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cuando Jesús se iba de allí, al pasar vio a un hombre llamado Mateo, sentado en el despacho de impuestos, y le dice: «Sígueme». Él se levantó y le siguió. Y sucedió que estando él a la mesa en casa de Mateo, vinieron muchos publicanos y pecadores, y estaban a la mesa con Jesús y sus discípulos. Al verlo los fariseos decían a los discípulos: «¿Por qué come vuestro maestro con los publicanos y pecadores?». Mas Él, al oírlo, dijo: «No necesitan médico los que están fuertes sino los que están mal. Id, pues, a aprender qué significa aquello de: Misericordia quiero, que no sacrificio. Porque no he venido a llamar a justos, sino a pecadores».
«No he venido a llamar a justos, sino a pecadores»
Rev. D. Joan PUJOL i Balcells
(La Seu d'Urgell, Lleida, España)
Hoy celebramos la fiesta del apóstol y evangelista san Mateo. Él mismo nos cuenta en su Evangelio su conversión. Estaba sentado en el lugar donde recaudaban los impuestos y Jesús le invitó a seguirlo. Mateo —dice el Evangelio— «se levantó y le siguió» (Mt 9,9). Con Mateo llega al grupo de los Doce un hombre totalmente diferente de los otros apóstoles, tanto por su formación como por su posición social y riqueza. Su padre le había hecho estudiar economía para poder fijar el precio del trigo y del vino, de los peces que le traerían Pedro y Andrés y los hijos de Zebedeo y el de las perlas preciosas de que habla el Evangelio.
Su oficio, el de recaudador de impuestos, estaba mal visto. Quienes lo ejercían eran considerados publicanos y pecadores. Estaba al servicio del rey Herodes, señor de Galilea, un rey odiado por su pueblo y que el Nuevo Testamento nos lo presenta como un adúltero, el asesino de Juan Bautista y el que escarneció a Jesús el Viernes Santo. ¿Qué pensaría Mateo cuando iba a rendir cuentas al rey Herodes? La conversión de Mateo debía suponer una verdadera liberación, como lo demuestra el banquete al que invitó a los publicanos y pecadores. Fue su manera de demostrar el agradecimiento al Maestro por haber podido salir de una situación miserable y encontrar la verdadera felicidad. San Beda el Venerable, comentando la conversión de Mateo, escribe: «La conversión de un cobrador de impuestos da ejemplo de penitencia y de indulgencia a otros cobradores de impuestos y pecadores (...). En el primer instante de su conversión, atrae hacia Él, que es tanto como decir hacia la salvación, a todo un grupo de pecadores».
En su conversión se hace presente la misericordia de Dios como lo manifiestan las palabras de Jesús ante la crítica de los fariseos: «Misericordia quiero, que no sacrificio. Porque no he venido a llamar a justos, sino a pecadores» (Mt 9,13).
♣ 복음의 사람이 되어간 세리 마태오 ♣
오늘은 ‘복음사가’ 마태오보다 ‘복음의 사람’이 되어간 세리 마태오에 주목해봅니다. 카파르나움에서 태어난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르 2,14) 마태오는 세리로서 당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동족들에게 세금을 수탈하여 로마 총독에게 바치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찍어 경멸하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죄인인 세리와 관계를 맺는 것은 종교적인 금기였기에 종교생활에서 소외된 그들은 회개할 기회조차 갖기 어려웠습니다(루카 19,9-10).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써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로마 5,8).
예수님께서 ‘공적 죄인’인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물론 제자들에게까지도 충격적인 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마태오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 하시자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태 9,9) ‘나를 따라라’ 하는 말씀은 권력에 복종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비심에 가득 찬 영의 눈으로 소외된 그를 내면의 변화에로 이끄신 초대인 셈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경건하신 예수님께서 상것들을 받아들이시고 그들과 어울리신 처사는 수치스런 일이었습니다(바빌론 탈무드, 브라콧 43b). 그러니 마태오를 부르신 것은 인간의 좁디좁은 잣대를 뛰어넘는 ‘거룩한 파격’이었지요. 예수님의 파격적인 처신을 보고 그들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11,19)라고 비아냥댑니다.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고, 하느님을 품고 있는 인간을 좁고 폐쇄적인 잣대로 차별하며 자기 기준과 취향에 맞는 이들끼리만 어울리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울타리 없는 사랑, 온갖 피조물, 무생물과 광물, 심지어 죽음까지도 동등한 형제자매로 받아들였던 성 프란치스코의 우주적 형제애가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의 부르심은 죄인인 세리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습니다. 부르심에 따라 나서는 마태오의 태도 또한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그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9,9). 그는 엄청난 부와 권세를 누렸으며, 온갖 비난을 무시할 정도의 강한 자아를 지녔습니다. 그런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루카 5,28)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될 수 없었겠지요.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지요. 그런데 죄를 짓고도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의인이라 여기며 잠든 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죄는 인식하지만 양심의 가책이나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태오처럼 남의 죄보다는 자신의 허물을 먼저 보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아파하며 자비를 구해야겠습니다.
