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주보+복음 묵상

[복음]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170129 설 미사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7.01.29|조회수139 목록 댓글 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자만하지 마라.>


설날의 제2독서 말씀은, 야고보서 4장 13절-15절, ‘자만하지 마라.’입니다.

(새해 첫날 묵상 주제로 삼기에 적합한 말씀입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3-15).”


여기서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라는 말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니 내일 할 일을 계획하는 것은 다 소용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계획대로 될 것이라고 자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야 하고, 재난과 불행도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만일에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고, 그것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또 정해져 있는 미래를 바꿀 방법이 없다면?

그러면 우리가 오늘 열심히 살 이유가 없어져 버립니다.

절망에 빠져서 인생을 포기하거나,

희희낙락 하면서 쾌락으로 시간 낭비만 하게 될 것입니다.

처벌받는 것이 확정되어 있다면 오늘의 회개가 소용없는 일이 됩니다.

구원을 받도록, 아니면 멸망을 당하도록 이미 확정되어 있다면

신앙생활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존재로 만드신 것은,

오늘을 열심히 살아서 내일을 바꿀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정해져 있는 운명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노력해서 내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자기 운명을 미리 알기 위해서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라는 말은,

인간은 허무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인데,

그렇지만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에서 나온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에 ‘만일에 구원받지 못하면’이라는 말을 넣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에 구원받지 못하면, 우리는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와 다를 것 없는 존재가 되고,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는 예식을 하는 것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도록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5).”


이 말은 모든 신앙인이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원하시면’은,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말에 대해서 이런 질문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일은 무엇이고, 허락해 주시지 않는 일은 무엇일까?”

“만일에 주님께서 아무것도 허락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그 일이 성공하면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 일이라고 믿어도 되는가?

반대로 실패하면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은 일이라고 믿어야 하는가?”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면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라는 말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항상 주님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는 뜻도 아니고,

주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사사건건 간섭하시는 분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또 어떤 일을 했을 때 성공하면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이고

실패하면 허락해 주시지 않은 것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즉 죄가 되는 일을 계획하거나 실행하면 안 되고,

모두에게 선(善)이 되는 일만 계획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자기 혼자만의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심도 죄입니다.)


그리고 누가 보아도 죄가 되는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행했는데도

자기 욕심대로 되었을 때,

그것을 주님께서 허락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안 됩니다.

주님은 악한 일(죄가 되는 일)을 허락해 주시는 분도 아니고,

도와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주님이 도와주신 것이 아니라면 사탄이 도와준 것입니다.)

반대로 누가 보아도 모두에게 선이 되는 일을 계획하고 실행했는데도

실패하거나,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주님의 무관심 때문이라고 주님 탓을 해도 안 됩니다.

믿음이 흔들려도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뜻’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인은 “모든 일은 다 주님 뜻대로 된다.”고 믿는 사람인데,

“주님 뜻대로” 라는 말은,

모든 일을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당신 마음대로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인간이 애를 쓰고 노력하는 것은 다 소용없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로봇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자유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이 있고,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 뜻에 합당한 일을 하면 그것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또 당신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면 그것을 말리시거나 막는 분인데,

인간들 가운데에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서 자기 욕심대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면 하와처럼 주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말을 더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려는 일이 정말로 주님의 뜻에 합당한 일인지

항상 잘 묵상하고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그 일이 잘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라는 뜻도 있지만,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물어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부모의 은혜

     

   

사람들은 제 이름을 듣고 개명할 생각을 안 해보았느냐고 묻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제 이름이 창피한 줄 잘 몰랐는데, 대학교 들어가니 

저를 모르던 학생들이 제 이름을 듣고 일제히 웃는 것을 보고는 조금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름을 주신 부모님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고 

이름을 바꿔볼까 하는 생각도 안 했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삼형제 중 막내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해 부모님은 제가 딸이기를 무척 바랐습니다. 

그런데 또 아들이 나오자 어머니도 고생해서 아이를 낳고도 인정받지 못했고, 

아버지도 화가 나셨는지 형 둘은 작명소에서 이름을 지었지만 

저는 그냥 세 번째 태어났으니 뒤에 돌림자 ‘용’과 앞에 ‘석 삼’을 넣어 ‘삼용’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도 기가 죽어있는 상태라 말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셨습니다.

