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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복음 묵상

[복음]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180318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8.03.18|조회수357 목록 댓글 0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0-33

20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21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22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27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29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3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31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3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33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había algunos griegos de los que subían a adorar en la fiesta. Éstos se dirigieron a Felipe, el de Betsaida de Galilea, y le rogaron: «Señor, queremos ver a Jesús». Felipe fue a decírselo a Andrés; Andrés y Felipe fueron a decírselo a Jesús. Él les respondió: «Ha llegado la hora de que sea glorificado el Hijo de hombre. En verdad, en verdad os digo: si el grano de trigo no cae en tierra y muere, queda él solo; pero si muere, da mucho fruto. El que ama su vida, la pierde; y el que odia su vida en este mundo, la guardará para una vida eterna. Si alguno me sirve, que me siga, y donde yo esté, allí estará también mi servidor. Si alguno me sirve, el Padre le honrará. 


»Ahora mi alma está turbada. Y ¿que voy a decir? ¡Padre, líbrame de esta hora! Pero ¡si he llegado a esta hora para esto! Padre, glorifica tu Nombre». Vino entonces una voz del cielo: «Le he glorificado y de nuevo le glorificaré». La gente que estaba allí y lo oyó decía que había sido un trueno. Otros decían: «Le ha hablado un ángel». Jesús respondió: «No ha venido esta voz por mí, sino por vosotros. Ahora es el juicio de este mundo; ahora el Príncipe de este mundo será echado fuera. Y yo cuando sea levantado de la tierra, atraeré a todos hacia mí». Decía esto para significar de qué muerte iba a morir.


♣ 내가 죽어 모두를 살리는 거룩한 삶 ♣



축제 때에 유다교로 개종한 그리스 사람 몇이, 예배를 드리러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던 그들은 필립보에게 다가가, 예수님을 "뵙고 싶다고" 청합니다. 그들은 그저 그분의 얼굴을 보고 인사를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신비를 알려는 갈망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갈망을 채워주시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12,23) 곧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영광에 이를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자발적인 십자가 죽음으로 이르게 되는 영광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12,24-25)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남김없이 봉헌하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요약하여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참 생명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영성생활의 목표는 거룩하신 하느님처럼 거룩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문제나 이웃의 아픔을 외면한 채 내적 고요와 평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내적 일치와 더불어 철저한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유보하는 거룩한 삶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듯이’(히브 5,8) ‘겪어냄’과 ‘내어놓음’, 곧 인내와 희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시간이나 재물 일부를 떼어 다른 이를 위해 내놓는 것만으로는 결코 '예수님의 영광의 때'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기꺼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모두를 내놓음으로써 남을 살리는 사람을 존중해주시며, 그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실 것입니다(12,25.26).


이런 삶은 사랑 때문에 내가 죽어 없어짐으로써 남을 살리는 삶이기에 매우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 길은 가까운데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스스로 이기심을 버리고, 고집부리지 않으며, 내 뜻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는 나를 넘어 하느님과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나를 떠나 모든 사람과 피조물과 세상사를 좋음과 애정을 마음에 품고 바라보면,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이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나만 좋고 아무 일 없으면 된다는 식의 태도로는 결코 함께 행복해질 수 없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먼저 고통을 견뎌내고 힘든 일을 감당하면,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의와 차별, 그릇된 사회제도와 편견에 저항하며 사랑을 실천하셨던 예수님을 따르는, 참 섬김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십자가는 실패와 죽음의 비극이 다가온다 하여도, 묵묵히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해야겠습니다. 제 한 목숨만 귀하게 여기지 말고, 모든 이에게 항구히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모두를 행복의 나라로 이끌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늘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억압과 차별을 받는 이들, 외롭고 고통받는 이들을 '먼저', '더' 사랑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한 톨의 밀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신을 땅에 떨어뜨리는 겸손, 묻히는 의탁, 썩는 자기비움과 자아이탈이야말로 생명과 기쁨의 씨앗임을 기억하면서...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한 알 밀알이 된다는 것


 




요즘 일본에서 '밤의 선생님'으로 유명한 미즈타니 오사무 선생님의 체험을 다룬 책 


「애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를 감명 깊게 읽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던지시는 한말씀 한말씀이 제게는 너무나 감명 깊고 소중해서 


마치 착한 목자 예수님 말씀을 듣는 듯합니다. 