나아가 죄지은 형제자매들을 단죄하고 잘못을 비난하면서 소외시키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며 보여주신 한없는 자비심과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주시는 태도를 살아내야겠습니다. 또한 죄인 취급을 받았음에도 부르시자 곧바로 “일어나 따랐던” 마태오의 솔직하고 단순한 자기인식, 사랑과 회개를 향한 자발성을 배워야겠지요.
마태오는 사도 바오로처럼 ‘죄인 가운데서 첫째가는 죄인’(1티모 1,15)이라는 정직한 의식을 지녔기에 회개하였고 주님의 사랑 안에 일치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세리 마태오가 회개하여 복음으로 변모되었던 그 점을 새기며 복음이 되어가는 하루이길 희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로 뽑힐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루카 6,12-13)”
(예수님의 제자가 열두 명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로 뽑히지 않은 제자들 가운데에는
세속적인 기준으로 볼 때 과거 경력이 좋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안 좋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열두 명을 뽑아서 그들을 사도로 삼으셨는데,
그들의 출신지, 직업, 학력 같은 인간적인 배경은 보지 않으셨고,
사도로서 일할 때에 필요한 자격만 보셨습니다.
그 자격은 아마도 믿음, 열정, 헌신, 충성심, 인내심 등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마태오의 직업이 세리였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도, 또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을,
신앙인으로 부르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이 말씀은 더욱더 마태오의 직업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마태 9,10).”
지금 이 식사는 마태오가 예수님을 위해서 베푼 잔치입니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루카 5,29).”
(여기서 ‘레위’는 마태오 사도입니다.)
마태오는 자기를 불러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의 동료들 입장에서는 그를 보내는 송별식 잔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잔치에 참석한 많은 세리들은 마태오의 동료들입니다.
여기서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라는 말은,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세리들이 많이 와서”로 해석됩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세리들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는 세리들도 당신의 양들이었고,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
그 잔치를 목격한 바리사이들이 시비를 걸고 있는데, 그들이 한 말의 뜻은,
“세리들 같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니
당신네 스승도 죄인이다.”입니다.
이 말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마태 11,18-19).”
바리사이들의 말은 예수님께서 세리들하고만 식사를 하신다는 비난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과 어울리신다는 비난인데,
예수님이 정말로 예언자이고 스승이라면 그러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2-13)”
예수님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다.”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니, 모든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여기서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병든 상태에 있기 때문에
내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내가 병든 이들을 만난다고 시비를 걸고 있는 너희는 건강하냐?”
라는 질문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세리들만 병든 이들이 아니라 바리사이들도 병든 이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도 만나셨고,
바리사이들하고도 식사를 함께 하셨습니다(루카 11,37).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너희가 서로 도와서 함께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낙인찍지 말고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동반자로서 서로 사랑을 실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지금 바리사이들의 태도는 자기 눈 속에 들보가 있다는 것은 부정하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문제 삼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마태 7,1-5).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씀은,
‘죄인만’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이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이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는 바리사이들도 죄인들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 또는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을 만나신 것은
그들을 편애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바리사이들의 경우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자주 꾸짖으신 것은
그들을 싫어하셨거나 미워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셨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어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보지 않으시고 현재 상태만 보실 것이고,
참으로 회개하고 완전히 변화된 사람의 과거는 깨끗이 지워버리실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꾸 남의 과거를 들추어내서 말하지만,
하느님은 회개한 사람의 과거는 잊어버리시는 분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화끈한 사람
오늘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마태오의 성소여정은 아주 짤막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무척이나 극적이고 감동적입니다.
