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41-51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42 그들이 말하였다. “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exto del Evangelio (Jn 6,41-51): En aquel tiempo, los judíos murmuraban de Él, porque había dicho: «Yo soy el pan que ha bajado del cielo». Y decían: «¿No es éste Jesús, hijo de José, cuyo padre y madre conocemos? ¿Cómo puede decir ahora: He bajado del cielo?». Jesús les respondió: «No murmuréis entre vosotros. Nadie puede venir a mí, si el Padre que me ha enviado no lo atrae; y yo le resucitaré el último día. Está escrito en los profetas: ‘Serán todos enseñados por Dios’. Todo el que escucha al Padre y aprende, viene a mí. No es que alguien haya visto al Padre; sino aquel que ha venido de Dios, ése ha visto al Padre.
»En verdad, en verdad os digo: el que cree, tiene vida eterna. Yo soy el pan de la vida. Vuestros padres comieron el maná en el desierto y murieron; éste es el pan que baja del cielo, para que quien lo coma no muera. Yo soy el pan vivo, bajado del cielo. Si uno come de este pan, vivirá para siempre; y el pan que yo le voy a dar, es mi carne por la vida del mundo».
«Nadie puede venir a mí, si el Padre que me ha enviado no lo atrae»
Fray Lluc TORCAL Monje del Monasterio de Sta. Mª de Poblet
(Santa Maria de Poblet, Tarragona, España)
Hoy, el Evangelio presenta el desconcierto en el que los connacionales de Jesús vivían en su presencia: «¿No es éste Jesús, hijo de José, cuyo padre y madre conocemos? ¿Cómo puede decir ahora: He bajado del cielo?» (Jn 6,42). La vida de Jesús entre los suyos había sido tan normal que, el comenzar la proclamación del Reino, quienes le conocían se escandalizaban de lo que entonces les decía.
¿De qué Padre les hablaba Jesús, que nadie había visto? ¿Quién era este pan bajado del cielo que quienes lo comen vivirán para siempre? Él negaba que fuera el maná del desierto porque, quienes lo comieran, morirían. «El pan que yo (...) voy a dar, es mi carne por la vida del mundo» (Jn 6,51). ¿Su carne podía ser un alimento para nosotros? El desconcierto que sembraba Jesús entre los judíos podía extenderse entre nosotros si no respondemos a una pregunta central para nuestra vida cristiana: ¿Quién es Jesús?
Muchos hombres y mujeres antes que nosotros se han hecho esta pregunta, la han respondido personalmente, han ido a Jesús, lo han seguido y ahora gozan de una vida sin fin y llena de amor. Y a los que vayan a Jesús, Él los resucitará el último día (cf. Jn 6,44). Juan Casiano exhortaba a sus monjes diciéndoles: «‘Acercaos a Dios, y Dios se acercará a vosotros’, porque ‘nadie puede ir a Jesús si el Padre que lo ha enviado no lo atrae’ (...). En el Evangelio escuchamos al Señor que nos invita para que vayamos hacia Él: ‘Venid a mi todos los que estáis cansados y agobiados, y yo os haré reposar’». Acojamos la Palabra del Evangelio que nos acerca a Jesús cada día; acojamos la invitación del mismo Evangelio a entrar en comunión con Él comiendo su carne, porque «éste es el verdadero alimento, la carne de Cristo, el cual, siendo la Palabra, se ha hecho carne para nosotros» (Orígenes).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한 6,41-42)”
여기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라는
말씀과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라는 말씀이 합해진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뜻은,
“나는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에 대해서만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라는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했던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가셔서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나자렛 사람들이
바로 그 말을 말했습니다(마태 13,54-57).
(나자렛 사람들은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 ‘목수의 아들’이,
즉 자기들이 무시하고 천대했던 ‘목수의 아들’일 뿐인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하느님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의 빵’을 먹은 사람들이고(요한 6,22-24),
또 지금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장소는
카파르나움 회당입니다(요한 6,59).
예수님께서 처음에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에는,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반응은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2).”
군중 속에 나자렛 사람들이 섞여 있었거나,
아니면 시간이 흘러서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고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기적의 빵’을 먹고 나서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고 했던 사람들이(요한 6,15)
새삼스럽게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을 문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는 일에서는
‘목수의 아들’이라는 점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신적 존재, 즉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일은
임금으로 삼는 일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6,44-46).”
