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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복음 묵상

[복음]그러면 여러분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171213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7.12.13|조회수191 목록 댓글 0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vangelio de Hoy


En aquel tiempo, respondiendo Jesús, dijo: «Venid a mí todos los que estáis fatigados y sobrecargados, y yo os daré descanso. Tomad sobre vosotros mi yugo, y aprended de mí, que soy manso y humilde de corazón; y hallaréis descanso para vuestras almas. Porque mi yugo es suave y mi carga ligera».


«Mi yugo es suave y mi carga ligera»

P. Jacques PHILIPPE 

(Cordes sur Ciel, Francia)

Hoy, Jesús nos conduce al reposo en Dios. Él es, ciertamente, un Padre exigente, porque nos ama y nos invita a darle todo, pero no es un verdugo. Cuando nos exige algo es para hacernos crecer en su amor. El único mandato es el de amar. Se puede sufrir por amor, pero también se puede gozar y descansar por amor…


La docilidad a Dios libera y ensancha el corazón. Por eso, Jesús, que nos invita a renunciar a nosotros mismos para tomar nuestra cruz y seguirle, nos dice: «Mi yugo es suave y mi carga ligera» (Mt 11,30). Aunque en ocasiones nos cuesta obedecer la voluntad de Dios, cumplirla con amor acaba por llenarnos de gozo: «Haz que vaya por la senda de tus mandamientos, pues en ella me complazco» (Sal 119,35).


Me gustaría contar un hecho. A veces, cuando después de un día bastante agotador me voy a dormir, percibo una ligera sensación interior que me dice: —¿No entrarías un momento en la capilla para hacerme compañía? Tras algunos instantes de desconcierto y resistencia, termino por consentir y pasar unos momentos con Jesús. Después, me voy a dormir en paz y tan contento, y al día siguiente no me despierto más cansado que de costumbre. 


No obstante, a veces me sucede lo contrario. Ante un problema grave que me preocupa, me digo: —Esta noche rezaré durante una hora en la capilla para que se resuelva. Y al dirigirme a dicha capilla, una voz me dice en el fondo de mi corazón: —¿Sabes?, me complacería más que te fueras a acostar inmediatamente y confiaras en mí; yo me ocupo de tu problema. Y recordando mi feliz condición de "servidor inútil", me voy a dormir en paz, abandonando todo en las manos del Señor…


Todo ello viene a decir que la voluntad de Dios está donde existe el máximo amor, pero no forzosamente donde esté el máximo sufrimiento… ¡Hay más amor en descansar gracias a la confianza que en angustiarse por la inquietud!


♣ 내 짐을 함께 져주시는 주님 ♣ 


 

이사야 예언자는 유배의 시련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이사 40,26),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으며,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40,28-29)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가고, 뛰어도 지칠 줄 모르며,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 40,31) 이처럼 이사야는 비참한 유배생활에서 해방시켜주시고 빛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주님을 굳건히 믿고 그분께 다가감으로써 고난과 역경 중에도 안식을 얻을 수 있음을 알려준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져주시러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이르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11,28) 예수 시대에 사랑의 법은 율법은 인간을 구속하는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짐을 덜어주어야 할 율법과 종교지도자들이 오히려 짐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들의 탐욕과 교만은 차별과 소외를 조장하는 잘못된 법과 제도를 만들어냈습니다. 


백성들은 각자의 무거운 짐에 더해 이러한 굴레들로 더욱 짓눌렸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실존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 나에게로 오너라”(11,28) 하십니다. 당신에게 오기만 하면 그 짐을 ‘함께’ 져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선물하러 오신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그분께 다가간다는 것은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이신 예수님께 다가가서 함께함이 곧 ‘안식’(11,28. 29)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수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그 무게를 견뎌내고 인생의 짐을 질 수 있는 힘은 나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짐을 질 때 인생 십자가의 무게는 훨씬 가벼워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신 분께서 사랑으로 내 십자가를 함께 져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11,29) 우리는 ‘하느님의 법’(예레 2,20; 호세 10,11)인 멍에를 짐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인 우리는 멍에를 피하려고 하지 말아야겠지요. 오히려 말씀을 실행하고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어떤 처지에서도 우리의 힘과 희망이 되어주시는 주님을 굳게 믿어야겠습니다. 그 믿음의 바탕 위에서 삶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이신 분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받아들여 감당해야 할 멍에를 회피해선 안 되겠지요. 매순간 주어지는 신앙의 멍에, 고통의 멍에, 절망과 불의의 멍에를 유연한 사고, 열린 마음, 관대한 태도, 사랑으로 견뎌냄으로써 행복의 길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희망>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여기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이라는 말씀은,

온갖 억압을 받으면서 자유와 평화를 잃어버린

인간들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좁은 뜻으로는 유대교의 율법들 때문에 허덕이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넓은 뜻으로는 인간의 인생 자체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코헬렛’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그렇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쉴 줄을 모르니

이 또한 허무이다(코헬 2,22-23).”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

이 또한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것임을 나는 보았다.