살아있는 돈보스코 음성을 듣는 듯합니다. 


 


"교사 생활 21년 동안 꼭 한가지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것이 있다. 


그건 바로 한 번도 학생을 야단치거나, 때린 일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학생들을 절대 야단치지 않는다. 


아이들은 모두 '꽃을 피우는 씨앗'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처 꽃피우지 못한 씨앗들을 만나기 위해 나는 오랫동안 밤거리에서 살았다. 


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들 옆에 있고 싶었다."


 


고된 하루 일과가 끝나면 미즈타니 선생님은 어김없이 밤거리로 나섭니다. 


선생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가 보기에 밤거리를 헤매는 아이들도 역시 사랑스런 아이들이다. 


따스한 태양빛이 비추는 밝은 세계에 사는 어른들이 매정하게도 그 아이들을 


더욱 어두운 밤의 세계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상처를 입고 슬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매일 내 사랑스런 아이들이 있는 밤거리로 들어서고 매일 그들을 만나고 있다."


 


한 아이가 선생님께 묻습니다. 



"미즈타니 선생님,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제일 많이 하는 말씀이 뭔지 아세요?" 


"몰라, 그게 뭔데?" 


"'괜찮아!'예요. 선생님의 그 '괜찮아' 때문에 우리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잖아요. 


선생님의 '괜찮아!' 때문에 저희가 구원받았어요." 


 


경찰에 붙잡혀 있을 때 선생님께서 면회오시자마자 뭐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뭐라고 했는데?" 


"'괜찮다. 할 수 없지. 이미 저지른 일인데' 


저희에겐 그 한 말씀이 정말 컸지요."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왜 그랬니?' 라고 다그치기보다


 '괜찮아!' 하고 던진 그 말 한 마디는 수많은 밤거리 아이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오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약물이나 폭력에서 아이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조직 폭력단 사무실까지도 


스스럼없이 찾아가십니다. 


급기야 선생님은 조직폭력배들에게서 한 아이를 빼내려고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내야만 했습니다.


 '한알 밀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생님은 온 몸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머지않아 세상과 인류 구원을 위해 


기꺼이 땅에 떨어져 죽는 한알 밀알이 될 것임을 암시하십니다. 


또한 우리도 당신 모범을 따라 자기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라고 초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사제서품을 준비하던 피정 때 두고두고 묵상하던 시(詩)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김용석 시인의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입니다. 


  


"나는 꽃이에요. 잎은 나무에게 주고 꽃은 솔방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보냈어요. 


그래도 난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거예요. 가을이 오면."


 


사제서품식 핵심에 후보자들이 바닥에 엎드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몸짓이지요.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을 위해 자신을 남김없이 내어놓는 꽃처럼 살겠다는 다짐의 표현입니다. 


더 많은 결실을 위해 기꺼이 땅에 떨어져 죽는 한알 밀알이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겠다는 맹세입니다. 


교회 공동체 가장 밑바닥에 서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겠다는 공적 약속입니다. 


 


'밤거리'라는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상처 입은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한알 밀알이 되신 미즈타니 선생님의 삶, 


그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그저 아이들이 좋아서, 한 아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고달픈 몸을 이끌고 위험한 밤거리를 떠도는 미즈타니 선생님의 삶, 


남아있는 제 사제생활의 이정표로 삼고 싶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 인생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일까요? 


자신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때입니다. 


나와 남이 하나가 될 때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웃을 향할 때입니다. 


사심 없이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 때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땅에 떨어져 죽는 한알 밀알이 될 때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미국 남북 전쟁이 있을 때의 일입니다. 


북군에서 전쟁에 나갈 군인을 징발할 때에 전쟁에 나갈 만한 사람들을 제비 뽑았는데 


설상가상으로 가족도 많고 부모도 계시고 전쟁에 나가면 


그 가족을 전혀 부양할 사람이 없는 사람이 그만 제비에 뽑혀서 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그 친구 가운데, 


부모도 안 계시고 아직 결혼도 하지 아니한 젊은이가 있다가 


대신 자원해서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그 징발하는 책임자에게 말하니까 


그도 감격해서 대신 그 젊은이로 하여금 전쟁터에 나가도록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자기 동네에서 자기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이 사람이 


