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호 : 18793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09 03:03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1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1.
카알은 말을 세웠다. 그리고 샌슨은 부끄러워졌다. 그의 부끄러움은
언덕 꼭대기에 서있는 한 명의 남자 때문이었다. 길 옆에 말을 세운
채 그 위에 앉아있는 남자는 고삐를 감아쥔 두 손을 안장 위에 얹고서
는 조용히 샌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늬 없는 회색 망토를 걸치고 허
리에는 역시 별 문양이 없는 롱소드를 찬 모습으로 바이서스의 어느
거리를 걷든 행인의 시선을 10초 이상 잡아두기 힘든 모습이었다. 순
간적으로 샌슨은 카알과 일행이 아니게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따위의 고민에 빠져버렸지만 그의 고민은 카알에 의해 해결되었다. 카
알은 남자를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Mil forujh iha eun Karl, de firion ki iha eun Sanson Percival."
물론 샌슨은 자이펀어를 알지 못했지만 그를 가리키며 이름을 부르는
카알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샌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듣고서도 남자는 한참 동안 지긋이 샌슨을 바라보았고 결과적
으로 샌슨은 수치와 동시에 약간의 분노까지 느꼈다. 그러나 샌슨이
입을 막 열려는 순간 '그래요, 잘못했어요!' 남자는 조용히 말했다.
"함이라고 합니다."
깔끔한 바이서스어였다. 카알은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자이펀의 국방
대신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말했다.
"샌슨 씨는 자이퍼어를 이해하십니까?"
샌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함은 카알에게 말했다.
"그럼, 바이서스 어를 사용하기로 합시다."
샌슨이 감사하다고 말해야 되는가에 대해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카알
은 말에서 내려섰고 그 모습을 보자 함 역시 말에서 내려섰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함 씨?"
"아니오.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 오르자마자 두 분이 달려
오시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샌슨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저, 무슨 못된 흉계가 있어 따라온 것은 아닙니다."
함은 그제서야 싱긋 웃었다.
"흉계가 있었다면 이렇게 드러내놓고 카알을 따라오시지는 않았겠지
요. 카알 씨가 걱정되어서 따라오신 것이리라 짐작합니다만."
"……짐작대로입니다. 카알은 검에는 아무런 소질이 없어서, 아, 그
렇다고 해서 제가 뭐 함 씨를 공격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 절대
로 아닙니다."
단독으로 만나기로 한 자리에 따라온 것에 대해 허둥지둥 변명하던
샌슨은 그만 포기하며 입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샌슨은 카알의 말과
자신의 말 고삐를 같이 쥔 채 조용히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취했다.
나는 여기 없는 것으로 취급해주쇼.
내색하진 않았지만, 함은 그런 샌슨을 보며 흥미를 느꼈다. 그는 샌
슨 퍼시발이라는 이름에 대해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함은 지금 샌
슨의 모습에서 지옥에서 방금 데려온 것 같은 부대 하나를 신들린듯
이 운용하여 번견이 양떼를 몰아붙이듯이 자이펀의 최정예부대 네 개
를 꼼짝달싹 못하도록 휘몰아대고 있는 바이서스의 무시무시한 장수의
모습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저게 정말 칼브린 이후 바이서스 최고의
맹장이라는 샌슨 퍼시발인가? 그 공포스럽다는 사내는 카알을 따라나
온 것에 대해 몹시도 미안해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말구종의 역할을 맡
은 채 다소곳이 서있었다.
카알은 길 옆의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실까요?"
함은 카알을 마주보는 자리에 있는 바위에 앉았다. 그렇게 앉은 두
사람은 마치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행객들처럼 보였다. 카알은
숨을 좀 돌리고나서 말했다.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휴전 협정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함은 고개를 갸웃하며 카알을 바라보았다.
"휴전 협정에 대해서는 이틀 뒤에 있을 정식 협약 때 충분히 논의될
수 있겠죠. 그쪽에서도 그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겠지요? 이쪽도 마
찬가지입니다. 나오기 전에 잠시 보니, 법학자들은 전범으로 기소된
귀국의 인사들을, 아, 함 씨도 물론 포함됩니다. 그 인사들을 기소 중
지시킬 것인지 기소 유예시킬 것인지를 놓고 사투를 벌이고 있더군
요."
함은 싱긋 웃었다.
"그게 그들의 일이니까요. 그런데 궁금하군요. 어떻습니까, 저는 천
인공노할 인류의 적으로 규정지어 만인의 이름으로 고발되어 있겠군
요?"
"거의 비슷합니다. 수식어가 좀 더 많은 편입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카알 당신은 자이펀 내에서 어떤 종류의 고
발도 당한 바 없습니다. 이쪽 율법가들은 당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
으니까요."
함은 농담하듯 말하며 카알에 대해 살짝 비꼬았다. 커튼 뒤에 숨어서
바이서스를 조종하신 귀하의 수완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 의미를 충분
히 알아들었지만 카알은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예. 이 휴전 협정에는 그렇듯 많은 분들이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있으
니만큼, 분명히 양국 모두가 만족할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생각됩
니다. 그래서 저는 휴전 협정에 대해서는 큰 우려를 가지지 않습니다.
오늘 함 씨를 이렇게 뵙고자 한 이유는 다른 이유에서지요."
"휴전 협정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면…… 무슨 이유로?"
"그것보다는 더 심각한 문제를 논의하고 싶습니다. 묻겠습니다. 귀국
에서는 안식에 들어야 할 자들이 지상을 배회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
니까?"
함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혹, 귀국이 디바인 웨펀이라 부르는 그 좀비들의 창궐에 대한 이야
기라면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종류의 언급도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만."
"아니오.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실 텐데요."
함은 찌푸린 얼굴 그대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솔로쳐께서도 부활하셨다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해 보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말씀하신대로, 현재 저희 나라에서는 역사가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만나보고 싶어하는 자들이 지상을 걷고 있습니다. 콜로넬 계곡에서는
데스나이트들이 일어섰고 켄턴의 하늘에서는 천공의 3 기사가 춤추고
있습니다."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충분히 가공할만한 것이라면, 말투는 어떠해도
상관없다. 그래서 카알은 단조로울 정도로 평이하게 말했지만 함은 한
참 동안 말문을 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조금 후에야 함은 힘들게
말했다.
"혹, 이유를 아십니까."
"예. 불민한 후손을 위해 선조들은 죽음까지도 뛰어넘어 배려를 남겨
둔다고 하지요. 그건 아시다시피 은유적인 말이지요. 관습이나 문화,
규칙, 건축물…… 하지만 이번 경우엔 그 말 그대로의 일이 일어났습
니다. 솔로쳐께서 해답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직접…… 만나셨습니까?"
"예."
그외에 다른 적합한 행동은 떠오르지 않았기에, 함은 잠시 한숨을 내
쉬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으로는 좀 실망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온갖 무지개가 하늘을
수놓고 땅이 갈라지고 벼락이 치는 가운데 수염소와 사자들이 끄는 수
레를 타고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죠. 솔로쳐께서는 임펠리아의 정문으
로 걸어들어오셨습니다."
함은 쓰게 웃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 분이겠지요.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카알은 잠시 미간을 문지르다가 말했다.
"좀 복잡합니다. 제가 얼마나 설명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만. 일단 이 부활들에는 여러분들이 Hjan이라고 부르는 것이 개입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함은 조금 놀랐다.
"Hjan?"
"예. 혹 제가 자이펀의 단어를 잘못 인용하더라도 용서하십시오. 솔
로쳐께서 가로되, 크나큰 Hjan을 지닌 자는 죽은 그 자신, 혹은 죽은
그의 친구나 가족들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나 그리움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단순한 사랑이었다면 루트에리노 대
왕은 이미 몇 번에 걸쳐 그를 사랑하는 바이서스 국민들에 의해 부활
되었을 거라고도 하셨습니다. 죽은 남편이나 아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요. 저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만."
"그렇……군요. 그래서 라울은 부활하지 않았으나 베이론은 부활한
것이군요."
함이 거론한 이름들은 당연히 카알에겐 낯설었다. 하지만 함은 설명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의 머리
속에서 무언가가 따다닥 소리를 내며 맞아들어가는 기분이 느껴졌다.
신차이와의 결투에서 죽은 자들 중, 라울 트리그로스는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결투에 임했고 남겨진 미련 없이 무사답게 죽었다. 그는 부
활하지 않았다. 그리고 베이론 코다슈는 분노로서 결투에 임했고 그
감정을 추스릴 겨를도 없이 일격에 칼맞은 낙타꼴로 죽었다. 그는 부
활했다.
카알은 함이 생각에 잠겨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부드럽게 말을
꺼내었다.
"저…… 그리고 솔로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이펀보다는 바이
서스에서 더많은 부활이 일어났을 거라고요."
"예? 이유가 뭐죠?"
"우리는 그 Hjan이 뭔지도 모르니까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감정은
추스릴 수 있을 테지만, 그것에 대해 이름도 모르는 감정이라면 보다
쉽게 그 감정에 휘두릴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섬뜩한 말씀이셨
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면서도, 거기에 붙여진 이름이 없다
면 있는지조차 모르는 감정이라는 것은."
"그렇겠군요. 예. 하지만 단순히 감정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는 생각하기 어렵군요."
"예. 물론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 전제 조건이 뭔가요?"
카알은 대답에 앞서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있는 언덕은
들판의 중간 쯤에 잘못 솟아난 것처럼 생긴 야트막한 야산이었고 그래
서 푸른 하늘은 턱없이 넓어보였다. 카알은 그 하늘 어디에선가 자신
이 말하고자 하는 말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공상을 해보았지
만 하늘은 마냥 푸르를 뿐, 카알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카알은
조금 힘들게 말을 꺼내었다.
"시간이 멈췄다는 것이 그 전제 조건입니다."
다행히도 함은 카알을 바보 취급하거나 미치광이를 보는 시선으로 카
알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열렬한 찬동의 의사를 표한
것도 아니지만. 함은 그저 조용히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었다.
카알은 그 스스로도 혼란스러워하는 개념에 대해 말을 해봄으로써 함
의 이해와 더불어 자신의 이해도 높여보고자 했다.
"현재, 시간은 느려지고 있습니다. 사물들의 시간이 느려지고 있습니
다. 봉오리는 꽃으로 피어나지 않고 부패해야 할 것들은 부패하지 않
습니다. 아이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보다 개인적인 것
을 말해볼까요. 흔히들 아이들은 미래의 주인이라고 말하지만 그 주인
들이 태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주위의 친지들 중 자녀를
얻은 친지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함은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그 황당한 가설에 대한 찬성의 증거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이유만으로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
"없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 표정, 이해합니다. 제 말이 우스꽝스럽게 느
껴지지요? 예. 저 자신도 긴가민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 개
인적인 일들을 돌아보았습니다."
"당신의 개인적인 일?"
"함.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미래를 꿈꾸는 사람
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제 취향에 맞는 미래를 꿈꾸지
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 미력하나마 노력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카알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
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는 말이죠."
"예?"
"저는 제가 미래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
다. 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말하지 않
겠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말씀드리죠. 저는 점점 더 사태와 상황들을
고착시키고 있었습니다. 현재를 끌어안아버린 거라고 할 수 있지요."
"무슨 말씀인지?"
카알은 난감함을 느꼈다. 어떻게 말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먼 나라
의 국방대신에게 들려주기에는 상당히 복잡한 내용들이었다.
그가 서커스를 이용하여 귀족들에게 보낸 경고는 결국 귀족들에게 경
계심을 품게 할 것이다. (샌슨이 습격당한 것을 보면 귀족들의 경계심
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거늘, 카알은 깨닫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문화사업이 의외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 카알이 준 - 모직 산업을 다룰 권리를 획득함으로써 얻게될
풍부한 재원을 이용하여 더 많은 문화 사업들을 자신의 손아귀 안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작가, 미술가, 음악가, 조각가, 정치가, 경제학자,
기타 모든 종류의 기술자들. 어쩌면 성직자와 마법사들까지도? 결국,
문화사업은 적절한 안목과 풍부한 재력을 가진 귀족들이 전담할 때 가
장 높은 수준의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이치다.
문화를 장악한 자들은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다. 역시 귀족이 해야
돼. 역시 귀족다워. 이건 귀족이 해야 할 일 아닐까? 고정 관념들. 움
직일 수 없는. 결국, 비귀족들은 귀족들의 문화 소작농이 될 것이다.
카알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외에 샌슨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들, 함에게는 더욱 말할 수 없었던
것들. 그 모든 계획과 비밀 활동을 재검토한 카알은 자기자신에 대해
아찔함까지 느꼈다. 그가 한 행동들은 모두 현재를 요지부동으로 만들
어버리는 것들이었다.
"너무 많습니다…… 대신 당신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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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축구 보고 신경질 부득부득 내며 글 올립니다. 어차피 어딘가
좀 모자란 듯한 그 풋풋함에 청소년 축구를 봅니다만, 골 운이 없어도
그렇게 없을 수가 있나 싶습니다.(아아악! 내가 미쳐! 골대 맞고 나오
고 수비수 다리에 맞고 나오고!)
아, 질문.
크라드메서가 왜 부활하지 않느냐? 글쎄요… 이건 앞으로의 전개에서
는 설명될 부분이 없으니 말을 하긴 해야겠지만, 좀 슬프군요. 나름대
로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글이 모자라니 도리가 없다.) 간단하게 설
명하지요. 크라드메서는 자살했습니다. Hjan이 없습니다. 넥슨? 그 친
구는 조각난 채 사망했습니다. Hjan을 가질 기억이 적을 뿐만 아니라,
그 기억들이 체계적이지도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조각난 넥슨들이 다
부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하하.)
F/W 책으로 나오냐? 나오겠죠. 계약은 오래전에 했으니. 다만 타자가
열심히 두드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요. 시리얼 식구분들과 함께 출
판사 분들께도 죄송. (죽자, 죽어.)번 호 : 18794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09 03:04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2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2.
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굳은 얼굴로 말
했다.
"당신은 휴전을 원하지요?"
함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질문이었으니까. 카알 역시 말을 계속
했다.
"하지만 그것은 고착입니다. 종전이 아닙니다. 휴전은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휴전 협약 이후 양국이 어떻게 될지
대충 말해볼까요? 가장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군비 경쟁입니다.
당신이 휴전 이후 모국에 대해 어떤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은 결국 비대해진 군부의 수장이 될 것입니다. 당
신은 하탄이 될지도 모릅니다."
함의 강직한 성격은 이 대목에서 도저히 인내심이라는 말을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다.
"불경한!"
샌슨의 눈빛 또한 예리해졌다. 하지만 함은 벌떡 일어서거나 칼자루
로 손을 가져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더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억
지로 내리누르며 카알을 쏘아보았다. 카알은 슬프게 말했다.
"당신이 그것을 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위 상황이 당신을 그렇
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거죠."
"말해보시오!"
"군비 경쟁부터 다시 시작하죠. 잠정적 전쟁을 대비한 군수사업의 발
달과 군부의 확장은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폭력의 특징은
그것이 에고 소드와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샌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있는 프
림 블레이드의 칼자루로 내려가 그것을 쓰다듬었다. 카알과 함은 알
수 없었지만 프림 블레이드 역시 숨을 죽인 채 카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에고 소드는 보통 칼과 달리 그 스스로 자연스럽게 주인을 찾아냅니
다. 보통 칼이라면 전사가 쥐거나 암살자가 쥐거나 푸줏간 주인이 쥐
거나 그 용도에 충실히 사용될 겁니다. 하지만 에고 소드는 그 스스로
주인을 찾아냅니다. 물론 착한 에고 소드는 그렇지 않겠지만, 대부분
의 에고 소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주인을 찾아냅니다. 그런데 검의
목적은 무엇이죠? 폭력, 피입니다. 에고 소드는 주인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주인을 택할 뿐입니
다."
