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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170203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7.02.04|조회수222 목록 댓글 0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4-29

그때에 14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6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17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2월 3일의 복음 말씀은, 마르코복음 6장 14절-29절,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입니다.

우리 교회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는 표지”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엘리야에 관해서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룬 사람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죄인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비판하는 말이 듣기 싫어서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고, 결국 죽인 살인자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그의 회개 선포도 거부했다.” 라는 뜻입니다.

헤로데도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요한의 비판을 듣지 않았고,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것을 몰랐더라도 죄는 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한이 예언자라는 것을 알았느냐, 몰랐느냐?”가 아니라,

“회개하려는 마음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입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 6장 19절-20절을 보면,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헤로디아만 요한을 죽이려고 했고,

헤로데는 요한을 보호해 준 것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비판을 듣기 싫어한 사람도 헤로데이고,

요한을 감옥에 가둔 사람도 헤로데이고, 결국 요한을 죽인 사람도 헤로데입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일에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역사서에 의하면,

헤로데는 요한의 활동이 자기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서

요한을 죽인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다.” 라는 말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예언자로 믿고 있는 백성의 여론이 두려워서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막았다.”로 해석됩니다.

이것은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군중을 두려워해서

요한에 대한 자기들의 생각을 말하지 못한 일과 비슷합니다(마르 11,31-33).

헤로데는 요한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여론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두려움은 자기의 왕권이 약화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헤로디아가 마음대로 요한을 죽이는 것을 일단 막은 것입니다.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라는 말도 겉으로만 보면,

헤로데가 요한의 말을 경청한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라는 말은,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입장이 난처해져서 당혹스러워했다는 뜻입니다.

‘기꺼이 듣곤 하였다.’ 라는 말은, 경청했다는 뜻이 아니라,

뭔가 특이한 자극을 즐기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바로 뒤에 있는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마르 11,21).”

라는 말도 겉으로만 보면, 헤로디아가 헤로데의 생일잔치를

요한을 죽이기에 좋은 기회로 삼았다는 뜻으로 보이지만,

헤로데도 그 잔치를 좋은 기회로 삼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잔치에 온 손님들을 통해서 여론을 떠볼 수도 있었고,

그들을 공범으로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헤로데의 생일잔치에 참석한 ‘고관들, 무관들, 유지들’도

세례자 요한이 살해당한 일에 대해서 책임이 있습니다.

살인이 저질러지고 있는 현장에서 그 살인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고

방관하거나 침묵을 지키는 것은 사실상 공범이 되는 일입니다.


26절에 나오는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라는 말은,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이게 된 것을 몹시 괴로워했던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 말인데, 그것은 아닙니다.

전후 상황을 볼 때,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게 된 상황을 괴로워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솔한 맹세와 약속을 손님들이 비웃을까봐 괴로워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헤로데는 왕의 권위와 권한으로

세례자 요한을 정식으로 처형하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녀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것 같은 모습으로 요한을 처형하게 되었으니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었다고 느꼈을 것이고, 자존심이 상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

헤로데는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라고 말합니다(마르 11,16).

이 말은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나타낸 말이 아니라,

“귀신이 나타났구나.” 정도의 뜻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요한의 귀신이 자기를 해코지하지나 않을까, 하며

불안해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과는 거리가 멉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루카복음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헤로데는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다는 것은 그의 ‘불순한 호기심’을 나타냅니다.

이 호기심은 그가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처럼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죽이기 위해서 만나 보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저는 지금 신부가 되기 위해 젊은 사내들이 함께 모여 사는 산허리 

빨간 벽돌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서품을 받고 신학교를 떠난지 2년이 지나서 다시금 이 공동체에 몸담고 있습니다. 

지금은 학생들과 함께 살기 위한 소임을 맡고 있지만, 

처음 제가 신학생으로 입학을 했을 때 처음에 들어왔을 때에는 너무나도 부푼 마음이었습니다. 

모든 형제들이 천사처럼 보여졌고, 그리고 너무나도 좋아보였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처음의 그 마음은 조금씩 닳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을 제외하고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살아가니까 

부딪히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서로 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살아온 나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정말 이 사람만 없다면 살아갈만 할텐데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의 삶의 구조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공동생활의 원칙에따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 사람과 함께 씻고 그리고 함께 기도하고 밥먹고, 

그리고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도 함께 듭니다. 

그리고 피하려고 할수록 저 자신의 마음은 더욱 평화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려고 할때 저는 자유로울수 있었고, 

그리고 저는 더 깎여져야 하는 모난 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입니다. 

 

제 자신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이를 품을때 저는 저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치우고 그리고 덮으려고 그리고 모른척하려고 하였지만 

그것은 바로 저의 모습이었고, 그런 부족한 저를 사랑하는 주님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잠시 제 자신의 부족함을 덮어버린다고 해서 잊혀지지 않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칼날을 오히려 그것을 보여준 이에게 오히려 들이대는 

우리의 잔혹함이 도사리고 있음을 저 제 자신의 삶을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바로 하느님의 목소리,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요한은 일찍이 당시의 많은이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게 변화되고 그리고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삶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종교 지도자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잘못됨을 

실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을 통해 알수 있듯이 헤로데의 삶을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아마 율법학자들과 또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는 

요한이 자신 앞에서 치워짐으로 인해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스스로의 부족함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예수님 마저 십자가의 못박아 버렸습니다. 

