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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복음 묵상

[복음]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180724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8.07.24|조회수710 목록 댓글 0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의 참 가족>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여기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들은 나의 가족이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가족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가족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시려고 일부러 하신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이 말씀이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형제다.” 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워도,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말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부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이 두 말씀을 합해서 생각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곧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것,

또는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

또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즉 당신의 가족이 될 자격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다음 말씀을 하십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루카 13,25-27).”

사람들은 자기들이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니 자기들은 주님의 가족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신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신 사람들일 뿐입니다.

즉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고, 그래서 주님도 외면하고,

자기들끼리만 이기적으로 먹고 마신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주님 앞에서’ 그런 짓을 했으니 그 죄가 더 큽니다.

 

또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이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으니

자기들은 주님의 신자들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구경’만 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들이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장소에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가르침을 얼마나 잘 새겨듣고 믿고 실천했는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성당에 와서 앉아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온 마음으로 함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집 안에 있다고 해서 가족인 것은 아닙니다.

온 마음으로, 또 온 삶으로 함께할 때, 그때 비로소 참 가족이 됩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들은 주님의 가족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모른다.’ 라는 말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3).”

주님께서 “나는 너희를 모른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이미 주님을 모른다고 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신 것,

또 주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그곳에 있었다는 것 등은,

주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온 마음과 삶으로 주님과 함께할 때, 그리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할 때,

그때 비로소 주님을 안다고 말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라는 말씀은,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고,

평소에 죄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의 가족이라고 주장하지만,

‘주님의 가족’으로서 살지는 않고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생활을 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밖에’ 있는 사람은,

즉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예수님의 가족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조건으로 제시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과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방법으로 제시된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사실상 같은 일인데, 강조점은 ‘실행(실천)’에 있습니다.

믿음도, 사랑도, 말로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삶으로 실천하지는 않고 말로만 믿는다고 말하고, 말로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거짓 믿음이고, 거짓 사랑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가족의 의미



한 중학교에서 도덕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부모님을 30일 동안 칭찬하고 

일기를 써 오라고 숙제를 냈습니다. 

아이들의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칭찬은 부모님이 자신들에게 하는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부모님 볼 시간도 별로 없고, 가장 큰 문제는 아무리 뜯어봐도 

부모님에게 좋은 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는 쑥스럽게 아버지에게 다가가 

“아버지 존재 자체가 저에겐 행복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대답하십니다.

“미친놈!”

칭찬하고 욕먹었습니다.

학원에 데려다주는 어머니에게 

“엄마가 학원 보내주셔서 공부 잘 하게 됐어요. 고마워요.”라고 말합니다.

돌아오는 어머니의 대답은, 

“반에서 00등 하는 게 공부 잘 하는 거니?”

학원 도착할 때까지 잔소리를 들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몰려왔지만 

그래도 숙제이니 끝까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찰하고 또 관찰했습니다. 

관찰했더니 관심이 됐습니다.

“엄마, 오늘 예뻐 보여요!”

“정말이니?”라며 엄마는 처음 얼굴을 보는 듯 한참동안 거울을 봅니다.

“아빠 배가 넉넉하시네요.”

“허허, 배가 만물의 근원이지.”

      

아버지에게 이런 유머감각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랜 시간 함께 살지 못했던 어머니가 돌아왔습니다. 

아이가 식사 준비를 하는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엄마가 만든 음식 매일 먹으니까 좋아요.”

엄마가 웁니다.

“엄마, 왜 울어요?”

“어, 양파 때문 ... ”

나도 양파 때문에 눈물이 났습니다.

30번의 칭찬이 끝나고 아이들이 말합니다.

 “그냥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곳인 줄 알았는데, 요즘 집이 좋아요.”

“부모님을 칭찬하면서 나도 조금씩 변하게 됐어요.”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 않고, 칭찬한 나에게 ... 

‘나도 참 괜찮은 사람 같다.’ 라는 마음이 생겨요.”

[출처: ‘엄마가 울었다’, 지식채널 e]

가족이란? 

이 질문에 이 실험만큼 좋은 사례를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세상에서 떨어진 나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가족일 것입니다. 

