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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복음 묵상

[복음]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160226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6.02.27|조회수174 목록 댓글 0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viendo que todos los publicanos y los pecadores se acercaban a Jesús para oírle, los fariseos y los escribas murmuraban, diciendo: «Este acoge a los pecadores y come con ellos». Entonces les dijo esta parábola. «Un hombre tenía dos hijos; y el menor de ellos dijo al padre: ‘Padre, dame la parte de la hacienda que me corresponde’. Y él les repartió la hacienda. Pocos días después el hijo menor lo reunió todo y se marchó a un país lejano donde malgastó su hacienda viviendo como un libertino. Cuando hubo gastado todo, sobrevino un hambre extrema en aquel país, y comenzó a pasar necesidad. Entonces, fue y se ajustó con uno de los ciudadanos de aquel país, que le envió a sus fincas a apacentar puercos. Y deseaba llenar su vientre con las algarrobas que comían los puercos, pero nadie se las daba. Y entrando en sí mismo, dijo: ‘¡Cuántos jornaleros de mi padre tienen pan en abundancia, mientras que yo aquí me muero de hambre! Me levantaré, iré a mi padre y le diré: Padre, pequé contra el cielo y ante ti. Ya no merezco ser llamado hijo tuyo, trátame como a uno de tus jornaleros’. Y, levantándose, partió hacia su padre. 


»Estando él todavía lejos, le vio su padre y, conmovido, corrió, se echó a su cuello y le besó efusivamente. El hijo le dijo: ‘Padre, pequé contra el cielo y ante ti; ya no merezco ser llamado hijo tuyo’. Pero el padre dijo a sus siervos: ‘Traed aprisa el mejor vestido y vestidle, ponedle un anillo en su mano y unas sandalias en los pies. Traed el novillo cebado, matadlo, y comamos y celebremos una fiesta, porque este hijo mío estaba muerto y ha vuelto a la vida; estaba perdido y ha sido hallado’. Y comenzaron la fiesta. 


»Su hijo mayor estaba en el campo y, al volver, cuando se acercó a la casa, oyó la música y las danzas; y llamando a uno de los criados, le preguntó qué era aquello. El le dijo: ‘Ha vuelto tu hermano y tu padre ha matado el novillo cebado, porque le ha recobrado sano’. Él se irritó y no quería entrar. Salió su padre, y le suplicaba. Pero él replicó a su padre: ‘Hace tantos años que te sirvo, y jamás dejé de cumplir una orden tuya, pero nunca me has dado un cabrito para tener una fiesta con mis amigos; y ¡ahora que ha venido ese hijo tuyo, que ha devorado tu hacienda con prostitutas, has matado para él el novillo cebado!’ Pero él le dijo: ‘Hijo, tú siempre estás conmigo, y todo lo mío es tuyo; pero convenía celebrar una fiesta y alegrarse, porque este hermano tuyo estaba muerto, y ha vuelto a la vida; estaba perdido, y ha sido hallado’».


«Me levantaré, iré a mi padre y le diré: Padre, pequé contra el cielo y ante ti»

Rev. D. Llucià POU i Sabater 

(Granada, España)

Hoy vemos la misericordia, la nota distintiva de Dios Padre, en el momento en que contemplamos una Humanidad “huérfana”, porque —desmemoriada— no sabe que es hija de Dios. Cronin habla de un hijo que marchó de casa, malgastó dinero, salud, el honor de la familia... cayó en la cárcel. Poco antes de salir en libertad, escribió a su casa: si le perdonaban, que pusieran un pañuelo blanco en el manzano, tocando la vía del tren. Si lo veía, volvería a casa; si no, ya no le verían más. El día que salió, llegando, no se atrevía a mirar... ¿Habría pañuelo? «¡Abre tus ojos!... ¡mira!», le dice un compañero. Y se quedó boquiabierto: en el manzano no había un solo pañuelo blanco, sino centenares; estaba lleno de pañuelos blancos.


Nos recuerda aquel cuadro de Rembrandt en el que se ve cómo el hijo que regresa, desvalido y hambriento, es abrazado por un anciano, con dos manos diferentes: una de padre que le abraza fuerte; la otra de madre, afectuosa y dulce, le acaricia. Dios es padre y madre...


«Padre, he pecado» (cf. Lc 15,21), queremos decir también nosotros, y sentir el abrazo de Dios en el sacramento de la confesión, y participar en la fiesta de la Eucaristía: «Comamos y celebremos una fiesta, porque este hijo mío estaba muerto y ha vuelto a la vida» (Lc 15,23-24). Así, ya que «Dios nos espera —¡cada día!— como aquel padre de la parábola esperaba a su hijo pródigo» (San Josemaría), recorramos el camino con Jesús hacia el encuentro con el Padre, donde todo se aclara: «El misterio del hombre sólo se esclarece en el misterio del Verbo encarnado» (Concilio Vaticano II). 


El protagonista es siempre el Padre. Que el desierto de la Cuaresma nos lleve a interiorizar esta llamada a participar en la misericordia divina, ya que la vida es un ir regresando al Padre.



♣ 자비의 집으로 돌아가는 회개 ♣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의 몫을 모두 챙겨 먼 고장으로 떠납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을 떠남으로써 자신을 아버지와 무관한 처지로 내몰았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도 단절해버리게 됩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아버지의 재산으로 마음껏 야망을 펼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방종한 생활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조차 얻어먹을 수 없을 정도로 극도의 곤궁에 떨어집니다. 자비로운 아버지 대신에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재산을 선택한 결과는 고통과 죽음뿐이었습니다. 그는 밑바닥을 치는 고통을 체험하고서야 ‘제정신이 들어’ 아버지에게 가서 용서를 청하고 종으로라도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극도의 고통은 회개의 발단이 됩니다. 


