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8-24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La generación de Jesucristo fue de esta manera: Su madre, María, estaba desposada con José y, antes de empezar a estar juntos ellos, se encontró encinta por obra del Espíritu Santo. Su marido José, como era justo y no quería ponerla en evidencia, resolvió repudiarla en secreto.
Así lo tenía planeado, cuando el Ángel del Señor se le apareció en sueños y le dijo: «José, hijo de David, no temas tomar contigo a María tu mujer porque lo engendrado en Ella es del Espíritu Santo. Dará a luz un hijo, y tú le pondrás por nombre Jesús, porque Él salvará a su pueblo de sus pecados». Todo esto sucedió para que se cumpliese el oráculo del Señor por medio del profeta: «Ved que la virgen concebirá y dará a luz un hijo, y le pondrán por nombre Emmanuel, que traducido significa: “Dios con nosotros”». Despertado José del sueño, hizo como el Ángel del Señor le había mandado, y tomó consigo a su mujer.
«José, hijo de David, no temas tomar contigo a María tu mujer»
Rev. D. Antoni CAROL i Hostench
(Sant Cugat del Vallès, Barcelona, España)
Hoy, la liturgia de la palabra nos invita a considerar el maravilloso ejemplo de san José. Él fue extraordinariamente sacrificado y delicado con su prometida María.
No hay duda de que ambos eran personas excelentes, enamorados entre ellos como ninguna otra pareja. Pero, a la vez, hay que reconocer que el Altísimo quiso que su amor esponsalicio pasara por circunstancias muy exigentes.
Ha escrito el Papa san Juan Pablo II que «el cristianismo es la sorpresa de un Dios que se ha puesto de parte de su criatura». De hecho, ha sido Él quien ha tomado la “iniciativa”: para venir a este mundo no ha esperado a que hiciésemos méritos. Con todo, Él propone su iniciativa, no la impone: casi —diríamos— nos pide “permiso”. A Santa María se le propuso —¡no se le impuso!— la vocación de Madre de Dios: «Él, que había tenido el poder de crearlo todo a partir de la nada, se negó a rehacer lo que había sido profanado si no concurría María» (San Anselmo).
Pero Dios no solamente nos pide permiso, sino también contribución con sus planes, y contribución heroica. Y así fue en el caso de María y José. En concreto, el Niño Jesús necesitó unos padres. Más aún: necesitó el heroísmo de sus padres, que tuvieron que esforzarse mucho para defender la vida del “pequeño Redentor”.
Lo que es muy bonito es que María reveló muy pocos detalles de su alumbramiento: un hecho tan emblemático es relatado con sólo dos versículos (cf. Lc 2,6-7). En cambio, fue más explícita al hablar de la delicadeza que su esposo José tuvo con Ella. El hecho fue que «antes de empezar a estar juntos ellos, se encontró encinta por obra del Espíritu Santo» (Mt 1,19), y por no correr el riesgo de infamarla, José hubiera preferido desaparecer discretamente y renunciar a su amor (circunstancia que le desfavorecía socialmente). Así, antes de que hubiese sido promulgada la ley de la caridad, san José ya la practicó: María (y el trato justo con ella) fue su ley.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요셉이 정의로웠다는 의미는
함석헌 선생께서 평북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실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학교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여러 명의 학생들이 교무실에 난입했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도저히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이었습니다.
난입한 학생들은 기물들을 부수고 선생님들을 마구 때렸습니다.
교사들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화난 교사들과 난입한 학생들 간에 난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난리가 벌어진 가운데서도 유독 함석헌 선생만은 얼굴을 두 팔에 파묻고
책상에 엎드린 채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함석헌 선생의 그 모습을 많은 학생들이 궁금해 하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그때 학생들 몇 명이 함석헌 선생을 찾아와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선생의 대답은 자신이 얼굴을 들면 자신을 치는 학생들이 누구인지를 보았을 터인데,
그렇게 되면 당신도 인간인지라 당신을 친 학생들을 기억하고 평생 잊지 못할 것이므로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과 배서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방에서 열심히 배를 까먹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배 과수원 주인이 우리들이 따가는 것을 원두막에서 다 지켜보고 계셨지만
일부러 누구네 자식들인 것을 다 알면서도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어렸었지만 실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누구인지 모르는 그 과수원 주인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떤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덮어두어도 되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져서 그것이 누구의 잘못인지 추궁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를 사람들에게 굳이 알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끝까지 따져 물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그냥 파혼해버리면 여자를 임신시켜놓고 책임도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면서도
그렇게 결정한 것이 과연 정의로운 사람일까요?
