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호 : 15205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04 00:17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
바이서스 임펠에서 가장 유명한 과일 가게,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가
게 안의 어느 방.
중앙에 놓인 작은 테이블 주위에 네 명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은 오후의 각도로 사내들의 어깨에 떨어지
고 있었다. 네 명의 사내들은 모두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와 서류 뭉
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류를 집어들어 바라보거나 다 읽은
서류를 옆사람에게 건네거나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았
다.
그러나 마침내 한 사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알은 힘빠진 목소리
로 말했다.
"이건 이해할 수가 없군. 이게 말하는 뜻은……"
카알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쟈크는 피식 웃었다.
"보쇼. 카알. 명령을 내리는 장군은 커녕 명령을 받는 병사도 되어본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이게 무슨 뜻인지는 짐작할 수 있어요. 그
러니 그렇게 머뭇거리지 말아요. 뭣하시다면, 내가 정리해 드릴까?"
카알은 우울한 표정으로 쟈크를 바라보았다. 쟈크는 손가락을 내밀어
지도를 짚었지만 그 눈은 자신의 손가락이 아니라 카알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쟈크는 입을 열었다.
"자이펀은, 총공격 태세입니다."
카알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오른쪽에 앉아있던
샌슨은 이를 북북 갈면서 지도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확실하군요. 병참의 이동을 보든, 군단 배치를 보든…… 최정예라
불릴만한 부대는 전부 한곳에 집결시켰군요. 전선의 공백을 무시하면
서까지. 하지만 왜 이러는 걸까요? 이건 누가 봐도 도박입니다."
카알은 샌슨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쟈크를 바라보았다.
"함 씨를 압박하는 거라도 있나, 쟈크 군?"
카알은 적국의 국방대신을 친구의 이름이라도 부르는 것처럼 불렀다.
쟈크는 눈을 크게 떴다.
"압박이라니오?"
"전쟁을 질질 끌고 있는 것 때문에 그의 자리가 위험하다거나……"
쟈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없어요. 우습지만, 함의 지위는 아무도 원하지 않아요. 다
른 명가들은 함이 그 자리를 맡아줘서 고마워한다면 모를까, 그 지위
를 압박하지는 않을 거요. 난 정말 이 나라를 이해하기 어렵수."
그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사내가 쟈크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넨 휴리첼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하기 어려울 것까진 없소. 쟈크 군."
"무슨 말씀이시죠, 백작님?"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이 백작이라는 호칭은 야유가 되었을 것이다.
휴리첼 가문은 백작의 지위를 몰수당했으며 엄밀하게는 바이서스 왕가
의 적이다. 즉 쫓기는 범법자의 입장이다. 하지만 쟈크가 부른 백작님
이라는 칭호에는 애정이 깃들어있었다. 그래서 로넨 휴리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이펀에서 군권은 그렇게 매력적인 권력이 아니오. 몇몇 예가 증명
하지만, 자이펀에서 반란은 불가능하오. 적어도 군권을 등에 업은 형
태의 반란은."
"흐음?"
"어떤 자이펀의 장군이라도 하탄을 향해 칼을 들 수는 있을 거요. 국
방대신에게든 장군에게든 자이펀의 무인들에게는 거의 완벽한 지휘권
이 주어지니까. 원한다면 반란을 시도할 수는 있소. 하지만 하탄에게
는 닐림의 날개가 있소. 하탄은 손수 반란을 제압할 필요도 없지. 명
가들이 나서게 될 거요. 그리고 명가들이 나서면 그 다음날로 반란군
은 궤멸이오. 명가들의 소환이 있으면 어제의 병사들은 모두 장군을
버리고 자신이 속한 가문으로 돌아가게 되니까. 게다가 그들은 그것을
배신이라 생각하지 않고 명예로운 선택으로 여기오."
"하아…… 그렇습니까?"
"그래요. 자이펀에서는 가문 자신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면,
반란은 시도도 될 수 없소. 자이펀의 무인들은 엄밀하게 말해서는 명
가들로부터 병사를 위탁받아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오."
"헤헷. 우습군요.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리
나라 장군들도 국왕으로부터 지휘권을 받아 국왕의 병사들을 지휘하는
거니까."
"국왕은 하나지만 명가는 다수요. 쟈크 군. 어떤 자이펀 장군이라도
수하의 부하들로 하여금 한 명의 하탄을 배신하게 할 수는 있을지 몰
라도 많은 명가들을 동시에 배신하게 만들 수는 없소."
쟈크는 탄복한 눈으로 로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왼편
에서는 샌슨이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알은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빙긋 웃다가 웃음을 지우며 지도와 서류가 가득 쌓인 테이블
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게로군. 역시 무인의 접근은 다르군요. 휴리첼 씨. 나는 그들
이 하탄에 대해 감히 반기를 들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
고 있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로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 자이펀의 국방대신은 최소한 한직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어도
자기 지위에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직위라는 말이 되겠군요?"
"그렇소이다. 위탁받은 병사들을 데리고 전쟁을 수행하느니만큼, 우
리나라에서 생각하는 장군보다는 훨씬 직업인의 성격이 강하다 볼 수
있소. 우리의 군사적 관점으로 보면 불합리한 체제이오만 자이펀에서
는 그런 체제로도 원활하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모양이오."
"불합리하다? 무엇 때문이지요?"
로넨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병사는 충성의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카알은 입을 다문 채 충성의 대상을 잃은 무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로넨의 말은 단조로운 어조로 계속되었다.
"엄격한 명령체계, 위계서열. 그런 것들은 전쟁을 능률적으로 수행하
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소. 실제로 그렇기도 하오만 그 본질은 좀 다
르오. 그것은 병사들에게 누군가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요. 병사들에게 있어 뚜렷한 충성의 대상은 어떤 강훈련보다도
더 병사들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요인이지요. 예를 들자면, 정예군과
도적떼들의 싸움의 승패는 항상 뻔하오. 그것은 어느쪽이 더 잘 훈련
되어있고 어느쪽이 더 잘 체계화되어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오. 가족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정예군과 약탈을 위해 싸우는 도적의 차이
지요. 그리고 그것이 간혹 도적이나 산적들로 하여금 정예병력을 깨트
릴 수 있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오. 그럴 경우, 그런 도적이나 산적에
게는 예외없이 출중한 우두머리가 있소. 충성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럴 듯하군요."
"내 생각으로는 자신과 고락을 같이하는 장군이 아닌 배후의 명가들
을 위해 싸우는 자이펀 병사들의 사기가 바이서스군에 비해 높을 것
같지는 않소이다. 하지만 자이펀은 지금까지의 현상이 입증하는 바 최
소한 밀리지 않는 전투를 해내고 있소. 그것은 자이펀 병사들 개개인
의 높은 자부심에 관련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오만. 그러니까 병사들
개개인의 질이 우리보다 훨씬 우수하기 때문이지요."
"흐음. 그런가요. 좋습니다. 그럼 자이펀의 국방대신은 직업인이며
무리의 우두머리라기보다는 군대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전쟁이라는 업
무를 치르는 전문가로 생각해도 될까요?"
"나는 반대하지 않겠소."
"그럼 이 친구는 공명심이나 야망을 원천적으로 봉쇄당했다고도 생각
해도 되는 겁니까?"
"그의 공명심을 만족시키는 것은 하탄께 받는 상찬이 전부일 것이오.
정복자의 위명이나 승리자의 영광은 자이펀의 무인에게 있어 그렇게
큰 원동력은 되지 않을 것이오."
카알은 잠시 호흡을 조절하고는 빠르게 말했다.
"그럼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을까요?"
"타인이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말하기 어렵
소."
카알은 두 손을 깍지 끼고는 엄지손가락들을 세워 이마를 받혔다. 그
리고는 천천히 엄지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찔렀다. 샌슨은 그런 카알
의 모습을 보다가 뒷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 한 마디 해도 될까요?"
카알은 손을 멈추고는 샌슨을 돌아보았다.
"프림 양? 퍼시발 군?"
"……전자입니다."
"해보세요, 프림 양."
샌슨은 맥이 탁 풀린 표정이 되더니 책을 읽듯이 프림 블레이드의 말
을 받아 읊었다.
"저, 카알. 난 검이에요. 전쟁터를 많이 돌아다녔지요. 이건 군인들
이 말하는 위력 시위가 아닐까요?"
쟈크는 샌슨이 '난 검이에요.' 라고 말하는 부분부터 키들거리기 시
작했다. 하지만 로넨 휴리첼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가 다시 샌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웃음기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레이디?"
샌슨은 이제 무릎에 얼굴을 박고 킬킬거리는 쟈크를 보며 붉으락푸르
락했다. 하지만 그의 책임감 넘치는 입은 충실하게 프림의 말을 반복
하고 있었다.
"느낌이에요, 여자의 육감이랄까?"
"푸흐허핫하하!"
쟈크는 기어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샌슨은 그런 쟈크
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뭔가 그럴 듯한 설명을 기대하고 있던 로
넨 역시 조금 한심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금 딱딱해진 어
조로 말했다.
"위력 시위로 볼 수는 있을 거요. 실제로 이 배치는 공백을 보여주
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배치니까.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는……"
그 때 카알이 말했다.
"잠깐, 나는 비전문가니 만큼 이해심을 가지고 조금만 설명해주시겠
소? 공백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무슨 말이지요?"
로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도를 가리켜보였다.
"보시오. 실제로 최정예가 집결한 지점은 푸른산맥을 가장 빠르게 넘
을 수 있는 칼피아 호 연안이오. 그리고 이런 병력 이동을 시도함으로
써 구멍이 생긴 곳은 로발 강 유역, 나브라, 다위너 세 군대라고 할
수 있겠군요. 다른 곳에서도 조금씩의 전력 유출이 있소만 그것은 일
단 넘어갑시다. 그런데 로발 강의 경우, 보시오. 칼피아 호에서 흘러
나오는 강이오. 강변을 따라 걷는다면 이곳의 군대이동은 쉬울 테고,
따라서 로발 강을 점령한 바이서스 군은 칼피아호에 집결된 최정예 부
대에 의해 보급선을 절단당할 우려가 클 것이오."
"흐음. 그렇군요."
"나브라의 경우는 더 고약하군요. 이곳은 점거해봐야 소용이 없소.
나브라는 대사막의 입구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곳을 점거해보았자 사막
에 익숙하지 않은 바이서스 군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거요. 다위너
의 경우는 항구도시요. 항구도시의 공략은 육해 양쪽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점령이 상당히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바이서스에는 해군이 없
소. 나브라와 다위너는, 자이펀으로서는 전술적으로는 빼앗기고 싶지
않지만 전략적인 가치까지 있는 전선은 아니오."
"그럼, 만일 이 세 전선을 점거당하더라도……"
"이 세 전선을 돌파하려면 바이서스로서는 전선을 분할해야 하오. 전
선이 얇아집니다. 그럼 칼피아 호에 집결된 부대는 그 얇은 전선을 쉽
게 돌파할 것이오. 적합하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흔히들
말하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말로 설명될 듯하오."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위력시위일 가능성이 높군요."
로넨은 물끄러미 카알을 바라보다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군무에 익숙지 않은 여기 쟈크 군까지 파악할 수 있는 만큼
이것은 뻔뻔스러운 총공세 의도를 나타내지요. 바이서스의 장수들은
당연히 파악할 수 있을 거요. 뻔히 보이는 속임수를 펼치는 이유는 위
력시위일 가능성이 높기는 하오. 하지만……"
"하지만?"
로넨은 조금 주춤하다가 말했다.
"이것이 위력시위라면, 공격은 반드시 있을 테지요. 그것도 상당한
전격전이 이루어지겠지요. 그리고 그 후 외교 채널을 통해 강화 제안
이 들어오지 않을까 하오. 강화 제의의 시점은 함 국방대신의 의도에
따르겠지만, 그가 바이서스에게 어느 정도의 출혈을 요구할지는 알 수
없소. 그 점에서 볼 때, 칼피아 호는 역시 위험한 한 수요."
카알은 묵묵히 로넨을 바라보았다. 로넨 휴리첼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푸른산맥이 돌파당하면 이파실, 켄턴까지도 위험해지겠지요. 이파실
과 켄턴이 공략당하면 사우스 그레이드는 목에 칼을 들이댄 형국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바이서스로서는 대문밖에 있던 적을 침대까지 끌어
들인 격이 될 것이오. 강화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바이서스
로서는 너무 큰 피해입니다. 권토중래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뿐더러,
자이펀에 연공을 바치는 문제까지도 고려해야 될지 모르오."
카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샌슨은 이를 갈아대며 상당히 듣기
불쾌한 음향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쟈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상한데요? 바이서스가 그렇게 불리한 입장이라면 자이펀은 강화를
제의할 필요가 없잖습니까? 그대로 밀어붙여 올라오면……"
"아니, 그렇지는 않소, 쟈크 군. 전격전의 문제점은 그것이 장기화되
기 어렵다는 점에 있소. 자이펀이 바이서스의 완전 병탄을 노린다면
그런 전격전은 곤란할 거요. 이 최정예부대는 바이서스 국내로 들어선
순간 보급선이 단절될 위험을 가지게 되오. 잊지 마시오. 그들은 적지
에서 싸우는 거요. 아무리 최정예라 해도 오랫동안 싸울 수는 없소."
"아아, 그럼 뭐냐, 한바탕 설친 다음 강화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말이오. 전선도 아닌 이런 배후에서 이런 지
도와 서류만 보고서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는 없소."
카알은 다시 엄지손가락으로 이마를 찌르기 시작했다. 그는 혼잣말처
럼 말했다.
"합리적이군. 전쟁은 끝낸다. 방법은 강화. 강화할 수 있도록 최대한
압박. 그리고 강화 체결 시점에서 자국의 이득은 최대한으로. 공격적
이면서도 합리적인 전략이군."
로넨은 싱긋 웃었다. 그런 로넨을 향해 카알은 약간 나른한 시선을
보내었다. 로넨이 그런 카알의 시선에 의아해하게 되었을 때, 카알은
갑작스럽게 말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휴리첼 씨?"
"뭐요?"
"무료하시지 않으신지 궁금합니다."
로넨은 카알의 화법을 조금씩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로넨은 허
튼 소리 하지 마시라고 말하는 대신 똑같이 잡담하듯 대꾸했다.
"무료하긴 하구료. 광대들을 상대하던 저번 일은 별로 재미가 없었
소. 무력한 광대들을 괴롭히는 것은 확실히 품격을 높이는데 도움되는
일은 아니었소만."
"함 씨를 상대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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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죄송합니다.
???? : 기다린 사람 아무도 없는데?
타자 : 아아, 일종의 자기 기만이야. (으윽.)
남도에도 눈은 오더이다. 하하. 심심해서 이용자 검색을 해봤습니다.
이용자 아이디에 D/R 의 캐릭터들의 이름을 쳐넣고. 결과는?
감사합니다. 여러분.번 호 : 15206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04 00:17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2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2.
로넨은 카알에게 대수롭잖은 어투로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버릇이 있
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는 잠시
대답을 보류한 채 카알을 쏘아보았다. 카알은 이제 엄지손가락으로 턱
을 받친 채 로넨을 마주 보고 있었다.
"강화에는 찬성합니다만 우리도 역시 잇속을 차려야지요. 함 씨의 계
획은 수정 후 통과입니다. 사우스 그레이드의 땅은 한 조각도 못내
어줍니다. 당신이 함 씨의 스케쥴을 바쁘게 만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
다."
"어떻게 말이오."
"고대로부터 전해져왔지만 아직도 유효한 전술이죠. 불과 물을 같이
보내는 것."
로넨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대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얼떨떨한 눈으로 로넨의 시선을 마주보았고 그런 샌슨을 보던 로넨은
피식 웃었다.
"샌슨 군의 부관인 거요?"
샌슨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가 뭔가 놀라움을 표시할 말을 찾
기도 전에 카알이 먼저 말했다.
"연장자에게 기분좋을 제안은 아닙니다만…… 휴리첼 가도 이젠 부활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나로선 반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군요. 하지만 당신은 나를 어떻게
참전시킬 생각이시오?"
"전시특례법을 조금 확장해서 적용하면 되겠습니다. 백의종군하실 의
향이 있으시다면."
"자수 말이군요."
"준비는 다 되어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재판소에 들리시기만 하면 됩
니다. 티 타임 때는 자유의 몸으로 참석하실 수 있을 겁니다."
로넨은 그만 웃고 말았다.
"놀라운 사람이오, 당신은. 뜻밖의 선물도 이 정도라면 놀라기도 어
렵군요. 감사히 수락하겠소이다."
쟈크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어, 저. 무시되는 기분을 느끼기도 어렵군요. 하지만 분명히 무시라
고요. 여기에는 도통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두 분 설명 좀 곁들
여서 풀 코스로 말씀하시면 안될까요?"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쟈크에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대신 카알은
샌슨에게 말했다.
"퍼시발 군. 휴리첼 씨를 수행하게."
눈을 껌뻑거리던 샌슨은 어쩔 수 없이 불안하게 말했다.
"수행? 저, 어디로요?"
"어디긴. 법무부지. 가서 법무장관을 찾아서 내가 보냈다고 하게. 자
네는 악질 반역자 로넨 휴리첼을 감화시켜 그로 하여금 자수하게끔 설
득한 것일세."
로넨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 샌슨은 아직까지도 두 눈을 불쌍하게 껌
뻑거리며 말했다.
"아…… 내가 그랬군요."
이번엔 카알과 로넨, 그리고 쟈크까지 모두 웃어버렸다. 카알은 미소
띤 얼굴로 샌슨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나서 휴리첼 씨는 백의종군하시는 것으로 과오를 씻게 되실
걸세. 무문의 명가 휴리첼 가문의 전사이신 휴리첼 씨의 임지는 저 잔
악한 자이펀과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사우스 그레이드. 저 용맹무비
하며 동시에 비할 데 없는 지혜로움을 동시에 갖춘 전사이자 현자인
샌슨 퍼시발 공을 보필하며 저 악랄한 자이펀의 국방대신 함을 상대로
용전분투하실 걸세. 이해했나?"
샌슨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럴 때면 차라리 입을 다문
채 프림 블레이드의 설명이 듣고 싶었다. 하지만 프림 블레이드는 낄
낄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샌슨은 어쩔 수
없이 말해야 했다.
"한번만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로넨은 정말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알은 거짓
말을 하지 않았다. 법무부에 도착한 후 그가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경비대원들을 피해다니며 가명을
쓰고 그림자를 찾아다녀야 했던 시절을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회상하
며, 로넨은 모든 준비를 마친 후 기다리고 있는 법무장관을 향해 고개
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법무장관은 국법준수 동의서, 사면장, 충
성 서약서, 휴리첼 가문 소유의 부동산 관계 서류 전부와 인수증 등을
꺼내어놓고는 로넨으로 하여금 차례로 사인하게 했다. 읽어볼 틈도 없
이 서류들에 사인하면서 로넨은 체포도 되기 전에 사면당하는 기분을
느꼈고, 실제로 사태는 그러했다. 그를 수행했던 샌슨 역시 머리를 가
로저었다.
"체포도 없고, 재판도 없고, 곧장 사면에 복권이군요."
법무장관은 피식 웃고는 그들을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다.
"이거 가져가요. 국왕 전하의 명령서요."
로넨은 법무장관이 내민 서류를 받아들면서도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
했다.
"명령…… 서요?"
"오크 산수 공부하는 소리 모두 빼고 말한다면, 로넨 휴리첼의 과오
는 강물에 실어보내고, 그를 활에 매긴 화살처럼 전선을 향해 쏘아붙
인다는 내용이오. 아, 당신은 모레 오전에 장엄의 홀에서 국왕 전하께
충성을 맹세하게 될 겁니다. 아시겠지요? 충성 서약서는 이미 썼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지요. 그리고 이건 당신 것입니다. 샌슨 씨."
"이건 뭔데요?"
"131전선의 키다린 장군 암살 건은 알지요? 당신은 키다린 장군의 사
망으로 공석이 된 제 12 군단의 군단장 자리를 맡게 됩니다. 자의에
따라 참모진을 구성할 수 있는 사령관의 권한은 로넨 휴리첼 씨에게
가장 먼저 사용하게 되는 거죠. 국왕 전하와 국방장관의 인가는 다 되
어있소. 돌아가는 길에 국방부에 들러서 국방장관께 인사나 하시오.
임관식 일정은 차후에 결정될 거요."
"도대체가……"
말이 안나온다. 샌슨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로넨
역시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카알은 도대체 언제 이 정도의 영
향력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게 되었지? 로넨은 샌슨을 향해 얼빠진
표정을 보내다가 겨우 손을 들어올려 경례를 했다.
"잘 부탁합니다. 사령관 각하."
"아, 예…… 예?"
그래서 두 사람은 대략 한 시간 만에 12 군단 사령관과 그 수석 참모
가 되어 카알과 쟈크가 기다리고 있는 쟈크의 과일 가게로 돌아오게
되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던 카알은 들어서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는 그만 커피를 뿜어내고 말았다.
쟈크의 투덜거림 속에서 얼굴이 빨갛게 된 채 테이블을 닦고 커피잔
을 정리하는 카알을 바라보며, 로넨은 다시 어처구니 없는 감정을 느
꼈다. 저 자가 정말 법무부와 국방부, 그리고 국왕까지도 움직여서 나
에게 자유를 돌려주고 함을 상대하게끔 조처한 자인가?
"놀라운 산책이었소. 카알 씨. 산책길에 자유도 줍고 12 군단 수석
참모 자리도 줍고 받들어 모실 사령관까지 주웠소."
"산책? 아아. 그렇군요. 그 정도의 시간밖에 안걸렸군요."
로넨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샌슨 역시 얼빠진 얼굴로 카알을 보
며 자리에 앉았다. 빙긋 웃고 있는 카알을 향해 로넨은 무표정하게 말
했다.
"보아 하니 샌슨 군 역시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이
더군요. 당신이 그 짧은 시간 동안 임펠리아와 귀족원에 구축해놓은
것이 어느 정도의 규모일지는 상상도 되지 않소. 다만, 나도 그 재주
를 좀 배웠으면 좋겠군요."
"아아. 행운이 조금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나 드래곤 슬레이어의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죠. 게다가 아무나 바이서스 임펠의 밤의 제왕
과 친구인 것도 아닙니다."
카알은 쟈크를 돌아보며 익살스럽게 말했고 쟈크는 뿌듯한 심정 속에
서 테이블 위에 커피를 쏟아놓은 카알을 용서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로
넨은 조용히 말했다.
"각설하고…… 이렇게까지 준비되었다면 당신은 진작에 나를 사용할
생각이었던 모양이군요. 함의 전격전을 알기 전부터 말입니다."
"그렇지요."
"이유는?"
카알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로넨은 목이 조금 메이는 것을 느꼈다.
"나를 복권시켜주기 위해서요?"
"바이서스로서도 좋은 일입니다. 까뮤나 넥슨의 일이 없었다면 당신
은 오래 전에 전선을 질타하고 있었을 겁니다. 능력있는 전사를 본인
과는 상관도 없는 죄 때문에 기용치 않는다면 손해죠."
로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로넨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런 그를 보며 카알은 다시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죠. 나라고 왜 함과 같은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겠습니
까."
"고맙군요. 솔직해줘서. 당신이 사용한 카드는 지골레이드인 거요."
"예. 나는 지골레이드로 압박하여 강화를 제의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리고 강화가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보다 많은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당
신과 샌슨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지요. 함 씨가 나와 같은 생각
을 떠올렸다는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양자는
강화에는 동의했지만, 덕분에 땅따먹기는 더욱 힘들어지게 되었군요."
로넨은 미소 띤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함의 추고, 함은 당신의 추겠군요."
"추라고 하셨습니까?"
"기나긴 전쟁의 끝에서, 희대의 전략가 두 명이 양국에서 동시에 등
장하는 것은 왠지 유피넬의 저울대의 역사함인 것처럼 느껴지는구려.
역시 유피넬의 저울대는 길고, 헬카네스의 추는 무거운 법이지 않겠
소."
"하하. 희대의 전략가라니오. 그것은 저 허즐릿이나 레베카 장군 같
은 이에게 어울리는 말이지, 나 같은 독서가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말
입니다."
로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몸을 앞으로 내밀며 본질적인 문
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당신이 독서가라는 점에 대해 조금 불안을 느끼고 있기는 하
오. 당신이 선택한 12 군단 말인데, 쓸만한 부대인 거요? 군인의 시각
과 독서가의 시각에 차이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지요."
"예…… 옳은 지적입니다. 사실은 나는 12 군단은 본 적도 없습니
다."
로넨의 어깨가 조금 쳐졌다.
"이보시오. 당신은 샌슨 군과 나로 하여금 그 부대를 가지고서 함이
모아들인 최정예 부대를 상대하게끔 했단 말이오. 검신과 칼자루도 구
분하지 못하는 병사들을 데리고 그런 어려운 일을 할 수는 없어요. 사
령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직 그 직위가 낯설기 때문이다. 샌슨은 자신을 부른 것이라고는 생
각도 하지 않은 채 로넨의 말을 듣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면서 말했다.
"어, 저, 예. 음. 그렇겠지요? 카알?"
카알은 대답했다.
"나는 전사가 아닙니다. 전사의 감식안 같은 것은 없지요. 그래서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생각해본 겁니다."
"독서가의 방식은 무엇이었소?"
"키다린 장군이 암살된 것은, 그 군단이 자이펀에게 위험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보았지요."
카알은 퍽이나 단순하다는 듯이 말했고 실제로 그 말은 단순했다. 하
지만 로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옳은 말씀이시오. 납득되는군요. 하지만 군단 하나를 가지고 자이펀
을 침공하는 일 같은 것은 불가능하오."
"아, 그 문제 말인데, 이제는 전략 변경입니다. 막기만 하십시오."
"막으라고요?"
"예. 원래는 국방장관께 간청하여 몇 개 군단을 더 움직여볼까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함 씨의 의도가 나의 의도와 같은 것이 밝혀진 이상
땅따먹기는 포기입니다. 함 씨의 의도를 저지시키기만 해도 성공입니
다. 지골레이드께서 강화를 이끌어내실 동안 자이펀 병사는 한 명도
바이서스의 땅을 밟지 못하게만 해주십시오. 바로 그 점 때문에 다른
전선에서는 절대로 부대를 빼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부탁이
되었습니다만, 가능하겠습니까?"
"……애써보겠소."
카알은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카알은 고개를 돌려
샌슨을 바라보았다.
"제 12 군단 사령관 각하. 이해하셨습니까?"
샌슨은 벙글거리며 말했다.
"헷. 그러고보니 우습군요. 사령관은 저인데, 제 참모한테 먼저 물어
보셨군요?"
"말했잖나, 퍼시발 군. 불과 물을 함께 보내는 거라고. 원래 계획대
로라면 난 자네에게 기대를 걸었을 거야. 자이펀 영토를 침범하고 강
화 시점까지 유지하는 작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뺏기지 않는 것이
중요한 입장이 되었네."
"아이구! 나는 모르겠습니다. 언감생심 오우거가…… 시끄러! 헬턴트
촌놈이 군단 사령관이라니오. 후치가 들었다면 배를 붙잡고 웃었을 겁
니다. 난 지금 12 군단의 병사들 앞에서 어떻게 하면 말을 더듬지 않
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더 고민입니다. 바보는 원래 고민이 없다 해
도…… 으아아, 정신 통일! 음음. 젠장, 카알. 지나치게 파격적인 인
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로넨 씨를 군단장으로 하시면 안됩니
까?"
로넨과 카알이 동시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샌슨 역시 자신
의 말이 틀렸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자유인이지만, 한 시
간 전만 해도 쫓기는 범법자였던 로넨이 바이서스 군의 군단장을 맡을
수는 없다. 하지만 샌슨의 불만은 끝나지 않았다.
"예, 예. 알겠어요. 하지만 카알, 난 정말이지 군단이라는 것이 어떻
게 편성되어 있는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날아가는 비둘기, 창공에……
우오옷! 놓고 말하겠습니다!"
샌슨은 칼자루를 놓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프림 블레이드를 풀어서
테이블 위에 던져놓았다. 프림 블레이드의 칼날이 떨리며 검집으로부
터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졌지만 샌슨은 강철 같은 얼굴로 그것을
무시해버렸다. 하지만 그처럼 굵은 신경을 가지지 못한 카알과 로넨은
찌푸린 얼굴로 소음을 애써 참았다. 샌슨은 그제서야 당당하게 말했
다.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모르는 부대를 어떻게 지휘하라는 말씀이십
니까, 카알?"
"아아,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으음. 휴리첼 씨께서 많은 조력을
주실 걸세. 그런데, 음…… 퍼시발 군? 프림 블레이드를 좀 쥐면 안되
겠나? 쟈크 군에게도 폐가 되지 않나. 이곳은 쟈크 군의 가게란 말일
세."
샌슨은 쟈크를 흘끔 바라보았고 그러자 쟈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
다.
"하! 걱정 마슈, 카알.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 방 안
에서 나는 소리는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지요. 아무
걱정 마시고 말씀 나누시죠."
쟈크는 그렇게 말하며 방을 나가버렸고 로넨과 카알의 이마에 생긴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아이고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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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D/R 과 F/W 를 비교하시는 분은 많은데, 의외로 그 두 개의 글이
한 명의 타자에게서 나온 거라는 것은 간과하시는 분이 많군요.
D/R 처럼 두드리려고 했다면, 두드릴 수 있었을 겁니다. D/R 을 두드
린 건 타자니까요. 하하.
뉴로맨서를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느낍니다. 역시 컴퓨터는 끔찍하게
발달하고 있다는 것을. 뉴로맨서에서 주인공은 겨우 3 메가 램 때문에
연인에게 배신당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PC에도 램은 64 메가… 무섭습
니다. 아,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에도 비슷한 예가 나옵니다. 달
세계 전체를 통괄하는 슈퍼 컴퓨터 마이크가 가진 여유 기억분이 고작
100 메가였지요. 하지만 지금은 PC의 하드도 기가바이트 시대. 아무래
도 우리 사는 시대가 SF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이 점에서 SF의 본령은, 아무래도 미래 예측은 아닌 거 같습니다. 저
SF 작가들은 미래 예측에 완전히 실패했죠. 하지만 저 글들은 누가 봐
도 명작이지요. 미래를 그리는 것이 SF의 목적이 아니라면, SF의 목적
은 과연 뭘까요.
왠 뜬금 없는 소리? 아아. 환타지의 목적이 꼭 환상에만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하. (너무 당연한 질문이지요.)
좋은 밤 되세요.
번 호 : 15360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05 23:58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3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3.
히무수스 소장은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국방대신의 텐트라고 해서 대단할 것은 전혀 없었다. 이 곳에서 이루
어지는 보다 많은 결단과 보다 높은 수준의 판단에 비해볼 때는 황량
하게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바닥에 깔린 낡은 카펫은 국방대신의 품위
를 지키기보다는 오히려 깎아내리고 있었고 흔들리고 있는 등불은 (초
가 아니라 등이었다.) 이곳이 유목민의 텐트가 아닌지 착각하게 만들
었다. 무성의하게 던져놓은 듯한 쿠션들은 아무래도 안락함과는 거리
가 멀었다. 쿠션이라는 것이 원래 그냥 놓아두기만 해도 안락해보인다
는 점을 볼 때 이 삭막한 배치는 놀라울 지경이었다. 여기엔 냉수도
없군. 히무수스 소장은 갑작스럽게 불평거리를 떠올렸다. 국방대신의
텐트에 불려가면 시원한 냉수 한잔은 얻어마실 줄 알았는데.
소장은 수염 끄트머리를 살짝 꼬다가 말했다.
"태양입니까, 모래입니까?"
함은 피식 웃고 말았다.
"태양."
"모래가 아닙니까?"
"아냐. 태양이야. 따라서 이건 절대 비밀일세. 자네와 나만 알고 있
어야 해."
"그 말씀 몇번째 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다섯번째."
히무수스 소장은 웃어버렸다. 먼저 불려왔던 다른 네 명의 지휘관들
도 모두 피식 웃어버렸으리라.
태양과 모래. 사막에서 더 치명적인 것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태양
이 아니다. 희게 백열하는 태양열은 언뜻 공포를 야기시키지만 사막
위를 거니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모래밭에서 뿜어져 올라오는 복사열
이다. 자이펀 육군에서 사용하는 태양과 모래는 기만전술과 기습전술
의 은유이다. 무섭게 타오르지만 저녁만 되면 깜쪽같이 사라지는 태양
은 기만전술, 그리고 조용히 깔려있지만 그 위를 걷는 사람을 죽이고
야 마는 모래는 기습전술이다.
따라서 함이 말한 내용은 이렇다. 태양처럼 불타올라라. 하지만 적을
이길 필요는 없다.
"명심하게. 자네는 지휘관이야. 병사들은 이기기 위해 싸운다고 생각
하게끔 놔두게. 자네 자신조차도 그렇게 믿어야 하고.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내 말을 명심하고 있어야 하네."
히무수스 소장은 조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하셨듯이, 저는 지휘관입니다."
그렇게 세세하게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잘 압니다. '태양' 이라는 단
어 하나로 충분합니다. 히무수스가 말하지 않은 것들을 모두 들은 함
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노파심일세. 이해하게. 이제 상세 계획을 말해주겠네."
히무수스는 긴장된 표정으로 국방대신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기밀인
이상 필기는 절대로 안된다. 모두 암기해야 될 것이다. 히무수스는 숨
소리마저 낮춘 채 국방대신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히무수스는 잠시 국방대신이 더 말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다렸다. 그
리고 국방대신은 히무수스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둘 사이에
는 묵직한 고요가 내려앉았고 그 공백 속에서 등불만이 낄낄거리듯이
흔들렸다. 히무수스는 어깨를 누르는 고요의 무게에 힘겨워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전부입니까?"
"그렇다네. 자네는 이미 이게 태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완전한 전
격전이 될 걸세. 보급은 없고, 지령도 없네. 식량은 모두 개인 휴대할
수 있을만큼 휴대한 다음 모자라면 현지조달하게. 현지조달이 안되면
즉각 달아나게. 속도를 늦추는 모든 행위는 생략하네. 속된 말로, 뻑
적지근하게 분탕질을 치고 돌아다니라는 말일세. 지령이 없는 만큼 각
개격파의 위험은 더욱 높아지네.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더욱 속력이 필
요한 거네. 알겠나?"
"외람되지만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마음을 열겠네."
"너무 위험한 전략입니다. 이곳에 모인 전력은 자이펀 최정예입니다.
이 소중한 전력들을 무질서하게 바이서스 국내에 풀어놓고는 내 몰라
라 해버리시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바로 그렇네. 그렇기 때문에 더우기 최정예가 필요했던 것이고."
"아무리 최정예라 하더라도, 그런 지리멸렬한 상태에서는 힘을 쓸 수
가 없습니다!"
함으로서는 다섯번째로 듣는 똑같은 내용의 항변이었다. 그랬기에 함
은 이제 약간의 즐거움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함은 히무수스 소장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공포. 우리들을 소모품으로 사용하실 생각이
오? 기대. 어떤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전략이 있는 거요? 자기기
만. 나라면 그런 어려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함은 똑같은 대답을 다섯번째 반복했다.
"걱정하지 말게. 2 개월도 못버틴다고는 말하지 않겠지?"
"2 개월이라고 하셨습니까?"
"이 전쟁은 50 일 내에 끝나네. 그러니 2 개월이지. 그리고, 그 전쟁
이 끝나는 시점에서 자네의 부대가 주둔하게 되는 바이서스의 영토는
자네 것일세."
히무수스 소장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물론 자이펀인에게는 토지소유
욕이 별로 없다. 사막은 토지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곳이며, 바다는 오
로지 그림 오세니아의 것이다. 하지만 바이서스의 땅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그래서 히무수스 소장은 함의 말에 내포된 엄청난 의
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 말씀 진담이십니까?"
"진중엔 농이 없는 법일세. 어떤가, 히무수스 소장. 자넨 2개월도 버
티지 못할 지휘관은 아니겠지. 하탄을 위해 힘써주게."
"잘 알겠습니다."
히무수스는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따라 일어선 함은
히무수스를 가볍게 포옹한 후 텐트 바깥까지 안내했다. 히무수스는 씩
씩한 걸음으로 자신의 진지를 향해 걸어갔다. 진지 군데군데서 흔들리
는 횃불빛이 소장의 뒷모습을 잠시 비춰주었다.
그대로 몸을 돌리려던 함은 발걸음을 멈췄다.
별빛을 받아 반짝이는 칼피아 호의 수면이 그의 시야를 가볍게 자극
해왔다. 지휘관들과의 독대는 모두 끝났고, 그래서 함은 가벼운 걸음
걸이로 호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텐트 앞에 서있던 호위병들이 함
을 뒤따르기 시작했지만 함은 가볍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혼자 걷고 싶네."
호위병들은 조금 당황했지만 함이 진영 안이라고도 볼 수 있는 호숫
가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밤의 호숫가는 의외로 소란스러웠다. 많은 부대들이 모여있었기에 취
사 정리를 하기 위해 나온 병사들만 해도 호숫가가 시끄러울 정도였
다.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나타난 국방대신의 모습을 보고는 당황해서
들고 있던 물동이를 집어던지거나 설겆이 거리를 팽개쳐둔 채 경례를
해왔고 국방대신은 조금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발걸음을 돌
렸다.
조금 더 걸어간 후에야 함은 비교적 조용한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수면 바로 가까이까지 늘어서 있는 숲 속으로 들어가자 진지의 횃불
도, 텐트들의 모습도, 그리고 소란스러움도 멀어졌다. 밤의 숲속이었
지만 두 개의 달이 모두 떠올라 있는지라 함은 어렵잖게 앉을만한 곳
을 찾을 수 있었다. 나무 등걸에 기대어 앉은 함은 호수의 수면 위로
떨어져내리는 별빛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은 별빛이 아니었다. 다섯 명
의 지휘관들을 모두 속여넘긴 후 찾아온 약간의 통쾌감과 씁쓸함, 자
괴감이 뒤섞인 묘한 감정이었다.
함은 자신의 내부를 향해 변명해보았다.
'그들에게 건전한 동기를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함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부하들에게 동기를 부여
하여 보다 높은 전투능력을 끌어내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함이
스스로까지 속여가면서 저질러버린 일은……
'군벌'
함은 자이펀의 군대에 군벌을 조장한 것이었다. 함의 명령에 따라 칼
피아 호에 몰려든 최정예 부대는 하탄을 위해 싸우는 군대가 아니라
지휘관의 영토와 재물을 위해 싸우는 부대로 변신했다. 이것이 어떤
효과가 되어 돌아올지에 대해서는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다섯 마리의 맹수를 바이서스라는 초원에 풀어버린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보다 빠르고 보다 강하게 날뛰도록 하기 위해서 굴레도 고삐도
채찍도 치워버렸다. 대초원을 차지한 다섯 맹수는 그곳을 영토로 삼아
자신을 살찌울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고국을 향해 이빨을 들이댈지
도 모른다.
'먼 훗날, 자이펀의 역사가는 나의 이름을 악명으로 기술할 것인가.'
왜 그런 것일까.
합리적인 이유를 댈 수는 있다. 가장 작은 시간에 최대한의 효과를
올리기 위해서 지휘도 생략하고 보급도 없애버렸다. 거기서 오는 불리
한 점을 스스로 타파해낼 수 있도록 최정예 부대만을 골라내었다. 최
정예 부대이기에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으며, 동시에 최정예 부대이
기 때문에 살아날 확률도 높은 것이다.
게다가 함은 군벌 조성의 위험을 최대한으로 줄이기 위해 50일이라는
한계 시점도 못박아 두었다. 50일 동안 점령할 수 있는 땅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다. 50일은 강화 제안과 회의, 그리고 그 체결에 걸리는
시간을 모조리 계산하여 도출해낸 가장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함이 군벌을 조성할 가능성을 만들어버린 것은 분명하다. 그
들 다섯 중 얼마나 살아남을지는 모르지만 살아남은 자는 하탄의 궁전
으로부터 턱없이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자이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비옥한 토지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몇번을 생각해봐도 이것은 군벌
조성이라는 결론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함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없는 밤의 숲속인 만큼, 그
표정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어.'
상대를 강화 회담의 자리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위험
은 멀고 효과는 가깝다. 옛말에도 있듯이, 오늘의 문제는 엘프보다는
차라리 오크에게 조언을 청하는 법이다.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시간
을 놓치는 것보다는 되는대로 처리하는 방식으로라도 문제에 달려드는
법이 낫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뱀파이어에게도 조력을 구하는 법이지."
"무슨 말이지?"
"혼잣말이었어. 앞으로 나오겠나."
함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나 어느 새 함의 뒤에 나타
난 시오네는 함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시오네는 천천히 걸어와
함의 등 바로 뒤에 섰다. 시오네의 손이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그녀의
메마른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시오네는 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시오네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깨가 부서지겠군. 나를 벨 거야? 그렇더라도 어깨가 그렇게 굳어
있어서야 어디 검이라도 제대로 뽑겠어?"
"내 어깨에서 그 손을 치워라."
"싫은데?"
"그 손을 베어내겠다."
"무섭군."
시오네는 순순히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시오네의 말에서도, 그 행
동에서도 무서워하는 기색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함은 시오네가 그의
앞으로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때까지도 그의 오
른손은 칼자루를 계속 쥐고 있었다.
시오네는 검은 망토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망
토 위와 덥수룩한 머릿결 사이에서 하얗게 도드라지는 얼굴 뿐이었지
만, 함은 그 얼굴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함은 시선을
보낼 곳이 없어졌다. 그래서 함은 시선을 낮추어 땅을 바라보며 말했
다.
"보고해."
"언제 정령사가 되었지? 노옴에게 무슨 명령을 내리는 거야?"
"네게 말한 거다. 보고해, 시오네."
"아무런 문제는 없어. 데밀레노스 공주에게는 호위가 거의 없더군.
원하는 어떤 시점에라도 데밀레노스를 아샤스에게로 돌려보낼 수 있
어."
"암살자는 구했나."
"암살자? 내가 암살자인걸."
함은 고개를 들어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샤스의 재가 프리스트인데. 네가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
나?"
"아아,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아샤스에게 바쳐진 처녀의 피는 어떤
맛일지 궁금해."
"문제가 없는 모양이군. 결행일은 일주일 뒤로 한다."
"일주일? 왜 그렇지?"
함은 고개를 조금 돌려 턱으로 진지 쪽을 가리켜보인 다음 말했다.
"그들은 그 시점에 푸른산맥을 넘어 달리고 있을 테니까."
"아아, 그래. 알았어."
함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시오네가 떠나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올려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시오
네는 무표정한 얼굴로 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옆으로
별들이 반짝여 시오네의 하얀 얼굴은 마치 밤의 하늘에 매달린 얼굴처
럼 보였다.
"뭐지?"
"호기심."
"어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이런 장대한 작전을 구사 중인 국방대신
이 떠올릴 만한 표정이 아니야."
"표정?"
"흥분도 없고, 즐거워하는 기색도 없군. 아무도 없는 이런 숲속이니
만큼 표정에 신경쓸 필요도 별로 없을 텐데 네 표정은 너무 굳어있
군."
"네 앞에서 누가 즐거워할 수 있겠나."
"그런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않는데.' 라고 말하면서 시오네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함
은 시오네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고 시오네는 이제 천천히 망
토를 옆으로 감아쥐며 한쪽 무릎을 꿇어 함과 눈높이를 맞췄다. 함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경고하겠는데, 내게 이상한 눈빛을……"
"시끄러워."
함은 입을 다물었다. 시오네는 팔짱을 끼고는 오른손을 들어 턱을 감
싼 자세로 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함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심지어
불쾌하기까지 한 상황이었다. 시오네의 얼굴이 그의 얼굴 바로 앞에
있었고 그녀의 낮은 호흡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무엇보다도 참기 어려
운 것은 시오네의 몸에서 풍겨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냄새였다. 함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렇게 바라보지?"
"숨기고 있는 것이 뭐지?"
"그런게 있다 하더라도 네게 말해줘야할 필요는 못느끼는데."
시오네는 함의 말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대신 시오네는 턱을 쓰다듬던 오른손을 천천히 돌렸다. 시오네의 턱을
떠난 오른손이 천천히 앞으로 뻗어가며 그녀와 함 사이의 공간을 느리
게 움직여갔다. 시오네의 손가락이 함의 얼굴에 닿기 직전, 함은 칼로
자르듯 말했다.
"멈춰."
시오네의 손가락은 함의 말을 따르듯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러나 시
오네의 손가락은 이제 위로 천천히 움직여갔다. 시오네의 검지손가락
은 함의 얼굴에서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간격을 둔 채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마치 그의 얼굴 윤곽을 만지듯. 함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
으며 시오네를 쏘아보고 있는 가운데, 이마까지 올라갔던 손가락은 이
제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시오네는 함의 얼굴을 양쪽으로 쪼개듯이
천천히 얼굴 가운데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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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호 : 15361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05 23:59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4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4.
턱을 지난 손가락은 이제 목까지 내려왔다. 함의 목울대 바로 앞에서
시오네의 손가락은 멈춰섰다. 함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는 그런
자신에 대해 화를 내었다. 하지만 함의 목 바로 앞에 위치한 시오네의
검지손가락은 그로 하여금 검으로 겨냥당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
었다.
"뭣하는 짓이지?"
시오네의 깡마른 손가락에서 길죽이 뻗어나온 손톱은 그대로 함의 목
울대를 꿰뚫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함은 시오네가 자신의 손가락이
아니라 그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함은 그 두 개의 퀭
하고 어두운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무슨 의미지."
시오네는 여전히 함의 목을 겨냥한 채 메마르게 말했다.
"너를 만지고 싶군, 장군."
"용납하지 않아."
"내가 조금 전에 너의 얼굴을 만진 것 같은가? 천만에. 나는 네가 죽
은 뒤 너의 얼굴이 썩고 그 아래 근육까지도 사라진 다음에 나타날 말
끔하게 육탈된 너의 해골을 짐작해본 거야. 단단하고, 텅비고, 무표정
한. 네가 멋대로 사용하여 세상을 왜곡했던 두 눈이 있던 자리에는 텅
빈 두 개의 구멍. 그리고 그 구멍 너머로는 네 추억을 담아 너를 구성
하던 뇌가 담겨있던 빈 공간이 보이겠지.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단어들을 말하고 맛있는 음식과 뒤섞여 즐겁게 움직이던 혀는 사라져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못하게 된 턱뼈만이 남겠지."
함은 말없이 시오네의 눈을 쏘아보았다. 내 눈에는 네가 해골로 보이
는데.
"그 때도 나는 지금과 같은 모습일 거야. 어쩌면 난 너의 해골을 쓰
다듬어볼 기회를 가질지도 모르지. 지금은 용납하지 않느니 뭐니 하던
그 고약한 혀도 없어지고나서, 나는 네 해골의 바깥뿐만 아니라, 살아
있을 동안에는 네 아내뿐만 아니라 너 자신조차도 만질 수 없던 네 해
골의 안쪽도 만질 수 있을 거야. 네 커다란 눈 구멍 안쪽으로 손가락
을 집어넣어 뇌가 붙어있던 자리를 더듬어볼 수 있겠지. 재미있다고
생각되지 않나? 네 해골의 안쪽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지 않아?"
함은 갑자기 스멀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시오네의 손가락이 자신의 눈을 뚫고 들어와 얼굴 안쪽, 그 자신의 해
골 안쪽을 천천히 더듬는…… 함은 욕지기를 참기 위해 숨을 깊이 들
이마셨다.
"말릴 순 없겠군. 죽고나서는 어쩔 수 없으니."
"죽고 싶니?"
"뭐라고?"
"정말 죽고 싶으냐고. 정말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으냐고. 정말 아
무도 너를 기억못하게 될 때까지, 그래서 네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될 때까지 시간이 내처 흐르도록 내버려두고 싶으냐고."
"그건 누구에게나……"
"네게 묻는 거야! 대답해!"
함은 시오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
는지라 달리 다른 곳을 볼 수도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함은 대답했
다.
"죽고 싶다."
뱀파이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기다렸다. 함은 목 앞을 감돌고
있는 시오네의 손가락을 잊어가며 말했다.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죽는 것이 아니다. 죽어야 하기에 죽는 것
이다. 나는 죽고 싶다."
"죽여줄까."
"싫다."
"문지방에 서있는 고양이 만큼의 지능도 없는 인간 같으니. 들어서지
도 않고, 나가지도 않고."
함은 고양이를 길러보았기 때문에 시오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
다. 하지만 시오네는 언제 고양이를 길러본 것일까? 문지방에 서서 방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고양이의 모습은 개는 보여주지 않는 독특한
모습이다.
"그런 건 아냐."
"그럼 뭐지."
"죽음은 약속되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가장 마지막에 받을 가장
큰 선물이지. 그리고 그 선물을 받고나면 더이상 다른 선물은 받지 못
한다. 그렇기에 보다 많은 선물을 받은 다음 죽음을 받으려는 거야."
함은 자신의 말이 어딘지 모르게 루트에리노 대왕의 유명한 말과 비
슷하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약속된 휴식.' 시오네는 가멸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죽음이 선물이라고? 장군이여. 전쟁터에 널브러진 시체들에게 그렇
게 말해보겠나?"
"나는 그들에 대해 슬퍼하고 눈물 흘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끝내 가지지 못한 삶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다. 죽음은 슬플 것이 하나도 없다."
시오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죽음이 슬프지 않다고?"
"상실된 삶에 슬퍼할 뿐이다."
"같은 거야."
"다른 거야."
시오네는 몸을 일으켰다. 함은 무성의하게 끝나버리는 대화에 아쉬움
을 느꼈지만 시오네가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환영의 의사를 가지고 있
었다. 그래서 시오네가 일어서기만 했을 뿐 발걸음을 돌릴 낌새를 보
여주지 않자 눈살을 찌푸리며 시오네를 올려다보았다.
"뭐지?"
"네가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는 뉴스가 하나 있어."
"말해봐."
"데스나이트에 대해서 아나?"
"알고 있다만."
"그들이 부활했다."
함은 하마터면 벌떡 일어날 뻔했다. 조금 들어올렸던 몸을 다시 어색
하게 아래로 내리며 함은 시오네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시오네는 함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똑
바로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 그대로야. 데스나이트들이 부활, 현재 켄턴 시를 공략 중이야."
"그들이 어떻게? 솔로쳐가 그들을 영원히 잠재운 것이 아닌가?"
"아, 그 이름이 나왔으니 말인데, 현재 켄턴은 솔로쳐의 지휘 아래
데스나이트들을 상대로 농성하고 있어."
이번에는 되물을 기분도 들지 않았다. 함은 시오네의 얼굴을 뚫어지
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 뱀파이어의 얼굴은 사람과 똑같은 얼굴이었
지만 그 표정은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함은 그 얼굴에서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농담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데. 은유로는 더 이상하고."
"내 말은 모두 사실이야. 하탄에게 먼저 보고해야겠지만 닐림의 날개
로 가는 길에 네게 먼저 말해주는 것이지."
"믿어야 되는 건가?"
"응."
함은 다시 입을 다물었고 시오네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함을 바라보
았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꽤나 당황한 함은 한참 후에야 평범한 말
한 마디를 겨우 할 수 있었다.
"다크사이드인 데스나이트들이라면 부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
만 솔로쳐가 어떻게? 누군가가 그를 부활시켰단 말이냐?"
"아니. 그냥 일어났어. 켄턴의 시민들은 데스나이트가 부활하자 그를
저지하기 위해 솔로쳐도 부활했다는 식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던데.
유피넬의 저울은 길고, 헬카네스의 추는 무겁다고들 하지."
"신의…… 역사란 말인가?"
"지금 뱀파이어에게 신학에 대해 묻고 있는 거라면 나는 너를 머저리
로 판정해주겠어."
"알았어."
"더 있어."
"또 뭐?"
"솔로쳐를 돕고 있는 세 명의 기사가 있어."
"세…… 명의 기사?"
"장미의 기사단의 영원한 전설. 모든 기사들로 하여금 최고의 명마
위에 앉아서도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게 만든 자. 흐음.
이런 이름들이 따라다니지."
함은 자신의 입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입은 그 스스로도 믿을 수 없
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공의 3 기사?"
케이트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고요한 예배당을 감도는 공기 속
에는 은은한 촛내음과 나무 내음, 그리고 뭐라 말할 수 없는 건조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떨어지는 햇살은 케이트
의 앞머리에 부딪혀 그녀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조용한 오후였고,
케이트는 충만한 신앙심 속에서 경건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독수리와 영광의 아샤스여."
다이앤은 하마터면 신음소리를 낼 뻔했다. 이곳은 레티의 수도원인
것이다. 그러나 케이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독수리 한 마리만 보내주세요. 저도 천공의 기사가 되고 싶어요."
다이앤은 황급히 케이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
배당에서 기도 중인 소녀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갈
피를 잡을 수 없었다. 케이트는 그 와중에도 계속 중얼거렸다.
"이왕이면 냄새가 덜 고약한 독수리였으면 좋겠어요. 저는 썩는 냄새
가 싫어요. 아, 기사들은 고행을 한다지요? 음…… 좋아요. 그 냄새를
참고 견디겠어요. 그 독수리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치겠어요. 파란 비누
로 그 독수리를 씻겨주겠어요."
오로지 다이앤만이 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인 제안인지 깨달을 수 있었
다. 케이트가 거론하는 파란 비누는 다이앤이 선물한 것이었다. 좋아
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그것으로 몸을 씻던 케이트는 그것이 닳는다는
것을 알고는 기절할 듯이 놀라버렸고, 그 이후로는 다이앤이 아무리
성화를 부려도 절대로 사용하지 않은 채 보관하고 있었다.
아샤스여. 다이앤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래도 저 애는
거래에 임하는 자세가 되어 있어요. 그렇잖아요?
케이트의 기도는 켄턴 시에 불고 있는 흥미롭고도 낭만적인 기류를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천공의 기사들은 켄턴의 유소년들의 폭
발적인 열광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으며 "얘야. 장래에 뭐가 되고 싶으
니." "천공의 기사요!" 이 도시의 전도유망한 청년들로 하여금 은밀한
경외감 속에 괴로워하게 하고 있으며 "이보게, 기사가 되고 싶은 겐
가?" "천공의 기사들 때문은 아닙니다. 저는 원래 거기에 관심이 있었
습니다!" 켄턴이 자랑할만한 숙녀들로 하여금 시력 저하의 오해를 받
게 만들고 있었다. "저것봐! 무스타파 경이 날 봤어!" "아닌 거 같은
데? 음. 왜 나를 보고 계실까." "너 눈이 어떻게 되었니?"
다이앤은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트 아가씨. 그래서는 안되요."
거룩한 자세로 기도 중이던 케이트는 살짝 고개를 돌려 다이앤에게
새침한 표정을 보내었다. 다이앤은 낮게 속삭였다.
"이곳은 레티의 수도원이에요. 이곳에서 아샤스께 드리는 기도를 해
서는 안되는 거에요."
"레티와 아샤스는 서로 사이가 나빠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세탁장에서 빵을 굽고 목욕탕에서 바
느질을 해서는 되겠어요? 안되겠죠? 레티의 수도원에는 레티를 만나
기 위해서 찾아오는 거에요. 알겠어요?"
케이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다이앤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잠
시 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보며 다이앤은 미소를 지었
다. 케이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엄숙하게 말했다.
"라고, 아샤스께 전해주세요. 레티님."
아아, 레티님! 다이앤은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저 애는 합리적이에
요, 그렇죠?
기도를 마친 케이트와 다이앤이 예배당을 나서자 신학에 커다란 관심
이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연병장이라고 불러줄만한 마당이 나타났
다. 일개 수도원에 필요한 마당으로서는 지나치게 넓으며 동시에 지나
치게 평탄화가 잘 되어있는 이 마당에서 레티의 수련사들은 그들의 기
도를 올리고 있었다.
"어깨에 힘 빼! 허리로 쳐라, 허리로!"
"네가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레티께서 휘두르는 것이다! 너를 잊
어!"
저 말에서 레티를 '네 애인' 으로 바꾼다면 여느 군대의 고참 하사관
이 외치는 말과 특별히 다를 바도 없을 것이다. "애인 손목을 쓰다듬
듯 부드럽게 검을 쥐어라!" 가벼운 차림을 한 채 줄을 맞춰 검을 휘두
르고 있는 수련사들의 모습은 이 도시에서 자라난 케이트나 다이앤이
보기엔 별로 독특한 장면도 아니었지만, 다이앤은 수련사들의 앞쪽에
서있는 몇몇 프리스트들 (다이앤은 하사관, 혹은 조교라고 생각했다.)
이 외치는 고함소리에서 이전에는 듣지 못했던 말들이 섞여 있는 것을
깨달았다.
"레티께 맹세코, 이 멍청한 놈아! 넌 수련사다, 천공의 기사가 아니
야! 적을 경배하지 말고 검을 경배해라!"
저게 무슨 뜻일까? 다이앤은 멍청히 선 채 프리스트를 바라보았고 그
러자 어린애가 그렇듯이 금방 집중력을 잃어버린 케이트는 수련사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프리스트에게 꾸지람을 들은 수련사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저, 그게 무슨 뜻입니까?"
프리스트는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수련사를 바라보았지만 다행히
도 군대였다면 일어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즉, 수련사의 무릎을 걷
어차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대신 프리스트는 노호한 기색이 완연한 얼
굴로 낮게 말했다.
"네 상대는 적이 아니라 검이다. 적을 상대로 삼으면 네가 보통 칼잡
이와 다를 바가 뭐냐? 칼잡이는 적을 가장 증오하며, 결국 칼잡이는
적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프리스트다. 네가 가장 두려워하고 동시
에 가장 큰 사랑을 바쳐야 되는 것은 네 칼이다. 알겠냐?"
"아…… 저, 그런데?"
"이 놈!"
군대야. 다이앤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인정했다. 걷어차인 무릎을 감
싸쥔 채 깡총깡총 뛰고 있는 수련사를 향해 프리스트는 격노한 목소리
로 외쳤다.
"그렇게 적을 쪼갤 듯이 검을 휘두르지 말란 말이다! 검이 힘들다.
엉! 검이 힘들어 한단 말이다!"
케이트는 다이앤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다이앤. 저게 무슨 말이에요? 칼이 힘들어 한다고요?"
다이앤은 고개를 돌려 케이트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
"마차에 올라가서 이야기하시죠, 케이트 아가씨. 기다리시지 않습니
까."
다이앤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던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 한
켠에 서있는 마차 위의 마부석에는 도대체 잘못 배치한 것으로밖에 보
이지 않는 마부가 근엄한 얼굴로 케이트와 다이앤을 바라보고 있었다.
케이트는 마차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딤라이트 겨어엉! 많이 기다리셨어요?"
케이트는 마차로 달려가며 외쳤다. 딤라이트는 가볍게 고개를 돌렸
다.
"아닙니다. 레이디 케이트. 오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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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5525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08 02:06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5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5.
케이트는 딤라이트의 말을 따랐지만 딤라이트와 다이앤 모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마차에 올랐다. 마부석에 뛰어올라 딤라이트의 옆에 앉
은 케이트는 헤헤 웃으며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딤라이트는
잠시 케이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레이디 케이트. 마차 안에 타십시오."
"싫어요. 나도 여기 타고 싶어요. 안쪽은 갑갑해요. 다이앤! 다이앤
도 여기 앉아요. 저기, 반대쪽에 앉으면 되겠네요."
상당한 잔소리를 늘어놓으려고 마음 먹고 있던 다이앤은 케이트의 이
제안에 재빨리 말을 삼켰다. 그리고는 '철없은 주인 때문에 몹시 속이
상하지만 아랫사람의 입장으로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으
니 양해해달라'는 상당히 긴 내용이 담긴 상당히 짧은 표정을 지어보
이고는 재빨리 마부석에 올랐다. 딤라이트는 순식간에 케이트와 다이
앤에게 포위되어 버렸다. 난처한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보던 딤라이트
는 빙긋 웃고 있는 다이앤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만약 이 자리에 앉
은 것이 딤라이트가 아닌 무스타파였다면 다이앤의 표정은 단숨에 해
석되었을 것이다.
2 : 1이에요. 물론 기사님께서는 200 : 1이라도 물러서지 않으시겠지
만, 어때요. 항복하시죠?
물론 딤라이트는 무스타파가 아니었지만 더 이상의 항변이나 권고는
그다지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점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딤라이
트는 애꿎은 말에게 화풀이를 했다.
"이랴!"
말들이 발을 떼고 마차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케이트는 환호를
지르고 싶었지만 수도원 안에서 떠들면 안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
다. 그래서 케이트는 마차가 수도원의 정문을 통과할 때까지 기다렸다
가 환호를 지르는 재치를 발휘했다.
"야아아!"
딤라이트는 미소띤 얼굴로 케이트를 돌아보았다. 케이트는 팔을 휘두
르며 환한 얼굴로 말했다.
"더 빨리 달려요, 더 빨리!"
"절대로 안됩니다. 레이디 케이트."
"히이잉! 조금만 더 빨리. 예? 조금만!"
딤라이트는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은 전차가 아닙니다. 지금도 충분히 빠릅니다. 말들을 괴롭힐
필요는 없습니다."
케이트는 딤라이트를 향해 입술을 비죽거려 보이고는 다시 옆을 바라
보았다. 간신히 말할 기회를 잡은 케이트는 다소곳하게 말했다.
"딤라이트 님. 수도원에 들리신 일은 어떻게 되셨는지요?"
"예. 원장님께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업무가 있으실 텐데도 불구하고 케이트 아가씨와 저를 동반
해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희들 때문에 기사님께서 이렇
게 마부처럼……"
"아니오. 괜찮습니다. 이것은 제 의무입니다."
"예?"
"기사의 의무 말입니다."
"아아, 예."
딤라이트는 기사다. 그렇기에 모종의 상담을 위해 레티의 수도원장을
찾아오는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에 두 명의 레이디가 동행하고 싶어한
다면 말 대신 마차를 몰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이앤은 딤라이트가 말에
타지 못해서 불쾌해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상과는 전혀 다르다.
"검이 힘들다는 것은 무슨 말이지요?"
케이트는 고개를 돌려 딤라이트에게 질문했다. 딤라이트는 앞을 본
채로 대답했다.
"검이 힘들어할 까닭이 있습니까. 쇠붙이인데요."
"아까 프리스트님이 그러던데……"
"그것은 마치 그럴 거라고 생각하라는 말씀일 겁니다."
"예?"
마차바퀴는 잘 정리된 흙길 위에서 뽀얀 먼지를 피워올리며 굴러갔
다. 길 앙편으로 흐드러진 풀잎 속에는 늦은 봄꽃들이 나그네의 코를
자극하는 향취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내키지 않는 듯, 그
러나 막힘없는 말투로 설명했다.
"검을 경배하라는 말도 들으셨을 겁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보시면 이
해에 도움이 되시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가느다른 갈대 줄기와 철봉,
양자 중에서 어느 것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겠습니까. 물론 갈대 줄
기가 가벼운 만큼 훨씬 쉽게 휘두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대로 휘
두를 수 있는 것은 철봉입니다. 갈대 줄기의 경우 어딘가에 부딪히기
라도 하면 당장 부러질 테니까요. 검이 힘들어할 거라고 생각하라는
말은, 검이 어딘가에 부딪히면 부러질 거라고 믿는 것처럼 소중하게
다루라는 말입니다."
