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처녀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는,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종말, 재림, 심판을
항상 잘 대비하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종말은 ‘지금’ 올 수도 있으니 대비하는 일도 ‘지금’ 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마태 25,1-4).”
이 상황은, 신랑이 늦어질지도 모르니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하라는 지시가
미리 내려져 있었던 상황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 지시대로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신랑의 도착 시간을 예상하고서
기름을 너무 많이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
그리고 자기들 생각대로 실제로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마음대로 정해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라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슬기로운 신앙인은 겸손한 자세로 “나는 아직도 부족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더욱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25,5-9).”
여기서 열 처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는 것은,
‘깨어 있어라.’ 라는 가르침과는 상관이 없고,
신랑의 도착이 예상보다 늦어진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기름이 다 떨어져서 등불이 꺼져 가고 있음을 처녀들이 모르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신랑이 제 시간에, 또는 예상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면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을까?
이 이야기는 원래 준비 자세를 가르치기 위한 비유이기 때문에,
신랑이 제 시간에, 또는 예상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것으로 설정되었다면,
어리석은 처녀들은 아예 기름이 하나도 없어서
처음부터 등불을 켜놓지 않고 있었다는 것으로 내용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는 신랑의 도착 시간은 중요하지 않고,
처녀들의 준비 자세가 중요합니다.
(종말과 심판은 먼 훗날의 일이 될 것이라고 방심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 마음대로 그 날과 그 시간을 예상했다가
예상한 대로 종말이 오지 않아서 실망하고 준비하기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양쪽 다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 주기를 거절하는 것은,
심판 날에는 다들 그렇게 무자비하게 변한다는 뜻이 아니라,
회개는 각자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생활이란, 원래 각자 스스로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성인의 통공’을 믿고 있습니다.
나의 기도가 이웃에게 은총을 내리게 하고,
또 이웃의 기도가 나에게 은총을 내리게 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데,
그 은총은 죄 속에 있는 사람이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도와주는 은총이고,
회개는 각자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0-13).”
신랑이 도착했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것은 회개하지 않은 상태로 종말과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비유의 내용을 보면, 어리석은 처녀들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려고 기름을 사러 갔기 때문이고,
그것을 생각하면, 어리석은 처녀들에게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의 모습은, 마지막까지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심판 날이 닥친 뒤에야 뒤늦게 허둥대면서 회개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늦어도 너무 늦은, 즉 회개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심판이 이미 끝나버린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심판이 이미 끝나버린 뒤에는 더 이상의 기회는 없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문이 닫힌 뒤에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에게
주인이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말하는 장면이 루카복음 13장에도 있습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루카 13,25-27).”
여기서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라는 말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즉 사랑 없이 자기 혼자서 먹었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라는 말은,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구경만 했음을, 즉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이 두 이야기를 합해서 생각하면,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앙인이면서도 평소에 사랑 실천도 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실행하지도 않는 사람들, 즉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마태 23,3)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는 슬기로운 처녀에 해당될까,
아니면 어리석은 처녀에 해당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슬기로운 처녀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또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혼 풍속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야단스러울 만큼 요란하게 결혼식을 행하는 풍습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혼식을 앞두고 며칠 동안 횃불을 밝혀가며 춤과 노래로 밤을 지새우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결혼식 당일 날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찾아오면
신부의 들러리들은 행렬을 지어 신랑을 축하하는데
이 때가 혼인 예식이 절정을 이루는 순간이지요.
열 명 정도의 신부 측 들러리들은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신랑을 맞이했는데
올리브 기름을 적신 천을 감은 긴 막대기로 된 횃불은 대체로
한 15분 정도 타고 꺼지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시간이 지체될 때를 염려하여
여분의 기름통을 준비하기도 하였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신랑 되는 사람이
한참 늦게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마태25,5)는데 한밤중에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25,6)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지요.
이 소리에 처녀들은 모두 일어나 제각기 등불을 챙겼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그제야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지만
거절을 당하고 허둥지둥 기름을 사러간 사이에 신랑이 당도합니다.
한 발 늦게 도착한 어리석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마태25,11-12)
하며 외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비유를 마치시지요.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다음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첫 째로 신랑이 오기 전까지는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가
전혀 구분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함께 섞여 있다가 신랑이 당도하고 나서야 구분이 되었지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선한 사람이 누구인지 악한 사람이 누구인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함께 섞여 살아가면서 선한 사람도 잘 살고 악한 사람도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선인과 악인이 아주 확연하게 구분이 되며
선한 사람이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이 벌을 받는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는 것이
오늘 말씀의 가르침입니다.
때로 세상에서의 삶이 불공평하게 보이고, 또 그런 심판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지만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는 명명백백하게 밝혀져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둘째, 신랑은 전혀 뜻하지 않은 시간에 온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어느 날 몇 시에 온다고 미리 알고 있으면 준비를 잘 하고 있다가
충분히 잘 맞을 수 있겠지요.
신나게 놀고 할 것 다하고 잠도 푹 자고 있다가
자명종 소리에 맞춰서 일어나 맞이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요.
신랑이 오는 시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신랑이 온다는 것은 삶의 종말, 즉 죽음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태어난 순서대로 죽음을 맞지만 또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요.
일년에 평균 2,30 여명의 죽음을 바라보면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예측하지도 못한 순간에
마지막을 맞이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든지 응답할 준비를 성실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의 조건입니다.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가 구분이 되듯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쫓겨나는 구분은 기름을 준비했느냐, 하지 못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횃불은 누구에게나 다 준비되어 있지요.
여기에서 기름은 단지 불을 밝히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불을 밝히는 것으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세상의 주유소 사장들이
제일 먼저 선택되겠지요.
