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중대건축93_게시판

[글]퓨쳐 워커 -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

작성자바람|작성시간03.01.13|조회수716 목록 댓글 0
번 호 : 10998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2-04 00:04
제 목 : [F/W]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1

Future Walker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1.

데이든 평원에서 켄턴으로 접어드는 길 오른편으로는 갈색산맥에서
뻗어나온 작은 산맥의 끄트머리가 평원과 만나며 작은 숲을 이루고 있
었다. 켄턴 시민들조차도 이름을 붙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볼품없는
숲이었지만 이제는 필요가 있다 해도 이름을 붙일 수가 없게 되었다.
모조리 불타버린 것이다. 평원 곳곳에 드문드문 흩어져있던 작은 숲과
관목들은 어젯밤에 펼쳐진 상상을 불허하는 싸움에 휘말려 앙상한 잿
더미로 변하거나 검은 가지만 남겨둔 채 쓸쓸하게 서있었다. 그리고
그 숲 바로 앞쪽으로 검은 안개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치 풍경화에
잘못 튕긴 검은 물감처럼, 검은 안개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데이
든 평원의 적막한 모습에 불안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300년이 지났다고 하셨소?"

흉벽 밖으로 왼쪽다리를 내놓고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 위에 올려
놓은 조금 불안하면서도 방만한 자세로 데이든 평원을 바라보며 솔로
쳐는 침착하게 질문했다. 성벽에 부딪혀 솟아오르는 거친 바람이 그의
흰 수염을 나부끼게 만들었고 그의 헐렁한 망토는 정신없이 펄럭였다.
그러나 솔로쳐 자신은 성벽 위의 조각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데
이든 평야를, 그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검은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
다. 검은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몸은 딱딱하게 굳어있는 그
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격전의 흔적은 옷 군데군데 남아있는 몇 개의
불탄 흔적과 그가 대충 던져놓은 그의 지팡이에 묻어있는 몇 방울의
검은 피 정도였다.
솔로쳐가 '집어던져둔' 지팡이는 몹시 이상한 모습으로 켄턴 시민들
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 지팡이는 솔로쳐로부터
4 큐빗 정도 앞쪽에, 즉 성벽 바깥의 허공에 떠서는 온몸으로 바람을
맞고 있었다. 곧은 지팡이의 몸체는 일곱 개의 금속 링이 둘러져 있었
고 그 끝부분에는 윤곽조차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색
을 가진 수정구가 꽂혀있었다. 어젯밤에서부터 오늘 오전까지 솔로쳐
가 그 지팡이를 쥔 채 무슨 일들을 했는지를 똑똑히 보았던 켄턴 시민
들은 경외스러워하는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과 그 지팡이를 번갈아 바
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민들의 앞쪽에 서있던 쥬리오 시장은 열성적으
로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대마법사님."

전투에 대비하여 입고 있는 하드 레더에 짓눌린 듯한 모습이었지만
쥬리오 시장의 목소리는 밝았다. 솔로쳐는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응? 아니, 나는 그런 이름으로 불릴만한 자가 못되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대마법사이십니다.
당신의 스승은, 예. 무례를 무릅쓰고 말하겠습니다만 실제보다 과장된
명성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너무 낮게 평가되는 것입니
다."

솔로쳐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러자 어깨 위로 늘어진
백발이 가볍게 물결쳤다. 어떻게 정리를 한다 해도 볼품있어 보이지는
않을 억세고 곧은 머릿결이 희한하게도 산발을 하고 있는 그 모습에는
어울렸다. 고개를 돌린 솔로쳐는 눈가를 가리는 머릿결을 옆으로 걷어
내며 쥬리오 시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장님께서는 내 스승이 어떤 분인지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요. 나는 미거한 마법사로……"

"당신은 저희 가문의 은인이십니다."

솔로쳐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케이트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솔로쳐의 눈빛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봐야 어둡기 짝이 없는 용모가
조금 보기 괜찮아진 정도였지만. 솔로쳐는 쥬리오 시장의 얼굴을 똑바
로 바라보며 말했다.

"알고 있소만."

"케이트 츄발렉. 저의 12대조부님의 아내 되십니다. 당신이 안계셨다
면 저는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솔로쳐는 그만 미소짓고 말았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고
개를 돌려 데스나이트들을 휘감고 있는 검은 안개를 바라보았다.

"당신 가문과 나는 정말 질긴 인연의 끈을 가지고 있나 보군. 당신의
12대 할머니도 나로 하여금 저들과 싸우게 만들었소. 그런데 300년의
휴식 끝에 다시 일어난 나는 그녀의 12대 후손인 당신을 위해, 그리고
당신의 도시를 위해 또다시 저들과 싸우고 있군. 혹시 당신의 기원이
나로 하여금 다시 이 땅에 발 디디게 만든 것은 아니오?"

쥬리오 시장의 옆에 시립해 있던 히든보리 사집관의 눈이 둥그래졌
다. 진짜 그런 것인가? 그들의 등 뒤에 서있던 시민들에게서도 비슷한
소근거림이 피어올라 성벽 위는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솔
로쳐는 농담을 한 것에 불과했다. 그는 다시 몸을 구부정하게 숙이며
데스나이트들을 쏘아보았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에서 피로가 묻어났
다.

"케이트. 당신 정말 뻔뻔해. 당신 애인을 구해준 것으로 모자라서 당
신 후손까지 보살펴야 되나. 그 때도 느낀 거지만, 당신 정말 위험한
심장을 가지고 있어."

쥬리오 시장은 황송스러운 표정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들
의 시장의 가문에 전하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한낱 전설에 불과한
것이라고 믿었던 많은 켄턴의 시민들은 감동적인 표정으로 쥬리오 시
장과 솔로쳐를 바라보았다.
솔로쳐는 길다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도대체 무엇이 나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게 한 것인지, 당신네들은
뭐 아는 바가 없소?"

"모르겠습니다. 저희들은 그저 유피넬의 저울에 걸린 데스나이트의
추에 상응하는 추로서 당신이 도래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볼
따름입니다."

"그 균형이 나로 하여금 다시 나를 이 시간의 탁류에 휘말리게 한 것
이란 말이오? 좋은 설명이지만,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말이기도
하군. 도움이 된다면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시오."

솔로쳐의 말투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쥬리오 시장과
켄턴의 시민들은 그의 말 마지막에 첨가된 말이 문맥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들의 노래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
트트의의 율율법법!"

검은 안개 속에서 갑자기 터져나온 노랫소리는 켄턴 시민들로 하여금
봄 가운데서 겨울을 느끼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성문
뒤에 도열해 있던 경비대원들은 이를 악물며 포챠드를 거머쥐었다. 전
원 말에 오른 채 빼어든 검을 안장 옆에 늘어트리고 있던 레티의 프리
스트들은 움찔하며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솔로쳐는 심드렁
한 표정으로 검은 안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계속 외우지 않으면 잊어먹을까 걱정되는 보군."

솔로쳐는 그렇게 싱거운 농담 한 마디를 던져주면서 검은 안개의 움
직임을 주시했다.
검은 안개는 지금까지처럼, 즉 오늘 아침에 이 이상한 강화가 이루어
졌을 때부터 계속 그래왔듯이 천천히 물결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
만 솔로쳐의 날카로운 눈은 그 안개가 천천히 켄턴의 외성벽을 향해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
트트의의 율율법법!"

안개는 서서히 속력을 올리면서 켄턴을 향해 파도쳤다. 이제 건너편
에 있던 숲의 모습은 완전히 가려버렸고 지평선의 흔적도 찾기 어려워
졌다. 성벽 위에 몰려서 있던 시민들 사이에서 짧은 비명과 한숨 등이
터져나왔고 쥬리오 시장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솔로쳐의 등을 바라보
았다. 하지만 솔로쳐는 귀찮은 듯한 손놀림으로 눈 사이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피곤해. 천공의 3기사도 없고 장미의 기사들도 없군. 죽을 맛이야.
이보오, 시장. 당신 말이 맞다면 나 뿐만 아니라 천공의 3기사도 돌아
와야 되지 않소. 300년전 저들을 물리친 것은 나 혼자서가 아니란 말
이야. 그런데 왜 나만 되살아나서 이런 고생을 하는가."

솔로쳐는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짜증스럽게 말
했고 쥬리오 시장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비록 켄턴을 보호
하고 있기는 하지만 솔로쳐는 현재 밀리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반나
절 거리도 더 떨어진 곳에서 최초로 터져나왔던 데스나이트들의 노래
가 이제 켄턴의 성벽에서 곧장 바라볼 수 있는 장소까지 와있는 것은
솔로쳐가 줄곧 물러나며 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로쳐는 지금 성벽
위에서 힘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
트트의의 율율법법!"

점점 거칠어지는 데스나이트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쥬리오 시장은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붙잡아 보았지만
익숙하지도 않은 칼자루의 감각은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떨리는 몸을 힘들게 가누며 쥬리오 시장은 안타깝게 솔
로쳐를 불렀다.

"대마법사님……?"

"이건 내가 목숨 기대어 살던 시대도 아니고 내게 무엇을 준 시대도
아니오. 이 시대는 내게 책임이 없고 나 역시 이 시대에 책임이 없단
말이야. 왜 시공을 뛰어넘어 저 자식들과 이런 개싸움을 벌여야 되나.
젠장. 나는 죽었던 자란 말이오! 왜 내가 약속된 휴식을 누릴 수 없단
말인가?"

지금 쥬리오 시장과 히든보리 사집관의 심장을 꺼내 함께 무게를 달
아본다고 해도 한 사람분의 심장 무게도 되지 못할 것이다. 두 사람은
헐떡이며 솔로쳐의 등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되뇌었다. 그렇다. 솔로
쳐가 단순히 이 시대에 되살아났다고 해서 이 시대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사는 시대에 대해서만 권
리와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것 때문
에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만일 그가 시간을 뛰어넘었
다 하더라도 그가 다른 시대에 대해 새로운 책임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모든 것들은 전적으로 그가 사는 시대에 속한 것이므
로……
펄럭! 솔로쳐는 눈가를 문지르던 손을 옆으로 힘차게 뿌렸고 그러자
망토가 아우성을 질렀다. 솔로쳐의 흰 수염이 곤두섰다. 그는 켄턴을
향해 쏟아져오는 검은 안개를 노려보며 말했다.

"신경질나니 네 녀석들에게 화풀이나 좀 해야겠다. 너희들도 알겠지.
내 성격은 우리 스승님의 성격에서 비교육적이고 반사회적인 부분만을
빼닮았다는 것 말이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
트트의의 율율법법!"

솔로쳐는 벌떡 일어서는 한쪽 팔을 거칠게 내뻗어 데스나이트를 겨냥
했다.

"쳇! 난 그 노래가 싫군. 음악 공부 좀 시켜주겠다. 샤웃(Shout)!"

쥬리오 시장은 히든보리 사집관이 기겁하며 양쪽 귀를 틀어막는 것을
보고는 의의해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시장은 고막이 찢어질 듯한 충
격 속에 나가떨어지며 왜 자신이 타인의 행동에서 교훈을 찾아내는 재
주가 없는지에 대해 통탄해야 했다. 바야흐로 솔로쳐에게서 수천개의
벼락이 동시에 떨어지는 듯한 어마어마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온 것이
다.

"멈춰라아아아!"

우르르르릉! 켄턴의 건물들이 진저리를 쳤다. "어억, 시장님?" 히든
보리 사집관이 황급히 쥬리오 시장을 부축했지만 쥬리오 시장은 똑바
로 서지 못하고 다시 엉덩방아를 찧었다. 지붕에 올려두었던 짚더미나
널빤지들이 와르르 쏟아졌고 개 짖는 소리와 닭들의 비명소리가 하늘
을 찌를 지경이었다. 꼬꼬댁! 왈왈! 꺄아아아악! 마지막은 인간의 비
명소리다. 성벽 뒤에 도열해 있던 경비대원들은 각자의 개성에 따라
무릎을 꿇거나 앞으로 나동그라졌고 갑주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개울가에 자갈 튀는 소리보다도 요란했다. "아이고, 맙소사. 유피넬이
여!" "게덴이여!" "오오, 레티여!" "어머나, 그랑엘베르!" 신들의 출
석점검 같은 고함소리들이 켄턴의 하늘로 쏟아져 올라갔고 무고한 참
새들과 까막까치들은 이 충격음에 기절하여 빗방울처럼 떨어져내려 켄
턴의 배고픈 악동들을 환희에 차게 만들었다. 하늘에서 특급으로 배달
되는 간식거리에 달려가는 악동들을 바라보며 경비대원들은 기막힌 기
분을 느꼈다.
제정신을 못차리는 쥬리오 시장을 황망히 일으키던 - 속마음으로는
멱살을 붙잡아 일으키고 싶었지만 - 히든보리 사집관은 눈가에 어린
눈물을 재빨리 짜낸 다음 몸을 돌렸다. 켄턴을 향해 번져오고 있던 안
개의 파도가 주춤하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검은 안개는 늑대의
포효를 들은 양떼처럼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히든보리 사집관은
탄성을 지를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열려진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비명소리였다.

"아아악! 대마법사님?"

솔로쳐는 흉벽에서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즉 성벽 아래로 몸을 던
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들보다 빨리 고함소리의 충격에서 벗어난 사람
들은 이 두번째 충격에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솔로쳐는 그 비
명에 대해 이상한 대답을 보내었다.

"나는 단수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출동시키시
오."

그리고 솔로쳐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 순간, 허공에 떠있던 솔로
쳐의 지팡이에 감긴 일곱 개의 링 중 다섯번째의 링이 짓푸른 빛을 뿜
어내었다.

"으윽!"

히든보리 사집관은 눈을 찌르는 그 푸른 빛에 당황하며 얼굴을 가렸
고 덕분에 반쯤 일으켜지고 있던 쥬리오 시장은 다시 엉덩방아를 찧었
다. "사집관! 차라리 부축하지 말……!" 실눈을 뜨고 주위를 바라본
쥬리오 시장은 성벽 위의 모든 것이, 흉벽과 갤러리의 바닥돌과 그 시
민들의 모습까지도 시퍼렇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서는 오싹함을 느
끼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푸른 빛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켄턴
의 시민들은 지팡이에 올라앉은 채 하늘을 날고 있는 솔로쳐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오오, 무지개의 솔로쳐! 하늘을 날고 있어!"

솔로쳐는 어린 양을 노리는 독수리처럼 검은 안개의 상공을 가로질러
날았다. 켄턴의 성벽 위로는 곧 수많은 주먹들이 튕겨지듯 솟아올랐고
"와아아아!" 검은 안개더미에서는 욕설과 노호성이 터져나왔다.

"네네놈놈이이 감감히히! 파파이이어어볼볼!"

펑펑펑펑펑! 검은 안개 더미에서 불덩어리들이 빗발치듯 솟아올랐다.
수면에 돌멩이를 던졌을 때 튀어오르는 물방울의 모습을 수천배로 확
대한 것처럼 솟아오르는 불덩어리들은 데이든 평원 위의 상공에 수천
개의 별똥별이 거꾸로 떨어지는 것 같은 장관을 이루어내었다. 그리고
그 불덩어리들은 모두 공중의 한 점,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솔로쳐
에게로 수렴되고 있었다.

"월 오브 아이스!"

솔로쳐의 아랫쪽에서 빠른 번득임이 일어났다. 마법사의 소환에 의해
허공에서 갑자기 결빙된 얼음덩이는 하늘을 뒤덮을 듯이 뻗어나갔다.
콰지지-직! 서서히, 둔중하게 낙하하던 얼음의 벽은 데스나이트들이
쏘아낸 불덩어리들에 명중되었다. 파파파팡! 켄턴의 시민들은 평원 위
로 수만 개의 다이아몬드가 흩뿌려지는 듯한 광경에 압도되고 말았다.
얼음조각들은 반경 수천 큐빗의 하늘을 쏜살처럼 비산했고 그 가운데
로 광포한 수증기의 구름이 피어올라 햇빛을 가렸다.

"이이 교교활활한한 놈놈!"

수증기의 구름은 솔로쳐의 모습을 가렸고 데스나이트들이 볼 수 있었
던 것은 그들 자신을 향해 우박처럼 떨어져내리는 얼음조각들의 번득
임 뿐이었다. 그러나 데스나이트들은 전혀 허둥대지 않았다. 대신 그
들은 100명이 한 사람인 것처럼 외쳤다.

"솟솟아아올올라라라라!"

검은 안개의 첨단부는 갑자기 위로 솟구쳐올랐다. 수증기의 구름이
햇빛을 가렸기 때문에 데스나이트들은 마음껏 검은 안개를 위로 쏘아
올릴 수 있었다. 떨어져내리던 얼음덩이는 검은 안개에 부딪히는 순간
마치 장작불에 떨어진 것처럼 흰 연기를 뿜으며 증발되어 올랐다.
데이든 평원의 상공이 운해에 가려졌다. 데스나이트들은 물론이거니
와 멀리 떨어져있던 켄턴 시민들조차도 솔로쳐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피어오르는 수증기와 검은 안개가 뒤섞이며 수천큐빗 높이에
이르는 장막이 형성되었다. 안개와 수증기 더미를 바라보던 시민들 중
에서 남달리 눈이 좋은 시민들이 고함을 질렀다.

"저기! 저기!"

안개더미를 꿰뚫고 솔로쳐가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솔로쳐는 지팡이
에 탄 채로 데스나이트들을 향해 급강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켄턴 시
민들과 데스나이트들 모두 솔로쳐를 단수로 부를 수는 없었다. 안개더
미를 꿰뚫고 나타난 솔로쳐는 얼핏 보기에도 10여 명이 넘는 숫자였
다.

"크크아아아아악악!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에에게게 그그런런 환환상
상이이 통통할할까까!"

데스나이트들은 포효하며 산개했다. 그 누구도 지휘를 내리지는 않았
지만 데스나이트들은 제각기 흩어져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솔로쳐들
을 대비했다. 질린 표정으로 10여명의 솔로쳐를 바라보고 있던 쥬리오
시장은 히든보리 사집관에 의해 급하게 돌려세워졌다.

"지금입니다!"

"뭐어……? 아, 그래! 나는 단수가 아닌……"

쥬리오 시장은 말끝을 삼키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성 아랫
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성문 개방! 레티의 검이여, 출동하시오!"

성문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대원들은 황급히 성문으로 달려들었
다. 육중한 성문이 열리는 순간 오랫동안 전의를 불태우며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던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마침내 그들의 말에 박차를 가했
다.

"레티! 창조가 닿을 수 없는 미를 찬미하며!"

"레티! 레티! 그의 칼로 죽는다!"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기 위해 싸운다는 점을 볼 때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진짜 전사들보다 더욱 전사다운 프리스트들이다.
그들의 기도는 전투의 외침이며, 그들의 성전은 전투교범이며, 그들의
제단은 유혈이 흐르는 전장이다. 켄턴의 성문을 뛰쳐나온 레티의 검들
은 그들만의 천국, 즉 죽음과 유혈의 전장을 향해 돌격했다.


================================================================
좀 늦었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사과 말씀 드립니다.
여러 가지 질문과 의견 감사합니다. 지금으로선 전개에서 설명하겠다
는 말 외엔 드릴 말이 없군요. 만일 끝까지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다
면 역시 퓨쳐워커는 환타지지 SF가 아니구나… 하고 여겨주시길.

어제 축구 너무 짜증나요. 으으. (아시아드가 개최되면 나 제대로 글
두드릴 수 있을까? 으음.)번 호 : 10999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2-04 00:04
제 목 : [F/W]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2

Future Walker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2.

"와아아아!"

떨어져내리는 솔로쳐들에 대비해서 밀집대형을 풀고 산개한 데스나이
트들은 성문을 박차고 달려나온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보며 분노의 외
침을 토해내었다. 아무런 지휘 없이도 일사불란하게 싸울 수 있다는
점에서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데스나이트들과 같다. 성문을 나와서야
보게 된 광경이지만,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서는 곧
장 솔로쳐의 생각을 이해했다. "뱅가드(Vanguard) !" 누군가가 외친
짧은 부르짖음에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재빨리 밀집하여 종심진을 형성
하기 시작했다. 이제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그들의 이름에 걸맞게 레티
의 검 모양이 되어 데스나이트들의 산개대형을 날카롭게 찔러들어갔
다. 두두두두두!

"레티! 레티! 레티!"

"이이 보보잘잘 것것 없없는는 것것들들이이 감감히히!"

선두의 프리스트는 데스나이트의 포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맹포한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데스나이트의 할버드가 더 빨랐다. 퓌
르르르! 데스나이트의 할버드가 검은 빛을 흩뿌리자 프리스트의 몸과
검이 한꺼번에 쪼개어지며 그의 상반신이 말 위에서 튕겨올랐다. "위
힝힝힝힝!" 주인을 잃은 말은 애처로이 울며 달렸다. 하지만 그 뒤를
따르던 프리스트는 그 모습을 보고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은 채 할버드
를 휘두른 데스나이트의 목을 쳤다. "레티이이이!" 프리스트의 검이
지나친 자리에서는 살이나 피가 튀는 대신 해골과 투구가 허공으로 날
았다.

"쿠쿠오오오오!"

데스나이트는 절규하며 몸을 뒤틀었다. 뒤이어 다가온 또다른 검날은
자세를 잃은 데스나이트의 몸을 사정없이 유린했다. 데스나이트는 땅
바닥에 쓰러지기까지 총 네 번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레티의 프리스
트들이 구사하는 뱅가드는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데스나이트
들을 찔러들어갔다. 선두의 프리스트는 죽던지 돌파하던지 둘 중의 하
나만을 택하는 방식으로 진격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도록 만들었고 그
런 식의 가멸찬 공격은 데스나이트의 진열에 깊은 상처를 만들어내었
다. 그리고 그 위로 솔로쳐들의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오른쪽으로!"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속력을 전혀 줄이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데스나
이트들은 그들이 우회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결과는 뱅가드
로 달리던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일제히 우회기동을 성공시키는 장관으
로 나타났다. 놀라운 기동력으로 라인(Line)을 형성한 레티의 프리스
트들은 그들이 갈라놓은 데스나이트들의 산개대형의 오른쪽을 짓밟기
시작했다. 이 위험천만한 전술에서 나타나는 약점, 즉 레티의 프리스
트들의 배후가 왼쪽의 데스나이트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는 문
제점에 대해서 솔로쳐는 무시무시한 해답을 내놓았다.

"미티어 스워어어엄!"

슈슈슈슈슝! 공기를 할퀴는 날카로운 소리가 사방으로 흘렀다. 안개
와 수증기로 가려진 하늘에서 붉은 기운이 일렁거린 순간, 느닷없이
나타난 불의 소나기는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갈라놓은 데스나이트의 무
리의 왼쪽을 향해 집중적으로 퍼부어졌다. 꽝꽝꽝꽝! 등뒤에서 일어나
는 폭음은 레티의 프리스트들마저도 간담이 서늘하게 만들었다.

"크크아아아아아아!"

폭발하며 불어닥친 화염과 열기의 파도는 데스나이트들의 갑주를 순
식간에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미티어 스웜에 직격당한 데스나이트들의
갑옷 속에서 열기를 이기지 못한 그들의 저주받은 몸이 폭발하듯 튕겨
져나왔다. 검은 연기와 불꽃의 분출 사이로 말라붙은 살점과 유골들이
불타오르며 솟구쳤다. 마치 잘 마른 낙엽더미에 불을 던진 듯한 모습
이었다.
허공을 날며 데스나이트들의 눈을 붙잡아두던 솔로쳐들이 일제히 쓴
미소를 지었다.

"역시 패싸움이 유리한 거야. 30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군."

그러나 솔로쳐와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잠시 후 똑같은 정도의 절망을
느껴야했다.
부대를 거의 절단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른쪽의 데스나이트들의 기세
는 줄지 않았다. 명령체계라는 것이 어차피 없었기에 부대의 절단은
그들에게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했다. 데스나이트들은 제각기 판단하
여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상대하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어떠한 지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스나이트들 전체의 행동은 싸움을 혼전으로 치
달아가는 형태를 취했다. 레티의 프리스트들과 데스나이트들이 뒤섞여
버리자 개인 전투력이 월등히 우수한 데스나이트들은 레티의 프리스트
들을 빠르게 제압해나가기 시작했다. 곧 전장에는 붉은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아아악! 레티여!"

"이, 이런! 커허헉!"

병장기의 크기와 예리함, 휘두르는 힘과 기술, 그리고 용기. 그 어떤
부분에서도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최고의 수준을 자랑한다. 하지만 데
스나이트들 앞에서는 레티의 프리스트들도 무력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
다. 데스나이트들이 휘두르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할버드며 플레일, 싸
이드(Scythe)들은 레티의 검들을 풀잎처럼 절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괴를 실천하는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스스로의 파괴에 아무
런 두려움이 없었다.

"쿠으윽!"

데스나이트의 길고 흉포한 파이크에 복부를 찔린 프리스트 하나가 비
명을 질렀다. 데스나이트는 싸늘하게 웃으며 파이크를 뽑으려했다. 그
러나 다음 순간 프리스트의 머리가 휙 올라오며 그의 두 손이 파이크
를 붙잡았다. 자신의 복부를 관통한 파이크를 부여잡은 프리스트의 입
에서 피와 함께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혼자서 걸어갈 저승길은 너무 외롭다!"

바로 아일페사스에게 레틴드롤스라는 이름을 받았던 자였다. 레틴드
롤스를 찌른 데스나이트는 싸늘하게 웃었지만 그 미소를 오랫동안 유
지할 수는 없었다. 레틴드롤스는 오른손만으로 파이크를 쥔 채 왼손을
들어 데스나이트를 가리켰다.

"끼아아압!"

레틴드롤스가 찢어지는 기합소리를 터뜨린 순간 그의 왼팔이 폭발하
며 뼈와 핏방울, 그리고 근육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그 왼
팔이 터져나가는 순간, 눈 앞의 데스나이트의 가슴이 통째로 날아가버
렸다.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그 어떤 창조물도 무위로 돌려버리는 레티의 권
능이 펼쳐졌던 것이다. 레틴드롤스에 의해 겨냥당한 데스나이트는 비
명도 지르지 못한 채 산산조각났고 갑주의 파편이 비산하는 가운데 악
취어린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레틴드롤스는 왼팔이 폭발
한 충격 때문에 나가떨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오른손으로 고삐를 부여
잡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를 띄우며 흐느끼듯 말했
다.

"다다익선이라고 하지…… 하하하……"

복부에 파이크를 꽂은 채 왼쪽어깨에서 폭포처럼 피를 쏟아내는 프리
스트의 모습은 공포, 절망, 어둠의 데스나이트들마저도 질리게 만들었
다. 데스나이트들은 분노에 떨며 저주의 말들을 퍼부어대었지만 레틴
드롤스가 자신의 오른쪽팔마저도 파괴해버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퍼퍼펑! 레틴드롤스는 오른쪽 팔에 이어 오른쪽 다리까지도 파괴해버
린 다음에야 말에서 떨어지며 절명했지만 그 때까지 두 명의 데스나이
트들을 죽음으로 인도했다. 비장함을 넘어선, 지독하게 끔찍한 죽음이
었다.
레틴드롤스의 죽음은 다른 프리스트들로 하여금 죽음의 이정표를 만
들어주었다. 데스나이트들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프리스트들은 아무런
주저없이 자신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장례를 치를 몸을 남겨두지도,
다시 한 번 레티에 대한 송가를 불러볼 희망을 남겨두지도 않는 무차
별적인 파괴행위 앞에 데스나이트들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레티의
프리스트 한 명이 죽는 동안 두세 명의 데스나이트가 파괴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데스나이트들은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데스나이트들의 분노는 더욱 희게 타올랐고 그들의 공격은 더욱 험악
해졌다.

"이이 지지독독한한 놈놈들들!"

"단단숨숨에에 죽죽여여라라! 목목숨숨을을 붙붙여여두두면면 안안된
된다다!"

데스나이트들은 조금 전의 레티의 프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상대가 완
전히 죽을 때까지 공격하는 방식으로 태도를 전환했다. 하늘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솔로쳐는 세 개의 검이 동시에 프리스트의 몸을 관
통하는 광경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저 미련스러운 작자들! 어쩌자고 저런 끔찍한 짓을!"

그러나 솔로쳐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혼전 상태의 무리에
대해서 마법을 구사할 수 없었던 솔로쳐는 냉정한 판단으로 오른쪽의
데스나이트들이 합류하는 것을 저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솔로쳐가
팔을 들어올린 순간, 오른쪽의 데스나이트들 사이에서 솔로쳐의 피를
식게 만드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디디스스펠펠매매직직!"

음산한 고함소리가 전장을 가로지른 순간 허공에 떠다니던 솔로쳐들
의 모습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모든 환상이 사라지고나서 남
은 하나의 솔로쳐는 데스나이트들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몸에 받아야
했다. 솔로쳐는 머쓱하게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

"받받아아랏랏!"

데스나이트들 중 거대한 활을 든 기사들이 일제히 하늘을 겨냥했다.
인간이었다면 제대로 다루기도 힘들었을 법한 그레이트 보우가 아우성
을 질렀다. 빠아아아아! 솔로쳐는 다급하게 다시 하늘로 솟아오르려
했지만 데스나이트의 공격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솔로쳐는 데
스나이트들의 활에 몸을 노출시킨 채 공중에서 멈춰섰다. 벼락 같은
속도의 캐스팅이 시작되었다.

"포스 필드(Force field)!"

그러나 캐스팅이 완료된 순간 솔로쳐는 좌절감을 맛보아야했다. 데스
나이트들은 그레이트 보우를 당기기만 했을 뿐 아직 시위를 놓지 않고
그저 솔로쳐를 겨냥하고 있었다. 솔로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인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속았던 것이다!

"안안티티매매직직쉘쉘!"

데스나이트의 삼엄한 명령이 떨어진 순간 모든 마나의 움직임이 강제
로 정지되며 데이든 평원 위의 자연력과 마나는 순식간에 조화를 이루
었다. 마나와 자연력이 조화된 곳에서는 아무런 일탈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법. 솔로쳐가 캐스트한 보호 스펠은 강제로 취소되었고 무지개의
대마법사는 허공에서 아무런 보호없이 데스나이트들의 화살에 노출되
게 되었다. 솔로쳐가 황급히 날아오르는 순간, 데스나이트들의 손이
일제히 시위를 놓으면서 죽음의 전주곡과도 같은 파열음이 울려퍼졌
다. 핑! 핑! 핑! 핑!

"크윽!"

데스나이트들의 적의에 의해 인도된 화살 하나가 솔로쳐의 옆구리를
적중시켰다. 솔로쳐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오르던 지팡이에서 떨어
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했기 때문에 상처를 보살필 시간
이 없었다. 핏방울을 길게 흩뿌리며 솔로쳐는 어두운 기류 속으로 사
라져갔다.
검은 안개의 소용돌이 너머로 솔로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데스나이트들은 침착한 태도로 다시 화살을 매기고는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솔로쳐는 떨어지지 않았고 데스나이트들은 별 불평도 없이 팔
을 비틀어 화살을 다시 전통에 집어넣었다. 그 동작은 마치 사냥을 끝
내는 엽사의 손놀림처럼 한가로왔다. 하지만 활을 갈무리하자마자 데
스나이트들은 노성을 지르며 미티어 스웜이 일으킨 화염을 뛰어넘어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를를 겨겨냥냥한한 것것은은 그그 무무엇엇일
일지지라라도도 댓댓가가를를 받받으으리리라라! 정정녕녕 유유피피넬
넬과과 헬헬카카네네스스라라도도!"

멀리 성벽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쥬리오 시장은 억눌린 신
음소리를 내었다. 자신의 몸마저도 파괴하며 데스나이트들과 싸우는
레티의 프리스트들의 분전은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데스나이트들은
더이상 같은 수법에 당하지 않겠다는 듯이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단숨
에 절명시키는 식의 공격을 퍼부었다. 검 하나가 프리스트를 찌르면
곧 도끼가 달려들어 목을 베고, 창 하나가 프리스트를 찌르면 당장 날
아온 플레일이 프리스트의 몸을 박살내었다. 이제 전투는 싸움이라기
보다는 학살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더이상 참지 못한 쥬리오 시장
은 크게 고함질렀다.

"나팔수! 퇴각 나팔을 불어라! 아처리들은 전투 태세로! 마법을 봉쇄
시킨 이상 저들 역시 마법을 못쓴다. 그러니 경비대원들은 즉각 출동
하여 프리스트들의 퇴각을 돕도록 하라!"

히든보리 사집관은 쥬리오 시장의 혜안에 감탄했다. 마법을 못쓴다고
해서 데스나이트가 시시한 상대로 바뀌는 것은 아니겠지만 출동하여
저들과 싸워야 할 경비대원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어린 나팔
수도 힘차게 나팔을 들어올렸다.
퇴각 나팔이 데이든 평원 위로 울려퍼졌다. 그러나 레티의 프리스트
들은 성벽을 흘끔 돌아보기만 할 뿐 그 소환에는 응하지 않았다. 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데스나이트들은 프리스트들과 성벽 사이에
반포위진을 형성하여 프리스트들의 도주로를 봉쇄하고 있었다. 그 모
습을 바라보던 히든보리 사집관은 이번에는 내 차례라는 듯이 검을 뽑
아들며 외쳤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쥬리오 시장은 당황하여 몸을 돌렸지만 이미 히든보리 사집관은 계단
을 뛰어내려가고 있었다. 익숙하지도 않은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 있지
만 히든보리 사집관은 가까스로 계단에서 굴러떨어지지 않은 채 성문
뒤에 도달했다. 히든보리는 곧장 대기시켜두었던 자신의 말에 뛰어올
랐고 출진준비를 갖추고 있던 경비대원들 틈에서 당황스러운 목소리들
이 터져나왔다.

"사집관님! 뭐하시는 겁니까?"

갑주와 무장을 걸쳤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렵하게 말에
오른 히든보리 사집관은 그대로 성문을 향해 치달아갔다. 시장의 명령
에 의해 이미 개방되고 있는 성문의 틈 사이를 빠져나가는 사집관을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비대원들은 얼빠진 모습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때 그들의 등 뒤에서 찢어지는 고함소리
가 들려왔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

켄턴 경비대장 로터스였다. 경비대원들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지르는
고함소리에 그 의미를 파악하기에 앞서 먼저 등을 타고 지나는 차가운
느낌에 진저리쳤다. 로터스의 피를 토하는 듯한 목소리는 화렌차의 3
기사가 동시에 부르짖는 듯한 전율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로터스는
검을 뽑아들며 목청껏 부르짖었다.

"죽는 것이 무섭다면, 죽을까봐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삶은 더 길고
더 무섭다! 켄턴 경비대원, 앞으로오!"

로터스의 외침이 켄턴 성안을 메아리친 순간 경비대원들은 이미 달려
나가고 있었다. 함성을 지르며 성문을 뛰쳐나온 경비대원들은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반포위하고 있는 데스나이트들의 등 뒤로 달려갔다. 말
들이 일으키는 먼지가 성벽을 타고 쥬리오 시장에게까지 피어올라 시
장은 잠시 전장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경비대원들의 최전방에서 달리고 있던 히든보리 압실링거는 용감한
인물이었고 그 용기를 발휘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
다. 그래서 히든보리는 포위된 프리스트들을 빼내기 위해서는 데스나
이트들에게 협공의 위험을 충분히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를 뒤따라 달려가던 로터스 경비대장은 갑자기 들려온 히든보리 사
집관의 거친 노랫소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전율을 느꼈다. 소설보
다 장부를 더 재미있게 읽는다는 그들의 사집관, 꽉 막히고 깐깐한 사
집관이 말을 달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다름아닌 일스의
랩소디를.



나팔이 울렸다, 앞으로! 달려라!

동으로 치달리면 대륙의 끝, 앞으로 치달리면 내 인생의 끝.

그러나 검은 곧다, 죽음을 넘어서!

나의 주군, 루트에리노! 그의 이름으로 달려라!



히든보리 사집관은 가장 정확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누구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가. 어떤 이름이 데스나이트를 진감케 하고 켄턴의 시민들
에게 죽을 힘을 다해 싸우게 만들 용기를 줄 것인가. 로터스는 앞을
달리고 있는 히든보리 사집관에게서 기사 일스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입에서 참을 수 없는 부르짖음이 울려퍼졌다.

"루트에리노, 루트에리노! 사집관님을 따르라, 데스나이트를 물리쳐
라!"

히든보리에 의해 불리워지고 로터스에 의해 퍼져나간 이름은 켄턴 경
비대원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루트에리노, 루트에리노! 그들
모두는 루트에리노 대왕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난 꼬마들이었고, 그
들 모두는 루트에리노 대왕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전사들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비대원들 사이에서 노랫소리가 폭발하듯 터져나
왔다.



나는 달린다, 진격의! 나팔소리!

사랑도 끝이 있어 이별하고, 추억도 끝이 있어 잊혀지지만.

그러나 끝이 없다, 내 발걸음에는!

