시키는 그리스도의 사명에 동참해야만 한다(4:18 참조). 그리스도는 이 추종자들인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새로 태어난 이로서 자신의 여정을 이 세상에서 계속하고 계신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가난하고 압제받는 이들 편에서서 살아가야한다.이들에게 중 립은 없다. 두가지 선택중 하나일 뿐이다. 세상의 권력자 편에 서는 침묵의 삶을 살던가 아니면 힘없는 이들 편에 서서 해방의 기쁜 소식을 소리높이 선포하는 일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일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은 폭력적인 혁명가가 되서는 아니된다. 폭력적인 혁명가들은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폭력을 통하여서 해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 가난하고 고통받고 압제받는 이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이들과 함께 죽음으로써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이 이루어짐을 깨우쳐야 한다. 루가에게 그리스도는 현세적 용어로 “평화주의자”였다. 이점은 다른 어느 복음서 보다도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져야 할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고 싸워가는 이들을 단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하고 압제받는 이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이들과 함께 하면서 그리스도가 택하신 자기봉헌의 길, 즉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헌신을 해야하는 이들이다.

그리스도가 소위 폭력혁명가인 “범죄자”들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은 이를 웅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바는 이 세상에서 인간만의 폭력적인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이 서로의 형제성을 통하여 이루어가는 해방의 역사속에서 하느님의 개입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즉 결정적 완성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스도인은 이를 믿고 다만 하느님 나라에 헌신하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루가는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중요 요점 

☞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는 같은 사람이다. 저술시기는 주후 85년부터 95년 사이이며 루가 복음서가 먼저, 그리고 후속 편으로 사도행전이 쓰여졌다. 
☞ 루가 복음서는 서론(1-4장), 탄생 이야기(1-2장), 갈릴래아에서의 예수님의 구세주적 활동(3-9장), 승천을 향한 도정(9-24장)으로 구성된다. 

루가 복음서의 주요 주제 : 
◉ 루가는 비팔레스티나 지역에 형성된 비유대인 그리스도인 교회를 향하여 기록했기 때문에 복음의 보편적 관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루가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따뜻한 정과 연민과 자비를 지니고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하기 위한 회개가 선포된다는 성서의 기록을 성취하는 분이다.

루가 복음의 또 한가지 중요한 특징은 성령에 대한 복음이라는 점이다. 이 복음서 1, 2장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이 성령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세례자 요한의 수태,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시므온, 안나등). 그리고 루가는 예수님을 성령과 함께 활동하신 분으로 묘사한다. 또 성령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에 의하여 교회에 임하고 교회를 통하여 활동하신다. 
◉ 루가 복음서는 또한 기도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으며 가장 훌륭한 기도의 전형은 예수님 자신이 가르쳐 준 기도이다. 사도행전에도 기도에 대한 기록이 계속 나온다. 
◉ 또한 루가 복음서는 기쁨과 평화의 복음이다. 그런데 이 평화와 기쁨은 기도의 열매로써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한 인격적 일치속에서만 가능하다. 
◉ 루가는 구원사의 지속을 길 또는 여정으로 파악한듯 하다.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당연히 여행하는 자들로서 한 곳에 머물러 안주해서는 안되었다. 예수는 아버지가 정해 놓은 길을 따라간 것이며 성령은 이 길을 인도하였고, 이 인도를 받아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이루실 수 있었다. 이제 같은 성령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도하여 하느님 구원 계획의 도구가 되게 하신다. 
◉ 루가 복음서는 가난한 이들의 복음, 사회적 복음이라 할 수 있다. 루가 복음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부자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과 압제속에서 사는 이들은 돌보아 주는 이들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택하기로 결정하셨다는 뜻에서이다. 즉 가난한 이들은 보호자가 없기에 하느님이 보호자로 나서시기로 했다는 의미이다. 
◉ 루가가 제시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들의 폭력적 혁명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 역사에 관여하여 권세있는 자들을 굴복시켜 가난하고 압제받는 이들이 해방되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
◉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고 압제받는 이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이들과 함께 하면서 그리스도가 택하신 자기봉헌의 길, 즉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헌신을 해야 하는 이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바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서로 형제성을 통하여 이루어가는 해방의 역사로써 이것은 하느님의 개입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사실이다. 그리고 이 결정적 완성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서 이루어지기에 그리스도인은 이를 믿고 하느님 나라에 헌신하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루가는 제시한다.




요한에 의한 복음서

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네 개의 복음서가-마지막회

1. 개 요 

저 자 

오랜 전승에 의하면 네번째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중 하나였던 제베데오의 아들 요한에 의하여 저술되었다고 한다. 이를 첫번째로 언급한 이는 리용의 주교였던 이레네오였는데 그는 180년경에 유명한 주교였었다. 이레네오의 이 언급은 그럴듯 하기는 하지만 이 언급이 사실인지에 대한 확인을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이 언급을 확인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발견되고 있지 못하며 둘째로는 2세기경에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은 사도 요한이 저술하였다는 데 대하여 여러 의문들을 제기하고 있다. 한가지 가능한 해석은 이 복음서가 복음서로써의 권위를 갖게된 그 연원이 사도 요한에게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는 있으나 이 복음서 자체를 기록하고 편집한 것은 다른 사람일 것이리라는 가설에 근거를 둘 수 있다. 
이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다음 세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이 복음서가 지닌 “사도적 권위”는 사도 요한과 예수님을 친견했던 제자들의 증언이 복음서 원전과 기본을 이루고 있다. 
(2) 사도들의 가르침을 교회발전에 따른 신학적 해석을 문자로써 기록한 복음 전파의 제자가 이 복음서 기록에 관여 했다. 
(3) 복음서를 이룬 원전에 다른 여러 가지를 첨가하여 기록을 완성한 편집 제자가 있었다. 

물론 이와같은 가설도 가설에 그친다. 다만 명확한 것은 이 복음서의 저자가 누구일 것이라고 확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복음서 자체가 저자를 명시하지 않는 한 이 복음서의 저자가 누구이리라는 것은 불확실한 것일 뿐이다.

요한사도가 세웠던 교회공동체들의 성장과정에서 오랜기간을 통하여 여러가지 전승이 전해져 왔고, 이 전승은 구어전승과 기록전승의 과정을 통하여 아마도 제 2대나 3대에 걸쳐 완성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여러과정과 단계를 거쳐서 여러 편집과 첨삭 가감이 이루어져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제 4대의 복음서가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저술장소 

저술장소 역시 저자처럼 확실치 않다. 오랜 전승에 의하면 장소는 에페소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제로 요한교회가 성장한 지역은 팔레스티나와 시리아라고 볼 때 이 또한 확실치 않다. 단지 요한신학과 안티오키아의 주교였던 이냐시오의 신학이 유사한 점도 참고가 될 수 있겠다. 시리아에서 발견된 사료중의 일부에서 요한 복음서가 안티오키아에서 저술되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긴하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서 오늘날에 와서는 에페소가 저술장소일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저술시기 

