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45-48
그때에 45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entrando Jesús en el Templo, comenzó a echar fuera a los que vendían, diciéndoles: «Está escrito: ‘Mi casa será casa de oración’. ¡Pero vosotros la habéis hecho una cueva de bandidos!». Enseñaba todos los días en el Templo. Por su parte, los sumos sacerdotes, los escribas y también los notables del pueblo buscaban matarle, pero no encontraban qué podrían hacer, porque todo el pueblo le oía pendiente de sus labios.
«Mi casa será casa de oración»
P. Josep LAPLANA OSB Monje de Montserrat
(Montserrat, Barcelona, España)
Hoy, el gesto de Jesús es profético. A la manera de los antiguos profetas, realiza una acción simbólica, plena de significación de cara al futuro. Al expulsar del templo a los mercaderes que vendían las víctimas destinadas a servir de ofrenda y al evocar que «la casa de Dios será casa de oración» (Is 56,7), Jesús anunciaba la nueva situación que Él venía a inaugurar, en la que los sacrificios de animales ya no tenían cabida. San Juan definirá la nueva relación cultual como una «adoración al Padre en espíritu y en verdad» (Jn 4,24). La figura debe dejar paso a la realidad. Santo Tomás de Aquino decía poéticamente: «Et antiquum documentum / novo cedat ritui» (Que el Testamento Antiguo deje paso al Rito Nuevo»).
El Rito Nuevo es la palabra de Jesús. Por eso, san Lucas ha unido a la escena de la purificación del templo la presentación de Jesús predicando en él cada día. El culto nuevo se centra en la oración y en la escucha de la Palabra de Dios. Pero, en realidad, el centro del centro de la institución cristiana es la misma persona viva de Jesús, con su carne entregada y su sangre derramada en la cruz y dadas en la Eucaristía. También santo Tomás lo remarca bellamente: «Recumbens cum fratribus (…) se dat suis manibus» («Sentado en la mesa con los hermanos (…) se da a sí mismo con sus propias manos»).
En el Nuevo Testamento inaugurado por Jesús ya no son necesarios los bueyes ni los vendedores de corderos. Lo mismo que «todo el pueblo le oía pendiente de sus labios» (Lc 19,48), nosotros no hemos de ir al templo a inmolar víctimas, sino a recibir a Jesús, el auténtico cordero inmolado por nosotros de una vez para siempre (cf. He 7,27), y a unir nuestra vida a la suya.
♣ 독선과 차별과 불의의 벽을 허물고 ♣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신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처럼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성전은 하느님 백성의 삶의 중심지이지요.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마자 성전 자체이신 자신을 온전히 드러냄으로써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은 더 이상 하느님의 집이라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신앙의 이름으로 합리화 한 이스라엘의 사회구조 전반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로 나뉘어 서로를 분리하고 출입에 제한을 두는 분리와 차별의 장소였습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권위와 신분이 우선시 되어 평등한 삶을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성전에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종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힘 있는 사람들이 성전을 장악하고 사람들의 경제생활과 정치생활을 좌우하고 있었으며 그 모든 부당한 일을 종교의 가면으로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성전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삶 전반이 탐욕과 집단적 이기주의의 모순과 불평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19,46).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심으로써 거짓된 종교관과 독선과 배타심과 탐욕이 낳은 뒤틀린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바로 세우려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이 성전인데도 여전히 성전은 건물과 장소에 국한하여 바라보는 시각이 있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우리 각자가 성전이요 성령의 궁전입니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세상의 한복판이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드러나는 곳이 바로 성전이지요.
따라서 성전 정화는 건물 청소에 한정되지 않으며 예수님의 일만은 아니겠지요. 성전정화는 개인 차원, 교회 차원, 사회 차원에서 하느님을 담아내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리 안에 있는 차별, 배타심, 독선과 탐욕, 이기심과 같은 벽을 허물어버려야겠지요. 인간이 만들어놓은 신분제도, 계층적 분리를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의 성전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생명을 안겨 줄 정의로운 정치적 또는 경제적 구조를 산출하는 자유로운 종교를 생활화 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폐쇄적 태도를 버리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린 성전이 되어야겠지요.
주님의 성전인 우리도 미움, 분노, 교만, 이기심, 세상재물에 대한 애착과 탐욕, 허영, 사치, 무관심과 냉대, 차별 등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일체의 것들을 청산함으로써 스스로 정화해야겠습니다. 하느님과 무관한 과거의 관습이나 사고방식, 지나친 이상 추구, 과거 감정에 대한 집착, 독선 등에서 벗어나야겠지요.
오늘도 나 자신과 이 사회가 독선과 차별을 버리고 사랑으로 서로의 고통과 슬픔과 기쁨을 나누며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성전이 되었으면 합니다. 거짓 권력의 횡포와 부패,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 불의와 핍박에 과감히 맞서는 정의의 실천을 통하여 이 세상이 참으로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성전을 정화하시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기도의 집’이라는 말은,
“누구나 들어가서 기도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하느님의 집”,
또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강도들의 소굴’이라는 말은,
“이기적인 탐욕으로 가득 차 있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강도들의 소굴’이라는 말은 예레미야서에서 온 말입니다.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
나도 이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7,9-11).”
