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vangelio de Hoy
En aquel tiempo, Jesús dijo: «¡Ay de vosotros, escribas y fariseos hipócritas, pues sois semejantes a sepulcros blanqueados, que por fuera parecen bonitos, pero por dentro están llenos de huesos de muertos y de toda inmundicia! Así también vosotros, por fuera aparecéis justos ante los hombres, pero por dentro estáis llenos de hipocresía y de iniquidad. ¡Ay de vosotros, escribas y fariseos hipócritas, porque edificáis los sepulcros de los profetas y adornáis los monumentos de los justos, y decís: ‘Si nosotros hubiéramos vivido en el tiempo de nuestros padres, no habríamos tenido parte con ellos en la sangre de los profetas!’. Con lo cual atestiguáis contra vosotros mismos que sois hijos de los que mataron a los profetas. ¡Colmad también vosotros la medida de vuestros padres!».
«¡Ay de vosotros, escribas y fariseos hipócritas!»
+ Rev. D. Lluís ROQUÉ i Roqué
(Manresa, Barcelona, España)
Hoy, como en los días anteriores y los que siguen, contemplamos a Jesús fuera de sí, condenando actitudes incompatibles con un vivir digno, no solamente cristiano, sino también humano: «Por fuera aparecéis justos ante los hombres, pero por dentro estáis llenos de hipocresía y de iniquidad» (Mt 23,28). Viene a confirmar que la sinceridad, la honradez, la lealtad, la nobleza..., son virtudes queridas por Dios y, también, muy apreciadas por los humanos.
Para no caer, pues, en la hipocresía, tengo que ser muy sincero. Primero, con Dios, porque me quiere limpio de corazón y que deteste toda mentira por ser Él totalmente puro, la Verdad absoluta. Segundo, conmigo mismo, para no ser yo el primer engañado, exponiéndome a pecar contra el Espíritu Santo al no reconocer los propios pecados ni manifestarlos con claridad en el sacramento de la Penitencia, o por no confiar suficientemente en Dios, que nunca condena a quien hace de hijo pródigo ni pierde a nadie por el hecho de ser pecador, sino por no reconocerse como tal. En tercer lugar, con los otros, ya que también —como Jesús— a todos nos pone fuera de sí la mentira, el engaño, la falta de sinceridad, de honradez, de lealtad, de nobleza..., y, por esto mismo, hemos de aplicarnos el principio: «Lo que no quieras para ti, no lo quieras para nadie».
Estas tres actitudes —que podemos considerar de sentido común— las hemos de hacer nuestras para no caer en la hipocresía, y hacernos cargo de que necesitamos la gracia santificante, debido al pecado original ocasionado por el “padre de la mentira”: el demonio. Por esto, haremos caso de la exhortación de san Josemaría: «A la hora del examen ve prevenido contra el demonio mudo»; tendremos también presente a Orígenes, que dice: «Toda santidad fingida yace muerta porque no obra impulsada por Dios», y nos regiremos, siempre, por el principio elemental y simple propuesto por Jesús: «Sea vuestro lenguaje: ‘Sí, sí’; ‘no, no’» (Mt 5,37).
María no se pasa en palabras, pero su sí al bien, a la gracia, fue único y veraz; su no al mal, al pecado, fue rotundo y sincero.
♣ 진실하고 책임 있는 사랑의 선포자 ♣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질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23,27-28)라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무덤이 죽음과 닿아 있어 부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유다인들의 3대 명절 때는 순례자들이 붐벼 무덤에 몸이나 옷이 닿곤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불결해져서 축제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이를 피하려고 길가의 모든 무덤에 회칠을 해두곤 했지요. 사람들은 밤에도 무덤이 보이도록 무덤에 횟가루를 칠한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들은 맑은 날에는 하얗게 빛나 보였고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예수시대부터 유다인들은 성인들과 예언자들을 기억하고 예언자들이 당하던 박해를 보속하는 뜻에서 기념관과 같은 무덤을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겉으로는 의로운 체하지만 실제로는 율법에 불충하고 위선적인 그들을 질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번째 질책과 같은 맥락에서, 자신들은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이라 자처하는 그들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그렇게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23,29-30).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위선적인 행동으로 예언자들을 박해하던 이스라엘인들 편에 서 있었지요.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은 조상들의 잘못과 무관하고 흠도 없다고 합니다. 나 몰라라 하는 뻔뻔함이 그들의 덫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은 조상의 후손들인 그들의 무책임과 위선을 책망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썩어가는 시체의 악취로 진동하고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질책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름답게 치장하고 유창한 말솜씨로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인생의 참된 길에 대해 말할 때가 많지요. 그러나 그 화려한 말을 하는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미움과 거짓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 표리부동의 모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 부정적인 생각과 자기비하, 열등감, 절망, 포기를 붙들고 있을 때에도 드러나지요.
