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주보+복음 묵상

[복음]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161011 화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6.10.11|조회수382 목록 댓글 0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37-41

그때에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vangelio de Hoy
 


En aquel tiempo, mientras Jesús hablaba, un fariseo le rogó que fuera a comer con él; entrando, pues, se puso a la mesa. Pero el fariseo se quedó admirado viendo que había omitido las abluciones antes de comer. Pero el Señor le dijo: «¡Bien! Vosotros, los fariseos, purificáis por fuera la copa y el plato, mientras por dentro estáis llenos de rapiña y maldad. ¡Insensatos! el que hizo el exterior, ¿no hizo también el interior? Dad más bien en limosna lo que tenéis, y así todas las cosas serán puras para vosotros».


«Dad más bien en limosna lo que tenéis, y así todas las cosas serán puras para vosotros»

Rev. D. Pedro IGLESIAS Martínez 

(Rubí, Barcelona, España)

Hoy, el evangelista sitúa a Jesús en un banquete: «Un fariseo le rogó que fuera a comer con él» (Lc 11,37). ¡En buena hora tuvo tal ocurrencia! ¡Qué cara debió poner el anfitrión cuando el invitado se saltó la norma ritual de lavarse (que no era un precepto de la Ley, sino de la tradición de los antiguos rabinos) y además les censuró contundentemente a él y a su grupo social!. El fariseo no acertó en el día, y el comportamiento de Jesús, como diríamos hoy, no fue “políticamente correcto”.


Los evangelios nos muestran que al Señor le importaba poco el “qué dirán” y lo “políticamente correcto”; por eso, pese a quien pese, ambas cosas no deben ser norma de actuación de quien se considere cristiano. Jesús condena claramente la actuación propia de la doble moral, la hipocresía que busca la conveniencia o el engaño: «Vosotros, los fariseos, purificáis por fuera la copa y el plato, mientras por dentro estáis llenos de rapiña y maldad» (Lc 11,39). Como siempre, la Palabra de Dios nos interpela sobre usos y costumbres de nuestra vida cotidiana, en la que acabamos convirtiendo en “valores” patrañas que intentan disimular los pecados de soberbia, egoísmo y orgullo, en un intento de “globalizar” la moral en lo políticamente correcto, para no desentonar y no quedar marginados, sin que importe el precio a pagar, ni como ennegrezcamos nuestra alma, pues, a fin de cuentas, todo el mundo lo hace.


Decía san Basilio que «de nada debe huir el hombre prudente tanto como de vivir según la opinión de los demás». Si somos testigos de Cristo, hemos de saber que la verdad siempre es y será verdad, aunque lluevan chuzos. Esta es nuestra misión en medio de los hombres con quienes compartimos la vida, procurando mantenernos limpios según el modelo de hombre que Dios nos revela en Cristo. La limpieza del espíritu pasa por encima de las formas sociales y, si en algún momento nos surge la duda, recordemos que los limpios de corazón verán a Dios. Que cada uno elija el objetivo de su mirada para toda la eternidad.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9-41).”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이라는 말씀은,

바리사이들이 ‘겉으로만’ 깨끗하게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라는 말씀은,

바리사이들의 마음속은 전혀 깨끗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몸만 씻지 말고 마음도 씻어라.”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깨끗함’을 ‘거룩함’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지 말고

온 마음을 다해서 거룩하게 살아라.” 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또 ‘깨끗함’을 ‘선’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겉으로만 착한 척 하지 말고,

제대로 온전히 선한 사람이 되어라.” 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또 ‘깨끗함’을 ‘아름다움’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겉모습만 아름답게 꾸미려고 하지 말고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하여라.” 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마음과 영혼을 아름답게 가꿔야 합니다.

화장술과 성형수술로 얼굴을 예쁘게 뜯어 고친다고 해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라는 말씀은,

눈에 보이는 ‘겉’만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속’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어리석다는 말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라는 말씀은,

겉으로나 속으로나 모두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겉으로만 잘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시는 분입니다(마태 6,4.6.18).

그러니 속마음이 중요합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겉으로 드러난 업적만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속마음을 먼저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겉과 속을 모두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자선’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자선’은 불우이웃 돕기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넓은 뜻으로 ‘이웃 사랑’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해지는 방법으로 ‘참회와 보속’,

또는 ‘극기고행’을 말씀하시지 않고,

‘이웃 사랑’을 말씀하신 것은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회개는 곧 사랑 실천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회개하려면 사랑 실천부터 하여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겉만 깨끗하고 속은 깨끗하지 않은 것은,

즉 회개하지 않는 생활은 ‘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 생활입니다.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한 것은,

즉 회개하는 신앙생활은 ‘사랑 실천’을 제대로 하는 생활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고 말했을 때(루카 3,8),

사람들은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고(루카 3,10),

그때 요한은 사람들에게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라고 말했습니다(루카 3,11).

