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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복음 묵상

[복음]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160219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6.02.19|조회수198 목록 댓글 0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n aquel tiempo, Jesús dijo a sus discípulos: «Os digo que, si vuestra justicia no es mayor que la de los escribas y fariseos, no entraréis en el Reino de los cielos. Habéis oído que se dijo a los antepasados: ‘No matarás; y aquel que mate será reo ante el tribunal’. Pues yo os digo: Todo aquel que se encolerice contra su hermano, será reo ante el tribunal; pero el que llame a su hermano "imbécil", será reo ante el Sanedrín; y el que le llame "renegado", será reo de la gehenna de fuego. 


»Si, pues, al presentar tu ofrenda en el altar te acuerdas entonces de que un hermano tuyo tiene algo contra ti, deja tu ofrenda allí, delante del altar, y vete primero a reconciliarte con tu hermano; luego vuelves y presentas tu ofrenda. Ponte enseguida a buenas con tu adversario mientras vas con él por el camino; no sea que tu adversario te entregue al juez y el juez al guardia, y te metan en la cárcel. Yo te aseguro: no saldrás de allí hasta que no hayas pagado el último céntimo».


«Deja tu ofrenda allí, delante del altar, y vete primero a reconciliarte con tu hermano»

Fr. Thomas LANE 

(Emmitsburg, Maryland, Estados Unidos)

Hoy, el Señor, al hablarnos de lo que ocurre en nuestros corazones, nos incita a convertirnos. El mandamiento dice «No matarás» (Mt 5,21), pero Jesús nos recuerda que existen otras formas de privar de la vida a los demás. Podemos privar de la vida a los demás abrigando en nuestro corazón una ira excesiva hacia ellos, o al no tratarlos con respeto e insultarlos («imbécil»; «renegado»: cf. Mt 5,22).


El Señor nos llama a ser personas íntegras: «Deja tu ofrenda allí, delante del altar, y vete primero a reconciliarte con tu hermano» (Mt 5,24), es decir, la fe que profesamos cuando celebramos la Liturgia debería influir en nuestra vida cotidiana y afectar a nuestra conducta. Por ello, Jesús nos pide que nos reconciliemos con nuestros enemigos. Un primer paso en el camino hacia la reconciliación es rogar por nuestros enemigos, como Jesús solicita. Si se nos hace difícil, entonces, sería bueno recordar y revivir en nuestra imaginación a Jesucristo muriendo por aquellos que nos disgustan. Si hemos sido seriamente dañados por otros, roguemos para que cicatrice el doloroso recuerdo y para conseguir la gracia de poder perdonar. Y, a la vez que rogamos, pidamos al Señor que retroceda con nosotros en el tiempo y lugar de la herida —reemplazándola con su amor— para que así seamos libres para poder perdonar.


En palabras de Benedicto XVI, «si queremos presentaros ante Él, también debemos ponernos en camino para ir al encuentro unos de otros. Por eso, es necesario aprender la gran lección del perdón: no dejar que se insinúe en el corazón la polilla del resentimiento, sino abrir el corazón a la magnanimidad de la escucha del otro, abrir el corazón a la comprensión, a la posible aceptación de sus disculpas y al generoso ofrecimiento de las propias».


«Si vuestra justicia no es mayor que la de los escribas y fariseos, no entraréis en el Reino de los Cielos»

Rev. D. Joaquim MESEGUER García 

(Sant Quirze del Vallès, Barcelona, España)

Hoy, Jesús nos llama a ir más allá del legalismo: «Os digo que, si vuestra justicia no es mayor que la de los escribas y fariseos, no entraréis en el Reino de los cielos» (Mt 5,20). La Ley de Moisés apunta al mínimo necesario para garantizar la convivencia; pero el cristiano, instruido por Jesucristo y lleno del Espíritu Santo, ha de procurar superar este mínimo para llegar al máximo posible del amor. Los maestros de la Ley y los fariseos eran cumplidores estrictos de los mandamientos; al repasar nuestra vida, ¿quién de nosotros podría decir lo mismo? Vayamos con cuidado, por tanto, para no menospreciar su vivencia religiosa. 


