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7-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8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9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0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12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Jesús dijo a sus discípulos: «Pedid y se os dará; buscad y hallaréis; llamad y se os abrirá. Porque todo el que pide recibe; el que busca, halla; y al que llama, se le abrirá. ¿O hay acaso alguno entre vosotros que al hijo que le pide pan le dé una piedra; o si le pide un pez, le dé una culebra? Si, pues, vosotros, siendo malos, sabéis dar cosas buenas a vuestros hijos, ¡cuánto más vuestro Padre que está en los cielos dará cosas buenas a los que se las pidan! Por tanto, todo cuanto queráis que os hagan los hombres, hacédselo también vosotros a ellos; porque ésta es la Ley y los Profetas».
«Todo el que pide recibe; el que busca, halla»
Rev. D. Joaquim MESEGUER García
(Sant Quirze del Vallès, Barcelona, España)
Hoy, Jesús nos habla de la necesidad y del poder de la oración. No podemos entender la vida cristiana sin relación con Dios, y en esta relación, la oración ocupa un lugar central. Mientras vivimos en este mundo, los cristianos nos encontramos en un camino de peregrinaje, pero la oración nos acerca a Dios, nos abre las puertas de su amor inmenso y nos anticipa ya las delicias del cielo. Por esto, la vida cristiana es una continua petición y búsqueda: «Pedid y se os dará; buscad y hallaréis; llamad y se os abrirá» (Mt 7,7), nos dice Jesús.
Al mismo tiempo, la oración va transformando el corazón de piedra en un corazón de carne: «Si, pues, vosotros, siendo malos, sabéis dar cosas buenas a vuestros hijos, ¡cuánto más vuestro Padre que está en los cielos dará cosas buenas a los que se las pidan!» (Mt 7,11). El mejor resumen que podemos pedir a Dios se encuentra en el Padrenuestro: «Venga a nosotros tu Reino, hágase tu voluntad así en la tierra como en el cielo» (cf. Mt 6,10). Por tanto, no podemos pedir en la oración cualquier cosa, sino aquello que sea realmente un bien. Nadie desea un daño para sí mismo; por esto, tampoco no lo podemos querer para los demás.
Hay quien se queja de que Dios no le escucha, porque no ve los resultados de manera inmediata o porque piensa que Dios no le ama. En casos así, no nos vendrá mal recordar este consejo de san Jerónimo: «Es cierto que Dios da a quien se lo pide, que quien busca encuentra, y a quien llama le abren: se ve claramente que aquel que no ha recibido, que no ha encontrado, ni tampoco le han abierto, es porque no ha pedido bien, no ha buscado bien, ni ha llamado bien a la puerta». Pidamos, pues, en primer lugar a Dios que haga bondadoso nuestro corazón como el de Jesucristo.
♣ 모두의 청을 들어주시는 주님의 사랑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청하기도 전에 주십니다. 따라서 청할 필요도 없이 주시는 대로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7,8)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그분은 누구든 차별하지 않고 보편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에서 뜻을 이루고 뭔가를 얻으려고 하느님께 기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는 찾고 구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습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면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정한 때나 방식에 매이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을 주님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식으로 주십니다.
무엇을 어떤 지향으로 청하느냐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보통 우리는 자신의 현세 삶에 필요한 것들을 청합니다. 그러나 먼저 청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할 때 그분 친히 나의 모든 것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갈망해야 할 것은 주님의 영입니다.”(성 프란치스코)
다음으로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청해야 합니다. 에스테르 왕비는 그런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는 주님께 자신과 유다 민족에게 닥친 죽음의 위협에서 구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왕 앞에 나아가 청하는 기도를 통해 두려움을 이겨내고 백성을 구원합니다.
그런데 현세 삶에 필요한 것을 청해서는 안 될까요? 무엇을 청하든 중요한 것은 지향입니다. 현세 삶에 필요한 것이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든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실현하려는 거룩한 지향을 지니고 청해야 합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하느님의 부르심에 더 잘 응답하고 더 좋은 사랑의 도구가 되려는 지향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어떤 자세로 청하는 것이 좋을까요?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내 뜻대로 움직여주시길 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게 해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또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며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기도를 들어주시든 거기에 집착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나아가 자신의 선행에 대한 대가를 청하는 것은 주님을 거래 대상으로 여기는 그릇된 처사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좋은 것을 훨씬 더 많이 주십니다(7,11). 따라서 무엇을 청하든 하느님의 ‘사랑의 관대함’을 공유하고 나눌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을 구하고, 모두가 기뻐할 수 있는 길을 찾으며,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두드려 여는 기도가 절실할 때입니다.