"왜요? 칼이 잘 부서지나요?"
"서툰 대장장이가 아무렇게나 만든 검이 아닌 바에야 검이 부러지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하지만 검이 부러질 거라고 생각하게 되면 검을
쥔 손이 조심스러워지고 그 행동이 조심스러워질 겁니다. 쓸데없는 동
작이나 자신의 균형까지도 해치는 큰 동작이 없어지겠죠. 레티의 프리
스트께서는 대략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저희들과는 조금
다르군요. 기사들이 견습기사들을 가르칠 때는 검을 마음대로 뿌리라
고 말합니다.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파괴력은 아무런 잡념도 없
는 마음에서 오로지 간절한 염원만으로 무의식 중에 내는 힘입니다.
수레에 깔린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 수레를 번쩍 들어올리는 어머니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되겠지요. 잡념이 섞이면, 그러니까 내가 상대를 이
길 수 있을까, 이 자를 벨 수 있을까, 피하고 나를 때리면 어쩌나 등
의 생각을 하며 검을 휘두르는 기사는 그 검끝이 흔들리고 동작이 흩
어집니다. 검은 마음을 표현하며 흔들리는 검끝은 흔들리는 마음과
같은…… 레이디 케이트?"
딤라이트는 잠시 고삐를 내려놓고는 자신의 망토를 풀어 케이트를 덮
어주었다. 케이트는 조금 뒤척거리다가 다시 망토 아래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다이앤은 살짝 웃었다.
"기사님. 대단하세요! 그 재주를 배웠으면 좋겠어요. 케이트 아가씨
를 재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아세요?"
딤라이트는 별 대답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왠지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해버린 기분을 느낀 다이앤은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묵직한 고요가 내려앉았고 말발굽 소리와 바퀴 소리는 그런 두
사람을 비웃듯이 짜랑짜랑하게 울려퍼졌다.
"저, 무례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말씀을 나누셨나요?"
이 하녀는 왜 기사의 일에 신경을 쓰는 걸까. 딤라이트는 조금 불쾌
감을 느꼈지만 그의 몸에 익어버린 예절은 다이앤의 질문에 대답할 것
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도 당장.
"제 거취에 대한 조언을 얻고자 했습니다."
"거취요?"
"아시겠지만, 저는 죽은 자입니다."
다이앤은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딤라이트는
여상스럽게 말했다.
"이 시대에 잘못 던져진 자로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여쭤보았습니
다."
"그래서…… 원장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제 경우라는 것이 워낙 희귀한,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사상 처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비교하여 이해할 만
한 다른 경우가 없습니다. 하지만 원장님께서 해주신 말씀 중에 한 마
디는 기억에 남는군요."
"어떤 말씀인데요?"
"그건 모든 이의 고민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이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는 표정이 분명했지
만 딤라이트는 더 설명하지는 않았다. 대신 딤라이트는 레티의 수도원
의 약간 건조하기까지 한 원장실에서 그에게 조용히 이야기하던 수도
원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모든 자들의 고민이오.'
딤라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원장은 딤라이트가 말할 기회
를 주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지는 짐작하겠소. 당신과 당신 동료들
의 경우가 유별나다는 것은 알아요.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겪은 것과
비슷하기라도 한 경험도 없는 것이 사실이고. 하지만 고귀한 기사여.
이 모자란 자가 보기에 모든 이는 한번쯤은 당신과 같은 고민을 하오.
자신이 잘못된 시대에 던져졌다는 것.'
딤라이트는 처연한 눈으로 원장을 바라보았다. 원장은 눈을 내리감았
다.
'딤라이트 경. 내가 해답을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여기지 않겠지요.
핸드레이크라도 이런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이 시대
는 당신을 부른 적이 없고, 당신은 이 시대를 찾아오고자 한 적이 없
소.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것은 모든 시대의 모든 이에게 마찬가지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다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말인지는, 당신 같은
성숙한 남자에겐 충분히 이해될만한 말이라 여겨집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딤라이트는 피로감이 느껴지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원장은 고개
를 가로저었다.
'모든 자들이 선택하는 방식을 따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걸어가시
오.'
'저는 사라져야 할 자입니다. 이 땅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원장은 빙긋 웃었다.
'반갑구려. 사실은 나도 그렇소.'
딤라이트는 잠시 침묵한 다음 작별 인사를 떠올려야 했다.
딤라이트는 상념 속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더 많은 상념이 그를 찾
아올 뿐이었다. 수도원을 찾기는 했지만 별 기대는 없었다. 다만 차마
그의 동료들처럼 술과 전투에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기에 수도원을
찾았을 뿐이다. 그런데 아무 기대없이 찾아온 수도원의 원장이 건넨
짧은 말이 그를 계속된 상념에 잠겨들게 했다.
사실은 나도 그렇소.
고민에 빠져버린 딤라이트의 얼굴은 다이앤으로 하여금 아무런 말도
못붙이게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다이앤은 레티의 수도원에서 성벽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 동안 욕구불만과 후회에 휩싸여 있었다. 차라리 케
이트 아가씨를 데리고 마차 안으로 들어갈걸. 너무 불편해. 다이앤은
딤라이트의 건너편에서 곯아떨어진 케이트를 향해 눈을 흘기기까지 했
다. 못된 아가씨. 괜한 고집을 피워 사람을 난처하게……
"눈이 불편하십니까."
"아니오! 천만에요! 아가씨가 잘 주무시는지 걱정이 되어서요. 예.
그래서요."
"아아, 네."
딤라이트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마차를 모는 일에만 관심을 집중시켰
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마차가 켄턴 성벽 가까운 곳의 갈림길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그레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다이앤은 숨통이 탁 트일 지경이었고 졸고 있
던 케이트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이 덜
깬 그녀의 눈은 그녀가 왜 이곳이 침대가 아닌지 이상하게 여기고 있
다는 것을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하지만 딤라이트는 상공을 바라보고
있느라 두 레이디에게 사과할 겨를이 없었다. 딤라이트는 노기가 충천
한 얼굴로 외쳤다.
"그레이! 이봐, 그레이!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늘에서 약간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딤라이트의 질문에 대답해왔다.
"어, 딤라이트?"
"어, 딤라이트? 자네 지금 어, 딤라이트라고 말했나? 지금 뭣하는 거
냐고 물었잖아!"
"보고있는 대로의 일을 하고 있다네, 친구. 아, 소개하겠네. 이쪽
은…… 그런데 아가씨 이름이 뭐더라? 아아, 클로디아! 클로디아 양을
소개하겠네."
딤라이트는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페가서
스 헐스루인에 올라탄 처녀를 바라보았다. 클로디아라는 그 처녀는 약
간 낭패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그러나 웃으면서 딤라이트를 향해 고개
를 끄덕여보였다. 딤라이트는 분기탱천하여 말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 이게 아니고!" 어쨌든, 딤라이트는 기
사다. 그래서 딤라이트는 이것아, 왜 내 페가서스 위에 네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거냐? 라고 말할 수는 없다. "클로디아 양. 어떻게 해서
미거한 본인의 승용물에 귀하신 몸을 맡기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만?"
클로디아는 뭐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그 때 그레이가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꽉 잡아요, 클로디아."
그레이는 킨 크라이에 탄 채 헐스루인의 고삐를 이끌고 있었다. 그래
서 헐스루인은 그레이의 인도에 따라 부드럽게 땅에 내려섰다. 딤라이
트는 미숙한 기수를 떨어뜨리지 않고 착륙한 헐스루인에게 애정어린
시선을 보냄과 동시에 자신이 아닌 다른 자를 태우고 있는 헐스루인에
게 잡아먹을 듯한 시선을 보내었다. 그레이는 그런 딤라이트를 보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그렇게 복잡한 시선을 보내나?"
딤라이트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눈이 두 개니까. 길어도 좋고 짧아도 좋지만,"
"앞뒤는 맞아야 하고 태도는 착실해야 된다, 이 말이지? 알았어. 착
실하게 앞뒤가 맞는 변명을 하겠네."
하지만 그레이는 당장 변명할 수는 없었다. 딤라이트는 그레이의 말
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헐스루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공손한
태도로 클로디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클로디아는 잠시 당황한 눈으로
딤라이트가 내민 손을 바라보다가 퍼뜩 사태를 이해하고는 그 손을 붙
잡고 아래로 내려섰다.
"고맙습니다."
"불편하시지나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비행은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이니까요."
딤라이트는 클로디아를 향해서는 절대로 무례한 시선을 보내지는 않
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그레이를 바라보는 딤라이트의 눈은 무례한
정도가 아니라 살기를 담고 있었다. 그레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주절거
리기 시작했다.
"아아, 글쎄. 참 신기하더라고.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닌데, 놀랍도
록 서로 의사가 통하던걸? 클로디아 양은 재치있고 상냥한 아가씨였
어. 금상첨화로 미인이시고. 그래서 말이야. 음, 난 자네가 저기 어린
숙녀를 태우는 것을 보고는 클로디아 양을 헐스루인에 태워도 될 거
라고 생각했지. 보라구. 항상 말한 거지만, 킨 크라이의 등은 너무 좁
잖아. 그런 점에서 무스타파 녀석은 정말 좋을 거란 말이야. 아이라의
그 넓은 등이라면 레이디 일개 소대를 태워도 될 걸."
딤라이트는 꼿꼿이 선 채 그레이를 쏘아보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
은, 그레이의 말은 앞뒤가 맞지도 않았고 말하는 태도도 그다지 착실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딤라이트는 그레이에게 더 이상 다른 변명의
말을 기대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클로디아를 바라보았다.
"레이디 클로디아. 저런 위험한 승용물에 오르시도록 방치한 점, 동
료를 대신하여 사과드립니다. 마차에 오르십시오. 댁까지 모셔다드리
겠습니다."
"예? 아, 아니에요. 기사님. 제 집은 가까워요. 저, 그리고 허락도
없이 타서 죄송합니다."
"천만에요. 대충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레이 휠드런 경은 쾌활한
사내니까요."
딤라이트가 말한 '쾌활한 사내' 라는 말에 담겨있는 속뜻은 케이트를
제외한 그 자리에 있는 누구에게라도 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앞뒤없고 경우없고 무례하다는 뜻을 '쾌활하다'는 한 마디로 표현해버
리는 딤라이트를 보며 다이앤과 클로디아는 동시에 입가에 웃음을 머
금었다. 그리고 그레이는 입매를 조금 뒤틀었다.
그러나 어쨌든 천공의 기사들의 우두머리였으니만큼 그레이는 클로디
아가 사라지면 딤라이트가 어떻게 변할지는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레이는 딤라이트와 클로디아가 작별 인사를 나누는 동안 재
빨리 킨 크라이 위에 올라타면서 말했다.
"자, 딤라이트. 숙녀분들에 대한 용무가 끝나거든 어서 성벽으로 오
게."
"성벽? 왜지?"
"빛의 탑에서 샌슨 경이 보낸 사람이 도착했네. 우리의 늙은 친구는
그 자가 가져온 것을 보고는 지팡이 없이도 하늘을 날겠다는 듯이 펄
쩍 뛰더군. 자네도 보고 싶겠지?"
"곧 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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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여러가지 일 때문에 바쁜 며칠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규칙적일 거
라고는 말씀드리기 어렵겠습니다만 되도록이면 규칙적으로 글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번 호 : 15526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08 02:07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6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6.
그러나 잠시 후 딤라이트가 켄턴 성벽 위에 몸을 나타내었을 때는 두
명의 레이디가 동반된 모습이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간다
고 주장하는 듯한 얼굴의 케이트와 케이트 아가씨가 가는 곳은 어디든
간다고 주장하는 듯한 얼굴의 다이앤이 딤라이트의 좌우에 붙은 모습
으로 함께 나타났던 것이다. 그레이는 그런 딤라이에게 몰상식한 시선
으로 바라보며 '전선에까지 여자를 끌고다니냐.'는 둥의 악의 없는 농
담을 퍼부어대었지만 딤라이트는 고지식하게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
고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항변했다.
"유일하고도 가장 순수한 기쁨을 내게 주는 기사도에 비춰보아도 나
의 행동 그 어느 곳에라도 부끄러움의 소지가 있다고는……"
"딤라이트. 시끄럽소.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는 난 미쳐버리고 말 것
같은데."
솔로쳐는 옆을 가리켜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솔로쳐의 옆에는 길게
땋은 머리 위로 묘한 모양의 서클렛을 끼고 조끼와 망토를 제멋대로
착용한 사나이가 서있었다. 그는 엄격한 얼굴을 한 채 솔로쳐의 옆에
서있었고 공손히 내밀어진 두 손에는 작은 상자 하나를 받쳐들고 있었
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재능의 소유자
였는데, 놀랍게도 세 가지 방식으로 윙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왼쪽 눈을 감거나, 오른쪽 눈을 감거나, 아니면 미간 조금
위에 달린 가운데 눈을 감거나.
딤라이트는 그 세 개의 눈을 바라보고는 놀라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자신의 떳떳함을 만천하에 공표하려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그
의 원군이 되어줘야 했을 케이트가 그를 배신했다. 케이트는 뽀르르
달려가서는 감탄한 표정으로 사나이를 올려보았던 것이다. 반면 다이
앤은 기겁한 표정으로 딤라이트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솔로쳐는 빙긋
웃으며 사내를 소개했다.
"빛의 탑에서 날아오신 시몬슬 군이오. 내 물건을 가지고 왔지."
시몬슬이라 불린 마법사는 싱긋 웃었다. 케이트는 입을 쩍 벌린 채
말했다.
"눈이…… 세 개네?"
시몬슬은 히죽 웃으면서 세 개의 눈동자를 한곳으로 모아보였다. 케
이트는 까르르 웃었지만 그 모습을 보며 침착할 수 있는 것은 솔로쳐
와 케이트 뿐이었다. 무스타파와 그레이조차도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
는 분위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몬슬과 거리를 두고 있었
다. 쥬리오 시장이나 히든보리 사집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딤
라이트는 척척 걸어가서는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일스의 딤라이트라고 합니다."
시몬슬은 딤라이트의 손을 마주 쥐었는데 그 동작에는 딤라이트도 조
금 놀랐다. 시몬슬이 상자를 내버려둔 채 딤라이트와 악수했음에도 불
구하고 상자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솔로쳐는 후학의 이런
잔재주를 웃음으로 무시해주었고 시몬슬은 유쾌하게 말했다.
"남보다 많은 눈이지만 이런 광경을 직접 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
니다. 천공의 기사님."
"그 눈은?"
"아아, 양초 값이 아까워서 불 켜지 않고도 책을 볼 수 있도록 인프
러비젼의 눈을 하나 이식했지요."
솔로쳐는 그 쯤에서 끼어들기로 마음먹었다.
"자, 시몬슬 군. 그 물건을 이리 주겠나?"
시몬슬은 경의가 어린 동작으로 까마득한 사조에게 상자를 건네었다.
물론 마법으로 건네는 무례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시몬슬은 두 손으
로 정중하게 상자를 내밀었다. 솔로쳐가 그 상자를 받아들자 시몬슬은
감개 무량한 표정으로 상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300년 만에 주인에게 돌아가게 되었군요. 솔직히 저희들은 이런 것
이 있다는 것까지 잊고 있었습니다. 루조차도 이것이 있다는 것은 기
억하고 있었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빛의 탑의 모
든 마법사와 견습생이 총동원되어 간신히 찾아내었지요."
"당연하지. 내가 있던 시절과 마찬가지라면 지금 쯤 빛의 탑은 더이
상 층수나 벽으로 구분할 수 없는 지경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있을걸."
"말씀하신대로입니다."
"열어보고 싶은 생각은 없던가?"
시몬슬은 계면쩍게 웃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은 마법사가 있다면 그 친구는 빛의 탑에서
쫓겨날 녀석이지요. 하지만 루가 조언해주었습니다. 무지개의 솔로쳐
가 맡긴 상자를 감히 열어보고 싶어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트롤보
다도 저조한 지성의 소유자일 거라고 하더군요."
"그 조언을 받아들인 것은 잘했네. 하지만 조금 있으면 후회할 걸
세."
시몬슬은 세 개의 눈을 모두 커다랗게 떴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말
하기 전에 케이트가 먼저 솔로쳐의 손에 들린 상자를 보며 말했다.
"이게 뭐에요, 대마법사님?"
솔로쳐는 늙은 얼굴을 온통 찡그리며 함뿍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하하, 키티 데시. 이것은 말이다. 내 스승님께서 내게 남겨주신
선물이지."
그레이는 눈을 껌뻑거렸다.
"핸드레이크님께서 남긴 물건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레이. 이 시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신네들은 핸드레
이크와 열두 드래곤의 노래는 들어보았겠지?"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쥬리오 시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솔로쳐 님. 그 노래는 아직까지도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이 물건은 그 때의 증거품이오. 전리품이라고도 할 수 있
고."
사람들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시몬슬과 히든보리가 얼굴에
떠올린 표정은 그 중에서도 압권이었다. 히든보리 사집관의 얼굴을 본
솔로쳐는 그가 상자 내의 물건이 뭔지 곧장 짐작해내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솔로쳐는 짓궂어 보이는 미소로 말했다.
"히든보리, 짐작하겠소?"
히든보리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떨고 있었다.
"맙소사. 그 물건이 제가 짐작하는 것이라면, 데스나이트들은 이제
가장 어울리는 짝을 만나버린 것 같군요! 아니, 정정하겠습니다. 데스
나이트들은 이제 그들 자신도 공포, 절망, 어둠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을 알게 될 겁니다."
시몬슬의 경악도 히든보리에 못지 않았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소, 소, 솔로쳐 님. 진짜 그겁니까? 예? 정말로 그것이……"
"그렇네."
"오, 맙소사. 열어볼걸!"
"후회할 거라고 했지? 자, 천공의 3 기사 여러분. 데스나이트들에게
이 친구들을 소개해 줍시다."
솔로쳐는 그렇게 말하며 상자를 열어보였다.
딤라이트는 멀리 평원 위로 꿈틀거리고 있는 검은 안개를 바라보았
다. 검은 안개에는 촛점을 맞출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너무 짙
고 너무 두터운 안개였다. 남달리 좋은 시력을 가지고 있는 천공의 기
사였지만 딤라이트는 그것을 바라보며 일그러진 환상을 보는 것 같은
기분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 후 딤라이트는 다른 것을 느꼈
다.
"왠지 더 커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무스타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다.
"그런 거 같군.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우리들을 발견한 것일까."
"당연히 발견했겠지. 그레이와 병사들이 저렇게 소란을 부리고 있는
걸."
무스타파가 가리킨 방향을 보던 딤라이트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
덕였다. 그레이는 켄턴에서부터 끌고 나온 병사들을 정렬시키기 위해
분주히 노력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 위에
서, 게다가 데스나이트들의 검은 안개가 지척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곳
에서 절도를 지켜 조용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계속 불안스럽게
몸을 움직였고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레이는 마침내 만족할 수준으로 병사들을 정렬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마의 땀을 닦아낸 그레이는 우쭐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자아, 친구들. 내가 손을 내리면 시작하는 겁니다. 준비됐죠?"
"됐습니다!"
병사들은 일단 씩씩하게 대답했고 그 대답을 들으며 그레이는 함박웃
음을 지었다. 팔짱을 낀 무스타파와 시선을 내리깐 채 곤혹스러워하는
딤라이트가 바라보는 가운데 그레이는 힘차게 손을 내렸다.
병사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약속된 파멸을 내재한 창조여! 하나된 허무로 회귀할 만물이여! 레
티의 검 아래 스러진 것들에 남겨질 이름은 없다! 파멸의 레티여!"
그레이는 신들린 듯이 지휘해대었고 이미 그 악랄한 박자 무시와 처
절한 음정 무시로 높은 위명을 획득하고 있던 켄턴 경비대원 합창단은
바락바락 노래를 불러대었다. 그러자 꿈틀거리고 있던 검은 안개 안에
서도 거친 노랫소리가 터져나왔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
트트의의 율율법법!"
"막상막하야."
솔로쳐는 그렇게 상당히 생략되었지만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해할 수 있는 말을 툭 던지듯히 말하고는 시몬슬에게 몸을 돌렸다. 시
몬슬이 들고 있던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솔로쳐는 낮게 말했다.
"빼돌린 거 다 내어놓게."
시몬슬은 그만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 되어 솔로쳐를 바라보았
다. 하지만 솔로쳐는 겨울 들판의 소나무보다 더 냉엄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몬슬은 안간힘을 다 써서 말했다.
"소, 소, 솔로쳐님. 다시는 회수하지 못합니다……"
"알고 있어."
"이런, 이런 귀한 재료는 두번 다시는 못구할 거, 겁니다. 제발, 후
학들을 위해서 하나나 두 개만 남겨주십시오. 이렇게 많잖습니까?"
시몬슬은 세 개의 눈 모두에 간절한 염원을 담은 채 솔로쳐를 바라보
았다. 하지만 솔로쳐는 피식 웃었다.
"내놔."
시몬슬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
다. 로터스 경비대장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시몬슬은
상자에서 슬쩍 빼내었던 것들을 꺼내어놓았다.
그것은 날카롭고 단단하게 생긴 세 개의 이빨이었다. 보통 성인의 손
가락보다도 더 큰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리하여
마치 나이프처럼 보이는 이빨이었다. 솔로쳐는 시몬슬의 손에서 그것
들을 주워들며 말했다.
"이런 걸 바지 주머니에 넣다니, 다리 안 아프던가?"
시몬슬은 마치 잔뜩 골이 난 어린애처럼 말했다.
"다리에 박혔더라도 하나도 안아팠을 겁니다."
"그 상자는 일단 들고 있게. 이 세 개로 먼저 시험해보지."
시몬슬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 변화무쌍한 표정을 보며 솔로쳐는 핏
웃어버렸다.
"그런 못된 손버릇을 구사하기 전에, 먼저 정중하게 요청했었어야지.
마법사 아니랄까봐 잔재주를 부릴 생각밖에 안하나."
시몬슬의 얼굴이 다시 바뀌었다. 이번에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회한이라는 제목을 붙이기에 적당한 표정이었다. 솔로쳐는 다시 웃으
며 몸을 돌렸다.
검은 안개는 이제 노랫소리를 향해 똑바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마치
산이 움직이는 듯한 그 모습을 보게 되자 경비대원들의 노랫소리도 조
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데스나이트들의 노랫소리는 더욱 거
칠게 울려퍼졌다. 딤라이트는 이제 검은 안개 속에서 번쩍이는 병장기
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울려퍼지는 거친 발자국 소
리도 들을 수 있었다.
"자, 싸움이 시작됐군. 로터스 경비대장! 경비대원들을 맡으시오!"
그레이는 그렇게 외치며 킨 크라이에 올라탔다. 딤라이트와 무스타파
역시 헐스루인과 아이라에 올라타고나자 솔로쳐는 앞으로 조금 걸어갔
다.
그리고 솔로쳐는 정원사의 기쁨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솔로쳐는 먼저 가만히 서서 땅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팍! 하
는 소리와 함께 땅에 조그만 구덩이가 생겨났다. 솔로쳐는 허리를 구
부려서는 손에 들고 있던 이빨들을 구덩이 속에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발로 흙을 밀어넣어 구덩이를 다시 메우고는 몇 번 밟았다. 누가 보더
라도 씨를 묻는 정원사 같은 모습이라고 할만한 광경이었다.
솔로쳐는 지팡이를 세워들고는 두 눈을 내리감고 나직하게 중얼거리
기 시작했다. 시몬슬은 귀도 세 개를 달아두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안
타까운 생각을 하며 솔로쳐의 목소리에 집중했지만 병사들의 발자국소
리와 다가오는 데스나이트들의 소란 때문에 솔로쳐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솔로쳐가 심어둔 '작물'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땅이 스멀거리며 움직였다. 그것은 솔로쳐 앞의 넓은 땅에서 동시에
여러 군데에서 일어났다. 솔로쳐 앞의 수백 평방 큐빗 전체의 땅이 마
치 파도치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경비대원들은 탄성을 질렀고 천공의
기사들은 침묵 속에서 땅을 주시했다. 솔로쳐는 짜랑짜랑하게 외쳤다.
"자, 일어나라, 드래곤 솔져!"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나는 것처럼, 드래곤 솔져들은 땅을 헤치며
솟아올랐다.
전사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검집도 없었다. 피도 묻지 않을 만큼 매끈
한 칼날을 가진 거대한 검을 오른손에 들고 있을 뿐이었다. 왼팔에는
거대한 타워 실드를 들고 있었고 갑옷은 입지도 않았다. 벌거벗은 상
체에는 쇠막대기 같은 근육들이 어지럽게 엉겨있었고 이목구비는 조금
씩 달랐지만 모두 한결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장 잘 단련된 전사
의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그런 전사들이 수백 평방 큐빗의 땅에서 솟
구쳐오른 것이었다.
드래곤 솔져들은 솔로쳐도 바라보지 않았고 다가오는 검은 안개도 바
라보지 않았다. 그들은 질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켄턴 경비대원들이
나,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놀라버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천공의 기사들과 그들의 승용물에게도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의 대상은 자신의 형제들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그대로,
그러나 드래곤 솔져들은 천천히 어깨를 긴장시키기 시작했다. 그 때
솔로쳐가 맹렬하게 외쳤다.
"자네들끼리 싸우는 것은 금지한다!"
드래곤 솔져들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
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일이오. 당신에게 그것을 금지시킬 권한
이 있소?"
듣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귀를 의심할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
였다. 미성이라고까지 부를 수는 없겠지만 흉맹하고 야만스러워보이는
모습에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이긴 했다. 그레이는 몸을 부
르르 떨고는 무스타파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무 안어울리는 목소리라고 생각되지 않아?"
"그렇군."
솔로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권한은 없어. 보다 많은 것을 아는 자가 건넬 수 있는 조언의 권한
이외엔. 지금 자네들끼리 마지막에 남을 자들을 위해서 싸운다면, 그
남은 자들은 데스나이트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드래곤 솔져들은 분명히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가오고 있는 검은 안개를 바라보았다. 그런 드래곤 솔
져들을 향해 솔로쳐는 빠르게 말했다.
"지금은 서로를 아껴라! 자네들이 서로를 죽이는 이유는 가장 강한
몇 명만을 남기기 위해서잖은가! 하지만 지금 자네들이 서로를 죽여댄
다면 아무도 남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데스나이트들은 몇 명 밖에 남지
않은 드래곤 솔져는 손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원하나!"
드래곤 솔져들은 의혹을 담은 눈으로 솔로쳐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때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
다.
"형제들이여. 의식은 싸움 후로 미룰 것을 제안한다. 저 분의 말이
옳을 것 같다."
말을 마친 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데스나이트들을 향해 달려가기 시
작했다. 그리고 다른 드래곤 솔져들 역시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없이
그대로 그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거대한 검과 타워실드에도 불구하고
드래곤 솔져들은 민첩하게 땅을 달리며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달려오는 드래곤 솔져들을 보게 되자 검은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삼엄
한 노랫소리들 사이에 분노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용용아아병병! 저저 마마법법사사에에게게 드드래래곤곤의의 이이빨
빨이이 있있었었나나!"
드래곤 솔져들은 씩 웃으며 검은 안개를 향해 무섭게 돌진했다. 그
모습을 보던 그레이는 씩씩하게 외쳤다.
"가자, 친구들! 일스 기사단원이 용아병들의 뒤에 숨어있을 필요는
없다. 데스나이트로 하여금 누가 더 무서운 적인지 판단하게 하자!"
킨 크라이는 포효하며 솟구쳐 올랐고 그 뒤를 따라 헐스루인이, 그리
고 거대한 몸 때문에 아이라가 마지막으로 솟아올랐다. 로터스 경비대
장 역시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켄턴, 루트에리노! 이 땅이 누구의 땅인가? 이 땅 위를 달려 적을
분쇄하는 것은 누구의 사명인가? 가라, 루트에리노의 아들들이여!"
"으아아! 켄턴, 루트에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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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신 분들은 사전 뒤져보셔도 좋을 듯. dragon's teeth라는 말은
원래 용아병의 전설에서 나온 단어지요.
좋은 밤 되세요.
번 호 : 15606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09 02:45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7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7.
"이이 검검을을 받받을을 수수 있있겠겠느느냐냐!"
데스나이트는 호기어린 동작으로 공간을 끊어내렸다. 갈라지는 공기
들이 절절한 비명을 올리는 가운데 똑바로 쏘아져내린 검은 드래곤 솔
져의 오른쪽 어깨를 치고 내려왔다. 드래곤 솔져는 무표정했다. 어깨
너머에서 튕겨져나온 그의 검이 데스나이트의 검을 허공에서 비끄러매
었다. 콰가각! 거대한 두 개의 검이 부딪히며 불꽃이 비산했다. 데스
나이트는 신음을 토하며 맞서기에 들어섰으나 드래곤 솔져에게는 검
을 마주대고 용쓰는 취미가 없었다. 드래곤 솔져의 왼쪽 어깨가 움직
이기 시작했고, 데스나이트는 경악했다.
"무무슨슨 짓짓이이……!"
드래곤 솔져의 타워 실드가 허공을 갈랐다. 날붙이는 아니지만 검과
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 막대한 중량이 실린 타워 실드의 날(?)이 수
평선을 긋자 온몸을 울리게 하는 충격음이 퍼졌다. 쾅깡깡! 병사들이
백병전에서 삽이나 손도끼 휘두르는 식이다. 무지스러운 공격에 명중
당한 데스나이트의 투구는 거의 박살날듯 우그러지며 하늘로 솟아올랐
다. 독한 연기와 포효 속에 무너지는 데스나이트를 보며 드래곤 솔져
는 희박한 유머 감각을 발휘했다.
"이 방패를 받을 수 있겠느냐."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또다른 드래곤 솔져가 인간 병사들이었다면 상
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해내고 있었다.
"흐이아아압!"
비명과 같은 기합소리. 드래곤 솔져가 내지른 검끝은 마상의 데스나
이트의 복부를 꿰뚫었다. 앞으로 무너지는 데스나이트의 멱살을 왼손
으로 거머쥔 드래곤 솔져는 데스나이트의 거대한 갑주를 머리 너머로
완전히 집어던졌다. 까랑깡깡까랑! 갑주들의 부품이 제멋대로 해체되
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나 드래곤 솔져는 자신의 업적에
대해 도취되는 대신 지금껏 데스나이트가 타고 있던 괴수의 고삐를 잡
아챘다. 하늘에서 그 모습을 보던 그레이는 목이 터져라 웃었다.
"저것이 용아병인가! 승용물의 외양에 신경 안쓴다는 점에서 천공의
명예 기사로라도 받아들여야겠군!"
드래곤 솔져는 그레이의 말 그대로였다. 드래곤 솔져는 그 위에 올라
타서 전투력만 끌어올릴 수 있다면 눈이 다섯 개든 꼬리 대신 뱀이 달
렸든 아무 신경도 안쓴다는 태도로 데스나이트의 괴수에 올라타려 했
다. 하지만 괴수는 앞다리 세 개로 하늘을 찌를 듯이 거칠게 반항했
다.
"갸다다다! 갸다다다!"
하마터면 세 개의 앞다리에 밟혀죽을 뻔했지만 드래곤 솔져는 타워
실드로 간신히 괴수의 공격을 받아내었다. 뒤로 넘어지지 않은 것은
묘기. 타워 실드가 사라진 곳에서 나타난 얼굴에는 투명한 분노가 어
려있었다. 드래곤 솔져는 괴수의 따귀를 올려붙이겠다고 결심했다. 타
워 실드로, 백핸드 풀스윙으로. 꽈광! 딤라이트는 헛바람을 삼켰다.
괴수의 입장에서라면 도개교에 깔리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1×2 큐빗
넓이의 철판으로 맞은 것이다. 거의 모로 쓰러질 뻔한 괴수가 제정신
을 차리기 위해 주춤거리는 동안, 드래곤 솔져는 날렵하게 몸을 날려
조금 전까지 데스나이트가 앉아있던 괴수의 등에 올라탔다. 월등히 가
벼운 기수의 몸무게에 괴수는 다시 심술을 부리려 했지만 드래곤 솔져
는 괴수의 뒷통수를 거머쥐며 나즈막하게 호통을 쳤다.
"일자 (一者) 이신 왕으로부터 너 빌어먹을 야수에게. '내게 복종하
라!'"
무스타파는 하마터면 아이라 위에서 뛰어내리며 성은이 망극하다고
외칠 뻔했다. 일스 대공 앞에 부복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박
력이었다. 일자왕인 드래곤의 위명을 빌린 드래곤 솔져의 호통에는 야
수와 기사 양자를 전율케 하는 힘이 있었다. 괴수는 침착해졌다. 아
니, 그것보다는 공포감에 빠져버린 듯했다. 갈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솟아나있던 지느러미와 가시들이 푸르르 떨렸다. 드래곤 솔져는 괴수
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고 괴수는 포효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일곱
개의 다리 모두가 허공에 뜬 것처럼 보이는 질주였다.
"갸다다다닷!"
괴수는 공포에 짓눌려 달리기 시작했고 드래곤 솔져는 타워 실드를
집어던진 다음 두 손으로 검을 휘저어대었다. 달린다기보다 난동을 부
린다에 가깝게 움직이는 일곱 개의 다리와 그 위에서 춤추는 검날은
그 전부가 가공할 흉기들이었다. 흩뿌려지는 드래곤 솔져의 검은 아군
과 적군을 구분치 않는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상공에서 바라보던 무스
타파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구분하지 않아. 서로를 죽이는 저들
의 의식은 유보된 것이지 취소된 것은 아닐 것이다. 매운 손속은 드래
곤 솔져의 완력과 괴수의 미친 듯한 질주와 결합되어 그가 지나가는
방향을 따라 전쟁터에 대로가 생겨날 지경이었다.
딤라이트는 무거운 한숨을 토하며 헐스루인을 아래로 몰아갔다. 옆으
로 늘어뜨려진 그의 활에는 이미 화살이 걸려 있고 또다른 화살 하나
가 입에 물려 있었다.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하늘에서의 저격은 무서
웠다. 빗방울처럼 쏘아진 화살은 어김없이 데스나이트들의 갑주 틈 사
이, 혹은 그 투구 속으로 파고들었다. 딤라이트는 또하나의 화살을 꺼
내며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든 이의 고민…… 그러나 나는 여기서 고민을 느끼지 않는다. 그
리고 그것은……"
"무스타파! 뒤를 따라라! 경비대원들이 포위되겠다!"
그레이는 뒤로 말들을 어지럽게 던져놓으며 아래로 날아들었다. 한
순간의 눈길로 전투 상황을 판단하는 기사의 눈에 경비대원들의 배후
로 접근해들어가는 데스나이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던 것이다. 훈련
된 전투마가 그러하듯 훈련된 킨 크라이는 야생의 그리폰은 취하지 않
는 자세로 마치 매처럼 떨어져내렸다. 빗겨든 그레이의 롱소드가 섬뜩
한 빛을 뿜었다.
"이이이이- 하!"
그레이는 데스나이트들의 상공을 면도질 하듯 스쳐지나갔다. 데스나
이트들은 공중을 향해 파이크를 세웠지만 그런 대공방어 자세를 유지
하기에는 전투 상황이 지나치게 난투적이었다. 로터스 경비대장은 공
포와 흥분 양자에 모두 몸을 맡긴 채 파이크를 세워든 데스나이트의
가슴을 향해 파고들었다. 데스나이트는 저주의 고함을 내지르며 세워
들었던 파이크를 그대로 몽둥이 후려치듯 아래로 휘둘렀다.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 앞앞에에 두두 발발로로 서서는는 것것으으로
로 이이미미 건건방방지지다다! 쓰쓰러러져져 개개처처럼럼 기기어어
라라!"
파이크의 창대가 로터스 경비대장의 어깨를 파고들듯이 명중했다. 와
드득. 한 순간 로터스 경비대장은 옆으로 휘청했다. 쇄골이 부러졌음
에도 불구하고 로터스 경비대장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눈 앞
이 하얗게 변했을 뿐이다. 눈이 뒤집힌 채로, 그러나 로터스 경비대
장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쓰러지려는 사람처럼 휘청거리
면서도 로터스 경비대장은 왼손으로 창대에 매달리며 검을 쥔 오른손
을 옆구리에 붙인 채 온몸으로 데스나이트에게 부딪혀들어갔다.
"죽음을…… 넘어서!"
쇠붙이가 긁히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데스나이트의 등 뒤로 로
터스의 검이 비죽하게 튀어나왔다. 데스나이트의 손에서 파이크가 떨
어져내렸다. 절그렁. 데스나이트는 두 손을 힘겹게 들어올려 로터스의
어깨를 짚었지만 로터스는 이미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데스나이트
에게 안겨있었다.
갑자기 데스나이트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뒤로 젖혀진 투구가 떨어
져내리며 곧이어 갑옷 전체가 폭발하듯 해체되었다. 로터스 경비대장
은 무너지는 갑옷더미와 함께 쓰러졌다. 땅에 얼굴을 박으면서도 로터
스 경비대장은 히죽 웃었다.
난전 중이라 지나치게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없던 솔로쳐는 몸 주위에
빛나는 화살들을 띄워둔 채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솔로쳐의 주위
를 맴돌고 있던 매직 미사일들은 솔로쳐의 손가락이 지시하는대로 날
아가며 데스나이트들을 명중시켰다. 솔로쳐는 그런 묘기를 부리면서도
아직 정신적 여유가 많다는 듯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경비대원들
을 독려하고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무스타파! 왼쪽으로. 기수를 부탁하오!"
"저 놈의 깃발을 켄턴에 바치겠소!"
무스타파는 입을 크게 벌리지도 않으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고
는 아이라를 아래로 몰아내려갔다. 거대한 와이번의 그림자가 전장에
드리워지자 전장의 하늘 위로 춤추던 검은 안개마저도 날개바람에 휘
말려 갈라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무스타파는 해를 등지며 아래로 떨어
져내렸다. 그의 목표가 된 데스나이트의 기수는 쏟아져내리는 햇살에
서 허둥지둥 고개를 돌리며 노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무스타파의 랜스
가 데스나이트에게 명중하기 직전, 뒤에서 뛰쳐들어온 드래곤 솔져가
당황하고 있는 데스나이트의 머리를 쪼개어놓았다. 무스타파는 당황하
여 아이라를 상승시키며 외쳤다.
"제길, 그건 내 거야!"
드래곤 솔져는 피식 웃고는 깃발을 주어들며 상공을 향해 일갈했다.
"당신은 천공의 '기사' 이고, 이 놈은 데스'나이트' 일지 몰라도, 나
는 드래곤 '솔져'요. 기사도를 말할 생각이라면 둘이서만 하시오."
"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녀석들! 좋아, 모두 쓰러트려라!"
"그렇잖아도 그럴 참이었소."
드래곤 솔져는 그렇게 말하며 주워든 깃발을 옆으로 휘둘렀다. 파르
르륵! 사악한 문양이 깃든 깃발은 진저리를 쳤고 깃대는 그대로 창이
되어 옆을 달리고 있던 데스나이트의 다리를 걸었다. 데스나이트는 속
절없이 쓰러졌고 드래곤 솔져는 쓰러진 데스나이트의 등으로 뛰어올라
검을 박아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넌덜머리를 내며 솟아오르던 무
스타파는 조금 먼 하늘에 떠있던 딤라이트를 향해 고함질렀다.
"끔찍한 놈들이군! 살해밖에 모르는 전투인형 같은 놈들이야."
딤라이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무스타파를 바라보는 딤라이트
의 얼굴은 조금 희게 변해있었다. 무스타파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
다.
"딤라이트! 이봐, 괜찮은가?"
"아아, 괘, 괜찮네."
"정신차려! 비록 난투 중이라지만 언제 화살이 날아올지 모른다! 데
스나이트잖아!"
"그래. 고맙네."
고맙다고? 무스타파는 더욱 어이가 없는 얼굴이 되어 딤라이트를 바
라보았지만 딤라이트는 이미 활을 단단히 쥐며 헐스루인을 몰아가고
있었다. 무스타파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아이라를 솟아오르게 만들었
다. 어쨌든 장애물이 없다는 점은 쏘는 쪽에서도 마찬가지인 만큼, 규
칙적인 비행은 위험하다.
딤라이트 역시 거의 본능적으로 헐스루인을 복잡한 궤도로 몰아가고
있었다. 전통에서 화살을 뽑아 시위를 거는 손길에는 불필요한 동작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까지 수많은 말들이 혼
란스럽게 뒤섞인 채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이의 고민이오.'
'내게 복종하라!'
'나는 여기서 고민을 느끼지 않는다.'
'죽음을…… 넘어서!'
'전투인형 같은 놈들이야!'
시위를 놓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줄이 딤라이트의 볼을 스쳤
다. 깜짝 놀란 딤라이트는 무의식 중에 볼을 쓸어만졌다. 진득한 느
낌. 피인가? 이런 멍청한 실수는 한번도 한 적이 없는데. 발사될 때
이미 흔들렸던 화살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딤라이트는 화
살의 궤적을 쫓는 대신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자신의 피가 벌
겋게 묻어있었다.
피도 흘리나. 죽은 몸이라는 것을 자꾸 잊게 만드는군.
"퇴퇴각각한한다다!"
분노 때문에 잔뜩 떨리는 고함소리가 전장을 가로지르자 가장 바깥쪽
에 있던 데스나이트들부터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드래곤 솔져들은 한
놈도 놓아보낼 수 없다는 듯이 기승스럽게 데스나이트들의 등을 유린
했지만 데스나이트들은 거칠게 몸을 빼내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솔로
쳐는 학수고대하던 순간이 다가옴을 깨닫고는 크게 고함질렀다.
"모두 멈추시오!"
고함을 지르는 솔로쳐의 두 손은 이미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경비
대원들은 외경심에 의해, 그리고 드래곤 솔져들은 그들만의 전투 감각
에 의해 제자리에 멈춰섰다. 데스나이트가 전장에서 빠져나와 분리가
이루어진 순간 솔로쳐는 벽력처럼 캐스팅했다.
"크리에잇 워터!"
"갸아아닷!"
첫번째 괴수가 비명을 지르며 발을 헛디뎠다. 괴수 위에 올라타고 있
던 데스나이트는 땅에 호되게 부딪히는 대신 물방울을 거칠게 튕겨올
리며 물 속으로 빠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연쇄적으로 데스나이트
들과 그 괴수들이 갑자기 수면으로 변한 땅 위에서 허둥거리며 쓰러지
고 아래로 잠겨들었다. 곳곳에서 물보라가 솟아오르며 데스나이트들의
포효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솔로쳐는 데스나이트들을 수장시킬 생각은
없었다. 바라보고 있던 자들이 놀람의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솔로쳐는
이미 다음 스펠을 캐스트하고 있었다.
"미티어 스웜!"
그레이는 기겁하며 외쳤다.
"이런, 제기랄! 모두 뒤로 물러나!"
================================================================
아, 지적 감사드립니다. 사람의 안와는 거의 폐쇄된 구조라서 손가락
을 집어넣는다고 해서 뇌를 만질 수는 없다고 합니다. (함은 해부학에
관심이 없는 만큼, 이것은 문학적 수단으로 남겨두고 수정하지는 않겠
습니다. 전문적인 지적 주신 **님께 감사드립니다.)번 호 : 15607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09 02:45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8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8.
경비대원들과 드래곤 솔져들, 그리고 천공의 기사들은 죽을 힘을 다
해 몸을 돌렸다. 검은 안개 사이로 붉은 기운이 일렁거렸다는 느낌이
잠시, 빗줄기 같은 광선들이 조금 전까지 땅이었던 수면을 향해 떨어
지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보다 높은 하늘로 솟아오르려 애쓰면서도 동
시에 땅을 향해 고함질렀다.
"엎드려! 물방울에 맞아죽는다!"
경비대원들은 질겁하며 몸을 날렸고 드래곤 솔져들은 타워 실드를 세
우며 충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무거운 갑주 때문에 속절없이 가라앉고
있던 데스나이트들은 무서운 고함소리를 내질렀다.
"솔솔로로쳐쳐어어어어!"
그리고 첫번째 불덩어리가 수면에 작렬했다.
퍼벙펑펑펑! 쏟아져내린 불덩어리가 수면에 작렬하는 순간 물기둥이
거세게 솟아올랐다. 물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라 검은 안개를 꿰뚫고 가
공할 폭발에 의해 경이적인 초속을 가지게 된 물방울들이 아우성을 내
지르며 전장 전체를 휩쓸기 시작했다. 수천개의 대거가 튀어나오는 듯
한 광경이었다.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어가고 있던 로터스는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귓가를 스친 물방울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폭발의 중심에 있던 데스나이트들은 직격에 맞아 가루가 되었다. 그
들의 갑주는 파편이 되어 물보라와 함께 높은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
리고 조금 떨어져있던 위치의 데스나이트들도 물을 타고 곧장 전달된
충격파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충격파는 데스나이트들의 갑주를 통과
하여 그 속에 있는 그들의 저주받은 몸을 산산조각내었다. 날아다니는
물방울들과 갑주의 파편들은 서로 부딪히고 땅을 휩쓸며 지독한 충격
음들을 만들어내었다. 수천 개의 해머가 동시에 모루를 때리는 듯한
소리였다. 그리고 갑주의 파편들은 물방울들과 함께 땅으로 떨어져내
리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꽈깡깡! 경비대원들은 물방울과 쇳조각들의
폭격 속에서 머리를 감싸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기절해버린 경비대원
들은 주위로부터 엄청난 부러움을 받게 되었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서 손에 상자를 든 채 사태를 바라보고
있던 시몬슬은 신음을 토했다.
"사조님, 사조님. 나는 이제 죽을 때까지 자신을 마법사라고 소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건 너무하다고요."
물기둥들은 사그라지고 이제 허옇게 솟아오른 수증기가 검은 안개를
밀어올리기 시작했다. 폭발의 충격에 의해 갈라지고 있던 검은 안개는
거세게 솟아오르는 흰 수증기에 휘말려 천천히 희미해졌다. 경비대원
들은 물방울과 쇳조각의 폭풍이 아닌 다른 것이 자신의 몸에 떨어지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들의 등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것은 따가운 오후의 햇살이었다.
경비대원들은 하나 둘 넋나간 사람처럼 일어났다. 피와 땀으로 범벅
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몸에는 하얗게 소름이 돋아있었고
많은 경비대원들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햇살은 그들의 몸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충격으로 갈라
진 땅과 흩어진 쇳조각, 그리고 물방울과 파편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
간 자리에 파헤쳐진 풀들과 흙덩이. 경비대원들은 왠지 이 세상의 모
습 같지 않은 그 광경을 보며 진저리를 쳤다.
그 때 날개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비대원들은 힘없는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안개가 사라졌기에
햇빛은 곧장 떨어졌고, 그래서 경비대원들은 눈을 찌푸리고 손바닥을
들어올려 햇살을 가렸다. 천공의 기사들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지팡이에 올라탄 솔로쳐가 햇살을 등진 채 검은 그림
자가 되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솔로쳐는 약간 피로해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땅에
내려선 솔로쳐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경비대원들의 눈빛을 느끼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함성은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켄턴! 솔로쳐!"
"어쩌실 생각입니까."
신차이는 치터리의 질문에 얼굴을 돌렸다. 다른 모든 뱃사람들과 육
전대원들마저도 멀리 수평선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치터리만은 굳은
얼굴로 신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차이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
다.
"돌아가서 보고해야겠지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이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신차이 선장."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예?"
"나 또한 다른 이들처럼, 저것을 보고 싶습니다."
처터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이 배에 있는 모든 이들 중
에서, 처터리만은 그것을 보고싶지 않았다. 돌보아주는 신도 없이 완
벽한 자신을 구가하는 위대한 생명체의 비행은 치터리를 불안하게 만
들었다. 치터리는 무의식 중에 닐림의 기도문을 중얼거리며 멀어져가
는 지골레이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후의 태양이 지골레이드의 푸른 날개를 붉게 물들이며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묘한 보라색과 황금빛을 뿜어내게 만들고 있었다. 지골레이
드는 전설처럼 날개를 펼치고 추억처럼 멀어져가고 있었다. 하늘과 바
다가 맞닿는 곳에 있을 알 수 없는 세계를 향해. 그리고 뱃전에서는
뱃사람들이 그렇게 조각해놓은 것처럼 우뚝우뚝 늘어서서는 한없는 경
배로써 드래곤의 비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 눈물로 두 볼을 적
시고 있는 뱃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잖았다. 가장 냉혹한 선원들마저도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떨구었다.
마지막 명멸이 있고나서, 블루 드래곤의 모습은 이제 수평선 어디에
서도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 중 누
구도 블루 드래곤이 수평선을 넘어 날아간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
다. 그 왕자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 있는 세계의 틈을 통해 빠
져나간 것이리라.
낮은 속삭임들이 잔뜩 억제되었던 호흡처럼 들려왔다.
"뭔가, 사람이 봐선 안될 것을 본 거 같다."
"적어도 정상적인 뱃놈이라면 보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을……"
"제기랄…… 이번에야말로 뱃놈 생활 끝이다. 마누라가 우라지게 보
고 싶은데."
"내 아들은 이제 여덟 살이야……"
치터리는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단순히 그들 앞에
서는 것만으로 그들 인간과 드래곤의 모습을 대비시켜 인간의 무릎을
꺾어버린 지골레이드에게 증오를 느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
력감이 선원들과 그를 덥친 것이다. 지골레이드에 대해 이를 갈면서도
치터리는 자신의 신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리고 다시는 세상에 나오
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신차이 선장이 말했다.
"이시도 군!"
펑펑 울고 있던 이시도는 어쩔 수 없이, 무례한 짓임에도 불구하고
코를 팽 푼 다음에야 그의 선장에게 얼굴을 돌릴 수 있었다. 신차이는
씁쓸하게 웃고는 말했다.
"정선한다. 저녁 식사 준비."
이시도는 눈물이 흥건한 눈으로 신차이를 바라보면서도 고개를 갸웃
했다.
"저, 저녁 식사요?"
오후이긴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다. 신차이는 몸을 돌리며 말했
다.
"지금, 내가 너희들에게 그 외에 무엇을 시킬 수 있겠나. 내일은 졸
란으로 돌아가니 저녁 식사 후 푹 쉬어두도록."
"아, 예. 갑판장! 돛을 접어라. 정선!"
"정선!"
갑판장의 복창에는 힘이 없었다. 하지만 선원들은 느리면서도 정확한
몸놀림으로 각자의 자리를 향해 달려갔다. 고요하던 갑판 위에 쿵쾅거
리는 발소리가 울려퍼지며 다시 활기가 돌아왔다. 선원들의 손놀림도
조금씩 빨라지며 레드 서펜트 호는 정선에 들어갔다. 닻줄이 풀리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치터리는 신차이 선장의 등을 향해 다급하
게 말했다.
"서, 선장님."
"프리스트 치터리. 선장실로 오시오. 육전대원들도."
"아, 예."
치터리와 육전대원들은 주승강구로 사라지는 신차이를 따라 배 아래
로 내려갔다. 신차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선장실을 향해 걸어갔
다.
선장실에 도착할 때까지 신차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치터리와
육전대원들 역시 아무 말 없이 그 뒤를 따라 선장실에 들어갔다.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신차이 선장은 입을 열어 대화를 시작하는
대신 파이프를 들어올렸다.
신차이 선장이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넣고 불을 붙일 동안 치터리는
초조하게 기다려야 했다. 첫모금을 빨아들인 신차이 선장은 선장실의
천장을 향해 조용히 담배연기를 날려보낸 다음에야 말을 시작했다.
"항해는 성공적으로 끝난 것 같소."
"예?"
"여러분들의 조력에 감사합니다. 아까 들으셨지만, 내일 본함은 졸란
으로 회항합니다."
치터리는 낭패한 표정으로 육전대원들을 돌아보았지만 육전대원들은
아무 표정도 없이 신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치터리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말했다.
"그래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쩌다니오? 내 임무는 끝났습니다."
"예?"
신차이는 선장실의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을 바라보았다.
신차이의 파이프에서 솟아오른 연기는 햇빛 속에서 하얗게 꿈틀거렸
다.
"본함의 목적은 닐림의 종단의 의뢰에 따라 동북항로의 괴사건을 조
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닐림의 대표이신 치터리 무스 씨는 이미 모든
것을 보셨고 지골레이드의 설명도 들으셔서 사태를 이해하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그 때 육전대원들 중 하나가 몸을 조금 움직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
기 전 신차이 선장은 재빨리 손을 들어올려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아니,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육전대 쪽의 목적은 내가 아는 바로는
이 조사 활동의 보호였습니다. 그렇잖습니까?"
"그렇긴 하오만, 선장님. 우리들은……"
"무의미합니다."
"예?"
신차이는 말을 잇기에 앞서 손을 들어올려 간단한 손짓을 해보였다.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지만 치터리와 육전대원들은 노예가 사라
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예들을 모두 내보낸 신차이 선장은 나직
하게 말했다.
"일스 침략이겠지요. 그렇잖습니까."
육전대원들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신차이는 파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동안 이 배의 항해 방식을 관찰하며 얼마나 많은 자료를 얻으셨는
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제는 일스 침략 같은 것은 무의미합니다. 바이
서스에서는 강화를 제안한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물론 결정은 높은 분들이 하겠지만, 나는 당신들에게 제안
합니다. 이 강화 제안은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보고하기 바랍니다."
"이유는?"
"치터리 무스 씨는 닐림의 종단을 대표하고, 당신들은 자이펀 군부를
대표하겠지요. 그렇다면 나는 선주 연합을 대표합니다. 선주 연합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자이펀 군부가 이 강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선주 연합은 계속해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수긍할 수 있
는 이유라도 있다면 모를까, 그런 무의미한 희생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지골레이드를 격퇴할 수 있습니까?"
육전대원들은 다시 불편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지골레이드는 그 이
름만으로도 자이펀 군인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존재였다. 하물
며 두 눈으로 직접 그 모습을 본 다음에야. 신차이는 매서운 눈으로
육전대원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캇셀프라임과 지골레이드가 전선에서 어떤 공포의 존재였는지는 여
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땅도 아닌 바다 위에서 드래곤을
붙잡을 수 있습니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강화 제
안이라는 것에 오히려 감사하고 싶습니다. 바이서스는 항로를 봉쇄하
여 우리들에게 패전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만……"
"아무 것도 강제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본 것과 들은 것
을 잊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여러분들의 상관에게 전달하기만을 바랍
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의무겠지요. 어쨌든 내 임무는 끝났고, 나는
돌아갈 것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육전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치터리는 당황한 표
정으로 육전대원들을 바라보았지만 육전대원들은 그대로 몸을 돌려 선
장실을 나갔다. 신차이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치
터리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임무는 끝나지 않았습니까?"
치터리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어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래서 치터리는 힘겹
게 입을 열었다.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장님."
"별말씀을."
"당신은 선주 연합에 이 사실을 보고할 테지요?"
"항해 일지는 분명하게 적을 테지요."
치터리는 고개를 떨구었다. 선주 연합에서 이 제안을 해온 것을 알게
된다면 자이펀은 더욱 강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치터리
는 돌이키기 어려운 길에 접어든 기분을 느꼈다.
"에, 여러 가지 점에 대해 감사를……"
"돌아가 쉬십시오. 치터리."
"아, 저."
"놀라운 오후였습니다. 나는 태풍을 몇 개 통과한 것보다 더 피곤합
니다."
치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서 치터리는 조용히 일어섰
다. 신차이는 그를 따라서 몸을 일으켰고 둘은 느릿한 동작으로 서로
를 잠깐 포옹했다.
몸을 돌려 선장실의 문을 나서기 직전, 치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
었다. 신차이는 말없이 그 등을 바라보았다. 치터리는 신차이에게 등
을 향한 채 말했다.
"이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쩐지 하지 않으
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더 많이 듭니다. 더군다나 지금이 아니면 말
할 기회도 없을 것 같군요."
신차이는 조용히 치터리의 말을 기다릴 뿐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치
터리는 입술을 적시고나서 힘들게 말했다.
"당신의 결투 말입니다."
"예."
"운차이는…… 운차이 발탄은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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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굴러가고 있군요.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5821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12 00:06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9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9.
켄턴 시 전체가 미칠 것 같은 환희 속으로 곧장 돌입했다.
창고 가장 깊숙한 곳에 잠들어있던 술통들이 거침없는 손길에 의해
밖으로 꺼내어졌다. 푸줏간 주인들은 근엄한 표정으로 자신들이 일년
동안의 매상을 하루 동안에 올렸음을 선포한 다음 땅을 치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고기만 더 있었다면 10년치 매상도 올리는 건데! 허황된 소
리가 아니다. 켄턴 시민들이 먹고 마셔대는 모습은 그 정도로 대단했
다. 집집마다 바구니로 실어날라진 음식들과 그릇들이 광장에 수북하
게 쌓여 경비대원들은 음식과 술 속에서 헤엄칠 정도였다.
입이 달린 사람들은 모두 노래를 불렀고 시내 곳곳에서 끌려나왔던
악기들은 광란에 가까운 연주에 박살이 나버렸다. 하프 줄이 끊어질
때마다 경비대원들의 웃음소리는 높아만 갔고 비어버린 술통은 무자비
하게 박살나서 모닥불 속에 던져졌다. 치솟아오른 모닥불은 수십 큐빗
까지 솟구쳐 올라 먼 곳에서 이 도시를 바라본 자가 있다면 드래곤이
사는 도시라는 판단을 내리고 말았을 것이다.
때려붓듯이 술을 마시고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던 천공의 기사 그
레이 휠드런은 완전히 늘어져버렸다. 조금 더 마시기 위해서는 술을
좀 깰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 그레이는 손에 술병을 든 채 성벽 계단
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바람을 좀 쐬야겠어.
그레이는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갤러리 위에 올라섰다. 자칫하면 아
래로 추락하기 알맞은 걸음걸이였지만 취한 그레이에게 위기감각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갤러리 위에는 경계를 위한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져 있었고 그들은 그레이의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레이는
혀꼬부라진 소리로 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보낸 다음 갤러리 위를 걸
었다. 한적한 곳을 찾아야겠어.
문득 그의 눈에 경비대원의 복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보였다. 그레이
는 눈을 몇 번 문지른 다음 쾌활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히야아, 소로챠!"
흉벽에 두 손을 짚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솔로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를 북부 목동처럼 부르지 마시오. 많이 취하신 것 같군, 그레이.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온 거요?"
"우음? 여기가 어딘데요?"
"……관둡시다. 이쪽으로 좀 당겨서 앉던가 하시오. 떨어지겠소."
그레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며 순순히 솔로쳐의 말을 따랐다. 구
겨지듯 주저앉은 그레이는 흉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아아, 멋진, 멋진 밤입니다."
"저 친구들에게는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소."
솔로쳐의 말은 별 무리없이 그레이의 귓속으로 흘러들어갔지만 그레
이가 그 말을 대충이나마 이해한 것은 시간이 제법 지난 후였다. 그레
이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는 흉벽을 짚으며 말했다.
"아직도 싸우고 있습니까? 잘, 음냐, 잘 안보이는데요."
"저쪽…… 검광이 보이시오?"
"아, 번쩍번쩍 하는군요. 번쩍, 번쩍."
그레이는 번쩍번쩍이라는 말에 따라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흉벽
위에 상체를 얹었다. 어두운 데이든 평원 저편에서 검들이 부딪히며
튀어오르는 날카로운 불꽃이 아물거리며 떠올랐다.
드래곤 솔져들이었다. 함께 태어난 형제들을 죽이는 그들의 의식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취기와 밤의 어둠 때문에 그레이는 몇
명의 드래곤 솔져가 남았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언듯언듯 보이는
불꽃은 그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고 있었다. 그레이는 흉벽의 커다란 돌 위에 상
체를 길게 뻗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지독한 놈들입니다. 독해요."
솔로쳐는 별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트림을 길게 하고
는 말했다.
"거으윽. 흐음, 흠. 몇 놈이 남아야 끝, 끝나는 겁니까?"
"고문에 의하면 그것은 특별히 정해진 바가 없다고 하오. 드래곤의
이빨을 얻은 자 얼마나 되겠소? 예가 될 만한 것이 너무 적소."
"자기들 마음대로라는 말입니까? 흐음. 남은 놈들은 어떻게 됩니까?"
"소환자의 충복이 된다는 것이 보편적인 이론이오."
"으하하! 엄선된 전사들 중에서, 예, 다시 엄선된 전사만 거느리게 되
시겠군요, 솔로쳐."
"그러면 뭣하겠소."
"예?"
솔로쳐의 얼굴에 깊숙하게 새겨져있는 주름살들도 밤의 어둠 속에서
는 모두 지워지는 듯했다. 마법사는 밤이다. 보이지 않는 손길, 숨겨
진 지식, 주체 없는 행동. 밤의 시간 속에서 솔로쳐는 신비로웠다.
"내가 그들을 데리고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그레이."
그레이는 잠시 흉벽 위에 엎드린 자세로 말없이 데이든 평원을 바라
보았다. 그의 손이 무의식 중에 요철돌을 똑똑 두드렸다. 잠시 후 그
레이는 말했다.
"떠나셔야 된다고요?"
"그렇소. 그레이."
"서두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강박관념처럼 보인다고요."
"당신에게는 그런 느낌이 없는 거요?
"그런 느……낌?"
"한 시라도 빨리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픈 느낌. 이 세계에 아무런 영
향도 주지 않고 관련되지도 않고 싶은 느낌 말이오."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솔로쳐는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등 뒤로 돌
려 잡으며 어깨를 폈다.
"아까 오후, 나는 정말 가슴 섬뜩한 느낌을 받았소."
"압니다, 알아요. 데스나이트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아니,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그럼?"
"전투가 끝난 후, 켄턴 경비대원들이 고함을 질렀을 때였소. 켄턴,
솔로쳐. 당신도 들으셨지? 그들은 그 때까지 그렇게 고함지르지 않았
소."
그레이는 낮게 중얼거렸다.
"켄턴, 루트에리노……"
"그래요. 그들은 항상 그렇게 외쳤지. 300년이 지났어도 우리나라 사
람들은 여전히 대왕의 이름을 그 정신적 지주로 삼아온 모양이오. 하
지만 내가 쓸데없는, 아니, 쓸데없는 짓은 아니었군. 어쨌든 그들 앞
에서 싸워 데스나이트들을 물리치자 그들은 대왕의 이름 대신 내 이름
을 연호했소."
"껄껄껄…… 기쁘시지 않습니까?"
"기쁘지 않아요. 나는 이 시대에 속한 자가 아니오. 수치스럽소."
그레이는 고개를 조금 꺾어 비스듬한 얼굴로 솔로쳐를 바라보았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게 떠오르는 솔로쳐의 얼굴에는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책임질 수 없는 일을 해버렸소. 이 시대에서 곧 사라져야 될 자가
말이오. 이 시대에는 아무런 일도 해서는 안될 자가 영웅의 이름으로
불리워졌소."
"하! 처녀를 임신시켜놓고 달아나는 방랑자처럼?"
그레이는 익살스러운 어조로 말했고 솔로쳐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길지 않았다.