그분을 떠나서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으랴?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인간에게 지혜와 지식과 즐거움을 내리시고

죄인에게는 모으고 쌓는 일을 주시어

결국 당신 마음에 드는 이에게 넘기도록 하신다.

이 또한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이다(코헬 2,24-26).”

하느님 없이 사는 사람의 인생은 허무일 뿐이고,

의미 없는 짐이고 멍에일 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만이 우리를 ‘허무’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수 있고,

우리를 온갖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음을 뜻합니다.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은, “나의 제자가 되어라.”,

즉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멍에’ 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과 계명 등을 가리키는,

일종의 반어법적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결코 멍에가 아닙니다.

‘사랑’이고,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한 열쇠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사랑’이 멍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계명들도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들을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 자유, 생명, 평화, 안식을 얻기 위한 노력이고,

동시에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니까 기쁨으로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도 반어법적 표현입니다.

이 말씀을 뜻에 따라서 다시 풀이하면,

“내 멍에는 너희의 멍에를 벗겨주는 ‘편안함’이고,

내 짐은 너희를 짐에서 해방시켜 주는 ‘가벼움’이다.”입니다.

즉 “나를 믿고 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

너희는 멍에에서 벗어나서 편안해질 것이고, 짐에서 해방될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대속’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내가 너희에게 편안함을 주기 위해서 너희의 멍에를 대신 메겠다.

너희를 짐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너희의 짐을 내가 대신 지겠다.”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덕분에 우리가 죄에서 구원되었고,

예수님의 죽음 덕분에 우리가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

바로 온갖 억압들과 고통들에서 해방되는가?

우리는 인생살이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해도 여전히 인생은 어렵고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가시덤불이 우리의 현실을 잘 나타냅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예수님의 가르침을 몰라서 숨이 막히는 것이 아니라,

알지만 인생살이의 어려움들이 너무 무거워서 숨이 막힙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베드로 1서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1베드 1,13).”

무엇을 희망하느냐에 따라서 고난을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가 달라집니다.

헛된 것에 희망을 두면 온갖 유혹과 고난에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것을 희망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도 굴하지 않고 나아가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믿음도 필요하고 사랑도 필요한데,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올바른 희망에서 올바른 신앙 여정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한국 사회의 노령화 현상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그에 따른 많은 어르신들의 고통도 점점 커져만 갑니다. 


잘 준비되지 않은 노년기로 인한 괴로움은 당장 저희가 모시고 있는 원로 회원들, 

그리고 부모친지들의 모습만 봐도 잘 알수 있습니다.

 

어르신들이 푸념삼아 툭툭 던지시는 말씀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왜 빨리 데려가지 않으시는지? 

지금 이렇게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럴 때 마다, ‘절대 그런 말씀 하지 마시라, 모든 것에 때가 있다, 

마음 크게 잡수시고, 보속이라 생각하시라.’ 

당부 드려도, 그도 잠시, 어느 새 똑같은 말씀들을 수시로 반복하십니다.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수도회와 수녀회들도 노령화로 인한 다양한 도전들이 만만치 않기에, 

나름 대처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하고 계십니다.

 

최근 살레시오 수녀회 양성부에서는 수도자들의 노년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오랜 연구 끝에, 

참으로 의미있는 결과물을 도출했습니다.


 ‘한 세대가 다른 세대에게 이야기를 전하다’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간했는데, 

노년기 수도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노인은 짐이나 문제가 아니라 아주 풍요로운 자원입니다. 

노년기는 인간 실존을 냉혹하게 표현하는 인생의 종착점이 아니라, 

집중적으로 살아야 할 단계이며, 

영적 성장을 위한 좋은 시기요, 기회로 여기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살아온 대로 늙어갑니다. 

성숙하고 충만하고 행복한 노년기는 젊은 시절부터 준비해가야 합니다.”


“노년기를 원의와 욕구가 충족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게 사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십시오. 

노인들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현존을 가치화 하십시오. 

