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15> 마닐라의 밤 생활
그때는 우리도 무척이나 젊었었나보다. 아침 7시부터 밤 11시 반까지의 그 혹독한 업무를 끝내고 우리들은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나는 술을 잘 못해서 이 궁리 저 궁리 해가며 가능한 한 술자리를 피하고 책 좀 보다가 잠 좀 더 자려고 했는데 허 과장, 오 과장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직원들이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도 날 그대로 놔두질 않았다.
입찰 때부터 현지에 나와 있어서 현지 사정을 남들보다 좀 더 잘 알고 현지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현장 초창기 3 ~ 4 개월 동안은 밤마다 내 일과는 한 팀 술집 데리고 가서 콧속에 바람 좀 넣어주고, 그 다음날은 다른 팀이 또 그 다음 날은 또 다른 팀의 길 안내, 술집 안내를 했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두어 달 계속 그러다 보니 잠이 부족해서 완전히 쌍코피 터질 지경이었다.
11시 반에 업무 끝나고 샤워하고 나면 12시 되는데 그때 나가서 술집 문닫는 새벽 세시까지 우두커니 남들 술 마시는 것 기다리다 숙소 돌아오면 새벽 3시 반에서 4시... 2 시간 반 정도 잠깐 눈 붙이고 6시 반에는 일어나서 아침 밥 먹는 둥 마는 둥하고 현장 나가서 업무를 보게 되는데 제대로 일이 됐을까?
오늘은 죽어도 못나가겠으니 제발 하룻밤만 쉬자고 해도 다른 팀이 나가는 다음 날 쉬라고 하고 그 다음 날에는 또 다른 팀이 똑 같은 말을 해서 완전히 기가 다 빠져나갔는데 그래도 어쨌든 나한테는 술값 내라는 소리는 안 하니 계속 노력 봉사는 했고, 그러다 보니 추억에 남는 일도 꽤 많았던 것 같다.
대리 3년 차인 내가 제일 쫄병이라 고참 대리 과장 눈짓하나에 거실에서 바둑 두시는 소장님, 공무 부장님 등 윗분들 눈치 피해서 현관 신발장에서 고참들 신발 한아름 숨겨 않고 이층 우리 방으로 올라가면 그때부터 마닐라의 밤 생활이 시작됐다.
현관을 통해서 나가면 윗사람들한테 싫은 소리만 듣고 못 나갈 테니까 그 분들 시선을 피해 낮은 포복으로 이층 마루를 건너질러 회전계단을 타고 식모 방으로 잠입, 거기서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곤 했다. 밖에 나가서도 차에 시동 걸면 안에서 듣는다고 내가 운전대 잡으면 허 과장, 오 과장, 이 대리는 뒤에서 차를 100 미터 이상 밀고 가 경비초소 앞에서 이제는 안전하겠지 하고 시시덕대며 차의 시동을 걸곤 했는데 그런데도 뭐가 그리 좋았는지?
매일 매일이 지루한 생활이었기에 서로 돌아가며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까 하고 아이디어를 하나씩 내놓곤 했는데 "야! 오늘은 모두 흰색 바지에 빨간 넥타이하고 나가는 거다" 하면 10 분 후에 모두 허연 색깔 바지에 모두들 새빨간 넥타이하고 모여 서로 바라보고 낄낄거리며 밤 외출을 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지만 우리에겐 필요는 궁리의 어머니였다. 처음 한달 정도만 우르르 몰려다니다 서로들 추구하는 바가 틀렸든지 마음이 맞고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2명 또는 3명씩 조를 짜서 음식점, 술집, 마사지 집, 사창가 등 자기들 취향에 따라 그래도 좋다는 집들을 한번씩 방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각 조별로 구역을 나누어 일주일에 2 ~ 3일 씩 서로 다른 업소에 가서 몸으로 직접 느껴보고 위치, 가격, 특징, 장단점 등의 정보를 서로 교환하여 석 달 정도 지나고 나니 마닐라 시내의 유흥업소에 관한 한 10여 년 이상 살아 온 교포들 보다 더 잘 알게 되었는데 우리는 이것을 현지 시장조사라고 불렀다.
제 이차 세계 대전 중에 일본 사람들은 현지인들 앞에서는 점잖게 행동했고 지금도 돈 많은 나라에서 와서 팁을 후하게 주니까 인기가 많았으나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사람 대신 형무소 소장을 했고 식민지 기간 중에 현지 인들을 많이 괴롭혔다고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기는 별로 없었기에 이에 약이 오른 김 과장은 술집에서 짓궂은 행동을 할 때나 팁을 주기 싫으면 항상 일본에서 온 "기무치 상"으로 행동했었다.