나의 주군, 루트에리노! 그의 이름으로 달린다!



데스나이트들로 하여금 무의식 중에 뒤를 돌아보게 만든 것은 경비대
원들의 말발굽 소리가 아니었다. 루트에리노, 루트에리노! 그 이름이
그들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데스나이트들은 으르렁거리며
손을 들어올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데스나이트
들은 그들 스스로가 이 평원 위의 마나의 움직임을 정지시킨 것을 깨
달으며 노성을 터뜨렸다.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휘날리는 풀잎과 먼지
구름, 그리고 번득이는 창칼.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앞질러 노래가, 루
트에리노의 이름이 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데스나이트들의 무기가
방향을 바꾸었고 후미의 기사들은 이제 달려오는 경비대원들에 맞서
달려갔다.
히든보리 사집관은 자신이 검을 쥐고 있다는 것을 거의 잊고 있었다.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뜨겁게 달아오르는 손끝과 목덜
미는 이미 마비되고 있었다. 그가 느끼는 것은 미칠 것 같은 흥분과
하얗게 타오르는 분노뿐, 히든보리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데스나이
트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아무런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그가 외치
는 이름의 힘은 그토록이나 강했다.

"루트에리노! 루트에리노!"

히든보리를 정면으로 가로막으며 달려들던 데스나이트는 육중한 파이
크를 내뻗으며 잔인하게 외쳤다.

"그그의의 곁곁으으로로 돌돌려려보보내내주주겠겠다다!"

"나의 주군이여!"

평생토록 펜촉보다 더 치명적인 무기를 사용해본 적이 없던 팔이었지
만 히든보리는 그가 목이 터져라 부르는 이름의 소유자인 것처럼 팔을
휘둘렀다. 데스나이트는 레티의 프리스트들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이
맹렬한 공격에 주춤하고 말았고 그것으로 승패는 갈렸다. 흐트러진 파
이크는 히든보리를 놓쳤지만, 화살처럼 튕겨나간 롱소드는 데스나이트
의 투구를 꿰뚫었다. 롱소드의 끝에 투구를 꿴 채 달려가는 히든보리
의 등 뒤로 데스나이트의 갑옷이 검은 기류에 휩싸여 허물어지듯 낙마
했다. 꽝깡깡! 히든보리는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퍼지는 함성을
질렀다.

"켄턴! 루트에리노!"

귀가 멀어버릴 정도의 고함소리와 온갖 소음, 그리고 병장기에서 번
뜩이는 불꽃과 반사광이 사방에 넘쳐흘렀지만 히든보리의 함성은 드래
곤의 포효처럼 울려퍼졌다. 데스나이트들의 저주가 잇달아 터져나왔지
만 그 소리를 뒤덮는 경비대원들의 함성이 전장을 가득 메웠다.

"으아아아! 루트에리노! 켄턴을 돌보소서!"

"돌격, 앞으로! 루트에리노의 이름 아래 데스나이트를 물리쳐라!"

데스나이트들은 이제 정신적인 의미와 실제적인 의미 양쪽으로 포위
를 당했다.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여전히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데스
나이트들을 압박해왔으며 등뒤로는 루트에리노의 망령에 휩싸인 것 같
은 경비대원들이 악귀 같은 얼굴을 한 채로 무기를 휘둘러오고 있었
다. 히든보리는 데스나이트들의 주춤거리는 동작을 보며 벅찬 희열을
느꼈다. 이겼다!
다음 순간 히든보리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
그런데… 여러분. 일주일 쉬는 것을 가지고 연재 중단이 어쩌니 하시
면 무섭습니다. 하하. (월간 퓨쳐워커로 바꿔버릴까? 퍼버벅!)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1080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2-05 01:22
제 목 : [F/W]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3

Future Walker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3.

그의 시야 한 구석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히든
보리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서 불안을 느낀 것인지 살펴보았다. 모든
것이, 심지어 하늘과 땅마저도 미쳐 날뛰는 것 같은 전장에서 단 한
가지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히든보리의 눈에 팔을 들어올린 데스나이트 한 명이 들어왔다. 주위
의 다른 데스나이트들이 레티의 프리스트들과 달려오는 켄턴 경비대원
들에 맞써 흉맹스럽게 무기를 휘둘러대고 있음에 반해 볼 때 그 데스
나이트는 신전의 예배당 가운데 서있는 것처럼 경건한 자세로 서있었
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히든보리는 얼어붙고 말았다. 데스나이트는
결코 빠르지 않은 속도로, 그러나 무자비하게 외쳤다.

"모모든든 것것을을 감감싸싸라라, 어어둠둠!"

하늘로 피어올라 소용돌이치고 있던 검은 안개가 빠른 속도로 하강하
기 시작했다. 프리스트들과 경비대원은 당황했지만 전투의 관성은 내
리깔리는 안개의 한가운데로 그들을 몰아가고 있었다. 무게와 질감을
가진 듯한 안개는 거침없이 쏟아져내려 주위를 감쌌고 히든보리는 이
제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안개 더미 너머에서 비명들
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크어억!"

"사집관님! 대장님! 이봐, 어디에…… 으아아!"

"이건…… 큭! 어머니!"

어둠 속에서 데스나이트들이 움직이면서 끔찍한 파열음과 발굽소리,
그리고 비명소리들이 터져나왔다. 당황한 경비대원들은 서로를 불러대
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데스나이트의 공
격 뿐이었다. 예리한 무기가 갑옷을 꿰뚫으며 나는 소리는 히든보리의
등골을 쑤셔내는 듯했다. 쿵. '무엇'인가가 말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
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히든보리는 시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히든보리는 온몸을 긴장시킨 채 롱소드를 부여잡았지만 당장이라도 안
개를 뚫고 나타난 데스나이트의 검이 그를 꿰뚫어버릴 듯한 공포는 참
기가 어려웠다. 그대로 아래로 뛰어내려 말의 가랑이 사이에라도 숨고
싶은 느낌과, 말을 돌려 켄턴이라고 짐작되는 방향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가고 싶은 느낌 사이에서 갈등하며 히든보리는 사방을 둘러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꿈틀거리는 안개 뿐이었다. 여기가 도대
체 어디지? 켄턴은 어느 쪽이지?
그 때 가까운 곳에서 느닷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눈을을 가가리리는는 어어둠둠 속속에에서서 보보이이는는 오오직
직 하하나나, 절절망망!"

히든보리는 기겁하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고 곧 심장이 멈
춰버릴 뻔했다. 그의 롱소드 끝에 꿰어져 있던 데스나이트의 해골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턱을 달각거리고 있었다. 눈동자도 없는 퀭한
구멍 안쪽에서 번득이고 있는 노오란 불빛은 경멸감과 증오심을 담은
채 히든보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롱소드는 해골의 입을 꿰뚫고 있었
고, 그래서 그 끝에서 턱을 달각거리고 있는 해골의 모습은 마치 롱소
드를 삼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계속해서 검을 집어삼켜, 마침내 손
잡이 끝까지 다가온 다음 히든보리의 손을 물어뜯는……

"으아아아!"

히든보리는 칼 맞은 오크 같은 비명을 지르며 롱소드를 집어던졌다.
파삭! 해골은 믿을 수 없이 간단히 산산조각이 났지만 히든보리는 그
것을 볼 새도 없이 그대로 말을 돌렸다. 켄턴이 어느 방향인지도 몰랐
지만 히든보리는 무턱대고 달려가며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 으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절절망망에에서서 그그대대가가 매매달달리리는는 것것이이 오오히
히려려 그그대대를를 파파멸멸시시키키리리라라, 공공포포!"

휘익! 쉬이익! 주위로 예리한 병장기들이 휘둘러지며 날카로운 소리
들이 들려왔다. 가끔 눈 앞으로 번쩍이는 무엇인가가 지나가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히든보리는 멈출 수 없었다. 그 때 암흑 속에서 갑작
스럽게 할버드가 튀어나왔다. 히든보리가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할 사
이도 없이, 튀어나온 할버드는 히든보리의 말의 머리를 쪼개어놓았다.
말은 비명도 없이 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암흑 속에서의 낙마는 끔찍했다. 히든보리는 땅에 떨어진 후에도 한
참 동안 더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나서야 고통이 다
가왔고, 히든보리는 급하게 일어서려다가 팔이 부러진 것을 깨달으며
다시 쓰러졌다. "으큭!" 입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피와 흙먼지를 뱉어낼
생각도 못한 채 히든보리는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 때 아무렇게나
내밀어진 그의 손에 닿는 것이 있었다.
히든보리는 고개를 들어올렸고, 그가 어떤 생물의 다리를 붙잡고 있
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표현할 말을 찾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치에서
벗어나 있는 그 생물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히든보리는 날카로운 비명
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히든보리가 쥐고 있는 발 이외에도 그 생물에게는 여섯 개의 각기 다
른 길이의 다리가 더 있었다. 말로 치면 가슴에 해당하는 부분에 있는
세 개의 눈은 크기가 모두 달랐을 뿐만 아니라 위치도 제멋대로였다.
하지만 세 개의 눈 모두가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로 히든보리를 쏘아보
고 있었다. 그리고 목이 있어야 할 부분에서는 살이나 근육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목뼈만이 보였고 그 목뼈 위에는 마갑을 둘러쓴
머리가 있었다. 그의 눈길이 그 생물에 올라탄 채 투핸드소드를 들어
올리고 있는 데스나이트의 모습에 이르렀을 때 히든보리는 눈을 감았
다.
죽었구나. 제길!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죽어지지가 않았다. 뭐야. 아무 느낌도 없이
벌써 죽은 건가? 주위가 터무니없이 고요해졌기 때문에 히든보리는 자
신의 추측이 상당히 설득력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추측과는 상
관없이 그의 감각은 그가 살아있음을 계속해서 가르쳐주고 있었다. 어
쨌든 죽은 자가 팔이 부러진 아픔을 계속해서 느껴야 된다는 것은 억
울한 일이다.
그럼 나 살아있는 건가?
히든보리는 눈을 떴다. 그리고는 그의 앞에 서있던 데스나이트가 그
에게는 관심도 보내지 않은 채 먼 곳을 쏘아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
었다. 왜 저러는 거지? 그 때 데스나이트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히든
보리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었다. 데스나이트는 당황한 목
소리로 외쳤다.

"저저 녀녀석석들들까까지지!"



"여어, 비켜!"

쥬리오 시장은 급하게 위를 올려다보다가 뒤로 넘어질 뻔했다. 성벽
위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난 솔로쳐는 그다지 품위있지는 않은 모습으
로 성벽 위에 내려섰다. 그의 지팡이는 여기까지 그를 충실히 수행했
지만 그의 후들거리는 다리는 그렇지 못했다. 솔로쳐는 성벽의 차가운
돌 위에 무릎을 꿇었다. 꽉 누르고 있었지만 화살이 꽂힌 옆구리에서
는 계속해서 피가 흘렀다. 쥬리오 시장은 날카롭게 고함질렀다.

"솔로쳐님! 이런, 의사! 의사를 데려와!"

끄으응! 솔로쳐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일어섰다. 재빨리 달려든 쥬리
오 시장의 팔에 의지한 솔로쳐는 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장. 화살을 단단히 붙잡으시오."

"예?"

"화살을 꽉 잡으란 말이다, 이 얼간아!"

쥬리오 시장은 영문을 모른 채 당황하며 솔로쳐의 허리 뒤쪽에 꽂힌
화살을 부여잡았다. 그러자 솔로쳐는 빠르게 심호흡을 하고서는 흉벽
을 부여잡았다.

"난 두 번은 못참을걸. 이 뽑는 것도 한번에 못하면 더 힘든 법인데
하물며 화살인 바에야. 그러니 한번에 뽑지 않으면 퍽 유감스러워할
거야. 뽑아!"

쥬리오 시장은 어떤 명확한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화살
을 잡아당겼고 그 순간 솔로쳐는 흉벽을 잡아당겼다. 선혈이 튀어오르
며 화살이 뽑혀나왔고 쥬리오 시장은 화살을 쥔 채 엉덩방아를 찧었
다. "아이코!" 쥬리오 시장은 기겁성을 질렀지만 솔로쳐는 침착한 태
도로 말했다.

"수고하셨소, 시장. 고맙군. 그리고 그거 화살촉은 건드리지 않도록
유의하시오. 평생 동안 후회하게 될걸."

바닥에 주저앉아서 멍청한 얼굴로 솔로쳐를 올려다보던 쥬리오 시장
은 화들짝 놀라며 화살을 내팽개쳤다. 그것은 데스나이트의 화살인 것
이다. 화살이 내팽개쳐진 곳에서는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
나는 소동이 벌어졌지만 솔로쳐는 거기에는 일별도 보내지 않고서 흉
벽을 쥔 채 전장을 바라보았다. 다시 아래로 깔린 검은 안개더미는 그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살륙을 감추고 있었지만 터져나오는 비
명과 소음은 가리지 않았다. 솔로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경비대원까지 다 출동시켰소?"

쥬리오 시장은 할 수 있다면 이렇게 꾸짖어주고 싶었다.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시는 분이 그렇게 침착하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예. 그렇습니다. 어쩌지요?"

솔로쳐는 할 수 있다면 이렇게 윽박질러주고 싶었다. 당신 돌았소?
저 아수라장 속에서 경비대원들과 레티의 프리스트만 빼내어오라고?
그리고 솔로쳐는 하고 싶은 말은 해버리는 주의였다.

"당신 돌았소? 저 아수라장 속에서 경비대원들과 레티의 프리스트만
빼내어오라고?"

"그, 그렇습니다만, 어, 어떻게 방도가, 아, 아니. 대마법사님. 치료
를 받으셔야…… 화살에 맞았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쥬리오 시장은 상당히 많은 요인이 야기한 복잡한 당황 속에서 횡설
수설했고 솔로쳐는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아, 이런. 화살에
맞았었지." 마치 잊어먹었던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말하던 - 그러니
까 쥬리오 시장의 말에 야유를 보낸 솔로쳐는 눈살을 찌푸리며 지팡이
를 거머쥐었다. 솔로쳐가 지팡이를 비틀어 그 머리 부분을 상처에 가
져다대자 지팡이에 감겨있던 링 중에서 네번째 링이 진초록의 빛을 뿜
었다. 쥬리오 시장이 경이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초록색의 빛
은 점점 사그라들었고 그에 따라 솔로쳐의 상처에서 배어나오던 피도
멎었다. 솔로쳐는 조금 창백해진 얼굴을 들어 다시 전장을 쏘아보았
다. 이 노릇을 어찌해야 된다.

"마법사 솔로쳐셨소?"

너 이 자식, 혹시 바보 아니야? 내가 마법사인거 이제 알았냐? 솔로
쳐는 쥬리오 시장을 향해 이렇게 외쳐주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쥬리오 시장의 턱뿐이었다. 솔로쳐는 쥬리오
시장의 눈을 따라 위로 올려다보았고, 다음 순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저울 눈금이 맞아떨어지는군."

하늘에 떠있던 사내 - 정확하게 말해서 견고하고 훌륭해보이는 바딩
을 한 페가서스에 올라타있던 사내는 솔로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
다는 듯이 점잖게 고개를 갸웃했다. 기사는 익숙한 솜씨로 페가서스를
성벽 위의 갤러리에 내려서게 만들었고 시민들은 숨소리마저 삼가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페가서스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인지 사내
는 간단한 하드레더만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하마(下馬)했을 땐
소음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페가서스의 기사는 눈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쥬리오 시장을 향해 말했다.

"시장님은 어디 계시오?"

"예?"

"켄턴의 시장님은 어디 계시냐고 물었소."

쥬리오 시장은 이런 대답을 해야 된다는 것이 퍽이나 거북했다.

"저, 접니다만."

페가서스의 기사는 다시 점잖은 얼굴에 의아함을 떠올렸다. 어찌나
엄격한 얼굴인지 이 기사의 턱에서는 수염이 자랄 때는 정중하게 허락
을 요청할 것 같았으며 땀이 흐를 때는 복창 소리와 함께 대오 정연하
게 흘러내릴 것 같았다. 기사는 침착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노델 시장님이 사망하셨단 말이오?"

노델 시장? 물론 사망했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에. 지
금 쯤은 시체도 찾아보기 힘들걸. 쥬리오 시장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쥬리오 시장은 이미 이 기사가 누군지 깨
닫고 있었다. 그래서 시민들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을 때
쥬리오 시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아직 두
명이 더 내려와야 되겠지.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페가서스의 기사 오른쪽으로는 역시 군마처럼 바딩을 한 그리폰이 흰
갑옷을 걸친 기사를 태운 채 내려왔다. 그리폰은 사나운 기세로 부리
를 딱딱 부딪히고 있었기에 쥬리오 시장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나야 했
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내려선 기사의 타고 있는 생물은 켄턴 시민들
을 광란에 빠지게 만들고도 남을만한 것이었다.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
우며 내려선 와이번의 등에는, 건장한 체구지만 와이번에 타고 있어서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 체구의 기사가 비정상적으로 긴 랜스를 세워든
채 앉아있었다.
성벽 위의 갤러리는 넓었지만 와이번의 거체를 내려서게 할만한 장소
는 아니었다. 그러나 와이번의 기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와이번을 흉벽
으로 몰아갔고 와이번은 횃대에 내려앉는 새처럼 흉벽을 두 발로 붙들
었다. 콰가가각! 와이번의 발톱이 흉벽의 돌을 긁으며 요란한 소리를
울리게 만들었지만 와이번은 균형을 잡고 날개를 접었다. 기사는 와이
번의 무릎을 밟으며 가벼운 동작으로 갤러리에 내려섰다.
세 명의 기사들은 솔로쳐와 쥬리오 시장의 앞쪽에 나란히 섰다.
기사들의 탈것들은 크기에서든 형태에서든 도저히 유사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각자의 탈것에 어울리는 복색을 갖추고 있는 기사들의 모
습에서도 역시 유사점은 없었다. 하지만 모두 당당한 자세로 기사답게
서있다는 점에서는 한결 같았다. 멀건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쥬리오
시장은 그들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반갑습니다, 천공의 3기사님. 저는 켄턴 시장……"

"당신들도 되살아났군!"

쥬리오 시장은 솔로쳐의 고함소리 때문에 자신을 소개할 - 천공의 3
기사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무한히 영광된 순간을 망치고 말았다. 그러
나 솔로쳐나 천공의 3기사 모두 쥬리오 시장의 안타까움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늘에서 날아온 기사들의 얼굴에 끔직한 표정이 스친 것은
잠시, 페가서스에서 내린 기사는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지금이 몇년입니까."

"300년이 지났다 하더군요. 딤라이트."

딤라이트라 불린 기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무 길군요. 그 정도의 시간을 뛰어넘은 것은 도대체 어떤 사술입
니까?"

"모르오. 이 시대의 사람들 역시 우리들의 부활이 어떤 힘에 의한 것
인지는 알고 있지 못하고 있소."

그 때 와이번에서 내린 기사가 - 와이번에서 내려서자 기사의 거대
한 덩치는 더욱 두드러졌다. - 들고 있던 거대한 랜스를 마치 지휘봉
처럼 가볍게 휘둘러 쥬리오 시장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사는
평원의 검은 안개를 가리켰을 뿐이었다.

"마법사께서 눈금이 맞았다 하심은 저들 때문입니까."

"그렇소. 무스타파."

그리폰의 기사가 싱긋 웃었다. 우울한 미소였다.

"하아, 아무래도 '물리치고나서 생각하자' 라고 하실 것 같군요. 무
지개의 솔로쳐."

"물론이오. 내 예정표에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보는 시간은……"

"언제나 여가 선용의 시간으로 돌려져 있다."

그리폰의 기사는 지겹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솔로쳐의 말을 받아서
솔로쳐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그레이. 잠시 동안은, 내가 부활한 이유가 저 사교성 떨어지는 친구
들로부터 이 시대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생각해두기로 했다
오. 아무래도 저 데스나이트들이 우호선린의 기치 아래 달려오고 있다
고는 생각하기 어려우니까."

그레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딤라이트의 냉철한 목소리
가 빠르게 솔로쳐의 말에 대답했다.

"이것이 사술이라면 나는 부활을 거부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고위
마법사라도, 심지어 당신의 스승이라 하더라도 300년의 시간은 뛰어넘
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사술입니다, 솔로쳐. 가까운 곳에 오
렘의 신전이 있습니까?"

"……자살할 거요?"

딤라이트는 마치 모욕당했다는 듯한 얼굴로 솔로쳐를 쏘아보다가 다
시 한숨을 내쉬었다. 저 마법사는 원래 저 지경이었지.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일스기사단원은 대공이나 오렘의 허락 없이는 자살할 수 없음을 잘
아시지 않습니다. 오렘의 프리스트께 저희들의 처리를 부탁드릴 생각
입……"

딤라이트의 이 장중한 선언은 그레이의 왼팔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
레이는 딤라이트의 어깨에 팔을 휘감아 그의 머리를 끌어당기며 말했
다.

"이봐, 이봐. 딤라이트! 처리라니? 하하하! 누가 들으면 우리가 발목
부러진 말이라도 되는 줄 알겠군? 우리가 무슨 쓰레기야, 처리라니."

딤라이트는 화를 내려다가 참는 거라는 표정을 너무 실감나게 구사하
며 그레이의 팔을 치우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레이는 더욱 짓궂게
딤라이트를 잡아당겨 머리를 비벼대었고 그 상황에서 여전히 침착한
어투를 구사하려 애쓰는 딤라이트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말이야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것은 일스기사단원으
로서는 결단코 수용할 수 없는 사술임이 분명한 바……"

"적 앞에서 도망치는 것도 일스기사단원으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일
이지."

무스타파는 낮은 으르렁거림처럼 말하며 데스나이트들을 쏘아보았다.
딤라이트는 이번에는 울컥 하려다가 참는 거라는 표정을 구사하며 말
했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존재 자체가 떳떳치 못하다면 어떻
게 저들을 친단 말인가?"

무스타파는 잠시 고개를 돌려 딤라이트를 바라보다가 지나가는 말처
럼 말했다.

"그러나, 검은 곧다. 죽음을 넘어서."

딤라이트를 끌어안으며 낄낄거리고 있던 그레이는 이번엔 반짝거리는
눈으로 무스타파를 바라보았다. 무스타파는 검이 아닌 랜스를 힘껏 부
여잡으며 말했다.

"자네는 죽어서도 저놈들과 싸우겠다고 말하곤 했지. 실제로 그렇게
되었잖은가."

"그건 사술에 의지해서라도 싸우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딤라이트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고 그레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쥬리
오 시장은 당황이 물씬 묻어나는 얼굴로 세 기사의 얼굴을 번갈아 쳐
다보았다. 그 때 솔로쳐가 재빨리 끼여들었다.

"이보시오들. 난 시간이 없어. 당신들은 부랑배도 아니고 산적떼들도
아니니 지휘자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어떻소?"

그러자 천공의 3기사들은 그 말이 옳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기사는 자신의 우두머리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우두머리 기사는 난처
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 또, 음. 그러니까. 에이, 난 머리 쓰는 거 질색이야. 이봐,
우리 솔로쳐님 따라하자고. 칼잡이들이 마법사에게 머리 쓰는 일 맡기
는 건 흉이 아니잖아."

그레이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딤라이트와 무스타파는 더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각자의 탈것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레이는 그리폰에
뛰어올라서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솔로쳐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거 참. 이제 됐습니까, 마법사님?"

"됐소. 어서 갑시다. 그레이."

솔로쳐는 빙긋 웃으며 지팡이를 위로 던져올렸다. 그레이는 대답 대
신 그리폰을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며 고함질렀다. "이이이이- 하!"


================================================================
음… 조선일보에 드래곤라자 애니화 이야기가 나기는 했습니다. 하지
만 그 이야기는 저도 모르고 SBS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르고(?) 오로지
조선일보만 아는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루머지요. 하하하.
그리고, 메일 보내주시는 분들껜 항상 죄송스럽습니다. 답장을 잘 쓰
지를 않는 타자지요. 글은 아무렇게나 두드려도 메일은 정말 힘들어합
니다. 죄송합니다.번 호 : 11081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2-05 01:23
제 목 : [F/W]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4

Future Walker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4.

"놈은, 취엑! 우리가 반나절 동안 넘을 산을, 취칙! 몇 걸음만에 넘
을 수도 있다! !"

떠오르는 햇살을 피해 바위 아래로 숨어버렸기 때문에 레이저는 루손
의 표정을 정확하게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보나마나 허옇게 질려있으
리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레이저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너 풀밭 아래로 달아나는 개미들을 잡을 수 있냐? 걱정마. 그 거인
녀석도 마찬가지야."

"우리를 못찾는다고? 츄으……"

"물론이지!"

"취키긱! 그럼 왜 그렇게 불안스럽게, 첵! 주위를 둘러보는 거냐?"

레이저는 그제서야 왜 자신이 루손의 표정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
었는지 알아차렸다. 루손이 바위 아래의 그늘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계속해서 주위의 산봉우리들 뒤에서 거인의 머리가
솟아오르지는 않는가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래가지고서는 내
말에 신뢰감을 더하기는 어렵겠군. 레이저는 머쓱하게 웃으며 땅바닥
에 앉았다. 그는 루손이 숨은 바위의 옆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쳇.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 역시 겁나는군."

바위 아래에서 루손의 불만스러운 외침소리가 터져나왔다.

"취! 그러니까 빨리 날아가자! 츄아! 너 어제 날았잖아!"

레이저는 불평스러운 얼굴로 루손에게 두 손을 내보였다. 그 손바닥
은 진흙과 이끼로 범벅이 되어있는데다가 작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루
손은 그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레이저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라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 친구야. 난 어젯밤 새도록 산을 탔단 말이야. 도저히 마법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메모라이즈를 못했기 때문에…… 관두지. 간
단하게 말하겠어. 난, 쉬기 전엔, 마법 못 써. 알겠냐?"

"취, 왜!"

"원래 그래."

아무 생각없이 대답하던 레이저는 문득 섬뜩함을 느끼며 루손을 바라
보았다. 바위 그늘 아래에서 루손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
라보고 있었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은 밤 동안 식었던 붉은산맥의 사
물에 온기를 던졌지만 레이저는 시리도록 번뜩이는 루손의 글레이브를
보느라 온기를 느낄 새가 없었다. 그리고 레이저는 그와 오크들을 연
결하는 하나의 점, 나크둠이 이미 죽었음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두
다리를 끌어당겼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는 무서울 것이 전혀 없다. 한시라도 빨리
달아나고 싶은 오크에게 있어 무력한 마법사는 짐만 될 뿐이며, 게다
가 증오스러운 '인간'인 것이다. 레이저는 다급하게 들리지 않도록 말
하려 했지만 그의 말은 상당히 다급했다.

"잠시만 쉬면 돼. 그럼 다시 마법을 쓸 수 있어."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레이저는 자신의 말을 후회했다. 루손이 그
를 해칠 수 있는 기회는 지금 뿐이라고 고함 지르는 것과 마찬가지였
기 때문이다. 레이저는 이제 다리를 거의 끌어당긴 채 여차하면 옆으
로 몸을 날릴 준비를 했다. 루손은 레이저의 그런 모습을 무서운 시선
으로 노려보다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럼 편히 쉬어! ! 그렇게 웅크리고서야 어떻게 쉬겠나? 멍청하
긴. 취이익. 겁먹지 마! 내가 망을 볼 테니. 제기랄! 취키킥!"

말을 마침과 동시에 루손은 글레이브를 당겨쥐더니 아무런 주저없이
바위 그늘 아래에서 나왔다. 레이저가 입을 쩍 벌린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루손은 쏟아지는 햇살에 넌덜머리를 내며 가까운 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루손은 그 나무 아래에 생긴 작은 그늘 속에 앉더니 글레이브를 무릎
에 얹고는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루손에게 있어 햇살에 노출되는
것은 단순히 불쾌한 정도가 아니라 조금은 고통스럽기까지 한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루손은 아무런 불평의 말 없이, 그저 눈 주위를 조금
일그러트린 자세로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레이저는 한숨
을 내쉬고는 힘없이 손을 들어올려 이마를 닦았다. 이마를 닦으면서
그의 머릿속의 생각까지도 닦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이마를 닦던 레이저의 손이 갑자기 멈춰졌다. 완전히 믿을 수 있을
까?
몹시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레이저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문장이 불길
한 울음소리를 내며 떠돌았다. 별로 세련되지도 않고 기발한 것도 아
니지만 지금의 그의 심정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문장이었다. '오
크도 잠든 마법사라면 맨손으로 죽일 수 있다.' 레이저는 화급히 루손
과의 추억들을 재점검해보았지만 불안한 마음 때문인지 즐거웠던 기억
보다는 루손을 화나게 만들었던 기억만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차피
그는 오크가 아니었고 그래서 오크들의 비위를 완전히 맞췄다고는 단
정지을 수가 없다. 따라서 루손은 그를 안심시켜서 잠들게 한 후에,
즉각적이고도 날렵하게 그의 목숨을 끊어놓을 것이다.
잠시 후, 레이저는 자신을 비웃기 시작했다.
이건 더하고 뺄 것이 없이 완전한 피해망상이다. 그덴산의 거인 때문
에 신경이 너무 곤두선 까닭이다. 그래서 친구를 의심하는 것이지. 레
이저는 자신의 감정을 깨끗이 정리했다. 그렇게까지 친구를 의심하느
라 잠이 오지 않는다면, 레이저여. 머리나 굴려보자고. 네녀석의 더러
운 인간성이 고쳐지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생각이나 하며 잠을 쫓는
것이 낫겠군. 이건 타협이야. 루손을 믿어서 잠들 수도, 믿지 못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수도 없다면,
도움이 될 일을 생각하자.
그래서 레이저는 생각했다.
그덴산의 거인이 이 시대에 고함을 지르고 바위를 던지는 이유는? 정
답 : 입이 있고 팔이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대답할 경우 웃을 친구가
혹시 있을지 몰라도 나 자신은 포함되지 않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
나고 있는 것일까. 그덴산의 거인이 죽었음은 의심할 바가 없는 역사
다. 그렇다면 이 사태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것, 죽은 자가 제멋대
로 되살아난 것에 해당한다.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것은……

"콜리……"

레이저의 입이 무의식 중에 열리며 그의 머릿속의 질문에 대답했다.
레이저는 자신의 말에 놀라서는 눈을 번쩍 떴다. 긴장한 청각과 시각
은 주위를 세심하게 관찰하기 시작했지만 들려오는 것은 산의 허리를
휘감아도는 아련한 바람소리와 풀잎의 사르락거림, 그리고 오전의 햇
살에 반짝이는 바위들 뿐이었다. 붉은 산맥에 만연한 붉은 바위와 푸
석푸석한 황토빛 흙들로 주위는 건조했다. 레이저는 고개를 조금 돌렸
고, 잔뜩 긴장해서는 그들이 넘어온 산봉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루손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따스한 봄날의 오전 가운데 패배자의 모습
으로 산등성이에 던져진 인간과 오크.
레이저는 다시 바위에 기대어앉으며 생각했다.
이게 그것과 관련된 것일까? 신스라이프의 문제. 턴빌의 불가사의.
고양이와 꿈의 콜리. 되살아나기를 원하는 신스라이프. 아홉 개의 제
물을 바쳐 부활하려드는 정신나간 부자 노인. 그 재산 나나 주지. 젠
장. 그 어마어마하다는 재산이 내게 굴러떨어진다면, 곧장 근사한 말
한 마리 사서는 디도스로 달려가는 거야. 헤게모니아의 모든 도박꾼
들, 아니 바이서스와 일스의 도박꾼들까지 초청해서 사상 최대의 판
을……
레이저는 간신히 자신을 수습했다. 정신차리자. 음. 지금까지 몇 명
의 목숨이 희생되었다고 했더라? 일곱인가, 여덟인가?
그 옛날 66년전, 고양이와 꿈의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음침한 목소리
로 신스라이프가 부활하도록 마법을 걸었다. "암흑 속에서 더 반짝이
는 눈이 그대의 꿈을 보니…… 어쩌구 저쩌구." 그런데 그만 부작용이
일어나서 신스라이프 대신에 그덴산의 거인이 부활한다. 이게 말이 되
나? 레이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작용이라는 것은 어떤 마법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런 식의 부작용은 일어날 수가 없다. 콜리
의 프리스트들은 분명히 신스라이프를 대상으로 마법을 걸었을 것이므
로, 부작용 역시 신스라이프에게 일어나거나 그 마법을 건 콜리의 프
르스트 자신들에게 일어나야 된다. 부활이 잘못 되어 신스라이프 선생
이 언데드가 된다거나 하는 부작용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엉뚱한 녀석이
부활한다라……. 말이 안된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스펠이 처음부터 잘못 시전되었다는 가정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라? 실수였나봐. 다른 녀석이 살아났네?" 레이
저는 하마터면 데굴데굴 구를 뻔했다. 킬킬킬! 콜리의 프리스트들이
그렇게도 멍청했을까? 흠.

"콜리와 신스라이프에 대해 조사할 것."

레이저는 또다시 무의식 중에 말하고는 크게 한탄했다. 이래서는 안
돼.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다 드러내어서야 어떻게 갬블러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레이저는 자신을 준엄하게 꾸짖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되나?
턴빌로 간다는 것은 입에서 뽀골뽀골 거품방울을 피워올리며 그를 뒤
쫓고 있을 도박사 패거리들의 손아귀 안으로 걸어들어간다는 의미다.
레이저가 사고를 저지른 고스빌과 턴빌은 걸어서는 좀 멀고 말을 달리
면 가깝고 칼 들고 뛰면 지척인 거리다. 즉, 누군가를 찔러주고 싶도
록 미워하는 사람이 가로지르기에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라는 말이
다. 즉 복수를 위해서……
젠장, 복수!
레이저는 갑자기 손을 꽉 움켜쥐었고 덕분에 뒷통수의 머리털을 한
웅큼 뽑아버릴 뻔했다. 레이저는 기대어앉았던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
다. 그걸 잊고 있었군.
찌르르르.
새울음소리가 텁텁한 산위의 공기를 가로질러 낮게 울렸다. 레이저는
불쑥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들려오는 것은 루손의 작은 숨
소리뿐이었다. 레이저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복수. 그걸 잊고 있었
군. 레이저가 아직까지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까닭은 그 복
수 대상이라는 것이 거의 천재지변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나크둠의 복수. 나크둠이 화렌차의 곁으로 돌아가게 된 까닭은 그덴
산의 거인이 나크둠에게 의향을 물어보지도 않고 그에게 바위를 선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녀석의 의향을 물어볼 필요없이 상
당히 인상적인 답례품을 보내어줄 필요가 있다. 이것이 레이저의 결론
이었다.
레이저는 루손을 불러들여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취, 취! 뭐야? 턴빌로 가겠다고?"

루손은 이맛살을 매우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이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여기서 산맥을 내려간 다음 턴빌로 가겠어. 그곳에 가봐
야만 알 수 있는 수수께끼가 생겼거든."

"무슨, 취이이이익! 무슨 수수께끼 말인가?"

"흐음. 너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될 거야. 간단하게 말한다
면, 저 그덴산의 거인이 되살아난 이유를 조사하기 위해서 거기 가는
거야."

루손은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득 루손은 레이저가
평소에는 잘 보여주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인
간이었다면 그것을 어두운 복수심에 뒤덮인 이마, 혹은 침침한 불꽃이
일렁이는 눈빛 등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 테지만 루손이 느끼기엔 그냥
보기 싫은 표정이었다.

"얼굴이 왜 그래? 취칙!"

"난 복수를 해야 돼, 루손."

"취! 보, 복수?"

"나크둠이 과연 이런 복수에 찬성할지 나는 확신할 수 없어. 어쨌든
내가 아는 한에서 가장 위대했던 오크의 복수를 인간이 맡게 된다는
것은 우스운 면도 있군. 하아…… 그래, 어쩌면 나는 대륙 역사상 가
장 웃기는 복수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오크의 복수자 레이저. 이건 파
하스가 되살아나더라도 제대로 된 곡을 붙이긴 어렵겠군."

레이저는 빙글빙글 웃었지만 루손이 보기엔 여전히 꼴불견인 표정이
었다. 레이저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하겠어."

루손은 이제 글레이브를 쥔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취이카악! 그덴산의 거인을 주, 주, !"

"내가 루트에리노 대왕이라도 되는 줄 알아? 흐음. 내가 그 역할을
맡는다면 루손 네가 양치기 챠넬의 역할을 맡겠는가? 키는 좀 모자라
지만……"

"난 못해! 츄아!"

"시키지도 않아."

"췻췻췻! 그럼?"

"나는 그덴산의 거인이 다시 일어난 까닭이 턴빌에 있을 거라고 생각
해. 그래서 그곳으로 가서 조사해보겠다는 거지."

"츄익?"

"그덴산의 거인을 물리칠 방법을 알아내게 될지도 모르지. 아니, 알
아내겠어."