오늘도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의 청을 기꺼이 들어주시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과 ‘주님의 영’을 갈망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을 끈기있게 청하는 거룩한 청원의 날이 되길 희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받은 것입니다!
기도와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오 복음 7장 7~8절)라는 말씀은, 생각하기에 따라 오해의 소지라 많은 말씀이라 신중한 해석이 요구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말씀에 굳은 확신을 갖고, 목숨을 다하여 간청했습니다. 십 년, 이십 년, 평생에 걸쳐 청했지만, 그러나 그 어떤 응답도 받지 못한 채, 실망하며 빈손으로 떠나갔는지 모릅니다.
특히 너무나 절박한 상황 앞에서, 극도의 가난 앞에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간절히 청하고 또 청했지만, 끝내 주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불치병으로 앓던 아들은 세상을 떠났고, 안전한 귀향을 바랐던 남편은 전사했습니다. 결혼은 파국으로 마무리되었고, 정든 집과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기도하던 백성들은 박해를 당했고 교회는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이토록 무자비한 현실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너무나 대치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웃들이 겪는 이해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우리는 주님께 청할 것, 그리고 그분께서 주실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가 보다 폭넓고 보편적인 기도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와서, 꽃같은 시절이 있었다면, 꽃이 지는 시절도 있는 것입니다. 막 출고된 신차처럼 건강미 철철 넘치는 젊은 시절이 있는가 하면, 노후된 중고차 처럼 여기 저기 아프고 골골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한 인간 존재로서, 대자연의 순환주기와 생로병사의 큰 흐름 안에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수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주님께 청할 것,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실 것은 세상에서의 복락이나 승승장구가 아니라 오직‘성령’이십니다. 간절히 청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받은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의 댓가로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은총이 뒤따릅니다. 그토록 이해할 수 없었던 비극적인 현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억울한 사건들도 수용하게 됩니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 고통과 십자가, 죽음마저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께서 친히 우리 마음의 문을 여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정착하십니다. 우리 안에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보게 됩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기도에 대해 과장하지도, 비하하지도 말라
[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42
김근수 ( editor@catholicnews.co.kr )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276
“7 간청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찾으십시오, 그러면 얻을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열릴 것입니다. 8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입니다. 9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여러분 중에 누가 있습니까? 10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11 여러분은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안다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마태 7,7-11)
‘재산을 땅에 쌓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심판하지 말라’ 등 부정적 경고와 명령 뒤에 복된 선언에 대한 설명 끝 부분까지 긍정적 권고가 이어진다. ‘받을 것이다, 얻을 것이다, 열릴 것이다’라는 수동태 동사는 인간의 태도에 대한 하느님의 반응을 나타낸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어떤 조건도 오늘의 단락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기도할 때 자기 영혼을 하느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유다교 스승(랍비)들은 가르쳤다. 기도하는 순간 하느님이 바로 눈앞에 계신 것처럼 생각하라는 뜻이다. 나는 하느님 손바닥 안에 있다.
간청하면 받는다는 것은 구걸하는 거지들의 논리다. 예수 시대에도 떠도는 거지들은 많았다. 구하고 찾는 것은 지혜문학에서 애용되는 표현이다(잠언 2,4; 마르 13,45).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것을 기도와 연결시켰다.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내게 기도하면, 나는 너희 말을 들어주리라.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찾으면 내가 너희 앞에 나타나리라”(예레 29,12). ‘두드리고, 열리는’ 비유는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마태 25,11; 루카 12,36; 묵시 3,20).
