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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복음 묵상

[복음]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렸다. 160110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6.01.10|조회수470 목록 댓글 0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렸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5-16.21-22

그때에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21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como el pueblo estaba a la espera, andaban todos pensando en sus corazones acerca de Juan, si no sería él el Cristo; respondió Juan a todos, diciendo: «Yo os bautizo con agua; pero viene el que es más fuerte que yo, y no soy digno de desatarle la correa de sus sandalias. Él os bautizará en Espíritu Santo y fuego».


Sucedió que cuando todo el pueblo estaba bautizándose, bautizado también Jesús y puesto en oración, se abrió el cielo, y bajó sobre Él el Espíritu Santo en forma corporal, como una paloma; y vino una voz del cielo: «Tú eres mi hijo; el Amado, en ti me he complacido».



«Tú eres mi hijo; yo hoy te he engendrado»

+ Rev. D. Joan BUSQUETS i Masana 

(Sabadell, Barcelona, España)

Hoy contemplamos a Jesús ya adulto. El niño del Pesebre se hace un hombre completo, maduro y respetable, y llega el momento en el que ha de trabajar en la obra que el Padre le ha confiado. Así es como le encontramos en el Jordán en el momento de empezar esta labor: uno más en la fila de aquellos contemporáneos suyos que iban a escuchar a Juan y a pedirle el baño del bautismo, como signo de purificación y renovación interior.


Allí, Jesús es descubierto y señalado por Dios: «Puesto en oración, se abrió el cielo, y bajó sobre Él el Espíritu Santo en forma corporal, como una paloma; y vino una voz del cielo: ‘Tú eres mi hijo; yo hoy te he engendrado’» (Lc 3,21-22). Es la etapa preparatoria del gran camino que está dispuesto a emprender y que le conducirá hasta la Cruz. Es el primer acto de su vida pública, su investidura como Mesías. 


Es también el proemio de su modo de actuar: no obrará con violencia, ni con gritos y asperezas, sino con silencio y suavidad. No cortará la caña quebrada, sino que la ayudará a mantenerse firme. Abrirá los ojos a los ciegos y librará a los cautivos. Las señales mesiánicas que describía Isaías, se cumplirán en Él. Nosotros somos los beneficiarios de todas estas cosas porque, como leemos hoy en la carta de san Pablo: «Él nos salvó, no por nuestras buenas obras, sino en virtud de su misericordia, por medio del bautismo regenerador y la renovación del Espíritu Santo que derramó abundantemente sobre nosotros (...). De este modo, salvados por su gracia, Dios nos hace herederos conforme a la esperanza que tenemos de alcanzar la vida eterna» (Tit 3,5-7).


La fiesta del Bautismo de Jesús debe ayudarnos a recordar nuestro propio Bautismo y los compromisos que por nosotros tomaron nuestros padres y padrinos al presentarnos en la Iglesia para hacernos discípulos de Jesús: «El Bautismo nos ha liberado de todos los males, que son los pecados, pero con la gracia de Dios debemos cumplir todo lo bueno» (San Cesáreo de Arlés).



♣ 세례 받은 사람다운 삶의 향기 ♣ 


오늘 복음은 요한의 증언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발현을 통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메시아로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오늘의 축일을 지내면서 세례 받은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봅니다. 


먼저 세례 받은 나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고, 그분 마음에 들며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과 힘을 받은 사람으로서(이사 42,1; 루카 3,22; 사도 10,38) 모든 이의 빛(이사 42,3)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세속의 정신이나 나의 생각과 의지가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주님의 영(靈)에 따라 살아야겠습니다. 


틈만 나면 내 생각이 앞서고 내 뜻대로 살려고 하는 ‘육’(肉)의 경향에 휩쓸리곤 하는 우리입니다. 주님의 영을 지니고 살려면 끊임없이 말씀을 경청하고 되새기며, 기도하면서 자신을 하느님 앞에 두어야겠지요. 주님의 뜻을 따를 것인지 현실과 타협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마다 내 생각과 의지를 내려놓는 수행을 시작할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과 늘 함께 계셨습니다(사도 10,38). 세례 받은 나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조차 ‘더 많이’, ‘더 빨리’라는 무의식의 작동에 자신을 내맡겨버리는 오늘입니다. 성인(聖人)이 되지 못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이미 들은 말씀을 망각해서이고, 늘 함께 계시는 주님을 잊은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 하나만 새기며 살아도 영적 성숙은 훨씬 빨라질 것입니다. 