루손은 잠시 어쩔 줄 몰라하는 듯한 모습으로 레이저를 올려다보았
다. 그는 레이저의 몸이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는 듯이 그
의 머리에서부터 허리, 다리, 발 끝 순서로 바라본 다음 다시 거꾸로
올라와서는 레이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레이저는 웃고 있었다.

"나는 신성을 인정하는 유일한 마법학파 올로레인의 후계자야. 오랫
동안 잊고 살긴 했지만, 올로레인은 무지개의 끝에 있는 것보다는 무
지개 자체에 참배하지. 그리고 나 역시 올로레인이야. 그덴산의 거인
이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따님인 시간을 능멸하고 부활했다면, 그 친구
는 내게 혹독한 대우를 받겠다고 공언한 것과 마찬가지야."

"취우, 취! 너, 멋있게는 보이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군.
!"

"하하하……."

레이저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루손은 의아한 표정으로 레이저의
손을 보았다.

"악수하고 헤어지지. 넌 이대로 지바스혼으로 가서 오크들과 합류할
거지? 난 여기서 산을 내려가서 턴빌로 가겠어."

루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레이저의 손을 붙잡지는 않았다. 레
이저는 의아한 표정으로 루손을 바라보았고 루손은 고개를 돌려 침을
탁 뱉었다.

"퇘! 츄! 흐음. 아무래도 우습군."

"뭐가?"

"나크둠의 복수를 인간이 맡는 것. 취췻!"

"그렇긴 해."

"취치치! 가자. 턴빌이라고 했지?"

레이저는 잠시 루손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밀어진 손을 그대로
허공에 띄워둔 채 레이저는 루손을 바라보았다. 루손은 글레이브를 거
꾸로 쥐더니 어깨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머리를 써! 취치칙! 네가 마법사잖아. 나는 루손이고, 루손은 겁내
지 않아. ! 너만이 나크둠의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나? 취에엑!"

"나와…… 함께 가겠다고?"

"취! 너를 끌고다니겠다는 말이지."

레이저는 얼빠진 얼굴로 루손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오크가 뭐라고
말한 거지? 오크 주제에 인간 사회에 뛰어들겠다는 말인가? 어느 칼에
맞아죽을지 모르는 그 험악한 곳에,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
복수와 오크의 화렌차여. 당신의 아들들은 정말 불량청소년이올시다.

"인간이…… 그래. 복수를 위해 오크 무리에 뛰어드는 인간은 없겠
지. 용병 무리에 뛰어든다거나 산적이나 해적 무리에 뛰어드는 인간은
있을지 몰라도…… 그럼 나 너를 존경해야 되나."

"치? 뭐라고?"

"아니. 혼잣말이야. 허헛, 뭐. 말이 안될 것도 없군. 인간인 내가 오
크인 나크둠의 복수를 하겠다는 거나, 오크인 네가 복수를 위해 인간
들 틈에 끼여들겠다는 거나. 돌아버린 정도를 따지자면 우열을 가릴
수가 없겠군."

"츄츄츄! 무슨 말을 하는 거야앗!"

"아니, 아니. 좋아. 너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취아, 왜 가능하지 못해? 양치기 챠넬과, 취칫! 신궁 우타크도 거인
에게 찾아갔다. 취치. 나도 인간들에게 찾아간다. 안될 게 뭐냐?
!"

"좀 비교가 되는 것을 비교해라. 거인은 인간들을 깔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하지만 인간들은 오크를 깔보지 않아. 네가 턴빌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즉시 턴빌 경비대원들 중에는 오크 슬레이어가 탄생하
게 될 거야."

"취엑. 속이지! 당연히."

"속인다고?"

"양치기 챠넬과 신궁 우타크가……"

"으윽. 제발 좀 참아줘, 루손!"

"취이 ! 무슨 말이든 마음대로 해봐라. 난 나크둠의 복수를 한다.
!"

레이저는 보다 더 심한 말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의 마
음 속에서는 이미 결심이 많이 꺾이고 있었다. 그는 루손이 고집을 부
리면 얼마나 지독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맨몸으로 턴빌로
찾아가는 것보다는 글레이브 하나가 따라오는 것도 좋지 않은가. 그
글레이브를 쥔 것이 인간이냐 오크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글레
이브를 잘 다루느냐 못 다루느냐와 그의 친구이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루손은 글레이브를 잘 다루며, 그의 친구인 것이다.
레이저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만류해보기로 했다.

"음. 그런데 나크둠이 없는 이상 자네가 남은 오크들을 잘 이끌어야
되는 거 아닌가? 나크둠의 오른팔이었던 자네가 없어진다면 지바스혼
으로 간 오크들은 누가 다스리지?"

루손은 입을 좀 벌린 채 멍한 얼굴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고, 그 표정을 보면
서 레이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런, 마치 인간처럼 말했군.
지바스혼으로 달려간 녀석들은 스스로를 충분히 돌볼 수 있겠지. 오크
는 지도자가 없어도 잘 해나갈 수 있는 녀석들이고, 반대로 지도자가
있다고 해서 월등히 조직적으로 움직이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게 오크
다.

"어째, 나는 오늘 오전 내내 너를 황당하게 만들고 있는 거 같군. 미
안해."

"취이익! 사과하는 것은 좋은데, ! 뭐에 대해 사과하는 거냐?"

"나도 모르겠어. 좋아…… 그런데, 너 정말 나와 같이 갈 건가?"

"물론! ! 나크둠의 복수라면!"

레이저는 더이상 루손을 달래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쩐지 더 달래어
서 루손의 마음을 돌려놓으면 후회하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좋아. 함께 가자."

루손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저 역시 진지한 태도로 말했
다.

"맹세하지. 나크둠의 복수의 그 날까지, 우리는 같이 살고 같이 죽는
다. 나크둠을 죽인 것은 그덴산의 거인이며,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든
그 녀석이 다시 살아난 이유를 알아낸 다음, 녀석을 원래 있어야 할
위치로 돌려보낸다. 즉 과거로 보내어버리는 거야."

"이봐, 취이칫! 거인을 죽인다로 바꾸지?"

"그게 그 말이야. 녀석은 이미 한번 죽었던 녀석이란 말이다. 알겠
나?"

"츄으…… 좋아."

루손은 말을 마친 다음 곧장 글레이브를 당겨잡았다. 글레이브의 칼
날 아랫부분을 잡은 루손은 그것을 마치 대거처럼 사용하여 자신의 오
른손바닥을 베었다. 루손은 글레이브를 그대로 앞으로 내밀었고, 레이
저는 그것을 받아든 다음 주저없이 자신의 오른손바닥을 베었다. 쉭.
글레이브는 미끄러지듯 움직였고 곧 손바닥에서는 새빨간 피가 솟아올
랐다. 레이저는 잠시 눈을 찡그렸지만 아무 말없이 글레이브를 땅에
거꾸로 박은 다음 손을 내밀었다. 루손은 내밀어진 레이저의 손을 힘
껏 마주쥐었다.
그들이 함께 사랑하는 오크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기 위해, 인간과 오
크는 둘의 피를 섞었다. 인간과 오크가 싸움 이외의 목적으로 서로의
피를 섞게 된 것은 두 종족이 대지를 걷게 된 이후 이것이 처음이었
다. 레이저와 루손은 진지한 태도로 맹세의 말을 합창했다.

"내 몸 속엔 네 피의 맹세가 흐른다.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넌 피의
맹세를 잊을 수 없다."

오크식의 피의 맹세를 끝낸 인간과 오크는 잠시 서로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루손의 눈은 뜨거운 복수심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레
이저의 눈은 좀 엉뚱한 빛을 내고 있었다. 레이저는 루손의 위아래를
천천히 훑어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문제가 좀 있군."


================================================================
별로 두드러지지도 않은 것이지만, 레이저가 다른 마법사들 - 아프나
이델, 솔로쳐 등 - 에 비해 유난히 신의 이름을 많이 부르는 것을 눈
치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레이저는 신성을 인정하는 유일한 학파인
올로레인 학파의 마법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다른 마법 학파
라고 해서 신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신성의 해석 문제에 있어
올로레인은 다른 학파들과는 좀 차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어떤 특징
이냐고요? 글쎄요.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천천히 설명하겠습니다.번 호 : 11126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2-06 00:43
제 목 : [F/W]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5

Future Walker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5.

"뭐? 문제라니? 츄츄츄!"

"네 그 모습 그대로 인간 사회에 들어가면 어느 도시의 경비대원들이
라도 칼을 빼들고 볼 텐데, 그건 좀 달갑잖단 말이다. 네 모습을 좀
바꿔주겠어. 물론 오랫동안 바꾸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인간들 틈에
들어가도 들키지 않을 정도는 해둬야지 않겠어."

루손의 얼굴에 경계심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이저는 루손이
뒤로 두발자국 물러나는 것을 보고서 루손이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충
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루손은 쥐어짜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취, 나, 츄츄츄! 나에게 마법을, 취킥! 마법을 걸 거야?"

"응."

루손은 험악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레이저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길
게 말하지는 않았다.

"취! 좋아!"

레이저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진한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오크를 사귄 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행운이야. 엘프나 드워프
는 별로 재미없는 종족이지. 멍청한 인간 녀석들. 이 종족을 보라고.
도대체 어떤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오크들 틈에 끼어들 생각을
떠올릴 수 있겠어? 하지만 눈 앞의 루손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이다.
레이저는 더이상 다른 말 없이 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별 필요없
는 동작이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루손은 그 모습을 보며 불
안한 듯이 코를 벌렁거렸다.

"음, 츄! 취. 너 마법 못한다고 하지 않았냐?"

"하늘을 나는 마법은 못한다고 했던 거야. 어제 메모라이즈했던 마법
중에 쓸만한 것이 있어. 음…… 괜찮다면 널 암컷으로 만들어주겠어."

루손은 입을 쩍 벌렸다.

"암, 츄아! 암컷?"

"요즘은 헤게모니아도 바이서스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아직은 인간
사회에서 암컷은 여러가지로 유리한 대우를 받을 수 있으니까. 너희들
도 마찬가지잖은가? 수컷이야 언제 죽을지 몰라도 암컷은 그럴 일이
없잖아. 인간들도 마찬가지지. 네가 뭘 실수한다 하더라도 네 모습이
여자라면 시비를 걸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하다못해 이런 경우라도,
그러니까 네가 음식을 사납게 먹더라도 네 모습이 수컷이라면 '저게
왠 오크 같은 새끼야?' 라고 하겠지만 암컷이라면 점잖게 외면해주는
예의를 기대할 수도 있겠지."

루손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인간 녀석. 원래 우리들과 사귈 정도
로 황당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나? 그러나 레이저는 전
혀 이상할 것도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 고민하던 루손은 레이저가 서서히 손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서
는 황급히 말했다.

"자, 잠깐! 취치칙! 지금 하는 거야?"

"응."

"어, 츄! 아프거나, 음! 취이킥! 피를 낸다거나……"

"그런 건 없어."

"나, 츄, 나는 어떻게 해야 되지? 취취 !"

"그냥 가만히 서있으면 돼. 지금 그대로."

"츄르르르…… 좋아. 하자!"

루손은 이를 악물고는 어깨로 숨을 쉬기 시작했다. 레이저는 그 모습
을 보며 미소짓다가 곧 미소를 지우며 빠르게 캐스트를 시작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하기는 했지만 레이저는 자신이 지금 하려는 일
이 어느 정도의 일인지를 모르지는 않았다. 생물의 정신은 그 겉모습
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물고기나 새의 정신세계에서는 3차원
적인 위치가 훨씬 중요할지도 모른다. 인간에겐 사방을 나타내는 단어
(앞, 뒤, 좌, 우,)면 충분하지만, 새나 물고기라면 360 ×360 전방위
를 나타내는 단어(좌측 전방 위로 45도 방향을 가리키는 단어를 만들
어보라.) 가 필요할 것이다. 때문에 모습이 바뀐다는 것은 그 생물의
정신에 엄청난 혼란을 주게 된다. 조악한 예이지만, 아무리 현명한 인
간이라도 그에게 꼬리가 생긴다면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될지에 대
해 곤혹스러워 하게 될 것이다. 실상 인간은 자신의 팔이나 다리를 움
직이는 법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이기 때
문이다.
드래곤처럼 강력한 지성과 이성을 가진 존재는 폴리모프했을 때도 큰
충격을 받지는 않는다. 드래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매우 힘
들어한다. 어떤 마법사도 자신의 모습을 바꿔버릴 수는 있지만 그 모
습에 어울리는 익숙한 동작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을 거쳐
야 한다.
그렇다면 오크는 어떨 것인가.
레이저는 강구할 수 있는 모든 안전장치를 다 구사하기로 결심했고,
그래서 캐스팅 타임은 퍽이나 길어지게 되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루손은 더욱 겁을 집어먹었고 결국 10분 쯤 뒤, 루손은 처
음의 그 당당하고 곧은 자세를 잃어버린 채 거의 정신착란을 일으킬
듯한 공포 속에서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서있었다. 마법은 인간에게도
두려운 것이며 오크에게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결국 캐스트의 마지
막 순간이 찾아왔을 때까지 루손이 쓰러지지 않은 까닭은 그의 자존심
이나 정신력보다는 나크둠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폴리모프 어더!"

마법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얼마나 불가사의한가 하면, 마법에 걸린
루손보다 마법을 시전한 레이저가 더 놀라버릴 정도로 불가사의한 것
이다.
루손은 자신의 모습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의외로 별
느낌이 없는 변화에 실망했다. 하지만 레이저는 캐스트가 끝난 순간,
어금니가 멋진 그의 친구 루손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똑똑히 볼 수 있
었다.
키가 불쑥 커졌다. 루손은 이제 레이저와 비슷한 정도까지 커졌다.
그리고 루손의 허리는 원래 그의 목둘레와 비슷할 정도로 가늘어졌다.
(루손의 목이 오크치고도 유별나게 굵긴 하다.) 일그러진 고깃덩이 비
슷하던 그의 양볼은 붉은 기가 살짝 감도는 팽팽한 여인의 볼로 변했
고 팔다리는 원래 굵기의 반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늘어졌다. 머리에
서 자라난 다갈색 머릿결은 어깨를 살짝 덮을 정도의 길이가 되어 가
볍게 물결쳤다. 원래 걸치고 있던 갑옷은 이제 레이저의 머릿속에 담
겨있는 파의 복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레이저는 루손이 코를 벌름거린 순간 땅을 뒹굴며 웃을 수밖
에 없었다.

"푸핫하하하!"

"어, 뭐야, 흐응, 어어?"

루손은 레이저의 행동을 보고 놀랐고, 그 놀라움을 표현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가늘고 새된 목소리로 변한 것에 놀랐고, 당황하여 앞으로
걸으려다가 익숙지 않은 다리의 길이 때문에 놀랐다. "으아아!" 꽈당
탕! 결국 루손은 레이저의 앞에 나동그라지고나서야 자신의 팔다리를
보게 되었다. 루손은 공포에 빠져버렸다.

"내, 내 팔이! 흥! 내 다리가? 어어? 흐흥! 내 목소리가?"

루손은 자신의 목을 만지다가 익숙지 않은 느낌에 기겁했다. 루손의
손은 그대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고 머릿결에 손이 닿자 루손은 마치
뱀이라도 만진 것처럼 질겁하며 손을 떼었다. 바쁘게 내려온 손은 이
제 가슴을 더듬었고 루손은 그만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루손은 울고
싶어진다는 감정을 느낀 자신에 대해 더욱 놀랐다. 루손의 손이 가랑
이 사이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 레이저는 웃는 와중에도 얼굴을 좀
붉혔다. 그러나 루손의 절망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기에 레이저
의 그런 모습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루손은 입을 쩍 벌린 채
숨막히는 소리로 말했다. 아니, 말하려 했다. 그러나 레이저가 먼저
화급히 그의 말을 막았다.

"아아, 그래. 말했잖아. 암컷이라고. 그건 없어졌어."

루손은 기겁하며 바지를 벗으려고 했지만 손가락의 길이나 모양이 익
숙하지 않아서 그 동작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레이저가 황급히 말렸
다.

"걱정마, 걱정마. 내가 마법만 풀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테니
까. 루손, 정신차리라고!"

그러나 당황한 루손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루손은 코
를 벌름거리려다가 더욱 황당한 기분을 느껴버렸다.

"흐응, 흥! 이, 이거, 콧소리가? 흐으응!"

"잠깐, 잠깐만! 이봐, 루손! 정신차려. 그러다가 콧물 나오겠다. 코
의 구조가 바뀌었잖아. 음. 일어설 수 있겠어? 이보라구, 루손. 일어
나보라고. 응?"

루손은 얼빠진 모습으로 레이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레이저가 몇번
이나 더 재촉하고나서야 루손은 간신히 일어날 생각을 했다.

"팔을 내밀어봐, 잡아줄 테니. 루손! 손을 줘야지?"

"파, 팔길이가?"

루손의 몸이 기억하던 팔다리의 길이가 완전히 변했기 때문에 루손은
레이저의 손에 자신의 팔꿈치를 얹고 말았다. 몇번의 실수 끝에 루손
과 레이저는 간신히 손을 마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루손의 변화에
는 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 몸의 무게가 변했으며, 게다가 그
무게의 분포마저도 오크였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포가 되어 있었다.
허리 쪽에 상당한 무게가 위치하고 있었던 루손은 가슴과 골반쪽으로
많은 무게가 옮겨가자 균형을 도통 잡을 수 없었다. 결국 루손은 그를
부축하고 있던 레이저와 함께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아이고!" "흐으
응!" 성숙한 여인의 몸을 껴안고 나동그라지면서 레이저는 슬프게 생
각했다. 결국, 붉은 산맥에서도 여자를 안을 수는 있었군. 그게 오크
라는 것이 문제지만. 아으윽.



"자네와 파가 쫓는 무지개는 무엇이지?"

파하스는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하프를 향해 말하듯이 질문했지만
쳉은 그 질문이 자신에게 던져진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여관방
안에 있는 사람은 물론 세 명이었지만 파는 건너편 침대에 드러누운
채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으니까. 저렇게 피곤했나? 그래서 쳉은 간
단하게 대답했다.

"파의 언니입니다."

쳉과 파의 침대 사이에 앉아있던 파하스는 여전히 하프의 현을 어루
만지며 말했다.

"너는 애인의 언니를 추적하는 거냐, 애인의 동생을 데리고 추적하는
거냐? 아니면 애인을 고르기 위해 둘을 한 자리에 모아놓기 위해 날뛰
는 거냐?"

쳉은 무례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질문을 회피했다.

"죽을 겁니까?"

하프의 현을 조율하던 파하스의 손이 멈춰졌다. 그는 하프의 현 사이
로 침대에 누워있는 쳉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파하스의 눈에는
쳉의 얼굴이 세로로 조각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각나 있다고 해서
원래 없던 표정이 생겨나진 않았지만. 파하스는 하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역시 그곳에 놓여있던 쳉의 술병을 들어 잔에 따르며 말했
다.

"모르겠다."

술을 다 따른 파하스는 설명이 좀 부족하다고 느꼈다.

"누군가에게 납치당해 눈을 가려진 채 네가 알지 못하는 곳에 내팽겨
쳐진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쳉은 베개를 조금 높인 다음 말했다.

"옛이야기에나 나올 상황이군요.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본 다음 제가
아는 사람, 혹은 장소로 돌아오려고 하게 될 겁니다."

"난 이 시대에 내팽겨쳐졌어.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돌아가겠다는 말이군요."

"안식으로."

파하스의 목소리에는 짙은 감정이 담겨 있었지만 쳉은 그 감정이 무
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만 잠들었으면 좋겠는걸. 저 작자는 100년
동안 잤기 때문에 잠이 별로 필요없나? 파하스는 갑자기 몸을 뒤틀더
니 의자에 앉은 채 다리를 쳉의 침대 위로 올려 편한 자세가 된 다음
배 위에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넌 죽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 게다가 100년을 뛰어넘은 적도 없
고. 이봐, 뭐 하나 물어보지. 자넨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같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였어. 재수 없으면 자고 있던 집에 불이 나서 죽을 수
도 있고, 낙마해서 죽을 수도 있고, 그렇잖으면 자객의 단검에 꿰어죽
을 수도 있었지. 내겐 원한 가진 남자들이 많았거든. 그 녀석들도 이
젠 다 죽었겠군. 고인들에게 명복 있기를. 진혼곡은 나중에. 어쨌든
난 다른 사람 못잖게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죽음에 대
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단 말이야. 그런 걸 계속 생각했다간 도무지 살
수가 없으니까. 생각해보라구. 미인에게 키스하면서 그녀의 죽음을 생
각해서는, 죽고나서 썩어서 해골바가지 위에 너덜거리는 그 뭉그러져
가는 입술의 감촉을 상상해서야 어떻게 제대로 키스할 수 있겠어?"

"예. 그렇습니다."

파하스는 쳉의 단순한 대답에 약간의 초조함을 느끼며 말을 이어나갔
다.

"아무도 죽음을 계속 생각하며 살지는 않잖아. 그렇지?"

"예."

"그런데 나는 이미 죽어봤단 말이야.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음. 자네 총각이야?"

"묻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순간 파하스의 눈이 조금 짓궂은 빛을 띠었다.

"여인과의 꿈 같은 밤. 모든 총각들의 환상이지. 하지만 실제로 겪어
보면 그거 시시하지. 살인을 해본 적은 있나?"

쳉은 파하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조금 전과 똑같은 대답을 했
다.

"묻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살인도 마찬가지지. 애써 피하려들지만, 피치못할 이유에서든 절실
한 이유에서든 누군가를 죽이게 되면 두번째 살인부터는 그다지 충격
이 없게 되지. 이 때부터 타인의 생명이라는 것이 부질없게 보이게 되
지. 이해가 되나? 그래. 이게 예로서는 더 낫군. 살인을 원하는 녀석
은 없지. 하지만 한번 누군가의 숨통을 끊어버리면, 그 다음부턴 살인
은 귀찮고 골치아픈 일일지는 몰라도 슬픈 일은 아니게 돼. 동정심이
라는 것이 사라지지. 죽음도 마찬가지야. 매일같이 잊으려 애써왔고
가까스로 피해왔던 거, 실제로 닥쳐보면 그게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게 돼. 이 때 팍! 하고 각성은 찾아오게 되지."

파하스는 극적으로 말을 맺으며 쳉의 눈치를 살폈지만 쳉은 긴장하지
도 호흡소리를 낮추지도 호기심어린 눈빛을 보내지도 않았다. 저 골렘
만큼의 감수성도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죽음을 애써 잊어가면서까지 지켜온 삶이 얼마나 부질없는가 하는
각성이지. 생존 욕구라는 것은 죽음을 피하려는 욕구야. 하지만 죽음
을 겪어버리면 그 반대개념으로서의 생존 욕구도 사라지지."

쳉은 물끄러미 파하스를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

"당신의 마지막은 사이들랜드 대평원에서였다고 들었습니다."

파하스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그랬어."

"사이들랜드 대평원을 떠돌며 호흡이 끊어질 때까지 하프를 타고 노
래를 부르다가 걸으며 죽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정확하게 언제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지요. 왜냐하면 당신은 죽고나서도 계속해서
걸었고 노래했고 하프를 탔으니까. 어쩌면 당신은 사이들랜드 대평원
에 도착한 순간에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더군
요."

"재미있는 전설이군."

"사실입니까?"

파하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쳉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른 말을 꺼내기
로 결심했다.

"내일 일을 결정하도록 합시다, 파하스. 나는 파와 함께 하던 일을
계속할 겁니다. 당신은 어쩌시겠습니까?"

파하스는 이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내었다.

"고향엘 와봐도 별 감동은 없어. 기억하는 모습과 너무 달라."

"그런가요."

"오히려 환멸을 느끼게 되는 거 같군. 첫사랑이었던 이웃집 누나를
사창가에서 발견하게 된 것과 비슷한 기분일까. 사내들은 무례해졌고,
아가씨들은 뻔뻔해졌군. 오늘 저녁만 해도 그래. 젠장!"

쳉은 저녁에 다른 여관에서 일어났던 작은 사건을 생각하며 짧게 미
소지었다. 다른 손님들이 있긴 하지만 세 사람 정도는 끼어 잘 수 있
을 거라는 말에 쳉은 고개를 끄덕였고 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만
파하스는 주인장을 삿대질하며 '당신 포주야?' 등의 말을 해서 커다란
싸움판을 벌일 뻔했다. 파가 다급하게 불러댄 이름을 듣고 "파하스!
진정해요." 주인장이 무슨 상상을 했는지는 자명하다. "미친 놈을 재
울 수는 없어. 자살을 하거나 다른 손님들에게……" "이 자식, 말 다
했냐!" 결국 세 사람은 그 여관을 나와서 파하스를 몹시 교육시킨 다
음에야 이 여관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파하스는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된 존재일까……"


================================================================
"…마지막으로, 제 이름을 짓겠어요. 이름이 없는 나날이 너무 길었
어요. 중요한 건, 내가 계속 웃으면서 이 모든 일을 할 거라는 점이에
요…" (송경아 「아기찾기」민음사, 285쪽)번 호 : 11128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2-06 00:44
제 목 : [F/W]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6

Future Walker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6.

"프리스트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겠지만,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우
리와 계속 함께 있어주길 바랍니다."

파하스는 고개를 휙 돌려 쳉을 바라보았다.

"왜지?"

"제가 찾고 있는 무녀는 퓨쳐 워커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문제는 엉
뚱한 시간에 떨어진 것에 대한 것 아닙니까?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어
쩌면 그녀는 당신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
다."

"그렇게 생각하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제일 처음 당신을 발견했다는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책임감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잠깐, 그렇게 기분 나
쁜 표정 짓지 마십시오. 당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은 아닙니다."

파하스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을 꺼내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어린애나 마찬가지야."

"그 외에도 뭐, 대시인 파하스라면 유쾌한 길친구가 될 거 같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들어보았다는 것은 영원한 자랑거리가 될 겁니다. 미
같은 무녀가 아니라면 이 시대의 사람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쳉은 파하스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파하스의 표정을 보고
는 좀 당황했다.

"잠깐, 조금 전에 뭐라고 했나? 미 같은 무녀? 자네가 추적하는 무녀
의 이름이 미인가?"

"그렇습니다만."

파하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파를 바라보았고 쳉은 의아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파하스는 시트를 뒤집어쓴 채 잠든 파의 모습
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아, 이봐. 파 양은 바이서스어를
모르나?"

"알 리가 없지요."

"그래서였군! 가자."

파하스는 벌떡 일어나며 침대 옆에 기대어두었던 자신의 검을 들어올
렸다. 쳉은 그에게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었고 파하스는 답답하다는
듯이 설명했다.

"젠장, 어른이 가자고 하면 어서 일어날 것이지! 오늘 오후에 들렀던
그 주점 기억하지? 싸움이 일어날 뻔했던 주점 말이야. 그 주점에서
자네를 도와주기 위해 일어났던 그 검사 기억하나?"

"예. 눈빛이 매섭던 검사 말이군요."

"그 검사는 자기 동료와 바이서스어로 이야기를 나눴네. 난 그들이
외국어를 사용하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 엿들었어. 그런데 그들의
대화에서 미라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더군. ……이봐, 쳉? 기다
려! 같이 가자고!"

파하스는 쳉을 뒤쫓아 달려가다가 쳉이 걷어찬 문이 되튕겨오는 바람
에 얼굴을 강타당할 뻔했다. 저 골렘 같은 녀석이 왜 저렇게 발광을
하는 거야? 파하스는 검을 찰 사이도 없이 손에 그 커다란 검을 쥐고
좁은 복도를 힘겹게 달려야 했다. "이봐, 쳉! 서라고!"
두 사람이 나간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열린 방문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에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등잔불이 가볍게 일렁거리기를 몇 번.
파의 침대에서 시트가 조용히 미끄러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부터 자신
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잔인한 결심을 한 사람이 나타났다.
파는 조용히 시트를 정돈해놓고는 등잔불을 훅 불어 끄고 파하스가
뛰쳐나가며 넘어뜨린 의자까지 똑바로 세워놓았다. 그리고 역시 파하
스가 열어젖힌 방문으로 나온 파는 문을 조심스럽게 닫아놓았다. 옆방
의 손님들의 안면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 동작마저 끝내고나자
파는 더이상 시간을 끌 수 없게 되었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다했어. 젠장. 이제 쳉 네가 나를 막지 못한다
면 그건 네 실수야. 아니, 운명이 그런 거야. 그렇게 되는 거라고.
파는 이렇게 되지도 않는 말을 속으로 웅얼거린 다음 조금 전 쳉과
파하스가 달려갔던 복도를 빠르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네 사촌형, 신차이는 어떤 사람이지?"

"누군가를 독살해야 된다면 방울뱀의 독을 모아 1파인트 잔을 넘치도
록 채운 다음 상대에게 그것을 간절히 마시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만
들어 준 후, 그것을 마시고 쓰러진 상대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곰곰히
생각하지. 정말 죽었을까."

이 녀석은 가족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에서만 말이 길어지는군. 그란
은 미소를 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감탄사도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운
차이를 실망하게 만든 다음 천천히 말했다.

"편집증이 있나?"

"아니. 괜찮은 사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네 고향에서는 그게 괜찮은 사나이의 표본이냐?"

"흐음. 그래. 이 말은 사내의 세 가지 덕목을 약간 은유적으로 나타
낸 말이지. 성실함, 이해심, 신중함. 방울뱀의 독을 1파인트나 모았으
니 성실한 것이고, 강제로 마시게 하지 않고 상대로 하여금 마시고 싶
어지게 만들었으니 이해심 있는 것이고, 1파인트나 되는 맹독을 마신
상대가 혹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점까지 의심하니 신중한 것이지."

"나라면 그건 바보의 세 가지 덕목이라고 말하고 싶군. 어쨌든 말인
데, 그 이야기나 다시 들려주게. 자네 사촌형이 목검으로 서펜트를 죽
였다는 이야기."

"왜?"

밤은 길고 그래도 인간 같은 네리아는 미를 간호하느라 정신이 없으
니 너를 상대해야 되는 데다가 우리가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녔으니
만일 이 도시에 후작이 있다면 우리 동정을 파악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습격에 대비해서 불침번을 서야 되는데 불침번을 서며 보내어
야 할 밤은…… 역시 기니까. 라고 대답하는 대신, 그란은 이렇게 말
했다. "심심하니까."

"내 가족사가 네겐 심심풀이 물파이프냐?"

"왜 그게 말이 안된다는 거지? 자네가 그 때 말하던 방식으로 말해볼
까. 신차이는 목검으로 서펜트를 죽였다. 그러나 목검으로 서펜트를
죽일 수는 없다. 이래가지고서는 삼단논법도 되지 않아."

"삼단논법이라고 말한 적 없다."

"아아."

"……거기에는 생략된 말이 있지."

"뭐지?"

"인간은."

인간은? 그란은 이 말이 어느 부분에 들어가야 되는지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주어가 들어갈 수 있는 부분은 어차피 한 군데 뿐이
었다.

"인간은 목검으로 서펜트를 죽일 수 없다?"

운차이는 그란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보내지 않고 파이프만 만지작거
렸다. 삼단논법을 완성한 그란은 그 결론에 당황하며 운차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사촌형이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야? 너처럼?"

"응? 그거 무슨 말이지?"

"농담하냐는 말이다."

운차이는 싸늘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은 길지 않았다. 파이프를 깊이
문 운차이는 약간 튀는 발음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그건 낭만적이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이야기야. 우리 사촌형의 어머
니, 즉 나의 고모님은 아름다우신 분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우냐 하면
신혼 여행의 해변 산책에서 머맨에게 납치당할 만큼."

"머맨에게? 으음……."

"내 사촌형은 고모님이 다시 인간 사회로 돌아오고 낳은 아이지."

"아버지를 알 수 없다는 말이군. 하지만 인간과 머맨 사이에 자식이
나올 수 있나?"

"모르지."

"너는 그렇게 의심한다?"

"말했듯이, 그는 서펜트의 장례식을 주관한 자니까. 그게 의심의 요
건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나 이거 참. 머맨의 자식이라고? 그림 오세니아와 시무니안의 자식
이란 말이지…… 허헛, 참."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하던 그란은 운차이의 핏발선 눈을 보고는 깜
짝 놀랐다. 운차이는 입에 문 파이프를 빼내며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 뭐라고?"

"……내가 시적인 표현을 쓴 것이 그렇게 경악스럽냐?"

"이런, 제기랄! 누가 그런 시시껄렁한! 그림 오세니아와 시무니안의
자식? 그렇군. 머맨과 인간 사이의 자식이라면, 그거 그렇게 부를 수
도 있군. 그렇다면……!"

운차이는 팽창할대로 팽창한 동공으로 그란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그
란은 퍽 불쾌해졌다.

"눈싸움하자는 거냐?"

그러나 운차이는 그란의 불평은 안중에도 없었다. 운차이는 평소에
거의 하지 않는 말, 즉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갈매기와 희구의…… 그림 오세니아. 대지와 회상의 시무니안……
희구와 회상……"

다시 한번 불평을 터뜨리려던 그란은 불평의 말이 입천장 쯤에 달라
붙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운차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정확하게
재현해내었다. 희구와 회상이라고? 희구는 바라는 것, 미래로 향하는
소망. 회상은 돌아보는 것, 과거로 향하는 그리움.
그란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문제, 신스라이프의 문제의 답이 네 사촌형이라는 말이야?"

"컹컹컹!"

그란의 질문에 대해 돌아온 이 이상한 대답은 잠시 두 사람을 얼어붙
게 만들었다. 그것은 운차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달탄?" 그 때
뭔가가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가 울리더니 또다른 찢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돼에에에!"

"네리아잖아? 이런, 제기랄!"

그란과 운차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의자를 박차고 계단으로 뛰
어올라갔다. 여관 정문과 홀은 빈틈없이 감시되고 있었는데 어느새 이
층에? 몸이 빠른 운차이가 앞장서고 그란은 그 뒤를 따르며 두 사람은
좁은 계단을 두, 세개씩 건너뛰며 올라갔다. 그래서 이층에서 갑자기
나타난 네리아 때문에 운차이가 멈춰섰을 때 그란은 운차이의 허리에
부딪히며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으아아악!"

운차이와 그란은 뒤엉켜 계단을 굴러내려갔다. 텅, 텅, 텅! 그러나
바닥에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두 사람의 몸 위로 날아오른 네리아였
다. 계단의 용도를 완전히 무시하는 무모한 행동을 취한 네리아는 일
층에 도달하자마자 무릎을 굽혀 충격을 흡수하며 그대로 한 바퀴 굴렀
다. 그리고 네리아가 다시 일어났을 무렵에야 두 사나이는 그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볼품없는 모습으로 일층에 도달했다. 뒤를 돌아본 네
리아는 바닥에 쫘악 널브러진 두 사람의 불쌍한 모습에 대해 사무치는
동정심을 표현하는 대신 이렇게 외쳤다.

"미가 납치됐어!"

"으윽! 뭐라고?"

그 때 바깥에서 다시 아달탄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크와아아!"
"으아, 사람 살려!" 연이어 터져나온 비명소리에 네리아는 환한 표정
으로 펍의 문을 박차고 달려나왔다.
밖으로 나온 네리아가 본 것은 개와 사람이 한데 어우러진 멋진 춤이
었다. 아무래도 리드는 사람쪽이 맡은 듯, 시커먼 복면을 둘러쓴 사내
는 팔에 아달탄을 매단 채 상당한 난이도가 있을 법한 스핀을 해대고
있었고 그래서 아달탄은 공중에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끄아아아!"

사내는 이층 창문에서 곧장 뛰어내려 자신의 팔에 매달린 키타나 하
운드를 떼어내기 위해 미친듯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하지만 아달탄
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키타나 하운드가 어떤 모습인지를 여실히 보
여주고 있었다. 양자 모두 감탄할 만한 동작이었다. 저 거체를 매단
채 돌고 있는 사내나, 저렇게 휘둘려지면서도 팔을 놓치지 않는 아달
탄이나. 그 때 사내의 다른쪽 팔이 뒤로 당겨졌다. 그리고 그 손에는
롱소드가 예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마!"

네리아가 곧장 트라이던트를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사내의 귀에는
그녀의 협박이 들어오지 않았다. 사내의 당면 과제는 이 글자 그대로
의 '미친개'를 떼어놓는 일이었고 그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트라이던
트에 꿰이든 그보다 더 심한 일을 당하든 그가 알 바 아니었다. 바로
그 때 우연히 일어난 두 개의 기적이 아니었다면 아달탄은 롱소드의
칼날에 피를 뿌려야 했고 사내는 네리아의 트라이던트에 피를 뿌려야
했을 것이다.
아달탄은 갑자기 사내의 팔을 놓아버렸고 사내는 하마터면 자신의 팔
을 잘라버릴 뻔했다. 공중에서 휘둘러지고 있던 아달탄은 사내의 팔을
놓자마자 그대로 날아가버렸다. "깨갱!" 그리고 사내를 향해 달려들던
네리아는 갑자기 발을 헛짚으며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그녀의 뒤를 따
라 달려나오던 운차이와 그란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잠시 평정
을 잃었다. 날아가버린 아달탄은 땅에 쓰러진 자세 그대로 끙끙거렸고
네리아는 코를 골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크으으으…… 쩝쩝."

