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를 뿌리고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참고: 겨자나무, 레바논 백향목 http://cafe.daum.net/catolicamadrid/8qyb/241
En aquel tiempo, Jesús decía a la gente: «El Reino de Dios es como un hombre que echa el grano en la tierra; duerma o se levante, de noche o de día, el grano brota y crece, sin que él sepa cómo. La tierra da el fruto por sí misma; primero hierba, luego espiga, después trigo abundante en la espiga. Y cuando el fruto lo admite, en seguida se le mete la hoz, porque ha llegado la siega».
Decía también: «¿Con qué compararemos el Reino de Dios o con qué parábola lo expondremos? Es como un grano de mostaza que, cuando se siembra en la tierra, es más pequeña que cualquier semilla que se siembra en la tierra; pero una vez sembrada, crece y se hace mayor que todas las hortalizas y echa ramas tan grandes que las aves del cielo anidan a su sombra». Y les anunciaba la Palabra con muchas parábolas como éstas, según podían entenderle; no les hablaba sin parábolas; pero a sus propios discípulos se lo explicaba todo en privado.
«El Reino de Dios es como un hombre que echa el grano (...y) la tierra da el fruto por sí misma»
Rev. D. Jordi PASCUAL i Bancells
(Salt, Girona, España)
Hoy Jesús habla a la gente de una experiencia muy cercana a sus vidas: «Un hombre echa el grano en la tierra (...); el grano brota y crece (...). La tierra da el fruto por sí misma; primero hierba, luego espiga, después trigo abundante en la espiga» (Mc 4,26-28). Con estas palabras se refiere al Reino de Dios, que consiste en «la santidad y la gracia, la Verdad y la Vida, la justicia, el amor y la paz» (Prefacio de la Solemnidad de Cristo Rey), que Jesucristo nos ha venido a traer. Este Reino ha de ser una realidad, en primer lugar, dentro de cada uno de nosotros; después en nuestro mundo.
En el alma de cada cristiano, Jesús ha sembrado —por el Bautismo— la gracia, la santidad, la Verdad... Hemos de hacer crecer esta semilla para que fructifique en multitud de buenas obras: de servicio y caridad, de amabilidad y generosidad, de sacrificio para cumplir bien nuestro deber de cada instante y para hacer felices a los que nos rodean, de oración constante, de perdón y comprensión, de esfuerzo por conseguir crecer en virtudes, de alegría...
Así, este Reino de Dios —que comienza dentro de cada uno— se extenderá a nuestra familia, a nuestro pueblo, a nuestra sociedad, a nuestro mundo. Porque quien vive así, «¿qué hace sino preparar el camino del Señor (...), a fin de que penetre en él la fuerza de la gracia, que le ilumine la luz de la verdad, que haga rectos los caminos que conducen a Dios?» (San Gregorio Magno).
La semilla comienza pequeña, como «un grano de mostaza que, cuando se siembra en la tierra, es más pequeña que cualquier semilla que se siembra en la tierra; pero una vez sembrada, crece y se hace mayor que todas las hortalizas» (Mc 4,31-32). Pero la fuerza de Dios se difunde y crece con un vigor sorprendente. Como en los primeros tiempos del cristianismo, Jesús nos pide hoy que difundamos su Reino por todo el mundo.
♣ 하느님 자녀들의 거룩한 여유 ♣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의 벗이 되어주시며 자유와 해방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에 군중들은 놀라고 열광했지만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데 길들여져 나자렛 시골 출신이요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 그리고 그분과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믿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4,26-29)와 겨자씨의 비유(4,30-32)를 통하여 미소한 것도 하느님 나라의 위력을 지니며, 그 나라는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초에는 보이지 않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반드시 오며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서 씨앗은 농부에 의해 뿌려지지만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합니다.”(4,28) 이 점이 바로 인간의 세상과 하느님 나라의 근원적인 차이입니다.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가시적인 성과나 변화에 끌려다니느라 보이지 않는 기묘한 방법으로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확장되어가며 어김없이 수확 때가 돌아오듯이 반드시 도래합니다(4,29).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많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들과 변화하는 현상들에 끌려 숨 가쁘게 살아갑니다. 그런 가운데 농부처럼 땀을 쏟고 고통을 감수한 다음, 어김없이 다가오는 수확의 때를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기보다는 조급해 합니다. 계획은 인간이 하지만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얼마나 자주 망각하는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낙담하거나 의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태도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지 않는 교만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녀답게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 나라를 위해 되돌리되 완성시켜주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인정하며 기다리는 ‘거룩한 여유’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언제든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치열하게 살면서 반드시 오게 될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기에 합당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눈에 보잘것없어 보이고 무가치해 보이는 아주 작은 씨앗을 통해서도 생명과 희망의 선물을 주시고 창조를 이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커가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는 ‘거룩한 여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여유는 그저 일이 없는 시간적 여백이나 신체적 자유를 말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거짓 자아와 집착과 탐욕, 육의 욕망에서 온전히 벗어날 때 찾아드는 영(靈)의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하루도 눈에 보이는 현상과 육의 욕망을 좇는 조급한 발걸음을 멈추고 거룩한 여유를 되찾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그리는 여유로움으로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과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키시며 행복을 가져다주시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하느님 중심의 삶
우연은 없습니다.
