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3-27
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27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Jesús entró en el templo. Mientras enseñaba se le acercaron los sumos sacerdotes y los ancianos del pueblo diciendo: «¿Con qué autoridad haces esto? ¿Y quién te ha dado tal autoridad?». Jesús les respondió: «También yo os voy a preguntar una cosa; si me contestáis a ella, yo os diré a mi vez con qué autoridad hago esto. El bautismo de Juan, ¿de dónde era?, ¿del cielo o de los hombres?». Ellos discurrían entre sí: «Si decimos: ‘Del cielo’, nos dirá: ‘Entonces, ¿por qué no le creísteis?’. Y si decimos: ‘De los hombres’, tenemos miedo a la gente, pues todos tienen a Juan por profeta». Respondieron, pues, a Jesús: «No sabemos». Y Él les replicó asimismo: «Tampoco yo os digo con qué autoridad hago esto».
«¿Con qué autoridad haces esto? ¿Y quién te ha dado tal autoridad?»
Rev. D. Melcior QUEROL i Solà
(Ribes de Freser, Girona, España)
Hoy, el Evangelio nos invita a contemplar dos aspectos de la personalidad de Jesús: la astucia y la autoridad. Fijémonos, primero, en la astucia: Él conoce profundamente el corazón del hombre, conoce el interior de cada persona que se le acerca. Y, cuando los sumos sacerdotes y los notables del pueblo se dirigen a Él para preguntarle, con malicia: «Con qué autoridad haces esto?» (Mt 21,23), Jesús, que conoce su falsedad, les responde con otra pregunta: «El bautismo de Juan, ¿de dónde era?, ¿del cielo o de los hombres?» (Mt 21,25). Ellos no saben qué contestarle, ya que si dicen que venía de Dios, entrarían en contradicción con ellos mismos por no haberle creído, y si dicen que venía de los hombres se pondrían en contra del pueblo, que lo tenía por profeta. Se encuentran en un callejón sin salida. Astutamente, Jesús con una simple pregunta ha denunciado su hipocresía; les ha dado la verdad. Y la verdad siempre es incómoda, te hace tambalear.
También nosotros estamos llamados a tener la astucia de Jesús, para hacer tambalear a la mentira. Tantas veces los hijos de las tinieblas usan toda su astucia para conseguir más dinero, más poder y más prestigio; mientras que los hijos de la luz parece que tengamos la astucia y la imaginación un poco adormecidas. Del mismo modo que un hombre del mundo utiliza la imaginación al servicio de sus intereses, los cristianos hemos de emplear nuestros talentos al servicio de Dios y del Evangelio. Por ejemplo: cuando uno se encuentra ante una persona que habla mal de la Iglesia (cosa que pasa con frecuencia), ¿con qué astucia sabemos responder a la crítica negativa? O bien, en un ambiente de trabajo, con un compañero que sólo vive para él mismo y “pasa de todos”, ¿con qué astucia sabremos devolver bien por mal? Si le amamos, como Jesús, nuestra presencia le será muy “incómoda”.
Jesús ejercía su autoridad gracias al profundo conocimiento que tenía de las personas y de las situaciones. También nosotros estamos llamados a tener esta autoridad. Es un don que nos viene de lo alto. Cuanto más nos ejerzamos en poner las cosas en su sitio —las pequeñas cosas de cada día—, mejor sabremos orientar a las personas y las situaciones, gracias a las inspiraciones del Espíritu Santo.
<예수님>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 사제들과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라고 묻습니다(마태 21,23).
여기서 '이런 일'이라는 말은,
좁은 뜻으로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마태 21,12-13)와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일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가리킵니다.
지금 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은,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인가?
그렇다면 그것을 증명해 보아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라는 질문으로 답변을 대신하십니다.
이 질문은 답변을 회피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요한의 일과 당신의 일은 같은 일이고,
모두 하늘에서 온 일이라는(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 때에는 가만히 있다가
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시비를 거느냐?"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은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마태 21,25-26)."
라고 말하면서 자기들끼리 의논합니다.
이 말을 보면,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것을 안 믿었습니다.
(못 믿은 것이 아니라 안 믿었습니다.)
그들이 안 믿으면서도 세례자 요한을 내버려 둔 것은
아마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이 말한 회개나 심판에 대한 무관심.)
