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주보+복음 묵상

[복음]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80818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8.08.20|조회수754 목록 댓글 0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13-15

13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exto del Evangelio (Mt 19,13-15): En aquel tiempo, le presentaron a Jesús unos niños para que les impusiera las manos y orase; pero los discípulos les reñían. Mas Jesús les dijo: «Dejad que los niños vengan a mí, y no se lo impidáis porque de los que son como éstos es el Reino de los Cielos». Y, después de imponerles las manos, se fue de allí.

«Le presentaron a Jesús unos niños para que les impusiera las manos y orase; pero los discípulos les reñían»

Rev. D. Antoni CAROL i Hostench 
(Sant Cugat del Vallès, Barcelona, España)

Hoy nos es dado contemplar una escena que, desgraciadamente, es demasiado actual: «Le presentaron a Jesús unos niños para que les impusiera las manos y orase; pero los discípulos les reñían» (Mt 19,13). Jesús ama especialmente a los niños; nosotros, con los pobres razonamientos típicos de “gente mayor”, les impedimos acercarse a Jesús y al Padre: —¡Cuando sean mayores, si lo desean, ya escogerán...! Esto es un gran error.

Los pobres, es decir, los más carentes, los más necesitados, son objeto de particular predilección por parte del Señor. Y los niños, los pequeños son muy “pobres”. Son pobres de edad, son pobres de formación... Son indefensos. Por esto, la Iglesia —“Madre” nuestra— dispone que los padres lleven pronto a sus hijos a bautizar, para que el Espíritu Santo ponga morada en sus almas y entren en el calor de la comunidad de los creyentes. Así lo indican tanto el Catecismo de la Iglesia como el Código de Derecho Canónico, ordenamientos del máximo rango de la Iglesia (que, como toda comunidad, debe tener sus ordenamientos).

¡Pero no!: ¡cuando sean mayores! Es absurda esta manera de proceder. Y, si no, preguntémonos: —¿Qué comerá este niño? Lo que le ponga su madre, sin esperar a que el niño especifique qué es lo que prefiere. —¿Qué idioma hablará este niño? El que le hablen sus padres (de otra manera, el niño nunca podrá escoger ninguna lengua). —¿A qué escuela irá este niño? A la que sus padres le lleven, sin esperar que el chico defina los estudios que prefiere...

—¿Qué comió Jesús? Aquello que le puso su Madre, María. —¿Qué lengua habló Jesús? La de sus padres. —¿Qué religión aprendió y practicó el Niño Jesús? La de sus padres, la religión judía. Después, cuando ya fue mayor, pero gracias a la instrucción que había recibido de sus padres, fundó una nueva religión... Pero, primero, la de sus padres, como es natural.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오19,14)
----
약 십년 간 주임신부로 지내던 전 본당처럼, 지금의 본당도 다국적 국제 성당입니다.
부임한 지 1년 4개월이 지나는 시점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볼 수 없는 풍경이 전개되는 성당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다국적 성당이라 하면 역시 사목자의 입장에서는 일장일단을 느낄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요.
좋은 점들에 대해 몇 가지 소개한다면, 서로 다른 것이 많기에 다양하고 풍요롭다는 것이 그 하나일 것이고,
다름을 넘어 조화를 이루며 형제적 일치를 체험할 수 있는 공동체이자 가족이라는 것이 또 하나의 좋은 점일 것입니다.
어쩌면 저희는 미래 교회를 미리 살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힘든 점들에 대해 말하면 역시 다른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지요.
언어, 문화, 취향, 심지어는 신앙생활의 습관에서조차 드러나는 차이 때문에 모든 것에 시간이 걸리고 손이 많이 간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주보를 만들어도 주요 언어권만 선정해서 6개국어로 매주 만들어냅니다.
십년 간의 노하우가 있어도 늘 새로운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축복을 청하고자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를 막으려다 예수님께 꾸지람을 듣습니다.
분명 시끄럽고 산만하게 움직이는 아이들이 제자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희 본당도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이 나라마다 달라 보입니다.
성당 예절을 엄격하게 가르치는 문화가 있고,
얘들이 뛰어다니던 큰 소리로 울어 대던 상관없이 앉아 있는 엄마들이 자연스러운 문화도 있습니다.
저 역시 미사 중에 아이들이 떠들고 뛰어다니면 집중력이 떨어져버리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것이 옳을 지 적지 않게 생각해보았고,
주보를 통해서나, 아니면 각 언어권 미사 중 부드럽고 점잖게 타이르기도 했습니다.
물론 효과는 있었고, 적어도 강론을 할 때 울어 대는 아기가 있으면 엄마들은 조용히 아이를 안고 나가서 달랜 후 들어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인터넷으로 교황께서 집전하는 미사를 보게 됩니다.
교황께서 설교를 하시는 도중에, 철부지 어린아이 하나가 제대로 뛰어올라 교황님의 제의를 잡고 늘어집니다.
주변 사람들과 아이의 부모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합니다.
그 때, 교황께서는 아이를 그대로 놓아두라고 아이를 말리려는 사람들을 제지하십니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설교를 계속하십니다.
한마디로 아름다웠습니다. 그 어떤 설교보다도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 저 역시 미사 중 아이가 큰 소리로 울어 대더라도 불편한 마음이 생기지를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잠시 기다려줍니다. 엄마가 무안해 하지 않게 말입니다. 다른 신자들도 여유로워진 표정을 짓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태도, 그리고 교황께서 보여주신 태도에는 공통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어떤 좋은 일을 하고자 할 때조차,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평상시 행동이나 태도로 드러나는 모범이 그 어떤 말보다 사람들에게 크고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행동은 평상시의 삶을 반영합니다. 억지로 해서 만들어지는 행동은 자연스러울 수가 없겠지요. 
환경이나 상황을 탓하기보다 그 안에 있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를 늘 살펴보아야 할 듯합니다.
그 마음의 상태는 반드시 태도나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란 어떤 모습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아버지 하느님께 대해 자녀로서 겸손과 단순 그리고 신뢰심을 갖는 것을 말한다.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는 이를 가리켜 ‘영적 어린이의 길’이라고 했다.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영성적으로 어린이와 같은 삶을 산 분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성녀는 오늘 복음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하느님 앞에 가장 작은 자가 되기 위하여 
어린이의 길을 택했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했으며 모든 일을 하느님께 의탁했다. 
 