함은 갑자기 들려온 고함소리에 놀랐다. 그리고 그 고함소리의 내용
엔 더욱 놀랐다.
"난 아니에요! 메스꺼워요, 피라니!"
함이 떨뜨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곳에서는 샌슨이 허옇게 질린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함과 샌슨의 얼굴과는 반대
로, 카알은 차분한 얼굴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저 프림 블레이드 같은 경우는 좀 독특하죠. 저 에고 소드는 자신의
목적, 즉 세상이 끝날 그 날까지 계속될 수다를 위해 주인을 이용합니
다. 자신에겐 입이 없으니까요. 뭐, 마검보다야 훨씬 보기도 좋고 애
교스럽기도 한 버릇이지만 주인을 이용하는 점에선 다른 에고 소드와
마찬가지입니다."
프림 블레이드가 입을(?) 다물어버린 것 역시 샌슨만이 깨달을 수 있
는 일이었다. 카알은 계속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함을 불러야 했다.
"저, 함 씨? 계속할까요."
"아, 예."
역시 무사인지라 에고 소드라는 말에 감탄하며 샌슨이 쥐고 있는 칼
자루를 감상하고 있던 함은 머쓱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카알은 계속
말했다.
"당신 나라 안에서 자라나고 비대해진 폭력은 결국 자신의 폭력성을
발휘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인을 찾아낼 겁니다. 폭력을 억눌러주기를
바라는 목적이 아닙니다. 에고 소드와 마찬가지로, 폭력이 그런 목적
으로 주인을 찾아내는 일은 드물지요. 그 폭력은 자신을 쥐고 휘둘러
줄 주인을 찾게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주인이 될 가능성이 높
습니다. 다른 명가의 수장들은 군부의 권한에 별로 관심이 없다면서
요? 당신은 자연스럽게 전후 자이펀 최고의 권력자, 군대 통수권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휴전 협정은 파기되는 거지요. 당신은
바라지 않았을지 몰라도 휘하의 병사들과 장군들이 보내오는 압력은
무시할 수 없겠지요. 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함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주위의 상황이 그러해도, 나에겐 자유 의사라는 것이 있습니
다."
"그런데 그 자유 의사라는 것이 현재의 무한한 반복을 바라고 있습니
다.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다른 예?"
"당신은 우리들로 하여금 시오네를 체포하게끔 하셨지요."
함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카알의 설명을 기다렸다. 그가 판단하기로,
눈 앞의 카알은 아무래도 설명을 좋아하는 성격인 듯했다. 과연 카알
은 설명을 시작했다.
"시오네를 체포하게끔 한 것으로 당신은 자신의 휴전 의사가 견고하
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뭐, 우리로서는 칭찬할만한 제스
춰지요. 데밀레노스 바이서스 공주님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별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 내가 그 뱀파이어를 싫어했다는 점도 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런데 그것을 조금만 바꿔 생각해볼까요. 시오네
는 하탄의 날개의 중요인물입니다. 내가 이해하기로 하탄의 날개는 군
부를 견제하는 하탄의 중요수단이지요. 당신은 그것을 꺾었습니다."
함은 자신의 가슴 속 어딘가에서 무엇인가가 덜컹 소리를 내며 떨어
졌다는 기분을 느꼈다. 카알은 시선을 조금 내리깔았다.
"당신 자신도 모르게, 혹 알고 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휴전
이후의 군부 장악을 위한 포석을 깔았습니다. 그 외에도 당신 스스로
관점을 조금 바꿔보면 유사한 목적으로 행한 일들이 있을지도 모르겠
습니다."
함은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떨어져서 그의 가슴 속에서 굴
러다니고 있는 것은 함의 입을 막았다. 함은 입술을 깨문 채 생각했
다.
그는 자이펀 최정예 부대를 바이서스로 파견했다. 휴전 이후에 있을
군벌의 발호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그런데 그 부대들은 저기 있는 바
이서스 건국 이후 두 명밖에 없을 맹장이라는 샌슨 퍼시발에 의해 지
리멸렬하고 있다. 그렇다면?
함은, 샌슨의 손을 빌어, 자신의 라이벌이 될지도 모를 장수들을 제
거해버린 것이 된다.
"이 휴전은 사실은 종전이라 해야 맞습니다. 지금까지의 전쟁, 즉 언
젠가 어느 한쪽의 승리나 패배로 끝나게 될 형태의 전쟁은 끝났습니
다. 그리고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겠지요. 승자도 패자도 결코 나타나
지 않을 영원한 전쟁 말입니다."
"영원한 전쟁이라고요? 그게 가능합니까?"
"죽은 자들이 생사를 넘는 것은 가능합니까?"
함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카알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푸른 새틴처럼 고왔다. 그리고 마른 붓으로 한번 슥 그은 듯한
구름들이 희미한 흉터처럼 하늘 한곳에 멎어 있었다. 카알은 그 구름
을 바라보았다.
"우리 나라에는 챠넬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예. 그 분께서 행동과 상황의 관계를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신 것
도 아십니까?"
"상황을 호전시키는 행동은 최상이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행동은 나
쁘지만, 상황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하는 행동은 최악이라고 하셨지
요."
"그 분은 전략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만, 그 때 그 분은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시간의 본질을 말씀하신 듯합니다."
"시간의 본질이오?"
"우리는 흘러야 합니다."
카알은 바위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보이는 황무
지를 바라보았다.
"때론 장려한 강물이 되어 도도하게 흐를 수도 있고, 때론 굽이쳐 꺽
이고 폭포가 되어 산산히 부서질 수도 있습니다. 때론 절벽을 타넘고,
때론 땅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가 되어서라도 우리는 흘러야 합니다.
고여있을 수는 없습니다. 앞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고 해서 영원히
현재를 묶어두는 것은 우리의 자살입니다."
함은 자신도 모르게 카알을 따라 넓은 황무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함과 카알이 보는 것은 서로 다른 황무지였다. 카알은 북받치는 목소
리로 힘들게 말했다.
"우리는 날아야 합니다."
"난다고요……"
"때론 황야를 질타하는 질풍이 되어 날 수도 있고, 때론 산에 부딪혀
갈갈이 찢겨질지언정 우리는 바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증인인 인간, 시간의 장인입니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이
되고 불어닥치는 바람이 되어 시간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알은 갑자기 몸을 돌려 함을 바라보았다.
카알을 마주보던 함은 그의 눈 가득히 담긴 슬픔에 어리둥절해졌다.
카알은, 그야말로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미안합니다."
"예?"
"미안합니다."
카알은 똑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함은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카알은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그
대로 몸을 돌려 샌슨에게 걸어갔다. 함은 제자리에 선 채 카알의 뒷모
습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황무지에서 불어온 바람이 한 올 언덕의 먼지를 피어오르게 만들고나
자 카알은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마상에서 함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카알은 약한 미소
를 지은 채 함에게 말했다.
"이틀 뒤의 휴전 협정 때 뵙겠습니다."
"아, 예…… 그런데……"
"제가 멋진 것을 보여드릴 테니 준비하시고 나오십시오."
"멋진 것?"
카알은 장난이라도 칠 것 같은 익살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 저는 열과 성을 다해 그 협정을 파탄낼 겁니다."
"예?" 라고 되묻지도 못했다. 함은 턱이 빠진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
았다.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
다. 카알은 다시 악동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쪽 율법가들도 이제 할 일이 생길 겁니다. 휴전 협정을 최악의 방
식으로 파탄냄으로써 양국 국민의 평화와 번영의 기틀이 서는 역사적
인 순간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자이펀과 바이서스 양쪽을 진흙탕에 던
져버린 역사의 범죄자로 카알 헬턴트를 기소할 수 있겠군요."
함은 아무 말도 못했다. 카알은 싱겁게 웃었다.
"당신만이라도 내 진심을 알아주시오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해야 어울
릴 것 같지만, 이 장면에 어울릴 법한 문구를 찾아내는 것은 후세의
문필가들에게 맡겨둡시다. 자이펀의 작가일지 바이서스의 작가일지야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멋진 문구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장면으로 만들
어주겠지요."
그리고 카알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평안하기를. 이
라고 말해야 하지만, 함은 아직까지도 굳어버린 입을 어쩌지 못한 채
카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카알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그대
로 몸을 돌렸다. 주춤거리던 샌슨은 함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그대로 슈팅스타에 올라 카알의 뒤를 따랐다.
함은 언덕 위에 못박힌 채 떠나가는 카알과 샌슨을 바라보았다. 황무
지를 가로질러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침내 작은 점과 모래바람이 되
어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그 때까지 그의 입속엔 하나의 문장이 되풀
이되풀이 되고 있었다.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
경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퍼버벅!
음. 그 카피가 마음에 와닿네요.(타자는 파워레이드 판촉요원이 아닙
니다… 윽윽.)
여러분의 경기는 어떻습니까?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8907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11 06:05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3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3.
샌슨은 고개를 돌려 카알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든 걸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라는 프림 블레이드의 조언이 있었다.
'달아나자구, 샌슨. 함 씨는 예의 바르고 품위있는 신사처럼 보이고,
따라서 너완 전혀 다른 인종일 가능성이 높단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상세하게 말해봐.'
'흥. 너처럼 드러내놓고 털래털래 따라올 사람은 아니라는 거지. 함
씨는 이 회견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면 틀림없이 주변에 병사들을 좌
악 깔아놨을 거야.'
'이해했어.'
'카알은 함 씨의 뒤통수를 갈긴 셈이고, 따라서 함 씨가 그 숨어있는
병사들에게 저놈들을 잡아라, 어쩌고 하는 말을 꺼낼 정도로 침착을
되찾기 전에 우린 조금이라도 더 도망가야 한단 말이야.'
'이해했다고 했잖아. 뻔한 말 하지마.'
'와……! 거기까지 짐작했어?'
'윽.'
샌슨은 이 황야 어딘가의 바위에 프림 블레이드를 꽂아놓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몇백년 쯤 뒤에 바위에 꽂힌 명검의 전설을 만들
어낼지도 모르는 샌슨의 계획이 실천되지 않은 까닭은 첫째, 샌슨은
전력으로 도망치고 있었고 둘째, 바위가 안보였다. 그래서 샌슨은 프
림 블레이드와 보다 건설적인 내용의 대화를 나누기로 결심했다.
'카알 말이야. 휴전 협정을 파탄내겠다고 했지?'
'그가 원한다면 뭐든 파탄내지 못할까. 결혼식 정도라면 나도 파탄낼
수 있어.'
'응? 어떻게?'
'응응. 샌슨 네가 결혼식장에 가는 거야. 그리고 내 칼자루를 꽉 움
켜쥐면 돼. 그럼 내가 어떻게 결혼식을 파탄내는지 알 수 있게 될 거
야.'
'끔찍하군…… 어쨌든 말이야. 카알은 왜 파탄낸다고 했을까?'
프림 블레이드는 잠시 침묵했다. 그 사이에 샌슨은 슈팅스타의 고삐
를 조금 느슨하게 한 다음 등 뒤를 돌아보았다. 추격자들의 모습이나
칼의 반사광, 먼지 구름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샌슨은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그 때 프림 블레이드가 말했다.
'너희는 흘러야 하니까.'
'뭐?'
'싸움에 이길지 질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계속 싸워야 하지 멈추
는 것은 너희답지 않으니까. 너희는 바람, 너희는 강물. 움직이고 번
성하고 영원히 행동해야 하겠지.'
'무슨 소리야, 그래서 전쟁을 옹호할 수는……'
'쉽게 말하지마.'
'응?'
'내 모습을 봐, 샌슨. 제기. 칼날에 녹이 덕지덕지 덮이고 칼자루는
낡아 부서지는, 그 광막한 시간이 흐를 때까지 나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해. 그 시간을 생각하다보면 소름끼치다 못해 까무러칠 것 같아. 미
칠 것 같아. 너는 햇수를 년으로 세겠지? 하지만, 아아! 나는 세기로
세어야 한단 말이야! 그 시간 동안, 그 진저리쳐지도록 긴 시간 동안
나는 내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어!'
샌슨은 침묵했다. 조금 후, 안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프림 블레이드는
말했다.
'때론 아버지가 나를 마검으로 만들어주었으면 하고 생각해. 그럼,
그럼 난 적당히 악명을 날리다가 용광로나 화산에 던져지겠지? 차라
리 그게 낫겠지. 그 기막힐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이 식물인간 같은 모
습의 형벌을 참아내는 것보단, 그게 훨씬 나을 거 같아.'
'프림.'
'너희는 움직여야 해.'
프림 블레이드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검의 논리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 아아, 그래. 난 검이야. 검
이 검의 논리를 말하는 것이 뭐 어때? 전쟁의 결과가 무섭다고 해서
아예 전쟁을 그만둘 수는 없어. 끝까지 가야 하는 거야.'
'난…… 모르겠어. 휴전을 하면 최소한 지지는 않는 거야. 게다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고.'
'카알이 말할 때 뭘 들은 거야? 이 상태에서 휴전을 한다면, 그건 현
실과의 타협, 혹은 현실 속의 함몰이야. 그럼 이 전쟁은 계속돼. 이건
혈우병과 마찬가지야. 너희는 영원히 피를 흘리게 될 거란 말이야. 다
친 팔은 낫게 하던가 잘라내던가 해야 돼. 계속 흐르는 피만 막고 있
어선 언젠가는 인간 자체가 죽을 거란 말이야.'
프림 블레이드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아니, 정정할래. 죽지는 않겠군. 이 현실이 계속 된다면, 인간은 죽
지 않겠군. 하지만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은 마찬가지야. 모르겠어.
이 세상은 유령들의 전장이 되는 걸까? 아이도 낳지 못하고, 그렇다고
죽지도 못하니, 그건 유령이야. 유령들이 영원히 싸움을 계속하는 거
지.'
'하지만……'
'싸워야해. 미래가 뭘지 몰라서 주춤거리지마. 휴전은 얄팍한 타협이
야. 그런 건 없어. 아니,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인간 스스
로가 결정해야 돼. 누군가가 고정시킨 현실 때문이 아니라. 일어나서
걸어가. 자손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너희들의 선조들
도 자신을 위해 그들의 인생과 싸웠어. 너희들도 너희들의 인생을 위
해 싸우기만 하면 돼. 너희들의 자손들은 스스로를 위해 싸우겠지. 왜
냐하면, 너희들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 싸움은 노래가 될 수
도 있겠고 탑이 될 수도 있겠고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도 있겠지. 아
침에 일어났을 땐 졸음과 싸우는 거야. 힘껏 일할 땐 게으름과 싸우는
거야. 논쟁을 벌일 땐 상대방과 설전을 하지. 자이펀이 적이라면 검을
들고 일어나 싸워. 뭐가 옳은지는 여가 선용의 시간을 위해 남겨둬.
방해물은 항상 생기고, 싸움은 영원한 것이야. 내 앞에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움직여!'
프림 블레이드의 목소리에 익살맞은 기운이 섞여들어갔다.
'봐, 지금도 방해물이 있어. 위대한 전사 샌슨. 싸워야겠군.'
'뭐?'
그 때 현실의 목소리가 샌슨의 귀에 들어왔다.
"퍼시발군. 말을 잠시 멈춰보게."
샌슨은 당황하며 슈팅스타를 멈췄지만 결국 카알을 한참 지나쳐야 했
다. 샌슨은 말을 돌려 다시 걸어왔고, 그 때문에 카알이 뭣 때문에 멈
추라고 했는지 묻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들이 달려온 언덕쪽에서 뽀얀 먼지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샌슨
은 이를 갈았다.
"함 녀석." 더이상 존칭은 사용되지 않았다. "부대를 매복시켜뒀던
모양이군요. 비겁한 놈!"