세상으로 눈을 돌리면, 이 사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고 IT강국으로 주목받는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결코 인간다운 사회, 더불어 행복한 나라라 할 수 없습니다. 속은 빈부격차와 부패, 자본의 권력화 속에 인간이 도구화 하고 있고, 자살률 최고라는 불안정하고 비참한 실상을 보이고 있지요. 속빈 강정과 같은 실상입니다. 어디서나 바리사이와 같은 위선과 탐욕이 문제입니다.
또한 바리사이들에게서 드러났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뻔뻔함과 왜곡된 의인의식과 무책임의 늪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누구든 잘못할 수 있지요.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나는 흠도 티도 없다는 자만과 무책임은 교만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오늘도 내 속에 악취 나는 것들은 없는지 살펴보고, 안에 품은 아름다운 하느님의 선물을 행동의 향기로 뿜어내는 진실한 우리가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렇게 영혼을 바꾸고,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여 책임을 짐으로써 죽음의 십자가를 생명의 샘터로 바꿔가는 정직한 사랑의 선포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일하는 목적
오늘 수원교구 어떤 본당의 한 보좌신부가 이번에 교황님이 오시는 것을 계기로
자신의 성당에서 4백 명이 넘는 입교자를 받았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요즘 같은 때에 그렇게 많은 입교자를 받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몇 달 전에 그 본당 주임신부님이 교황님이 오시는 것을 계기로
무언가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
저는 그저 한 귀로 듣고는 한 귀로 흘려버렸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소공동체와 레지오 두 파트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소공동체 각 구역별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현수막을 설치하고 전단지를 돌렸습니다.
물론 그 성당 이름이 새겨진 물티슈도 함께 나누어 주었습니다.
레지오는 상가나 가정을 다니면서 현수막과 전단지, 물티슈 등을 돌렸습니다.
이렇게 사용된 돈이 천만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신자들 모두에게 물티슈 세 개씩을 주고 각자 선교할 것도 권했습니다.
그리고는 교황님이 며칠 동안 한국에 머무실 때 본격적으로 입교자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입교신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언론에서 교황님이 대서특필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도 가톨릭에 대한 관심으로
크게 기울었던 것입니다.
교구 복음화국에서 일하고 있는 저로서는
‘이 운동을 전 본당에서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크게 남았습니다.
‘그 신부님처럼 조금만 더 부지런하게 뛸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까!’라고 생각하니
주님께도 죄송스러웠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게으름으로 주위의 많은 영혼들을 잃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바오로가 게으름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합니다.
일중독이란 말이 생각나게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바오로가 ‘일하는 것’만 강조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하며,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가끔 동료 사제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사목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데도
‘기쁨’을 못 느끼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사제의 길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과연 가정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며 살아왔는데
정말 기쁘고 보람스럽습니까?
기쁨이 없는 노력이란 열매가 없는 나무와도 같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돈을 쓰며 흥청망청 놀았고
큰 아들은 일만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게 된 것은 아버지를 위해 쉬지 않고 일했던
큰 아들이 아닌 놀기만 했던 작은 아들이었습니다.
과연 큰 아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불교에서 가장 어리석은 여인을 표현할 때
물동이를 이고 땀을 흘리며 어디론가 계속 걸어가는 여인이라고 합니다.
일은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목적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계속 돌아다닐 뿐인 것입니다.
그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을 합니까?
그 목적이 명확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신이 한 모든 일이 헛수고였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7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여러분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습니다. 28 이와 같이 여러분도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마태오 23,27-28)
여섯째 저주는 그릇의 겉과 속을 다룬 다섯째 저주와 내용상 이어진다. 갈수록 저주의 강도가 세어진다.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은 그 정도가 지나치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어떤 행동을 두고 저주하는지 본문에 나타나 있지도 않다. 유다인의 매장 풍습을 잘 모르는 현대인에게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단락이다.
