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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복음 묵상

[복음]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170401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7.04.02|조회수141 목록 댓글 0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40-53

그때에 예수님의 40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41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42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43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44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45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46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47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48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49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51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52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53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내 아집과 편견과 사고의 틀을 벗어버리고 ♣ 


 

하느님의 심판을 전했다는 이유로 자기 동족들의 미움을 산 예레미야 예언자는, 자기 처지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다.”(11,19)며 탄식합니다. 그는 그들의 살의에 가득 찬 태도 때문에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마저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몰랐다며 주님께 복수해 달라고 청합니다(11,20). 그는 고통스런 죽음을 맞지만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예레미야에게서 드러났던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을 통해 더 뚜렷이 드러납니다. 군중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참 예언자라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메시아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들은 메시아가 갈릴래아 나올 리가 없다고 합니다(7,40-44). 그들 눈에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만 들어왔던 것이지요. 


한편 성전 경비병들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7,46)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잡으러갔으나 감히 그분을 잡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자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오만에 가득 차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7,49)라고 경멸합니다. 


왜 그런 태도를 보였을까요?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권력과 명예욕, 자신들의 사고의 틀에 묶여 참 하느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고정관념, 자신의 지식, 신념, 자신만의 잣대로 감히 하느님을 저울질 하고 세속화 한 질서 안에 하느님을 가두어버리려 한 것입니다.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렇게 자기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면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부정하고 그에게 호의를 드러내는 군중을 저주합니다. 율법에 터 잡아 공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예수님의 권리를 옹호하려는 니코데모를 모욕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들의 음모와 악의와 적대심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뜻은 드러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새겨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곧 하느님을 나의 사고의 틀이나 이기적인 목적으로 가두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그분의 정체성은 논쟁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 드러나는 자애로우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체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야 하는 우리는 나의 잣대를 버려야 합니다. 나의 잣대로 하느님을 정의하고 판단하는 자체가 교만입니다. 하느님을 나의 아집과 편견, 사고의 틀로 보고 만나려고 하는 태도야말로 하느님을 도구화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또한 사회 인습과 제도의 틀 안에 하느님을 가두려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아울러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접하게 되는 다른 이들의 악의와 악행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다른 사람의 선의를 무시하는 사람은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고 사랑에서 멀어져 스스로를 단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숨겨진 일조차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악의와 음모, 거짓과 불의를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드러내고야 마심을 믿어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의인(義人)의 길

 

요즘 계속되는 성경 말씀은 ‘의인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시련과 절망, 

그리고 희망과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모세, 이사야, 에제키엘, 호세아, 그리고 또 한 사람 빼놓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때로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할 일, 

두고두고 고민하고 성찰해봐야 할 묵상거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법 없이도 살 사람, 정말 착한 사람, 다시 말해서 의인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입니다. 


반대로 정말 악한 사람, 금수(禽獸)만도 못한 사람, 

다시 말해서 악인들이 누리는 권세요 떵떵거림입니다.


의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의인이란 누가 뭐래도 주님의 뜻을 추구하는 사람, 

주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 

매사에 주님께 의탁하는 사람, 착하고 겸손한 사람, 

세상과 인간을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악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 

주님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 

주님을 멀리 떠나 사는 사람, 

언제나 자기뿐인 사람, 안하무인인 교만한 사람, 

악하고 부정한 사람, 

세상과 인간을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제시합니다. 

또한 성경 안에는 수많은 의인들의 이야기와 또 다른 악인들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님 부르심에 따라 평생토록 일관되게 의인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대체로 느꼈던 바는 비슷했습니다. 

의로운 길을 걷는데 따른 고통과 박해였습니다. 

의인의 삶 뒤에 항상 따라다니는 고달픔과 외로움이었습니다. 


또한 악인들의 버젓이 활개를 치며 당당히 살아가고 있는 데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었습니다. 


‘의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혼란스러움이었습니다.


의인으로 살았던 시편 저자는 삶이 얼마나 괴로웠던지 이렇게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오니, 뒤쫓는 모든 자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저를 구해 주소서. 

사자처럼 이 몸 물어 가지 못하게 하소서. 아무도 구해 주는 이 없나이다. 

주님 제 의로움, 제 결백을 보시고,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이제 악인들의 죄악은 끝내시고. 의인들은 굳세게 하소서.”

의인 중의 의인이셨던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내내 받으셨던 고통과 수모 역시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했던 것이 유다인들, 특히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저질렀던 행태였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해주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 예수님이셨습니다. 

자신들을 오랜 종살이로부터 해방시켜주시려고 다가오신 구세주 예수님이셨습니다. 


백번 천 번 감사하고 고개 숙여도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철저한 배척과 냉대였습니다. 