"조야함으로도 진실을 꿰뚫는 당신의 언변에 찬사를 보내오. 그래,
그런 것 같소. 보시오. 취해버린 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저기
왼쪽 성탑의 그늘에서 세 개의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몬
슬을 볼까? 딴에는 내가 별을 읽고 마법을 수련하는 것을 훔쳐보겠다
는 속셈인 거 같소. 멍청한 녀석. 인프러비젼이 가능하니 내 얼굴을
낮처럼 볼 수 있을 텐데도 내가 자신을 눈치챘다는 것은 모르는군. 그
리고 저 멍청한 후배놈은 켄턴 시의 시민들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는
거 같소.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내게 기대고 있소. 당신들 천공의 기
사 역시 마찬가지요. 검의 수련만을 지상과제로 삼아오는 레티의 프리
스트들이 당신들을 보며 자격지심을 느끼는 것은 딤라이트 당신도 짐
작하겠지?"
그레이는 솔로쳐가 자신의 이름을 잘못 불렀나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의 등 뒤에서 딤라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그런 거 같더군요. 사소한 일에도 저희들의 이름을 거론하더군
요."
그레이는 고개를 홱 돌렸다. 완전 무장을 갖춘 채 성벽을 올라오는
딤라이트의 모습을 보자 그레이는 그의 목적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
다. 틀림없이 저 근엄한 기사는 켄턴 시민들의 즐거운 술자리를 위해
솔선해서 경비 엄무를 맡기 위해 올라온 것이리라.
솔로쳐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딤라이트의 어린 연인은 어떨까."
딤라이트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솔로쳐는 그
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키티 데시는 민감하고 가냘픈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을 거요. 그녀의
머릿속에 각인된 당신의 모습이 어떤 것일지는 상상되지 않소. 하지만
이 싸움 전체가 성장기의 그녀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가는
마법사의 지팡이에 걸 필요도 없이 맹세할 수 있소. 그녀 뿐만이 아니
오. 켄턴의 많은 어린이들, 청년들. 모두 마찬가지요. 머리가 굳지 않
은 모든 켄턴 시민들에게 우리들은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을 거요.
그리고 우리의 이 불가사의한 체류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악영향
또한 증대하겠지요."
딤라이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레이는 못마땅한 표정
이었다. 그레이는 손을 들어올려 턱을 문지르다가 불평스럽게 말했다.
"한시 바삐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얌전히 떠나야 된다, 이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마치 허락받지 않고 쳐들어온 불청객처럼?"
"불청객처럼이 아니라 우리는 불청객이오."
"제기랄, 왜요! 그럼 세상에 불청객 아닌 녀석이 어디 있습니까?"
그레이는 패악스럽게 외쳤다. 딤라이트는 눈을 크게 뜨며 걸어오기
시작했지만 그레이는 이제 똑바로 일어서서 솔로쳐를 쏘아보며 말했
다.
"지긋지긋합니다. 당신의 그 말은! 여기선 아무 짓도 해선 안된다,
여기에는 아무 영향도 줘선 안된다! 왜죠? 왜 안된다는 겁니까? 이 세
상에 허락받고 태어나는 놈도 있답니까? 우리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뭐가 마찬가지란 말이오! 그들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죽었던 사람……"
"저는 존재한단 말입니다!"
"뭐요?"
그레이는 이마 앞으로 늘어진 자신의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며 말
했다.
"제기랄. 마법사님의 말 뜻이야 잘 압니다.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저 자신이 저에 대한 존재감을 절실히 느낀단 말입니다! 대개의 사람
들이 그러는 것처럼요. 다른 사람들이 끊임없이 너는 존재하는 자다.
라고 가르쳐줘야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는 얼뜨기도 있답니까? 제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이 있지요. 그 말은 자신이, 그리고 자신만이 자신의
존재의 증인이자 증거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
른 사람이 아닌, 오로지 자신만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단 말입니다."
높이 치솟았던 그레이의 어조는 말을 하면서 점점 낮아졌다. 술기운
은 그의 다리를 비틀거리게 만들었고 그레이는 눈을 심하게 껌뻑였다.
그런 그레이를 보며 솔로쳐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레이는 흉벽의 요
철돌에 등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부님의 말을 반복하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단수가 아니라고? 우리
는 혼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말에는 나도 찬성합니다만 나는 조
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예. 마법사님의 사부님은 나는 단수가 아니라
고 하셨지요. 그 말씀, 재미있지 않습니까? '단수가 아닌 나'라는 것
을 인식할 수 있는 '나' 자체는 전제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래서라…… 뭐, 부대끼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즐기고 싶어
진단 말이지요. 사랑도 좋아요. 증오도 좋고. 나는 이 시대와 동떨어
진 고고한 존재로 있어야 된다는 것이 신경질 난단 말입니다. 며칠 전
저녁, 코가 비뚤어지게 술마시던 도중 번쩍하고 제 뇌리를 스치고 지
나간 생각이 그거였습니다. 나는 신경질이 납니다! 이 시대를 좋아하
느냐 싫어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존재하는 세계에 참여하고
싶단 말입니다. 그건 당연한 욕구잖습니까! 핸드레이크님이 말씀하셨
듯이 나는 단수가 아니니까, 시대와 동떨어진 단수로 살 수는 없다고
요. 마음에 안드는 녀석은 괴롭혀주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는 밤새워
서라도 이야기 나누고 싶단 말입니다."
솔로쳐는 본격적으로 그레이를 쏘아보기 시작했지만 그레이는 여전히
그 시선을 하늘로 보내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먼곳에서 훔쳐보고 있던 시몬슬도 심상치않
은 사태라고 여긴 듯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솔로쳐는 딱딱한 음성으
로 말했다.
"무슨 궤변을 늘어놓든지간에 당신의 말에는 찬성할 수 없소, 그레
이. 당신이나 당신의 동료, 그리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저 데스나이트와의 전투 행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소!"
그레이는 고개를 돌려 솔로쳐를 마주보며 고함질렀다.
"어째서 말입니까! 나는 살아있는데!"
"웃지도 못하겠군. 당신이 살아있다고? 그레이 당신이? 웃기지 마시
오. 당신은 300년 전에 콜로넬 계곡에서 죽었소. 지금이라도 그 땅을
파보면 당신의 유골이 나올 거요!"
그레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딤라이트 역시 마찬
가지였다. 비록 아무런 말이나 약속도 없었지만 그들 사이에서 암암리
에 거론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던 역린을 무참하게 건드린 솔로쳐는 계
속해서 냉혹하게 말했다.
"원한다면 거기로 날아가서 파내어 가져다줄 수도 있소. 당신을 가르
치기 위한 교육 재료로는 그만이겠군. 눈으로 보여주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을 테니까. 망상도 이런 망상은 없소. 스스로를 아시오! 자신
을 안 다음에 '나'라고 말하고, 그리고나서 나는 단수가 아니라고 말
하시오. 도대체 당신이나 나나 '나'라는 말을 함부로 쓸 자격이나 있
소? 존재하지도 않는 자들이?"
그레이는 행동으로 솔로쳐의 말에 대답했다.
================================================================
인프러비젼이 뭔지는 설명되었을 것 같습니다.
사고로 사고쳐보려고 (以思考 行事故… 퍼버벅!) 아무 명제나 떠올려
보았습니다.
명제 : All logue is monologue.
사고 시작.
참 슬퍼지는 것은, 저 명제가 왠지 참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 글쟁
이의 악몽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하하하. (웃자, 웃어.)
반명제라도 하나 만들어봐야겠죠. All logues is dialogue. 글쟁이의
천국이 만들어지는군요.
문제는… 대화가 타인을 향한 독백인지 독백이 자신을 향한 대화인지
를 구분하기가 머리 쥐나는 일이라는 것. 아아, 타자는 너무 심심한가
봅니다. (잡담이 길다. 끊자.)번 호 : 15822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12 00:07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0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0.
번쩍! 딤라이트는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깜짝 놀란 솔로쳐가 바라보
았을 때는 그레이의 롱소드는 이미 시몬슬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술에 취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레이의 검은 허공에 단단하
게 고정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걸어왔다가 졸지에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된 시몬슬
은 기절할 정도로 놀라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우선
적으로 그를 구해야할 그의 입은 무의미한 말만 쏟아내고 있었다.
"기, 기, 기사님? 왜, 왜, 왜……"
솔로쳐와 딤라이트가 이 느닷없는 사태에 당황하여 어떤 행동도 취하
지 못하고 있던 사이에 그레이는 낮으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가 이 마법사를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그레이!"
솔로쳐의 노호성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의 검 끝은 전혀 움직이지도,
떨리지도 않았다.
"나도 데스나이트인데, 뭐 데스나이트다운 일 한번 하는 셈치고 이
검으로 이 마법사를 찌르면, 그럼 그건 무슨 사태입니까. 존재하지도
않는 자에 의해 죽은 것은 살해입니까, 사고입니까?"
"당신은 명예로운 일스 기사단원이오. 그런 당신이 무고한 자를 죽이
겠다고?"
"아, 그 명예로운 일스 기사단원 그레이 휠드런? 그 친구는 죽었어
요. 지금은 그 유골이 콜로넬 계곡에 뒹굴고 있을 겁니다. 왜, 겁나십
니까? 당신은 당신만 납득하는 논리를 통해서 내 존재를 박탈시켰는데
도대체 뭘 겁내십니까. 존재하지도 않는 내가 이 시대의 사내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솔로쳐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할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할말이 서로 뒤엉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레이는 그런 솔로쳐를 묵
묵히 바라보았다. 시몬슬은 조금이라도 칼끝을 피해보려고 꿈틀거렸
다. 하지만 그레이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의
검은 시몬슬의 목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시몬슬은 잘 넘어가지도 않
는 침을 삼키며 헐떡거렸다. 그 때였다.
"그 칼 치우세요!"
그레이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의 허리에 올까말까 한 케이트가 고개를 한껏 쳐든 채 그레이를 올
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는 쥬리오 시장이 당황한 표
정으로 서있었다. 칼자루를 움켜쥐고 여차하면 그레이를 공격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딤라이트는 당황하며 그 둘을 돌아보았다. 언제 올라온
거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과는 전혀 상반되게, 케이트
의 얼굴에는 뜨거운 분노가 어려있었다. 8 살 소녀의 얼굴에 떠오른
분노는 그레이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케이트는 짜랑짜랑하게 외쳤다.
"당신이 진짜 기사에요? 약자를 찌르기 위해 검술을 익혔어요? 레티
의 프리스트들은 파괴를 위해 검을 익히지만 기사들은 약자를 보호하
기 위해 검을 익히잖아요!"
"꼬마야, 시끄럽구나."
"뭐라고요?"
"네게 이런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웃긴다만 그래도 말해주지. 너보
다는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 될 거야. 어처구니없는 일이
지만 나는 부활해버렸어. 실실 웃으며 지내니까 아무도 모르지만 내
속에 있는 갈등과 고민은 너무 힘겹다. 부활을 확인한 그 순간부터 나
는 계속 자신에게 물어야 했어. 내가 누구지? 나는 그레이 휠드런인
가?"
그레이는 검끝을 내렸다. 시몬슬은 튕겨지듯 물러나며 숨을 몰아쉬었
다. 그의 눈은 끔찍한 살의를 담은 채 그레이를 쏘아보았지만 그레이
는 발 아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내 의지로 여기 나타나 있는 것이 아냐. 그렇다면 사람
들이 태어나는 것과 뭐가 달라? 의지와 아무런 상관없이 태어나버리는
사람하고 뭐가 다르냔 말이야. 그럼 내가 왜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없
지? 왜 도로 사라져야 하느냐고!"
솔로쳐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레이에게 사라지라고 말한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솔로쳐도 직접 말하지는 않
았다. 그리고 데스나이트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켄턴에서 천공의 기사
를 경원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 그 자신이 이미
그걸 요구했을 뿐이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알고 있었어. 나의 말은 짜증나는
재촉이었겠군.'
솔로쳐는 이를 악물었다. 그레이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존재할 수
없는 시간 속에 던져진 자신을. 그리고 그레이는 그것에 대해 이미 분
노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검을 꽂아넣으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익!
어둠 속에서 날개짓 소리가 다가왔다. 그레이는 그대로 흉벽의 요철
돌 위로 뛰어올랐다. 솔로쳐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레이는 아래로
떨어지려는 듯이 허공으로 뛰었다. 그리고는 밤을 가르며 날아온 킨
크라이의 안장에 매달렸다.
날렵한 동작으로 킨 크라이의 안장에 올라탄 그레이는 고삐를 확 나
꿔챘다.
"올라가자!"
파바박! 킨 크라이는 급격하게 날개를 퍼득이며 속아올랐고 그 날개
에서 떨어져나온 하얀 깃털들이 눈송이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솔로쳐
는 흩날리는 깃털 사이로 사라지는 그레이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케
이트는 밤하늘에서 하얗게 떨어지는 깃털의 비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
다가 손을 내밀어 그 중 하나를 받았다. 그녀는 그 거대한 깃털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딤라이트는 먼저 몸을 돌려 시몬슬에게 사과했다.
"동료를 대신하여 사과드립니다. 그건 무례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
는 폭행이었습니다만,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취중의
언동이었을 것입니다."
"아, 네. 딤라이트 님. 하지만……"
시몬슬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밝지 못했다. 시몬슬
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목숨을 위협받은 일을 쉽게 잊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몬슬은 자신이 상당히 기억에 남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딤라이
트에게는 부지불식간에 웃음을 짓게 만드는 말이었을 뿐이다. 이 300
살은 어린 친구야. 우리는 전장에서 매순간 죽음을 보네. 그걸 다 잊
지 못한다면 난 오래 전에 미쳤을 거야.
고개를 돌린 딤라이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케이트를 보게 되었
다. 작은 손에는 킨 크라이의 거대한 깃털을 꼭 쥐고 있었고 커다란
모자 속에 파묻힌 듯한 작은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레이디 케이트……"
"딤라이트 님, 왜? 그레이 님은 왜 저러시는 거에요?"
딤라이트는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몰랐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는 먼저
행동에 들어갔다. 딤라이트는 케이트 앞으로 걸어가서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케이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말들이 떠올랐
다.
"그레이는 힘든 일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힘든 일? 데스나이트랑 싸우시는 거요?"
딤라이트는 거의 무의식 중에 대답했다.
"아니오. 그것보다는 외롭기 때문입니다."
"외로워요?"
그레이는 킨 크라이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축 늘어져있었다. 놓아버
린 고삐는 아래로 늘어져 킨 크라이의 발 아래쪽에서 뒤로 흔들리고
있었고 킨 크라이의 날개는 옆으로 펼쳐진 채 조용히 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는 말 위에서 죽은 기수라도 되는 것처럼 축 늘
어져있었다.
푸- 푸-. 그레이가 숨을 내쉴 때마다 킨 크라이의 목덜미 깃털이 가
볍게 들썩였다. 킨 크라이는 자신이 태우고 있는 기수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지만 기수는 여전히 술냄새가 가득 묻어나는 숨만 내
쉴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킨 크라이도 방향을 바꾸거나 고도
를 바꾸지도 못한 채 그저 조용히 날아갔다.
그레이는 갑자기 상체를 일으켰다.
그레이는 똑바로 앉고 나서도 한참 동안 어리둥절해했다. 내가 여기
서 뭘하고 있는 거지? 아, 잠깐. 내가 왜 일어났지?
한참 생각한 후에야 그레이는 조금 전 뭔가가 그의 눈가에서 움직이
는 것을 보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 깊은 밤의 하늘 위에서 뭐가 그
의 눈을 자극했던 것일까? 그레이는 밧줄처럼 엉겨 얼굴을 덮은 머릿
카락을 옆으로 치우고는 무거운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주위를 살펴
보았다.
아래…… 그래. 아래였다.
그레이는 아랫쪽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땅은 캄캄했다. 이상하군.
이 황야 위에 무엇이…… 그 때 조금 전 그의 시야를 자극했던 것이
다시 나타났다.
번뜩임.
검의 번뜩임이었다. 그레이는 가물거리는 눈을 비비고는 부릅 뜬 눈
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섬광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레이는 잠시 멀건히 아래를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 후 그레이는 아래에서 끄덕거리고 있던 고삐를 끌어올려서는 느
릿하게 손에 감아쥐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 섬광을 보았다고 생각되는
지점을 향해 킨 크라이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방향이나 거리를 짐작할
만한 대상물이 전혀 없는 깜깜한 밤하늘과 들판이었지만 오랜 비행 경
험 때문에 3차원적인 공간 지각 능력이 매섭도록 단련되어있던 그레이
는 별 주저없이 방향을 정하고는 조금 위험해보일 정도의 강하에 들어
갔다.
땅에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취했지만 그
가 타고 있는 그리폰은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레이는 무턱대고 아
래로 내려갔고 땅에 닿기 직전 킨 크라이가 날개를 휘저으며 상체를
들어올렸을 때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안장
옆으로 내려섰다.
그레이는 손에 고삐를 쥔 채 잠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하늘로 치솟아올라 밤하늘을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불꽃이 보였
다. 켄턴인가. 꽤 멀군. 그레이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보다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갑자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오."
그레이는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윤곽 같은 것이 눈
에 들어왔다. 그레이는 칼자루 쪽으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그레이 휠드런. 슬픈 자."
아마도 맨정신의 그레이 앞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면
그레이는 포복절도를 하고 말았을 것이다. 취해버린 그레이도 자신의
인삿말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느꼈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반응
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한 가지 반응은 보였다.
"무명(無名). 남은 자."
"남은 자……? 드래곤 솔져인가."
"그렇소."
그레이의 눈에 보이는 드래곤 솔져는 캄캄한 그림자 뿐이었다. 거대
한 어깨가 아래로 조금 쳐져있었고 오른쪽 팔은 유달리 길어보였다.
검을 쥐고 있군. 그런데 왼손의 저건 뭐지? 그레이는 자꾸만 감겨지려
는 눈을 다시 한번 비비고는 힘겹게 눈을 뜨며 말했다.
"왼손의 그건 뭐요? 방패로는 보이지 않는데."
그림자는 잠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슬쩍
던졌다. 꽤나 무거운 것이었던 듯, 상당히 둔탁한 소리가 났다.
"신경쓸 필요 없는 물건이오."
그러나 그레이는 이미 알아차렸다. 저 정도 크기에 저 정도 무게라면
뻔하다. 그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고는 말했다.
"그게 마지막 형제의 머리였소?"
"……그런 것 같소. 더 남은 자는 없는 것 같군."
마지막 남은 드래곤 솔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이는
찌푸린 얼굴로 상대방을 바라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여전히 캄캄한 그
림자 뿐이었다. 드래곤 솔져는 입을 열었다.
"낮의 전투에서 보았소. 하늘을 나는 기사였지요?"
"잠깐, 내가 보입니까?"
"보입니다."
"밤눈이 참 좋군. 그래요…… 내가 그 기사요."
"부탁 하나 드리리다. 괜찮다면 제 소환자에게 안내해주시겠소?"
"저기 불꽃 보이지요? 그곳으로 곧장 걸어가면 되오. 켄턴 시요."
그림자의 머리가 작아졌다 커졌다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인가? 거
대한 그림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켄턴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레이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여기 황량한 밤의 들
판에 홀로 서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 그레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안내해주겠소. 같이 갑시다."
그레이는 킨 크라이의 고삐를 끌며 그림자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그
림자는 잠시 기다려주었고 그레이는 하늘을 날 때와는 전혀 다른 고민
거리 때문에 화를 내어가며 그에게로 걸어갔다. 하늘에서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봐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땅은 다르다.
비틀거리며 걸어간 그레이는 그림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앞으
로 걸어갔다. 드래곤 솔져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그레이
는 뒷짐 진 손에 킨 크라이의 고삐를 길게 잡고는 유유자적하게 걸으
려 애쓰며 말했다.
"무명이라. 당신은 어떻게 이름을 가지게 됩니까?"
"이름을 획득할 권리는 가졌으니 소환자가 내게 이름을 주겠죠."
"권리?"
"남은 자니까."
"아아."
이 녀석들은 서로 죽이고 죽여서 결국 최후에 남는 녀석들만 살아갈
권리와 이름을 가질 권리를 가지게 되나 보군. 삭막한 의식이야. 그레
이는 드래곤 솔져의 의식에 대해 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다고 생각
했다. 하지만 생각만 앞설 뿐 무슨 말을 해야 될지는 떠오르지 않았
다. 그 때 그레이에게 갑작스럽게 질문거리가 떠올랐다.
"당신은 앞으로 뭘 하실 생각이오?"
"예?"
"그 끔찍한, 실례. 내게는 그렇게 보이오. 그 끔직한 의식도 끝났으
니 당신은 이제 살아갈 권리를 가진 거죠? 그리고 이름도 가진다며?
자아를 가질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이로군. 그럼 당신은 이제 최대한
선별된 당신의 그 최강의 육체와 험한 댓가를 치루고 가지게 된 값비
싼 자아를 가지고 뭘 할 생각이오?"
취해버린 그레이에게는 퍽이나 힘든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간신히
질문을 마치자 드래곤 솔져는 별 어려울 것도 없다는 듯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소환자의 명령을 수행할 겁니다."
"다른 건? 이봐요. 당신은 새로 태어난 거잖소. 다른 건 없소? 젠장,
이 세상에 대해 뭘 알아야 하고 싶은 것도 생기긴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말 나눠본 걸 가지고 추측해보면 당신은 꽤나 많은 식견의
소유자인 것 같은데. 최소한 당신과 내가 말 나누는 데는 아무 불편도
없으니까."
"어느 정도는…… 그래요. 보통의 인간과 같은 정도의 식견은 가지고
있소."
"위대한 드래곤 만세요. 그럼 당신은 이 세상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을 거요. 그럼 하고 싶은 것도 뚜렷하게 생각할 수 있잖소?"
"하고 싶은 것은 분명히 있소."
그레이는 반색을 하며 말했다.
"뭐요?"
"소환자로부터 명령을 받고 싶군요."
그레이는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 저 녀석은 내
얼굴이 보인다고 했었지? 그레이는 더 험한 인상을 만들어보이며 말했
다.
"젠장, 넌 사람이 아니었지. 그래."
"그렇소. 그레이 휠드런."
"내가 주정을 늘어놓았던 모양이군. 도대체 누굴 상대로 이런 이야기
를……"
"발 앞을 조심하시오."
그레이는 급하게 멈춰섰다. 그는 그림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
"발 앞에 갑주가 있소. 발을 조심스럽게 내밀어 보시겠소?"
그레이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어보았다. 그러자 곧 발에 닿는 단단
한 쇠붙이가 느껴졌다. 으음. 하긴 데스나이트들의 갑옷 같은 것은 수
거하지도 않았지. 틀림없이 고가에 팔릴 전리품이었지만 데스나이트의
갑주에 손을 댈만큼 용감한 경비대원은 없었다. 그래서 데이든 평원은
다른 전장과는 달리 수많은 전리품들이 방치된 형국이었다. 그레이는
발 앞을 가로막는 갑주를 거칠게 걷어찰까 아니면 옆으로 돌아갈까 고
민했다. 갑옷을 차면 발이 아플 거라는 생각 같은 것은 취해버린 그레
이에게는 들지 않았다.
그 때 갑주가 말을 했다.
"검검을을 뽑뽑아아라라……"
그레이는 잠시 동안 얼어붙어버렸다. 술 때문이야. 꼼짝도 하지 못하
는 자신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레이는 결론까지도 내렸다. 술이 아니라
면 벌써 움직였을 텐데. 그래서 마지막 드래곤 솔져는 갑주를 후려치
는 대신 그레이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겨야 했다. 그레이는 엉덩방아
를 찧을 뻔했고 드래곤 솔져는 다시 갑주를 공격할 기회를 포기해야
했다. 그레이는 드래곤 솔져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검을 뽑아들었
다.
그리고 말을 하던 갑주는 천천히 일어났다.
일어나다? 그레이는 그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다. 사람이나 동
물이 일어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것은 마치 무게가 없
는 물체가 둥둥 떠오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윽고 갑주는 꼿꼿한
자세로 그레이와 마지막 드래곤 솔져 앞에 섰다.
왼팔은 팔꿈치부터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그리고 갑주에는 커다란 구
멍이 뚫려 그 구멍으로 켄턴 시의 불빛이 보일 지경이었다. 조금 이상
한 각도로 흔들거리는 오른팔에는 거대한 투핸드 소드를 들고 있었다.
사람이 든다면 틀림없는 투핸드 소드였지만 데스나이트는 그 검을 마
치 롱소드처럼 쥐고 있었다.
투구의 뿔은 부러지고 찢어진 망토가 기이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레
이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공포? 아냐. 냄새다. 그레이는 눈 앞
의 데스나이트에게서 지독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유황
밭에 던져진 시체가 이런 냄새를 풍길 것인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냄새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레이는 다시 뒤로 몇 발자국 물러
나고 말았다.
데스나이트는 말했다.
"누누가가 먼먼저저 덤덤빌빌 것것인인가가. 동동시시에에 덤덤벼벼
도도 상상관관없없다다."
드래곤 솔져의 그림자가 검을 옆으로 한번 뿌린 다음 그대로 앞을 향
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취한 자신은 가만히 있어도 용서받을
거라는 조금 비겁한 생각을 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드래곤 솔져의 강인한 어깨가 꿈틀거렸다. 그는 옆으로 서서는 수평
으로 들어올린 왼손바닥을 데스나이트에게 내밀고는 느슨하게 검을 쥔
오른손은 허벅지 쯤에 적당히 떨어트렸다.
"오라."
"무무엄엄한한 놈놈!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에에게게 선선수수를를 허
허락락한한다다고고? 건건방방진진 자자세세 집집어어치치우우고고 네
네놈놈의의 공공포포와와 함함께께 덤덤벼벼라라! 데데스스나나이이트
트가가 너너에에게게 지지옥옥을을 보보여여주주리리라라!"
드래곤 솔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허벅지 쯤을 오가던
그의 오른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보며 데스나이트는
흡족한 듯이 웃었다.
"핫핫하하하하! 지지옥옥에에 온온 것것을을 환환영영한한다다."
드래곤 솔져의 발이 앞으로 튕겨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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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 다가오고 있군요. (발렌타인 데이는 보이지 않는다. 떠올리지
도 못한다… 으윽.)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6019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15 03:19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1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1.
그리고, 그것으로 끝났다.
드래곤 솔져는 앞으로 크게 발을 내디딘 자세 그대로 정지했다. 그레
이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검을 부여잡았다. 마법! 제기
랄.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싸워야 되나, 킨 크라이에 올라타
야 되나? 그 때 데스나이트가 말했다.
"왜왜 멈멈췄췄는는가가?"
그레이는 어이가 없었다. 왜 멈추냐니? 그 때 무시무시한 도약 자세
그대로 굳어있던 드래곤 솔져가 앞으로 내디딘 발을 천천히 회수하며
똑바로 섰다. 어깨 위에서 굳어있던 그의 팔도 천천히 내려와 허리 쯤
에서 고요히 정지했다. 어라? 마법에 걸린 것이 아닌가?
드래곤 솔져는 말했다.
"뭐지?"
데스나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공에 둥둥 뜬 것처럼 보이는 그의
갑주가 조용히 흐느적거릴 뿐 데스나이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드래
곤 솔져와 그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래곤 솔져는 지치고 성난 음
색으로 말했다.
"왜 맞서 싸우려하지 않는가. 싸울 의사가 없는 상대에게 검을 휘두
를 수는 없다."
데스나이트의 어깨 부분이 조금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보며 그레이
는 칼자루를 쥐어짤듯이 움켜쥐었다.
"넌넌 인인간간이이 아아니니었었지지. 물물러러나나라라. 기기사사
여여, 네네가가 오오라라."
그레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드래곤 솔져는 말없이 뒤로 물
러났다. 마치 데스나이트의 말대로 그레이가 데스나이트와 싸워야 된
다는 듯이. 그레이는 그 두 개의 그림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흐느적
거리는 데스나이트의 파괴된 그림자, 그리고 드래곤 솔져의 완벽한 그
림자를 번갈아 보는 그레이의 시각 한쪽으로 켄턴에서 솟아오르는 불
꽃이 음험한 욕망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졌던 황야 위의
공기는 자욱한 핏방울을 머금고 있는 듯했다. 비린 냄새. 그리고 데스
나이트의 냄새. 그레이는 입술을 핥고 나서 말했다.
"잠깐, 이봐, 데스나이트 경. 말이 이상하군."
"무무슨슨 말말인인가가."
"인간이 아니었지. 라고 했나? 그럼 인간은 싸울 의사가 없는 상대에
게도 검을 휘두른단 말인가?"
데스나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점점 노성으로 바
뀌었다.
"그것은 네놈들의 이야기잖아! 단지 피해자의 공포를 즐기기 위해 맹
목적으로 공격하는……"
"그그렇렇다다. 형형제제여여."
"뭐라고? 잠깐, 지금 뭐라고 불렀지?"
데스나이트의 갑주가 앞으로 조금 움직였다. 하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이었기에 그레이는 그것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이라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데스나이트는 죽어가는 사자처럼 으르렁거
렸다.
"드드래래곤곤 솔솔져져들들의의 의의식식을을 따따라라볼볼까까. 검
검을을 뽑뽑아아라라. 형형제제여여."
"닥쳐! 아, 아니, 열어! 입을 열어 설명해! 내가 왜 너의 형제냐.
왜!"
데스나이트는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데스나이트는 자신의 검을 천천
히 들어올렸다. 억제될대로 억제되어 있던 그레이에게 있어 데스나이
트의 그 동작은 마지막 장애물을 파괴하는 효과로 작용했다. 그레이는
거친 고함을 지르며 잔뜩 당겨진 화살처럼 달려들었다.
뜻없는 고함소리, 그리고 그 고함소리보다 빠른 발. 그레이는 데스나
이트의 왼쪽 허리 옆을 순간적으로 돌파했다. 사고는 필요없다. 누적
된 경험과 숙련은 사고보다 빠르게 그레이를 인도했고 그래서 그레이
는 데스나이트의 검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직선을 가장 빠르게 지나
쳤다. 그레이가 자신의 행동에 망연해하며 어깨와 팔에 남아있는 타격
의 여운을 느끼고 있을 때 그의 등 뒤에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데스
나이트의 갑주가 무너져내렸다.
땡그르…… 꽝깡깡!
그레이는 몸을 돌렸다. 급격한 회전에 휘말린 그의 앞머리카락들이
요동치며 그레이의 시야를 가렸다. 그 사이로 그레이는 땅바닥에 나뒹
굴고 있는 데스나이트의 갑옷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솟아
올라 어두운 밤하늘로 솟아오르는 불길한 색깔의 연기도.
얼마간 솟아오른 연기는 상승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엉겼다. 그레이가
부릅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연기는 점점 엉기며 형체를 이루
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헐떡이며 연기를 바라보았다.
연기는 이제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어깨 위에는 비난
하는 듯한, 동시에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띈 채 그레이 자신을 바라보
는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
으며 그레이는 목이 졸리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꿇었다.
"으와아아아!"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 속에서 그레이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었
다. 번갯불이 머리를 때리는 듯한 느낌. 그리고 그레이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미친듯이 요동치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구역질 날듯이 헐떡이
는 자신의 호흡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레이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
했다.
무언가가 그레이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레이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
르며 튕겨지듯 일어났다.
"손대지마!"
하마터면 오른팔이 통채로 날아가버릴 뻔했지만 드래곤 솔져는 침착
했다.
"슬픈 자. 무엇을 보았소?"
"뭐?"
"무엇을 보았냐고 물었소."
그레이는 고개를 돌려 연기가 스멀거리던 그 공간을 바라보았다. 하
지만 그곳에는 깊이 없는 암흑 뿐이었다. 지독한 어둠 때문에 데스나
이트의 갑주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마구 경련을 일으키는 얼
굴을 돌려 핏발 선 눈으로 드래곤 솔져의 어두운 윤곽을 바라보았다.
곧은 자세로 선 드래곤 솔져에게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정심. 그래, 내가 필요한 것은 동정어린 관심이야. 하지만 드래곤
솔져는 어둡고 위압적인 자세로 선 그림자일 뿐이었다.
그레이는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입술을 힘겹게 움직였다.
"내 얼굴을…… 내 얼굴을 봤어. 저기서."
드래곤 솔져의 머리가 조금 움직였다가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
다. 순간 그레이는 지금 드래곤 솔져의 얼굴이 어떤 표정인지 알고 싶
다는 지독한 욕구를 느꼈다. 드래곤 솔져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 그대
로 말했다.
"데스나이트의 사술을 본 것이오. 신경 쓸 필요 없는 것이오."
"제길, 내 얼굴이란 말이야!"
"당신 스스로도 알 것이오. 당신은 이런 어둠 속에서 사물을 그렇게
뚜렷하게 볼 수 없소. 내 얼굴이 보이시오?"
"뭐라고?"
"내 얼굴이 보이냐고 물었소."
그레이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래. 눈 바로 앞에 있는 드래곤 솔져
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 지독한 어둠 속에서 뭔가를 볼 수
있을 리가 없어. 연기? 얼굴? 보일 까닭이 없어.
하지만 그레이의 망막에는 아직도 그 모습의 잔영이 남아있는 듯했
다. 당장이라도 웃음, 혹은 눈물을 터뜨릴 듯한 얼굴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레이 휠드런의 모습은 뚜렷했다. 그 얼굴을 다시 떠
올리며 그레이는 무릎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보았어.
드래곤 솔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괘념치 마시오. 데스나이트는 소멸하는 그 순간까지 공포와 절망,
그리고 어둠을 선물하기 위해 못된 잔재주를 부린 것이었을 거요."
그레이는 그 순간 온몸을 치닫는 한기를 느꼈다.
"잠깐, 너는 봤나?"
"아니, 못봤소."
"못봤다고? 그 얼굴은? 제기랄, 그 연기는?"
"연기?"
그레이는 드래곤 솔져의 검은 윤곽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하지만
드래곤 솔져는 묵묵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못봤군. 나만
봤어.
"먼저 가라."
"예?"
"저 불꽃이 켄턴이다. 밤눈이 좋으니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겠지. 그
곳에 도착하거든 솔로쳐를 찾아라. 너의 소환자다."
드래곤 솔져는 잠시 기다렸다가 말했다.
"당신은 여기 있을 거요?"
"가."
대답하는 그레이의 목소리는 낮지도 높지도 않았지만 드래곤 솔져는
검을 추스리고는 그대로 켄턴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불꽃을 배경
으로 떠오르는 드래곤 솔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레이는 입술을 깨
물었다. 키가 큰 드래곤 솔져는 성큼성큼 걸어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드래곤 솔져의 모습이 손톱만해지자 그레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기엔 아무 것도 없다."
그레이는 자신의 속삭임에 흠칫했다.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그레이
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암흑 뿐, 구름이 가
득 끼었는지 밤하늘엔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애타는 심
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면서도 그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는 알
지 못했다.
그 때 무엇인가가 그의 허벅지쪽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기절할 듯이 놀란 그레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러내렸
다. 검날이 살을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감각이 그의 팔을 지나 어깨를
때렸다.
"키에에엑!"
고막을 찢을 듯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그레이는 검을 휘두른 자세 그
대로 굳어버렸다. 밤을 관통하며 울려퍼진 소리는 그의 귀에 익은 목
소리였다. 그레이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킨 크라이!"
털썩. 거대한 덩치를 가진 생물이 땅에 쓰러지는 소리. 그레이는 손
을 내뻗었으나 손아귀에 쥐어지는 것은 암흑과 그의 절망 뿐이었다.
그레이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땅을 더듬으며 킨 크라이를 찾았
다. 손바닥이 쓸리고 돌부리에 부딪힌 손가락에서는 지독한 통증이 느
껴졌다. 철퍽. 손가락 끝에 따스하고 질척한 느낌이 드는 순간 그레이
의 목덜미에 소름이 하얗게 돋았다. 마침내 그레이는 킨 크라이의 몸
을 찾아내었다.
부드러운 깃털은 피에 젖어 서로 달라붙어 있었다. 그레이는 킨 크라
이의 몸을 만지면서도 계속 가중되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왜지? 왜
움직이지 않지? 킨 크라이, 왜! 날개는, 날개는 괜찮아. 다시 날 수
있어. 이건, 다리인가? 다리도 괜찮아. 그런데 왜 움직이지 않지? 킨
크라이, 왜?
다급하게 더듬던 그레이의 손가락은 마침내 자신이 저질러놓은 비극
의 상처를 찾아내었다.
미간 한 가운데였다. 공포로 휘두른 그레이의 검은 킨 크라이의 정수
리에서 옆으로 비스듬하게 예리한 상처를 만들어놓았다. 갈라진 두개
골 사이로 흘러나온 뇌수와 피가 그레이의 손가락을 적셨다. 길다란
끈…… 이건? 둥글다. 물컹거리는 느낌. 잠시 후 그레이는 자신이 파
열된 오른쪽 안와로부터 흘러나와 대롱거리는 킨 크라이의 오른쪽 시
신경을 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레이는 화다닥 뒤로 물러났다.
"으아아아아!"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레이는 어둠을 향해 비명질렀다. 눈을 부릅
떴으나 보이는 것은 명멸하는 빛깔들 뿐이었다. 눈을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눈을 감은 것처럼 희고 붉고 푸른 빛살들이 그레이의
눈 앞을 어지럽혔다. 그레이는 땅바닥을 움켜쥐며 목이 터져라 비명질
렀다.
"으아아, 으아아, 으아아아아!"
땅에 앉은 채 그레이는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어둠은 계
속해서 그를 따라왔다. 그레이는 일어서지도, 몸을 돌리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 때 그의 몸이 무엇인가에 호되게 부딪혔
다. 그레이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바위인가?
그의 손에 닿는 것은 바위가 아니었다. 매끄럽고 진저리쳐지도록 차
가운 것. 그레이는 그것을 밀어버리려고 있는 힘껏 부여잡았다. 그 순
간 그의 손이 굳어버렸다.
투구다.
그레이가 움켜쥐고 있는 것은 데스나이트의 투구였다. 조금 전 자신
이 쓰러트린 데스나이트의 투구였다. 그레이는 어느새 그것을 들어올
리고 있었다. 자신의 손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암흑 속이었지
만 그레이는 투구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보였다.'
조금 전과 같아.
그레이는 암흑 속에서도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레이는 투구를 버릴 수 없었다. 이 암흑, 어딘가에 킨 크라이의 시
체가 쓰러져있을 이 지독한 암흑 속에서 그 투구는 그레이가 볼 수 있
는 유일한 물체였다. 그레이는 어느 새 킨 크라이의 죽음도 잊어버린
채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악하기 짝이 없는 문양들과 거친 장식들. 거대한 투구의 양쪽 관자
놀이에서는 조각된 뱀들이 뻗어나와 마치 눈썹처럼 눈 위를 흘러 미간
에서 모였다. 그리고는 서로 또아리를 틀며 콧등으로 흘러내렸다. 치
켜올려진 바이저는 가로로 슬릿들이 나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이 사람
의 갈빗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바이저를 아래로 내리
자 인간의 갈빗대를 파고드는 뱀의 모습이 떠올랐다. 심장을 관통하는
두 마리의 뱀…… 바이저 아랫부분은 노출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
히 있어야 할 볼 가리개는 없었다. 대신 귀 부분에서 솟아나온 거대한
뿔들이 얼굴 앞으로 휘어지며 볼 가리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디자인, 이상하다.
매력적이다.
그레이는 친우의 얼굴인 것처럼 투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뭔가가 모자라다. 이 투구에는 있어야할 것이 없다.
그 안에 있어야할 머리.
그렇다. 머리가 없다. 그레이는 그것을 채워넣기로 결심했다. 천공의
기사 그레이는 입이 온통 뒤틀리도록 사납게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머리라면 마침 내게도 하나 있거든."
그레이는 천천히 투구를 들어올렸다. 머리에 뒤집어쓰기 직전, 투구
속을 보게 된 그레이는 그 속에서 뭔가가 일렁이는 것을 본 것 같았
다. 하지만 그의 손은 멈춰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썼다.
================================================================
갈라드리엘 님께. 에, 아프나이델은 실전 경험이 많으니까요. 인프러
비젼은 설명되었을 겁니다. 에델린을 태운 코스모스가 등뼈가 부러지
지 않는 까닭이라. 샌슨을 태우고도 끄떡없는 슈팅스타가 있다고 대답
하면 될까요… 하하.
드래곤 라자의 패러디를 쓰는 것에 대해 반대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
다. 감사한 일이지요. 즐겁게 기대하겠습니다.번 호 : 16020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15 03:19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2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2.
"머맨과…… 인간의 혼혈이라고요?"
"그런 불측한 소문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머맨과 인간 사이에
자손이 생긴다는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카알은 팔짱을 꽉 낀 채로 오른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콧망울을 만지
작거렸다. 잠시 후 그의 오른손은 다시 내려와 테이블을 똑똑 두드리
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리는 이야기를 처음 시작하던 때와 똑같은 모
양으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앉아있었다. 하탄의 궁궐에 있을 때
의 장엄한 옷 대신 바이서스의 평범한 옷을 걸치고 앉아있음에도 불구
하고 알리 주위에는 사막의 근엄함이 감돌고 있는 듯했다.
카알의 오른손이 이제는 허공으로 올라갔다. 카알은 허공에 있는 무
엇인가를 만질듯이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저, 그 어머니 되는 여자분이 돌아왔을 때 말입니다. 흠흠."
알리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의 손가락이
더욱 어지럽게 움직였다.
"에, 저, 그러니까, 뭐 확인된 바가 없습니까? 그러니까 머맨에게
붙잡혀갔을 때, 에, 그러니까 당신들은 여성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음, 미덕으로 여긴다는 점은 나도 잘 알고 있지만, 아, 그건 예
사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그 여자분은 머맨에게, 에…… 그러
니까 의심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알리의 무표정은 그대로였고 불쌍한 카알은 이제 자신의 오른손을 자
기 입 안에 집어넣을 지경이었다. 알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성관계가 있었는지를 묻고 싶은 게냐."
카알은 풀이 죽어서 대답했다.
"의외로 쉽게 말씀하시는군요. 예. 그렇습니까?"
"물론, 모른다."
"어, 당신이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거나, 그런 소문에 대해 열심히
조사하고 다닐만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의심
이 있었다면 여성 본인이 뭐라고 항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
어, 머맨에게 잡혀간 것은 확실하지만 수치스러워할만한 일은 전혀 없
었다, 라든지."
알리는 눈살을 꿈틀거렸다.
"여자가?"
순간 카알은 자신이 완전히 다른 관습의 소유자와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젠장. 저 나라에서는 여자들은 자기 변명도 못
하는 모양이군.
"그럼 뭡니까? 아무도 묻지도 않았고, 본인도 아무 설명을 안했고?
그 여자가 머맨과 나란히 앉아 밤바다의 아름다움만을 감상했는지 아
니면 그보다 더 진전된 상황을 즐겼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입니
까?"
"그렇다."
카알은 항복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신차이는 사람입니까?"
"뭐?"
"사람처럼 생겼습니까?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보이거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알리는 잠시 기다렸다가 천천히 말했다.
"너는 사람이냐?"
"무슨 뜻인지?"
"내게는 네가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낮의 햇살 아래서의 너
를 본 적이 없으니 네가 뱀파이어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할 수도 있다.
혹 도플갱어라는 의심도 가능할지 모르지. 어쩌면 네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거인일지도 모르잖느냐."
카알은 킬킬거렸지만 알리의 얼굴에는 웃음기 비슷한 것도 없었다.
카알은 웃음을 멈추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농담을 할 때는 좀 웃어라,
이 사막 촌뜨기 녀석아. 알리는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말했다.
"본 것만 가지고 진실처럼 말할 수는 없다."
"당신이 본 것, 아는 것만 가지고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이미 말했듯이 신차이 발탄은 이제리스 해협의 서펜트
를 거꾸러뜨린 일이 있다. 그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지독하게 어려
운, 거의 불가능한 일이겠지. 하지만 그것이 하프 머맨의 증거인지 노
련하고 사나운 인간 뱃사람의 증거인지는 구분하여 말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
"그 외에는?"
"없다."
"사람입니까? 알리 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다."
카알은 이제 두 손 모두를 사용해서 자신의 심사를 표시했다. 즉 양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버린 것이다. 웃음기도 없는 얼굴로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알리는 나직하게 말했다.
"왜지."
"머리 꼬리가 남아있어야 소고기인지 말고기인지 압니다."
"왜 신차이 발탄에 대해 관심을 가지느냐. 게다가 너의 관심은 조금
바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뀐다고요?"
"처음에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들이었다. 그런
데 이제 너의 관심은 그가 사람인지 하프 머맨인지에 대해 집중되어
있는 것 같군. 나로선 알 도리조차 없는 그 어머니의 일까지 질문하는
것은 네가 거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 아니겠느냐."
"가슴이 서늘한데요? 하하. 바로 보셨습니다."
"설명해줄 수 있겠느냐."
"신기한 일이니까 호기심이 동해서."
알리는 잠시 카알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나는 적절한 대답을 해줄 수 없다.
일방적인 질문만 해서는 내게서 좋은 정보를 받아내기는 어려울 텐
데."
"알지만, 안됩니다."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인가. 모르겠군. 놀라운 전설을 가지고 있는 자
이긴 하지만 결국 뱃사람에 불과한 자 아니던가. 게다가 자유무역선의
선장이니 너나 바이서스에 어떤 도움이 될 소지를 가지지도 못한 것
같다. 이해하기 어렵군."
카알은 빙긋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길게 기대어서는 배 위에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알리의 말 그대로다. 원래는 지골레이드와 만나게 될 인간에 대한 관
심이었다. 하지만 이제 카알의 관심은 신차이의 정체에 집중되어 있었
다.
머맨과 인간의 혼혈이라. 머맨은 바다. 바다는 갈매기와 희구의 그림
오세니아. 인간은 땅. 땅은 대지와 회상의 시무니안. 희구는 미래로
향하는 희망이고 회상은 과거로 향하는 상념이다.
하프 머맨은, 결국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의 교차
점이 될 수 있다. 카알은 그것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 정답을 알아야 한다.
카알은 가슴이 답답해오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는 안돼. 하지만, 하
지만.
그 정답을 찾아내서 숨겨야 한다.
그 때였다. 문이 열리며 경비대장 조나단 아프나이델이 들어섰다. 조
나단은 알리의 모습을 보았지만 마치 그를 보지 못한 것처럼 잠시 허
공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요. 돌아가서 쉬셔도 좋습니다. 알리
씨."
알리는 잠시 할 말이 남았다는 듯이 카알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곧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카알은 그것이 알리가 의자에
앉은 이후로 처음으로 보여주는 동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와, 대단
하군. 정말 꼼짝도 하지 않았는걸. 알리는 조나단의 옆을 지나쳐 문을
나섰다. 문밖에는 그를 감방으로 안내할 궁성 수비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알리가 나가고나자 조나단은 테이블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는 카
알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카
알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불편해보이시는군요, 조나단님?"
"불편하오. 당신은 조심이라는 것을 모르오? 그렇잖아도 그것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찾아온 거요."
카알은 꾸중을 얌전히 듣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표정을 보던
조나단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웃음과 함께 딱딱한 어조로 말하려
던 결심도 잊어버렸다.
"이보시오. 궁성 수비대장인 내 입장이 뭐가 되는 거요? 내 허락도
없이 죄수를 함부로 궁성 안까지 끌어들이다니."
"하하. 알리는 원래 궁성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조나단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지하감옥은
궁성 임펠리아의 지하에 있으므로 알리는 궁성 안에 있다는 카알의 말
은 틀리지 않았다. 카알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조나단 씨에게 허락
을 받으려 했지만 자리에 안계시더군요."
조나단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빛의 탑에 잠시 다녀왔소. 솔로쳐 사조님의 일 때문에 의논할 일도
좀 있고."
"아아, 그렇습니까."
카알은 그것으로 멈추고는 마법사들의 일에 대해 더이상 질문하지 않
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조나단은 그 태도에 만족하며 말했다.
"무엇이든 한도를 넘어서는 좋지 않은 법입니다. 카알. 당신의 순수
한 의도를 백안시하는 무리는 아직도 남아있소. 나야 당신이 오로지
이 나라를 위해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그 노력
의 일환으로 자이펀의 포로와도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
소.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오. 어떤 자들은
당신이 적국의 포로와 내통하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단 말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행동에 유의하겠습니다."
카알은 완전히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그래서 조나단은 꺼내려고 마
음먹었던 말의 절반만 꺼내고는 다른 화제로 바꿨다.
"그리고, 낭보가 있소."
"낭보요? 요즘은 놀랄 일이 너무 많아서 겁부터 나는군요."
조나단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일 기억하시오? 샌슨 군이 켄턴에서 받아온 부탁. 그 중 솔로쳐
의 부탁은 처리되었소. 시몬슬이 켄턴으로 출발했지. 그리고 한 가지
가 더 있잖소?"
"예? 그럼!"
카알은 테이블을 뛰어넘어 조나단을 끌어안으려는 듯한 동작으로 말
했다. 조나단은 마치 자신이 애써서 그렇게 된 것처럼 우쭐한 표정으
로 말했다.
"그래요. 조금 전 일스로부터 전령이 왔습니다. 장미의 기사들이 출
진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오래전, 300년 전 그 때와 마찬가지로."
"오, 아샤스여! 오렘이여! 잘되었군요. 정말 잘되었군요!"
카알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조나단 역시 즐겁게 말했다.
"그래요. 이제는 켄턴 시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소. 당신도
그랬겠지만, 그 동안 나도 정말 괴로왔소.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현실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었소. 국왕 전하께서도 몹시 괴로와하고 계셨소."
"예. 기뻐할 일입니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빨리 보내올 줄은 몰랐군
요.
"일스 대공께서는 300년 전의 수하가 보내온 충성의 서약에 퍽 감동
한 모양이오. 하긴 그런 말에 감동하지 않을 자 어디 있겠습니까. 전
령의 말에 의하면 대공께서는 딤라이트 경의 말에 눈물을 보였다 하더
군요. 그리고 져스티스 기사단원들 역시 그들의 영웅이자 전설인 선배
의 말에 격렬한 감동을 표시했던 모양이오. 대공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면 기사단 단독으로라도 비공식적으로 원정을 불사할 분위기였다는 말
이 다 들리더군요."
카알은 당연하지. 라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대신 카알은 쟈크의 도움
으로 일스 기사단원 전체에 천공의 기사들의 부활과 그 전갈에 대한
소문이 퍼지도록 공작했던 사람의 표정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순진하게 말했다.
"아아, 져스티스 기사단은 역시 기사도의 정화 같은 존재들이군요!
감격스럽습니다."
감탄하는 카알의 얼굴을 보던 조나단은 그를 더 기쁘게 해주고 싶어
좀이 쑤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조금만 기다리시오. 전령이 가져온 국서의 사본을 만들어오
겠소. 지금 쯤이면 사본은 다 만들어졌을 거요. 내 빨리 다녀오리다."
그리고 조나단은 카알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벌써 일어나서는 문을
열고 나섰다. 카알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나단이 문 밖으로 완
전히 사라지고나서야 자기 나름대로 이 상황에 대해 기뻐하기 시작했
다. 즉,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올리며 피로감이 그득한 얼굴로 안온
한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그레이의 출병 요청이 대공의 귀에만 들어가서는 일이 안된다. 자국
병력의 유출을 꺼려한 대공이 입을 닫아버리면 속수무책이니까. 그랬
기에 카알은 자기 나름대로의 수단을 충분히 강구해두었었다. 쟈크의
도둑 길드원들은 일스 기사단원들이 자주 들리는 술집에서, 혹은 그들
의 부인이 모여드는 사교모임에서, 어쩌면 카알은 전혀 상상할 수 없
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일스 기사단원들의 귀에 그 소문이 들어가도
록 했다. 그리고 장미의 기사들은 그 소식에 놀랐고, 그리고는 흥분해
버린 것이다. 수하들이 이미 다 알고 있었기에 그레이의 요청을 거부
할 수도 없게 된 일스 대공의 불쌍한 처지를 생각하며 카알은 킬킬 웃
었다.
테이블에 올린 발뒤꿈치로 테이블을 딱딱 두드리며 카알은 흥겹게 중
얼거렸다.
'샌슨, 로넨. 기뻐하시오. 당신들이 진짜로 지휘할 부대가 도착하고
있소.'
바이서스에 들어온 병력은 바이서스의 것이다. 물론 일스 기사단이라
는 어마어마한 위명이 있으니만큼 다루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부
터는 그들을 흡수해버리기 위한 공작이 필요해지겠군. 카알은 더없이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깊은 고뇌에 잠겨있던 카알은 갑자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가슴에 턱을 묻은 카알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갑자기 그의 볼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카알은 오른손으로 입을 막으며 소
리없이 울었다.
'친구들이여. 미안하오.'
제레인트, 아프나이델, 이루릴, 에델린, 엑셀핸드…… 그들마저도 속
여야 하는가.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카알은 어깨를
떨며 울었다.
교차점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숨겨야 한다.
돌아온 과거에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다 이용한다.
그리고 교차점을 공개한다.
그리고 그 동안 굳어졌던 상황을 강제로 현실로 만든다.
자신도 모르게 조목조목 생각하고 있던 카알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래. 아무도 모르지. 현실이 정지한다면, 마음에 드는 현실을 하나 만
든 다음 다시 굴러가게 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두 볼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카알은 더없이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폭발적인 웃
음은 아니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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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잘 쇠시길 바랍니다.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6227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20 02:10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3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3.
으스스할 정도로 고요해. 네리아는 침울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
다. 저 모든 얼굴들 색깔이 모두 각양각색. 이쁘지는 않아. 궤헤른.
당신 미소지으면 근사할 것 같은데. 지금의 그런 얼굴로는 어떤 여자
에게도 접근할 생각하지 말아요. 쥬블킨 할아버지. 당신 무서워요. 저
여자는 뭐지. 흐음. 그 글레이브도 상당히 엑조틱하지만 내 트라이던
트가 더 근사해. 와아, 이 길다란 한숨소리는 뭘까. 운차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얕고 긴 한숨 끝에, 운차이는 칼로 자르듯 말
했다.
"후작을 죽인다."
그란의 눈이 재빨리 운차이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제레인트는 기
겁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 운차이……"
"쉽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시간이야. 우리들의 오랜 추적의 목적만
생각해도 결론은 당연하다."
운차이는 쓰디쓴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올려 신스라이
프를 바라보았다. 싱긋 웃으며 운차이를 마주보던 신스라이프의 얼굴
이 갑자기 굳어버렸다. 부르르 떨며 고개를 다시 돌리는 신스라이프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운차이는 나직하게 말했다.
"Yi youkchi ro nharphe un…… Khai!"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 중에서 자이펀어를 아는 자들의 얼굴이
가볍게 굳었다. 그러나 쥬블킨과 콜리의 프리스트들 중에서 자이펀어
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쥬블킨은 두 주먹을 들어올리며 탄성
을 질렀다.
"당신의 결정은 정확했소! 여덟번째 죽음은 아홉번째 정답을 부를 것
이오! 당신은 그 정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나는 약속을 이행하
게 될 것이오!"
운차이의 입매가 조금 꿈틀거렸지만 그는 여전히 나직하게 말했다.
"이 놈들은 우리가 맡지. 올라가서 원하는 것을 해."
"알겠소! 당신의 밤에 콜리의 가호가 영원하기를!"
광란에 젖어 부르짖는 쥬블킨을 바라보며 파하스는 운차이의 말을 해
석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이펀어로 이루어진 운차이의 선언에
따른다면 신스라이프는 할슈타일 후작보다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운차이의 선언을 이해하지 못한 쥬블킨은 그대로 몸을
돌려 후작을 쏘아보았다. 그 옆에는 레이저와 루손이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서있었다.
궤헤른의 귀 앞으로 급격하게 주름이 생겨났다.
이를 악문 궤헤른은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운
차이와 그란들이 무서운 표정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궤헤
른은 절망을 느꼈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후작과 그의 사이에는
흥분한 콜리의 프리스트들이 사람의 벽을 만들고 있었고 등 뒤에는 그
들의 최고의 악몽이라 불릴만한 자들이 칼과 눈빛 양쪽을 모두 맹렬하
게 번득이고 있었다. 니크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 토실토
실한 볼 때문에 파묻힌 것처럼 보이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니크는 애써 울음을 참느라 헐떡거렸다. 그리고 가이버는 고개를 떨
군 채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쥬블킨 역시 후작의 부하들이 완전히 무력한 것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계단을 걸어올라가는 그의 동작은 여유로왔다. 이제 그를 가로막고 있
는 것은 두 명 뿐이었다. 루손을 부둥켜안고 있던 레이저는 초조한 표
정으로 쥬블킨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굳어버린 후작을 바라보았
다. 정말 이래야 되나? 레이저는 다시 말하려 했지만 쥬블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비켜라, 올로레인의 후예여."
레이저는 얼굴을 온통 찡그린 채 쥬블킨을 바라보았지만 쥬블킨의 얼
굴은 완고했다. 레이저는 고개를 숙여 루손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도
사태를 이해못한 채 거인에 대한 공포에 빠져있던 루손이었지만 그녀
역시 주위를 흐르는 진지한 분위기에 입을 다물고는 레이저를 올려다
보았다. 레이저는 루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루손…… 거인은 사라져야하겠지?"
"응? 그, 그래. 레이저. 그렇지."
"따라와."
레이저는 어깨를 늘으뜨린 채 계단 옆으로 걸어갔다. 루손은 쥬블킨
을 한번 바라보고는 글레이브를 흔들며 레이저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쥬블킨은 벅찬 심정으로 신스라이프를 올려다보다가 후작에게 다가갔
다. 이제 그를 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후작은 여전히 달려내려오는 모습 그대로 굳어있었다. 그 모습을 보
며 쥬블킨은 참을 수 없는 유쾌함을 느꼈다. 그는 후작의 귓가로 얼굴
을 가져가며 나직하지만 열띤 목소리로 속삭였다.
"개인적으로…… 네놈이 여덟번째 제물이라는 것에 대해 콜리에게 감
사하고픈 심정이다, 후작. 의사를 존중할 줄 모르는 놈은 생명을 존중
할 줄 모르는 놈이지. 네녀석의 생명은 네가 이미 포기한 것이다. 킬
킬킬……"
자신의 귓가에서 울려퍼지는 쥬블킨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할슈타일
후작은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죽어야 하나, 이렇게 멍
청하게! 꼼짝할 수도, 말할 수 조차도 없는 이런 무력한 모습으로 이
런 놈에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미 죽은 녀석을 위해서!
쥬블킨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의 손이 계단 위에 떨어져있는 경
비대원의 포챠드를 들어올렸다. 쥬블킨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서는
포챠드를 할슈타일 후작의 가슴에 겨냥했다.
"콜리의 가호 속에!"
후작은 고함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쥬블킨
이 내지른 포챠드는 그대로 후작의 복부를 꿰꿇었다. 푸윽! 날카로와
질대로 날카로와진 후작의 감각은 복부의 피부를 뚫고 근육을 자르며
뱃속을 후비는 포챠드의 칼날을 그대로 느꼈다.
"후작니이이임!"
니크는 목이 터지도록 울부짖었다. 그리고 궤헤른은 무릎을 꿇고 말
았다. 잡아삼킬듯이 쥬블킨을 노려보던 후작의 예리한 눈빛에 순간 얼
룩이 번졌다. 손끝이 차갑다. 발이 차갑다. 후작은 빠른 속도로 무뎌
져가는 자신의 감각을 느꼈다. 포챠드가 다시 빠져나갈 때 후작은 둔
한 동통 같은 것만을 느꼈을 뿐이었다.
이제 죽음인가.
무너져내린 바위와 흙더미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깊은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동굴 속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크는 절망하지 않았다.
절망을 느끼기엔 그의 현실인식 능력이 너무 조악했다. 그래서 오크는
조금도 좌절하지 않은 채 한결같은 힘으로 돌을 내리치고 흙더미를 파
내었다.
꽝! 꽝! 꽝!
현실인식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그에게는 행운이었고 그의 팔 근육
에는 불행이었다. 오크는 무너진 동굴에 갇혔다는 현실을 느끼기는 했
지만 그것이 큰 장애라는 추리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크는 손
도끼로 바위를 내려치고 흙더미를 밀어부치며 꾸준히 길을 만들어내었
다. 그가 땅을 파는 방식은 드워프가 보았다면 수십대 위의 조상 이름
까지 거론하며 지독한 욕설을 퍼부어댈 방식이었다. 안전대책이라든지
붕궤의 위험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크는 다시 손도끼를
바위 틈에 끼워넣었다. 그리고는 두 손에 침을 탁 뱉고는 손도끼를 지
렛대삼아 아래로 내리밀기 시작했다.
"취, 츄아아아악!"
바위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를 아는 모든 오크들이 두려워하는 괴
력이 최고 수준으로 발휘되었다. 극도로 긴장된 그의 어깨 근육에서는
핑핑 소리가 울릴 지경이었다. 크게 뒤틀리던 바위가 움직이자 오크는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꽈드드등!
바위가 뽑혀나오며 어마어마한 충격음이 울려퍼졌다. 땅을 파던 오크
의 상체만큼이나 큰 바위가 쑥 뽑혀나오며 토사와 자갈들이 우수수 쏟
아져내렸다. 바위는 바닥에 떨어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크는 씨익 웃었다. 하지만 이 장면은 인간 광부였다면 모든 신의
이름을 부르며 광란스러운 감사를 표해야할 장면이었다. 이토록 거대
한 바위가 뽑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절묘한 균형을 이룬 그 위의 바위
들은 2차 붕궤없이 서로 맛물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기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오크는 지난 열하루 동안 이런 기적을 수십 차례 이
상 만났었다.
하지만 오크는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따위는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열하루 동안 굽힘없이 바위를 들어내고 땅을 파게 한 그의 강
철같은 의지는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이제 더이상 뜯어
먹을 다른 오크의 시체가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
다. 동굴 속에서 발견한 오크의 시체는 모두 뜯어먹었고 이젠 뼈다귀
라도 빨아야 될 지경이다. 그랬기에 오크는 아무 생각 없이 다른 바위
에 달려들었다.
쩡! 도낏날이 바위에 부딪히며 불꽃이 튀어올랐다. 불꽃 속에서 잠시
드러난 나크둠의 얼굴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킨 크라이라 불리웠던 그리폰이 머리를 들어올렸다.
푸드덕. 날개가 무겁다. 킨 크라이는 고개를 홰홰 내젖다가 갑자기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캄캄하다. 그리폰은
어둠을 좋아하지 않는다. 킨 크라이는 불안한 심정으로 부리를 딱딱
부딪히고는 고개를 돌려 날개를 손질했다. 주위에는 깃털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건성으로 날개를 손질하던 킨 크라이는 갑자기 주위
에 자욱한 피냄새를 느꼈다.
킨 크라이는 화드득 놀라면서 몇 큐빗 정도 날아올랐다. 비상이라기
보다는 도약이다. 잠깐 펼쳐졌던 날개가 다시 접히며 킨 크라이는 다
시 밤의 데이든 평원 위에 내려섰다.
무엇인가에, 맞았다.