마태오,
오늘 복음에 표현된 대로라면 얼마나 ‘화끈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한 번 한다면 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부르심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대응합니까.
일단 멈칫합니다. 앞뒤전후를 따져봅니다.
일단 시간을 벌고 생각할 여유를 찾습니다.
“좋지요. 그렇지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부모님과 가족들과 상의하고 말씀 드릴께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저 같은 사람이!”
그러나 마태오의 태도를 눈여겨보십시오.
어떻습니까?
마태오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앞뒤 재지 않고 ‘그냥’ 일어섭니다.
손에 들어 있던 고액권들과 세금장부들을 그대로 둔 채
지체 없이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마태오의 행동 하나 하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렸는지 모릅니다.
어두웠던 지난 과거를 말끔히 청산하고 새 출발하는 그 첫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마태오는 기쁨과 감사의 잔치를 벌입니다.
이 세상과 결별하는 송별회도 겸했겠지요.
마태오는 이 송별회에 예수님과 제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료들, 세리들,
죄인들을 초대합니다.
마태오가 그들을 초대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랑하기 위해서?
친구들과의 헤어짐이 슬퍼서?
그래서 그들과 마지막으로 한 잔 하기 위해서?
절대로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친구 세리들, 죄인들도 생명과 구원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찾게 하려는 의도에서 그들을 초대한 것입니다.
마태오 한 사람의 회개는 그 날 당일로 또 다른 수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의
동반 회개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우리들과는 달라도 철저하게 다른 예수님의 관점, 사고방식을 묵상해봅니다.
마태오,
당대 사회에서 철저한 죄인이었습니다.
되 돌이킬 수 없는 민족의 반역자였습니다.
동족들의 피를 빨아먹고 자기 배를 채우던 고리대금업자였습니다.
수전노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로마의 앞잡이이자 매국노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태오를 당신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냥 제자가 아니라 최측근 제자, 후에 당신의 행적을 성실하게 기록할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그 옛날 하느님 앞에 늘 부족하고 부끄러웠던 마태오를 부르듯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잘 나서, 우리가 똑똑해서, 우리가 흠도 티도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부족해서, 안쓰러워서, 죄인이어서, 병자여서, 답답해서, 안타까워서 부르십니다.
오늘도 부족한 저희를 생명에로 부르신 자비의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부족한 우리를 도구삼아 당신 구원사업을 계속하시는 은총의 하느님,
영광 받으소서.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나"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오늘 독서 중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럼 ‘나’에게는 어떤 은사를 주셨을까요?
‘잘 모르겠는데요.’ 하고 대답하실 분들이 많을 거 같은데요.
그분들에게 다음의 글이 조금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송길원 교수의 글인데요.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나와 아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오른손잡이 인데, 아내는 왼손잡이다.
그래서 습관에 따라, 국그릇을 왼쪽에다 잘 갖다 놓는다.
별거 아닐 것 같은 그 차이가, 신경을 건드린다.
거기다 나는 종달새 형이다.
새벽 시간에 일어나 설친다.
늦잠을 자면, 무조건 게으르다고 여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올빼미 형이다.
밤새 부엉부엉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든다.
도대체 맞는 구석이 없다.
나는 물 한 컵을 마셔도, 마신 컵은 즉시 씻어 둔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언제 해도 할 일이며 내가 다시 손을 댈지 모를 일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게 안 된다.
찬장에서 꺼내 쓸 그릇이 없을 때까지, 꺼내 쓰다가 한꺼번에 씻고, 몸살이 난다.
나는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떠나야 할 시간에」 화장한다고 정신이 없다.
다가가서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화장품 뚜껑이라는 뚜껑은, 다 열어 놓고 있다.
나는 그게 안 참아진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낸다.
“아니, 이렇게 두고 외출했다 돌아오면 향 다 날아갈 것 아냐,
뭐 땜에 비싼 돈 주고 화장품을 사, 차라리 맹물을 찍어 바르지.”
거기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거의 없다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성경책까지 들이밀었다.
“여보, 예수님이 부활만 하시면 됐지, 뭐 때문에 그 바쁜 와중에,
수의인 세마포와 머리를 싼 수건을 개켜 놓고 나오셨겠어?
당신같이 정리정돈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정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으셨던 거야.