그리고 불신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수많은 의인들이 여전히 백성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당하고 계시는 의인들께서 꼭 기억하실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의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이 지상에서 겪는 시련과 그들이 지고 가고 있는 십자가를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의인들의 길은 동틀 녘의 빛과 같아 한낮이 될 때까지 점점 밝아지지만 

악인들의 길은 암흑과 같아 어디에 걸려 비틀거리는지도 모른다.”

(잠언 4장 18~19절)는 사실입니다.

 

힘겨운 세상에서, 숱한 악인들 사이에서 외롭지만 당당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열어 가시는 의인들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 

그분들은 스스로 길이 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의인들이 안심하고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되고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뮤지컬을 보지 못하셨다고 해도, 그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요. 

그 이야기를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빵을 훔친 죄로 19년 중노동을 선고 받은 장발장은 점점 사나운 죄수가 되어갑니다. 

주먹 싸움에서 그를 이길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의지를 꺾어 놓을 사람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출소의 날이 왔습니다. 


그러나 당시 죄수들은 신분증을 가지고 다녀야 했기에 어느 여관 주인도 

이 위험한 전과자를 받아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궂은 날씨에 묵을 곳을 찾아 나흘 간 시골 길을 헤매던 그에게 

마침내 어느 친절한 신부가 자비를 베풉니다.


그 날 밤 장발장은 너무 편안한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다가 신부와 그 누이가 잠자리에 들자, 

침대에서 일어나 찬장을 뒤져 가족 은잔을 훔쳐서는 어둠 속으로 슬며시 달아납니다.


이튿날 아침 경찰 세 명이 장발장을 끌고와 신부의 집 문을 두드립니다. 

훔친 은잔을 들고 달아나던 범인을 붙잡은것입니다. 

그들은 이 악당을 평생 사슬에 묶어 놓을 태세였습니다. 

그러나 신부의 반응은 누구도 예상 못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장발장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시 오셨군요!” 신부는 장발장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제가 촛대까지 드렸던 걸 잊어버리신 모양이죠? 

그것도 은이라서 족히 200프랑은 나갈 겁니다. 

깜박 잊고 놓고 가셨나요?”


장발장은 눈이 휘둥그래 졌습니다. 

그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을 눈빛에 담아 노신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시 읽어도 감동이 생길 만큼 은혜로운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은혜로운 체험이 이야기 속에만 있을까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에 병자 성사를 다녀왔습니다. 

50대로 보이는 형제님이 수술을 앞두시고 병자성사를 신청했는데, 

그동안 냉담했다며 먼저 고해성사를 보셨습니다. 


죄의 고백이 다 끝난 후에 사죄경을 외워드렸는데, 그 때부터 병자성사를 드리는 동안 

계속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다 큰 어른이 눈물을 보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도, 계속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으셨나 봅니다. 


형제님의 눈물이 많은 이야기를 해 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느님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웠는지를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 형제님을 예수님은 내치지 않으십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고, 벌을 면해 주십니다. 

자비와 용서로 받아들여주시고, 사랑으로 안아 주십니다. 

그래서 그런지 병자성사를 마친 형제님의 모습이 평온하고 차분해 보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 판공성사를 다니다보면, 10년 20년 냉담한 분들이나 

큰 죄를 지은 분들이 용서를 청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은 고해 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깊이 체험하는 것 같습니다. 


고해성사 후에 눈물을 보이시는 분도 많고, 

죄의 용서를 받고 주님께 다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감동한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장발장이 느꼈던 감동, 그리고 고해와 병자 성사 안에서 신자들이 느꼈던 감동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전 경비병들도 체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그 동안 듣도 보도 못한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체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손 댈 생각도 못하고 그냥 돌아와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말을 할 수 있기 위해서 기도와 말씀과 성사에 

더 자주 참여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야 그 안에서 주님이 얼마나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신지 

알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을 겁니다.

 


인천교구 밤송이(김기현 요한) 신부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바리사이들이 니코데모에게 한 이 말은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암시하는 말이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태생이 아니라 베들레헴 태생이며 

그 집안은 다윗 임금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이렇게 전해 줍니다.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니코데모는 예수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을 대변하고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인물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은 중립적인 위치에 섰던 사람들로, 

선입관과 인간적 지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들이 느끼는 그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권위와 능력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복시켰습니다. 


그들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보다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속담처럼 인간적 지식이 때로는 

삶의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방해하고는 합니다. 


많이 안다는 것은 행복의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심을 깊게 하지도 않습니다. 

지식과 신앙심은 비례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신앙의 진리를 키워 주고 사랑하게 만듭니다. 



2017,4,1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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