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매일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
살다보면 우리가 미처 잘 몰라 뵙고 그냥 지나치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은 바로 우리와 매일 동행하시는 주님,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가족 안에 현존하고 계시는 주님,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 안에 숨어계시는 주님,
작고 가난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
너무나 부족해 보이는, 그래서 늘 ‘엄마 친구 아들’,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되어 보이는
내 자식들 안에 ‘가능성’ ‘희망’이란 이름으로 현존해 계시는 주님...
너무나 가까이 계셨던 하느님을 몰라 뵙고 배척했던 예수님의 고향마을 사람들처럼
우리 가까이 살아가시는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편견 때문입니다.
선입관 때문입니다.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지나친 기대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숨어계시는 주님을 알아 뵙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영성적인 눈을 뜨는 것입니다.
뒤로 한걸음 크게 물러나는 것입니다.
보다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좀 더 밑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기대치를 낮추는 것입니다.
작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너무 큰 것을 기대하셔서 그렇습니다.
안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뭔가 찾으려니 그렇습니다.
가까이서가 아니라 멀리서 특별한 것을 찾으려니
그렇게 불행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행복의 비결, 따로 없습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가까운 것, 소박한 것,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데서 행복은 시작됩니다.
멀리서, 바깥에서, 어느 다른 하늘 아래서 특별한 그 무엇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우리 가정 안에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보물을 찾아나가면 좋겠습니다.
영성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눈길을 확 끄는 뭔가 대단한 것, 휘황찬란한 것, 특별한 것이 아니라
매일의 지속적인 기도, 매일의 미사, 매일의 일상적인 사건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나가고 계신다면 제대로 하고 계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집시다.
【어느 동네에 작은 슈퍼마켓이 두 개 있었습니다.
IMF가 닥치자 사람들의 소비심리 위축으로 가게들이 어려워졌습니다.
손님이 한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가게에는 주인 말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머, 손님이 이렇게 없어서 어떻게 해요?”
“없긴 왜 없어요. 지금 당신이 있잖아요.”
“이렇게 사면 얼마에요. 제가 좀 많이 팔아드려야 할 텐데, 오늘은 이것만 필요하네요.”
“이만큼이라도 사주면 고맙지요.”
“안녕히 계세요. 또 올게요.”
“네, 살 거 없어도 오다가다 들르세요.”
이 가게의 이름은 ‘긍정’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가게에 손님이 들어갔습니다.
“어머, 손님이 이렇게 없어서 어떻게 해요?”
“그러게 말이에요. 파리만 날리고 있네요.” 그럼 내가 파리?
“이렇게 사면 얼마에요. 제가 좀 많이 팔아드려야 할 텐데, 오늘은 이것만 필요하네요.”
“그럼 좀 많이 사가요. 비싼 걸로.”
확 부담이 느껴진다.
“안녕히 계세요. 또 올게요.”
“또는 무슨, 가게가 오늘 문 닫을지 내일 문 닫을지도 모르는데요.”
이 가게의 이름은 ‘부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뭐라도 하나 살게 있으면, 긍정의 가게를 찾겠지요.
결국 긍정의 가게는 힘든 고비를 넘겼고 부정의 가게는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게 주인의 생각이 곧 현실이 된 것입니다. 】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오늘 복음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긍정적인 시선과 마음보다는
부정적인 시선과 마음을 가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이 베푸시는 기적과 용서, 그리고 소박한 변화 등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삶에서 소박한 변화를 체험하고 싶다면, 작은 기적이라도 체험하고 싶다면,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살고 싶다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삶에 임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야 무언가 이루어내고, 성취하고, 얻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이 맡은 일을 할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인천교구 밤송이(김기현 요한) 신부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1-3).”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을 때,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실 때,
제자들도 그 일을 함께 겪었음을 나타냅니다.
(루카복음 4장 28절-29절을 보면,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제자들도 그 위기를 예수님과 함께 겪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나자렛 사람들이
제자들을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자렛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놀란 이유와 같을 것입니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나자렛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과 권위와 지혜를 느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라는 나자렛 사람들의 말은,
그들이 치유 기적을 직접 목격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가르침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졌다.”인데,
이 말은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에 대해서,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에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하고,
어떤 의사도 친지들에게 의료 활동을 하지 않는다.” 라는 속담이 있었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했는데,
아마도 실제로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로 뒤에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선교활동을 할 때 사람들이 거부하거나 배척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이런 말씀을 하셨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예언자는 고향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박해를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은 이유를,
“저 사람은 목수로서...” 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목수 일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목수는 당시에 낮은 계층의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을 잘 알고 있었는데,
그 가족들이 나자렛에서는 존경받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직업에 대한 편견과 예수님의 집안에 대한 편견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5-6).”
여기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기적을 일으키시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지 않아서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았다.”로 해석됩니다.
만일에 그들이 믿었다면, 예수님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했을 것이고,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기 때문에 청하지도 않았고,
기적을 일으키실 기회 자체를 예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청하기만 하면 받을 수 있었던 은총이었는데도, 청하지 않아서 못 받았습니다.)
