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주보+복음 묵상

[복음]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161224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6.12.24|조회수599 목록 댓글 0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4

1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2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3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4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5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6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7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8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10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13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저 낮은 곳 사랑의 쉼터로의 순례 ♣ 


오늘 제 1독서에서 다윗 임금은 하느님의 궤를 모실 집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먼저 다윗 왕가를 당신의 집으로 삼으시어 안정된 삶의 터를 마련해주시고 지켜주시며(2사무 7,10-11),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7,12). 이는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서 하신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노래합니다. 그는 아들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구자가 되는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루카 1,68). 오실 구세주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며,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1,72-75).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1,78-79) 주님의 성탄은 단순히 우리와 거리가 먼 초월적이고 신비스런 탄생 신화를 전해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 성탄을 참 기쁨 안에서 맞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성탄이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하여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사랑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겠지요. 죄와 어둠 중에 살아가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구원의 선물, 생명의 호흡으로 내놓는 것은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오심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집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거저 받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하고’ ‘의롭게’ 섬길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습니다(1,75). 거룩함과 평화를 호흡하는 유일한 길은 현세적 가치와 육의 정신으로부터 떠나 주님을 갈망하고 사랑으로 그분을 섬기는 길 밖에는 없음을 기억해야겠지요. 


또한 주님의 성탄은 오직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해 오시는 주님의 낮은 곳으로의 발걸음입니다. 낮은 곳이란 일시적으로 그저 나보다 더 안 돼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가 아닐 것입니다. 낮은 곳은 무엇보다도 내 영혼에 주님의 사랑을 채우고, 다른 이들이 언제든 들어와 자리 잡을 수 있는 ‘사랑의 쉼터’가 되도록 자신을 비우는 움직임을 말합니다. 


저 낮은 곳 사랑의 쉼터로의 순례는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을 품고, 생명의 혼을 지니고 낮은 곳, 후미진 곳,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변두리로 달려가는 그 발걸음에 이미 성탄의 기쁨은 퍼지겠지요. 주님의 탄생을 앞두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찬미를 드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오시는 주님의 그 귀한 선물을 거룩하고 의로운 행실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그것은 저 낮은 곳의 사람들과 겸손하게 나누는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나의 마음의 움직임과 실천하는 삶으로 사랑의 선택을 함으로써 말구유로 기꺼이 내려오신 주님을 닮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모두 자신을 낮추고 비워 모든 것을 주 하느님께 되돌림으로써,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어주실(1,78-79) 메시아를 탄생시키는 아름다운 사랑의 어머니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지금은 방이 있을까?>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3-7).”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여러 가지 의문들이 떠오릅니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그게 많은 사람이 여러 날 동안 여관방을 차지해야 할 정도로 복잡한 일이었을까?

본문을 보면, 베들레헴에 도착하자마자 마리아가 해산을 한 것은 아닌 것 같고,

해산하기 전에는 요셉과 마리아는 어디서 지냈을까?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 등록을 한 사람들은 모두 다윗 집안의 자손들일 것이고,

모두가 다 친척들이었을 텐데,

요셉에게 방을 빌려 줄 정도로 가까운 친척은 하나도 없었을까?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만으로는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을 때에만 외양간으로 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외양간에서 지냈거나, 아니면 들에서 노숙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들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과 함께 지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랬다면 그 목자들이 자기들의 외양간을 빌려주었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원래 노숙자들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이 태어나던 때에는 노숙자들과 다를 것 없는 처지였습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는 말은,

요셉이 ‘돈이 없어서’ 외양간으로 간 것이 아니라,

‘방이 없어서’ 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나자렛과 베들레헴은 12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아마도 분명히 요셉은 베들레헴으로 가면서 마리아의 해산에 대비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목수였지만, 필요한 돈과 여러 가지 물품들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도착해서 방을 빌리려고 했지만 빌릴 수 없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여관방을 다 차지했기 때문이고,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는 방을 내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관뿐만 아니라 일반 가정에서도 방을 빌려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만일에 요셉이 부자였다면, 넉넉하게 웃돈을 주고 방을 빌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할 만한 돈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베들레헴에 있었던 사람들이

곧 태어날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가난한 목수 부부가 외양간에서 아기를 낳도록 방치한 일은 죄가 됩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관심 갖지 않고 사랑을 베풀지 않은 죄.

그래서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라는 말을,

“베들레헴에는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이다.”

