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Un sábado, cruzaba Jesús por los sembrados, y sus discípulos empezaron a abrir camino arrancando espigas. Decíanle los fariseos: «Mira ¿por qué hacen en sábado lo que no es lícito?». Él les dice: «¿Nunca habéis leído lo que hizo David cuando tuvo necesidad, y él y los que le acompañaban sintieron hambre, cómo entró en la Casa de Dios, en tiempos del Sumo Sacerdote Abiatar, y comió los panes de la presencia, que sólo a los sacerdotes es lícito comer, y dio también a los que estaban con él?». Y les dijo: «El sábado ha sido instituido para el hombre y no el hombre para el sábado. De suerte que el Hijo del hombre también es señor del sábado».
«El sábado ha sido instituido para el hombre y no el hombre para el sábado»
Rev. D. Ignasi FABREGAT i Torrents
(Terrassa, Barcelona, España)
Hoy como ayer, Jesús se las ha de tener con los fariseos, que han deformado la Ley de Moisés, quedándose en las pequeñeces y olvidándose del espíritu que la informa. Los fariseos, en efecto, acusan a los discípulos de Jesús de violar el sábado (cf. Mc 2,24). Según su casuística agobiante, arrancar espigas equivale a “segar”, y trillar significa “batir”: estas tareas del campo —y una cuarentena más que podríamos añadir— estaban prohibidas en sábado, día de descanso. Como ya sabemos, los panes de la ofrenda de los que nos habla el Evangelio, eran doce panes que se colocaban cada semana en la mesa del santuario, como un homenaje de las doce tribus de Israel a su Dios y Señor.
La actitud de Abiatar es la misma que hoy nos enseña Jesús: los preceptos de la Ley que tienen menos importancia han de ceder ante los mayores; un precepto ceremonial debe ceder ante un precepto de ley natural; el precepto del reposo del sábado no está, pues, por encima de las elementales necesidades de subsistencia. El Concilio Vaticano II, inspirándose en la perícopa que comentamos, y para subrayar que la persona ha de estar por encima de las cuestiones económicas y sociales, dice: «El orden social y su progresivo desarrollo se han de subordinar en todo momento al bien de la persona, porque el orden de las cosas se ha de someter al orden de las personas, y no al revés. El mismo Señor lo advirtió cuando dijo que el sábado había sido hecho para el hombre, y no el hombre para el sábado (cf. Mc 2,27)».
San Agustín nos dice: «Ama y haz lo que quieras». ¿Lo hemos entendido bien, o todavía la obsesión por aquello que es secundario ahoga el amor que hay que poner en todo lo que hacemos? Trabajar, perdonar, corregir, ir a misa los domingos, cuidar a los enfermos, cumplir los mandamientos..., ¿lo hacemos porque toca o por amor de Dios? Ojalá que estas consideraciones nos ayuden a vivificar todas nuestras obras con el amor que el Señor ha puesto en nuestros corazones, precisamente para que le podamos amar a Él.
파격破格의 사랑, 파격破格의 자유
-사람이 먼저다-
‘파격의 사랑, 파격의 자유’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하나 덧붙인다면 ‘파격의 아름다움’입니다.
겨울 들어 가장 추운 오늘 날씨입니다.
새벽 ‘자비의 집’ 본관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말 그대로 살을 에이는 듯한 찬 기운이
온몸에 파고 드는 듯 했습니다.
추위와 더불어 하늘 역시 겨울 들어 가장 맑고 깊었고 별들 역시 초롱초롱 빛났습니다.
추우면 우선 시려 마비되는 곳이 손끝입니다.
몸의 손끝 같이 사회의 변두리에 밀려난 이들 역시 맨먼저 느끼는 세상 추위일 것입니다.
지난 1월 15일 늦은 저녁에 '시대의 지성'이자 '시대의 스승'이라 일컫는 큰 별이 떨어졌습니다.
쇠귀牛耳 신영복 선생이 타계했습니다. 파격의 사랑, 파격의 자유,
파격의 아름다움을 살았던 참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혹자는 ‘우리라는 땅이 신영복이라는 산을 품었다’고 말합니다.
요즘 들어 타계시 선생처럼 신문 지면을 크게 차지한 분도 없었고
많은 분들의 애도를 받은 분도 없었습니다.
