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8-24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역사를 뚫고 오시어 변형시키시는 신비 ♣
오늘 제 1독서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남왕국 유다는 강대국 아시리아와 그에 맞선 동맹군 사이의 전쟁 중에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721년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유다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하즈 왕은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이사 7,11)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구원의 손길을 청하라는 것이었으나 그는 청하지 않습니다(7,12).
아하즈 왕은 그렇게 하느님의 손길을 거부해버렸습니다. 하느님의 구원경륜은 인간역사의 틀과 일정한 장소나 시간, 특정한 사건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역사를 품어 변형시키는 궁극적인 힘입니다. 인간의 불의와 고통이 드러나는 그 역사를 관통하여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구원경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체적인 삶의 순간마다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을 앞두고 있는 지금 오늘 복음의 요셉의 역할과 태도를 되새기며 혼란스럽고 불안한 삶의 한복판에서 나의 말과 행동을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지 분명한 선택을 해야겠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예고하는 오늘 복음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요셉의 역할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의로움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함으로써 드러나는 의로움과는 차원이 달랐지요. 그는 약혼녀 마리아가 같이 살기도 전에 잉태한 것을 알고는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마태 1,18-19).
그런데 요셉은 주님의 천사에게서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하느님의 구원경륜과 관계를 맺는 요셉의 방식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로움에 의탁한 것입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나 불의 앞에서 자기 기준과 가치관에 따라 항변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 것이 요셉의 방법이었습니다. 구원경륜과 관계를 맺는데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개입하시도록 여백을 드리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추구한다면서 얼마나 자주 나의 뜻을 내세우는지 모릅니다.
요셉이 지녔던 또 다른 의로움의 자세는 하느님의 음성을 따르는 받아들임입니다. 이 세상의 현실, 인간역사를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바꾸는 것은 의로움이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요셉은 그렇게 당시 사회질서와 율법에 비추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묵인한 것이 아니라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뜻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셉의 의로움은 단순한 불의의 거절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동참을 통해서 실행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는 그렇게 고상한 신비스러움이나 추상적인 관념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처럼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여 자신을 사랑의 신비의 일부로 내놓을 때 가능한 것이지요.
오늘도 성 요셉처럼 하느님의 의로움에 의탁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다른 이들과 이 사회의 구체적인 고통에 동참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 역사를 뚫고 오시어 생명과 참 기쁨으로 변형시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부르심과 응답>
루카복음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단순히 ‘마리아’에게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
에게 보내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루카 1,27).
이것은 하느님께서 마리아만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도 함께 선택하셨음을 나타냅니다.
(마리아와 요셉을 함께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마태 1,19).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사람,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요셉이 루카복음에 나오는 시메온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루카 2,25-26).”
요셉도 시메온처럼 의롭고 독실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이 예수님의 아버지로 선택된 것은,
그의 희망과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요셉을 선택하신 것은,
그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아 강림’은 요셉이 생각했던 방식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에 메시아 탄생에 관한 예언들이 있지만,
메시아께서 그런 식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보면,
요셉이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게 된 일이 먼저이고,
천사가 나타나서 그 일을 설명해 준 일은 그 다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그런 순서로 일을 하셨을까?
(잉태 전에 마리아에게 먼저 설명해 준 것처럼
요셉에게도 미리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우리가 하느님의 생각을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은 마리아의 ‘동정 잉태’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은,
무척 놀라고 당황하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기도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것은(마태 1,19),
오랫동안 기도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셉이 감추려고 한 것은 마리아의 잉태가 아니라 파혼입니다.
이것은 마리아와 아기를 모두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이었습니다.
파혼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마리아를 요셉의 약혼녀로만 생각하게 될 것이고,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파혼을 실행하기 전에 천사가 나타난 일은,
요셉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요셉이 천사를 천사로 바로 알아보았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고,
천사가 하는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로 알아들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바로 순종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아버지가 될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언제 어떻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든지 간에
즉시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말에 연결됩니다.
요셉은 평소에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았던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바로 응답하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놀라고 당황하고 두려워하다가 부르심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억지로 응답했을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억지 응답은 응답이 아닙니다.)
‘준비’ 라는 말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4).”
이 말씀은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이지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 강림은 요셉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생각할 수도 없었던 방식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도 요셉은 평소에 늘 준비하고 있었던 의인이었기 때문에
그 일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부르심에 응답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요셉의 응답과 순종은 한 번으로 그친 일이 아니라는 점이 그것입니다.