이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적인 생각만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지 마라.”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실 수도 있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밀가루와 물로 만들어진 작은 빵이 예수님의 몸인 성체로 변화되는 것,
그것도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밀가루와 물로 만들어진 작은 빵’이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믿음은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사람”이라는 말과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특별한 인도와 가르침을 받은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이끌어 주십니다.
따라서 누구는 인도받고 누구는 인도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 쪽에서 어떤 사람은 응답하고, 어떤 사람은 응답하지 않는데,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되고, 믿게 됩니다.
반대로 말씀에 응답하지 않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래서 안 믿고, 영원한 생명도 얻지 못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하느님을 믿고 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하느님을 몰라서 안 믿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먼저’ 믿으면, 믿음 속에서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교회의 교리 등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또는 인간 세상의 상식과 너무 거리가 멀다고,
믿을 수 없으니 믿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아버지의, 또는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는 사람이고,
자신들이 거부함으로써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7-51).”
이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나를 믿어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믿는 일’이 ‘먹는 일’로 표현되어 있는데,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아먹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영원한 생명의 새로움
음식이 육체적 생명을 영위하게 해 주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영적 생명을 유지하게 해 주는 원천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우리는 귀로 듣는 말씀만이 아닌, 음식으로 섭취하는 빵의 모습으로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은 언뜻 보기에는 모순적인 두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말은 변하지 않는 어떤 지속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생명이라는 말은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 말이 합쳐져서 이해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은 변화하고 움직이는 생명의 본질이
매 순간 ‘새로움’으로 가득 차서, 이 새로움이 끝도 없이 이어져서 계속될 것이라는
희망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의 새로움은 죽고 나서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에서도 이 새로움에 대한 체험이 가능하다고 믿고
이 체험에 기꺼이 참여할 마음을 가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은 해가 뜨고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미사에 참석할 때에도 반복되고 늘상 형식적으로 똑같은 전례에 식상해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매일 똑같이 뜨는 해, 매일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어떤 ‘새로움’을 매순간 발견하지 못한다면
영적인 생명은 생기를 잃어버리고 빛을 잃어서 점점 어두워질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우리가 매 순간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며,
생기를 북돋워서 생생하게 만듦으로써,
하느님의 생명과 이어주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만들어 줍니다.
육체적 생명은 시간이 지나면 노화하고 쇠퇴하지만,
영적인 생명은 생생하게 살아서, 끊임없이 새로워져 자라나고 성장합니다.
영적인 생명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보살핌이나 손길이 부족해서일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몸을 모시기에 합당하도록 내 마음을 얼마나 보살피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부산교구 김형수 신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오늘 독서에 보면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고생스러워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엘리야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싸리나무 아래로 들어가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다가 잠이 들어 버리는데요.
쓰러져 있는 그에게 하느님은 천사를 보내시어 먹을 빵과 물을 주시고,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하고, 그를 흔들어 깨웁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다시 일어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향하게 되는데요.
그와 같은 경험을 저도 이 본당에 와서 몇 번 했던 거 같습니다.
힘들고 버거워서 다 그만두고 싶은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마다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천사와 같은 분들을 만났던 거 같습니다.
하나는 작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보통 공소에 가려면 배를 타고 가야하는데, 피서철에는 노선이 정해져 있지 않아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고 복잡합니다.
그런 경험을 처음 하던 날 정해진 노선으로 운항을 하지 않아서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되었는데,
공소에 가긴 갈 거기 때문에 신자 분들에게 전화해서 ‘기다려 달라..’ 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만에 공소에 도착하고 보니 한 45분정도 늦게 도착했더라고요.
공소에 들어가 보니 평소보다 많은 분들이 와 계셨는데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은 우산을 접고 들어온 저에게 ‘공소 예절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만 하면 어떻하냐..
우리가 마냥 기다릴 순 없지 않느냐.. 늦으면 얼마나 늦을 거 같다.. 이야기가 있으셔야죠..’
