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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복음 묵상

[복음]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161130 성 안드레아 축일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6.11.30|조회수304 목록 댓글 1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vangelio de Hoy


En aquel tiempo, caminando por la ribera del mar de Galilea vio a dos hermanos, Simón, llamado Pedro, y su hermano Andrés, echando la red en el mar, pues eran pescadores, y les dice: «Venid conmigo, y os haré pescadores de hombres». Y ellos al instante, dejando las redes, le siguieron. Caminando adelante, vio a otros dos hermanos, Santiago el de Zebedeo y su hermano Juan, que estaban en la barca con su padre Zebedeo arreglando sus redes; y los llamó. Y ellos al instante, dejando la barca y a su padre, le siguieron.


«Os haré pescadores de hombres»

Prof. Dr. Mons. Lluís CLAVELL 

(Roma, Italia)

Hoy es la fiesta de san Andrés apóstol, una fiesta celebrada de manera solemne entre los cristianos de Oriente. Fue uno de los dos primeros jóvenes que conocieron a Jesús a la orilla del río Jordán y que tuvieron una larga conversación con Él. Enseguida buscó a su hermano Pedro, diciéndole «Hemos encontrado al Mesías» y lo llevó a Jesús (Jn 2,41). Poco tiempo después, Jesús llamó a estos dos hermanos pescadores amigos suyos, tal como leemos en el Evangelio de hoy: «Venid conmigo y os haré pescadores de hombres» (Mt 4,19). En el mismo pueblo había otra pareja de hermanos, Santiago y Juan, compañeros y amigos de los primeros, y pescadores como ellos. Jesús los llamó también a seguirlo. Es maravilloso leer que ellos lo dejaron todo y le siguieron “al instante”, palabras que se repiten en ambos casos. A Jesús no se le ha de decir: “después”, “más adelante”, “ahora tengo demasiado trabajo”...


También a cada uno de nosotros —a todos los cristianos— Jesús nos pide cada día que pongamos a su servicio todo lo que somos y tenemos —esto significa dejarlo todo, no tener nada como propio— para que, viviendo con Él las tareas de nuestro trabajo profesional y de nuestra familia, seamos “pescadores de hombres”. ¿Qué quiere decir “pescadores de hombres”? Una bonita respuesta puede ser un comentario de san Juan Crisóstomo. Este Padre y Doctor de la Iglesia dice que Andrés no sabía explicarle bien a su hermano Pedro quién era Jesús y, por esto, «lo llevó a la misma fuente de la luz», que es Jesucristo. “Pescar hombres” quiere decir ayudar a quienes nos rodean en la familia y en el trabajo a que encuentren a Cristo que es la única luz para nuestro camino.



♣ 예수님과 함께하며 한 알의 밀알이 되는 사도 ♣ 

시몬 베드로의 동생이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는,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요한이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말하자, 이튿날 다른 제자와 함께 예수님을 따라갑니다(1,37). 

예수님께서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시자 그들은 “라삐,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되묻습니다(1,38). 이에 그분께서 “와서 보시오.”(1,39) 하시며 그들과 함께 묵으십니다. 안드레아는 이렇게 처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분을 알아보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안드레아는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1,41) 하며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갑니다. 이것이 그의 첫 복음선포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사돈어른의 치유를 도왔고, 굶주린 군중을 위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소년이 있다고 예수님께 알려드렸습니다. 선을 발생시키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지요. 

또한 안드레아는 올리브 산에서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종말에 관한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마르 13,32-37). 축제를 지내러 온 그리스 사람들 몇이 예수님을 뵙게 해달라고 청하자 그는 필립보와 함께 그분께 말씀드리기도 했지요. 그때 그분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12,24) 하고 가르치십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는 이 말씀대로 주님을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됩니다. 그는 예수님의 승천 후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러시아 남부에서 발칸반도를 거쳐 북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선포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 때인 70년경 마케도니아 남쪽의 파트라스에서 체포되어 십자가에 X자로 못 박혀 순교했다고 합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형장에 끌려갔을 때 십자가 앞에 꿇어앉아 두 손을 높이 쳐들고 기쁨에 가득 차 “내가 바라고 사랑하며 오랫동안 찾던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나를 구하신 주님께서 나를 받아 주시도록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 올려 주님 곁으로 가게 해주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성 안드레아 사도를 본받아야겠습니다. 그는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하는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듣고 단순하게 받아들였으며,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곧바로”,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마태 4,20).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는 주저함이 없이 단순하게 즉각적으로 따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한 제자로 살아가려면 나의 가치기준과 소유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면 유연하게 떠나야만 합니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포기와 결단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기 위해 나와 세속과 재물로부터 떠나는 결단이 필수적이지요. 나아가 따른다는 것은 일시적으로 또는 남는 것을 가지고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헌신과 투신을 말합니다. 