그 무관심은 사실상 '하느님의 뜻'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고 있는지
반성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또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자기들의 기득권에 별로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시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와 요르단 강에서만 활동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도 안 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사제들과 원로들은
요한이 하는 일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이 하고 싶은 말은 "사람에게서 왔다."입니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 말을 하지 못합니다.
"군중이 두렵소." 라는 말은 백성의 여론이 두렵다는 뜻이 아니라,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자기들에게 돌을 던지지나 않을까 두렵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그들이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세속적인 기득권을 잃는 것만을 두려워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에게는 "혹시라도 요한이 진짜로 하느님의 예언자였던 것은 아닌가?
우리가 죄를 지은 것은 아닌가?" 같은 두려움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한 뒤에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마태 21,27).
모르겠다는 그들의 말은,
지금 이 상황에서는 "관심 없다." 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이 한 일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고 말한 것이지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관심 없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의 권한이 하늘에서 왔는지 사람에게서 왔는지에 대해서도
관심 갖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와서 권한을 물은 것은,
정말로 하늘에서 온 권한인지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자기들에게 위협이 되는지,
아니면 무시해도 되는지를 알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권한이 어디에서 왔든지 간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되면 예수님의 일을 막고,
위협이 안 된다고 생각되면 무시하고.)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는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자기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요한 11,47-53).
사제들과 원로들이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7)."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한이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하셔도
들으려고 하지 않을 자들입니다.
(원래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들의 관심사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이익뿐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보여 주어도 보지 않고, 들려주어도 듣지 않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말하지 않겠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내가 말해도 너희는 듣지 않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도 "내가 (메시아라고)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요한 10,25)."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이, 또 그리스도교가
자기에게 세속적인 이익을 주는지, 아닌지를 따져보고,
이익을 준다고 판단해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랬다가 기대한 것만큼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미련 없이 떠나거나 박해자로 변해 버립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랬더라도 나중에 진실한 신앙인이 되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우리는 그처럼 세속적인 이익만 바라는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기복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곧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신앙은 어떤가?
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주시기를 바라고 있는가?
(예수님께 무엇을 달라고 청하고 있는가?)
송영진 모세 신부
불신자에게 유보된 예수의 정체
대림시기에 봉독되는 복음의 주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했다.
첫째는 메시아의 도래와 현존이 가져오는 징표들에 관한 내용으로서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병자와 소경을 치유하고, 죄인의 죄를 사하며,
억눌린 백성들을 배려하고 위로하는 내용이다.
둘째는 메시아적 징표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요구하는 내용으로서
그 태도는 믿음과 불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선택할 경우 하느님나라의 보장을 받는다.
셋째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대조하는 내용이다.
둘 다 구약성서에 계시된 자들로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위한 특사요 선구자로,
예수는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이요 메시아로 예언되었다.
이들 주요내용을 잘 이해하는 방법으로
그 날의 독서로 대부분 봉독되는 이사야 예언서와의 연결을 도모하도록 권유하였다.
이제 대림 제3주간의 복음은 모두가 세례자 요한과 관련된 것이다.
복음은 메시아의 도래를 위한 선구자로 세례자 요한을 등장시키고
그의 정체성을 밝히면서 광야와 요르단강에서 회개의 설교와 세례를 베풀게 한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복음은 선구자의 중요한 역할을 부각시키면서
그 이상으로 메시아의 정체와 권위가 출중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이 우선 메시아를 준비하는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을 보도하고,
그 다음에 메시아의 역사적 도래, 그리고 메시아의 활동을
단순히 시간상의 순서로 열거하려는 목적만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음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영향력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메시아 예수의 ‘이미 오심’을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은
인자(人子)의 ‘다시 오심’에로 연장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해 보자.
역사적 사건의 측면에서 볼 때,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은
메시아 예수의 공생활로 말미암은 신약의 시작으로 끝나며,
신약은 그리스도 예수의 메시아적 역할, 즉 공생활, 수난, 죽음, 부활로 끝난다.
그러나 구세사적 측면에서 볼 때, 요한과 예수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두 분의 역할은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경륜 속에
하느님 스스로가 세례자 요한과 아들 예수에게 부여한 사명과 권한 때문이다.