"네리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운차이와 그란이 살펴보았을 때 사내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다. 운차이는 바닥에 엎어진 네리아를 잠시 바라보더니 곧
장 아달탄을 향해 달려갔다. 여자는 안 만져. 그란은 이렇게 해석하고
는 자신이 네리아를 맡게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크르르릉! 푸아……
음냐." 땅에 쓰러진 불편한 자세 그대로 코를 골아대는 네리아를 보며
그란은 혀를 찼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찾고 있는 것을 대충 짐작하고
있던 그란은 잠시 후 네리아의 오른쪽 귀 아래에 꽂혀있는 작은 바늘
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아달탄을 살피고 있던 운차이는 그란이 발견한
것과 같은 것을 발견했다.

"독침?"

그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잠시 보류하며 운차이는 아달탄의 다리
부분에서 뽑아낸 바늘을 혀로 가져갔다. 아주 빠르게 바늘을 핥은 운
차이는 침을 퇘 뱉고서는 대답했다.

"수면제야. 이 둘을 재우고 미를 납치하려 했나 본데."

"그럼 약기운이 지금에서야 돌았단 말이야?"

"약이 엉터리야. 추적할까?"

그란은 고민했지만 대답하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납치는 살해하지 않겠다는 보증이다. 네리아와 아달탄부터 처리하
지. 드디어 후작이 꼬리를 드러내었군."

운차이는 잠시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란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
이며 아달탄을 안아올렸다. 그란은 이미 네리아를 안아올리고 있었다.
"푸화아…… 냠냠." 그 때 드디어 후라마의 펍의 안녕질서와 그 투숙
객들의 평안한 밤을 담보해야 할 주인 후라마가 거친 밤바람에 잠옷자
락을 휘날리며 손에는 장작을 든 채 문을 박차고 달려나왔다. "뭐야!"
펍의 주인으로 4대째. 후라마는 능숙하게도 상황의 종료를 느꼈던 모
양이다.
네리아를 안아든 그란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후라마를 지나쳐 홀로
걸어들어가버렸다. 그리고 운차이는 아달탄을 안은 채 반대편으로 지
나쳤다. 외로운 대로에 외로운 존재로 남겨진 후라마는 당황한 태도로
몸을 돌렸다. 자신이 가진 무한한 정의를 아직 반도 펼쳐보이지 않았
다고 주장하는 듯한 발걸음으로 두 사람의 뒤를 따라들어온 후라마는
운차이를 향해 질문했다.

"무슨 일입니까, 손님?"

"당신에게 퍽 자주 요청하는 기분이 드는데, 뜨거운 물과 수건 등을
가져다주시오."

"예? 저,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당신 여관에서 우리 동료 중 한 명은 납치되었고 한 명은 독침을 맞
았고 한 마리는, 역시 독침을 맞았소. 이제 설명이 되었소?"

그 때 또다른 목소리가 운차이의 말에 대답했다.

"아달탄? 그럼 미가 납치된 겁니까?"

운차이는 고개를 돌리며 반사적으로 검의 손잡이를 부여잡았다. 그러
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활짝 열린 여관문을 통해 숨이 턱에 닿아 헐떡
거리고 있는 두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운차이는 그
들이 낮에 보았던 남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거구의 젊은이 쪽이
운차이에게 다가서며 아달탄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말했다.

"쳉이라고 합니다. 아달탄은 어떻게 된 거죠? 그리고 미가 납치당했
다고 하셨습니까?"

운차이는 잠시 쳉의 어깨 너머 열린 여관문을 통해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거 왠지 설명하고 설명받을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은 밤
이로군.


================================================================
즐거운 주말 되세요.번 호 : 11191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2-07 01:24
제 목 : [F/W]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7

Future Walker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7.

파는 아무 무기도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는 대신 재빨리 혁대를
뽑아들었다. 혁대를 왼손에 감아 쥔 파는 다시 배를 지붕의 기와에 찰
싹 붙인 채 꿈틀거리듯이 기어갔다. 하지만 지붕 끄트머리에 이르자
낡은 너와들이 불길한 소리를 내었기 때문에 파는 잠시 멈춰서야 했
다. 그 순간 구름에 가리워졌던 달이 다시 하늘을 은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달빛 속으로 떠오른 자신의 손, 그리고 그 손에 쥐어진 혁
대의 버클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던 파는 피식 웃어버렸다. 교교한 달
빛이 소리없이 물결치는 지붕 위에서 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모한
건가? 아니면 고도로 지능적인 건가?
파는 쳉과 파하스보다도, 운차이와 그란보다도, 심지어 네리아가 비
명을 지르기도 전에 먼저 후라마의 펍에 도달했었다. 쳉과 파하스가
숨차도록 달려온 것에 반해 파는 건물들의 지붕과 옥상을 밟으며 하늘
로 날아왔기 때문에 곧장 가로지르는 방식으로 달려올 수 있었다. 그
리고 후라마의 펍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건물의 지붕에 도달했을
때, 파는 당황하며 건물 위로 불쑥 솟아오른 굴뚝 뒤에 몸을 숨겨야
했다.
조심스럽게 얼굴의 반만 내민 파는 후라마의 펍을 살펴보았다. 은은
한 달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파는 후라마의 펍 지붕에 왠 사내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저게 뭐지? 나이트호크인가? 사내들은 모두 세 명
이었고 모두들 복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붕 위에서 뭔가 작업을
하더니 곧 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파는 그들이 지붕
에 밧줄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파는 몸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굴뚝을
돌아서 달빛 때문에 생기는 굴뚝의 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 동안 사내들 역시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후라마의 펍 벽을 따라 내
려왔다. 그 때 밤하늘을 가로지르던 작은 구름이 달을 가렸다.
주위는 암흑으로 빠져들어갔다.
거대한 세 마리 거미처럼 여관벽을 타고 내려온 사내들은 목표한 창
문에 이르자 묘한 재주를 선보였다. 먼저, 가운데서 내려오던 사내가
갑자기 몸을 뒤집었다. 사내는 발로 밧줄을 감고 한손으로 창턱을 짚
으며 창문 위에 완전히 거꾸로 매달린 자세가 되었다. 그리고는 창문
위쪽으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어 창문 안쪽의 동정을 살피기 시작
했다. 다른 두 사내들은 창문의 좌우로 내려와 벽을 밟고 대기했다.
놀라울 정도의 조직적인 행동에 파는 숨소리마저 낮추었다.
창문으로부터 나오는 빛 이외에 다른 빛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파는
사내들의 동작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파는 창문 위쪽에 거
꾸로 매달렸던 사내가 다른 두 사내들에게 뭔가 손짓을 보내는 것, 그
리고나서 품속에서 꺼낸 뭔가를 입가로 가져가는 것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손짓을 받은 창문 왼쪽에 있던 사내도 뭔가를 입가로 가져갔
다. 창문 바깥의 침입자가 창문 안쪽의 피해자를 공격하기 위해 입가
로 가져가는 것…… 블로우건이다!
파는 훅! 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실제로 소리
가 들려올 까닭은 없었지만. 그리고 고요한 후라마의 펍은 끔찍한 소
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컹컹컹!"

파는 침입자들과 거의 비슷한 경악을 느꼈다. 블로우건에 맞고 고함
을 지른다는 것은 파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건 아달탄이
잖아? 파가 당황하는 사이에 창문 오른쪽에 있던 사내가 벽을 박차고
는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와장창! "안돼에에에!" 또다시 들려온 비명
소리는 여자의 것이었다. 설마 미인가? 그러나 파는 그것이 미의 비명
소리와는 좀 다르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바이서스어였으니까.
창문 밖에 남아있던 두 사내는 재빨리 건물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남자들이 땅에 내려서자마자 이층 창문으로부터 뛰어들어갔던 남자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쾅쾅! 도대체 인간이라고 봐야 될지 의심스러운
동작이었는데, 그 자는 옆구리에 시트로 둘둘 만 사람을 하나 낀 채
아래로 뛰어내렸으면서도 별 충격이 없는 것처럼 곧장 일어섰기 때문
이다. 발뒷꿈치가 박살나지 않았나? 그런데 저 시트 속에는…… 이런!
파는 역시 뛰어내릴까 했지만 그녀가 있는 곳은 사층짜리 건물의 지붕
위였다.
그러나 아달탄은 주저하지 않았다.
사내가 뛰어내린 창문으로부터 아달탄이 날아올랐다. 휘익! 키타나
하운드의 거체가 주저없이 뛰어내린 곳은 옆구리에 시트 꾸러미를 끼
고 있는 남자의 머리 위쪽이었다. 그 때 먼저 내려왔던 사내 하나가
바람처럼 달려들며 팔을 내밀었고 아달탄은 할 수 없이 그 사내의 팔
을 물어야 했다. "끄으윽! 도망치십시오!" 사내가 막아준 덕분에 다른
두 남자들은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후라마의 펍에서 빨강머
리 여자가 희한하게 생긴 창을 휘두르며 달려나왔다.
그러나 파는 대로의 싸움을 자세히 보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왜냐하
면 달려가던 두 남자들은 조금 후 골목을 하나 꺾더니 되돌아오고 있
었던 것이다. 그들이 뛰어든 곳은 다름아닌 후라마의 펍 정면의 건물
이었다. 문은 반대쪽으로 나있었기 때문에 건너편에서는 볼 수 없는
위치였지만, 높은 곳에 있던 파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파는
자신이 본 것을 믿어야 될지 고민하는 애처로운 상황에 빠졌다. 바로
앞집으로 납치한다고?

"하지마!"

다시 바이서스어다. 놀란 파가 고개를 들어올렸을 때 아달탄에게 공
격당하던 사내는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여관에서 또다른 사내들이 달
려나왔지만 그들은 도망자를 추적하기보다는 빨강머리 여자와 아달탄
에게 각자 달려갔다. "네리아?" 파는 순간 여기서 몸을 드러내어 저들
에게 납치범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려야 되지 않는가에 대해 고민했
다. 그 때 반대쪽의 길에서 달려오는 두 명의 남자들이 없었다면 파는
곧장 아래를 향해 고함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쳉과 파하스였다. 그들의 모습이 보인 순간 파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
췄다. 쳉과 파하스는 그대로 후라마의 펍으로 달려들어갔다.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낮췄던 파는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
고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파는 잠시 후라마의 펍의 동정을 살피
다가 다시 납치범들이 들어간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서있는 건물
지붕에서 납치범들이 들어간 건물까지의 거리는…… 넘을 수 있어. 파
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뛰어올랐다. 산봉우리를 타고 날아다닌다
는 산과 은닉의 일세인처럼 파는 지붕에서 지붕까지의 10큐빗 가까운
허공을 날았다.
거대한 박쥐처럼 사뿐히 지붕 위에 내려선 파는 소리없이 엎드렸다.
천천히 지붕 끄트머리를 향하며 파는 혁대를 뽑아들었고, 그 때 구름
은 흘러 다시 달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구름이 달빛을 가린, 불과 몇
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래서 파는 지금 납치자들이 뛰어든
건물의 지붕 위로 위치를 옮긴 다음 손엔 혁대를 쥔 채 이렇게 고민에
빠져있었다. 무모한 건가? 아니면 고도로 지능적인 건가? 눈 앞의 건
물로 도망치는 납치범들이 도대체 어떤 종류에 해당하는 것인지 파로
서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제자리에 가만히 엎드려 고민하는 동안 파는 자신의 고민의
정체를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낡은 너와 때문이야. 그렇잖았다면 멈
춰서지도 않았을 텐데. 파는 너와에 대해 소리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미를 구해야 되나? 파의 고민은 바로 그것이었다.
미를 납치한 것이 어떤 녀석인지는 모른다. 그 이유 같은 것은 더욱
모르고. 하지만 미를 납치했다. 그것도 쳉과 만나기 직전에 납치해주
었다. 나쁜 놈들! 너희들이 아니었으면 쳉은 미를 만날 수 있었고, 그
러면 틀림없이 기뻐했을 거야. 너희들이 망쳤어. 너희들은 쳉을 기쁘
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나쁜 것은 너희들이야.
파는 손에 전설의 무기나 되는 것처럼 자신의 혁대를 감아 쥔 채 차
가운 지붕 위에 이렇게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셀레나의 달빛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싫었다. 게다가 이 다음 순간에 무엇을 해야 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계속 이런 상태에 있어야 된다는 것은 더욱 그녀의 마
음에 들지 않았다.
미. 모두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왜 쳉을 사랑해. 왜 떠났어.
왜 납치당한 거야. 왜 아버지를 죽게 내버려두었어. 왜 내 몸에 이상
한 문신을 새겨서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게 만든 거야.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려있는 일이 점점 바보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파
는 몸을 일으켰다.
파는 지붕에 앉은 채 가슴 앞에 무릎을 모으고 다리를 감싸 안았다.
익숙지 않은 높이에서 익숙지 않은 야경을 바라보며 파는 조용히 호흡
했다. 머리 위로 쏟아져내리는 별빛은 고향과 마찬가지였지만 이 도시
의 밤은 지평선 대신 네모난 어둠들이 가득가득 쌓여 밤하늘을 이고
있었다. 파는 무릎에 턱을 얹고 앞을 바라보았다.
뜻하지 않은 소란을 겪게된 후라마의 펍에서만 왁자지껄한 불빛이 번
득였을 뿐, 도시의 다른 부분에서는 검은 밤하늘을 이고 서있는 건물
들의 을씨년스러운 그림자들 뿐이었다. 둔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지평
선을 가린 네모난 어둠들. 사이들랜드의 양치기 처녀의 발 아래로 펼
쳐진 도시의 음영은 너무 어둡고 너무 무거웠다. 파는 고개를 젖혀 하
늘을 올려다보았다.
납치당한 혈육이 끌려간 건물의 지붕 위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바
라보는 별빛이라고 해서 별다른 것은 없었다. 파는 고개를 숙여 무릎
에 얼굴을 파묻고는 소리없이 흐느꼈다.



쥬빌킨 일레드마는 복잡한 심사를 가누기 위해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평소에 잘 마시지 않던 술이었기에 오랫동안 취하는 줄을 모
르던 쥬블킨은 결국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술을 퍼마셨다. 송장을 치
울까봐 겁을 집어먹은 마스터에 의해 쥬블킨이 주점 바깥으로 쫓겨난
것은 루미너스가 밤의 여정의 중반부에 이르렀을 때였다.
혼미한 정신으로 어느 집 벽에 기대어 배뇨를 마친 쥬블킨은 바지 앞
자락을 그대로 열어둔 채 어, 참 시원한 밤이다. 어쩌구 하면서 자신
의 집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었다. 의사의 자존심은 무너진지 오래 되
었다고 생각했건만 그의 가슴 속에 아직도 짓밟힐 수 있는 마지막 자
존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쥬블킨은 킬킬거렸다. 젠장. 엉터리
약 파는 거하고 다를 바 없어. 하지만 분명히 달랐고 쥬블킨도 잘 알
고 있었다.
털썩. 쥬블킨은 대로 가운데 주저앉아 두 팔로 땅을 짚고 하늘을 올
려다보았다. 그래서 쥬블킨은 루미너스의 둥근 얼굴을 가로지르며 날
아가는 검은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휘익. 아마도 왼쪽의 삼층짜리 건물의 지붕이라고 짐작되는 곳에서
날아오른 그림자는 그대로 밤하늘을 가로질러 루미너스의 얼굴을 잠시
가렸다가 그대로 오른쪽의 이층짜리 건물의 지붕 너머로 사라져갔다.
달을 가린 순간 잠시 드러났던 그림자는 아무리 보아도 젊은 여자의
실루엣이었다. 쥬블킨은 한가롭게 추리했다.
일세인께서 돌아오셨나?
마지막까지 우리를 지켰다가 타의에 의해 떠나셨던 그녀께서 다시 돌
아오신 건가?
……요즘같은 세상이라면, 의사를 존중할 줄도 모르는 녀석들이 우글
거리는 세상이라면, 그럴만도 하지. 쥬블킨은 그대로 뒤로 쓰러져 코
를 골기 시작했다. 크으윽.



"그럼 당신이 그 바이서스 남자를 죽였습니까? 그렇군요. 손에 끼고
계신 그 장갑이 아무래도 예사 물건으로 보이지는 않는군요."

"긍정한다."

"왜 미를 데리고 온 것입니까?"

"거절이 제시됨은 내 어학 실력을 상회하는 난이도 높은 설명이 요구
됨으로 해서이다."

파하스는 포복절도를 하고 싶었지만 쳉의 얼굴을 봐서 참기로 했다.
반면 운차이는 보지 않는 척하며 침대에 눕혀둔 네리아만을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쳉과 그란의 대화에는 끼여들지 않고 있었다. 쳉
은 머리를 좀 거칠게 긁고나서 바이서스어로 바꿔 말했다.

"그럼 당신 나라 말 하십시오."

그란은 멍한 표정으로 쳉을 바라보았다.

"당신, 바이서스어 할 줄 알았나? 왜 진작 말하지 않아서 괜한 고생
을 하게 만든 건가?"

"말 잘 못합니다. 듣기 가능합니다. 그러니 바이서스어 하십시오. 당
신 헤게모니아어 듣기 하지요? 각자 자기 말 합시다."

그래서 그란은 한결 자세하고 이해되기 쉽게 설명해줄 수 있었다. 그
란은 자신들이 바이서스의 범죄자를 추적하고 있으며 그 범죄자와의
대결에서 미가 휘말려들까봐 우려되어 미를 보호할 겸 데리고 있었다
는 점, 그리고 그 범죄자가 미를 납치한 것으로 추측된다는 점에 대해
빠르고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 동안 파하스는 네리아의 얼굴을 뚫어지
게 바라보고 있는 운차이에게 말을 건네었다.

"이봐, 난 파하스라고 하는데."

운차이는 시큰둥한 태도로 대답했다.

"운차이요."

"자넨 아무래도 자네 어깨의 모래를 다 털어내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군. 나는 각 지방과 각 나라의 액센트를 다 연구했지. 제법 훌륭하지
만 내 귀는 못속여. 자네 자이펀 모래쥐지?"

운차이는 고개를 휙 쳐들어 파하스를 쏘아보았다. 이 자식 아까 낮에
도 기세 오른 강아지처럼 깽깽거리더니 원래 천성이 고약한 녀석인가
보군. 그리고 성격 고약한 사람을 상대할 때 부드러워지는 경향은 운
차이에게는 없었다.

"말 곱게 써라."

"뭐야? 너야말로 말 곱게 써라. 너희 나라에서는 위아래도 없냐? 난
그러니까…… 음. 144세다. 알았어?"

"어디 달력으로?"

"난 드래곤력으로, 아니, 요즘은 그거 안 쓴다고 했지. 바이서스력으
로 172년생이다."

운차이는 자신의 판단을 수정했다. 미친 녀석이었군. 운차이는 말없
이 상대방의 얼굴에서 미친 자의 증거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파하스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운차이를 마주보았다.

"내 얼굴에서 주름살 찾는 거냐? 미안하지만 그런 건 없을 거야. 난
100년, 아니, 정확하게 108년을 뛰어넘었거든. 하하. 생물학적으로 난
36세야."

미친 녀석이라고 다 침을 흘리고 눈빛이 괴상한 것은 아닌가 보군.
운차이는 이런 의문을 하늘로 날려보낸 다음 파하스를 무시해버렸다.
그러나 파하스는 다시 네리아를 바라보고 있는 운차이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흐음…… 그 빨강머리 아가씨는 자네 애인인가?"

휘릭! 운차이는 고개를 돌려 이를 악문 채 파하스를 노려보았다. 파
하스는 운차이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너 이 자식, 누구 장사를 치르려고?"

"나도 충격이야! 정신이 다 번쩍 든다, 임마!"

네리아가 발딱 일어나며 외쳤기 때문에 파하스도 운차이도 더이상 싸
우지는 못했다. 보다 인간적인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 그
래봤자 각자 자기나라 말로 떠들고 있었기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신
분열적인 광경이라고 착각하기 딱 알맞은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쳉과 그란도 고개를 돌려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일어나자마
자 운차이를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았지만 곧 힘없는 표정으로 양쪽 관
자놀이를 눌렀다.

"아, 머리 아파. 어떻게 된 거지? 음음. 아까 그러니까…… 미는? 미
어떻게 되었어?"

"미는 납치되었어. 침입자를 봤나?"

"몰라. 복면을 하고 창문으로 뛰어들었어…… 그런데 나는 왜 정신을
잃은 거지? 그리고 이 분들은 누구야?"

쳉은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며 말했다.

"쳉이라고 합니다. 미의 오랜 친구지요. 우리는 사이들랜드에서부터
미를 뒤쫓아 왔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도중에 나와 동행이 된……"

그 때 파하스가 재빨리 손을 들어 쳉의 말을 제지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파하스는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침대에 앉은 네리아를 향해 허리를 살짝 숙여보이며 유려
한 말투로 말했다.

"고귀한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가엾은 혀를 가졌다는 죄 때문에 어
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 혀를 만족시킬 아름다운 사랑을 찾아
지평선과 지평선 사이에 외로운 발자국을 남길 이 불쌍한 광대의 이름
은 파하스라 합니다."

그란과 운차이는 얼이 빠져버렸고 쳉은 일말의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
지만 네리아는 재치있는 대답을 해야 될 것 같은 강박관념에 휩싸여
버렸다. 네리아는 운차이를 잠깐 쏘아보고는 재빨리 몸가짐을 바로하
며 상냥하게 말했다.

"어…… 당신의 성실한 혀에 축복이 있어 언젠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
다운 사랑을 노래할 행운이 있을 거에요. 그 때 저 네리아가 그 자리
에 있었으면 좋겠네요."

파하스의 눈이 커다랗게 바뀌었다. 부활 이후로 처음으로 여성다운
여성을 만나버렸다는 놀라움이 파하스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파하스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으며 격정적으로 외쳤다.

"고귀한 레이디 네리아여! 레이디의 손끝이 머무는 바람에 향기 어리
고 레이디의 입술이 닿는 시간에 충만한 아름다움 있으니 이 광대의
무의미한 출생이 비로소 의미를 획득했나이다!"

네리아는 발그레해진 볼 위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운차이가 먼
저 말했다.

"친절하게 대해줘, 네리아. 장님인가봐."

잠시 후 파하스는 베개를 휘두르는 네리아의 우아한 손길을 찬미해야
했다. 쳉은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침착함으로 그란
을 감동시키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미를 추적하실 생각입니까."

"사실 고민스럽소. 우리가 추적하는 사람들은 많은 인원을 데리고 있
을 거요. 게다가 그는 우리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만 난 그의
위치를 모르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자리를 피해 도망치고 싶은데."

쳉은 그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지만 그란은 개의치않으며 말했
다.

"미 양을 내버려둔다고 말하고 싶겠지요? 그건 아니오. 미 양은 반드
시 구출할 거요. 우리 일에 휘말려 그렇게 된 것이니까. 하지만 현재
우리 인원은 운차이와 나, 네리아 이렇게 세 명 뿐이오."

"나를 더하면 네 명입니다."

그 때 '미인은 원래 무자비한 법' 어쩌고 하면서 네리아의 구타 능력
에 대한 아낌없는 칭송을 보내던 파하스가 끼여들었다.

"다섯이야. 나도 있잖아, 쳉. 레이디에게 검은 손을 내민 녀석은 시
공을 뛰어넘어 나의 적이다."

쳉은 잠시 파하스를 바라보았고 그 얼굴에 맑은 표정이 있는 것에 안
도했다.

"그리고 우리 숙소에는 동료가 한 명 더 있으며, 그러니 모두 일곱이
되겠군요."

잠자코 듣고 있던 그란은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여섯 아닌가? 그
러나 쳉은 피식 웃으며 일곱번째 동료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란의 얼
굴이 환해졌다.


================================================================
컨디션 저하. 바이오 리듬은 믿을 게 못돼요. 이게 믿을 만한 것이었
다면 아마 군대에서도 채용했겠지요. 비슷한 바이오 리듬을 가진 병사
들을 모아서 부대 편성을 했을 겁니다.

"4분대 앞으로!"
"안됩니다! 4분대의 오늘 바이오 리듬은 최하입니다!"
"아뿔사!"

타자가 사는 법… 은 왜 이 모양인지. 하하.번 호 : 11192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2-07 01:25
제 목 : [F/W]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8

Future Walker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8.

궤헤른은 천장의 무늬를 쏘아보고 있었다. 옆에서 오가는 사람들에
대해 신경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에 대해 신경쓰다 보면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떠올리게 될 것이며, 그 개라는 이름을 방패 삼아 사
람들 사이를 뻔뻔스럽게 돌아다니는 몬스터에게 물어뜯긴 자신의 팔까
지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궤헤른은 성한 팔을 뻗어 테이블에 놓인 술
병을 잡아당겼지만 그의 손목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궤헤른은 고개를 돌렸다. 후작이었다. 땀에 젖은 머릿카락 사이로 후
작의 눈이 궤헤른을 쏘아보고 있었다. 궤헤른은 애타는 눈으로 후작을
마주보았다.

"피를 흘리는 녀석이 뭘 마시겠다는 건가."

"너무 아픕니다."

궤헤른의 목소리는 가냘팠다. 그러나 후작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살아있다는 증거니 기뻐해."

살아있다는 것?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라. 그거 말은
되는군. 궤헤른은 손에 힘을 뺐고 후작은 그의 손목을 들어 가슴 위에
놓아주었다. 그러나 궤헤른은 아픔을 견딜 수 없었다. 팔에 끼었던 팔
목 보호대 덕분에 팔이 잘려나가는 것은 간신히 모면했지만 그 단검
같은 이빨이 헤집어 놓은 팔의 근육은 원래의 결을 알아볼 수 없을 정
도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궤헤른의 팔을 보살피고 있던 네 명의 사
내들은 아직까지도 팔을 자를 것인지 치료를 감행해야 될지를 놓고 고
민하고 있었다. 결국 치료를 감행하는 쪽으로 결론이 날 것이다. 여기
있는 친구들 중에 절단 수술을 해낼 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은 많았지
만 절단해놓고도 살아있게끔 할 실력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
까.
궤헤른은 머릿속으로 아달탄을 '미친 개새끼'라고 불러보았지만 그렇
다고 해서 팔이 덜 아픈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반드시 네 목을 잘라
벽에 걸겠다.' 이건 좀 나았다. 궤헤른은 박제 제작에 대해 알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지식을 모조리 동원하여 아달탄을 저주했다. 그 핏발
선 눈알을 파내고 구슬을 끼워주는 거야. 그리고 그 코는……

"후작님……! 으윽. 후작님!"

궤헤른이 갑자기 팔을 뻗었다. 그러나 후작은 그의 손목을 나꿔채며
으르렁거렸다.

"닥쳐! 참지 못하겠나."

"아니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급한…… 커흑! 용건입니다. 후
작님!"

궤헤른은 할슈타일 후작에게 붙잡혀있던 팔을 확 빼내었다. 후작은
눈을 매섭게 떴고 궤헤른을 치료하고 있던 사내들도 궤헤른의 행동에
놀랐다. 후작은 궤헤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뭔가. 급한 용건은."

몸을 격하게 움직였기에 상처 입은 팔에 충격이 전달된 궤헤른은 기
절할 정도의 통증을 느끼며 허옇게 질려버렸다. 후작은 궤헤른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귀를 바싹 가져가야 했다.

"이 자리를…… 당장 피해야 됩니다. 후작님……"

"뭐."

"노, 놈들이…… 쪼, 쫓아올 겁니다."

"왜지. 녀석들이 이틀 동안이나 의심하지 않았던 눈 앞의 건물을 갑
자기 의심하게 될 거라고 믿나. 자네가 너무 아파서 불안해졌다는 것
은 알겠지만……"

"아니오! 그, 그렇잖습니다. 녀석들은 아닙, 아닙니다. 하지만……
그 개 말입니다. 후작님."

"개."

"예. 개는 냄새를 잘……맡습니다. 그걸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개
가 깨어나면……"

밖으로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대한 가려둔 등잔불 때
문에 방 안은 캄캄했다. 그 어둠 속에서 후작의 눈이 번쩍였다. 후작
은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정신을 잃은
채로 누워있는 미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 저 무녀의…… 냄새를 추적할 겁니다…… 이 정도 거리는 개에
겐…… 눈으로 보는 것보다 선명……"

"알았으니 그만하게."

후작은 궤헤른의 말을 정지시키고는 사내들에게 눈짓을 보내어 계속
치료하게 했다. 그리고 미를 바라보며 고민을 시작했다. 만일 다른 곳
으로 이동한다 하더라도 그 개가 남겨진 희미한 냄새를 맡아서 뒤따라
온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공격을? 그건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가 사
용할 수 있는 검은 이제 네 자루 뿐이기 때문이다. 후작은 일그러진
얼굴로 지금 궤헤른을 치료하고 있는 네 명의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후작의 마지막 부하들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후작은 아쉬워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어두운 방 안에 남겨진 네 명
의 머저리들이 하나 남아있던 그런대로 쓸만한 부하를 치료하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까지 냉정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후작은 달아나버린
그의 사병들을 저주했다. 개만도 못한 녀석들. 할슈타일가가 부여한
은혜가 얼마이거늘, 겨우 1년도 참지 못해 모조리 달아나버리다니.
바이서스를 탈출하던 당시만 해도 그에게는 할슈타일가의 피붙이라고
도 부를 수 있는 사병이 300 명 가량 있었다. 당시만 해도 재기의 길
은 어렵기는 하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혹독
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을 때, 사병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충
성심은 많이 희박해져 있었다. 이대로 산적이 되는 것이 어떻겠냐는
건방진 의견을 낸 부하의 목을 베어버린 밤 후작은 거의 암살당할 뻔
했다. 내분은 당연한 것이었다. 검광이 번득이고 어제의 동료들의 피
로 피를 씻는 밤은 좌절 때문에 더욱 길었고, 새벽이 찾아왔을 때 후
작의 곁에 남아있는 부하는 100 명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시체
의 숫자는 별로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후작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달
아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남아있는 충성심의 마지막 발
휘였는지도 모르지만 후작은 그에 대해 고마워할 여유는 없었다. 미
친듯한 후작을 말리기 위해 궤헤른은 곤욕을 치루어야 했다.
그리고 후작의 그런 행동은 남아있는 사병들의 가슴 속에도 회의를
불러 일으켰고, 그들은 자신의 머릿속으로, 혹은 비밀스러운 귓속말을
통해 달아난 패거리들과 남아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교해보기 시작했
다. 그리고 얼마 후, 후작은 눈을 뜨는 아침마다 부하들의 빈자리를
세는 것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를 뒤쫓고 있는 그란 일행에게 이미 많
은 수의 부하들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후작과 궤헤른
이 했던 행동들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너희들은 내 거야. 후작은 이를 갈았다. 달아나버린 늑
대 300 마리 대신, 너희 3마리 타이거들을 가지겠어. 그 때까지 네놈
들을 상하게 하지는 않겠어. 후작은 다시 미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그
개의 문제는 처리해야겠군.

"돌맨."

궤헤른을 보살피고 있는 사내들 중 가장 젊은, 아니 어리다고 해야
할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얼굴에 불안감이 가득
한 눈빛을 담고 돌맨은 그의 양부를 바라보았다.

"예?"

"저 무녀의 옷을 벗겨라."

"예?"

돌맨은 당황한 표정으로 거부의 몸짓을 취했지만 그것은 후작을 더욱
짜증스럽게만 만들 뿐이었다. 후작은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돌맨을 바
라보며 말했다.

"멍청한 녀석! 냄새를 지워야 된다. 어서 옷 하나를 벗겨!"

"아, 아…… 예. 후작님."

대답을 하고서도 돌맨은 상당히 주저하는 몸짓으로 미에게 다가섰다.
침대에 누워있다가 곧장 납치된 미였기 때문에 걸치고 있는 옷이 그렇
게 많지는 않았고 그래서 돌맨은 당황어린 표정으로 미를 주욱 훑어보
았다. 후작은 그런 돌맨을 보면서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의 증오를 느
꼈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장시간이 지나서야 돌맨은 서툰 손길로
미의 셔츠를 벗겨내고는 황급히 시트를 덮어주는 동작을 마칠 수 있었
다. 손에 미의 셔츠를 든 채 돌맨은 후작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들고 있어. 궤헤른은 어떤가."

붕대를 촘촘히 감고 있을 뿐 실제적인 의미에서는 아무런 치료도 받
지 못했지만 궤헤른은 몸을 일으켰다.

"걸을 수 있습니다. 다리를 다친 것은 아니니까요."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배낭을 들어올렸다.

"장소를 옮긴다. 가이버. 나가서 말을 준비해라. 사무엘. 궤헤른의
짐을 들도록. 니크. 무녀를 업어라. 단 네가 덮던 시트로 그녀를 감싸
고 나서."

후작의 빠른 명령에 따라 세 명의 사내는 각자의 일을 향해 흩어졌
다. 자신의 배낭을 맨 다음 그대로 문을 향해 걸어가는 후작의 등을
향해 돌맨이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저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후작님?"

후작은 잠시 멈추었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는 등을 돌린 그
대로 말했다.

"너는 여기서 한 두어 시간 기다린 다음 그대로 사라져라."

"예?"

"냄새를 뿌리며 사라지란 말이다. 단,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근처에
는 오지 마라. 약속일인 모레 아침에 켄턴 시청에서 만난다."

돌맨은 기막힌 표정이 되었다.

"자, 잠깐만요! 아버…… 후작님. 저 혼자서 저 세 명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어요!"

"단순히 도망만 치는 것인데 뭐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냐."

돌맨은 입을 쩍 벌렸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후작의 등을 쏘아보
고 있던 그의 입이 다급하게 열렸다.

"절 죽이려는 거죠!"

각자의 일을 수행하고 있던 세 사내들의 손이 동시에 정지했다. 후작
은 천천히 몸을 돌려 돌맨을 바라보았고 돌맨은 그 얼굴에 질려버렸
다. 하지만 그의 입은 무의식 중에 헐떡이며 그의 심정을 전달하고 있
었다.

"후, 훈트처럼 저를 미끼로 쓰려는 거지요! 나, 나도 봤어요. 저 무
녀가 타고 있던 말은 훈트의 말이었어요! 훈트는 죽었지요? 그래요!
그 녀석들이 훈트를 죽인 거 후작님도 아시잖아요! 모른다고 하실 수
는 없어요! 그런데 저도 떠나보내시려는 거에요? 죽이겠다는 거……
쿡!"

돌맨은 믿을 수가 없었다. 문 바로 앞에 서있던 후작이 어느새 그의
앞에 와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천장이 낮아지며 돌맨은 자신이 허공에
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대 후려치려다가 맡겨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기에 후작은 단순히 돌맨의 멱살을 붙잡아
올렸지만 돌맨은 숨이 막히는 고통 속에서 발버둥쳤다.

"컥, 크걱!"

"닥치고 잘 들어라. 네녀석이 훈트처럼 끝까지 입을 다물 것이라고는
나도 믿지 않는다. 그러니 살고 싶다면 녀석들에게 투항해도 좋다. 구
출해주겠다. 하지만 내가 시킨 일은 해야 한다. 네녀석이 감히 내 말
을 무시할 수는 없다. 알겠나."

돌맨은 '구출해주겠다' 는 후작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교살색에 걸린 것 같은 목에서는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후, 후자…… 수, 숨이 막……"

"알겠나."

후작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고 힘껏 잡아당겨진 셔츠 깃은 당장
이라도 찢어질 듯했다. 그 때 궤헤른이 힘겨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후작님. 공자님은 대답할 상태가 아니십니다. 내려주십시오."

후작은 궤헤른의 말을 따랐다. 다만 그의 방식대로 돌맨을 내려놓았
다. 집어던져진 옷가지 마냥 공중을 날아 방구석에 쳐박힌 돌맨은 숨
막히는 고통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며 울음을 터뜨렸다. 후작은 그런
돌맨을 매섭게 노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공자님, 후작님이라고. 그만 웃기게, 궤헤른."

후작은 그 말만을 남기고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갔다. 다른 사내들도
모두 그 뒤를 따랐지만 궤헤른은 자신의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
서도 이 사태를 수습해보려는 책임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팔을 부
여잡은 채 돌맨에게 다가갔다. 돌맨은 후작에 의해 집어던져진 모습
그대로 흐느끼고 있었다. 16살이나 되는 소년이라면 이미 소년으로 부
르기도 어렵지만 돌맨은 자기 나이에서 10년을 잃어버린 듯한 모습으
로 펑펑 울고 있었고 궤헤른은 그 모습을 보며 측은함과 동시에 짜증
을 느꼈다. 하지만 궤헤른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공자님. 후작님께서는 공자님을 보호하기 위해 그러신 겁니다. 이해
하시고 일어나십시오."

목이 막히도록 울고 있던 돌맨은 궤헤른의 말에 대답하기에 앞서 요
란하게 트림을 해야 했다.