성공회대 교수의 감동적인 추도사중 일부입니다.
‘이 추운 겨울, 선생님은 ’꽃처럼 바람처럼’ 훌쩍 가버렸습니다.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받아들이고 미련없이 곡기를 끊으셨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떠난 이 땅에서 장차 우리는 ‘문사철文史哲’의 ‘언어’만이 아닌
‘시서화詩書畵’의 ‘아름다움’으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지식인을
어디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요?
잎사귀가 아닌 뼈대를 직시할 줄 알고, ‘석과불식碩果不食’,
즉 씨 과일은 남겨두어 내년의 풍성한 과일을 생산하는 기반으로 삼는다는 정신으로
미래 시대를 키워낼 수 있는 스승을 다시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강철같이 단단하면서도 물처럼 부드럽고,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한 어른을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선생은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말씀했고,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개념이 아닙니다. 사람이 끝입니다.’말씀했던
참으로 사람을 아꼈던 참된 파격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어제 원장수사의 대화중 마음에 와닿은 한마디에서 착안한 파격의 사랑, 파격의 자유란 강론 제목입니다.
“아마 성전 벽면에 부엉이 눈의 그림이 붙은 것은 파격적일 것입니다.
부엉이 눈은 무섭지 않아요.”
사실 얼핏보면 무서워 보이지만 '깨어있는 눈' 이기에 잘 들여다 보면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하여 미사때마다 자주 성전 뒷면의 부엉이와 눈을 맞추며 깨어 미사를 봉헌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독서의 하느님은 얼마나 파격적인지요.
깊이 들여다보면 '파괴의 파격'이 아닌 '창조의 파격', '파격의 사랑',
'파격의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인용되는 다윗 역시 얼마나 파격적인지요.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다윗의 이런 대담한 파격의 사랑은, 자유는 어디서 기인할까요?
그가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했으며 하느님 역시 그를 깊이 신뢰하고 사랑했다는 확신에서
가능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파격의 사랑과 자유 역시 다윗처럼 하느님께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에 뿌리두고 있음을 봅니다.
안식일 법을 어기며 밀 이삭을 뜯는 제자들의 파격적 행위에 딴지를 거는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파격의 사랑, 파격의 자유의 절정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참 아름다운, 사랑과 자유의 파격의 사람,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예전 모 대선 후보의 ‘사람이 먼저다’라는 모토도 예수님의 위 말씀에 근거하고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을 빼다 닮았기에 예수님의 이런 파격의 사랑과 자유입니다.
우리는 오늘 1독서에서 하느님의 파격적 사랑과 자유의 모습을 봅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을 마음을 본다.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사무엘 예언자를 통하여 사울을 버리고, 사람 눈에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다윗을 선택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얼마나 파격적인지요.
이런 하느님의 자유로운 파격적 모습은 바로 당신의 깊은 사랑에서 기인됨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역시 당신을 닮아 파격의 사랑, 파격의 자유,
파격의 아름다움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에페1,17-18 참조). 아멘.
성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3-24)"
(여기서 '길을 내고 가면서'는 '길을 가면서'입니다.
원문에는 길을 낸다는 뜻이 없습니다.)
지금 바리사이들이 시비를 거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서 먹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고 되어 있습니다(마태 12,1).
(이 내용을 해석할 때, 마태오복음은 읽어 보지도 않고 제자들의 행동을
'율법 문제로 시비를 걸 필요가 없는, 심심풀이로 한 사소한 일'로
생각하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심심풀이로 그런 행동을 했다면,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모든 일(노동)'입니다(탈출 20,8-11; 신명 5,12-15).
그런데 밀 이삭을 뜯어 먹은 행동도 노동으로 볼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도 바리사이들의 그런 생각을 부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떻든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일은 분명히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바리사이들의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마르 2,25-26)"
예수님께서 다윗의 경우를 말씀하신 것은,
율법을 어겼지만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 같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다윗이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배가 고파서' 그랬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도 안식일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가 고파서' 그랬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비난하면 안 됩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행동은 율법을 어긴 일이 아니라는 '반박'이 아니라,
"그들이 율법을 어겼지만 죄를 지었다고 그들을 비난하지는 마라."
