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안고 있는 성조 아브라함
14세기, 채색 삽화, 그라카니카 정교회 수도원, 그라카니카, 세르비아
이 작품은 14세기에 제작된 기도서의 삽화에 실린 것이다.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천국 정원에 앉아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슴에 안고 있다. 그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다가와 자신들도 구원의 품 안으로 거두어 달라며 요청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품고 있는 사람 가운데는 거지 라자로도 있을 것이다.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장안동성당 주임
생명의 말씀
행복하여라, 부자들이여!
우리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고대인들도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것이 확실한 아브라함에 대해서 그가 “가축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였다”(창세 13,2)고 창세기의 저자들은 강조한 것은 아닐까요? 또한 기브온에서 제사를 바치다가 잠이 든 솔로몬의 꿈에 나타난 하느님께서는 나라를 통치할 지혜와 함께 부와 명예와 장수를 약속해주셨습니다(1열왕 3장 참조). 그러니까 솔로몬이 누린 부와 명예는 그가 받은 하느님의 축복을 확인시켜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기를 쓰고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또 부자들을 비난할 이유도 없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약간의 잘못을 저질렀다 해서 꼭 공정한 법의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실제로 서로 부자가 되려고 하지 가난해지려고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오늘 아모스 예언자의 말씀은 왠지 우리 마음에 불편함을 줍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사는 자들!”(아모 6,1). 그들이 불행한 이유는, 자신들은 온갖 사치를 누리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기”(아모 6,6) 때문입니다.
아모스 예언자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어떤 기준이 적용되어서 부자(富者)가 심판을 받은 반면에 빈자(貧者) 라자로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재물이 많은 부자이기 때문에 무조건 심판을 받은 것이라면,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예수님이 야말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좌파’ 혹은 ‘빨갱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듯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이 되는 ‘사유 재산권’을 부인한 ‘폭탄 발언’을 하신 셈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부자가 심판을 받은 것은 재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루카 16,29 참조).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이란 다름 아니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19,18; 루카 10,27)라는 가르침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부자가 천국이 아닌 지옥에 가게 된 이유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주위의 이웃에게 따뜻한 관심을 갖고 자신이 갖고 있는 재물과 능력과 시간을 나누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이 기준이 부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아브라함이 부자였기 때문에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보다는 소돔이 죄 때문에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소돔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 아브라함의 따뜻한 행동(창세 18장 참조)을 보고 그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와 반대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이들에게 비난한 적이 있다면, 혹시 이런 우리 행동이 하느님의 축복을 스스로 거부하는 행동은 아닐지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렇게 한번 묻고 싶습니다. “부자이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행복하십니다. 나눠줄 것이 남들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아멘.
신희준 루도비코 신부
사제평생교육원
말씀의 이삭
수녀님의 유머
시인 릴케는 ‘지난 여름은 위대했습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준비한 여름의 노고를 의미하는 위대함이겠지만, 제가 보낸 2010년의 여름은 ‘참위대하게’ 더웠습니다.
그 더위가 한창일 때, 제가 글을 연재하고 있는 잡지의 기자이신 수녀님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다가오는 원고마감을 앞두고 보내온 안부 편지였습니다. 이 더위에 원고 달라는 말을 하기조차 죄송하다면서, 수녀님 자신도 ‘저도 사실 요즈음… 시원한 복장으로 원하는 포즈를 취하며 놀고 싶은 맘뿐이네요.’라고 하셨습니다. 이 무더위 속에 수녀님이 수도복 벗고 놀며 취하고 싶은 포즈가 뭘까. 가만히 웃음이 나왔습니다.
문득 오래 전 예비자 시절에, 한 수녀님이 웃으며 들려준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 수녀님은 자신은 꼭 천국에 가야 한다면서 그 이유가 ‘평생 색깔 있는 옷’ 한번 못 입어본 게 억울해서라는 거였습니다. 수녀님이라고 왜 빨강바지가, 잠자리 날개 같은 블라우스가 한번쯤 입어 보고싶지 않으셨겠습니까.
더 고마운 것은, ‘원고 빨리 주세요!’ 하는 말은 꺼내지도 않고 슬그머니 하시는 말씀이 더운데 힘내라고 유머를 하나 해 주시겠다는 거였습니다. 아, 수녀님께서 들려주신 유머라 그래서인지… 그 유머는 재미있으면서도,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위해 애써 주시는 수녀님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해 드려야지 하는 자성의 마음을 담아 그 유머를 여기 옮겨 봅니다.
성실하게 믿음의 삶을 살았던 어떤 신자께서 천당에 가게 되었답니다. 기쁘게 천당에 도착해서 식당에 들어가 보니, 어쩐 일인지 식당에서 식탁도 닦고 서빙도 하는 분들이 전부 본당 신부님과 수녀님들이더랍니다. 신자들은 자리에 앉아서 편안하게 대접만 받고. 깜짝 놀란 그 신자가 ‘아니 이런 궂은일은 저희들에게 맡기셔요’하면서 말렸더니 수녀님과 신부님들이 말하더랍니다. 저 세상에서는 신자들이 우리를 너무 많이 도와주고, 신세만 졌기 때문에 여기 천국에 와서는 우리가 궂은일을 하는 거라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주교님도 추기경님도 보이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궁금한 마음에 그분들은 다 어디 계시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이러더랍니다.
‘추기경님이랑 주교님이요? 그분들은 배달 가셨습니다.’
한수산 요한 크리소스토모
소설가, 세종대학교 교수
생명사랑
생명의 복음을 경축하기(1)
“ 이 경축은 그 행위와 상징과 의식(儀式)”이 지닌 환기시키는 힘을 통하여, 이 복음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전달하는 귀중하고 의미심장한 무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과 타인들 안에 관상적인 시각을 길러야 합니다. 이러한 시각은 모든 사람을 ‘오묘하게’ 창조하신 생명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서 생겨납니다<생명의 복음 83항>.
복음 선포의 삼중 직무 중 ‘사제직’에 해당하는 것은 전례와 기도, 성사를 통한 생명의 ‘경축’(celebration)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서도 우리는 이 경축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 주어진 생명의 선물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생명, 고통, 죽음 등의 충만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얻게 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참되게 생명을 경축하기 위해서는 “관상적인 시각”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눈으로 모든 생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시각은 생명을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선물로 바라보며 찬미로 응답하게 합니다. 이 시각은 “모든 사물 안에서 창조주의 반영을 발견”하게 만들고, 병들고, 소외되고,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포기하기 않고 오히려 그 의미를 찾게 하며, “깊은 종교적 경외심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존중”하도록 만들어줍니다.
박정우 후고 신부
-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