그래도 몇 명은 예수님을 믿었고, 청해서 은총을 받았습니다.
“놀라셨다.” 라는 말은, “안타까워 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가신 것은 존경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존경받지 못하는 것이 서운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이,
즉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고향이냐, 아니냐, 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지역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고향 사람들을 편애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사람들도 다른 지역 사람들과 똑같이 사랑하셨고,
똑같은 구원의 은총을 주려고 하셨는데,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없는 편견 때문에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 은총을 거부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모든 일을 세속적으로만 판단했음을 나타냅니다.
또 이것은 그들의 주관심사는 ‘영적 구원’이 아니라
‘물질적인 복’이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바라는 대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내려 주셨다면,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이 목수 출신이었다는 것은 상관하지 않고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고 존경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어떤가? 나자렛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가?
송영진 모세 신부
고향으로 가셨는데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지?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놀랐다.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예수님의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인지 루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말씀은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 간 이들에게 해방을,
눈먼 이들에게 다시 볼 수 있음을 선포하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라고 이사야서에 적혀 있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놀라지 않았다.
루카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 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라고 하였다.
마치 복음을 읽고 난 후 사람들이 "무슨 강론을 하실 것인가?" 하고 신부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과 같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사람들을 향하여
"오늘 이 성서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폭탄과 같은 선언을 하셨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놀라면서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사 중에는 대부분 조용하고 엄숙하다.
웬만해서는 그런 분위기가 깨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지?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하고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렸다는 것은 사람들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표현하는 것이다.
회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으며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자신들도 모르게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웅성거렸던 것이다.
왜 그처럼 놀랐을까?
지금까지는 회당장이 어느 성서의 한 부분을 읽고 그 말씀을 설명해 주는 강론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성서 말씀을 해석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성서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선언해 버리시니
그들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이며 처음 보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오늘 이 성서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은
해설이 아니라 선포된 내용이 오늘 실현되고 있음을 알리는 말씀이다.
즉 예수님은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회당장과 하혈하는 부인의 병을 고쳐 주심으로써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졌음을 보여 주셨고
회당장이 죽어 가는 어린 딸로, 그리고 하혈하는 부인은
하혈하는 병으로 묶여 있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심으로써 그들을 해방시켜 내보냈으며,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심으로써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보게 해주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여기에 사용한 "놀라다"라는 동사는 예수님의 부모가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렸던 예수님을 찾으셨을 때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루가 2, 48)고 했을 때와 같은 동사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모들은 어린 예수님이 어떻게 되었는지 무척 근심걱정을 하며
사흘 동안 헤매어 찾고 있다가 어린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 학자들과
당당하게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놀랐던 놀라움과 같은 놀라움이다.
이와 똑같은 놀람이 그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었다.
"놀란다"는 것은 우리 안에 새로운 변화 즉 기적이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서도 이런 놀라움이 일어나야 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회당장이나 하혈하는 여인처럼 가난하고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세로
복음을 대한다면 누구나 이런 놀라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놀라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 내가 읽은 복음 말씀의 내용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씌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 씌어졌고, 내 안에서 이루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읽는 말씀은 바로 오늘 나에게 이루워져야 할 말씀이다.
즉 묶여 있는 나를 해방시켜 주시고, 눈먼 나를 보게 해주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해주시고,
무거운 짐으로 억압받고 있는 나를 해방시켜주시고,
하혈하는 병을 낫게 해주시고, 죽은 나를 살려주시고,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기 위해 들려주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읽을 때마다 놀래야 한다.
내가 먼저 놀라고 내 주위 사람들도 놀래야 한다.
내가 오늘 복음을 받아들인만큼 내 안에서 놀라운 일들이 이루워 질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놀라면서 많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 6가지인데 이 중 셋은 긍정적인 것이고 셋은 부정적인 것이다.
첫 번째,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라는 질문은
예수님의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느님한테서 힘을 받아서 하는 것이냐, 아니면 사탄의 힘을 빌린 것이냐?
하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 3, 22) 하고 떠든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능력의 출처가 어디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던진 질문이다.
사람들이 좀 더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우려 들었다면 이런 혼동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하혈하던 부인처럼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경배드렸을 것이다.
두 번째,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지?"라는 질문은 가르침의 출처를 따지는 질문이다.
즉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지혜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지혜의 출처가 어디냐? 하는 것이다.
지혜를 그리스어로 '소피아'라고 한다.
지혜와 지식은 차원이 다르다.
지식은 어떤 사물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다.
어떤 사물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박사라고 한다.
즉 그 분야에 대하여 공부를 많이 해서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단순히 지성과 이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집회서에 보면 지혜에 대한 말씀이 있다.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법칙이다.
지혜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두려우신 분이시며, 당신의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지혜를 만들고 지켜보며 헤아리시는 주님으로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과
모든 인간에게 지혜를 너그러이 내리시고,
특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풍부히 나누어 주신다."(집회 1, 1-10 참조)
지혜는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생활이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의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 저 가정은 늘 화목하게 지낼까?
저 사람의 평화스런 모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저 사람의 기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저 사람의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라고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런 신앙인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다.
유광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