그게 부활의 첫 메시지야.
당신 부활 믿어. 부활 믿냐고?”
그렇게 아내를 다그치고 몰아세울 때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야, 이 자식아! 잘하는 네가 해라.
이놈아 네 부인이 안 되니까, 너를「붙여 놓은 것」아니냐! ”
너무 큰 충격이었다.
그렇게 나 자신의 생각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이 늘상 궁금해 하는 게 있다.
하느님이 주신 나의 은사는 무얼까?
하지만 뜻밖에도 너무 간단하게 은사를 알 수 있다.
'내 속에서 생겨나는 상대방에 대한 불평과 불만,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은사인 것이다.'
일테면, 내 아내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종이 나부랭이가 나뒹구는데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편한 게 없다.
오히려 밟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나는 금방 불편해진다.
화가 치민다.
이 말은 내가 아내보다 정리정돈에 탁월한 은사가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은 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 상대방의 마음을 박박 긁어 놓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 사용하라는데 있지 않다.
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섬기라고」주신 선물이다.
바로 그 때,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 아내한테는, 화장품 뚜껑 여는 은사가 있고
나에게는, 그 뚜껑 닫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아내를 대하는 내 태도가 바뀌었다.
아내가 화장한다고 앉아 있으면, 내가 다가가 물었다
"여보, 이거 다 썼어? 그러면 뚜껑 닫아도 되지. 이거는? 그래, 그럼 이것도 닫는다."
이제는 내가, 뚜껑을 다 닫아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렇게 야단을 칠 때는 전혀 꿈쩍도 않던 아내가,
서서히 변해 가는 것이다.
잘 닫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세게 잠갔던지,
이제는 날 더러 뚜껑 좀 열어달라고 한다.
내가 먼저 변하니 이렇게 아내가 변할 줄이야 미처 몰랐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기도가 있다.
제가 젊었을 때는 하느님에게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중년이 되었을 때 내 가족과 친구들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늙어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저의 우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기도는 저를 변화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더라면
제 인생은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나’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인천교구 밤송이(김기현 요한) 신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사가 아니라 자비다”[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55
9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시오” 하고 부르셨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 나섰다. 10 예수께서 집에서 음식을 드실 때 세리들과 죄인들도 많이 따라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게 되었다. 11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2 예수께서 이 말을 듣고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합니다. 13 여러분은 가서 배우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사가 아니요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나는 의로운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았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 9,9-13)
마태오를 부르심, 식사에서 바리사리파의 질문, 예수의 답변이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단락이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2,13-17을 마태오는 크게 줄였다. “레위” 대신 “마태오”라는 이름, “바리사이파 율법학자” 대신 “바리사이파”로 바뀌었다. 세리(稅吏, 세금 공무원)와 죄인들이 예수께 다가오고 호세아서 6,6 인용이 덧붙여졌다.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의 구도는 마태오 복음서 4,18 이하와 일치한다(예수는 길을 걷다가 일상적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부르고 그 이름이 기록된다). 국경 마을 가파르나움에 세관 위치는 어울린다. 생선에도 관세가 붙었기에 세리들은 어부들에게 알려진 사람일 수 있다. 세금 걷는 과정에서 부패와 율법의 깨끗함 규정을 지키지 않았던 세리는 공식적으로 죄인이라 불렸다.
▲ ‘예수께서 세관을 떠나도록 마태오를 부르시다’, 산데르스 반 헤메센의 작품(1540년)
예수께 부르심 받은 사람은―마르코 복음처럼 레위로 나타나지 않고― 마태오로 등장한다. 마태오는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이다(2열왕 24,17; 느헤 8,4). 초대교회부터 같은 사람에게 두 이름이 붙여졌다는 해설이 많았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두 아람어 이름이 붙은 사례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12 제자 명단에 레위는 없으므로 마태오로 바꾼 것이라는 해설이 요즘 우세하다. 즉, 레위와 마태오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 마태오 공동체에 마태오라는 사람이 알려졌기에 그렇게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닐까. 마태오 복음에서 마테타이(mathetai)는 예수의 제자를 가리키는 데 65번, 12 제자를 가리키는데 9번 사용되었다. 마태오는 제자 개념을 폭넓게 생각한 것이다.
