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31일 월요일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12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내 인생의 버킷 리스트와 우선적 관심사 ♣
우리 사회는 사회적 갈등, 빈부 격차, 계층 간의 양극화, 자본의 우상화 등의 심화로 인간의 존엄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욕망을 충동질하는 현세의 물질과 정보들을 접하면서 삶의 초점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버킷 리스트와 우선적 관심사를 지닐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일생에 꼭 하고싶고 의미있는 것들을 담는 버킷 리스트는 목적 의식과 생의 의욕을 갖도록 해줍니다. 한편 우선적 관심사는 삶의 질서와 방향을 뚜렷이 해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버킷 리스트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 곧 인간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어둠 속을 헤매는 영혼들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는 것이 그분의 유일한 열망이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나의 버킷 리스트는 무엇인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인생을 보람되게 하고 나를 돌아보고 성장시키기 위한 다양한 것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실천이 목록에서 빠져 있다면 세속적인 버킷 리스트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요.
한편 예수님의 우선적 관심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육신과 영혼의 아픔을 겪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를 베풀 때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14,12)과 같은 잘 아는 이들과 힘이 있고 내가 도움을 받을 법한 이들이나 의인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을 우선 선택하셨지요.
나의 우선적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더 중요하며 무엇을 삶의 우선 순위에 두는지 정하지 않은 채 닥치는 대로 살아간다면 인생이 초점을 잃게 되고 하느님의 진리와 세상의 가치를 분간하지 못한 채 헤맬 것입니다. 또한 보잘것없고 고통받는 이들보다 자신에게 잘해주는 이들이나 힘있는 이들과의 만남을 우선시 한다면 영혼의 파멸을 자초하고 말겠지요.
우리도 ‘오히려’ 관심 밖의 사람들, 곧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14,13)고 하신 예수님의 행동방식을 배워야겠습니다. 세상 권세나 재물과 명예를 첫자리에 두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과 구조적 악과 도구적 악에 의해 차별받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먼저 눈길을 돌리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상기시켜줍니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필리 2,4) 내 삶의 우선관심사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과 핍박 속에 힘없이 살아가는 이들을 우선 선택하고 그들에게로 중심을 옮기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오늘도 잠시 멈추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내 인생의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보고, 사랑 나라의 변두리로 밀려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는 이들을 우선 선택하는 나의 멋진 우선관심사를 작성해보았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2016년 11월 1일 화요일
🐥 오늘의 복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속화된 세상에서 거룩함을 회복시킬 소명 ♣
교회는 오늘 겨울로 향하는 길목에서 하느님과 일치하여 영광을 입은 모든 성인들을 기리고 그분들을 본받아 거룩해지고,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을 희망하며 살아가도록 재촉합니다. 또한 이 대축일은 천상교회와 지상교회의 연대와 일치를 상기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거룩한 얼굴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은 온전히 하느님께 의존한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인들의 거룩함과 가난함을 나누어받을 수 있고, 그들의 거룩함을 본받아야겠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1테살 4,3).
우리 모두 삶속에서 주님의 사랑의 계획이 실현될 수 있도록 자신을 주님의 거처와 도구로 내놓음으로써 성인들을 공경해야겠습니다. 우리도 성인들처럼 온갖 박해와 고통과 큰 환난을 겪어냄으로써(묵시 7,14) 영원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거룩함은 세상과 동떨어져 특정 장소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성(聖)과 속(俗)을 구별하지만 '성'은 하느님의 선과 자비와 정의가 드러나는 곳이고 '속'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없는 곳일 뿐입니다. 성인 공경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실행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축성되고 새롭게 태어난 우리는 거룩함에로 불린 사람답게 살아야겠지요. 하느님의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아픈 이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며, 필요한 것마저도 기꺼이 나누면서 살아가도록 늘 힘써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육의 행실이 아니라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신용, 온유, 절제(갈라 5,22-23)와 같은 영의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거룩함이란 하느님을 닮는 것이고 그분의 본성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16) 이 사랑이 영혼 안에서 결실을 맺으려면 각자가 ‘항구히’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사랑을 실행하고 선을 되돌리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아홉 가지 행복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하느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인정하면서, 그 무엇도 내세우지 않을 때 ‘거룩함’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결국 거룩함이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말씀이지요.