성녀가 깨달은 진리는, 성화의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는 것이지 
인간 편에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 인간은 어린이와 같이 작은 채로 남아 있으면서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인정하고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 걱정하지 않듯이 
모든 것을 선하신 주님께 내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성녀는 ‘예수님의 팔’이라는 상징적 용어를 쓰며 성화시키시는 하느님께 대해 
자신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저를 하늘까지 들어올려 줄 승강기는 오, 예수님, 당신의 팔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저는 커질 필요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작은 채로 있어야 하고 
점점 더 작아져야 합니다.”
 
성녀는 자신을 낮추는 이러한 겸손을 바탕으로 어린이가 부모 앞에서 
단순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행동하듯이 하느님 앞에서 그러하고자 했다. 
 
그래서 성녀는 겸손이나 희생 혹은 애덕과 같은 덕행의 실천에 있어서도 
어떤 계획이나 방법을 따로 세우거나 특별한 기회를 만들어 행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아주 작은 기회나 사소한 것들 안에서 
단순하고도 자연스럽게 실천했다. 

또한 성녀의 생활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 대한 자녀다운 신뢰로 넘쳐 있었다. 
성녀는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겼으며, 
설사 고통을 통해야 한다 하더라도 온전히 하느님을 신뢰했다. 
더군다나 성녀는 자기 힘이 닿지 않는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충분했다. 
 
그래서 자신의 약함·무능력함·작음·허물이나 미천함을 느낄수록 
무한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자신의 전존재를 맡기고 더욱더 신뢰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인천교구 김흥주 신부


축복 가운데 있는 어린이
[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09

13 그때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해 주시기를 청하였다.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라자 14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시오.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15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마태오 19,13-15)

유일한 대본인 마르코 10,13-16을 마태오가 줄이고 고쳤다. 어린이를 안아주는 장면(마르코 10,13)은 마태오에서 삭제되었다. 제자들이 어린이를 나무라는 장면과 제자들에게 화를 내는 예수 모습도 마태오에서 보이지 않는다. 예수와 제자들의 품위에 흠집이 가지 않도록 마태오가 세심하게 배려한 것이다. 첫 복음인 마르코가 소박하고 정직하다면 후대 복음으로 갈수록 세련된 편집 솜씨가 드러난다. 짧은 문장보다 긴 문장이, 간결한 표현보다 화려한 표현이어서 원문과 거리가 멀다.