카알은 '자네 역시 일대일 회담에 따라나오지 않았는가.'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카알은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말했다.
"물을 테니, 자네나 프림 양 누구라도 좀 대답해주시게. 저 추격대는
함이 직접 지휘하고 있을까?"
"그럴 가능성이 높긴 합니다만 지금까지의 정황에서는 확신을 가질만
한 것들이 없습니다."
"가능성은 높단 말이지?"
"그렇지요.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한 것 아닙니까. 대여섯시간 거
리나 되는 거리를 혼자서 되돌아갈 리는 없을 테고, 저라면 저 부대
와 합류하겠습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샌슨이 바라보는
가운데 그의 품 속에서 나온 것은 작은 스크롤이었다. 카알은 멋적은
얼굴로 샌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겁한 카알 녀석이라고 불러도 할 말 없겠군."
"예?"
카알은 대답 대신 고삐를 놓고는 두 손으로 스크롤을 찢었다.
스크롤이 찢어지자 그 속에서 광선이 튀어올랐다. 위로 솟구쳐오른
광선은 샌슨으로 하여금 레브네인 호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광선
은 까마득한 하늘로 솟아올라 구름을 뚫었고 잠시 후 사라졌다. 샌슨
은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손을 툭툭 털고는 말했다.
"자, 잘 부탁하네."
"방금 그건 일종의 응원 같은 것이었습니까? 예. 그럼 저는 추적대와
용감히 맞서 싸우고 카알은 그 사이에 도망치는 것이군요. 멋진 응원
이었습니다. 비겁하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카알은 달아나셔야……"
"으윽. 아냐. 그건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네, 퍼시발군. 뒤
를 보게."
샌슨은 뒤를 돌아보았다.
전방에서 그들을 추적하는 것과 비슷한 먼지구름들이 일어나고 있었
다. 지평선 곳곳에서 일어나는 그 먼지구름을 보며 샌슨은 숨이 턱 막
히는 희열을 느꼈다. 바람을 타고 가늘게 말발굽소리들이 들려왔다.
두두두두두. 절대의 전투력과 치명적인 돌격력으로 땅 위를 질타하는
말발굽소리.
그리고 힘찬 나팔소리가 울렸다.
나팔소리는 황무지 위를 서슴없이 휘몰아쳤다. 황무지 전체가 진저리
를 치며 들고 일어나는 듯했다. 샌슨은 그 나팔소리를 잘 알고 있었
다.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 속에 샌슨은 프림 블레이드를 천천히 뽑아
들었다. 나의 최고의 경의로서. 말발굽소리는 이제 몸이 흔들릴 지경
으로 커졌다. 그리고 시시각각 커지는 먼지구름들 사이로 갑주의 번득
임이 무지개를 그렸다. 샌슨은 소름이 돋을 듯한 유쾌함을 느꼈다. 그
는 검을 높이 뽑아들고 목이 터져라 고함질렀다.
"장미의 기사여, 오라! 죽음과 삶은 내 알 바 아니다. 칠흑의 땅 위
에 피의 장미 꽃잎을 날릴 뿐!"
샌슨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나팔소리가 다시 울렸다. 금속성의 맑고
날카로운 소리들은 천둥처럼 황무지 위를 치달렸다. 그리고 그들 심장
속에서 용솟음치는 피의 소환에 맞춰 지옥의 노래를 부르는 전사들의
합창이 들려왔다.
장미의 기사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앞으로 내밀어진 일스 기사단의 창검은 흰 무지개를 사방으로 퍼뜨렸
다. 불꽃처럼 휘날리는 말들의 갈기 위로 일스 기사단의 강철 투구가
번득였다. 슬릿 위로 새겨진 장미 문양은 마치 흐르는 피처럼 보였다.
일스의 대장장이들의 손길이 얼마나 가해졌을까, 지독하게 연마된 갑
주의 강철은 로열 블루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선두에 달리던 기사
는 앞으로 내뻗고 있던 거대한 창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창이 아니었
다. 기사는 팔을 휘둘렀고 그러자 거대한 깃발이 펼쳐졌다. 장미와 정
의의 오렘의 문장이 거대한 깃발 가득히 화려한 불꽃을 뿜어내고 있었
다. 기수는 다시 뿔나팔을 들어올렸다. 벽력 같은 나팔 소리가 다시
황무지를 진동시켰다.
빠- 빠바바바- 바-!
빠- 빠바바바- 바-!
저들이 바로 일스 기사단이었다. 그레이, 무스타파, 딤라이트 천공의
기사의 가장 올바른 후계자들, 대륙 최고의 단위 전투력이다. 검과 파
괴의 레티의 아들들이 파괴를 위해 검을 든 프리스트들이라면 저들은
정의를 위해 신에게 몸을 바친 무사들이다. 샌슨은 미친듯이 웃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외쳤다.
"카알! 함을 어떤 상태로 가져다 바칠까요?"
카알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고삐를 당겼다. 일스 기사단의 돌격
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고속력으로 옆으로 비켜나야 할 것이다.
죽을 맛이겠군.
"전쟁의 예법이 요구하는 한 정중하게. 하지만 여의치 않다면 시체라
도 상관없네. 그것이 전쟁의 예법이니."
"알겠습니다! 자, 누가 일스 기사단을 앞지르는지 보십시오!"
그리고 샌슨은 검을 높이 들어올려 휘저었다.
"바이서스, 루트에리노!"
그리고 샌슨은 앞으로 달려갔다. 카알은 싱긋 웃으며 옆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상에서 카알은 일스 기사단의 나팔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슬프고, 아름답고, 격정적인 나팔소리였다.
================================================================
올려주신 감상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저, 이왕 있는 게시
판이니 비평, 감상란을 이용해주시면 더 감사하겠습니다. 이 아래쪽에
보이는 M2 통신작가협회의 17번란은 서머란과 시리얼란의 글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을 올릴 수 있는 란입니다. 아직은 활성화되었다고 말하기
어렵겠지만 여러분들이 이용해주시면 활성화되지 않겠습니까?
내일은 청소년 축구 말리 전… 싸워라! 이겨라! 세계 4강이자 월드컵
우승도 했다는 나라에서 나온 팀이 시간 끌기로 상대해야할 정도로 강
력한 우리 청소년들이니, 믿습니다! 오-레! 오레오레오레… 퍼버벅!번 호 : 18908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11 06:05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4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4.
천막의 입구에 쳐져있는 천을 들어 밖을 바라보던 카알은 고개를 끄
덕였다. 야영지 곳곳에 피워둔 화톳불이 불을 밝히고 있을 뿐 주위는
고요했다. 불침번을 서는 병사들 한 두 명이 오갈 뿐, 휴전 협상을 위
한 사절단과 법학자들은 모두 기진맥진한 채 잠든지 오래였다. 그들에
게는 행군이나 다름없었던 며칠 간이었다. 그래도 막중한 임무를 의식
한 그들은 매일 저녁 졸리는 것을 참아가며 휴전 협정서의 초안을 잡
기 위해 상의를 거듭해왔지만, 조금 전 저녁식사 시간에 카알이 행한
선언, 즉 휴전 협상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은 그들 모두를 얼빠지
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들은 황당함과 허탈감에 일찌감치 곯아떨어졌
을 것이다.
카알은 천을 도로 내리고는 고개를 돌려 천막 중앙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커다랗고 묵직해보이는 관이 놓여있었다. 카알은 잠시 관뚜껑
을 노크하고픈 생각을 떠올렸지만 꾹 참으며 말했다.
"시오네. 나와도 좋아요."
관뚜껑이 천천히 움직였다. 텅. 가벼운 소리를 내며 관뚜껑이 옆으로
떨어지자 시오네는 일어났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을 종군 프리
스트들과 허옇게 질린 얼굴의 병사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막사 안에는
카알 뿐이었다. 시오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 혼자 뿐인가?"
카알은 피로한 얼굴이었다. 그는 테이블 대신 사용하고 있던 궤짝 위
에 놓인 두 개의 잔 가운데 하나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지?"
"거기 앉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 관에서 나오는 것은 곤란합니
다. 거기 관 귀퉁이에라도 앉으시지요."
시오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관 주위의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뒤틀리며 예리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관 주위의 땅에는 복잡한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시오네는 그것을 알아볼 수 없었고, 그래서 정
령사의 솜씨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 늙은 정령사 구다이의 솜씨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에 시오네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
다.
"준비가 철저하군."
"저는 소심한 편이거든요."
카알은 빙긋 웃으며 또 하나의 잔을 들어올려서는 관 귀퉁이에 앉은
시오네에게 건네었다. 시오네는 의아한 표정으로 잔을 바라보았고, 받
아든 잔의 내용물을 확인한 시오네는 당황해버렸다.
"와인이…… 아니군?"
"아닙니다."
시오네는 눈을 흡떠 카알을 바라본 채 천천히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나 잔의 내용물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오자 시오네는 더이상 카알
에게 집중하기 어려웠다. 시오네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시오네는 눈
을 감은 채 입 안의 내용물을 음미하다가 아쉬운 듯이 마시고서 말했
다.
"살 것 같은 기분이군."
카알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영원한 시체인 뱀파이어가 살 것
같다고? 하지만 눈을 감고 있던 시오네는 카알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궤짝에 걸터앉아서는 자신의 잔을 마셨다. 카
알의 잔에는 와인이 담겨있었다.
시오네는 길다란 혀로 입술을 핥고서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슴, 수컷, 311년산."
카알은 킬킬거렸다. 시오네에게서 유머 감각을 기대하지는 못했다.
시오네는 눈을 떠 웃고 있는 카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인간? 내가 그걸 어떻게 준비하겠습니까. 그건 취사병이 저녁 식사
에 쓰려고 잡은 사슴을 요리할 때 간신히 구한 겁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군요. 맛을 다 구분합니까?"
"설마. 이 방에 진동하는 사슴고기 냄새로 추측한 거야. 저녁 식사
때 그걸 먹었으니, 네가 사슴에서 이걸 구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
지."
"아아, 그렇군요. 미각이 아니라 후각에 경의를 표시해야 되는 것이
군요."
시오네는 차갑게 웃으며 잔을 만지작거렸다. 오래간만에 충족된 욕망
때문에 시오네는 퍽 즐거운 기분이었다.
"뭘 준비했나."
"예?"
"너는 내게 뭔가 자극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불러낸 거 아닌가?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이렇게 공을 들여가며 준비한 것이겠
지. 그 굉장한 이야기가 뭔지 말해보시지."
카알은 히죽 웃었다.
"이해가 빠르니 대화가 편하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함을 붙
잡았습니다."
시오네의 손이 움찔했다. 하마터면 잔의 내용물이 모두 쏟아질 뻔했
지만 시오네는 가까스로 그것을 붙잡았다. 시오네는 자신의 팔에 흐른
피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카알을 노려보았다.
"함……을?"
"예. 1:1로 회담하자고 하니 나오더군요. 물론 부대를 가득 끌고 나
왔습니다만 퍼시발 군과 일스 기사단이 모두 무찔렀습니다."
시오네는 이를 악물며 카알을 바라보았다. 이 끔찍한 놈이 할 수 없
는 일은 도대체 뭐지. 그 불가사의한 사내가 조금 왜소한 듯한 체격에
평범한 중늙은이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시오네에게 별다른 위안
이 되지 못했다. 아니, 그런 평범함이 시오네를 더욱 압박해왔다. 시
오네는 그 압박감을 뿌리치듯 허리를 펴며 사납게 말했다.
"축하하겠어. 함은 바이서스에 붙잡힌 두번째 국방대신이 되는 건가.
하지만 모국을 배신한 두번째 국방대신이 되기는 어려울걸. 그 놈은
겉보기와는 꽤나 다른 녀석이거든."
"예. 고문은 엄두도 못내겠더군요. 자살하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될
지경이니, 도대체 고문 같은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되더군요."
시오네는 불안한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자살했나?"
"아니오. 이미 혀를 한번 깨물었습니다만 종군 프리스트들이 급히 치
료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손발 다 묶이고 입에는 재갈까지 채워진
상태지요. 조금 있으면 볼 수 있을 겁니다."
"볼 수 있다고?"
"퍼시발 군이 데리러 갔습니다."
시오네는 잔을 들어올려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는 잔을 땅에 집어던
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잔은 떼구르르 굴러갈 뿐이었다.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게 뭔지 알아보려면 직접 발을 들이밀어보는 수밖에 없
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말라고 권하고 싶군요. 구다이 씨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경고했습니다."
시오네는 겁먹은 표정도 짓지 않았다. 다만 사납게 으르렁거렸을 뿐
이다.
"왜 데려오겠다는 거지? 나를 희롱하려는 거냐? 배신자들을 서로 만
나게 하곤 그 모습을 즐기려는 거야!"
"그런 취미는 없습니다. 당신이나 함이나 서로 볼 낯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서로 만나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도리가 없군요."
시오네는 사납게 쉭쉭거렸다.
"도리라니?"
"말씀드렸다시피 함 씨를 고문할 수는 없습니다. 손발이나, 하다못해
입만 자유로와도 당장 자살하려고들 테니까요. 그래서 당신 도움이 필
요합니다."
시오네는 눈을 몇 번 껌뻑였다. 카알은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고 그
모습은 시오네를 더욱 의아하게 했다. 카알은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은 뱀파이어입니다. 이성에 대한 지배력이 있잖습니까?"
깜빡거리던 시오네의 눈이 순간적으로 고정되었다. 시오네는 입을 쩍
벌린 채 카알을 쳐다보았다.
"뭐? 너, 그럼 지금……?"
"예. 함 씨를 트랜스에 빠트려주십시오."
시오네는 벌떡 일어났다. 카알은 흠칫하며 궤짝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으나 곧 멈추었다. 시오네는 관 속에 똑바로 선 채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올 수 없다. 시오네는 핏발 선 눈으로 카알을 쏘아보았다.
"뭣 때문이지?"
"자이펀 사절단의 구성과 방어태세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능
하다면 사절단의 인사들을 모두 잡고 싶거든요."
"뭣 때문에?"
"이기려고 그러는 거죠. 사절단에 뽑힐 정도의 인사들은 전쟁수행에
있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명약관화하지 않습니까."
"뭐야?"
"예?"
"도대체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지? 왜냐! 너희들의 폭발성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짧은 인생, 죽어야할 생명, 그래서 어느 순간
정반대로 바뀌어버리는 모습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
지만 너는 뭐냐. 그렇게 순수하게, 최소한 보여주어야할 가식도 던진
상태로 바뀌어버리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냐? 네가 휴전협상을 미끼로
평화사절단을 잡으려드는 놈이었나? 네가 1:1 회담을 미끼로 적 장수
를 낚으려드는 놈이었나? 네가 뱀파어이를 이용하여 인간을 희롱하려
는 놈이었나? 넌 아니었어!"
카알은 시무룩한 얼굴로 시오네를 바라보다가 다시 궤짝에 앉았다.
"나도 압니다."
시오네는 어깨로 숨을 쉬며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고개를 떨구
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죠?"
"뭐?"
"내게 도대체 뭘 바란 것입니까."
시오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카알은 땅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꼬고 싶진 않지만, 당신은 함을 배신하고, 함은 당신을 배신했습
니다. 이 땅 위를 오가는 당신들은 서로를 마음껏 이용해버리려 들었
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가 바보인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처럼.
나는 당신들이 지키지 못하는 순수성의 우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 역시 당신들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했고. 이
시점에서, 내가 도대체 무슨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카알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눈이
었다.