이러한 행복은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는 ‘영으로 가난하고’, 세상의 고통과 자기 죄를 슬퍼하는 사람,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온유한 사람’, 선을 추구하고 자비를 베풀며, 모든 일에 올바르고 순수한 동기를 지니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 사람들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맺어주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이 얻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나 자신의 악한 의지와 탐욕을 포기함으로써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어 주님의 거룩함을 호흡하는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모든 선과 거룩함과 평화와 기쁨의 샘이신 하느님과 함께 있음이 곧 참 행복임을 기억하고, '지금' '여기' 속화된 세상에 주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회복하도록 힘쓰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2016년 11월2일 수요일
🍀 오늘의 복음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죽음이 마지막이 아닌 것을 ♣
교회는 위령의 날에 죽은 뒤 아직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모든 이를 위해 위로하며 기도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있을 때나 죽어서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는 인과응보의 틀에서 벗어나 이 세상에서 살다가 하느님에게 돌아가신 모든 분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11,28) 하시며 모두를 품으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이시고(루카 6,36),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리기 때문입니다(로마 5,20).
위령의 날에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세례로 시작된 부활을 향한 파스카 여정의 완성이기에 찬미와 감사의 마음으로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죽음은 절망의 끝이나 죽음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다리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알아 뵙지 못한 채 죽은 이들을 포함한 모든 죽은 이들을 기억함으로써 그들과 우리가 하느님 안에 함께 살아있음을 확인해야겠습니다.
또한 이 날은 살아있는 이들로 하여금 삶과 죽음을 묵상하며, 종말에 이루어질 구원을 미리 묵상하도록 초대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기억하면서 삶과 죽음의 울타리를 넘어 하느님 안에 함께 살아있으며,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삶과 죽음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세상살이를 하다가 죽음을 맞으면 현세 세상과 죽음의 세계 사이에 극단적이고 결정적인 단절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슬퍼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리스도교인은 현세의 삶이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결코 죽음으로 막을 내리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조차도 생명과 희망을 무너뜨리지 못하며, 그렇게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주님 안에 있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입니다."(지혜 3,9) 우리는 죽음도 생명도 주님 손 안에 있음을 회상하고 죽은 이들과 함께 사랑 속에 살기를 희망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한편 위령의 날은 누구든 예외 없이 맞게 되는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지금 여기서 잘 죽을 수 있기를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 앞에서 우리다운 응답은 ‘지금 여기서 죽으며 사는 것’입니다. 지금 잘 죽는다는 것은 기꺼이 자신을 내놓으며 더 자비로워지는 것이겠지요.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내 모든 것을 되돌릴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행복을 맛보게 되겠지요. 죽음을 넘어 영원히 살려면 이타적이고 순수한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모든 선을 되돌려야 할 것입니다.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는 죽음을 통해 영원의 길을 가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죽음 넘어 영원에 이르기까지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생생히 되살려준 백임마누엘 형제와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다가 억울하게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국가폭력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고인에게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못한 슬픈 현실 앞에 우리 모두 참으로 부끄러운 마음으로 머리를 숙이는 오늘입니다.