하고 화난 것과 표현하는 것의 중간 정도 되는 느낌의 말투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45분이나 늦었으니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의 연속이었는데요.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면서 ‘죄송하지만 한 편으로 서운하다...’
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원래 공소 미사는 한 달에 한 번 있었는데, 저는 공소 신자들이 미사를 중심으로 모이고
단합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매주 갔었거든요.
안 가도 되는 미사에 고생해서 갔는데, 그 고생을 알아주지 않는 거 같아서
서운한 마음이 조금 들더라구요.
본당에 왔는데도 서운함이 잘 풀리지 않았는데요.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약간 극단적인 쪽으로 갔었습니다.
‘앞으로 미사를 가지 말아야겠다. 공소 일에 대해 앞으로 신경도 쓰지 말아야겠다...’
다음날 오전까지 그런 생각이 있었는데요.
문득 스쳐 지나간 모습이 있었습니다.
전날 배터에서 본당으로 걸어가다가 만난 가족들이 저를 반겨주었던 따뜻함,
물 한 잔 건네주시는 소박함, 밥 먹고 가라는 정.. 그런 것들이 문득 스쳐지나가면서,
‘내가 그런 분들이 있어서 신부할 맛 나는 것처럼,
신자들도 나에게서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삐지고 틀어져서 자기 멋대로 옹졸하게 살아가는 신부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사를 주고 다가가는 신부가 되면 좋겠다... 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에 뭔가가 스르르 쓸려내려가는 느낌과 함께 편안해지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다른 하나는 올해 있었던 일입니다.
한 번은 미사 중에 복음을 읽고 나서 강론 대신 나눔을 했었습니다. 강
론하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었구요.
미사에 나온 분이 많지 않아서 그렇게 해 봤습니다.
복음을 읽고 어떤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는지 1분 정도 생각한 뒤에,
‘나눔을 해 주셔도 되고요. 할 얘기가 없는 분은 마음에 와 닿는 구절만 말씀해 주세요~’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은 죽어도 안 하시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말씀 한 구절을 반복해서 읽는 게 힘든 것도 아닌데...
서로의 이야기도 좀 듣고, 듣는 가운데 배우기도 하고,
다시 선포된 말씀을 마음에 새겨보기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잘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살짝 의기소침해졌었습니다.
그 일 때문만은 아닌 거 같습니다.
요즘 신자들을 위해서 이런 저런 계획과 일감들을 제 바구니에 담고 또 담는 일이 많은데요.
그 무게 때문에 가끔 지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합니다.
그런 때에 ‘그만해야겠다..’ 는 핑계거리라도 찾고 싶었던 거 같습니다.
신자들을 다 보내고 난 뒤에 수단을 입고 한참 산책을 했습니다.
그렇게 걸으니까 신학교에서 마침기도 끝나고 고민하며 산책하던 생각도 나고,
저번에 사랑의 선교회 수녀님들이 오셔서 ‘여기 관상 수도회가 들어오면 참 좋겠네..’
하셨던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엄청 조용하거든요.
그렇게 산책을 하면서 ‘신자들이 별로 호응이 없는데 나도 놀 수 있다는 걸...
다른 일들 신경 안 쓰고 편히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바로 ‘그건 아니지.. 아직도 올인 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또 대답을 하더라고요.
그렇게 독백하고 지나가는 생각들과 대화하면서 산책을 계속 했습니다.
‘얼마나 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왜 해야 하는 걸까..’
한참을 그렇게 걷는데 예전에 ‘섬김’ 이라는 단어로 묵상했던 것이 떠오르더라고요.
그것이 줄임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섬에 사는 김 신부...’ 이고요.
다른 하나는 ‘섬기는 삶을 살아라. 김 신부...’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생각이 저번에 예수님의 전 생애가 섬기는 삶이었다는 내용들이
죽 지나갔습니다. 그
러면서 마음속으로 ‘섬기는 삶.. 평생 섬기는 삶.. 예수님도 평생 섬기는 삶을 사셨는데...’
하는 말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방에 들어와서 컴퓨터를 켰습니다.
노래 다운받고 듣는 취미가 생겨서 인터넷을 키고 노래를 검색했는데요.
그날은 성가가 듣고 싶어서 가톨릭 부분에 들어가서 한 번씩 들어보고
다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 제 마음에 꽂히는 성가가 있었습니다.