킨 크라이는 그것을 떠올렸다. 주인의 다리에 가볍게 머리를 비벼대
었을 때였다. 무엇인가가 날아와 머리에 부딪히며 머릿속이 온통 번쩍
였다. 지독한 아픔과 공포. 맞았어. 킨 크라이는 다시 고개를 내젖고
는 제자리에서 몇 바퀴 돌았다. 뭐였지?
그러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자 킨 크라이의 머릿속에서 무
엇에 맞았다는 의식이 점점 현실성을 잃었다. 아프지 않아. 맞았나?
자신이 공격당했다는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가자 그의 머릿속으로 느리
게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주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
주인은 그를 이 무거운 안장을 치워주고 씻겨주고 먹이를 가져다주는
존재다. 그런데 그것들이 가장 필요한 이 시점에 주인이 보이지 않는
다. 어떻게 된 거지? 킨 크라이는 다시 뱅글뱅글 돌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둡고 피냄새만 날뿐이다. 킨 크라이는 갑자기 피로
감을 느꼈다. 그러자 희미한 사고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뭔가
를 먹고 잠자리를 찾아야 해.
주인을 찾자.
킨 크라이는 자신의 결정에 만족했다. 주인을 찾으면 그가 자신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안장을 떼어주고 잠자리를 주리라. 주인은…… 주인의
친구들에게 간 것일까.
주인의 친구. 딤라이트. 무스타파. 어디?
킨 크라이의 멋진 결정은 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주인의 친구들은 어
디에 있는 것일까. 킨 크라이는 다시 어쩔 줄 모르는 동작으로 부리로
땅을 헤집고 발톱으로 흙을 긁어대며 빙빙 돌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리폰? 사우스 그레이드에 왠 그리폰이지?"
킨 크라이는 화들짝 놀라면서 몸을 돌렸다. 이상하다. 조금 전까진
아무도 없었는데. 킨 크라이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몸을 낮
추며 날개를 좌악 펼쳤다.
어둠 속에 검은 그림자가 서있었다. 건장한 남자의 그림자. 킨 크라
이는 고개를 한껏 낮춘 채 남자의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저건 누구
지?
킨 크라이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안장? 안장이라니, 넌 길든 그리폰인가? 하지만 그리폰 라이더가 남
아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일스의 기사……"
사내는 흠칫하며 다시 킨 크라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술이 열리
는 순간 킨 크라이는 조금 놀라버렸다.
"킨 크라이? 너 혹시 일스의 기사 그레이 휠드런의 그리폰인 킨 크라
이인가?"
킨 크라이는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과 주
인의 이름이 연달아 불리자 킨 크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조금
쳐들었다. 남자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킨 크라이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얼굴을 감싸쥐었다.
"소, 솔로쳐도 돌아오셨지. 설마, 설마 그렇다면…… 천공의 기사도
부활했단…… 부활!"
남자는 갑자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킨 크라이가 의아한 심정
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남자는 정신없는 동작으로 자신의 팔다리
를 만지며 더듬더듬 말했다.
"내…… 팔! 내 다리, 남아있어. 붙어있어…… 살아있어! 나는? 나
는 싸웠는데…… 살아난 건가? 나도 부활한 건가? 오오, 레티여!"
남자는 무릎을 꿇었고 그 갑작스러운 동작에 놀란 킨 크라이는 뒤로
훌쩍 뛰었다. 하지만 남자는 킨 크라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어깨를 감싸쥔 채 오열했다.
"맙소사, 되살아났어. 살아났어! 어떻게? 어떻게? 나는…… 나는?"
이름이 없는 레티의 프리스트였건만 그가 죽기 직전 그에게 이름을
붙인 자가 있었다. 레틴드롤스는 부활한 자신의 몸, 그 법칙의 반역물
을 그러안은 채 온몸이 부서져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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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분위기에 편승하고(객지로 떠났던 친구들이 고향을 찾는 때입니
다.) 기타 등등의 일로 게으름을 많이 부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바스타드 소드의 영어 스펠링은 짐작하시는대로 Bastard sword 가 맞
습니다. 욕설이기 때문에 이건 아닐 거라고 하셨지만, 그 단어가 맞습
니다. 하하. 하지만 검 이름에 욕설을 붙인 것은 아닙니다. 저 단어는
영어의 고어에서 쌍으로 이루어진 것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바스타드 소드는 두손으로 쥘 수도 있지요.
그리고… 저는 이영도입니다. 메일 죽 읽다가 경영님 글 정말 재미있
어요. 하는 부분에서 고꾸라질 뻔했습니다. 혹시나 이경영 님의 글 소
개하는 글인가 싶어 다시 읽었는데 역시 F/W 의 이야기더군요. 이경영
님의 글 재미있지요… 하지만 저는 이영도란 말입니다.
시리얼란에서 M1 을 누르시면 곧장 작꿈사로 가실 수 있습니다. 그곳
의 3-3 게시판은 시리얼란 이용자분들의 전용 잡담란입니다. 잡담들의
경우는 되도록 그곳을 이용해주시면 좋겠습니다.번 호 : 16228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20 02:10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4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4.
론리 시걸의 갑판장 보타는 사납게 외쳤다.
"그, 그 부적 나도 만지게 해줘요!"
"다, 닥쳐! 가까이 오지마!"
바바라 선장은 으르렁거리며 부적을 꽉 움켜쥐었다. 졸란의 뒷골목에
서 암파린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점복가에게 구입한, 도무지 어떤 효용
이 있을지 의심스러운 괴상하게 생긴 부적이었지만 바바라 선장은 부
적의 효용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적을 믿고 있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중갑판에 몰려있던 다른 해적들 전부가 바바라 선
장이 움켜쥔 부적을 간절한 눈초리로, 혹은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쳐다
보고 있었다.
공포에 빠져있던 것은 다른 해적들과 마찬가지지만 그 눈초리를 본
바바라 선장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이놈들은 어차피 해적
인 것이다. 반란을 무서워할 놈들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그들이 간절
히 원하는 것을 선장이 가지고 있다면 선장의 머리 쯤이야 생선 머리
떼어내는 것보다 더 간단하게 떼어낼 놈들인 것이다. 바바라 선장은
보타 갑판장의 손이 칼자루쪽으로 가는 것을 보며 황급하게 외쳤다.
"조, 좋아. 내가 부적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앞장서서 올라가보겠
다. 너, 너희들은 내 뒤만 따라오면 된다. 알았냐?"
해적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들 단순한 해적들은 역시 선장님밖에
없다는 표정으로 바바라 선장에게 찬양을 보내어왔다. 바바라 선장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내 뒤를 바싹 따라와라. 알겠냐? 이 부적을 가지고 있으니 나는 너
희들을 막아줄 수 있다. 우리는 바다의 신사다! 아, 알겠냐? 귀신 따
위 혀 무서워할 것이 못돼! 바바라는 악마도 두려워하지 않아. 내, 내
가 놈의 목을 비틀어주지. 그러니까 너희들은 바싹 따라와야 한다. 알
았지?"
일방적인 수긍만을 보내온 다른 해적들과 달리 조금 똑똑한 편인 보
타 갑판장은 회의적인 눈길로 바바라 선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상갑판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존재는 보타 갑판장에게도 마찬가지의
공포를 끼치고 있었기에 보타 갑판장은 어쩔 수 없이 바바라 선장을
믿는다는 몸짓을 해보였다.
바바라 선장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주승강계단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해적들은 각자의 무기를 든 채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그 뒤를 따랐다. 승강계단을 올라선 바바라 선장은 잠시
멈춰서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계단 아래쪽에서는 해적들의 얼굴이 가
득 모인 채 어서 올라가라는 표정을 보내오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바바라 선장은 부적을 왼손에 꼭 쥔 채 오른손으로는 검을 뽑아들었
다. 그러자 문을 열 손이 없었다. 바바라 선장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다리를 뒤로 당겼다.
"이야아아아!"
바바라 선장은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찼다. 그리고는 그대로 뒤로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계단을 데굴데굴 구른 바바라 선장은 긴장된 자세로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해적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해적들은 비명
을 지르거나 욕설을 내뱉으며 서로 뒤엉켜 쓰러졌다.
"우아아아! 뭐, 뭐야앗!"
"바바라, 너 이 당나귀 새끼 같으니!"
"어, 어떤 놈이, 으헉! 내 다리! 문을 잠군 거야! 이익, 눈알을 파버
리겠다!"
"선장님이, 으윽! 아까 자, 잠그라고 했잖아요!"
"내가 나가기 전에 열어놨어야 되잖아!"
해적들은 헐떡이고, 욕설을 내뱉고, 서로의 머리를 짓누르고, 팔꿈
치로 옆사람의 눈두덩이를 가격하기까지 했지만, 일어나지는 못했다.
위에서 떨어졌다는 이유로 가장 먼저 일어난 바바라 선장은 빨리 비켜
나라는 선원들의 고함소리에 허둥지둥 옆으로 비켜났다. 황급히 일어
난 바바라 선장은 조금 떨어져있었기에 쓰러지지 않았던 보타 갑판장
이 자신의 바로 앞쪽에 서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보타 갑판장은 경멸어린 눈으로 바바라 선장을 바라보고 있지
는 않았다. 그의 시선은 위로 한껏 쳐들려있었다. 바바라 선장은 의아
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리고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주승강구의 문이 열려있었다. 바바라 선장이 걷어차는 바람에 빗장이
박살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푸른 하늘을 등진 채 시커멓게 보
이는 사내가 해적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내의 다리가 움직였다. 뚜벅뚜벅. 사내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뒤엉켜 버둥거리고 있던 해적들은 숨소리마저 멈춘 채, 그
러나 지금보다 훨씬 격렬한 동작으로 일어나려고 애썼다. 그와 동시
에 해적들은 계단에서 멀어지려고 버둥거렸다. 조용하면서도 격렬한
소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사내의 발자국 소리만이 중갑판 전체로 울려
퍼졌다. 뚜벅뚜벅.
바바라 선장은 무엇인가가 자신의 등을 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
다. 그러나 사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바바라 선장은 고개를 돌리
지 못했다. 그의 귓가로 보타 갑판장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요!"
보타 갑판장의 목소리는 낮고도 사나웠다. 바바라 선장은 침을 꿀꺽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이고 부적을 움켜쥐고 다리도 좀 떨었지만,
그러나 앞으로 걸어가지는 못했다. 그 동안 일어난 해적들은 모두 바
바라 선장의 뒤쪽으로 도망쳐 그의 등 뒤에 숨으려 애썼다. 그래서 다
가오는 사내와 바바라 선장의 사이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보타 갑
판장은 이제 나이프를 뽑아 바바라 선장의 등을 찔러버리고 싶다는 투
로 말했다.
"서, 선장님! 부적, 부적을 내밀어요!"
"다, 닥쳐! 내가 알아서 한다. 부, 부적을 내밀어서 저 녀석을 화나
게 하면 어쩔 거야?"
보타 갑판장은 그 말에 대해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 때 사내가 멈춰
섰기에 보타의 말은 목구멍에 걸려버렸다. 멈춰선 사내는 물끄러미 바
바라 선장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피식 웃었다.
바바라 선장이 조금 뚱뚱한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의 등 뒤
에 수십 명의 해적들이 숨을 수야 없다. 하지만 해적들은 그들 모두가
바바라 선장의 등 뒤에 숨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서로를 밀어대며
선장의 등 뒤에 숨으려 애쓰고 있었다. 사내는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
밖에 지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웃음을 보던 바바라 선장은 이제 최
후의 순간이라고 판단해버렸다. 그래서 바바라 선장은 발작적으로 부
적을 들어올렸다. 팔을 너무 세차게 내미는 바람에 하마터면 부적을
놓칠 뻔했지만 바바라 선장은 다급하게 부적을 움켜쥐며 말했다.
"무, 물러가라! 잡스런 귀신은 물러가라!"
사내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바라 선장을 바라보다가 그의 손
에 쥐어진 부적을 쳐다보았다.
"그건 뭐요? 부적?"
바바라 선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그래! 이건 부적이다. 유,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이름으로, 잡귀
는 물러가라!"
보타 갑판장을 위시한 해적 전원들은 경외감에 가까운 감정으로 바바
라 선장의 등을 바라보았다. 우리 선장님이 저렇게 유식할 수가! 야,
그런데 헬카네스가 누구냐? 그 친구 싸움 잘해?
사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귀신이 아니오. 당신이 나를 구했잖습니까?"
"그, 그래. 아니, 그랬었지. 하, 하지만……"
"하지만?"
바바라는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빌어먹을, 넌
뒈졌단 말이다! 구해내긴 했지. 하지만 넌 결국 뒈졌고 내가 바다에
던졌어. 그런데 왜? 왜 귀신이 되어 이 배에 기어올라온 거야. 난 할
거 다 해줬는데 왜 찾아온 거야! 왜 나를 찾아와, 네가 복수해야 할
것은……
"왜 블루 드래곤에게 가지 않고 우리 배에 온 거요!"
바바라 선장은 몸을 돌려 보타 갑판장에게 입이라도 맞춰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블루 드
래곤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사내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졌다.
"지골레이드…… 지골레이드! 으아아아!"
사내는 미친 듯이 외쳤다. 바바라는 황급히 물러나려 했지만 그의 등
뒤에는 수많은 해적들이 몰려서있었기에 조금도 물러날 수 없었다. 그
래서 바바라 선장은 지독한 공포에 빠진 채로 사내의 광분을 마주보아
야 했다.
"지골레이드! 복수!"
"놈은 어디 있나."
졸란 정화대장 사라스는 이를 악물고는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을 둘러싼 시민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광장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라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
이 광장 중앙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내 생애에 이렇게 많은 시선들을
한꺼번에 받은 것은 이게 처음인 것 같군. 그러나 광장 중앙에 서있
는 또 하나의 사내는 시민들의 시선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는 다
시 사라스를 향해 질문했다.
"사라스, 대답해! 놈은 어디 있나?"
사라스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경의를 그대에게…… 신차이 선장을 찾으시는 겁니까."
"선장? 미치광이 살인마를 찾을 뿐이다. 감히 나에게 검을 겨눌 생각
까지 했다니. 놈이 저지르는 해악은 이제 더이상 용납할 수 없다. 어
디 있나!"
사라스는 이마를 닦았다. 진득한 땀이 손바닥에 묻어났다.
"그가 당신을 공격한 것을 알고 있습니까?"
"뭐야?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사라스?"
"예. 그는 당신을 공격했지요. 저도 압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
죠?"
"사라스!"
상대방은 어이없다는 감정을 넘어서서 분노가 어린 말투로 외쳤다.
사라스 역시 자신의 화법이 머저리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사라스는 정화대원들에게 살짝
눈짓을 보내고는 상대방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예. 그건 신차이 선장도 알고 나도 알고 이 주위에 있는 시민들 모
두 잘 아는 사실입니다. 결투했죠.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래
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뭐라고?"
"그 결투 말씀입니다만,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뭐? 그야 그가 날 쳐서……"
사내의 입은 열려진 그대로였으나 더이상 말은 나오지 않았다. 사라
스는 몸을 조금 낮추며 느리게, 그러나 재촉하는 어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건 수많은 무술 사범들이나 명가의 수장들이 감탄을
표했던 결투였습니다. 강완도 그런 강완은 없을 것이오, 신속에 있어
서는 비유할 바를 찾기도 어려웠던 멋진 한 수였습니다. 신차이 발탄
은 당신과의 결투 끝에…… 당신을 죽였죠. 베이론 코다슈."
베이론은 꼼짝도 하지 않았으나 팔치온을 쥔 그의 손은 심하게 흔들
리고 있었다. 사라스는 메마른 입술을 한번 핥고나서는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말했다. 감히 그 말을 꺼내기 어렵다는 듯이.
"당신은 죽었습니다. 코다슈의 불길은 꺼졌습니다. 그렇잖습니까, 베
이론 코다슈? 그런데, 그렇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신은 누구입니
까?"
사라스가 나직하고 간곡한 어투로 보내었던 질문은 끔찍한 비명소리
로 되돌아왔다.
"끄아아아아!"
"덥쳐!"
정화대원들 역시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갔고 "우우와아악!" 졸
란의 정화대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그런 볼쌍사나운 모습을 보면서도
사라스는 꾸중을 내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장 커다란 비
명을 지르며 베이론에게 달려든 것은 바로 사라스 본인이었던 것이다.
절망의 색깔은 암흑. 암흑의 비릿한 냄새는 지겨워.
하얀 백색의 공포가 다가올 때, 가장 뜨거운 침묵으로 노래한다.
팔이 어깨 속으로, 어깨가 다시 가슴 속으로 말려들 것 같은
차가움 차가움 차가움 차가움 차가움 차가움.
할슈타일 후작은 눈을 떴다.
소리없는 아우성들이 후작의 시각을 무자비하게 유린했다. 얼굴들,
표정들, 감정들, 찌르지마. 찌르지마. 그런 눈빛으로 찌르지마. 너무
아파. 제기랄. 내 눈이 어떻게 된 거지? 내 눈이 '듣고' 있어. 내 눈
이 '만지고' 있어.
쩡 하는 이명. 귀가 열린 것 같다.
삽시간에 끔찍하도록 많은 소리들이 '보였다.' 할슈타일 후작은 귀를
틀어막았다. 귀를 틀어막는 손바닥의 색깔은 붉었다. 태양 때문이다.
할슈타일 후작의 입술이 열렸다.
"아아아…… 아아…… 아아아아!"
찌르지마, 태우지마, 시끄러워! 이 피냄새는 너무 예리해, 그 소리들
은 너무 뜨거워, 그런 색깔들은 너무 시끄러워!
"아아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
덜그렁. 쥬블킨의 손아귀에서 포챠드가 떨어졌다. 그의 동공은 그대
로 튀어나올 것처럼 팽창했다. 쥬블킨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면서도
할슈타일 후작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죽지…… 않아?"
계단 아래에 있던 궤헤른은 덜덜 떨리는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분명히 보았다. 쥬블킨이 내지른 포챠드가 후작의 복부를 거의 관통했
었다. 상처에서 뿜어져나온 피는 지독하게 붉었다. 그 냄새는 아직까
지도 그의 코 안에 남아있었다. 쓰러지는 후작을 보며 니크가 내지른
비명소리도 아직까지 그의 귀 안을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런데 후작이 일어난 것이다.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궤헤른은 무력하게 몸을
돌렸고 흥분으로 시뻘겋게 변한 니크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니크의
두 볼은 그대로 터질 것 같았다.
"살아계세요! 죽지 않으셨어요!"
"응? 어어, 니, 니크. 그래…… 응?"
"이런 우라지게 좋은! 후작님이 죽지 않으셨어요! 급소를 피했나 봐
요. 이 개 같은 콜리의 프리스트 같으니, 뒈져라! 네놈의 손으로 우리
후작님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 같아? 보세요! 집사님! 보시라고요!
일어나고 계세요!"
니크는 궤헤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면서도 눈으로는 계속해서 할슈
타일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궤헤른은 니크가 흔드는대로 흔들리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어떻게든 정리해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사고는 갈피를 잃었고 그의 이성은 헤집어놓은 흙탕물 마냥 한층 더한
혼란 속으로만 계속 빠져들었다.
운차이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계단 위의 후작을 응시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이제 똑바로 일어섰다. 하지만 두 눈은 꼭 감겨있었고 두 손은
자신의 귀를 단단히 틀어막고 있었다. 그런 자세로 후작은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죽었을 텐데, 어떻게 죽지 않는
거지? 웅 하는 이명이 운차이의 귓속을 가득 채웠다. 이해할 수 없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 때 운차이의 귀를 가득 메운 이명들 사이
로 나직한 목소리 하나가 흘러들어왔다.
"요즘 유행하는 이야기 하나 들려드릴까요?"
운차이는 고개를 홱 돌렸다. 제레인트였다. 제레인트는 똑바로 서서
는 오른손에 쥔 디바인 마크를 가슴에 붙인 채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래서 운차이는 제레인트의 귀를 바라보게 되
었다.
"끝난 두루마리가 다시 펼쳐지고 이야기는 새롭게 시작된답니다."
"제레인트……?"
"후작의 두루마리도 그렇군요. 후작의 일대기의 맨 마지막 장면은 이
랬어요. 쓸쓸하고 차가운 북부의 도시에서 한 광신도에게 찔려죽다.
그리고 끝. 그런데 말입니다. 후작에게 새로운 두루마리가 배당되었답
니다. 어쩌겠어요. 비장한 죽음 장면을 바꿔야지요. 할슈타일 후작,
다시 살아남."
운차이는 소스라치는 기분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히죽 웃었다. 그는 몸을 조금 돌려서는 파하스에게 경의어린 동작으로
허리를 굽혀보였다.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파하스를 향해
제레인트는 나직하게 말했다.
"데스나이트도 살아나고, 솔로쳐도 살아나고, 거인도 살아나고, 파하
스 님도 살아났지요."
파하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돌려 다시 후작을 바
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너무 이상하게 바
라보지는 말아요, 운차이."
"그럼 후작도……"
"후작도 살아났습니다. 안 죽은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나버린
겁니다."
================================================================
흐음. 2월은 사용자 입장에서는 신경질 나고 노동자 입장에서는 신나
는 달이라더군요. 일 적게 해도 월급은 똑같이 나오니.
그 말을 듣고 달력을 보니 어느새 2월 말… 시간이 참 겁나게 흘러갑
니다. 여러분들 모두 기쁜 월말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6288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21 01:37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5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5.
"네가 누구냐고?"
아일페사스는 싱긋 웃었다. 그녀는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으며
상체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래. 저는 누구냐고 물었어. 말해보려무나, 귀여운 거인아."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가 사용하는 어휘들에 대해 상당한 교정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물론 지금까지도 계속 느껴왔던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이나 절실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살아난다면 기어코 아일페사
스의 어학 능력부터 손봐주리라. 그리고 아프나이델의 그런 결심과 똑
같은 결심이 엑셀핸드의 마음 속에서는 수십 배 증폭되고 보다 폭력적
으로 바뀐 형태로 맴돌고 있었다.
거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아일페사스를 내려다보다가 팔짱을 꼈다. 거
인을 올려다보던 엑셀핸드는 푸른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이 그의 정수
리에 걸릴 것 같다는 착각을 계속 느꼈다. 그런 압도적인 높이에서 거
인은 근엄하게 말했다.
"너는 인간 계집애잖아."
바로 그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아일페사스는 거인의 말이 끝나자
마자 펄쩍 뛰었다.
"까르르륵! 틀렸어요! 틀렸어!"
거인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뭐라고? 틀리다니. 그럼 네가 무엇이란 말이냐!"
"너 까무라치지 말아요? 제가 누구냐면 말이야."
아일페사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두 손을 허리에 얹었다. 그리고는
상체를 있는대로 젖혀서 거인에게 턱을 보여주려 애쓰면서 말했다.
"저는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의 이름을 계승
하는 자,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두번째 목소리이자 드래곤들의 첫번째
목소리, 드래곤의 별의 보호자, 알겠니? 저는 드래곤 로드의 딸 아일
페사스다!"
거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덴산의 거인은 하나뿐인 눈을 커
다랗게 뜬 채 아일페사스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후, 거인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뭔데?"
일행들 중 정신적으로 엉덩방아를 찧지 않은 자는 이루릴 뿐이었다.
에델린과 엑셀핸드,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각 종족을 대표해서 트롤과
드워프, 인간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황당함을 표현하는지를 여실
히 나타내어보였다. 아일페사스의 경우, 그녀는 코를 크게 벌름거리며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야, 이 멍청한 거인이시여! 너는 너무 멍청해요! 제가 누군지 말했
잖아! 얼간아! 바보야! 저는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의 이름을 계승하는 자,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두번째 목소리이자
드래곤들의 첫번째 목소리, 드래곤의 별의 보호자란 말이야! 말해줬잖
아요! 이해력이 떨어지면 노력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거인 역시 짜증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는 말이다!"
사방이 트인 황야였지만 거인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울려퍼졌다.
머리를 홰홰 휘젖던 에델린은 그 메아리가 자신의 귓속에서 울리는 것
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 위압적인 고함소리도 아일페사스를 주눅
들게 하지는 못했다. 아일페사스는 저렇게 우둔한 녀석은 처음 보겠다
는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뭐? 이이이익! 저는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
의 이름을……"
그 때 이루릴이 팔을 들어올렸다. 거인은 이루릴을 내려다보았지만
아일페사스는 이루릴이 물구나무를 선 채 발로 박수를 치며 돌고래 울
음소리를 낸다 해도 자신이 할 말은 끝까지 하겠다는 결연한 태도로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 때 아프나이델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입을 틀
어막았다.
"웁! 웁!"
"조용히 있어, 제발!"
아프나이델의 조력에 힘입어 간신히 고요를 얻은 이루릴은 그녀다운
태도로 말했다.
"거인이여. 그녀는 드래곤입니다."
그덴산의 거인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튀어
나올 정도로 커진 눈으로 거인은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거인은 상체를 앞으로 굽혔다. 휘익. 거대한 거인의 몸이 움
직이며 그림자가 머리 위를 덥치자 엑셀핸드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
을 느꼈다. 거인은 상체를 숙여 아프나이델의 품에 안겨있는 아일페사
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행들로서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
대한 거인의 얼굴이 땅까지 내려온 채 그들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델린은 동굴 같은 거인의 콧구멍을 보고는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상체를 숙이는 것만으로도 일행들에게 폐소공포증 비슷한 것
을 선사하던 거인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람인데?"
이루릴은 생긋 웃었고 아프나이델은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
을 느꼈다. 이루릴은 그런 아프나이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일페사스를 놓아주세요."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의 입을 열었다. 막혔던 봇물이 터지는 것처
럼 아일페사스의 입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니까 저는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의 이
름을 계승하는 자,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두번째 목소리이자 드래곤들
의 첫번째 목소리, 드래곤의 별의 보호자인 아일페사스란 말이야!"
아일페사스를 놓아주었던 아프나이델은 재빨리 몸을 돌려 이번에는
엑셀핸드를 끌어안아야 했다.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에게 안긴 채 저
멍청한 드래곤 로드의 여식의 머리를 두드려서라도 개선하겠다는 식의
폭언을 퍼부어대었다. 차분한 태도로 아일페사스의 말이 끝나기를 기
다리던 이루릴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 조용히 말했다.
"아일페사스. 원래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하셔서 거인의 의혹을 풀어드
리세요."
"응? 아아. 그렇구나! 잘봐요, 이 우둔한 거인아!"
거인은 크게 씨근거렸지만 남아있는 의혹은 그의 손을 멈추게 만들었
다. 혹시나 정말 드래곤 로드의 딸이라면? 그래서 거인은 아일페사스
를 눌러죽이지는 않았다. 자신이 어느 정도의 위험 속에 있는지를 도
통 파악하지 못한 아일페사스는 똑바로 서서는 그덴산의 거인을 올려
다보았다.
"자! 이것이 저의 정체에요! 야하아아압!"
거인은 그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차츰, 그의 마음 속에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물결
치기 시작했다. 거인의 조악한 어휘 수준으로는 그의 감정을 정리할
단어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거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광경은 그대로였다. 거인은 입술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게 너의 정체냐?"
아일페사스는 씩 웃었다.
"그렇다! ……엥?"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을 내려다
보았다. 작고 앙징스러운 두 개의 발이 사이좋게 서있었다. 그리고 그
위의 다리와 아랫배, 가슴까지를 주욱 바라본 아일페사스는 손을 들어
올렸다.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펴졌다 오므려졌다 하고 있었다. 사람의
손가락은 이상해. 너무 약해 보여. 아일페사스는 갑자기 인간에 대한
동정심을 느꼈다. 문득, 그녀의 정수리를 쏘아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
졌다.
고개를 숙인 채로 아일페사스는 눈을 치켜떠 거인의 얼굴을 훔쳐보았
다. 그곳에서는 볼을 크게 실룩거리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인의
얼굴이 있었다.
"오, 오…… 오아앙…… 그러니까 말이야…… 이, 이건 실수에요! 야
하아아압!"
"잠깐만, 잠깐만. 이상하다? 자, 다시. 야하아아압!"
"너무 놀라지 않도록 주의해요. 이이이야압! 하이오오옵! 후압! 얍얍
얍!"
"너 지금 제가 거짓말 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거인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아니."
"뭐? 그럼 믿는 거야! 좋아요! 그래! 믿는군요!"
아일페사스는 깡총깡총 뛰며 좋아했다. 하지만 거인의 고개는 좌우로
움직였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내가 수수께끼 놀이에서 이겼다는 것이
다."
거인은 자신이 상당히 위트있는 말을 했다고 믿으며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끈한 아일페사스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자신이 드래
곤이라고 주장했지만 거인은 정신 이상한 인간 계집애에게는 별로 신
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얼굴을 퍼렇게 물들인 채로 아일
페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 때 그가 묻
고 싶던 것을 에델린이 질문했다.
"아일페사스, 아일페사스. 어떻게 된 거에요. 폴리모프할 수 없는 건
가요?"
"뭐? 어, 그래. 저 폴리모프가 안돼. 이상해요…… 이이이! 왜 안되
는 거야!"
"긴장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정신을 집중해서 다시 해보면 어떨까
요?"
"이이익! 새가 긴장한다고 추락사하니? 물고기가 긴장한다고 익사하
니? 린, 왜 그렇게 멍청한 말을 해요!"
"그, 그래요? 그럼…… 그럼 왜 안되는 건가요?"
"몰라!"
엑셀핸드 역시 불안한 눈으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지만 그가 질문
한 대상은 아프나이델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봐, 아프나이델.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모르겠습니다. 왜 변신이 안되는 건지…… 변신이…… 변화가?"
아프나이델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켄턴 방향으로 돌아갔다.
변화가 안된다고?
현실이 고정되었다고?
아프나이델은 목 뒤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설마 그건가?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 무서운 상황을 추리하던 그의 귓가에 거인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너희들은 졌다! 이제 말하라!"
누구 저 멍청한 거인 녀석의 입 좀 막아줄 사람 없나! 아프나이델은
허옇게 뒤집어진 눈으로 거인을 흘겨보고는 다시 켄턴을 바라보았다.
섬뜩함을 느낀 거인은 목소리를 조금 낮춰서 말했다.
"어, 이봐. 너희들이 졌단 말이다. 그러니 약속한대로 루트에리노의
소재를……"
"이 새대가리 같은 거인아! 입 좀 다물고 있어. 생각 좀 하자!"
엑셀핸드는 눈 앞이 노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이 공포 때
문에 미쳐버렸구나. 내가 거인에게 대신 사과할까? 그 때 아프나이델
은 들고있던 로드를 내동댕이치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변화가 없어? 변화가 안된다고? 고정되었다고? 제레인트! 제레인트!
갈림길을 잘못 선택한 거요?"
올바른 선택을 하라는 목적으로 제레인트를 먼저 턴빌로 보내었던
아프나이델은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잘못 선택한 것일
까? 아니면 너무 늦었던 것일까? 아니, 잠깐만. 아직은 모른다. 이것
은 시간이 느려지는 현상 때문에 발생한 한 증상일지도 모른다. 어쩌
면 아직 기회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
턴빌로 가야 한다. 아프나이델은 자신의 결심에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턴빌로 가야 한다. 어쩌면 제레인트 혼자서는 역부족일지도 몰
라.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일지도 몰라. 어서 턴빌로 가야 해. 그런데
그러려면 문제가 되는 것이 있군. 그것도 자그마치 100 큐빗짜리 문제
로군. 그러면 어떻게 한다?
아프나이델은 재빨리 로드를 들어올리고는 자신의 말 세레니얼의 고
삐를 움켜쥐었다. 거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아프
나이델이 먼저 외쳤다.
"나를 따라와! 루트에리노의 소재를 알려주겠다!"
거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행들 사이에서는 빠른 속도로 시선이
교환되었다. 하지만 엑셀핸드에서 아일페사스, 그리고 에델린으로 빠
르게 전달되던 시선은 이루릴에게 이르러 멈춰졌다. 에델린은 가슴 속
이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끼며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 양……?"
이루릴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에델린을 보고 있었다. 에델
린은 불경스럽게도 신의 이름을 빌려 욕설을 퍼붓고 싶은 충동을 느꼈
다. 오오, 맙소사! 엘프에게 이것이 사기라는 것을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
이루릴은 의아한 표정으로 에델린을 보며 말했다.
"에델린. 뭐하시나요? 어서 말에 타시죠."
꽝! 에델린은 뭔가가 자신의 머리를 후려치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엑셀핸드와 아프나이델도 마찬가지였다. 에델린이 뭔가 할 말
을 찾기 위해 입을 뻐끔거리고 있을 때 이루릴은 차분하게 엑셀핸드가
아프나이델의 등 뒤에 타는 것을 도와주며 말했다.
"대왕도 부활하신 줄은 몰랐군요. 뵙고 싶네요. 어서 가볼까요."
에델린은 간신히 졸도하지 않고 코스모스에 올라탔다.
================================================================
누구는 부활하고 누구는 부활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좀
받는군요. 전개에 관련된 것이니만큼 기다려주십사는 대답밖에 드리지
못하겠군요.
번 호 : 16289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21 01:38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6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6.
네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알던 제레인트가 아니었다. 잠시
동안 네리아는 할슈타일 후작의 부활마저도 잊은 채 제레인트를 바라
보았다. 왜 저렇게 슬픈 어조로 말하는 거지? 포기하는 것 같은, 뭐라
고 하더라.
"왜 그렇게 무력감에 젖어 말하는가."
아, 그래! 그거였어. 네리아는 운차이를 바라보았고 제레인트 역시
운차이를 돌아보았다.
"예?"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 급한 것은 할슈타일 후작과, 그리고
쥬블킨의 문제였다.
쥬블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
다. 모든 이성적 사고를 뛰어넘어 순수한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다. 후
작을 찔렀을 때 그는 이 세상의 모든 확실한 진리를 뛰어넘는 확실함
으로 후작의 죽음을 느꼈다. 그것은 살해의 감각이다. 그런데 후작은
쥬블킨이 느꼈던 감각을 배신하며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답이 뭐야!"
천둥 같은 목소리. 쥬블킨은 얼빠진 얼굴을 돌려 계단 아래를 바라보
았다. 콜리의 프리스트들 역시 얼굴 가득한 공포로 그를 마주보고 있
었다. 그리고 그 너머 후작의 전사들, 그리고 그 뒤. 아까부터 저런
식으로 고함을 질러대던 녀석.
운차이는 다시 외쳤다.
"말햇! 여덟번째 희생자는 죽었다. 되살아났건 어쨌건 죽은 건 죽은
거야! 그럼 아홉번째 정답이 드러나야 한다. 아홉번째 정답은 뭐야!"
쥬블킨은 되살아난다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버렸기에 그 뒤의 말에
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되살아났다고? 그렇군! 되살아난 것
이군. 죽지 않는 것이 아니야! 인식은 공포를 몰아내고 쥬블킨의 경직
은 빠르게 사라졌다. 쥬블킨은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았
다. 쥬블킨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억세게 재수좋은 녀석. 네놈이 바로……
숨막히는 표정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저 역시 운차
이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이마를 딱 소리나게 쳤다. 맞았어! 그덴
산의 거인은 되살아났지. 이 문제 때문에. 그렇다면 저 남자도 되살아
난 것인가.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이 말하는 바는 무엇이지? 순간 레이
저는 심장이 떨어지는 충격을 느꼈다.
나크둠도 되살아날 수 있는가?
죽은 녀석들이 살아난다면, 그렇다면 나크둠도 되살아날 수 있는 것
인가? 제기랄, 말이 돼! 나크둠이 되살아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이
웃기는 사태들을 보라고. 방금 복부를 관통당했던 녀석이 멀쩡하게 살
아났어.
하지만 나크둠은 깊은 동굴 안에 갇혀있어. 오오, 이런 가져다붙일
욕도 없는 지독한! 레이저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쥬블킨을 바라보았
다.
"이봐! 죽은 녀석들은 다 살아나는 거요? 말해!"
"뭐라고?"
루손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이저는
쥬블킨만을 바라보며 외쳤다.
"말하라고! 죽은 자들은 모두 부활하는 거요? 거인도 부활했어. 파하
스도 부활했어. 신스라이프도 부활했다고! 그렇다면…… 죽었던 모든
자들은 부활할 수 있는 거요?"
이 소란과 공포스러운 장면들을 보면서도 아직까지도 달아나지 않고
남아있던 시민들 사이에서 뜨거운 바람 같은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
되살아난다고? 죽은 자들이? 죽은 내 어머니가, 죽은 내 남편이, 죽은
내 딸이 되살아난다고?
군중들은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계단 쪽을 향해 걸어
오기 시작했다.
운차이는 흠칫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껏 공포 때문에 멀찌감
치 물러나려고 애쓰던 군중들이 갑자기 주위를 좁혀오기 시작한 것이
다. 군중들은 아직까지도 하늘에 떠있는 신스라이프와 이상한 마법사,
그리고 괴상하며 목적을 알 수 없는 여러 일행들에 대해 겁을 집어먹
은 상태였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표정을 지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스스로도 걷는다는 행동을 자각하지 못하는 듯한 멍한 얼굴들이
었지만 운차이의 감각은 위기를 알려오고 있었다.
"이봐, 그란. 사람들이…… 그란? 제기랄!"
손이 늦었다. 그란의 어깨는 앞으로 빠져나갔고 운차이의 손은 허공
을 가로질렀다. 그란 하슬러는 맹렬한 속도로 돌진하고 있었다.
후작의 전사들 중 가이버가 가장 먼저 그란을 발견했다.
"핫소드……!"
꽝! 가이버는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당하고는 니크와 궤헤른을 덥치는
방향으로 나가떨어졌다. 중력과 운동에너지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인간의 비명과 욕설을 만들어내었다. 니크와 궤헤른은 가이버의 몸에
맞아 나가떨어졌고 그란은 그 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뒤늦게 사태를
발견한 네리아가 찢어지는 고함을 질렀다.
"그라아안! 무슨 짓이야!"
그란 하슬러는 아무 말 없이 콜리의 프리스트들 한가운데로 돌진했
다.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주춤거리며 로드를 들어올렸으나 그란은 사
자처럼 외쳤다.
"막으면 죽는다!"
훌륭한 헤게모니아어. 운차이는 속으로 악담을 퍼부으며 그란의 뒤를
따라 달렸다. 하지만 월등히 스타트가 빨랐던 그란은 이미 콜리의 프
리스트들 사이를 무인지경처럼 헤치고 있었다. 담대한 프리스트 하나
가 로드를 앞으로 내밀며 그란을 막아섰다. "멈춰! 뭐……!" 남은 평
생 동안 후회할 결정이었다. 그란은 프리스트의 멱살을 붙잡고는 그대
로 들어올리며 다른 손으론 그의 가랑이를 잡아채었다. "크억!" 그란
은 프리스트의 몸을 방패처럼 앞으로 내밀며 계단을 뛰어올랐다. 콜리
의 프리스트들은 목숨을 걸고 몸을 날려 그란의 돌진을 피했지만 몇몇
운수 사나운 프리스트들은 그의 진로에 서있었다는 이유로 사람에 충
돌하여 하늘을 나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쿠앙, 쾅쾅! 몸과 몸
이 부딪혀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충돌음이 울려퍼지며 성
스러운 프리스트들이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광경을 보며 네리아는 기막
힌 얼굴로 말했다.
"전에도 봤던 거야. 사람 폭풍이잖아?"
단숨에 콜리의 프리스트들 사이를 돌파한 그란은 그 때까지 앞을 가
리는데 사용하던 프리스트를 옆으로 팽개치고는 검을 뽑아들었다. 이
제 그의 앞에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는 쥬블킨과 흐리멍텅한 눈
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할슈타일 후작만이 서있었다. 그란은 칼자루
를 부러져라 움켜쥐며 바이서스어로 외쳤다.
"할슈타일!"
그 때까지도 감각의 혼란을 겪고 있던 할슈타일 후작은 그란의 외침
을 귀로 보고 있었다. 시뻘건 분노의 색깔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선홍색의 불꽃이 폭풍쳤다.
"마가릿 하슬러를 기억하나!"
할슈타일 후작은 기를 쓰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손은 더듬거렸고
발은 맥박치고 있었다. 심장은 쩔뚝거리고 있었고 허파는 주춤거리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고함지르려 했으나 왼쪽 어깨로는 말이 나오
지 않는다는 것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감각의 소용
돌이 가운데로 그란의 분노가 해일처럼 몰아닥쳤다.
"되살아난 것에 감사하겠다. 내 손으로 죽여주마!"
그란은 검을 높이 쳐들었다.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던 후작은 하늘로
높이 쳐들린 그란의 검을 눈으로 들으면서도 아무 짓도 할 수 없었다.
그란의 입술이 크게 뒤틀렸다.
"아아아압!"
"막아, 루소온!"
콰가가각!
계단 아래에 서있던 사람들은 얼떨결에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쇠
와 쇠가 부딪히며 지독한 소음과 함께 눈을 부시게 하는 불꽃이 튀어
오른 것이다. 그러나 운차이는 눈을 감지 않았다. 실눈을 뜬 채 계단
위를 바라보던 운차이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맙소사……"
루손의 글레이브가 후작의 목 바로 앞에서 그란의 롱소드를 막고 있
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많은 영웅들과 수많은 전설을 탄생시킨 대륙
의 검의 역사에서도 처음으로 일어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저건 글레이브의 유난스럽게 넓은 날 때문이다. 그냥 검이었다면 그
란의 힘 때문에 반동강이 나버렸겠지. 그리고 저 글레이브는 연성이
강한, 상당히 질긴 철로 만들어진 것이겠지. 운차이는 애써 상황을 설
명하려 했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상황은 그의 현실감각을 완전히 뒤
흔들어놓고 있었다.
그란의 롱소드는 루손의 글레이브에 직각으로 꽂혀있었다.
마치 빵에 꽂아둔 나이프 같은 꼴이었다. 그란의 매끈한 롱소드는 루
손의 글레이브를 절반쯤 절단한 위치에서 정지해있었다. 그란도 루손
도 그 광경을 보며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굳어있었다.
그러나 그란이 운차이와 같은 상황에 빠져있는 것에 비해볼 때, 즉
무의식 중에 이 상황을 어떻게든 납득해보고자 애쓰고 있는 것에 비해
볼 때 루손은 상황을 설명하고 납득하고 싶은 욕망이 별로 없었다. 그
리고 그런 루손의 성향은 뒤로 당겨진 그녀의 오른쪽 다리를 통해 나
타나고 있었다.
"꺄아아압!"
루손은 걷어찬다기보다는 미는 식으로 그란의 복부를 찼다. 무의식
중에 감행한 행동이었지만 가장 적절한 행동이었다. OPG 를 착용한 그
란을 걷어차서 물러나게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루손은 밀어
버렸고 그란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까드드득! 사람들로 하여금
귀를 틀어막고 싶어지게 만드는 마찰음이 울려퍼지며 그란의 롱소드는
루손의 글레이브에서 뽑혀나왔다. 그란은 뒤로 물러났고 그제서야 루
손은 조금 전부터 간절히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루손은
글레이브를 두 다리 사이에 끼우고는 잠시 두 손을 양쪽 겨드랑이에
낀 채 팔짝팔짝 뛴 것이다.
"아악, 내 손! 손가락이, 손가락이 다 부러졌나봐! 어후후후! 팔이
저려 죽겠네. 우웅, 우우웅! 왜 막으라고 그런 거야!"
거의 취해버린 기분이었지만 레이저는 간신히 앞으로 걸어나올 수 있
었다.
"멈춰…… 요. 당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멈춰요."
그란은 루손을 바라보면서 레이저의 말에 대답했다.
"왜? 마법사."
"난 대답을 듣지 못했으니까. 거기 서! 쥬블킨!"
계단 아래로 내려가려던 쥬블킨은 레이저의 고함소리에 발걸음을 멈
췄다. 레이저는 재빨리 말했다.
"질문은 모두 세 가지요. 죽은 자는 모두 다 부활하는 거요? 아홉번
째 정답은 어디 있지요?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도대체 뭐지?"
쥬블킨의 입술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그 중 하나만 가르쳐 주지. 첫번째 것. 모두 다 부활하
는 것은 아냐. 그리고 더 이상의 부활도 없을 것이다."
"뭐?"
쥬블킨의 입술이 이젠 분명한 비웃음을 띄고 있었다.
"저 자에게 정말 콜리의 축복이 있었던 모양이군. 어떤 행운의 이름
이 저 자를 설명할까. 하하하. 나도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하
지만 짐작하는 바는 있지…… 정정하겠어. 두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해줄 수 있을 것 같군."
두번째 질문? 그게 뭐더라? 아, 그렇지. 아홉번째의 정답. 그게 어디
있는데? 쥬블킨은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그는 손을 들어올리며 외쳤
다.
"형제들이여! 그 자를 보호하라!"
레이저와 루손, 그리고 그란도 황급히 몸을 돌렸다. 쥬블킨이 가리키
고 있는 곳은 땅에 뚫린 구멍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구멍
옆에는 한 사람이 서있었다. 그 사람은 처연한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쥬블킨은 두 팔을 위로 들어올리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드디어 정답이 나왔다!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
그 흐름의 교차점! 콜리를 대신하여 너희들의 노고에 감사하마. 형제
들이여. 그 자를 보호하라! 그 자야말로 아홉번째의 정답, 과거를 거
부하는 자, 미래를 거부하는 자! 신스라이프의 희망이다!"
레이저는 눈을 크게 껌뻑거렸다. 맙소사, 저 사람이 그 정답이라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그는 그 자를 알고 있었다. 역시 그
사람을 알고 있던 그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쥬블킨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때 그런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신스라이프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스라이프는 천천히 허공을 걸어 구덩이 옆에 서있던 자에게 다가갔
다. 구덩이 가장자리까지 다가갔을 때 그의 몸은 아까 그랬던 것처럼
다시 허공에서 걸렸다. 신스라이프는 제자리에 멈춰서서는 눈살을 찌
푸렸다. 그러나 그 표정은 길지 않았다. 신스라이프는 똑바로 선 채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허공을 만지듯이 움직였다.
신스라이프는 낮지만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라."
구덩이 옆에 서있던 사람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
았다. 하지만 그 자의 다리는 흐느적거리듯 움직이며 구덩이 쪽을 향
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구덩이의 가장자리, 신스라이프의 바로 앞에
멈춰선 그 사람은 멍한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라."
다리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그 손이 떠오르듯 천천히 올라왔다. 신
스라이프는 초조한 표정으로 그 손을 바라보았다. 둥둥 떠오르던 손은
마침내 신스라이프의 손바닥 바로 앞에 멈춰졌다.
"내 손을 잡아라."
그 사람은 촛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쥬
블킨은 헐떡이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른 콜리의 프리스
트들 역시 숨소리마저 죽인 채 그 손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정적이 가득한 정원 위로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파! 안돼!"
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신호가 된 것처럼 파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아왔다. 파는 바로 앞에 서있는 신스라이프를 바라보
았다. 그 눈에서는 가느다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앞으로 뻗어나간 파의 손이 신스라이프의 손을 움켜쥐었다.
================================================================
1999년이라고 쓰니 왠지 종말적인 기분이 듭니다만, 단기로 생각해보
니 웃음이 픽 나오는군요. 올해는 단기 4332년입니다. 아무리 봐도 종
말적인 분위기는 나지 않는 숫자지요? 불기로 따지면 2543년이라는 머
리 아픈 숫자가 나옵니다. 역시 종말적인 분위기는 없군요.
숫자의 마력도 재미있군요.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6350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22 17:26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7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7.
.유이 던왔켜시비준 를파 터부전 래오 이신자
……고리그 ,유이 인답정 가파 ,유이 민내 을손 가파 .다었없 수 알
는미 만지하 .다안 를과결 저먼 다보인원 .다안 를과결 든모 .다본 를
래미 는커워 처퓨. 다없 수 알 도것 무아 .다없 수 알 .다럽스란혼 이
것 든모 .다았보라바 을만파 와프이라스신 채 한못 지끼느 도것 무아
는미 만지하 .다았핥 을볼 의미 며리거끙끙 은탄달아
.다었꿇 을릎무 는미
쳉은 숨까지 멈춘 채 파를 바라보았다.
파의 손가락들이 굽혀지며 신스라이프의 손과 깎지를 끼는 그 짧은
시간이 쳉에게는 수십년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막아야 해. 왜?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 알게 뭐람?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잘 안되면 또
어때. 수백만분의 1단위로 구분지어진 수백만 개의 시간들을 가로질러
가며 쳉은 상념에 빠졌다. 하지만 그 상념들의 대부분들은, 아니 그
모두는 다음 상념과도, 그 앞의 상념과도 연결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
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느끼고 행하는 망상처
럼. 쳉은 그렇게 수백만 개의 시간들을 무의한 상념들에 낭비하고 있
었다.
'.데는았을 저먼 터부과결 는때 른다 ,데는았않 지렇그 는때 른다
.어있 어되 로꾸거 이것 든모 은금지 .야로꾸거 이것 든모 ……야로꾸
거'
.다된 이답정 의프이라스신 는파 고리그 .다된 게지가 을힘 운라놀
는파 .다한행 을신문 게에파
.다된 이답정 의프이라스신 는파 고리그 .다된 게지가 을힘 운라놀
는파 .다한행 을신문 게에파
……다난떠 을길 .다는않 지이보 가래미
.다한결해 를태사 .다난떠 을길 .다는않 지이보 가래미
.다난만 과쳉 .다한랑사 을쳉 .다한혼결 과쳉
.다한혼결 과쳉 .다한랑사 을쳉 .다난만 을쳉
.다한랑사 를지버아 .다는죽 가지버아 .다프슬
.다프슬 .다는죽 가지버아 .다한랑사 를지버아
.다유비 한능가 때 을있 수 될납용 가유비 한악조 장가 도것그 나러
그 .다깝가 에한회 리라차 은것그 .다되황허 음름이 의포공 서에앞 정
감 는끼느 금지 가미 .다었있 고나어일 서에분부 든모 몸 의녀그 이들
율전 는없 수 을참 .다었떨 을몸온 채 은막어틀 을입 는미
연속적이지 않은 상념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흐름이 두드러졌다. 나
뉘어졌던 시간들이 갑자기 연결되며 쳉은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포착
하여 상념의 시간 속에 결박했다.
쳉은 갑자기 자신이 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파는 누구지? 미의 여동생. 꺽달진 성격이라고 생각되지만 확신할
수 없다. 마음씨 착한 호인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를 따라오며
내가 미를 만나는 것을 방해해왔다. 나는 화를 내지 않았어. 감정결핍
때문에? 아냐. 나에겐 감정이 결핍되어 있기에 파를 처리하는데 장애
물이 되는 감정도 없다. 나는 아무런 죄책감이나 감정의 얼룩 같은 것
을 느끼지 않은 채 파를 강제로 돌려보낼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
러지 않았어.'
다시 몇천 개의 시간이 흘렀다. 쳉은 신스라이프의 손과 마주 쥔 파
의 손에서 그 얼굴 쪽으로 시선을 옮기기 시작했다.
'너는 누구지? 난 왜 너에 대해 아무 것도 떠올릴 수가 없지? 미와
만났을 때부터니까 12년 동안 너를 알아왔어. 물론 일년에 며칠씩밖에
만나지 못했지. 그것 때문인가? 그래서 나는 너에 대해 아무 것도 떠
올릴 수 없는 건가? 아냐. 그렇다면 미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나는 미
에 대해서라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감정결핍 때문에? 내 감정은 미
에게만 돌아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래도 이상해. 너
는 누구지?'
몇백 개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쳉의 시선이 파의 볼에 도달했다.
'양털을 깎던 파. 안장을 들어올리던 파. 아달탄을 걷어차던 파. 취
한 채 덤벼드는 주정꾼 네 명을 맨손으로 모두 거꾸러뜨리던 파. 시체
를 보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리던 파. 사이들랜드의 대초원의 가장
어두운 밤, 내 볼을 쓰다듬던 파. 너는 누구지?'
?지거 난어일 이일 런그 터부서게에너 왜
.다었이동행 첫 의미 한행 채 한못 지알 를래미 즉 ,동행 된치일 이
간시 의동행 와고사 은것그
'?까을었주해 을신문 게에파 는미 왜 데런그'
.다었이동행 한미의무 은신문 한행 가미 서라따 .다었이뿐 을있 가래
미 는죽 려걸 에트스페 후 은잃 두모 을족가 는게에파 .다었없 이적
한용사 을힘 의신문 그 는파 서에래미 는보 가녀그 ?까을았않 지하각
생 고다하상이 왜 ?까을랬그 왜 .다었주해 을신문 게에파 는녀그
.다었루이 를치일 로으음처 서어있 게에파 이것그 데런그
.다된현구 서에속 치일불 런그 는미 의서로커워처퓨 고리그 .다는않
는지끼느 을음졸 고알 을것 될 게자잠 시역 녀그 만지하 .다났만 을쳉
고알 을것 될 게하랑사 을쳉 는녀그 .을것 는다었있 고하치일불 해의
에간시 는르흐 로으향방 른다 로서 이몸 의녀그 와고사 의녀그 .다었
있 고알 에중 식의무 는미
'.어었이향방 은같 과람사 른다 는체자 간시 그 는가러흘 려실 이몸
의미 ,만지였로꾸거 는고사 의미'
.다었이동행 의녀그 은웃비 을신자 에중 식의무 은것 인툽 게에개 을
음이 의들아 할못 지보아안 .다했못 지하식인 는로으적식의 도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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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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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스라이프의 손을 마주쥔 채, 파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신스라이
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신스라이프는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다른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다른 손도 들거라."
파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축 늘어져있던 손이 힘없이 올라가며 신스
라이프의 손을 마주 쥐었다. 그렇게 두 남녀는 두 손을 깍지낀 채 서
로를 바라보았다. 레이저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떻
게 해야 되지? 왜 저 여자야? 파 L. 그라시엘. 당신은 어떤 여자였기
에? 싸움 잘하고 도톰한 입술이 달빛 아래에서는 놀랍도록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 이외에 당신은 또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때 레이저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사람이 있었다.
어깨가 거의 부서지는 느낌을 받으며 레이저는 뒤를 돌아보기에 앞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 그러나 그 비명을 억누르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마법사…… 공격해!"
레이저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멍한 표정으로 신스라
이프와 파를 바라보고 있던 그란 역시 창백해진 얼굴을 뒤로 돌려 할
슈타일 후작을 바라보았다. 할슈타일 후작은 얼굴 근육 전체를 푸들거
리며 힘겹게 말했다.
"공격해. 공격……해! 저 놈을…… 죽여. 저것을 마, 막!"
"할슈타일!"
그란은 짓씹듯이 외치며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할슈타일 후
작이 취한 것처럼 흔드는 손을 보고서는 잠시 멈추었다. 후작은 힘들
게, 어마어마하게 힘들게 손을 움직였다. 그의 감각에서 지금 할슈타
일 후작은 왼쪽 허리를 경직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자신의 모든 감각에 대해 저주를 퍼부으며 오른쪽 정강이를 앞뒤로 움
직였다. 즉, 말을 했다.
"저, 저 놈을 공……격. 마법……사. 제발! 이유는…… 천천히……
나를 믿고! 그란…… 제발……"
"네놈을 믿으라고?"
그란은 어이없다는 투로 말하고는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이 놈의 미
친 소리를 더이상 듣고 있을 수는 없다. 저 송장 녀석이 부활하든 말
든, 저 여자가 살아난 송장의 손을 쥐든 말든 나는 네 녀석의 목을 따
야겠어. 그란은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할슈타일. 이건 살인이 아니다, 박멸이다!"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치며 그란은 검을 내리쳤다. 그러나 롱소드의
날이 후작의 목에 닿기 직전, 그의 어깨는 무서운 경련을 일으키며 팔
을 정지시켰다. 후작의 목에 칼날을 댄 채, 그란은 불가사의한 장면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후작의 눈에 죄책감이 떠올라 있었다.
절대로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잘못 보았다고 치부해버리기에는, 그래
서 그대로 검을 당겨 후작의 목을 쳐버리기에는 그 감정은 너무 역력
했다. 그란은 무의식 중에 말했다.
"뭐지?"
턱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할슈타일 후작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애
타게 말했다.
"미……안. 미안해……"
그란은 번갯불로 뒤통수를 강타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뭐라고?"
"미안하다…… 마가릿의 일…… 미안. 나를 용서…… 그란. 나의 잘
못이……다."
"그만……"
후작의 입술에서는 침방울이 튀고 불가해하게 뒤틀린 턱은 말보다는
신음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란은 그의 말을 똑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똑바로 알아듣는 자신의 귀를 저
주했다. 후작은 힘겹게 말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 내가 죽어보니…… 이젠……아, 알아……
안다…… 우스운가? 나는 우습……다. 내가 죽은 다, 다음에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 용서를……"
"그만햇! 네놈에게 사과를 받고 싶은 게 아냐!"
그러나 후작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할슈타일 후작이 온힘을 다해
말했을 때 그란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되는 충격을 느꼈다.
"마가릿…… 살아날까?"
그란의 손에서 힘이 주욱 빠져나갔다. 그란은 이제 후작의 목을 겨누
고 있다기보다는 그 어깨에 검을 얹어둔 것 같은 꼴로 서있었다. 그러
나 그와 후작 모두 롱소드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할슈타일 후작은 힘
들게 그란의 눈동자를 '들으며' 말했다.
"너의 아내…… 되살아날……까? 그렇게 생각……하나? 응? 주, 죽은
자들…… 죽은 자들이 되사, 사, 살아난다. 그란, 그란. 너의 아내,
마가릿. 네 딸의 이름…… 에포닌? 에포닌은 어머니를…… 만날 수 있
을까? 그, 그래. 네 아들. 죽은…… 네 아들은?"
"무슨 말을……"
"새, 생각해! 그……란. 죽은 자, 모, 모두 살아나, 살아난다! 네
아, 아……내, 네 아들! 살아날까? 응? 그렇, 그렇게 생각하나? 응?"
그란은 덜덜 떨면서 뭐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혀는 제멋대로 움직
이고 목구멍에서는 바람 새는 소리만이 새어나왔다. 죽은 자들이 되살
아난다. 죽은 자들이 되살아난다?
"나를, 나를 봐. 되살아…… 났어. 부……활했다고! 안, 안…… 안
돼. 그럴 수 없어!"
그란이 지독한 혼란으로 빠져들어가는 것과 반대로, 할슈타일 후작은
말을 계속하며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의 눈
은 보고, 그의 귀는 듣고, 그의 입은 말하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이제 훨씬 능숙하게 말했다.
"그럴 순 없어, 그, 그란! 그래……선 안돼. 마법사, 마법사! 저, 신
스라이…… 공격해. 공격하라고!"
하지만 레이저는 꾸물거렸다. 그것은 평소의 그의 모습과는 퍽이나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그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지만, 그러나 레이저는
공격하지 못했다. 아무 스펠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판단
도 내릴 수 없었다. 그저 눈 앞으로 보이는 공포스러운 광경에서 얼굴
을 돌리지 않는 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신스라이프는 부서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느리고
지독하게 반복적인 노래였다. 그 노래들은 대기보다 무거운 기체처럼
바닥에 깔리는 듯했다. 둔탁하고 둔중한 음정이 불규칙적으로 반복되
면서 오르락내리락했다. 파하스는 혼란스러운 머릿속 한 구석에서 그
노래를, 노래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음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그 노래에 맞춰서 신스라이프가 천천히 부서지고 있었다. 넓
은 옷 아래쪽으로 푸석거리는 가루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머리에서는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떨어져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구덩이 아래로
떨어지기도 전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의 피부가 모닥불에 던져진
종이처럼 바스러지는 것을 보며 네리아는 구역질을 느꼈다.
툭. 끔직스러운 소리가 짧게 퍼지며 로브 아래로 무엇이 떨어졌다.
운차이는 그것이 신스라이프의 오른쪽 정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와스스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무수한 가루와 함께 왼쪽 다리
가 허벅지부터 떨어져내렸다. 그것들은 아득한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갔다.
풍화되고 있다…… 제레인트는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지나친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던 조각상이 마침내 부스러지듯 신스라이프의 몸
은 파편과 먼지, 그리고 부서진 조각들이 되어 부스러졌다. 다리가 없
어지자 점점 빨라지는 붕궤는 마침내 상체에까지 이르렀다. 배와 가슴
은 거의 동시에 부스러지며 조각조각이 되어 떨어졌다. 머리는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먼지가 되었다.
"마, 막아! 막으라고! 이 개 같은 마법사. 막아!"
할슈타일 후작은 울부짖고 있었지만 레이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비틀거리며 걸어가서는 그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란은 그 손의 뜨거움에 흠칫했다.
"그란, 그란! 막아! 멸망은…… 멸망만이……!"
스르륵. 바치고 있던 몸이 먼지가 되면서 신스라이프의 흰 옷은 아래
로 떨어졌다. 소매가 빠져나올 때까지도 그 팔은 부서지지 않고 있었
다. 먼지와 함께 떨어져내린 신스라이프의 옷은 흰 나비처럼 나풀거리
며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다.
이제 파는 신스라이프의 남아있는 두 팔을 쥔 채 서있었다. 돌연 파
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파는 신스라이프의 손가락을 놓았고 그러자 남
아있던 팔들은 먼저 떨어졌던 몸의 조각들과 나풀거리는 옷을 뒤따라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 신스라이프의 몸은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
다.
파는 그러고도 한참 동안 팔을 앞으로 뻗은 채 조용히 서있었다. 콜
리의 프리스트들이 부르는 노래는 그 때까지도 침울한 리듬으로 지겹
게 이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파는 손을 들어올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게 어떤 뜻인지를 알지 못했지만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노래를 멈추
었다.
파는 손을 내리고는 몸을 돌려 쥬블킨을 응시했다.
"너에게 감사한다. 쥬블킨."
신스라이프의 목소리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도 숨쉬지 않았다. 파는, 아니 신스
라이프는 그 정적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란은 헐떡거렸다. 이건 뭐지? 그 때 그란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할슈타일 후작의 손이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그란의 귓가로 할슈타일
후작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멸망은…… 완성의 당연한 귀결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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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별 이상한 시간에 다 올리는군요. 하하.
뒤에서부터 두드리는 괴벽으로, 그렇잖아도 재미없는 글 읽으시는 독
자분들의 스트레스를 가중시켜드린 점 죄송합니다. (미의 부분은 전부
다 뒤에서부터 보세요. 한 줄씩만 뒤에서부터 읽으면 의미가 통하지가
않습니다.)
저번 편에 상당한 오타가 있었습니다. 아프나이델이 말했던 켄턴이라
는 단어는 전부 턴빌입니다. (왜 똑같이 '턴'자가 들어가는 말을 사용
해서 이런 곤욕을 치르나… 으으윽!)
그 외에 지적해주신 오타들은 전부 제가 잘못 쓴 것입니다. (그래도
원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오타만 난다는 것에 대해 안도의 감정을
느끼는 타자… 퍼버벅!)
전개에 관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보내주시는 메일들에 대해서는, 항상 감사와 송구스러움을 함께 느낍
니다. 답장 못드리는 점 사과드립니다.
챕터 7 도 끝났습니다. 즐거운 통신 되시길. 예? 챕터 8 올리면 죽인
다고요? 하, 하하…
좋은 밤 되세요.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04 00:17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
바이서스 임펠에서 가장 유명한 과일 가게,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가
게 안의 어느 방.