죽음이 판을 치는 곳에 생명을 불어넣도록 재촉하는 오늘, 우리 모두 이 땅에서 불의와 폭력을 저지르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사랑 실천과 공동선의 실현을 위한 노력이 부족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려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문화가 사라지고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과 정의와 기쁨이 넘치는 사랑방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복음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10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 받아들이고 함께하며 애타게 찾는 사랑 ♣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15,1).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변두리로 밀려나 선택받은 백성 축에 끼지 못한 채 살았던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의 힘에 이끌려 그분 가까이 다가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영혼을 치유하여 자유의 길로 인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떠나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키고 속박해버린 이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여 관계를 맺으시고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받아들이시고 '함께' 식사하심으로써 생명을 나누어주셨습니다(15,2). 사랑이 아니고서는 영혼의 병인 죄가 치유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15,2) 모습을 보고 투덜거립니다. 자신들만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요 구원의 대상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합리적 신념은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자비를 가로막아버립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고 그 어떤 차별도 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받아들임’과 ‘함께함’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영혼의 병을 앓는 죄인은 받아들여짐으로써 치유됩니다. 자비(misericordia)는 죄에서 벗어나도록 하느님 사랑을 헤아릴 수 있는 심장을 건네는 것이지요. 받아들임은 사랑의 건넴입니다.
죄인의 아픈 영혼은 이렇게 받아들임을 통하여 치유됩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죄인은 다시 새로운 창조의 순례를 시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연약함과 결핍과 아픔을 받아들이시어 사랑의 존재가 되도록 이끌어주시는 주님의 자비로 서로를 품어야겠습니다.
또한 자비는 삶을 함께하고 식사를 같이하는 ‘함께 함’을 통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 유식한 이와 무식한 이, 가진 자와 가난한 자, 병자와 건강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와 함께하셨습니다. 함께함은 예수님처럼 찾아 나서서 가까이 다가가 형제자매들의 고통과 갈등, 불안과 혼란의 깊이로 들어가 동감하고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는 목자나(15,4-5),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는 부인처럼(15,8) 애타게 우리를 찾으십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잃고 헤매는 자신을 찾아 나서고, 영혼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애타는 사랑으로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5,8)
오늘 우리는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농락당하며 거짓을 일삼고 탐욕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버린 정치권력의 수치스런 모습을 보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감성적 분노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로 무장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중심을 잡고 진실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나아가 오늘 우리 신앙인들의 사랑의 책임과 소명을 다시 상기하고, ‘받아들임’과 ‘함께함’, 그리고 애타게 찾아나서는 연민의 마음을 불러일으켜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불의와 거짓에 맞서 하느님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동시에 자비와 연민의 마음을 지니고 그 불쌍한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나서야겠지요.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2016년 11월 4일 금요일
🌺 오늘의 복음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3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4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5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6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영원한 생명을 찾아가는 결단과 지혜 ♣
오늘 예수님께서는 ‘집사의 비유’를 통해 사라져 버릴 세상 것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지혜롭게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그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탕진하는 비열한 죄를 저지릅니다(15,13). 그러자 주인은 집사를 해고합니다(16,2ㄴ).
그러자 집사는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16,3)라고 탄식하며 ‘영리하게’ 주인의 권위를 이용하여 소작인들의 빚을 탕감해주어 해고된 뒤 자기를 환대해줄 친구를 만들어둡니다. 그는 궁지에 몰렸으나 앞을 내다보며 지체 없이 결단을 내리며 최선을 다해 살길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16,8). 그의 불의한 행위가 아니라 긴박한 상황에서 민첩하게 처신한 그의 태도를 칭찬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너무 늦어 종말에 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기 전에 지체하지 말고 하늘나라를 위하여 빨리 결단을 내리라고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과 은총의 선물을 관리하는 집사들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배를 하느님으로, 자신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이 세상 것만 생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필리 3,18-19)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근심 걱정과 탐욕에 사로잡혀 장사에 열중하는 '세속의 자녀'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선과 구원에 마음을 쓰는 '빛의 자녀'로 살아야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빛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착하게 사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빛의 자녀들은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들끼리 거래할 때 영리하고 민첩하게 처신하는 것 못지않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신속하고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언제 맞을지 모를 종말을 잘 준비해야겠습니다. 종말은 준비하는 영리한 삶은 매순간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처럼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삶을 치열하게 사는 것이겠지요. 빛의 자녀로서 품어야 할 것을 품고, 바르고 의로운 생각을 하며, 남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놓는 것보다 더 좋은 준비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종말을 잘 준비한다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하느님과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양식을 선택하는 결단을 내리고 실행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혹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기꺼이 시간과 돈을 쓰고 민첩하게 처신하면서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고통 받는 이들, 억울하게 핍박 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데는 무관심하지는 않은지 돌아볼 때입니다.