"꺽, 뭐, 뭐라고요?"

"일부러 그런 안배를 하신 거란 말입니다. 후작님께서 말씀하셨잖습
니까. 투항하라고. 저들의 검을 피해 달아나는 것보다는 저들에게 투
항하는 편이 훨씬 안전합니다. 설마 포로를 죽이겠습니까. 게다가 이
쪽에는 저 무녀가 있기 때문에 저들은 공자님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아……"

돌맨의 대답은 대답이라기보다는 반사작용 같은 것이었다. 궤헤른의
말을 이해하기엔 그의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돌맨은 어
렴풋하게나마 이해했고 따라서 울음도 조금씩 멎어갔다. 궤헤른은 힘
들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왕 투항할 바에는 후작님의 일을 돕고 나서 투항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부탁이니 후작님의 뜻을 잘 이해하시고 받드셔서 저들을
멀리 이끌어가주십시오. 공자님께서 그 일을 해내셔야지만 후작님께서
도 자유롭게 공자님을 구출할 방도를 세울 수 있게 되십니다."

"그, 그래요. 알겠어요, 궤헤른."

돌맨은 고개를 끄덕였다. 궤헤른은 까무라칠 것 같은 상처의 고통 속
에서도 돌맨에게 몇 가지 행동 요령을 알려준 다음 밖으로 걸어나왔
다.
문밖으로 걸어나온 궤헤른은 문 옆에 기대어 서있는 후작을 보았다.
후작은 팔짱을 낀 채 아무 말 없이 복도의 맞은편 벽을 쏘아보고 있었
다. 궤헤른은 먼저 문을 닫고나서 낮게 말했다.

"후작님?"

후작은 여전히 맞은편 벽이 참 볼만하게 생겼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
했다.

"네게 애 보는 능력도 있는 줄은 몰랐군."

궤헤른은 씁쓸하게 웃었다.

"바이서스에 있을 때 배우게 된 것입니다. 후작님께서는 모아들이신
아이들에 대해 관심이 없으셨지요."

후작은 벽에 기대었던 몸을 똑바로 세웠다.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가
던 후작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네가 한 말, 너는 믿나."

"반만 믿습니다. 공자님은 안전하겠지요. 후작님의 핏줄까지도 증오
하는 그란이지만 공자님이 양자인 것을 무시하지는 않을 겁니다."

구출하겠다는 말은 믿지 않지만. 궤헤른은 별 의심없이 그렇게 생각
했다. 징징거리는 기술 외에 아무 능력도 가지지 못한 어린애는 후작
의 표현대로라면 '어떤 원동력도 되지 못하는' 버러지다. 그리고 이제
돌맨은 후작에 의해 의미를 가지게 된 양성 원동력이다. 돌맨 할슈타
일은 후작의 도주를 돕는 것, 그리고 그란과 운차이 일행으로 하여금
미와 맞바꿀 수 있는 인질이 생겼다는 오해를 주는 것으로서 그 효용
을 끝내게 될 것이다.

"스스로가 믿지 않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군."

"저를 포기하지 못하시는 이유가 하나 더 느셨군요."

후작의 걸음이 갑자기 멈춰졌다. 궤헤른은 고소를 머금은 채 그 등을
바라보았다.

"저에게 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공자에게 시키셨습니다.
아십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이용하려드는 후작님의 결심이 제게 의해
이용당한다는 것을. 제가 쓸모가 있는 동안은, 후작님은 저를 포기하
지 못합니다. 그란과 운차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십
니다."

"무슨 말을 하고픈 거지."

"그냥 아쉬워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300 명의 인원이 있었을 때 저들
에게 휴식을 선물했더라면 오늘 같이 골치아픈 밤은 맞지 않았어도 되
지 않았을까 하는."

무의식 중에 힘이 들어간 후작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후작
의 목소리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날 비난하는 건가."

"글쎄요…… 신스라이프의 문제를 풀고 그 재산을 가지게 되면, 그래
서 다시 부하들을 모으고 재기의 기틀을 다지게 되면, 제일 먼저 할
일 하나를 제안드리고 싶은 겁니다."

"뭐지."

궤헤른은 어제 낮, 후작이 '나는 녀석들이 좋아' 라고 말했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모진 고통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녀석들을 죽이는 겁니다."


================================================================
대학의 방학 시즌. 글이 많이 올라오겠네요. 새로이 글쓰시는 분들은
모쪼록 즐거운 창작 되시길.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1268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2-08 01:01
제 목 : [F/W]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9

Future Walker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9.

파는 고민했다. 반갑게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놀란 표정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불안에 떨다가 지친 듯한 표정으로 맞이할 것인가? 고
민을 끝내지 못한 파는 결국 상당히 어정쩡한 자세로 문을 열었다. 하
지만 쳉은 문을 열자마자 곧장 파를 지나쳐 자신의 짐을 향해 걸어갔
기 때문에 파는 제대로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했다. "어, 쳉……?" 쳉
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온 파하스는 파의 모습을 보고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파 양. 놀랐겠군요."

"예. 자다가 일어나보니 두 분이 보이질 않아서…… 어디 갔다 오셨
어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두 가지가 있습니다만 어느 걸 먼저 듣겠냐
고 물어볼 수는 없겠군요. 좋은 소식부터 말해야 이야기가 되니까."

"예? 어, 무슨 이야기인데요?"

"파 양의 언니 미 양을 찾았습니다."

파는 기뻐해야 된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파하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짐을 챙기고 있던 쳉까지도 놀랄 정도로 기뻐해버렸다. 그녀는 파하스
의 어깨를 쥐고 팔짝팔짝 뛰면서 당신은 기쁨을 가져다주는 나의 천사
요, 행복의 메신저라는 식의 칭찬을 아낌없이 퍼부어대었던 것이다.
그래서 파하스는 나쁜 소식을 말해야 된다는 사실에 대해 거의 죄의식
에 가까운 면구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에, 그 언니분이 괴
한들에 의해 납치당했습니다."

"예에? 아니, 뭐라고요!"

파는 비명처럼 외쳤다. 그녀가 슬픔을 못이겨 기절할 거라고 제멋대
로 판단한 파하스는 재빨리 파를 부축하려는 자세를 취했고, 그래서
상당한 낭패감을 맛보아야 했다. 파는 기절하기는 커녕 파하스의 어깨
를 붙잡아 흔들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었다.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리에요, 파하스! 괴한이라니! 허튼 소리 하지
말아요! 언니는 그냥 양치기라고요. 복면 괴한 같은 것이 따라다닐 사
람이 아니에요!"

"아, 아, 저도 이해못할 일이기는 한데, 에, 좀 놔주시지 않겠습니
까."

그 때 자신의 배낭 뿐만 아니라 파의 배낭까지 어깨에 둘러맨 쳉이
걸어왔다. 쳉은 간략하게 말했다.

"가면서 설명하지."

"어딜 가는데? 응?"

"미의 동행이었던 사람들에게."

"아, 그래? 어서 가!"

세 사람은 말을 이끌고 운차이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후라마의 펍으
로 갔다. 길을 걸어가면서 쳉은 그 동안의 상황에 대해 그답게 설명했
다.

"미는 스카니아를 벗어나자마자 이상한 일행과 동행하게 되었고 지금
은 그 이상한 일행의 적에게 납치당한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서 파하스가 설명을 맞게 되었다.

"예. 파 양.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파 양의 언니분 미 양은 고향마을
을 벗어나자마자 모종의 임무를 띄고 헤게모니아에 들어온 바이서스의
비밀요원들과 동행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황야의 우정 이외
에 다른 목적은 없는 동행이었을 것입니다만, 역시 고슴도치와 놀면
바늘에 찔리는 법이지요. 바이서스의 비밀요원들의 목적은 그들 나라
에서 도망친 반역자들의 체포였습니다. 그런데 그 반역자의 무리가 거
꾸로 일행을 급습, 미 양을 납치한 것입니다."

"예? 반역자요? 비밀요원이요?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인생이 이야기보다도 더 신기할 때가 있다는 말에 대한 좋은 예시라
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 비밀요원들을 보시면 놀랄 겁니다. 낮에 들
렀던 펍에서 우리와 함께 싸우려 했던 전사를 기억합니까?"

"예. 그럼 그 사람이…… 아, 그럼 설마!"

"예. 통탄할 일이기는 합니다만, 바로 그 때 미 양은 그 펍의 이층에
계셨습니다. 아아, 이건 정말이지 이야기보다 더 신기하다는 말로도
설명이 안되는 지독한 악운이군요."

"말도 안돼…… 말도 안돼."

파하스는 다시 한번 파를 부축하려는 자세를 취했고 이번엔 성공했
다. 파는 파하스의 몸짓을 알아차리고는 그의 팔에 몸을 기대었다. 파
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꼈고 파하스는 그럴 수 없이 정성스
러운 태도로 파를 부축했다. 쳉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았지만 오랫
동안 바라보지는 않았다. 쳉은 이 도시를, 어느 내장 속에 미를 감추
고 있을 것이 분명한 이 괴물 같은 도시의 밤을 바라보았다. 곧 후라
마의 펍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왔나.'

커텐 틈을 통해 후라마의 펍에 도착한 쳉과 파, 그리고 파하스의 모
습을 바라보며 돌맨은 이를 악물었다. 방 안의 불은 모두 꺼두었고 배
낭과 무장도 모두 갖춘 상태였다. 손에는 여전히 미의 셔츠를 들고 있
었다. 이제부터 도망가야겠군. 냄새를 풍기며 달아나는 자신의 입장이
사냥개들에게 쫓기는 여우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돌맨은 서글퍼졌다.
문득 돌맨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방문 쪽을 한번 바라본 돌맨은 셔츠를 들어올려 거
기에 얼굴을 묻었다. 어두운 밤의 어두운 방 안에서, 양부에게 버림받
은 소년은 그렇게 셔츠에 코를 파묻은 채 오랫동안 서있었다. 커텐 틈
으로 스며들어온 달빛이 소년의 볼에 세로로 길고 흰 선을 긋고 있었
다.
잠시 후 셔츠에서 얼굴을 뗀 돌맨은 이를 악물어 공포를 몰아내면서
방을 나섰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고 발디딤은 갈팡질팡이었지만
돌맨은 가까스로 아래로 내려올 수 있었다. 오늘 밤, 납치에 들어가기
앞서 가이버와 사무엘은 여관 안을 깨끗이 '청소'했었고 돌맨은 그 사
실을 잘 알고 있었다.
홀 안은 사물의 윤곽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홀 가
운데 의자에 앉아있던 여관 주인장은 계단으로 내려온 돌맨을 물끄러
미 바라보았지만 돌맨은 그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가슴에 구멍이
난 채 비난하는 듯한 눈으로 쏘아보고 있는 시체를 보았다간 틀림없이
주저앉고 말았을 테니까. 하지만 홀 바닥에 있을 또 하나의 장애물을
피하기에는 홀 안이 너무 어두웠다. 분명 이 근처 어디에 있을 텐데.
돌맨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발을 조심스럽게 뻗었다. 돌맨의 예상은 정
확했고 딱딱하면서도 뭉클한 기묘한 감각이 발끝에 닿는 순간 돌맨은
고환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끼며 입을 틀어막았다. 고함을 질러서는
안돼! 돌맨은 머릿속으로 크기를 가늠한 다음 눈을 감은 채 하녀의 시
체를 훌쩍 뛰어넘었다. 쿵. 작은 소리였지만 돌맨은 자신의 발소리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이이이이-하!"

벌써 수십 번도 넘게 울려퍼진 목소리였지만 그레이의 목소리에는 조
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그리폰에 탄 그레이가 까마득한 하늘에서
아래로 곧장 내리꽂히며 고함을 지를 때마다 데스나이트는 거친 저주
의 고함소리를 외치며 흩어져야 했다. 지팡이에 탄 채로 하늘을 날던
솔로쳐는 그레이가 다시 급강하하는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또다시
마법을 못쓰게 되었군. 갑자기 그의 등 뒤로 날개짓 소리가 들리며 딤
라이트가 나타났다. 딤라이트는 손에 든 활을 다시 어깨에 걸쳐매고는
솔로쳐와 나란히 날도록 페가서스를 몰아가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
다.

"아무래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즐기고 있구료."

"죽음을 겪고나서도 저렇듯 겸허할 줄 모르니…… 민망스럽습니다."

딤라이트의 얼굴은 민망스러워 보이기에는 너무 당당했지만 솔로쳐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려주고는 다시 그레이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날
개를 접고 곤두박질 치듯이 쏘아져내려간 그레이의 그리폰이 급격하게
날개를 펴자 깃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푸드드득! 거의 직각에 가까
운 급반전을 통해 데스나이트들의 투구에 걸릴 정도로 낮은 궤도로 접
어든 그레이는 왼쪽 발을 재빨리 등자에서 빼내었다. 왼손으로 안장을
쥔 그레이는 몸을 오른쪽으로 한껏 누인 채 검을 마구 휘둘러대었다.

"이야야야야!"

데스나이트들의 입장에서는 바람에 칼날이 달린 것이나 진배없었다.
목뼈가 부러지지 않을까 의심스러운 어마어마한 속력으로 머리 위를
날아가며 칼날을 휘두르는 그레이의 이런 기승스러운 공격은 데스나이
트들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웠고, 혼란에 빠진 데스나이트들이 대오를
정리하여 반격태세를 취하자마자 그레이는 다시 창공으로 뛰쳐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늘의 다른 각도에서 무스타파의 와이번이 거대
한 날개를 휘저으며 내려섰다. 와이번은 정렬한 데스나이트 사수들의
등 뒤로 짓쳐들어가며 격렬하게 포효했다.

"크아아아악!"

그레이의 그리폰이 쏘아진 화살의 사나움에 비견된다면 무스타파의
와이번은 그야말로 전차의 저돌성으로 데스나이트들의 뒤통수를 유린
했다. 한 불운한 데스나이트의 투구가 무스타파의 손에 쥐어진 랜스에
명중되는 순간 투구는 글자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며 파편을 흩날렸다.
와이번의 거체가 이런 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저고도 비행을 하며 일
으킨 바람은 데스나이트들의 자세를 크게 뒤흔들었고 그래서 활을 들
어 무스타파의 와이번을 겨냥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데스나이트들에
게 실제적인 피해는 많지 않았지만 그레이와 무스타파가 십자 비행을
마친 부분의 데스나이트들의 진형은 붕괴의 단말마를 질러대었고 그
붕괴지점을 정확히 포착한 솔로쳐는 서슴치않고 마법을 퍼부어대었다.
폭음과 불길이 요란하게 울려퍼지며 다시 대여섯 명의 데스나이트들이
파괴되었다. 누가 봐도 고의적이라고 생각되는 저궤도로 불길의 위를
가로지르며 그레이는 목청껏 외쳤다.

"아잣차! 이 자식들아, 나도 이젠 데스나이트야! 죽은 기사라고! 우
하하!"

그레이의 외침은 경쾌했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딤라이트의 얼굴
은 창백해졌다. 캐스트를 마치고 다시 지팡이를 부여잡던 솔로쳐는 딤
라이트를 바라보았다.

"딤라이트?"

"괜찮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딤라이트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삐를 말아쥐는 동작에 과도한 집중력
을 발휘했다.

"이제 명확하게 떠오르는군요. 예. 저들이 나를 죽였습니다."

"내가 너무 늦었었지. 미안하게 생각하오."

"아니오. 그것은 우리들의 실수였습니다."

"실수?"

딤라이트는 서글프게 웃으며 솔로쳐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사부의 위명에 기대어 이름을 떨치는 마법사로 취급한 것,
지금 사과한다면 너무 늦겠지요? 죽고나서, 300년의 시간이 지나고나
서 하는 사과이니."

솔로쳐 역시 웃고 말았다. 세월마저 숨이 차 헐떡일만한 기나긴 시간
이 흐른 뒤, 과거의 악몽이 재현된 것 같은 전장 위에서 그 옛날의 기
사가 그 옛날의 마법사에게 그 옛날의 실수를 사과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솔로쳐는 재치있는 대답을 떠올리지 못했다.

"하긴, 늦긴 늦군요."

딤라이트는 발 아래의 전장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말
했다.

"저희 주군과 당신의 사부님의 관계는 한 두 마디로 설명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앙숙이지요."

"예…… 앙숙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 그렇게
무례했던 것, 이해해주십사 말씀드리자면 너무 뻔뻔할까요."

솔로쳐는 어제의 일처럼 그 날을 떠올렸다.

"젊고, 용감했던 당신이었소. 마법사의 조력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당신의 모습은 실례라고 하기엔 너무 아름다웠지. 그리
고 난 당시에도 그런 말에 흥분하기엔 세월을 많이 훔친 늙은이였소.
화내지 않아요."

"하지만 끝내 저희들을 도와주러 오셨잖습니까."

"하하. 그 이야기에 관해서라면 쥬리오 시장에게 물어보시오. 그의
가문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거요."

"예?"

딤라이트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솔로쳐는 그냥 웃었다. 그러나 오랫동
안 웃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저 아래쪽에서부터 그레이가 자신이 외친
고함소리를 추적할듯이 맹렬한 속도로 날아오르며 외쳤다.

"저 친구들이 뭔가 줄게 있는 모양입니다! 나는 사양하고 싶은데, 마
법사님은 어떠십니까?"

"마음만 감사히 받도록 하지! 화살은 싫소!"

솔로쳐는 그레이의 말에 대답하며 지팡이를 위로 날아오르게 만들었
다. 화살의 비라고 불릴 만한 가공할 대공사격이 시작되었고 천공의 3
기사와 무지개의 마법사는 제각기 흩어져 하늘의 네 방향으로 흩어져
날아올랐다. 그러자 데스나이트 사수들은 일제히 활을 비틀어 가장 큰
목표물, 즉 무스타파의 와이번을 노렸다.
항상 나지. 무스타파는 짧게 생각하며 와이번을 복잡한 움직임으로
몰았다. 와이번의 거대한 날개가 제멋대로 휘둘러지며 바람 끊는 소리
가 요란했다. 몇 개의 화살이 와이번의 날개를 찢어놓았지만 와이번은
익숙하다는 듯이 상처를 무시하며 날아올랐다. 그레이는 민첩한 동작
으로 그리폰을 솟구쳐오르게 하면서 웃었다.

"하하, 무스타파! 그렇게 느려서야 엉덩이에 화살 맞겠군. 자네 엉덩
이가 오죽 큰가!"

"닥치지 않으면 그 새대가리 괴물을 바베큐로 만들어 아이라에게 먹
이겠다."

아이라는 무스타파의 와이번의 이름이다. 그레이는 히죽 웃으며 자신
이 타고 있던 그리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리폰의 목덜미를 쓰다듬
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넌 정말이지 맛없게 생겼단 말이야. 아이라
에게 미안한 일인걸."

무스타파는 신음소리를 흘렸고 그리폰은 이대로 몸을 뒤집어 이 고약
한 주인을 데스나이트에게 집어던져버리면 어떨까 하는 망상에 시달렸
다. 그러나 그레이는 태평한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작별 인사가 요란한 친구들이야."

그레이의 지적대로 화살을 퍼부어댄 데스나이트들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볼품없는 모습은 아니었다. 비록 상처입고 기세가 꺾여 후
퇴하는 것이었지만 데스나이트들은 품위있게 행동할 줄 알았다. 딤라
이트가 무의식 중에 한숨을 흘릴 만큼 질서정연한 후퇴동작을 통해 데
스나이트들은 켄턴 성벽으로부터 약 2,000큐빗 정도 떨어진 위치에 진
을 치고 검은 안개로 자신을 완전히 감쌌다. 산과 숲을 기대어 만들어
진 진형은 천공의 기사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방해하려는 목적이 뚜
렷이 드러나고 있었다.
평원 위에 검은 언덕이 생긴 것 같은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딤라이트는 짧고 강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레이!"

"응? 왜?"

"어쩔 텐가."

"어쩌기는. 파도도 거세게 몰아치기 위해선 일단 물러서는 법이야.
켄턴으로 귀환한다."

그레이는 사태를 간단하게 파악했다. 레티의 프리스트들과 켄턴 경비
대원, 그리고 솔로쳐의 분전이 있었기에 데스나이트들은 혼란되어 있
었고 우리들은 그 혼란을 잘 이용했었다. 하지만 조직적으로 정비를
갖춘 데스나이트들에게 시비를 걸 수는 없다. 돌아가서 밥 먹자.

"이봐, 친구들! 뒤를 엄호할 테니 부상자들을 수용해서 켄턴으로 돌
아가시오!"

전장에서 따로 빠져나와 안전지대로 대피해 있던 경비대원들과 레티
의 프리스트들은 상공을 향해 팔을 휘저어주었다. 부러진 창대를 팔에
대고 찢어진 망토로 묶고 있던 히든보리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하늘
을 바라보았다. 망토 자락을 창대에 묶어 급조한 깃발로 부상병들을
집합시키고 있던 로터스 경비대장은 그 깃발을 다른 경비대원에게 넘
기고는 히든보리에게 다가왔다. 로터스는 한쪽 손을 힘들게 꿈지럭거
리는 히든보리를 보자 말없이 손을 뻗어 매듭을 단단히 묶어주었다.

"고맙소, 경비대장."

로터스는 힘들게 웃으며 히든보리가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 고함소
리를 계속 내지르고 전장의 먼지를 들이마신 후라 경비대장의 목은 잔
뜩 쉬어있었다.

"내 생전 이런 싸움은 처음이었습니다. 사집관님."

"나도 마찬가지오. 과거의 공포가 우리를 덥쳤을 때, 역시 과거의 희
망들이 부활하여 우리를 돕는군."

"그렇군요."

"당연한 일일까요?"

"예?"

히든보리는 온전한 팔로 부러진 팔을 살짝 붙잡으며 나직하게 말했
다.

"우리가 부모의 자식이듯, 현재는 과거의 자식이오.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듯, 과거가 현재를 보살피는 것 아닐까요."

"제겐 어려운 이야기군요, 사집관님. 지금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은 한 잔의 술과 한 조각의 빵 이외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주
겠다면 데스나이트와도 악수하고픈 생각이 드는 걸요."

켄턴의 사집관은 빙긋 웃었다.

"내 집에는 우리 어머님께서 담그신 301년산 와인이 있소. 죽었다가
살아난 기념으로, 오늘 그걸 한번 따 볼 생각이오. 함께 하겠소?"

켄턴의 경비대장은 입가에 가득 넘쳐흐르는 침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았다.
짙어져가는 햇살이 켄턴이 외벽을 달구고 있는 오후였다. 부상병들의
수용이 끝나자 켄턴의 성문은 다시 굳게 닫힌 다음 봉쇄되었으며 봄의
노곤한 햇살 사이를 가르며 과거로부터 날아와 그들을 구원한 그리폰,
페가서스, 와이번, 지팡이는 성벽 위로 날아들었다. 쥬리오 시장은 히
든보리를 얼싸안으려 들다가 그의 총애하는 사집관을 기절시켰고 "으
아아! 내 팔! 꼬로로록." 301년산 와인이 잠시 보류되었다는 것을 깨
달은 경비대장으로 하여금 눈물을 찔끔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쥬리
오 시장은 솔로쳐와 천공의 3기사를 대할 때는 훨씬 침착해질 수 있었
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예. 정말 감사하다고, 예! 감사합
니다."

쥬리오 시장의 이 상당히 침착한(?) 언행은 솔로쳐와 그레이, 그리고
무스타파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딤라이트는 장중한 어조로 대
답했다.

"300년 묵은 빚을 청산했을 뿐입니다, 시장님. 그 날 우리는 데스나
이트들을 격파하지 못했습니다. 이토록이나 늦은 빚갚음에 대해 치하
의 말씀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이런 식의 대답에는 딤라이트마저도 할 말이 없었다. 딤라이트는 고
개를 가로저으며 마굿간이 어디 있냐는 질문을 통해 대화의 방향을 바
꿔버렸다.

"마굿간이오?"

"헐스루인도 고생했으니…… 헐스루인은 제 페가서스의 이름입니다.
쉬게 해주고 싶군요."

"아, 예. 당연하십니다. 저, 그런데 조금 전 여러분들이 분전하시는
동안 바이서스 임펠로부터 찾아온 손님이 계십니다. 북문으로 들어오
셨기에 싸움터를 피하실 수 있었지요. 그 분이 여러분들을 뵙고 싶어
하는데요."

솔로쳐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농담을 말했다.

"손님? 아니, 나는 이 시대에 지인이 없는데?"

그레이와 무스타파는 가벼운 웃음을 떠올렸지만 솔로쳐의 농담을 알
아듣지 못한 딤라이트는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쥬리오 시장은 벙
긋 웃으며 손을 들어 그 손님을 가리켰다.
대로 저편에서 거구의 젊은이가 한손은 자연스럽게 칼자루에 얹어두
고 다른손으로는 말고삐를 쥔 채 서있었다. 온몸에 뒤집어쓴 먼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젊은이의 옷가지들이 원래 무슨 색인지 짐작하기 어
려울 지경인데다가 옆에 서있는 말은 허옇게 말라붙은 땀 때문에 백마
로 보일 지경이었다. 엄청난 거리를 쉼없이 달려온 것이 틀림없다. 그
젊은이는 광장에 설치된 임시 숙영지에 수용되는 부상병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젊은이의 순한 얼굴은 이런 표정에
있어 최적이라고 할 만한 얼굴이었지만 그 거대한 덩치를 본 천공의 3
기사는 감탄하고 말았다. 그레이는 활짝 웃으며 무스타파에게 말했다.

"이봐, 저 친구, 마치 멜다로공 같지 않아?"

"체격은 확실히 그렇군."

"혹시 멜다로공의 후손 아닌가 모르겠어."

그레이와 무스타파가 이런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젊은이는 이쪽을 돌
아보았다. 젊은이는 곧 환한 얼굴이 되어 씩씩한 걸음걸이로 걸어왔
다. 솔로쳐와 천공의 3기사가 바라보는 가운데 멈춰선 젊은이는 솔로
쳐를 바라보며 열렬하게 말했다.

"아빠!"


================================================================
참, 나… 고작 인포샵입니까. 검색해보면 주르르 다 튀어나오는 곳에
올리면 누가 모릅니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 그만둡시다. 양심을 팔
아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고요? 에끼, 여보슈. 웃기지 말아요. 컴퓨터
가 있으니 통신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돈이 궁하면 컴퓨터 파는 것
이 어때요. 양심을 파는 것보다는 나을 거요. 당신들은 유괴범과 다를
바가 없어요. 남의 머릿속의 글을 유괴해서 돈을 벌려 드니까.

뻔히 도용되는 거 알면서 글올리는 것이 미련스럽게 보일지도 모르지
만, 타자에게는 믿음이 있어요. 그런 작자들은 극소수이고, 다른 분들
은 모두 점잖게 글을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져주시리라고. 하하.

???? : 즐거운 시간? 짜증나는 시간이야.
타자 : 허억. 심장에 비수가…!

(그래도… 스스로가 조금 한심스럽긴 하군. 쳇.)번 호 : 11269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2-08 01:02
제 목 : [F/W]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10

Future Walker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10.

바람에 머리카락 흩날리는 소리마저 들릴 듯한 적막이 사람들을 감쌌
다. 가장 먼저 혼란에서 깨어난 그레이는 자신이 이 모든 사태를 이해
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법사님의 아드님이었군. 역시 부활한 거야……"

"터무니없는! 난 결혼한 적이 없소!"

그레이는 잠시 주춤했지만 다시 사태를 이해한 자 특유의 웃음을 지
어보였다.

"어, 뭐, 꼭 결혼해야 아들이 생기는 것은 아니죠. 첫사랑 그녀가 말
하지 않았던 자식이랄까. 300년만에 시간과 죽음마저 뛰어넘어 만나길
고대하던 아버지를 찾아서……"

그레이가 이런 발랄하지만 진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을 때 자신이
내뱉은 말에 경악해버렸던 젊은이는 간신히 제정신을 수습해서 힘겹게
말을 꺼내었다.

"제가 아니라…… 이 검이 말한 겁니다만……"

젊은이는 그렇게 말하며 매우 특이하게 생겼으며 동시에 아름다운 자
신의 검을 뽑았다. 천공의 3기사는 주춤했지만 젊은이는 검을 뒤집어
날을 쥔 다음 솔로쳐에게 칼자루를 내밀었다. 솔로쳐의 눈이 커졌다.

"어라? 이게 누군가!"

솔로쳐는 반가운 표정으로 그 아름다운 검을 쥐었다. 곧 솔로쳐는 풀
려버린 눈으로 허공을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야아! 반갑구나, 프림. 음? 떽! 이 아빠를 유령 취급해서는 못써.
그동안 재미있는 사람들 많이 만났니? 아아. 그래그래. 착하다. 음음.
그래?"

딤라이트의 눈썹이 하늘을 찌를듯이 솟구쳤다. "마검인가?" 이번엔
그레이와 무스타파의 눈썹이 땅이 꺼져라 축 쳐졌다. 그레이는 피식피
식 웃으며 말했다.

"저게 바로 프림 블레이드로군. 대공께서도 말씀하셨잖아, 이 친구
야."

"응? 아아. 기억난다."

딤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젊은이를 바라
보았다.

"프림 블레이드를 소지하고 계시다면, 귀공은 바이서스 왕가의 분이
신가요?"

프림 블레이드를 솔로쳐에게 건넨 젊은 청년은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
며 보다 그 거구에 어울리는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아니오. 그렇잖습니다. 저 검의 저번 소유주는 왕족이십니다만 제게
선물로 남기셨지요."

"그럼 귀공은?"

젊은이는 자세를 곧바로 하며 암기하고 있던 말을 하는 것처럼 절도
있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그레이 휠드런 공, 무스타파 하빈스 공, 딤라이트 이스
트필드 공. 바이서스와 일스의 거리를 멀다 하시지 않고 찾아주셨던
분들께서 300년의 시간을 멀다 하시지 않고 다시 찾아주셨으니 무한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샌슨 퍼시발이라고 합니다."



샌슨은 시간을 쓰는데 있어서 여유를 두지 말라는 카알의 지침을 잊
어먹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샌슨은 부디 들어와서 원로에 쌓인 먼지
라도 좀 털고 가시라는 쥬리오 시장의 권유를 점잖게 사양하며 선 자
리에서 외워온 내용을 모조리 말했다. 폭포처럼 쏟아낸 이야기가 마침
내 끝났을 때 샌슨은 솔로쳐와 쥬리오 시장만이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공의 3기사들은 돌아가며 프림 블레
이드를 쥐어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좋은 검에 대한 전
사의 순수한 호기심에 덧붙여 무지개의 대마법사가 만든 마법검은 천
공의 3기사들을 매우 자극시켰다.
솔로쳐는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시간이 멈췄다고? 아니지. 다시 말해야 되겠군. 당신네들의 시간이
멈췄다는 말이오, 그럼?"

"예. 우리들의 시간이 멈췄기 때문에 과거의 여러분들께서 우리들에
게 이르렀다고 생각됩니다."

그 때 무스타파에게 프림 블레이드를 뺏긴 그레이가 솔로쳐와 샌슨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 샌슨 경. 그거 이해가 안되는데?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
르지만 그런 추리는 당신들의 시간, 우리들의 시간 하는 식으로 시간
을 구분했을 때 가능한 말인 거 같소. 그런 거요?"

"무슨 말씀인지요, 그레이 경?"

"글쎄. 당신의 비유는 마치 두 마리의 말이 달리다가 한 마리가 멈춰
서자 다른 한 마리가 따라잡았다는 식의 말처럼 들린다는 말이오. 그
러니 두 마리의 말처럼 두 개의 시간을 따로 말한 것 같소. 우리들의
시간, 당신들의 시간. 그렇잖아요?"

"예. 그렇군요."

"하지만 시간은 하나잖소. 우리들이 머물던 시간이 그대로 이어져 당
신네들의 시간에 이어지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두 마리의 말
이 아니라 한 마리의 말 아니오? 만일 말이 한 마리 뿐이라면, 한 마
리의 말은 멈출 수야 있겠지만 그 자신을 따라잡았다는 식의 표현은
불가능할 거 같은데."

샌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렇군요?"

상당한 반론을 예상하고 있던 그레이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 때 솔로쳐가 끼여들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소. 그레이. 시간은 하나가 아니오. 당신이 마법
을 조금 익혔더라면 설명하기 좋았을 텐데. 음…… 혹시 헤이스트 스
펠이나 타임 스톱이라는 스펠에 대해 들어보셨소?"

"예? 아, 헤이스트 스펠이라는 것은 마법사의 속력을 매우 높이는 것
이지요. 그리고 타임 스톱은, 에, 저 그러니까 시간을 정지시키고 마
법사만이 움직이는…… 아!"

그레이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솔로쳐는 그레이가 이해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샌슨과 딤라이트, 그리고 쥬리오 시장이 도통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프림 블레이드를 든 채 입을 쩍 벌리
고 있던 무스타파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솔로쳐는 두
팔을 조금 펼치며 매우 학자연한 태도로 설명을 시작했다.

"타임 스톱은 사물의 시간을 정지시키고 마법사만이 자유로이 움직이
는 마법이오. 분명히 존재하는 스펠이며, 마나에 깊이 안겨있는 마법
사라면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소. 당신들 중 마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
은 대개 들어소셨을 거요. 그런데 만일 시간이 하나의 흐름이자 고정
불변의 것이라면, 타임 스톱을 성공시킨 마법사가 보낸 시간은 도대체
무엇이겠소?"

"어, 그런가요?"

샌슨은 별로 생각해볼 기회도 없었던 문제에 당황하며 대답했다. 솔
로쳐는 빠르게 말했다.

"그것도 다 시간이오. 시간이라는 것은 하나의 흐름이 아니지. 시간
은 사실 모든 사물에 있어 따로 흐르는 것이오. 하늘을 나는 새와 바
람에 흩날리는 풀잎은 사실 서로 다른 시간,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오. 이해했으리라 믿고, 그럼 헤이스트 스펠을 예로 들어봅시다.
이 경우 마법사는 자신의 시간을 매우 빠르게 보내는 것이오. 그래서
주위의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마법사가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타임 스톱의 경우는 마법사가 자신의 시간을
극한까지 가속시킨 것이오. 아니, 무한이라고 해야 될까? 그렇소. 타
임 스톱을 캐스트한 마법사는 자신의 시간을 무한히 빠르게 만든 것이
며, 이 때 주위의 시간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멈춘 것이 되는 거요. 아
시겠소?"

샌슨은 거의 불쌍하게 보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우리들은, 아니, 모든 것들은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는……
그럼 어떻게 서로 이야기하고 행동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보통의 사물들이 가지는 그 시간 차이라는 것이 거의 0에
가까울만큼 무한히 작기 때문이오. 그래서 사물들은 모두 하나의 시간
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지요. 마법의 도움이 없다면, 보통의 사
물들은 각자의 시간 차이를 절대로 경험할 수 없소."

샌슨은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래서 샌슨은 솔로쳐의 말 전
체를 그냥 외워버렸다. 카알에게 들려주고나서 쉽게 설명하라고 요구
해야겠군. 샌슨은 그렇게 결심한 다음 '나는 당연무쌍하게도 이해했
다' 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들의 추측이 맞은 것이라는 말씀이시죠?"

"논리적으로 틀린 부분은 없다고 해야겠군. 하지만……"

솔로쳐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묻겠소, 샌슨. 부활한 이들은 우리 뿐이오? 그러니까 나와 천공의
기사, 그리고 저 데스나이트들 뿐이냐고."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이상하군."

"예?"

솔로쳐는 그레이와 딤라이트를 한번씩 바라보고는 침울하게 말했다.

"왜 우리들뿐이지? 대왕이나 여덟 별은 왜 부활하지 않는 건지. 우리
사부님의 경우는? 나는 조금 전 모든 사물은 각자의 시간을 가진다고
말했소. 그 말을 바꿔 말하자면, 다른 시간에 비해 특별한 시간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 되오. 모든 시간은 평등하오. 그런데 왜 우리들만이
현재에 부활한 건지……"

샌슨은 미리 들어두었던 대답을 할 수 있어서 안도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부족하나마
추측해본 바에 의하면,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될수록 더 많은 과거들
이 우리를 따라잡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레이는 눈썹을 조금 찡그리며 말했다.

"그럼, 우리들이 그냥 처음으로 부활했다는 것이오? 흐음. 마법사님.
조금 전에 다른 시간에 비해 특별한 시간은 없다고 하셨지요? 모든 시
간이 평등하다고."

"그랬소."

"그럼 우리는 가장 먼저 떨어진 빗방울인가 보군요. 모든 빗방울들은
다 똑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중에는 분명 가장 먼저 떨어지는 빗방
울이 있는 법이지요."

그레이의 아름답고도 적절한 비유에 솔로쳐는 피식 웃어버렸다.

"좋아. 일단은 그렇게 여기고 있도록 하지. 음. 그래, 샌슨. 이 사태
에 대한 당신들의 대비는?"