중앙에 놓인 작은 테이블 주위에 네 명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은 오후의 각도로 사내들의 어깨에 떨어지
고 있었다. 네 명의 사내들은 모두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와 서류 뭉
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류를 집어들어 바라보거나 다 읽은
서류를 옆사람에게 건네거나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았
다.
그러나 마침내 한 사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알은 힘빠진 목소리
로 말했다.
"이건 이해할 수가 없군. 이게 말하는 뜻은……"
카알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쟈크는 피식 웃었다.
"보쇼. 카알. 명령을 내리는 장군은 커녕 명령을 받는 병사도 되어본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이게 무슨 뜻인지는 짐작할 수 있어요. 그
러니 그렇게 머뭇거리지 말아요. 뭣하시다면, 내가 정리해 드릴까?"
카알은 우울한 표정으로 쟈크를 바라보았다. 쟈크는 손가락을 내밀어
지도를 짚었지만 그 눈은 자신의 손가락이 아니라 카알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쟈크는 입을 열었다.
"자이펀은, 총공격 태세입니다."
카알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오른쪽에 앉아있던
샌슨은 이를 북북 갈면서 지도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확실하군요. 병참의 이동을 보든, 군단 배치를 보든…… 최정예라
불릴만한 부대는 전부 한곳에 집결시켰군요. 전선의 공백을 무시하면
서까지. 하지만 왜 이러는 걸까요? 이건 누가 봐도 도박입니다."
카알은 샌슨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쟈크를 바라보았다.
"함 씨를 압박하는 거라도 있나, 쟈크 군?"
카알은 적국의 국방대신을 친구의 이름이라도 부르는 것처럼 불렀다.
쟈크는 눈을 크게 떴다.
"압박이라니오?"
"전쟁을 질질 끌고 있는 것 때문에 그의 자리가 위험하다거나……"
쟈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없어요. 우습지만, 함의 지위는 아무도 원하지 않아요. 다
른 명가들은 함이 그 자리를 맡아줘서 고마워한다면 모를까, 그 지위
를 압박하지는 않을 거요. 난 정말 이 나라를 이해하기 어렵수."
그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사내가 쟈크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넨 휴리첼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하기 어려울 것까진 없소. 쟈크 군."
"무슨 말씀이시죠, 백작님?"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이 백작이라는 호칭은 야유가 되었을 것이다.
휴리첼 가문은 백작의 지위를 몰수당했으며 엄밀하게는 바이서스 왕가
의 적이다. 즉 쫓기는 범법자의 입장이다. 하지만 쟈크가 부른 백작님
이라는 칭호에는 애정이 깃들어있었다. 그래서 로넨 휴리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이펀에서 군권은 그렇게 매력적인 권력이 아니오. 몇몇 예가 증명
하지만, 자이펀에서 반란은 불가능하오. 적어도 군권을 등에 업은 형
태의 반란은."
"흐음?"
"어떤 자이펀의 장군이라도 하탄을 향해 칼을 들 수는 있을 거요. 국
방대신에게든 장군에게든 자이펀의 무인들에게는 거의 완벽한 지휘권
이 주어지니까. 원한다면 반란을 시도할 수는 있소. 하지만 하탄에게
는 닐림의 날개가 있소. 하탄은 손수 반란을 제압할 필요도 없지. 명
가들이 나서게 될 거요. 그리고 명가들이 나서면 그 다음날로 반란군
은 궤멸이오. 명가들의 소환이 있으면 어제의 병사들은 모두 장군을
버리고 자신이 속한 가문으로 돌아가게 되니까. 게다가 그들은 그것을
배신이라 생각하지 않고 명예로운 선택으로 여기오."
"하아…… 그렇습니까?"
"그래요. 자이펀에서는 가문 자신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면,
반란은 시도도 될 수 없소. 자이펀의 무인들은 엄밀하게 말해서는 명
가들로부터 병사를 위탁받아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오."
"헤헷. 우습군요.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리
나라 장군들도 국왕으로부터 지휘권을 받아 국왕의 병사들을 지휘하는
거니까."
"국왕은 하나지만 명가는 다수요. 쟈크 군. 어떤 자이펀 장군이라도
수하의 부하들로 하여금 한 명의 하탄을 배신하게 할 수는 있을지 몰
라도 많은 명가들을 동시에 배신하게 만들 수는 없소."
쟈크는 탄복한 눈으로 로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왼편
에서는 샌슨이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알은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빙긋 웃다가 웃음을 지우며 지도와 서류가 가득 쌓인 테이블
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게로군. 역시 무인의 접근은 다르군요. 휴리첼 씨. 나는 그들
이 하탄에 대해 감히 반기를 들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
고 있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로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 자이펀의 국방대신은 최소한 한직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어도
자기 지위에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직위라는 말이 되겠군요?"
"그렇소이다. 위탁받은 병사들을 데리고 전쟁을 수행하느니만큼, 우
리나라에서 생각하는 장군보다는 훨씬 직업인의 성격이 강하다 볼 수
있소. 우리의 군사적 관점으로 보면 불합리한 체제이오만 자이펀에서
는 그런 체제로도 원활하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모양이오."
"불합리하다? 무엇 때문이지요?"
로넨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병사는 충성의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카알은 입을 다문 채 충성의 대상을 잃은 무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로넨의 말은 단조로운 어조로 계속되었다.
"엄격한 명령체계, 위계서열. 그런 것들은 전쟁을 능률적으로 수행하
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소. 실제로 그렇기도 하오만 그 본질은 좀 다
르오. 그것은 병사들에게 누군가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요. 병사들에게 있어 뚜렷한 충성의 대상은 어떤 강훈련보다도
더 병사들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요인이지요. 예를 들자면, 정예군과
도적떼들의 싸움의 승패는 항상 뻔하오. 그것은 어느쪽이 더 잘 훈련
되어있고 어느쪽이 더 잘 체계화되어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오. 가족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정예군과 약탈을 위해 싸우는 도적의 차이
지요. 그리고 그것이 간혹 도적이나 산적들로 하여금 정예병력을 깨트
릴 수 있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오. 그럴 경우, 그런 도적이나 산적에
게는 예외없이 출중한 우두머리가 있소. 충성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럴 듯하군요."
"내 생각으로는 자신과 고락을 같이하는 장군이 아닌 배후의 명가들
을 위해 싸우는 자이펀 병사들의 사기가 바이서스군에 비해 높을 것
같지는 않소이다. 하지만 자이펀은 지금까지의 현상이 입증하는 바 최
소한 밀리지 않는 전투를 해내고 있소. 그것은 자이펀 병사들 개개인
의 높은 자부심에 관련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오만. 그러니까 병사들
개개인의 질이 우리보다 훨씬 우수하기 때문이지요."
"흐음. 그런가요. 좋습니다. 그럼 자이펀의 국방대신은 직업인이며
무리의 우두머리라기보다는 군대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전쟁이라는 업
무를 치르는 전문가로 생각해도 될까요?"
"나는 반대하지 않겠소."
"그럼 이 친구는 공명심이나 야망을 원천적으로 봉쇄당했다고도 생각
해도 되는 겁니까?"
"그의 공명심을 만족시키는 것은 하탄께 받는 상찬이 전부일 것이오.
정복자의 위명이나 승리자의 영광은 자이펀의 무인에게 있어 그렇게
큰 원동력은 되지 않을 것이오."
카알은 잠시 호흡을 조절하고는 빠르게 말했다.
"그럼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을까요?"
"타인이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말하기 어렵
소."
카알은 두 손을 깍지 끼고는 엄지손가락들을 세워 이마를 받혔다. 그
리고는 천천히 엄지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찔렀다. 샌슨은 그런 카알
의 모습을 보다가 뒷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 한 마디 해도 될까요?"
카알은 손을 멈추고는 샌슨을 돌아보았다.
"프림 양? 퍼시발 군?"
"……전자입니다."
"해보세요, 프림 양."
샌슨은 맥이 탁 풀린 표정이 되더니 책을 읽듯이 프림 블레이드의 말
을 받아 읊었다.
"저, 카알. 난 검이에요. 전쟁터를 많이 돌아다녔지요. 이건 군인들
이 말하는 위력 시위가 아닐까요?"
쟈크는 샌슨이 '난 검이에요.' 라고 말하는 부분부터 키들거리기 시
작했다. 하지만 로넨 휴리첼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가 다시 샌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웃음기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레이디?"
샌슨은 이제 무릎에 얼굴을 박고 킬킬거리는 쟈크를 보며 붉으락푸르
락했다. 하지만 그의 책임감 넘치는 입은 충실하게 프림의 말을 반복
하고 있었다.
"느낌이에요, 여자의 육감이랄까?"
"푸흐허핫하하!"
쟈크는 기어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샌슨은 그런 쟈크
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뭔가 그럴 듯한 설명을 기대하고 있던 로
넨 역시 조금 한심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금 딱딱해진 어
조로 말했다.
"위력 시위로 볼 수는 있을 거요. 실제로 이 배치는 공백을 보여주
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배치니까.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는……"
그 때 카알이 말했다.
"잠깐, 나는 비전문가니 만큼 이해심을 가지고 조금만 설명해주시겠
소? 공백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무슨 말이지요?"
로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도를 가리켜보였다.
"보시오. 실제로 최정예가 집결한 지점은 푸른산맥을 가장 빠르게 넘
을 수 있는 칼피아 호 연안이오. 그리고 이런 병력 이동을 시도함으로
써 구멍이 생긴 곳은 로발 강 유역, 나브라, 다위너 세 군대라고 할
수 있겠군요. 다른 곳에서도 조금씩의 전력 유출이 있소만 그것은 일
단 넘어갑시다. 그런데 로발 강의 경우, 보시오. 칼피아 호에서 흘러
나오는 강이오. 강변을 따라 걷는다면 이곳의 군대이동은 쉬울 테고,
따라서 로발 강을 점령한 바이서스 군은 칼피아호에 집결된 최정예 부
대에 의해 보급선을 절단당할 우려가 클 것이오."
"흐음. 그렇군요."
"나브라의 경우는 더 고약하군요. 이곳은 점거해봐야 소용이 없소.
나브라는 대사막의 입구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곳을 점거해보았자 사막
에 익숙하지 않은 바이서스 군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거요. 다위너
의 경우는 항구도시요. 항구도시의 공략은 육해 양쪽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점령이 상당히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바이서스에는 해군이 없
소. 나브라와 다위너는, 자이펀으로서는 전술적으로는 빼앗기고 싶지
않지만 전략적인 가치까지 있는 전선은 아니오."
"그럼, 만일 이 세 전선을 점거당하더라도……"
"이 세 전선을 돌파하려면 바이서스로서는 전선을 분할해야 하오. 전
선이 얇아집니다. 그럼 칼피아 호에 집결된 부대는 그 얇은 전선을 쉽
게 돌파할 것이오. 적합하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흔히들
말하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말로 설명될 듯하오."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위력시위일 가능성이 높군요."
로넨은 물끄러미 카알을 바라보다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군무에 익숙지 않은 여기 쟈크 군까지 파악할 수 있는 만큼
이것은 뻔뻔스러운 총공세 의도를 나타내지요. 바이서스의 장수들은
당연히 파악할 수 있을 거요. 뻔히 보이는 속임수를 펼치는 이유는 위
력시위일 가능성이 높기는 하오. 하지만……"
"하지만?"
로넨은 조금 주춤하다가 말했다.
"이것이 위력시위라면, 공격은 반드시 있을 테지요. 그것도 상당한
전격전이 이루어지겠지요. 그리고 그 후 외교 채널을 통해 강화 제안
이 들어오지 않을까 하오. 강화 제의의 시점은 함 국방대신의 의도에
따르겠지만, 그가 바이서스에게 어느 정도의 출혈을 요구할지는 알 수
없소. 그 점에서 볼 때, 칼피아 호는 역시 위험한 한 수요."
카알은 묵묵히 로넨을 바라보았다. 로넨 휴리첼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푸른산맥이 돌파당하면 이파실, 켄턴까지도 위험해지겠지요. 이파실
과 켄턴이 공략당하면 사우스 그레이드는 목에 칼을 들이댄 형국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바이서스로서는 대문밖에 있던 적을 침대까지 끌어
들인 격이 될 것이오. 강화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바이서스
로서는 너무 큰 피해입니다. 권토중래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뿐더러,
자이펀에 연공을 바치는 문제까지도 고려해야 될지 모르오."
카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샌슨은 이를 갈아대며 상당히 듣기
불쾌한 음향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쟈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상한데요? 바이서스가 그렇게 불리한 입장이라면 자이펀은 강화를
제의할 필요가 없잖습니까? 그대로 밀어붙여 올라오면……"
"아니, 그렇지는 않소, 쟈크 군. 전격전의 문제점은 그것이 장기화되
기 어렵다는 점에 있소. 자이펀이 바이서스의 완전 병탄을 노린다면
그런 전격전은 곤란할 거요. 이 최정예부대는 바이서스 국내로 들어선
순간 보급선이 단절될 위험을 가지게 되오. 잊지 마시오. 그들은 적지
에서 싸우는 거요. 아무리 최정예라 해도 오랫동안 싸울 수는 없소."
"아아, 그럼 뭐냐, 한바탕 설친 다음 강화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말이오. 전선도 아닌 이런 배후에서 이런 지
도와 서류만 보고서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는 없소."
카알은 다시 엄지손가락으로 이마를 찌르기 시작했다. 그는 혼잣말처
럼 말했다.
"합리적이군. 전쟁은 끝낸다. 방법은 강화. 강화할 수 있도록 최대한
압박. 그리고 강화 체결 시점에서 자국의 이득은 최대한으로. 공격적
이면서도 합리적인 전략이군."
로넨은 싱긋 웃었다. 그런 로넨을 향해 카알은 약간 나른한 시선을
보내었다. 로넨이 그런 카알의 시선에 의아해하게 되었을 때, 카알은
갑작스럽게 말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휴리첼 씨?"
"뭐요?"
"무료하시지 않으신지 궁금합니다."
로넨은 카알의 화법을 조금씩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로넨은 허
튼 소리 하지 마시라고 말하는 대신 똑같이 잡담하듯 대꾸했다.
"무료하긴 하구료. 광대들을 상대하던 저번 일은 별로 재미가 없었
소. 무력한 광대들을 괴롭히는 것은 확실히 품격을 높이는데 도움되는
일은 아니었소만."
"함 씨를 상대해주시겠습니까?"
================================================================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죄송합니다.
???? : 기다린 사람 아무도 없는데?
타자 : 아아, 일종의 자기 기만이야. (으윽.)
남도에도 눈은 오더이다. 하하. 심심해서 이용자 검색을 해봤습니다.
이용자 아이디에 D/R 의 캐릭터들의 이름을 쳐넣고. 결과는?
감사합니다. 여러분.번 호 : 15206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04 00:17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2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2.
로넨은 카알에게 대수롭잖은 어투로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버릇이 있
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는 잠시
대답을 보류한 채 카알을 쏘아보았다. 카알은 이제 엄지손가락으로 턱
을 받친 채 로넨을 마주 보고 있었다.
"강화에는 찬성합니다만 우리도 역시 잇속을 차려야지요. 함 씨의 계
획은 수정 후 통과입니다. 사우스 그레이드의 땅은 한 조각도 못내
어줍니다. 당신이 함 씨의 스케쥴을 바쁘게 만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
다."
"어떻게 말이오."
"고대로부터 전해져왔지만 아직도 유효한 전술이죠. 불과 물을 같이
보내는 것."
로넨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대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얼떨떨한 눈으로 로넨의 시선을 마주보았고 그런 샌슨을 보던 로넨은
피식 웃었다.
"샌슨 군의 부관인 거요?"
샌슨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가 뭔가 놀라움을 표시할 말을 찾
기도 전에 카알이 먼저 말했다.
"연장자에게 기분좋을 제안은 아닙니다만…… 휴리첼 가도 이젠 부활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나로선 반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군요. 하지만 당신은 나를 어떻게
참전시킬 생각이시오?"
"전시특례법을 조금 확장해서 적용하면 되겠습니다. 백의종군하실 의
향이 있으시다면."
"자수 말이군요."
"준비는 다 되어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재판소에 들리시기만 하면 됩
니다. 티 타임 때는 자유의 몸으로 참석하실 수 있을 겁니다."
로넨은 그만 웃고 말았다.
"놀라운 사람이오, 당신은. 뜻밖의 선물도 이 정도라면 놀라기도 어
렵군요. 감사히 수락하겠소이다."
쟈크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어, 저. 무시되는 기분을 느끼기도 어렵군요. 하지만 분명히 무시라
고요. 여기에는 도통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두 분 설명 좀 곁들
여서 풀 코스로 말씀하시면 안될까요?"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쟈크에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대신 카알은
샌슨에게 말했다.
"퍼시발 군. 휴리첼 씨를 수행하게."
눈을 껌뻑거리던 샌슨은 어쩔 수 없이 불안하게 말했다.
"수행? 저, 어디로요?"
"어디긴. 법무부지. 가서 법무장관을 찾아서 내가 보냈다고 하게. 자
네는 악질 반역자 로넨 휴리첼을 감화시켜 그로 하여금 자수하게끔 설
득한 것일세."
로넨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 샌슨은 아직까지도 두 눈을 불쌍하게 껌
뻑거리며 말했다.
"아…… 내가 그랬군요."
이번엔 카알과 로넨, 그리고 쟈크까지 모두 웃어버렸다. 카알은 미소
띤 얼굴로 샌슨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나서 휴리첼 씨는 백의종군하시는 것으로 과오를 씻게 되실
걸세. 무문의 명가 휴리첼 가문의 전사이신 휴리첼 씨의 임지는 저 잔
악한 자이펀과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사우스 그레이드. 저 용맹무비
하며 동시에 비할 데 없는 지혜로움을 동시에 갖춘 전사이자 현자인
샌슨 퍼시발 공을 보필하며 저 악랄한 자이펀의 국방대신 함을 상대로
용전분투하실 걸세. 이해했나?"
샌슨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럴 때면 차라리 입을 다문
채 프림 블레이드의 설명이 듣고 싶었다. 하지만 프림 블레이드는 낄
낄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샌슨은 어쩔 수
없이 말해야 했다.
"한번만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로넨은 정말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알은 거짓
말을 하지 않았다. 법무부에 도착한 후 그가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경비대원들을 피해다니며 가명을
쓰고 그림자를 찾아다녀야 했던 시절을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회상하
며, 로넨은 모든 준비를 마친 후 기다리고 있는 법무장관을 향해 고개
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법무장관은 국법준수 동의서, 사면장, 충
성 서약서, 휴리첼 가문 소유의 부동산 관계 서류 전부와 인수증 등을
꺼내어놓고는 로넨으로 하여금 차례로 사인하게 했다. 읽어볼 틈도 없
이 서류들에 사인하면서 로넨은 체포도 되기 전에 사면당하는 기분을
느꼈고, 실제로 사태는 그러했다. 그를 수행했던 샌슨 역시 머리를 가
로저었다.
"체포도 없고, 재판도 없고, 곧장 사면에 복권이군요."
법무장관은 피식 웃고는 그들을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다.
"이거 가져가요. 국왕 전하의 명령서요."
로넨은 법무장관이 내민 서류를 받아들면서도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
했다.
"명령…… 서요?"
"오크 산수 공부하는 소리 모두 빼고 말한다면, 로넨 휴리첼의 과오
는 강물에 실어보내고, 그를 활에 매긴 화살처럼 전선을 향해 쏘아붙
인다는 내용이오. 아, 당신은 모레 오전에 장엄의 홀에서 국왕 전하께
충성을 맹세하게 될 겁니다. 아시겠지요? 충성 서약서는 이미 썼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지요. 그리고 이건 당신 것입니다. 샌슨 씨."
"이건 뭔데요?"
"131전선의 키다린 장군 암살 건은 알지요? 당신은 키다린 장군의 사
망으로 공석이 된 제 12 군단의 군단장 자리를 맡게 됩니다. 자의에
따라 참모진을 구성할 수 있는 사령관의 권한은 로넨 휴리첼 씨에게
가장 먼저 사용하게 되는 거죠. 국왕 전하와 국방장관의 인가는 다 되
어있소. 돌아가는 길에 국방부에 들러서 국방장관께 인사나 하시오.
임관식 일정은 차후에 결정될 거요."
"도대체가……"
말이 안나온다. 샌슨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로넨
역시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카알은 도대체 언제 이 정도의 영
향력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게 되었지? 로넨은 샌슨을 향해 얼빠진
표정을 보내다가 겨우 손을 들어올려 경례를 했다.
"잘 부탁합니다. 사령관 각하."
"아, 예…… 예?"
그래서 두 사람은 대략 한 시간 만에 12 군단 사령관과 그 수석 참모
가 되어 카알과 쟈크가 기다리고 있는 쟈크의 과일 가게로 돌아오게
되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던 카알은 들어서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는 그만 커피를 뿜어내고 말았다.
쟈크의 투덜거림 속에서 얼굴이 빨갛게 된 채 테이블을 닦고 커피잔
을 정리하는 카알을 바라보며, 로넨은 다시 어처구니 없는 감정을 느
꼈다. 저 자가 정말 법무부와 국방부, 그리고 국왕까지도 움직여서 나
에게 자유를 돌려주고 함을 상대하게끔 조처한 자인가?
"놀라운 산책이었소. 카알 씨. 산책길에 자유도 줍고 12 군단 수석
참모 자리도 줍고 받들어 모실 사령관까지 주웠소."
"산책? 아아. 그렇군요. 그 정도의 시간밖에 안걸렸군요."
로넨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샌슨 역시 얼빠진 얼굴로 카알을 보
며 자리에 앉았다. 빙긋 웃고 있는 카알을 향해 로넨은 무표정하게 말
했다.
"보아 하니 샌슨 군 역시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이
더군요. 당신이 그 짧은 시간 동안 임펠리아와 귀족원에 구축해놓은
것이 어느 정도의 규모일지는 상상도 되지 않소. 다만, 나도 그 재주
를 좀 배웠으면 좋겠군요."
"아아. 행운이 조금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나 드래곤 슬레이어의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죠. 게다가 아무나 바이서스 임펠의 밤의 제왕
과 친구인 것도 아닙니다."
카알은 쟈크를 돌아보며 익살스럽게 말했고 쟈크는 뿌듯한 심정 속에
서 테이블 위에 커피를 쏟아놓은 카알을 용서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로
넨은 조용히 말했다.
"각설하고…… 이렇게까지 준비되었다면 당신은 진작에 나를 사용할
생각이었던 모양이군요. 함의 전격전을 알기 전부터 말입니다."
"그렇지요."
"이유는?"
카알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로넨은 목이 조금 메이는 것을 느꼈다.
"나를 복권시켜주기 위해서요?"
"바이서스로서도 좋은 일입니다. 까뮤나 넥슨의 일이 없었다면 당신
은 오래 전에 전선을 질타하고 있었을 겁니다. 능력있는 전사를 본인
과는 상관도 없는 죄 때문에 기용치 않는다면 손해죠."
로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로넨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런 그를 보며 카알은 다시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죠. 나라고 왜 함과 같은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겠습니
까."
"고맙군요. 솔직해줘서. 당신이 사용한 카드는 지골레이드인 거요."
"예. 나는 지골레이드로 압박하여 강화를 제의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리고 강화가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보다 많은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당
신과 샌슨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지요. 함 씨가 나와 같은 생각
을 떠올렸다는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양자는
강화에는 동의했지만, 덕분에 땅따먹기는 더욱 힘들어지게 되었군요."
로넨은 미소 띤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함의 추고, 함은 당신의 추겠군요."
"추라고 하셨습니까?"
"기나긴 전쟁의 끝에서, 희대의 전략가 두 명이 양국에서 동시에 등
장하는 것은 왠지 유피넬의 저울대의 역사함인 것처럼 느껴지는구려.
역시 유피넬의 저울대는 길고, 헬카네스의 추는 무거운 법이지 않겠
소."
"하하. 희대의 전략가라니오. 그것은 저 허즐릿이나 레베카 장군 같
은 이에게 어울리는 말이지, 나 같은 독서가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말
입니다."
로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몸을 앞으로 내밀며 본질적인 문
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당신이 독서가라는 점에 대해 조금 불안을 느끼고 있기는 하
오. 당신이 선택한 12 군단 말인데, 쓸만한 부대인 거요? 군인의 시각
과 독서가의 시각에 차이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지요."
"예…… 옳은 지적입니다. 사실은 나는 12 군단은 본 적도 없습니
다."
로넨의 어깨가 조금 쳐졌다.
"이보시오. 당신은 샌슨 군과 나로 하여금 그 부대를 가지고서 함이
모아들인 최정예 부대를 상대하게끔 했단 말이오. 검신과 칼자루도 구
분하지 못하는 병사들을 데리고 그런 어려운 일을 할 수는 없어요. 사
령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직 그 직위가 낯설기 때문이다. 샌슨은 자신을 부른 것이라고는 생
각도 하지 않은 채 로넨의 말을 듣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면서 말했다.
"어, 저, 예. 음. 그렇겠지요? 카알?"
카알은 대답했다.
"나는 전사가 아닙니다. 전사의 감식안 같은 것은 없지요. 그래서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생각해본 겁니다."
"독서가의 방식은 무엇이었소?"
"키다린 장군이 암살된 것은, 그 군단이 자이펀에게 위험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보았지요."
카알은 퍽이나 단순하다는 듯이 말했고 실제로 그 말은 단순했다. 하
지만 로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옳은 말씀이시오. 납득되는군요. 하지만 군단 하나를 가지고 자이펀
을 침공하는 일 같은 것은 불가능하오."
"아, 그 문제 말인데, 이제는 전략 변경입니다. 막기만 하십시오."
"막으라고요?"
"예. 원래는 국방장관께 간청하여 몇 개 군단을 더 움직여볼까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함 씨의 의도가 나의 의도와 같은 것이 밝혀진 이상
땅따먹기는 포기입니다. 함 씨의 의도를 저지시키기만 해도 성공입니
다. 지골레이드께서 강화를 이끌어내실 동안 자이펀 병사는 한 명도
바이서스의 땅을 밟지 못하게만 해주십시오. 바로 그 점 때문에 다른
전선에서는 절대로 부대를 빼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부탁이
되었습니다만, 가능하겠습니까?"
"……애써보겠소."
카알은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카알은 고개를 돌려
샌슨을 바라보았다.
"제 12 군단 사령관 각하. 이해하셨습니까?"
샌슨은 벙글거리며 말했다.
"헷. 그러고보니 우습군요. 사령관은 저인데, 제 참모한테 먼저 물어
보셨군요?"
"말했잖나, 퍼시발 군. 불과 물을 함께 보내는 거라고. 원래 계획대
로라면 난 자네에게 기대를 걸었을 거야. 자이펀 영토를 침범하고 강
화 시점까지 유지하는 작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뺏기지 않는 것이
중요한 입장이 되었네."
"아이구! 나는 모르겠습니다. 언감생심 오우거가…… 시끄러! 헬턴트
촌놈이 군단 사령관이라니오. 후치가 들었다면 배를 붙잡고 웃었을 겁
니다. 난 지금 12 군단의 병사들 앞에서 어떻게 하면 말을 더듬지 않
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더 고민입니다. 바보는 원래 고민이 없다 해
도…… 으아아, 정신 통일! 음음. 젠장, 카알. 지나치게 파격적인 인
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로넨 씨를 군단장으로 하시면 안됩니
까?"
로넨과 카알이 동시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샌슨 역시 자신
의 말이 틀렸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자유인이지만, 한 시
간 전만 해도 쫓기는 범법자였던 로넨이 바이서스 군의 군단장을 맡을
수는 없다. 하지만 샌슨의 불만은 끝나지 않았다.
"예, 예. 알겠어요. 하지만 카알, 난 정말이지 군단이라는 것이 어떻
게 편성되어 있는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날아가는 비둘기, 창공에……
우오옷! 놓고 말하겠습니다!"
샌슨은 칼자루를 놓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프림 블레이드를 풀어서
테이블 위에 던져놓았다. 프림 블레이드의 칼날이 떨리며 검집으로부
터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졌지만 샌슨은 강철 같은 얼굴로 그것을
무시해버렸다. 하지만 그처럼 굵은 신경을 가지지 못한 카알과 로넨은
찌푸린 얼굴로 소음을 애써 참았다. 샌슨은 그제서야 당당하게 말했
다.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모르는 부대를 어떻게 지휘하라는 말씀이십
니까, 카알?"
"아아,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으음. 휴리첼 씨께서 많은 조력을
주실 걸세. 그런데, 음…… 퍼시발 군? 프림 블레이드를 좀 쥐면 안되
겠나? 쟈크 군에게도 폐가 되지 않나. 이곳은 쟈크 군의 가게란 말일
세."
샌슨은 쟈크를 흘끔 바라보았고 그러자 쟈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
다.
"하! 걱정 마슈, 카알.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 방 안
에서 나는 소리는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지요. 아무
걱정 마시고 말씀 나누시죠."
쟈크는 그렇게 말하며 방을 나가버렸고 로넨과 카알의 이마에 생긴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아이고 맙소사!
================================================================
음. D/R 과 F/W 를 비교하시는 분은 많은데, 의외로 그 두 개의 글이
한 명의 타자에게서 나온 거라는 것은 간과하시는 분이 많군요.
D/R 처럼 두드리려고 했다면, 두드릴 수 있었을 겁니다. D/R 을 두드
린 건 타자니까요. 하하.
뉴로맨서를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느낍니다. 역시 컴퓨터는 끔찍하게
발달하고 있다는 것을. 뉴로맨서에서 주인공은 겨우 3 메가 램 때문에
연인에게 배신당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PC에도 램은 64 메가… 무섭습
니다. 아,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에도 비슷한 예가 나옵니다. 달
세계 전체를 통괄하는 슈퍼 컴퓨터 마이크가 가진 여유 기억분이 고작
100 메가였지요. 하지만 지금은 PC의 하드도 기가바이트 시대. 아무래
도 우리 사는 시대가 SF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이 점에서 SF의 본령은, 아무래도 미래 예측은 아닌 거 같습니다. 저
SF 작가들은 미래 예측에 완전히 실패했죠. 하지만 저 글들은 누가 봐
도 명작이지요. 미래를 그리는 것이 SF의 목적이 아니라면, SF의 목적
은 과연 뭘까요.
왠 뜬금 없는 소리? 아아. 환타지의 목적이 꼭 환상에만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하. (너무 당연한 질문이지요.)
좋은 밤 되세요.
번 호 : 15360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05 23:58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3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3.
히무수스 소장은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국방대신의 텐트라고 해서 대단할 것은 전혀 없었다. 이 곳에서 이루
어지는 보다 많은 결단과 보다 높은 수준의 판단에 비해볼 때는 황량
하게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바닥에 깔린 낡은 카펫은 국방대신의 품위
를 지키기보다는 오히려 깎아내리고 있었고 흔들리고 있는 등불은 (초
가 아니라 등이었다.) 이곳이 유목민의 텐트가 아닌지 착각하게 만들
었다. 무성의하게 던져놓은 듯한 쿠션들은 아무래도 안락함과는 거리
가 멀었다. 쿠션이라는 것이 원래 그냥 놓아두기만 해도 안락해보인다
는 점을 볼 때 이 삭막한 배치는 놀라울 지경이었다. 여기엔 냉수도
없군. 히무수스 소장은 갑작스럽게 불평거리를 떠올렸다. 국방대신의
텐트에 불려가면 시원한 냉수 한잔은 얻어마실 줄 알았는데.
소장은 수염 끄트머리를 살짝 꼬다가 말했다.
"태양입니까, 모래입니까?"
함은 피식 웃고 말았다.
"태양."
"모래가 아닙니까?"
"아냐. 태양이야. 따라서 이건 절대 비밀일세. 자네와 나만 알고 있
어야 해."
"그 말씀 몇번째 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다섯번째."
히무수스 소장은 웃어버렸다. 먼저 불려왔던 다른 네 명의 지휘관들
도 모두 피식 웃어버렸으리라.
태양과 모래. 사막에서 더 치명적인 것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태양
이 아니다. 희게 백열하는 태양열은 언뜻 공포를 야기시키지만 사막
위를 거니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모래밭에서 뿜어져 올라오는 복사열
이다. 자이펀 육군에서 사용하는 태양과 모래는 기만전술과 기습전술
의 은유이다. 무섭게 타오르지만 저녁만 되면 깜쪽같이 사라지는 태양
은 기만전술, 그리고 조용히 깔려있지만 그 위를 걷는 사람을 죽이고
야 마는 모래는 기습전술이다.
따라서 함이 말한 내용은 이렇다. 태양처럼 불타올라라. 하지만 적을
이길 필요는 없다.
"명심하게. 자네는 지휘관이야. 병사들은 이기기 위해 싸운다고 생각
하게끔 놔두게. 자네 자신조차도 그렇게 믿어야 하고.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내 말을 명심하고 있어야 하네."
히무수스 소장은 조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하셨듯이, 저는 지휘관입니다."
그렇게 세세하게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잘 압니다. '태양' 이라는 단
어 하나로 충분합니다. 히무수스가 말하지 않은 것들을 모두 들은 함
은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노파심일세. 이해하게. 이제 상세 계획을 말해주겠네."
히무수스는 긴장된 표정으로 국방대신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기밀인
이상 필기는 절대로 안된다. 모두 암기해야 될 것이다. 히무수스는 숨
소리마저 낮춘 채 국방대신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히무수스는 잠시 국방대신이 더 말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다렸다. 그
리고 국방대신은 히무수스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둘 사이에
는 묵직한 고요가 내려앉았고 그 공백 속에서 등불만이 낄낄거리듯이
흔들렸다. 히무수스는 어깨를 누르는 고요의 무게에 힘겨워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전부입니까?"
"그렇다네. 자네는 이미 이게 태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완전한 전
격전이 될 걸세. 보급은 없고, 지령도 없네. 식량은 모두 개인 휴대할
수 있을만큼 휴대한 다음 모자라면 현지조달하게. 현지조달이 안되면
즉각 달아나게. 속도를 늦추는 모든 행위는 생략하네. 속된 말로, 뻑
적지근하게 분탕질을 치고 돌아다니라는 말일세. 지령이 없는 만큼 각
개격파의 위험은 더욱 높아지네.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더욱 속력이 필
요한 거네. 알겠나?"
"외람되지만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마음을 열겠네."
"너무 위험한 전략입니다. 이곳에 모인 전력은 자이펀 최정예입니다.
이 소중한 전력들을 무질서하게 바이서스 국내에 풀어놓고는 내 몰라
라 해버리시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바로 그렇네. 그렇기 때문에 더우기 최정예가 필요했던 것이고."
"아무리 최정예라 하더라도, 그런 지리멸렬한 상태에서는 힘을 쓸 수
가 없습니다!"
함으로서는 다섯번째로 듣는 똑같은 내용의 항변이었다. 그랬기에 함
은 이제 약간의 즐거움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함은 히무수스 소장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공포. 우리들을 소모품으로 사용하실 생각이
오? 기대. 어떤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전략이 있는 거요? 자기기
만. 나라면 그런 어려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함은 똑같은 대답을 다섯번째 반복했다.
"걱정하지 말게. 2 개월도 못버틴다고는 말하지 않겠지?"
"2 개월이라고 하셨습니까?"
"이 전쟁은 50 일 내에 끝나네. 그러니 2 개월이지. 그리고, 그 전쟁
이 끝나는 시점에서 자네의 부대가 주둔하게 되는 바이서스의 영토는
자네 것일세."
히무수스 소장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물론 자이펀인에게는 토지소유
욕이 별로 없다. 사막은 토지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곳이며, 바다는 오
로지 그림 오세니아의 것이다. 하지만 바이서스의 땅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그래서 히무수스 소장은 함의 말에 내포된 엄청난 의
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 말씀 진담이십니까?"
"진중엔 농이 없는 법일세. 어떤가, 히무수스 소장. 자넨 2개월도 버
티지 못할 지휘관은 아니겠지. 하탄을 위해 힘써주게."
"잘 알겠습니다."
히무수스는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따라 일어선 함은
히무수스를 가볍게 포옹한 후 텐트 바깥까지 안내했다. 히무수스는 씩
씩한 걸음으로 자신의 진지를 향해 걸어갔다. 진지 군데군데서 흔들리
는 횃불빛이 소장의 뒷모습을 잠시 비춰주었다.
그대로 몸을 돌리려던 함은 발걸음을 멈췄다.
별빛을 받아 반짝이는 칼피아 호의 수면이 그의 시야를 가볍게 자극
해왔다. 지휘관들과의 독대는 모두 끝났고, 그래서 함은 가벼운 걸음
걸이로 호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텐트 앞에 서있던 호위병들이 함
을 뒤따르기 시작했지만 함은 가볍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혼자 걷고 싶네."
호위병들은 조금 당황했지만 함이 진영 안이라고도 볼 수 있는 호숫
가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밤의 호숫가는 의외로 소란스러웠다. 많은 부대들이 모여있었기에 취
사 정리를 하기 위해 나온 병사들만 해도 호숫가가 시끄러울 정도였
다.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나타난 국방대신의 모습을 보고는 당황해서
들고 있던 물동이를 집어던지거나 설겆이 거리를 팽개쳐둔 채 경례를
해왔고 국방대신은 조금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발걸음을 돌
렸다.
조금 더 걸어간 후에야 함은 비교적 조용한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수면 바로 가까이까지 늘어서 있는 숲 속으로 들어가자 진지의 횃불
도, 텐트들의 모습도, 그리고 소란스러움도 멀어졌다. 밤의 숲속이었
지만 두 개의 달이 모두 떠올라 있는지라 함은 어렵잖게 앉을만한 곳
을 찾을 수 있었다. 나무 등걸에 기대어 앉은 함은 호수의 수면 위로
떨어져내리는 별빛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은 별빛이 아니었다. 다섯 명
의 지휘관들을 모두 속여넘긴 후 찾아온 약간의 통쾌감과 씁쓸함, 자
괴감이 뒤섞인 묘한 감정이었다.
함은 자신의 내부를 향해 변명해보았다.
'그들에게 건전한 동기를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함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부하들에게 동기를 부여
하여 보다 높은 전투능력을 끌어내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함이
스스로까지 속여가면서 저질러버린 일은……
'군벌'
함은 자이펀의 군대에 군벌을 조장한 것이었다. 함의 명령에 따라 칼
피아 호에 몰려든 최정예 부대는 하탄을 위해 싸우는 군대가 아니라
지휘관의 영토와 재물을 위해 싸우는 부대로 변신했다. 이것이 어떤
효과가 되어 돌아올지에 대해서는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다섯 마리의 맹수를 바이서스라는 초원에 풀어버린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보다 빠르고 보다 강하게 날뛰도록 하기 위해서 굴레도 고삐도
채찍도 치워버렸다. 대초원을 차지한 다섯 맹수는 그곳을 영토로 삼아
자신을 살찌울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고국을 향해 이빨을 들이댈지
도 모른다.
'먼 훗날, 자이펀의 역사가는 나의 이름을 악명으로 기술할 것인가.'
왜 그런 것일까.
합리적인 이유를 댈 수는 있다. 가장 작은 시간에 최대한의 효과를
올리기 위해서 지휘도 생략하고 보급도 없애버렸다. 거기서 오는 불리
한 점을 스스로 타파해낼 수 있도록 최정예 부대만을 골라내었다. 최
정예 부대이기에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으며, 동시에 최정예 부대이
기 때문에 살아날 확률도 높은 것이다.
게다가 함은 군벌 조성의 위험을 최대한으로 줄이기 위해 50일이라는
한계 시점도 못박아 두었다. 50일 동안 점령할 수 있는 땅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다. 50일은 강화 제안과 회의, 그리고 그 체결에 걸리는
시간을 모조리 계산하여 도출해낸 가장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함이 군벌을 조성할 가능성을 만들어버린 것은 분명하다. 그
들 다섯 중 얼마나 살아남을지는 모르지만 살아남은 자는 하탄의 궁전
으로부터 턱없이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자이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비옥한 토지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몇번을 생각해봐도 이것은 군벌
조성이라는 결론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함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없는 밤의 숲속인 만큼, 그
표정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어.'
상대를 강화 회담의 자리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위험
은 멀고 효과는 가깝다. 옛말에도 있듯이, 오늘의 문제는 엘프보다는
차라리 오크에게 조언을 청하는 법이다.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시간
을 놓치는 것보다는 되는대로 처리하는 방식으로라도 문제에 달려드는
법이 낫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뱀파이어에게도 조력을 구하는 법이지."
"무슨 말이지?"
"혼잣말이었어. 앞으로 나오겠나."
함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나 어느 새 함의 뒤에 나타
난 시오네는 함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시오네는 천천히 걸어와
함의 등 바로 뒤에 섰다. 시오네의 손이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그녀의
메마른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시오네는 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시오네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깨가 부서지겠군. 나를 벨 거야? 그렇더라도 어깨가 그렇게 굳어
있어서야 어디 검이라도 제대로 뽑겠어?"
"내 어깨에서 그 손을 치워라."
"싫은데?"
"그 손을 베어내겠다."
"무섭군."
시오네는 순순히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시오네의 말에서도, 그 행
동에서도 무서워하는 기색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함은 시오네가 그의
앞으로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때까지도 그의 오
른손은 칼자루를 계속 쥐고 있었다.
시오네는 검은 망토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망
토 위와 덥수룩한 머릿결 사이에서 하얗게 도드라지는 얼굴 뿐이었지
만, 함은 그 얼굴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함은 시선을
보낼 곳이 없어졌다. 그래서 함은 시선을 낮추어 땅을 바라보며 말했
다.
"보고해."
"언제 정령사가 되었지? 노옴에게 무슨 명령을 내리는 거야?"
"네게 말한 거다. 보고해, 시오네."
"아무런 문제는 없어. 데밀레노스 공주에게는 호위가 거의 없더군.
원하는 어떤 시점에라도 데밀레노스를 아샤스에게로 돌려보낼 수 있
어."
"암살자는 구했나."
"암살자? 내가 암살자인걸."
함은 고개를 들어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샤스의 재가 프리스트인데. 네가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
나?"
"아아,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아샤스에게 바쳐진 처녀의 피는 어떤
맛일지 궁금해."
"문제가 없는 모양이군. 결행일은 일주일 뒤로 한다."
"일주일? 왜 그렇지?"
함은 고개를 조금 돌려 턱으로 진지 쪽을 가리켜보인 다음 말했다.
"그들은 그 시점에 푸른산맥을 넘어 달리고 있을 테니까."
"아아, 그래. 알았어."
함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시오네가 떠나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올려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시오
네는 무표정한 얼굴로 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옆으로
별들이 반짝여 시오네의 하얀 얼굴은 마치 밤의 하늘에 매달린 얼굴처
럼 보였다.
"뭐지?"
"호기심."
"어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이런 장대한 작전을 구사 중인 국방대신
이 떠올릴 만한 표정이 아니야."
"표정?"
"흥분도 없고, 즐거워하는 기색도 없군. 아무도 없는 이런 숲속이니
만큼 표정에 신경쓸 필요도 별로 없을 텐데 네 표정은 너무 굳어있
군."
"네 앞에서 누가 즐거워할 수 있겠나."
"그런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않는데.' 라고 말하면서 시오네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함
은 시오네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고 시오네는 이제 천천히 망
토를 옆으로 감아쥐며 한쪽 무릎을 꿇어 함과 눈높이를 맞췄다. 함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경고하겠는데, 내게 이상한 눈빛을……"
"시끄러워."
함은 입을 다물었다. 시오네는 팔짱을 끼고는 오른손을 들어 턱을 감
싼 자세로 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함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심지어
불쾌하기까지 한 상황이었다. 시오네의 얼굴이 그의 얼굴 바로 앞에
있었고 그녀의 낮은 호흡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무엇보다도 참기 어려
운 것은 시오네의 몸에서 풍겨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냄새였다. 함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렇게 바라보지?"
"숨기고 있는 것이 뭐지?"
"그런게 있다 하더라도 네게 말해줘야할 필요는 못느끼는데."
시오네는 함의 말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대신 시오네는 턱을 쓰다듬던 오른손을 천천히 돌렸다. 시오네의 턱을
떠난 오른손이 천천히 앞으로 뻗어가며 그녀와 함 사이의 공간을 느리
게 움직여갔다. 시오네의 손가락이 함의 얼굴에 닿기 직전, 함은 칼로
자르듯 말했다.
"멈춰."
시오네의 손가락은 함의 말을 따르듯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러나 시
오네의 손가락은 이제 위로 천천히 움직여갔다. 시오네의 검지손가락
은 함의 얼굴에서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간격을 둔 채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마치 그의 얼굴 윤곽을 만지듯. 함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
으며 시오네를 쏘아보고 있는 가운데, 이마까지 올라갔던 손가락은 이
제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시오네는 함의 얼굴을 양쪽으로 쪼개듯이
천천히 얼굴 가운데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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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호 : 15361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05 23:59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4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4.
턱을 지난 손가락은 이제 목까지 내려왔다. 함의 목울대 바로 앞에서
시오네의 손가락은 멈춰섰다. 함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는 그런
자신에 대해 화를 내었다. 하지만 함의 목 바로 앞에 위치한 시오네의
검지손가락은 그로 하여금 검으로 겨냥당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
었다.
"뭣하는 짓이지?"
시오네의 깡마른 손가락에서 길죽이 뻗어나온 손톱은 그대로 함의 목
울대를 꿰뚫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함은 시오네가 자신의 손가락이
아니라 그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함은 그 두 개의 퀭
하고 어두운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무슨 의미지."
시오네는 여전히 함의 목을 겨냥한 채 메마르게 말했다.
"너를 만지고 싶군, 장군."
"용납하지 않아."
"내가 조금 전에 너의 얼굴을 만진 것 같은가? 천만에. 나는 네가 죽
은 뒤 너의 얼굴이 썩고 그 아래 근육까지도 사라진 다음에 나타날 말
끔하게 육탈된 너의 해골을 짐작해본 거야. 단단하고, 텅비고, 무표정
한. 네가 멋대로 사용하여 세상을 왜곡했던 두 눈이 있던 자리에는 텅
빈 두 개의 구멍. 그리고 그 구멍 너머로는 네 추억을 담아 너를 구성
하던 뇌가 담겨있던 빈 공간이 보이겠지.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단어들을 말하고 맛있는 음식과 뒤섞여 즐겁게 움직이던 혀는 사라져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못하게 된 턱뼈만이 남겠지."
함은 말없이 시오네의 눈을 쏘아보았다. 내 눈에는 네가 해골로 보이
는데.
"그 때도 나는 지금과 같은 모습일 거야. 어쩌면 난 너의 해골을 쓰
다듬어볼 기회를 가질지도 모르지. 지금은 용납하지 않느니 뭐니 하던
그 고약한 혀도 없어지고나서, 나는 네 해골의 바깥뿐만 아니라, 살아
있을 동안에는 네 아내뿐만 아니라 너 자신조차도 만질 수 없던 네 해
골의 안쪽도 만질 수 있을 거야. 네 커다란 눈 구멍 안쪽으로 손가락
을 집어넣어 뇌가 붙어있던 자리를 더듬어볼 수 있겠지. 재미있다고
생각되지 않나? 네 해골의 안쪽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지 않아?"
함은 갑자기 스멀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시오네의 손가락이 자신의 눈을 뚫고 들어와 얼굴 안쪽, 그 자신의 해
골 안쪽을 천천히 더듬는…… 함은 욕지기를 참기 위해 숨을 깊이 들
이마셨다.
"말릴 순 없겠군. 죽고나서는 어쩔 수 없으니."
"죽고 싶니?"
"뭐라고?"
"정말 죽고 싶으냐고. 정말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으냐고. 정말 아
무도 너를 기억못하게 될 때까지, 그래서 네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될 때까지 시간이 내처 흐르도록 내버려두고 싶으냐고."
"그건 누구에게나……"
"네게 묻는 거야! 대답해!"
함은 시오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
는지라 달리 다른 곳을 볼 수도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함은 대답했
다.
"죽고 싶다."
뱀파이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기다렸다. 함은 목 앞을 감돌고
있는 시오네의 손가락을 잊어가며 말했다.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죽는 것이 아니다. 죽어야 하기에 죽는 것
이다. 나는 죽고 싶다."
"죽여줄까."
"싫다."
"문지방에 서있는 고양이 만큼의 지능도 없는 인간 같으니. 들어서지
도 않고, 나가지도 않고."
함은 고양이를 길러보았기 때문에 시오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
다. 하지만 시오네는 언제 고양이를 길러본 것일까? 문지방에 서서 방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고양이의 모습은 개는 보여주지 않는 독특한
모습이다.
"그런 건 아냐."
"그럼 뭐지."
"죽음은 약속되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가장 마지막에 받을 가장
큰 선물이지. 그리고 그 선물을 받고나면 더이상 다른 선물은 받지 못
한다. 그렇기에 보다 많은 선물을 받은 다음 죽음을 받으려는 거야."
함은 자신의 말이 어딘지 모르게 루트에리노 대왕의 유명한 말과 비
슷하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약속된 휴식.' 시오네는 가멸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죽음이 선물이라고? 장군이여. 전쟁터에 널브러진 시체들에게 그렇
게 말해보겠나?"
"나는 그들에 대해 슬퍼하고 눈물 흘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끝내 가지지 못한 삶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다. 죽음은 슬플 것이 하나도 없다."
시오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죽음이 슬프지 않다고?"
"상실된 삶에 슬퍼할 뿐이다."
"같은 거야."
"다른 거야."
시오네는 몸을 일으켰다. 함은 무성의하게 끝나버리는 대화에 아쉬움
을 느꼈지만 시오네가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환영의 의사를 가지고 있
었다. 그래서 시오네가 일어서기만 했을 뿐 발걸음을 돌릴 낌새를 보
여주지 않자 눈살을 찌푸리며 시오네를 올려다보았다.
"뭐지?"
"네가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는 뉴스가 하나 있어."
"말해봐."
"데스나이트에 대해서 아나?"
"알고 있다만."
"그들이 부활했다."
함은 하마터면 벌떡 일어날 뻔했다. 조금 들어올렸던 몸을 다시 어색
하게 아래로 내리며 함은 시오네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시오네는 함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똑
바로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 그대로야. 데스나이트들이 부활, 현재 켄턴 시를 공략 중이야."
"그들이 어떻게? 솔로쳐가 그들을 영원히 잠재운 것이 아닌가?"
"아, 그 이름이 나왔으니 말인데, 현재 켄턴은 솔로쳐의 지휘 아래
데스나이트들을 상대로 농성하고 있어."
이번에는 되물을 기분도 들지 않았다. 함은 시오네의 얼굴을 뚫어지
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 뱀파이어의 얼굴은 사람과 똑같은 얼굴이었
지만 그 표정은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함은 그 얼굴에서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농담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데. 은유로는 더 이상하고."
"내 말은 모두 사실이야. 하탄에게 먼저 보고해야겠지만 닐림의 날개
로 가는 길에 네게 먼저 말해주는 것이지."
"믿어야 되는 건가?"
"응."
함은 다시 입을 다물었고 시오네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함을 바라보
았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꽤나 당황한 함은 한참 후에야 평범한 말
한 마디를 겨우 할 수 있었다.
"다크사이드인 데스나이트들이라면 부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
만 솔로쳐가 어떻게? 누군가가 그를 부활시켰단 말이냐?"
"아니. 그냥 일어났어. 켄턴의 시민들은 데스나이트가 부활하자 그를
저지하기 위해 솔로쳐도 부활했다는 식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던데.
유피넬의 저울은 길고, 헬카네스의 추는 무겁다고들 하지."
"신의…… 역사란 말인가?"
"지금 뱀파이어에게 신학에 대해 묻고 있는 거라면 나는 너를 머저리
로 판정해주겠어."
"알았어."
"더 있어."
"또 뭐?"
"솔로쳐를 돕고 있는 세 명의 기사가 있어."
"세…… 명의 기사?"
"장미의 기사단의 영원한 전설. 모든 기사들로 하여금 최고의 명마
위에 앉아서도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게 만든 자. 흐음.
이런 이름들이 따라다니지."
함은 자신의 입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입은 그 스스로도 믿을 수 없
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공의 3 기사?"
케이트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고요한 예배당을 감도는 공기 속
에는 은은한 촛내음과 나무 내음, 그리고 뭐라 말할 수 없는 건조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떨어지는 햇살은 케이트
의 앞머리에 부딪혀 그녀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조용한 오후였고,
케이트는 충만한 신앙심 속에서 경건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독수리와 영광의 아샤스여."
다이앤은 하마터면 신음소리를 낼 뻔했다. 이곳은 레티의 수도원인
것이다. 그러나 케이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독수리 한 마리만 보내주세요. 저도 천공의 기사가 되고 싶어요."
다이앤은 황급히 케이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
배당에서 기도 중인 소녀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갈
피를 잡을 수 없었다. 케이트는 그 와중에도 계속 중얼거렸다.
"이왕이면 냄새가 덜 고약한 독수리였으면 좋겠어요. 저는 썩는 냄새
가 싫어요. 아, 기사들은 고행을 한다지요? 음…… 좋아요. 그 냄새를
참고 견디겠어요. 그 독수리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치겠어요. 파란 비누
로 그 독수리를 씻겨주겠어요."
오로지 다이앤만이 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인 제안인지 깨달을 수 있었
다. 케이트가 거론하는 파란 비누는 다이앤이 선물한 것이었다. 좋아
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그것으로 몸을 씻던 케이트는 그것이 닳는다는
것을 알고는 기절할 듯이 놀라버렸고, 그 이후로는 다이앤이 아무리
성화를 부려도 절대로 사용하지 않은 채 보관하고 있었다.
아샤스여. 다이앤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래도 저 애는
거래에 임하는 자세가 되어 있어요. 그렇잖아요?
케이트의 기도는 켄턴 시에 불고 있는 흥미롭고도 낭만적인 기류를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천공의 기사들은 켄턴의 유소년들의 폭
발적인 열광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으며 "얘야. 장래에 뭐가 되고 싶으
니." "천공의 기사요!" 이 도시의 전도유망한 청년들로 하여금 은밀한
경외감 속에 괴로워하게 하고 있으며 "이보게, 기사가 되고 싶은 겐
가?" "천공의 기사들 때문은 아닙니다. 저는 원래 거기에 관심이 있었
습니다!" 켄턴이 자랑할만한 숙녀들로 하여금 시력 저하의 오해를 받
게 만들고 있었다. "저것봐! 무스타파 경이 날 봤어!" "아닌 거 같은
데? 음. 왜 나를 보고 계실까." "너 눈이 어떻게 되었니?"
다이앤은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트 아가씨. 그래서는 안되요."
거룩한 자세로 기도 중이던 케이트는 살짝 고개를 돌려 다이앤에게
새침한 표정을 보내었다. 다이앤은 낮게 속삭였다.
"이곳은 레티의 수도원이에요. 이곳에서 아샤스께 드리는 기도를 해
서는 안되는 거에요."
"레티와 아샤스는 서로 사이가 나빠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세탁장에서 빵을 굽고 목욕탕에서 바
느질을 해서는 되겠어요? 안되겠죠? 레티의 수도원에는 레티를 만나
기 위해서 찾아오는 거에요. 알겠어요?"
케이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다이앤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잠
시 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보며 다이앤은 미소를 지었
다. 케이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엄숙하게 말했다.
"라고, 아샤스께 전해주세요. 레티님."
아아, 레티님! 다이앤은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저 애는 합리적이에
요, 그렇죠?
기도를 마친 케이트와 다이앤이 예배당을 나서자 신학에 커다란 관심
이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연병장이라고 불러줄만한 마당이 나타났
다. 일개 수도원에 필요한 마당으로서는 지나치게 넓으며 동시에 지나
치게 평탄화가 잘 되어있는 이 마당에서 레티의 수련사들은 그들의 기
도를 올리고 있었다.
"어깨에 힘 빼! 허리로 쳐라, 허리로!"
"네가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레티께서 휘두르는 것이다! 너를 잊
어!"
저 말에서 레티를 '네 애인' 으로 바꾼다면 여느 군대의 고참 하사관
이 외치는 말과 특별히 다를 바도 없을 것이다. "애인 손목을 쓰다듬
듯 부드럽게 검을 쥐어라!" 가벼운 차림을 한 채 줄을 맞춰 검을 휘두
르고 있는 수련사들의 모습은 이 도시에서 자라난 케이트나 다이앤이
보기엔 별로 독특한 장면도 아니었지만, 다이앤은 수련사들의 앞쪽에
서있는 몇몇 프리스트들 (다이앤은 하사관, 혹은 조교라고 생각했다.)
이 외치는 고함소리에서 이전에는 듣지 못했던 말들이 섞여 있는 것을
깨달았다.
"레티께 맹세코, 이 멍청한 놈아! 넌 수련사다, 천공의 기사가 아니
야! 적을 경배하지 말고 검을 경배해라!"
저게 무슨 뜻일까? 다이앤은 멍청히 선 채 프리스트를 바라보았고 그
러자 어린애가 그렇듯이 금방 집중력을 잃어버린 케이트는 수련사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프리스트에게 꾸지람을 들은 수련사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저, 그게 무슨 뜻입니까?"
프리스트는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수련사를 바라보았지만 다행히
도 군대였다면 일어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즉, 수련사의 무릎을 걷
어차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대신 프리스트는 노호한 기색이 완연한 얼
굴로 낮게 말했다.
"네 상대는 적이 아니라 검이다. 적을 상대로 삼으면 네가 보통 칼잡
이와 다를 바가 뭐냐? 칼잡이는 적을 가장 증오하며, 결국 칼잡이는
적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프리스트다. 네가 가장 두려워하고 동시
에 가장 큰 사랑을 바쳐야 되는 것은 네 칼이다. 알겠냐?"
"아…… 저, 그런데?"
"이 놈!"
군대야. 다이앤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인정했다. 걷어차인 무릎을 감
싸쥔 채 깡총깡총 뛰고 있는 수련사를 향해 프리스트는 격노한 목소리
로 외쳤다.
"그렇게 적을 쪼갤 듯이 검을 휘두르지 말란 말이다! 검이 힘들다.
엉! 검이 힘들어 한단 말이다!"
케이트는 다이앤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다이앤. 저게 무슨 말이에요? 칼이 힘들어 한다고요?"
다이앤은 고개를 돌려 케이트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
"마차에 올라가서 이야기하시죠, 케이트 아가씨. 기다리시지 않습니
까."
다이앤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던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 한
켠에 서있는 마차 위의 마부석에는 도대체 잘못 배치한 것으로밖에 보
이지 않는 마부가 근엄한 얼굴로 케이트와 다이앤을 바라보고 있었다.
케이트는 마차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딤라이트 겨어엉! 많이 기다리셨어요?"
케이트는 마차로 달려가며 외쳤다. 딤라이트는 가볍게 고개를 돌렸
다.
"아닙니다. 레이디 케이트. 오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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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5525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08 02:06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5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5.
케이트는 딤라이트의 말을 따랐지만 딤라이트와 다이앤 모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마차에 올랐다. 마부석에 뛰어올라 딤라이트의 옆에 앉
은 케이트는 헤헤 웃으며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딤라이트는
잠시 케이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레이디 케이트. 마차 안에 타십시오."
"싫어요. 나도 여기 타고 싶어요. 안쪽은 갑갑해요. 다이앤! 다이앤
도 여기 앉아요. 저기, 반대쪽에 앉으면 되겠네요."
상당한 잔소리를 늘어놓으려고 마음 먹고 있던 다이앤은 케이트의 이
제안에 재빨리 말을 삼켰다. 그리고는 '철없은 주인 때문에 몹시 속이
상하지만 아랫사람의 입장으로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으
니 양해해달라'는 상당히 긴 내용이 담긴 상당히 짧은 표정을 지어보
이고는 재빨리 마부석에 올랐다. 딤라이트는 순식간에 케이트와 다이
앤에게 포위되어 버렸다. 난처한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보던 딤라이트
는 빙긋 웃고 있는 다이앤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만약 이 자리에 앉
은 것이 딤라이트가 아닌 무스타파였다면 다이앤의 표정은 단숨에 해
석되었을 것이다.
2 : 1이에요. 물론 기사님께서는 200 : 1이라도 물러서지 않으시겠지
만, 어때요. 항복하시죠?
물론 딤라이트는 무스타파가 아니었지만 더 이상의 항변이나 권고는
그다지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점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딤라이
트는 애꿎은 말에게 화풀이를 했다.
"이랴!"
말들이 발을 떼고 마차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케이트는 환호를
지르고 싶었지만 수도원 안에서 떠들면 안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
다. 그래서 케이트는 마차가 수도원의 정문을 통과할 때까지 기다렸다
가 환호를 지르는 재치를 발휘했다.
"야아아!"
딤라이트는 미소띤 얼굴로 케이트를 돌아보았다. 케이트는 팔을 휘두
르며 환한 얼굴로 말했다.
"더 빨리 달려요, 더 빨리!"
"절대로 안됩니다. 레이디 케이트."
"히이잉! 조금만 더 빨리. 예? 조금만!"
딤라이트는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은 전차가 아닙니다. 지금도 충분히 빠릅니다. 말들을 괴롭힐
필요는 없습니다."
케이트는 딤라이트를 향해 입술을 비죽거려 보이고는 다시 옆을 바라
보았다. 간신히 말할 기회를 잡은 케이트는 다소곳하게 말했다.
"딤라이트 님. 수도원에 들리신 일은 어떻게 되셨는지요?"
"예. 원장님께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업무가 있으실 텐데도 불구하고 케이트 아가씨와 저를 동반
해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희들 때문에 기사님께서 이렇
게 마부처럼……"
"아니오. 괜찮습니다. 이것은 제 의무입니다."
"예?"
"기사의 의무 말입니다."
"아아, 예."
딤라이트는 기사다. 그렇기에 모종의 상담을 위해 레티의 수도원장을
찾아오는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에 두 명의 레이디가 동행하고 싶어한
다면 말 대신 마차를 몰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이앤은 딤라이트가 말에
타지 못해서 불쾌해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상과는 전혀 다르다.
"검이 힘들다는 것은 무슨 말이지요?"
케이트는 고개를 돌려 딤라이트에게 질문했다. 딤라이트는 앞을 본
채로 대답했다.
"검이 힘들어할 까닭이 있습니까. 쇠붙이인데요."
"아까 프리스트님이 그러던데……"
"그것은 마치 그럴 거라고 생각하라는 말씀일 겁니다."
"예?"
마차바퀴는 잘 정리된 흙길 위에서 뽀얀 먼지를 피워올리며 굴러갔
다. 길 앙편으로 흐드러진 풀잎 속에는 늦은 봄꽃들이 나그네의 코를
자극하는 향취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내키지 않는 듯, 그
러나 막힘없는 말투로 설명했다.
"검을 경배하라는 말도 들으셨을 겁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보시면 이
해에 도움이 되시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가느다른 갈대 줄기와 철봉,
양자 중에서 어느 것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겠습니까. 물론 갈대 줄
기가 가벼운 만큼 훨씬 쉽게 휘두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대로 휘
두를 수 있는 것은 철봉입니다. 갈대 줄기의 경우 어딘가에 부딪히기
라도 하면 당장 부러질 테니까요. 검이 힘들어할 거라고 생각하라는
말은, 검이 어딘가에 부딪히면 부러질 거라고 믿는 것처럼 소중하게
다루라는 말입니다."