이용현 신부님의 ‘늘 그렇게’ 라는 성가인데요. 가사가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늘 그렇게 맑은 눈빛으로 늘 그렇게 밝은 웃음으로
늘 그렇게 넓은 가슴으로 늘 그렇게 사랑하길 나는 기도 하네
사랑하는 친구여
늘 그렇게 그분의 눈빛이 늘 그렇게 그분의 숨결이
늘 그렇게 그분의 사랑이 늘 그렇게 내게 머물길 나는 기도 하네
지나간 시간들의 아쉬움과 다가올 시간들의 설레임 모두
우리가 늘 그렇게 그분과 함께 살아간다면
세상엔 그 모든 것들은 사랑으로 채울 수 있을 거라네
늘 그렇게 늘 그렇게 늘 그렇게
마치 누군가 의기소침해 있는 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인 듯했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듣고 또 반복해서 들으며
‘그래.. 늘 그렇게..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거야..’ 하고 힘을 냈던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힘들어 하고 있는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도록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우리에게 기운을 불어 넣어 주시고
필요한 메시지를 주십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아이들 밥 해 주러 오신 자매님들이 야외 부엌에 있던 내 호박 몇 개를 삶아 드셨다.
그 이야기를 본당 보좌 신부님께 했나보다.
그랬더니 보좌 신부님이 이런 대답을 하셨다고 한다.
“신부님 거를 훔쳐 드셨으니 죄질이 너무 커서 주교님한테
고해성사 하셔야겠는데요~”
인천교구 밤송이(김기현 요한) 신부
영혼이 없다면 사랑이 왜 필요한가?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많은 시도를 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현대에서도 영혼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는데 특별히 ‘임사체험’을 통해서였습니다.
임사체험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증언을 말합니다.
‘서프라이즈 –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에서는 한 중요한 임사 실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998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의료기관에서 임사체험과 사후세계에 대한
서로 반대 입장을 가진 두 단체가 모여
실제로 환자를 대상으로 임사체험 실험을 하였습니다.
팜 레이놀즈라는 작사가 겸 가수가 임사체험 실험대상이 되었는데
그녀는 오랫동안 동맥경화를 앓아왔으며 심실정지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심실정지 수술이란 환자를 저체온상태로 만들어서 일시적으로 사망상태로 만들고
머리에서 혈액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하는 수술입니다.
수술이 시작되었고 그녀를 저체온 상태로 떨어뜨려서 팜 레이놀즈의 심장박동과 호흡이 정지되었고
뇌파도 정지되어 그녀는 완벽히 의학적으로 사망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녀가 의학적 사망한 상태에서 수술이 진행되었고 나중에 수술이 모두 끝난 뒤
다시 깨어난 팜 레이놀즈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놀라운 증언을 하였습니다.
팜 레이놀즈는 “나는 내가 죽어있는 동안 내 영혼이 살아서
내가 수술 받는 모든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았다.”고 말해 모든 연구진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녀는 “내가 수술을 받는 과정과 모든 의사와 간호사들의 움직임을 똑똑히 보았고
나를 수술하는 의료기구들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놀랍게도 팜 레이놀즈는 그녀가 사망한 상태에서 이뤄진 모든 수술과정을 지켜보았고
전 과정을 기억해낸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의 존재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사실입니다.
또한 그녀는 의료진이 자신의 두개골을 절개하는 모습과
의료진들의 배치, 수술기구들의 종류, 또한 일반인들은 알지 못하는 수술도구나
세세한 집기들의 위치까지도 정확하게 설명하였습니다.
나중에 실험참가자들이 수술실 모습을 촬영한 비디오화면을 확인해본 결과
팜 레이놀즈가 보았다고 설명한 모든 것들이 사실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즉, 팜 레이놀즈는 의학적으로 사망한 상태에서도 그녀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현상들을
목격한 것이며 이것은 그녀의 영혼의 존재를 빼놓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영화배우 에스트라다, 샤론 스톤, 엘리자베스 테일러, 가수 팜 레이놀즈는
자신들이 명백히 사후세계를 목격했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고
현재 미국에서는 영혼을 연구하는 교과가 100개 이상 의과대학에 개설되었고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는 영혼치료에 관한 의과대학 전공서도 출간되었습니다.