오늘도 안드레아 사도처럼 기꺼이 자신을 떠나 선을 발생시키는 주님의 도구가 되어, 이웃을 돕고 사회를 밝히며 사랑과 정의의 질서를 바로 세우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 썩어 없어지는 한 알의 밀알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복음 선포>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나를 따라오너라.” 라는 말씀은 “내 제자가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낚는다.” 라는 말은 원래는 나쁜 말인데,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사람을 구한다.” 라는 좋은 뜻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물속에 있는 사람을 물 밖으로 끌어내는 일은,

죽을 위험에 놓여 있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물’은 ‘죽음’을 상징하고, ‘물 밖’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좋은 표현들을 놓아두고

굳이 ‘사람 낚는 어부’ 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그들의 직업이 어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너희는 그동안 물고기를 잡는 어부로만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구하는 사도로 살게 될 것이다.”

(또는 “너희는 그동안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복음 선포를 하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만들겠다.” 라는 말씀은,

어부들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또 사도가 된 것은

그들 자신들의 선택과 그들 자신들의 힘으로 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총으로 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선택하고,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은데,

그런 생각은 착각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뽑으신 일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은총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시기 전에

그들부터 먼저 “물속에서 물 밖으로” 끌어내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부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물속에서’, 즉 죽음을 향해서 가는 인생을 살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물 밖으로’, 즉 생명을 향해서 가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복음 선포 사업에 동참한 일은

그들 자신들이 받은 구원을 증언한 일이기도 하고,

자신들이 받은 은총을 사람들과 나눈 일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여서 신앙인이 된 사람들은,

‘사람 낚는 어부들’(사도들)에 의해서 ‘낚인(구원을 전해 받은) 사람들’입니다.

즉 물속에(죽음 속에) 있다가 물 밖으로(생명으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이 되기 전에는 물속에, 즉 죽음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신앙인은 어둠 속에 앉아 있다가 큰 빛을 보고 그 어둠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실감하기가 어렵지만,

어른이 된 후에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세례 받기 전의 인생과 받은 후의 인생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것은 죽음에서 벗어나서 새 생명을 얻게 된, 대단히 큰 변화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령 강림 후 첫 설교 때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사도 2,38-39).”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사도 2,40).”

이 말에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나는 죄인이 아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을 보면,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회개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구원도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

예수님께서, 또 사도들이 물 밖으로 데리고 가려고 해도

물속이 더 좋다고 하면서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을 것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사람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이고,

그래서 ‘늘 회개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과 사도들 덕분에

물속에서 물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한 번 물 밖으로 나왔다면 다시 물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방심하고 자만하면,

마치 끌려가는 것처럼 ‘옛 생활’로 되돌아가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받은 생명의 은총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일과 같습니다.


그 다음에 할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입니다.

사실 사도들이 받은 임무는 사도들만의 임무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모든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여러분은 나무랄 데 없는 순결한 사람이 되어

이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에서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십시오(필리 2,15.공동번역).”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과 구원의 빛을 받은 사람이고,

자기가 받은 빛을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사람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해 주는 일이기 때문에 ‘복음 선포’는 곧 ‘사랑 실천’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나를 달리게 하시는 분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세상을 건너 갈 징검다리’란 제목의 내용입니다. 


 

종민이는 몸이 약합니다. 

조회 때 쓰러진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종민이는 이렇게 약하게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도 원망스럽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개교 50주년 기념행사로 10킬로 단축 마라톤 경기가 있었습니다. 

종민이는 이번에는 꼭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으로 

집 근처 공원에서 매일 한 시간씩 마라톤 연습을 하였습니다. 

부모님은 이런 종민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으로나마 응원해 주었습니다. 


마라톤 경기가 있던 날 종민이는 끝까지 경기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습니다. 

출발 신호와 함께 100여 명의 학생들이 교문을 빠져나갔습니다. 


한참을 달리다 경사진 언덕을 오를 때, 종민이는 가슴이 뻐근해졌습니다. 

1킬로도 채 뛰지 못하고 종민이의 체력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몇 명의 아이들이 종민이를 앞질러 갔습니다. 

종민이는 꼴찌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고 몇 번을 뒤돌아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기를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열 걸음 정도를 걸었습니다. 