신앙인의 응답은 ‘날마다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날마다’ 흔들림 없이, 충실하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따라가야 응답이 완성됩니다.
대답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거짓 응답이 됩니다.
가다가 중간에 포기하면 처음부터 가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요셉은 그런 점에서도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분입니다.
그는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성가정을 책임진 가장으로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예수님을 따라간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우리가 그렇게 ‘충실하게 응답하는 삶’을 살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항상 도와주시고 보살펴 주신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천사가 나타난 일을 ‘하느님께서 요셉을 도와주신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우리를 도구삼아 이루신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함께하신 다는 것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주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하느님을 잘 모셔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대림초 4개가 환히 빛을 밝히는 그만큼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음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 순명하는 삶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얻기를 바랍니다.
아빌라의 성녀 대데레사는 우리에게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대의 몸을 지니고 있을 뿐 지상에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손과 발을 지니고 있을 뿐 그리스도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그대의 눈은 이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시는 바로 그분의 눈이요,
그대의 두 발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 걸음을 내딛는 바로 그분의 발이며
그대의 두 손은 세상을 강복하시려 펼쳐 드신 바로 그분의 손입니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몸이 바로 그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마음을 잘 표현해 놓은 성당에 간 적이 있습니다.
미국 샌디에고 한인성당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1729년에 지어진 미션성당에는
양 팔이 없는 몸통 십자고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손이 되어드려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를 듣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도구삼아 당신의 뜻을 펼치십니다.
주님의 뜻은 인간의 선한 응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도 하느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다만 내가 힘들 때는 그 고통에 가려서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시련과 역경 안에서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기적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할 때 양다리 걸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주님의 능력은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언제나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임마누엘”(אמנוּאל)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임마누(אמנוּ)라는 말과 엘(אל)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로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고 ‘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두 말을 합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신비로운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서있던 요셉의 처신을 통해 순명의 역사를,
믿음의 응답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요셉을 바라보면 정말 너무도 기가 막힌 일을 당했습니다.
마리아와 약혼을 하고 잠자리를 한 적이 없는데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요셉으로서는 황당한 일입니다.
결혼을 앞두고 얼마나 마음이 설레었겠습니까?
그런데 약혼한 처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임신을 했다는 사실에 접하게 됩니다.
실망, 또 실망,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놀랍고 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냥 결혼을 하자니 남의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이 되고,
파혼을 하자니 한 사람을 돌팔매질을 당해 죽게 만드는 것이고……
따지고 소문내고, 소란을 피울 수도 있었으나 요셉은 고민하였습니다.
법을 어기지도 않고 마리아를 죽음에로 몰아넣지 않으면서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결국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시대 상황으로 봐서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예수”라는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ihsouς)는 ‘예슈아’(ישוע)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신약성경에 나오는 발음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1독서 이사야 7장 14절을 보면,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요셉은 자기 삶의 상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요셉에게 닥친 일은 믿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사의 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에 대한 해명도 설명도 없습니다.
‘믿겠으면 믿고, 말겠으면 말라.’는 식입니다.
사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렇게 보통사람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물론 마리아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1,38). 한 순명도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것 다 설명해 주고 다 보여준 다음에 믿으라고 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의 협력을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과 더불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응답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구원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믿음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응답의 역사를 보면 아브람은 일가친척을 떠나 하느님께서 보여줄 낯선 땅으로 떠날 것을
요청 받았고 또 떠났습니다.
그리고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기꺼이 하느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15,6).
탈출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었던 모세의 삶의 여정을 보면
인간적인 정의감에 불탔던 그가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여호11,15).
불과 삼백 명으로 십오만 병사에 대항해 싸우는 기드온,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메시지를 순명으로 받아들인 마리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순명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마땅하고 옳은 일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이기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고통과 시련이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큰 사람이 되려면 이러한 단련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갈등과 상처를 가슴에 담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요셉의 태도를 기
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사방에 소문을 내고, 따지고 망신을 주며 보복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철저하게 배려하는 큰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남의 허물을 일삼아 찾아다니고 들추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없는지요.
이웃의 잘못만이 눈에 띄는 사람이라면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주변에는 진실한 사람이 없고 하느님께서도 함께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삶이라면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입니다.