"나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 전쟁을 끝내어야 합니다. 인류사
에 오욕으로 기록될 전쟁 행위를 끝내어야 합니다. 오물을 치우는 것
에 비단 걸레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정정당당한 싸움? 싸움 어디에
고결함이 있단 말입니까? 서로를 죽여대기 위해 창칼을 든 것에서부터
전쟁은 인간의 오욕입니다. 거기에 금붙이를 달든 보석으로 치장하든
오욕이 가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수십만의 군세를 몰아 정정당당하
고 화려하게 싸워야만 아름다운 것입니까? 수십만의 시체가 쌓여 썩어
가고 있는 전장에서 그렇게 말씀해보시죠. 나는 관심 없습니다. 몇 명
의 인물만 붙잡아 전쟁을 빠르게 끝낼 수 있다면 나는 그쪽을 선택하
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야 어떠하든 상관 없습니다. 그들이
나를 책임져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들은 떠들 뿐입니다. 나를 책임
지는 것은 나 자신 뿐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내 행동들의 댓가가 나
를 겨냥할 때 나는 나 스스로를 책임질 것입니다."
"나도 그 말에 찬성이오."
시오네와 카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막사의 입구에는 밧줄에 꽁
꽁 묶인 함과 샌슨이 서있었다. 찢어지고 흙과 피로 범벅이 된 옷을
걸치고 있어 초췌함을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함은 꼿꼿하게
서있었다. 그리고 카알의 말에 대답한 것은 함이었다. 카알은 당황해
서 말했다.
"아니, 재갈은?"
샌슨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보기 안좋아서…… 그래도 자이펀의 국방대신이시잖습니까. 하탄의
이름에 걸고 자살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았습니다."
"나 이거야 원. 순수성의 우상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겠군."
"예?"
샌슨은 눈을 껌뻑거렸지만 카알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함을 바라
보았다. 함은 시오네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관 주위
의 도안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안좋아보이는군."
"……그쪽도 마찬가지야. 그 얼굴의 멍자국과 말라붙은 피는 아무리
좋게 말해주고 싶어도 지저분하다는 말이 최상일 것 같은데."
"아아, 그래. 그래도 그쪽이 나보단 낫군. 술도 마셨나 보…… 응?"
함은 시오네가 집어던진 잔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오네는 고개를 돌려 함을 외면했고 함은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카
알은 천막 안에 딱 한 개 있던 의자를 끌고와서는 함에게 내밀고는 자
신은 다시 궤짝에 앉았다. 함은 묵묵히 의자에 앉았고 샌슨은 그 뒤에
섰다. 함은 카알에게 말했다.
"나를 왜 데리고 온 겁니까."
"글쎄올시다. 괜히 흥분해 가지고 시오네 양과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았군요. 곤란한데요. 시오네? 어떻습니까. 내 제안은?"
시오네는 그대로 관에 드러누웠다. 관뚜껑이 날아오르더니 요란한 소
리를 내며 닫혔다. 카알은 쓰게 웃었다.
"멋진 대화 거부군요."
함은 그런 카알의 모습을 보다가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당신의 말, 나는 찬성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책
임진다는 말과 내가 생각하는 책임이 서로 좀 다른 것 같기는 하지
만."
"사소한 차이, 혹은 심연이 몇 개 쯤 빠질만한 차이라고 해두죠."
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알을 보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관점의 문제…… 할 말이 없군요."
카알은 미간을 찡그렸다.
"어디 보자, 곤란하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시오네 양을 설득해서 당
신을 트랜스에 빠트려볼까 했습니다. 아아, 눈을 그렇게 뜨시면 저는
무섭습니다. 소심한 편이라서요."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시오네 양이 비협조적이니 어차피 힘들군요."
"당신이 승자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포로가 된 나 자신을 부정하지
도 않아요. 하지만 난 당신을 위해 말하고 싶습니다. 자랑스러운 승리
를 스스로 모욕하지 마시오!"
카알은 물끄러미 함을 바라보았다.
"명예를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닌만큼, 모욕을 두려워하지도 않습
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그리고, 내가 자이펀과 싸우는 줄 아십니까?"
함은 말을 멈추고는 카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카알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아까 오후, 그 언덕 위에서 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시
간은 정말 멈춰가고 있습니다. 내일을 알기 위해선 어제만 보면 충분
할 날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이라는, 그 뭔지 알 수 없어서 가
슴 설레게 하는 단어가 의미를 잃어갈 거란 말입니다. 내가 자이펀과
싸우는 줄 아십니까?"
"그럼 당신은 무엇과 싸우는 거요?"
"현실과 싸우고 있습니다."
함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이런 진부한 대답은 기대하지 못했다.
카알 역시 싱긋 웃었다.
"진부한 말이지만, 지금 내 싸움은 그 말 이외에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군요. 나는 현실은 안정적이라는 모든 믿음에 대항해 싸우고 있
습니다. 현실을 고정시키려는 모든 의지와 싸우고 있지요. 정의, 신
뢰, 우정, 사랑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내 싸움은 그런 것입니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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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과 메모 남겨주시는 여러분들께 항상 감사하고, 동시에 죄송스럽
습니다. 지독하게 답장 안쓰기로 소문난 타자. 으으윽. 타자의 인형을
만들어 벽에 걸고 옴마니밧메홈와 아브라카다브라를 100번 암송하시고
축복받은 다트를 던진다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종파를 구분할 수가
없군.)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9192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17 01:21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5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5.
쳉은 조용조용한 어투로 말했다. 그의 성격 때문이다.
"죄송합니다만 저희들도 이 배를 크게 신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남
해의 따뜻한 바다를 오가던 배가 북해의 얼음바다 속에서 안전할 수
있다고 믿는 바보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
한 배는 이 배뿐입니다."
이시도 역시 조용조용한 어투로 말했다. 목이 쉬었기 때문이다.
"자, 자유 무역선을 깔보지, 깔보지 마시오. 에취! 이곳에서야 자유
무역선의 전설이, 전설이, 우엣취! 제기랄! 이 빌어먹을 감기라니! 이
날씨에, 이 바다! 으웃체체치아!"
쳉은 온화한 얼굴로 단어보다 기침소리가 더 많은 이시도의 말을 끝
까지 경청했다. 그런대로 들어줄만 하지만 기침소리 때문에 격조가 많
이 떨어지는 헤게모니아어로 이루어진 이시도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이 배는 그 이름 거룩하사 자유무역선 레드 서펜트이며, 우리
선원들은 불가사리보다 질기고 상어보다 사나우며 말향고래만큼이나
강인하므로, 북해의 얼음 바다 쯤은 유람하는 기분으로 항해할 수 있
다.
쳉은 고개를 조금 틀어 레드 서펜트의 선원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판
단으로 레드 서펜트의 선원들은 대합 만큼이나 두껍게 옷을 여며입고
잉어만큼이나 구슬픈 눈을 한 채 해파리만큼이나 흐느적거리고 있었
다. 하지만 쳉은 구태여 그 사실들을 지적하는 대신 자신의 용무에 충
실하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저희들을 태우고 북해로 가주실 수 있습니까."
이시도는 애처로울만큼 기침을 해대고, 자이펀어로 욕설을 좀 해댄
끝에 다시 헤게모니아어로 말했다.
"하, 하지만 우린, 우리 용무가 있소. 훌쩍. 우리는 이곳 탄느완의
상공회의소 대표부와, 와, 와찻치아츄! 에, 대표부와 상의하여, 이곳
에서 탄느완 주재 자이펀 상관(商館) 설립을, 을, 위한 기초 조사를
할 생각이오. 게다가 어, 어차피 우리는 여객 수송은 하지도 않소. 이
잇치!"
이시도는 신차이가 말한 대외적인 목적을 그대로 말했다. 하지만 신
차이는 탄느완 주재 상관이 없다는 것에 착안하여 그런 일거리를 만들
어내었을 뿐 거기에 열심인 것은 아니며, 그런 자신의 속셈을 부하 선
원들에게 숨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현재 신차이와 레드 서펜트의 고급
선원들이 몇몇 탄느완의 상인들과 접촉하고 있긴 있지만 사교적인 만
남 이상으로 진행되지는 않고 있었다. 지금도 신차이는 탄느완의 한
거간꾼과의 점심 식사를 위해 배를 떠나있었기에 이시도가 감기에 걸
린 몸을 이끌고 나와 쳉을 상대해야 했다.
이쯤에서 이시도가 괴로워하고 있는 혹독한 감기에 대한 동정심을 표
해주면 좋으련만, 쳉은 여전히 차분하고 간결한 어조로 자신의 용건에
대해서만 말했다.
"상관 설립을 위한 회견이 목적이라면 배는 필요 없잖습니까. 탄느완
상공회의소와의 회의를 담당할 전담 팀들만이 육상에 남아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일 텐데요. 그 동안 배는 할 일이 없을 테고, 저희들을
태워주실 수도 있을 듯합니다만."
감기 때문에 졸도할 것만 같은 컨디션이었지만, 이시도는 호기심을
느꼈다.
"도대체 부, 북해에는 뭐하러 가시려는 거요? 에취! 얼음과 물밖에
없, 없는데?"
"일주일 전까지는 그랬지요. 하지만 지금은 얼음과 물 이외에 하나가
늘어났습니다. 일주일 전 쯤 약 삼, 사십여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를 싣고 이곳을 떠난 배가 있습니다."
"아아, 나도, 츄! 그 이야기 들었수. 배를 통채로 사서, 사서 출발했
다며?"
이시도는 상륙하자마자 사이록의 수평선에 북방의 검법을 접목시킴으
로서 화룡점정하겠다는 거창한 대외적 목적을 내건 채 탄느완의 술집
을 누볐으며, 그 결과로 다양한 풍문과 숙취와 멍자국과 이 지독한 감
기를 얻었던 참이다. 그래서 이시도는 거금을 쾌척하여 배를 구한 후
화급히 북해로 떠나간 일행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쳉은 고
개를 끄덕였다. 악랄한 감기에도 불구하고 이시도의 상상력은 최고성
능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아아, 그래? 흐음. 음츄! 그 사람들을 추적하, 하겠다는 말이오?"
"예."
"취! 당신은 뱃사람이 아니니, 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에
츄! 하지만 배를 추적하는 것이 들판에서 말 타고 추, 추적하는 그런
일과, 훌쩍, 비슷한 건 줄 아시오? 바다에는 길이 없단 말이오. 추!
게다가 당신이 아무리 뛰어난 추적자라고 해도 바닷물에는 자취가 남
지 않소."
쳉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시도의 말을 들은 다음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건 제가 감당할 문제군요. 그리고 제게는 그 문제들을 처리할 수
단이 있습니다. 한 가지만 빼고. 저는 가이너 카쉬냅처럼 물 위를 걸
을 수는 없습니다."
요약. 추적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너희는 배만 제공해라. 이시도
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보자, 흐음. 아츄! 재미있을 거 같은데. 어, 어쩌면 사이록의
수평선에 극풍의 매서움을 더할 기회일지도, 잇치! 모르겠군." 쳉은
사이록의 수평선이 뭐냐고 묻지 않음으로써 이시도를 좌절시켰다. 하
지만 이시도는 빨리 회복했다. "좋아, 기한은 어느 정도요?"
쳉은 그 대답을 미로부터 들어두었다.
"현재로선 삼주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삼주 동안의 냉해 항해라……" 나는 미쳤어. 이시도는 속으로 생각
했다. 자이펀의 배들 중 어떤 배도 북해의 얼어붙은 바닷물에 몸을 담
궈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어진단 말이야. 그러니 나는 미
친 거지. 그리고 이시도는 자신 내부의 목소리에 항상 성실하게 귀를
기울여왔다.
"솔직히 말해서, 에츄! 나는 하고 싶어지는데."
"……이 배는 원합니다만 당신은 안타셨으면 하는데요."
"뭐요!"
"그 감기 때문입니다. 저 바다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실 수 있을지 걱
정입니다."
쳉은 알지 못했지만 이 말이 결정타였다. 이시도는 씩씩거리며 말했
다.
"아아! 내가 타고 말고는 선장님이 결정할 문제요. 그리고 이 배에
당신네들을 태울 건지 말지도 역시 선장님이 결정할 문제고. 당신의
제안은 선장님에게 전해주겠소. 예정은 3주. 목표는 북해. 맞지요? 대
가는?"
"당신네들의 통상적인 요금 같은 것은 없겠군요. 승객 운송은 안한다
고 하셨으니. 이렇게 합시다. 나는 헤게모니아의 상당히 유력한 상단
에 소속된 사람입니다." 이 대목에서 쳉은 조금 켕기는 기분을 느꼈
다. 그는 지금 POG상단으로부터 장기 무단 결근을 하고 있는 셈이었으
니까. "이 도시에서 자이펀의 상관 건립을 돕겠습니다."
이시도는 머리를 굴려보기 시작했다. 신차이 선장의 목적은 뭐라고
하더라도 그의 사촌동생 운차이의 수색일 것이다. 신차이가 거간꾼들
이나 상인들과 접촉하고 있는 것 역시 본질적으로는 풍문을 듣기 위한
것이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심장마비에 걸리게 할 정도로 재수없는
인간의 소문을 들어보신 적 없으십니까?' 따라서, 이 배와 선원들의
거취는 운차이의 소재지에 따라 결정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함부로
대답해줄 수가 없군.
"좋아요. 훌쩍. 당신의 제안을 선장님에게 전하지요. 하지만 많이 기
대하지는 마슈. 우리 선장님이나 우리들이나 북해를 두려워할 사람은
아니지만, 별 소득이 없을 것 같은 항해는 두려워하니까."
"잘 알겠습니다."
쳉은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작별 인사를 보내었다. 이
시도는 대화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갑판을 가로질러 주승강구에 뛰어
들었고 그 뒷모습을 보던 쳉은 피식 웃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배 좌현
의 난간에 다다른 쳉은 멀리 항구쪽을 향해 신호를 보내었다. 곧 보트
한 척이 빠른 속력으로 바다 위를 미끄러져 왔다. 보트가 뱃전에 닿자
쳉은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가 보트에 승선했다. 보트를 젓고 있던 사
람들은 별 말 없이 그대로 항구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보트 뒤쪽에 앉아 항구에 도달하기를 기다리던 쳉은 잠시 고개를 돌
려 레드 서펜트를 바라보았다. 탄느완의 항구에 내항에 정박해 있는
레드 서펜트의 모습은 이채로왔다. 사방이 하얀 이 땅에서 레드 서펜
트의 붉은 돛은 섬 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그 날씬하고 스피디해보
이는 선체 역시 독특한 것이었지만 현재 항구에는 북양 항해용의 둔중
한 배가 없어서 비교해볼 수는 없었다.
북양 항해용 배는 부빙과의 충돌을 대비한 설계로 흘수선이 낮고 배
바닥이 평평하며 상당히 견고하게 만들어진다. 실제로 북양 항해용 배
는 낮은 흘수선 때문에 급격하게 다가오는 빙산 위로 얹히는 재주를
보인다. 하지만 레드 서펜트는 날씬하고 가볍게 만들어져 있으며 - 북
양 항해용 배에 비춰봐서 그렇다는 말이다. - 흘수선이 꽤 높다. 그래
서 레드 서펜트는 탄느완 부두의 낮은 수심 때문에 부두에 접안하지
못하고 이렇게 내항의 바다에 정박해있었다.
쳉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점점 다가오는 부두를 바라보았다. 탄느완 시
내의 낮은 건물들은 땅바닥을 끌어안은 듯한 모습으로 지면에 찰싹 달
라붙어있었다. 무시무시한 강풍과 집을 무너뜨릴 정도로 쌓이곤 하는
눈 때문에 이곳의 건물들은 모두 단층이었으며 납작하고 단단했다. 흙
과 이끼 뿐인 을씨년스러운 언덕들 사이로 바라보이는 탄느완 시내는
이 혹독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라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백
기처럼 보였다.