그래도 마닐라의 술집은 우리나라에 비해 손님을 손님으로 제대로 대접을 해 주었던 것 같다. 가끔 국내에서 단란 주점이고 룸 싸롱이고 몇 번 따라가 보긴 했는데 이건 뭐 손님이 접대부인지? 접대부가 손님인지? 도대체 왜 비싼 돈 내고 술 마시고 또 팁까지 주어가면서 옆에 앉아 가끔씩 신경질 팍팍 부리는 여자들 비위를 왜 맞춰야 하는지 모르겠다.
필리핀 술집의 엔터테이너들은 접대하는 일을 하나의 떳떳한 직업으로 생각하여 손님을 맞을 땐 항상 프로의 근성을 발휘하여 웃는 얼굴로 맞이한다 또 그 시간을 즐기려고 손님들에게 먼저 장난을 거는 경우도 많고, 혹간 손님들이 짓궂게 굴어도 요령있게 피하며 항상 밝은 얼굴을 유지해서 술을 마시고 나오면서 바가지 썼다는 생각이 안 들고 유쾌하게 나올 수 있도록 한다.
날씨가 더운 지방이라 독한 술들은 못하고 주로 현지에서 생산되는 싼미규엘 비어(맥주)로 했는데 부담 없이 마시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가끔 무대 위에 올라가 춤을 추는데 여러 사람들이 분위기를 같이 맞춰 줘서 몸치(맞나?)인 내가 귀국 후엔 그래도 춤 한가닥한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물론 요즘엔 나이가 좀 들었다는 이유로 최대한 자제하긴 하지만...
옛날엔 마닐라 술집들이 거의 앞에 무대가 있어 십 수명씩 비키니 차림으로 나와, 스트립 쇼를 하곤 했는데 최근에 가보니 우리나라 단란주점 형태로 많이 바뀌었고 또 한국인이 경영하는 음식점, 술집, 모텔, 하숙 등이 많이 늘어 마카티에만 20 여 업소가 넘는다고 했다.
자주 갔던 음식점이 코리아 가든(한국관)과 고려정 이었고 가끔은 개고기 먹겠다는 사람들 따라 마산 집에 가곤 했는데 이상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값이 비싸더라도 불고기, 갈비 등의 고기 시키는 사람들이 일 인분 가격이 똑 같은데도 불구하고 고기를 안 시키고 꼭 된장찌개, 김치찌개, 짜장면 등과 그 비싼 소주(두꺼비)를 우선 시키는 것이었다.
한국에 나와서 또 회식을 같이할 기회가 생겨서 모여보니 그때는 된장찌개, 김치찌개, 짜장면 등은 안 시키고 또 고기 종류만 시키더니...
그때는 우리도 무척이나 젊었었나보다. 아침 7시부터 밤 11시 반까지의 그 혹독한 업무를 끝내고 우리들은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나는 술을 잘 못해서 이 궁리 저 궁리 해가며 가능한 한 술자리를 피하고 책 좀 보다가 잠 좀 더 자려고 했는데 허 과장, 오 과장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직원들이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도 날 그대로 놔두질 않았다.
입찰 때부터 현지에 나와 있어서 현지 사정을 남들보다 좀 더 잘 알고 현지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현장 초창기 3 ~ 4 개월 동안은 밤마다 내 일과는 한 팀 술집 데리고 가서 콧속에 바람 좀 넣어주고, 그 다음날은 다른 팀이 또 그 다음 날은 또 다른 팀의 길 안내, 술집 안내를 했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두어 달 계속 그러다 보니 잠이 부족해서 완전히 쌍코피 터질 지경이었다.
11시 반에 업무 끝나고 샤워하고 나면 12시 되는데 그때 나가서 술집 문닫는 새벽 세시까지 우두커니 남들 술 마시는 것 기다리다 숙소 돌아오면 새벽 3시 반에서 4시... 2 시간 반 정도 잠깐 눈 붙이고 6시 반에는 일어나서 아침 밥 먹는 둥 마는 둥하고 현장 나가서 업무를 보게 되는데 제대로 일이 됐을까?
오늘은 죽어도 못나가겠으니 제발 하룻밤만 쉬자고 해도 다른 팀이 나가는 다음 날 쉬라고 하고 그 다음 날에는 또 다른 팀이 똑 같은 말을 해서 완전히 기가 다 빠져나갔는데 그래도 어쨌든 나한테는 술값 내라는 소리는 안 하니 계속 노력 봉사는 했고, 그러다 보니 추억에 남는 일도 꽤 많았던 것 같다.
대리 3년 차인 내가 제일 쫄병이라 고참 대리 과장 눈짓하나에 거실에서 바둑 두시는 소장님, 공무 부장님 등 윗분들 눈치 피해서 현관 신발장에서 고참들 신발 한아름 숨겨 않고 이층 우리 방으로 올라가면 그때부터 마닐라의 밤 생활이 시작됐다.
