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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복음 묵상

[복음]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170114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7.01.15|조회수60 목록 댓글 0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죄인들에게도 열려 있는 자비의 문 ♣ 


 

예수님 시대에 세리들은 관세, 특히 국경을 통과하는 상품들에 부과되는 변칙적인 세금을 징수하였습니다. 관세 수입은 지방군주의 금고로 들어갔는데 갈릴래아에서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금고로 들어갔습니다. 관세는 국가관리가 아닌 세금청부업자 곧 세리를 통해 거둬들였습니다. 


세리들은 금고에 들어갈 돈이 모자라면 채워 넣어야 했지만 남으면 자기 몫으로 챙겼습니다. 탐욕스런 세리들은 세금액이 정해져 있지 않은 점을 악용하여 최대한 자기 뱃속을 채우려했습니다. 이방인들과 접촉할 뿐 아니라 이렇게 부당이득을 취함으로써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 취급을 받은 것이지요(마태 11,19).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관원인 레위를 제자로 삼으시고,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십니다(2,16). 그러자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이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거나 식사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선민사상’과 선행을 한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상선벌악’의 사고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편협된 시각과 폐쇄적이며 경직된 사고로는 예수님께서 죄인인 세리를 제자로 삼으시고 함께 어울리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2,17)이라 하시며 행복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여십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은 의인은 구원받지 못한다거나 죄인이 먼저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던 죄인들도 예수님과 함께한다면 구원받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세상과 동료 인간들을 선과 따뜻한 애정과 깊은 헤아림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해야겠지요. 하느님의 시각,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품을 수 있어야겠지요. 주님의 영과 사랑으로 차별하고 편을 가르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 악과 불의와 거짓은 몰아내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아야지요. 


구세주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하찮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잣대, 사회적 지위 등을 내세워 함부로 남을 판단하려 드는 처사야말로 꼴불견입니다. 복음을 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구를 판단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랑으로 품을 것인가를 늘 고민하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선민사상과 상선벌악, 이분법적 사고와 차별하는 마음을 버리고, 아픈 곳부터 치료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먼저’ 죄인들, 양심이 무디어져 수치심을 잃어버린 이들, 고통과 차별을 당하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려야겠습니다.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채워나가야겠지요. 오늘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되도록 아무도 차별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으며 배척하지 않고 사랑으로 품는 넉넉하고 푸근한 날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르 2,13-14).”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마태오 사도입니다(마태 9,9).
복음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어느 날 우연히 예수님께서 레위를 보셨고,
그를 보시자마자 제자가 되라고 부르신 것으로,
또 예수님께서 부르시자마자 레위가 즉시 응답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아마도 분명히 그 일이 있기 전에
어떤 준비 과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군중을 가르치실 때,
레위도 그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여러 번,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제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을 것이고,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준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계속 눈여겨보셨을 것이고,
그가 세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즉 레위(마태오)가 사도가 된 것은 우연한, 또는 즉흥적인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일이었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레위 쪽에서도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레위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가 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죄인에게 베푸신 자비’ 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실 때, 직업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으셨습니다.
레위의 경우에, 그가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신심, 성품 등만 보셨을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도 처음에는 충분히 자격을 갖춘 인물이었을 텐데,
나중에 그 자신이 스스로 타락하고 변절했습니다.)

레위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자신은 사도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자격은 그 자신이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아마도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깨우쳐 주셨을 것이고,
용기를 심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가 즉시 응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신 이야기 뒤에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두 이야기는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5-17)”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죄인들이고, 병든 이들입니다.)
따라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씀은,
“나는 ‘모든 사람’을 부르러 왔다.” 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세리들처럼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힌 사람들만 만나신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일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냐고
시비를 거는 일 자체가 부당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더 많은 애정을 쏟으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들을 꾸짖으신 일은 적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신 일은 많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은 엄하게 꾸짖으시고,
회개하는 죄인들은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바리사이냐, 세리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개했느냐, 아니냐, 가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타나엘은 율법학자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라고 그를 칭찬하셨습니다(요한 1,47).

단순하게 생각하면, 병든 이들이 의사를 찾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픈 사람’이 의사를 찾게 됩니다.
몸속에 병이 있어도 자기가 병들었다는 것을 모르거나, 아프지 않거나,
병들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의사를 찾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들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회개합니다.)
만일에 죄 속에서 살면서도 죄의식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있다면,
당연히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회개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을 것이고, 회개하기를 거부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씀을 묵상할 때,
‘죄인’이라는 말을 ‘그들’로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를 부르러 오신 분입니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의사이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병든 이’는 바로 ‘나’입니다.
복음 말씀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한 말씀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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