Lo que hoy nos enseña Jesús es a no creernos seguros por el hecho de cumplir esforzadamente unos requisitos con los que podemos reclamar méritos a Dios, como hacían los maestros de la Ley y los fariseos. Más bien debemos poner el énfasis en el amor a Dios y los hermanos, amor que nos hará ir más allá de la fría Ley y a reconocer humildemente nuestras faltas en una conversión sincera.


Hay quien dice: ‘Yo soy bueno porque no robo, ni mato, ni hago mal a nadie’; pero Jesús nos dice que esto no es suficiente, porque hay otras formas de robar y matar. Podemos matar las ilusiones de otro, podemos menospreciar al prójimo, anularlo o dejarlo marginado, le podemos guardar rencor; y todo esto también es matar, no con una muerte física, pero sí con una muerte moral y espiritual.


A lo largo de la vida, podemos encontrar muchos adversarios, pero el peor de todos es uno mismo cuando se aparta del camino del Evangelio. Por esto, en la búsqueda de la reconciliación con los hermanos hemos de estar primero reconciliados con nosotros mismos. Nos dice san Agustín: «Mientras seas adversario de ti mismo, la Palabra de Dios será adversaria tuya. Hazte amigo de ti mismo y te habrás reconciliado con ella».



♣ 생명을 키우고 넓혀가는 길 ♣ 


에제키엘 예언자는 제1차 바빌론 유배를 전후하여 어려움 중에 있는 유다 백성을 향하여 스스로는 회개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과 집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잘못을 경고합니다. 다른 한편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1)라는 하느님의 자비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5,20)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율법의 세목을 지키고 정해진 교리를 꼬박꼬박 지키는 것만으로는 신앙인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살인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생명 존중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육신을 죽이지 않는 외적 행위 뿐 아니라, 성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말함으로써 평화를 깨뜨리며 마음에 상처를 주는 내적 살인도 해서도 안 된다 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개별 목숨에 국한시키지 않으시고 관계 안에서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최대한을 요구하시고, ‘보다 더’를 요청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요구에 충분히 응답하며 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더 잘 응답하려면 무엇보다도 잠에서 깨어나 영적 감각을 되살려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늘 하느님 앞에 자신을 두고 온갖 피조물을 지극한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보살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지니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민감한 영적 감각을 지닐 때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에서도 분노, 폭언, 멸시, 관계 단절과 같은 평온과 일치를 깨뜨리는 행동을 그만 둘 것입니다. 아울러 형제와 ‘먼저’ 화해하지 않고는 참지 못할 것입니다.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면 분노, 증오, 악의, 험담과 같은 반생명적인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립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 수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고”(5,23-24), "고소를 당하면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마지막 한 닢까지 갚고 얼른 타협하라." 


우리 사회는 거짓과 무책임, 당리당략의 추구, 공정한 기회의 박탈, 금수저와 흙수저로 표현되는 신분 차별, 돈과 경쟁으로 숨쉬기 힘든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인들부터 대충주의와 안일함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예수님 께서는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5,26)이라 하십니다. 