라는 '변호'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안식일을 어긴 이들'이지만 '죄 없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배가 고팠는지, 그 정도는 아니었는지... 모릅니다.
하여간에 제자들의 모습은 무척 딱하고 불쌍한 모습이고,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을 가엾게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예수님도 제자들처럼 배가 고픈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밀 이삭 몇 개를 뜯어 먹는다고 배고픔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조금만 더 참지, 배가 좀 고프다고 쓸데없는 행동을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가?" 라고 제자들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한다면 우리도 바리사이 같은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라는 말씀은,
지금 상황에서는 "내 제자들이 안식일을 어긴 것만 보지 말고,
왜 그래야 했는지 그들의 사정을 먼저 보아라."로 해석됩니다.
법보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세속의 법정에서도 정상 참작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법을 말할 때에는 가장 먼저 사랑을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배가 고프면 누구든지 안식일을 어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 양심을 속이면 안 됩니다.
지키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지만 못 지킨 경우와
처음부터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안 지킨 경우는 분명히 다릅니다.)
앞의 말씀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법은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 지침입니다.
따라서 사랑 없는 법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지금 자비 없이 안식일 율법만 따지는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입니다.)
제자들을 변호하신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유대인들은 '안식일은 하느님을 위한 날'이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주일'은 '주님을 위한 날'이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있는 십계명을 잘 읽어 보면,
안식일은 중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한 날,
즉 '사람을 위한 날'입니다.
(종들에게 일을 시키는 주인들을 위한 날이 아니라,
쉬지도 못하고 날마다 중노동을 하는 종들을 위한 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을, "종교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종교를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종교가 하느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독재 권력처럼 되어서 사람을 억압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창조적 휴식
제 1독서 : 히브 6,10-20 (이 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
복 음 : 마르 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주일을 일요일로 고치자.'라는 논쟁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주일을 주님과 함께' 라고 광고를 내자
비신자들이 주일이 아니라 일요일이라고 시정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작은 논쟁이었지만 주일에 대한 신자와 비신자의 생활 방식이 전혀 다름이 드러났던 사건이었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과 율법 학자들은 주일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논쟁을 벌입니다.
안식일은 히브리말로 '샵바트'(sabbatch)라고 하는데
'쉬다, 하던 일을 멈추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이 되는 날 쉬셨기에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해 주님께 바쳐 드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창세2,2-3)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할 때에 주간과 안식일 제도까지 제정하셨다고 창세기 저자는 말합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백성을 다른 민족들과 구분 짓는 커다란 표징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이'안식일'이 예수님과 율법 학자들 사이의 큰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불쌍한 병자를 고쳐 주시는데 이를 바리사이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지요.
이 안식일에 관한 갈등으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모의까지 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분개하며
예수님을 율법의 파괴자로 고발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안식일 자체를 부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이 되면 예수님께서는 으레 회당에 가셔서 전례에 참석하셨지요.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마르1,21-2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 또한 계속해서 안식일 규정을 지켰습니다.
'바오로는 늘 하던 대로 유다인들을 찾아가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하였다.'
(사도17,2)
오늘 복음에서도 안식일 법을 놓고 바리사이들과 예수님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2,2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마르2,25-26)
바리사이들은 참된 안식일의 정신이나 하느님의 뜻보다는
사람들이 만든 법의 세부 규정에 얽매인 그릇된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휴식과 기쁨의 날인 안식일, 곧 하느님을 위하여 거룩히 지내야 하는 날이
일종의 금령의 날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짐스러운 날이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법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7)
안식일은 하느님의 위한 날이고 하느님을 위함은 이웃 사랑으로 구체화됩니다.
다시 말해 안식일은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날인 것입니다.
우리 시대 역시 안식일, 곧 주일을 신자의 의무로만 여기어 짐스럽게만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을 강박관념으로 여겨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죄가 되고,
하느님께로부터 어떤 징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아무런 느낌이 없이 미사에 참여한다면
그들은 또 다른 바리사이들로서 주일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 또한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주일은 나 자신의 휴식을 취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찬미하며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날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통해 육체적인 휴식뿐만 아니라 영적인 재충전도 맞는 은총의 시간을 갖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예수님 시대나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나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계명입니다.
안식일 법을 마련해 주신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예수님과 함께 매주간을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