"왜요? 칼이 잘 부서지나요?"
"서툰 대장장이가 아무렇게나 만든 검이 아닌 바에야 검이 부러지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하지만 검이 부러질 거라고 생각하게 되면 검을
쥔 손이 조심스러워지고 그 행동이 조심스러워질 겁니다. 쓸데없는 동
작이나 자신의 균형까지도 해치는 큰 동작이 없어지겠죠. 레티의 프리
스트께서는 대략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저희들과는 조금
다르군요. 기사들이 견습기사들을 가르칠 때는 검을 마음대로 뿌리라
고 말합니다.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파괴력은 아무런 잡념도 없
는 마음에서 오로지 간절한 염원만으로 무의식 중에 내는 힘입니다.
수레에 깔린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 수레를 번쩍 들어올리는 어머니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되겠지요. 잡념이 섞이면, 그러니까 내가 상대를 이
길 수 있을까, 이 자를 벨 수 있을까, 피하고 나를 때리면 어쩌나 등
의 생각을 하며 검을 휘두르는 기사는 그 검끝이 흔들리고 동작이 흩
어집니다. 검은 마음을 표현하며 흔들리는 검끝은 흔들리는 마음과
같은…… 레이디 케이트?"
딤라이트는 잠시 고삐를 내려놓고는 자신의 망토를 풀어 케이트를 덮
어주었다. 케이트는 조금 뒤척거리다가 다시 망토 아래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다이앤은 살짝 웃었다.
"기사님. 대단하세요! 그 재주를 배웠으면 좋겠어요. 케이트 아가씨
를 재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아세요?"
딤라이트는 별 대답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왠지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해버린 기분을 느낀 다이앤은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묵직한 고요가 내려앉았고 말발굽 소리와 바퀴 소리는 그런 두
사람을 비웃듯이 짜랑짜랑하게 울려퍼졌다.
"저, 무례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말씀을 나누셨나요?"
이 하녀는 왜 기사의 일에 신경을 쓰는 걸까. 딤라이트는 조금 불쾌
감을 느꼈지만 그의 몸에 익어버린 예절은 다이앤의 질문에 대답할 것
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도 당장.
"제 거취에 대한 조언을 얻고자 했습니다."
"거취요?"
"아시겠지만, 저는 죽은 자입니다."
다이앤은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딤라이트는
여상스럽게 말했다.
"이 시대에 잘못 던져진 자로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여쭤보았습니
다."
"그래서…… 원장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제 경우라는 것이 워낙 희귀한,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사상 처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비교하여 이해할 만
한 다른 경우가 없습니다. 하지만 원장님께서 해주신 말씀 중에 한 마
디는 기억에 남는군요."
"어떤 말씀인데요?"
"그건 모든 이의 고민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이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는 표정이 분명했지
만 딤라이트는 더 설명하지는 않았다. 대신 딤라이트는 레티의 수도원
의 약간 건조하기까지 한 원장실에서 그에게 조용히 이야기하던 수도
원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모든 자들의 고민이오.'
딤라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원장은 딤라이트가 말할 기회
를 주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지는 짐작하겠소. 당신과 당신 동료들
의 경우가 유별나다는 것은 알아요.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겪은 것과
비슷하기라도 한 경험도 없는 것이 사실이고. 하지만 고귀한 기사여.
이 모자란 자가 보기에 모든 이는 한번쯤은 당신과 같은 고민을 하오.
자신이 잘못된 시대에 던져졌다는 것.'
딤라이트는 처연한 눈으로 원장을 바라보았다. 원장은 눈을 내리감았
다.
'딤라이트 경. 내가 해답을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여기지 않겠지요.
핸드레이크라도 이런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이 시대
는 당신을 부른 적이 없고, 당신은 이 시대를 찾아오고자 한 적이 없
소.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것은 모든 시대의 모든 이에게 마찬가지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다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말인지는, 당신 같은
성숙한 남자에겐 충분히 이해될만한 말이라 여겨집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딤라이트는 피로감이 느껴지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원장은 고개
를 가로저었다.
'모든 자들이 선택하는 방식을 따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걸어가시
오.'
'저는 사라져야 할 자입니다. 이 땅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원장은 빙긋 웃었다.
'반갑구려. 사실은 나도 그렇소.'
딤라이트는 잠시 침묵한 다음 작별 인사를 떠올려야 했다.
딤라이트는 상념 속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더 많은 상념이 그를 찾
아올 뿐이었다. 수도원을 찾기는 했지만 별 기대는 없었다. 다만 차마
그의 동료들처럼 술과 전투에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기에 수도원을
찾았을 뿐이다. 그런데 아무 기대없이 찾아온 수도원의 원장이 건넨
짧은 말이 그를 계속된 상념에 잠겨들게 했다.
사실은 나도 그렇소.
고민에 빠져버린 딤라이트의 얼굴은 다이앤으로 하여금 아무런 말도
못붙이게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다이앤은 레티의 수도원에서 성벽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 동안 욕구불만과 후회에 휩싸여 있었다. 차라리 케
이트 아가씨를 데리고 마차 안으로 들어갈걸. 너무 불편해. 다이앤은
딤라이트의 건너편에서 곯아떨어진 케이트를 향해 눈을 흘기기까지 했
다. 못된 아가씨. 괜한 고집을 피워 사람을 난처하게……
"눈이 불편하십니까."
"아니오! 천만에요! 아가씨가 잘 주무시는지 걱정이 되어서요. 예.
그래서요."
"아아, 네."
딤라이트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마차를 모는 일에만 관심을 집중시켰
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마차가 켄턴 성벽 가까운 곳의 갈림길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그레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다이앤은 숨통이 탁 트일 지경이었고 졸고 있
던 케이트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이 덜
깬 그녀의 눈은 그녀가 왜 이곳이 침대가 아닌지 이상하게 여기고 있
다는 것을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하지만 딤라이트는 상공을 바라보고
있느라 두 레이디에게 사과할 겨를이 없었다. 딤라이트는 노기가 충천
한 얼굴로 외쳤다.
"그레이! 이봐, 그레이!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늘에서 약간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딤라이트의 질문에 대답해왔다.
"어, 딤라이트?"
"어, 딤라이트? 자네 지금 어, 딤라이트라고 말했나? 지금 뭣하는 거
냐고 물었잖아!"
"보고있는 대로의 일을 하고 있다네, 친구. 아, 소개하겠네. 이쪽
은…… 그런데 아가씨 이름이 뭐더라? 아아, 클로디아! 클로디아 양을
소개하겠네."
딤라이트는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페가서
스 헐스루인에 올라탄 처녀를 바라보았다. 클로디아라는 그 처녀는 약
간 낭패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그러나 웃으면서 딤라이트를 향해 고개
를 끄덕여보였다. 딤라이트는 분기탱천하여 말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 이게 아니고!" 어쨌든, 딤라이트는 기
사다. 그래서 딤라이트는 이것아, 왜 내 페가서스 위에 네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거냐? 라고 말할 수는 없다. "클로디아 양. 어떻게 해서
미거한 본인의 승용물에 귀하신 몸을 맡기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만?"
클로디아는 뭐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그 때 그레이가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꽉 잡아요, 클로디아."
그레이는 킨 크라이에 탄 채 헐스루인의 고삐를 이끌고 있었다. 그래
서 헐스루인은 그레이의 인도에 따라 부드럽게 땅에 내려섰다. 딤라이
트는 미숙한 기수를 떨어뜨리지 않고 착륙한 헐스루인에게 애정어린
시선을 보냄과 동시에 자신이 아닌 다른 자를 태우고 있는 헐스루인에
게 잡아먹을 듯한 시선을 보내었다. 그레이는 그런 딤라이트를 보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그렇게 복잡한 시선을 보내나?"
딤라이트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눈이 두 개니까. 길어도 좋고 짧아도 좋지만,"
"앞뒤는 맞아야 하고 태도는 착실해야 된다, 이 말이지? 알았어. 착
실하게 앞뒤가 맞는 변명을 하겠네."
하지만 그레이는 당장 변명할 수는 없었다. 딤라이트는 그레이의 말
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헐스루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공손한
태도로 클로디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클로디아는 잠시 당황한 눈으로
딤라이트가 내민 손을 바라보다가 퍼뜩 사태를 이해하고는 그 손을 붙
잡고 아래로 내려섰다.
"고맙습니다."
"불편하시지나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비행은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이니까요."
딤라이트는 클로디아를 향해서는 절대로 무례한 시선을 보내지는 않
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그레이를 바라보는 딤라이트의 눈은 무례한
정도가 아니라 살기를 담고 있었다. 그레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주절거
리기 시작했다.
"아아, 글쎄. 참 신기하더라고.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닌데, 놀랍도
록 서로 의사가 통하던걸? 클로디아 양은 재치있고 상냥한 아가씨였
어. 금상첨화로 미인이시고. 그래서 말이야. 음, 난 자네가 저기 어린
숙녀를 태우는 것을 보고는 클로디아 양을 헐스루인에 태워도 될 거
라고 생각했지. 보라구. 항상 말한 거지만, 킨 크라이의 등은 너무 좁
잖아. 그런 점에서 무스타파 녀석은 정말 좋을 거란 말이야. 아이라의
그 넓은 등이라면 레이디 일개 소대를 태워도 될 걸."
딤라이트는 꼿꼿이 선 채 그레이를 쏘아보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
은, 그레이의 말은 앞뒤가 맞지도 않았고 말하는 태도도 그다지 착실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딤라이트는 그레이에게 더 이상 다른 변명의
말을 기대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클로디아를 바라보았다.
"레이디 클로디아. 저런 위험한 승용물에 오르시도록 방치한 점, 동
료를 대신하여 사과드립니다. 마차에 오르십시오. 댁까지 모셔다드리
겠습니다."
"예? 아, 아니에요. 기사님. 제 집은 가까워요. 저, 그리고 허락도
없이 타서 죄송합니다."
"천만에요. 대충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레이 휠드런 경은 쾌활한
사내니까요."
딤라이트가 말한 '쾌활한 사내' 라는 말에 담겨있는 속뜻은 케이트를
제외한 그 자리에 있는 누구에게라도 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앞뒤없고 경우없고 무례하다는 뜻을 '쾌활하다'는 한 마디로 표현해버
리는 딤라이트를 보며 다이앤과 클로디아는 동시에 입가에 웃음을 머
금었다. 그리고 그레이는 입매를 조금 뒤틀었다.
그러나 어쨌든 천공의 기사들의 우두머리였으니만큼 그레이는 클로디
아가 사라지면 딤라이트가 어떻게 변할지는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레이는 딤라이트와 클로디아가 작별 인사를 나누는 동안 재
빨리 킨 크라이 위에 올라타면서 말했다.
"자, 딤라이트. 숙녀분들에 대한 용무가 끝나거든 어서 성벽으로 오
게."
"성벽? 왜지?"
"빛의 탑에서 샌슨 경이 보낸 사람이 도착했네. 우리의 늙은 친구는
그 자가 가져온 것을 보고는 지팡이 없이도 하늘을 날겠다는 듯이 펄
쩍 뛰더군. 자네도 보고 싶겠지?"
"곧 가겠네."
================================================================
음. 여러가지 일 때문에 바쁜 며칠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규칙적일 거
라고는 말씀드리기 어렵겠습니다만 되도록이면 규칙적으로 글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번 호 : 15526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08 02:07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6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6.
그러나 잠시 후 딤라이트가 켄턴 성벽 위에 몸을 나타내었을 때는 두
명의 레이디가 동반된 모습이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간다
고 주장하는 듯한 얼굴의 케이트와 케이트 아가씨가 가는 곳은 어디든
간다고 주장하는 듯한 얼굴의 다이앤이 딤라이트의 좌우에 붙은 모습
으로 함께 나타났던 것이다. 그레이는 그런 딤라이에게 몰상식한 시선
으로 바라보며 '전선에까지 여자를 끌고다니냐.'는 둥의 악의 없는 농
담을 퍼부어대었지만 딤라이트는 고지식하게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
고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항변했다.
"유일하고도 가장 순수한 기쁨을 내게 주는 기사도에 비춰보아도 나
의 행동 그 어느 곳에라도 부끄러움의 소지가 있다고는……"
"딤라이트. 시끄럽소.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는 난 미쳐버리고 말 것
같은데."
솔로쳐는 옆을 가리켜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솔로쳐의 옆에는 길게
땋은 머리 위로 묘한 모양의 서클렛을 끼고 조끼와 망토를 제멋대로
착용한 사나이가 서있었다. 그는 엄격한 얼굴을 한 채 솔로쳐의 옆에
서있었고 공손히 내밀어진 두 손에는 작은 상자 하나를 받쳐들고 있었
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재능의 소유자
였는데, 놀랍게도 세 가지 방식으로 윙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왼쪽 눈을 감거나, 오른쪽 눈을 감거나, 아니면 미간 조금
위에 달린 가운데 눈을 감거나.
딤라이트는 그 세 개의 눈을 바라보고는 놀라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자신의 떳떳함을 만천하에 공표하려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그
의 원군이 되어줘야 했을 케이트가 그를 배신했다. 케이트는 뽀르르
달려가서는 감탄한 표정으로 사나이를 올려보았던 것이다. 반면 다이
앤은 기겁한 표정으로 딤라이트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솔로쳐는 빙긋
웃으며 사내를 소개했다.
"빛의 탑에서 날아오신 시몬슬 군이오. 내 물건을 가지고 왔지."
시몬슬이라 불린 마법사는 싱긋 웃었다. 케이트는 입을 쩍 벌린 채
말했다.
"눈이…… 세 개네?"
시몬슬은 히죽 웃으면서 세 개의 눈동자를 한곳으로 모아보였다. 케
이트는 까르르 웃었지만 그 모습을 보며 침착할 수 있는 것은 솔로쳐
와 케이트 뿐이었다. 무스타파와 그레이조차도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
는 분위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몬슬과 거리를 두고 있었
다. 쥬리오 시장이나 히든보리 사집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딤
라이트는 척척 걸어가서는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일스의 딤라이트라고 합니다."
시몬슬은 딤라이트의 손을 마주 쥐었는데 그 동작에는 딤라이트도 조
금 놀랐다. 시몬슬이 상자를 내버려둔 채 딤라이트와 악수했음에도 불
구하고 상자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솔로쳐는 후학의 이런
잔재주를 웃음으로 무시해주었고 시몬슬은 유쾌하게 말했다.
"남보다 많은 눈이지만 이런 광경을 직접 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
니다. 천공의 기사님."
"그 눈은?"
"아아, 양초 값이 아까워서 불 켜지 않고도 책을 볼 수 있도록 인프
러비젼의 눈을 하나 이식했지요."
솔로쳐는 그 쯤에서 끼어들기로 마음먹었다.
"자, 시몬슬 군. 그 물건을 이리 주겠나?"
시몬슬은 경의가 어린 동작으로 까마득한 사조에게 상자를 건네었다.
물론 마법으로 건네는 무례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시몬슬은 두 손으
로 정중하게 상자를 내밀었다. 솔로쳐가 그 상자를 받아들자 시몬슬은
감개 무량한 표정으로 상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300년 만에 주인에게 돌아가게 되었군요. 솔직히 저희들은 이런 것
이 있다는 것까지 잊고 있었습니다. 루조차도 이것이 있다는 것은 기
억하고 있었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빛의 탑의 모
든 마법사와 견습생이 총동원되어 간신히 찾아내었지요."
"당연하지. 내가 있던 시절과 마찬가지라면 지금 쯤 빛의 탑은 더이
상 층수나 벽으로 구분할 수 없는 지경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있을걸."
"말씀하신대로입니다."
"열어보고 싶은 생각은 없던가?"
시몬슬은 계면쩍게 웃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은 마법사가 있다면 그 친구는 빛의 탑에서
쫓겨날 녀석이지요. 하지만 루가 조언해주었습니다. 무지개의 솔로쳐
가 맡긴 상자를 감히 열어보고 싶어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트롤보
다도 저조한 지성의 소유자일 거라고 하더군요."
"그 조언을 받아들인 것은 잘했네. 하지만 조금 있으면 후회할 걸
세."
시몬슬은 세 개의 눈을 모두 커다랗게 떴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말
하기 전에 케이트가 먼저 솔로쳐의 손에 들린 상자를 보며 말했다.
"이게 뭐에요, 대마법사님?"
솔로쳐는 늙은 얼굴을 온통 찡그리며 함뿍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하하, 키티 데시. 이것은 말이다. 내 스승님께서 내게 남겨주신
선물이지."
그레이는 눈을 껌뻑거렸다.
"핸드레이크님께서 남긴 물건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레이. 이 시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신네들은 핸드레
이크와 열두 드래곤의 노래는 들어보았겠지?"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쥬리오 시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솔로쳐 님. 그 노래는 아직까지도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이 물건은 그 때의 증거품이오. 전리품이라고도 할 수 있
고."
사람들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시몬슬과 히든보리가 얼굴에
떠올린 표정은 그 중에서도 압권이었다. 히든보리 사집관의 얼굴을 본
솔로쳐는 그가 상자 내의 물건이 뭔지 곧장 짐작해내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솔로쳐는 짓궂어 보이는 미소로 말했다.
"히든보리, 짐작하겠소?"
히든보리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떨고 있었다.
"맙소사. 그 물건이 제가 짐작하는 것이라면, 데스나이트들은 이제
가장 어울리는 짝을 만나버린 것 같군요! 아니, 정정하겠습니다. 데스
나이트들은 이제 그들 자신도 공포, 절망, 어둠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을 알게 될 겁니다."
시몬슬의 경악도 히든보리에 못지 않았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소, 소, 솔로쳐 님. 진짜 그겁니까? 예? 정말로 그것이……"
"그렇네."
"오, 맙소사. 열어볼걸!"
"후회할 거라고 했지? 자, 천공의 3 기사 여러분. 데스나이트들에게
이 친구들을 소개해 줍시다."
솔로쳐는 그렇게 말하며 상자를 열어보였다.
딤라이트는 멀리 평원 위로 꿈틀거리고 있는 검은 안개를 바라보았
다. 검은 안개에는 촛점을 맞출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너무 짙
고 너무 두터운 안개였다. 남달리 좋은 시력을 가지고 있는 천공의 기
사였지만 딤라이트는 그것을 바라보며 일그러진 환상을 보는 것 같은
기분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 후 딤라이트는 다른 것을 느꼈
다.
"왠지 더 커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무스타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다.
"그런 거 같군.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우리들을 발견한 것일까."
"당연히 발견했겠지. 그레이와 병사들이 저렇게 소란을 부리고 있는
걸."
무스타파가 가리킨 방향을 보던 딤라이트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
덕였다. 그레이는 켄턴에서부터 끌고 나온 병사들을 정렬시키기 위해
분주히 노력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 위에
서, 게다가 데스나이트들의 검은 안개가 지척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곳
에서 절도를 지켜 조용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계속 불안스럽게
몸을 움직였고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레이는 마침내 만족할 수준으로 병사들을 정렬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마의 땀을 닦아낸 그레이는 우쭐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자아, 친구들. 내가 손을 내리면 시작하는 겁니다. 준비됐죠?"
"됐습니다!"
병사들은 일단 씩씩하게 대답했고 그 대답을 들으며 그레이는 함박웃
음을 지었다. 팔짱을 낀 무스타파와 시선을 내리깐 채 곤혹스러워하는
딤라이트가 바라보는 가운데 그레이는 힘차게 손을 내렸다.
병사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약속된 파멸을 내재한 창조여! 하나된 허무로 회귀할 만물이여! 레
티의 검 아래 스러진 것들에 남겨질 이름은 없다! 파멸의 레티여!"
그레이는 신들린 듯이 지휘해대었고 이미 그 악랄한 박자 무시와 처
절한 음정 무시로 높은 위명을 획득하고 있던 켄턴 경비대원 합창단은
바락바락 노래를 불러대었다. 그러자 꿈틀거리고 있던 검은 안개 안에
서도 거친 노랫소리가 터져나왔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
트트의의 율율법법!"
"막상막하야."
솔로쳐는 그렇게 상당히 생략되었지만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해할 수 있는 말을 툭 던지듯히 말하고는 시몬슬에게 몸을 돌렸다. 시
몬슬이 들고 있던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솔로쳐는 낮게 말했다.
"빼돌린 거 다 내어놓게."
시몬슬은 그만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 되어 솔로쳐를 바라보았
다. 하지만 솔로쳐는 겨울 들판의 소나무보다 더 냉엄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몬슬은 안간힘을 다 써서 말했다.
"소, 소, 솔로쳐님. 다시는 회수하지 못합니다……"
"알고 있어."
"이런, 이런 귀한 재료는 두번 다시는 못구할 거, 겁니다. 제발, 후
학들을 위해서 하나나 두 개만 남겨주십시오. 이렇게 많잖습니까?"
시몬슬은 세 개의 눈 모두에 간절한 염원을 담은 채 솔로쳐를 바라보
았다. 하지만 솔로쳐는 피식 웃었다.
"내놔."
시몬슬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
다. 로터스 경비대장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시몬슬은
상자에서 슬쩍 빼내었던 것들을 꺼내어놓았다.
그것은 날카롭고 단단하게 생긴 세 개의 이빨이었다. 보통 성인의 손
가락보다도 더 큰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리하여
마치 나이프처럼 보이는 이빨이었다. 솔로쳐는 시몬슬의 손에서 그것
들을 주워들며 말했다.
"이런 걸 바지 주머니에 넣다니, 다리 안 아프던가?"
시몬슬은 마치 잔뜩 골이 난 어린애처럼 말했다.
"다리에 박혔더라도 하나도 안아팠을 겁니다."
"그 상자는 일단 들고 있게. 이 세 개로 먼저 시험해보지."
시몬슬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 변화무쌍한 표정을 보며 솔로쳐는 핏
웃어버렸다.
"그런 못된 손버릇을 구사하기 전에, 먼저 정중하게 요청했었어야지.
마법사 아니랄까봐 잔재주를 부릴 생각밖에 안하나."
시몬슬의 얼굴이 다시 바뀌었다. 이번에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회한이라는 제목을 붙이기에 적당한 표정이었다. 솔로쳐는 다시 웃으
며 몸을 돌렸다.
검은 안개는 이제 노랫소리를 향해 똑바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마치
산이 움직이는 듯한 그 모습을 보게 되자 경비대원들의 노랫소리도 조
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데스나이트들의 노랫소리는 더욱 거
칠게 울려퍼졌다. 딤라이트는 이제 검은 안개 속에서 번쩍이는 병장기
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울려퍼지는 거친 발자국 소
리도 들을 수 있었다.
"자, 싸움이 시작됐군. 로터스 경비대장! 경비대원들을 맡으시오!"
그레이는 그렇게 외치며 킨 크라이에 올라탔다. 딤라이트와 무스타파
역시 헐스루인과 아이라에 올라타고나자 솔로쳐는 앞으로 조금 걸어갔
다.
그리고 솔로쳐는 정원사의 기쁨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솔로쳐는 먼저 가만히 서서 땅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팍! 하
는 소리와 함께 땅에 조그만 구덩이가 생겨났다. 솔로쳐는 허리를 구
부려서는 손에 들고 있던 이빨들을 구덩이 속에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발로 흙을 밀어넣어 구덩이를 다시 메우고는 몇 번 밟았다. 누가 보더
라도 씨를 묻는 정원사 같은 모습이라고 할만한 광경이었다.
솔로쳐는 지팡이를 세워들고는 두 눈을 내리감고 나직하게 중얼거리
기 시작했다. 시몬슬은 귀도 세 개를 달아두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안
타까운 생각을 하며 솔로쳐의 목소리에 집중했지만 병사들의 발자국소
리와 다가오는 데스나이트들의 소란 때문에 솔로쳐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솔로쳐가 심어둔 '작물'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땅이 스멀거리며 움직였다. 그것은 솔로쳐 앞의 넓은 땅에서 동시에
여러 군데에서 일어났다. 솔로쳐 앞의 수백 평방 큐빗 전체의 땅이 마
치 파도치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경비대원들은 탄성을 질렀고 천공의
기사들은 침묵 속에서 땅을 주시했다. 솔로쳐는 짜랑짜랑하게 외쳤다.
"자, 일어나라, 드래곤 솔져!"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나는 것처럼, 드래곤 솔져들은 땅을 헤치며
솟아올랐다.
전사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검집도 없었다. 피도 묻지 않을 만큼 매끈
한 칼날을 가진 거대한 검을 오른손에 들고 있을 뿐이었다. 왼팔에는
거대한 타워 실드를 들고 있었고 갑옷은 입지도 않았다. 벌거벗은 상
체에는 쇠막대기 같은 근육들이 어지럽게 엉겨있었고 이목구비는 조금
씩 달랐지만 모두 한결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장 잘 단련된 전사
의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그런 전사들이 수백 평방 큐빗의 땅에서 솟
구쳐오른 것이었다.
드래곤 솔져들은 솔로쳐도 바라보지 않았고 다가오는 검은 안개도 바
라보지 않았다. 그들은 질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켄턴 경비대원들이
나,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놀라버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천공의 기사들과 그들의 승용물에게도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의 대상은 자신의 형제들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그대로,
그러나 드래곤 솔져들은 천천히 어깨를 긴장시키기 시작했다. 그 때
솔로쳐가 맹렬하게 외쳤다.
"자네들끼리 싸우는 것은 금지한다!"
드래곤 솔져들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
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일이오. 당신에게 그것을 금지시킬 권한
이 있소?"
듣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귀를 의심할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
였다. 미성이라고까지 부를 수는 없겠지만 흉맹하고 야만스러워보이는
모습에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이긴 했다. 그레이는 몸을 부
르르 떨고는 무스타파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무 안어울리는 목소리라고 생각되지 않아?"
"그렇군."
솔로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권한은 없어. 보다 많은 것을 아는 자가 건넬 수 있는 조언의 권한
이외엔. 지금 자네들끼리 마지막에 남을 자들을 위해서 싸운다면, 그
남은 자들은 데스나이트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드래곤 솔져들은 분명히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가오고 있는 검은 안개를 바라보았다. 그런 드래곤 솔
져들을 향해 솔로쳐는 빠르게 말했다.
"지금은 서로를 아껴라! 자네들이 서로를 죽이는 이유는 가장 강한
몇 명만을 남기기 위해서잖은가! 하지만 지금 자네들이 서로를 죽여댄
다면 아무도 남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데스나이트들은 몇 명 밖에 남지
않은 드래곤 솔져는 손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원하나!"
드래곤 솔져들은 의혹을 담은 눈으로 솔로쳐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때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
다.
"형제들이여. 의식은 싸움 후로 미룰 것을 제안한다. 저 분의 말이
옳을 것 같다."
말을 마친 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데스나이트들을 향해 달려가기 시
작했다. 그리고 다른 드래곤 솔져들 역시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없이
그대로 그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거대한 검과 타워실드에도 불구하고
드래곤 솔져들은 민첩하게 땅을 달리며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달려오는 드래곤 솔져들을 보게 되자 검은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삼엄
한 노랫소리들 사이에 분노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용용아아병병! 저저 마마법법사사에에게게 드드래래곤곤의의 이이빨
빨이이 있있었었나나!"
드래곤 솔져들은 씩 웃으며 검은 안개를 향해 무섭게 돌진했다. 그
모습을 보던 그레이는 씩씩하게 외쳤다.
"가자, 친구들! 일스 기사단원이 용아병들의 뒤에 숨어있을 필요는
없다. 데스나이트로 하여금 누가 더 무서운 적인지 판단하게 하자!"
킨 크라이는 포효하며 솟구쳐 올랐고 그 뒤를 따라 헐스루인이, 그리
고 거대한 몸 때문에 아이라가 마지막으로 솟아올랐다. 로터스 경비대
장 역시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켄턴, 루트에리노! 이 땅이 누구의 땅인가? 이 땅 위를 달려 적을
분쇄하는 것은 누구의 사명인가? 가라, 루트에리노의 아들들이여!"
"으아아! 켄턴, 루트에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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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신 분들은 사전 뒤져보셔도 좋을 듯. dragon's teeth라는 말은
원래 용아병의 전설에서 나온 단어지요.
좋은 밤 되세요.
번 호 : 15606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09 02:45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7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7.
"이이 검검을을 받받을을 수수 있있겠겠느느냐냐!"
데스나이트는 호기어린 동작으로 공간을 끊어내렸다. 갈라지는 공기
들이 절절한 비명을 올리는 가운데 똑바로 쏘아져내린 검은 드래곤 솔
져의 오른쪽 어깨를 치고 내려왔다. 드래곤 솔져는 무표정했다. 어깨
너머에서 튕겨져나온 그의 검이 데스나이트의 검을 허공에서 비끄러매
었다. 콰가각! 거대한 두 개의 검이 부딪히며 불꽃이 비산했다. 데스
나이트는 신음을 토하며 맞서기에 들어섰으나 드래곤 솔져에게는 검
을 마주대고 용쓰는 취미가 없었다. 드래곤 솔져의 왼쪽 어깨가 움직
이기 시작했고, 데스나이트는 경악했다.
"무무슨슨 짓짓이이……!"
드래곤 솔져의 타워 실드가 허공을 갈랐다. 날붙이는 아니지만 검과
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 막대한 중량이 실린 타워 실드의 날(?)이 수
평선을 긋자 온몸을 울리게 하는 충격음이 퍼졌다. 쾅깡깡! 병사들이
백병전에서 삽이나 손도끼 휘두르는 식이다. 무지스러운 공격에 명중
당한 데스나이트의 투구는 거의 박살날듯 우그러지며 하늘로 솟아올랐
다. 독한 연기와 포효 속에 무너지는 데스나이트를 보며 드래곤 솔져
는 희박한 유머 감각을 발휘했다.
"이 방패를 받을 수 있겠느냐."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또다른 드래곤 솔져가 인간 병사들이었다면 상
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해내고 있었다.
"흐이아아압!"
비명과 같은 기합소리. 드래곤 솔져가 내지른 검끝은 마상의 데스나
이트의 복부를 꿰뚫었다. 앞으로 무너지는 데스나이트의 멱살을 왼손
으로 거머쥔 드래곤 솔져는 데스나이트의 거대한 갑주를 머리 너머로
완전히 집어던졌다. 까랑깡깡까랑! 갑주들의 부품이 제멋대로 해체되
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나 드래곤 솔져는 자신의 업적에
대해 도취되는 대신 지금껏 데스나이트가 타고 있던 괴수의 고삐를 잡
아챘다. 하늘에서 그 모습을 보던 그레이는 목이 터져라 웃었다.
"저것이 용아병인가! 승용물의 외양에 신경 안쓴다는 점에서 천공의
명예 기사로라도 받아들여야겠군!"
드래곤 솔져는 그레이의 말 그대로였다. 드래곤 솔져는 그 위에 올라
타서 전투력만 끌어올릴 수 있다면 눈이 다섯 개든 꼬리 대신 뱀이 달
렸든 아무 신경도 안쓴다는 태도로 데스나이트의 괴수에 올라타려 했
다. 하지만 괴수는 앞다리 세 개로 하늘을 찌를 듯이 거칠게 반항했
다.
"갸다다다! 갸다다다!"
하마터면 세 개의 앞다리에 밟혀죽을 뻔했지만 드래곤 솔져는 타워
실드로 간신히 괴수의 공격을 받아내었다. 뒤로 넘어지지 않은 것은
묘기. 타워 실드가 사라진 곳에서 나타난 얼굴에는 투명한 분노가 어
려있었다. 드래곤 솔져는 괴수의 따귀를 올려붙이겠다고 결심했다. 타
워 실드로, 백핸드 풀스윙으로. 꽈광! 딤라이트는 헛바람을 삼켰다.
괴수의 입장에서라면 도개교에 깔리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1×2 큐빗
넓이의 철판으로 맞은 것이다. 거의 모로 쓰러질 뻔한 괴수가 제정신
을 차리기 위해 주춤거리는 동안, 드래곤 솔져는 날렵하게 몸을 날려
조금 전까지 데스나이트가 앉아있던 괴수의 등에 올라탔다. 월등히 가
벼운 기수의 몸무게에 괴수는 다시 심술을 부리려 했지만 드래곤 솔져
는 괴수의 뒷통수를 거머쥐며 나즈막하게 호통을 쳤다.
"일자 (一者) 이신 왕으로부터 너 빌어먹을 야수에게. '내게 복종하
라!'"
무스타파는 하마터면 아이라 위에서 뛰어내리며 성은이 망극하다고
외칠 뻔했다. 일스 대공 앞에 부복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박
력이었다. 일자왕인 드래곤의 위명을 빌린 드래곤 솔져의 호통에는 야
수와 기사 양자를 전율케 하는 힘이 있었다. 괴수는 침착해졌다. 아
니, 그것보다는 공포감에 빠져버린 듯했다. 갈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솟아나있던 지느러미와 가시들이 푸르르 떨렸다. 드래곤 솔져는 괴수
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고 괴수는 포효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일곱
개의 다리 모두가 허공에 뜬 것처럼 보이는 질주였다.
"갸다다다닷!"
괴수는 공포에 짓눌려 달리기 시작했고 드래곤 솔져는 타워 실드를
집어던진 다음 두 손으로 검을 휘저어대었다. 달린다기보다 난동을 부
린다에 가깝게 움직이는 일곱 개의 다리와 그 위에서 춤추는 검날은
그 전부가 가공할 흉기들이었다. 흩뿌려지는 드래곤 솔져의 검은 아군
과 적군을 구분치 않는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상공에서 바라보던 무스
타파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구분하지 않아. 서로를 죽이는 저들
의 의식은 유보된 것이지 취소된 것은 아닐 것이다. 매운 손속은 드래
곤 솔져의 완력과 괴수의 미친 듯한 질주와 결합되어 그가 지나가는
방향을 따라 전쟁터에 대로가 생겨날 지경이었다.
딤라이트는 무거운 한숨을 토하며 헐스루인을 아래로 몰아갔다. 옆으
로 늘어뜨려진 그의 활에는 이미 화살이 걸려 있고 또다른 화살 하나
가 입에 물려 있었다.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하늘에서의 저격은 무서
웠다. 빗방울처럼 쏘아진 화살은 어김없이 데스나이트들의 갑주 틈 사
이, 혹은 그 투구 속으로 파고들었다. 딤라이트는 또하나의 화살을 꺼
내며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든 이의 고민…… 그러나 나는 여기서 고민을 느끼지 않는다. 그
리고 그것은……"
"무스타파! 뒤를 따라라! 경비대원들이 포위되겠다!"
그레이는 뒤로 말들을 어지럽게 던져놓으며 아래로 날아들었다. 한
순간의 눈길로 전투 상황을 판단하는 기사의 눈에 경비대원들의 배후
로 접근해들어가는 데스나이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던 것이다. 훈련
된 전투마가 그러하듯 훈련된 킨 크라이는 야생의 그리폰은 취하지 않
는 자세로 마치 매처럼 떨어져내렸다. 빗겨든 그레이의 롱소드가 섬뜩
한 빛을 뿜었다.
"이이이이- 하!"
그레이는 데스나이트들의 상공을 면도질 하듯 스쳐지나갔다. 데스나
이트들은 공중을 향해 파이크를 세웠지만 그런 대공방어 자세를 유지
하기에는 전투 상황이 지나치게 난투적이었다. 로터스 경비대장은 공
포와 흥분 양자에 모두 몸을 맡긴 채 파이크를 세워든 데스나이트의
가슴을 향해 파고들었다. 데스나이트는 저주의 고함을 내지르며 세워
들었던 파이크를 그대로 몽둥이 후려치듯 아래로 휘둘렀다.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 앞앞에에 두두 발발로로 서서는는 것것으으로
로 이이미미 건건방방지지다다! 쓰쓰러러져져 개개처처럼럼 기기어어
라라!"
파이크의 창대가 로터스 경비대장의 어깨를 파고들듯이 명중했다. 와
드득. 한 순간 로터스 경비대장은 옆으로 휘청했다. 쇄골이 부러졌음
에도 불구하고 로터스 경비대장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눈 앞
이 하얗게 변했을 뿐이다. 눈이 뒤집힌 채로, 그러나 로터스 경비대
장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쓰러지려는 사람처럼 휘청거리
면서도 로터스 경비대장은 왼손으로 창대에 매달리며 검을 쥔 오른손
을 옆구리에 붙인 채 온몸으로 데스나이트에게 부딪혀들어갔다.
"죽음을…… 넘어서!"
쇠붙이가 긁히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데스나이트의 등 뒤로 로
터스의 검이 비죽하게 튀어나왔다. 데스나이트의 손에서 파이크가 떨
어져내렸다. 절그렁. 데스나이트는 두 손을 힘겹게 들어올려 로터스의
어깨를 짚었지만 로터스는 이미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데스나이트
에게 안겨있었다.
갑자기 데스나이트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뒤로 젖혀진 투구가 떨어
져내리며 곧이어 갑옷 전체가 폭발하듯 해체되었다. 로터스 경비대장
은 무너지는 갑옷더미와 함께 쓰러졌다. 땅에 얼굴을 박으면서도 로터
스 경비대장은 히죽 웃었다.
난전 중이라 지나치게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없던 솔로쳐는 몸 주위에
빛나는 화살들을 띄워둔 채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솔로쳐의 주위
를 맴돌고 있던 매직 미사일들은 솔로쳐의 손가락이 지시하는대로 날
아가며 데스나이트들을 명중시켰다. 솔로쳐는 그런 묘기를 부리면서도
아직 정신적 여유가 많다는 듯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경비대원들
을 독려하고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무스타파! 왼쪽으로. 기수를 부탁하오!"
"저 놈의 깃발을 켄턴에 바치겠소!"
무스타파는 입을 크게 벌리지도 않으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고
는 아이라를 아래로 몰아내려갔다. 거대한 와이번의 그림자가 전장에
드리워지자 전장의 하늘 위로 춤추던 검은 안개마저도 날개바람에 휘
말려 갈라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무스타파는 해를 등지며 아래로 떨어
져내렸다. 그의 목표가 된 데스나이트의 기수는 쏟아져내리는 햇살에
서 허둥지둥 고개를 돌리며 노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무스타파의 랜스
가 데스나이트에게 명중하기 직전, 뒤에서 뛰쳐들어온 드래곤 솔져가
당황하고 있는 데스나이트의 머리를 쪼개어놓았다. 무스타파는 당황하
여 아이라를 상승시키며 외쳤다.
"제길, 그건 내 거야!"
드래곤 솔져는 피식 웃고는 깃발을 주어들며 상공을 향해 일갈했다.
"당신은 천공의 '기사' 이고, 이 놈은 데스'나이트' 일지 몰라도, 나
는 드래곤 '솔져'요. 기사도를 말할 생각이라면 둘이서만 하시오."
"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녀석들! 좋아, 모두 쓰러트려라!"
"그렇잖아도 그럴 참이었소."
드래곤 솔져는 그렇게 말하며 주워든 깃발을 옆으로 휘둘렀다. 파르
르륵! 사악한 문양이 깃든 깃발은 진저리를 쳤고 깃대는 그대로 창이
되어 옆을 달리고 있던 데스나이트의 다리를 걸었다. 데스나이트는 속
절없이 쓰러졌고 드래곤 솔져는 쓰러진 데스나이트의 등으로 뛰어올라
검을 박아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넌덜머리를 내며 솟아오르던 무
스타파는 조금 먼 하늘에 떠있던 딤라이트를 향해 고함질렀다.
"끔찍한 놈들이군! 살해밖에 모르는 전투인형 같은 놈들이야."
딤라이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무스타파를 바라보는 딤라이트
의 얼굴은 조금 희게 변해있었다. 무스타파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
다.
"딤라이트! 이봐, 괜찮은가?"
"아아, 괘, 괜찮네."
"정신차려! 비록 난투 중이라지만 언제 화살이 날아올지 모른다! 데
스나이트잖아!"
"그래. 고맙네."
고맙다고? 무스타파는 더욱 어이가 없는 얼굴이 되어 딤라이트를 바
라보았지만 딤라이트는 이미 활을 단단히 쥐며 헐스루인을 몰아가고
있었다. 무스타파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아이라를 솟아오르게 만들었
다. 어쨌든 장애물이 없다는 점은 쏘는 쪽에서도 마찬가지인 만큼, 규
칙적인 비행은 위험하다.
딤라이트 역시 거의 본능적으로 헐스루인을 복잡한 궤도로 몰아가고
있었다. 전통에서 화살을 뽑아 시위를 거는 손길에는 불필요한 동작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까지 수많은 말들이 혼
란스럽게 뒤섞인 채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이의 고민이오.'
'내게 복종하라!'
'나는 여기서 고민을 느끼지 않는다.'
'죽음을…… 넘어서!'
'전투인형 같은 놈들이야!'
시위를 놓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줄이 딤라이트의 볼을 스쳤
다. 깜짝 놀란 딤라이트는 무의식 중에 볼을 쓸어만졌다. 진득한 느
낌. 피인가? 이런 멍청한 실수는 한번도 한 적이 없는데. 발사될 때
이미 흔들렸던 화살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딤라이트는 화
살의 궤적을 쫓는 대신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자신의 피가 벌
겋게 묻어있었다.
피도 흘리나. 죽은 몸이라는 것을 자꾸 잊게 만드는군.
"퇴퇴각각한한다다!"
분노 때문에 잔뜩 떨리는 고함소리가 전장을 가로지르자 가장 바깥쪽
에 있던 데스나이트들부터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드래곤 솔져들은 한
놈도 놓아보낼 수 없다는 듯이 기승스럽게 데스나이트들의 등을 유린
했지만 데스나이트들은 거칠게 몸을 빼내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솔로
쳐는 학수고대하던 순간이 다가옴을 깨닫고는 크게 고함질렀다.
"모두 멈추시오!"
고함을 지르는 솔로쳐의 두 손은 이미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경비
대원들은 외경심에 의해, 그리고 드래곤 솔져들은 그들만의 전투 감각
에 의해 제자리에 멈춰섰다. 데스나이트가 전장에서 빠져나와 분리가
이루어진 순간 솔로쳐는 벽력처럼 캐스팅했다.
"크리에잇 워터!"
"갸아아닷!"
첫번째 괴수가 비명을 지르며 발을 헛디뎠다. 괴수 위에 올라타고 있
던 데스나이트는 땅에 호되게 부딪히는 대신 물방울을 거칠게 튕겨올
리며 물 속으로 빠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연쇄적으로 데스나이트
들과 그 괴수들이 갑자기 수면으로 변한 땅 위에서 허둥거리며 쓰러지
고 아래로 잠겨들었다. 곳곳에서 물보라가 솟아오르며 데스나이트들의
포효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솔로쳐는 데스나이트들을 수장시킬 생각은
없었다. 바라보고 있던 자들이 놀람의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솔로쳐는
이미 다음 스펠을 캐스트하고 있었다.
"미티어 스웜!"
그레이는 기겁하며 외쳤다.
"이런, 제기랄! 모두 뒤로 물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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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적 감사드립니다. 사람의 안와는 거의 폐쇄된 구조라서 손가락
을 집어넣는다고 해서 뇌를 만질 수는 없다고 합니다. (함은 해부학에
관심이 없는 만큼, 이것은 문학적 수단으로 남겨두고 수정하지는 않겠
습니다. 전문적인 지적 주신 **님께 감사드립니다.)번 호 : 15607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09 02:45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8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8.
경비대원들과 드래곤 솔져들, 그리고 천공의 기사들은 죽을 힘을 다
해 몸을 돌렸다. 검은 안개 사이로 붉은 기운이 일렁거렸다는 느낌이
잠시, 빗줄기 같은 광선들이 조금 전까지 땅이었던 수면을 향해 떨어
지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보다 높은 하늘로 솟아오르려 애쓰면서도 동
시에 땅을 향해 고함질렀다.
"엎드려! 물방울에 맞아죽는다!"
경비대원들은 질겁하며 몸을 날렸고 드래곤 솔져들은 타워 실드를 세
우며 충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무거운 갑주 때문에 속절없이 가라앉고
있던 데스나이트들은 무서운 고함소리를 내질렀다.
"솔솔로로쳐쳐어어어어!"
그리고 첫번째 불덩어리가 수면에 작렬했다.
퍼벙펑펑펑! 쏟아져내린 불덩어리가 수면에 작렬하는 순간 물기둥이
거세게 솟아올랐다. 물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라 검은 안개를 꿰뚫고 가
공할 폭발에 의해 경이적인 초속을 가지게 된 물방울들이 아우성을 내
지르며 전장 전체를 휩쓸기 시작했다. 수천개의 대거가 튀어나오는 듯
한 광경이었다.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어가고 있던 로터스는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귓가를 스친 물방울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폭발의 중심에 있던 데스나이트들은 직격에 맞아 가루가 되었다. 그
들의 갑주는 파편이 되어 물보라와 함께 높은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
리고 조금 떨어져있던 위치의 데스나이트들도 물을 타고 곧장 전달된
충격파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충격파는 데스나이트들의 갑주를 통과
하여 그 속에 있는 그들의 저주받은 몸을 산산조각내었다. 날아다니는
물방울들과 갑주의 파편들은 서로 부딪히고 땅을 휩쓸며 지독한 충격
음들을 만들어내었다. 수천 개의 해머가 동시에 모루를 때리는 듯한
소리였다. 그리고 갑주의 파편들은 물방울들과 함께 땅으로 떨어져내
리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꽈깡깡! 경비대원들은 물방울과 쇳조각들의
폭격 속에서 머리를 감싸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기절해버린 경비대원
들은 주위로부터 엄청난 부러움을 받게 되었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서 손에 상자를 든 채 사태를 바라보고
있던 시몬슬은 신음을 토했다.
"사조님, 사조님. 나는 이제 죽을 때까지 자신을 마법사라고 소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건 너무하다고요."
물기둥들은 사그라지고 이제 허옇게 솟아오른 수증기가 검은 안개를
밀어올리기 시작했다. 폭발의 충격에 의해 갈라지고 있던 검은 안개는
거세게 솟아오르는 흰 수증기에 휘말려 천천히 희미해졌다. 경비대원
들은 물방울과 쇳조각의 폭풍이 아닌 다른 것이 자신의 몸에 떨어지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들의 등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것은 따가운 오후의 햇살이었다.
경비대원들은 하나 둘 넋나간 사람처럼 일어났다. 피와 땀으로 범벅
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몸에는 하얗게 소름이 돋아있었고
많은 경비대원들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햇살은 그들의 몸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충격으로 갈라
진 땅과 흩어진 쇳조각, 그리고 물방울과 파편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
간 자리에 파헤쳐진 풀들과 흙덩이. 경비대원들은 왠지 이 세상의 모
습 같지 않은 그 광경을 보며 진저리를 쳤다.
그 때 날개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비대원들은 힘없는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안개가 사라졌기에
햇빛은 곧장 떨어졌고, 그래서 경비대원들은 눈을 찌푸리고 손바닥을
들어올려 햇살을 가렸다. 천공의 기사들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지팡이에 올라탄 솔로쳐가 햇살을 등진 채 검은 그림
자가 되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솔로쳐는 약간 피로해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땅에
내려선 솔로쳐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경비대원들의 눈빛을 느끼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함성은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켄턴! 솔로쳐!"
"어쩌실 생각입니까."
신차이는 치터리의 질문에 얼굴을 돌렸다. 다른 모든 뱃사람들과 육
전대원들마저도 멀리 수평선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치터리만은 굳은
얼굴로 신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차이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
다.
"돌아가서 보고해야겠지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이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신차이 선장."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예?"
"나 또한 다른 이들처럼, 저것을 보고 싶습니다."
처터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이 배에 있는 모든 이들 중
에서, 처터리만은 그것을 보고싶지 않았다. 돌보아주는 신도 없이 완
벽한 자신을 구가하는 위대한 생명체의 비행은 치터리를 불안하게 만
들었다. 치터리는 무의식 중에 닐림의 기도문을 중얼거리며 멀어져가
는 지골레이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후의 태양이 지골레이드의 푸른 날개를 붉게 물들이며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묘한 보라색과 황금빛을 뿜어내게 만들고 있었다. 지골레이
드는 전설처럼 날개를 펼치고 추억처럼 멀어져가고 있었다. 하늘과 바
다가 맞닿는 곳에 있을 알 수 없는 세계를 향해. 그리고 뱃전에서는
뱃사람들이 그렇게 조각해놓은 것처럼 우뚝우뚝 늘어서서는 한없는 경
배로써 드래곤의 비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 눈물로 두 볼을 적
시고 있는 뱃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잖았다. 가장 냉혹한 선원들마저도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떨구었다.
마지막 명멸이 있고나서, 블루 드래곤의 모습은 이제 수평선 어디에
서도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 중 누
구도 블루 드래곤이 수평선을 넘어 날아간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
다. 그 왕자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 있는 세계의 틈을 통해 빠
져나간 것이리라.
낮은 속삭임들이 잔뜩 억제되었던 호흡처럼 들려왔다.
"뭔가, 사람이 봐선 안될 것을 본 거 같다."
"적어도 정상적인 뱃놈이라면 보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을……"
"제기랄…… 이번에야말로 뱃놈 생활 끝이다. 마누라가 우라지게 보
고 싶은데."
"내 아들은 이제 여덟 살이야……"
치터리는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단순히 그들 앞에
서는 것만으로 그들 인간과 드래곤의 모습을 대비시켜 인간의 무릎을
꺾어버린 지골레이드에게 증오를 느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
력감이 선원들과 그를 덥친 것이다. 지골레이드에 대해 이를 갈면서도
치터리는 자신의 신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리고 다시는 세상에 나오
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신차이 선장이 말했다.
"이시도 군!"
펑펑 울고 있던 이시도는 어쩔 수 없이, 무례한 짓임에도 불구하고
코를 팽 푼 다음에야 그의 선장에게 얼굴을 돌릴 수 있었다. 신차이는
씁쓸하게 웃고는 말했다.
"정선한다. 저녁 식사 준비."
이시도는 눈물이 흥건한 눈으로 신차이를 바라보면서도 고개를 갸웃
했다.
"저, 저녁 식사요?"
오후이긴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다. 신차이는 몸을 돌리며 말했
다.
"지금, 내가 너희들에게 그 외에 무엇을 시킬 수 있겠나. 내일은 졸
란으로 돌아가니 저녁 식사 후 푹 쉬어두도록."
"아, 예. 갑판장! 돛을 접어라. 정선!"
"정선!"
갑판장의 복창에는 힘이 없었다. 하지만 선원들은 느리면서도 정확한
몸놀림으로 각자의 자리를 향해 달려갔다. 고요하던 갑판 위에 쿵쾅거
리는 발소리가 울려퍼지며 다시 활기가 돌아왔다. 선원들의 손놀림도
조금씩 빨라지며 레드 서펜트 호는 정선에 들어갔다. 닻줄이 풀리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치터리는 신차이 선장의 등을 향해 다급하
게 말했다.
"서, 선장님."
"프리스트 치터리. 선장실로 오시오. 육전대원들도."
"아, 예."
치터리와 육전대원들은 주승강구로 사라지는 신차이를 따라 배 아래
로 내려갔다. 신차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선장실을 향해 걸어갔
다.
선장실에 도착할 때까지 신차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치터리와
육전대원들 역시 아무 말 없이 그 뒤를 따라 선장실에 들어갔다.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신차이 선장은 입을 열어 대화를 시작하는
대신 파이프를 들어올렸다.
신차이 선장이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넣고 불을 붙일 동안 치터리는
초조하게 기다려야 했다. 첫모금을 빨아들인 신차이 선장은 선장실의
천장을 향해 조용히 담배연기를 날려보낸 다음에야 말을 시작했다.
"항해는 성공적으로 끝난 것 같소."
"예?"
"여러분들의 조력에 감사합니다. 아까 들으셨지만, 내일 본함은 졸란
으로 회항합니다."
치터리는 낭패한 표정으로 육전대원들을 돌아보았지만 육전대원들은
아무 표정도 없이 신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치터리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말했다.
"그래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쩌다니오? 내 임무는 끝났습니다."
"예?"
신차이는 선장실의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을 바라보았다.
신차이의 파이프에서 솟아오른 연기는 햇빛 속에서 하얗게 꿈틀거렸
다.
"본함의 목적은 닐림의 종단의 의뢰에 따라 동북항로의 괴사건을 조
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닐림의 대표이신 치터리 무스 씨는 이미 모든
것을 보셨고 지골레이드의 설명도 들으셔서 사태를 이해하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그 때 육전대원들 중 하나가 몸을 조금 움직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
기 전 신차이 선장은 재빨리 손을 들어올려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아니,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육전대 쪽의 목적은 내가 아는 바로는
이 조사 활동의 보호였습니다. 그렇잖습니까?"
"그렇긴 하오만, 선장님. 우리들은……"
"무의미합니다."
"예?"
신차이는 말을 잇기에 앞서 손을 들어올려 간단한 손짓을 해보였다.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지만 치터리와 육전대원들은 노예가 사라
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예들을 모두 내보낸 신차이 선장은 나직
하게 말했다.
"일스 침략이겠지요. 그렇잖습니까."
육전대원들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신차이는 파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동안 이 배의 항해 방식을 관찰하며 얼마나 많은 자료를 얻으셨는
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제는 일스 침략 같은 것은 무의미합니다. 바이
서스에서는 강화를 제안한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물론 결정은 높은 분들이 하겠지만, 나는 당신들에게 제안
합니다. 이 강화 제안은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보고하기 바랍니다."
"이유는?"
"치터리 무스 씨는 닐림의 종단을 대표하고, 당신들은 자이펀 군부를
대표하겠지요. 그렇다면 나는 선주 연합을 대표합니다. 선주 연합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자이펀 군부가 이 강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선주 연합은 계속해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수긍할 수 있
는 이유라도 있다면 모를까, 그런 무의미한 희생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지골레이드를 격퇴할 수 있습니까?"
육전대원들은 다시 불편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지골레이드는 그 이
름만으로도 자이펀 군인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존재였다. 하물
며 두 눈으로 직접 그 모습을 본 다음에야. 신차이는 매서운 눈으로
육전대원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캇셀프라임과 지골레이드가 전선에서 어떤 공포의 존재였는지는 여
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땅도 아닌 바다 위에서 드래곤을
붙잡을 수 있습니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강화 제
안이라는 것에 오히려 감사하고 싶습니다. 바이서스는 항로를 봉쇄하
여 우리들에게 패전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만……"
"아무 것도 강제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본 것과 들은 것
을 잊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여러분들의 상관에게 전달하기만을 바랍
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의무겠지요. 어쨌든 내 임무는 끝났고, 나는
돌아갈 것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육전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치터리는 당황한 표
정으로 육전대원들을 바라보았지만 육전대원들은 그대로 몸을 돌려 선
장실을 나갔다. 신차이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치
터리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임무는 끝나지 않았습니까?"
치터리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어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래서 치터리는 힘겹
게 입을 열었다.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장님."
"별말씀을."
"당신은 선주 연합에 이 사실을 보고할 테지요?"
"항해 일지는 분명하게 적을 테지요."
치터리는 고개를 떨구었다. 선주 연합에서 이 제안을 해온 것을 알게
된다면 자이펀은 더욱 강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치터리
는 돌이키기 어려운 길에 접어든 기분을 느꼈다.
"에, 여러 가지 점에 대해 감사를……"
"돌아가 쉬십시오. 치터리."
"아, 저."
"놀라운 오후였습니다. 나는 태풍을 몇 개 통과한 것보다 더 피곤합
니다."
치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서 치터리는 조용히 일어섰
다. 신차이는 그를 따라서 몸을 일으켰고 둘은 느릿한 동작으로 서로
를 잠깐 포옹했다.
몸을 돌려 선장실의 문을 나서기 직전, 치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
었다. 신차이는 말없이 그 등을 바라보았다. 치터리는 신차이에게 등
을 향한 채 말했다.
"이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쩐지 하지 않으
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더 많이 듭니다. 더군다나 지금이 아니면 말
할 기회도 없을 것 같군요."
신차이는 조용히 치터리의 말을 기다릴 뿐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치
터리는 입술을 적시고나서 힘들게 말했다.
"당신의 결투 말입니다."
"예."
"운차이는…… 운차이 발탄은 살아있습니다."
================================================================
밤이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굴러가고 있군요.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5821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12 00:06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9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9.
켄턴 시 전체가 미칠 것 같은 환희 속으로 곧장 돌입했다.
창고 가장 깊숙한 곳에 잠들어있던 술통들이 거침없는 손길에 의해
밖으로 꺼내어졌다. 푸줏간 주인들은 근엄한 표정으로 자신들이 일년
동안의 매상을 하루 동안에 올렸음을 선포한 다음 땅을 치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고기만 더 있었다면 10년치 매상도 올리는 건데! 허황된 소
리가 아니다. 켄턴 시민들이 먹고 마셔대는 모습은 그 정도로 대단했
다. 집집마다 바구니로 실어날라진 음식들과 그릇들이 광장에 수북하
게 쌓여 경비대원들은 음식과 술 속에서 헤엄칠 정도였다.
입이 달린 사람들은 모두 노래를 불렀고 시내 곳곳에서 끌려나왔던
악기들은 광란에 가까운 연주에 박살이 나버렸다. 하프 줄이 끊어질
때마다 경비대원들의 웃음소리는 높아만 갔고 비어버린 술통은 무자비
하게 박살나서 모닥불 속에 던져졌다. 치솟아오른 모닥불은 수십 큐빗
까지 솟구쳐 올라 먼 곳에서 이 도시를 바라본 자가 있다면 드래곤이
사는 도시라는 판단을 내리고 말았을 것이다.
때려붓듯이 술을 마시고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던 천공의 기사 그
레이 휠드런은 완전히 늘어져버렸다. 조금 더 마시기 위해서는 술을
좀 깰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 그레이는 손에 술병을 든 채 성벽 계단
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바람을 좀 쐬야겠어.
그레이는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갤러리 위에 올라섰다. 자칫하면 아
래로 추락하기 알맞은 걸음걸이였지만 취한 그레이에게 위기감각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갤러리 위에는 경계를 위한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져 있었고 그들은 그레이의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레이는
혀꼬부라진 소리로 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보낸 다음 갤러리 위를 걸
었다. 한적한 곳을 찾아야겠어.
문득 그의 눈에 경비대원의 복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보였다. 그레이
는 눈을 몇 번 문지른 다음 쾌활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히야아, 소로챠!"
흉벽에 두 손을 짚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솔로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를 북부 목동처럼 부르지 마시오. 많이 취하신 것 같군, 그레이.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온 거요?"
"우음? 여기가 어딘데요?"
"……관둡시다. 이쪽으로 좀 당겨서 앉던가 하시오. 떨어지겠소."
그레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며 순순히 솔로쳐의 말을 따랐다. 구
겨지듯 주저앉은 그레이는 흉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아아, 멋진, 멋진 밤입니다."
"저 친구들에게는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소."
솔로쳐의 말은 별 무리없이 그레이의 귓속으로 흘러들어갔지만 그레
이가 그 말을 대충이나마 이해한 것은 시간이 제법 지난 후였다. 그레
이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는 흉벽을 짚으며 말했다.
"아직도 싸우고 있습니까? 잘, 음냐, 잘 안보이는데요."
"저쪽…… 검광이 보이시오?"
"아, 번쩍번쩍 하는군요. 번쩍, 번쩍."
그레이는 번쩍번쩍이라는 말에 따라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흉벽
위에 상체를 얹었다. 어두운 데이든 평원 저편에서 검들이 부딪히며
튀어오르는 날카로운 불꽃이 아물거리며 떠올랐다.
드래곤 솔져들이었다. 함께 태어난 형제들을 죽이는 그들의 의식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취기와 밤의 어둠 때문에 그레이는 몇
명의 드래곤 솔져가 남았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언듯언듯 보이는
불꽃은 그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고 있었다. 그레이는 흉벽의 커다란 돌 위에 상
체를 길게 뻗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지독한 놈들입니다. 독해요."
솔로쳐는 별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트림을 길게 하고
는 말했다.
"거으윽. 흐음, 흠. 몇 놈이 남아야 끝, 끝나는 겁니까?"
"고문에 의하면 그것은 특별히 정해진 바가 없다고 하오. 드래곤의
이빨을 얻은 자 얼마나 되겠소? 예가 될 만한 것이 너무 적소."
"자기들 마음대로라는 말입니까? 흐음. 남은 놈들은 어떻게 됩니까?"
"소환자의 충복이 된다는 것이 보편적인 이론이오."
"으하하! 엄선된 전사들 중에서, 예, 다시 엄선된 전사만 거느리게 되
시겠군요, 솔로쳐."
"그러면 뭣하겠소."
"예?"
솔로쳐의 얼굴에 깊숙하게 새겨져있는 주름살들도 밤의 어둠 속에서
는 모두 지워지는 듯했다. 마법사는 밤이다. 보이지 않는 손길, 숨겨
진 지식, 주체 없는 행동. 밤의 시간 속에서 솔로쳐는 신비로웠다.
"내가 그들을 데리고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그레이."
그레이는 잠시 흉벽 위에 엎드린 자세로 말없이 데이든 평원을 바라
보았다. 그의 손이 무의식 중에 요철돌을 똑똑 두드렸다. 잠시 후 그
레이는 말했다.
"떠나셔야 된다고요?"
"그렇소. 그레이."
"서두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강박관념처럼 보인다고요."
"당신에게는 그런 느낌이 없는 거요?
"그런 느……낌?"
"한 시라도 빨리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픈 느낌. 이 세계에 아무런 영
향도 주지 않고 관련되지도 않고 싶은 느낌 말이오."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솔로쳐는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등 뒤로 돌
려 잡으며 어깨를 폈다.
"아까 오후, 나는 정말 가슴 섬뜩한 느낌을 받았소."
"압니다, 알아요. 데스나이트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아니,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그럼?"
"전투가 끝난 후, 켄턴 경비대원들이 고함을 질렀을 때였소. 켄턴,
솔로쳐. 당신도 들으셨지? 그들은 그 때까지 그렇게 고함지르지 않았
소."
그레이는 낮게 중얼거렸다.
"켄턴, 루트에리노……"
"그래요. 그들은 항상 그렇게 외쳤지. 300년이 지났어도 우리나라 사
람들은 여전히 대왕의 이름을 그 정신적 지주로 삼아온 모양이오. 하
지만 내가 쓸데없는, 아니, 쓸데없는 짓은 아니었군. 어쨌든 그들 앞
에서 싸워 데스나이트들을 물리치자 그들은 대왕의 이름 대신 내 이름
을 연호했소."
"껄껄껄…… 기쁘시지 않습니까?"
"기쁘지 않아요. 나는 이 시대에 속한 자가 아니오. 수치스럽소."
그레이는 고개를 조금 꺾어 비스듬한 얼굴로 솔로쳐를 바라보았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게 떠오르는 솔로쳐의 얼굴에는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책임질 수 없는 일을 해버렸소. 이 시대에서 곧 사라져야 될 자가
말이오. 이 시대에는 아무런 일도 해서는 안될 자가 영웅의 이름으로
불리워졌소."
"하! 처녀를 임신시켜놓고 달아나는 방랑자처럼?"
그레이는 익살스러운 어조로 말했고 솔로쳐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길지 않았다.