저술시기 역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제베데오의 아들인 요한이 저자라고 생각하는 이들과 꿈란 공동체의 여러 기록들과 이 복음서의 연관을 인정하고 있는 이들은 저술시기를 좀더 빠른 시기에 잡고 있다. 이와는 달리 이 복음서가 희랍영향하에 기술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저술시기를 늦게 잡고 있다. 오늘날 파피루스 기록의 일부에서 이 복음서의 몇가지 부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2세기 전반부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아직은 이 복음서의 기록이 주후 90년에서 100년으로 보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2. 제 4복음서와 공관복음서와의 관계 

제 4 복음서를 쓴 “요한”(?)이 다른 공관 복음서를 접했는지에 대하여는 여러 이론이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사실로 미루어 요한은 마르꼬의 복음서를 알고 있었던 것 같으며 루가 복음서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요한이 마태오 복음서를 사용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요한 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놀라울 만큼 다른 복음서의 형태와 내용을 지니고 있는데 90%이상이 다르다고 본다. 단지 몇가지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데 예컨데 4:46-54절에 기록된 관리의 아들의 치유, 6:1-21에 기록된 물위를 건너신 다음의 빵을 많게 한 기적등이다. 이런 유사성보다는 다른 점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세례, 마귀를 쫓아낸 일, 엄밀한 의미에서 비유에 관한 이야기를 전연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공관복음에서 중요한 종말의 임박성에 관한 언급이 전연 나타나고 있지 않다. 또한 사건기술의 순서에서도 전연 다른 틀을 쓰고 있는데 예를 들면 다른 복음의 후반부에서나 나타나는 성전정화가 이 복음서에는 시작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예수님의 긴 가르침이 이 복음에서는 여러개로 배열되어 있다. 이 복음서 저자가 공관복음을 알고 있었던지 모르고 있었던지 간에 다른 공관복음서를 참조로 기록한 흔적을 찾을 길이 없는데 이는 이 복음서가 전혀 다른 전승에서 나온 것이라는 증거이다. 

3. 제 4 복음서의 구성 

Ⅰ. 서론 ( 1: 1-51 ) 
1. 머릿말 ( 1: 1- 18 ) 
2. 증언 (1: 19- 51 ) 
a) 세례자 요한 (1: 19- 34 ) 
b) 제자들 (1: 35- 51 ) 
Ⅱ. 표징들 ( 2: 1 - 12: 50 ) 
표징 1 : 새로운 시작 ( 2:1 - 4:42 ) 
표징 2 :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말씀 ( 4:43- 5:47 ) 
표징 3 : 생명의 빵이신 예수 ( 6:1 - 71 ) 
표징 4 : 신원에 대한 논쟁 ( 7:1 - 8:59 ) 
표징 5 : 세상의 빛 ( 9:1 - 10:42 ) 
표징 6 : 죽음을 이긴 삶 ( 11:1 - 54 ) 
표징 7 : 죽음을 넘어선 삶 ( 11:55 - 12:50 ) 
Ⅲ. 영 광 ( 13: 1 - 20: 31 ) 
고별사 ( 13:1 - 17:26 ) 
수난사화 ( 18:1 - 19:42 ) 
부활 ( 20:1 - 31 ) 
Ⅳ. 결어 : 갈릴레아에 나타나심 ( 21: 1 -25 ) 

4.요한 공동체의 성장 단계 

요한 복음서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요한사도가 형성시키고 키워온 공동체가 어떤 단계로 성장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서는 바로 공동체의 삶을 투영하여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공동체는 대단히 특이하나 당시로서는 전형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성장과정을 밟았다. 요한 복음서는 이러한 공동체 성장과정에 맞게 기록되었다. 

(1) 선교의 단계 

최초의 요한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새로운 종교집단으로써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유대교 회당중심의 생활을 했으며 유대교의 전통적인 유일신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구약에 기록된 대로 받아들였으며 다른 유대인들과 별반 다른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성서가 예수를 향하여 집중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이스라엘 역사와 성서의 약속된 바가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 졌다고 믿고 있었다. 이 공동체의 가르침은 유대 전승속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런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고 자신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인들이라고 생각했다(1.47).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 또한 유대교 회당의 삶 안에서 그들의 삶의 정황과 체험에 맞게 이루어 졌다.

이런 가운데에서 이들이 특징적으로 행한 활동은 예수님이 남겨주신 선교사명을 이룩하고자 하는 활동들이었다. 이 선교그룹들은 그렇다고 해서 유대교의 회당이나 구조를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넘어뜨리고자 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새로운 예언자의 명확한 가르침에 자신들의 삶을 재조명하였을 뿐이었다. 이와같은 사실은 예수님의 활동을 기술한 첫번째 여러 사건들에서 명확히 찾을 수 있다(1장). 여러 제자들이 선택되어 훈련과 양성을 받으며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갔듯이 선교를 위한 제자양성은 이 공동체에서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 복음서 초반부터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나온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두 제자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설명한다(1:35-40).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는 베드로를 쫓아서 예수의 제자가 된다(1:41-42). 또한 필립보는 나타나엘이 예수를 추종하도록 만든다(1:45-46).

사마리아 여인도 이와같은 맥락에서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이 여인은 시카르의 여러 사람에게 “와서 보시요...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라고 말한다(4:29-30). “그 고을에서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4:39). 요한 공동체는 예수님이야 말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바 있는 그분”(1:45)이라는 사실을 유대인 회당에서 공공연하게 공언하던 공동체였다. 초기 단계에 요한 공동체는 이와같은 선교활동을 유대인, 사마리아인, 이방인등 모든 이들을 향하여 하였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초기 요한 공동체는 자신들의 사명을 복음화로 받아들여 이를 수행하는 공동체였으리라 생각된다. 

(2) 공세적인 단계 

요한 공동체는 이 단계에 와서도 지역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하여 살던 공동체로 남아 있었다. 아직도 예수님에 관한 설교를 하고 있었으며 그분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리라는 믿음을 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들어오면 더 이상 선교적인 활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이제 이들은 더 과감하게 예수님을 선포하기 시작하였으며 유대교 회당을 통하여 대대로 전해내려오던 유대교의 믿음을 부인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즉 이들은 다분히 공세적인 자세를 취하여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예식이 유대교 예식을 대치할 수 있다고 보았고, 구약에 관한 해석도 유대교와 달리 하기 시작했으며, 예수가 모세와 구약의 여러 성조를 대체한 우월한 분이었음을 공공연히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다양한 행태들은 그리스도 공동체 신자들 사이에 다른 의견들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 단계에 와 예수님에 대한 새롭고도 다양한 신앙고백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과는 다른 예언자이며 하느님이 맺으신 계약의 백성의 새로운 참된 지도자이며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다른 어느 예언자들보다도 위대한 분으로 간주되었다.

