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10.12-14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exto del Evangelio (Mt 18,1-5.10.12-14): En una ocasión, los discípulos preguntaron a Jesús: «¿Quién es, pues, el mayor en el Reino de los Cielos?». Él llamó a un niño, le puso en medio de ellos y dijo: «Yo os aseguro: si no cambiáis y os hacéis como los niños, no entraréis en el Reino de los Cielos. Así pues, quien se haga pequeño como este niño, ése es el mayor en el Reino de los Cielos. Y el que reciba a un niño como éste en mi nombre, a mí me recibe. Guardaos de menospreciar a uno de estos pequeños; porque yo os digo que sus ángeles, en los cielos, ven continuamente el rostro de mi Padre que está en los cielos. ¿Qué os parece? Si un hombre tiene cien ovejas y se le descarría una de ellas, ¿no dejará en los montes las noventa y nueve, para ir en busca de la descarriada? Y si llega a encontrarla, os digo de verdad que tiene más alegría por ella que por las noventa y nueve no descarriadas. De la misma manera, no es voluntad de vuestro Padre celestial que se pierda uno solo de estos pequeños».
«No es voluntad de vuestro Padre celestial que se pierda uno solo de estos pequeños»
Rev. D. Valentí ALONSO i Roig
(Barcelona, España)
Hoy, el Evangelio nos vuelve a revelar el corazón de Dios. Nos hace entender con qué sentimientos actúa el Padre del cielo en relación con sus hijos. La solicitud más ferviente es para con los pequeños, aquellos hacia los cuales nadie presta atención, aquellos que no llegan al lugar donde todo el mundo llega. Sabíamos que el Padre, como Padre bueno que es, tiene predilección por los hijos pequeños, pero hoy todavía nos damos cuenta de otro deseo del Padre, que se convierte en obligación para nosotros: «Si no cambiáis y os hacéis como los niños, no entraréis en el Reino de los Cielos» (Mt 18,3).
Por tanto, entendemos que aquello que valora el Padre no es tanto "ser pequeño", sino "hacerse pequeño". «Quien se haga pequeño (...), ése es el mayor en el Reino de los Cielos» (Mt 18,4). Por esto, podemos entender nuestra responsabilidad en esta acción de empequeñecernos. No se trata tanto de haber sido uno creado pequeño o sencillo, limitado o con más capacidades o menos, sino de saber prescindir de la posible grandeza de cada uno para mantenernos en el nivel de los más humildes y sencillos. La verdadera importancia de cada uno está en asemejarnos a uno de estos pequeños que Jesús mismo presenta con cara y ojos.
Para terminar, el Evangelio todavía nos amplía la lección de hoy. Hay, ¡y muy cerca de nosotros!, unos "pequeños" que a veces los tenemos más abandonados que a los otros: aquellos que son como ovejas que se han descarriado; el Padre los busca y, cuando los encuentra, se alegra porque los hace volver a casa y no se le pierden. Quizá, si contemplásemos a quienes nos rodean como ovejas buscadas por el Padre y devueltas, más que ovejas descarriadas, seríamos capaces de ver más frecuentemente y más de cerca el rostro de Dios. Como dice san Asterio de Amasea: «La parábola de la oveja perdida y el pastor nos enseña que no hemos de desconfiar precipitadamente de los hombres, ni desfallecer al ayudar a los que se encuentran con riesgo».
가장 큰 사람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18,4).하시고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 하여라”(마태18,1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어린이를 중심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결국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과 순수한 마음을 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미아발생으로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보면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 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아이가 길을 잃고 헤맵니다.
그러니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많이 소유한 것이 위대하게 보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
자신을 낮추어 비우는 사람이 위대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애당초부터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요.
“어리석은 사람은 자꾸만 더해서 많이 갖고, 현명한 사람은 자꾸만 덜어서 많이 갖습니다”(이규경). 노자도 “성인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밝고, 자기를 옳다고 하지 않으므로 빛나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이 있고 자기를 뽐내지 않으므로 윗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루카18,17).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할 때 우리는 하늘 앞에서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지니고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사랑이 담긴 일을 보시고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한 일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1고린14,20).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천국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사제는 하느님 안에서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큰 사람이었습니다.