깨닫고 보면 모두가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제가 15년전 2001년 이맘때즘, 11년전 2005년 이맘때쯤 수녀원에 피정지도차 건강한 몸으로 왔다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0년이 지난 2016년 오늘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수녀원에 와서 그리웠던 수녀님들의 한결같은 모습을 보니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기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새벽 잠에서 깨어나자 문득 떠오른 고려말 길재의 ‘오백년 도읍지를’ 이란 시조입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즉시 중간 구절을 바꿔 읽으니 그대로 통했습니다.
‘인걸은 의구하되 산천은 간데 없네.’
수녀님들은 그대로 인데 수도원 앞의 산천은 상전벽해 완전히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경부고속도로 건너편 우뚝 솟은 산에 일출 장면도 장관이었는데
이제 고층 아파트가 가리웠고,
‘아, 사라진 논과 밭의 자연은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었구나.’하는 안타까운 생각에
마음이 시렸습니다.
하여 마음이 약간 굳어있었는데 수녀님들의 꽃같은 환대에 활짝 펴졌습니다.
15년전, 11년전이나 변함없는 수녀님들의 모습에
어제 저녁식탁에서 어느 수녀님께 드린 덕담도 생각납니다.
“어, 수녀님 그대로네요. 그때나 변함이 없어요. 수녀님은 영원이십니다.”
곁에 있던 수녀님도 공감의 폭소를 터뜨렸습니다만,
이 또한 하느님의 기적이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 오셨음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세월 흘러 나이 들어도
영혼은 영원한 청춘이라 모습에도 하느님의 영원이 반사되기 마련입니다.
제가 요셉수도원에 정주한지 1988년부터 2016년 지금까지이니 올해로 29년째가 됩니다.
놀라운 사실을 소개합니다.
29년전 아기 나무였던 소나무들이 이젠 숲의 아름드리 나무가 되었습니다.
절집의 자산은 노목老木과 노승老僧이라 했는데
수도원의 사람들도 나무들도 큰 숲을 이룬 느낌입니다.
‘아, 나무의 외적성장은 사람의 내적성장을 상징하는구나’ 깨닫게 됩니다.
사실 함께 정주해온 도반 형제들의 모습에서 언뜻 거목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데
여기와서 그리웠던 수녀님들의 그윽한 모습을 볼 때도 이와 똑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순종의 삶을 살아오셨음에 대한 생생한 증거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일컫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해설을 읽으며 위 말을 묵상했습니다.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만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바로 씨뿌리는 사람이 가리키는 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처럼 일희일비하지 않고 항구한 믿음과 희망으로 사는 것이 하느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얼마나 낙관적 긍정적 삶입니까?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를 두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지 않으면
이렇게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수 없습니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현재만이 아닌 과거와 미래를 조망하는 넓고도 깊은 시야입니다.
길바닥이든 돌밭이든 가시덤불밭이든 환경 탓하지 않고 개의치 않고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니
급기야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놀라운 기적같은 수확입니다.
짧은 안목에는 실패인생인 듯 했는데 깨닫고 보니 성공인생이요,
전투에는 진 것 같은 삶이었는데 전쟁에는 이긴 삶이었습니다.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것이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복음의 전반부 비유의 중심이 씨뿌리는 사람이라면 후반부 해설의 중심은 토양입니다.
문제는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 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 밭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들이 좋아도
내 마음 밭이 길바닥 같다면, 돌밭 같다면, 가시덤불 같다면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바로 이 자리가 항구한 수행의 노력을 필요로하는 자리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타고난 마음 밭도 있지만
항구한 노력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박토의 마음밭도 옥토로 변할 수 있습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결과임을 다음 복음 말씀이 입증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
하느님 중심의 항구한 노력의 수행을 기울인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하느님은 나탄 예언자에게,
당신 눈에는 여전히 철부지인 다윗을 찾아 말씀을 전하게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이 주어가 된 문장들입니다.
바로 다윗을 통해 베풀어 주신 하느님 은혜를 상기시키며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자극합니다.