그분은 성조 야곱보다도 위대한 분이시며(4:12) 성조 아브라함 보다도(8:53, 56-58), 심지어는 모세 보다도 (1:17, 3:13-17, 5:36, 5:46, 6:31-32) 위대한 분으로 들어났다. 실제로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나 지도자를 넘어선 분이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새로운 것을 계시하는 분이시며, 새로운 예배의 길을 여신 분이시며, 경배의 대상이시기 때문이었다.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옵니다”(4:21) 이란 말씀은 구약의 모든 경신례의 무효화를 선언하는 말씀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행하던 축제의 행사도 교체되었다. 즉 구약의 유월절을 빵을 떼어 나누는 성체성사로 대체하셨다(6:4). “참된 빵”(6:32)이 이제는 하늘에서 내려와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주는 것으로 선언하셨다(6:33). 성전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으로 대체되었다(2:21).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참”이란 접두어는 유대교 회당 전통을 “거짓”으로 단정하는 용어로 쓰여지고 있다. 예컨데 예수님은 모든이를 비추는 “참”빛으로 서술되었고(1:9),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예배자들이며(4:23),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빵으로 서술된다(6:23). 또한 예수님은 “참”된 포도나무로 모든이들이 그 나무에 속한다(15:1). 
“누구든지 물과 영으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3:5). 
“만일 여러분이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여러분 안에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6:53).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배타적인 관점을 표현하는 것으로 요한 공동체의 이 성숙 단계에서는 이러한 배타성이 강조된다. 즉 하느님의 생명과 그 나라에 속하려면 예수를 통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것을 진취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즉 이런데에 속하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분파화의 단계 

요한 공동체가 점점 과격하고 거칠게 예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하게됨에 따라 예수님을 점점 더 천상적인 분, 하느님과 같은 분으로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유대교 회당의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과로 요한 공동체는 두가지 뼈아픈 체험을 하게 되는데 회당으로 부터의 파문과 이탈자의 발생이었다. 

ㄱ) 파 문 
요한 복음서 여러곳에서 파문과 같은 뼈아픈 체험이 들어나고 있는데, 치유받은 소경이 예수님의 재판시에 예수님이 하늘로 부터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계속 주장하자 그를 “밖으로 쫓아낸다”(9:34). 이 소경의 부모는 이 골치아픈 사단에 연루되기를 원치 않는데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회당에서 추방하도록 합의 했기 때문이다”(9:22). 이 복음의 다른 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요한공동체에 가입하길 원했지만 “바리사이들 때문에 드러나게 고백하지는 못하였다”(12:42)고 기록한 것을 보면 파문의 위협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의 고별 이야기 가운데 이러한 위기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추방할 것입니다”(16:2)라고 예수님은 말씀 하신다. 

ㄴ) 이탈자 
요한 공동체가 발전해 오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도 생겨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이탈하는 이들도 나타나게 된다.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 후에 “이때부터 예수의 제자들 중 많은이가 돌아서서 물러가고 더 이상 당신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6:66)라는 귀절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이들은 요한 공동체를 이탈한 이들을 말한다. 

(4) 마지막 단계 : 요한의 편지 

요한 공동체의 역사는 요한의 편지를 통하여 마지막 단계를 알 수 있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의 요한의 편지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회당으로부터의 파문의 단계를 거치면서 공동체는 내적 갈등으로 쓰라린 체험을 겪는데 예수님께 대한 다른 생각과 신앙고백의 차이로 급격한 분리가 일어난다. 그 결과로 “그들은 우리 가운데서 나왔지만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했다면 우리와 함께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으례 들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1 요한 2:19) 라고 쓰고 있다. 그들은 “반그리스도” 라고 불리웠으며 (1 요한 2:18, 4:8, 2 요한 7) “거짓 예언자” (1 요한 4:1) “속이는 자” 들로 불리웠다. (1 요한 2:26, 3:7, 2 요한 7) 공동체의 몇몇 엘리트들의 탈퇴는 공동체에 심각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요한 1서에 나타난 공동체는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공동체의 존립과 존속을 심각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공동체에 남아있는 이들 만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들, 바로 하느님의 “자녀” 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1 요한 3:1-2)

이런 형태로 요한 공동체는 공동체 외부로 부터 모든 것이 차단되고 격리되어 갔는데, 이는 결국 “세상” 으로부터의 격리를 의미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이나 세상 것을 사랑해서는 아니되게 되었다. “세상도 또한 그안에 있는 것도 사랑하지 마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1 요한 2:15) 요한 1서의 기저를 이루었던 생각은 비록 이탈자와는 다른 충성스러운 공동체원일지라도 예수님의 성혈을 필요로하는 죄인이었기에 용서를 구해야 했었다. (1 요한 1:8, 2:2) 그들은 예수님이 육화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다른 이탈자들과는 다른 예수님의 신원을 고백했다. (1 요한 4:2) 그들은 또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이탈자들과는 다른 해석을 했다. (1 요한 4:20) 뿐만아니라 이탈자와는 달리 물과 피와 성령이 함께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1 요한 5:6-10) 

이렇게 네 단계를 거쳐 요한 공동체는 복음서의 신학을 정립해왔으며 이 내용은 네째 복음서에 기록으로 남겨졌다. 그렇기에 네번째 복음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네단계의 신학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5. 네째 복음서 해설 

1) 서 론 

서론 부분은 두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머릿말 (1:1-18)과 증언 (1:19-51) 부분이다. 

ㄱ) 머릿말(1:1-18) 

이부분은 복음서의 머릿말 부분으로 복음서가 대략 쓰여진 다음에 편집과정에서 모두가 기록 삽입되었다고 보여진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복음서의 핵심적 주제들을 종합 정리 요약한 신학적 논제들이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데 생명 (이복음서에서 36번이나 기록), 빛 (23번 기록), 어두움, 증언 (14번 기록), 증언하다 (33번 기록), 세상 (78번 기록) 등의 용어가 이 머릿말 부분에 등장한다. 그래서 머릿말은 복음서 전문을 읽고난 다음에 종합 정리 요약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어떤 성서 학자는 이 부분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던 노래 형태를 따라 구성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형태상으로 보면 노래나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0주년 기념 성서의 번역 참조) 

ㄴ) 증언(1:19-51) 

이 부분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 (1:19-34) 부분과 저자로 알려진 요한의 증언으로 명시된 (1:34) 제자들을 부르시는 부분 (1:35-51)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증언 부분에서 중요한 귀절은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1:19) 와 제자들의 세 증언, 즉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다” (1:41),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바 있는 그분을 우리는 만났다” (1:45), “랍비, 랍비는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1:49) 라는 증언 들이다. 이를 다시 상세히 보자. 

세례자 요한의 증언 (1:19-34)은 세례자 요한이 “당신은 누구요?” 라는 제관들과 레위지파 사람의 질문에 대하여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예언자도 아니요” 라는 답변으로 시작된다. 세례자 요한의 답변과는 달리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런 이라는 사실을 들어낸다. (4:26, 6:20등) 이렇게 보면 네번째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 보다는 높은 분 이시라는 사실을 명백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공관복음서와 같은 입장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신원을 이사야서 40:3 을 인용하여 “나는 주님의 길을 바르게 하라고 광야에서 부르짖는 이의 소리요” 라고 답변한다. (1:23)

세례자 요한은 또한 요르단 강 건너편 쪽에서 물로써 참회의 셰계를 베푸는데 (1:26)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세례와는 다른 세계이다. 이를 통하여 세례자 요한의 행적은 앞으로 오실 그 분과는 전연 다른 행적을 남긴다. 오실 그분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어서 세례자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합당치 못한 자로 자신의 신원을 밝힌다. (1:27)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 (1:29) 으로 부르는데 이 말은 구약의 대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한 중요한 선언이다. 이로써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이로서 신원이 밝혀진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본질적으로 예수님이 베푸실 세례와는 다른 세례라는 사실도 밝힌다(1:33).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시고 성령이 머무르시는 분으로 두번씩이나 반복 언급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으로 때가 될때 이 사실은 명백히 입증된다(7:39, 19:30 참조). 이 부분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대한 증언의 내용들이다. 