천으로 감싼 시신은 밖에서 드나들 수 있는 동굴무덤이나 바위무덤에 모셔진다. 일 년 후 뼈를 모아서 광주리나 자루에 넣어 동굴이나 밭에(민수기 19,16) 영구히 모신다. 밭에 모신 무덤 위에는 돌판을 덮는다. 무덤이 여럿 있는 곳에는 돌을 세운다. 무덤을 표시하기 위해 석회를 바른다. 해마다 우기(雨期)가 지나고 파스카 축제 전에 다시 석회를 칠한다.
같은 주제가 루가복음에도 있다. “여러분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무덤인 줄도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닙니다.”(루가 11,44) 마태오보다 루가에 나오는 이야기가 더 오래된 것 같다. 부활절 이후에 생긴 이야기니 예수가 진짜 한 말씀은 아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루가에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으로, 마태오에는 드러난 무덤으로 소개되는 것이 대조적이다. 그들을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다고 마태오는 말한다. 유다인의 매장 관습을 보면 루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행인이 모르고서 무덤을 밟고 지나가기는 경우는 생각하기 어렵다.
유다인과 그리스인은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무덤을 장식하는 일을 당연히 여겼다. 그러나 27절에서 겉은 ‘그럴싸해’ 보이는 무덤이란 표현은 이해하기 어렵다.(개역개정 성경에 ‘아름답게’로 번역됨) 경건한 유다인은 무덤 표시를 아름답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얗게 칠해진 돌판이나 돌은 무덤이 불결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시일 뿐이다. 그 표시를 아름답다고 표현한 유다교 문헌은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 이 문제를 해명하려는 성서학자들의 노력은 여전히 궁색하다.
28절에서 아노미아(anomia, 불법, 不法)는 4복음서중 마태오에게만 보이는 단어다. 70인역 공동성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서에 무려 50번이나 나타나는 단어다. 바리사이들은 잘못된 사회구조를 비판하지 않았고 더구나 그들은 비판당할 세력임을 마태오는 이 단어로 가리키고 있다. 이 단어의 사회비판적 성격이 그동안 성서해설서에서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다. 루가복음 뿐 아니라 마태오복음도 강력한 사회비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특징이 그리스도교에서 별로 강조되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는 사회비판적 집단이 아니라 주로 체제유지 세력으로 기능해온 탓이다. 그러니 성서가 지니는 사회비판적 특징을 그리스도교가 제대로 강조할 수 있었겠는가.
무덤의 겉은 돌판이고 무덤 속에는 뼈가 들어있다. 그 대조적인 모습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마태오가 투사한 듯하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성서에 부적절한 비유가 등장하는 모습은 어색하다. 유다교에서 추방된 아픔과 분노를 마태오가 숨기지 못하는 것이다. 곧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그리스도교에서 바리사이라는 단어 자체를 가능하면 쓰지 말자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성서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바리사이가 너무도 부당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라는 단어를 쓰면 쓸수록 그 부정적인 뜻이 재확인되고 확대된다. 마태오 23장을 공부하면서 나는 유다인에게 죄송함을 자주 느낀다.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에게 저지른 잘못은 그 언제 사라질까.
지나치게 지켜진 전례와 소홀히 여겨진 윤리 사이의 모순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요 주제다. 이 주제는 이웃 종교나 형제자매 종교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리사이에 대한 비판으로 먹고 살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비판으로 성숙해야 한다. 이웃을 비판한다고 자신의 회개가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비판과 반성은 같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 하나를 생각해 보자. 뛰어난 신학자인 율법학자들과 모범적인 평신도인 바리사이파를 예수는 왜 비판했을까. 우선 그들의 직분을 존중하고 본받으라고 가르쳐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들보다는 범죄자나 종교의무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해야 옳지 않은가. 그러나 예수는 유다교의 지배층을 비판하였다. 범죄자나 종교의무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예수는 단 한 번도 비판한 적이 없다. 예수가 그들의 행동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는 그들을 역사의 희생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잘못보다 체제의 잘못이 더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의 잘못과 모순을 잘 모른다는 비판을 받곤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잘못과 처신을 해방신학자는 그 누구보다 더 자주, 가까이, 지겹도록,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을 개인 윤리가 아니라 사회윤리의 시각에서 먼저 보기 때문이다. 개인 윤리를 개인윤리 내부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윤리라는 큰 틀에서 보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자를 어리석고 순진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사실 어리석다.