바로 이것이 삶의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다윗은 나탄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기 삶의 문장들을 하느님을 주어로 삼아 렉시오 디비나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수도원에 보내 주셨다’
문장에서 처럼 하느님을 주어로 삼을 때의 겸손과,
‘내가 수도원에 왔다.’
즉 나를 주어로 삼을 때의 교만은 실로 엄청난 차이입니다.
새삼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우리 영성생활에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에, 선행의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시며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4,9).
아멘.
이수철 프란시스코 신부
허물어지는 것은 한 순간
때로 죄나 악의 세력들이 지닌 힘이 얼마나 강렬한지...
나약한 우리가 홀로 막아내고 저항하기가 이만저만 힘겨운 게 아닙니다.
인간을 악의 골짜기로 인도하는 어둠의 세력이 지닌 확장성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나는 아무 걱정하지 마. 그 정도는 이겨낼 수 있어.’ 라고 큰소리치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깊고 깊은 악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자신의 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지속적인 겸손이며,
유혹 앞에서의 즉각적인 기도인 것입니다.
죄란 것이 그렇더군요.
한번 짓기 시작하면 어느새 몸에 익숙해집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딱 이번 한번만이라고 다짐하지만
어느새 죄는 눈덩이처럼 커져가고 습관화됩니다.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의 사슬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게 되고 맙니다.
죄란 것이 그렇더군요.
한 가지 죄를 지으면 또 다른 죄가 고개를 내밀며 유혹합니다.
죄들은 서로를 부추기면서 점점 한 인간 자체를 죄의 소굴로 만들어버립니다.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칠죄종(七罪宗)
다시 말해서 일곱 가지 대죄(大罪)는 교만, 인색, 음욕, 탐욕, 분노. 질투, 나태인데,
이들 각자는 서로 단합해서 한 인간을 점점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고
결국 한 존재를 폐허처럼 만들어버립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멀쩡하다 할지라도 절대 방심해서는 안되겠습니다.
허물어지는 것은 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 왕이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성왕으로 점지된 다윗이었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성덕으로 백성들을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나약한 한 인간이었습니다.
잠시 하느님에게서 눈을 떼고 살짝 방심한 사이 그는 어느새
깊은 죄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 죄는 또 다른 죄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는 충신 중의 충신 우리야를 사지로 몰아넣고 죽게 했습니다.
또 다른 충직한 신하 역시 공범으로 전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죄는 또 다른 죄를 불러왔습니다.
다윗의 실수는 죄와 악의 세력이 지닌 확장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이상 죄와 악의 확장성에 놀라워하고 가슴을 쳐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보다는 하느님 나라가 지니는 놀랍고 신비한 확장성을 체험하며 기뻐해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니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확장성’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풍요로움’이 아닐까요?
한없는 관대함과 자비로움이 아닐까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겨자씨 하나가 자라고 자라서
날아가는 새들까지 깃들일 큰 나무로 성장하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아주 작은 선행 하나, 이웃을 향한 아주 미세한 희생 하나,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실천한 티끌만한 사랑의 봉사 하나가
백배, 천배 확장되어 하느님으로부터의 아낌없는 칭찬과 보상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스스로 씨앗이 되어야 함을...
오늘 복음은 나머지 두 개의 ’자라나는 씨의 비유’(26-29절)와 ’겨자씨의 비유’(30-32절)를
한꺼번에 들려준다.
각 비유의 시작(26절, 30절)에서 직접 언급되었듯이 비유의 주제는 하느님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땅에 뿌려진 씨앗과 같이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낟알을 맺는 이삭으로 성장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어느 씨앗보다도 작은 것이지만 땅에 심겨지면
새들이 둥지를 틀고 그 그늘에 쉴 수 있을 만큼 큰 푸성귀(나무; 마태 13,32)로 자라난다는 것이다.
비유의 특징은 시작과 끝의 대조, 작고 하찮은 것에서 시작하여 놀랍고 엄청난 결과로 끝맺는
대조(對照)에 있다.
오늘 두 가지 비유를 첫 번째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연결하여 생각하면
이해는 더 빨라진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아주 열악한 환경, 즉 길바닥이나, 흙이 많지 않은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을 제외하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그 토양의 조건에 따라 30배, 60배, 100배의 놀라운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따라서 좋은 땅에 씨가 뿌려진 경우에 한하여 세 가지 비유를 모두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우선 세 가지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씨앗(seed)’과 ’성장(growth)’과 ’열매(fruit)’이다.
이 셋은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요소들로서
씨앗은 시작을,
성장은 과정을,
열매는 마지막 결과를 뜻한다.
시작은 어떤 경우에든 작고 미약하다.
마지막 결과인 열매는 놀랍고 엄청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 해당되는 성장은 사람의 머리로는 잘 파악할 수 없는 신비에 덮여있다.