"일단 시공의 문제이니 만큼 저희들은 이 문제를 요정의 여왕께 여쭤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페어리퀸 다레니안 말씀이오?"

"예. 이미 수도에서는 특사들이 출발했습니다. 저와 동시에 출발했으
니 이제 쯤은 레브네인 호수에 이르렀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 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딤라이트가 끼여들었다.

"질문이 있소, 샌슨 경. 당신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면 우리들은 어떻
게 되는 거요."

샌슨은 당황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래서 샌슨은 우물쭈물하다가 힘들게 대답했다.

"저, 그러니까 원래대로……"

"잊혀진 시간으로 돌아가게 된단 말이군요. 소멸한다고."

"그렇게 추측합니다."

"그렇게 만들겠다는 것이겠지. 우리는 있을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샌슨은 입을 다물었다. 쥬리오 시장은 불안한 표정으로 딤라이트의
안색을 살폈지만 딤라이트의 딱딱한 얼굴에서는 그의 심사를 추측하게
할만한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딤라이트는 가볍게 입을 열었다.

"바라마지 않는 바요."

"예?"

딤라이트는 밝게 웃지도 않았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지
만, 자신 속에 완성된 진리를 말하는 자가 보여주는 당당함으로 말했
다.

"꼭 성공하시길 빌겠소. 그리고 그 때까지, 우리는 저 데스나이트들
이 현재의 여러분에 대해 어떠한 종류의 위해도 끼칠 수 없도록 저지
하겠소. 그것이 이 기괴한 상황에서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정의
인 것 같소. 나는 오렘의 이름 아래 맹세하겠소."

샌슨은 감탄해버렸고 그는 감탄을 표현하는 데 있어 가식이 없는 성
격이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온 목적도 바로 그렇습니다!"

"그럴 거라 짐작했소. 그런데 부탁이 하나 있군요."

"부탁? 말씀하십시오."

"대공께 저희들의 지위를 복권시켜주시고 임무의 수행을 완료하도록
허락해달라는 연락을 취해주셨으면 하오."

"예? 대공…… 일스 대공전하 말씀입니까?"

딤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300년 전, 나는 우정으로서 바이서스를 도울 것을 결심하신
대공 전하의 명령에 따라 데스나이트들을 물리치기 위해 이 땅을 찾았
었소. 그러나 나는 선의로서 주어진 협조의 손길을 무시했고, 그래서
콜로넬 계곡의 망자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소."

딤라이트의 말을 듣고 있던 솔로쳐는 쓰게 웃었다. 바이서스의 어전
앞에서 데스나이트들을 처리하는데 있어 마법사의 도움까지 필요하지
는 않을 거라고 말하던 딤라이트의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던 모습
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와 나 모두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흘렀던
300년은 그를 이렇게 변모시켰던 것인가. 아니면 이것은 죽음을 경험
한 자의 변화인가.
딤라이트는 차분하게 말했다.

"대공께서 내리신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지금 당
장이라도 일스로 찾아가 갑옷을 벗고 대공 앞에 무릎 꿇어 죄를 고하
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하지만 시기가 이러하니 그럴 수는 없군요.
그러니 원컨대, 저와 제 사랑하는 친구들로 하여금 끝끝내 완수하지
못한 명령을, 우리들의 목숨을 지불하고서도 이행하지 못했던 명령을,
참람된 망자의 몸으로나마 수행하게 허락해주십사 부탁드려 달라는 것
이오."

"죽어서까지…… 주군께서 내린 명령을 수행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딤라이트 경?"

딤라이트는 동그래진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함으로
써 샌슨을 바보로 만들어버렸다.

"당연한 거 아니오?"

샌슨은 자신의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몰라 허둥거렸다. 다행
히도 무지개의 대마법사가 그를 구원했다.

"좋소. 샌슨. 그럼 켄턴으로의 지원병은 언제까지 구성 가능한 거
요?"

샌슨은 다시 착 가라앉은 얼굴이 되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
긴 했지만, 그 대답을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이 그에겐 너무 벅찬 일이
었다. 샌슨은 힘빠진 얼굴로 쥬리오 시장을 바라보았다가, 시장이 이
미 그의 대답을 짐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쥬리오 시장은 슬픈 표
정으로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샌슨은 어렵게 말을 꺼내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원병은 없습니다."

"뭐요?"

"자세한 사정은 쥬리오 시장님께서 말씀하시겠지만 현재 바이서스는
전쟁 중입니다. 자이펀과의 전쟁 중이지요. 그래서 추가 지원이 몹시
힘든 상태입니다. 그러니……"

샌슨은 말을 맺지 못했다. 이번에는 솔로쳐가 샌슨을 바보 취급해버
렸다.

"이런 멍청한! 누가 보통 지원병을 말한 거요?"

"예?"

"전쟁 중이라. 음. 도대체 평화로운 시기라는 것이 없군. 내가 300년
에 걸친 두 시대를 살아본 사람으로서 말하겠는데, 인간사 평안할 날
이 없군. 어쨌든 내가 말한 것은 그런 지원병이 아니오. 이곳은 데스
나이트들의 공격을 받고 있단 말이오."

"그럼…… 무슨?"

솔로쳐는 대답하려다가 머리를 가로젓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그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 킨 크라이의 깃털 하나만 뽑아주시겠소? 좀 큼지막한 놈으로."

그레이는 별 말 없이 자신의 그리폰에게 다가서서는 그 하얀 깃털을
하나 뽑았다. 그레이에게 깃털을 건네받은 솔로쳐는 그것을 손에 들고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의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솔로쳐의 눈이 감긴 순
간, 솔로쳐의 지팡이에 감겨있던 링 중에서 두번째 링이 주홍색의 빛
을 뿜었다. 쥬리오 시장과 샌슨이 당황하여 조금 뒷걸음치는 동안 솔
로쳐는 빛나는 지팡이를 그대로 깃털에 가져다대었다. 순간 지팡이의
빛이 그대로 깃털로 옮겨진 것처럼 깃털은 선명한 오렌지빛을 뿜어내
기 시작했다. 그것도 물감으로 물들인 것 같은 빛깔이 아니라 그 자체
로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솔로쳐는 만족한 표정으로 깃털을 바
라보더니 샌슨에게 내밀었다.

"이걸 가져가시오."

"예? 아, 예. 어디로……?"

"빛의 탑으로 찾아가시오. 빛의 탑의 마법사들이 모조리 마학 연구하
다가 돌아버리지 않았다면 이 깃털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볼 수 있는
녀석들도 있을 거요. 당신이 할 일은 그저 그들 앞에서 이 깃털을 허
공에 던지는 것이오. 그러면 그 친구들은 이해할 거요. 그들이 이해하
면, 솔로쳐가 맡겨둔 물건을 찾고 싶어한다고 말하시오. 당신이 직접
가져다 줄 필요는 없소. 그 녀석들도 운동 좀 해야 될 테니까. 현재
길드장이 누군지야 내 알 바 아니지만, 까마득한 사조께서 명령하는
것이니 속히 가져오라고 전하시오."

샌슨은 황공스러운 동작으로 깃털을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그레이가 말했다.

"아, 샌슨 경. 부탁이 참 많습니다만 이왕 부탁하는 김에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거 뭐냐, 딤라이트의 말을 전달하는 사자 편에 그레이의 말이라고
해서 한 마디 더 전달해주시오. 내 비록 죽었지만 내가 대공과 맺었던
충성의 서약은 그대로요. 그리고 그 서약은 내 자손과 대공의 자손에
게까지 모두 해당되는 것이었소. 그러니 이렇게 말해주시오. 인간이
말하는 것과 인간이 말할 수 없는 모든 것이 충성의 서약을 깰 수 없
음을 기억하신다면, 300살 넘게 먹은 늙은 수하들을 정의롭게 대해주
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일스 기사단원의 출병을 부탁드립니다. 알겠
소?"

샌슨은 도대체 이 행운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몰랐고 그것은 쥬리
오 시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작해야 힘없는 동의 - 이 시대와 관련
된 사람은 아니지만, 부탁한다면 후손을 위해 싸워주겠다. - 만이라
도 얻어낼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여겼던 여행이 이런 엄청난 결과로
끝나게 될 줄이야. 샌슨은 이마가 부서져라 경례를 붙이려다가 눈 앞
의 사람들이 일스의 기사이자 마법사, 즉 그에게 경례를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간신히 알아차리고는 대신 머리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미력한 목숨 초개처럼 던져 그 전갈을 전하겠습니다!"

그레이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죽으면 못 전해요. 살아서 전하도록."

"아, 예."

그 때 무스타파가 오랜 침묵을 깨고 말했다.

"죽어도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사람들은 모두 무스타파를 돌아보았고 무스타파는 조금 겸연쩍은 표
정으로 말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잖소. 그러니 샌슨 경도 죽
으면 되살아날지도 모르지. 그렇잖소?"

샌슨은 입을 쩍 벌렸다. 그러나 솔로쳐가 말하는 것을 듣고는 더욱
놀라야 했다.

"그렇지는 않지. 만일 샌슨과 그 동료분들의 추측이 맞다면 현재는
점차 고정되고 있는 거 아니겠소? 재수가 없으면 여기 있는 우리 친구
샌슨께서는 사망한 그 순간이 영원히 고정될지도 모르지. 되살아날 수
없게 말이오. 흥미로운 연구거리인데. 음음. 샌슨. 사실의 판단을 위
해 좀 죽어주실 생각은 없소?"

"그, 그 말씀은 수용하기 어렵군요……"

솔로쳐는 껄껄거리며 농담이었다고 말했고 천공의 3기사들도 웃어버
렸다. 하지만 샌슨은 방금 오고간 대화에서 깨달은 사실을 생각하느라
웃기가 어려웠다.
이들은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 자신은 죽으면 되살아날 수 있을지 없
을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과거의 시간이 되어 되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죽어버린 그 순간이 고정되어 절대로 부활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제3의 경우도 있다. 샌슨은 바로 그 제3의 경우를 고민하며
머리아파해야 했다.
이미 그는 고정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절대로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
예… 모든 사물은 각자의 시간을 가지고, 따라서 시간은 절대적인 것
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 솔로쳐가 말하는 것은 상대성 이론입니다. 쉽
죠? 그러니 이젠 시간의 절대성을 기반으로 한 질문은 그만 주시길 부
탁드립니다. 왜 300년 전의 인물이 먼저 튀어나왔냐 하는 질문이 그러
하겠군요. 대답 : 당신이 보고 있는 현재의 별빛은 300만년 전의 것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 별 옆의 달은 2초 전의 달이고. (역시 비유는
위험하군요.)
좋은 밤 되세요. 타자는 누구 용돈이나 벌어주려고 고생해가며 글 두
드리는 스스로의 미련함에 대해 관조하렵니다.(계속 글 써야 되나.)번 호 : 11324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2-09 02:44
제 목 : [F/W]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11

Future Walker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11.

"좋은 해답이 있어요, 아프나이델?"

"모르겠는데요."

바위에 걸터앉아있던 제레인트는 아프나이델의 대답에 풀죽은 표정이
되어서는 풀잎을 뜯기 시작했다. 툭. 툭. 역시 맥이 풀린 표정으로 호
수를 바라보고 있던 엑셀핸드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이루릴을 바라보
다가 못참겠다는 듯이 말했다.

"이봐, 이루릴!"

"네."

"다시 좀 불러주게. 이건 도대체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왜 똑똑히
말해주지 않는 거야?"

"그녀는 대답해주셨습니다만."

"그런데 그 대답이라는 것이 머리 아픈 소리잖아! 뭐라고? 어, 그러
니까 과거가…… 교차점이……"

요정의 여왕의 말을 반복하려다가 잠시 주춤한 엑셀핸드는 주위의 모
든 이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엑셀핸드는
으르렁거렸지만 아일페사스가 먼저 말했다.

"까먹었지?"

"……넌 기억하냐?"

"물론이죠, 엑스 오빠."

"그럼 말해봐!"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 두 흐름의 교차점을 찾
으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리라."

아일페사스는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기며 낭랑한 목소리로 페어리퀸
다레니안의 대답을 반복했다. 엑셀핸드는 드워프어로 뭐라고 혼잣말을
한 다음 아프나이델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
은 당황하며 말했다.

"예?"

"그 말이 무슨 뜻이냐, 아프나이델!"

"조금 전에 말했듯이, 모르겠는데요?"

그러자 엑셀핸드는 기세 오른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때? 마법사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이란 말이야. 그런 말도 돼지
않는 말, 잊어먹을 수도 있는 거 아냐? 라고 주장하는 듯한 표정이었
지만 불행하게도 아무도 엑셀핸드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모두들 답답
한 표정으로 레브네인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요
정의 여왕이 한 말은 무슨 의미일까?
앉은 자리에서 조그마한 건초더미 비슷한 것을 만들어버린 다음에야
제레인트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이상의 다른 대답은 주시지 않을 거 같지요?"

"아쉽지만, 그렇게 추측됩니다."

이루릴은 평온하게 대답했고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젠 우리들에게 맡겨진 것이군요. 그게 뭔지, 그러니까 과거
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이 뭔지 밝혀내고, 그 흐름의 교
차점이라는 것을 찾아내는 것은 전부 우리 몫이란 말이군요. 아악! 그
런데 나는 수수께끼에는 소질이 없단 말입니다! 아프나이델! 좋은 생
각 좀 없어요?"

단지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 똑똑한 마법사, 잘난 마법사, 이미 세
상의 모든 지식을 알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
들을 추구하는 마법사, 유피넬의 저울 눈금을 속여 헬카네스의 추마저
도 비켜가는 위대한 그 이름, 마법사. - 무려 세 번에 걸쳐 지적당한
아프나이델은 기가 죽을대로 죽어서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일페사스는 아프나이델에 대한 이런 취급에 분개해서는 외쳤다.

"왜 자꾸 나이드만 못살게 구는 거야? 린! 언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뭐 떠오르는 것이 있어요?"

에델린은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잘 돼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대답
했다.

"떠오르는 것이 없네요, 아일페사스."

"제리! 너는 없어요?"

"지금으로선."

"엑스 오빠는 건너 뛰고, 악! 때리지마! 아, 루리. 루리는 뭐 떠오르
는 거 없어?"

"없군요."

"그럼 요정의 여왕이 잘못 생각한 거네요. 그 정도만 말해주면 우리
가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했나 본데 그렇지가 못하잖아. 우리들을 너무
대과평가했나봐."

"과대평가라고 하는 거야, 아일페사스."

아프나이델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아일페사스는 콧대를 높이 세워보였
을 뿐이었다. "요정의 여왕이 한 말도 모르는 주제에 그까짓 과대평가
라는 단어 똑바로 아는 것이 무슨 자랑이야?" 아일페사스의 말에 의해
일행들은 다시 자신들의 아둔함을 인식하며 속상해해야 했다. 제레인
트는 다시 한번 처량한 목소리로 아프나이델에게 말했다.

"과거로 향하는 것이 뭘까요?"

괴롭히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신뢰감의 표현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일행 중에 이 묘한 문제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프나이델이 유일한 사람일 거라고 무의식 중에 믿는 제레인트의 질
문에 아프나이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땅을 바라
보며 말했다.

"전사인가 보지요."

"그럼 미래로 향하는 것은요?"

"마법사겠지요."

아무렇게나 대답하던 아프나이델은 문득 주위가 고요해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들었다. 제레인트와 에델린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
었고 엑셀핸드는 턱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이루릴은 아무 표
정없이 아프나이델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일페사스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나이드? 그게 무슨 말이야? 대답을 알아낸 거에요?"

"어? 뭐? 아, 아니. 농담한 건데……"

아프나이델은 당황해서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제레인트가 급하게 말했
다.

"잠깐만요, 아프나이델. 그 농담이 왠지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한 거지요?"

아프나이델은 이제 본격적으로 당황해버렸다. 그는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아, 저, 그게 그러니까. 음. 에, 마법사는, 마법사는 그러니까……"

엑셀핸드는 마치 아프나이델을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
해. 아무도 너 안 잡아먹어!" 라고 말했다. 아프나이델은 주저주저하
며 말을 이어나갔다.

"어…… 음. 예. 이건 그냥 농담입니다. 마법사들끼리 하는 객담 같
은 거지요. 전사가 다루는 검은 무엇에 쓰입니까? 그것은 자신을 보호
하는, 즉 자신을 유지하는 도구입니다. 이 때 발전이나 변화 같은 것
은 배제되지요. 전사는 자신의 몸 어디라도 다치지 않기를 원할 겁니
다. 맞지요? 예. 그러니까 검이라는 것은 항상성이나 일관성 유지의
도구입니다. 과거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기를 원하는 심리의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정체의 도구지요."

제레인트는 아프나이델의 말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상체를 앞으로 기
울여갔다.

"음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그럼 마법사의 경우에는?"

"마법사는 반대로 변화를 원하는 심리지요, 뭐. 가만히 놔두지를 못
하는 것이 마법사의 심리입니다. 균일하게 배치되어 안정된 마나를 마
구 일탈시키고 변화시키고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에, 그런 것이 마법
사의 소행입니다. 그렇잖습니까? 마법사는 되는대로 놔두는 것을 못견
뎌하지요. 뭔가를 바꿔보고, 변화시켜보고. 아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마법사라는 존재가 뭔지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마법사는 변화의 노예
지요."

"그러니까 현재의 모습을 놔두지 못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뭐."

아프나이델은 자신의 별 대수롭지 않은 농담에 일행들이 이토록이나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에 놀라고 말았다. 심지어 엑셀핸드까지도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의 말을 되씹고 있었다. 에델린은 작
은 코를 힘차게 벌렁거리며 말했다.

"으음. 그 교차점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아프나이
델 님의 말은 그럴 듯하게 느껴지는데요. 그렇잖습니까, 이루릴?"

"예. 그렇게 느껴지는군요."

"그거 농담이라니까요……"

"맞아. 제레인트. 이 친구의 말은 내게도 이해되는데. 음? 그 표정
뭔가. 전에도 본 적이 있는 표정인데?"

"아, 아닙니다. 엑셀핸드. 으음. 확실히 그럴 듯하지요? 현재에 살면
서도 어제의 충성, 어제의 모국을 지키는 전사, 현재에 살면서도 내일
의 발견, 내일의 신지식을 겨냥하는 마법사."

"말씀드렸다시피 그건 농담이고……"

"오아! 어쨌든 나이드, 멋져! 그래도 제일 똑똑해요. 마법사다워요.
당장 맞춰버리다니! 오아!"

"아일페사스. 부디…… 그건 농담이라고!"

그러나 아일페사스는 아프나이델의 이런 절절한 반항을 무시하며 질
문했다.

"그런데, 나이드의 말대로라면 과거로 향하는 흐름은 전사고 미래로
향하는 흐름은 마법사인데, 그럼 전사와 마법사의 교차점이 뭔데?"

"성직자인가?"

제레인트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렇게 말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는 신경쓰지 않았다. 일행은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만을 바
라보았고 아프나이델은 그만 항복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알 도리가 없지요."

그러자 일행은 이구동성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아! 남자 전사와 여자 마법사가, 혹은 그 반대의 경우가 결혼해서
낳은 아이!"

"아냐. 전사의 길과 마법사의 길이 만나는 곳. 그건 명예다! 명예야
말로 그 양자 모두가 관심을 가진 거야."

"그런 식으로라면 돈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혹은 보석이라고
도."

"혹시 어린이를 말하는 거 아닐까요? 어린이는 장차 전사가 될 수도,
마법사가 될 수도 있는 존재니까 그 양자의 시발점…… 아니, 잠깐.
교차점이라고 했으니 좀 이상한데……"

"잠깐. 교차점이라고 했으니 그건 어떤 장소를 말하는 거 아닐까요?
알았습니다! 마법국가인 바이서스와 전사국가인 자이펀. 이건 바이서
스 - 자이펀 전쟁을 빗댄 말입니다!"

"잠깐만요. 물론 바이서스에 빛의 탑이 있긴 하지만 바이서스는 어디
까지나 기사도의 나라란 말입니다."

"그럼 궁성 임펠리아다!"

마지막으로 일갈한 엑셀핸드는 모든 이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퍽
기뻐했다. 에델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노커여, 임펠리아라고 하셨습니까? 바이서스의 궁성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곳은 전사의 성지이지만 마법사가 지키는 곳이니까."

엑셀핸드는 한층 높아져가는 기쁨에 거의 취하는 기분을 느꼈다. 일
행들은 모두 뒤통수를 매우 딱딱한 무엇으로 두드려맞은 듯한 표정으
로 드워프들의 노커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그래도 가
장 초연한 표정을 하고 있던 이루릴이 조용히 말했다.

"바이서스 기사도의 총본산인 성지이지만,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이
름을 기억하기 위해 대대로 마법사가 그 수비대장을 맡는 곳. 엑셀핸
드께서는 그것을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군요."

"그렇지, 그렇지!"

경악에서 깨어난 제레인트가 달려들 것 같은 과격함으로 엑셀핸드를
겁주며 외쳤다.

"하지만 궁성이 왜요!"

"응? 어, 무슨 말인가?"

"그럼 이 모든 우스꽝스러운, 아니, 비극적인, 아냐. 기괴망측한,
음. 아무래도 제 마음을 적당히 나타낼 수 있는 말을 찾기도 어려
운…… 이라고 말해야 될 이 사태가 바이서스의 궁성 임펠리아에서 일
어났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궁성의 무엇이, 누구가? 그게 말이 돼
요?"

제레인트의 말투는 마치 질책하는 듯했고 그래서 엑셀핸드도 노기 띤
얼굴이 되었다.

"내게 말할 기회를 준다면, 그 기회를 용도변경해서 네녀석의 뒤통수
부터 한 대 때려주겠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전사와 마법사의 교
차점이라고 하니 그게 떠오른다는 거다. 이 엉터리 프리스트야!"

에델린은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말했다.

"음음. 여러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발 내 말을 들어주세
요. 예?"

에델린의 간곡한 부탁에 의해 "때려봐요, 때려봐! 내 뒤통수에 손이
나 닿아요?" "크아아악! 이놈의 자식, 정정한다. 다리 몽둥이를 분질
러놓겠다!" 등등의 험악한 애정교환을 하고 있던 제레인트와 엑셀핸드
도 진정하게 되었다. 에델린은 그 거구에 어울리는 깊이 울리는 목소
리로 말했다.

"일단 요정의 여왕께서 주신 말씀의 전반부는 아프나이델님에 의해,
후반부는 엑셀핸드님에 해석되었습니다. 그 해석에 따르자면 요정의
여왕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와 같습니다. '전사와 마법사의 교차점, 궁
성 임펠리아를 찾으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리라.' 이 이상의
다른 해석은 현재로선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에델린의 목소리에는 사태를 안정된 것으로 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고
그래서 일행들은 자신도 모르게 매우 안심스러운 기분을 느껴버렸다.
에델린은 잠시 쉬었다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궁성 임펠리아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만일
그 해석이 옳지 않다 하더라도 어차피 우리들은 페어리퀸 다레니안께
서 주신 말씀을 수도로 가져가야 될 것입니다. 수도로 가져가서 보다
현명한 분들께 이 말씀에 대해 해석을 요구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잖
습니까?"

그러나 이 부분에서 제동이 들어왔다. 자신의 해석을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여기는 일행에 대해서 곤혹스러워 하고 있던 아프나이델이 고
개를 조금 가로저으며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해석이 옳지 않았을 경우에는 수도로 돌아가는 것은, 글
쎄요. 저희들은 지금의 이 문제상황의 이면에 있는 원인을 규명하고
그 해결방안까지 모색할 것을 목적으로 출발한 것 아닙니까? 출발하기
전 카알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우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흘러가는 강물이 멈추고 천공을 일주하는 태양이 멈춰버리는 일은 일
어나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언제 일어날지 모릅니다. 아니, 어쩌
면 밤이 우리들의 '현재'로서 영원히 고정될 수도 있겠지요. 그럼 우
리는 영원한 어둠 속에서 살아야 될 겁니다."

아프나이델의 말에 일행은 섬뜩함을 느꼈다. 부드러운 표용력에 의해
일행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에델린과는 달리 아프나이델은 끔찍한 말
만 일삼으au 일행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따라서 한시바삐 이 상황의 이유를 밝히고 그 해결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들의 해석이 틀렸을 경우
우리들은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여기서 수도까지 돌아가는 시
간, 음, 이건 얼마 안 걸리겠군요. 하지만 그 말씀을 전달하고 다시
해석해야 하는 시간은 꽤나 많이 걸릴 겁니다."

"그래서…… 어쩌자고?"

엑셀핸드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그 질문
에 대한 대답을 이미 준비해두고 있었다.

"간단하지요. 물어보는 겁니다."


================================================================
아…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비몽사몽 간입니다. 지독한 몸살
감기에 걸렸습니다. 모니터 화면이 몽롱하게 보일 지경입니다.(아마도
오타가 수두룩할 거 같습니다. 으윽.)번 호 : 11325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2-09 02:45
제 목 : [F/W]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12

Future Walker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12.

"물어보다니?"

아프나이델은 대답하는 대신 매우 극적인 동작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일행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프나이델의 시선을 따라가게 되
었다. 그 시선이 멈춰진 곳에는 선량해 뵈는 얼굴이 얼굴에 당혹을 담
은 채 서 있었다.

"제레인트?"

"예?"

"이 해석이 맞아요, 틀려요?"

제레인트는 생각하기도 전에 대답했다. "틀려요."
아프나이델은 자신의 해석이 틀렸다는 데서 안도감을 느껴야 된다는
것이 꺼림찍했다. 게다가 일행들이 전부 그 해석에 기대를 걸고 있다
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바에야. 그래서 아프나이델은 서글프게 웃으며
말했다.

"예…… 들으셨지요? 틀렸답니다.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그 해석은
그냥 농담이었을 뿐이니까요."

"끄으으응!"

엑셀핸드가 일행을 대표해서 신음을 토했기에 다른 이들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인간, 트롤, 드워프, 엘프, 드래곤의 이 복잡다단한 구성
의 종족들은 모두 각 종족을 대표할만한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제레인트만은 예외였다.

"하지만 맞아요."

레브네인 호수에서 들려오는 찰박거리는 물소리만이 잠시 사위를 점
령하며 기세등등하게 울려퍼졌다. 만연한 고요함 속에서 일행들이 제
레인트를 바라보는 가운데 이 말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이가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이루릴이었다. 그리고 아일페사스가 냉큼 그 뒤를 이어 말했다.

"그런가요라니? 루리! 루리! 아니, 제리! 어떻게 된 거야? 맞다는 거
에요, 틀리다는 거에요?"

"틀려. 하지만 맞아."

아프나이델은 턱을 긁적거리며 침울하게 말했다.

"역시 세상은 흑백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법 어쩌고 하는 교훈
을 주려는 목적이라면 상당한 짜증을 야기시킬 뿐 본래의 목적에는 실
패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걸요?"

"아니…… 에, 그러니까. 아프나이델의 해석은 틀려요. 하지만 우리
는 임펠리아로 가야 해요."

"한결 낫군요."

아프나이델은 정말 다행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기 때문에 제레인트는
퍽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그 표정 그대로 의문을 제
시했다.

"그럼 뭡니까. 우리 해석은 틀렸지만 답은 맞았다는 말입니까?"

"글쎄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조건을 붙이는 질문은 제
게 부여된 권능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조건을 붙이는 것은, 음. 마치
세 갈래 길에서 오른쪽의 길로 가지 않는다고 할 경우 가운데와 왼쪽
중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음. 그럼 어쨌든 우리는 임펠리아로 가야겠군요?"

"저는 그러고 싶습니다."

제레인트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루릴은 침착한
표정으로 레브네인 호수를 향해 작별 인사를 보내었다.

"도움 준 것에 감사해요, 내 친구 다레니안. 열심히 노력해보겠습니
다."

아일페사스는 뭘 열심히 한다는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루릴
을 바라보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드래
곤의 대표로서 이 작별의 자리에서 자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된
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기품있게 앞으로 걸어가서는 씩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다렌. 조그만 것이 제법이었……"

아일페사스는 드래곤의 대표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아프나이
델의 손에 의해 입이 틀어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아일페사스를 끌어당기는 것과 동시에 제레인트는 초죽음
이 된 얼굴로 수면을 향해 외쳤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잘못 가르쳐서 그러니 부디 넓으
신 아량으로 용서해주십시오!"

레브네인 호수의 넓은 수면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고 마법사와
프리스트는 이마를 쓸어내렸다. 아프나이델의 손에 입이 틀어막혀진
아일페사스가 이 손을 확 깨물어버릴까 하는 흉폭한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에 엑셀핸드가 후환이 두렵다는 듯이 말했다.

"어, 음. 작별인사 끝났지? 어서 돌아가세. 흠흠!"

그러자 이루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캐스트했다.

"게이트."

이루릴이 그랜드스톰으로 곧장 통하는 마법의 문을 만들어내자 가장
먼저 뛰어든 것은 엑셀핸드였다. 그 뒤를 따라 제레인트가 레브네인
호수를 향해 다시 한번 인사를 보내고는 게이트 안으로 걸어들어갔고
에델린과 이루릴이 그 뒤를 따랐다. 아일페사스를 안고 있던 아프나이
델은 그제서야 아일페사스를 놓아주고 그 뒤를 따라 걸어가려 했다.
그 때 아일페사스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프나이델은 멈칫 하며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
굴을 보고는 조금 놀라버렸다. 아일페사스는 그가 한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러니, 아일페사스?"

"펫시라고 부르랬잖아. 그랜드스톰에서는 잘 부르더니 왜 다시 그렇
게 불러요, 나이드."

"아…… 하하. 그래, 음. 펫시."

아일페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결투를 신청해요, 결투를. 그게 뭐야? 뻣뻣하게 '펫!시!' 라
니."

"차차 익숙해지겠지. 기다리렴."

"글쎄요?"

웃으며 대답하던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의 대답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아일페사스는 호수에서 불어온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머릿
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익숙해져? 현재가 고정되면, 나이드는 영원히 저를 '아일페사스'라
고 부르는 거 아냐?"

아프나이델은 침울한 표정으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
는 그 시선에 움찔하더니 몸을 돌려 수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프
나이델도 덩달아 수면을 바라보았다. 젊은 마법사와 금발의 해츨링은
그렇게 자작나무 숲을 등지고 넓은 호수면에 둘의 그림자를 던지며 잠
시 서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따스하게 들
리도록 노력하며 말했다.

"그렇게 안되도록 하려는 거잖니…… 펫시."

아일페사스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려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그래야지. 그런데 말이야."

"응?"

"현재가 고정되면…… 아, 아냐. 돌아가."

"응? 왜 그러니."

아일페사스는 두 손을 엉덩이 뒤로 모으고는 하릴없이 돌멩이를 걷어
찼다. 퐁.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가 작은 물소리를 내자 아일페사스의
입 속을 맴돌던 말이 깜짝 놀라며 튀어나왔다.

"그럼 저 영원히 드래곤이 못되고 해츨링으로 있는 거야?"

아프나이델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지만 애써 아무런 내
색을 하지 않으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음음. 저 드래곤이 되면 드래곤 라자를 가져야 되지? 그래야 제리
랑, 나이드랑, 엑스 오빠들하고 이야기할 수 있죠? 아빠는 그렇다고
하던데."

"그렇지. 너는 그 때 지상에서는 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존재가 될 테니까."

무의식 중에 대답하던 아프나이델은 문득 눈 앞의 아일페사스를 바라
보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완벽한 존재'라. 아일페사스는 아프나이델
의 웃음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저 덩달아 웃으며 말했다.

"헤. 그거 귀찮겠다. 어서 가! 게이트가 닫히겠어."

아일페사스는 그 말만 남겨두고는 재빨리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긴 블론드의 물결이 검은 문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아프나
이델은 싱긋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문득 그의 발걸음이 멈춰지며,
아프나이델은 요정의 여왕이 거주하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대마법사를 사랑했지만 영원히 그와 자신을 분리시켜버린 여
왕이 계시는 호수를 향해 아프나이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 주신 것, 감사합니다. 이미 도움을 받은 주제에 더 바라는 것
은 뻔뻔하겠지요.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고정을 타파하는 변화는 마
법사의 몫, 그리고 인간의 몫일 테니까요."

수면을 스치는 가벼운 바람만이 아프나이델의 말에 대답했다. 아프나
이델은 아무도 없는 호숫가에서 수면을 향해 말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
고는 조금 머쓱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는 그 머쓱함에서 도망치듯
게이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이곳입니다…… 헬턴트 공?"

"아, 예."

켄턴으로 보낸 샌슨의 일과 레브네인 호수로 파견한 일행에 대한 일
로 머릿속이 꽉 차 있던 카알은 간수장의 목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
렸다. 그 용모만으로도 죄수들의 탈옥 의지를 상당히 저지시키고 있을
것만 같이 생긴 간수장은 그런 카알을 바라보다가 이해했다는 듯이 말
했다.

"걱정 마십시오. 창살은 튼튼하고 간수들은 민첩합니다. 죄수들에 대
해 겁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카알은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간수의 추측에 대해 별 말은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몇 번 끄덕여주었다. 간수장은 손에 들고 있던 횃불
을 벽에 붙어있는 횃불걸이에 걸고는 한 손으로는 검을 뽑아들고 다른
손으로는 따라온 간수들에게 간단한 손짓을 보내었다. 카알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간수들은 창살 좌우로 달려가서는 손에 든
할버드로 창살을 겨냥했다. 만일 죄수가 뛰쳐나오면 곧장 공격한다는
의미인 것 같았지만 카알은 어리둥절해버렸다.

"이런 엄중한 준비가 필요합니까? 문을 여는 것도 아닌데?"

간수장은 결코 자신이 겁을 먹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냉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이 층은 좀 특별해서요. 규칙입니다."

"아, 예. 알았습니다."

간수들이 제자리에 서자 간수장은 손에 든 검으로 창살을 몇 번 두드
렸다. 탕탕탕! 지하의 공간인데다가 감옥의 좁은 통로였기에 카알은
귀를 막고 싶어졌다. 그건 창살 안쪽의 사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인
듯, 감방 안쪽에서 노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례한 녀석들…… 개돼지를 부르는 예법으로 사람을 부르는구나."

카알은 간수장이 이 말에 대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간수장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간수장은 좌우에 도열한 간수들을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죄수가 저렇게 뻣뻣한 거야? 네놈들이 간수
냐, 시종이냐?"

간수들은 이 꾸지람을 아무 변명없이 받아들였지만 그들의 표정은 그
들의 억울한 심사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기어코 간수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간수장님. 저 안의 녀석은 인간 같지가 않습니다요. 너무 삭막합니
다. 에, 웃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눈만 바라보면 기운이 쫙 빠지
고……"

"뭐야? 너 지금 죄수 이야기 하는 거야, 작부 이야기를 하는 거야?
뭐, 눈을 바라보면 기운이 빠져?"

"아, 저, 그게 그러니까 말입니다요. 꼭 무슨 몹쓸 괴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까닭없이 떨리고……"

간수장의 표정은 이제 한심스럽다는 것을 넘어서 분노에 치닫고 있었
다. 그 때 카알이 나섰다.

"아, 그럴 게요. 그건 살기라는 겁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헬턴트 공?"

카알은 그에 대해 설명해주려고 했지만 그 때 감방 안에서 다시 목소
리가 들려왔다.

"넌 뭐지? 헬턴트 공이라고 했나?"

간수들은 잠잠해졌고 카알은 앞으로 한 발 걸어갔다. 간수장이 당황
해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절대로 창살 가까이 가시면 안됩니다."

카알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는
창살에서 충분히 떨어진 채 감방 안의 어둠을 향해 말했다.

"그렇습니다."

감방 안쪽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간수들은 긴장된 표
정으로 할버드를 꼬나쥐었다. 아마도 카알의 얼굴이 잘 보이는 각도로
몸을 옮긴 듯, 잠시 후 감방 속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사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어떻게 알고 있지?"

카알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다.
"Djipenian harll raro.Ethkyzer e attla un di hlow? Nen djipenian
et'likhiw Ali."

간수장과 간수들은 얼이 빠져버렸다. 간수들의 손에 들린 할버드가
아래로 처지는 것을 본 간수장은 황급히 정신을 차려 눈짓을 보내었고
그러자 간수들 역시 당황하며 다시 할버드를 단단히 쥐어올렸다. 감방
안에서 조금 늦다 싶게 대답이 나왔다.

"우리나라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가 보군. 하지만 바이
서스 개의 입으로 그 아름다운 말이 들먹여지는 것은 모욕이다. 그러
니 발음도 시원찮은 그 말 그만두도록."

카알은 화도 내지 않고 씩 웃었다.

"역시 발음이 별로지요? 알리 공. 당신의 바이서스어는 꽤 훌륭하군
요."

전선 시찰 중 바이서스 레인저들의 활약에 의해 납치되었던 전 자이
펀 내무대신 알리는 무응답으로 카알의 말에 대답했다. 카알은 싫은
내색도 없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근황이 좀 어떠십니까?"