자기 대신 나간 사람에 대한 감격이 얼마나 깊었던 가는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신문을 보면 얼른 전쟁 뉴스부터 먼저 보고 특별히 어떤 곳에 격전이 있다고 하면 


거기 혹 자기 친구가 들지 않았는가 해서 먼저 그것부터 살펴보고 


또 이따금 죽은 사람의 명단이 나게 되어도 행여 자기 친구가 전사하지 않았나 


제일 먼저 그것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 한 번은 큰 격전이 있게 되었는데 


그만 자기 친구가 그 격전 가운데서 싸울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에 신문에 나는 것을 보니까 죽은 사람의 명단 가운데, 


그 사람의 이름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런 신문을 보고 이 사람이 앞이 아득했습니다. 


곧 그 싸움터에 나가서 자기 대신 죽은 그 시체를 친히 모셔다가 


자기 가족 공동묘지에 그 시체를 묻고 그의 이름을 쓰고 그 아래는 간단히


 “그는 나를 위하여 죽었다”라는 묘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는 나를 위하여 죽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의 운명을 미리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신은 열매 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죽음으로 맺은 열매는 무엇일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를 탄생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교회 안에 함께 머무십니다. 


 


교회 안에 당신 무덤을 만드시기 위해 교회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런 삶을 살라고 재촉하고 계십니다. 


 


큰 가시고기의 부정은 유명합니다. 


큰 가시고기는 둥지를 짓는 유일한 물고기라고도 합니다. 


 


암컷은 둥지에 알을 낳고 떠나갑니다. 


그러면 수컷은 알 냄새를 막기 위해 수풀과 돌들로 방어막을 칩니다. 


그리고 수천 개에 해당하는 알들을 일일이 뒤집어주고 바람을 쏘여줍니다. 


큰 가시고기는 알들에게 계속 부채질을 해 주고 알을 훔치러 온 녀석들과 싸웁니다. 


 


그래서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습니다. 


사흘이 지나면 부화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큰 가시고기는 더욱 바빠집니다. 


 


먼저 깨어난 새끼들을 돌보고 늦게 깨어나는 고기들을 위해 


계속 지느러미로 산소를 공급해줍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새 몸은 푸른색으로 변하고 지느러미는 갈라져 


더 이상 물에 뜰 수 없게 됩니다. 


 


새끼를 모두 탄생시킨 5일째 


아비 물고기는 힘이 빠져 가라앉아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면 새끼들이 아비 가시고기의 살을 먹으며 


바다로 나갈 힘을 얻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듯이, 우리 삶의 목적은 죽음입니다. 


죽음으로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아벨이 죽음으로 땅을 차지하고 카인을 쫓아냈듯이, 


땅을 차지하는 유일한 힘은 피입니다. 


 


그 땅이 곧 교회입니다. 


그 땅이 곧 가나안 땅이고 하느님나라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안으로 묻힌 것입니다. 


모세는 교회 안에 자신의 무덤을 만든 것입니다. 


하느님나라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를 더 잘 이해시키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약삭빠른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으로 자신을 맞아줄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합니다. 


주인도 칭찬해주고 예수님도 칭찬해주십니다. 


분명히 주인의 재산을 도둑질하며 친구를 사귀었는데 칭찬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부정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다 주인의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무엇을 줄 때나 하느님께 무언가를 봉헌한다고 할 때 


다 주님의 것으로 하기 때문에 의롭지 못한 재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게 되면 나중에 그들이 우리를 받아들이게 될 터인데 


그 곳이 곧 교회요 천상 예루살렘이요 하느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명을 우리를 위해 바치셨습니다. 


이는 우리 안에 당신 처소를 만들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고 그리스도는 또 우리의 성전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또 누군가가 내 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온유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뜻인 우리 자신을 이웃을 위해 내어주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만이 우리가 장차 머물게 될 땅을 차지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죽지 않으면 어떻게 자신의 살을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우리 안에 심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제주도에서 한 아파트에 불이 났을 때 


아버지가 남겨진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아무 보호 장비도 갖추지 않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아들을 구해오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 안에 영원히 살게 됩니다. 


목숨으로 자신이 갈 곳을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 곳이 없어 구천을 떠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옥입니다. 