식사는 누구 집에서 열렸나. 세리가 초대한 식사(루카 5,29)라고 루카는 분명히 밝힌다. 우리말 공동번역 신약성서에는 “마태오의 집에서”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그 집이 예수의 집인지, 베드로의 집인지, 다른 사람의 집인지 마태오 복음에서 분명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죄인들이 예수께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초대자의 호의로 열리는 식사는 보통 종교적 색채를 지니는 자리다. 그런 식사에 죄인들은 초대되거나 참석할 수 없다. 가파르나움처럼 작은 마을에서 그런 식사는 사람들 눈에 금방 보이겠다.
그러나 예수는 죄인들과 같이 먹고 마신다.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는 율법 규정을 무시하고 다니는 셈이다. 그러니 유다교 지배층에게 예수는 미움의 대상이겠다. 유다교 지배층에게 예수가 미움 받는 두 가지 주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죄인들과 어울림, 둘째, 죄 사함.
바라사이파는 예수의 제자들에게 질문하는데 답변에 예수가 나선다. 바리사이파는 마태오 복음에서 처음으로 여기에서 예수의 적대자로 등장한다. 그리스 문화에 널리 퍼졌던 ‘의사’ 비유를 예수도 알고 있나 보다. 율법 규정을 지키지 못하고 부자들에게 가깝다는 이유로 의사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특정한 직업에 대한 선입견은 그리스도교 정신과 거리가 멀다. 자녀와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애쓰는 대부분 직업은 이미 ‘성직’이다. 성직은 종교적 직분에만 해당되는 단어가 아니다. 하느님을 의사로 표현한 구절도 있다(예레 8,2).
예수 말씀에서 의사가 아닌 병자가 주어로 등장하는 사실이 특히 중요하다. 병자는 객체로, 대상으로 취급당한 것이 아니라 당당히 주체로 존중되었다. ‘이웃’에 대한 예수의 말씀에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남을 그저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주체로 여기는 태도가 우리에게 중요하다.
“가서 배우시오”는 랍비 교육지침 중 하나다. “희생제사가 아니라 자비”(호세 6,6)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 드리지 못함을 슬퍼하는 제자들을 위로하는 데 유다교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와 다른 의도로 호세아서 6,6을 인용하였다. 예수는 아주 강력한 종교비판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세상 모든 종교가 깊이 새겨도 좋은 말씀이다. 어느 종교에서나 종교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종교의식을 강조하려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 비추어 예수는 특별히 종교적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마태오 복음서 9,1-17에서 유다교 여러 그룹과 예수의 차이와 갈등이 드러난다. 율법학자들과 갈등, 바리사이파와 갈등, 세례자 요한 그룹과 갈등―세 가지 장면이 9,1-17에 차례로 소개된다. 그들과 다른 점에서 예수의 독창적인 면모가 점차 드러난다.
오늘의 단락에서 마태오는 제자를 부르심과 죄인들과의 식사를 곧바로 연결시켰다. 예수를 따름은 죄인들에 대한 태도 변화를 즉시 요구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 신자 여부는 사회적 약자와 죄인을 바라보는 자세와 행동에서 폭로된다. 겉으로 아주 종교적 인간으로 보이는 사람이 사랑과 정의에서 거리가 먼 사람일 수도 있다. 종교적 직책을 맡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마음으로 경멸하고 무시할 수도 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해 교육용으로 만든 규칙들이 절대화되면 오히려 그런 규칙들이 사랑과 정의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변할 수 있다. 어떤 종교적 규칙도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진 않는다. 아무리 매일 미사와 새벽기도에 열심히 참석한다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거나 무시한다면 이미 헛짓이다. 목적과 방편을 구분하는 분별력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종교에서도 겉모습보다 속마음이 중요하다. “왜 당신네 신부와 목사는 부자와 어울려 식사를 합니까?”―그런 핀잔을 흔히 듣는 오늘이다. “왜 당신네 목사와 신부는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합니까?”―그런 소리를 자주 듣는 세상이 어서 오길 빈다.
사족 : 오늘 본 9장 9절을 근거로 세리 마태오가 마태오 복음서 저자라는 주장이 초대교회부터 있었다. 그렇다면 마태오 복음 저자는 예수를 직접 목격하고 같이 다녔다는 셈이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이 마르코 복음을 대본으로 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그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마태오 복음 저자가 누군지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이 옳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