죽음을 묵상하며 영원을 준비하도록 초대하는 위령성월에 아무도 죽음을 대신해줄 수 없듯 구원을 위한 준비도 나의 몫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세상일에 민첩하고 영리하게 처신하는 그 이상으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존재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음을 가슴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바쁜 발걸음을 멈추어 지나온 삶과 현주소를 살펴보면서 나는 생의 마지막을 위한 지혜로운 선택을 했으면 합니다. 진정한 행복, 영원한 생명을 찾아가는 것은 우물쭈물하거나 미뤄서는 안 되는 시급한 일이지 않습니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2016년 11월5일 토요일
🌸 오늘의 복음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9ㄴ-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13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1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참 주인을 성실히 섬기며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님을 섬겨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 삶을 방향과 목적을 분명함으로써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16,13)고 하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인간에게 있어 하느님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궁극적인 삶의 목표요 존재이유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니 하느님을 현세 재물과 그 밖의 인간사 가운데 하나로 똑같이 취급한다면 출발점부터가 어긋나버려 착각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섬겨야 할 하느님은 상황에 따라 또는 기분 내키는 대로 선택하거나 이용할 대상이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온갖 편의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돈과 디지털 기기들, 그리고 감각을 자극하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들은 알게 모르게 하느님을 망각하도록 의식을 마비시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과 세상, 하느님과 돈, 하느님의 말씀과 현세 가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갈팡질팡하는 신자들도 적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나 돈을 좋아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육적이고 세속적이며, 물질 중심적이고 돈을 우상처럼 섬기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섬기는 데 있어 중요한 자세로 ‘성실성’을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고’(16,10),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도 성실하며’(16,11),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한 사람’(16,12)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실성이란 섬겨야 할 하느님을 삶의 목표와 존재이유로 삼고 그분께 시선을 집중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늘 기억하면서 그분께서 주신 모든 것들을 공동의 선과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에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세상의 온갖 가치를 이용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선을 행함으로써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 모두 현세 물질과 이기적이고 인간중심적인 가치와 힘을 하느님 위에 두어 우상에 빠지거나, 둘을 똑같은 것으로 여겨 양다리를 걸치지 않도록 정신 차려야겠습니다. 스스로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현세 가치와 물질을 하느님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은 더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하신(16,15) 예수님의 경고를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하느님과 세상, 하느님과 재물, 하느님의 정의와 인간이 저지르는 불의 앞에서 양비론이나 중립을 표방하며 분명한 선택을 하지 않은 채 방관하거나 회피하는 태도를 지녀서도 안 되겠지요. 후안무치의 부패 무능 정권의 거짓과 탐욕과 폭력으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고 전근대적인 국가의 사유화가 펼쳐치는 이 땅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과연 무엇을 어떤 태도로 섬기며 살고 있는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할 줄 알며,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필리 4,11. 13)는 믿음으로 삶의 중심을 바로 잡고 걸어가도록 도와주소서! 주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착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이끌어주시고, 세상의 하찮은 것들에 목숨을 걸지 않고 오직 사랑이신 당신께 시선을 집중하고 당신의 뜻을 실행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2016년 11월6일 일요일
🌳 오늘의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7-38<또는 20,27.34-38>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삶과 죽음에 초연한 부활 신앙 ♣