   

또한 저는 태어날 때 목 뒤에 커다란 혹이 달려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어머니는 삼형제 중 저를 낳을 때가 가장 힘드셨다고 합니다. 

얼굴도 얼마나 못생겼던지, 어머니는 이런 저를 안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시며 

목에 붙은 혹을 제거하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병원에서도 저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제가 태어난 이후로 집안에 우환이 가득하였습니다. 

아버지도 여러 번 크게 다치셔서 뇌수술까지 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집도 점점 더 가난해졌습니다. 

        

우리나라 고전소설에 ‘김원전’이라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성은 ‘김’이고 이름은 ‘원’인데, 

태어날 때부터 알처럼 생겨서 이름이 ‘둥글 원’입니다.

   

어머니가 어느 날 혼절하는 고통으로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검은 알처럼 둥글게 생겼습니다. 

어머니도 까무러칠 일이었지만, 남편이 이를 보고나서 부인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아기는 어디 있소?”

아마도 “도대체 ‘내가 기대했던’ 아기는 어디 있소?”라고 묻는 것일 것입니다.

   

이 소문이 퍼지게 되자, 동네 사람들 중 어떤 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알에서 이무기가 나와 못된 짓을 하고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군사를 풀어 그 이무기를 죽이고, 

그것을 낳은 사람도 흉악한 죄인이라 하여 빛을 못 보는 곳에 가두었다가 굶겨 죽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덕망이 높은 집안에서 저런 알이... 아니 아이가...”

   

부부가 시름에 잠겨 밥을 먹고 있는데 알이 이불 속에 있다가 굴러서 밥상 옆으로 옵니다. 

아버지가 입도 없는 녀석이 밥을 먹으려고 하니 신기해하면서 밥을 한 그릇 주어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알에서 입이 새 부리마냥 나와 밥 한 그릇을 뚝딱 먹어버렸습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신기해하며 아내에게 밥을 계속 주라고 합니다. 

검은 알은 밥을 먹으며 몸집이 커져서 결국 다른 방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달빛을 타고 신선이 내려와 알을 깨뜨리니 알에서는 건장한 청년이 나옵니다. 

이 건장한 청년은 머리가 아홉 달린 아귀라는 괴물이 공주들을 납치해가는 것을 목격하고 

공주를 구하러갑니다. 

 

지하세계에 들어가니 괴물의 왕국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괴물을 죽이고 공주들을 구하고 

그 중 한 명과 혼인하여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머리 아홉 달린 아귀는 자기 자아입니다. 

자아가 그렇게 크고 대단해지면 부모님 또한 그런 모습을 하게 됩니다. 


사춘기 때는 자아가 너무 커져 부모님이 내가 넘어서야 하는 큰 괴물같이 보입니다. 

자신의 자유를 박해하는 존재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아를 죽이는 날 참으로 어른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모든 것이 평온해지고 부모님에 대한 시선도 다시 변하게 됩니다. 

        

만약 김원의 부모님이 이웃의 말을 듣고 아이에게 밥을 주지 않았다면 

아이가 성장하여 자기 자신을 벗고 올바른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부모는 아이가 밥을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부모가 아닌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느낍니다.

그것이 우리 부모가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가장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아프게 한 것만 생각하며,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춘기부터 자신 안에 살고 있는 자아라는 괴물을 죽이지 못해서입니다. 

   

 저도 못난이로 태어났지만, 제 목에 난 혹에 어머니가 자주 당신 침을 발라 

계속 문지르셨다고 합니다. 


그 혹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어머니의 사랑은 

저를 온전히 자라게 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도 저희를 사랑하셔서 고생스럽게 돈을 버셔야 했지만, 

저를 보며 화를 내신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사랑해주셨습니다.

   

이런 부모님의 사랑이 저를 성장시키셨던 것입니다. 

물론 저를 감싸고 있는 못난이 콤플렉스는 제 스스로의 싸움이었고, 

제 신앙으로 인해 달을 타고 내려오신 그 분께서 깨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내 안에서 나와 나 자신과 싸워나가고 그래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기까지 성장시켜주신 분은 부모님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괴물과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부모님과 조상님들을 기리고 있습니다. 

음식을 차리고 차례도 지냅니다. 