자존감은 타인이 나에게 사랑으로 측정해 주는 가치입니다. 

그러니 가족은 사랑이 흐르는 곳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뜻입니다.

사랑이 없는 가족은 가족이 아니라 집단이나, 무리, 혹은 떼거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모기떼를 모기 가족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뭉쳐 다녀도 그 구성원들이 타인에게 자신의 피를 내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만큼 상대의 존엄성이 높아집니다. 

원숭이 ‘무리’라도 되려면 적어도 자녀를 키워내고 자신의 바나나를 나누어주며 

다른 구성원의 털도 골라줄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이 무리의 목적은 모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생존’에 있지 ‘사랑’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만이 목적인 공동체가 가족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족을 이용한다면 동물 무리만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저기에서 박해를 받으시자 

예수님의 가족들은 자신들이 입을 손해를 걱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미쳤다고 여기고 잡으러 옵니다. 

불쌍한 성모님까지 끌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설교를 하시다말고 당신 가족들이 왔다는 말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한 가족은 한 아버지가 있고 한 아버지의 뜻이 있습니다. 

한 아버지의 뜻은 한 가족이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사랑으로 당신 한 가족을 만드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이들은 모두 그분의 자녀들이 됩니다.

이제 가족은 핏줄보다 사랑의 능력으로 단결됩니다. 

예수님도 핏줄보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의 한 가족을 꿈꾸십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아니면 같은 핏줄이라도 한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 아이들이 한 것처럼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사람은 세상 모든 이들을 가족처럼 여기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가족은 두려워 할 대상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운 이유는 내가 그들에게 가족처럼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핏줄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하면 아주 많은 이들과 가족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를 나눈 가족들끼리 주고받는 사랑은 그 어떤 인간적인 사랑보다 헌신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피보다 더 진하고 피보다 더 고귀한 사랑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동지를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사랑입니다. 

 

“동지(同志)”란 말 그대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입니다. 

뜻을 같이 하는 동지야말로 우리 인생 길에 있어서 가장 든든한 벗입니다. 

만약에 뜻을 같이 나눌 동지가 한 사람도 없다면 

우리 인생은 그 얼마나 서글픈 인생이며 고독한 인생입니까? 

 

그러므로 나와 뜻을 같이 나눌 동지를 만난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런 동지를 위하여 나에게 남아있는 인생 시간표를 다 쓸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인생은 의미 있는 인생, 값진 인생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요한 15,13)

고 하셨습니다. 

피를 나눈 가족보다 뜻을 나눈 동지를 위한 사랑이 더 큰사랑입니다. 

 

육체를 흐르는 피보다 영혼을 흐르는 뜻이 더 소중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큰사랑을 바칠 동지를 가졌습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을 나눌 벗을 가졌습니까? 

 

함석헌 선생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운 때에도 

“너 뿐이야” 믿어 주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양보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예” 보다는 “아니오” 라고 가만히 머리 흔들어 진실로 충고해 주는 그 한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 에서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한 사람을 가졌습니까? 

지금 나에게 그런 벗이 없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고독해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벗을 위하여 목숨 바친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셨는데, 

저와 여러분, 우리가 바로 주님께서 그렇게 목숨 바쳐 사랑하신 주님의 벗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마태 12, 48) 라고 물으시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 12,5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주님의 동지가 됩시다. 

이제 우리는 나와 뜻을 같이 나눌 동지인 주님을 만났으니 

그것만으로도 우리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동지인 주님을 위하여 우리에게 남아있는 인생 시간표를 다 바칩시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인생은 의미 있는 인생, 값진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살다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야 할 때가 찾아오면

 “주님 사랑 내 안에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으며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았던 두 눈을 다시 뜨고 나면 우리를 한가족으로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주님을 

천국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가족이요, 주님의 벗이요, 주님의 동지들입니다.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 라고 믿어 주는 주님이 계시니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대구대교구 박윤조 안토니오 신부




나는 슬퍼하고 울부짖으며 맨발에 알몸으로 걸어 다니고

 

 

미카는 예언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때로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소개합니다. 