보트는 한결같은 속력으로 부두로 다가갔다. 앉아있는 것 이외에 다
른 할 일이 없었던 쳉은 보트 옆으로 갈라지는 하얀 잔물결들과 거울
같은 외해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상념이 밀고들어온 것은 당
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래서 쳉은 생각했다.
'미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쳉은 할슈타일 후작을 생각했다. 후작은 세상에 그것보다 더 당연한
말은 없다는 듯이 파를 죽이겠다는 말을 반복해왔다. 쳉이 판단하기로
후작은 자신의 부활을 야기한 신스라이프/파의 파멸을 통해 부활을 무
효화시키는 것을 지상과제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미는 후작의 그런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 역
시 파의 살해에 동조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후작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일까?
마침내, 쳉은 미와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행이 묵고 있던 여관에 도착한 쳉은 홀의 커다란 벽난로 앞에서 엉
덩이를 나란히 붙인 최대한 밀착한 모습으로 모여앉은 후작 일행의 뒷
모습을 보곤 싱긋 웃었다. 후작과 궤헤른, 사무엘, 니크, 가이버는 체
면불구하고 담요를 뒤집어쓴 채 벽난로 앞에서 무더기가 되어 앉아있
었다. 여관의 주인은 안쓰러운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장작더미를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의 인기척을 알아차린
궤헤른은 고개를 돌려서는 턱을 딱딱 부딪히는 얼굴로 쳉을 맞이했다.
"어떻게 됐소."
"선장이 없더군요. 일등 항해사에게 제안을 전달했습니다. 내일 다시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수, 수고하셨소. 추울 텐데 여기와서 몸 좀 녹이시오."
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벽난로 앞의 조그마한 공간은 다섯 명의 거
한들을 수용하기에도 모자라보였다. 궤헤른 역시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쳉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대신 꼼짝도 하지 않는 후작
의 등을 잠시 바라보았다. 후작은 난로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에 시선
을 고정시킨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쳉은 궤헤른에게 몇 마디
위로를 건네고는 발걸음을 돌려 미의 방을 향했다.
방문 열리는 소리에 침대 가에 앉아있던 아달탄은 귀를 쫑긋 세우며
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들어선 사람이 쳉인 것을 알아차리자 아달탄
은 다시 앞발 위에 머리를 얹고는 졸기 시작했다. 미는 침대 위에 앉
아서는 침대 옆의 창턱에 팔을 고인 채 앉아있었다. 덧창을 열어젖혀
창문 밖으로 탄느완의 얼음바다가 잘 보였다. 멀리 계곡을 타고내려오
는 빙하는 희박한 햇살 아래에서도 신비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쳉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미 비바체 그라시엘."
미는 고개를 돌려 쳉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의아로움이 떠올
라있었다.
"빼먹었잖아."
"응?"
"정식으로 부르고 싶었다면 앞에 '사랑스러운'을 붙여야지."
"미안해."
쳉은 고개를 살짝 숙여보인 다음 방을 가로질러 침대 발치에 앉았다.
미는 무릎을 굽혀 쳉이 앉도록 해주었지만 쳉이 앉자마자 그의 무릎
위에 두 발을 올려놓았다. 쳉은 피식 웃으며 미의 조그마한 발을 내려
다보았다.
"정강이에 살 좀 빼."
"근육이야, 그거."
미는 쳉의 무릎 위에 편안하게 다리를 올려놓고는 허리를 뒤틀어 다
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쳉은 입을 다문 채 미의 발가락을 만지작거
리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들
의 일을 계속했다. 침대 위가 너무 고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달탄
이 머리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별다른 흥밋거리를 발견하지 못
한 아달탄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다음 다시 앞발 속에 머리를 파
묻었다.
미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말하고 싶은 것이 뭐기에 그렇게 분위기 잔뜩 잡으며 부른 거지? 거
기 시원하다. 좀 긁어볼래."
"무좀 아니야?"
"손에는 옮지 않을 테니 긁어봐. 이키키키! 거기 말고. 간지럽잖아.
까르르륵!"
"흐음. 파를 따라잡으면 어쩔 생각이지?"
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눈만 깜빡였다. 미의 옆얼굴을 보던 쳉은
고개를 돌려 아달탄의 갈비뼈 부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내려다보
았다. 미는 조금 후에 말했다.
"그런 질문을 받는 건 처음인 거 같네. 미래에 어쩔 거냐는 식의 질
문."
"퓨쳐 워커잖아."
"그래. 맞아. 미는 퓨쳐 워커. 그러니 그런 질문은 싫은걸. 어떻게
해야 될지 생각해야 된다는 건 미에겐 참 중노동이거든."
"걷는 연습을 해봐."
"해보자…… 음. 하지만 역시 파에게 달린 문제인걸."
"파에게?"
"응. 파에게 달린 문제야. 아니, 그건 모든 사람들에게 마찬가지겠
다. 응. 지금부턴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각자에게 달린 문제가 될 거
야."
쳉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언제의 누구에게든 마찬가지의 말인 것 같은데."
미는 창밖을 향해 흥얼거리듯이 말했다.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걸. 미는 파가 아니고, 파는 미가 아니
고. 미는 미대로. 파는 파대로. 쳉은……"
미는 말끝을 흐뜨러트렸다. 쳉은 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미는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돌려 쳉을 바라보았다.
"혹시 모르니, 할 건 해두자."
"할 거?"
미는 쳉의 무릎 위에 얹어두었던 다리를 오므렸다. 그리곤 침대 위에
두 손을 짚고는 쳉에게 기어와서는 그의 바로 옆에 앉았다. 쳉은 가만
히 앉은 채 미를 바라보았다. 미는 쳉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다가
두 팔을 들어올렸다.
미의 두 팔이 쳉의 목을 감아들어갔다. 그의 목 뒤에서 만난 그녀의
두 손은 서로 조용히 얽혀들었다. 쳉은 눈을 가늘게 떴고, 미는 아예
감아버렸다. 미는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해."
그리고 미의 입술은 쳉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서두르지도 않고,
주저하지도 않는 한결같은 속도로. 쳉은 낭패스러움과 기대감, 조바심
과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으며, 자신의 감정들에 놀라워했다. 그
사이에 미의 입술은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편안함으로 쳉의 입
술과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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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남도에는 이제 슬슬 여름 분위기가 나려고 드는군요. 낮이면 꽤
따뜻하다를 넘어서 조금 더울 정도입니다. 시간들이 데굴데굴 잘도 굴
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도 밤에 창문 열어놓으니 꽤 서
늘하다….)
번 호 : 19193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17 01:22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6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6.
신스라이프는 배 난간을 부여잡은 채 바다 위로 떠가는 빙산을 바라
보았다.
바다도 빙산도 모두 젖빛이다. 선원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바다를 둘
러보았다. 혹시라도 다가와 배에 구멍을 내어버리거나 배를 통채로 수
장시킬 수 있는 빙산의 출몰에 갑판원들은 바짝 긴장해있었다. 하지만
선교 높은 곳에 자리한 선장은 무뚝뚝한 얼굴로 수평선을 바라볼 뿐
옆에 서있는 조타수에게는 눈길도 보내지 않고 있었다. 선장은 조타수
를 믿고 있었고, 조타수는 선장이 자신을 믿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그들이 서로에게 어떤 신뢰감을 표현하는지 알
바가 아닌 상태였다.
그의 속에서 파는 날뛴다는 표현이 적합할만큼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
다. 신스라이프는 어금니를 사려물었다. 이제 파는 거의 자의식을 찾
아가고 있었고 그래서 신스라이프는 초조했다.
'이 차가운 바다가 너를 일깨우는 건가? 아니면 시축인가? 시축일 가
능성이 높군.'
'시간축…… 부른다……'
띄엄띄엄이긴 하지만 파는 이제 대답까지도 하고 있었다. 신스라이프
는 웃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너무 늦었어.'
'나…… 퓨쳐……'
'넌 미래가 아니야. 넌 현재이고, 그것에 만족했어. 지금에 와서 부
정할 생각인가? 넌 내 손을 잡음으로써 현재와 손잡았다. 그것이 네
의지가 아니라고 말할 건가? 웃기는 소리. 나는 네 의지를 구속한 적
이 없다. 그건 네 본심이었어.'
'나…… 퓨쳐 워커……'
'퓨쳐 워커? 흐응. 이젠 더이상 그렇게 주장할 수 없다. 다가오는 시
간축이 너에게 무엇을 줄 거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왜 반항하는가. 넌 내 속에서 영원한 현재를 만끽할 수 있다. 그것이
네가 원한 것 아닌가?'
'나…… 파 라르고 그라시엘…… 퓨쳐 워커……'
"제기랄, 집어쳐!"
신스라이프는 고함을 내질렀다. 메인 마스트 아래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발레드와 쥬블킨은 당황하며 신스라이프의 등을 바라보았
다. 신스라이프는 뱃전을 단단히 움켜쥔 채 상체를 앞으로 크게 내밀
고 있었다. 발레드는 그가 투신하려드는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다음
순간 신스라이프는 상체를 확 쳐들었다. 뒤로 꺾어져라 고개를 치켜든
신스라이프는 하늘을 쏘아보았다.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이냐. 그래! 넌 파 라르고 그라시엘이고, 사
이들랜드의 양치기이고, 23 년 동안 몇 개 쯤의 추억을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여자다. 그래서? 네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
야! 그 외엔 전부 내가 준 것이다. 내 것을 돌려받겠다는 것이다!'
신스라이프의 손가락들은 어느새 하얗게 변한 채 뱃전의 단단한 나무
를 파고들고 있었다. 나무가 부스러지는 소리에 쥬블킨과 발레드는 크
게 놀랐다. 그들이 뭐라고 말하며 다가왔지만 신스라이프는 알아차리
지 못했다. 신스라이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모든 신경을 그 내부로
집중하여 파의 대답을 기다렸다. 파는 조금 느리게 대답했다.
'시간은…… 누가 멈추는가……'
'누가 너로 하여금 시간을 멈출 수 있게 해줬느냐! 누가 너에게 그런
힘을 줬느냐, 추억이 더이상 멀어지지도 잊혀지지도 않게 하고, 보고
싶지 않은 미래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힘을 줬느냐!'
'거절…… 한다. 도로 가져가……'
'의미를 생각하고 말해!'
신스라이프의 거센 분노는 파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가 막 뭐라고
말하려 했을 때, 갑자기 그의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신스라이
프는 홱 뒤로 돌았다. 실수였다. 그의 시야에 쥬블킨과 발레드의 걱정
스러워하는 얼굴이 들어온 순간, 그 얼굴들은 서로 뒤섞여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신스라이프는 균형을 잃고 주춤거렸다. 발레드가 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신스라이프에게는 그 손이 흉기처럼 보였다. 신스라
이프는 비틀거리며 계속 뒤로 물러났다. 빙글빙글 도는 시야 속으로
쥬블킨과 발레드의 얼굴이 서로 반대쪽에서 스며들어왔다가 나갔다를
반복했다. 그 얼굴들은 고함을 지르고 있었지만 신스라이프에게는 아
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신스라이프는 그대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갑판에 쓰러졌다. 갑판에 구겨지듯 쓰러진 신스라이프는 하늘을 보았
다. 회색으로 일렁거리는 하늘. 유백색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서 눈
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사방으로 흩어지는 눈발을 바
라보며 기절했다.
"정신이 드십니까."
신스라이프는 그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으
면 저 질문은 반복될 것이다. 귀찮군. 신스라이프는 조금 전까지 그가
희롱하던 무의식의 세계에 작별을 보내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선실의 거무튀튀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배의 흔들림에 따라 몸이
가볍게 출렁거렸고 신스라이프는 구토감을 느꼈다. 그는 힘없이 고개
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은 침대 옆의
벽이었다. 이런. 감각이 엉망진창이군. 신스라이프는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도르네이의 얼굴이 보였다.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도르네이……"
"예. 그렇습니다. 정신을 차리셨군요. 하루 하고도 반나절 만입니
다."
신스라이프는 뭐가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냐고 물으려다가 주춤했다.
기절? 아아, 기절했었나. 신스라이프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보았다. 그
러자 낯선 감각들이 온몸으로부터 몰려왔다. 이건 뭐지? 신스라이프는
시트 아래로 손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만져보았다. 그리곤 자신이 셔
츠 한 장만 걸친 채 누워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의아쩍은 표정
으로 도르네이를 바라보았다.
도르네이는 계면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 그러니까…… 기절하신 동안 옷수습을 해야 할 일이 좀 있었습
니다."
"똥오줌을 내놓았나."
"……예."
신스라이프는 쓰게 웃었다.
"누구야? 재미 본 녀석이."
도르네이 역시 피식 웃었다.
"저였습니다. 물론 옷을 벗기고 닦기도 했습니다만 특별히 재미있지
는 않았습니다. 아들네미 조그마했을 때 기저귀 수발하던 추억이 잠시
되살아나는 정도였지요."
"알았어. 옷은 준비되지 않았나."
"빨래는 해놓았습니다만 여기선 빨래 말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더
군요." 도르네이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선실 가운데에는 조그마한 화
로가 놓여있었고 그 위에 신스라이프의 바지와 속옷 등이 널려 있었
다. "조금 더 기다리셔야겠습니다."
신스라이프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 간단한 동작을, 신스라
이프는 조각조각내어 시도해야 했다. 팔이 후들거렸고 허리에서는 둔
한 통증이 전해져왔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도르네이는 신스라이프가
침대 옆으로 다리를 내놓자 점잖게 고개를 돌렸다. 신스라이프는 자신
의 다리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다리엔 아직 힘이 안들어가는군. 옷을 건네주겠나? 입고 있으면 마
르겠지."
"그러고 싶으시다면. 거의 다 마른 것 같습니다."
도르네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신스라이프에게 옷가지를 건네고는 다시
벽을 바라보는 자세로 앉았다. 옷을 입던 신스라이프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왜 너 혼자뿐이지?"
"지금은 밤입니다. 다들 자고 있을 겁니다."
"그럼 네가 혼자서 날 간호했다는 말인데, 다른 녀석들이 허락했나?
넌 날 죽이고 싶어할 걸로 짐작하는데."
"그래도 전 콜리의 지팡이입니다."
다부지게 말하던 도르네이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 모르겠군요. 죽은 프리스트라고 해야 할지. 콜리께로 가지
않고 다시 이 지상으로 돌아왔으니 그 분의 지팡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콜리에게 기도하게. 신앙을 달라고. 자네들 신의 몽상가들에게는 퍽
어울리는 일이겠지."
"몽상가?"
"자네들은 꿈의 신을 믿지 않나."
"아, 예……"
도르네이는 대답하긴 했지만 신스라이프의 설명이 어딘지 미흡하다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신스라이프는 더이상 말하고픈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옷을 다 입은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도 가서 눈 좀 붙이게. 난 이제 괜찮으니. 한 숨 더 자겠어."
"그러시겠습니까?"
도르네이는 일어나 테이블 옆에 놓아둔 등불을 들어올린 다음 선실
문을 향했다. 문을 열기 위해 손을 올리던 도르네이는 갑자기 멈춰서
서는 뒤로 돌았다. 신스라이프의 두 눈이 조용히 도르네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르네이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말했다.
"피로하실 텐데 죄송합니다만……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가."
"저는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겁니까?"
"무슨 말이지."
선실은 끝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단조롭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는 삐걱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도르네이는 왠지 서글퍼지는 느낌을 받았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스라이프께서는 아마도 이런 현실에서 깨어나
길 바라시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죽은 자들이 제멋대로 살아나는
현실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부활을 성취하신 당신이 이렇게 이상한
항해를 하시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짐작을 말해보거라."
"이 상황을 타개하시려는 거지요?"