여기서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 라는 말씀에는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강도로 전락시키느냐?”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 일은, 성전 모독죄를 짓는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 말씀 바로 앞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예로부터 영원히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땅에 살게 하겠다(예레 7,5-7).”
이 말씀을 보면, ‘하느님만’ 섬겨야 한다는 것도 강조되어 있지만,
‘이웃 사랑’을 제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특별히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사실상 하나의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 없는 성전은(교회는) 하느님의 성전이(교회가) 아닙니다.
사이비 성전, 사이비 교회가 될 뿐입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이웃을 제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 실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그저 자기 개인의 현세적인 복만 비는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기복 신앙은 사이비 신앙이고, 사실상 미신입니다.
그리고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속을 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7-48).”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1) 성전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했다는 것.
2)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그 방법을 찾았다는 것.
그들은 왜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했을까?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로 변질되었다는 말씀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들의 행위가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큰 죄가 될 뿐입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
예수님의 가르침이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또는 양심이) 불편한 것은 회개를 하라는 표시입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회개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싫었고,
그래서 자기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말씀 자체를 막아버리려고 했습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지만,
예수님 곁을 지키고 있는 백성들 때문에 죽이지 못합니다.
백성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어떻든 그들은 당시에는 예수님을 지켜 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민중이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지지했음을 나타냅니다.
민중은 왜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지지했을까?
자기들이 바라고 있던 일을 예수님께서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로 변질되었음을 느끼고 있었고,
‘기도의 집’으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종교는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일종의 독재 권력이었습니다.
독재 정치만 악인 것이 아니라, 독재 종교도 악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집입니다(요한 2,16).
그러니 성전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동시에 성전은 모든 사람을 위한 집입니다(마르 11,17).
그러니 이웃 사랑을 거스르는 일도 하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뒤에,
그것을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요한 2,19).
이 말씀은, ‘강도들의 소굴’은 허물고 없애라는 준엄한 명령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서 개인의 욕심이나 채우는 종교는 없애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큰 죄를 짓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이 되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열려 있는 이타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가 곧 성전이다.
성도 예루살렘의 불행과 멸망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편치 않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눈물과 한탄으로 그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 그분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는 일, 올리브산을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곧바로 성전으로 가셔서 갖은 상혼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다.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은 4복음서 모두가 보도하고 있다.
(마태 21,12-17; 마르 11,15-19; 요한 2,13-17)
익히 알고 있는 바, 요한복음은 성전정화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 시점에 두었고,
공관복음은 공생활 종료 시점에 두고 있다.
그런데 루카는 원전이 될 마르코복음을 대폭 축소하였고,
정화의 시점도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날인 것(마르 11,12)을 입성 당일로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 있듯이 루카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을 원전에 비해
대폭 축소하여 보도하면서,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서에 없는
‘성전 안에서는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도 ‘날마다 가르치셨다.’(46a절)고 한다.
루카복음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과
성전 안에서의 활동 사건을 함께 묶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먼 길을 오셨다.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를 옆으로 둘러, 데카폴리스, 베레아, 유다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한 장도의 목적은 우선 예루살렘 성전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당일, 곧바로 상인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성전을 정화하신 이유는
성전이 예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루카 2,49)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성전,
바로 그 집에 예수께서 드디어 도착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이사야 예언자도 “나의 집은 뭇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56,7)고 했다.
더럽혀진 성전이 상인들을 쫓아내는 것만으로 다시 성화(聖化)되는 것은 아니다.
성화는 기도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현존과 말씀을 통하여 성전은 자신의 잃어버린 거룩함을 다시 찾는 것이다.
이는 적어도 예수께서 계시는 동안은 가능하다.
그런 다음에는 예수님 스스로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신약의 새로운 성전이요 하느님의 집이 되실 것이다.
성전은 웅장한 벽돌과 아름다운 치장으로만 하느님의 집이 되지는 못한다.
하느님께 드리기 위해 제단에 바쳐진 값나가는 제물이 성전을
하느님의 집이 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작금에 수십억의 돈을 들여야 땅을 마련하고 그 위에 하나의 성전이 지어지는 것을 본다.
자신은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에 살면서도 웅장한 성전건립을 위해 기금을 내고 약정을 한다.
성당이 분가되어 겨울에 떨고 여름에 찌는 비닐하우스나 군대막사 같은 가건물을 마련하더라도
신자들이 모이면 그곳은 성전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려 모여든 공동체가 곧
하느님의 집이며, 성전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1코린 3,17)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가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봉헌할 수 있도록 지어진 성전은 우리 공동체가 거룩해질 때 함께 거룩해지는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