이스라엘 백성의 부활신앙은 기원 전 164년 경에 기술된 다니엘서(12,2-3)를 비롯해 이사야서(26,19), 지혜서(7,1-6), 그리고 마카베오서 등에 나타납니다.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두고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인정했으나(사도 23,8) 현세 사정이 부활한 뒤에도 지속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한편 주로 고위 사제가문 출신들로 구성된 사두가이들은 성경으로 인정한 모세오경에 없다고 생각되는 죽은 자의 부활이나 천사와 영적 존재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해석에서는 보수적이었고, 정치적으로 부패한 유다 당국자들과 로마의 권력과 손을 잡고 실리를 챙겼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수혼법(신명 25,5-10)을 들어 부활세계는 지상 삶의 연장일 뿐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며 예수님을 비웃으려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우리의 삶과 죽음의 주관자이시며(20,38), 부활의 삶이란 현세 삶의 연장이 아니며 하느님의 권능으로 시작되는 전혀 새로운 세계임을 가르치십니다(20,35). 바오로 사도도 그런 부활관을 지녔습니다(1코린 15,42-44).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생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또 세상을 살아가며 형성되는 인간관계와 사랑, 삶의 수고와 고통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지나가버릴 현세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산다면 영원한 생명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런 삶은 물질과 감각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참 행복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내세의 삶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부활 때문에 선사받은 새로운 생명입니다. 죽음은 그렇게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단절이나 절망과 허무의 골짜기가 아니라 영원으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입니다. 따라서 마카베오의 형제들은 의로운 이의 부활을 믿고 순교했으며,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도 죽음을 자매(태양의 찬가 27절)라 하였지요.
그런데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우리는 생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는 그런 희망을 지닐 때 세상살이에서 겪는 온갖 역경과 고통을 견디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굳건한 부활신앙으로 지상에서의 삶이 생명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차려 현실에 초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세 재화나 명예, 다양한 인간관계 등 세상살이에서 주어지고 만나게 되는 그 어떤 것도 전부가 아님을 알고 그 무엇에도 매이거나 연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국가권력에 의한 탄압과 허수아비 언론, 자본가들의 횡포에 하느님의 힘으로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오늘 생명과 죽음이 얼굴을 마주보며 또 다른 생명을 향해 달려가는 자연의 변화를 보며,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하며 지금 이 순간에 생명과 죽음 전부를 담아내도록 혼신을 다 하고, 희로애락이 산책하는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했으면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누리는 생명은 끝이 없고, 하느님 안에서는 삶도 죽음도 궁극적인 의미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2016년 11월7일 월요일
오늘의 복음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더불어 하느님의 선(善) 안에 머물기 위해 ♣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면서 동시에 모든 이가 더불어 당신의 사랑과 선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그 길을 알려줍니다. 곧 남을 죄짓게 하지 말고(1-3ㄱ), 형제의 죄를 몇 번이고 용서해주며(3ㄴ-4), 굳은 믿음을 가지라(5-6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일치하여 행복하게 살려면 먼저 남을 죄에 걸려넘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에 기우는 본성적 경향과 인간적 한계 때문에 자신부터 죄에 걸려 넘어지곤 하니 남을 죄짓게 하지 않고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이요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분노하고 증오하고, 고정된 사고의 틀과 왜곡되고 비합리적인 사고로 남을 판단하며, 자기혐오와 열등감 등을 남에게 투사하게 되지요. 선과 사랑의 결핍이 남을 걸려넘어지게 합니다. 따라서 무감각, 무관심, 상처와 고통의 방치, 불의 앞에서의 회피를 떨쳐버리고, 하느님의 선과 사랑 안에 머물러 다른 이들에게 죄의 짐을 떠넘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 인간의 한계와 이 세상의 속성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죄의 유혹에 걸려넘어지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이는 불행하다고 하십니다(17,1). 그분께서는 다른 사람, 특히 ‘보잘것없는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 당시 몹시 잔인한 처형 방법이었던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나으니(17,2) ‘스스로 조심하라’(17,3)고 경고하십니다. 사랑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모든 이가 함께 하느님의 선 안에 머물려면 서로 한없이 용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이 죄를 '떠넘기는' 것이라면 용서는 남의 죄를 '떠맡는' 것입니다. 내 사랑의 그릇으로 다른 이의 영혼의 상처를 품어 녹여버리는 것이 용서이지요. 우리가 이런 용서를 '몇번이고' 한없이 할 때 모두가 하느님의 선 안에 머물러 행복한 존재가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죽어도 용서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다른 이와 자신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소외시킴으로써 자기 영혼을 자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매순간 주님의 엄청난 사랑과 용서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하느님 때문에' '조건없이', 그리고 '한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화해해야 합니다.