점점 없어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보다, 

더 중요한 것, 불변하고 결정적인 가치들과 임무를 간직하면서, 

자신의 품위를 새롭게 하는 능력을 기르십시오.”

 

“노인들의 마지막 적은 고통이나 병고, 혹은 장애가 아닙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의미의 부재입니다. 

노인들에게 진정 두려운 것은 자신이 쓸모 없는 사람, 

보탬이 되지 않는 사람, 의미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자각입니다.

 

보십시오. 

노년기는 기울어져 가는 시기, 소멸되어 가는 시기가 절대로 아닙니다. 

노년기에 접어들었을 때, 자주 우리가 느끼는 유혹, 

삶이 짐이요, 족쇄요, 고통으로 느껴질 때 마다, 더 집중적으로 노력할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삶, 인생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 추구입니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모든 날들, 모든 순간들은 

단 한 순간도 예외없이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꼭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겠습니다. 


내 삶은 소중하다는 것, 

내 인생은 가치가 있다는 것, 

나는 존재 자체로 존귀하다는 것.


그래서 중요한 것이 신앙 안에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주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자녀임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양 어깨에 짊어져야 할 가장 크고 무거운 멍에 

노년과 죽음, 생각할수록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안에 머무를 때, 

그 무거운 멍에도 잠자리나 나비 날개처럼 가벼워질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세상을 쉽게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쉽게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어려움과 근심, 걱정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이 제일 어렵고 자기 혼자만 힘든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가 나름대로 살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 때뿐이지만 삶의 걱정을 잊어보려고 술을 많이 마시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각박한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괴상한 종교에 심취하기도 하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삶의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스스로의 생명을 끊어버리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고 어려운 현실은 그대로이고 오히려 더 큰 실망과 좌절을 겪게 될 뿐이다. 

잘못된 길로 계속 가게 되면 더 큰 수렁에 빠지게 된다. 

 

사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도 마찬가지로 삶의 어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신앙인이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렵지만 가야 하는 그 길로 가야한다. 

현실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삶의 현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마지못해 사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삶을 가꾸어 나가야 한다. 

 

또 신앙인은 허상을 쫓아 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 

좌절과 실패도 겪게되지만 그런 것까지도 이겨내고 매일 매일을 힘차게 살아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가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이다. 

신앙인이 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배워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멍에’를 메는 것을 배워야 한다. 

사랑의 멍에를 지지 않고서는 우리의 삶의 어려움과 근심,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모습을 통해서, 

당신의 온 삶을 통해서 삶을 무게를 덜고 좀더 가볍고 기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삶의 어려움,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지워주시는 사랑의 멍에를 지고 살면 

나도 모르게 훨씬 편안해 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대구대교구 손현기 모세 신부 


성직자가 권력 틀어쥔 교회,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71
  • 김근수
  • 승인 2013.09.27 12:07

25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어린이 같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27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외에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 외에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 오십시오. 내가 편히 쉬게 하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부드럽고 겸손합니다. 29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마태 11,25-30)

  
▲ ‘베타니아의 예수’, 제임스 티소의 작품(1894년)
복음서에서 가장 많이 토론되는 구절 중 하나인 오늘의 단락은 해석하기 쉽지 않다. 세 부분으로 구성된 단락은 각기 그 청취자가 다르다. 첫 부분(25-)은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찬양, 두 번째 부분(27)은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예수의 설명, 그리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 대한 초대 말씀으로 셋째 부분(28-30)이 이어진다. 이 세대와 갈릴래아 마을에 대한 저주 말씀에 이어 예수를 따르는 사람을 위로하는 긍정적인 분위기의 단락이다.

25절은 예수의 답변으로 시작된다. 답변은 유다교 랍비들이 즐겨 쓰는 교육 방법이다. 예수의 기도는 동시에 가르침이다.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기도는 보통 미래시제 동사로 나타나는데 오늘 예수의 기도에는 현재시제가 쓰였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란 표현은 공동성서에 없다. 공동성서에는 주로 ‘세상의 하느님’이 쓰인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예수 기도의 특징이다. 예수가 가부장적인 취향을 가졌다기보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당시 사회에서 주는 이미지를 채택한 것이다. 하느님을 ‘어머니’라 불러도 된다. 현재 가톨릭교회의 남성우월주의 풍조는 역사의 예수와 아무 관계없다.

