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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복음 묵상

[복음]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151129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5.11.29|조회수386 목록 댓글 0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5-28.34-3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5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35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decía Jesús a sus discípulos: «Habrá señales en el sol, en la luna y en las estrellas; y en la tierra, angustia de las gentes, perplejas por el estruendo del mar y de las olas, muriéndose los hombres de terror y de ansiedad por las cosas que vendrán sobre el mundo; porque las fuerzas de los cielos serán sacudidas. Y entonces verán venir al Hijo del hombre en una nube con gran poder y gloria. Cuando empiecen a suceder estas cosas, cobrad ánimo y levantad la cabeza porque se acerca vuestra liberación.

»Guardaos de que no se hagan pesados vuestros corazones por el libertinaje, por la embriaguez y por las preocupaciones de la vida, y venga aquel Día de improviso sobre vosotros, como un lazo; porque vendrá sobre todos los que habitan toda la faz de la tierra. Estad en vela, pues, orando en todo tiempo para que tengáis fuerza y escapéis a todo lo que está para venir, y podáis estar en pie delante del Hijo del hombre».

«Estad en vela (...) orando en todo tiempo para que (...) podáis estar en pie delante del Hijo del hombre»

Rev. D. Antoni CAROL i Hostench
(Sant Cugat del Vallès, Barcelona, España)

Hoy, justo al comenzar un nuevo año litúrgico, hacemos el propósito de renovar nuestra ilusión y nuestra lucha personal con vista a la santidad, propia y de todos. Nos invita a ello la propia Iglesia, recordándonos en el Evangelio de hoy la necesidad de estar siempre preparados, siempre “enamorados” del Señor: «Guardaos de que no se hagan pesados vuestros corazones por el libertinaje, por la embriaguez y por las preocupaciones de la vida» (Lc 21,34).

Pero notemos un detalle que es importante entre enamorados: esta actitud de alerta —de preparación— no puede ser intermitente, sino que ha de ser permanente. Por esto, nos dice el Señor: «Estad en vela, pues, orando en todo tiempo» (Lc 21,36). ¡En todo tiempo!: ésta es la justa medida del amor. La fidelidad no se hace a base de un “ahora sí, ahora no”. Es, por tanto, muy conveniente que nuestro ritmo de piedad y de formación espiritual sea un ritmo habitual (día a día y semana a semana). Ojalá que cada jornada de nuestra vida la vivamos con mentalidad de estrenarnos; ojalá que cada mañana —al despertarnos— logremos decir: —Hoy vuelvo a nacer (¡gracias, Dios mío!); hoy vuelvo a recibir el Bautismo; hoy vuelvo a hacer la Primera Comunión; hoy me vuelvo a casar... Para perseverar con aire alegre hay que “re-estrenarse” y renovarse.

En esta vida no tenemos ciudad permanente. Llegará el día en que incluso «las fuerzas de los cielos serán sacudidas» (Lc 21,26). ¡Buen motivo para permanecer en estado de alerta! Pero, en este Adviento, la Iglesia añade un motivo muy bonito para nuestra gozosa preparación: ciertamente, un día los hombres «verán venir al Hijo del hombre en una nube con gran poder y gloria» (Lc 21,27), pero ahora Dios llega a la tierra con mansedumbre y discreción; en forma de recién nacido, hasta el punto que «Cristo se vio envuelto en pañales dentro de un pesebre» (San Cirilo de Jerusalén). Sólo un espíritu atento descubre en este Niño la magnitud del amor de Dios y su salvación (cf. Sal 84,8).


♣ 사랑의 알아차림과 기다림 ♣

오늘의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인구증가와 그에 따른 자원의 고갈, 생태계 파괴와 생명경시, 정보화에 따른 비인격화 경향, 빈곤의 문제, 전쟁과 난민 문제 등 복잡하고도 심각한 문제로 얽혀 있습니다. 벌써부터 지구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희망과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기다림의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인격에 대한 기다림이며 따라서 그것은 희망의 기다림입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어떻게 주님을 맞이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제1독서는 주님을 맞는 가장 근원적인 자세가 바로 '회상'과 '현재화'임을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유배를 맞아 절망하며 울부짖습니다. 그러자 예레미야 예언자는 메시아가 오시어 세상에 공정과 정의가 이루어주시고, 유다는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을 안전하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과 맺은 하느님의 계약은 영원하리라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33,15-16).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공정과 정의를 이루어주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에 대한 기억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정의의 싹’을 키우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의해 반드시 실현되고야 말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을 맞으려면 창조와 해방으로 이끄신 구원의 손길을 기억하고 그것을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을 기다리는 가장 근본적인 자세는 사랑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느님 앞에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도록 주님께서 테살로니카 교우들의 사랑을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며 힘을 북돋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1테살 3,12-13). 사랑이신 주님을 맞이하는 합당한 자세는 사랑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대림절은 간절한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초대하는 시기입니다. 오시는 주님께서 미약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아차리고 느낄수록 나는 사랑의 사람으로 바뀔 것입니다. 사랑이 커가고 사랑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 앞에 나설 수 있으며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이 사랑의 존재가 되고 그 사랑으로 타자(他者)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좋은 준비는 없습니다.