힘겹고 어려워하는 이들과 마음을 나누는 사람, 만나면 위로와 기쁨이 되고
하느님의 축복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궁지에 몰린 마리아를 감싸주고 품어주려 했던 요셉의 모습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 요셉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최선책으로 결정한 것은
다 소용이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혼자 고민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이해득실을 따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한가운데서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응답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더더욱 상식에 어긋나고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울 때
그때야말로 그 안에서 주님의 뜻에 맞는 응답의 소명을 받고 있는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편안하고 안락한 길에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 길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는 길이라 해도 그 길이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와 연결되지 않은 길이라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목적지를 향한 길이라면 그 길을 가야합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내가 이것을 감당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들 때 응답의 소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게 여겨지는 일, 궂은 일, 곤란한 일에 직면해서 피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십시오.
길의 상태가 아니라, 그 길의 끝이 어딘가를 생각하십시오.
바로 그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 응답 안에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길 청하며 매일 매 순간 우리 마음속에
아기 예수님을 탄생 시켜 드려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고통을 겪게 됩니다.
병에 걸려 아파하거나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여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또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한숨짓거나 과도한 노동으로 지쳐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힘들고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하며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내가 고통을 겪을 때 하느님은 어디 계십니까?
나의 고통을 알기나 하십니까?’
마치 나 혼자서 모든 고통을 감당하는 것 같고,
하느님은 저 멀리서 지켜보고만 계시는 듯 여겨집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과 같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한 하느님을 예수님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체험해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먼저 예수님에게서 임마누엘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멀리서 우리의 고통을 지켜보고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뼈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몸소 세상이 어떤지를 보고 느끼셨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알고 있는 유혹 중에 예수님께서 체험하지 않으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외로웠고, 피곤했고, 배고팠고, 사탄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또 처음 사목을 시작하실 때 마을 사람들로부터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는 야유를 들었고,
그의 가르침을 듣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동네에서 내쫓기도 하고,
심지어 절벽에서 밀어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또 단 한 사람의 종교지도자들도 그를 믿거나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그를 죽여라!’ 고 외치는 동족들에게 둘러싸여
모욕과 매질을 수난을 당하시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죠.
그러한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게 되면,
하느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나와 같은 고통을 겪으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 저도 예수님이 수난 받으시는 모습의 복음을
반복해서 읽고 묵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군중에게 매를 맞고 모욕을 받으시는 모습을 보고,
그 느낌이 전해지면서 ‘어떻게 저런 고통을 받아낼 수 있으실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수난 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다가, 과거에 저의 절망스런 모습이
갑자기 스쳐지나갔는데, 제가 절망해서 엎드리고 있는 모습이 계속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제 어깨에 손을 얹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괜찮아, 다시 한 번 일어서봐...”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신 분이 나에게 위로를 해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성당에 앉아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는데요.
저 말고 다른 분들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위로와 힘을 얻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지 마비 장애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도 십자가에 못 박혀 나처럼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을 겪으셨구나..
나의 고통을 아시는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손을 못 쓰게 된 나병환자들은 못에 박힌 예수님의 손을 보며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불구가 되셨구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에도
그 상처를 지니고 계시구나..’
하며 위로를 얻고 동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고통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셨고
그 상처를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임마누엘 하느님,
곧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임마누엘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 가난하고 아프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셨는데,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하신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곧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교회를 세우시고, 예수님이 하시던 일, 곧
복음을 전하고 아픈 이들을 돌보고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맡기셨습니니다.
이러한 결정은 우리가 서로 도와가며 고통과 고난을 이겨내라는 말씀이시겠죠.
이런 경우와 비슷합니다.
축구 선수가 운동을 하다가 발목을 삐면 그는 게임을 떠나 잠시 쉬어야 합니다.
쉬지 않으면 발목이 망가져서 다시 축구를 할 수 없게 되겠죠.
마찬가지로 우리 공동체 안에 고통을 받고 있는 지체가 있다면
공동체가 관심을 가지고 돌봐줘야 합니다.
그래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가 건강해질 수 있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해낼 수 있겠죠.
만일 다른 지체의 아픔에 무관심하고 도움을 주려하지 않는다면,
그 모습은 암세포를 키우는 것과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한 세포가 다른 세포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성장하고 번성할 때,
그 세포를 암 세포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몸에 퍼지게 되면 결국 생명을 잃게 되겠죠.
암에 걸리지 않으려면 각자의 세포가 머리가 지시하는 것에 충성하고
다른 세포들을 밟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야하겠죠.
마찬가지로 우리 공동체가 살아남으려면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지체들에게
무감각해서는 안 됩니다.