신스라이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도르네이를 바라보았다. 도르
네이는 기대감 섞인 눈빛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그리
고 그 부활에 사용된 의식들과 마법들은 이상한 부작용을 만들어냅니
다. 저 같은 자가 그것이죠. 그럼 당신은 당신이 살아갈 새로운 나날
을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이 이상한 현상들을 타개하시려 하실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치고, 그래서?"
"이 상황이 타개되면, 저는 다시 죽는 겁니까?"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추운 배 위에서 두텁게 옷을 입
고 있건만 도르네이의 모습은 쓸쓸하고 황량해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등불은 작고 가냘프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의 서글픈 눈빛은 잔설 속을
오가는 배고픈 길짐승의 그것과 비슷했다. 신스라이프는 말해줘야겠다
고 결심했다.
"나는 모른다."
"모르신다는 것은……"
"네게 달린 문제다."
"예?"
신스라이프는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눕혔다.
"미안하지만 불 좀 끄고 나가주게."
"신스라이프……"
"그건 자네가 결정할 문제야. 더 이상은 말해봤자 소용없을 걸세. 좋
은 밤 되게."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머리 위까지 시트를 끌어올렸다. 도르네이는 당
혹감과 이유없는 슬픔으로 시트 아래의 신스라이프를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미안하지만이라고 했나? 신스라이프. 당신이 그런 말을……?
도르네이는 테이블로 다가가 등잔의 불을 껐다. 선실은 삽시간에 어
두워졌다. 도르네이는 등불을 들고 선실을 나왔다. 선실의 문을 닫기
전, 도르네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신스라이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르네이는 조용히 선실의 문을
닫았다.
================================================================
음… 사방에 글 두드리는 일만 해도 정신이 없거늘, 타자는 요즘 발
더스 게이트에 미쳐있습니다… 으흐흑! NPC들이 제멋대로 대사를 말하
는 것에 엄청나게 감동…. Kivan! 최고다! 컴포짓 보+1 으로 쏘아대는
애로+1 의 위력에 감격하여 재산을 거덜내어가며 화살을 구입했으나…
퍼버벅! 주인공이 코볼드 코만도의 화살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로드하
시겠습니까? 음음…
???? : 사망이 무슨 색깔인지 아니?
타자 : 아니, 어디서 많이 듣던… 어허헉! 붉은색…
게임은 적당히 합시다.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9426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21 00:38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7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7.
탄느완의 수면은 마치 수은처럼 무겁고 잔잔하게 보였다. 실제로 선
원들이 무거운 물이라고 부르는 바다인 것이다. 이곳의 물고기들은 결
빙되기 직전의 바스락거리는 물을 들이마신다. 얼음장 같은 수면을 바
라보던 할슈타일 후작은 고개를 돌려 신차이 선장을 마주보았다.
"왜 나를 그렇게 보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당신은 산 자가 아니오."
할슈타일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웃은 사람은 그뿐이었다. 이시도는
눈을 크게 떴고 궤헤른은 반대로 눈을 가늘게 떴다. 쳉은 미의 어깨를
감아안은 채 뒤쪽에서 고요한 눈으로 신차이 선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차이는 갑판 위의 덱체어에 앉아서는 긴 외투를 어깨에 걸친 채 팔
짱을 끼고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떨어진 눈송이들이 녹았
다가 다시 얼어붙어 옷은 금속성의 광택을 띄고 있었고 신차이 선장의
얼굴 역시 밀납 빛깔을 띄고 있었다. 궤헤른은 그 얼굴이 이 새하얀
하늘 아래에서 아름다워보인다고 생각했다. 할슈타일은 커다란 망토를
신경질적으로 여미며 말했다.
"콜…… 콜록! 그럼 난 뭐지."
"당신을 설명할 언어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거나 내가 들어보지 못
한 거 같소."
"자네는 누구의 지혜를 잇는 거지."
"바다."
"바다. 감히 그림 오세니아의 지혜를 잇는다고 말하는 건가. 그럼 최
후의 헬카네스에게 묻겠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르겠소."
대답하며 신차이는 부스스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자 쳉은 이 사내가
얼마나 위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우람한 체격도 아니었지만 쳉은 신차이 선장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장신의 쳉에게는 희귀한 일
이었다. 똑바로 일어난 신차이는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시도 군에게 듣기로 당신들은 누군가를 추적하고 싶어한다고 들었
습니다. 누구를 고 있는 겁니까?"
"내 죽음의 열쇠 보관자."
할슈타일 후작은 나직하게 말했고 신차이 선장은 그 대답이 버겁다는
듯이 얼굴을 조금 돌렸다.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아야 간신히 알아차
릴 수 있는 싸락눈이 춤추듯 흩날리고 있었다. 빙하의 기슭에 힘들게
자라난 가문비나무 가지들은 흰 견장을 달고 있었지만 바다는 빨아들
이듯 눈을 흡수하고 있을 뿐 잔물결조차 없이 고요했다. 신차이는 다
시 고개를 돌려 후작을 보았다.
"진정한 죽음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번 죽어봤기에,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아니까."
신차이는 후작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른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
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쳉의 겨드랑이 아래 가냘픈 모습으로 서있
는 미의 얼굴이었다. 신차이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쳉에게로 시선
을 돌렸다.
"당신들은 전부 이 분의 수하들입니까?"
"나와 미는 아닙니다."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기…… 미를 돕는 것입니다."
"그래요?"
신차이는 다시 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쳉을 향하고 있
었다.
"그 아가씨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쳉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자이펀인들의 관습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쳉은 고개를 돌려 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더욱 의아해져버
렸다. 미는 멍한 눈으로 신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홀린 것 같
은 미의 눈빛은 신차이의 온몸을 훑어내리고 있었다. 미는 조금 더듬
거리며 말했다.
"미는…… 몰라요."
모른다고? 쳉과 궤헤른은 다시 놀란 표정으로 미를 바라보았다. 신차
이는 눈썹을 찌푸리다가 다시 쳉에게 말했다.
"저 아가씨는 모르는 것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인지 물어봐주겠습니
까?"
"몰라요." 미는 대답했다. "나는 정말 모르겠어요."
이번엔 후작과 미 자신을 제외한 일행 전부가 당황했다. 미가 저런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일행 전부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차이와 레드 서펜트의 선원들은 눈 앞의 사람들이
왜 놀라는지 알 수 없었다. 신차이는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가 폈다.
탄느완에서는 큰 볼일이 없다. 대충 알아본 바로 상관 설립은 가능할
것 같았다. 일스를 경유하는 중계무역의 항로의 설정, 그리고 탄느완
주재 상관 설립과 그 부대 비용, 유지비 등에 대한 대충의 계획서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신차이는 그것으로 선주나 선주연합에
제출할 항해 성과로는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자이펀으로 돌아
가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신차이의 고민거리였다. 운차이의 소식을
알아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일이었기에 이곳에 체류할 이유
는 되지 못한다. 물론 선원들은 그의 결정을 존중하겠지만……
3주라. 신차이는 생각했다. 3주 동안 북해를 조금 돌며 해도를 작성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다시 탄느완으로 돌아와 운차이
의 소식을 좀 알아본 다음, 그 결과에 따라 차후 행동을 결정하자. 어
쨌든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신차이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 기
간이라면 이 불가사의한 인물에 대한 탐구도 가능하겠지.
"승선을 허가하겠습니다. 출항일은 언제로 하면 좋겠습니까? 추적이
니만큼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듯합니다만."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어떤가."
"오늘 저녁 썰물 때 가능할 겁니다. 저녁식사 시간 후가 되겠군요."
"알았어. 준비는 크게 필요하지 않겠군."
후작은 몸을 돌려 궤헤른과 니크, 가이버, 사무엘 등을 바라보았다.
이 험악한 곳까지 스스로 납득할 수도 없는 이유에 의지하며 그를 따
라와준 사내들. 후작은 조금 쿨럭거린 다음 바이서스어로 말했다.
"너희들의 봉사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니크는 충격받은 얼굴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표현은 덜할지 몰라도
다른 사내들 역시 당황한 얼굴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이대로 하선하도록. 내 말은 너희들 마음대로 처분해라.
내겐 이제 필요없으니. 너희들이 함께 자구책을 찾던지 그냥 헤어지던
지는 너희들이 결정해라. 헤어지기로 결심했다면 궤헤른이 남아있는
돈을 알아서 나누어 주도록. 하지만 되도록이면 함께 턴빌로 돌아가
라. 그리고 신스라이프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라. 어렵긴 하
겠지만, 궤헤른 자네를 믿겠다."
"후, 후작님!"
"따라갈 겁니다. 그리고 후작님과 함께 돌아올 겁니다!"
니크와 사무엘이 동시에 외쳤고 가이버 역시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
었다. 하지만 궤헤른은 조금 슬픈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후작은 일그러진 얼굴로 수하들을 쏘아보다가 갑자
기 외쳤다.
"이 머저리들!"
조금 전까지 쿨럭거리던 사람의 외침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목소리
였다. 이시도는 기겁한 표정으로 후작을 보았다.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뭘 따라오겠다는 거냐!"
"후, 후작님……"
스르렁! 후작에게 다가가려던 니크는 갑자기 튀어나온 칼날에 멈칫했
다. 후작은 검을 똑바로 들어 니크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시도는 잇소
리를 내며 재빨리 목검을 꼬나들었지만 신차이 선장은 손을 들어 이시
도를 제지했다. 후작은 타오르는 눈으로 니크와 가이버, 사무엘을 번
갈아 쳐다보았다.
"이대로 보트를 타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너희들 전부를 베겠다."
니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후작은 농담을 과히 좋아하지 않는다. 그
는 후작의 말이 진심인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니크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가이버와 사무엘 역시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 때 궤헤른이 천
천히 입을 열었다.
"즐거웠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만……"
니크와 가이버, 사무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궤헤른을 바라보
았지만 후작은 차분한 얼굴로 궤헤른을 보았다. 궤헤른은 메마른 목소
리로 말했다.
"당신을 알고 당신과 함께 했다는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을 겁니
다."
궤헤른은 고개를 조금 숙여보였다.
"안녕히, 나의 주인님."
Good bye, my Lord…… 매서운 해풍 속에서도 씁쓸함과 처연함이 가
득한 궤헤른의 바이서스어는 이시도의 귀에도 잘 들려왔다. 이시도는
알 수 없는 슬픈 감정에 눈을 껌뻑거렸다.
궤헤른은 그대로 몸을 돌려 보트를 향해 걸어갔다. 니크는 울음을 터
뜨릴 듯한 얼굴이 되어 다시 한번 후작을 바라보았지만 후작은 엄한
얼굴을 할 뿐 무언으로 그를 쫓아내고 있었다. 니크는 기어코 눈을 거
칠게 비벼대며 보트에 올랐다. 가이버와 사무엘 역시 힘없는 걸음걸이
로 보트에 오르자 궤헤른은 보트의 노잡이들에게 짧게 명령을 보내었
다.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한 보트는 탄느완의 부두를 향해 멀어져갔
다. 후작은 그제서야 검을 꽂아넣었다.
신차이는 후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배 위에서는 선장의 명령 없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후작은 희미하게 웃었다.
"걱정말게, 선장. 내 검을 지금 당장 바다 속에 던져넣지 않는 까닭
은 이것이 단 한번 더 사용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 대상
은 이 배의 그 누구도 아닐세. 부탁인데, 나를 선실로 좀 안내해주겠
나."
"먼저 항로를 가르쳐주십시오."
"그것은 저기 미가 가르쳐줄 거야. 나는 쉬고 싶네. 춥고, 피곤하
군."
후작은 강제로 떠나보낸 부하들 때문에 외롭고 슬프기도 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차이는 후작이 말하지 않은 것을 읽을 수 있었
다. 신차이는 고개를 돌려 이시도에게 말했다.
"그 분을 선실로 안내하라. 프리스트 치터리가 묵던 선실이면 되겠
군."
"알겠습니다."
후작은 옷자락을 여미며 자신의 배낭을 힘없이 들어올렸다. 이시도는
후작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놀랐다. 조금 전 검을 뽑아들고 호령하던
사내는 어디로 간 거지? 후작은 외로운 병자처럼 보였다. 이시도는 후
작을 승강구로 안내하며 부축해드리겠다는 말이 목구멍에서 빙빙 도는
것을 느꼈다.
신차이는 쳉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영문을 몰라하던 쳉은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는 미를 내려다보았다. 미는 낮고도 또박또박한 목소리
로 말했다.
"목적지는 정북. 나침반의 바늘을 그대로 따라 가주시면 되요."
"얼음, 눈, 바람. 전 싫어, 제발 싫어요, 부디 싫어요, 한결 싫어요,
추위가 싫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던 운차이는 음울하게 말했
다.
"그렇게 떠들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다른 사람들을 보시지."
"루리, 추워?"
"아니오…… 별로."
"린, 추워?"
"글쎄요."
"센츄리온, 추워?"
"이힝힝힝."
"저만 추워, 저만 추워. 불공평해. 저는 불공평한 것이 싫어. 엥엥
엥!"
운차이는 아일페사스에게 왜 추위에 크게 개의치 않는 자들에게만 질
문하면서 아프나이델이나 제레인트, 네리아 등에겐 물어보지 않는 거
냐고 윽박지르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래봤자 듣지 못한
척하거나 무시해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차이는 드래곤
로드의 딸에게 재갈을 물릴 경우 드래곤 로드로부터 몇 년 정도 도망
다니면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취향에
퍽 잘 들어맞는 공상이었지만, 그런 행동으로 인해 야기될 결과는 그
의 취향에 별로 맞지 않았다.
이루릴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일페사스. 당신은 날씨에 대한 강력한 면역이 있을 텐데요. 극지
의 블리자드나 화산의 열기도 당신을 침범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일페사스가 대답하기에 앞서 제레인트가 먼저 대답했다.
"다만…… 칭얼거리고 싶은 유혹에 대한 면역은 없는 거겠지요."
제레인트의 목소리에마저 짜증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아일페사스는
눈을 흡뜬 채 제레인트를 쏘아보았지만 갑자기 그녀의 눈 위쪽에서부
터 커다란 천이 내려와 그녀의 눈 앞을 가로막았다. 아일페사스는 천
을 들어올리며 옆을 보았고, 초췌한 모습의 아프나이델이 자신의 망토
를 풀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녀에게 덮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일페사스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나이드, 미쳤어요?"
아프나이델은 셔츠 바람으로 덜덜 떨면서도 히죽 웃었다.
"어, 언젠가는 그렇게 되었다는 이유로 존경, 존경받을 수 있는 직업
에 종사하고 있긴 하, 하지."
"너 돌으셨구나? 빨리 가져가서 입어! 인간 주제에 말이야, 얼어죽으
려고!"
아프나이델은 이를 딱딱 부딪히면서도 애써 아일페사스의 얼굴을 똑
바로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그녀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망토를 거머쥐어 아프나이델에게 내밀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안 떠들면 되시는 거잖아. 너 말이에요, 건방져.
드래곤 로드의 계승자인 아일페사스를 훈계하려는 거야?"
아프나이델은 싱긋이 웃으며 망토를 받아들었다. 아프나이델의 등 뒤
에 앉아서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엑셀핸드는 미소지었지만 풍
성한 수염 때문에 그의 입술 움직임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얼
어붙은 손을 힘들게 놀려 망토의 조임끈을 묶은 아프나이델은 아일페
사스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의 눈꼬리는 여전히 꿈틀거리며 춤을 추고 있는 상태였다.