 


전재용 선장은 바다 위에서 죽어가는 베트남 난민 96명의 생명을 구해줌으로써 


이 세상에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나중에는 그들에 의해 미국으로 초청을 받습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를 맞아주는 이들은 


우리가 친구를 맺은 이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이 결국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당신 무덤을 만드시려고 했던 것처럼, 


이웃 안에 우리의 무덤을 만드는 길만이 우리 참 구원의 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전례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가진 것으로 친구를 만듭시다. 


이것이 전례에 참여하기 위해 강도당한 이를 스쳐 지나간 이들이 얻지 못하는 


구원을 차지하는 길입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줍시다. 


그렇게 부정한 재물인 우리 생명으로 친구를 만들었을 때야만 


앞으로 우리가 머물 거처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오늘 복음 중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그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될 수 있을까..’ 


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데요. 두 가지가 필요할 거 같습니다. 


 


하나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작은 탐욕이 가져오는 결과 때문인데요.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중국을 점령하고 있을 때, 


길키라는 사람이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곳에 잡혀있던 수감자들의 배급량은 하루에 1,200칼로리에 불과할 정도로 적었습니다. 


 


빵 여섯 조각, 끊인 물이 전부였습니다. 


모든 포로들은 저체중에다 영양 부족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먹을 것 생각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미국 적십자사에서 미국인 포로 200명분, 총200개의 꾸러미를 배편으로 보냈습니다. 


미국인 포로들은 금덩이라도 발견한 기분이었습니다. 


20킬로그램의 꾸러미 하나에는 각각 분유 한 통, 버터 세 캔, 스팸 세 캔, 치즈, 초콜릿, 


설탕 한 파운드씩, 그리고 분말커피, 잼, 연어 통조림, 


그리고 말린 자두나 건포도 봉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길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주로 빵에다 고기나 기름기는 거의 없고 당분은 물론이고 


사실은 아무 맛도 없는 식사만 해왔다. 


그러다 입에 넣은 영양 만점의 기름기 많고 맛있는 음식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였다.” 


 


꾸러미 안에는 음식 외에도 아쉽기 그지 없던 옷가지가 있었습니다. 


미국인들이 모두 쓰고도 남는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분의 음식과 옷가지를 미국인보다 숫자가 훨씬 많았던 다른 국적의 수감자들에게 


관대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6개월 후, 음식은 모두 사라졌고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겨울이 찾아왔고, 수용소 내의 사기는 완전 바닥이었습니다. 


성탄절이 지나고 며칠 후, 갑자기 무슨 신기루처럼 수용소 정문 앞에 


적십자 꾸러미를 실은 당나귀 행렬이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이었습니다. 


일본군 수용소장은 꾸러미 개수를 모두 1,550개로 파악한 후, 


1450명의 포로들에게 한 꾸러미씩 분배하고, 


200명의 미국인들에게 반꾸러미씩 더 줄 수 있겠다고 계산했습니다. 


기쁨과 흥분이 수용소 내에 가득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포로들은 꾸러미를 분배할 수 없다는 공고를 읽고 경악했습니다. 


미국인 몇 사람이 수용소 측의 처분에 항의해 미국 적십자에서 보낸 선물이니 


자신들만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은 주지 말고 


미국인 포로 한 명당 7개 반씩의 꾸러미를 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진저리가 난 수용소장은 본부에 판단을 요청했고, 10일 동안 길키와 다른 미국인들은 


다른 국적 포로들의 적개심과 증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길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들 같은 이야기만 했다. 


서로가 미국인, 영국인, 백인, 흑인, 유대인, 인도인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지내던 공동체가 


갑자기 적대적인 민족 집단들로 나뉘어 싸우기 시작했다. 


놀라운 성탄절 선물이 남긴 것은 역설적이게도 땅 위의 평화와 정반대되는 상황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소중한 꾸러미가 수용소 한가운데 가만히 놓여있는 동안 


인간들의 갈등과 악의의 돌풍이 거칠게 불어 닥쳤다.】


 


 이처럼 탐욕은 공동체를 갈라놓고 싸움을 일으키고 불목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는 거 같습니다. 


그렇게 갈라져 싸우는 모습이 하느님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겠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내 안의 탐욕을 경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 된 모습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희생을 배우는 겁니다.


 


 ‘콰이강의 기적’이라는 책의 저자 고든은 스물네 살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그 때 겪은 일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고든은 일본군에게 붙잡혀 태국 정글에 건설 중이던 철로 공사 현장에 보내졌습니다. 