갚는다는 것은 생명을 거스르는 온갖 부조화와 불일치, 부정적인 언어와 움직임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이제 서로 존중하면서 애정어린 대화, 따뜻한 배려와 관대한 이해, 차별과 불화의 극복을 통해 자유롭게 생명의 관계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나 영성생활은 늘 '보다 더', ‘아직도 더’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잠든 의식을 일깨워 어떤 상황이나 관계에서도 주님의 영을 품고 ‘더’, ‘먼저’, ‘서둘러’ 사랑하고 작은 것 하나도 소중히 여김으로써 생명을 키워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학과 영성
불의하게 번 돈도 사절하지 않는 교회[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22
김근수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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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7.16  10:4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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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옛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자기 형제자매에게 화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며, 자기 형제자매에게 바보(Raka)라고 말하는 자는 최고법원에 넘겨질 것이며,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불타는 지옥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당신 형제자매가 당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일이 떠오르거든 당신의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우선 가서 당신 형제자매와 화해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와서 당신의 예물을 바치십시오. 당신 적대자와 함께 길을 걷는 동안 당신은 얼른 그와 화해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적대자가 당신을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넘겨 당신은 감옥에 갇힐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말합니다. 마지막 푼돈까지 여러분이 다 갚기 전에 여러분은 감옥에서 결코 석방되지 못할 것입니다.” (마태 5,21-26)


복된 선언 후 여섯 개 반대 명제(Anti-these)를 마태오가 시작하는 본문이다. 예수가 율법과 예언을 어떻게 완성하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어떻게 넘어서는지 보여주는 구절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보다 더 잘하는 것으로 그들을 넘어서야 한다. 예수를 돋보이기 위해서라면 유다교를 무작정 비난하려는 유혹에 교회는 저항해야 한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비난하는 것으로는 교회가 그들을 넘어설 수 없다.


‘이렇게 말해졌습니다’라는 수동태 표현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말합니다’는 예수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랍비 A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어법이 당시 랍비들의 논쟁에서 흔히 사용되었다. 그리고 랍비들은 성서를 인용하곤 하였다〔신약성서에 나오는 ‘성서’라는 단어는 모두 공동성서(구약성서)를 가리킨다. 예수 자신은 4복음서나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랍비들과 다르게 예수는 성서 구절을 반대 증명으로 인용하지 않고 자신의 독창적 해설을 덧붙인다. 유다교에서 ‘옛사람’은 유다교 회당의 노인들이나 옛 세대 전부를 가리킬 수 있지만, 여기서는 모세 시대의 시나이 전승을 이어받은 선조들을 가리킨다(여호 24,31). 살인자에 대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는 규정을 공동성서에서 정확히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창세기 9,6와 탈출기 21,12를 참조하는 것 같다.


  
▲ ‘사도들에게 설교하는 그리스도’, 두초(Duccio di Buoninsegna)의 작품, 1311년

화내는 자에 대한 심판은 세상적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킨다. 마태오 공동체 구성원에게 “형제”라는 단어를 마태오는 즐겨 쓰는데, 그 단어가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예배나 미사에서 “형제”라는 단어를 “형제자매”라고 옮겨 읽어야 하겠다. 성서 구절이 남녀차별의 근거로 이용되면 안 되겠다.) “바보(Raka)”라는 히브리어 욕설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특이하다. 마태오 복음 당시 독자에게 익숙한 낱말이 아닐까. 마태오 복음이 시리아에서 쓰였다는 추측을 뒷받침하는 단어다.


화-바보-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세 가지 나열이 점층법을 뜻하는 것 같지는 않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의 심한 단어다. 최고법원(Synhedrion)에 넘긴다는 말을 단어 그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마태오는 여기서 세상 법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최후심판(Krisis)을 연상하는 것 같다(마태 10,15; 11,22; 12,36). 하느님의 ‘심판’(Krisis=영어 crisis)가 인간에게 진짜 ‘위기’다. ‘불타는 지옥’이란 단어는 신약성서에 마태오 복음서에서만 나타난다(마태 23,23; 마르 9,43 ‘지옥의 불’). 빚진 사람이 감옥에 가는 경우가 유다 법에는 없었다. 그리스-로마법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는 행위가 언제 중단되어야 하는지 유다교에서 자주 토론되었다. 훔친 제물을 가져올 경우, 이웃에게 저지른 피해가 복구되지 않았을 경우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잠언 15,8; 21,3).