사실 자비와 함께하지 않는 정의는 무자비함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죽을죄를 범한 사람은 죽여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은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무자비하게 내치는 것으로 끝난 것일까요?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며 감싸주셨습니다.
그 가죽옷이란 인간이 지닌 죄의 부끄러움을 감춰주기 위해
무언가의 희생이 요구된다는 암시입니다.
결국 우리 죄를 위해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당신 아드님의 희생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기도 하지만 그 정의 안에 자비가 공존합니다.
노아가 술을 마시고 나체인 상태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은 그 부끄러운 모습을 보고 자신의 형제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야펫과 셈은 그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로 들어와서는
자신들의 겉옷으로 아버지를 가려주었습니다.
누가 저주를 받고 누구 축복을 받았는지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에서 장발장의 잘못을 주교님이 감싸주지 않으셨다면
장발장은 더 안 좋은 사람으로 변해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끝까지 유다의 배반을 제자들에게 알리지 않았던 것을 상기해야겠습니다.
정의로운 사람은 요셉과 같이 타인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이 희생하면서까지
그것을 감싸주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요셉처럼 성가정의 가장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 각자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는 일
새벽미사를 다녀오는 길에 평화방송을 틀었더니 왠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서울시립동부아동상담소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김보애 안나 수녀님의 목소리였습니다.
명동성당 대림특강 두 번째 강사로 하신 말씀들이 재방송되고 있었습니다.
25년간 줄곧 상처입고 마음 아픈 아이들을 위해 헌신해 오신 수녀님의 노고를
손에 잡힐 듯이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심리·정서적으로 힘든 아이들 치료를 부탁드리면 어떤 아이든 따지지 않고
흔쾌히 받아주시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수녀님께서 처음 그 일을 시작하실 때를 회고하셨습니다.
당시 많은 아이들이 본드와 가스를 많이 했었는데, 안타깝게도 한 아이가 세상을 뜨고 말았답니다.
그 아이를 땅에 묻으면서 미안함과 죄책감에 대성통곡을 하셨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한 가지 결심을 하셨답니다.
“너처럼 힘든 청소년이 오면 죽을힘을 다해서 일 할게...”
또 다시 목전으로 다가온 이번 성탄 아기 예수님은 어느 다른 하늘 아래서 태어나실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서, 우리의 가정 안에서,
무척이나 각박해진, 그래서 상처입고 소외받으며 죽어가는 이웃들이 줄을 선 우리 사회 안에서
다시 태어나셔야 합니다.
수녀님께서 심한 학대에 시달리다 못해 쉼터까지 오게 된
6살짜리 여자 아이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정말이지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밤에 잠을 재우는데, 수녀님 손을 꼭 잡으면서 제발 어디 가지마시라고,
자기 옆에 앉아 옛날이야기를 해주시라고...
잠 들었나 해서 살며시 손을 빼내려면 꼭 쥔 손을 절대 놓지 않더라는...
우리 각자가 부모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한 아이를 따뜻이 안아줄 때
아기 예수님은 우리 품에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심연의 바닥에서 울고 있는 한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줄 때
아기 예수님은 우리 사이에 탄생하시는 것입니다.
죽어도 용서하기 힘든 한 이웃을 큰마음으로 용서할 때
아기 예수님은 내 안에서 탄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지막 부분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이전까지만 해도 족보의 이름이 남성에게서 남성으로 전해지다가
요셉에 이르러 갑자기 남성은 무대 뒤로 물러나고
여성, 즉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도구 역할을 했었지만 이제는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우리 인간을 당신 구원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실 수도 있지만
때로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직접 행동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은 아주 중요한 결정적인 순간이며 그 일은 하느님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일이 바로 기적중의 기적, 인류 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인 일입니다.
이 특별한 대사건, 예수님의 탄생 앞에 보여준 요셉의 태도를 우리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요셉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대충 분위기를 파악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요셉은 크게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호기심으로 접근하지도 않았습니다.
고민 고민하며 강생의 신비를 해석하려고도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경외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침묵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강생 사건을 바라봤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 손길에 맡겼습니다.
그저 묵묵히 주님의 천사의 명령에 따라 순종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