다음 부분은 제자들의 증언이다( 1:35 - 51). 
우선 안드레아와 다른이들이 세례자 요한의 공적 증언을 듣고 예수님과 합류하는 과정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간다“(1:37).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1:39). 이 과정은 따라가서, 보고, 함께 지내는 것으로 서술된다. 베드로는 동기였던 안드레아의 안내로 예수님을 만나는데 이때 베드로는 새로운 사람으로 예수를 따르기 시작하고 이는 베드로의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 표현된다.(1:42)

필립보는 직접 예수님으로 부터 선택을 받는다(1:43-44). 이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안내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나타나엘은 의심이 많은 이로 서술이 된다. 이에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구약의 야곱,즉 이스라엘 백성으로 비교하신다. 나타나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필립보가 소개하기 전에 무화과 나무 아래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설명한다. 무화과 나무 아래 서 있었다는 표현은 메시아가 언제 어디에 나타날 것인지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나타나엘로 하여금 자신이 아버지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속에 있음을 깨닫게 하여 주고 이를 구약에 나오는 야곱의 사다리로 비유하여 설명한다(1:51, 창세기 28:12 참조)

네째복음서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대략 말하자면,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의 사명과 수난 그리고 죽음과 일치되고 있다. 첫째 부분은 일반적으로 표징들(2:1-12:50)로 일컬어지는데 네째복음서에 보고된 일곱가지 표징(기적)이 모두 담겨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부분은 때로 수난의 책으로 불리우기도 하지만 당신의 고별사,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13:1-20:31)로 구성되는 것을 볼 때 오히려 일반적인 명칭인 그리스도의 영광이 더 어울리는 제목인 것 같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은 원래 20 : 30 - 31절로 끝나는 원문에 덧붙여진 부록으로 알려져 있다. 

2) 표징들 ( 2: 1 - 12: 50 ) 

구 조 
네째복음서를 주의깊게 읽어보면 어떤 ”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즉 가나의 혼인잔치(2:1-11)의 이야기(이야기란 예수께서 뜻하신 어떤 사건의 서술을 의미한다)와 성전정화(2:13-21) 이야기가 니고데모와의 대화(3:1-21)와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4:1-42)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어 관리의 아들의 치유이야기(4:46-54)와 베짜타 못의 어떤 사람의 치유이야기(5:1-18)가 나오고 이들 이야기들은 생명과 심판에 관한 말씀(5:19-47)으로 이어진다. 또 빵의 기적(6:1-15)과 물위를 걸으신 이야기(6:16-21)후에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6:22-71)이 나온다.


이처럼 요한복음 2 - 6장에는 이야기와 말씀의 형태가 반복되고 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성서학자들은 이 표징부분의 구조를 설명할 때 이야기와 말씀의 형태를 한 단위로 간주하고 이를 ”일화“라고 부른다.

일화란, 
(1) 이야기와 이어지는 말씀(담화)으로 이루어지는 한 구조단위이다 ; 
(2) 이야기와 말씀은 기본적인 주제를 지니고 있다(예를 들면 가나의 혼인잔치, 성전 정화 그리고 니고데모.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 모두는 낡은 것을 새 것으로 대치시키는 예수님을 주제로 삼고 있다) ; 
(3) 이야기와 설화는 서로 보완적인 것인데, 이야기 밑에 흐르는 신학은 말씀에서 신학적으로 발전된 것이며, 말씀에 나타난 신학은 이야기속에서 극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 
(4) 말씀은 대화로 시작될 수 있으며(예 3:1-10), 이 대화는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슬그머니 독백으로(3:11-21)발전하고 이어 끝말(3:22-36)로 마감된다 ; 
(5) 각각의 일화는 어떤 의미로 독립된 단위 즉 소(小)복음이라 할 수 있으니, 참조하는 형식으로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당신 집을 향한 열정이 나를 집어 삼킬 것입니다“-2:17-라는 첫번째 일화는 예수의 죽음을 그리고 2:22절은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 ; 
(6) 다시 말하자면 각각의 일화는 모두 ”연결말“ 혹은 ”고리말“을 갖고서 복음서 전체에 걸쳐 다른 일화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영“이란 말이 1:32.33 ; 3:5 ;4:23, 24 ; 7:39 ; 19:30 ; 20:22절에 모두 나오고 있다. 
그러면 요한 복음서 첫째부분에 나타난 일곱가지의 표징들을 살펴보자. 

표징 1 : 새로운 시작 ( 2 : 1 - 4 : 42 ) 

☆ 가나의 혼인잔치(2:1-11)이야기에서 예수는 때가 왔을 때 낡은 것을(물이 가득찬 항아리로 상징된다) 포도주로, 새로운 질서의 좋은 포도주로, 다시 말하자면 구원의 선물로 대치시킬 것이다(마리아는 이 이야기에서 중개자로 등장하지 않고 하느님백성을 대표하는 사람-여성-으로 나타난다). 
☆ 성전 정화 이야기(2:13-21)에서 우리는 낡은 예배장소인 성전이 새로운 경배장소인 ”몸“,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바뀔 것임을 깨닫게 된다. 
☆ 니고데모와의 대화( 3:1-21, 22-36 )는 낡은 생활양식이 새로운 생활양식으로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고 암시한다. 이 새로운 생활양식은 너무나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탄생과 비교되며, ”위로부터 새로 나지 않으면“의 원칙과 ”물과 성령으로“ 의 원칙들은 세례와 계속되는 신앙의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4:1-42)도 역시 낡은 것, 야곱의 우물, 이스라엘의 조상은 ”살아있는 물“, ”영원한 생명의 원천“, 다시 말하자면 영원하고도 거룩하신 생명이신 분의 생명으로 대치되어야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성전의 예배는 “영과 진리”의 예배, 즉 성령의 힘으로 변화된 사람들에 의해 실천되는 예배, 그리고 그들과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반영하는 예배로 바뀌어야 한다. 

표징 2 :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말씀 ( 4 : 43 - 5 : 47 ) 

☆ 관리아들의 치유이야기 (4:46-54)에서 예수는 거의 죽게 된 한 소년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씀으로 살리신다. 이 이야기는 또한 신앙의 성장을 의미한다. 즉 기적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예수의 말씀에 대한 신앙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한 존재의 전인격을 전적으로 내어 맡기는 신앙으로 발전되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 
기라고 하겠다. 
☆ 베짜타못 병자의 치유(5:1-18)에서 예수는 살았다고 할 수 없는 목숨을 38년동안이나 연명해온 한 사람을 고치신다. 다시한번 이야기는 예수의 말씀에 의한 치유와 그 말씀에 대한 그 사람의 전적인 복종을 표현하고 있다. 
☆ 이어지는 담화(5:19-47)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생명이 단순히 육체적 생명일 뿐만 아니라 부활한 생명(5:21, 28),즉 최후의 심판 때에 선인에게 내려지는 생명임을 알게 된다. 이같은 예수의 주장은 세례자요한(5:33-35)과 하느님의 증언으로 지지되며, 예수의 행적(5:36)과 성서의 말씀(5:39)으 
로 더욱 확실해 진다. 