여기에서 기름은 단지 불을 밝히는 의미가 아니라 '선행'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름인 것이지요.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에게는 모두 횃불이 있었습니다.
즉, 누구에게나 기본적인 신앙은 있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실천하였는가입니다.
선행과 기도가 뒷받침되지 않은 신앙은 어리석은 처녀가 나중에 아무리 소리쳐도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마태25,12)하고 냉정하게 거절당할 뿐입니다.
신랑을 맞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선행이 준비된 충실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선행을 실천하는 지혜로운 삶이 쌓여서
주님을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의 비유로써
아주 간결하게 신앙인의 삶을 제시해 줍니다.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선행을 차곡차곡 쌓는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이 슬기로운 사람이지만,
이웃은 아랑곳없이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서 살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처녀에 해당되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기름이 떨어질 것을 대비하여
성실하게 미리 준비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나이가 많을수록 하느님 뵐 날이 가까워지지요.
하느님 뵐 날이 가까워질수록 선행의 기름을 더욱 넉넉히 채우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나이를 먹을수록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어라.'
그런데 반대로 나이가 들수록 말은 점점 많아지고 지갑은 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이제 하느님 뵐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또 그 날이 언제 어떻게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
선행의 기름을 쌓기에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사랑하다 기쁨을 잃을 때
사랑하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면서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상대의 불행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믿고 상대를 위해 내 행복까지도 잃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을 때 혼자만 행복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애착입니다.
몇 년 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죽은 남편과 7년 동한 동거한 한 여성의 실화가 공개되었습니다.
이것은 방배동 한 빌라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새어나오면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죽은 뒤 무려 7년 동안 집안에 두고 산 사람처럼 대하며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시신은 7년 동안 완전히 부패되지 않은 ‘미라’ 상태에 가깝게 보전돼왔습니다.
남편은 앞길이 유망한 환경부 고위공무원(3급. 부이사관)이었고
아내는 약사로 대인관계에 큰 이상이 없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는 시신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잠을 잤으며, 시신을 씻긴다고 했습니다.
그 집에는 세 자녀와, 남자의 친누나도 시신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취재 결과 그 남자의 가족들은 아버지가, 남동생이, 아들이 ‘살아있다’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부검 결과 시신에서 에탄올이나 포르말린 등 방부 처리한 약품 성분들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동료공무원들은 “종교의 힘으로 현대의학을 뛰어넘어보겠다.”고 했다는 진술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성지에서 남편을 위한 생미사를 봉헌했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놓아야 할 때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부활할 가능성이 없이 미라가 된 사람들과 사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관계를 끊는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자유로운 두 영혼이 하는 것인데
한 사람이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다면 자유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까칠할 때는 까칠해야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이 건강한 까칠함입니다.
그렇게 자유로운 사람이 오히려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관계 맺을 준비가 더 잘 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직장 상사가 술 한 잔 하자고 제안하는데 싫다고 단호하게 대답하려면
더 이상 그에게 좋은 대접을 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말아야합니다.
하지만 그런 까칠함이 없는 것이 더 이상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서 오는 또 다른 이익을 바라고 관계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싫은데 그런 관계를 맺어야만 해서 억지로 술자리에 참석한 사람이
그 상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관계 때문에 기쁨을 잃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리옷 유다와 함께 지옥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복음에서 현명한 처녀들이 미련한 처녀들에게
자신들의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름을 나눈다고 자신들의 불이 곧 꺼진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것을 꺼뜨릴 위험마저도 감수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금은 매정한 듯 보이지만 그 불이 꺼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건강한 까칠함이란 적어도 내 안에 등잔불이 꺼지지 않을 정도까지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등잔불이란 성령의 타오름인데,
그 열매인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잃어가면서까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줄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누군가를 함께 미워해야 한다면 그 관계를 끊으십시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기쁨과 평화를 잃게 된다면 그런 관계는 끊어야합니다.
그것들을 지킬 수준이며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만나도 됩니다.
이것이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사람의 관계 맺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관계에 먹히고 애정에 먹혀 그것들의 노예가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누가 보나 보지 않나 한결같아야 한다
맥시칸의 결혼식과 인도 사람의 결혼식, 그리고 미국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문화가 다르지만 복을 빌어주고 헤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자녀의 풍요를 누리기를 바라는 기원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신랑신부를 끈으로 묶는 행위라든지 반지를 교환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쌀을 뿌리는 행위를 통해서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약의 선언 후 성모님께 꽃을 봉헌하는 모습을 통해 신앙인의 모습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의 결혼 풍습은 약혼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약혼으로 법적인 혼인이 성립되지만 약 1년간은 신부가 친정에 머물러 있고
부부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갑니다.
신부 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을 마중합니다.
그리고 신랑 일행이 도착하면 함께 들어가 밤새도록 잔치를 벌입니다.
왠 등불이냐고요?
사막지역은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밤을 이용하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고 다섯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신랑이 일찍 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늦어져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있으나마나 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저는 하루일정을 마감하며 자동차의 주유상태를 확인합니다.
혹 급한 일이 있어도 일정거리를 갈 수 있도록 하기해서 입니다.
간혹 미처 확인을 하지 못하는 날이면 하필 그날에 일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하루쯤이야! 하고 방심하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형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우정을 쌓는 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천상잔치에 참여하기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인 풍습은 다르지만 그 안에 예식이 의미하는 알맹이가 있듯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 하기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의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순간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가 있는데
1). 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2). 못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는 것이며
3). 내가 거기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남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도 있는데
1).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2). 나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미안하고
3).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 성인들의 통공과 가족, 이웃들의 희생과 기도로
온 것이기에 미안하답니다.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