“나는 슬퍼하고 울부짖으며 맨발에 알몸으로 걸어다니고 승냥이처럼 슬피 울며 

타조처럼 애처롭게 울리라.”(미카서 1장 8절)

 

그도 그럴 것이 주님께서 미카 예언자에게 부여한 사명은 바로 

타락한 예루살렘의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위선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탐욕스런 부자들의 횡포를 단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네 인간 역사는 대체로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것 같습니다. 

미카 예언자의 고발 내용은 어찌 그리도 오늘 우리의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충실하시지만 인간은 언제나 불충실합니다. 

미카 예언자 시대 당시 경신례는 호화롭게 거행되었지만, 

진정한 마음의 회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거짓 예언자들과 목자들은 착한 목자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갔고, 

자기 호주머니만 생각하는 삯꾼으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부자들은 주님 두려운 줄 모르고 

가난한 백성들을 벼랑끝까지 몰고 갔습니다.

 

미카 예언자는 이런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안고 자신의 예언직을 수행하기 시작합니다. 

주님께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재물이나 권력에 더 방점을 찍는 그릇된 안전 의식, 

가식과 허위로 가득한 전례, 그분께는 눈엣가시 같은 우상숭배 행위는 

주님 주도 아래 모조리 폐기될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죄와 반역과 불충실의 대명사요 화신인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철저하게도 파괴될 것임을 외쳤습니다.

 

틈만 나면 멸망을 선포하고, 숨겨둔 죄를 고발하는 미카 예언자를 향한 

기득권 세력의 눈초리는 날카로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거대한 집단적 악과 맞서 혈혈단신 투쟁하는 미카 예언자의 모습이 참으로 외로워 보입니다. 

그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 쪽에 섰지만, 그들 앞에서도 철저하게 혼자였습니다. 

사제들과 판관들, 권력자들로부터 당한 무시와 냉대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당시 함께 활동하는 다른 예언자들 사이에서도 철저하게 왕따였습니다.

그 끔찍하고 고통스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미카 예언자는 최종적으로 희망을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는 에프라타의 보잘 것 없는 부족으로부터 시작될 새로운 부흥이 

준비되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 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서 5장 1절)

 

 다윗의 후손, 메시아 임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곳에서 탄생하실 것이며, 

철저하게 파괴될 예루살렘은 다시 한번 당당히 재건되어 

온 세상의 중심지가 될 것을 예언합니다. 

세상 모든 민족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달려와 그분을 뵙게 될 것이며, 

끝까지 주님께 충실했던 소수의 남은 자들은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임을 선포합니다.

 

미카 예언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서쪽 40킬로 지점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 

모레셋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시골 출신 농부로 살다가 예언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당시 농부들이 겪고 있던 고초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그는 농부와 목축업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부패하고 타락한 지주들과 귀족층을 신랄하게 고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신도 희년을 맞아 세상 안에 몸담고 계시는 평신도들에게 부여된 

사제직, 예언직, 왕직에 대해서 자주 생각합니다. 

사제직, 예언직, 왕직 하니, 평신도들에게 너무 거리감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너무 거창하거나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좋을 듯 합니다.

 

미사드리는 마음으로 각자에게 맡겨진 일상의 일들을 정성껏 수행해나가는 것이 

평신도들이 사제직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가정과 직장, 공동체를 ‘작은 교회’로 여긴다면 

사제직을 잘 이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찬례 중에 밀떡이 주님의 몸으로 변화되듯이, 

각자가 행하는 매일의 업무를 거룩하게 수행함을 통해 주님의 일로 변화시키는 것이 

곧 사제직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접시를 닦을 때 마치 미사 중 사제가 성작을 닦듯이, 정성껏 기도하는 마음으로 닦으면, 

사제직을 잘 수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비록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지만, 

우리 안에 주님께서 분명히 현존하고 계심을 굳게 믿는다면, 

그래서 우리 자신을 또 다른 메시아이요 왕이신 그리스도, 다시 말해서 

제2의 그리스도로 여긴다면 왕직을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상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주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품위에 걸맞게 살아간다면, 