바로 그 때, 종민이의 등 뒤에서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종민이와 100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한 명이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종민이는 꼴찌가 아니었습니다. 

 

종민이는 힘을 내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꼴찌는 종민이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꼴찌를 향해 환호와 격려의 박수를 계속 보내주었습니다. 


자신의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고 있다는 안도감에 종민이는 9킬로를 달렸습니다. 

경기는 종반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 힘을 다해 교문을 들어설 때까지도 꼴찌는 종민이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습니다. 

 

선생님과 학생들의 박수를 받으며 종민이는 마침내 결승점에 도착했습니다. 

종민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뒤를 이어 달려 들어올 친구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친구가 결승점을 얼마 남기지 않고 

경기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종민이는 왠지 마음이 아팠습니다. 


종민이는 집에 돌아와 자랑스럽게 자신이 10킬로를 완주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종민이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밤늦도록 책상에 앉아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안방 문틈 사이로 아버지의 가는 신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종민이의 아버지도 종민이처럼 몸이 많이 약했습니다. 


다음날, 종민이는 아버지가 왜 밤새도록 끙끙 앓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마라톤 경기가 있던 날, 

자신의 뒤에서 꼴찌로 달렸던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종민이 아버지는 꼴찌로 달리며 종민이에게 안도감을 주고 싶었던 거였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꼴찌의 모습을 통해 

종민이를 격려하고 싶었던 거였습니다. 

종민이보다 더 약한 몸으로 아버지는 그 긴 거리를 달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흘린 땀은 종민이가 세상을 건너 갈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우리는 조선 명필 서예가 한석봉 어머니가 아들을 어떻게 교육했는지 잘 압니다. 

아들이 공부를 다 마치지 않고 돌아오자 불을 끄고 당신은 떡을 썰고 

한석봉은 글을 쓰게 하였습니다. 

 

한석봉은 자신을 위해 어머니가 얼마나 노력하고 계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수학하여 위대한 명필가가 됩니다. 

 

종민이 아버지가 뛰어주었기 때문에 종민이도 끝까지 뛸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일을 하는 힘이 

당신을 위해 일해주시는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어부인 안드레아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의 형과 마찬가지로 사람 낚는 어부로 일을 시키십니다. 

모든 사도들은 순교의 길을 가셨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도 나중에 엑스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설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죽기직전까지 시간이 아까웠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나누고 계신 스승을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께서 나와 함께 뛰어주십니다. 

나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계십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가만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를 뛰게 한다고 해서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결승점에 도달하는 기쁨은 우리 것이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분은 나에게 힘을 내라고 오늘도 그 차디찬 나무 위에서 힘겹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단 한 사람을 낚는 낚시꾼 


11월의 마지막 날 교회는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을 기념한다. 

안드레아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으로서 형과 같은 어부였으나, 

갈릴래아 호숫가를 거니시던 예수로부터 형과 함께 제자로 불림을 받았다. 


안드레아는 벳사이다 출신(요한 1,44), 아니면 카파르나움 출신(마르 1,29)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처음에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였다가 예수의 제자가 된 

그 첫 번째 사람이다.(요한 1,35-40) 


그리고는 자기 형(신몬 베드로)을 예수께 인도하였다. 

신약성서를 살펴보면 안드레아는 복음서에 16번, 사도행전에 1번 등장하는데,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승천, 성령강림 사건에 함께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성령강림 이후 안드레아는 흑해 연안의 소아시아 전역과 오늘날 불가리아와 그리스 지방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도 소생시켰다고 전해진다. 


성인의 마지막 종착역은 그리스 아카이아 지방의 파트라스, 

여기서 성인은 에게아스 총독의 부인 막씨밀리아를 신앙으로 인도하고 

영적 생활을 하도록 권고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총독은 안드레아 성인을 불러 그리스도교에 대한 납득할만한 이해를 요구한다. 

성인의 충분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총독은 경비병들에게 지시하여 

성인을 구금하고 고문을 가한다. 


결국 성인은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매달려 서서히 죽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이 ‘X’ 모양의 십자가를 ‘안드레아 십자가’라 부른다. 


성인은 죽어가면서도 백성들을 향하여 설교를 하였고, 하늘의 광채가 그를 비추었다. 

이에 완전히 정신이 나간 에게아스 총독은 성인을 창으로 찌르며 죽도록 매질하게 하였다. 

이렇게 성인은 60년경에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 


막씨밀리아는 성인의 시체를 거두어 경건하게 장례를 치렀다. 