세례 받은 나는 무엇을 실행해야 할까요? 주님의 종처럼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성실하게 공정을 펴고 세우며 살아야 합니다(이사 42,3-4). 곧 다른 이들의 희망이 되어주고 의로운 일을 행하며 바른 인생을 사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세월호 침몰로 죄없이 희생된 이들의 가족들의 울부짖음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숨소리가, 비정규직과 실직에 내몰린 이들과 농민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가진 자와 힘 있는 이들의 부당하고 불의한 처사에 억울해 하는 이들의 분노가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스미며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이 땅에서 신앙인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세례 받은 우리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과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도록 불림 받았습니다(이사 42,7). 예수님처럼 우리도 평화의 복음을 전하고(사도10,36), 좋은 일을 하며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고쳐 주어야겠습니다(10,38). 


주변을 둘러보면 묶이고 매이고 맺힌 이웃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옥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워 떠나고 싶은 오늘의 한국의 상황을 ‘헬조선’(Hell+ 朝鮮)이라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누가 어디에서 묶이고 갇히고 맺혀 울부짖고 슬퍼하며 고통받고 있는지 사랑 지극한 눈으로 살피며 다가가, 자유와 해방이 되어주셨던 예수님을 삶으로 선포해야겠습니다. 


오늘 하루 잠시 멈추어 세례 때의 약속을 회상하고, 세례 받은 나의 소명에 좀 더 충실하도록 마음을 다지며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천부당만부당한 예수님의 세례 

 

 

출근시간, 등교시간, 한 바탕 ‘아침대란’을 치룬 한 엄마가 모닝커피를 한잔 마신 후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시작했을 때의 일입니다. 

 

4살 된 막내아이가 엄마를 거든다며 청소기를 꺼냈습니다. 

4살 밖에 안 된 아이다보니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말려들어가 있는 청소기 코드도 제대로 뺄 줄 모릅니다. 

전원을 꼽고, 스위치를 켰지만, 키가 작다보니 청소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그래도 엄마는 아이가 하는 대로 가만히 둬봅니다. 

아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보지만 도움은커녕 엄마에게는 방해만 됩니다. 

 

멀쩡하게 서 있는 화분을 넘어트립니다. 

무리하게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보니 자주 전원이 꺼지고 기계에 손상이 갑니다. 


사실 아이가 가만히 앉아 있어주는 것이 엄마에게는 훨씬 편한 일인데, 

그래도 엄마는 아이가 엄마를 도와주고 싶다는 그 기특하고 갸륵한 마음에 감동을 받습니다.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벌써 아이가 이렇게 컸구나, 귀엽고 대견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엄마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아이가 청소에 도움이 되든지 말든지 상관없습니다. 

그저 엄마를 도와주고 싶다는 아이의 그 마음에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습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솔직히 그분께 별 도움 안 되는 우리입니다. 

때로 가만히만 있어줘도 좋은 우리입니다. 

때로 방해만 되는 우리입니다. 

우리의 도움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겸손하게 우리 인간의 협력을 요청합니다. 

우리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십니다.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답답한 인간의 제도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으십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은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한 나약한 인간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심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정녕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먼저 예수님께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아야 당연한 일인데, 

반대로 그분께서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십니다. 

세례자 요한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손을 통해 세례를 받으십니다. 

 

참으로 이해 안가는 부분입니다. 

세례는 축성된 깨끗한 물로서 인간의 죄를 씻는 예식입니다. 

세례는 죄인들이나 받는 예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는 인간들이나 받는 예식입니다. 

 

그런데 무죄한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세례가 전혀 필요 없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시다니... 

 

무한한 자기 낮춤, 극도의 겸손, 우리와 나란히 걸어가는 절친한 친구가 되고 싶다는 

하느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 예수님의 세례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행하는 기도와 선행, 봉사와 희생, 너무나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별 의미도 없어 보입니다. 