주님을 맞으려면 사랑의 존재가 되는 것과 더불어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의 징후가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속량이 가까웠기에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십니다(21,28).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구원이 임박하였기 때문입니다. 온갖 변화는 창조와 파멸의 징후를 품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늘 깨어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뜻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죽음을 자초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을 맞으려면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21,34),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21,36) 해야 합니다. 따라서 현세일과 탐욕으로 영적인 감각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하고,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었던 하느님의 생명과 그분이 실천하신 연민을 보고 깨달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창조와 해방의 손길을 기억하여 현재화하고, 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알아차려 사랑의 사람이 되며, 늘 깨어 기도함으로써 영적 감각을 잃지 않고 하느님의 생명과 연민을 실천하는 행복한 기다림의 순간을 이어가게 하소서. 아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대림 시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이러한 일들'은 재림 전의 여러 가지 표징들입니다(루카 21,25-26).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라는 말씀은 "믿음과 희망을 가져라." 라는 뜻입니다.
("기뻐하여라."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것은 '자유인'의 자세입니다.
즉 해방된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는 것은 노예들과 죄인들의 자세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서 안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대림 시기를 맞이한 우리는
예수님의 강생(탄생)에 관한 말씀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재림에 관한 말씀으로 읽을 때에는,
'속량'이 가까워졌다는 말은 구원과 해방의 '완성'이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강생에 관한 말씀으로 읽을 때에는,
구원과 해방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뜻으로 읽게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원의 시작이고, 예수님의 재림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우리가(인류 전체가) 노예 상태에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는 노예라는 것.)
예수님은 노예로 살고 있었던 우리를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해방된 삶'을 시작하는 것이고,
종말과 재림은 이 해방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해방을 얻은 자유인의 생활이기도 하고,
해방과 자유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속량'이라는 것은
'몸값을 받고 노예를 풀어주는 일'(몸값을 내고 노예 상태에서 풀려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몸값을 내신 분입니다.
(그 몸값은 예수님의 목숨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몸값을 받은 자는 누구인가?
앞에서 우리가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말했으니,
그 '죄와 죽음'이라는 것이 몸값을 받은 셈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죄와 죽음을 무력화시킨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죽음을 정복하셨고,
죄와 죽음에 대해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죄와 죽음은 예수님 앞에서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죄와 죽음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해방과 자유는 아직은 미완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대림 시기가 시작되는 이 시점에서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해야 합니다.
승리자이신 예수님과 패배자인 '죄와 죽음'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는
대림 시기에도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은 단순히 성탄절을 준비하는 시기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와 해방을 얼마나 누리고 있는가?
이 자유와 해방의 완성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또는 "승리자이신 예수님 편에 서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또는 "'이미' 패배했지만 아직도 우리 가운데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죄와 죽음'이라는 것을 물리치는 싸움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를
특별히 점검하는 시기입니다.
(물론 평소에도 늘 해야 하는 일입니다.)

 

승리자이신 예수님 편에 서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도 '죄와 죽음'이라는 것과 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쪽에서는 이미 이긴 싸움입니다.
그러나 우리 각 개인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진행 중인 싸움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확정되었지만, 작은 전투는 아직도 계속되는 상황.)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또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그러면 백전백승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흔들리고, 기도하지 않고, 세속의 유혹에 넘어가고,
그러면서 예수님을 잊어버린다면, 백전백패입니다.

 

지금 우리의 대림 시기는
메시아 없이 살던 사람들이 메시아의 강생을 기다리던 때와 같은 시기가 아닙니다.
메시아는 이미 이천여 년 전에 오셨고, 우리의 해방을 선포하셨고,
당신의 목숨으로 몸값을 내셨고, 부활하심으로써 최종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척 하면서 연극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으니,
이 믿음 속에서 대림시기와 성탄 시기를 지내야 합니다.
믿음을 더욱 강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시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대림 시기는 다시 한 번 더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시기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면
이제 잠시 멈추고 신앙인으로서 자기의 '삶'을 점검하는 시기.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소홀히 하고 세속의 일에 한눈을 팔았다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시기.
길 잃은 양처럼 살았다면
우리를 애타게 찾고 있는 착한 목자이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시기.