큰 사람은 키가 커서 큰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커서 큰 사람입니다.
하루를 허물로 누벼놓았어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주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주님 품에 안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큰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린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것 즉, 겸손
신부로서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 대부분의 신부님들은
강론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저에게 물어도 대답은 같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이 어린이미사 강론입니다.
지금은 전담사목을 하기에 어린이미사강론을 하는 고통은 덜었지만,
본당사목을 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어린이미사강론을 하다보면 등에서
식은 땀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제가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어린이들의 말로 풀어서
강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저의 속마음까지도 빤히 들여다보는 것같은 그들의 맑은 눈동자 앞에서 강론한다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서품 때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몸바치겠다고 서약했건만,
입으로만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앵무새처럼 외웠을 뿐 어느 것 하나 실천하는 것이 없는
저의 위선을 어느 누구보다도 제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우선되어야 할 덕목이
어린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것 즉, 겸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있기에 부모님께 전적으로 의탁합니다.
마찬가지로 겸손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죽어야 할 죄인이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만물의 영장으로 세워주셨고,
당신의 외아들을 통하여 구원해주심으로써 천사들보다도 높은 지위에 들어높여진 존재가
인간인 것입니다.
이 두가지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였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험난한 이 세상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기에 보잘것 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 잘나고 못 나고가 무슨 차이가 있으며, 공적을 쌓고 안쌓고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또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능력이나 결과가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우리가 잘나거나 공적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 은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살려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는 어린이가 부모에게 의탁하듯이 오롯이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과 인간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셨지만 돌아온 것은 죽음뿐이었습니다.
그 결과를 당신께서도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드셨기에
겟세마니동산에서 피땀흘려가면서 기도하셨지만, 받아들이신 다음에는
당당하게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렇게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했기에 부활의 영광을 얻으신 것이고
우리에게 그 열매를 나누어주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사회가 왜 이렇게 비인간화되어가고 살기 어렵게 되어가는지요?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기를 합리화하는데 도사가 되어 자기의 잘못은 없고 남의 탓, 사회 탓이며,
좀 나은 경우에는 이런 현실 속에서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하고 항변을 합니다.
세계화의 탁류 속에서 약소국인 우리나라의 선택의 폭은 제한되어 있기에
모두가 힘을 합쳐도 이 난국을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족벌언론은 족벌언론대로,
가진 자는 가진 자대로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기에 급급하고 상대방을 비난하기에 급급합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는 자신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겸허하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현실을 직시하면서
지혜를 모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99마리를 버려두고 나서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오시지 않고 구원하러 오셨음을 명심합시다.
꼴베신부님께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믿고 자진해서 죽음을 대신 받아들이셨듯이
우리 역시 천진난만한 어린이처럼 우리의 모든 잘잘못을 하느님께 맡기고,
돌아온 탕자처럼 하느님의 품안에서 해방과 기쁨의 잔치를 벌입시다. 아멘
부산교구 유영일 신부
작은 것이 아름답습니다
교회 안의 큰 경사이자 대축제인 성모승천대축일을 하루 앞둔 오늘
우리는 성모님에 대한 열렬한 신심의 소유자였던 폴란드 출신의
콘벤투알 성 프란치스코회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의 축일을 지냅니다,
각별한 성모신심을 지녔었던 콜베 사제는 성모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봉헌했으며,
성모님을 세상만방에 널리 알리기 위해 ‘성모의 기사’란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콜베 사제가 우리에게 모범으로 남겨둔 이웃사랑의 실천은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담근 시원한 동동주가 목으로 술술 넘어가듯 만사가 술술 잘 풀리는 가운데
이웃사랑을 실천하기란 사실 ‘누워서 떡먹기’입니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평화로운 가운데, 넉넉한 자금과 수많은 협력자들이 확보된 가운데
이웃사랑을 실천하기란 ‘식은 죽 먹기’입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도 죽을 지경인 상황 속에서,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괴로운 상황 속에서는
제대로 된 이웃사랑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내 코가 석자’인 상황 속에서도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그 사람이야말로
참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콜베 신부님께서 그랬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보다 ‘살짝’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보다 한 2% 더 사랑이 추가되었던 것입니다.