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 베들레헴에 방이 없었던 상황은 그곳에 사랑이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베들레헴에서 방을 구하지 못한 요셉과 마리아는 ‘가장 작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의 마음 안에는 방이 있을까?

예수님이, 또는 요셉과 마리아가 노숙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왔을 때,

그들에게 내어줄 방이 있을까?

사랑이 있다면 방도 있을 것입니다.

(빈 방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마련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빈 방이 많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곳에 성탄절은 없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1,12).”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요셉과 마리아가 외양간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일은

사실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는 뜻으로도 볼 수도 있는데,

하느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계획하셨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베들레헴 사람들에게는 죄가 없거나, 죄가 가벼워지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천사의 말은, “구유에 누워 있다는 것은

그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신분증 같은 것이다.” 라는 뜻이 아니라,

“구유에 누워 있는 그 아기는 메시아다. 그분이 구유에 누워 있다는 것은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 지를 나타내는 표지이다.”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메시아는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는 분”이기 때문에(루카 1,52)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구유는 십자가에 바로 연결됩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그리스도(구세주, 메시아)로 믿는 믿음과(1코린 1,23)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메시아로 믿는 믿음은 같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사랑 없음’ 때문에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워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아기가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은 ‘회개하라는 표징’이 된다는 점입니다.

(구유는 인간들의 ‘죄’와 ‘사랑 없음’을 나타내는 표지가 되기도 하고,

그런 인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구유 앞에서 무엇을 묵상해야 하는가?

또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송영진 모세 신부



결핍의 끝판왕 아기 예수님의 성탄


 

요즘 과체중 혹은 나름 ‘스케줄’로 인해 간헐적 단식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오늘만 해도 아침 단식, 그리고 점심 대충, 저녁 건너뛰고 강의, 그리고 드디어 저녁 11시, 

단골 24시 우동 집에서 뜨거운 우동 한 그릇을 마주하니, 

배가 무지 고픈데다 너무 감격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배가 고프니, 세상에 3500원짜리 우동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개 눈 감추듯이 순식간에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싹 다 비웠습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 않던 단무지 한 조각도 정말 기가 차게 맛있었고 소중했습니다.

 

그런 저를 유심히 바라보시던 주인아주머니께서는 부탁도 안했는데, 

알아서 추가 사리와 국물을 얹어주십니다. 

오늘 심야 우동 가게는 제게 작은 천국이었습니다. 

참으로 큰 행복의 원천이었습니다. 

결핍이야말로 행복을 불러오는 원천임을 알게 했습니다.

 

이렇게 우동 한 그릇이 큰 깨달음을 주는군요. 

많은 경우 우리는 그리도 불편해하고 두려워하는 결핍이 사실은 

행복의 근원이 된다는 진리를 잊고 삽니다. 


힘겨워도 비탈진 오르막길을 넘어서야 산정에 도달할 수 있고, 

거기서 그림 같은 산세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견디고 또 견뎌야 동트는 새벽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인내하고 또 인내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오늘도 수많은 구도자들이 물질적 풍요를 뒤로 하고 

척박한 결핍의 세월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더 큰 충족, 더 큰 깨달음, 더 큰 영광을 맛보기 위해 극단적 결핍의 삶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더 환한 빛을 보기 위해 더욱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바늘귀만한 천국에 입국하기 위해 더욱 작아지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또 다시 성탄입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기대를 완전 저버리고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강생하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모습으로, 가장 크신 분이 가장 작은 모습으로 육화하셨습니다. 

가장 귀한 분이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결핍도 아기 예수님 탄생 때의 결핍과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물론 결핍은 우리 인간을 고통의 끝으로 몰고 갑니다. 

뿐만 아니라 극단적 결핍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마냥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때로 결핍은 인간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때로 결핍은 삶을 더 열정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원이 됩니다. 

부족함을 바탕으로 새로운 창조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결핍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너그러움입니다. 

결핍을 즐기는 여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성탄, 

구세주께서 ‘결핍의 끝’인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신 사건, 

만왕의 왕께서 ‘결핍의 끝판 왕’인 마구간 탄생은 워낙 특별한 사건이요 대단한 신비이기에, 

그냥 세상의 눈,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봐서는 백번 바라봐도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완전히 자세를 낮춰야 아주 조금 성탄의 신비가 이해됩니다. 

김 서린 안경을 닦듯이 우리의 시선을 정화시키고 또 정화시켜야 

아주 조금 성탄의 신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더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야 구세주의 아름다운 별빛을 뚜렷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