  

스스로를 부정함으로 인해서 스스로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그리고 결국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묶여서 허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속박과 그리고 회피가 아니라 

행복과 그리고 자유로움입니다. 

  

나에게 있는 좋은 것뿐만 아니라 나에게 있는 부족함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나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우리는 더욱 넓게 사랑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리고 만날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그리고 우리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요한을 또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저에게도 헤로데와 똑같이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요한을 껴안음으로 인해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겠습니까?, 

아니면 오늘 헤로데처럼 핑계를 대고 그리고 단지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치워버리겠습니까? 

 

우리는 헤로데의 전철을 밟지 않고 진정 내 자신안에 그리스도의 뜻이 자리할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산교구 김인한 알베르또 신부 




독서 : 히브리서 13장 1~8절

 

그리스도인의 일상이 되어야 할 것들...


 

노벨상 수상작 ‘대지’를 쓴 펄 벅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의 일입니다. 

펄 벅이 경주의 고적지를 보기 위해 기차를 달리는데 창밖의 장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농부가 볏단을 실은 소달구지를 몰고 가고 있었는데, 

농부의 어깨에도 적지 않은 양의 볏단이 얹혀 있었습니다. 

이를 궁금하게 여긴 펄 벅이 수행원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은 소를 두고 왜 저렇게 힘들게 볏단을 지고 가나요?”

“소가 너무 힘들까 봐 거들어주는 거지요. 우리나라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랍니다.”

 

수행원의 말에 펄 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말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보고 싶은 것을 이미 다 보았다. 

저 모습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소가 힘들까봐 거들어주는 바보스럽고 정 많은 풍경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상이고 

초상화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그 모습에 대한 권고가 오늘 독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형제애를 실천하십시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말씀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형제애를 실천하고, 손님접대를 소홀히 하지 않고,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기억해 주는 것’이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일상이 된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작은 일부터 시작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형제애를 실천합시다. 

 

지난 피정 때 동기 신부와 산책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친구가 재정적으로나 마음적으로 많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많이 부끄럽고 그 친구에게 소홀히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형제애 실천의 시작은 가까운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시간을 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관심을 갖고 그 형제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알아야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겠죠. 


이미 잘 하고 계시겠지만, 그동안 소홀히 하고 있던 친구에게 안부 전화나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시간을 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손님접대를 소홀히 하지 맙시다.


어제 사목위원 몇 분이 사제관에 찾아 오셨습니다. 

명절인데 신부님 혼자 있으면 외로울까봐 찾아오셨다고 했는데, 

사제관에는 전혀 손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음식도 없고, 음식을 올릴 상도 없고, 난방도 제 서재만 해 놓아서 거실이 무척 추웠습니다. 

손님 맞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었는데, 

다행히 신자 분들이 알아서 다 해오셨습니다. 

 

음식도 해 오시고 상도 교육관에서 쓰는 거 가져오시고 

난로도 교육관에서 쓰는 거 가져다 난방을 했습니다. 


그래서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는데요.

 그 모습을 보면서 ‘아직 손님 맞을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술상을 볼 정도의 음식과 성당에 오가는 사람들이 

차나 커피 한 잔 하고 갈 수 있을 정도의 준비를 해 두려고 합니다. 

 

혹 여러분 중에도 손님 맞아본 경험이 별로 없거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분들이 계시다면, 

손님 맞을 준비를 조금씩 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기억하는 겁니다. 

묵상글을 쓰면서 방향 제시가 아니라 제 개인적인 다짐이 계속 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병원에 계신 할머님 한 분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번에 눈이 굉장히 많이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할머님 한 분이 넘어지셔서 

팔목이 부러지셨습니다. 

그래서 영종도에 있는 병원에 계신데, 당분간 입원해 계셔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분과 늘 함께 다니시던 할머님이 혼자 다니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억이 나는데, 

찾아가볼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일 미사 끝나고 한 번 찾아뵈려고 합니다.


제 개인적인 다짐들을 죽 늘어놓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형제를 사랑하고, 손님을 잘 접대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기억하고 돌보는 일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구나... 

섬기고 봉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구나...’ 라는 것을 느끼고 알게 될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아들 맹구의 시험 성적을 놓고 부모가 대화를 나눴다. 

“맹구의 역사 시험 성적은 어떻소?”


아빠가 묻자 엄마가 대답했다. 

“별로 좋지 않아요.

하지만 그 아이 잘못은 아니죠. 


글쎄 시험 문제가 전부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들에 관해서 나왔더라구요!”



인천교구 밤송이(김기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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