남에게 죄의 짐을 지우고, 남의 죄를 품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하십니다(17,6). 자꾸만 죄에 걸려넘어지고, 남을 죄짓게 하고 미움의 골이 깊어 마음이 평안하지 않습니까? 바로 지금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실낱같은 믿음의 동아줄을 잡고 선하신 주님의 마음으로 다시 다가가보면 어떨까요!
주님! 오늘 하루도 당신에게서 멀어지려 하는 저희를 붙들어주시어 당신의 선 안에 머물게 하소서! 그리하여 다른 이들을 죄에 걸려넘어지게 하지 않게 하시며, 다른 이들의 허물과 죄를 너그러이 이해하고 품을 수 있는 사랑깊은 가슴을 허락하소서!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2016년 11월8일 화요일
💚 오늘의 복음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7-10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가? ♣
우리는 무엇인가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떤 마음으로 하며 사는가는 단순히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관계된 매우 중요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17,9-10)
우리 인생에는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일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도 있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의 일은 개인의 원의나 취향에 관계없이 해야만 하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곧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하느님 사랑의 창조물로서 사랑의 존재가 되어 사랑을 실행하며, 만나는 모든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을 발견하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이유요 소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각자가 주님의 종답게 주님의 일을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하고 앞서 행해야 하는 일로 여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이 많지만 문제는 우선순위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랑과 정의의 실천, 희생과 선행과 같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며,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자랑하거나 대가를 챙기는 것은 하느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삼는 교만한 태도임이 분명합니다. 사실 온힘을 다해 주님의 일을 한다 해도 해야 할 일의 극히 일부만을 해낼 뿐이니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최선을 다 하되 겸손해야 하며, 오히려 주님의 사랑의 도구로 쓰여짐에 감사드려야겠지요.
오늘 우리는 국민에 의해 주어지고 국민을 위해 쓰여져야 할 국가권력을 개인의 재산 축적을 위해 동원하고, 국가관료 조직을 사병처럼 부리며, 기업과 대학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함부로 훼손하는 등 희대의 국정농단 사태를 접하고 있습니다. 불통과 이기심과 독단, 그리고 무책임과 권모술수와 거짓으로 나라를 파탄지경으로 내몰고도, 특정인의 개인비리로 치부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권력의 끈을 붙들고 있는 뻔뻔스럽고 가련한 이들을 보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패의 극단을 보며 우리는 과연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사명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제 하느님의 이름으로 부패한 권력에 맞서 하느님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도록 적극 나서야겠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숙고하고 실행에 옮겨야 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마땅히 해야만 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사회정의와 공동의 선을 최선을 다해 실행해나가야겠습니다. 인간다운 삶의 질서, 진정 국민을 위한 깨끗한 정치, 경제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다 함께 연대하는 오늘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2016년 11월9일 수요일
오늘의 복음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친교와 사랑으로 짓는 내 삶의 성전 ♣
오늘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는 이 대성전은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교황들이 거주하였고, 다섯 차례의 공의회가 열렸으며,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규칙 인준이 이루어지기도 했던 교회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모든 교회가 성령 안에서 일치되어 있음을 기억하고, 우리의 성화 성소에 대해서도 새겨보아야겠습니다.