"조야함으로도 진실을 꿰뚫는 당신의 언변에 찬사를 보내오. 그래,
그런 것 같소. 보시오. 취해버린 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저기
왼쪽 성탑의 그늘에서 세 개의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몬
슬을 볼까? 딴에는 내가 별을 읽고 마법을 수련하는 것을 훔쳐보겠다
는 속셈인 거 같소. 멍청한 녀석. 인프러비젼이 가능하니 내 얼굴을
낮처럼 볼 수 있을 텐데도 내가 자신을 눈치챘다는 것은 모르는군. 그
리고 저 멍청한 후배놈은 켄턴 시의 시민들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는
거 같소.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내게 기대고 있소. 당신들 천공의 기
사 역시 마찬가지요. 검의 수련만을 지상과제로 삼아오는 레티의 프리
스트들이 당신들을 보며 자격지심을 느끼는 것은 딤라이트 당신도 짐
작하겠지?"
그레이는 솔로쳐가 자신의 이름을 잘못 불렀나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의 등 뒤에서 딤라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그런 거 같더군요. 사소한 일에도 저희들의 이름을 거론하더군
요."
그레이는 고개를 홱 돌렸다. 완전 무장을 갖춘 채 성벽을 올라오는
딤라이트의 모습을 보자 그레이는 그의 목적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
다. 틀림없이 저 근엄한 기사는 켄턴 시민들의 즐거운 술자리를 위해
솔선해서 경비 엄무를 맡기 위해 올라온 것이리라.
솔로쳐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딤라이트의 어린 연인은 어떨까."
딤라이트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솔로쳐는 그
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키티 데시는 민감하고 가냘픈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을 거요. 그녀의
머릿속에 각인된 당신의 모습이 어떤 것일지는 상상되지 않소. 하지만
이 싸움 전체가 성장기의 그녀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가는
마법사의 지팡이에 걸 필요도 없이 맹세할 수 있소. 그녀 뿐만이 아니
오. 켄턴의 많은 어린이들, 청년들. 모두 마찬가지요. 머리가 굳지 않
은 모든 켄턴 시민들에게 우리들은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을 거요.
그리고 우리의 이 불가사의한 체류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악영향
또한 증대하겠지요."
딤라이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레이는 못마땅한 표정
이었다. 그레이는 손을 들어올려 턱을 문지르다가 불평스럽게 말했다.
"한시 바삐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얌전히 떠나야 된다, 이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마치 허락받지 않고 쳐들어온 불청객처럼?"
"불청객처럼이 아니라 우리는 불청객이오."
"제기랄, 왜요! 그럼 세상에 불청객 아닌 녀석이 어디 있습니까?"
그레이는 패악스럽게 외쳤다. 딤라이트는 눈을 크게 뜨며 걸어오기
시작했지만 그레이는 이제 똑바로 일어서서 솔로쳐를 쏘아보며 말했
다.
"지긋지긋합니다. 당신의 그 말은! 여기선 아무 짓도 해선 안된다,
여기에는 아무 영향도 줘선 안된다! 왜죠? 왜 안된다는 겁니까? 이 세
상에 허락받고 태어나는 놈도 있답니까? 우리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뭐가 마찬가지란 말이오! 그들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죽었던 사람……"
"저는 존재한단 말입니다!"
"뭐요?"
그레이는 이마 앞으로 늘어진 자신의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며 말
했다.
"제기랄. 마법사님의 말 뜻이야 잘 압니다.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저 자신이 저에 대한 존재감을 절실히 느낀단 말입니다! 대개의 사람
들이 그러는 것처럼요. 다른 사람들이 끊임없이 너는 존재하는 자다.
라고 가르쳐줘야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는 얼뜨기도 있답니까? 제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이 있지요. 그 말은 자신이, 그리고 자신만이 자신의
존재의 증인이자 증거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
른 사람이 아닌, 오로지 자신만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단 말입니다."
높이 치솟았던 그레이의 어조는 말을 하면서 점점 낮아졌다. 술기운
은 그의 다리를 비틀거리게 만들었고 그레이는 눈을 심하게 껌뻑였다.
그런 그레이를 보며 솔로쳐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레이는 흉벽의 요
철돌에 등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부님의 말을 반복하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단수가 아니라고? 우리
는 혼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말에는 나도 찬성합니다만 나는 조
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예. 마법사님의 사부님은 나는 단수가 아니라
고 하셨지요. 그 말씀, 재미있지 않습니까? '단수가 아닌 나'라는 것
을 인식할 수 있는 '나' 자체는 전제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래서라…… 뭐, 부대끼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즐기고 싶어
진단 말이지요. 사랑도 좋아요. 증오도 좋고. 나는 이 시대와 동떨어
진 고고한 존재로 있어야 된다는 것이 신경질 난단 말입니다. 며칠 전
저녁, 코가 비뚤어지게 술마시던 도중 번쩍하고 제 뇌리를 스치고 지
나간 생각이 그거였습니다. 나는 신경질이 납니다! 이 시대를 좋아하
느냐 싫어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존재하는 세계에 참여하고
싶단 말입니다. 그건 당연한 욕구잖습니까! 핸드레이크님이 말씀하셨
듯이 나는 단수가 아니니까, 시대와 동떨어진 단수로 살 수는 없다고
요. 마음에 안드는 녀석은 괴롭혀주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는 밤새워
서라도 이야기 나누고 싶단 말입니다."
솔로쳐는 본격적으로 그레이를 쏘아보기 시작했지만 그레이는 여전히
그 시선을 하늘로 보내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먼곳에서 훔쳐보고 있던 시몬슬도 심상치않
은 사태라고 여긴 듯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솔로쳐는 딱딱한 음성으
로 말했다.
"무슨 궤변을 늘어놓든지간에 당신의 말에는 찬성할 수 없소, 그레
이. 당신이나 당신의 동료, 그리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저 데스나이트와의 전투 행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소!"
그레이는 고개를 돌려 솔로쳐를 마주보며 고함질렀다.
"어째서 말입니까! 나는 살아있는데!"
"웃지도 못하겠군. 당신이 살아있다고? 그레이 당신이? 웃기지 마시
오. 당신은 300년 전에 콜로넬 계곡에서 죽었소. 지금이라도 그 땅을
파보면 당신의 유골이 나올 거요!"
그레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딤라이트 역시 마찬
가지였다. 비록 아무런 말이나 약속도 없었지만 그들 사이에서 암암리
에 거론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던 역린을 무참하게 건드린 솔로쳐는 계
속해서 냉혹하게 말했다.
"원한다면 거기로 날아가서 파내어 가져다줄 수도 있소. 당신을 가르
치기 위한 교육 재료로는 그만이겠군. 눈으로 보여주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을 테니까. 망상도 이런 망상은 없소. 스스로를 아시오! 자신
을 안 다음에 '나'라고 말하고, 그리고나서 나는 단수가 아니라고 말
하시오. 도대체 당신이나 나나 '나'라는 말을 함부로 쓸 자격이나 있
소? 존재하지도 않는 자들이?"
그레이는 행동으로 솔로쳐의 말에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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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프러비젼이 뭔지는 설명되었을 것 같습니다.
사고로 사고쳐보려고 (以思考 行事故… 퍼버벅!) 아무 명제나 떠올려
보았습니다.
명제 : All logue is monologue.
사고 시작.
참 슬퍼지는 것은, 저 명제가 왠지 참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 글쟁
이의 악몽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하하하. (웃자, 웃어.)
반명제라도 하나 만들어봐야겠죠. All logues is dialogue. 글쟁이의
천국이 만들어지는군요.
문제는… 대화가 타인을 향한 독백인지 독백이 자신을 향한 대화인지
를 구분하기가 머리 쥐나는 일이라는 것. 아아, 타자는 너무 심심한가
봅니다. (잡담이 길다. 끊자.)번 호 : 15822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12 00:07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0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0.
번쩍! 딤라이트는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깜짝 놀란 솔로쳐가 바라보
았을 때는 그레이의 롱소드는 이미 시몬슬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술에 취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레이의 검은 허공에 단단하
게 고정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걸어왔다가 졸지에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된 시몬슬
은 기절할 정도로 놀라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우선
적으로 그를 구해야할 그의 입은 무의미한 말만 쏟아내고 있었다.
"기, 기, 기사님? 왜, 왜, 왜……"
솔로쳐와 딤라이트가 이 느닷없는 사태에 당황하여 어떤 행동도 취하
지 못하고 있던 사이에 그레이는 낮으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가 이 마법사를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그레이!"
솔로쳐의 노호성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의 검 끝은 전혀 움직이지도,
떨리지도 않았다.
"나도 데스나이트인데, 뭐 데스나이트다운 일 한번 하는 셈치고 이
검으로 이 마법사를 찌르면, 그럼 그건 무슨 사태입니까. 존재하지도
않는 자에 의해 죽은 것은 살해입니까, 사고입니까?"
"당신은 명예로운 일스 기사단원이오. 그런 당신이 무고한 자를 죽이
겠다고?"
"아, 그 명예로운 일스 기사단원 그레이 휠드런? 그 친구는 죽었어
요. 지금은 그 유골이 콜로넬 계곡에 뒹굴고 있을 겁니다. 왜, 겁나십
니까? 당신은 당신만 납득하는 논리를 통해서 내 존재를 박탈시켰는데
도대체 뭘 겁내십니까. 존재하지도 않는 내가 이 시대의 사내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솔로쳐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할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할말이 서로 뒤엉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레이는 그런 솔로쳐를 묵
묵히 바라보았다. 시몬슬은 조금이라도 칼끝을 피해보려고 꿈틀거렸
다. 하지만 그레이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의
검은 시몬슬의 목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시몬슬은 잘 넘어가지도 않
는 침을 삼키며 헐떡거렸다. 그 때였다.
"그 칼 치우세요!"
그레이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의 허리에 올까말까 한 케이트가 고개를 한껏 쳐든 채 그레이를 올
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는 쥬리오 시장이 당황한 표
정으로 서있었다. 칼자루를 움켜쥐고 여차하면 그레이를 공격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딤라이트는 당황하며 그 둘을 돌아보았다. 언제 올라온
거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과는 전혀 상반되게, 케이트
의 얼굴에는 뜨거운 분노가 어려있었다. 8 살 소녀의 얼굴에 떠오른
분노는 그레이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케이트는 짜랑짜랑하게 외쳤다.
"당신이 진짜 기사에요? 약자를 찌르기 위해 검술을 익혔어요? 레티
의 프리스트들은 파괴를 위해 검을 익히지만 기사들은 약자를 보호하
기 위해 검을 익히잖아요!"
"꼬마야, 시끄럽구나."
"뭐라고요?"
"네게 이런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웃긴다만 그래도 말해주지. 너보
다는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 될 거야. 어처구니없는 일이
지만 나는 부활해버렸어. 실실 웃으며 지내니까 아무도 모르지만 내
속에 있는 갈등과 고민은 너무 힘겹다. 부활을 확인한 그 순간부터 나
는 계속 자신에게 물어야 했어. 내가 누구지? 나는 그레이 휠드런인
가?"
그레이는 검끝을 내렸다. 시몬슬은 튕겨지듯 물러나며 숨을 몰아쉬었
다. 그의 눈은 끔찍한 살의를 담은 채 그레이를 쏘아보았지만 그레이
는 발 아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내 의지로 여기 나타나 있는 것이 아냐. 그렇다면 사람
들이 태어나는 것과 뭐가 달라? 의지와 아무런 상관없이 태어나버리는
사람하고 뭐가 다르냔 말이야. 그럼 내가 왜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없
지? 왜 도로 사라져야 하느냐고!"
솔로쳐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레이에게 사라지라고 말한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솔로쳐도 직접 말하지는 않
았다. 그리고 데스나이트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켄턴에서 천공의 기사
를 경원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 그 자신이 이미
그걸 요구했을 뿐이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알고 있었어. 나의 말은 짜증나는
재촉이었겠군.'
솔로쳐는 이를 악물었다. 그레이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존재할 수
없는 시간 속에 던져진 자신을. 그리고 그레이는 그것에 대해 이미 분
노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검을 꽂아넣으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익!
어둠 속에서 날개짓 소리가 다가왔다. 그레이는 그대로 흉벽의 요철
돌 위로 뛰어올랐다. 솔로쳐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레이는 아래로
떨어지려는 듯이 허공으로 뛰었다. 그리고는 밤을 가르며 날아온 킨
크라이의 안장에 매달렸다.
날렵한 동작으로 킨 크라이의 안장에 올라탄 그레이는 고삐를 확 나
꿔챘다.
"올라가자!"
파바박! 킨 크라이는 급격하게 날개를 퍼득이며 속아올랐고 그 날개
에서 떨어져나온 하얀 깃털들이 눈송이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솔로쳐
는 흩날리는 깃털 사이로 사라지는 그레이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케
이트는 밤하늘에서 하얗게 떨어지는 깃털의 비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
다가 손을 내밀어 그 중 하나를 받았다. 그녀는 그 거대한 깃털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딤라이트는 먼저 몸을 돌려 시몬슬에게 사과했다.
"동료를 대신하여 사과드립니다. 그건 무례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
는 폭행이었습니다만,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취중의
언동이었을 것입니다."
"아, 네. 딤라이트 님. 하지만……"
시몬슬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밝지 못했다. 시몬슬
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목숨을 위협받은 일을 쉽게 잊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몬슬은 자신이 상당히 기억에 남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딤라이
트에게는 부지불식간에 웃음을 짓게 만드는 말이었을 뿐이다. 이 300
살은 어린 친구야. 우리는 전장에서 매순간 죽음을 보네. 그걸 다 잊
지 못한다면 난 오래 전에 미쳤을 거야.
고개를 돌린 딤라이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케이트를 보게 되었
다. 작은 손에는 킨 크라이의 거대한 깃털을 꼭 쥐고 있었고 커다란
모자 속에 파묻힌 듯한 작은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레이디 케이트……"
"딤라이트 님, 왜? 그레이 님은 왜 저러시는 거에요?"
딤라이트는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몰랐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는 먼저
행동에 들어갔다. 딤라이트는 케이트 앞으로 걸어가서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케이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말들이 떠올랐
다.
"그레이는 힘든 일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힘든 일? 데스나이트랑 싸우시는 거요?"
딤라이트는 거의 무의식 중에 대답했다.
"아니오. 그것보다는 외롭기 때문입니다."
"외로워요?"
그레이는 킨 크라이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축 늘어져있었다. 놓아버
린 고삐는 아래로 늘어져 킨 크라이의 발 아래쪽에서 뒤로 흔들리고
있었고 킨 크라이의 날개는 옆으로 펼쳐진 채 조용히 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는 말 위에서 죽은 기수라도 되는 것처럼 축 늘
어져있었다.
푸- 푸-. 그레이가 숨을 내쉴 때마다 킨 크라이의 목덜미 깃털이 가
볍게 들썩였다. 킨 크라이는 자신이 태우고 있는 기수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지만 기수는 여전히 술냄새가 가득 묻어나는 숨만 내
쉴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킨 크라이도 방향을 바꾸거나 고도
를 바꾸지도 못한 채 그저 조용히 날아갔다.
그레이는 갑자기 상체를 일으켰다.
그레이는 똑바로 앉고 나서도 한참 동안 어리둥절해했다. 내가 여기
서 뭘하고 있는 거지? 아, 잠깐. 내가 왜 일어났지?
한참 생각한 후에야 그레이는 조금 전 뭔가가 그의 눈가에서 움직이
는 것을 보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 깊은 밤의 하늘 위에서 뭐가 그
의 눈을 자극했던 것일까? 그레이는 밧줄처럼 엉겨 얼굴을 덮은 머릿
카락을 옆으로 치우고는 무거운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주위를 살펴
보았다.
아래…… 그래. 아래였다.
그레이는 아랫쪽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땅은 캄캄했다. 이상하군.
이 황야 위에 무엇이…… 그 때 조금 전 그의 시야를 자극했던 것이
다시 나타났다.
번뜩임.
검의 번뜩임이었다. 그레이는 가물거리는 눈을 비비고는 부릅 뜬 눈
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섬광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레이는 잠시 멀건히 아래를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 후 그레이는 아래에서 끄덕거리고 있던 고삐를 끌어올려서는 느
릿하게 손에 감아쥐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 섬광을 보았다고 생각되는
지점을 향해 킨 크라이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방향이나 거리를 짐작할
만한 대상물이 전혀 없는 깜깜한 밤하늘과 들판이었지만 오랜 비행 경
험 때문에 3차원적인 공간 지각 능력이 매섭도록 단련되어있던 그레이
는 별 주저없이 방향을 정하고는 조금 위험해보일 정도의 강하에 들어
갔다.
땅에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취했지만 그
가 타고 있는 그리폰은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레이는 무턱대고 아
래로 내려갔고 땅에 닿기 직전 킨 크라이가 날개를 휘저으며 상체를
들어올렸을 때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안장
옆으로 내려섰다.
그레이는 손에 고삐를 쥔 채 잠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하늘로 치솟아올라 밤하늘을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불꽃이 보였
다. 켄턴인가. 꽤 멀군. 그레이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보다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갑자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오."
그레이는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윤곽 같은 것이 눈
에 들어왔다. 그레이는 칼자루 쪽으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그레이 휠드런. 슬픈 자."
아마도 맨정신의 그레이 앞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면
그레이는 포복절도를 하고 말았을 것이다. 취해버린 그레이도 자신의
인삿말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느꼈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반응
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한 가지 반응은 보였다.
"무명(無名). 남은 자."
"남은 자……? 드래곤 솔져인가."
"그렇소."
그레이의 눈에 보이는 드래곤 솔져는 캄캄한 그림자 뿐이었다. 거대
한 어깨가 아래로 조금 쳐져있었고 오른쪽 팔은 유달리 길어보였다.
검을 쥐고 있군. 그런데 왼손의 저건 뭐지? 그레이는 자꾸만 감겨지려
는 눈을 다시 한번 비비고는 힘겹게 눈을 뜨며 말했다.
"왼손의 그건 뭐요? 방패로는 보이지 않는데."
그림자는 잠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슬쩍
던졌다. 꽤나 무거운 것이었던 듯, 상당히 둔탁한 소리가 났다.
"신경쓸 필요 없는 물건이오."
그러나 그레이는 이미 알아차렸다. 저 정도 크기에 저 정도 무게라면
뻔하다. 그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고는 말했다.
"그게 마지막 형제의 머리였소?"
"……그런 것 같소. 더 남은 자는 없는 것 같군."
마지막 남은 드래곤 솔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이는
찌푸린 얼굴로 상대방을 바라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여전히 캄캄한 그
림자 뿐이었다. 드래곤 솔져는 입을 열었다.
"낮의 전투에서 보았소. 하늘을 나는 기사였지요?"
"잠깐, 내가 보입니까?"
"보입니다."
"밤눈이 참 좋군. 그래요…… 내가 그 기사요."
"부탁 하나 드리리다. 괜찮다면 제 소환자에게 안내해주시겠소?"
"저기 불꽃 보이지요? 그곳으로 곧장 걸어가면 되오. 켄턴 시요."
그림자의 머리가 작아졌다 커졌다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인가? 거
대한 그림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켄턴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레이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여기 황량한 밤의 들
판에 홀로 서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 그레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안내해주겠소. 같이 갑시다."
그레이는 킨 크라이의 고삐를 끌며 그림자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그
림자는 잠시 기다려주었고 그레이는 하늘을 날 때와는 전혀 다른 고민
거리 때문에 화를 내어가며 그에게로 걸어갔다. 하늘에서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봐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땅은 다르다.
비틀거리며 걸어간 그레이는 그림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앞으
로 걸어갔다. 드래곤 솔져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그레이
는 뒷짐 진 손에 킨 크라이의 고삐를 길게 잡고는 유유자적하게 걸으
려 애쓰며 말했다.
"무명이라. 당신은 어떻게 이름을 가지게 됩니까?"
"이름을 획득할 권리는 가졌으니 소환자가 내게 이름을 주겠죠."
"권리?"
"남은 자니까."
"아아."
이 녀석들은 서로 죽이고 죽여서 결국 최후에 남는 녀석들만 살아갈
권리와 이름을 가질 권리를 가지게 되나 보군. 삭막한 의식이야. 그레
이는 드래곤 솔져의 의식에 대해 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다고 생각
했다. 하지만 생각만 앞설 뿐 무슨 말을 해야 될지는 떠오르지 않았
다. 그 때 그레이에게 갑작스럽게 질문거리가 떠올랐다.
"당신은 앞으로 뭘 하실 생각이오?"
"예?"
"그 끔찍한, 실례. 내게는 그렇게 보이오. 그 끔직한 의식도 끝났으
니 당신은 이제 살아갈 권리를 가진 거죠? 그리고 이름도 가진다며?
자아를 가질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이로군. 그럼 당신은 이제 최대한
선별된 당신의 그 최강의 육체와 험한 댓가를 치루고 가지게 된 값비
싼 자아를 가지고 뭘 할 생각이오?"
취해버린 그레이에게는 퍽이나 힘든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간신히
질문을 마치자 드래곤 솔져는 별 어려울 것도 없다는 듯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소환자의 명령을 수행할 겁니다."
"다른 건? 이봐요. 당신은 새로 태어난 거잖소. 다른 건 없소? 젠장,
이 세상에 대해 뭘 알아야 하고 싶은 것도 생기긴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말 나눠본 걸 가지고 추측해보면 당신은 꽤나 많은 식견의
소유자인 것 같은데. 최소한 당신과 내가 말 나누는 데는 아무 불편도
없으니까."
"어느 정도는…… 그래요. 보통의 인간과 같은 정도의 식견은 가지고
있소."
"위대한 드래곤 만세요. 그럼 당신은 이 세상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을 거요. 그럼 하고 싶은 것도 뚜렷하게 생각할 수 있잖소?"
"하고 싶은 것은 분명히 있소."
그레이는 반색을 하며 말했다.
"뭐요?"
"소환자로부터 명령을 받고 싶군요."
그레이는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 저 녀석은 내
얼굴이 보인다고 했었지? 그레이는 더 험한 인상을 만들어보이며 말했
다.
"젠장, 넌 사람이 아니었지. 그래."
"그렇소. 그레이 휠드런."
"내가 주정을 늘어놓았던 모양이군. 도대체 누굴 상대로 이런 이야기
를……"
"발 앞을 조심하시오."
그레이는 급하게 멈춰섰다. 그는 그림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
"발 앞에 갑주가 있소. 발을 조심스럽게 내밀어 보시겠소?"
그레이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어보았다. 그러자 곧 발에 닿는 단단
한 쇠붙이가 느껴졌다. 으음. 하긴 데스나이트들의 갑옷 같은 것은 수
거하지도 않았지. 틀림없이 고가에 팔릴 전리품이었지만 데스나이트의
갑주에 손을 댈만큼 용감한 경비대원은 없었다. 그래서 데이든 평원은
다른 전장과는 달리 수많은 전리품들이 방치된 형국이었다. 그레이는
발 앞을 가로막는 갑주를 거칠게 걷어찰까 아니면 옆으로 돌아갈까 고
민했다. 갑옷을 차면 발이 아플 거라는 생각 같은 것은 취해버린 그레
이에게는 들지 않았다.
그 때 갑주가 말을 했다.
"검검을을 뽑뽑아아라라……"
그레이는 잠시 동안 얼어붙어버렸다. 술 때문이야. 꼼짝도 하지 못하
는 자신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레이는 결론까지도 내렸다. 술이 아니라
면 벌써 움직였을 텐데. 그래서 마지막 드래곤 솔져는 갑주를 후려치
는 대신 그레이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겨야 했다. 그레이는 엉덩방아
를 찧을 뻔했고 드래곤 솔져는 다시 갑주를 공격할 기회를 포기해야
했다. 그레이는 드래곤 솔져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검을 뽑아들었
다.
그리고 말을 하던 갑주는 천천히 일어났다.
일어나다? 그레이는 그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다. 사람이나 동
물이 일어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것은 마치 무게가 없
는 물체가 둥둥 떠오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윽고 갑주는 꼿꼿한
자세로 그레이와 마지막 드래곤 솔져 앞에 섰다.
왼팔은 팔꿈치부터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그리고 갑주에는 커다란 구
멍이 뚫려 그 구멍으로 켄턴 시의 불빛이 보일 지경이었다. 조금 이상
한 각도로 흔들거리는 오른팔에는 거대한 투핸드 소드를 들고 있었다.
사람이 든다면 틀림없는 투핸드 소드였지만 데스나이트는 그 검을 마
치 롱소드처럼 쥐고 있었다.
투구의 뿔은 부러지고 찢어진 망토가 기이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레
이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공포? 아냐. 냄새다. 그레이는 눈 앞
의 데스나이트에게서 지독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유황
밭에 던져진 시체가 이런 냄새를 풍길 것인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냄새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레이는 다시 뒤로 몇 발자국 물러
나고 말았다.
데스나이트는 말했다.
"누누가가 먼먼저저 덤덤빌빌 것것인인가가. 동동시시에에 덤덤벼벼
도도 상상관관없없다다."
드래곤 솔져의 그림자가 검을 옆으로 한번 뿌린 다음 그대로 앞을 향
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취한 자신은 가만히 있어도 용서받을
거라는 조금 비겁한 생각을 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드래곤 솔져의 강인한 어깨가 꿈틀거렸다. 그는 옆으로 서서는 수평
으로 들어올린 왼손바닥을 데스나이트에게 내밀고는 느슨하게 검을 쥔
오른손은 허벅지 쯤에 적당히 떨어트렸다.
"오라."
"무무엄엄한한 놈놈!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에에게게 선선수수를를 허
허락락한한다다고고? 건건방방진진 자자세세 집집어어치치우우고고 네
네놈놈의의 공공포포와와 함함께께 덤덤벼벼라라! 데데스스나나이이트
트가가 너너에에게게 지지옥옥을을 보보여여주주리리라라!"
드래곤 솔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허벅지 쯤을 오가던
그의 오른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보며 데스나이트는
흡족한 듯이 웃었다.
"핫핫하하하하! 지지옥옥에에 온온 것것을을 환환영영한한다다."
드래곤 솔져의 발이 앞으로 튕겨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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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 다가오고 있군요. (발렌타인 데이는 보이지 않는다. 떠올리지
도 못한다… 으윽.)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6019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15 03:19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1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1.
그리고, 그것으로 끝났다.
드래곤 솔져는 앞으로 크게 발을 내디딘 자세 그대로 정지했다. 그레
이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검을 부여잡았다. 마법! 제기
랄.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싸워야 되나, 킨 크라이에 올라타
야 되나? 그 때 데스나이트가 말했다.
"왜왜 멈멈췄췄는는가가?"
그레이는 어이가 없었다. 왜 멈추냐니? 그 때 무시무시한 도약 자세
그대로 굳어있던 드래곤 솔져가 앞으로 내디딘 발을 천천히 회수하며
똑바로 섰다. 어깨 위에서 굳어있던 그의 팔도 천천히 내려와 허리 쯤
에서 고요히 정지했다. 어라? 마법에 걸린 것이 아닌가?
드래곤 솔져는 말했다.
"뭐지?"
데스나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공에 둥둥 뜬 것처럼 보이는 그의
갑주가 조용히 흐느적거릴 뿐 데스나이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드래
곤 솔져와 그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래곤 솔져는 지치고 성난 음
색으로 말했다.
"왜 맞서 싸우려하지 않는가. 싸울 의사가 없는 상대에게 검을 휘두
를 수는 없다."
데스나이트의 어깨 부분이 조금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보며 그레이
는 칼자루를 쥐어짤듯이 움켜쥐었다.
"넌넌 인인간간이이 아아니니었었지지. 물물러러나나라라. 기기사사
여여, 네네가가 오오라라."
그레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드래곤 솔져는 말없이 뒤로 물
러났다. 마치 데스나이트의 말대로 그레이가 데스나이트와 싸워야 된
다는 듯이. 그레이는 그 두 개의 그림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흐느적
거리는 데스나이트의 파괴된 그림자, 그리고 드래곤 솔져의 완벽한 그
림자를 번갈아 보는 그레이의 시각 한쪽으로 켄턴에서 솟아오르는 불
꽃이 음험한 욕망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졌던 황야 위의
공기는 자욱한 핏방울을 머금고 있는 듯했다. 비린 냄새. 그리고 데스
나이트의 냄새. 그레이는 입술을 핥고 나서 말했다.
"잠깐, 이봐, 데스나이트 경. 말이 이상하군."
"무무슨슨 말말인인가가."
"인간이 아니었지. 라고 했나? 그럼 인간은 싸울 의사가 없는 상대에
게도 검을 휘두른단 말인가?"
데스나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점점 노성으로 바
뀌었다.
"그것은 네놈들의 이야기잖아! 단지 피해자의 공포를 즐기기 위해 맹
목적으로 공격하는……"
"그그렇렇다다. 형형제제여여."
"뭐라고? 잠깐, 지금 뭐라고 불렀지?"
데스나이트의 갑주가 앞으로 조금 움직였다. 하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이었기에 그레이는 그것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이라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데스나이트는 죽어가는 사자처럼 으르렁거
렸다.
"드드래래곤곤 솔솔져져들들의의 의의식식을을 따따라라볼볼까까. 검
검을을 뽑뽑아아라라. 형형제제여여."
"닥쳐! 아, 아니, 열어! 입을 열어 설명해! 내가 왜 너의 형제냐.
왜!"
데스나이트는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데스나이트는 자신의 검을 천천
히 들어올렸다. 억제될대로 억제되어 있던 그레이에게 있어 데스나이
트의 그 동작은 마지막 장애물을 파괴하는 효과로 작용했다. 그레이는
거친 고함을 지르며 잔뜩 당겨진 화살처럼 달려들었다.
뜻없는 고함소리, 그리고 그 고함소리보다 빠른 발. 그레이는 데스나
이트의 왼쪽 허리 옆을 순간적으로 돌파했다. 사고는 필요없다. 누적
된 경험과 숙련은 사고보다 빠르게 그레이를 인도했고 그래서 그레이
는 데스나이트의 검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직선을 가장 빠르게 지나
쳤다. 그레이가 자신의 행동에 망연해하며 어깨와 팔에 남아있는 타격
의 여운을 느끼고 있을 때 그의 등 뒤에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데스
나이트의 갑주가 무너져내렸다.
땡그르…… 꽝깡깡!
그레이는 몸을 돌렸다. 급격한 회전에 휘말린 그의 앞머리카락들이
요동치며 그레이의 시야를 가렸다. 그 사이로 그레이는 땅바닥에 나뒹
굴고 있는 데스나이트의 갑옷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솟아
올라 어두운 밤하늘로 솟아오르는 불길한 색깔의 연기도.
얼마간 솟아오른 연기는 상승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엉겼다. 그레이가
부릅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연기는 점점 엉기며 형체를 이루
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헐떡이며 연기를 바라보았다.
연기는 이제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어깨 위에는 비난
하는 듯한, 동시에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띈 채 그레이 자신을 바라보
는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
으며 그레이는 목이 졸리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꿇었다.
"으와아아아!"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 속에서 그레이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었
다. 번갯불이 머리를 때리는 듯한 느낌. 그리고 그레이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미친듯이 요동치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구역질 날듯이 헐떡이
는 자신의 호흡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레이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
했다.
무언가가 그레이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레이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
르며 튕겨지듯 일어났다.
"손대지마!"
하마터면 오른팔이 통채로 날아가버릴 뻔했지만 드래곤 솔져는 침착
했다.
"슬픈 자. 무엇을 보았소?"
"뭐?"
"무엇을 보았냐고 물었소."
그레이는 고개를 돌려 연기가 스멀거리던 그 공간을 바라보았다. 하
지만 그곳에는 깊이 없는 암흑 뿐이었다. 지독한 어둠 때문에 데스나
이트의 갑주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마구 경련을 일으키는 얼
굴을 돌려 핏발 선 눈으로 드래곤 솔져의 어두운 윤곽을 바라보았다.
곧은 자세로 선 드래곤 솔져에게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정심. 그래, 내가 필요한 것은 동정어린 관심이야. 하지만 드래곤
솔져는 어둡고 위압적인 자세로 선 그림자일 뿐이었다.
그레이는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입술을 힘겹게 움직였다.
"내 얼굴을…… 내 얼굴을 봤어. 저기서."
드래곤 솔져의 머리가 조금 움직였다가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
다. 순간 그레이는 지금 드래곤 솔져의 얼굴이 어떤 표정인지 알고 싶
다는 지독한 욕구를 느꼈다. 드래곤 솔져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 그대
로 말했다.
"데스나이트의 사술을 본 것이오. 신경 쓸 필요 없는 것이오."
"제길, 내 얼굴이란 말이야!"
"당신 스스로도 알 것이오. 당신은 이런 어둠 속에서 사물을 그렇게
뚜렷하게 볼 수 없소. 내 얼굴이 보이시오?"
"뭐라고?"
"내 얼굴이 보이냐고 물었소."
그레이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래. 눈 바로 앞에 있는 드래곤 솔져
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 지독한 어둠 속에서 뭔가를 볼 수
있을 리가 없어. 연기? 얼굴? 보일 까닭이 없어.
하지만 그레이의 망막에는 아직도 그 모습의 잔영이 남아있는 듯했
다. 당장이라도 웃음, 혹은 눈물을 터뜨릴 듯한 얼굴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레이 휠드런의 모습은 뚜렷했다. 그 얼굴을 다시 떠
올리며 그레이는 무릎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보았어.
드래곤 솔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괘념치 마시오. 데스나이트는 소멸하는 그 순간까지 공포와 절망,
그리고 어둠을 선물하기 위해 못된 잔재주를 부린 것이었을 거요."
그레이는 그 순간 온몸을 치닫는 한기를 느꼈다.
"잠깐, 너는 봤나?"
"아니, 못봤소."
"못봤다고? 그 얼굴은? 제기랄, 그 연기는?"
"연기?"
그레이는 드래곤 솔져의 검은 윤곽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하지만
드래곤 솔져는 묵묵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못봤군. 나만
봤어.
"먼저 가라."
"예?"
"저 불꽃이 켄턴이다. 밤눈이 좋으니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겠지. 그
곳에 도착하거든 솔로쳐를 찾아라. 너의 소환자다."
드래곤 솔져는 잠시 기다렸다가 말했다.
"당신은 여기 있을 거요?"
"가."
대답하는 그레이의 목소리는 낮지도 높지도 않았지만 드래곤 솔져는
검을 추스리고는 그대로 켄턴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불꽃을 배경
으로 떠오르는 드래곤 솔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레이는 입술을 깨
물었다. 키가 큰 드래곤 솔져는 성큼성큼 걸어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드래곤 솔져의 모습이 손톱만해지자 그레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기엔 아무 것도 없다."
그레이는 자신의 속삭임에 흠칫했다.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그레이
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암흑 뿐, 구름이 가
득 끼었는지 밤하늘엔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애타는 심
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면서도 그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는 알
지 못했다.
그 때 무엇인가가 그의 허벅지쪽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기절할 듯이 놀란 그레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러내렸
다. 검날이 살을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감각이 그의 팔을 지나 어깨를
때렸다.
"키에에엑!"
고막을 찢을 듯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그레이는 검을 휘두른 자세 그
대로 굳어버렸다. 밤을 관통하며 울려퍼진 소리는 그의 귀에 익은 목
소리였다. 그레이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킨 크라이!"
털썩. 거대한 덩치를 가진 생물이 땅에 쓰러지는 소리. 그레이는 손
을 내뻗었으나 손아귀에 쥐어지는 것은 암흑과 그의 절망 뿐이었다.
그레이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땅을 더듬으며 킨 크라이를 찾았
다. 손바닥이 쓸리고 돌부리에 부딪힌 손가락에서는 지독한 통증이 느
껴졌다. 철퍽. 손가락 끝에 따스하고 질척한 느낌이 드는 순간 그레이
의 목덜미에 소름이 하얗게 돋았다. 마침내 그레이는 킨 크라이의 몸
을 찾아내었다.
부드러운 깃털은 피에 젖어 서로 달라붙어 있었다. 그레이는 킨 크라
이의 몸을 만지면서도 계속 가중되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왜지? 왜
움직이지 않지? 킨 크라이, 왜! 날개는, 날개는 괜찮아. 다시 날 수
있어. 이건, 다리인가? 다리도 괜찮아. 그런데 왜 움직이지 않지? 킨
크라이, 왜?
다급하게 더듬던 그레이의 손가락은 마침내 자신이 저질러놓은 비극
의 상처를 찾아내었다.
미간 한 가운데였다. 공포로 휘두른 그레이의 검은 킨 크라이의 정수
리에서 옆으로 비스듬하게 예리한 상처를 만들어놓았다. 갈라진 두개
골 사이로 흘러나온 뇌수와 피가 그레이의 손가락을 적셨다. 길다란
끈…… 이건? 둥글다. 물컹거리는 느낌. 잠시 후 그레이는 자신이 파
열된 오른쪽 안와로부터 흘러나와 대롱거리는 킨 크라이의 오른쪽 시
신경을 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레이는 화다닥 뒤로 물러났다.
"으아아아아!"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레이는 어둠을 향해 비명질렀다. 눈을 부릅
떴으나 보이는 것은 명멸하는 빛깔들 뿐이었다. 눈을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눈을 감은 것처럼 희고 붉고 푸른 빛살들이 그레이의
눈 앞을 어지럽혔다. 그레이는 땅바닥을 움켜쥐며 목이 터져라 비명질
렀다.
"으아아, 으아아, 으아아아아!"
땅에 앉은 채 그레이는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어둠은 계
속해서 그를 따라왔다. 그레이는 일어서지도, 몸을 돌리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 때 그의 몸이 무엇인가에 호되게 부딪혔
다. 그레이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바위인가?
그의 손에 닿는 것은 바위가 아니었다. 매끄럽고 진저리쳐지도록 차
가운 것. 그레이는 그것을 밀어버리려고 있는 힘껏 부여잡았다. 그 순
간 그의 손이 굳어버렸다.
투구다.
그레이가 움켜쥐고 있는 것은 데스나이트의 투구였다. 조금 전 자신
이 쓰러트린 데스나이트의 투구였다. 그레이는 어느새 그것을 들어올
리고 있었다. 자신의 손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암흑 속이었지
만 그레이는 투구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보였다.'
조금 전과 같아.
그레이는 암흑 속에서도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레이는 투구를 버릴 수 없었다. 이 암흑, 어딘가에 킨 크라이의 시
체가 쓰러져있을 이 지독한 암흑 속에서 그 투구는 그레이가 볼 수 있
는 유일한 물체였다. 그레이는 어느 새 킨 크라이의 죽음도 잊어버린
채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악하기 짝이 없는 문양들과 거친 장식들. 거대한 투구의 양쪽 관자
놀이에서는 조각된 뱀들이 뻗어나와 마치 눈썹처럼 눈 위를 흘러 미간
에서 모였다. 그리고는 서로 또아리를 틀며 콧등으로 흘러내렸다. 치
켜올려진 바이저는 가로로 슬릿들이 나있었다. 그레이는 그것이 사람
의 갈빗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바이저를 아래로 내리
자 인간의 갈빗대를 파고드는 뱀의 모습이 떠올랐다. 심장을 관통하는
두 마리의 뱀…… 바이저 아랫부분은 노출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
히 있어야 할 볼 가리개는 없었다. 대신 귀 부분에서 솟아나온 거대한
뿔들이 얼굴 앞으로 휘어지며 볼 가리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디자인, 이상하다.
매력적이다.
그레이는 친우의 얼굴인 것처럼 투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뭔가가 모자라다. 이 투구에는 있어야할 것이 없다.
그 안에 있어야할 머리.
그렇다. 머리가 없다. 그레이는 그것을 채워넣기로 결심했다. 천공의
기사 그레이는 입이 온통 뒤틀리도록 사납게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머리라면 마침 내게도 하나 있거든."
그레이는 천천히 투구를 들어올렸다. 머리에 뒤집어쓰기 직전, 투구
속을 보게 된 그레이는 그 속에서 뭔가가 일렁이는 것을 본 것 같았
다. 하지만 그의 손은 멈춰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썼다.
================================================================
갈라드리엘 님께. 에, 아프나이델은 실전 경험이 많으니까요. 인프러
비젼은 설명되었을 겁니다. 에델린을 태운 코스모스가 등뼈가 부러지
지 않는 까닭이라. 샌슨을 태우고도 끄떡없는 슈팅스타가 있다고 대답
하면 될까요… 하하.
드래곤 라자의 패러디를 쓰는 것에 대해 반대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
다. 감사한 일이지요. 즐겁게 기대하겠습니다.번 호 : 16020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15 03:19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2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2.
"머맨과…… 인간의 혼혈이라고요?"
"그런 불측한 소문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머맨과 인간 사이에
자손이 생긴다는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카알은 팔짱을 꽉 낀 채로 오른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콧망울을 만지
작거렸다. 잠시 후 그의 오른손은 다시 내려와 테이블을 똑똑 두드리
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리는 이야기를 처음 시작하던 때와 똑같은 모
양으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앉아있었다. 하탄의 궁궐에 있을 때
의 장엄한 옷 대신 바이서스의 평범한 옷을 걸치고 앉아있음에도 불구
하고 알리 주위에는 사막의 근엄함이 감돌고 있는 듯했다.
카알의 오른손이 이제는 허공으로 올라갔다. 카알은 허공에 있는 무
엇인가를 만질듯이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저, 그 어머니 되는 여자분이 돌아왔을 때 말입니다. 흠흠."
알리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의 손가락이
더욱 어지럽게 움직였다.
"에, 저, 그러니까, 뭐 확인된 바가 없습니까? 그러니까 머맨에게
붙잡혀갔을 때, 에, 그러니까 당신들은 여성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음, 미덕으로 여긴다는 점은 나도 잘 알고 있지만, 아, 그건 예
사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그 여자분은 머맨에게, 에…… 그러
니까 의심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알리의 무표정은 그대로였고 불쌍한 카알은 이제 자신의 오른손을 자
기 입 안에 집어넣을 지경이었다. 알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성관계가 있었는지를 묻고 싶은 게냐."
카알은 풀이 죽어서 대답했다.
"의외로 쉽게 말씀하시는군요. 예. 그렇습니까?"
"물론, 모른다."
"어, 당신이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거나, 그런 소문에 대해 열심히
조사하고 다닐만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의심
이 있었다면 여성 본인이 뭐라고 항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
어, 머맨에게 잡혀간 것은 확실하지만 수치스러워할만한 일은 전혀 없
었다, 라든지."
알리는 눈살을 꿈틀거렸다.
"여자가?"
순간 카알은 자신이 완전히 다른 관습의 소유자와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젠장. 저 나라에서는 여자들은 자기 변명도 못
하는 모양이군.
"그럼 뭡니까? 아무도 묻지도 않았고, 본인도 아무 설명을 안했고?
그 여자가 머맨과 나란히 앉아 밤바다의 아름다움만을 감상했는지 아
니면 그보다 더 진전된 상황을 즐겼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입니
까?"
"그렇다."
카알은 항복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신차이는 사람입니까?"
"뭐?"
"사람처럼 생겼습니까?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보이거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알리는 잠시 기다렸다가 천천히 말했다.
"너는 사람이냐?"
"무슨 뜻인지?"
"내게는 네가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낮의 햇살 아래서의 너
를 본 적이 없으니 네가 뱀파이어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할 수도 있다.
혹 도플갱어라는 의심도 가능할지 모르지. 어쩌면 네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거인일지도 모르잖느냐."
카알은 킬킬거렸지만 알리의 얼굴에는 웃음기 비슷한 것도 없었다.
카알은 웃음을 멈추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농담을 할 때는 좀 웃어라,
이 사막 촌뜨기 녀석아. 알리는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말했다.
"본 것만 가지고 진실처럼 말할 수는 없다."
"당신이 본 것, 아는 것만 가지고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이미 말했듯이 신차이 발탄은 이제리스 해협의 서펜트
를 거꾸러뜨린 일이 있다. 그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지독하게 어려
운, 거의 불가능한 일이겠지. 하지만 그것이 하프 머맨의 증거인지 노
련하고 사나운 인간 뱃사람의 증거인지는 구분하여 말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
"그 외에는?"
"없다."
"사람입니까? 알리 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다."
카알은 이제 두 손 모두를 사용해서 자신의 심사를 표시했다. 즉 양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버린 것이다. 웃음기도 없는 얼굴로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알리는 나직하게 말했다.
"왜지."
"머리 꼬리가 남아있어야 소고기인지 말고기인지 압니다."
"왜 신차이 발탄에 대해 관심을 가지느냐. 게다가 너의 관심은 조금
바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뀐다고요?"
"처음에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들이었다. 그런
데 이제 너의 관심은 그가 사람인지 하프 머맨인지에 대해 집중되어
있는 것 같군. 나로선 알 도리조차 없는 그 어머니의 일까지 질문하는
것은 네가 거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 아니겠느냐."
"가슴이 서늘한데요? 하하. 바로 보셨습니다."
"설명해줄 수 있겠느냐."
"신기한 일이니까 호기심이 동해서."
알리는 잠시 카알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나는 적절한 대답을 해줄 수 없다.
일방적인 질문만 해서는 내게서 좋은 정보를 받아내기는 어려울 텐
데."
"알지만, 안됩니다."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인가. 모르겠군. 놀라운 전설을 가지고 있는 자
이긴 하지만 결국 뱃사람에 불과한 자 아니던가. 게다가 자유무역선의
선장이니 너나 바이서스에 어떤 도움이 될 소지를 가지지도 못한 것
같다. 이해하기 어렵군."
카알은 빙긋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길게 기대어서는 배 위에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알리의 말 그대로다. 원래는 지골레이드와 만나게 될 인간에 대한 관
심이었다. 하지만 이제 카알의 관심은 신차이의 정체에 집중되어 있었
다.
머맨과 인간의 혼혈이라. 머맨은 바다. 바다는 갈매기와 희구의 그림
오세니아. 인간은 땅. 땅은 대지와 회상의 시무니안. 희구는 미래로
향하는 희망이고 회상은 과거로 향하는 상념이다.
하프 머맨은, 결국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의 교차
점이 될 수 있다. 카알은 그것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 정답을 알아야 한다.
카알은 가슴이 답답해오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는 안돼. 하지만, 하
지만.
그 정답을 찾아내서 숨겨야 한다.
그 때였다. 문이 열리며 경비대장 조나단 아프나이델이 들어섰다. 조
나단은 알리의 모습을 보았지만 마치 그를 보지 못한 것처럼 잠시 허
공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요. 돌아가서 쉬셔도 좋습니다. 알리
씨."
알리는 잠시 할 말이 남았다는 듯이 카알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곧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카알은 그것이 알리가 의자에
앉은 이후로 처음으로 보여주는 동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와, 대단
하군. 정말 꼼짝도 하지 않았는걸. 알리는 조나단의 옆을 지나쳐 문을
나섰다. 문밖에는 그를 감방으로 안내할 궁성 수비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알리가 나가고나자 조나단은 테이블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는 카
알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카
알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불편해보이시는군요, 조나단님?"
"불편하오. 당신은 조심이라는 것을 모르오? 그렇잖아도 그것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찾아온 거요."
카알은 꾸중을 얌전히 듣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표정을 보던
조나단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웃음과 함께 딱딱한 어조로 말하려
던 결심도 잊어버렸다.
"이보시오. 궁성 수비대장인 내 입장이 뭐가 되는 거요? 내 허락도
없이 죄수를 함부로 궁성 안까지 끌어들이다니."
"하하. 알리는 원래 궁성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조나단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지하감옥은
궁성 임펠리아의 지하에 있으므로 알리는 궁성 안에 있다는 카알의 말
은 틀리지 않았다. 카알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조나단 씨에게 허락
을 받으려 했지만 자리에 안계시더군요."
조나단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빛의 탑에 잠시 다녀왔소. 솔로쳐 사조님의 일 때문에 의논할 일도
좀 있고."
"아아, 그렇습니까."
카알은 그것으로 멈추고는 마법사들의 일에 대해 더이상 질문하지 않
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조나단은 그 태도에 만족하며 말했다.
"무엇이든 한도를 넘어서는 좋지 않은 법입니다. 카알. 당신의 순수
한 의도를 백안시하는 무리는 아직도 남아있소. 나야 당신이 오로지
이 나라를 위해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그 노력
의 일환으로 자이펀의 포로와도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
소.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오. 어떤 자들은
당신이 적국의 포로와 내통하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단 말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행동에 유의하겠습니다."
카알은 완전히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그래서 조나단은 꺼내려고 마
음먹었던 말의 절반만 꺼내고는 다른 화제로 바꿨다.
"그리고, 낭보가 있소."
"낭보요? 요즘은 놀랄 일이 너무 많아서 겁부터 나는군요."
조나단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일 기억하시오? 샌슨 군이 켄턴에서 받아온 부탁. 그 중 솔로쳐
의 부탁은 처리되었소. 시몬슬이 켄턴으로 출발했지. 그리고 한 가지
가 더 있잖소?"
"예? 그럼!"
카알은 테이블을 뛰어넘어 조나단을 끌어안으려는 듯한 동작으로 말
했다. 조나단은 마치 자신이 애써서 그렇게 된 것처럼 우쭐한 표정으
로 말했다.
"그래요. 조금 전 일스로부터 전령이 왔습니다. 장미의 기사들이 출
진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오래전, 300년 전 그 때와 마찬가지로."
"오, 아샤스여! 오렘이여! 잘되었군요. 정말 잘되었군요!"
카알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조나단 역시 즐겁게 말했다.
"그래요. 이제는 켄턴 시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소. 당신도
그랬겠지만, 그 동안 나도 정말 괴로왔소.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현실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었소. 국왕 전하께서도 몹시 괴로와하고 계셨소."
"예. 기뻐할 일입니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빨리 보내올 줄은 몰랐군
요.
"일스 대공께서는 300년 전의 수하가 보내온 충성의 서약에 퍽 감동
한 모양이오. 하긴 그런 말에 감동하지 않을 자 어디 있겠습니까. 전
령의 말에 의하면 대공께서는 딤라이트 경의 말에 눈물을 보였다 하더
군요. 그리고 져스티스 기사단원들 역시 그들의 영웅이자 전설인 선배
의 말에 격렬한 감동을 표시했던 모양이오. 대공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면 기사단 단독으로라도 비공식적으로 원정을 불사할 분위기였다는 말
이 다 들리더군요."
카알은 당연하지. 라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대신 카알은 쟈크의 도움
으로 일스 기사단원 전체에 천공의 기사들의 부활과 그 전갈에 대한
소문이 퍼지도록 공작했던 사람의 표정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순진하게 말했다.
"아아, 져스티스 기사단은 역시 기사도의 정화 같은 존재들이군요!
감격스럽습니다."
감탄하는 카알의 얼굴을 보던 조나단은 그를 더 기쁘게 해주고 싶어
좀이 쑤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조금만 기다리시오. 전령이 가져온 국서의 사본을 만들어오
겠소. 지금 쯤이면 사본은 다 만들어졌을 거요. 내 빨리 다녀오리다."
그리고 조나단은 카알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벌써 일어나서는 문을
열고 나섰다. 카알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나단이 문 밖으로 완
전히 사라지고나서야 자기 나름대로 이 상황에 대해 기뻐하기 시작했
다. 즉,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올리며 피로감이 그득한 얼굴로 안온
한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그레이의 출병 요청이 대공의 귀에만 들어가서는 일이 안된다. 자국
병력의 유출을 꺼려한 대공이 입을 닫아버리면 속수무책이니까. 그랬
기에 카알은 자기 나름대로의 수단을 충분히 강구해두었었다. 쟈크의
도둑 길드원들은 일스 기사단원들이 자주 들리는 술집에서, 혹은 그들
의 부인이 모여드는 사교모임에서, 어쩌면 카알은 전혀 상상할 수 없
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일스 기사단원들의 귀에 그 소문이 들어가도
록 했다. 그리고 장미의 기사들은 그 소식에 놀랐고, 그리고는 흥분해
버린 것이다. 수하들이 이미 다 알고 있었기에 그레이의 요청을 거부
할 수도 없게 된 일스 대공의 불쌍한 처지를 생각하며 카알은 킬킬 웃
었다.
테이블에 올린 발뒤꿈치로 테이블을 딱딱 두드리며 카알은 흥겹게 중
얼거렸다.
'샌슨, 로넨. 기뻐하시오. 당신들이 진짜로 지휘할 부대가 도착하고
있소.'
바이서스에 들어온 병력은 바이서스의 것이다. 물론 일스 기사단이라
는 어마어마한 위명이 있으니만큼 다루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부
터는 그들을 흡수해버리기 위한 공작이 필요해지겠군. 카알은 더없이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깊은 고뇌에 잠겨있던 카알은 갑자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가슴에 턱을 묻은 카알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갑자기 그의 볼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카알은 오른손으로 입을 막으며 소
리없이 울었다.
'친구들이여. 미안하오.'
제레인트, 아프나이델, 이루릴, 에델린, 엑셀핸드…… 그들마저도 속
여야 하는가.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카알은 어깨를
떨며 울었다.
교차점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숨겨야 한다.
돌아온 과거에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다 이용한다.
그리고 교차점을 공개한다.
그리고 그 동안 굳어졌던 상황을 강제로 현실로 만든다.
자신도 모르게 조목조목 생각하고 있던 카알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래. 아무도 모르지. 현실이 정지한다면, 마음에 드는 현실을 하나 만
든 다음 다시 굴러가게 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두 볼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카알은 더없이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폭발적인 웃
음은 아니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하하하……"
================================================================
설 잘 쇠시길 바랍니다.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6227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20 02:10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3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3.
으스스할 정도로 고요해. 네리아는 침울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
다. 저 모든 얼굴들 색깔이 모두 각양각색. 이쁘지는 않아. 궤헤른.
당신 미소지으면 근사할 것 같은데. 지금의 그런 얼굴로는 어떤 여자
에게도 접근할 생각하지 말아요. 쥬블킨 할아버지. 당신 무서워요. 저
여자는 뭐지. 흐음. 그 글레이브도 상당히 엑조틱하지만 내 트라이던
트가 더 근사해. 와아, 이 길다란 한숨소리는 뭘까. 운차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얕고 긴 한숨 끝에, 운차이는 칼로 자르듯 말
했다.
"후작을 죽인다."
그란의 눈이 재빨리 운차이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제레인트는 기
겁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 운차이……"
"쉽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시간이야. 우리들의 오랜 추적의 목적만
생각해도 결론은 당연하다."
운차이는 쓰디쓴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올려 신스라이
프를 바라보았다. 싱긋 웃으며 운차이를 마주보던 신스라이프의 얼굴
이 갑자기 굳어버렸다. 부르르 떨며 고개를 다시 돌리는 신스라이프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운차이는 나직하게 말했다.
"Yi youkchi ro nharphe un…… Khai!"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 중에서 자이펀어를 아는 자들의 얼굴이
가볍게 굳었다. 그러나 쥬블킨과 콜리의 프리스트들 중에서 자이펀어
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쥬블킨은 두 주먹을 들어올리며 탄성
을 질렀다.
"당신의 결정은 정확했소! 여덟번째 죽음은 아홉번째 정답을 부를 것
이오! 당신은 그 정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나는 약속을 이행하
게 될 것이오!"
운차이의 입매가 조금 꿈틀거렸지만 그는 여전히 나직하게 말했다.
"이 놈들은 우리가 맡지. 올라가서 원하는 것을 해."
"알겠소! 당신의 밤에 콜리의 가호가 영원하기를!"
광란에 젖어 부르짖는 쥬블킨을 바라보며 파하스는 운차이의 말을 해
석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이펀어로 이루어진 운차이의 선언에
따른다면 신스라이프는 할슈타일 후작보다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운차이의 선언을 이해하지 못한 쥬블킨은 그대로 몸을
돌려 후작을 쏘아보았다. 그 옆에는 레이저와 루손이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서있었다.
궤헤른의 귀 앞으로 급격하게 주름이 생겨났다.
이를 악문 궤헤른은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운
차이와 그란들이 무서운 표정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궤헤
른은 절망을 느꼈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후작과 그의 사이에는
흥분한 콜리의 프리스트들이 사람의 벽을 만들고 있었고 등 뒤에는 그
들의 최고의 악몽이라 불릴만한 자들이 칼과 눈빛 양쪽을 모두 맹렬하
게 번득이고 있었다. 니크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 토실토
실한 볼 때문에 파묻힌 것처럼 보이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니크는 애써 울음을 참느라 헐떡거렸다. 그리고 가이버는 고개를 떨
군 채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쥬블킨 역시 후작의 부하들이 완전히 무력한 것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계단을 걸어올라가는 그의 동작은 여유로왔다. 이제 그를 가로막고 있
는 것은 두 명 뿐이었다. 루손을 부둥켜안고 있던 레이저는 초조한 표
정으로 쥬블킨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굳어버린 후작을 바라보았
다. 정말 이래야 되나? 레이저는 다시 말하려 했지만 쥬블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비켜라, 올로레인의 후예여."
레이저는 얼굴을 온통 찡그린 채 쥬블킨을 바라보았지만 쥬블킨의 얼
굴은 완고했다. 레이저는 고개를 숙여 루손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도
사태를 이해못한 채 거인에 대한 공포에 빠져있던 루손이었지만 그녀
역시 주위를 흐르는 진지한 분위기에 입을 다물고는 레이저를 올려다
보았다. 레이저는 루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루손…… 거인은 사라져야하겠지?"
"응? 그, 그래. 레이저. 그렇지."
"따라와."
레이저는 어깨를 늘으뜨린 채 계단 옆으로 걸어갔다. 루손은 쥬블킨
을 한번 바라보고는 글레이브를 흔들며 레이저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쥬블킨은 벅찬 심정으로 신스라이프를 올려다보다가 후작에게 다가갔
다. 이제 그를 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후작은 여전히 달려내려오는 모습 그대로 굳어있었다. 그 모습을 보
며 쥬블킨은 참을 수 없는 유쾌함을 느꼈다. 그는 후작의 귓가로 얼굴
을 가져가며 나직하지만 열띤 목소리로 속삭였다.
"개인적으로…… 네놈이 여덟번째 제물이라는 것에 대해 콜리에게 감
사하고픈 심정이다, 후작. 의사를 존중할 줄 모르는 놈은 생명을 존중
할 줄 모르는 놈이지. 네녀석의 생명은 네가 이미 포기한 것이다. 킬
킬킬……"
자신의 귓가에서 울려퍼지는 쥬블킨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할슈타일
후작은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죽어야 하나, 이렇게 멍
청하게! 꼼짝할 수도, 말할 수 조차도 없는 이런 무력한 모습으로 이
런 놈에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미 죽은 녀석을 위해서!
쥬블킨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의 손이 계단 위에 떨어져있는 경
비대원의 포챠드를 들어올렸다. 쥬블킨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서는
포챠드를 할슈타일 후작의 가슴에 겨냥했다.
"콜리의 가호 속에!"
후작은 고함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쥬블킨
이 내지른 포챠드는 그대로 후작의 복부를 꿰꿇었다. 푸윽! 날카로와
질대로 날카로와진 후작의 감각은 복부의 피부를 뚫고 근육을 자르며
뱃속을 후비는 포챠드의 칼날을 그대로 느꼈다.
"후작니이이임!"
니크는 목이 터지도록 울부짖었다. 그리고 궤헤른은 무릎을 꿇고 말
았다. 잡아삼킬듯이 쥬블킨을 노려보던 후작의 예리한 눈빛에 순간 얼
룩이 번졌다. 손끝이 차갑다. 발이 차갑다. 후작은 빠른 속도로 무뎌
져가는 자신의 감각을 느꼈다. 포챠드가 다시 빠져나갈 때 후작은 둔
한 동통 같은 것만을 느꼈을 뿐이었다.
이제 죽음인가.
무너져내린 바위와 흙더미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깊은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동굴 속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크는 절망하지 않았다.
절망을 느끼기엔 그의 현실인식 능력이 너무 조악했다. 그래서 오크는
조금도 좌절하지 않은 채 한결같은 힘으로 돌을 내리치고 흙더미를 파
내었다.
꽝! 꽝! 꽝!
현실인식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그에게는 행운이었고 그의 팔 근육
에는 불행이었다. 오크는 무너진 동굴에 갇혔다는 현실을 느끼기는 했
지만 그것이 큰 장애라는 추리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크는 손
도끼로 바위를 내려치고 흙더미를 밀어부치며 꾸준히 길을 만들어내었
다. 그가 땅을 파는 방식은 드워프가 보았다면 수십대 위의 조상 이름
까지 거론하며 지독한 욕설을 퍼부어댈 방식이었다. 안전대책이라든지
붕궤의 위험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크는 다시 손도끼를
바위 틈에 끼워넣었다. 그리고는 두 손에 침을 탁 뱉고는 손도끼를 지
렛대삼아 아래로 내리밀기 시작했다.
"취, 츄아아아악!"
바위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를 아는 모든 오크들이 두려워하는 괴
력이 최고 수준으로 발휘되었다. 극도로 긴장된 그의 어깨 근육에서는
핑핑 소리가 울릴 지경이었다. 크게 뒤틀리던 바위가 움직이자 오크는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꽈드드등!
바위가 뽑혀나오며 어마어마한 충격음이 울려퍼졌다. 땅을 파던 오크
의 상체만큼이나 큰 바위가 쑥 뽑혀나오며 토사와 자갈들이 우수수 쏟
아져내렸다. 바위는 바닥에 떨어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크는 씨익 웃었다. 하지만 이 장면은 인간 광부였다면 모든 신의
이름을 부르며 광란스러운 감사를 표해야할 장면이었다. 이토록 거대
한 바위가 뽑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절묘한 균형을 이룬 그 위의 바위
들은 2차 붕궤없이 서로 맛물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기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오크는 지난 열하루 동안 이런 기적을 수십 차례 이
상 만났었다.
하지만 오크는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따위는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열하루 동안 굽힘없이 바위를 들어내고 땅을 파게 한 그의 강
철같은 의지는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이제 더이상 뜯어
먹을 다른 오크의 시체가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
다. 동굴 속에서 발견한 오크의 시체는 모두 뜯어먹었고 이젠 뼈다귀
라도 빨아야 될 지경이다. 그랬기에 오크는 아무 생각 없이 다른 바위
에 달려들었다.
쩡! 도낏날이 바위에 부딪히며 불꽃이 튀어올랐다. 불꽃 속에서 잠시
드러난 나크둠의 얼굴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킨 크라이라 불리웠던 그리폰이 머리를 들어올렸다.
푸드덕. 날개가 무겁다. 킨 크라이는 고개를 홰홰 내젖다가 갑자기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캄캄하다. 그리폰은
어둠을 좋아하지 않는다. 킨 크라이는 불안한 심정으로 부리를 딱딱
부딪히고는 고개를 돌려 날개를 손질했다. 주위에는 깃털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건성으로 날개를 손질하던 킨 크라이는 갑자기 주위
에 자욱한 피냄새를 느꼈다.
킨 크라이는 화드득 놀라면서 몇 큐빗 정도 날아올랐다. 비상이라기
보다는 도약이다. 잠깐 펼쳐졌던 날개가 다시 접히며 킨 크라이는 다
시 밤의 데이든 평원 위에 내려섰다.
무엇인가에, 맞았다.
킨 크라이는 그것을 떠올렸다. 주인의 다리에 가볍게 머리를 비벼대
었을 때였다. 무엇인가가 날아와 머리에 부딪히며 머릿속이 온통 번쩍
였다. 지독한 아픔과 공포. 맞았어. 킨 크라이는 다시 고개를 내젖고
는 제자리에서 몇 바퀴 돌았다. 뭐였지?