고든은 매일 수 천 명의 포로들과 함께 정글을 베어 길을 트고 


낮은 습지를 통과하는 철도 노반을 깔았습니다. 


 


작업장은 단테가 묘사한 지옥 그대로였습니다. 


허리에 간신히 천 하나만 두른 채, 포로들은 50도 육박하는 찌는 듯한 태양 아래서 일했습니다. 


온몸은 벌레에 물렸고 날카로운 돌멩이에 맨발이 베이고 멍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일본군 간수는 포로가 게으름을 부린다 싶으면 때려 죽이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이거나 


다른 포로들이 다 보는 앞에서 목을 잘라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과로,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어갔습니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적절한 영양 공급과 휴식, 치료를 받지 못한 8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쟁 기간 내내 수용소는 모두가 자신만을 위한 적자생존의 실험실이었습니다. 


식량배급을 받을 때 포로들은 기름기 있는 수프에 떠다니는 야채 몇 조각이나 쌀 몇 알을 놓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장교들은 그들의 특별 배급을 자기들끼리만 먹었습니다. 


숙소에서는 절도가 흔했습니다. 


 


사람들은 야수처럼 살았고, 그 때문에 그들 안에는 증오가 이글거렸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한 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한 사건이 포로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일본군 간수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면 작업 도구를 꼼꼼히 세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간수가 삽 하나가 없어졌다며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그는 포로들을 헤집고 다니면서 훔친 사람을 찾아내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자백하지 않자 그는 “다 죽인다! 다 죽인다!” 고 소리를 지르며 


줄 맨 앞에 있는 사람에게 총부리를 들이 댔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한 징집병이 앞으로 걸어 나와 차렷 자세를 취하고는 말했습니다. 


 


“내가 했습니다.”


 


화가 난 간수는 그 포로에게 덤벼들어 발로 차고 때렸고, 


그는 맞으면서도 간신히 차렷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간수는 총을 높이 치켜들어 개머리판으로 그 포로의 머리를 찍었습니다. 


포로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지만 


간수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신을 계속 걷어찼습니다. 


 


마침내 구타가 그치자, 다른 포로들은 동료의 시신을 들고 숙소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날 밤, 작업 도구의 재고 조사를 다시 했을 때, 


간수는 실수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삽은 하나도 없어지지 않았던 겁니다.


 


포로 중 한 명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는 성경 구절을 기억했습니다. 


포로들의 태도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죽어가는 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합당한 장례식을 치르고 매장을 한 뒤 각 사람의 무덤에 십자가를 꽂아 주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포로들은 서로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고든은 이런 말을 합니다.


 


“죽음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었다. 그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파괴적인 지배력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 후 포로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보람된 일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하는 토론 모임을 갖기도 하고, 


여러 가지 외국어를 공부하는 모임도 생겨났습니다. 


 


또 예술적 재능을 가진 이들은 목탄이나 다른 무엇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식물학자들은 정원을 돌보고 약초를 캐기 시작했습니다. 


또 음악가들은 대나무를 잘라 목관 악기를 만들어 관현악단이 생기기도 하고, 


작은 연주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고든의 책은 수용소에서 일어난 각 사람의 변화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변화가 얼마나 완전했는지 마침내 해방이 되었을 때 포로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던 간수들을 친절하게 대했고 


그들에게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내 눈이 주의 영광을 보네’ 참조)


 


책의 내용에서 보는 것처럼 어떤 포로의 희생적 죽음이 수용소에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기심과 두려움이 가득했던 수용소가 


사랑하고 희망하고 돌보고 자비를 베푸는 장소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죄와 죽음으로 가득 찬 세상은 변화하지 않을 것만 같고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 희생적 죽음이 세상에 만연한 죄와 죽음의 분위기를 은총과 생명의 분위기로 바꾸어 놓은거죠.


오늘 하루, 나도 예수님처럼 내가 속한 공동체의 변화를 위하여 


작은 희생을 실천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최승정 신부님이 묵상하는 글귀 중에 하나가 이런 거라고 한다. 


 


‘이 세상에 맑은 날만 있다면 


세상은 사막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한 청년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밤에는 비오고 낮에는 맑으면 되죠~”










인천교구 밤송이(김기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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