표징 3 : 생명의 빵이신 예수 ( 6 : 1 - 71 ) 

☆ 빵의 기적이야기(6:1-15)는 해방절 때에 이루어지고 있다. 모세같은 예언자가 그랬던 것처럼(신명 18:15) 예수께서도 산에서 빵을 군중에게 주셨고 그들은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이 기대했던 구세주/왕의 역할을 거절하였다(수난이야기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기념할 때 어떤 의미로 그분을 왕이라 말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 빵의 기적이 끝난 후 다른 표징을 보인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물위를 걷는(6:16-21) 또 하나의 표징을 보인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8:24, 58 ; 13:19 ; 18:5) “나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구약의 “나는 있는 자 그대로이다”(출애굽 20:5 ; 신명 5:5-9 ; 이사 43:10 ; 44:6)라는 구약의 하느님의 거룩한 계시를 상기시켜준다. 
☆ 생명의 빵에 관한 대화(6:22-59)에서 예수는 출애굽동안에 모세가 하늘에서 생명의 빵을 내려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지금 예수를 통하여(6:26-34) 그 빵을 주고 계신다고 설명한다. 예수자신이 진정으로 생명의 빵(6:35-50)이다. 대화의 마지막 부분(6:51-59)은 먹고 마시는 형식의 성찬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에 반대하여 많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를 떠나갔으나(6:60-65), 베드로와 열두 제자는 예수의 참된 신원을 고백(6:66-69)하였으며, 군중은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마지막 구절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근처에서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일치되는 것 같다(마르 8:27-30). 

표징 4 : 신원에 대한 논쟁 ( 7 : 1 - 8 : 59 ) 

☆ 이야기는 예수께서 당신 친척들의 요구를 첫번째로 거절하신 후 초막절기를 지내기 위하여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을 말해준다(7:1-13). 
☆ 이어지는 말씀(7:14-8:59)은 예수의 신원에 관하여 적대적인 유대인들과 벌이는 7가지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논쟁들은 간음을 행한 여인의 이야기 때문에 (7:53-8:11) 중단되는데, 이 여인의 이야기는 초기의 네째복음서기록에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원래 네째복음서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이 일곱가지 대화는 또한 예수가 생명이시며(7:37-39) 세상의 빛98:12)이심을 설정하고 있다. 이 두가지 확인은 초막절 축제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여성의 회당에는 불이 놓여 있고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와 제단에 붇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4:13-14 ; 7:37- 38) 

표징 5 : 세상의 빛 ( 9: 1 - 10 : 42 ) 

☆ 태생소경의 치유이야기(9:1-12)는 시험을 받는 장면으로 확대되는데, 두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회당의 장면(9:13-23과 9:24-34)이 나온다. 앞을 보게 된 한 사람(9:5)은 사람들이 노리고 있었던 예수의 행위를 사실 그대로 증언한다. 마지막에 우리는 외모가 어떻든지간에 상관없이, 최후의 심판 때에는 예수가 심판관이시고 지도자들이 심판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9:35-41). 요한복음 9장의 주요주제는 빛과 심판이다. 심판에 관한 이야기는 10장으로 이어진다. 
☆ 착한 목자에 관한 말씀(10:1-21, 22-42)은 출애굽 34장(이스라엘의 지도자/목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배경과 달리 예수는 당신이 착하신 분이며 당신 백성의 참 목자라고 강조하심으로써 성서적 의미의 지도자상을 만들어내신다.

참다운 지도자는 ㉠ 자신의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으며(10: 11, 17), ㉡그의 백성을 “알고”,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체험에 참여하며(10:15) 그리고 ㉢참다운 일치를 가져온다(10:16). 그는 그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 (10:28)을 줄 것이다. 이 생명의 주제는 다음의 일화로 이어진다(요한 11장). 

표징 6 : 죽음을 이긴 삶 ( 11 : 1 - 53 ) 

이 이야기와 말씀의 일화는 밀접하게 짜여져있다. 이 이야기는 야이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와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마르 5:21-24, 35-43). 여기에다 대화가 덧붙여져서 복음사가는 이 이야기의 신학적의미와 암시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라자로의 부활이야기는 당신을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가 점점 더 얻게 된 명성 때문에 산헤드린(최고회의)에서의 만남은 긴박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11:45-53). 가야파는 논쟁을 서두를 것을 호소하고 있다(11:50). 이제 논쟁은 “국가안보”에 관한 것이 되었다. 산헤드린은 자신의 안보를 위하여 두려움에 가득차 행동하고 있다(그리스어 원전에서는 더 이상 산헤드린을 거룩한 곳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산헤드린은 권력의 장소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 위치에 대한 두려움을 빌라도에게 전이시킬 수 있다면 곧바로 그의 협력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19:12-16). 요한사가는 권력자들이 두려움으로 인해 백성을 억압하고 박해한다는 것을 분명히 간파하고 있었다.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이어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은 마침내 시작되었고, 그러므로 2:4 ; 7:30 ; 8:20절의 내용과 달리, 복음사가는 이제 “때”가 왔다고 말하는 것이다(12:23 ; 13:1) 

표징 7 : 죽음을 넘어선 삶 ( 12 : 1 - 50 ) 

☆ 베타니아에서의 향유 바름 이야기(12:1-11)는 예루살렘 입성 이전에 나온다(마르꼬 경우는 입성후에 나온다). 이것은 향유 바름(“구세주”는 “향유바름”을 의미한다) 이 예수의 개선적인 입성을 위한 준비로 제시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또한 장례 준비로써 예수의 발을 향유로 씻긴 마리아의 예언적 행위도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예수는 죽음과 묻힘을 통하여 구세주로서의 영광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예루살렘의 입성이야기 (12:12-15)는 즈가리야 9:9절의 말씀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보라 네 임금이 오신다... 암나귀의 새끼나귀에 겸손되이 올라 앉으시어...”. 그러나 이사실은 부활후에야 비로서 이해되었다(요한 12:16-19). 
☆ 당신을 만나고 싶다는 그리스출신의 유대인들에게(12:20-22) 예수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는(12:23-26) 비유의 말씀을 선포하신다. 그리고나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을 내어 맡기신다(12:27-28). 그러자 “하늘로부터 목소리” 가 응답한다(12:28b-30). 수난은 세상에 대한 심판, 세상과의 대립으로 간주되며 여기에서 창조계획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3:16-17에서는 그렇게 언급되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으로 언급되고 있다(12:31). 
☆ 표징부분의 정리-요약 (12:37-50). 여기에서 복음사가는 예수의 사명에 관한 두 가지 정반대의 응답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믿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 이사야 
53:1과 6:10절에 나오는 사람들과 믿었던 또다른 많은 사람들(12:37-43)을 표현하고 있다. 
마침내, 예수의 메시지는 총정리되어 잘 요약된다(12:44-50).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표징들에 나타난 일곱가지 주제와 그 주제의 다양한 측면들은 이야기와 말씀으로 잘 요약되어 있다고. 