*70인역 공동성서: 히브리어 공동성서(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 신약성서 저자들이 주로 사용함. *공동성서(구약성서): 1. ‘구약(舊約)’이란 단어는 ‘낡아빠진, 효력이 사라진’ 이라는 오해를 줄 수 있다. 2. 유다인과 그리스도교가 같이 쓰는 특징을 존중한다. 그래서 구약성서 대신 공동성서라는 표현을 나는 쓰고 있다.
“29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여러분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성자들의 기념비를 장식해 놓고는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 떠들어 댑니다. 31 이것은 여러분이 예언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입니다. 32 그러나 여러분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시오.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여러분이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겠습니까?”(마태오 23,29-33)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무덤과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헤로데 대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예수 시대에 그런 무덤은 적지 않았다. 개신교 성서학자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갈릴래아, 사마리아, 유다 지역에 그런 무덤이 39개 있고 대부분 유다 지역에 있다고 보고하였다.(느헤미아 3,16; 사도행전 2,29 참조) 그런 무덤이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음을 오늘 단락은 전제한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런 무덤을 세웠다는 기록은 유다교 문헌에 전혀 없다. ‘의인을 위하여 무덤을 만들지 말라. 그들의 말씀이 그들의 비석이다’는 말을 2세기 랍비 시몬 벤 감미엘은 전하고 있다.
과거의 역사와 선조들의 부끄러운 행위를 모른 척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도망치는 것이다. 민족의 역사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하면 32절 말씀처럼 우리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다. 일제시대에 친일 행위를 저지른 노기남 대주교 같은 종교인을 가톨릭은 언제까지 감쌀 셈인가. 순교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기리지만 우리가 순교를 꺼린다면 어떻게 되나. 오늘의 불의에 저항하지 않고서 지난날 순교자를 추앙하는 것은 순교 마케팅에 불과하다. 우리가 순교의 삶을 살아야 지난날 순교자를 제대로 존중하는 것이다.
활동 초기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산상수훈이라는 희망을 예수는 선사하였다. 그러나 죽기 직전 예수는 동족 지배층을 저주하는 말씀을 남기고 있다. 8가지 희망의 말씀에 7가지 저주가 대조된다. 새는 죽기 전에 그 소리가 슬프고 죽기 전에 사람은 그 말이 착하다 하지 않은가. 예수는 자기 활동을 결국 비관적으로 보는 것인가. 예수의 삶을 전체적인 구도에서 보는 눈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성서번역이 되지 않고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던 15세기까지 마태오 23장의 저주는 그리스도교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미사에서 낭독되지도 않아서 신자들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성서해설에서도 유다인을 공격할 때에도 별로 인용되지 않았다. 2세기 오리게네스(Origenes) 이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욕심이 많고 돈을 밝힌다는 오해가 교회에 자리잡긴 하였다. 오랫동안 유럽 전역에서 반(反)유다주의가 퍼졌으나 마태오 23장이 그 근거로 크게 인용되지는 않았다. 마태오 23,23 십일조 부분을 인용하여 유다인의 돈 욕심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루터 이후 18세기까지 지속된 개신교의 십일조 관행을 변호하기 위해 개신교에서 같은 구절이 인용되기도 하였다. “십일조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소수파인 마태오 공동체가 자신의 터전이던 바리사이를 비판한 것처럼, 루터 시대에 소수파인 개신교는 자신의 터전인 가톨릭을 공격하는 상황이 되었다. 마태오가 바리사이를 대하는 처지는 개신교가 가톨릭을 대하는 처지와 비슷하였다. 루터 이후 개신교 성서해설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구원을 행업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대명사가 되었다. 가톨릭은 루터에게 바리사이와 동일시되었다. 오늘도 그렇게 알거나 가르치는 개신교 형제자매들이 드물지 않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자신을 세우기 위해 남을 비난하는 행위는 주도권 다툼에서 흔하다. 특히 형제 사이의 다툼은 예상보다 더 심각해지기 쉽다. 초대교회가 로마에 저항하기보다 유다교를 비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16세기부터 인쇄술과 성서번역 덕택에 많은 사람들이 성서를 읽게 되었다. 그때부터 마태오 23장(그리고 루가 18,9-14)의 내용을 빌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는 위선자로 비유되는 것을 넘어서 아예 위선자로 동일시되었다. 바리사이는 유럽 전역에서 일상용어가 되었다. 독일어에서 바리사이 커피라는 단어도 생겼다. 커피에 술을 타면 커피 위에 거품이 생기는데 그러면 어떤 맛인지 알기 어렵다. 바리사이는 어느덧 ‘되기 싫은 사람, 보기 싫은 사람, 미운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 스피노자(Spinoza) 이후 계몽주의 시대에 바리사이는 부정적인 뜻으로 유럽에서 자리잡았다. 이에 대한 반발로 19세기 유럽 유다교에서는 바리사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가다듬었다. 그들에게 사두가이는 근본주의자를, 바리사이는 개혁파를 가리키게 되었다.