예수는 유다교의 이러한 규칙을 넘어 형제자매 사이의 적극적 화해를 요구하신다. 내 형제자매가 내게 원한 품은 사실을 안다면 내가 먼저 가서 화해를 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는 참 성질도 좋으시다. 화해 없는 상태에서 예배 참석, 부패한 돈을 헌금하기, 엉터리 성서 해설 등으로 오늘 그리스도교는 예배를 또 얼마나 유린하고 있는가. 불의하게 번 돈도 전혀 사절하지 않는 교회다. 교회는 간도 쓸개도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교회가 감히 언제 경제정의를 외칠 면목이나 있겠는가(교회=개신교 · 가톨릭을 모두 가리키는 호칭).


한쪽에서 분노 마케팅이 활발하고 다른 쪽에서 힐링 마케팅이 한창인 우리 사회다. 어디 분노뿐이랴. 하느님이 허락하신다면 저승사자 노릇도 기꺼이 하고픈 우리 사회다. 누구누구만 없어진다면 그래도 우리 사회는 달라질 텐데―그런 생각 없는 사람 어디 있나. 그러나 살인 욕구뿐 아니라, 분노뿐 아니라 언어도 조심해야 한단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아름답고, 정확하게 말하라’는 두 가지 지침을 알려준다. 정확하지도 못하고 아름답지도 않은 단어를 우리는 매일 즐겨 쓴다. 교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능숙히 지어내고 진실도 가볍게 외면하는 못된 버릇이 교회 안에 적지 않다. 성서신학의 연구 성과를 외면하는 것도, 빨갱이 운운하는 설교가 많은 것도 교회의 이익을 지키려는 어리석은 몸부림에서 비롯된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단락은 교회 역사와 설교에서 주로 개인윤리 차원에서 다루어졌다. 로마 제국의 국교로 지정되면서 국민윤리 교육을 담당하는 처지로 돌변한 그리스도교에게 예정된 수순이다. 그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다.


악마도 성서를 능숙히 인용할 줄 안다. 그러나 예수는 성서 구절을 함부로 인용하지 않았다. 성서에 등장하는 단어의 어원 분석, 시대적 배경에 대한 정보, 성서 저자의 편집 의도와 영향사(影響史)에 대한 식견 없이 마구 해대는 성서 인용주의는 얼마나 위험한가. 우리말로 번역된 성서의 어떤 단어에 집중하여, 자기 경험과 연상에 도취된 채 상상의 날개를 타고, 성서 본문과 무관한 엉뚱한 메시지에 도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한 추리력의 결과를 성서 메시지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성서 인용주의는 올바른 성서 이해를 망치는 주범 중 하나다.


‘살인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은 로마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로마 군인을 살해하던 바리사이파 분파인 젤로데 무리에게 아주 곤혹스럽게 들렸겠다. 억압자를 눈앞에 두고도 처형을 망설이는 피억압자의 착한 마음을 억압자들은 짐작이나 할까. 젤로데파는 장발장의 심정과 가깝겠다.


신약성서, 특히 공관복음서는 한마디로 전쟁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민족 군사지배에 시달리는 식민지 백성의 아픈 현실과 생존을 위한 지혜가 담긴 작품이다. 성서를 읽을 때 피식민지 백성의 아픔이 생생하게 느껴지는가. 자기 땅에 살면서도 남의 땅에 사는 듯한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이 성서에서 느껴지는가. 성서를 읽으면서 ‘레 미제라블’이 떠오르는가.


그런 느낌이 없다면 아직 성서를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겠다. 성서에서 역사를 빼면 남는 것은 윤리교과서뿐이다. 성서를 교양서적으로 축소하는 요즘 유행에 속으면 안 된다. 성서는 힐링을 노리는 책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라고 권하는 책이다. 힐링은 지배세력에게 매력적인 코드지만 저항하는 책이란 표현은 교회에서도 문전박대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소브리노(Sobrino)로부터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집중 연구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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