실직자나 배우자를 잃은 사람들이나 이혼한 사람들,
노인들이나 결손 가정 아이들, 그리고 투병중에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이
머리이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이며 함께 사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서로서로 돕고 슬픔을 나누고 고통을 함께 하는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에게서
임마누엘 하느님, 곧 하느님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심을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 주간 동안 기도 안에서, 또 공동체 안에서
임마누엘 하느님, 곧 나와 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하느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작은 사랑을 실천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어린이 미사를 하기 전에 복사 아이들에게 물었다.
“살면서 힘든 게 뭐야?”
“공부하는거요.”
“숙제하는거요.”
대부분 비슷한 대답을 했는데,
정말 착하고 순수한 아이가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해서 많이 웃었다.
“나이 먹는 게 제일 힘들어요.”
인천교구 밤송이(김기현 요한) 신부님
우리 각자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는 일
새벽미사를 다녀오는 길에 평화방송을 틀었더니 왠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서울시립동부아동상담소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김보애 안나 수녀님의 목소리였습니다.
명동성당 대림특강 두 번째 강사로 하신 말씀들이 재방송되고 있었습니다.
25년간 줄곧 상처입고 마음 아픈 아이들을 위해 헌신해 오신 수녀님의 노고를
손에 잡힐 듯이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심리·정서적으로 힘든 아이들 치료를 부탁드리면 어떤 아이든 따지지 않고
흔쾌히 받아주시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수녀님께서 처음 그 일을 시작하실 때를 회고하셨습니다.
당시 많은 아이들이 본드와 가스를 많이 했었는데,
안타깝게도 한 아이가 세상을 뜨고 말았답니다.
그 아이를 땅에 묻으면서 미안함과 죄책감에 대성통곡을 하셨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한 가지 결심을 하셨답니다.
“너처럼 힘든 청소년이 오면 죽을힘을 다해서 일할게.”
또 다시 목전으로 다가온 이번 성탄 아기 예수님은
어느 다른 하늘 아래서 태어나실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서,
우리의 가정 안에서,
무척이나 각박해진, 그래서 상처입고 소외받으며 죽어가는 이웃들이 줄을 선
우리 사회 안에서 다시 태어나셔야 합니다.
수녀님께서 심한 학대에 시달리다 못해 쉼터까지 오게 된 6살짜리 여자 아이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정말이지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밤에 잠을 재우는데, 수녀님 손을 꼭 잡으면서
제발 어디 가지마시라고, 자기 옆에 앉아 옛날이야기를 해주시라고...
잠 들었나 해서 살며시 손을 빼내려면 꼭 쥔 손을 절대 놓지 않더라는...
우리 각자가 부모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한 아이를 따뜻이 안아줄 때
아기 예수님은 우리 품에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심연의 바닥에서 울고 있는 한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줄 때
아기 예수님은 우리 사이에 탄생하시는 것입니다.
죽어도 용서하기 힘든 한 이웃을 큰마음으로 용서할 때
아기 예수님은 내 안에서 탄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지막 부분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이전까지만 해도 족보의 이름이 남성에게서 남성으로 전해지다가
요셉에 이르러 갑자기 남성은 무대 뒤로 물러나고 여성, 즉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도구 역할을 했었지만
이제는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우리 인간을 당신 구원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실 수도 있지만
때로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직접 행동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은 아주 중요한 결정적인 순간이며 그 일은 하느님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일이 바로 기적중의 기적, 인류 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인 일입니다.
이 특별한 대사건, 예수님의 탄생 앞에 보여준 요셉의 태도를
우리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요셉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대충 분위기를 파악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요셉은 크게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호기심으로 접근하지도 않았습니다.
고민 고민하며 강생의 신비를 해석하려고도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경외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침묵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강생 사건을 바라봤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 손길에 맡겼습니다.
