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속에 숨어 있던 글씨 서각書刻
전홍구
어느 날 문득 나는 나무판 위에 써 놓은 글씨를 바라보다가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종이 위에 적힌 글씨는 분명 내 손으로 쓴 것인데도 어딘가 허전했다. 뜻은 있었으나 숨결이 없었고 모양은 있었으나 체온이 없었다. 마치 뿌리를 잃은 나무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글씨를 쓰는 사람에서 글씨를 살려내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서각을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처음 칼을 잡았을 때 나는 글씨를 새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깨달았다. 칼은 글씨를 만드는 도구가 아니라 숨어 있는 글씨를 꺼내는 도구라는 사실을.
나무는 침묵의 생명체다.
숲에서 베어져 나와 오랜 세월 말없이 살아온 존재다. 사람들은 죽은 나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무는 여전히 살아 있다. 다만 말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그 침묵 위에 붓으로 글씨를 썼다.
글씨를 쓰는 순간부터 이미 나무와 대화가 시작된다.
어떤 글자는 힘차게 뻗어 나가려 하고 어떤 글자는 조용히 웅크려 앉아 있다. 어떤 획은 바람처럼 흐르고 어떤 획은 바위처럼 무겁다.
칼을 들고 첫 획을 파내는 순간 나무는 비로소 자기 속살을 보여준다.
결을 따라 칼이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나무 향이 피어오른다. 그 향기는 마치 오래된 기억의 냄새 같았다.
어릴 적 아버지가 다듬던 나무의 냄새 겨울 아궁이에서 타오르던 장작 냄새 비에 젖은 숲길의 냄새가 함께 깨어난다.
나는 글씨를 새기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파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획 한 획이 깊어질수록 글씨는 나무 위에서 서서히 일어선다.
마치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듯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언어가 목소리를 찾듯 글씨는 조금씩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신기한 일이다.
붓으로 쓸 때는 보이지 않던 생명이 칼끝을 지나면서 나타난다.
빛이 깊은 곳에 그림자를 만들고 그림자는 다시 빛을 더욱 빛나게 한다.
그 순간 나는 문득 사람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상처를 입는다.
기쁨보다 아픔이 깊을 때도 있고 햇살보다 그늘이 길게 드리워질 때도 있다.
그러나 서각을 하면서 깨달았다.
깊이 파인 곳이 있기에 빛이 머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무런 흔적도 없는 평평한 나무에서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아픔이 깊었던 사람일수록 타인의 눈물을 이해하고 상처가 컸던 사람일수록 더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결국 삶의 아름다움은 상처가 없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가 빛을 품게 되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작업이 끝난 후 나는 한참 동안 작품 앞에 서 있곤 한다.
조금 전까지 나무였던 것이 이제는 글씨가 되어 있다.
아니, 글씨를 넘어 하나의 생명이 되어 있다.
그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나무 속에 숨어 있던 것을 겨우 발견했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사람도 그렇다.
누구의 가슴 속에도 아직 깨어나지 못한 문장이 하나씩 숨어 있다.
사랑이라는 글자 그리움이라는 글자 용서라는 글자 희망이라는 글자.
우리는 평생 그 글자를 찾아가는 여행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나무 앞에 앉는다.
붓을 들고 칼을 들고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나무가 들려주는 침묵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그리고 언젠가 내 생이 다하는 날 누군가가 나를 서각 한다면 좋겠다.
세월이라는 칼끝으로 불필요한 것을 모두 덜어내고 욕심과 허영의 껍질을 벗겨내어 마침내 내 안에 숨어 있던 진짜 한 글자를 꺼내 준다면 좋겠다.
그때 나는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서각은 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영혼 속에 숨어 있는 이름을 찾아내는 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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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필
■ 전홍구 시인, 수필가
△『문예사조』 시, 수필 등단(1991)
△ 국가유공자, 남양주은성교회 안수집사
△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원, 국제PEN한국본부 회원
△ 서울시인협회 부회장, 국보문학 상임고문
△ 수상 : 2024년 국보문학 우주문학상 시 부문 대상 수상
2025년 글로벌컬쳐 명인대상 수상
2026년 대한민국 시문학발전 공로대상 수상
△ 시집 : 제3집『나뭇가지 끝에 걸린 하늘』, 제6집『그래도 함께 살자고요』
제7집『나의 펜은 마른 적이 없었다』, 제8집『80송이』,
제9집『별 하나 뜨게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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