성전은 축복과 생명을 가져오는 물이 흐르는 곳이요,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곳입니다(에제 47,8-9. 12). 성전은 거룩함이 반향되고 하늘나라가 실현되는 상징적 공간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전이 장소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영성의 샘이요 세상의 성화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성전이라 하시며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이라 하십니다(루카 2,21). 성전은 인간을 재생시키는 생명의 물이 나오는 곳이며, 이 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이며, 모든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전은 하느님 사랑의 일치를 드러내는 교회의 상징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교회는 그 소명과 사명에서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 사회, 문화 등의 다양한 환경 속에 뿌리를 내린다면 세상 모든 지역에서 다양한 외적 모습과 표현을 띠게 될 것입니다. 각자가 애덕 실천을 통하여 살아있는 성전이 될 때 세계의 모든 성당이 하나로 일치되고, 지역교회와 보편교회가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성전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의 삶을 회상하고 보존하며 살아내는 곳입니다. 우리는 성전에 누구든 차별없이 존중받고 사랑하며,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먼저 사랑으로 선택하여 함께 하며,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울어주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웃어주는 ‘공감과 연민’을 담아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2코린 6,16) 따라서 하느님의 성전인 형제 자매들을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서로를 사랑으로 존중하며 소중히 대하는 마음과 삶의 태도야말로 성전을 참 성전이게 하는 우리다운 모습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성전다운 거룩함의 향기를 풍길 때 구원의 샘이 되고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전세계 모든 교회가 로마 교회와 일치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사명을 실현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이 되어 이 세상을 사랑 가득하고 정의로운 하느님의 성전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 한복판에서 구원의 신비, 사랑의 신비를 선포하고 거행할 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실현 되겠지요. 그 순간 세상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세상과 교회의 머릿돌로서 늘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랑의 친교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내 모든 것을 바치며 투신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2016년 11월10일 목요일
(꽃) 오늘의 복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20-25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세상 한복판에서 찾고 만나는 하느님 나라 ♣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메시아의 나라가 언제 올지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오지 않고 다른 민족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기다리다 못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17,20)고 여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으며,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17,20-21). 곧 하느님 나라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이 미치는 곳에' 있으며 '이미' 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 세상 한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활동과 더불어 늘 있으므로 시간에 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삶의 현실 한가운데 있고, 있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 한가운데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치유기적(10,9)과 구마기적(11,20)을 통해 이미 그 위력이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고 실현하려면 예수님을 삶의 중심이요 궁극적 이유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12,54-56). 하느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에 매이지 않기에 기이한 현상을 찾아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말아야 한다.”(17,23-24)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다른 이들이 나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예수그리스도의 향기를 발견하고 있나요? 그렇지 못하다면 자신과 세상에 눈길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안위와 현세 재물과 권력에 애착을 두고 몰두하여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기에 이미 와 계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은총의 폭포수를 단 한방울도 받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오늘 한국사회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며 신음하시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듯합니다. 이기심과 탐욕에서 비롯된 상리공생 의식의 실종, 패거리 의식, 인간을 돈과 권력의 도구로 삼는 윤리 의식의 상실, 불평등과 소외 등이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찾고 만나려면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 지극한 관심을 가지 서 가져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 '한가운데'로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내 마음속에서 나 홀로 하느님을 찾으려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인간의 생로병사, 희로애락이 있는 삶의 현장 한복판, 그리고 우리 사이 관계 속에서 모두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공동선, 상리공생을 이룰 수 있도록 무관심의 이끼를 거둬내야겠습니다.
오늘도 현세 일과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는 눈길을 거두어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눈길을 돌리고, 사소한 일들과 시간들, 일상의 만남 안에서 다가오는 주님을 놓치지 않고 챙길 수 있길 희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26-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8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29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30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31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32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33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6)
37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저 멀리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의 예를 들어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니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노아와 롯 때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심고 짓고 하며 자기 일에만 몰두하다가 멸망하였지요(17,26-31).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심판의 날은 아무도 미리 알 수 없으나, 눈앞의 것에만 매여 제멋대로 살던 이들은 그날에 심판을 받고 정의가 승리를 거두는 것을 똑똑히 목격하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과학기술과 자동화 디지털기기의 발달로 일자리를 잃는 이들이 급속도로 늘면서 생존의 몸부림 속에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노아시대의 사람들이나 롯의 아내처럼 먹고 마시고 즐기며 눈앞의 생존에만 목숨을 거는 이들이 적지 않은 듯합니다.