아프나이델의 눈길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일페사스는 찌푸린
눈으로 센츄리온의 갈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주의깊게 바라본 바에 따르면 이 북쪽의 바
람이 그녀의 어깨에 닿는 순간부터 아일페사스는 모든 것에 대해 불만
스러워하고 있었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별 무리없이 정서불안이라고
말해버리겠지만 아프나이델은 드래곤에 대해서도 그런 진단이 가능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일페사스를 바라보던 아프나이델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이루릴이 표정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
었다. 아프나이델은 왠지 모르게 어깨를 조금 움츠려보였다. 다음 순
간 그의 마음 속에서 어떤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
메시지? 아프나이델은 눈을 조금 크게 뜨며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
루릴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세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신 거죠? 캐스팅하신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건 천천히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아, 예. 미안합니다.'
아프나이델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주제에 마법사라고 관심은 그런
곳으로밖에 가지 않는군. 이루릴은 여전히 앞을 바라보며 메시지를 보
내어왔다.
'저도 걱정하고 있어요. 그녀에게서 불안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인
간 여러분에게는 지독한 날씨임에 분명하지만 사실 이 추위는 그녀에
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을 거에요.'
'물론 그렇겠지요. 왜 저러는지 궁금합니다.'
'그녀는 보호받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보호요?'
================================================================
술을 마시다 마시다 지루해져 앞자리를 바라보니, 술친구가 팔걸이에
기대어 졸고 있기에 의아해서 바라본 손목시계가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을 때, 청춘은 왠지 슬프군요. 출근하는 친구들은 이미 12시 부근에
다 사라졌던 것. 남아있던 친구는 꿈의 세계로 사라졌던 것.
도대체 이 지구라는 곳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고향 친구들이 빨리 우주선을 가지고 찾아와야 할 텐데.번 호 : 19427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21 00:38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8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8.
아프나이델은 의아한 얼굴로 이루릴을 바라보았지만 이루릴은 여전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록수
의 잎들 사이로 부는 칼날 같은 바람은 어둑어둑해지는 고갯길을 더욱
스산하게 만들고 있었고 남색 하늘에 떠다니는 어두운 구름들은 제멋
대로 춤추고 있었다. 보다 온화한 날씨에서는 보기 힘든, 거의 발광이
라고 불러주는 것이 마땅할 구름의 움직임은 바라보는 사람의 정신까
지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고갯길을 일행들은 힘들게, 그러나 변함없는 끈기로 걸어올라가
고 있었다. 선두에 운차이, 그리고 후미에 그란이라는 배치는 일행에
게 강력한 추진력을 선사하고 있었다. 맹수의 으르렁거림 같은 바람
소리는 일행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만들었지만, 제레인트나 아프나이델
마저도 딱딱한 얼굴을 한 채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고갯길을 끈기있
게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갑자기 이루릴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아프나이델. 드래곤 로드는 왜 당신들에게 아일페사스의 후견인의
역할을 부여했을까요?'
'어떤 의미인지……'
'글쎄요. 지금의 이 여정을 보고 있으니 왠지 의아한 생각이 듭니
다.'
'의아하시다고요?'
'아일페사스가 이 북구까지 오게 된 이유가 뭐죠? 그녀에게 이유가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당신들을 따라오고 있는 것이
겠죠?'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이루릴은 잠시 말을 멈췄다. 어둠 속에서 거의 보이지도 않는 그녀의
검은 머릿결을 보려 애쓰던 아프나이델은 이 침묵이 이루릴의 배려임
을 깨달았다. 아프나이델, 생각해보세요. 아프나이델은 다시 아일페사
스를 돌아보았다가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아프나이델은 이루릴을 쳐다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신스라이프를 추적시키기 위해 그녀로 하여금 우리를
따라다니게 한 거란 말씀입니까? 우리는 그녀의 안내자라고요?'
'지금의 현상은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하지만…… 그건 원인과 결과가 잘 연결되지 않는……'
'원인과 결과라고 하셨나요.'
아프나이델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머릿속에서 섬광 같은 것이 지
나쳤다.
시간이 멈춘다면, 원인과 결과의 전후 관계 따위는 아무런 의미를 가
지지 못한다. 아프나이델은 곱아드는 손가락을 힘껏 구부려 주먹을 쥐
었다. 손끝에서 감각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아프나이델은 거세어
지는 심장의 박동을 가라앉혔다.
그 때, 일행의 앞쪽에서 가벼운 술렁거림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아프나이델은 앞쪽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운차이
의 뒷모습을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그가 고갯마루의 정상에 우뚝 서
있다는 것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고개를 다 올
라온 것인가? 아프나이델은 힘겹게 언덕 위로 올라섰다. 그의 등 뒤에
서 엑셀핸드의 지긋지긋해하는 탄성이 들려왔다.
"오오, 카리스 누멘이여. 이 고개를 끝나게 해주신 것에 감사드리나
이다."
마지막으로 그란과 돌맨 할슈타일이 올라선 다음, 일행들은 잠시 언
덕 정상에 모여 선 채 발 아래를 바라보았다. 내리닫는 길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검은 숲과 구불텅거리는 산자
락 사이로 멀리 평평한 어둠이 보였다. 제레인트는 눈을 찌푸린 채 발
아래를 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 바다군요. 그런데 저기 하얀 것은 뭐지요?"
이루릴이 태연스러운 어투로 대답했다.
"빙하군요."
"빙하?"
"얼음의 강…… 산정상에서 쌓인 눈이 얼음이 되어 계곡을 타고 흘러
내리는 것이에요. 마치 강처럼. 물론 강처럼 빠르지는 않습니다. 자신
의 무게로 천천히 미끄러지는 거니까요."
"Afhick, Dotimasir ba ami……"
어둠 속에서 운차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네리아는 킥 웃고 말았
다. 운차이의 목소리는 정나미가 뚝뚝 떨어진다는 투였다. 물론 그 의
미는 알 수 없었지만 운차이가 세상에 빙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에 대해 어처구니없어하며 모종의 욕설을 퍼붓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
게나 확실했다. 이루릴은 조용히 설명을 계속했다.
"그런 빙하들이 바다에 닿았을 때 부서져 빙산이 되는 것입니다. 저
기 밤바다에 흰 덩어리들이 보이시나요."
"테페리여, 저는 저것이 범선의 돛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좀 이상
하게 보이긴 했지만. 저게 얼음 덩어리입니까?"
"그렇습니다."
"불빛이…… 저기가 탄느완인가 보군요. 어두워서 길이 잘 보이지 않
는데, 거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루릴은 잠시 산자락과 검은 숲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빙하가 문제군요. 내려가는 계곡 중간에서 빙하를 잠시 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어두운 밤이라면 여러분들껜 너무 어려운 일일 것
같은데요. 서두르다가 빙하 가운데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 것은 바람
직하지 않으니 내일 오전 중에 닿을 생각을 하고 느긋하게 내려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암흑의 산속에서 엘프의 조언을 무시할만큼 무모한 자는 아무도 없었
기에 일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루릴이 가벼운 목소리
로 "자, 출발할까요." 라고 말했을 때도 일행들은 한숨만 내쉬었을 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일을 주저하지는 않았다.
아래로 향하는 길을 따라내려가며 이루릴은 다시 먼 탄느완의 도시와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때 엘프의 경이적인 시각 속으로 빙산들 사이
로 사라져가는 돛이 보였다. 저것은 범선인가. 이루릴은 잠시 그 범선
에 주목했다. 다크 실버의 바다와 화이트 블루의 빙산 사이로 그 배의
돛은 꽤나 두드러졌다. 붉은 색. 이루릴은 그 범선이 다시 빙산의 그
늘 뒤로 사라지기 직전 돛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거대한 돛 가득히
그려진 것은 붉은 서펜트의 문양이었다. 이 백은의 세계에서 그 범선
의 모습은 충분히 이질적이었지만 이루릴은 가벼운 미소만 지었다.
아름다운 배로구나.
"나는 이제 죽으면 다시는 부활하지 않을 거요. 수도에서 나는 내 속
의 가장 저열한 부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장 끈질기게 남아있던
욕망을 충족받았소."
그레이가 있었다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유곽에라도 다녀오셨습니
까?' 등의 말을 꺼내었겠지만 딤라이트와 무스타파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로쳐는 특별히 자랑스러워하지는 않는 어조로 담담히 자
신을 해부해보였다.
"명예욕이라고 부르는 것이겠지만, 더 본질적인 의미에서 심사라고
해도 좋소. 나 자신의 생을 객관적인 누군가에 의해 심판받고 싶다는
것이지. 수십 세대 후의 필부필부인 후예들이 공정한 심사관들이 되는
지 어떤지는 따지고 싶지 않아요. 어쨌든 그 심사를 받았고 좋은 점수
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당신들도 아마
알 거요. 은빛 갑주로 성장하고 퍼레이드를 해본 경험이 있을 테니."
무스타파는 피식 웃었다.
"짜릿하죠."
무스타파의 눈은 과거를 보고 있었다. 그는 목을 조금 울리며 말했
다.
"오로지 나를 위해 환호하는 사람들의, 서로 잘 구분되지도 않는 얼
굴들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라면, 거의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 들지
요."
"내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소. 늙은이의 주책이지."
솔로쳐는 지팡이를 세워들며 말했다.
"나는 자랑삼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오. 솔직히 말하자면
혼자서 그 기쁨을 그러안고 무덤으로 돌아가고 싶소. 내가 이 이야기
를 꺼내는 까닭은 당신들을 위해서요.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 속에 응
어리진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길 바라오. 난 당신들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지는 못해요. 그리고 이 시대에서, 당신들은 당신들 자신만큼
이나 당신들을 잘 아는 사람을 결코 찾아내지 못할 거요. 그러니 스스
로에게 물어보고, 스스로 찾아내시오. 그럼 당신들은 다시 죽을 수 있
을 거요."
말을 마친 솔로쳐는 딤라이트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딤라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테이블을 쏘아보고 있었다. 솔로쳐는 근심스러웠
다. 저 강직한 성기사는 자신 속에 응어리져 자신이 평생 동안 섬겨온
진리를 거부하게 될 정도로 강력한 안타까움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
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알 수 없는 안타까움 때
문에 나는 기사의 본분도, 오렘의 명예도 저버린 채 이 지상에 다시
돌아왔단 말인가? 딤라이트는 고래고래 고함질러 부정하고 싶을 것이
다. 하지만 딤라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로쳐는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에 앉아있던 네번째 사람을 바라보았
다.
"레티의 검이여."
레틴드롤스는 처연한 얼굴로 솔로쳐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젖어있는
눈가를 못본 척하며 솔로쳐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절대적 위기에서 자신을 파괴한 당신의 결정, 누가 보더라도 과연
그래야 했을까 의심되는 것은 당연하오. 더군다나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라면 더욱 그렇지. 그러니 그렇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소."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부끄럽습니다."
"아니,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소. 그런 결정을 내리면서도 마음 속에
한 점 의혹이나 주저함이 없었다면 그 자야말로 비인간적이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손가락이나 발가락 하나를 희생하라고 해도 우선
거절부터 할 것이오. 당신은 인간적이었고, 인간들 중 그 누구도 당신
을 힐난할 수 없을 거요. 그리고 설령 레티께서 현신하신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변호하겠소."
레틴드롤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로쳐님. 저는 들었습니다. 제가 죽은 다음에 많은 형제들이 저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하지만 그 형제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
다. 저만이 레티에의 길을 거부하고 이 지상에 미련을……"
"그게 아니오!"
솔로쳐는 거칠게 외쳤다. 레틴드롤스는 입을 다문 채 솔로쳐를 바라
보았다.
"그래요! 그 전투에서, 많은 레티의 검이 당신을 따라 자신을 파괴했
소. 그리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소. 하지만 거기엔 분명히 차이가 있
소! 당신은 다른 누구의 본보기도 없는 상태에서 가장 먼저 그것을 시
도했소. 당신의 불안이 가장 큰 것은 당연하잖소? 다른 형제들은, 제
길. 내 입을 용서하시오. 그 작자들에게는 화려한 군중심리의 응원이
라도 있었을 거요. 네가 하니 나도 한다는 식의.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런 응원도 없었단 말이오. 도대체 뭘 부끄러워하시오? 당신은 힘든
길을 갔고, 혼자서 가야했던 그 여정에서 당신이 받았을 고통은 동정
의 소지는 있어도 결코 경멸받을 수는 없는 것이오!"
레틴드롤스는 고개를 숙였다. 솔로쳐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레티께서 당신들에게 그런 권능을 부여한 것은 스스로의 생존을 경
멸하라는 뜻은 아니실게요. 그 분은 파괴신이시지만…… 아니, 관두겠
소. 성직자와 교리를 논하려드는 것은 마법사의 자세가 아니지. 부탁
이니 스스로를 부정하지 마시오. 당신 역시 스스로를 똑바로 봐야 하
오. 고개돌려 외면해버리기만 똑바로 볼 수 없소. 당신의 hjan이 무엇
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당신을 직시해야 할 거요."
"명심하지요."
할 말은 끝났고, 솔로쳐는 천막의 휘장을 걷어올리며 밖으로 나왔다.
천막 안에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숙고해볼만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야전막사의 바깥에서는 거대한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선 채 조용히
주위를 응시하고 있는 전사가 있었다. 지나가던 켄턴 시민들 모두가
한두번씩 돌아보고 있었지만 전사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솔로
쳐가 나오자 전사는 부드럽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솔로쳐는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에카드나. 거기 그렇게 서있는 것, 힘들지 않나?"
용아병 에카드나(Ekardnah)는 솔로쳐가 그에게 왜 이런 이상한 이름
을 붙였고, 그런 작명을 통해 어떤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가에 대해
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들지 않습니다."
"자네 종족에 대해서 심도있게 연구해본 바가 별로 없어서 내가 잘
모르는 바가 많군. 자네에겐 어떤 욕망이 있지? 만일 내가 자네의 봉
사가 필요없다고 말한다면 자네는 어떻게 되는 건가."
"지금 대답해야 합니까?"
"어렵지 않다면."
에카드나는 솔로쳐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맑고 그 안에
서는 어떤 종류의 감정의 일렁거림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렵군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것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나셨습니까?"
"흐음…… 지내다보면 목적이 생길 거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저는 현재로선 아기와 마찬가지니까요. 세계에
대한 어떤 은원이 생겨난다면 제 목적도 생겨날지 모르지요."
"나는 단수가 아니니까? 하하하."
에카드나는 솔로쳐의 웃음의 이유도 알지 못했지만 별 말을 하지 않
았다. 솔로쳐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좋아. 하지만 한 가지 부탁은 하지."
"말씀하십시오."
"내 복수를 하겠다느니 뭐니 하는 말은 하지 말게. 내가 어떤 방식으
로 죽든. 특별히 말해두는 이유는, 내가 자네의 소환자이기 때문이야.
어쩐지 부모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걸."
에카드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솔로쳐는 허허 웃었다.
"즐거운 인생이 되길 바라네.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는. 남겨진 미련
을 발에 묶고 걷기에 저승길은 너무 길다네. 그런 건 훌훌 털어버리고
걸어야하지."
"솔로쳐?"
솔로쳐는 들고 있던 지팡이를 힘차게 휘두르며 걷기 시작했다. 그는
에카드나의 곁을 지나치며 말했다.
"경험에서 나온 말이야. 명심해."
에카드나는 잠시 솔로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솔로쳐는 인사를 건
네어오는 켄턴의 경비대원들과 시민들에게 미소와 따스한 인삿말들을
건네며 걸어가고 있었다. 지팡이를 쥔 손은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고
햇살 아래 그의 뒷모습은 꼿꼿했다.
루손은 글레이브의 칼날을 붙잡을 뻔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자신의 몸에 익숙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가까스로 손바닥만 조금 베어먹은 루손은 손을 재빨리 입으로 가져가
피를 핥았다. 그리고 루손은 다시 글레이브를 꼬나들었다.
레이저는 담담하려 애쓰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거기서……?"