바리사이는 그리스도교에서 오늘도 가장 흔히 쓰이는 언어폭력의 대명사다. 성서신학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이런 잘못된 언어폭력을 그리스도교는 계속할 셈인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양심과 정신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겠다. 유다인에 대한 박해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저지른 유럽 그리스도교에서 마태오 23장은 이제 조심스럽게 다루어지고 있다. 성서학자들도 감히 언급하기 꺼려하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그냥 모른 척 지나칠 수도 없다. 그리스도교는 오늘 어떻게 해야 하나.
1. 마태오 23장을 잘못 해석하여 유다인에게 끼친 피해와 아픔을 숨기지 말고 신자들에게 알려야 한다. 역사를 잊는다고 역사가 사라지진 않는다. 2. 설교자들은 바리사이라는 단어를 쓸 때 아주 조심해야 한다. 가능하면 차라리 쓰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3.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에 대한 비판으로 먹고 살면 안 된다. 유다교 바로알기 운동이라도 그리스도교에서 일어나야 한다. 유다교를 공정하게 신자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마태오처럼 분별없이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를 공격하면 안 된다. 유다교에 대한 마태오의 적개심을 오늘 그리스도 신자들이 상속받을 이유나 필요는 없다. 우리가 마태오를 뛰어넘기를 마태오 자신도 간절히 바랄 것이다.
[참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마카베오 이전 시기에 율법학자에 대한 중요한 두 문헌은 에스라(Esra) 7과 시락(Sirach) 37 이다. 에즈라는 성전과 사제와 연결되었고 율법연구와 가르침이 주요한 임무였다. 벤 시라(Ben Sira) 역시 성전과 관계되었지만 정치에도 관여하였고 사회적으로 명망을 누렸다. 공통년 이전 3-2세기에 시리아의 식민통치에 맞서 독립투쟁하던 마카베오 왕조시대에 다양한 분파의 율법학자들이 나타났다. 성전과 왕정에 대한 태도에 따라 하시딤, 에세느, 사두가이, 바리사이파가 생겼다. 하시딤, 바리사이, 사두가이, 에세느 그리고 젤로데파에 율법학자들이 있었다.
성전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사두가이, 외딴 곳에서 단체생활하던 에세느보다 바리사이파에게 율법학자는 더 중요하였다. 바리사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공통년(서기) 70년에 로마에 대한 독립전쟁에서 패배한 유다민족에게 유일하게 바리사이파만 살아남았다. 예수 죽음 후 40년이 지난 시점이다. 공통년 35년 무렵부터 약 30여년을 선교활동하던 바울은 유다교 여러 분파가 존재하던 시절을 살았다. 바울과 다르게 4복음서 저자들은 바리사이만 생존한 유다교가 존재하던 시대를 살았다. 성전파괴 후 유다교에게 남은 것은 율법뿐이었다. 성전이 없어지니 사제들의 권력은 사라졌다.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해석하는 율법학자들이 유다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율법학자들에 대한 학자들의 논의에는 많은 의견일치가 있다. 그러나 바리사이에 대해서는 그 의견 차이가 적지 않다. 바리사이(파리사이오스, parisaios)가 무슨 뜻인지,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자칭했는지 우리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우리가 바리사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대부분 막스 베버(Max Weber)에게 온 것이다. 베버(Weber)에 따르면 바리사이는 사제가 아닌 평신도 그룹으로 도시에 거주하며 제사나 계시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율법을 중시한다. 그러나 현대의 유다교 학자들에 의해 이런 개념은 흔들리고 있다. 바리사이는 식탁 예절과 십일조를 중시한 사람들이었고 유다교에서 주도 세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바리사이에 대해 우리가 가진 자료는 에세느파가 남긴 쿰란(Qumran) 문헌,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가 남긴 역사서, 신약성서, 랍비 문헌 네가지다. 요세푸스의 기록은 마르코와 마태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랍비 문헌도 요세푸스의 주장과 크게 다르다. 70년 이전의 바리사이에 대한 공통된 주장을 얻기에는 쉽지 않다. 학계에서는 요세푸스의 의견을 가장 중시하고 있다.