3) 영 광 ( 13 : 1 - 20: 31 ) 

네째복음서의 두번째 부분과 첫째부분인 표징을 비교해 보면, 

☆ 두번째 부분에서도 같은 요소들, 즉 이야기와 말씀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으니,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점이다 ; 표징에서는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말씀이 잇달았으나, 두번째 부분에서는 먼저 긴 말씀-말씀들-(13:1-17:26)이 있고 다음에 긴 이야기(18:1-20:31)가 나온다. 이렇게 순서가 바뀐 이유는 명백하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먼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난후에 그의 고별사를 말했다고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부분과 똑같은 “논리적”관계는 그대로 존재한다. 즉 수난과 부활이야기의 신학적의미들은 고별말씀에서 거의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 표징 부분에서는 7번의 이야기와 이어지는 말씀이 있었지만, 두번째 부분에서는 오직 한번의 이야기와 말씀이 있다. 

㈀ 고별사 ( 13 : 1 - 17 : 26 ) 

14: 31의 “자, 일어나 가자”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복음의 전통적인 역사인데 아마도 18: 1의 “이 기도를 마치신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나아가셨다”는 구절이 곧바로 이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15-17장은 후에 삽입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13:31-14:31과 15:1 -16:33을 예수의 고별사에 관한 두가지 변형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17장은 아마도 15:1- 16:33과 함께 삽입되었을 것이다. 

* 발을 씻기심 ( 13 : 1 - 30 ) 

발을 씻기시는 행위는 고별말씀을 하기위한 극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발씻기는 예식에 이어 베드로와의 대화(13:6-11)가 나오고 이 대화는 발씻김이 겸손의 표양(13:15)을 의미할 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 그때 베드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부활이 일어난 후(13:7) 이해할 의미, 즉 발씻김에 참여하지 않으면 나눌 수 없는(13:8) 그런 의미를 갖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예수께서 “겉옷을 벗고”(13:4) 발을 씻고나서 “겉옷을 입고”(13:12) 같은 표현, 그리고 목자가 목숨을 바치고 다시 목숨을 얻게 되는(10:17-18)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예수의 떠남과 돌아옴 ( 13 : 31 - 14 : 31 ) 

절박해진 이별앞에서 예수는 이제 서로 사랑하라는 그의 새로운 계명을 참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한다(13:31-38).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간 후 어떻게 그들안에 계속하여 자신이 현존하는가를 설명하며(14:1-5) 제자들을 위로한다. 그리고나서 자신이 아버지께로 이르는 길(14:6-11)임을 말한다. 그가 떠난 후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이었다(14:12-14). 또한 서로의 사랑에 의하여 그들 가운데 현존하는 예수를 드러내야 할 것이었다(14:15-24).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성령이 주관하실 것이었다(14:25-26). 만약 그들이 예수가 떠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기뻐할 것이었다(14:27-31). 

* 그리스도와 그의 공동체에 관한 대화 ( 15 : 1 - 16 : 33 ) 

예수와 그의 공동체간의 살아있는 일치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표현되고 있다(15:1-11). 또한 이 일치는 제자들을 박해하는 세상의 증오 앞에서(15:18-16:4) 제자들 상호간의 사랑으로(15:12-17) 표현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대화는 성령의 일하심에 관하여 전개된다(16:5-15). 성령의 필요성을 설명한 후(16:5-7) 대화는 세상을 향한 성령의 사명과(16:8-11) 제자들에게 미치는 영향(16:12-15)에 관한 것으로 이어진다. 이어 다가오는 이별의 주제로 돌아가(16:16-24), 커다란 슬픔이 있겠지만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니, 그 슬픔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라고(16:25-33)한다. 

* 예수의 기도 ( 17 : 1 - 26 ) 

먼저 예수는 아버지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 달라고, 다시 말하면 예수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아버지가 당신의 영광스러운 현존을 표현하시라고 기도한다(17:1-5).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17:6-19) 그들의 현재 상황을 말씀드리고 아버지께서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간구하며(17:6-10), 세가지 청원을 바라고 있다 :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이 하나가 되도록”(17:11); ㉡“그들을 악마에게서 지켜주시기를”(17:15); ㉢ “그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바치는 사람이 되도록”(17:17). 마지막으로, 예수는(후에 나타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한다. 즉 사도들의 말을 통하여 그를 믿게될 모든 사람을 위하여(17:20-26) 기도하는 것이다. 

㈁ 수난사화 ( 18 : 1 - 19 : 42 ) 

수난이야기는 매우 조심스럽게 세부분으로 나뉘어 구성된다 :

① 체포와 “산헤드린에서의 재판”(18:1-27) ; ②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18:28-19:16) ; ③ 십자가 처형, 죽음 그리고 묻힘(19:17-42)이다. 공관복음의 수난사화와 비교할 때 요한복음 18 : 1 - 19 : 42절은 산헤드린의 재판에는 극히 짧은 부분을 할애하나 ( 18:19-24절은 산헤드린전체의 공식적인 심문이 아니라 안나스에 의한 사적인 심문으로 묘사되고 있다), 빌라도의 재판은 요한수난사화에 있어 핵심부분으로 더 발전되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빌라도는 또한 세속세계를 의미하는데, 세상에 대한 심판을 이미 시작하고 있는(12:31) 예수와 갈등관계인 산헤드린보다 덜 잔혹한 상대이다. 전 수난사화 중심에는 왕권 혹은 구세주의 권한에 관한 문제가 놓여있고(18:33-40 ; 19:14-15), 이 주제는 수난사화 시작과 끝에도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난사건 전체의 핵심주제인 것 같다. 

① 체포와 심문 ( 18 : 1 - 27 ) 

예수의 체포(18:1-11). 공관복음서와 달리, 네째복음서에는 고뇌의 장면이 없다. 복음사가는 이미 12:27절에서 이를 언급했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로 온 것이다.“ 체포사건이 이런 방식으로 표현됨으로써 복음사가는 예수가 자신을 충분히 알고 있고 그래서 사건들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무슨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18:4). 그는 원하기만 한다면 체포를 피할 수도 있었다(18:4-7). 그리고 제자들의 운명도 마음대로 처리해버릴 수 있었다(18:8-9) 

안나스의 심문; 베드로의 부인 ( 18 : 12 - 27 ). 공관복음과 달리, 네째복음서에는 산헤드린에서의 장면이 없다. 예수는 안나스의 심문을 받는데(18:13-14, 19-23), 안나스는 그를 대사제 가야파에게, 이어 산헤드린에 보내는데(18:24), 그곳에서 예수는 총독관저로 끌려가 빌라도앞에 선다(18:28). 예수는 요한복음 5장부터 유대인들과 지도자들에게 계속 심문을 받는데 독성죄가 처음으로 5: 18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7: 47-52절의 ”유대 지도자들과의 논란“ 장면에서 예수의 구세주 주장은 거부당하고, 이미 산헤드린 재판의 초기부분에서 판결을 받은 셈이다(11:47-52).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예수의 사명(1:28 -10:40)도 이미 끝난 것이다. 안나스의 심문은 베드로의 부인사화에 의해 틀이 잡히고 있다(18:15-18 그리고 18:25-27) 