"그게 감옥 안에 있는 자에게 묻는 질문인가. 역시 미련한 바이서스
땅개……"

"아, 그런가요. 그럼 다른 걸 물어볼까요. 어떤 취향의 밧줄을 좋아
하십니까?"

"밧줄?"

"교수대는 참형이나 극약형과 달라서 꽤 오랫동안 그 고객에게 봉사
합니다. 특히 당신은 국사범으로 썩은 내를 풍기게 될 때까지 매달려
있게 될 걸요. 그토록 오랫동안 목에 걸고 계실 밧줄이니 아무래도 착
용감이 좋은 것이 낫겠지요?"

카알의 천연덕스러운 말투에 알리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간수장과 간수들은 꽤나 잔인해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했다. 그들은 카알이 알리의 콧대를 꺾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들려온 알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튼튼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끊어지면 자네나 나나 곤란
하니까. 내 알기로 바이서스에서는 교수대 밧줄이 끊어져 죄수가 살아
나면 그 형이 취소된다고 들었는데, 맞는가?"

"그렇습니다. 아샤스의 은총이라고 하지요."

"그건 달갑잖군. 썩은 고기를 탐식하는 새매의 신 따위가 내려준 은
총은 사양하지."

카알은 빙긋 웃었지만 속으로는 혀를 찼다. 이 녀석은 다루기가 어렵
군. 아마도 카알이 뭔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라는 것 쯤은
벌써 짐작했을 것이다. 솔직하게 나가볼까.

"거래하시겠습니까?"

"거래라고?"

"복잡한 방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
는 그런 화법을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제가 뭔가를 부탁
하고 싶을 때는 더욱 그렇지요."

"부탁은 솔직하게 한다라. 좋은 태도로군."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최대한은……"

그 직후, 카알은 옆에서 듣고 있는 간수장과 간수들을 의식해서 자이
펀어로 바꿔 말했다. 그리고 알리는 쇠사슬을 상징으로 삼는 신의 권
능이 말해진 것을 깨달았다. 자유라고? 알리는 고집스럽게 바이서스어
로 말했다.

"그게 가능한가? 네가 무엇이기에?"

"가능합니다."

"보증은?"

"없습니다."

카알은 짧막하고 냉혹하게 대답한 다음, 충분한 시간을 두고서 다시
말했다.

"당신의 경우 특별히 손해볼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손해가 많을 수도 있지. 그리고
네가 말하는 그 댓가를 보건데, 내게 원하는 것이 상당할 거라고 짐작
되는군."

"아,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약간의 풍문이
니까요."

"풍문이라니?"

"그게 말입니다…… 당신네 나라는 참 복잡해서요. 일반 포로들을 아
무리 족쳐봐야 명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모르더라고요. 특히나 명가
의 잘 알려지지 않은 풍문 같은 것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뭔가를 알
고 싶어할 때는 역시 명가의 일원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구조더군
요. 반면, 명가의 일원은 같은 명가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너무하다 싶
을 만큼 잘 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알리는 카알의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네가 명가의 무엇에 관심이 있느냐."

카알은 다시 시간을 좀 두었다. 그리고 알리가 충분히 초조해졌을 거
라고 판단되었을 때 갑자기 입을 열었다.

"신차이 발탄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
부디 몸조심하세요. (내일 올라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에취!
좋은 밤 되세요.
번 호 : 11525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2-13 00:45
제 목 : [F/W]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13

Future Walker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13.

알리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신차이 발탄. 그 이름에 대해서는 들어보았다. 그리고 세월의 힘 앞
에 조금씩 둔화되고 있긴 하지만 하탄의 궁전에서 단련된 그의 기억력
속에서 알리는 신차이의 모습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게 언제더라.
선주연합 초청 연회였을 것이다. 오가는 귓속말들과 짤막짤막한 웃
음, 어디서든 원하면 나타나는, 그리고 어디에든 내려놓기만 하면 조
용히 사라지는 술잔들과 파이프. 노예들의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도록
일부러 낮춰두는 조명은 연회장 곳곳에 신비로운 암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연회에는 바이서스나 헤게모니아에서 벌어지는 무도회
나 파티에서 볼 수 있는 같은 화려함이나 요란함은 없다. 여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이펀의 연회에서는 권위나 도덕의식으로 자신을
둘러싸서 현격히 떨어지는 정열을 감추려드는 늙은이도 없고, 부족한
재산과 낮은 지위를 지적받기 싫어 자신의 남성다움을 비정상적으로
과장하는 풋내나는 젊은이도 없다. 벽이 없이 기둥만으로 둘러싸인 테
라스에 앉아서 멀리서 들려오는 밤바다의 철썩임을 들으며, 조용히 술
을 마시고 조용히 파이프를 피우며 그 틈틈히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자이펀식 연회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런 조용한 연회에서도 '정말 말수가 적은 젊은이군'
이라는 평가가 나올 만큼 입을 완강히 닫고 있는 젊은이가 있어 알리
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젊은이는 한 구석에 정좌한 채 조용히 파이프
만 피우고 있었는데 그 위치라는 것이 기묘했다. 기둥 하나를 희한하
게 이용하여 앉은 젊은이 주위에는 어떤 사람도 편하게 앉을 자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젊은이 주위에 앉으려고 들었다간 오가는 사람들의
통행을 상당히 방해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리는 환담을 나누고
있던 교육대신 가다론에게 간단한 눈짓을 보낸 다음 그 젊은이를 가리
키며 말했다.

"얼음장 같은 젊은이군요. 누군지 혹시 아십니까."

만일 가다론이 잘 모르겠는데, 등의 말을 했다면 알리는 그 다음 날
해가 두 개 떠오른다 해도 크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연 가다론
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신차이 선장이오."

"선장이라고요?"

"그렇소. 이골 비겐트 선장의 후임으로 레드 서펜트의 선장이 된 자
요. 아마도 비겐트 가문에서 데리고 온 모양인데. 하지만 저렇게 낙타
시장의 소처럼 앉아있어서야 그를 데리고 온 이골 선장의 정성이 아무
값을 받지 못하겠군."

알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나라의 연회에 비한다면 너무 조용해
서 무미건조할 지경이긴 하지만 자이펀의 연회도 새로 사회에 진출하
는 젊은이들에게 인맥을 넓히고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가 되는 점에서
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 와서 저렇게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은, 그 자신이 출세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우선 그의 후원
자에게 모욕이 되는 행동이다. 그런데 왜 이골 선장은 가만히 있는 걸
까?

"이골 선장이 좀 타일러야 될 텐데요. 왜 저렇게 내버려두는 건지."

알리의 이 당연한 의문은 가다론 교육대신을 웃음짓게 만들었다.

"핫하! 옳은 말이오. 하지만 이골 선장이 저 친구를 다룰 수 있을지
는 모르겠소."

"예?"

"이제리스 해협의 군주도 저 젊은이를 마음대로 다루지는 못했소. 아
니, 거꾸로 저 젊은이가 이제리스 해협의 군주의 버릇을 고쳐줬지."

알리는 잠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서 얼떨떨해졌다. 그러나 조
금 후 알리는 매우 유명한 소문 하나를 떠올렸다.

"아니, 그럼 저 젊은이가 이제리스 해협의 서펜트를 죽였다는 그 일
등 항해사입니까?"

"일등 항해사였지. 지금은 가진 용기의 절반 쯤은 수평선 아래 빠트
리고 다시는 배에 오를 생각을 못하게 된 이골 선장의 후임 선장이 되
었소만."

알리는 감탄한 눈으로 신차이 선장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런 젊은이
라면 구태여 자신을 내세울 필요도 없겠구나. 오히려 조금이라도 서툴
게 말을 꺼내었다간 틀림없이 그의 유명한 모험이 대화의 전면으로 떠
오르게 될 테고, 자신의 모험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야기하게 되면 틀
림없이 자만심에 차있다는 오해를 받게 될 테니까. 그렇다면 저 젊은
이는 현명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군. 알리는 대충 그런 견해를 가다
론 교육대신에게 말했고, 그 댓가로 푸짐한 비웃음을 받게 되었다.

"흐음. 사실과는 조금의 연관성도 없는 추리올시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 젊은이가 저렇게 차가운 얼굴을 하고 앉아있는 까닭은 겸손해보
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 아무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
기 때문일 거요. 특히 저 자 앞에서는."

가다론은 그렇게 말하며 턱을 살짝 움직였다. 알아보기 힘든 동작이
었지만 가다론과 오랜 세월 동안 사귀어온 알리는 그 몸짓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어렵지 않게 짚어낼 수 있었다. 신차이 선장과 조금 떨어
진 거리에서 즐겁게 술잔을 비우며 담소하고 있는 한 명가의 인물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알리는 그가 지목되는 이유는 짐작할 수 없었다.

"로발 라이브스 말씀입니까?"

"그렇소. 이건 선주연합의 사람들을 주빈으로 하는 연회이니 그가 올
줄은 몰랐는데, 정말 희한하군. 이골 선장도 퍽이나 난감할 게요."

"그가 저 신차이 군과 좋지 못한 관계라도 됩니까?"

"좋지 못한 관계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군요. 신차이의 아버지거
든."

"예?"

그 날 저녁, 알리는 조금씩 취해가는 가다론을 잘 구슬러가며 신차이
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운의 젊
은이와 몇 마디 나눠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신차이는 예의바르게
대화에 임해왔고, 그와 몇 마디를 나눠본 알리는 그가 보여주는 품격
과 그의 비극적인 과거사가 서로 잘 연결되지 않는 것을 느끼고는 어
리둥절해버렸다.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사회 초년생
인 신차이를 상대로 알리가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 또한 법도에 맞
지 않기 때문에 - 무릇 명가의 수장이자 하탄의 궁전에 출입하는 자는
모든 배우고자 하는 성실한 젊은이들에게 똑같은 시간을 할애해야 되
는 법. - 알리는 신차이의 수수께기 같은 분위기를 해석할 만한 단서
를 얻지 못한 채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신차이는
그 며칠 후 항해를 떠나버렸고 그 자신은 이렇게 적국에 억류당하게
된 것이다.
알리는 긴 상념에서 깨어나 카알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안다."

"잘된 일이군요."

"그런데 그를 알고 싶어하는 너의 이유는 모르겠다."

"지적 호기심에서, 라고 대답하면 되겠습니까."

네가 알 필요 없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알리는 카알의 말을 이
렇게 해석했다. 신차이 발탄. 그 젊은이에 대한 정보가 바이서스 수뇌
부의 인물에게 소중할 까닭이 뭔가. 포섭? 글쎄. 그렇게까지 낙타 시
장의 소처럼 굴던 젊은이가 포섭할만한 위치에 올랐을 거라고 생각하
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가 아는 정보라고 해봐야 대단한 것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신차이 선장의 과거사가 도대체 자이펀 - 바이서스 전쟁
에서 무슨 영향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카알은 침묵의 시간을 정확하게 재고 있었다. 고민하고 있군. 좋아.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지. 카알은 손을 들어 감방 안쪽을 향해 흔들어
주었다.

"생각해보고, 결정하십시오. 급하게 판단하면 잘못 판단할 가능성이
높지요. 당신에게 시간을 드리고 싶습니다." 언제 다시 오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좋은 대답 기다리겠습니다."

알리는 아무 말 없이 떠나가는 카알의 등을 바라보았다.



알리와의 회담을 마친 카알이 부리나케 그랜드스톰으로 찾아왔을 때
레브네인 호수로 떠났던 특사들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수련사들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방에서 조금 전에 떠났던 일행들이 그대로 돌아와
있는 것을 보고는 카알은 조금 당황해버렸다. 순식간에 다녀올 수 있
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빠르다니.

"빠르군요."

아프나이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마나의 힘은 강력하지요."

"예…… 어떻게 되었습니까. 페어리퀸은 만나뵈었습니까?"

"예. 만나뵙고 우리들의 문제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조언을 구했
지요."

카알은 반가운 표정으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 어떤 대답을 주셨습니까?"

엑셀핸드가 심통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아주 골치아픈 대답을 주었네."

"예? 무슨 말씀인지?"

엑셀핸드는 카알의 말에 대답하기에 앞서 아일페사스를 돌아보았다.

"너 그거 다 외우지?"

"물론이지. 들어봐, 카알.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
름, 두 흐름의 교차점을 찾으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리라."

일행들은 카알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그게 무슨 뜻이냐? 고 물어오
면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당연히 우리도 모른다. 라고 대답해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알은 황당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고 그게
무슨 뜻이냐고도 묻지 않았다. 대신 카알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일행
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엉뚱한 곳에 다녀오신 거 아닙니까?"

"응? 무슨 말인가?"

"그 이야기는…… 저기 헤게모니아의 어느 도시에 전해오는 유명한
수수께끼 아닙니까."

"뭐라고?"

일행들은 당황해버렸다. 카알이 이 문제에 대해 아는 척한다는 상황
은 예기치 못했기 때문이다. 카알은 당황해하는 일행들의 얼굴을 주욱
둘러보고는 미심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그러니까 분명히 헤게모니아에 전해져내려오는 수수께끼일 겁
니다. 그 수수께끼를 푸는 자에겐 상상할 수 없이 막대한 재산이 주어
진다지요. 하지만 문제를 풀겠다고 자원해놓고도 풀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된다는, 뭐 그런 살벌한 조건이 붙어있는 문제일 겁
니다. 그래서 유명하지요."

"목숨을 요구할만한 재산이라. 굉장한가 보군요. 얼마나 많은 재산인
데요?"

"침버 씨…… 이 상황에서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닌 거 같습니다."

"예? 아, 하하. 예. 그렇기는 하지요."

"제레인트는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않는가. 왠만하면 말해주지, 그
래?"

"아인델프 님……!"

카알이 제레인트와 엑셀핸드를 매우 험하게 노려보는 동안 아프나이
델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만요. 그럼 그런 문제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예? 예. 그렇습니다. 오래 전에 들었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문제
는 틀림없군요. 다레니안께서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럼, 다레니안께서는 그 수수께끼를 풀어야 된다고 말씀하신 건가
요. 하지만 그 수수께끼가 왜 중요한 것인지 모르겠군요."

"그 문제에 대해 좀 더 아시는 것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게 아마 어떤 괴퍅한 노인의 유언에 따라 생긴 문제라
고 했던 것 같은데 정확한 내용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거야 모
험가들이나 상회 쪽에 알아보면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헤게모니아로 가서 그 문제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는 걸까요?"

"음. 다레니안께서 정말 그 이상의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이상한데. 카알은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매우 수상하다고 생각했
다. 다레니안이 왜 그런 빈약한 조언만 한 것일까. 도와줄 의도가 있
다면 더 상세하게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와줄 의도가 없다
면 아예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호한 이야기
는 뭐지. 문득 카알은 이루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아무런 말없이 서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알의
시선을 느끼고는 카알을 똑바로 바라보았지만 그 눈빛에는 아무런 의
지도,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 검은 눈을 들여다보고 있던 카알은
거의 무의식 중에 입을 열었다.

"다레니안께서 왜 그러셨을까요, 세레니얼 양?"

"왜 그러시다니오."

"도와주실 의도가 있다면 더 상세하게 말씀하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요."

"글쎄요. 의도와 능력이 항상 일치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 그럴까요."

카알은 이루릴의 추측이 그럴 듯하다고 여겼다. 그 이상은 다레니안
도 모르기 때문이라. 흐음. 하지만 그 추측대로라면, 이 상황은 수도
원 담을 넘듯이 차원의 벽을 뛰어넘는 페어리퀸에게까지 이해하기 힘
든 상황이라는 말이 된다. 페어리퀸도 그저 추측만이 가능한 어려운
문제를 과연 우리가 풀 수 있을까.
그 때 에델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들로 하여금 수도로 돌아오게 하신 테페리의 뜻은 이것입
니까?"

제레인트는 당황해서 에델린을 돌아보았다.

"예? 이것이라니오?"

"테페리께서는 제레인트로 하여금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가라고 명하
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명령은 이 문제를 카알에게 말씀드려 그것이
이미 존재하는 문제라는 것을 확인받기 위함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만."

"아…… 그렇겠군요. 예. 그럴 겁니다."

"예. 테페리의 인도에 의해 우리들은 이제 그 문제가 헤게모니아의
어떤 곳에 전해내려오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논리적인 귀결로 본다면 우리는 그곳으로 출발해야 되지 않을까 여겨
집니다만."

"그렇군요. 음. 다른 의견 가지신 분 있습니까?"

아무도 다른 의견을 말하지는 않았다. 도무지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없이 혼돈된 상황 속에서 다레니안이 말한 문제는 유일한 돌파구였기
때문에 다른 의견 같은 것이 나올 까닭이 없는 것이다. 카알은 조금
고민하고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저는 그 문제가 정확히 헤게모니아의 어디에 전해내려
오는 문제인지를 조사하고 그곳까지의 여행 수단을 준비하겠습니다.
음. 침버 씨와 에델린 양이 계신데다가 세레니얼 양과 엑셀핸드 님도
계시니 여러분들의 국경 통과에는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고 여겨집니
다. 일단 준비가 갖춰질 때까지 쉬고 계시도록 하십시오."

엑셀핸드는 머리에 난 투구자국을 좀 긁적이다가 말했다.

"자네는 계속 여기를 지키고 있을 텐가?"

"예."

"흐음. 자네가 같이 간다면 좋을 텐데. 우리의 저번 모험 땐 자네의
도움이 꽤 컸지."

카알은 희미하게 웃었다. 크림슨 드래곤 크라드메서를 제거한 모험
때 아일페사스를 제외한 나머지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한 동료였다.
엑셀핸드 역시 잠시 그 때의 추억에 잠겼다가 말했다.

"왜 같이 가지 않겠다는 거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중에서 이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을 거 같은데. 내가 보아온 자네 성격대로라
면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부득부득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완전히 예상이 빗나갔군."

"글쎄요. 드라이어드의 노랫소리나 님프의 지저귐이 더 이상 저를 자
극하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카알의 대답에 엑셀핸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때 이루릴이 고요
하게 말했다.

"그건 모험심을 잃은 모험가를 나타내는 오랜 고어로군요."

"예. 확대해석으로 처자식이 생겨버린 젊은이를 나타내기도 하지요."

카알의 농담에 모두들 피식피식 웃었지만 엑셀핸드는 웃지 않았다.

"자네 결혼하나?"

"예? 아니, 천만에요. 그건 농담이었습니다."

"나도 농담한 거야. 자넨 날 뭘로 보는 건가."

"아하, 이런. 죄송합니다. 음…… 어떻게 말씀드려야 될지. 저희 종
족은 짧은 수명 때문에 모든 것에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모험심도
충족시키며 동시에 안락한 가정을 만들기는 어렵듯이. 동쪽으로 가는
배를 타고 미지의 세계로 달려가면서 동시에 가을에 거둬들일 곡식을
재배할 수는 없듯이. 바라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엑셀핸드는 잠깐 고민한 다음 꽤나 재치있는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헤게모니아로 달려가는 대신 여기서
자네가 하려는 것은 뭔가?"

카알은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엑셀핸드가 저렇게까지 재치있는 질문
을 던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고민은 아니었다. 카알의 고민은 그의
뱃속을 이들 앞에 까뒤집어도 되는가 하는 고민이었다. 어쨌든, 아무
리 친구라도 할 수 없는 말이 있는 법이니까.
카알은 거짓말을 해야 될 때 주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태여 양심
의 가책이 적은 방식을 선택하느라 골치아파하지도 않았다.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저를 믿어달라는 말
외엔 없습니다."

이 대답은 대부분의 일행들을 만족시켰다. 그래서 카알은 그 후로 오
랫동안 죄의식에 시달려야 했다.


================================================================
며칠 동안 심하게 앓았습니다. 너무 앓다보니 지금 입 주위가 허옇게
해어진 상태지요. 오늘에서야 간신히 키보드 두드릴 정도의 정신을 되
찾았습니다. 감기 무섭더군요. 아무쪼록 건강 주의하세요. 아아, 위문
편지 보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어, 저. 글을 퍼가는 문제에 대해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비평을 써주
세요. 공평성 문제도 있는 만큼, 그렇지 않은 분께는 허락드리기가 힘
듭니다. (누구는 죽도록 비평쓰고 누구는 그냥 가져가고… 라면 좀 신
경질나는 일이겠지요? 하하.)번 호 : 11526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2-13 00:45
제 목 : [F/W]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14

Future Walker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14.

자이펀 국방부 건물은 하탄의 궁전 바로 뒤에 위치한다. 실제로 하나
의 부지라고 착각할 정도로 바싹 붙어있기 때문에 국방부 건물이 하탄
의 궁전의 부속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탄의 궁전과 국방부가 지나
치게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점은 오랜 세월에 걸쳐 명가들의 지
적을 받아온 사항이었지만 - 군권을 마음대로 다루는 국방부대신이 반
역을 도모했을 경우 하탄은 그의 손아귀에 있게 된다. - 대대로 하탄
들은 자신이 군대의 강력한 힘에 기대어있다고 여기길 좋아했다.
언젠가 하탄은 큰코 다치게 될지도 몰라.
국방부 건물의 고색창연한 복도를 걸어가며 함은 그렇게 되뇌었다.
함은 둥글고 거대한 창문 너머로 하탄의 궁전을 바라보았다. 밤의 여
왕의 망토 아래서도 하탄의 궁전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둥근 모
스크 곳곳에는 진짜 에메럴드와 황금이 박혀 낮에는 똑바로 바라보기
도 힘들 정도의 광채를 뿜어낸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밤이면 하탄의
궁전은 바라보는 자로 하여금 눈을 뜬 채로 꿈속을 거니는 기분을 느
끼게 한다. 저 아름다운 건물이 여기서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다.
많은 부대도 필요없겠지. 어떤 나라의 어떤 쿠데타든지 간에 모든 쿠
데타는 수도방위군에 의해 일어나는 법이야. 그런데 하탄은 겁도 없이
국방부 건물, 그러니까 수도 정화대 사령부가 있는 곳 바로 코 앞에
거주하고 계시지 않는가.
전쟁이 끝나면 국방부 건물의 이전을 상주해봐야 될지도 모르겠군.
국방대신 함이 반역을 일으킬 까닭은 없다. 다만 못된 짓을 상상하며
즐거워하는 아이처럼 함은 반역자가 된 척하며 스릴을 즐겨보는 것일
따름이다. 함은 스스로의 장난에 머쓱해하며 국방부 대신의 방, 즉 자
기 방의 문 앞에 멈춰섰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당연히 문이 열릴 거라 생각하고 앞으로 걸어가려던 함은 하마터면
문에 부딪힐 뻔했다. 당황하며 멈춰선 함은 문이 적의 장수나 되는 것
처럼 험악하게 쏘아보았다. 사람이 다가섰는데 문이 열리지 않다니?
자이펀에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문을 여닫는 노예가 갑작스러운 심
장마비로 쓰러지거나 자살에의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함은 허리에 찼던 검을 천천히 뽑아들고는 문에 귀를 가져갔다.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감각은 그에게 위
험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조심해.' 함은 귀를 가져가며 동시에 기
감을 확장시켰다.
얕은 신음소리.
문 저편에서 마치 흐느끼는 듯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함은 당황했
다. 이게 뭐지? 이렇게 희한한 신음소리는 전장에서도 듣지 못했다.
괴로움에 못이겨 내뱉는 신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신음소리는 참
을 수 없는 쾌락에 젖어……
함의 얼굴이 붉어지며 동시에 창백해졌다. 왈칵! 함은 문을 연다는
익숙하지 않은 동작을 상당히 흥분된 감정 속에서 시도했고 그래서 문
은 떨어져 나갈 듯 요란하게 열렸다. 그리고 함은 자신의 책상을 바라
보았다.
달빛이 쏟아져내리는 책상 앞쪽엔 젊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여인은
책상을 향해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함은 책상 위에 젊은 사내
가 길게 누워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인은 젊은 사내에게, 정확하
게는 젊은 사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리고 젊은 사내
는 두 팔로 여인의 목을 끌어안은 채 뒤집혀진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
며 목구멍이 턱턱 막히는 듯한 애달픈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함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의 생
명이 송두리채 빠져나가는 그 장면에는 상식을 초월하는 요괴적인 아
름다움이 있었다. 그 때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여인이 천천히 상체
를 일으켰다. 사내의 팔은 여인의 목을 놓지 않으려는 듯이 잠깐 따라
올라왔지만 곧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털썩. 나무토막보다 더 생기
없는 모습으로 떨어진 사내의 팔은 책상 아래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고개를 돌린 여인은 함을 바라보며 혀로 입술을 빠르게 핥았다. 그리
고 여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게 된 함은 몽환적인 최면 상태에서 벗
어나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함은 벽에 붙어있는 지도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더러운…… 내 방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시오네는 포만감에 젖어 게으른 미소를 지어보였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일어서서 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스르륵. 시오
네의 발자국 소리에 함은 고개를 돌려 시오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가까이 오지 마라."

"두려운 거야?"

이번엔 함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문득 자신의 손에 검을 쥐고 있다
는 것을 깨달은 함은 재빨리 검을 들어올려 시오네를 겨냥했다. 번쩍
이는 검광을 본 시오네는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녀의 입이 벌어지며
날카로운 송곳니가 빛을 뿜었다. "샤아앗!" 시오네는 매섭게 으르릉거
리며 몸을 낮추며 두 팔을 등 뒤로 돌렸다. 함은 시오네가 몸을 낮춤
에 따라 검을 든 팔을 천천히 낮추며 검끝이 계속 시오네의 목을 겨냥
하도록 했다. 시오네의 눈에서 검푸른 빛이 번득였다.

"네가 내 그림자라도 찌를 수 있을 거 같아?"

시오네의 입가로 짧은 비웃음이 스쳤다. 하지만 함은 무표정한 얼굴
로 대답했다.

"네게 그림자가 있었나?"

"크캬아아악!"

시오네는 두 팔을 맹포하게 펼치며 포효했지만 함은 꿈쩍도 하지 않
았다. 함의 검끝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며 시오네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함은 무뚝뚝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
쉬었다.

"내 주위에서 다시는 이런 행동, 용납 못해."

"카아악! 용납하지 않겠다면 네가 어쩔 테냐!"

"300년간 빌붙어왔다면 인간 앞에 겸손할 줄 아는 것이 좋을 텐데."

"흥! 넌 네가 먹고 마시는 것을 존경하나?"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은 내 삶의 댓가지. 하지만 넌 살아있지 않지."

시오네는 갑자기 똑바로 섰다. 그녀는 비웃는 눈으로 함을 바라보며
말했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워?"

"자랑스럽다."

"그래서, 죽을 수 없는 나를 그렇게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그렇다."

"어리석은 자기애…… 개는 자신이 꼬리를 가졌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지. 그래서 그토록이나 꼬리를 붙잡기 위해 노력하고. 그리고 너는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군. 지독하게 유치한 종족 같으
니."

함의 눈썹이 짧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시오네는 이미 흥분을 잊어가
고 있었다. 함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마음껏 흡혈을 마친 시오네는
감정이 상당히 고조되어 있었다. 그래서 시오네는 싸움을 벌일 생각이
없었고 그 점은 함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녀가 뒤로 물러났을
때 그 동작은 함을 놀라게 만들었는데, 시오네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물러났고 함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책상 옆의 쿠션에
기대어 앉아 바닥에 두 다리를 곧게 펴고 있었다. 함은 검을 내려 검
집에 꽂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녀를 대적할 수 있을까.
시오네는 쿠션에 기대어 누운 채 왼팔을 들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것처럼 들어올린 손이었지만 시오네의 눈은 달이
아니라 그녀의 손가락 끝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함
은 시오네가 자신의 왼손 두번째손가락의 손톱을 달빛에 이리저리 비
춰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가롭기 짝이 없는 동작이었지만 그
녀의 앞쪽 2큐빗도 되지 않는 곳에는 온몸의 피를 빨린 채 죽어넘어진
시체가 불품없이 널브러져 있어 함은 그 광경에서 한가로움을 느낄 수
는 없었다.

"뭐하는 거지?"

시오네는 별 대답없이 즐거운 표정으로 손톱에 비치는 반사광을 바라
보고 있었다. 마치 보석이나 꽃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처럼 자기 손톱
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시오네의 모습에는 특이한 순수성이 있었다.
함은 말없이 다가선 다음 손수 노예의 시체를 들어올렸다. 이 녀석이
내 방을 관리하던 녀석인가. 살아있을 적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
굴을 죽고나서 이렇게 본다는 것, 그리고 그 만질 수 없이 움직이던
몸을 만진다는 것은 함에게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시체는 묵직했고,
차가웠으며, 실감이 넘쳤다. 죽고나서야 이렇게 실감 넘치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인가.
함은 별 말 없이 시체를 들고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자이펀식 창문
은 굉장히 높고 넓기 때문에 함은 별 무리없이 시체를 바깥으로 집어
던질 수 있었다. 함은 잠시 고민하다가 시오네를 돌아보았다.

"본 자가 있나?"

"없으니 걱정마. 으음…… 졸린데."

"졸립다고? 밤에 활동하는 네가?"

"아니. 피곤해서 그런 것이 아니야. 따스한 피가 혈관을 돌면서 차가
워진 몸을 덥히는 감각은…… 넌 봄날의 햇볕 아래에 누워본 적이 있
겠지? 그 비슷한 거야. 다른 사람의 몸을 돌던 피가 내 몸 속으로 들
어와서 내 피와 뒤섞여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그만."

함은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달래기 위해 책상 옆에 놓은 조그만 티
테이블 앞에 앉았다. 티 테이블에는 몇 개의 술병과 술잔이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아마도 죽은 노예가 정리해둔 것이리라. 바닥에 정좌한
함은 술잔을 채워 빠르게 들이키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이 비운 술잔을 바라보며 함은 나직하게 말했다.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되었지?"

"부탁? 뭐더라…… 킬킬킬!"

함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되어 고개를 들어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쿠션 속에 푹 파묻힌 채 시오네는 정말 즐거운 듯이 미소짓고 있었다.

"아, 내 모습이 이상하지? 취한 것 비슷한 거야. 흐음. 조금 전의 그
노예 녀석은 정말 기운이 넘치더군. 들어봐, 들어봐. 음음. 그 피가
지금 내 머릿속까지 올라왔나봐. 그 녀석의 피가 너무 강렬해서 그런
지 머릿속이 멍해지는데? 깔깔깔!"

시오네가 크게 웃자 그녀의 몸이 쿠션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치맛자락이 말려올라가 시오네의 다리가 달빛 아래 하얗게 드러났지만
함은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했다. 저건 육식동물이고 괴물이다. 함
은 고개를 돌려 책상 위의 촛대를 끌어당겼다. 시오네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불? 켜지마."

"난 빛 속에서 생활하는 인간이야."

"웃기고 있네. 웃긴다고. 하하하! 너는 어둠 속에서 만들어졌어. 네
어머니의 그 어둡고 축축한 뱃속에서. 그러다가 느닷없이 빛 속으로
쫓겨났지. 그래서 평생 동안 뭔가 잃어버린 듯한 느낌에 갈팡질팡하게
되는 거야. 뭘 잃어버렸는지 몰라 이리저리 찾아헤메다가 얼떨결에 철
학을 만들고 마법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고 나라를 세우고 전설을 만들
겠지만, 끝까지 네가 뭘 잃어버렸는지는 알지 못할 거야. 그러다가 죽
기 직전에야 깨닫지. 네가 잃어버린 것, 네가 쫓겨났던 그 어둠의 세
계. 그래서 넌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거란다. 깔깔깔!"

"심심한 모양인가 본데, 그렇더라도 오래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 없으
니 빨리 대답해. 부탁한 것은 어떻게 되었지?"

"음…… 아. 그 신차이? 어제 출발했어."

함은 당황했다.

"어제? 그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데."

"나도 몰랐어. 어쨌든 닐림의 아이 중에 하나 붙여보냈고 육전대에도
몇 명 보내달라고 했지. 말 잘 듣던데."

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닐림의 날개의 이름을 빌린 것은 그런 효과를
노린 것이다. 국방대신의 명령으로 그 친구를 동북항로로 파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많은 명가들의 원한을 산 사나이를 국방대신이 사사
로이 보호한다는 의심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니까. 하지만 닐림의 날
개의 이름이라면 어떤 명가도 함부로 불평을 꺼내지는 못할 것이다.
이 상황은 어떻게 보면 희극적인 면도 있다. 신차이 선장의 분노도 닐
림의 날개 때문이고, 그의 도피도 닐림의 날개 덕분이니까.

"육전대원들에게는 명령을 잘 전달했겠지?"

"응."

"그럼 동북항로의 일은 그 친구가 잘 처리해주기를 기대해야겠군. 그
친구가 그에게 따라다니는 이야기만큼이나 대단한 사나이라면 잘 조사
해주겠지."

"확신이 없어 보이는군?"

"사실 그 친구에게 많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 신차이라는 친구는
감정이 너무 격해.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사촌동생의 원한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을 보면 성격이 불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대충 짐작
할 수 있지. 바다 위에서는 성격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일이지."

"그럼 동북항로의 일은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거야?"

아무래도 말이 길어지겠군. 함은 이번엔 불쾌감을 억누르기 위해 술
이 필요하다가 느꼈다. 천천히 술잔을 채워든 함은 술잔을 든 팔을 세
운 무릎 위에 얹고 다른 손으로는 바닥을 짚은 채 편한 자세를 취했
다.
청백의 달빛 이외에 아무런 조명도 없는 방 안에서 비스듬하게 앉아
서 마주 보고 있는 국방대신과 뱀파이어 사이에는 묘한 평온함이 감돌
았다. 인간은 술에 취하고 뱀파이어는 피에 취했기에 주위를 감도는
기류는 부드러웠다. 술 한 모금을 머금어 입을 따스하게 한 함은 창밖
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쟁을 끝내면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지. 우스운 일인데, 군대가
개척한 길은 대상들에게 좋은 교역로가 될 것 같은 전망이야. 푸른산
맥 일대에 대해서는 이제 유래없이 정확한 지도가 만들어졌으니."

시오네는 빠르게 상체를 세웠다. 타오르는 그녀의 눈빛이 함을 겨냥
했다.

"무슨 말이지? 전쟁을 끝내다니?"

"끝낼 때가 되지 않았나. 아니, 좀 넘었지."

"어떻게 끝낸다는 말이야, 어떻게!"

함은 술잔을 다시 1/3 쯤 비웠고 그 시간은 시오네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너도 알겠지만, 바이서스군의 든든한 지지세력이었던 캇셀프라임과
지골레이드는 사라졌어. 우리들에게는 퍽 우울한 일이지."

"뭐야?"

"캇셀프라임이나 지골레이드는 우리들을 위협하는 힘이었지만 동시에
바이서스군을 나태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했지. 두 드래곤이 사라진 지
금 바이서스군의 입장은 흔히 말하는 배수진이야. 게다가 너희 닐림의
날개에서 조장한 붉은 땅 작전도 한 몫을 단단히 했지. 바이서스 군은
이제 진짜 전쟁을 하고 싶은 결심이 단단히 섰을걸. 쥐도 도망갈 곳을
남겨놓고 모는 법이라고 했지. 하물며 바이서스는 쥐가 아니지. 타성
으로 싸워왔기에 실력 발휘를 못하던 사자에 가깝지."

함은 별 감정도 없이 담담하게 적국을 칭송했다. 시오네는 함의 감정
을 읽을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절벽에 몰린 사자에게 돌을 던진 자가 받아야 할 댓가는 크겠지."

"지금 자이펀에는 승기가 없다는 말을 하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동북 항로의 문제 따위는 큰 문제가 아니야."

"너, 일스를 칠 계획 아니었나? 육전대원들에게 내린 명령은 그럼 뭐
지? 왜 일스로의 침투 가능성을 점쳐보라는 그 따위 명령을 내린 거
야?"

"다행이군……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시오네는 입을 다물었다. 함은 즐거운 듯이 미소지었다.

"고마운 일이군. 모두들 내가 일스를 쳐서 바이서스를 우회침입하려
한다고 믿어주면 좋겠는데."

"그럼 그건 기만이야?"

"어느 정도는. 그 작전은 누구든지 추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별로 재
미가 없어. 하지만 사태가 여의치 않다면 시도해볼 생각은 가지고 있
지."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은?"

함은 대답을 잠시 보류한 채 시오네의 안색을 주의깊게 살폈다. 시오
네의 표정은 무시무시했다. 그녀는 함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짐작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고, 그래서 함은 거짓말을 하거나 말을 돌릴 필요는
없겠다고 판단했다.

"휴전."

시오네는 아무 말 없이 매섭게 함을 쏘아보았다. 함은 손에 쥔 술잔
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스 병탄을 통한 우회 침입의 가능성으로 바이서스를 긴장시키고,
휴전을 제안할 생각이다. 그래서 네게 한 가지 부탁이 있지."

시오네는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부탁이라고?"

함은 갑자기 빙긋 웃으며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넌 물론 그런 경험은 없겠지."

"어떤 경험?"

"중매를 서 본 적이 있나?"

시오네는 잠시 말도 못꺼낼 정도로 당황해서 함을 바라보았다. 함은
낄낄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아, 농담이야, 농담. 나는 데밀레노스 공주를 시집보냈으면 좋겠
다고 생각하고 있어."

