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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복음 묵상

[복음]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160309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6.03.10|조회수206 목록 댓글 0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dijo Jesús a sus discípulos: «Mi Padre trabaja hasta ahora, y yo también trabajo» Por eso los judíos trataban con mayor empeño de matarle, porque no sólo quebrantaba el sábado, sino que llamaba a Dios su propio Padre, haciéndose a sí mismo igual a Dios. 


Jesús, pues, tomando la palabra, les decía: «En verdad, en verdad os digo: el Hijo no puede hacer nada por su cuenta, sino lo que ve hacer al Padre: lo que hace Él, eso también lo hace igualmente el Hijo. Porque el Padre quiere al Hijo y le muestra todo lo que Él hace. Y le mostrará obras aún mayores que estas, para que os asombréis. Porque, como el Padre resucita a los muertos y les da la vida, así también el Hijo da la vida a los que quiere. Porque el Padre no juzga a nadie; sino que todo juicio lo ha entregado al Hijo, para que todos honren al Hijo como honran al Padre. El que no honra al Hijo no honra al Padre que lo ha enviado. En verdad, en verdad os digo: el que escucha mi Palabra y cree en el que me ha enviado, tiene vida eterna y no incurre en juicio, sino que ha pasado de la muerte a la vida. 


»En verdad, en verdad os digo: llega la hora (ya estamos en ella), en que los muertos oirán la voz del Hijo de Dios, y los que la oigan vivirán. Porque, como el Padre tiene vida en sí mismo, así también le ha dado al Hijo tener vida en sí mismo, y le ha dado poder para juzgar, porque es Hijo del hombre. No os extrañéis de esto: llega la hora en que todos los que estén en los sepulcros oirán su voz y saldrán los que hayan hecho el bien para una resurrección de vida, y los que hayan hecho el mal, para una resurrección de juicio. Y no puedo hacer nada por mi cuenta: juzgo según lo que oigo; y mi juicio es justo, porque no busco mi voluntad, sino la voluntad del que me ha enviado».


«En verdad, en verdad os digo: el que escucha mi Palabra y cree en el que me ha enviado, tiene vida eterna»

Rev. D. Francesc PERARNAU i Cañellas 

(Girona, España)

Hoy, el Evangelio nos habla de la respuesta que Jesús dio a algunos que veían mal que Él hubiese curado a un paralítico en sábado. Jesucristo aprovecha estas críticas para manifestar su condición de Hijo de Dios y, por tanto, Señor del sábado. Unas palabras que serán motivo de la sentencia condenatoria el día del juicio en casa de Caifás. En efecto, cuando Jesús se reconoció Hijo de Dios, el gran sacerdote exclamó: «¡Ha blasfemado! ¿Qué necesidad tenemos ya de testigos? Acabáis de oír la blasfemia, ¿qué os parece?» (Mt 26,65).


Muchas veces, Jesús había hecho referencias al Padre, pero siempre marcando una distinción: la Paternidad de Dios es diferente si se trata de Cristo o de los hombres. Y los judíos que le escuchaban le entendían muy bien: no era Hijo de Dios como los otros, sino que la filiación que reclama para Él mismo es una filiación natural. Jesús afirma que su naturaleza y la del Padre son iguales, aun siendo personas distintas. Manifiesta de esta manera su divinidad. Es éste un fragmento del Evangelio muy interesante de cara a la revelación del misterio de la Santísima Trinidad.


Entre las cosas que hoy dice el Señor hay algunas que hacen especial referencia a todos aquellos que a lo largo de la historia creerán en Él: escuchar y creer a Jesús es tener ya la vida eterna (cf. Jn 5,24). Ciertamente, no es todavía la vida definitiva, pero ya es participar de la promesa. Conviene que lo tengamos muy presente, y que hagamos el esfuerzo de escuchar la palabra de Jesús, como lo que realmente es: la Palabra de Dios que salva. La lectura y la meditación del Evangelio ha de formar parte de nuestras prácticas religiosas habituales. En las páginas reveladas oiremos las palabras de Jesús, palabras inmortales que nos abren las puertas de la vida eterna. En fin, como enseñaba san Efrén, la Palabra de Dios es una fuente inagotable de vida.