이 사명과 권한이 두 분의 역할과 활동을 인간구원과 관련하여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권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예수와 백성의 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정확한 시점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 이틀째 되는 날이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사흘째 되는 날로 편집되었다.(마르 11,1-33)
논쟁의 원인이 되는 ‘이런 일’이란 예수께서 입성 직후 행하신 성전정화사건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행하신 예수님의 전체 행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수님의 권한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느님으로부터의 권한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시고, 그들이 알아듣기 훨씬 쉬운 방법을 택하신다.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한 반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믿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지만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사제들은 세례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반문이 그들을 진퇴양난에 빠트려 ‘모르겠다.’는 대답을 얻어냈지만,
사실상 그들은 속으로 세례자 요한을 불신함으로써 예수까지도 불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겠다.’는 대답은 사실상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대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무엇이 하느님의 일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분별하여
백성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함으로써
자신들의 직무를 다하지 못함은 물론, 예수가 누구이며,
어떤 권한으로 지금까지 놀라운 행적을 해왔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렇듯 불신자에게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은 유보된다.
예수님의 대답은 적어도 말씀을 들으려 하고 받아들이려 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이에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신뢰이다.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일어나는 하느님의 사건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얻기란 힘들다.
우리 중에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모른다고 말 할 사람은 없다.
오늘날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의 선구자적 역할과 활동을 신뢰한다는 것은
곧 메시아의 탄생을 준비하는 회개와 쇄신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십자가를 져야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은
1542년에 스페인의 아빌라 인근에서 태어납니다.
본래 조상은 명문 귀족이었지만 가세가 몰락하여 요한이 태어날 당시에
집안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는 어느 정도 성장했을 대 목수의 조수로 일하다가 메디나 병원에 채용 되어
간호사 일을 하기도 합니다.
이때 병원 전속 사제가 되려는 생각으로 예수회가 경영하는 신학교에 통학했고,
22살쯤에는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에
1567년 사제서품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가르멜회 환경과 생활 방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깊은 침묵과 기도가 요구되는 카르투지오회로 옮기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아빌라의 데레사에게 털어놓았고, 그녀는 그보다는 함께 수도회를 개혁하자고
권유합니다.
그렇게 수도회를 개혁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성 요한은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됩니다.
개혁을 반대하는 수도자들에게 납치되어 수도원 다락에 9개월간 감금당하고,
그곳에서 온갖 모욕과 학대를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감옥에서 탈출한 후에도 계속 반대자들의 비난과 공격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사는 가운데 그가 남긴 여러 편의 시와 저술들은
우리의 영적인 유산이 되었는데,
성 요한이 삶과 저서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너희가 참으로 살고자 한다면 십자가로부터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영적 찬가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영혼이 고통에다 위로와 열망을 두지 않거나
또는 여러 겹으로 된 고통의 숲 속을 거치지 않고서는 여러 겹으로 된 하느님의 지혜에
결코 이르지 못함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지혜를 참으로 갈망하는 영혼은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십자가의 숲 속에서 고통 받는 것을 원해야 함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내 십자가를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을 때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는 말씀인데요.
돌아보면 정말 그렇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매일 복음 묵상을 하는데 평온하고 일상적인 날에는 복음이 눈으로 읽혀집니다.
그리고 좋은 구절이라고 생각되는 말씀을 가지고 묵상을 하고 글을 쓰는데,
글을 다 쓰고 나면 글이 좀 가볍고 약간 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갈등이 있고 고민이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는
복음이 눈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히고,
어떤 말씀에 자동으로 몰입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말씀이 마음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과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고 가르침을 줍니다.
그럴 때 나온 글은 일단 말이 되는 것 같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 스스로에게 작은 만족과 감동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나를 짓누르는 십자가의 압력이 강할수록
더 깊은 지혜와 깨달음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살다보면 그런 십자가의 짓누름이 많이 있죠.
가정 안에서나 직장 안에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겪는 여러 가지 짓누름과 압력이 있습니다.
그런 십자가의 짓누름과 압력을 벗어던지지 않고 잘 지고 견디어 낼 수 있다면,
하느님의 깊은 지혜에 도달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나의 십자가를 성실히 지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지혜를 깨다는 신앙인이 됩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생명평화미사 후에 공지사항 때...)
김인국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공지한다.
“여러분 24일 날 국회 앞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미사가 봉헌됩니다.
많이들 오세요.
그날은 특별히 전종훈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해 주실 겁니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제일 잘 안다고...
신부님도 3년째 비정규직으로 지내고 계시거든요.“
인천교구 밤송이(김기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