"자, 잠깐. 데밀레노스 공주? 닐시언 국왕의 여동생 말이야?"

"그래. 그녀가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함은 장난기도 없는 얼굴로 엄숙하게 말했다. 욕설을 퍼부어줄까 생
각하던 시오네는 문득 함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공주의 결혼이라면 상
당히 중요한 국가적 행사이다. '비록 귀국과 우리나라가 전쟁 중이긴
하지만, 귀국의 국가적 경사를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잠정적인
휴전을 제안하고 싶소.'

"무슨 말인지는 알겠군. 그런데 내게 중매를 부탁한다면 난 너를 멍
청이로 볼 수밖에 없는데."

"다행이군.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비록 적국의 공주님이긴 하
지만 너 따위를 매파로 보내는 실례되는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다."

시오네의 입술이 말려올라가며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함은 그
것을 못본 체하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럼 뭘 부탁하겠다는 거지?'

술잔을 내린 함은 다시 뜬금없는 말을 했다.

"결혼은 갑작스럽게 하기 힘들어도 장례식은 갑작스럽게 할 수도 있
지."

"뭐?"

"데밀레노스 공주를 살해하고 싶다는 말이야."


================================================================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환타지를 많이 읽었지만 남자 엘프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던가요. 음.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지
군주의 레골라스나 글로핀델, 엘론드, 길 갈라드… 윽. 그 많은 이름
을 다 주워삼기려 들다니. 어쨌든 전부 남자 엘프였지요. 다 주워삼기
면 중대병력도 넘게 나오겠는데. 아, 하이엘프의 숲에서도 에스타스인
가 하는 남자 엘프가 나오죠? 검, 마법 이야기의 릴케도 역시 남자 엘
프였고… 생각해보니 엄청나게 많은 거 같군요.

남성 엘프 여러분! 궐기합시다! 여러분들도 이 환상의 세계에서 씩씩
하게 검을 휘두르고 스펠을 캐스트하며 목숨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인
간 히어로의 상대역이라는 이유만으로 위치가 격상하는 여성 엘프들에
비해 여러분들은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투쟁! 투쟁! 우리도
엘프다, 남녀차별 왠 말이냐! 고용안정… 퍼버벅!

…아직 덜 나았나 봅니다. 용서하시길. 으윽.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1581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2-14 03:58
제 목 : [F/W]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15

Future Walker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15.

시오네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못한 채 함을 바라보았다. 함이 한 말
들은 그 온화한 어조와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충격적인 내용들 뿐이
었다. 바이서스를 칭송하고 휴전 따위의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꺼냈
었을 때부터 시오네는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데밀레노스 공주
를 암살한다는 말이 나오자 시오네는 입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물론
뱀파이어에게 윤리적인 이유에서의 경악이 있을 까닭은 없다. 시오네
는 자이펀인인 함이 여자를 암살하겠다는 말을 태연하게 한 것에 놀란
것이다. 함은 그런 시오네의 얼굴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지? 너는 암살자고 뱀파이어야. 살해가 무슨
뜻인지 모르나?"

시오네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그
녀는 분노를 표현할 겨를도 없이 상당히 얼빠진 어조로 질문하고 말았
다.

"그게 가능할 거 같아? 데밀레노스 공주가 암살되면 바보라도 자이펀
을 의심할 텐데?"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휴전 제의를 거부한다면 놈들은 멍청이지."

"아무리 휴전을 원한다고 해도 국민들의 눈을 무시할 수는 없을 텐
데."

"그건 네 수완의 문제야. 살해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나? 자
연사로 말이다. 너는 마법사며 뱀파이어다."

시오네는 잠시 함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구한다면 방법이야 찾을 수 있지."

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쩌다가 적국 공주님의 결혼까지 고려하는 한심한 신세가 되
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외무부의 몇몇 똑똑한 친구들과 손잡
고 데밀레노스 공주의 결혼을 추진하고 있어. 헤게모니아나 일스의 적
당한 공작, 후작 등에 대해 알아보고 있지. 하지만 나는 급할 때 쓸
수 있는 수단도 있었으면 해. 그러니 너는 데밀레노스를 자연사처럼
살해할 방법을 알아봐줬으면 한다. 이해했나?"

시오네는 시니컬하게 웃었다.

"훗. 그녀의 입장으로 본다면 결혼식 아니면 장례식이군. 어느 쪽으
로든 처녀는 죽는 건가?"

"죽음 아니면 남자와의 결혼이야. 어쨌든 그녀는 대륙을 구하는 세기
의 신부가 되는 거지."

함은 무뚝뚝한 말투로 시오네의 농담을 맞받았다. 시오네는 그런 함
을 바라보며 다시 키들거렸다.
멍청한 놈. 네 말은 맥락이 닿질 않아. 조금 전 넌 바이서스가 진짜
전쟁을 치를 각오가 되어있다고 말했어. 그런 상황에서 왕족 암살이
일어나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겠지. 너와는 다른 목적이지만,

"충심으로 노력해드리지."

"지금 당장 노력해주겠나?"

"뭐?"

"용건은 끝났으니 돌아가달라는 말이야."

"아아, 그래. 알았어. 무섭단 말이지. 하하하!"

시오네는 웃으며 일어났다. 함을 한 번 쳐다본 시오네는 그대로 몸을
돌려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함은 바닥에 앉은 채 시오네가 박쥐로 변
해 밤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목이 마르군.
전선에 있는 동안 함은 완전한 금주 상태였다. 갑자기 마신 술은 그
의 목을 타게 만들었고 함은 천천히 세번째로 잔을 채웠다. 술잔을 채
운 함은 그것을 다리 옆에 내려놓고는 가늘게 뜬 눈으로 시오네가 사
라져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뱀파이어가 바이서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멸찬 증오는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픈 생각도 없다. 하지만 시오네는 바이서스가 파
멸하는 길이라면 자이펀이 공멸하든 말든 상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므
로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을 더욱 험악하게 만들 수도 있는 공주 암살이
라면 발벗고 나설 것이다.
내가 쓰는 도구들은 하나같이 비뚤어졌고 증오에 가득차 있군.
그 신차이 선장도 그렇고, 저 시오네도 그렇다. 함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그 스스로 자신을 위해 활동하게 만드는 그
의 능력을 뭐라고 불러야 될지 잠시 고민해보았다.
신차이는 동북 항로를 담당하고, 시오네는 바이서스를 담당한다. 국
방대신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외부적인 문제들은 모두 타인에게 맡
겨두고서, 이제 나는……
함은 바닥에 놓아두었던 술잔을 들어올렸다.
신차이 선장의 행동은 그 스스로의 분노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
이펀 사회가 전쟁 동안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나타내는 사회 현상이
기도 하다. 하탄의 말씀인 법률, 라센법이 희롱당하는 것은 명가들이
이 전쟁 동안 그들의 입지를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조사해보자. 아마도 수많은 범법이 드러날 것이다. 당신들이 전선에서
나를 불러들인 것은 당신들의 발밑을 파낸 결과가 될 것이다.
나는 자이펀을 상대하는 것이다.



쳉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손에 든 미의 셔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아무
래도 셔츠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소유주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파가 나란히 앉은 채 그녀의 발치에 웅크리
고 앉은 아달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침울하고
고요한 표정으로써 섣불리 말도 못 걸 분이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네리아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아…… 안돼. 그럴 수는 없어.'

그녀는 알고 있었다.
쳉은 앞으로 4년 후 페스트에 걸려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의 파
는 쳉의 죽음, 미의 죽음, 그리고 조카의 죽음을 차례로 본 다음 목을
매달고 자살할 것이다. 이름만 전해들었을 뿐 보지 못했을 때도 그것
은 사무치도록 무서웠다. 하지만 직접 쳉과 파를 보게 되자 네리아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파의 모습을 보게 되자 네리아는 그녀가
밧줄에 목을 건 채 공중에 떠서 대롱거리는 모습까지도 떠올릴 수 있
게 되었다. 미가 미래를 볼 수 있게 되면서부터 느껴온 것은 이런 것
이었어? 어떻게 죽어갈지 아는 사람을 눈 앞에서 바라봐야 되는 기분,
그러면서 말하지 않는 이 기분이?
왈칵 고개를 돌린 네리아는 그란과 눈이 마주쳤다. 그란은 네리아의
눈에 어린 눈물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리아는 짐짓 목
소리를 바꿔 명랑하게 말했다.

"아! 샌슨은 이럴 때 이런 식으로 말한다던데."

"응?"

네리아는 턱을 쑥 내밀고 발뒤꿈치를 들며 어깨를 뒤로 젖혀보였다.
샌슨의 모습을 알고 있는 운차이와 그란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네리아는 목소리마저 굵직하게 바꿔 말했다.

"어, 그러니까, 자, 내가 질문하고 넌 대답한다. 대답이 시원찮으면
그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자른다. 따라서 헛소리는 열 번까지 할 수
있을 거야. 자를게 더 없어지면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걸 자르겠
다."

"멋진 친구로군! 만나봤으면 좋겠소."

파하스는 이렇게 말하며 즐거워했지만 그란은 뜨악한 표정으로 네리
아를 바라보았다.

"그 담화를 저 유년기에게 전달할 것을 요구하는가?"

"아니, 뭐…… 참고하라고. 안될깡?"

"저 유년기에게 혼절 발생이 추측된다."

"유년기가 아니라 꼬마야, 꼬마. 저 꼬마 기절할 거라는 말 아냐?"

"응? 아, 꼬마. 기절."

그란이 말하는 그 '유년기'는 지금 방구석에 앉아서 사방 모든 곳으
로부터의 공격을 막겠다는 듯이 웅크리고 있었다. 결국 사방 모든 곳
에서 공격이 날아올 거라고 생각하며 불안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일행
은 헤게모니아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소년은 헤게모니아어에
그다지 익숙하지 못했기에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점은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돌맨 할슈타일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그렇게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채 돌맨은 무의식 중에 입가에 난 상처
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일행에게 붙잡히는 과정에서 거칠게 반항하다
가 입은 상처였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 동작은 마치 나는 상처를 입
었어, 건드리지 마. 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파하스는 뒷통수를
긁적이더니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이봐, 그럼 저 할슈타일인가 하는 꼬마가 너희들이 쫓던 그 반역자
일행 중 하나란 말이야?"

"그래."

"원참. 바이서스 꼬마들은 조숙하기도 하군. 저 나이에 반역까지? 혹
시 실연 경험은 없는지 궁금하군."

"반역의 수괴의 양자야."

"뭐라고?"

"달리 갈 곳이 없어 따라다닌 것일 거라는 말이다."

"아아, 그래? 그럼 살살 달래면 말을 들을 거 같은데. 자네들의 얼굴
로는 그게 어렵겠군. 내가 해볼까?"

운차이는 꼭 포로 앞에서 웃기는 재롱을 떨어야 되나 등으로 생각했
지만 귀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고 싶다면."

운차이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파하스는 예의 그 화려한 동작으로 돌
맨의 시선을 붙잡으며 걸어갔다. 돌맨은 다가서는 파하스를 보며 한껏
긴장하여 몸을 더욱 심하게 웅크렸지만 파하스는 싱긋 웃으며 유창한
바이서스어로 말했다.

"이봐, 젊은 친구. 어떤 사람들이 나누느냐에 따라 잠깐의 시간도 수
십년의 우정에 값할 수 있지. 나와 이야기 좀 할까?"

돌맨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파하스를 바라보았고 그란과 네리아는 휘
둥그레진 눈으로 파하스를 바라보았지만 운차이는 희망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저런 식으로 돌맨을 웃긴다면 녀석의 마음이 풀릴지도 모르겠
군. 운차이가 이런 괘씸한 생각을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파
하스는 운차이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보이고는 다시 돌맨에게 말했
다.

"나는 파하스라고 하네. 젊은 친구의 이름은 뭐지?"

"웃기지마, 알면서 왜 물어보는 거야?"

운차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웃겼군.' 이런 모욕적인 언사에
충격을 받은 파하스는 잠시 아무 말도 못하며 돌맨을 바라보았다. 돌
맨은 사나운 표정으로 파하스를 쏘아보며 다음에 뭐가 날아올 것인지
추측해보았다. 주먹일까? 발길질일까? 그러나 파하스는 대시인이었다.

"아아, 이름을 알고 싶어서 물은 것이 아니었네. 인사를 나누자는 거
였지. 할슈타일 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말했다면 상대는 감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파하스는 자신이 성질을 참고 있다는 것을 과격하게 드러내며
말했다.(어깨는 부르르, 이를 악물며, 왼손은 희게 변할 정도로 꽉 쥐
고, 오른손은 칼자루로 갈듯이 움찔움찔.) 그래서 돌맨은 더욱 움츠러
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파하스는 분노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씩 웃던 파
하스는 털썩 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주저앉았다. 돌맨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게 된 파하스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자, 나는 앉았다. 팔짱도 꼈고. 도망치지도 않고 공격하지도 않는다
는 뜻이지. 네 입 속에 든 검과 내 입 속의 검으로만 싸우자. 어때?"

"뭐라고 떠드는 거야?"

돌맨은 짐짓 사납게 말하려 했지만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인지라 위
압감이 전혀 없었다. 파하스는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한번에 하나씩 해결하지. 그리고 하나가 해결된 다음에 그 다음 것
으로 넘어가고. 그러나 항상 시간은 아끼도록 하지. 대화의 규칙은 이
정도로만 해두자. 그럼 시작하겠어."

돌맨은 입술을 깨문 채 파하스를 쏘아보았다. 파하스는 빠르고 박력
있게 질문했다.

"왜 미 양을 납치했지?"

이 질문은 돌맨과 파하스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주의를 단숨에 집중
시켰다. 대시인다운 흡인력이라고 할까. 바이서스어를 모르는 파는 그
러지 않았지만 쳉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돌맨을 바라보았다. 돌맨은
턱을 가슴에 파묻으며 파하스를 노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파하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자네들이 쫓기고 있다고 들었네. 쫓기는 자들이 납치 따위의
고차원적인 활동을 시도한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걸세. 그렇잖은
가? 인질이 필요했다? 이건 아냐. 왜냐하면 자네들의 추적자는 자네들
의 소재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구태여 소재를 드러내며 인질
을 만든다는 것은 광인의 소행이지. 즉 이 납치의 본질은 자네들에게
미 양이 필요하다는 거야. 단순하지."

쳉이 갑작스럽게 끼어들었다.

"잠깐, 파하스. 바이서스의 반역자들에게 왜 헤게모니아의 무녀인 미
가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고요히 앉아있던 쳉이 너무나 느닷없이 말했기 때문에 네리아는 깜짝
놀랐다. 파하스는 쳉을 한 번 돌아보고는 다시 돌맨을 바라보았다.

"나는 반역을 해본 적이 없어. 그래서 반역자들에게 뭐가 필요한지
모르겠군. 여기 어디 반역자 있나?"

"있다."

이번엔 파하스가 놀랄 차례였다. 아무 생각없이 던진 농담에 긍정의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파하스는 기막힌 표정으로 그란을 바라보
았다. 그란은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파하스를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고는 운차이를 돌아보았다.

"네가 설명해. 어휘가 모자라다."

운차이는 흔쾌히 그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란은 반역자였어."

그리고 운차이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기다리던 그란은 곧 운차이를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정도는 나도 가능하다."

"그럼 직접 하지 그랬나."

그란은 신음을 토한 다음 방안의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모자
란 헤게모니아어로 꿋꿋하게 자기 변호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란이
'나는 할슈타일 후작에게 가족을 희생당하고 귀족인 그를 벌주기 위해
반역자와 손을 잡았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유피넬의 저울대는 공정하
여 후작 자신이 반역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죄인의 몸이나마 그를
추적하는 것으로 내 죄과를 씻는 것과 동시에 묵은 원한을 갚으려 하
고 있다.' 는 내용의, 상당히 복잡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그야말로 상
당히 복잡하게 말하고나자 네리아는 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느
껴야 했다.
이 불행한 이야기를 들으며 배를 붙잡고 웃는 어마어마한 실례를 범
하지 않기 위해 파하스는 초죽음에 가까운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 그럼 그란. 도망 중인 반역자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말해줄 수
있겠나?"

"빠른 말, 막대한 돈, 안전한 장소."

파하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쳉을 돌아보았다.

"그 중에서 미 양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뭐지?"

"하나도 없습니다만."

"아냐, 있어!"

네리아는 고함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돌맨에게 다가섰다. 돌맨이 흠
칫하는 사이에 네리아는 벼락처럼 말했다.

"그거지? 신스라이프의 문제! 요 꼬마야, 내 말이 맞지?"

사람들은 네리아의 말에 돌맨의 표정이 확 변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네리아는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지? 미는 과거 아무 때나 볼 수 있어. 그렇다면, 신스라이프가
살아있던 당시도 볼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그 문제의 답도 볼 수 있
겠지. 그렇지? 그걸 노린 거지? 그럼 그 재산을 가질 수 있어. 막대한
돈!"

파하스는 자기 무릎을 철썩 소리가 나도록 내려쳤다. 그만큼 격렬하
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네리아의 추리에 감탄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하지만 돌맨만은 얼굴을 찡그린 채 네리아를 바라볼 뿐 아
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하스는 네리아를 향해 박수를 치며 연극조로 말했다.

"너무하오, 그랑엘베르여! 당신은 수많은 처녀들에게 나눠줬어야할
덕목을 저 레이디에게 모두 소모했음이 분명하오! 놀랍습니다. 네리아
양. 기막힌 추리입니다!"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네리아를 향해 운차이 역시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밤낮없이 그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추리지."

"운차이, 너!"

파하스는 이제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네리아와 운차이의 소란을 무
시하며 돌맨을 향해 말했다.

"자, 할슈타일 군. 자네는 말하지 않았지만 천번째 질문은 해결되었
네. 부정할 텐가?"

"멍청이, 마음대로 생각해."

"아, 좋아.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 자네는 버림받은 건가?"


================================================================
늦어서 죄송합니다. 힘들어서 올리는 거 포기하려다가 챕터 끝내어놓
고 놀자고 마음을 바꿔먹어 이제서야 올립니다. (아아. 뼈마디가 비명
을 지른다.)
번 호 : 11582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8-12-14 03:59
제 목 : [F/W]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16

Future Walker


4.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16.

파하스는 두번째 질문에서도 대시인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단숨에 돌맨의 의식을 파고든 파하스의 질문은 돌
맨을 고함지르게 만들었다.

"아냐!"

"좋아, 역시 뭔가 보장받은 것이 있었군. 그렇지 않다면 자네 같은
소년에게 그런 힘든 일을 시킬 수는 없었겠지. 뭐라고 그러던가? 구출
해주겠다고? 그건 아니겠지. 구출해줄 바에야 처음부터 다른 녀석에게
그 일을 시키면 되니까. 술 한 병이면 충분해. 거리의 적당한 주정뱅
이 하나에게 셔츠를 들려준 다음 죽을 힘을 다해 튀게 만들면 되지.
그렇다면? 아아. 미 양이 인질인가. 인질 교환? 그렇다면 그 후작 나
으리는 예절바른 친구가 되는군. 미 양을 잠시 빌려쓰는 대신 너를 담
보로 맡긴다는 말이 되나. 미 양의 신변에 대해서는 걱정 마십시오.
여기 그녀의 안전보장을 위한 담보물을 보내드립니다. 이런 내용의 서
한 없어?"

돌맨은 불공평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말한 것은 짧은 단어 하
나 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파하스는 수십 단어로서 대답해왔으니까.
네리아는 머리를 과장되게 휘두르며 불평했다.

"파하스, 너무 빨라요. 천천히 가요."

파하스는 네리아에게 사과하느라 다시 상당한 단어들을 소모했다. 그
시간 동안 나머지 일행들은 파하스의 말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이해했
다. 그란은 빙긋 웃었다.

"당신 높이 영리하군."

"그럴 때는 보통 매우라는 말을 쓰네. 그란."

"아, 매우 영리하군."

파하스는 다시 돌맨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너로 하여금 그런 위험한 일을 할 수 있게 한 것은 붙잡혀봐야
인질 교환으로 다시 풀려날 수 있다는 믿음이겠군. 알았어. 소중한 인
질이니 잘 모셔드리지."

파하스의 말이 끝나자 운차이는 몸을 일으켰다.

"턴빌의 시청에 다녀오겠다. 후작이 언제 어디서 그 문제에 도전하는
지 알아보겠어. 그건 턴빌 시청이 관리하고 있던 재산이니 비밀로 할
수는 없겠지."

운차이가 일어나자 쳉 역시 몸을 일으켰다.

"같이 가고 싶습니다."

"좋으실대로."

그러자 파와 파하스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네리아 역시 일어섰다. 운
차이는 눈살을 찌푸린 채 주위를 주욱 둘러보더니 그란을 바라보았다.
그란은 운차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녀와. 나를 감시의 책무에 있게 하지."

혼자서 지키고 있겠다라. 돌맨 '할슈타일'과 그란 하슬러 둘만 이 방
에 남아있는다는 말이지. 운차이는 그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할슈타일이라는 이름을 증오한다고 하더라도 설마 양자에게 무
슨 짓을 하지는 않겠지.

"좋아, 다녀오겠다. 애한테 맞지않도록 조심해."

그란은 코방귀를 뀌었다.
사람들이 방을 나서자 그란은 묵묵히 의자를 들어올려 방문 가까이에
놓고는 그 위에 앉았다. 돌맨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란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그란은 돌맨을 흘깃 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바이서스어로
말했다.

"침대에 앉아도 좋고 의자에 앉아도 좋다."

"뭐라고?"

"그렇게 불쌍하게 앉아있는 것이 즐겁지는 않을 텐데. 편하게 있어도
좋다는 말이야."

돌맨은 그란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선 돌맨은, 그러나 침대나 의자로 향하는 대신 똑바로 선 채 의자
에 앉은 그란을 바라보았다.

"당신, 경계를 안하는군? 나를 묶어두거나 해야 되지 않아?"

"묶여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냐?"

"내가 당신을 해치우고 달아나면 어쩔 테야? 당신, 의자를 옮기면서
당신 검을 챙기지는 않았군."

돌맨의 말대로 그란의 검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고 그 위치는 돌맨
과 그란의 중간 쯤 되는 곳이었다. 그란은 싱긋 웃었다.

"좋을대로 해봐."

"……별명이 핫소드지?"

"그렇게 불리기도 했지."

"그렇더라도 칼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 그렇잖아?"

그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맨이 정말 검을 움켜쥐고 그를 공격하
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생각이 있다면 저렇게 주절주절 말했을 리가
없으니까. 내가 좀 도와줘볼까.
그란은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섰다. 돌맨은 움찔하면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동시에 앞으로 움직이려 했다. 그래서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모
습이 되어버렸다. 그런 그를 본체만체하며 그란은 아무 말 없이 테이
블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돌맨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으아아!"

테이블을 덮칠듯이 와락 달려든 돌맨은 그란의 검을 나꿔챘다. 그란
은 조용히 멈춰섰고 돌맨은 떨리는 손으로 후다닥 검을 뽑아들었다.
잠시 동안 돌맨이 내뿜는 거친 숨소리만이 방안의 고요를 어지럽혔다.

"자, 이제 검을 쥐었군. 어쩔 거지?"

"비, 비켜! 문에서 비켜. 저쪽 벽으로 가서 붙어서! 그럼 해치지 않
겠어!"

"그렇게 못하겠다면?"

"찌를 거야!"

"그리곤?"

"뭐? 찌, 찌르면 죽는 거지 그리고라니?"

"날 찌르고나면 그 다음엔 어쩔 거지. 후작의 위치를 아나?"

돌맨은 잠시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란을 바라보았다. 그란은 평온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돌맨은 그의 눈빛 속에 동정심 같
은 것이 담겨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하스는 네게 그것을 묻지 않았지. 기억나지? 파하스 역시 짐작했
겠지. 그리고 나 역시 짐작해. 틀림없이 후작은 네게 자신의 소재를
가르쳐주지 않았을 테지. 자, 그럼 나를 죽이고나서 어떻게 후작을 찾
아갈 거지?"

돌맨은 덜덜 떨면서 그란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 그대로다. 그란을
죽이고 여기서 나가봐야 돌맨에게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런데 왜
무턱대고 검을 움켜쥐었지?

"넌 압박감 때문에 필요성과 가능성을 헷갈려버린 거다. 먼저 검을
쥐면 나를 죽일 가능성은 있지. 하지만 나를 죽일 필요성은 없어. 멍
청이처럼 굴지 말고 검을 내려놔라. 후작이 인질 교환을 요청할 때까
지 그냥 기다리면 되는 거 아냐."

그렇지 않다면, 그래. 너 역시 후작이 너를 구해줄 거라고는 믿지 못
하는 것이겠지? 나도 그렇게 짐작해. 그란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렇
더라도 너는 그 거짓말을 믿을 도리밖에 없지. 불쌍한 녀석. 하지만
넌 그 거짓말을 믿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고마워해야 돼. 네겐, 그리
고 내게도 마찬가지지만,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하니까. 그래서 가능성
이 거의 없는 일도 기대해볼 수 있지. 우리는 미보다는 행복한 거지.
돌맨은 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침대로 걸어가서는 두 손에 얼굴
을 파묻고는 한참 동안 어깨를 떨었다. 그란은 그를 내버려둔 채 상념
에 잠겨들었다. 불안이 없겠지만, 동시에 희망도 없는 미에 대해서.
미래를 볼 수 없게 된 것은 그녀의 행운이 아니었을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없기에 행복한 것이 아닐까?



"글레이브가 좀 짧아. 흐으응!"

변한 모습 때문에 크게 의기소침해 있던 - 게다가 자신의 동의 하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뭐라고 화를 낼 수도 없었던 - 루손이 입을 연
것은 변신이 있고 사흘 뒤였다. 그동안 그럭저럭 변신한 오크라기보다
는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자신의 새 몸에 익숙해진 루손은
레이저를 향해 글레이브를 들어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콧소리는 내지 마. 넌 그저 몸에 익은 기억 때문에 그러는 거지 진
짜 콧소리가 나오는 것은 아닐 텐데."

루손은 잠시 입술을 깨문 채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도톰한 입술이 더
욱 도드라졌고 커다란 눈은 빠르게 깜빡였다. 그런대로 예쁘장한 모습
이었고, 레이저는 루손이 오크식으로 미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잠시 해보았다.

"후우. 글레이브가 짧다. 쓰기 불편해."

"그래서?"

"늘여줘. 넌 마법사잖아."

"그런 곳에 마법을 쓰느니 그냥 하나 새로 사는 것이 낫겠어. 설마
오크식 글레이브는 구하기 어렵겠지만 다른 무기는 구할 수 있겠지."

"인간처럼 검을 쓰라고? 그건 싫다!"

"그럼 저기 도착한 다음 대장장이에게 부탁하면 되잖아. 적당한 길이
의 자루로 바꿔달라고."

레이저는 그렇게 말하며 나무 사이로 보이는 턴빌시의 건물들을 가리
켰다. 한 사람(?)이 발걸음에 익숙하지 않은 것에 비해 볼 때 둘은 꽤
빠른 속도로 걸어와 턴빌에 도달해있었다. 이제 이 오솔길만 빠져나가
면 곧장 턴빌이다. 루손은 이를 드러내며 외쳤다.

"너 바보냐! 저기 들어가려면 글레이브가 필요해서 그렇게 말한 거잖
아!"

"아…… 이런. 제발, 루손. 넌 지금 인간의 모습이야. 네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널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거라고."

"제길, 불안하단 말이야! 네 마법이 갑자기 깨지거나, 아니면 다른
마법사가 날 알아보거나, 어쨌든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쩔래!"

레이저는 옆을 지나가는 여자를 바라보며 저 여자가 혹시 오크가 변
신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는 마법사에 대해 상상해보았다. 말
도 안돼. 그건 편집증이야. 오크를 여자로 변신시키려고 마음먹을 정
도로 미친 녀석이 아니라면 그런 의심을 할 리는 없겠지. 나는 그런
녀석을 하나 알고 있는데…….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 내 말을 믿어."

"그렇다면 내 글레이브를 들고 너 혼자 들어가. 그리고 그것을 내 팔
길이에 맞춰 수리해서 가지고 나와. 그 때까진 난 저기엔 가지 않겠
어. 알았어?"

"이런, 젠장!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다시 왕복
하라고? 그렇게는 못해. 게다가 곧 해가 진단 말이야!"

그 때였다. 레이저는 루손의 눈이 갑자기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루손은 레이저의 어깨 너머로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의
아해진 레이저는 몸을 돌렸다.
턴빌에서부터 몇 명의 사람들이 말에 탄 채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가
꽤 멀긴 하지만 레이저와 루손은 턴빌로 들어가는 오솔길 가운데 서있
었기 때문에 저쪽에서 걸어오는 사람들과 곧장 마주치게 될 형편이었
다. 루손은 두 말 없이 길 옆으로 달려갈 자세를 취했지만 레이저가
먼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뭐하려는 거야?"

"멍청하긴, 어서 숨어야지!"

"제발, 루손! 너 지금 인간의 모습이란 말이야. 아무 걱정말고 그냥
걷는 것이 더 나아. 저쪽에서도 이미 우리들을 봤을 거라고. 숨는 것
이 더 이상해보일 거야."

공포 때문에 혼란스러운 정신이긴 했지만 루손은 레이저의 말이 옳다
고 여겼다.

"그, 그런가?"

"그래. 젠장. 벌써 의심하겠다. 어서 걸어, 어서! 아니, 글레이브는
내려! 그게 뭐야? 싸움 거는 것처럼 보이잖아!"

루손은 그제서야 자신이 글레이브를 두 손으로 쥔 채 앞으로 겨냥하
며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루손이 글레이브를 내리고나자
두 사람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다가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식별할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루손은 다시 길 옆의 숲으로 뛰어들
고 싶어졌다. 그리고 레이저는 미심쩍은 시선이 되었다.
말은 전부 다섯 마리였다. 다섯 명의 기수 모두 무장을 갖추고 있었
지만 제복 같은 것은 입고 있지 않았다. 여행가들이나 모험가들이 무
장을 갖추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다섯 명의 사내들은
보통의 여행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모두 사나운 얼굴에 건장한 체구
였다. 설마 이렇게 도시에 가까운 곳에서 산적이나 강도는 아니겠지.
레이저는 다가오는 사람들이 모험가 정도 되는 자들이라고 판단하고
는 그대로 걸어갔다. 하지만 루손은 다섯 명이나 되는 인간 칼잡이들
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면서 태연하게 걷기가 매우 힘들었
다.
이윽고 두 무리의 거리가 20큐빗 정도로 가까워지자 서로의 얼굴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레이저는 사납기 그지없어 보이는 기수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고개를 조금 외면했다. 하지만 고개
를 돌리던 그의 눈에 다섯번째 기수가 들어오자 레이저는 고개 돌리는
것을 멈추고 말았다.
다섯번째의 기수는 한손으로 고삐를 쥔 채 다른손으로는 커다란 꾸러
미 같은 것을 안아들고 있었다. 그런데 꾸러미 아래쪽으로 사람의 다
리가 내려와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바라본 레이저는 사내가 시트
로 둘둘 말다시피 한 여자를 안아든 채 힘든 자세로 말을 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저러지? 병자인가? 호기심이 동한 레이저는 선두
의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어, 실례하겠습니다."

아무 말없이 지나치려 했던 선두의 사내는 레이저가 갑자기 말을 걸
어오자 찌푸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말을 멈추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대로 지나치려는 건가? 레이저는 당황해서 옆으로 비켜섰
다. 루손 역시 재빨리 레이저의 등 뒤로 돌아들어갔다.

"아, 잠깐만요. 저기 뒤의 저 여자분은 어디가 아픈 겁니까?"

레이저의 질문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사내는 입술을 굳게 닫아건 채
그대로 레이저의 옆을 지나쳐 걸어가버렸다. 그리고 다른 사내들도 그
뒤를 따라 걸어갔다. 레이저는 당혹한 표정으로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사내들은 그대로 레이저와 루손이 걸어왔던 쪽을 향해 사라져갔다.
원, 지독하게도 무뚝뚝한 녀석들이다. 그런데 아픈 여자를 데리고 어
디를 저렇게 가는 거지? 그 때 루손이 레이저의 등을 후려쳤고 레이저
는 깜짝 놀라버렸다.

"뭐, 뭐야?"

"정말이야! 눈치채지 못했어. 아무도! 히야!"

루손은 펄쩍펄쩍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이
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자, 이제 걱정말고 들어가자. 알았지?"

"좋아."

아직도 불안감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루손은 조금 전보다는 훨씬 낙관
적인 기분 속에서 레이저의 말에 대답했다. 레이저는 한번 더 사내들
이 사라져간 방향을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턴빌을 향해 걷기 시작했
다. 루손 역시 그 뒤를 따랐지만 아직도 흥분감이 가시지 않아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굉장하군, 네 마법 말이야. 인간들이 날 보고도 그대로 지나치다니,
햐! 이건 정말이지 어떤 오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일걸."

"흐음. 턴빌에 들어가거든 네게 거울을 한번 보여줘야겠다. 아직 네
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모르겠군."

"거울?"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고 싶을 때 사용하는 도구야. 음, 그러니까 글
레이브 날에 흐릿하게 비치는 영상이 있잖아?"

레이저의 말을 들은 루손은 자신의 글레이브를 들어 그 날을 바라보
았다. 하지만 투박한 글레이브의 표면에는 흐릿한 색깔 정도밖에 비춰
지지 않았다.

"거울은 그것을 훨씬 선명하게 비춰지도록 만든 거야."

"아아. 그래? 신기한 것이 다 있군. 그게 어떻게 보이지?"

레이저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몸을 돌렸다. 땅을 바라보던 레이저는
루손에게 말했다.

"루손, 뒤로 돌아 네 그림자를 봐."

루손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비치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
고 깜짝 놀라버렸다. 거기에는 훤칠하고 마른 몸매의 그림자가 손에
글레이브를 든 채 깜짝 놀라고 있었다.

"아아! 인간의 그림자잖아?"

레이저는 빙긋 웃으며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흐음. 그 옆에는 멋진 갬블러의 그림자로군. 거울은 저런 거야. 저
렇게 시커멓지는 않고 모습이 또렷하게 보인다는 점이 다르지만."

레이저의 농담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루손은 그것이 자기 그림자
인지 확인하겠다는 듯이 손을 들어올리고 다리를 움직였다. 물론 그림
자는 루손의 행동을 정확하게 따라했다. 레이저는 홀린 표정으로 자신
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는 루손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자, 어서 가자. 저 그림자도 우리를 따라다니느라 힘들었을 테니 어
서 가 쉬고 싶을 거야. 하지만 그림자가 혼자 걸을 리는 없으니까 우
리가 부지런히 가야지."

"응? 아, 그렇지는 않아."

"뭐야?"

"나크둠이 해준 이야기가 있어."

루손이 나크둠의 이름을 말하자 레이저는 다시 아련한 슬픔을 느꼈
다. 시체도 못가지고 나왔어. 나크둠은 무너진 바위굴 속에 남아서 외
롭게 부패하고 있겠군. 하지만 자신의 그림자를 정신없이 바라보던 루
손은 레이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음. 그래. 나크둠이 말해준 수수께끼가 있지. 그림자는 사람의 행동
을 그대로 따라하잖아? 사람이 걸어가면 그림자도 걸어가고, 사람이
멈추면 그림자도 멈추지. 그렇지?"

"그렇지."

"네 말대로 그림자는 혼자 걷지 않잖아."

"그래. 그런데?"

"그런데 그림자를 혼자 걷게 하는 방법이 있거든. 자기는 가만히 있
으면서 그림자만 움직이게 하는 거. 어떤 방법일 거 같아?"

레이저는 나크둠이 설마 마법을 쓰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오크
다운, 그러니까 별로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대답일 텐데.

"모르겠는데. 그런 방법이 뭐야?"

"간단하지. 등 뒤에서 누군가 횃불을 들고서는 움직이는 거야. 횃불
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그림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
이지.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도 말이야. 그렇지?"

"하하. 그렇군."

레이저는 실없이 웃어버렸다. 레이저가 웃자 루손은 기세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녀(?)의 그림자도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저
는 웃으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가 우리 그림자를 위해 해를 움직여줄 리는 없잖
아. 그러니 우리가 부지런히 걸어야지. 자, 어서 가자고."

"응."

루손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밤에 활동하는 그였기에 자
기 그림자를 볼 기회는 별로 많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레이저도 자신
의 그림자를 바라본 기억은 별로 없었지만. 걸어가면서 레이저는 다시
나크둠에 대해 생각했다.
나크둠. 실없기는. 하하. 자신은 가만히 있으면서 횃불을 움직여 그
림자를 움직이게 한다고요?
레이저는 잠시 떠오른 생각을 지워버리며 턴빌을 향해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피곤한 그림자를 위해서라도 빨리 저기 도착해야
겠다.


================================================================
챕터 끝났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