그분도 난 데 없이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와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느라
하루하루가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 명씩 동료 수감자들이 주검이 되어 실려 나가는 것을 보며
그분도 죽음의 공포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머리털 나고 처음 맞이해보는 극단적이고 처절한 상황 앞에서
‘하느님, 도대체 이게 뭡니까?’ 하는 하소연이 저절로 튀어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목자로서 콜베 신부님은 너무나 당당하고 의연하셨습니다.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도 그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힘겨운 강제노역에 시달리면서도
힘겨워하는 동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쥐꼬리만한 빵 조각을 젊은 재소자들에게 나눠주고,
눈을 부릅뜨고 죽어버린 형제의 눈을 감겨주고, 임종을 지켜주고...
이것이 바로 참 목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은 단 한명의 동료 재소자를 대신해서 죽음의 아사 감방으로 내려가셨지만,
사실 인류 전체를 대신해서 지하로 내려가신 예수님을 꼭 빼닮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역설의 진리를 온 몸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내 눈 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단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것,
지금 내 곁에서 고통 받고 있는 단 한 생명을 소홀히 하지 않은 것...
그것이 사실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좋은 주교를 기억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 103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하고 물었다. 2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이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4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입니다. 5 또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오 18,1-5)
‘그때에’는 앞뒤 단락을 매끄럽게 연결하여 설명할 때 마태오가 즐겨 쓰는 표현이다. 마태오 13,36; 24,3처럼 제자들이 다가와 예수에게 질문한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9,33-37과 달리 마태오는 제자들 사이의 다툼을 삭제하였다. 메가스(megas, 큰, 위대한)는 서열과 지위에 대한 생각을 가리킨다. 한 나라에서 메가스는 임금과 신하를 가리킨다.(마카베오상 7,8) 마태오복음에서 제자들의 질문은 현재의 서열을 의식하는 마르코와 루가와 달리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서열을 따지는 것 같다.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는 “여러분이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이란 응답을 내놓는다. ‘하늘나라에서’라는 일반적인 질문에 갑자기 질문하는 사람의 ‘현재’ 삶이 주제로 등장한다. 제자들은 하늘나라에서 권력서열을 물었는데 예수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을 먼저 제시하고 그 다음에 권력서열에 대해 답한다. 하늘나라에 들어갈지 여부도 모르는 판국에 어찌 하늘나라에서 서열을 묻느냐는 질책도 담겨 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우선 애쓰라는 경고다.
어린이가 예수의 답변에 등장한다. ‘어린이’의 특징이 무엇인지 마태오가 밝히지 않아서 각종 해설이 역사에 나타났다. 어린이에 대한 해설자 개인과 시대의 생각이 해설에 투영되었다. 어린이에 대한 가부장사회의 교육이념이 해설자 자신도 모르게 해설에 드러났다. 어린이의 사실적 모습보다 어린이는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논의에 끼어들었다. 어린이에 대해 크게 보면 세 가지 시각의 해설이 보인다. 1. 어린이의 순진무구함 2. 하느님에 대한 신뢰 3, 권력을 버림
▲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15~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네(Giorgione)의 작품
순진함, 단순함, 죄없음 등이 어린이의 특징으로 자주 언급되었다. 괴테(Goethe)에게 어린이는 모든 미덕의 씨앗이다. 톨스토이(Tolstoi)는 소설 <부활>에서 마태오 18장을 인용하며 어린이를 이웃사랑의 인간적 근원이라고 칭송한다. 많은 해설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자녀를 길러본 적 없는 예수는 어린이의 실상을 제대로 모른 것 같다. 이 대목에서 나는 예수가 결혼하지 않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어린이가 부모를 믿고 의지하는 특징이 또한 언급되었다. 어린이가 부모를 믿듯이 제자들은 하느님을 신뢰하라는 뜻이다.