②빌라도의 재판 ( 18 : 28 - 19 : 16 ) 

빌라도앞에 예수의 출현은 왕관을 씌우는 장면과 매질하는 장면의 두부분으로 나뉘어진다(19:1-3). 그리고 빌라도의 전 재판과정은 7장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관저바깥(18:29, 38 ; 19:4, 13)과 관저안의 장면(18:33 ; 19:1, 9)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a. 유대인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데려가다 ( 18 : 28 - 32 ) 
b. 빌라도가 왕권에 관하여 예수를 심문하다 ( 18 : 33 - 38a ) 
c. 바라바 사건 ( 18 : 38b - 40 ) 
d. 매질과 가시관 씌움 ( 19 : 1 - 3 ) 
e. 자, 이 사람이다 ( 19 : 4 - 7 ) 
f. 다시 시작된 심문과 권력에 관한 대화 ( 19 : 8 - 11 ) 
g. 왕은 카이사르밖에 없다 ( 19 : 12 - 16 ) 

십자가처형에 바로 앞서 행해진 매질은(마르 15:15) 이 요한복음에서는 의도적으로 빌라도의 재판 중심장면에 들어와 있고 따라서 전 수난사화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매질장면이 왕이나 황제취임의 모든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왕권/구세주권은 요한 수난사화의 핵심주제이다. 
재판 끝장면에서, ”빌라도는... 예수를 데리고 나와 심판의 자리(돌 깔아 놓은 자리)에 앉았다“(19:13). 그런데 이구절은 ”빌라도는 예수를 데리고 나와 심판의 자리에 앉게 했다“고 번역할 수도 있다. ”세상의 심판“에서(12:31) 예수는 사람들에게 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심판관처럼 조용히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③ 십자가처형, 죽음 그리고 묻힘 ( 19 : 17 - 42 ) 

십자가 처형과 죽음(19:17-30). 아버지의 사랑하는 외아들이며 또다른 이사악인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를 진다(19:17). ”나자렛의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는 히브리, 라틴, 그리스말로 씌어져서 모든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였고, 이것은 예수의 왕권에 대한 마지막 침묵의 선언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극심한 반대를 받게된다. 시편 22:18절의 표현대로, 예수의 옷은 병사들이 나누어 가졌고, 솔기가 없는 그의 옷들은 예수의 공동체의 일치를 상징하거나, 대사제의 옷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서 구세주는 ”그가 사랑하는 제자들“을 하느님의 백성, 교회를 상징하는 ”여인“에게 맡긴다(19:25-27). 예수의 구원적인 사명은 이제 완성된 것이다(19:28). 이어 복음사가는 시편 22:15(갈증)절과 69:21절(신 포도주)을 통합시킨다. 예수는 수동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을 아버지께 내어 맡긴다(19:30). 

예수의 묻힘 ( 19 : 31 - 42 ). 이 부분은 ”과월절 준비일“(19:31,42)을 언급하며 틀을 잡는다. 예수가 이미 죽었으므로 병사들은 다리를 꺾지 않았고(과월절에 쓰는 양들의 뼈를 꺾지 않는 관습의 암시인 것 같다 -19:36 참조)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나왔다는 표현은, 예수가 진짜로 죽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19:34). 이어 저자는 이 모든 사건이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의 증언에 근거한다고(19:35) 독자에게 확신시킨다. 요한복음 19 :36- 37절은 출애굽 12:46절, 민수 9:12절, 즈가리아 12:10절(그리고 시편 22:16)의 완성에 관한 것이다. 예수는 어떤 다른 사람의 무덤에 묻혔으나 (이사 53:9 참조), 두사람의 유대지도자,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하여 왕의 매장예식의 대우 (많은 향료등)를 받는다. 

㈂ 예수의 부활 ( 20 : 1 - 31 ) 

요한의 부활묘사는 두 이야기씩 짝을 지어 이루어지고 있다. 첫번째 두 이야기는 무덤가에서 일어났다. 즉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20:1,2-10), 그리고 막달라여자 마리아에게 출현(20:11-18)하신 이야기이다. 또다른 두 이야기는 식사때에 일어난다. 먼저 제자들에게 나타나고(20: 19-24) 다음으로 같은 그룹에 나타난 이야기인데 이번에는 도마가 함께 있다.(20:24-29). 20:8,17,21-22절에서 발견되는 신앙에 관한 언급은 사랑받던 제자와 대조되는, 의심하는 도마의 이야기를 요약하고 있다. 20:30-31절이 원래 요한복음의 끝부분이므로, 이 복음에 나타난 독자들과 미래의 신앙인들에게 하는 예수의 마지막 말씀은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0:29)라는 구절이다.

* 베드로와 다른 제자 ( 20 : 1 - 10 ) 

수의의 모습과 위치에 관한 조심스런 묘사는 무덤에 누가 훔치러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시체가 그곳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결과로 사랑받던 제자는 “보고 믿었다”(20:8 ; 참조 1:18,34,46 ; 2:11 ; 9:36-41 ; 20:29).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베드로의 신앙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다. 복음사가는 아마도 오로지 깊은 사랑만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믿음으로 이끈다고 제시하는 것 같다. 이처럼 빈 무덤을 맹목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이끌어지지 않는 것이다. 

* 막달라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 20 : 1, 11 - 18 ) 

시체를 보러 무덤에 갔던 막달라여자 마리아는 아직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몰두해 있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바로 자기눈앞에 서 있어도 알아보지 못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에야 비로소(10:27참조) 마리아는 그를 알아 보았고, 예수는 그에게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제자들간의 새로운 관계, 고별사에서 언급되었던 새로운 관계를 기대하라고 말한다(14:18-21). 이 관계는 예수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므로 이미 시작된 관계이다. 마리아는 이 사실을 제자들과 예수의 형제들에게 알릴 것이었다(20:17). 부활에 관한 참 신앙은 예수가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믿고 신체적 모습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 20 : 19 - 23 ) 

이 구절은 예수가 닫힌 문을 통하여 들어온다든가 벽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참조 14:18-23,28 ; 16:16,22) 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이야기는 네가지 점을 강조하는데, (a) 평화의 인사(20:19) ; (b) 사도들의 파견(20:21) ; (c) 성령의 선물(20:22) ; 그리고 (d) 죄를 용서하는 권한(20:23)이다. 

*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도마 ( 20 : 24 - 29 ) 

부활하신 주님은 도마가 주장했던 대로 정확하게 그의 육체적 부활을 직접 시험해보도록 초대하며, 그에게 불신자가 아니라 신앙인이 되라고 도전한다. 도마가 그의 동료제자들의 증언을 믿었어야 했다는 것을 이 구절은 암시하고 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 - 복음의 독자들이나 미래의 신앙인들을 소위 복되다고 일컫는다(20:29). 

* 마무리 ( 20 : 30 - 31 )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저자는 자신의 복음을 위한 자료들을 선택하면서 한가지 기준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 즉 그의 복음을 읽는 독자들에게 자료가 신앙을 갖게 하거나 심화시키는데 특히 도움이 되는가 하는 기준이다. 