부모가 없으면 지금의 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상님들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알 속에만 갇혀있지 않게 우리를 알 밖으로 나오게 해 주신 또 다른 부모님이 계십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셨기 때문에 부모님께 더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 부모님이신 하느님과, 또한 그 분께서 우리 부모님으로 세워주신 그 분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세 개의 고향을 가진 행복한 신앙인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 이래요." 

 


신이 나서 노래 부르며 설레는 마음으로 가래떡이 쏟아지는 방앗간을 서성대던 

어린 시절의 설날이 떠오릅니다. 

 

새벽부터 친척들이 모여들면 떡국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설빔을 차려입고는 

어른들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를 드리고 기쁜 마음으로 받았던 세뱃돈도 그립습니다. 

 

천주교 집안인지라 차례는 지내지 않고 성묘만 했던 그 좋은 날이 새삼 그리운 오늘, 

축복의 설에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축복받는 법에 대해서입니다. 

 

오늘 독서인 민수기에서는 사제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데, 

사실 복이란 그 복을 받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주고 싶어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가뭄에 비가 아무리 쏟아져도 그릇을 준비해야 단비를 모아 받을 수 있듯이, 

복 받을 준비가 돼야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복 받을 준비란 아주 단순합니다. 

새해 첫날 하듯이 남에 관해 좋은 것을 말해주고 빌어주며 부족한 부분은 감싸주는 것입니다. 

 

1년을 이런 마음으로 산다면 설날인 오늘 서로서로 축복해 주고 하느님께 청했던 복이 

1년 내내 지속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저는 여러분에게 세 개의 고향을 가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고향이 세 개나 되나?"하고 놀라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세 개의 고향이란 이렇습니다. 

 


첫째는 육신의 고향, 즉 내가 태어난 곳이고, 

둘째는 신앙의 고향, 즉 하느님을 알게 된 곳이며, 

셋째는 영원한 고향, 즉 우리 조상이 계시고 내가 죽은 후에 가야할 궁극적인 곳입니다. 

 


첫 번째 육신의 고향은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고향입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지요. 

오랜만에 찾아가도 어린 시절 추억이 배어 있고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낯설지 않으며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곳입니다. 

 

 


두 번째 고향인 신앙의 고향도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저에게는 육신의 고향보다 더 중요한 신앙의 고향이 있습니다. 

바로 사제로 수품된 성당입니다. 

 

신부 생활이 그저 기쁘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은 서 있는 길이 안 보일 정도로 화가 나거나 낙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가끔 제가 사제품을 받은 성당에 가서 기도합니다. 

 

나를 그렇게 만든 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나를 사제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면 순식간에 다시 힘이 살아나지요. 

사제로서 첫 마음이 다시 회복됨을 느낍니다. 

 

신앙의 고향이 주는 이 신비한 힘을 알기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신앙의 고향을 가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신앙의 고향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쉽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은 곳이 신앙의 고향이 될 수가 있습니다. 

정말 어렵고 힘들 때 내가 찾아갔던 그 성당, 

거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위로를 받았다면 바로 그 성당이 신앙의 고향이 될 것입니다. 

 

또 내가 결혼했던 성당이 신앙의 고향이 될 수도 있지요. 

배우자와 일생을 함께할 것을 하느님과 많은 친지들 앞에서 서약하고 맹세했던 그 성당, 

그리고 부부 사랑의 결실인 아이를 낳아서 유아 세례를 시켰던 그 성당은 

신앙의 고향이 돼 큰 힘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고향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제일 중요한 고향이 있습니다. 

옛날부터 많은 신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본 고향, 근본적 고향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영원한 하느님이 계신 그 곳, 우리 선조들이 이 세상을 떠나서 돌아간 그 곳, 

본 고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신앙인이 돌아가야 할 곳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 고향을 믿고 희망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육신의 고향, 신앙의 고향, 본 고향, 이렇게 세 개의 고향을 가지라고 말씀드립니다. 

찾아갈 육신의 고향만 있어도 행복할 텐데 나에게 힘을 주는 고향이 세 개씩이나 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 중에서도 우리 선조들이 가 계신 영원한 고향, 본 고향이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다 죽습니다. 

 

영원한 고향이 있는 사람은 죽음에서조차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믿기에 이 세상의 삶이 더 행복하고 

죽은 뒤 더 큰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세 개의 고향을 다 가진 행복한 여러분 되시기를 바라며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십시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