파이스(pais), 파이디온(paidion)이라는 단어는 어린이뿐 아니라 노예를 가리킨다. 유다 사회에서 어린이는 대부분 부정적인 뜻으로 인용되었다. 오늘 단락에서 어린이를 이해하는 열쇠는 4절의 타페이노스(tapeinos)라는 단어다. ‘작은, 낮은’을 뜻하는 이 단어는 권력 없음, 무의미함, 약함을 뜻한다. 유다교와 그리스 문화에서 그 단어가 겸손을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그 단어는 겸손을 뜻하기보다 낮은 지위를 가리킨다. 오늘 단락에서 어린이는 순진함이라는 윤리적 시각이나 하느님에 대한 신뢰라는 신앙적 시각보다 권력을 비움이란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성서해설이나 설교에서는 그런 점을 제대로 강조하지 않는다.
제자들은 어린이처럼 작고 돋보이지 않으며 힘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4절에서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권력을 비우라는 뜻이다. 어린이를 맞아들이듯 친절하게(마태오 18,5), 작은 자를 형제자매적으로 사랑하고(마태오 18,10-14), 무한한 용서(마태오 18,21-), 이웃사랑을 위한 재산포기(19,16-21)도 제시된다. 무엇보다도 상하관계의 권력의지를 포기하고(마태오 23,8-10) 봉사(마태오 20,26-28; 23,11)하라는 뜻이다.
어린이를 도우라는 말이 아니라 어린이처럼 되라는 말씀이다. 낮은 자를 도우라는 말이 아니라 낮은 자가 되라는 뜻이다. 오늘 단락을 읽고 가장 부끄러울 사람들이 누구일까. 가톨릭 주교들과 대형교회 목사들이다. 그들의 현재 모습은 오늘 단락의 어린이와 정면으로 어긋난다. 가톨릭 주교는 가톨릭교회에서 유일한 ‘갑‘이다. 주교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고 지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맡고 있지만, 모든 권력을 한손에 움켜쥐는 현재 주교제도는 성서정신과 거리가 멀다. 예수는 오늘 가톨릭의 주교제도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주교제도를 시대정신에 굴복시키자는 뜻이 아니라 성서정신에 비추어 보자는 뜻이다. 가톨릭교회 개혁의 핵심은 주교제도 개혁이다. 주교선출, 임기, 권한 분배 등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로메로 대주교, 김수환 추기경, 교황 프란치스코 등 훌륭한 주교를 기억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모범적인 개인의 사례로 제도의 어두움을 덮을 수는 없다. 엉터리 주교들 때문에 교회와 신자들과 국민들이 겪는 고통도 만만치 않다. 주교제도 자체를 성서정신에 맞추어 개혁해야 한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결단과 희생이 기대된다.
‘어린이’는 겸손이 아니라 권력포기를 상징한다. 개인적 차원에서 ‘갑’ 행세를 중단하는 것 뿐 아니라 구조적 차원에서 권력에 대한 가치전환을 뜻한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권력은 전혀 무의미하다. 가난한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이자 우리의 꿈이다. 가난에는 돈 뿐 아니라 권력의 포기도 포함된다. 그리스도교의 회개는 하느님에게 다가섬, 가난한 사람에게 다가섬 을 동시에 포함한다. 하느님에게 다가서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다가서지 않았다면 아직 제대로 회개한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다가서지 않았다면 아직 하느님에게 다가선 것도 아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다가서지만 아직 하느님에게 다가서지 않았다면 훌륭한 맑시스트이지만 아직 예수를 아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권력을 움켜쥔 사람은 개인적 회개뿐 아니라 구조적 회개를 진지하게 고뇌해야 한다. 모두 낮추면 결국 서로 존중받게 되지만, 일부를 높이고 대부분을 낮추면 남는 것은 불신과 독재뿐이다. ‘교회안에 민주주의는 없다’라는 잘못된 생각에 의지하면 안 된다. 예수는 민주주위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하느님나라’라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이미 주었다.
김근수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