하느님께 무슨 도움이 되겠나, 의심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 작은 우리의 몸짓들이 하느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도구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우리의 봉헌을 껄껄 웃으시면서, 행복해하시면서, 

기꺼이 받으실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세례>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1-22)"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세례를 받으신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에게 세례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겸손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신다는 뜻으로,

아버지와 성령과 요한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증명하게 하기 위해서,

세례의 물을 축성하기 위해서,

유대교의 세례를 폐지하고 당신의 세례를 세우기 위해서, 등으로 해석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6-17)."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신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위치로 내려오신 일.)

 

복음 말씀의 본문을 보면,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의 뜻은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있을 때에"입니다.

실제로 '온 백성'이 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또 요한의 세례가 완전히 마무리 된 다음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뒤에도

요한은 감옥에 갇히기 전까지 한동안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요한 3,23).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뒤에 기도를 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세례란 수동적으로 받기만 해도 되는 예식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헌신'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베드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1베드 3,21)."

이 말은, 세례는 단순히 형식적인 예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일이고,

구원받기 위해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늘이 열리며" 라는 말은

하느님의 계시가 내리는 상황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평소에는 하늘이 닫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내리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셨음을 사람들이 목격하고 인간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시는 모습을 보고

아마도 사람들은 비둘기가 날아와서 앉는 모습을 연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요한 1,1)

예수님께서 성령을 안 받은 상태로 지내시다가 처음으로 받게 된 것은 아닙니다.

또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아야만 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내리고 하느님의 음성이 들린 일은

사람들을 위한 계시로 해석됩니다.

(일종의 시청각 교육 같은 것.)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뒤에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

아마도 앞으로 하시게 될 일들에 대해서

아버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셨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는 안 나오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확인해 주시는,

또는 직접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겉으로는 예수님께 하신 말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메시아가 되셨음을 선언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원래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가 '되신' 분이 아니라, 원래 메시아이신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에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루카 9,35)."

여기서 하느님 말씀의 뜻은,

"예수는 메시아이니 메시아의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의 말을 들어라."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있는 위치로 내려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인데,

이것은 구원 사업의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를 데리고 올라가셔야 구원사업이 완성됩니다.

우리 쪽에서 표현한다면,

"세례를 받는 것은 구원의 시작일 뿐이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야 구원이 완성된다."입니다.

(세례성사는 졸업식이 아니라 입학식입니다.)

 

'끝까지' 라는 말에서 바로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신앙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속 한가운데에서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최종 목적지를 잊지 말고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송영진 모세 신부



신학과 영성
하느님, 민원 넣으려구요[서공석 신부] 1월 10일(주님 세례 축일) 이사 42,1-4.6-7; 루카 3,15-16.21-22
서공석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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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07  13: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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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일찍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이 행하던 회개의 세례 운동에 예수님이 가담하셨던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들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이 복음 선포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세례 운동을 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에게 세례를 준 요한이 예수님보다 더 큰 인물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복음서를 집필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숨기지 않고 보도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요한에게 가지 않고, 세례를 받은 예수님에게 가도록 장치를 하였습니다. 그 장치의 하나가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요한의 고백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말은 성령이 불혀 모양으로 제자들에게 내려왔다고 말하는 사도행전의 성령강림 장면을 상기시킵니다.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같은 저자가 집필하였습니다.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는 말은 예수님에 비하면, 요한은 종도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세례 사실은 알리되, 요한은 예수님의 출현을 예고한 인물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기도하고 계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태로 그분 위에 내리셨다.’고 말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시는 것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새로운 창조를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새롭게 창조된 인간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고 말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말씀은 시편(2,7)의 메시아에 대한 말과 이사야서(42,1)의 “하느님 마음에 드는 종”이라는 말을 합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인데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하느님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반영된 말입니다.