바리사이에 대해 학자들은 어떤 점에서 일치하는가. 1. 바리사이는 공통년 70년 이전에 유다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다. 2. 바리사이는 종교교육과 일상생활 성화(聖化)에 열성적인 개혁적 중도파다. 3. 바리사이는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4. 바리사이는 조상들의 전통을 중시하였다. 5. 바리사이는 모임을 통해 공동체를 이룬 조직이다.
마태오와 요한복음에서 바리사이에 대한 묘사는 아주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게 마치 바리사이들이 예수 처형에 가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마태오 27,62; 요한 18,3) 루가복음에 바리사이에 대해 호의적인 보도가(루가 7,36-; 11,37-; 13,31-; 사도행전 5,34)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부정적이다.(루가 16,14)
마태오복음에는 바리사이와 마태오 공동체 사이의 갈등과 분열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잇다. 분열의 당사자요 목격자인 마태오는 유다교와 분열 과정에서 겪은 개인적 아픔과 분노를 숨기지 않고 있다. 마태오복음은 분열의 당사자가 쓴 분열의 기록이다. 그들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 마태오 공동체와 바리사이 사이의 갈등은 심했다. 2. 마태오 공동체와 바리사이 사이의 공통점은 많았다. 둘 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고 일상생활의 거룩함을 위해 애썼다. 바리사이와 마태오 공동체의 다툼은 낯선 사람들끼리의 대결이 아니라 형제 사이의 다툼이다. 형제 사이의 다툼이니 그리 심하게 다툰 것이다. 유다교를 보는 마태오의 심정과 지금 우리의 심정은 물론 같지 않다.
예수는 유다교 여러 그룹 중에서 바리사이파에 가장 가깝다. 예수는 바리사이 보수파인 샴마이(Shammaj) 학파보다 개혁파인 힐렐(Hillel) 학파에 더 가깝다. 그러나 예수는 바리사이파에 가담하지 않았다. 예수는 유다교 분파 중 어느 한 곳을 택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유다교 어느 분파도 가난한 사람을 환영하지 않았다. 예수 그룹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 그룹의 핵심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고 핵심을 이룬다는 것이 예수 그룹의 특징이다. 오늘 그리스도교에도 그러한가. 예수 운동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핵심이었는데 오늘 그리스도교에는 성직자가 핵심이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에 대한 학문적 정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들을 대하는 오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태도다. 바리사이를 위선자로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설교자들 중에도 그런 모습이 자주 보인다.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바리사이 바로알기 운동이라도 생겨야 할 판이다. 다른 사람을 속여도 안되지만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도 큰 잘못이다. 우리끼리 잘 뭉치기 위해 남을 공격할 필요는 없다. 못난 사람은 남을 공격해서 뿌듯함을 느끼지만 잘난 사람은 스스로를 성찰하며 산다. 그리스도교가 유다교를 심하게 비난해온 배경에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에 느끼는 열등감이 있다.
대부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바리사이에 대한 공정한 가르침을 교회 안에서 받은 적이 없다. 설교자들은 신자들에게 바리사이에 대해 공정하게 가르친 적 있는가. 모두 반성할 일이다.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에 저지르는 잘못을 하느님이 보고 계신다. 우리가 예수에게 충실하고 만족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진리가 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이라는 사실이다. 유다교는 그리스도교보다 먼저 하느님께 사랑받았다. 유다인에게 맺은 하느님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는다.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유다교는 그리스도교에게 전해 주었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