그저 묵묵히 주님의 천사의 명령에 따라 순종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신학과 영성 |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위한 헌사[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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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러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했는데, 그들이 동거하기 전에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롭고 마리아(의 일)을 폭로하기를 원치 않았으므로 남몰래 그를 소박하기로 작정했다.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마침 꿈에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그에게 말했다. “다윗의 아들 요셉,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 아내 마리아를 데려가시오. 그 속에 수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당신은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시오. 사실 그는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일어난 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그는 말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 주의 천사가 그에게 일러준 대로 자기 아내를 데려갔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녀와 동침하지 않고 지냈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불렀다.” (마태 1,18-25) 예수 탄생에 대한 이야기다. 탄생 장소가 나타나지 않는데, 베들레헴(마태 2,1)을 전제하는 것 같다. 천사, 탄생, 이름 지음, 이름의 뜻에서 이스마엘 탄생(창세 16,11), 이사악 탄생(창세 17,19) 이야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두 가지는 다르다.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으로 인한 것이고. 예수는 임마누엘이라 이름을 받았다. 유다인의 약혼(erusin)은 결혼의 시작이어서 배우자들의 법적 관계가 이미 시작된다. 그래서 마리아는 아내라고 불러진다. 약혼 나이는 여자는 보통 12~13세, 남자는 18~24세였다. 약혼 후 여자는 부모 집에서 부모 권한 아래 살다가 1년 후 결혼한다(nissuin). 그 기간에 약혼녀가 성관계하면 간음한 여인으로 여겨졌다. 마리아의 임신은 요셉과 무관한 것이다. 요셉의 반응에 대한 설명에서 성서학자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화가 난 요셉이 마리아와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그러나 공식적으로 두 명 증인 앞에서 이혼 서명하는 것은 생략하려 했다는 것이다. 주로 개신교 성서학자들이 이런 의견을 펼친다. 하느님이 마리아에게 큰 계획을 가지신 것을 알게 된 요셉이 영광에 대한 두려움 탓에 이혼을 결심했다는 해석도 있다. 주로 가톨릭 성서학자들이 이런 의견을 펼친다. 잉태 전에 요셉이 천사에게 말을 들었는지 여부가 해석의 관건이다. 본문에서 뚜렷하게 그 시점을 알기는 어렵다. 요셉의 태도는 율법에 대한 충실 또는 하느님 계획에 대한 존중으로 볼 수 있다. 두려워 말라는 천사의 말은 요셉의 태도를 하느님 뜻에 대한 존중으로 해석하게 한다.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쓰이는 순종, 복종이라는 단어를 나는 사용하지 않겠다. 그 단어가 본래 의도와 다르게 잘못 쓰이는 경우가 흔하고, 노예 윤리를 훈육하는 듯한 연상을 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는 순종 대신 존중이라는 단어를 쓰겠다.) Jehoschua의 약칭인 히브리어 Jeschua는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예수는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구절이 나온다. 백성들 사이에 있던 메시아 기대와 같지 않고 모세의 메시아 역할과도 다르다. 마태오는 여기 백성(laos)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새로운 백성, 즉 교회를 생각했을까. laos는 마태오에서 대부분 부정적인 경우(마태 13,15; 15,8; 27,25), 또는 예수와 거리를 두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마태 26,47; 27,1). 새로운 백성을 가리킬 때 마태오는 etnos를 쓴다(마태 21,43). 천사가 꿈에 나타나는 것은 독특하다. 이것은 이른바 꿈 심리학과는 관계없다. 마태오는 꿈을 선호한다. 그리스 문화에 영향을 받은 독자들을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성령으로 인한 잉태는 요셉이 이미 알았던 사실이 아니라 마태오가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정보이다. 이것은 예수의 혼외 탄생에 대한 유다인들의 오해를 방지하려는 구절이다. 유다교 랍비문학에 예수는 판데라(pandera) 또는 판테라(Pantera)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있다. partenou(동정녀)라는 그리스어를 혼동해서 생겨난 것 같다. 예수는 로마 군인 판데라의 아들이라는 전승도 여기서 생겨난 듯하다. 오늘도 여전히 이런 입장을 고집하는 유다인 학자들도 있다. ‘성령으로’라는 단어에서 ‘~으로, ~에서’를 뜻하는 그리스어 전치사 ek는 물질적인 근원이나 출처를 연상케 할 수 있다. 성령이 마치 임신에 필요한 초자연적인 물질로 오해될 수 있다. 문법적 단어와 물리적 존재가 뒤엉키는 한 사례다. ‘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다’는 문장에서 아들을 낳은 후 동침했다는 결론을 논리적으로 이끌어낼 수는 없다. | |  | | | ▲ Saint Columba Altarpiece, 플랑드르 화가 바이덴(Rogier van der Weyden)의 작품(1455년) |