  
▲ '예수의 세례', 후세페 데 리베라.(1643)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인이 받는 세례를 죽음과 관련짓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오실 때, 그분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는 제자들에게 “당신들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마르 10,38)라고 예수님이 반문하셨다고 합니다. 여기 “내가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누구나 다 그분의 죽음과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았다.”(로마 6,3)고 해설합니다. 초기 신앙공동체가 세례를 죽음과 관련지어 생각한 것은 세례로 시작된 예수님의 활동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신 결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말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대하였듯이,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하고, 현세적 번영을 주는 인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여 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의 모습은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하는 일입니다. 세례는 내어주고 쏟는 그 삶을 시작하는 성사입니다.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 되는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삽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배워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재물은 이 세상에서 나의 삶을 편하게 해줍니다. 권력은 나를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해 줍니다. 나 한 사람 편하고, 나 한 사람 행세하며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재물과 권력은 나를 중심으로 한 세상에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나 한 사람의 안일과 출세를 보장하기 위해 사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하느님이 아닙니다. 성전은 우리의 뜻을 이루어 주는 민원실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 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삽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 하느님과 현세적 부귀영화를 동시에 얻으려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현세적인 것을 잃는 것이 죽음입니다. 잃고 또 잃으면, 자기 목숨마저 잃습니다. 사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스스로를 잃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고 키우는 부모는 부모로 살기 위해 많은 것을 잃습니다. 살신성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재물과 지위와 권력을 자기 인생의 최대 보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비는 사람은 이웃을 형제자매로 생각합니다. 재물만을 좇는 사람은 자기의 자유가 재물만을 위한 것이라 착각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그 자유의 기준입니다.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아끼고 보살피면,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우리의 자유가 지닌 본연의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신앙으로 입문하게 하는 성사입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사는 자유를 누리겠다고 약속하는 성사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허례허식을 끊어 버리고, 하느님의 자유를 좇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이 세상의 물질과 부귀영화를 자기 삶의 유일한 보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례는 그런 것을 최대의 보람으로 생각하였던 자기의 과거가 죽는 성사입니다. 자비롭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 새롭게 살겠다고 약속하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선거 때가 되면, 각 후보들이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들을 봅니다. 자기 한 사람 뽑아 달라고 남을 비방하고 흑색선전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입으로는 백성을 섬기겠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가 표를 많이 얻어, 자기 한 사람이 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면 모두 쉽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이웃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의 말에 귀 기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자,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말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우리가 받은 세례도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또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되도록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세례에서 약속한 대로 하느님의 자녀 되어 내어 주고 쏟음을 살려고 노력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신학과 영성
지금 나를 사랑하기[박병규 신부] 1월 10일(주님 세례 축일) 이사 42,1-4.6-7; 루카 3,15-16.21-22
박병규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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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07  15: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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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같이 어울려 사는 데 익숙한 나머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나 사랑은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자기 소외 현상과 더불어 어김없이 나타나는 건, 나와 함께 있는 이들, 특별히 잘나 보이거나 잘났다고 일컬어지는 이에게 기대는 버릇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개 정치인들에 대한 민중의 처연한 태도에서도 강하게 작동한다. 정치인들에 대한 기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다. 다만, 그 기대가 정치인들의 능력이나 자질에서가 아니라, 민중의 ‘게으른(?)’ 무관심에서 기인할 때가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정치를 제대로 보고자 하는 노력은 상당한 힘을 필요로 한다. 제대로 보기 위해선 주위에 일어나는 일과 그 인과관계 등, 챙겨 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회적 주체로서 자신을 잃어버린 이들이 가지는 정치인들에 대한 기대는 자기 자신과 그 삶에 대한 게으르고 허황된 욕망의 투사일 뿐이다.