이렇게 하느님나라는 작고 미약한 복음의 씨앗을 시작으로
누구도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성장과정을 거쳐 진정한 하느님나라로 완성된다.
이 완성은 곧 ’낫이 사용되는 추수의 때’로서 종말을 의미한다.
하느님나라의 완성은 조그만 씨앗이 놀라운 열매를 내듯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아무도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없다.
농부라면 씨앗에서 열매까지의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농부에게조차도 성장의 신비는 놀라움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놀라운 성장의 신비를 처음부터 끝까지 체험하려는 자는
스스로 씨앗이 되어 땅에 묻혀야 한다.
오늘 두 가지 비유의 청중은 누구인가?
앞서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청중은 호숫가에 모여든 모든 군중이었고,
’등불의 비유’와 종말보상률에 관한 훈시는 12제자와 다른 특별한 제자들에게 한정된 말씀이었다.
비유설교의 마지막 부분(33-34절)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 복음의 두 가지 비유는 다시금 전체 군중을 향한 말씀이다.
예수께서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여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있는 사람에게는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고 한다.
웬 차별인가?
예수께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9절, 23절)고 하시면서
왜 군중과 제자들을 차별하시는 것일까?
제자들이 두 귀 말고도 다른 ’들을 귀’를 달고라도 있는 것일까?
군중과 제자들을 따로 차별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권한에 속한다.
즉 예수님 마음이다.
그러나 군중에게도 여전히 ’들을 귀’를 가꾸어 나갈 수 있는 기회는 있다.
반면 제자들에게도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들을 귀’를
단계적으로 시험받아야 하는 일이 남아있다.
따라서 누구에나 하느님나라의 복음은 열려있고, 복음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복음은 처음에는 씨앗과 같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씨앗이시듯이
제자들도 씨앗이 되어야함을 시험받게 될 것이다.
스스로 씨앗이 되는 자만이 하느님나라의 성장신비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복음 말씀은 마르코복음 4장 26절-34절,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6-27)."
이 말씀에서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라는 말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몰라도 된다." 라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또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입니다.)
이 세상의 일 가운데 우연히, 또는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몰라도, 또 우리 눈에는 안 보여도,
이 세상의 일에는 하느님의 섭리와 통치권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바람과는 다른 결과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믿어야 합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니까 씨를 뿌린 다음에 가만히 있어도 된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뿌린 씨를 가꾸고 보살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싹이 트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 생명 작용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사람도 사람의 일은 해야 합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면,
그 나머지 과정은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사도들은 교회를 '어떻게' 성장시켜야 하는지를 알았을까?
몰랐습니다. 그냥 했습니다.
사도들은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길을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교회 운영에 관한 무슨 '매뉴얼' 같은 것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고,
정해진 틀이나 제도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열성적으로 일했을 뿐입니다.
일하다가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어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일곱 봉사자'를 뽑아서 식탁 봉사를 맡긴 일은(사도 6,2-5)
배급 문제로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입니다(사도 6,1).
아마도 그때 사도들은 함께 의논만 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새로운 제도를 만든 것은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성령께서 인도해 주신 덕분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율법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사도 회의를 연 일도 마찬가지입니다(사도 15장).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1-32)."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그 자리에 모여 있었던 사람은 '백스무 명가량'이었습니다(사도 1,15).
'120명'은 당시 교회의 전체 신자 수였을 것입니다.
(만일에 그때 박해자들이 교회를 일망타진하려고 작정했다면,
아주 간단하게 전멸시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후에 베드로 사도가 설교했을 때,
그날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은 '삼천 명가량'입니다(사도 2,41).
'120명'이 순식간에 '삼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글자 그대로 '겨자씨'가 '큰 나무'로 성장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7)."
신자들의 수가 늘어난 것은 '주님께서' 보태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장과 발전은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물론 사도들도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일을 충실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런 결과를 예상했을까?
기대는 했겠지만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선교활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1코린 3,6-7)."
이 말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말은 "안 해도 된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라게 하시니 우리는 결과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고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심는 사람은 열심히 심고, 물을 주는 사람은 열심히 물을 주고..."
이 내용은 개인의 신앙생활과 인생에도 적용됩니다.
지금 뭔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또 그 희망이 주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확신한다면,
자기가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 하고,
결과는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도 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또 자기가 바라는 대로만 되어야 한다고 주님께 결과를 강요하는 것도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떤 시험을 준비하고 있고,
그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주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확신한다면,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사람 쪽에서 할 일이고,
합격 여부는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시험공부는 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주님의 뜻이 어떤 것이든지 상관없이 '무조건' 합격해야 한다고 고집부리는 것은
교만입니다.
(승진, 건강, 사업... 인생살이의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