현관을 통해서 나가면 윗사람들한테 싫은 소리만 듣고 못 나갈 테니까 그 분들 시선을 피해 낮은 포복으로 이층 마루를 건너질러 회전계단을 타고 식모 방으로 잠입, 거기서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곤 했다. 밖에 나가서도 차에 시동 걸면 안에서 듣는다고 내가 운전대 잡으면 허 과장, 오 과장, 이 대리는 뒤에서 차를 100 미터 이상 밀고 가 경비초소 앞에서 이제는 안전하겠지 하고 시시덕대며 차의 시동을 걸곤 했는데 그런데도 뭐가 그리 좋았는지?
매일 매일이 지루한 생활이었기에 서로 돌아가며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까 하고 아이디어를 하나씩 내놓곤 했는데 "야! 오늘은 모두 흰색 바지에 빨간 넥타이하고 나가는 거다" 하면 10 분 후에 모두 허연 색깔 바지에 모두들 새빨간 넥타이하고 모여 서로 바라보고 낄낄거리며 밤 외출을 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지만 우리에겐 필요는 궁리의 어머니였다. 처음 한달 정도만 우르르 몰려다니다 서로들 추구하는 바가 틀렸든지 마음이 맞고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2명 또는 3명씩 조를 짜서 음식점, 술집, 마사지 집, 사창가 등 자기들 취향에 따라 그래도 좋다는 집들을 한번씩 방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각 조별로 구역을 나누어 일주일에 2 ~ 3일 씩 서로 다른 업소에 가서 몸으로 직접 느껴보고 위치, 가격, 특징, 장단점 등의 정보를 서로 교환하여 석 달 정도 지나고 나니 마닐라 시내의 유흥업소에 관한 한 10여 년 이상 살아 온 교포들 보다 더 잘 알게 되었는데 우리는 이것을 현지 시장조사라고 불렀다.
제 이차 세계 대전 중에 일본 사람들은 현지인들 앞에서는 점잖게 행동했고 지금도 돈 많은 나라에서 와서 팁을 후하게 주니까 인기가 많았으나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사람 대신 형무소 소장을 했고 식민지 기간 중에 현지 인들을 많이 괴롭혔다고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기는 별로 없었기에 이에 약이 오른 김 과장은 술집에서 짓궂은 행동을 할 때나 팁을 주기 싫으면 항상 일본에서 온 "기무치 상"으로 행동했었다.
그래도 마닐라의 술집은 우리나라에 비해 손님을 손님으로 제대로 대접을 해 주었던 것 같다. 가끔 국내에서 단란 주점이고 룸 싸롱이고 몇 번 따라가 보긴 했는데 이건 뭐 손님이 접대부인지? 접대부가 손님인지? 도대체 왜 비싼 돈 내고 술 마시고 또 팁까지 주어가면서 옆에 앉아 가끔씩 신경질 팍팍 부리는 여자들 비위를 왜 맞춰야 하는지 모르겠다.
필리핀 술집의 엔터테이너들은 접대하는 일을 하나의 떳떳한 직업으로 생각하여 손님을 맞을 땐 항상 프로의 근성을 발휘하여 웃는 얼굴로 맞이한다 또 그 시간을 즐기려고 손님들에게 먼저 장난을 거는 경우도 많고, 혹간 손님들이 짓궂게 굴어도 요령있게 피하며 항상 밝은 얼굴을 유지해서 술을 마시고 나오면서 바가지 썼다는 생각이 안 들고 유쾌하게 나올 수 있도록 한다.
날씨가 더운 지방이라 독한 술들은 못하고 주로 현지에서 생산되는 싼미규엘 비어(맥주)로 했는데 부담 없이 마시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가끔 무대 위에 올라가 춤을 추는데 여러 사람들이 분위기를 같이 맞춰 줘서 몸치(맞나?)인 내가 귀국 후엔 그래도 춤 한가닥한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물론 요즘엔 나이가 좀 들었다는 이유로 최대한 자제하긴 하지만...
옛날엔 마닐라 술집들이 거의 앞에 무대가 있어 십 수명씩 비키니 차림으로 나와, 스트립 쇼를 하곤 했는데 최근에 가보니 우리나라 단란주점 형태로 많이 바뀌었고 또 한국인이 경영하는 음식점, 술집, 모텔, 하숙 등이 많이 늘어 마카티에만 20 여 업소가 넘는다고 했다.
자주 갔던 음식점이 코리아 가든(한국관)과 고려정 이었고 가끔은 개고기 먹겠다는 사람들 따라 마산 집에 가곤 했는데 이상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값이 비싸더라도 불고기, 갈비 등의 고기 시키는 사람들이 일 인분 가격이 똑 같은데도 불구하고 고기를 안 시키고 꼭 된장찌개, 김치찌개, 짜장면 등과 그 비싼 소주(두꺼비)를 우선 시키는 것이었다.
한국에 나와서 또 회식을 같이할 기회가 생겨서 모여보니 그때는 된장찌개, 김치찌개, 짜장면 등은 안 시키고 또 고기 종류만 시키더니...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