♣ 생명을 불어넣는 그리스도인의 사명 ♣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가에서 병자를 고쳐주시자 유다인들이 시비를 겁니다. 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해 선포되는 하느님 나라와 구원의 선물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에”(5,18) 더욱 더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을 그대로 할 따름이며(5,19), 하느님의 아들로서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리거나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고 하십니다(5,21-22). 그렇게 그분은 인간의 삶에 관여하시어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5,25-26)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사명은 이 세상에 그분이 지니신 생명이 가득 채워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반생명적이고 비인간적인 문화를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복음의 의미가 드러나도록 힘써야겠지요. 다시 말해 모두를 옥죄고 불편하게 하며 인간다운 삶을 거스르는 문화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불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죽음의 문화가 판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 기아,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언어,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이득과 권력을 얻으려는 시도들, 낙태, 살인과 학살, 자살, 인신매매, 성폭력과 성차별, 고문, 노동 현장에서의 인간의 도구화,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비인도적인 처사들, 전쟁과 기아, 무차별한 개발에 따른 생태 환경의 파괴 등. 

이 거룩한 사순시기에 관심을 가지고 반생명적인 죽음의 문화에 하느님의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려면 무엇보다도 깊은 관심과 사랑을 지니고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비인간화의 현실 앞에서 ‘아니오!’를 말하며 상황을 바꿀 수 있도록 연대해야 할 것입니다.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과도한 소비와 낭비를 줄이는 등 태도와 가치의 구체적인 변화를 꾀하지 않고는 죽음의 문화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의 문화는 탐욕과 무관심으로부터 생성됩니다. 자기만족과 소유, 애착과 무한 경쟁에서 벗어나 공생하고 나누며 더불어 행복의 길을 찾아가는 삶의 방향전환이 절실한 때입니다. 생명의 싹은 평화에서 움틈을 기억하고 공동선을 추구해나가야 합니다.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가 사는 공동체와 사회에 죽음의 문화가 스며들 때, 우리는 생명이신 하느님을 거슬러 스스로는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연대하여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도록 힘쓰고, 사랑과 관심, 생명존중과 나눔을 통해 죽음의 문화 한복판에 하느님의 생명을 불어넣는 ‘생명의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누가 이토록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가? 
  
 
오늘 복음의 첫머리에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5,17)
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선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어제 복음에서 안식일에 38년 동안 앓던 병자를 치유하여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게 하심으로써 안식일 금지규정을 어기신 것에 대한 예수님의 해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유다인들이 유일신으로 섬기는 하느님 야훼이며,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아버지이시다.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내리신 아버지께서 안식일에도 일하시므로 
아들인 예수께서도 일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들도 자동적으로 안식일 율법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근거를 아버지와의 철저한 일치성에 두고 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아들로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밝히고, 
일치성으로 하느님과 같다는 주장을 하시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변호와 자세한 설명이 가르침으로 이어진다.(5,19-47) 
 
우리는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안다. 
공관복음서가 예수의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보도하는 방식을 통하여 지상 예수에서 
메시아 그리스도로 향하는 신학(상향 그리스도론)을 전개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전승된 사료들을 심층적으로 분석, 명상, 해석하여 하느님의 아들에서 
예수로 향하는 신학(하향 그리스도론)을 전개하고 있다. 
 
물론 상향 그리스도론이나 하향그리스도론이나 출발점만 다른 것이고 실상은 같은 것이다. 
나아가 요한복음은 예수가 육화(肉化)된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이 말씀은 이미 세상창조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선재(先在) 그리스도론을 
펴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요한복음서는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어서 둘도 없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서 신학은 그리스도론, 삼위일체론(구원경륜적 삼위일체론과 내재적 삼위일체론), 
성령론, 교회론, 성사론 등 다양한 분야의 신비를 조명하게 된다. 
 
물론 더 중요한 자료는 두말할 필요 없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세상은 예수께서 보여 주신 그만큼 하느님에 대하여 알고 있으며, 
복음사가는 그만큼을 성령의 감도에 의하여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 스스로가 하느님과 같다는 발언은 유대인들에게 천지개벽할 일이었고, 
이는 곧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예수를 신앙하는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언명이지만 
'하느님은 오직 야훼 한 분뿐이다'는 철저한 유일신관을 가진 유다인들에게는 
용납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외적 원인이 율법을 어긴 범법자로서가 아니라, 
신성모독이라는 독성죄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우리는 이 자리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은 하느님 아버지의 위탁에 의한 것이었다. 
아들은 하느님 아버지 스스로의 말씀이며 계시(啓示)이다. 
이 말씀은 병자를 낫게 하고, 죽음을 살려 생명을 주는 말씀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렇게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은 '금(禁)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하느님 말씀의 이 두 작용은 서로 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 말씀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순명(順命), 아니면 항명(抗命) 뿐이다. 
 
하지만 '행(行)하라는 말씀'이 항상 먼저이고 그 다음이 '금(禁)하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말씀과 계명을 통하여, 비록 그것이 내용상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 한가지이다. 
상대 신부
 
그것은 바로 온전한 우리 자신이다. 
이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에게 원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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