태어난 아기 예수가 중심이 아니라 어떻게 탄생했느냐라는 의학적 관심이 갑자기 사람들에게 등장했다. 마리아 처녀탄생도 이와 같은 불필요한 곡절을 겪고 있다. 성서 본문이 말하려는 의도와 신자들이 성서에서 받아들이는 것 사이의 차이가 이처럼 크게 드러난 성서 구절도 드물다. 성령 잉태와 처녀탄생이라는 본래 서로 연관될 필요가 없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학자들은 종교역사를 살펴보곤 하였다. 이집트에서 연유한 처녀탄생 설화가 그리스 문화에 영향 받은 예수 추종자들에 의해 그리스도교에 흘러들었다는 설명도 있다. 당시 위인들은 처녀에게 탄생한다는 신화가 흔했다. 플라톤이나 알렉산더 대왕 같은 위대한 사람은 모두 육체적인 아버지 없이 탄생했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여인들이 신들과 성관계를 가져 잉태했다는 것이다. 그런 설화에 보면 예수는 위대한 남성들 틈에 편입될 따름이다. 마리아 처녀탄생 경우는 그런 설화와 다르다. 성령은 히브리어에서 여성이고 그리스어로 중성이다. 여성인 마리아와 여성 또는 중성인 성령이 생물학적으로 임신을 위해 협조한다는 설명은 아예 불가능하다. 마태 1,23에서 그리스어 성서는 처녀를(Jungfrau) 가리키지만 히브리어 성서 원문은 젊은 여인(junge Frau)을 가리킨다. 마태오는 공동성서(구약성서) 그리스어 번역본을 참조하였다.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고백이 중요한데도 사람들은, 특히 현대인들은 처녀탄생이 의학적으로 가능한지를 아직도 묻고 있다. 천지도 창조하신 하느님이 그런 정도 기적도 못하실까. 진짜 고뇌어린 문제는 처녀탄생에 대한 성서의 근거가 희박하다는 사실이다. 처녀탄생에 대한 역사적 질문보다는 그 신학적 의미를 밝히려는 성서학자들이 대부분이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여 예수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 마리아 동정 교리의 참뜻이다. 마태오에게 처녀탄생은 신앙의 핵심 요소가 아니라 예수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을 고백하기 위한 하나의 기초였다.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개입과 참여를 깨닫는 사람에게 처녀탄생은 하나의 생생한 체험 계기로 여겨진다. 하느님의 창조의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리아 처녀탄생을 신학적으로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처녀탄생을 종교 설화로 이해하는 사람이나 의학적으로 질문하는 사람은 아직 마리아 처녀 탄생의 의미를 오해하는 것이다. 마태오는 의학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성(性)노동자 여성(매매춘 여성)이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면 신학적으로 처녀다. 성 경험이 없는 사람이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신학적으로 처녀가 아니다. 마리아 처녀탄생은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고뇌를 안겨주는 주제이지만, 정작 마태오는 이런 모습에 의아할 것이다. 가톨릭의 마리아 동정교리는 예수에 대한 가르침이나 교회론에서 중심 내용에 속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리아 동정교리가 뜻하지 않는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분야가 따로 있다. 죄의 문제를 성 문제와 재빨리 연결시키는 가톨릭교회의 모습이 그것이다. 혼전 성관계를 죄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는 형편이다. 성 문제와 죄를 연관시키는 의도와 마리아 동정교리는 아무런 관계없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금욕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기혼자들보다 더 거룩한 것처럼 자주 오해된다. 그런 불필요한 연상이 사실 큰 문제다. 성직자 우월주의에 대한 근거 없는 토대로 마리아 동정이 언급되기도 한다. 마리아 동정에 대한 잘못된 신학적 이해가 낳은 어색한 풍경이다. 개신교 형제자매들이 마리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존중심을 마리아에 대한 지나친 과장이 방해하기도 한다. 마리아를 과장하기 쉬운 가톨릭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분별력과 자제심을 발휘해야 한다. 지금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신심은 전반적으로 보면 적절한 정도를 훨씬 넘어섰다. 13~14세, 요즘 중학교 1학년 정도의 어린 소녀가 본인도 모르는 임신으로 얼마나 두려웠을까. 아내가 간음녀로 몰려 돌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요셉은 또 얼마나 두려웠을까.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여 인간적 두려움을 이겨낸 두 사람 덕분에 인류는 예수라는 희망을 얻게 되었다. 그들뿐 아니라 용기 있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헌사를 바친다. 용기가 있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다기보다 하느님 뜻을 알면 용기가 생기는 법이다.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 뜻을 알기 쉽고 받아들이기 쉽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소브리노(Sobrino)로부터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집중 연구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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