요한에 대한 민중의 기대 역시 그러했다. 요한이 살아갔던 시대는 메시아에 대한 바람이 민중 개개인의 좌절과 포기를 기반으로 한 영웅주의에 기대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식민주의를 살던 민중은 메시아가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은 애당초 없었다. 그가 누구든 메시아라면 지금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내 주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민중은 그들의 현실 삶을 너무나 싫어해서 역설적이게도 너무나 그 현실 삶에 붙들려 있었고 그로 인해 참된 메시아는 볼 수도, 보려 하지도 않았다. 너무 심하게 갈구하면 그것에 파묻혀, 새롭게 다가오는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편견에 빠지니까.... 민중은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메시아는 소외되었다.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요한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했다. 자신이 소거된 자리에 새로운 기대를 불러일으킬 메시아를 불러오는데, 그가 예수다. 요한이 예수를 소개하는 방식은 철저한 자기 낮춤이다. 예수의 신발 끈조차 풀어 내지 못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격하시키는 것은 예수와의 관계 안에서 종보다 못한 자리를 굳이 차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예수 시대 랍비들은 그들의 제자들에게 주인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한다. 마치 종이 주인을 대하듯 랍비들의 제자들은 스승을 모셨다. 그런데 신발 끈을 푸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종이라도 주인의 신발 끈을 풀어 주진 않았다. 그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요한이 예수의 신발 끈조차 풀지 못한다 한 것은 종보다 더 낮은 자리, 모든 것을 내어 놓고 버릴 수 있는 자리를 택했다는 철저한 자기 낮춤이다.

메시아 예수는 요한의 ‘자기 낮춤’을 발판 삼아 근엄한 도인이나 현인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예수의 등장은 기대에 찬 민중의 바람과는 전혀 달랐다. 예수는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오히려 죄인들이나 받는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으로 등장한다. 요컨대, 메시아 예수는 종보다 낮은 자리를 스스로 선택한 요한보다 더 낮춘 모습, 곧 ‘죄인’ 예수로 등장한다. 신약성경 곳곳에 예수는 죄 없는 이로 소개되는데(2코린 5,21; 히브 4,15; 7,26; 1베드 2,22; 1요한 3,5 참조), 죄 없는 이가 죄인이 된다는 사실은 하나의 ‘자기 부정’이다. 더 큰 능력을 지닌 채, 자신 아닌 모습으로 처연히 내려앉을 수 있다는 것은 희생이란 말로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이것은 죽음처럼 지독히 힘든 일이어서 사실상 죽음에 가까운 것이다. 예수는 실제로 죽어 갈 것이다. 그 죽음이 이 세상의 죄인들의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 세례 사건의 핵심이다.(로마 6,4; 콜로 2,12 참조) 예수는 하느님이되,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 그래서, 기다려지는 메시아가 아니라 이미, 여기에 사람으로 하나된 메시아로 등장하는 것, 이것이 예수 세례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바다. 기다림엔 새로움이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 삶을 받아 내는, 그것으로 지금 내가, 우리가 처한 삶과 시대를 제대로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메시아 예수는 자신의 세례로 증거한다.

예수의 세례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며,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이 땅과 저 하늘을 하나로 묶어 낸다.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묘사되는 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인데, 그 묘사의 끝이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유일하다. 죄인의 모습으로,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온 예수만 하늘과 땅을 하나로 엮어 내는 유일한 사랑의 시작이요 마침이다.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도래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죽음으로 빚은 사랑의 결실이다. 세상 권력 속에 위엄을 갖춘 임금으로서가 아니라,(시편2 참조) 어디 내놔도 보잘것없을 만큼 초라한 메시아, 죄인 예수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하느님이 기특해 마지않는 메시아의 본모습이다.(이사 42,1 참조)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 경쟁 속에 허덕이는 삶에 지칠 대로 지친 것 같다. ‘더, 더 더’ 좋은 것, 멋진 것, 대단한 것에 ‘환장’한 환우들이 우리 곁에 상존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세상 뒤집어엎을 영웅이 아니라, 세상 속에 스스로에 대한, 우리에 대한 질문을 차분히 던져 볼 여유와 시간이다. 우린 영웅 옆에 기생하려고 이 세상에 사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삶 안에 메시아를 만나 뵈려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 삶이 어떤지, 스스로를 죽여 가며 오시는 메시아가 머물 만한지 먼저 되돌아보는 게 신앙인이 가질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성당에서 묵주 들고 세상의 각박함을 잊고자 하는 이에게 메시아는 도대체 소용이 있을까.... 예수를 받아들이는 건, 지금 현실을 살아 내는 것으로 족하다. 있지도 않을 유토피아에서 예수를 기다리는 허황된 꿈일랑 벗어 던져 보는 것, 그거면 족하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더 읽을 거리: 요한의 세례 운동  http://cafe.daum.net/catolicamadrid/8qyb/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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