아버지는 집을 떠난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바랐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집을 떠난 아들을 기다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수없이 사랑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아버지는 아들이 떠나간 길목을 바라보며 사랑의 그리움을 키우고 또 키웠을 것입니다. 


간절하고 한없는 사랑에 가득 찬 마음은 저 멀리 돌아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15,20)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지지 않고, 누더기 옷을 입고 해진 신발을 신은 몰골이 엉망인 있는 그대로의 아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몰아 쉬며 평온을 되찾고 기뻐하며 잔치를 벌입니다. 방탕하게 지낸 아들을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며 충실히 살았지만 아버지가 ‘자비로운 분’이며,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아버지가 동생을 사랑으로 다시 받아들이자 시기하며 분노를 터뜨립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회개를 계기로 펼쳐지는 사랑의 잔치에 함께하도록 큰아들을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허물을 용서해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며,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애를 품으시는”(미카 7,18-19) 분이십니다. 이렇듯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시며,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비를 망각하고 자비의 땅을 벗어나 제 뜻대로 살려 하고, 욕망을 따라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주 어둠이 찾아들고 시기와 질투, 분노에 자신을 맡겨버리곤 하지요. 그럼에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자비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신과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오늘도 육(肉)에 이끌려 넘어지는 그때가 바로 사랑의 하느님을 향해 다시 일어서야 할 때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또 자비의 하느님을 떠나 그분과 이웃과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고통을 겪을 때, ‘제정신을 차려’ 다시 주님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되찾은 아들의 비유>


루카복음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두 아들'은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나'는 작은아들일 수도 있고, 큰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나는 작은아들도 아니고 큰아들도 아니다.

나는 작은아들처럼 살지도 않았고, 큰아들처럼 살지도 않았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큰아들'입니다.


(자기 입으로 "나는 성인이다." 라고 말한 성인은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한다면, 백 퍼센트 성인이 아닙니다.

그냥 교만한 위선자일 뿐입니다.)


비유의 끝 부분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작은아들은 '회개한 사람'이고, 큰아들은 '회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비유의 시작 부분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두 아들 모두 '회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어떻든 두 아들 모두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들입니다.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집을 나가서 방탕하게 사는 작은아들의 모습은,

하느님을 안 믿고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서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만일에 원하는 것을 원하는 대로 얻고, 살고 싶은 대로 살면서 부족한 것이 없다면,

그런 사람들의 인생은 그렇게 살다가 끝날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아들이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에 심한 기근이 들었고,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했다는 것은(루카 15,14)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을 차릴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고 부르심입니다.

그런 외적인 압박이 아니더라도, 내적으로 자기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인생의 허무함을 생각하고, 어떤 갈망이나 갈증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하느님의 은총이고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할 때 바로 정신을 차린 것이 아니라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루카 15,15).

그것은 하느님을 찾아야 할 때 하느님은 찾지 않고

'사람의 도움'만 찾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하느님(예수님)에게서 찾지 않고 인간의 학문에서 찾는다면,

일시적으로 뭔가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더 큰 허망함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고,

더욱 심한 갈망과 갈증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영원하신 분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허무한 것들 속에서 영원한 것을 찾아서 얻을 수는 없습니다.


마침내 제정신이 든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루카 15,17-20).

그런데 '아버지의 집'은 새로운 곳이 아니라 원래 그가 살았던 곳입니다.

사실 그 자신의 집입니다.

자기가 떠났던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이것은 회개란, 또 신앙생활이란, 낯선 세상으로 가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을 안 믿다가, 즉 신앙인이 아니었다가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는 경우에도

낯선 신을 새로 믿는 것도 아니고, 낯선 집에 새로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는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하느님은 원래 아버지였고,

하느님의 집은 원래 자기 집이었습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 15,20)." 라는 말은,

아버지는 이미 작은아들을 용서했고,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작은아들을 찾으러 가지 왜 기다리기만 했나?"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찾아 나섰고 그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강제로 끌고 가지는 않았고, 스스로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비유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니

돌아온 작은아들이 그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뒤의 삶'은 그 자신의 숙제입니다.

회개했다면 보속도 해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을 받았으니 더욱 충실하게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의 '내가' 회개한 사람이라면 '회개의 삶'을 끝까지 살아야 합니다.

회개는 한 번 했다고 다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큰아들의 경우에는, "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잘못입니다(루카 15,29).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을 받아주지 않는 것도 잘못이고,

아버지의 용서를 부정하는 것도 잘못이고,

자기가 받고 있는 사랑을 부정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라는 그의 말은(루카 15,29),

아버지가 자기를 종처럼 부려먹기만 했다는 불평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이 모든 잘못들은 모두

"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겉으로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따져보면 큰아들의 잘못이 더 크고, 더 많습니다.)


작은아들은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안'에 있는데,

큰아들은 화를 내면서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밖'에 있습니다(루카 15,28).

이것은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만,

자기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라고 주장하면

그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큰아들을 타이르기 위해서 그에게 갑니다.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한 것입니다.

큰아들이 집으로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제 그것은 그 자신의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그것은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고, 그들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예수님)은 아무도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꾸짖든지 타이르든지 간에 어떻게든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스스로 떨어져 나가지만 않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못 받게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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