성인의 유해 대부분은 356년 콘스탄티노플의 사도성당에 옮겨졌고, 

1208년에는 나폴리 근처 아말피의 성 안드레아 대성당으로 로 옮겨졌다. 

유해의 다른 부분들은 로마와 파트로스로 옮겨졌다고 하나 그 진실성은 의심스럽다. 


안드레아 사도는 러시아와 스코틀랜드 등 여러 나라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으며,

 부르군트 왕가는 안드레아 십자가를 가문의 문장을 삼기도 했다. 


부르군트 왕가는 12세기경 ‘안드레아의 십자가’를 발견하여 마르세이유에 보관하였으나 

14세기에는 다시 브뤼셀로 옮겨 보관하였다고 한다. 


성서에서 안드레아 성인은 형 베드로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로 나타난다. 

형 베드로가 과격하고 덤벙거리는 유형이라면 동생 안드레아는 신중하고 세심한 성격을 가진 자였다.

복음서에서는 안드레아는 주의력과 끈기가 대단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요한 1,36)는 말을 듣고 

예수께서 묵고 계신 곳까지 따라가 그분의 제자가 된다. 

그리고는 형 시몬을 예수께 인도하였다.(요한 1,37-42) 


며칠씩 따라 다니던 오천 명의 군중을 허기진 채로 돌려보내시지 않으려는 예수님의 의중을 헤아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어린아이를 발견하고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것을 예수님께 전해 드림으로써 

빵의 기적을 보기도 했다.(요한 6,8-9) 


예수님이 마지막 과월절 명절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온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를 뵙게 해 달라는 간청을 듣고 필립보와 함께 예수께 전해 올리기도 한다.(요한 12,20-22) 


또 안드레아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제자와 함께 

올리브산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시던 예수께로 다가가 재난의 시기와 징조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는, 어떤 일이 있어나도 정신을 차리고, 박해자들 앞에서 주님을 증언해야 하며,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도 했다.(마르 13,3-13) 


바로 이런 세심함과 끈기와 다짐이 오늘 성 안드레아 사도를 있게 한 것이다. 

위에 언급한 안드레아 성인의 복음선포활동에서 보았듯이, 

그는 총독 에게아스의 부인 막씨밀리아를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인도한 대가로 목숨을 바쳐야 했다. 


그가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세심하고 주의 깊은 성격 탓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스승인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의 스승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번째 제자들의 소명사화를 전하는 오늘 복음이 더 의미 있게 들리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제자들의 소명사건이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과 

갈릴래아 출현의 첫 시점에 있었던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태오는 이 사건을 예수님 공생활의 첫 부분에 배치해 놓았다. 

왜일까? 

그것은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있으면서 스승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고 보고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을 안드레아 사도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해 낸 것이다. 


자기 형 베드로가 그물을 쳐서 많은 사람들을 낚는 어부요 사도였다면(사도 2,14-42), 

동생 안드레아는 낚시를 던져 한 사람을 낚는 세심하고 끈기 있는 낚시꾼이며 사도였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단 한 사람을 인도하는 데서 시작됨을 깨닫는 오늘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신학과 영성
우리는 ‘신자’ 이전에 ‘인간’으로 부르심 받았다[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9
김근수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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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6.27  09: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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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갈릴래아 호숫가를 거닐다가 보시니,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기 안드레아 두 형제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부였다. 그러자 그들에게 “내 뒤로 오시오. 당신들을 사람 낚는 어부들로 삼겠소” 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 그리고 그분은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기 요한을 보셨는데 그들은 자기네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배에서 자기네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부르시니 그들은 곧 배와 자기네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마태 4,18-22)

예수가 제자를 부른 두 장면으로 엮어진 이야기다. 오늘 본문은 사실 보도라 하기보다 이상화된 장면이다. 초기 제자들의 이름과 직업, 그리고 부르신 장소가 나타나 있다. 둘째 초대는 첫째 초대보다 짧은 후렴처럼 소개된다. 첫째 이야기에서 제자들은 그물을 버렸는데, 둘째 이야기에서 제자들은 배와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다. 자녀를 떠나보내는 부모 입장이 아니라 떠나는 자녀 입장에서 서술되고 있다(1열왕 19,20).

갈릴래아 호숫가는 마태오 복음 16,12까지 예수의 주요 활동 무대다.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도 갈릴래아 호수, 특히 긴네렛 호수라고 불렸다(민수 34,11). 어부는 호숫가에 발을 담근 채 그물을 던진다. “그물”은 선교에 대한 전망을 고려한 표현이다(마태 13,47).