13절 파이디아(paidia)는 파이데스(paides)와 달리 아주 어린 아이를 가리킨다. 아마 부모들이 예수에게 데려온 자녀들을 암시하는 것 같다. 힙포크라테스(Hippokrates)는 7살 아래의 아이를 파이디아(paidia)로 분류하였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동작은 공동성서(구약성서)의 여러 곳에 보인다. 희생제사에 쓰일 동물 위에(레위 1,4), 모세가 요수아에게(신명기 34,9), 부모가 자녀를 축복할 때(창세기 48,14-18) 머리에 손을 얹었다는 기록이 있다. 예수 시대에도 율법학자들이 제자들과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 같다. 자녀 축복은 집안에서 부모가 행하였고 제사에서는 사제들이 백성을 축복하였다. 유다 어린이들은 보통 5살 때 토라를 읽기 시작하고 10살 때 미쉬나(Mischna, 구전[口傳]율법)을 배우기 시작하며 13살부터 계명 준수를 요구받게 된다.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라는 이유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당시 사회적으로 존재 의미가 없던 어린이와 여성들의 처지를 제자들이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다. 마태오는 그저 예수의 반응에만 신경 쓰고 있다. 14절 예수의 말씀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이야기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어린이 뿐 아니라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을 14절은 분명히 언급한다.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작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한다. 하늘나라의 우선적 손님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을 특별히 대우하는 예수의 태도에 혹시 불쾌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 단락의 주제는 어린이처럼 작은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교회사에서는 이 이야기를 어린이 같은 사람에 대한 집중은 외면한 채 엉뚱하게도 어린이 세례와 연결시키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 분열(종교개혁) 시대에 어린이 세례에 대한 근거로 자주 인용되었다. 루터(Luther)는 어린이 세례를 이 단락에 연결시켰고 가톨릭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부터 어린이 세례와 오늘 단락을 연결하는 논의는 점차 사라졌다. 초대교회에 어린이 세례가 있었다고 강력히 주장하던 두 성서학자 쿨만(Cullmann)과 예레미아스(Jeremias)도 그 입장을 완화시켰다. 이제 그런 주장을 펼치는 성서학자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초대교회에서 어린이 세례가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오늘 단락의 19,14과 사도행전 8,36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늘 단락의 내용은 어린이 축복이지 어린이 세례가 아니다. 고린토전서 7,14는 어린이 세례가 있었다는 주장에 대한 반대 근거다. 성서신학이 교회 전통에 밀려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오늘 단락이 꼽힌다.

일단 자리 잡은 전통은 (성서에 근거가 있든 없든) 그리스도교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먼저 전통이 세워지고 나중에 성서적 근거를 찾아 헤매는 경우도 없지 않다. 성서적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전통의 자생력은 계속 유지된다. 가톨릭교회의 경우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오래 된 것은 무조건 옳은 것인가. 근거 없는 전통은 왜 고쳐지거나 사라지기 어려울까. 신앙의 선조들에 대한 예우 차원인가. 성서는 멀고 전통은 가까운가. 전통의 이름으로 교회 안에서 위력을 떨치는 것들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고칠 것은 빨리 고치는 것이 상책이다.

성서와 전통이 대립하는 경우라면 성서학자는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가. 마땅히 성서 편에 서야 하겠다. 근거 없는 전통에 대해 성서학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 자초지종을 정직하게 설명해야 하겠다. 성서학자는 성서를 변호하는 사람이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지 않을 때 신학자는 누구를 편들어야 하는가. 신학자는 무조건 교회를 편들어야 하는가. 신학자는 우선 가난한 사람을 편들어야 하겠다. 신학 정보를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 정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용 신학자 되기 쉽다. 교회가 본분을 잊고 자기이익에 몰두할 때 신학자는 교회를 강력하게 비판해야 한다. 공동성서 시대의 예언자의 임무가 오늘은 신학자에게 맡겨져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족] 예배와 미사에서 어린이들을 조용한 방에 격리시키지 말고 어린이다운 모습으로 참여하도록 배려하면 어떨까. 갓난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을 하느님이 기뻐하실 것 같다. 정적이 감도는 장례식 분위기가 예배와 미사의 원칙은 아니지 않는가. 성인 신자들이 그 독점적 주인공은 아니지 않는가. 하느님 앞에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세가 더 아름다워 보인다.
 

 
 
김근수 (요셉)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