‘이웃 사랑’ 실천이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 라는 것입니다.


‘사랑 실천’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입니다(마태 7,21).

하느님의 뜻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고,

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 즉 사랑 실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곧 사랑 실천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속에 담긴 것’이라는 말은,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을 뜻하는 말인데,

바로 앞에서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재산은 ‘불의한 재물’(루카 16,9)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이 아니더라도, 즉 합법적으로 모은 재산이라고 해도

사랑 없이 이기심과 탐욕만 가득하다면 ‘불의한 재물’입니다.)


‘속’까지 깨끗해지려면 그 ‘속’을 완전히 비워야 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불의한 재물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버리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그것으로 ‘이웃 사랑’ 실천을 해야 합니다.

(사랑 없는 무소유와 청빈은 의미가 없습니다.)


겉만 깨끗하고 속은 깨끗하지 않은 사람은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묵시 21,27).”


‘사랑으로써’ 겉과 속을 모두 깨끗하게 한 사람만이 참으로 정결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하느님을 품은 아름다운 사람 ♣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시자 바리사이가 놀랍니다(11,38). 이에 예수께서는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11,39. 41) 하고 이르십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감사의 표시로, 그리고 부정한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식사 전에 손을 씻었습니다. 그러니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드시려 하신 예수님의 태도에 놀랄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왜 예수님으로부터 질책을 받았을까요? 


선(善)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삶과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의미를 주시고 긍정적이고 열린 시선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과 관습의 틀에 묶여 좁디좁은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바로 곁에 계시고 그분과 함께 식사함이 곧 구원의 선물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지요. 


바리사이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눈에 띄는 기도와 단식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니 겉으로 보면 신앙생활을 매우 열심히 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적인 관습과 자신들에게 익숙해진 의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손을 씻지 않는 행위만 눈에 거슬렀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영적인 시선, 곧 하느님의 눈길을 잃고 자신을 주인공으로 착각하며 살았기에 속을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채웠습니다(11,39). 그들은 자신의 가치기준과 경험, 세상의 지식, 고정된 관념과 자기만의 신념에 묶여 있었기에 남을 헤아릴 여유도 관대함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지니지 못했으니 겉과 속이 다르고 언행이 일치할 없었을 것입니다. 


나도 바리사이들처럼 살 때가 있지 않습니까? 혹시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랑의 질책에 가슴을 치며 다시 잠든 영혼을 깨워야겠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바리사이와 같은 어리석음과 착각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을 품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주님의 영을 갈망하고 주님의 혼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굳어져 있는 사고의 틀, 선입견과 편견, 부정적 시각,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관습과 신념들에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열린 마음과 하느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모든 존재 안에 계신 주님을 발견하도록 힘쓸 때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 되겠지요. 


또한 늘 무엇을 하든 깨끗하고 순수한 정신과 지향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지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랑과 평화와 정의와 선을 실현하려는 지향을 지닐 때 모든 행위가 곧 하느님을 발생시키는 성사(聖事)가 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눈에 보이는 사랑으로 실행하고 나눌 때 우리의 영혼도 맑아지고 매순간이 놀라운 창조의 순간으로 바뀔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 나눔을 통해 내 영혼의 쓰레기를 비워내고(11,41), 빈마음으로 하느님을 품으며, 순수하고 깨끗한 눈길로 만사만인을 바라보고, 열린 마음으로 선을 실행하는 아름다운 우리로 거듭 나길 희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내 삶에 작은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해 봅시다.



고해성사를 주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많은 신자 분들이 

반복되는 죄와 잘못의 패턴을 끊어버리지 못해 힘들어 한다.’는 겁니다. 


그 중에는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하며 변화에 대한 의지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고해를 보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죄와 잘못의 패턴을 끊어버리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삶을 변화시키기를 원한다면, 생각하는 방식을 변화시켜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탄 배의 자동조정장치가 동쪽으로 맞춰져 있는데, 

억지로 배를 서쪽으로 돌리고 있다면 어떨까요? 

금방 지치고 포기해 버리고 말겠죠. 


그런데도 우리 대부분은 ‘나는 ~하고야 말겠어.’ 하고 결심하고 의지력으로 밀어붙이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보다 우선적인 일은 내 삶의 자동조정장치를 재설정하는 것입니다. 

곧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첫째로 한 번에 하나의 결점을 고치는 데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주 범하는 실수 가운

데 하나는 한꺼번에 많은 것을 이루려 한다는 겁니다. 처음 변화에 대한 의지를 보일 때, ‘나

는 열 가지를 변화시킬 거야..‘ 하기 보다는 내 삶에 가장 장애가 되는 한 가지를 변화시키려

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오늘 하루를 변화시키는 데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코끼리를 먹는 방법은? 한 번에 한 입씩 먹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좀 더 작은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곧 변화를 이루어내기 위해, 한 시간을 인내하고 하루를 견디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것이 도움이 될 텐데요.