그러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자 킨 크라이의 머릿속에서 무
엇에 맞았다는 의식이 점점 현실성을 잃었다. 아프지 않아. 맞았나?
자신이 공격당했다는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가자 그의 머릿속으로 느리
게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주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
주인은 그를 이 무거운 안장을 치워주고 씻겨주고 먹이를 가져다주는
존재다. 그런데 그것들이 가장 필요한 이 시점에 주인이 보이지 않는
다. 어떻게 된 거지? 킨 크라이는 다시 뱅글뱅글 돌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둡고 피냄새만 날뿐이다. 킨 크라이는 갑자기 피로
감을 느꼈다. 그러자 희미한 사고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뭔가
를 먹고 잠자리를 찾아야 해.
주인을 찾자.
킨 크라이는 자신의 결정에 만족했다. 주인을 찾으면 그가 자신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안장을 떼어주고 잠자리를 주리라. 주인은…… 주인의
친구들에게 간 것일까.
주인의 친구. 딤라이트. 무스타파. 어디?
킨 크라이의 멋진 결정은 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주인의 친구들은 어
디에 있는 것일까. 킨 크라이는 다시 어쩔 줄 모르는 동작으로 부리로
땅을 헤집고 발톱으로 흙을 긁어대며 빙빙 돌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리폰? 사우스 그레이드에 왠 그리폰이지?"
킨 크라이는 화들짝 놀라면서 몸을 돌렸다. 이상하다. 조금 전까진
아무도 없었는데. 킨 크라이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몸을 낮
추며 날개를 좌악 펼쳤다.
어둠 속에 검은 그림자가 서있었다. 건장한 남자의 그림자. 킨 크라
이는 고개를 한껏 낮춘 채 남자의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저건 누구
지?
킨 크라이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안장? 안장이라니, 넌 길든 그리폰인가? 하지만 그리폰 라이더가 남
아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일스의 기사……"
사내는 흠칫하며 다시 킨 크라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술이 열리
는 순간 킨 크라이는 조금 놀라버렸다.
"킨 크라이? 너 혹시 일스의 기사 그레이 휠드런의 그리폰인 킨 크라
이인가?"
킨 크라이는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과 주
인의 이름이 연달아 불리자 킨 크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조금
쳐들었다. 남자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킨 크라이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얼굴을 감싸쥐었다.
"소, 솔로쳐도 돌아오셨지. 설마, 설마 그렇다면…… 천공의 기사도
부활했단…… 부활!"
남자는 갑자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킨 크라이가 의아한 심정
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남자는 정신없는 동작으로 자신의 팔다리
를 만지며 더듬더듬 말했다.
"내…… 팔! 내 다리, 남아있어. 붙어있어…… 살아있어! 나는? 나
는 싸웠는데…… 살아난 건가? 나도 부활한 건가? 오오, 레티여!"
남자는 무릎을 꿇었고 그 갑작스러운 동작에 놀란 킨 크라이는 뒤로
훌쩍 뛰었다. 하지만 남자는 킨 크라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어깨를 감싸쥔 채 오열했다.
"맙소사, 되살아났어. 살아났어! 어떻게? 어떻게? 나는…… 나는?"
이름이 없는 레티의 프리스트였건만 그가 죽기 직전 그에게 이름을
붙인 자가 있었다. 레틴드롤스는 부활한 자신의 몸, 그 법칙의 반역물
을 그러안은 채 온몸이 부서져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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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분위기에 편승하고(객지로 떠났던 친구들이 고향을 찾는 때입니
다.) 기타 등등의 일로 게으름을 많이 부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바스타드 소드의 영어 스펠링은 짐작하시는대로 Bastard sword 가 맞
습니다. 욕설이기 때문에 이건 아닐 거라고 하셨지만, 그 단어가 맞습
니다. 하하. 하지만 검 이름에 욕설을 붙인 것은 아닙니다. 저 단어는
영어의 고어에서 쌍으로 이루어진 것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바스타드 소드는 두손으로 쥘 수도 있지요.
그리고… 저는 이영도입니다. 메일 죽 읽다가 경영님 글 정말 재미있
어요. 하는 부분에서 고꾸라질 뻔했습니다. 혹시나 이경영 님의 글 소
개하는 글인가 싶어 다시 읽었는데 역시 F/W 의 이야기더군요. 이경영
님의 글 재미있지요… 하지만 저는 이영도란 말입니다.
시리얼란에서 M1 을 누르시면 곧장 작꿈사로 가실 수 있습니다. 그곳
의 3-3 게시판은 시리얼란 이용자분들의 전용 잡담란입니다. 잡담들의
경우는 되도록 그곳을 이용해주시면 좋겠습니다.번 호 : 16228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20 02:10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4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4.
론리 시걸의 갑판장 보타는 사납게 외쳤다.
"그, 그 부적 나도 만지게 해줘요!"
"다, 닥쳐! 가까이 오지마!"
바바라 선장은 으르렁거리며 부적을 꽉 움켜쥐었다. 졸란의 뒷골목에
서 암파린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점복가에게 구입한, 도무지 어떤 효용
이 있을지 의심스러운 괴상하게 생긴 부적이었지만 바바라 선장은 부
적의 효용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적을 믿고 있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중갑판에 몰려있던 다른 해적들 전부가 바바라 선
장이 움켜쥔 부적을 간절한 눈초리로, 혹은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쳐다
보고 있었다.
공포에 빠져있던 것은 다른 해적들과 마찬가지지만 그 눈초리를 본
바바라 선장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이놈들은 어차피 해적
인 것이다. 반란을 무서워할 놈들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그들이 간절
히 원하는 것을 선장이 가지고 있다면 선장의 머리 쯤이야 생선 머리
떼어내는 것보다 더 간단하게 떼어낼 놈들인 것이다. 바바라 선장은
보타 갑판장의 손이 칼자루쪽으로 가는 것을 보며 황급하게 외쳤다.
"조, 좋아. 내가 부적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앞장서서 올라가보겠
다. 너, 너희들은 내 뒤만 따라오면 된다. 알았냐?"
해적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들 단순한 해적들은 역시 선장님밖에
없다는 표정으로 바바라 선장에게 찬양을 보내어왔다. 바바라 선장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내 뒤를 바싹 따라와라. 알겠냐? 이 부적을 가지고 있으니 나는 너
희들을 막아줄 수 있다. 우리는 바다의 신사다! 아, 알겠냐? 귀신 따
위 혀 무서워할 것이 못돼! 바바라는 악마도 두려워하지 않아. 내, 내
가 놈의 목을 비틀어주지. 그러니까 너희들은 바싹 따라와야 한다. 알
았지?"
일방적인 수긍만을 보내온 다른 해적들과 달리 조금 똑똑한 편인 보
타 갑판장은 회의적인 눈길로 바바라 선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상갑판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존재는 보타 갑판장에게도 마찬가지의
공포를 끼치고 있었기에 보타 갑판장은 어쩔 수 없이 바바라 선장을
믿는다는 몸짓을 해보였다.
바바라 선장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주승강계단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해적들은 각자의 무기를 든 채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그 뒤를 따랐다. 승강계단을 올라선 바바라 선장은 잠시
멈춰서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계단 아래쪽에서는 해적들의 얼굴이 가
득 모인 채 어서 올라가라는 표정을 보내오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바바라 선장은 부적을 왼손에 꼭 쥔 채 오른손으로는 검을 뽑아들었
다. 그러자 문을 열 손이 없었다. 바바라 선장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다리를 뒤로 당겼다.
"이야아아아!"
바바라 선장은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찼다. 그리고는 그대로 뒤로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계단을 데굴데굴 구른 바바라 선장은 긴장된 자세로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해적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해적들은 비명
을 지르거나 욕설을 내뱉으며 서로 뒤엉켜 쓰러졌다.
"우아아아! 뭐, 뭐야앗!"
"바바라, 너 이 당나귀 새끼 같으니!"
"어, 어떤 놈이, 으헉! 내 다리! 문을 잠군 거야! 이익, 눈알을 파버
리겠다!"
"선장님이, 으윽! 아까 자, 잠그라고 했잖아요!"
"내가 나가기 전에 열어놨어야 되잖아!"
해적들은 헐떡이고, 욕설을 내뱉고, 서로의 머리를 짓누르고, 팔꿈
치로 옆사람의 눈두덩이를 가격하기까지 했지만, 일어나지는 못했다.
위에서 떨어졌다는 이유로 가장 먼저 일어난 바바라 선장은 빨리 비켜
나라는 선원들의 고함소리에 허둥지둥 옆으로 비켜났다. 황급히 일어
난 바바라 선장은 조금 떨어져있었기에 쓰러지지 않았던 보타 갑판장
이 자신의 바로 앞쪽에 서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보타 갑판장은 경멸어린 눈으로 바바라 선장을 바라보고 있지
는 않았다. 그의 시선은 위로 한껏 쳐들려있었다. 바바라 선장은 의아
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리고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주승강구의 문이 열려있었다. 바바라 선장이 걷어차는 바람에 빗장이
박살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푸른 하늘을 등진 채 시커멓게 보
이는 사내가 해적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내의 다리가 움직였다. 뚜벅뚜벅. 사내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뒤엉켜 버둥거리고 있던 해적들은 숨소리마저 멈춘 채, 그
러나 지금보다 훨씬 격렬한 동작으로 일어나려고 애썼다. 그와 동시
에 해적들은 계단에서 멀어지려고 버둥거렸다. 조용하면서도 격렬한
소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사내의 발자국 소리만이 중갑판 전체로 울려
퍼졌다. 뚜벅뚜벅.
바바라 선장은 무엇인가가 자신의 등을 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
다. 그러나 사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바바라 선장은 고개를 돌리
지 못했다. 그의 귓가로 보타 갑판장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요!"
보타 갑판장의 목소리는 낮고도 사나웠다. 바바라 선장은 침을 꿀꺽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이고 부적을 움켜쥐고 다리도 좀 떨었지만,
그러나 앞으로 걸어가지는 못했다. 그 동안 일어난 해적들은 모두 바
바라 선장의 뒤쪽으로 도망쳐 그의 등 뒤에 숨으려 애썼다. 그래서 다
가오는 사내와 바바라 선장의 사이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보타 갑
판장은 이제 나이프를 뽑아 바바라 선장의 등을 찔러버리고 싶다는 투
로 말했다.
"서, 선장님! 부적, 부적을 내밀어요!"
"다, 닥쳐! 내가 알아서 한다. 부, 부적을 내밀어서 저 녀석을 화나
게 하면 어쩔 거야?"
보타 갑판장은 그 말에 대해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 때 사내가 멈춰
섰기에 보타의 말은 목구멍에 걸려버렸다. 멈춰선 사내는 물끄러미 바
바라 선장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피식 웃었다.
바바라 선장이 조금 뚱뚱한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의 등 뒤
에 수십 명의 해적들이 숨을 수야 없다. 하지만 해적들은 그들 모두가
바바라 선장의 등 뒤에 숨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서로를 밀어대며
선장의 등 뒤에 숨으려 애쓰고 있었다. 사내는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
밖에 지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웃음을 보던 바바라 선장은 이제 최
후의 순간이라고 판단해버렸다. 그래서 바바라 선장은 발작적으로 부
적을 들어올렸다. 팔을 너무 세차게 내미는 바람에 하마터면 부적을
놓칠 뻔했지만 바바라 선장은 다급하게 부적을 움켜쥐며 말했다.
"무, 물러가라! 잡스런 귀신은 물러가라!"
사내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바라 선장을 바라보다가 그의 손
에 쥐어진 부적을 쳐다보았다.
"그건 뭐요? 부적?"
바바라 선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그래! 이건 부적이다. 유,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이름으로, 잡귀
는 물러가라!"
보타 갑판장을 위시한 해적 전원들은 경외감에 가까운 감정으로 바바
라 선장의 등을 바라보았다. 우리 선장님이 저렇게 유식할 수가! 야,
그런데 헬카네스가 누구냐? 그 친구 싸움 잘해?
사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귀신이 아니오. 당신이 나를 구했잖습니까?"
"그, 그래. 아니, 그랬었지. 하, 하지만……"
"하지만?"
바바라는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빌어먹을, 넌
뒈졌단 말이다! 구해내긴 했지. 하지만 넌 결국 뒈졌고 내가 바다에
던졌어. 그런데 왜? 왜 귀신이 되어 이 배에 기어올라온 거야. 난 할
거 다 해줬는데 왜 찾아온 거야! 왜 나를 찾아와, 네가 복수해야 할
것은……
"왜 블루 드래곤에게 가지 않고 우리 배에 온 거요!"
바바라 선장은 몸을 돌려 보타 갑판장에게 입이라도 맞춰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블루 드
래곤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사내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졌다.
"지골레이드…… 지골레이드! 으아아아!"
사내는 미친 듯이 외쳤다. 바바라는 황급히 물러나려 했지만 그의 등
뒤에는 수많은 해적들이 몰려서있었기에 조금도 물러날 수 없었다. 그
래서 바바라 선장은 지독한 공포에 빠진 채로 사내의 광분을 마주보아
야 했다.
"지골레이드! 복수!"
"놈은 어디 있나."
졸란 정화대장 사라스는 이를 악물고는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을 둘러싼 시민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광장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라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
이 광장 중앙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내 생애에 이렇게 많은 시선들을
한꺼번에 받은 것은 이게 처음인 것 같군. 그러나 광장 중앙에 서있
는 또 하나의 사내는 시민들의 시선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는 다
시 사라스를 향해 질문했다.
"사라스, 대답해! 놈은 어디 있나?"
사라스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경의를 그대에게…… 신차이 선장을 찾으시는 겁니까."
"선장? 미치광이 살인마를 찾을 뿐이다. 감히 나에게 검을 겨눌 생각
까지 했다니. 놈이 저지르는 해악은 이제 더이상 용납할 수 없다. 어
디 있나!"
사라스는 이마를 닦았다. 진득한 땀이 손바닥에 묻어났다.
"그가 당신을 공격한 것을 알고 있습니까?"
"뭐야?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사라스?"
"예. 그는 당신을 공격했지요. 저도 압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
죠?"
"사라스!"
상대방은 어이없다는 감정을 넘어서서 분노가 어린 말투로 외쳤다.
사라스 역시 자신의 화법이 머저리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사라스는 정화대원들에게 살짝
눈짓을 보내고는 상대방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예. 그건 신차이 선장도 알고 나도 알고 이 주위에 있는 시민들 모
두 잘 아는 사실입니다. 결투했죠.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래
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뭐라고?"
"그 결투 말씀입니다만,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뭐? 그야 그가 날 쳐서……"
사내의 입은 열려진 그대로였으나 더이상 말은 나오지 않았다. 사라
스는 몸을 조금 낮추며 느리게, 그러나 재촉하는 어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건 수많은 무술 사범들이나 명가의 수장들이 감탄을
표했던 결투였습니다. 강완도 그런 강완은 없을 것이오, 신속에 있어
서는 비유할 바를 찾기도 어려웠던 멋진 한 수였습니다. 신차이 발탄
은 당신과의 결투 끝에…… 당신을 죽였죠. 베이론 코다슈."
베이론은 꼼짝도 하지 않았으나 팔치온을 쥔 그의 손은 심하게 흔들
리고 있었다. 사라스는 메마른 입술을 한번 핥고나서는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말했다. 감히 그 말을 꺼내기 어렵다는 듯이.
"당신은 죽었습니다. 코다슈의 불길은 꺼졌습니다. 그렇잖습니까, 베
이론 코다슈? 그런데, 그렇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신은 누구입니
까?"
사라스가 나직하고 간곡한 어투로 보내었던 질문은 끔찍한 비명소리
로 되돌아왔다.
"끄아아아아!"
"덥쳐!"
정화대원들 역시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갔고 "우우와아악!" 졸
란의 정화대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그런 볼쌍사나운 모습을 보면서도
사라스는 꾸중을 내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장 커다란 비
명을 지르며 베이론에게 달려든 것은 바로 사라스 본인이었던 것이다.
절망의 색깔은 암흑. 암흑의 비릿한 냄새는 지겨워.
하얀 백색의 공포가 다가올 때, 가장 뜨거운 침묵으로 노래한다.
팔이 어깨 속으로, 어깨가 다시 가슴 속으로 말려들 것 같은
차가움 차가움 차가움 차가움 차가움 차가움.
할슈타일 후작은 눈을 떴다.
소리없는 아우성들이 후작의 시각을 무자비하게 유린했다. 얼굴들,
표정들, 감정들, 찌르지마. 찌르지마. 그런 눈빛으로 찌르지마. 너무
아파. 제기랄. 내 눈이 어떻게 된 거지? 내 눈이 '듣고' 있어. 내 눈
이 '만지고' 있어.
쩡 하는 이명. 귀가 열린 것 같다.
삽시간에 끔찍하도록 많은 소리들이 '보였다.' 할슈타일 후작은 귀를
틀어막았다. 귀를 틀어막는 손바닥의 색깔은 붉었다. 태양 때문이다.
할슈타일 후작의 입술이 열렸다.
"아아아…… 아아…… 아아아아!"
찌르지마, 태우지마, 시끄러워! 이 피냄새는 너무 예리해, 그 소리들
은 너무 뜨거워, 그런 색깔들은 너무 시끄러워!
"아아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
덜그렁. 쥬블킨의 손아귀에서 포챠드가 떨어졌다. 그의 동공은 그대
로 튀어나올 것처럼 팽창했다. 쥬블킨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면서도
할슈타일 후작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죽지…… 않아?"
계단 아래에 있던 궤헤른은 덜덜 떨리는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분명히 보았다. 쥬블킨이 내지른 포챠드가 후작의 복부를 거의 관통했
었다. 상처에서 뿜어져나온 피는 지독하게 붉었다. 그 냄새는 아직까
지도 그의 코 안에 남아있었다. 쓰러지는 후작을 보며 니크가 내지른
비명소리도 아직까지 그의 귀 안을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런데 후작이 일어난 것이다.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궤헤른은 무력하게 몸을
돌렸고 흥분으로 시뻘겋게 변한 니크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니크의
두 볼은 그대로 터질 것 같았다.
"살아계세요! 죽지 않으셨어요!"
"응? 어어, 니, 니크. 그래…… 응?"
"이런 우라지게 좋은! 후작님이 죽지 않으셨어요! 급소를 피했나 봐
요. 이 개 같은 콜리의 프리스트 같으니, 뒈져라! 네놈의 손으로 우리
후작님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 같아? 보세요! 집사님! 보시라고요!
일어나고 계세요!"
니크는 궤헤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면서도 눈으로는 계속해서 할슈
타일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궤헤른은 니크가 흔드는대로 흔들리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어떻게든 정리해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사고는 갈피를 잃었고 그의 이성은 헤집어놓은 흙탕물 마냥 한층 더한
혼란 속으로만 계속 빠져들었다.
운차이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계단 위의 후작을 응시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이제 똑바로 일어섰다. 하지만 두 눈은 꼭 감겨있었고 두 손은
자신의 귀를 단단히 틀어막고 있었다. 그런 자세로 후작은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죽었을 텐데, 어떻게 죽지 않는
거지? 웅 하는 이명이 운차이의 귓속을 가득 채웠다. 이해할 수 없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 때 운차이의 귀를 가득 메운 이명들 사이
로 나직한 목소리 하나가 흘러들어왔다.
"요즘 유행하는 이야기 하나 들려드릴까요?"
운차이는 고개를 홱 돌렸다. 제레인트였다. 제레인트는 똑바로 서서
는 오른손에 쥔 디바인 마크를 가슴에 붙인 채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래서 운차이는 제레인트의 귀를 바라보게 되
었다.
"끝난 두루마리가 다시 펼쳐지고 이야기는 새롭게 시작된답니다."
"제레인트……?"
"후작의 두루마리도 그렇군요. 후작의 일대기의 맨 마지막 장면은 이
랬어요. 쓸쓸하고 차가운 북부의 도시에서 한 광신도에게 찔려죽다.
그리고 끝. 그런데 말입니다. 후작에게 새로운 두루마리가 배당되었답
니다. 어쩌겠어요. 비장한 죽음 장면을 바꿔야지요. 할슈타일 후작,
다시 살아남."
운차이는 소스라치는 기분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히죽 웃었다. 그는 몸을 조금 돌려서는 파하스에게 경의어린 동작으로
허리를 굽혀보였다.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파하스를 향해
제레인트는 나직하게 말했다.
"데스나이트도 살아나고, 솔로쳐도 살아나고, 거인도 살아나고, 파하
스 님도 살아났지요."
파하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돌려 다시 후작을 바
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너무 이상하게 바
라보지는 말아요, 운차이."
"그럼 후작도……"
"후작도 살아났습니다. 안 죽은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나버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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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2월은 사용자 입장에서는 신경질 나고 노동자 입장에서는 신나
는 달이라더군요. 일 적게 해도 월급은 똑같이 나오니.
그 말을 듣고 달력을 보니 어느새 2월 말… 시간이 참 겁나게 흘러갑
니다. 여러분들 모두 기쁜 월말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6288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21 01:37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5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5.
"네가 누구냐고?"
아일페사스는 싱긋 웃었다. 그녀는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으며
상체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래. 저는 누구냐고 물었어. 말해보려무나, 귀여운 거인아."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가 사용하는 어휘들에 대해 상당한 교정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물론 지금까지도 계속 느껴왔던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이나 절실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살아난다면 기어코 아일페사
스의 어학 능력부터 손봐주리라. 그리고 아프나이델의 그런 결심과 똑
같은 결심이 엑셀핸드의 마음 속에서는 수십 배 증폭되고 보다 폭력적
으로 바뀐 형태로 맴돌고 있었다.
거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아일페사스를 내려다보다가 팔짱을 꼈다. 거
인을 올려다보던 엑셀핸드는 푸른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이 그의 정수
리에 걸릴 것 같다는 착각을 계속 느꼈다. 그런 압도적인 높이에서 거
인은 근엄하게 말했다.
"너는 인간 계집애잖아."
바로 그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아일페사스는 거인의 말이 끝나자
마자 펄쩍 뛰었다.
"까르르륵! 틀렸어요! 틀렸어!"
거인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뭐라고? 틀리다니. 그럼 네가 무엇이란 말이냐!"
"너 까무라치지 말아요? 제가 누구냐면 말이야."
아일페사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두 손을 허리에 얹었다. 그리고는
상체를 있는대로 젖혀서 거인에게 턱을 보여주려 애쓰면서 말했다.
"저는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의 이름을 계승
하는 자,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두번째 목소리이자 드래곤들의 첫번째
목소리, 드래곤의 별의 보호자, 알겠니? 저는 드래곤 로드의 딸 아일
페사스다!"
거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덴산의 거인은 하나뿐인 눈을 커
다랗게 뜬 채 아일페사스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후, 거인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뭔데?"
일행들 중 정신적으로 엉덩방아를 찧지 않은 자는 이루릴 뿐이었다.
에델린과 엑셀핸드,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각 종족을 대표해서 트롤과
드워프, 인간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황당함을 표현하는지를 여실
히 나타내어보였다. 아일페사스의 경우, 그녀는 코를 크게 벌름거리며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야, 이 멍청한 거인이시여! 너는 너무 멍청해요! 제가 누군지 말했
잖아! 얼간아! 바보야! 저는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의 이름을 계승하는 자,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두번째 목소리이자
드래곤들의 첫번째 목소리, 드래곤의 별의 보호자란 말이야! 말해줬잖
아요! 이해력이 떨어지면 노력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거인 역시 짜증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는 말이다!"
사방이 트인 황야였지만 거인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울려퍼졌다.
머리를 홰홰 휘젖던 에델린은 그 메아리가 자신의 귓속에서 울리는 것
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 위압적인 고함소리도 아일페사스를 주눅
들게 하지는 못했다. 아일페사스는 저렇게 우둔한 녀석은 처음 보겠다
는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뭐? 이이이익! 저는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
의 이름을……"
그 때 이루릴이 팔을 들어올렸다. 거인은 이루릴을 내려다보았지만
아일페사스는 이루릴이 물구나무를 선 채 발로 박수를 치며 돌고래 울
음소리를 낸다 해도 자신이 할 말은 끝까지 하겠다는 결연한 태도로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 때 아프나이델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입을 틀
어막았다.
"웁! 웁!"
"조용히 있어, 제발!"
아프나이델의 조력에 힘입어 간신히 고요를 얻은 이루릴은 그녀다운
태도로 말했다.
"거인이여. 그녀는 드래곤입니다."
그덴산의 거인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튀어
나올 정도로 커진 눈으로 거인은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거인은 상체를 앞으로 굽혔다. 휘익. 거대한 거인의 몸이 움
직이며 그림자가 머리 위를 덥치자 엑셀핸드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
을 느꼈다. 거인은 상체를 숙여 아프나이델의 품에 안겨있는 아일페사
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행들로서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
대한 거인의 얼굴이 땅까지 내려온 채 그들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델린은 동굴 같은 거인의 콧구멍을 보고는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상체를 숙이는 것만으로도 일행들에게 폐소공포증 비슷한 것
을 선사하던 거인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람인데?"
이루릴은 생긋 웃었고 아프나이델은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
을 느꼈다. 이루릴은 그런 아프나이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일페사스를 놓아주세요."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의 입을 열었다. 막혔던 봇물이 터지는 것처
럼 아일페사스의 입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니까 저는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의 이
름을 계승하는 자,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두번째 목소리이자 드래곤들
의 첫번째 목소리, 드래곤의 별의 보호자인 아일페사스란 말이야!"
아일페사스를 놓아주었던 아프나이델은 재빨리 몸을 돌려 이번에는
엑셀핸드를 끌어안아야 했다.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에게 안긴 채 저
멍청한 드래곤 로드의 여식의 머리를 두드려서라도 개선하겠다는 식의
폭언을 퍼부어대었다. 차분한 태도로 아일페사스의 말이 끝나기를 기
다리던 이루릴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 조용히 말했다.
"아일페사스. 원래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하셔서 거인의 의혹을 풀어드
리세요."
"응? 아아. 그렇구나! 잘봐요, 이 우둔한 거인아!"
거인은 크게 씨근거렸지만 남아있는 의혹은 그의 손을 멈추게 만들었
다. 혹시나 정말 드래곤 로드의 딸이라면? 그래서 거인은 아일페사스
를 눌러죽이지는 않았다. 자신이 어느 정도의 위험 속에 있는지를 도
통 파악하지 못한 아일페사스는 똑바로 서서는 그덴산의 거인을 올려
다보았다.
"자! 이것이 저의 정체에요! 야하아아압!"
거인은 그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차츰, 그의 마음 속에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물결
치기 시작했다. 거인의 조악한 어휘 수준으로는 그의 감정을 정리할
단어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거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광경은 그대로였다. 거인은 입술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게 너의 정체냐?"
아일페사스는 씩 웃었다.
"그렇다! ……엥?"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을 내려다
보았다. 작고 앙징스러운 두 개의 발이 사이좋게 서있었다. 그리고 그
위의 다리와 아랫배, 가슴까지를 주욱 바라본 아일페사스는 손을 들어
올렸다.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펴졌다 오므려졌다 하고 있었다. 사람의
손가락은 이상해. 너무 약해 보여. 아일페사스는 갑자기 인간에 대한
동정심을 느꼈다. 문득, 그녀의 정수리를 쏘아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
졌다.
고개를 숙인 채로 아일페사스는 눈을 치켜떠 거인의 얼굴을 훔쳐보았
다. 그곳에서는 볼을 크게 실룩거리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인의
얼굴이 있었다.
"오, 오…… 오아앙…… 그러니까 말이야…… 이, 이건 실수에요! 야
하아아압!"
"잠깐만, 잠깐만. 이상하다? 자, 다시. 야하아아압!"
"너무 놀라지 않도록 주의해요. 이이이야압! 하이오오옵! 후압! 얍얍
얍!"
"너 지금 제가 거짓말 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거인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아니."
"뭐? 그럼 믿는 거야! 좋아요! 그래! 믿는군요!"
아일페사스는 깡총깡총 뛰며 좋아했다. 하지만 거인의 고개는 좌우로
움직였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내가 수수께끼 놀이에서 이겼다는 것이
다."
거인은 자신이 상당히 위트있는 말을 했다고 믿으며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끈한 아일페사스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자신이 드래
곤이라고 주장했지만 거인은 정신 이상한 인간 계집애에게는 별로 신
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얼굴을 퍼렇게 물들인 채로 아일
페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 때 그가 묻
고 싶던 것을 에델린이 질문했다.
"아일페사스, 아일페사스. 어떻게 된 거에요. 폴리모프할 수 없는 건
가요?"
"뭐? 어, 그래. 저 폴리모프가 안돼. 이상해요…… 이이이! 왜 안되
는 거야!"
"긴장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정신을 집중해서 다시 해보면 어떨까
요?"
"이이익! 새가 긴장한다고 추락사하니? 물고기가 긴장한다고 익사하
니? 린, 왜 그렇게 멍청한 말을 해요!"
"그, 그래요? 그럼…… 그럼 왜 안되는 건가요?"
"몰라!"
엑셀핸드 역시 불안한 눈으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지만 그가 질문
한 대상은 아프나이델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봐, 아프나이델.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모르겠습니다. 왜 변신이 안되는 건지…… 변신이…… 변화가?"
아프나이델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켄턴 방향으로 돌아갔다.
변화가 안된다고?
현실이 고정되었다고?
아프나이델은 목 뒤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설마 그건가?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 무서운 상황을 추리하던 그의 귓가에 거인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너희들은 졌다! 이제 말하라!"
누구 저 멍청한 거인 녀석의 입 좀 막아줄 사람 없나! 아프나이델은
허옇게 뒤집어진 눈으로 거인을 흘겨보고는 다시 켄턴을 바라보았다.
섬뜩함을 느낀 거인은 목소리를 조금 낮춰서 말했다.
"어, 이봐. 너희들이 졌단 말이다. 그러니 약속한대로 루트에리노의
소재를……"
"이 새대가리 같은 거인아! 입 좀 다물고 있어. 생각 좀 하자!"
엑셀핸드는 눈 앞이 노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이 공포 때
문에 미쳐버렸구나. 내가 거인에게 대신 사과할까? 그 때 아프나이델
은 들고있던 로드를 내동댕이치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변화가 없어? 변화가 안된다고? 고정되었다고? 제레인트! 제레인트!
갈림길을 잘못 선택한 거요?"
올바른 선택을 하라는 목적으로 제레인트를 먼저 턴빌로 보내었던
아프나이델은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잘못 선택한 것일
까? 아니면 너무 늦었던 것일까? 아니, 잠깐만. 아직은 모른다. 이것
은 시간이 느려지는 현상 때문에 발생한 한 증상일지도 모른다. 어쩌
면 아직 기회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
턴빌로 가야 한다. 아프나이델은 자신의 결심에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턴빌로 가야 한다. 어쩌면 제레인트 혼자서는 역부족일지도 몰
라.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일지도 몰라. 어서 턴빌로 가야 해. 그런데
그러려면 문제가 되는 것이 있군. 그것도 자그마치 100 큐빗짜리 문제
로군. 그러면 어떻게 한다?
아프나이델은 재빨리 로드를 들어올리고는 자신의 말 세레니얼의 고
삐를 움켜쥐었다. 거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아프
나이델이 먼저 외쳤다.
"나를 따라와! 루트에리노의 소재를 알려주겠다!"
거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행들 사이에서는 빠른 속도로 시선이
교환되었다. 하지만 엑셀핸드에서 아일페사스, 그리고 에델린으로 빠
르게 전달되던 시선은 이루릴에게 이르러 멈춰졌다. 에델린은 가슴 속
이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끼며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 양……?"
이루릴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에델린을 보고 있었다. 에델
린은 불경스럽게도 신의 이름을 빌려 욕설을 퍼붓고 싶은 충동을 느꼈
다. 오오, 맙소사! 엘프에게 이것이 사기라는 것을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
이루릴은 의아한 표정으로 에델린을 보며 말했다.
"에델린. 뭐하시나요? 어서 말에 타시죠."
꽝! 에델린은 뭔가가 자신의 머리를 후려치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엑셀핸드와 아프나이델도 마찬가지였다. 에델린이 뭔가 할 말
을 찾기 위해 입을 뻐끔거리고 있을 때 이루릴은 차분하게 엑셀핸드가
아프나이델의 등 뒤에 타는 것을 도와주며 말했다.
"대왕도 부활하신 줄은 몰랐군요. 뵙고 싶네요. 어서 가볼까요."
에델린은 간신히 졸도하지 않고 코스모스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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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부활하고 누구는 부활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좀
받는군요. 전개에 관련된 것이니만큼 기다려주십사는 대답밖에 드리지
못하겠군요.
번 호 : 16289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21 01:38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6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6.
네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알던 제레인트가 아니었다. 잠시
동안 네리아는 할슈타일 후작의 부활마저도 잊은 채 제레인트를 바라
보았다. 왜 저렇게 슬픈 어조로 말하는 거지? 포기하는 것 같은, 뭐라
고 하더라.
"왜 그렇게 무력감에 젖어 말하는가."
아, 그래! 그거였어. 네리아는 운차이를 바라보았고 제레인트 역시
운차이를 돌아보았다.
"예?"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 급한 것은 할슈타일 후작과, 그리고
쥬블킨의 문제였다.
쥬블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
다. 모든 이성적 사고를 뛰어넘어 순수한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다. 후
작을 찔렀을 때 그는 이 세상의 모든 확실한 진리를 뛰어넘는 확실함
으로 후작의 죽음을 느꼈다. 그것은 살해의 감각이다. 그런데 후작은
쥬블킨이 느꼈던 감각을 배신하며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답이 뭐야!"
천둥 같은 목소리. 쥬블킨은 얼빠진 얼굴을 돌려 계단 아래를 바라보
았다. 콜리의 프리스트들 역시 얼굴 가득한 공포로 그를 마주보고 있
었다. 그리고 그 너머 후작의 전사들, 그리고 그 뒤. 아까부터 저런
식으로 고함을 질러대던 녀석.
운차이는 다시 외쳤다.
"말햇! 여덟번째 희생자는 죽었다. 되살아났건 어쨌건 죽은 건 죽은
거야! 그럼 아홉번째 정답이 드러나야 한다. 아홉번째 정답은 뭐야!"
쥬블킨은 되살아난다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버렸기에 그 뒤의 말에
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되살아났다고? 그렇군! 되살아난 것
이군. 죽지 않는 것이 아니야! 인식은 공포를 몰아내고 쥬블킨의 경직
은 빠르게 사라졌다. 쥬블킨은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았
다. 쥬블킨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억세게 재수좋은 녀석. 네놈이 바로……
숨막히는 표정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저 역시 운차
이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이마를 딱 소리나게 쳤다. 맞았어! 그덴
산의 거인은 되살아났지. 이 문제 때문에. 그렇다면 저 남자도 되살아
난 것인가.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이 말하는 바는 무엇이지? 순간 레이
저는 심장이 떨어지는 충격을 느꼈다.
나크둠도 되살아날 수 있는가?
죽은 녀석들이 살아난다면, 그렇다면 나크둠도 되살아날 수 있는 것
인가? 제기랄, 말이 돼! 나크둠이 되살아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이
웃기는 사태들을 보라고. 방금 복부를 관통당했던 녀석이 멀쩡하게 살
아났어.
하지만 나크둠은 깊은 동굴 안에 갇혀있어. 오오, 이런 가져다붙일
욕도 없는 지독한! 레이저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쥬블킨을 바라보았
다.
"이봐! 죽은 녀석들은 다 살아나는 거요? 말해!"
"뭐라고?"
루손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이저는
쥬블킨만을 바라보며 외쳤다.
"말하라고! 죽은 자들은 모두 부활하는 거요? 거인도 부활했어. 파하
스도 부활했어. 신스라이프도 부활했다고! 그렇다면…… 죽었던 모든
자들은 부활할 수 있는 거요?"
이 소란과 공포스러운 장면들을 보면서도 아직까지도 달아나지 않고
남아있던 시민들 사이에서 뜨거운 바람 같은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
되살아난다고? 죽은 자들이? 죽은 내 어머니가, 죽은 내 남편이, 죽은
내 딸이 되살아난다고?
군중들은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계단 쪽을 향해 걸어
오기 시작했다.
운차이는 흠칫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껏 공포 때문에 멀찌감
치 물러나려고 애쓰던 군중들이 갑자기 주위를 좁혀오기 시작한 것이
다. 군중들은 아직까지도 하늘에 떠있는 신스라이프와 이상한 마법사,
그리고 괴상하며 목적을 알 수 없는 여러 일행들에 대해 겁을 집어먹
은 상태였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표정을 지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스스로도 걷는다는 행동을 자각하지 못하는 듯한 멍한 얼굴들이
었지만 운차이의 감각은 위기를 알려오고 있었다.
"이봐, 그란. 사람들이…… 그란? 제기랄!"
손이 늦었다. 그란의 어깨는 앞으로 빠져나갔고 운차이의 손은 허공
을 가로질렀다. 그란 하슬러는 맹렬한 속도로 돌진하고 있었다.
후작의 전사들 중 가이버가 가장 먼저 그란을 발견했다.
"핫소드……!"
꽝! 가이버는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당하고는 니크와 궤헤른을 덥치는
방향으로 나가떨어졌다. 중력과 운동에너지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인간의 비명과 욕설을 만들어내었다. 니크와 궤헤른은 가이버의 몸에
맞아 나가떨어졌고 그란은 그 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뒤늦게 사태를
발견한 네리아가 찢어지는 고함을 질렀다.
"그라아안! 무슨 짓이야!"
그란 하슬러는 아무 말 없이 콜리의 프리스트들 한가운데로 돌진했
다.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주춤거리며 로드를 들어올렸으나 그란은 사
자처럼 외쳤다.
"막으면 죽는다!"
훌륭한 헤게모니아어. 운차이는 속으로 악담을 퍼부으며 그란의 뒤를
따라 달렸다. 하지만 월등히 스타트가 빨랐던 그란은 이미 콜리의 프
리스트들 사이를 무인지경처럼 헤치고 있었다. 담대한 프리스트 하나
가 로드를 앞으로 내밀며 그란을 막아섰다. "멈춰! 뭐……!" 남은 평
생 동안 후회할 결정이었다. 그란은 프리스트의 멱살을 붙잡고는 그대
로 들어올리며 다른 손으론 그의 가랑이를 잡아채었다. "크억!" 그란
은 프리스트의 몸을 방패처럼 앞으로 내밀며 계단을 뛰어올랐다. 콜리
의 프리스트들은 목숨을 걸고 몸을 날려 그란의 돌진을 피했지만 몇몇
운수 사나운 프리스트들은 그의 진로에 서있었다는 이유로 사람에 충
돌하여 하늘을 나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쿠앙, 쾅쾅! 몸과 몸
이 부딪혀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충돌음이 울려퍼지며 성
스러운 프리스트들이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광경을 보며 네리아는 기막
힌 얼굴로 말했다.
"전에도 봤던 거야. 사람 폭풍이잖아?"
단숨에 콜리의 프리스트들 사이를 돌파한 그란은 그 때까지 앞을 가
리는데 사용하던 프리스트를 옆으로 팽개치고는 검을 뽑아들었다. 이
제 그의 앞에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는 쥬블킨과 흐리멍텅한 눈
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할슈타일 후작만이 서있었다. 그란은 칼자루
를 부러져라 움켜쥐며 바이서스어로 외쳤다.
"할슈타일!"
그 때까지도 감각의 혼란을 겪고 있던 할슈타일 후작은 그란의 외침
을 귀로 보고 있었다. 시뻘건 분노의 색깔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선홍색의 불꽃이 폭풍쳤다.
"마가릿 하슬러를 기억하나!"
할슈타일 후작은 기를 쓰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손은 더듬거렸고
발은 맥박치고 있었다. 심장은 쩔뚝거리고 있었고 허파는 주춤거리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고함지르려 했으나 왼쪽 어깨로는 말이 나오
지 않는다는 것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감각의 소용
돌이 가운데로 그란의 분노가 해일처럼 몰아닥쳤다.
"되살아난 것에 감사하겠다. 내 손으로 죽여주마!"
그란은 검을 높이 쳐들었다.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던 후작은 하늘로
높이 쳐들린 그란의 검을 눈으로 들으면서도 아무 짓도 할 수 없었다.
그란의 입술이 크게 뒤틀렸다.
"아아아압!"
"막아, 루소온!"
콰가가각!
계단 아래에 서있던 사람들은 얼떨결에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쇠
와 쇠가 부딪히며 지독한 소음과 함께 눈을 부시게 하는 불꽃이 튀어
오른 것이다. 그러나 운차이는 눈을 감지 않았다. 실눈을 뜬 채 계단
위를 바라보던 운차이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맙소사……"
루손의 글레이브가 후작의 목 바로 앞에서 그란의 롱소드를 막고 있
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많은 영웅들과 수많은 전설을 탄생시킨 대륙
의 검의 역사에서도 처음으로 일어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저건 글레이브의 유난스럽게 넓은 날 때문이다. 그냥 검이었다면 그
란의 힘 때문에 반동강이 나버렸겠지. 그리고 저 글레이브는 연성이
강한, 상당히 질긴 철로 만들어진 것이겠지. 운차이는 애써 상황을 설
명하려 했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상황은 그의 현실감각을 완전히 뒤
흔들어놓고 있었다.
그란의 롱소드는 루손의 글레이브에 직각으로 꽂혀있었다.
마치 빵에 꽂아둔 나이프 같은 꼴이었다. 그란의 매끈한 롱소드는 루
손의 글레이브를 절반쯤 절단한 위치에서 정지해있었다. 그란도 루손
도 그 광경을 보며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굳어있었다.
그러나 그란이 운차이와 같은 상황에 빠져있는 것에 비해볼 때, 즉
무의식 중에 이 상황을 어떻게든 납득해보고자 애쓰고 있는 것에 비해
볼 때 루손은 상황을 설명하고 납득하고 싶은 욕망이 별로 없었다. 그
리고 그런 루손의 성향은 뒤로 당겨진 그녀의 오른쪽 다리를 통해 나
타나고 있었다.
"꺄아아압!"
루손은 걷어찬다기보다는 미는 식으로 그란의 복부를 찼다. 무의식
중에 감행한 행동이었지만 가장 적절한 행동이었다. OPG 를 착용한 그
란을 걷어차서 물러나게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루손은 밀어
버렸고 그란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까드드득! 사람들로 하여금
귀를 틀어막고 싶어지게 만드는 마찰음이 울려퍼지며 그란의 롱소드는
루손의 글레이브에서 뽑혀나왔다. 그란은 뒤로 물러났고 그제서야 루
손은 조금 전부터 간절히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루손은
글레이브를 두 다리 사이에 끼우고는 잠시 두 손을 양쪽 겨드랑이에
낀 채 팔짝팔짝 뛴 것이다.
"아악, 내 손! 손가락이, 손가락이 다 부러졌나봐! 어후후후! 팔이
저려 죽겠네. 우웅, 우우웅! 왜 막으라고 그런 거야!"
거의 취해버린 기분이었지만 레이저는 간신히 앞으로 걸어나올 수 있
었다.
"멈춰…… 요. 당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멈춰요."
그란은 루손을 바라보면서 레이저의 말에 대답했다.
"왜? 마법사."
"난 대답을 듣지 못했으니까. 거기 서! 쥬블킨!"
계단 아래로 내려가려던 쥬블킨은 레이저의 고함소리에 발걸음을 멈
췄다. 레이저는 재빨리 말했다.
"질문은 모두 세 가지요. 죽은 자는 모두 다 부활하는 거요? 아홉번
째 정답은 어디 있지요?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도대체 뭐지?"
쥬블킨의 입술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그 중 하나만 가르쳐 주지. 첫번째 것. 모두 다 부활하
는 것은 아냐. 그리고 더 이상의 부활도 없을 것이다."
"뭐?"
쥬블킨의 입술이 이젠 분명한 비웃음을 띄고 있었다.
"저 자에게 정말 콜리의 축복이 있었던 모양이군. 어떤 행운의 이름
이 저 자를 설명할까. 하하하. 나도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하
지만 짐작하는 바는 있지…… 정정하겠어. 두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해줄 수 있을 것 같군."
두번째 질문? 그게 뭐더라? 아, 그렇지. 아홉번째의 정답. 그게 어디
있는데? 쥬블킨은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그는 손을 들어올리며 외쳤
다.
"형제들이여! 그 자를 보호하라!"
레이저와 루손, 그리고 그란도 황급히 몸을 돌렸다. 쥬블킨이 가리키
고 있는 곳은 땅에 뚫린 구멍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구멍
옆에는 한 사람이 서있었다. 그 사람은 처연한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쥬블킨은 두 팔을 위로 들어올리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드디어 정답이 나왔다!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
그 흐름의 교차점! 콜리를 대신하여 너희들의 노고에 감사하마. 형제
들이여. 그 자를 보호하라! 그 자야말로 아홉번째의 정답, 과거를 거
부하는 자, 미래를 거부하는 자! 신스라이프의 희망이다!"
레이저는 눈을 크게 껌뻑거렸다. 맙소사, 저 사람이 그 정답이라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그는 그 자를 알고 있었다. 역시 그
사람을 알고 있던 그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쥬블킨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때 그런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신스라이프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스라이프는 천천히 허공을 걸어 구덩이 옆에 서있던 자에게 다가갔
다. 구덩이 가장자리까지 다가갔을 때 그의 몸은 아까 그랬던 것처럼
다시 허공에서 걸렸다. 신스라이프는 제자리에 멈춰서서는 눈살을 찌
푸렸다. 그러나 그 표정은 길지 않았다. 신스라이프는 똑바로 선 채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허공을 만지듯이 움직였다.
신스라이프는 낮지만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라."
구덩이 옆에 서있던 사람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
았다. 하지만 그 자의 다리는 흐느적거리듯 움직이며 구덩이 쪽을 향
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구덩이의 가장자리, 신스라이프의 바로 앞에
멈춰선 그 사람은 멍한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라."
다리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그 손이 떠오르듯 천천히 올라왔다. 신
스라이프는 초조한 표정으로 그 손을 바라보았다. 둥둥 떠오르던 손은
마침내 신스라이프의 손바닥 바로 앞에 멈춰졌다.
"내 손을 잡아라."
그 사람은 촛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쥬
블킨은 헐떡이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른 콜리의 프리스
트들 역시 숨소리마저 죽인 채 그 손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정적이 가득한 정원 위로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파! 안돼!"
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신호가 된 것처럼 파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아왔다. 파는 바로 앞에 서있는 신스라이프를 바라보
았다. 그 눈에서는 가느다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앞으로 뻗어나간 파의 손이 신스라이프의 손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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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이라고 쓰니 왠지 종말적인 기분이 듭니다만, 단기로 생각해보
니 웃음이 픽 나오는군요. 올해는 단기 4332년입니다. 아무리 봐도 종
말적인 분위기는 나지 않는 숫자지요? 불기로 따지면 2543년이라는 머
리 아픈 숫자가 나옵니다. 역시 종말적인 분위기는 없군요.
숫자의 마력도 재미있군요.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6350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2-22 17:26
제 목 : [F/W] 멸망은 완성의 귀결.....17
Future Walker
7. 멸망은 완성의 귀결…………17.
.유이 던왔켜시비준 를파 터부전 래오 이신자
……고리그 ,유이 인답정 가파 ,유이 민내 을손 가파 .다었없 수 알
는미 만지하 .다안 를과결 저먼 다보인원 .다안 를과결 든모 .다본 를
래미 는커워 처퓨. 다없 수 알 도것 무아 .다없 수 알 .다럽스란혼 이
것 든모 .다았보라바 을만파 와프이라스신 채 한못 지끼느 도것 무아
는미 만지하 .다았핥 을볼 의미 며리거끙끙 은탄달아
.다었꿇 을릎무 는미
쳉은 숨까지 멈춘 채 파를 바라보았다.
파의 손가락들이 굽혀지며 신스라이프의 손과 깎지를 끼는 그 짧은
시간이 쳉에게는 수십년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막아야 해. 왜?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 알게 뭐람?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잘 안되면 또
어때. 수백만분의 1단위로 구분지어진 수백만 개의 시간들을 가로질러
가며 쳉은 상념에 빠졌다. 하지만 그 상념들의 대부분들은, 아니 그
모두는 다음 상념과도, 그 앞의 상념과도 연결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
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느끼고 행하는 망상처
럼. 쳉은 그렇게 수백만 개의 시간들을 무의한 상념들에 낭비하고 있
었다.
'.데는았을 저먼 터부과결 는때 른다 ,데는았않 지렇그 는때 른다
.어있 어되 로꾸거 이것 든모 은금지 .야로꾸거 이것 든모 ……야로꾸
거'
.다된 이답정 의프이라스신 는파 고리그 .다된 게지가 을힘 운라놀
는파 .다한행 을신문 게에파
.다된 이답정 의프이라스신 는파 고리그 .다된 게지가 을힘 운라놀
는파 .다한행 을신문 게에파
……다난떠 을길 .다는않 지이보 가래미
.다한결해 를태사 .다난떠 을길 .다는않 지이보 가래미
.다난만 과쳉 .다한랑사 을쳉 .다한혼결 과쳉
.다한혼결 과쳉 .다한랑사 을쳉 .다난만 을쳉
.다한랑사 를지버아 .다는죽 가지버아 .다프슬
.다프슬 .다는죽 가지버아 .다한랑사 를지버아
.다유비 한능가 때 을있 수 될납용 가유비 한악조 장가 도것그 나러
그 .다깝가 에한회 리라차 은것그 .다되황허 음름이 의포공 서에앞 정
감 는끼느 금지 가미 .다었있 고나어일 서에분부 든모 몸 의녀그 이들
율전 는없 수 을참 .다었떨 을몸온 채 은막어틀 을입 는미
연속적이지 않은 상념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흐름이 두드러졌다. 나
뉘어졌던 시간들이 갑자기 연결되며 쳉은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포착
하여 상념의 시간 속에 결박했다.
쳉은 갑자기 자신이 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파는 누구지? 미의 여동생. 꺽달진 성격이라고 생각되지만 확신할
수 없다. 마음씨 착한 호인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를 따라오며
내가 미를 만나는 것을 방해해왔다. 나는 화를 내지 않았어. 감정결핍
때문에? 아냐. 나에겐 감정이 결핍되어 있기에 파를 처리하는데 장애
물이 되는 감정도 없다. 나는 아무런 죄책감이나 감정의 얼룩 같은 것
을 느끼지 않은 채 파를 강제로 돌려보낼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
러지 않았어.'
다시 몇천 개의 시간이 흘렀다. 쳉은 신스라이프의 손과 마주 쥔 파
의 손에서 그 얼굴 쪽으로 시선을 옮기기 시작했다.
'너는 누구지? 난 왜 너에 대해 아무 것도 떠올릴 수가 없지? 미와
만났을 때부터니까 12년 동안 너를 알아왔어. 물론 일년에 며칠씩밖에
만나지 못했지. 그것 때문인가? 그래서 나는 너에 대해 아무 것도 떠
올릴 수 없는 건가? 아냐. 그렇다면 미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나는 미
에 대해서라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감정결핍 때문에? 내 감정은 미
에게만 돌아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래도 이상해. 너
는 누구지?'
몇백 개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쳉의 시선이 파의 볼에 도달했다.
'양털을 깎던 파. 안장을 들어올리던 파. 아달탄을 걷어차던 파. 취
한 채 덤벼드는 주정꾼 네 명을 맨손으로 모두 거꾸러뜨리던 파. 시체
를 보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리던 파. 사이들랜드의 대초원의 가장
어두운 밤, 내 볼을 쓰다듬던 파. 너는 누구지?'
?지거 난어일 이일 런그 터부서게에너 왜
.다었이동행 첫 의미 한행 채 한못 지알 를래미 즉 ,동행 된치일 이
간시 의동행 와고사 은것그
'?까을었주해 을신문 게에파 는미 왜 데런그'
.다었이동행 한미의무 은신문 한행 가미 서라따 .다었이뿐 을있 가래
미 는죽 려걸 에트스페 후 은잃 두모 을족가 는게에파 .다었없 이적
한용사 을힘 의신문 그 는파 서에래미 는보 가녀그 ?까을았않 지하각
생 고다하상이 왜 ?까을랬그 왜 .다었주해 을신문 게에파 는녀그
.다었루이 를치일 로으음처 서어있 게에파 이것그 데런그
.다된현구 서에속 치일불 런그 는미 의서로커워처퓨 고리그 .다는않
는지끼느 을음졸 고알 을것 될 게자잠 시역 녀그 만지하 .다났만 을쳉
고알 을것 될 게하랑사 을쳉 는녀그 .을것 는다었있 고하치일불 해의
에간시 는르흐 로으향방 른다 로서 이몸 의녀그 와고사 의녀그 .다었
있 고알 에중 식의무 는미
'.어었이향방 은같 과람사 른다 는체자 간시 그 는가러흘 려실 이몸
의미 ,만지였로꾸거 는고사 의미'
.다었이동행 의녀그 은웃비 을신자 에중 식의무 은것 인툽 게에개 을
음이 의들아 할못 지보아안 .다했못 지하식인 는로으적식의 도어적
.다했못 직하식인 을것그 는녀그 에기였들아받 고다한연당 을것그 고
리그 .다였녀그 은것 난만 을인원 고알 를과결 .다였녀그 은것 온아살
로꾸거
.다랐놀 게치라스소 는미
신스라이프의 손을 마주쥔 채, 파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신스라이
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신스라이프는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다른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다른 손도 들거라."
파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축 늘어져있던 손이 힘없이 올라가며 신스
라이프의 손을 마주 쥐었다. 그렇게 두 남녀는 두 손을 깍지낀 채 서
로를 바라보았다. 레이저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떻
게 해야 되지? 왜 저 여자야? 파 L. 그라시엘. 당신은 어떤 여자였기
에? 싸움 잘하고 도톰한 입술이 달빛 아래에서는 놀랍도록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 이외에 당신은 또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때 레이저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사람이 있었다.
어깨가 거의 부서지는 느낌을 받으며 레이저는 뒤를 돌아보기에 앞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 그러나 그 비명을 억누르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마법사…… 공격해!"
레이저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멍한 표정으로 신스라
이프와 파를 바라보고 있던 그란 역시 창백해진 얼굴을 뒤로 돌려 할
슈타일 후작을 바라보았다. 할슈타일 후작은 얼굴 근육 전체를 푸들거
리며 힘겹게 말했다.
"공격해. 공격……해! 저 놈을…… 죽여. 저것을 마, 막!"
"할슈타일!"
그란은 짓씹듯이 외치며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할슈타일 후
작이 취한 것처럼 흔드는 손을 보고서는 잠시 멈추었다. 후작은 힘들
게, 어마어마하게 힘들게 손을 움직였다. 그의 감각에서 지금 할슈타
일 후작은 왼쪽 허리를 경직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자신의 모든 감각에 대해 저주를 퍼부으며 오른쪽 정강이를 앞뒤로 움
직였다. 즉, 말을 했다.
"저, 저 놈을 공……격. 마법……사. 제발! 이유는…… 천천히……
나를 믿고! 그란…… 제발……"
"네놈을 믿으라고?"
그란은 어이없다는 투로 말하고는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이 놈의 미
친 소리를 더이상 듣고 있을 수는 없다. 저 송장 녀석이 부활하든 말
든, 저 여자가 살아난 송장의 손을 쥐든 말든 나는 네 녀석의 목을 따
야겠어. 그란은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할슈타일. 이건 살인이 아니다, 박멸이다!"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치며 그란은 검을 내리쳤다. 그러나 롱소드의
날이 후작의 목에 닿기 직전, 그의 어깨는 무서운 경련을 일으키며 팔
을 정지시켰다. 후작의 목에 칼날을 댄 채, 그란은 불가사의한 장면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후작의 눈에 죄책감이 떠올라 있었다.
절대로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잘못 보았다고 치부해버리기에는, 그래
서 그대로 검을 당겨 후작의 목을 쳐버리기에는 그 감정은 너무 역력
했다. 그란은 무의식 중에 말했다.
"뭐지?"
턱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할슈타일 후작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애
타게 말했다.
"미……안. 미안해……"
그란은 번갯불로 뒤통수를 강타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뭐라고?"
"미안하다…… 마가릿의 일…… 미안. 나를 용서…… 그란. 나의 잘
못이……다."
"그만……"
후작의 입술에서는 침방울이 튀고 불가해하게 뒤틀린 턱은 말보다는
신음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란은 그의 말을 똑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똑바로 알아듣는 자신의 귀를 저
주했다. 후작은 힘겹게 말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 내가 죽어보니…… 이젠……아, 알아……
안다…… 우스운가? 나는 우습……다. 내가 죽은 다, 다음에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 용서를……"
"그만햇! 네놈에게 사과를 받고 싶은 게 아냐!"
그러나 후작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할슈타일 후작이 온힘을 다해
말했을 때 그란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되는 충격을 느꼈다.
"마가릿…… 살아날까?"
그란의 손에서 힘이 주욱 빠져나갔다. 그란은 이제 후작의 목을 겨누
고 있다기보다는 그 어깨에 검을 얹어둔 것 같은 꼴로 서있었다. 그러
나 그와 후작 모두 롱소드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할슈타일 후작은 힘
들게 그란의 눈동자를 '들으며' 말했다.
"너의 아내…… 되살아날……까? 그렇게 생각……하나? 응? 주, 죽은
자들…… 죽은 자들이 되사, 사, 살아난다. 그란, 그란. 너의 아내,
마가릿. 네 딸의 이름…… 에포닌? 에포닌은 어머니를…… 만날 수 있
을까? 그, 그래. 네 아들. 죽은…… 네 아들은?"
"무슨 말을……"
"새, 생각해! 그……란. 죽은 자, 모, 모두 살아나, 살아난다! 네
아, 아……내, 네 아들! 살아날까? 응? 그렇, 그렇게 생각하나? 응?"
그란은 덜덜 떨면서 뭐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혀는 제멋대로 움직
이고 목구멍에서는 바람 새는 소리만이 새어나왔다. 죽은 자들이 되살
아난다. 죽은 자들이 되살아난다?
"나를, 나를 봐. 되살아…… 났어. 부……활했다고! 안, 안…… 안
돼. 그럴 수 없어!"
그란이 지독한 혼란으로 빠져들어가는 것과 반대로, 할슈타일 후작은
말을 계속하며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의 눈
은 보고, 그의 귀는 듣고, 그의 입은 말하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이제 훨씬 능숙하게 말했다.
"그럴 순 없어, 그, 그란! 그래……선 안돼. 마법사, 마법사! 저, 신
스라이…… 공격해. 공격하라고!"
하지만 레이저는 꾸물거렸다. 그것은 평소의 그의 모습과는 퍽이나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그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지만, 그러나 레이저는
공격하지 못했다. 아무 스펠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판단
도 내릴 수 없었다. 그저 눈 앞으로 보이는 공포스러운 광경에서 얼굴
을 돌리지 않는 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신스라이프는 부서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느리고
지독하게 반복적인 노래였다. 그 노래들은 대기보다 무거운 기체처럼
바닥에 깔리는 듯했다. 둔탁하고 둔중한 음정이 불규칙적으로 반복되
면서 오르락내리락했다. 파하스는 혼란스러운 머릿속 한 구석에서 그
노래를, 노래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음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그 노래에 맞춰서 신스라이프가 천천히 부서지고 있었다. 넓
은 옷 아래쪽으로 푸석거리는 가루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머리에서는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떨어져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구덩이 아래로
떨어지기도 전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의 피부가 모닥불에 던져진
종이처럼 바스러지는 것을 보며 네리아는 구역질을 느꼈다.
툭. 끔직스러운 소리가 짧게 퍼지며 로브 아래로 무엇이 떨어졌다.
운차이는 그것이 신스라이프의 오른쪽 정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와스스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무수한 가루와 함께 왼쪽 다리
가 허벅지부터 떨어져내렸다. 그것들은 아득한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갔다.
풍화되고 있다…… 제레인트는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지나친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던 조각상이 마침내 부스러지듯 신스라이프의 몸
은 파편과 먼지, 그리고 부서진 조각들이 되어 부스러졌다. 다리가 없
어지자 점점 빨라지는 붕궤는 마침내 상체에까지 이르렀다. 배와 가슴
은 거의 동시에 부스러지며 조각조각이 되어 떨어졌다. 머리는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먼지가 되었다.
"마, 막아! 막으라고! 이 개 같은 마법사. 막아!"
할슈타일 후작은 울부짖고 있었지만 레이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비틀거리며 걸어가서는 그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란은 그 손의 뜨거움에 흠칫했다.
"그란, 그란! 막아! 멸망은…… 멸망만이……!"
스르륵. 바치고 있던 몸이 먼지가 되면서 신스라이프의 흰 옷은 아래
로 떨어졌다. 소매가 빠져나올 때까지도 그 팔은 부서지지 않고 있었
다. 먼지와 함께 떨어져내린 신스라이프의 옷은 흰 나비처럼 나풀거리
며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다.
이제 파는 신스라이프의 남아있는 두 팔을 쥔 채 서있었다. 돌연 파
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파는 신스라이프의 손가락을 놓았고 그러자 남
아있던 팔들은 먼저 떨어졌던 몸의 조각들과 나풀거리는 옷을 뒤따라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 신스라이프의 몸은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
다.
파는 그러고도 한참 동안 팔을 앞으로 뻗은 채 조용히 서있었다. 콜
리의 프리스트들이 부르는 노래는 그 때까지도 침울한 리듬으로 지겹
게 이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파는 손을 들어올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게 어떤 뜻인지를 알지 못했지만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노래를 멈추
었다.
파는 손을 내리고는 몸을 돌려 쥬블킨을 응시했다.
"너에게 감사한다. 쥬블킨."
신스라이프의 목소리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도 숨쉬지 않았다. 파는, 아니 신스
라이프는 그 정적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란은 헐떡거렸다. 이건 뭐지? 그 때 그란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할슈타일 후작의 손이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그란의 귓가로 할슈타일
후작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멸망은…… 완성의 당연한 귀결인 것을……."
================================================================
이제는 별 이상한 시간에 다 올리는군요. 하하.
뒤에서부터 두드리는 괴벽으로, 그렇잖아도 재미없는 글 읽으시는 독
자분들의 스트레스를 가중시켜드린 점 죄송합니다. (미의 부분은 전부
다 뒤에서부터 보세요. 한 줄씩만 뒤에서부터 읽으면 의미가 통하지가
않습니다.)
저번 편에 상당한 오타가 있었습니다. 아프나이델이 말했던 켄턴이라
는 단어는 전부 턴빌입니다. (왜 똑같이 '턴'자가 들어가는 말을 사용
해서 이런 곤욕을 치르나… 으으윽!)
그 외에 지적해주신 오타들은 전부 제가 잘못 쓴 것입니다. (그래도
원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오타만 난다는 것에 대해 안도의 감정을
느끼는 타자… 퍼버벅!)
전개에 관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보내주시는 메일들에 대해서는, 항상 감사와 송구스러움을 함께 느낍
니다. 답장 못드리는 점 사과드립니다.
챕터 7 도 끝났습니다. 즐거운 통신 되시길. 예? 챕터 8 올리면 죽인
다고요? 하, 하하…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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