왕직을 잘 수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지도자들, 그리고 이웃들, 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불의와 거짓을 

고발하는데 있어 편안하고 자유로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선을 위해, 이웃의 선익과 구원을 위해 용기를 낸다면, 

그래서 그들을 회개와 새 삶으로 인도하고자 노력한다면, 

충분히 예언직을 잘 수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

[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77

김근수


46 예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와 말하고 싶어 했다. 47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서 있고 선생님과 말하기를 원합니다.” 48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말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입니까? 그리고 누가 내 형제들입니까?” 49 그리고 예수께서는 당신 손을 제자들에게 내미시며 말씀하셨다. “보시오, 여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 있습니다. 50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12,46-50)

   

▲ <성가정>, 무리요(1660) 

‘집’에 대해 전에 말하지 않았기에 어디서 일어난 사건인지 알기 어렵다. “밖”이란 단어는 예수의 가족과 예수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암시한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3,31-35에서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3,21)라는 난감한 부분을 마태오는 삭제해 버렸다. 가족의 행동에 대한 예수의 반응도 놀랍지만 제자들이 느닷없이 등장한 것이 특이하다. 제자들은 12,2 이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들과 함께 예수를 찾아다닌 것 같다. 마리아의 딸들, 즉 예수의 자매들은 당시 관습에 따라 집에 머문 듯하다. 예수의 부친 요셉은 일찍 사망했다는 전승이 있다. 만일 요셉이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이 단락에 등장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십니다”(마태 23,9)라는 말씀 때문이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이나 사제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을 여전히 거리낌 없이 쓰고 있다. 베드로나 바울도 그런 호칭을 누구에게 들어본 적 없다. 추기경, 주교, 몬시뇰, 더구나 신부(神父)라는 경망스런 호칭까지. 가톨릭교회에는 호칭이 많기도 하다.

손을 내미는 행동은 도움의 손길(마태 12,13), 축복(창세 48,14), 하느님의 심판(에제키엘서, 예레미야서) 등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낸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병자에게 향하는 예수(8,30),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내미는 예수의 손길(14,31) 같은 경우가 보인다.

제자들을 가리키는 예수의 손은 제자들이 예수의 보호를 받는다는 뜻이다. 제자들은 세상 끝날까지 하느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마태 28,20). 제자는 유다교에서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를 믿는 공동체 구성원을 가리킨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가 제자들을 ‘형제, 자매,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마태 25,40; 28,10). 신앙공동체는 한 가정이다.

누가 예수의 제자인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50절에서 예수는 분명히 말한다. 하느님을 아는 것으로 부족하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부족하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교황도 신학자도 신자도 마찬가지다. 세례를 받거나 목사 안수를 받으면 마치 구원을 보장받은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천국행 티켓을 예약한 사람은 하늘 아래 아무도 없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자매들을 배려하여 예수는 자매라는 단어를 50절에 포함시켰다.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 제자들을 예수는 잊지 않은 것이다. 여성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우리 시대 기준에서 그리 파격적으로 보이지는 않겠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놀랄 만큼 개혁적이다. 당시 유다교에서 여성을 제자로 맞아들인 그룹은 오직 예수 운동뿐이다.

그러한 예수의 마음과 자세를 오늘의 가톨릭교회는 느끼고 있는가. 사회개혁에 앞장서는 일부 가톨릭 사제들이 신자를 대하는 태도나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서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남미에서 해방신학에 적극 동조하는 사람이 아내에게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사례도 많다.

예수의 ‘육신의 가족’은 이스라엘이나 유다교 회당을 가리킨다는 잘못된 해설도 교회 역사에서 있었다. ‘예수와 제자는 한 가족’이라는 오늘 단락의 긍정적 의미보다 엉뚱하게도 부정적 해석에 치우치는 경우가 교회사에서 더 많았다. 영지주의자(그노시스주의), 마르치온 추종자 등은 오늘 단락을 근거로 예수는 육신의 부모 없이 탄생했다고 주장하였다. 가족 윤리를 무시하거나 마리아 신심을 비판하는 용도로 잘못 인용되기도 하였다. 오늘의 단락을 근거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오늘 본문의 본래 의도와 거리가 먼 해석들이다. 가족 윤리를 강조하고 마리아 신심이 싹트기 시작한 초대교회에게 오늘의 단락은 적지 않게 당황스럽기는 하겠다.