이렇듯 과학이 발달할수록 이전에 믿어오던 믿음들이 거짓이 아님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믿지 않으면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영혼의 존재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하시는 말씀이
또한 영혼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빵은 음식이고 음식을 먹으면 에너지로 바뀝니다.
즉 당신은 에너지를 주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에너지는 어떤 생명을 내 안에 먹었을 때 그 생명이 죽음으로써 생깁니다.
돼지고기를 먹으면 그 죽은 돼지의 생명이 내 안에서 에너지가 되어 나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육체에 에너지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가 아니면 그럼 어디에 필요한 에너지일까요?
중국 전통의학에 따르면 사람에게 영혼이 존재하는데
영혼(魂-혼)은 하늘에서 오며 양(陽)에 속하고 주로 정신감각을 주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넋(魄-백)은 땅에서 나오며 음(陰)에 속하며 사람의 신체를 주재합니다.
이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 인간인데,
영혼은 하늘에서 온 것이고, 육체의 고향은 땅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두 차원의 에너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는 육체를 유지시키기 위해 땅에서 나는 생명으로 채워지는 에너지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에너지로 영혼의 에너지인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에너지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늘에서 오는 빵은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니 영혼의 에너지는 사랑인 것입니다.
육체의 에너지가 채워지지 않아도 배고픔을 느낄 수 있고,
영혼의 에너지가 채워지지 않아도 배고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육체도 배고픔을 느끼지만 영혼도 배고픔을 느낍니다.
이를 세상 용어로는 ‘애정결핍’이라 부릅니다.
애정결핍에 따른 문제는 누구나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결핍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영혼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가 그런 결핍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육체는 애정결핍과 상관없이 세상 음식만 먹으면 잘도 성장하고 잘도 생존합니다.
영혼이 있다면 균형 잡힌 식습관을 가져야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랑이 필요 없다면 영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받지 않은 채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랑 받지 못하면 결국 영혼이 죽는 것입니다.
사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면 영혼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에너지이고 양식인데 그것을 소비할 기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기관은 육체가 아닙니다.
육체는 땅에서 나는 음식으로 유지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필요한 기관은 영혼인 것입니다.
영혼이 사랑으로 양식을 삼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음식을 해 줄 때 음식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도 함께 줍니다.
음식은 몸의 양식이 되지만 사랑은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
영혼을 생각하지 않고는 사랑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땅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스스로 사랑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어떤 피조물도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채울 수 없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지 않고는 결코 인간다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이고 그 빵을 먹어야만 영혼도 배부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돼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왜 영혼에게 양식을 주는 일에 그리도 게으른 것일까요?
모든 생명체들은 이 균형 잡힌 성장을 잘도 합니다.
나무는 인간과 매우 흡사합니다.
나무는 땅에서 자라나지만 하늘의 태양빛과 비가 없다면 자랄 수 없습니다.
나무는 가장 높게 자라는 생물입니다.
그만큼 하늘에서 내려오는 에너지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흙의 영양분만으로는 안 되어 하늘의 에너지를 받기 위해
나무는 서로 경쟁하듯 더 하늘로 치솟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인간도 땅의 것과 하늘의 것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뿌리만 깊이 내릴 뿐이지 위로 치솟으려하지 않습니다.
햇빛을 받지 못하는 나무는 아무리 뿌리가 깊어도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이 세상에서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먹기는 해야겠지만
하늘에서 오는 양식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육체를 위해서도 먹어야하고 영혼을 위해서도 먹어야합니다.
육체의 양식은 음식이고 영혼의 양식은 사랑입니다.
음식이 부족하면 배가 고프지만
사랑이 부족하면 마음이 허합니다.
마음이 허한 것을 음식으로 채우려다가는 비만만 늘어납니다.
사랑의 에너지가 쓰이는 곳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창조하신 분이
그 영혼을 기르시기 위해 당신 자신이 에너지가 되어
우리에게 먹히시는 것입니다.
만든 분은 그 만든 것을 유지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만 깊게 박히고 위로는 솟지 못하는 불균형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