4) 결어 (結語) 갈릴레아에 나타나심 ( 21 : 1 - 25 ) 

네째 복음이 20:30-31에서 끝난후 얼마 지나서, 그러나 최종적으로 사람들에게 주기전에 한 편집인 (혹은 어떤 그룹이?) 이야기를 더 보충하고 독자들이 가질 어떤 질문들, 예를들면 베드로의 처지와 예수의 사랑받던 제자와의 관계등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덧붙이기로 결정했음에 틀림없다. 

☆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 21 : 1 - 14 ) 

제자들, 혹은 사람낚는 어부라고 불리워지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15:5참조) 사람들로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쳐서 고기를 듬뿍 낚게 되는데, 이런 표징은 사랑받던 제자가 주님을 알아보는 표징이다. 153마리의 물고기는 그들 사명의 완전하고도 보편적인 결과를 나타낸다. 그리고나서 제자들은 주님이 그들을 위해 마련한 식사(성찬례)로 초대된다. 식사가 다 준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방금 잡은 고기를 몇마리 가져오라고 한다(사명과 성찬례의 연결을 의미한다?) 

☆ 예수, 베드로 그리고 사랑받던 제자 ( 21 : 15 - 23 ) 

세번 되풀이되는 질문과 대답(세번의 부인과 비교되는)에 의하여 베드로는 다시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양떼를 돌보라는(21:15-17)사명까지 받게 된다. 이어지는 구절은 베드로가 어떻게 죽으리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다. 마지막 말씀인 “나를 따르라”(21:19)는 13:36절에 관한 암시인 것 같다. 즉 “너는 지금 나를 따를 수 없다.“ 그러나 이 마지막 단계에서 이제 베드로는 예수를 참으로 따를 수 있게 되었다. 사랑받던 제자의 앞날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는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분명히 오해되고 있는데 다시 바로 잡아야 한다. 즉, 그 사랑받던 제자는 이 글들이 씌어질 때 이미 죽었음이 분명하다. 

☆ 두번째 결어 ( 21 : 24 - 25 ) 

24절은 20:30절에 따라 요한공동체가 그 전통을 사랑받던 제자로부터 이어 받았다고 지적한다. 또 20:31절을 따라 25절은 복음이 선택적인 것으로, 예수의 삶에 관한 모든 기록을 남기는 것에 별반 관심이 없음을 독자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중요 요점 

☞ 요한 복음서의 저술시기는 주후 90년에서 100년으로 보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 요한 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 그 형태와 내용에 있어 90% 이상이 다르다. 즉 이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세례, 마귀를 쫓아 낸 일등 비유에 관한 이야기나 종말의 임박성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또 시작부분에 성전 정화가 나타나는 것도 다른 틀인데 이러한 차잇점들로 미루어 요한 복음서가 공관복음서를 참조했다기 보다 전혀 다른 전승을 참조했다고 볼 수 있다. 
☞ 요한 복음서의 이해를 위하여 먼저 요한사도가 형성시키고 키워 온 공동체의 성장과정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 최초의 요한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성서가 예수를 향하여 집중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이스라엘 역사와 성서의 약속된 바가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특징적으로 행한 활동은 예수님이 남겨주신 선교사명을 이룩하려는 활동들이었다. 따라서 선교를 위한 제자양성은 이 공동체의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요한 복음서 초반부터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나온다. 그리고 이 선교활동을 유대인, 사마리아인, 이방인등 모든 이들을 향하여 했다. 
☞ 두번째 단계는 더 이상 선교적인 활동에만 머물지 않고 더 과감하게 예수를 선포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유대교의 믿음을 부인하는 공세적인 단계가 된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그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등 예수님의 여러 말씀은 배타적인 관점을 표현하는 것으로 요한 공동체의 성숙단계에서는 배타성이 강조된다. 즉 하느님의 생명과 그 나라에 속하려면 예수를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이다. 
☞ 세번째 단계는 분파화의 단계로써, 요한 공동체가 점점 더 과격하고 거칠게 예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함에 따라 두가지 뼈아픈 체험, 즉 유대교 회당으로부터의 파문과 이탈자의 발생이었다. 
☞ 마지막 단계는 요한의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회당으로 부터의 파문의 단계를 거치며 요한 공동체는 내적갈등, 즉 예수님께 대한 다른 생각과 신앙고백의 차이로 급격한 분리를 겪게 된다. 공동체에서 몇몇 엘리트들이 탈퇴하였고, 공동체에 남아있는 이들만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라고 표현되었다(요한 1서)

이런 형태로 요한 공동체는 외부로부터 모든 것이 차단되고 격리되어 갔는데 이는 결국 “세상“으로 부터의 격리를 의미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육화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것,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형제를 사랑하는 것, 남아있는 공동체원 모두가 예수님의 성혈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기에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했다. 
☞ 이러한 네 단계를 거쳐 요한 공동체는 복음서의 신학을 정립했고 이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요한 복음서이다. 
☞ 요한 복음서는 머릿말과 증언으로 구성된 서론(1장), 일곱가지 일화들로 구성된 표징들(2-12장), 고별사 수난사화 부활로 이루어지는 영광(13-20장), 그리고 갈릴래아에 나타나시는 예수(21장)를 묘사하는 결어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을 마감하며 - 결론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설교가들은 (복음전승의 두번째단계) 그들의 청중들이 살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는 방법을 썼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청중들의 필요에 따라 해석하였다. 즉 그들 청중들의 마음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사가들도(복음전승의 세번째 단계) ”교회의 상황을 고려하였다.” 복음사가들은 다른 순서로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연결시켰고, 말씀의 원래 의미를 간직하면서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았다. 메시지를 받고 전하는 과정을 우리는 전승이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은 전승이란 단어를 들을 때 이렇게 생각한다. “항상 이래왔고 그러니까 항상 이렇게 남아있어야 해.“ 이런 생각은 전승에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전승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전승은 종이로 포장된 선물을 받는 것이 아니며, 보통 생각하듯이 내용이나 포장 모두가 결코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 변화되어야 한다! 메시지를 받으면서 또 전하면서 그사이에 우리는 메시지를 인식하고 축적해야 하며 우리 삶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메시지를 전할 때는 우리가 그 메시지를 살아내는 방식도 함께 전해져야 한다. 이런 사실은 궁극적으로 종교에 대해 맹목적으로 가르치는 사람과, 참다운 종교교육가.참다운 교리교육가사이에 차잇점을 드러나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이 단순히 지식의 문제만은 아니라 하더라도, 확고한 지식없이 삶을 참으로 전달하는 것도 또 가능할 수가 없게 된다.

우리는 예로니모 성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였다. ”복음에 대해 무지하면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복음에 대한 무지란, 복음의 역사적 진실에 대한 연구없이 복음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복음의 역사적배경을 배우면서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다.

메시지를 선포한다는 것, 혹은 복음선교나 신앙쇄신은 자주 잘못 채택되고 고착된 자료를 맹목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자 한다면 그 선포가 자주 그래왔던 것처럼, 삶을 질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기있게 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은, 삶은 결코 질식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생명을 얻고 또 풍부하게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처/참사람되어 단행본, <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네 개의 복음서가>, 헤르만 헨드릭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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