 

사실 우리는 편안하면 편안해서 방심하고,
힘들면 힘들어서 주저앉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세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오염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목욕을 하는 것처럼,
대림 시기가 아니더라도 날마다 회개를 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이기락 타대오 신부

 
대림 첫 주일 교회력으로 한 해의 처음이 기다림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늘 성당에 들어오시면서 제대 앞이나 옆에 놓인 대림환을 보셨을 겁니다.
네 개의 초가 있고 그중 제일 진한 보라색 초에 촛불이 켜져 있지요.
새벽이나 평일 저녁에는 아침의 고요와 저녁의 평온함 속에 촛불 홀로 타고 있습니다.

그 빛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지금 성당의 주인은 신자도 건물도 아닌 저 촛불인 것 같습니다.
이 빛이 주는 고요와 평온함 속에서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시는 예수님,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유다 왕궁의 경비대 울안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내린
하느님 말씀을 전합니다.
유다 왕국의 멸망이 눈앞에 닥쳐온 시기,
나라는 이제 곧 망하고 예루살렘 성벽도 다 무너지고 예레미야를 가두었던 치드키야 임금은
두 눈이 뽑혀 청동 사슬에 묶여서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목전에 두고 있는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한 약속을 이루어주겠다.”(예레 33,14)

오늘 독서 앞부분에는 “기쁜 소리와 즐거운 소리, 신랑 신부의 소리와 ‘만군의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릴 것이다.”(예레 33,11)
라는 신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구원의 모습을 말씀하시다니!
독서의 말씀들은 다윗 임금 때에도 있을 것 같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현세적인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도 정말 이해가 갑니다.
 
유다 백성들은 한 치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처지로 내몰리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을 포기하지도, 그들에게 절망하지도 않으시는 하느님.
더욱이 가져본 적도 없었던 꿈같은 행복까지 약속하시다니!
이런 불행을 초래한 장본인이 바로 그들인데도 말입니다.

오늘 복음도 그런 점에서는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고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떨치며 올 것이다”(루카 21,27 참조) 하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재난은 가깝게는 기원후 70년의 로마제국에 의한 이스라엘의 멸망,
멀리는 마지막 종말의 때이기도 하겠지요.
 
예레미야서와 루카 복음의 정황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그 무엇을 생각하면서
오늘 제2독서를 묵상하면 이런 약속들이 실제로 이루어진 실체를 보는 듯합니다.

바오로 사도와 초대 교회 신자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굳게 믿었지요.
그런 확신과 흔들림 없는 신앙 속에서 그들은 하루하루를
‘그 날이 바로 오늘’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우리가 여러분 덕분에 우리의 하느님 앞에서 누리는 이 기쁨을 두고
하느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1테살 3,9)
라고 감동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서간의 집필 연대가 기원후 50-55년경 쯤이니 그래도 거의 2000년 전이네요.
그때의 신앙과 굳은 확신이 마치 금강석처럼 빛이 납니다.
우리가 이런 확신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요.
 
사도 바오로를 통하여 성령께서 하시는 생명력이 넘치는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 제대 앞에 놓인 대림환의 초들을 봅니다.
 
이 초에 하나하나 불을 붙이면 제일 처음 것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갇혀있던
유다 왕궁의 경비대 안으로 또 다음 것은 루카복음의 예수님께로
그리고 세 번째는 아테네에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오로의 책상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 같습니다.
 
남아 있은 초 하나는 바로 ‘지금 여기’에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2006년 12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이 마지막 촛불의 무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어떤 믿음과 확신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예레미야서처럼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습니까?
 
오늘 복음은 주님의 재림 못지않게 우리 개개인의 죽음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는 시간이 넉넉하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모두 내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며 내일은 은총이요, 자비의 시간이고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망각할 정도로 찰나적인 세상사에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재림과 죽음의 시간은 무섭고 두려운 시간이 되겠지요.
 
조용히 타고 있는 대림환 촛불에서 극적인 기다림의 순간들이 일렁이며 지나갑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때가 차면(갈라 4,4 참조) 기다리던 분이 오시겠지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을 때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또 우리가 이렇게 모자라고 부족하게 살고 있어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기다림을 주님께서는 작게 평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인생은 기다림 속에서 저물어간다고 누군가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다림은 막연하고 모호한 것이 아니라 기쁨과 희망 속에서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구체적이고 희망찬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쩌면 일년 중에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때인지도 모를, 대림시기입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희생과 긴 인내를 요구한다는 점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구상 시인은 고백합니다. 그리고 권고합니다.


“삶은 인내로구나. 삶은 긴 인내로구나. 삶은 길고 긴 인내로구나!
 
 
서울대교구 이기락 타대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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