베드로는 처음부터 시몬으로 소개된다. 베드로는 마태오 복음이 생긴 공동체에 잘 알려져 있었다. 시몬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베드로 또는 시몬 베드로라고 언제나 불린다(예외 : 마태오 17,25). 오늘 본문과 마태 10,2에서 “베드로라고 불리는 시몬”으로 나타난다.

  
▲ ‘사도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심’, 두초(Duccio di Buoninsegna)의 작품, 1311년.

마태 16,16에서 시몬 베드로라는 이름을 예수가 장엄하게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별명이던 베드로가 직무 이름으로 새롭게 규정되는가? 첫 번째 사도(마태 10,2)로서 베드로는 요한 복음 1,40-42와 달리 공관복음(마르코 · 마태오 · 루카 복음 총칭)에서 언제나 첫째로 부름 받았다.

마르코 복음 3,16과 달리 예수가 시몬에게 그 이름을 주었다고 마태오는 말하지 않는다. 바위라는 뜻의 그리스어 베드로는 돌같이 단단한 그 성격을 암시한다. 베드로의 성격을 예수가 베드로라는 별명으로 확인한 것이지 그 성격을 예수가 창조한 것은 아니다(마태 16,19). 제자들 성질머리를 예수도 고치지 못했다. 자기 성격은 자기 탓이다. 별명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이 언급된 사실은 예수가 그들 성격을 확인해 주었다는 뜻일까(마태 10,2-4; 루카 6,16)?

목수 예수가 어부 제자를 부른다. 제자보다 동지(同志)가 더 적절한 번역은 혹시 아닐까. 목수는 어부보다 훨씬 대접받던 직업이었다. 당시 목수는 전문직 중산층에 속하는 호평 받는 직업이었다. 반면 어부는 농부처럼 하층 직업에 속했다. 목수는 가난한 직업이었다는 설교를 아직도 자주 듣는다. 이런 멍청한 설교를 신자들은 언제까지 더 들어야 하나.

그러나 마태오에게 12 제자단 구성은 빠져 있다. 오늘 제자들을 부른 이야기, 마태오를 부르심(마태 9,9)에 이어 10,1에 이미 12 제자가 있는 것으로 전제될 뿐이다. 마태오는 사도(apostolos)라는 단어를 10,2에서만 사용하고, 언제나 제자(mathetai)라는 단어를 쓴다. mathetai는 12 제자들과 공동체의 일치를 나타내는 단어지만 apostolos는 그렇지 않다.

부모를 떠나는 대목은 마태 10,37에 다시 나온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불효를 권유하는 구절이 전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불효를 부추기고 권장하는 집단이 아니다. 아버지는 유다교를 따르고 자녀는 초대교회를 따르는 경우가 있던 당시 신자들을 위로하려는 구절이다.

예수를 따를수록 부모에게 더 효도해야 한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을까. 인륜도 모르면서 천지의 창조주를 어떻게 알까. 인륜부터 닦는 것이 종교심의 기본이다. 논어도 모르고서 어찌 성서를 알랴. 기본이 되지 않고서 높은 경지를 어떻게 넘볼까. 인성의 기본도 갖추지 않은 성직자들이 마이크를 잡으면 어떻게 될까. 신자들에게 반말하는 성직자들이 적지 않다. 유치원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인간들이다.

제자들을 그렇게 부르듯 예수는 우리를 부르셨다. 예수를 알기에 앞서 우리는 인간으로 하느님께 부름 받았다. 그리스도교 신자로 세례 받는 것보다 앞서 인간으로 세례 받은 셈이다. 인간으로 부름 받은 이 놀라운 사실을 그리스도교 세례보다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어느 종교에 속하느냐보다 우리 모두가 인간이란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교리를 단순히 아는 것이 곧 예수를 따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회개를 동반한 따름이 진짜 따름이다. 예수를 따름은 내 자신이 또 다른 예수가 되도록 애쓰는 것이다. 가톨릭에서 성직자에게 흔히 붙이는 경칭인 ‘또 다른(alter) 예수’는 성직자에게만 해당되는 용어가 전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또 다른 예수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소브리노(Sobrino)로부터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집중 연구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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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구스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12.01 중간의 그림은 톨레도 대성당에 있는 엘 그레코 그림이지요.
    마치 예수님을 모시듯 십자가를 안고, 들어 축복하는 그 손이 참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같은 방에 있는 '옷 벗겨지시는 예수' 그림에서 자신을 못박으려는 이를 축복하시는 예수님 손길과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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