그러나 악한 자의 기도를 하느님은 반기지 않는다. “귀를 막고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하느님은 그 기도마저 역겨워 하신다”(잠언 28,9). 기도가 받아들여질 것이라 권고하는 임무는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특히 예언자들의 몫이다. “네가 부르짖으면 하느님이 대답하실 것이다. 네가 도움을 청하면 하느님은 말하실 것이다. ‘내가 여기 있다’”(이사 58,9).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로 옮겨진다.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딸의 비유라 여겨도 되겠다. 빵과 생선은 겟네사렛 호수(갈릴래아 호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주식이다. 빵과 돌, 생선과 뱀은 모양이 비슷하여 그런 비유가 쓰인 것 같다.
11절 “여러분은 악하면서도”라는 표현에서 이른바 성악설이나 구원예정설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칼빈과 바르트는 예정설을 주장했지만 예정설은 예수와 아무 관계없다. 그리스도교는 어떤 종류의 예정설도 교리(dogma)로 가르친 적이 없다.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진리라는 뜻의 도그마(dogma)는 억지 주장 등의 부정적인 뜻을 가리키는 단어로 흔히 잘못 사용되고 있다.
자녀를 학대하는 악한 아버지의 비유가 오늘의 단락에 보인다. 나쁜 어머니의 비유도 공동성서에 나타난다. 부모라고 어찌 다 같은 부모일까.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으리라”(이사 49,15).
부모가 자녀를 버려도 하느님은 인간을 버리지 않으신다. 부모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유추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서 부모의 사랑을 보는 것이다. 인식론 순서는 부모의 사랑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의 사랑 쪽으로 향하지만 판단 순서는 그 반대다. 그것이 신학적 순서다. 칸트식으로 말한다면, 지식은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경험이 지식의 판단기준인 것은 아니다.
오늘의 단락은 하느님과의 거래 원칙에 대한 조언이 아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획득하기 위한 요령을 가르치는 대목도,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장사 수완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부모보다 하느님을 더 믿으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하느님께 마음 놓고 기도하라는 권고의 말씀이다.
기도하라는 말씀은 특히 오늘 사방에서 묵살되고 있다. 기도를 자본주의 논리로 악용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탓에 기도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싸늘하다. 합리성을 최고 원칙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기도를 업신여기기도 한다. 기도를 주술적으로 과장하는 것도, 기도를 문맹적 행위로 비하하는 것도 올바른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대로 기도는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도록 도와준다. 올바른 기도가 참으로 드문 오늘이기에 기도는 더 소중하다.
예수 시대 유다인들은 주로 어떤 기도를 바쳤을까. 가난한 사람들은 기도에서 무엇을 간청했을까. 로마 식민지에서 해방되게 해주십사 그들은 간청하였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하였다.
다른 사람은, 다른 민족은 무엇을 기도하는지 우리는 가끔이라도 살펴보자. 우리 시대에 중요하고 시급한 기도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성철 스님의 말이다.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역사의 희생자를 위한 기도는 더 아름답다. 예수의 삶 자체가 역사의 희생자를 위한 기도였다. 기도는 문장이 아니라 삶이다.
예수의 역사보다 예수의 말씀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그리스도교에 두드러진다. 그리스도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요약하는 사람도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의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하지만 예수의 역사는 말씀 못지않게 중요하다. 성서에서 말씀만 읽고 그 역사를 외면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성서를 반쪽으로 축소하는 격이다.
성서는 예수의 단순한 어록이 아니다. 이솝 이야기, 채근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부류의 책과 성서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성서에는 예수의 말씀 뿐 아니라 예수의 역사가 살아 숨 쉰다. 성서는 말씀보다는 역사가 우세한 책이다. 그리스도교는 말씀의 종교라기보다 역사종교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김근수 (요셉)
사랑도 용서도 희생도, 내가 먼저
[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43
김근수 ( editor@catholicnews.co.kr )
“여러분이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마태 7,12)
흔히 ‘황금률’이라 부르는 오늘 구절은 예수 어록(Q)에서 원수 사랑 부분에 있던 것이 확실하다. 그것을 마태오는 복된 선언 마지막 부분으로 옮긴 것 같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는 구절은 마태오가 덧붙인 것 같다. 예수가 이미 한 말을 기억시키려는 의도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습니다”(마태 5,17).