예를 들면 

‘제가 미워하는 사람이 제 앞에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부정적인 마음을 갖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반응하고 행동하게 도와주십시오.... 

오늘 하루 화내지 않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 

오늘 하루 정욕을 멀리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할 수 있겠죠. 


거기에 나의 노력과 의지를 더해서 하루를 다르게 살 수 있다면, 

변화의 첫 걸음을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한 달, 그리고 일 년이 될 수 있다면, 어느새 많이 변화하고 좋은 습관을 가지게 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 

 

셋째로 

선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악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다보면, 

언제가 악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혹은 이겨내려 하기보다는 피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끊겠다는 사람이 책상 앞에 담배를 두거나, 

성적인 유혹을 끊어버리겠다고 하는 사람이 성인채널에 티비를 틀어놓고 있는 모습은 

자신의 의지를 과대평가하는 교만한 행동이겠죠. 


죄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유혹의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유혹을 떨쳐내려 하기보다는 선한 것에 집중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과 선행에 집중하면 유혹을 떨쳐내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요즘 제게 유혹이 있다면 포기하고 싶은 유혹, 적당히 하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제 마음에 몇 가지 말씀이 저를 자극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끕니다. 


그 말씀은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

다.’ 라는 말씀들입니다. 


말씀을 외우고 마음에 간직해 두고 있으면 악한 마음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함께 말씀을 외웁시다. 

그 말씀들이 우리를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줄 겁니다. 

 

그리고 선행이 악의 유혹을 떨쳐내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선한 일을 실행하다보면, 기쁨이 따라오고 보람이 따라오고 

삶의 작은 의미가 따라옴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그 길이 바른 길이고 좋은 길이라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자연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담배를 끊은 사람이 담배 피는 사람에게서 역한 냄새를 맡듯이’ 

유혹의 손길이 가까이 왔을 때 거기서 느껴지는 역한 냄새를 맡고 

유혹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멀리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나의 삶에 작은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작은 것에 집중하고 말씀에 집중하고 

선한 일에 집중해 봅시다. 

 



인천교구 밤송이(김기현 요한) 신부




호박을 바라보며



여러 농작물을 재배하는 가운데, 가장 신기하게 바라보게 되는 작물은 호박입니다. 

봄에 1000원쯤 하는 모종 몇 개를 둔덕에 심어놓고, 거름을 듬뿍 줍니다. 

완전히 잊어먹고 있었는데, 가을이 오면 온 둔덕이 호박넝쿨과 호박잎 천지로 변합니다. 


여기 저기 묵직하고 탐스런 호박들이 숨어있습니다. 

어떤 녀석들은 얼마나 무거운지 혼자서 들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탐스럽게 잘 익은 녀석들 때문에 올 가을축제 때는 호박죽을 제대로 쑤어 팔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올 호박 농사가 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호박과실파리라는 녀석들 때문입니다. 

호박재배 농가의 피해는 심각합니다. 

더 괴로운 것은 퇴치를 위한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렇게 잘 자란 호박의 겉모양은 정말 멀쩡합니다. 

오랜 나날 자식 키우는 심정으로 잘 키웠다가 설레는 마음으로 수확합니다. 

시장에 내다 팔거나, 호박 즙을 생산하는 건강원에 납품합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항의가 빗발칩니다. 

물건 도로 가져가라고.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으면 어떻게 이따위 호박을 팔 수 있냐는 말을 들으며 

호박을 거두어 와야 합니다. 


호박을 잘라보면 호박과실파리 유층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호박과실파리 녀석들이 애호박 시절, 애호박 안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호박 내면에 자리 잡은 알들은 애벌레가 될 때까지 그 안에서 성장을 거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이르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 불행하게도 그들은 호박과실파리들로부터 철저하게 유린된 

썩은 호박과 같았습니다.


겉은 멀쩡했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이 봉헌하는 헌금의 액수도 대단했습니다.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질타를 받았을까요? 

그들은 철저하게도 이중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삶이 가식적이었습니다. 

위선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잘 보이기보다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바빴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비쳐졌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진 곳에서는 

호박씨를 깠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귀신같이 꿰뚫어보시던 예수님이셨기에 

그토록 철저하게도 이중적인 인간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악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생에 걸쳐 노력해야할 것이 바로 위선과 이중성의 극복입니다. 

사람보다는 하느님 앞에 똑바로 서기입니다. 

언행일치, 기도와 삶의 조화, 신앙과 생활의 통합, 전례와 삶의 일치입니다.


미사 가운데서는 천사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는 말과 함께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게 될 때, 

우리 역시 예수님의 신랄한 질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바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시간이 ‘땡’하기 무섭게 주변사람들 괴롭히고 족치는 사람들, 

예수님의 무서운 질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