27절은 초대교회부터 오늘까지 삼위일체 교리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어 왔다. 초대교회 신학자[敎父]들은 하느님 곁에 예수가 이미 존재한다고 해설하였다. 그러나 27절이 예수가 진짜 하신 말씀으로 더 이상 여겨지지 않는 오늘, 마태오 복음서 11,25-27에 대한 그런 해설은 성서학계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그 구절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하느님을 알려면 먼저 예수를 알라는 뜻이다. ‘하느님은 이러이러하다’고 미리 정해놓고 예수를 바라보지 말고, 먼저 예수를 살피고 나서 ‘아하, 하느님은 이런 분이시구나’를 깨달으라는 뜻이다. 하느님이 누구신지 예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는 신론에 대한 대중강연을 하지 않았지만 예수의 삶 전체가 곧 신론에 대한 강의다. 신관을 미리 정해 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그리스도교를 살피는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이겠다.

28-30절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향한다. 예수는 부드럽고 겸손한 분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접촉하였고 스스로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신 분이다. 그런 예수에게 배우라는 초대 말씀이다.

28절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이 곧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세상살이에 헤매는 사람을 위로하는 말로 요즘 자주 쓰이긴 한다. 그 구절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을 우선 가리킨다. 십자가라는 멍에는 사실 가볍지 않다. 예수라고 그것을 모를까. 그러나 진정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예수 안에서 느끼는 짐이 가볍기만 하다.

지혜로운 사람을 하느님이 뽑지 않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어린이 같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심에 예수는 감사드린다. ‘지혜로운 사람’은 문맥과 상황에 따라 유다교에서 묵시 그룹, 에세느파, 특히 율법학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단어는 평범한 사람들과 대조되는 특별한 신분과 그룹, 즉 종교귀족을 가리키는 명사로 굳어졌다.

그와 반대되는 단어인 네피오스(nepios)에는 ‘어린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다. 공동성서(구약성서)에 나오는 ‘땅에서 버림받은 사람들’(am ha arez)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여인들, 갈릴래아 사람들, 가난한 시골 사람들 등 시간과 돈이 없어서 유다교 종교지식에 가까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예수는 의식하였다. 무식한 사람들이 진리를 알게 되었고 지식인들은 무식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예수의 감사기도는 두 가지 점에서 놀랍다. 첫째, 어리석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나타나신다. 둘째, 예수는 자신을 어리석은 사람들에 포함시키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을 바보라고 했었다. 랍비에게서 번듯한 교육과정도 받지 못하고, 성직자도 신학자도 아닌 유다교 평신도로 살던 예수다. 예수는 종교 엘리트주의에 반대하고 성직자 중심주의를 알지 못하는 분이다. 종교인과 신학자들에게 충격적인 오늘의 말씀이다. 여기서 <슬픈 예수 1>에서 다룬 문제 하나를 소개하겠다.

그리스도교에서 지식과 정보의 유통과정을 살펴보자.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빈, 라너, 바르트 등 1급 신학자가 있다. 그들을 연구하는 독일, 로마, 미국의 신학대학 교수―나라마다 수준 차이가 있지만―를 2급 신학자로 분류하자. 그들에게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온 신학교 교수들을 3급 신학자라 하자. 그들에게 배워 교회와 성당에서 수고하는 목사, 신부를 4급으로 치자. 4급에게 혼나고 사는 우리 신자를 편의상 5급이라 하자.

사실 4급과 1급의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다. 2급과 4급은 프로와 아마추어 차이다. 대부분 성직자인 3급, 4급들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지식과 정보와 권력을 거의 독점하고 통제하고 있다. 대형교회 목사가 거의 모든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도 큰 문제다. 정보와 권력의 이러한 독점 구조가 바람직하게 변하지 않는다면 신자들이 성서 공부를 제대로 받을 가능성은 앞으로도 별로 없다.

물론 신심과 신학 지식이 정비례하지도 않는다. 신학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꼭 권력을 쥐고 있어야 할까? 오늘 그리스도교의 심각한 문제다. 바울 같은 인물이 오늘의 그리스도교에 등장하기는 구조적으로 어렵다.

교회 내 부끄러운 풍조인 반(反)지성주의를 선동하는 단락이 아니다. 생각하며 사는 신자들을 성직자들이 면박하기 좋을 구절도 아니다. 지적 노력에 게으른 성직자들에게 주는 알리바이용 말씀도 아니다. 성서 공부와 설교에 게으른 설교자를 두둔하는 말씀도 아니다. 세상의 버림받은 사람에게 먼저 손길을 건네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단락이다.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는 종교 지배층을 비판하는 말씀이다. 신학자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숙연한 오늘의 말씀이다. 겸손하지 못한 신학자는 아직 신학자가 아니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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