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판화 / 김수원
밤새 흰 눈이 내렸거든요
고드름 하나 꺾어
눈밭에 판화를 새겼거든요
고드름을 조각칼로 쥐고
자작나무도 파고요 굴뚝새도 팠습니다
우리집 마당이 판화가 되었지요
바람이 쓱쓱 지나가며 나뭇가지마다 하얀 선을 긋고
새 한 마리 발자국 콕콕 찍어 낙관을 남깁니다
햇살이 나타나기 전까지 잠시 멈춰버린 고요
쏟아져 내리는 눈송이를 자세히 보면
눈의 결정체에도 작은 세상이 있어요
그 세상도 누가 칼날로 팠나요
겨울을 파내는 사람들 너무 많아서
판화 가장자리로 눈이 쌓여요
내 몸은 판화 속에 있어요
햇살은 아주 큰 조각칼
눈이 녹으며 군데군데 검게 파내요
마당의 판화를 모두 밀어버리면
겨울 판화는 사라지고
나는 쓸쓸하고
눈이 또 내리길 기다립니다
눈은 내리지 않고
나도 사라집니다
낯선 도로에서 / 김수원
당신이 신기루처럼 희미해질 때 있어요
먼 곳에서 깃발을 흔들며
앞장설 때도 있지만
신기루처럼
당신은 흩어지고
나는 깃발을 스쳐 가고 말아요
신기루니까요
뜬구름을 잡는 걸까요
일생에 잡아본 것은 빈주먹뿐이었는데요
당신은 가끔 대기권 밖을 떠돌다가 돌아온 사람 같아요
유영하는 그림자였던 것도 같고
낯선 도로에서
장승처럼 서 있기도 하고
그런 당신의 표지를 따라왔어요
당신이 깃발처럼 펄럭일 때 있거든요
닿지 않는 거리는 틈일까요
다가가는 만큼 멀어지는 교차로,
희미해지는 거리의 끝에서
신호등처럼 입술이 붉게 켜지고 있나요
내가 가면 왜 따라오나요
건물도 나무들도 구름도
긴 신호가 되는 나를 따라 왔어요
나는 당신을 따라왔고요
깃발을 흔드네요
그림자처럼
김수원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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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불교문예 시 등단, 2019년 한국시조문학시조등단,
수상: 숲속에 시인상. 참여문학상. 계간문예 작가상, 상상탐구 작가상.
시집 「바람의 순례 외」 「나는 아직 넘치지 않았다」 외 동인지 2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