황금률은 공자의 논어와 인도에서도 보인다. 그리스에서도 헤르도트(Herodot) 이래 거의 모든 문학 유형에서 흔히 나타난다. 유다교에서 황금률은 널리 퍼지진 않았다.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유다교 문헌에서 간혹 등장한다. 황금률과 이웃 사랑을 연결한 것이 유다교적 특징이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레위 19,18).
예수 시절 존경받던 랍비 힐렐은 모세오경의 요약으로 황금률을 언급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물론 토라를 황금률로 대체할 수는 없다. 황금률은 보통 긍정적 문장과 부정적 문장으로 나타난다. 힐렐의 부정적 표현과 마태오의 긍정적 표현에서 결정적 차이를 이끌어낼 필요는 없다. 황금률이 예수의 독특한 사상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는 남에게 배우는 데 게으르지 않던 분 같다. 예수는 남에게서 배우고 그것을 자기 방식대로 발전시킨 분이다. 공자처럼 예수에게도 뚜렷한 스승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세례자 요한은 분명 예수의 스승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에게 진정한 스승은 곧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이라고 볼 수 없는 오늘의 문장이 마태오 복음에서 왜 나타날까. 당한 만큼 보복한다는 전투수칙, 주고받는 합리적 행동원칙을 황금률이 표현했다고 보는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 내 행동이 이웃을 넘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 행동의 규준이 되게 하라는 칸트의 언급으로도 조금 부족하다. 이웃 사랑과 연결한 유다교적 특징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황금률의 문제는 루카 복음 6,32-34에서 드러난다. “여러분이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잘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인들도 그만큼 합니다.” 황금률 정도는 죄인들도 능히 한다는 지적이다. 악의 세력은 서로를 보호하는 데 능숙하다.
황금률은 원수에 대한 사랑(루카 6,31)으로 보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황금률은 보복(Talio) 원칙에서 멀지 않게 된다. 그것이 마태오가 결국 하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사상의 특징이다.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을 넘어서 원수 사랑에까지 진전시키는 예수다. 율법을 비판함으로써 율법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함으로써 율법이 완성된다(갈라 5,14; 로마 13,8-10; 야고 2,8).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먼저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랑을 받은 후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도 용서도 희생도 ‘내가 먼저’―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특징이다. 그런 힘이 어디서 올까. 바로 예수에게서 온다는 가르침이다. 예수에 집중하자. 그리스도교에 등장한 수많은 성인들과 신학자들을 보기에 앞서 먼저 예수에 집중해야 한다. 예수가 누군지도 잘 모르면서 마리아, 성인, 어떤 신학자니 무슨 신학 흐름이니 언급하는 사람이 드물지 않다.
먼저 사랑하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희생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정말 그렇게 하는가. 가톨릭 성직자들과 개신교 목회자들은 사랑도 용서도 희생도 먼저 하는가. 남에게는 그렇게 하라고 설교하지만 자신들은 먼저 그렇게 하는가.
먼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부족하다. 누구나 먼저 자기 자신을 개혁해야 한다. 교회도 종교인들도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남에게 해 주려면 자신을 먼저 고쳐야 한다. 남에게 바라지 말고 남에게 해 주려면 더욱 그렇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고 예수가 말하는 대목은 예수가 그들을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바리사이는 모범적 신앙인으로, 율법학자는 뛰어난 성서학자로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존경받았다. 그들은 기도, 선행, 성서 공부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신앙인들이었다. 그런 그들보다 예수 제자들은 더 뛰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흔히 설교자들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를 ‘위선자’라 칭하며 가볍게 무시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유다교를 비판해서 그리스도교가 향상되지는 않는다. 공부 잘하는 학생을 비판해서 자기 점수가 오르진 않는다.
그들의 신앙심과 성서 식견을 솔직히 나는 십분의 일도 따라갈 자신이 없다. 그들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그것을 예수는 비판한 것이다. 종교적 모범과 성서 식견에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면 예수에게 비판받는 것이다.
우리 시대 모범적 신앙인들과 성서학자들은 예수 시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 크게 다른가. 그들과 비슷한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은 오늘 누구일까. 그들에게 향한 비난을 자기 자신에게 먼저 향해야 할 사람들이 교회 안에 적지 않다.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에서 우리 믿음의 진실 여부가 마침내 드러난다.
김근수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