내 대학 시절 수필가로 유명하던 모 교수는 어느 강연에서 47절 예수의 ‘형제’ 구절을 근거로 ‘마리아 평생 동정’을 반박하였다.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동정 교리를 생물학적으로 그는 잘못 이해한 것이다. 48절 “누가 내 어머니입니까”라는 구절을 마리아에 대한 예수의 불손한 태도로 보고서 마리아 신심을 비난하던 사례도 개신교에 적지 않다. 오늘의 단락은 마리아 신심을 논하는 자리가 전혀 아니다. 예수의 가족에게 모욕을 주려는 단락도 아니다. (예수의 형제, 자매 문제는 마태오 복음서 13,53-58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예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의 가족이라는 말씀이 오늘 단락의 유일한 주제다. 우리는 예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가 될 기회와 가능성을 지닌 위대한 존재다. “여러분은 스승 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고 여러분은 모두 형제입니다”(마태 23,8). 이 구절은 아쉽게도 가톨릭 교회론에서 외면당해 왔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세례 여부, 종교에 관계없이―은 모두 예수의 제자다.

 

 

 

김근수 (요셉)



Texto del Evangelio (Mt 12,46-50): En aquel tiempo, mientras Jesús estaba hablando a la muchedumbre, su madre y sus hermanos se presentaron fuera y trataban de hablar con Él. Alguien le dijo: «¡Oye! ahí fuera están tu madre y tus hermanos que desean hablarte». Pero Él respondió al que se lo decía: «¿Quién es mi madre y quiénes son mis hermanos?». Y, extendiendo su mano hacia sus discípulos, dijo: «Éstos son mi madre y mis hermanos. Pues todo el que cumpla la voluntad de mi Padre celestial, ése es mi hermano, mi hermana y mi madre».


«El que cumpla la voluntad de mi Padre celestial, ése es (...) mi madre»


P. Pere SUÑER i Puig SJ 

(Barcelona, España)


Hoy, el Evangelio se nos presenta, de entrada, sorprendente: «¿Quién es mi madre?» (Mt 12,48), se pregunta Jesús. Parece que el Señor tenga una actitud despectiva hacia María. No es así. Lo que Jesús quiere dejar claro aquí es que ante sus ojos —¡ojos de Dios!— el valor decisivo de la persona no reside en el hecho de la carne y de la sangre, sino en la disposición espiritual de acogida de la voluntad de Dios: «Extendiendo su mano hacia sus discípulos, dijo: ‘Éstos son mi madre y mis hermanos. Pues todo el que cumpla la voluntad de mi Padre celestial, ése es mi hermano, mi hermana y mi madre’» (Mt 12,49-50). En aquel momento, la voluntad de Dios era que Él evangelizara a quienes le estaban escuchando y que éstos le escucharan. Eso pasaba por delante de cualquier otro valor, por entrañable que fuera. Para hacer la voluntad del Padre, Jesucristo había dejado a María y ahora estaba predicando lejos de casa.


Pero, ¿quién ha estado más dispuesto a realizar la voluntad de Dios que María? «He aquí la esclava del Señor; hágase en mí según tu palabra» (Lc 1,38). Por esto, san Agustín dice que María, primero acogió la palabra de Dios en el espíritu por la obediencia, y sólo después la concibió en el seno por la Encarnación.


Con otras palabras: Dios nos ama en la medida de nuestra santidad. María es santísima y, por tanto, es amadísima. Ahora bien, ser santos no es la causa de que Dios nos ame. Al revés, porque Él nos ama, nos hace santos. El primero en amar siempre es el Señor (cf. 1Jn 4,10). María nos lo enseña al decir: «Ha puesto los ojos en la humildad de su esclava» (Lc 1,48). A los ojos de Dios somos pequeños; pero Él quiere engrandecernos, santificar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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