멋진 인생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지금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며 사는 삶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듯 멋지게 살려면 이 세상의 움직임에 눈을 돌리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아 하느님의 뜻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목숨 구하겠다고 세상일에 애착하고 미련을 두고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지요.
우리 모두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듯 멋지게 살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지혜를 구했으면 합니다. 애착과 집착과 아집에 사로잡혀 분열된 자아를 버리고,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내 한목숨 살리자고 발버둥치면 결국 소유의 노예가 되어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나만의 생존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바란다면 오늘이 마지막이듯 과감한 버림과 세상을 거스르는 결단과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보전하려 애쓰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잃을 것이며, 지금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차지할 것이라(17,34) 하십니다.
지금 여기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좇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며 살아간다면 결국 시체가 독수리의 먹이가 되듯 심판과 멸망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17,37). 따라서 우리는 평소에 각자의 처지에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관계 중심, 타자 중심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만나는 사람을 선물로 여겨 소중히 대하고, 만나는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얼을 깨닫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눈앞의' 생존이 아니라 '저 멀리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느님의 뜻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오늘이 마지막이듯 자신을 버리고 회개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멋지게 살아갔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2016년 11월12일 토요일
오늘의 복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사랑을 얻어내는 거룩한 고집 ♣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재판관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신론자였던 듯합니다. 그가 원로들이 아닌 법정으로 가서 분쟁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유대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시 재판관들은 뇌물이나 권력을 이용하지 않는 한 억울한 이들의 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악명 높은 사람들이었지요.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재판관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변호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 과부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18,2), ‘불의한’(18,6)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해달라고 귀찮게 조릅니다.
이 과부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뇌물로 쓸만한 돈도 기댈만한 사람도 없었던 사회적 약자였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억울함을 풀고 의로움을 얻고자 끈질기게 불의한 재판관에게 청한 것이지요. 하느님은 의로우시기에 의로움은 포장하거나 방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자체가 바로 가장 큰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지닌 힘과 재물에 기대어 대단한 존재인 양 착각을 하지만 하느님 앞에 먼지에 지나지 않지요! 우리 모두 자신을 재판관처럼 하느님도 사람도 무시하며 추하게 살아갈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어 늘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과부와 같은 처지에 있음을 명심해야겠지요.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가 귀찮아 할 정도로 ‘올바른 판결을 해달라고’ 계속 청하자 올바른 판결을 해주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18,5).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을 때 그 청을 지체 없이 들어주실 것입니다."(18,7-8)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란 제자들과 하느님을 성실하게 섬기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온갖 부정의 과녁이 되기 때문에 고통도 많이 겪게 되지만, 하느님께 정의로 갚아 주시기를 청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정의가 아니고서는 정의롭게 할 수 없으며, 사랑이 아니고서는 사랑을 줄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중요한 태도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8,1)는 것입니다. 여기서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한 것은 청한 것을 받을 때까지 그치지 말고 언제나 기도하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지요. 우리는 청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쉽게 포기하고 낙심하며 다른 세상적인 해결책을 찾아 나서곤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들어 주신다”는 신뢰를 가지고 끈기있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정해진 시간 안에 성과를 내는 사업이 아니라 ‘인내하는 사랑’이요, ‘믿음 안에서의 버티기’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온전히 맡겨드리고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기도의 호흡 안에서 ‘끝까지’ 청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는 ‘사랑의 기다림’인 셈입니다.
오늘도 과부처럼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굳게 믿고 모든 것을 내맡기며 끈질기게 기도하는 거룩한 고집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으로 기다리는 차 한잔의 여유를 가지는 넉넉한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