계곡 바닥에 앉아있던 거인은 피로한 얼굴로 절벽 위의 레이저와 루
손을 바라보았다. 거인이 앉아있던 계곡 바닥은 까마득하게 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인은 레이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기다릴 것이다."
루손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취아악! 누가 그냥 죽게 내버려둘까! 츄, 츄칫!"
목숨을 걸고 발악하듯이 외친 고함소리였지만 거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레이저는 손을 들어 루손을 제지하며 말했다.
"그만, 루손. 복수는 성립될 수 없어. 나크둠은 살아났잖아."
"어? 츄, 그런가?"
루손은 얼떨떨한 얼굴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취치! 하지만 거인이 나크둠을 죽인 건……"
"관두자, 루손."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지만 루손은 입을 다물었다. 레이저는 다시
거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그덴산을 정복하러 돌아온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
거인은 눈을 들어 주위로 펼쳐진 산자락과 계곡의 흐름을 굽어보았
다. 레이저 역시 무의식 중에 거인을 따라 그덴산 주위로 펼쳐진 신록
의 파도를 바라보았다. 대지를 박차고 솟아오른 절벽과 봉우리들, 녹
색의 숲 사이로 우뚝 솟아로는 붉은 암벽과 그 위로 휘감아도는 구름
의 물결. 밀생한 자작나무의 숲 옆으로 켜켜히 쌓인 암석들은 시간의
비망록처럼 그곳에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레이저는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놀라움에 경직했다. 그는 이런 그덴산
을 본 적이 없었다. 바로 이 장소에서 볼 때의 그덴산의 아름다움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레이저는 불현듯 알아차렸다. 거인은
이 장소를 알고 있었겠지. 그는 그덴산의 주인이었으니까. 그는 이 장
소에서 바라보는 그덴산의 이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그래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겠지.
거인은 약간 졸음이 섞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 아름다운 그덴산이 아니면 나는 어디서 최후를 기다리겠는
가."
레이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질투심까지 느꼈다.
방랑자가 촌락의 농부에게 느끼는, 그리고 유목민이 농경민에게 느끼
는 질투심과 비슷한 질투심. 레이저는 일그러진 눈으로 세상 그 어느
곳에, 최후에 그곳에 있고 싶은 장소를 가지고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거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조그마한 자들은 시간의 수원까지 거슬러올라갈 것이라 믿어지
네. 그리고 그들은 막혔던 수원을 뚫고 새로운 시간이 세상에 흐르게
할 것이네. 그 때 세상에 흘러넘칠 시간의 강물은 나를 씻기고 과거로
나를 돌려보내겠지. 과거의 먼지는 씻겨지고, 과거의 추억은 강물 속
에 흩어져 사라지겠지."
거인은 이대로 산이 되고 암석이 될 것이다. 기다림 자체를 뛰어넘어
서. 레이저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먼곳을 바라보던 거인은 보고
싶은 것을 다 보았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무릎에 고개를 떨
구기 직전, 거인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시작되어 영원히 계속될 내 휴식을 방해하지 말아주게."
그리고 거인의 눈꺼풀은 닫혔다. 거인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고, 그리
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은 나뭇잎들을 한웅큼 날
아와 거인의 바위 같은 어깨에 뿌렸다. 그것은 그덴산이 그의 유일하
면서도 진정한 주인에게 보내는 마지막 작별인사였다.
레이저는 목이 메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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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9960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5-02 01:54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9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9.
이시도는 할슈타일 후작을 보고 있었고, 할슈타일 후작은 쳉을 보고
있었고, 쳉은 미를 보고 있었고, 미는 신차이 선장을 바라보고 있었
다. 신차이의 경우, 레드 서펜트의 이물에 서서는 결빙되지 않았을 뿐
얼음이나 다름없는 차가운 북해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은 북해의 바닷물을 닮아있었다.
연쇄의 고리에서 쳉이 조용히 일어나 자신의 자리를 비웠다.
캡스턴 옆에 놓인 물통에 앉아 다리를 조금 흔들고 있는 미에게 다가
선 쳉은 그녀의 오른쪽 갑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오른쪽을 선택
한 이유는 왼쪽에는 아달탄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는 고개를
조금 돌려 쳉의 덥수룩한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빗질 좀 해라. 바람 맞아서 엉망이잖아. 저 사람들처럼 머릿수건을
하는 건 어때?"
"네가 거기 앉아있음으로해서 이 배의 선원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건
아니?"
"응? 무슨 말?"
"이 배의 선원들은 자이펀인들이야. 그래서 목이 마르다는 이유로 네
게 다가와 좀 비켜달라고 말할 사람들은 아니라는 거지."
미는 히죽 웃고서는 물통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들에게 레이디를 상대로 말하는 법을 가르치자. 그들도 세상의 반
을 구성하고 있는 자들을 완전히 무시한 채로 살 수는 없을 텐데?"
"무시하는 건 아닐지도 몰라. 오히려 너무 강하게 인식하고 있는 걸
지도. 난 잘 모르겠어. 음. 언젠가 일스의 술집에서 모래바람 풀풀 풍
기는 상인 친구와 대작하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자이펀인들은 다른 여
자들에게는 눈길도 보내지 않는 만큼 자기 아내에게는 퍽 살갑게 대해
준다는 둥의 이야기를 들었어……"
쳉은 자신의 모자란 이야기 실력을 잘 알고 있었지만 미를 상대로 할
때 그런 것을 신경쓸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쳉은 자신이 들었던 소박
한 이야기들을 천천히 말했고 미는 여러가지 표정을 지었지만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쳉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눌하지만 꾸밈
없이 말하는 쳉과 풍부한 표정을 짓지만 별 참견은 하지 않은 채 이야
기에 귀를 기울이는 미 두 사람의 모습은 삭막한 북해의 바다 위라는
공간 속에서 이질적이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하오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할슈타일 후작은 포마스트 아래에 기대어 서서는 그런 두 사람을 물
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코에서 나오는 숨결이 그대로 하얀 안개가
되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꽉 다물린 입보다는 가슴 앞으로 엇갈린
두 팔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후작은 팔짱을 낀 채 오
른손 검지로 왼쪽 이두근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큼직한 방한 외투
로 몸을 감싸고 눈 바로 위까지 후드를 내려쓰고 있던 이시도는 고물
에 서서 그런 후작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시도는 후작의 손가락이
어떤 낯익은 박자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후작을 한참 동
안 관찰하던 이시도는 갑자기 오른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는 오른
손을 왼쪽 손목으로 가져갔다.
맥박이군.
그 때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시도를 흘깃 보았다. 이시도는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쥔 채 머쓱한 얼굴이 되어 후작의 눈길을 받
아야 했고, 후작은 의아쩍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손가락
을 내려다본 후작은 이시도의 행동을 이해했다. 후작은 팔짱을 풀며
이마를 짚었다. 그의 입술에서 하얀 숨결과 함께 혼잣말 같은 말이 몇
마디 섞여 흘러나왔다.
"부질없군…… 살아있는 척하고 있어."
이시도는 이 바이서스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시도는 그에게 몇 마
디 걸어보아야겠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래서 괜스레 포마스트의 돛줄
을 잡아당겨보기도 하고 갑판원들에게 별 필요도 없는 지시들을 내리
기도 하면서 "단추를 더 단단이 잠궈! 감기들면 어쩌나!" 자연스럽게
후작에게 다가왔다. 후작은 그런 그에게 속아주는 척했다. 이시도는
후작 바로 곁에 다가서서는 후드를 뒤로 넘기며 두 손에 입김을 호호
불며 말했다.
"어이구, 지독한 날씨입니다. 할슈타일 씨. 갑판에 그렇게 서있으셔
도 괜찮으십니까?"
후작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이시도는 벙글진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이서스 분이 어떻게 자이펀의 배를 타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시도를 보았다. 이시도는 먼저 후작과
자신의 거리를 확인한 다음 말을 이었다.
"시비를 걸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아요.
이 배는 자유무역선이고, 게다가 여긴 자이펀의 해역도 아닌 만큼 우
리들이 설령 바이서스의 국왕을 태웠다고 해도 그것이 군사적 목적이
아니라면 자이펀의 군부도 크게 화낼 수는 없거든요. 투덜거리기는 하
겠지만."
이시도는 우쭐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후작은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잠시 후 이시도가 조금 당황하게 되었을 때 후작은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다."
"예?"
"나도 이것이 바다 위를 떠가는 배인 이상 선적이 어딘가 따위는 신
경쓰지 않는다. 대답이 되었는지."
이시도는 잠시 이것이 화를 내어야 되는 일인지에 대해 고려해보았지
만 아무래도 무엇에 대해 화를 내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시도는 어떠한 반응을 보여도 이미 늦어버릴 때까지 아무 반응을 보
이지 못했고, 할슈타일 후작은 그런 이시도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쳉과 미를 바라보았다.
쳉은 이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갑판에 주저앉은 쳉은 물통에
앉은 미의 다리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히 앉아있었고 미는 쳉의 머리
에 손을 얹은 채 그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꼬아대고 빗어대고 하고
있었다. 쳉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미의 턱을 보다가 조금 졸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 신차이 선장을 쳐다보는 거니?"
"이건 질투다. 쳉은 질투를 하고 있어. 미는 이제 비극적인 삼각관계
의 가련한 희생물이 될 거야. 흐음. 한번 쯤 그런 것도 해보고 싶었
어."
"저, 그러니까……"
"잠깐 기다려봐. 멋진 대사를 생각해낼 수 있을 거야. 어디 보자……
먼저 쳉은 질투에 눈이 멀어서 신차이 선장과 결투해라. 알았지? 그럼
미가 쳉의 팔을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할께. 별빛마저 드문드문한 캄캄
한 밤이라도, 그대 설령 내 앞에 있지 않더라도, 미의 두 눈이 멀어버
릴지라도, 미의 눈동자는 언제나 쳉의 모습을 반사할 것을 믿지 못하
니?"
"내가 감동적이라고 말하면 웃을 거지?"
"당연하지. 골렘이 감동 어쩌고 하면 미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웃
어."
"사실, 닭살 돋아."
"그러라고 한 말이야. 자, 이제 계란 낳아봐."
쳉은 묵직한 한숨을 토해내었고 미는 그런 쳉의 머리카락을 더욱 헤
집으며 깔깔거렸다. 잠시 후 미는 쳉의 머리카락에 엉켜버린 소매 단
추를 풀어내느라 조금 투덜거렸고 그 동안 쳉은 눈물을 찔끔거리며 참
아야 했다.
"많이 아팠어? 잘 참네. 착하다."
"상으로 대답이나 해줘."
"대답? 아아, 아까 그 질문. 글쎄다. 미는 왜 신차이 선장을 바라볼
까."
미는 다리를 흔들면서 다시 이물에 서있는 신차이의 등을 바라보았
다.
"저 사람, 바다야."
"바다?"
"응…… 바다야. 신기해. 미가 들판에서 자라나 그런지 몰라도 꽤 신
기하게 느껴지네."
"뭐, 처음으로 본 뱃사람에게 느끼는 신비감을 말하는 거니?"
"그건 아닐 테지. 이 배엔 뱃사람들이 많이 있잖아. 어디, 시무니안
을 보자. 시무니안의 대지엔 계곡이 있고 산이 있고 언덕이 있고 강이
있겠지. 그림 오세니아의 바다는? 그 안에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바다는 평평해. 지금 여기서 파도치는 이야기는 하지 말기."
막 그 이야기를 꺼내려던 쳉은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미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며 말했다.
"땅을 닮은 사람은 그 안에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겉으로 다 드러나
겠지. 그래서 그 사람에겐 풍요로운 과수원 같은 부분도 있을 테고 오
르기 힘든 산 같은 모습도 있을 테지. 마음 속의 깊은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는 계곡 같은 부분도 있을 테고 다져지고 흩어져 황야처럼 바뀐
부분도 있겠지. 그게 땅을 닮은 사람이겠지. 하지만 바다를 닮은 사람
은 일단 모든 부분이 똑같이 평평해."
"평평하다?"
"응. 미 말이 이상하지? 미 머릿속에서도 좀 모호한 개념밖에 없어
서. 그러니 말이 이상하더라도 용서해라. 용서 안하면 때릴 테야.
머…… 이렇게 사람을 나눠보았지만 저 사람에겐 그게 통하지가 않네.
선장님은 완전히 바다 그 자체야."
미는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도망칠 수가 없네.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쳉은 얼굴을 들어 미를 보았지만 앞으로 늘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미
의 눈은 잘 보이지 않았다. 쳉이 볼 수 있는 것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의 입술 뿐이었다. 미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그림 오세니아께서 손을 내미셨으니…… 하긴 그 분밖에 안계신 건
가."
미는 고개를 조금 돌려 후작을 곁눈질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팔짱을
낀 채 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렌차께서도 꼼짝할 수 없게 되었고, 음, 그럼 그덴산의 거인도 포
기하셨겠구나. 그림 오세니아께서도 많은 힘을 쓰시지는 못하겠지. 하
지만 그 과묵하고 고요한 분이 직접 나설 생각을 하셨다는 건 대단해.
그분이니까 이만큼이나 도움을 베푸실 수 있겠지. 워낙 강력한 분이니
까. 하지만 늦게 내밀어진 그 손길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겠지. 이제
곧……."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미는 쳉의 얼굴을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하지만 말이야,"
"응?"
"미가 진짜로 도움받고 싶은 것은 얼간이 쳉이야. 미는 무지무지 바
보라서, 쳉은 아무런 도움이 안될 것을 알면서도 말이지. 메에에에!"
미는 가볍게 말하고 있었지만 쳉은 바로 그 때문에 가슴을 후벼파이
는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쳉은 그 감정을 정의할 수 없었고, 정의될
수 없는 감정에 시달리는 것은 쳉에겐 항상 낯설었다. 그래서 쳉은 한
참 동안이나 굳은 얼굴을 한 채 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미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쳉의 두 볼을 살짝 붙잡은 미는 허리를 굽혀
그의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미가 투정을 너무 심하게 부렸나 보다. 그 얼굴로 울면 보기 흉할
거야. 웃어라."
쳉은 입술 양끝을 힘들게 위로 끌어올렸다. 미는 그 얼굴을 보고는
죽어라고 웃어대다가 그만 물통에서 굴러떨어졌다. 쳉이 당황하여 미
를 부축하기 위해 일어섰을 때 마스트 끝에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Sarle Lo-!"
이시도, 할슈타일 후작, 신차이 선장, 그리고 쳉과 그의 품에 반쯤
안겨 일어서던 미 전부가 마스트 끝을 올려다보았다. 신차이와 이시도
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떠올라있었다. 신차이가 고함질렀다.
"Ir rivhepjan?"
"Rigkeel un borthas! rene……?"
말끝을 잠시 흐리던 감시원은 다시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미는 눈
을 깜빡거리다가 쳉에게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
"잘은 모르겠는데, 배가 보인다고 하는 것 같군."
"와, 배? 다행이네. 그런데 선장님은 왜 저런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
는 거지?"
"그런데 그 배가……" 쳉은 얼굴을 돌렸고 미는 쳉의 옆얼굴을 보며
불안감을 느꼈다. "좌초한 것 같다는데?"
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좌초라고?"
쳉의 자이펀어 번역은 정확하게 맞는 것은 아니었다. 이 주위의 바다
에 암초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으므로 좌초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시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
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배가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군요. 크라켄이 나타나서 배를 붙잡아 집
어던진 걸까요?"
시선을 돌려 주위의 바다와 빙산을 바라보던 신차이는 고개를 가로저
었다.
"낭만적인 상상이지만, 그건 아닐세. 빙산에 끼인 거야."
"예? 빙산이오?"
"저기 저쪽의 빙산을 자세히 보게. 심하게 부서졌지? 그리고 목재들
이 몇 개 보이는군. 배는 저 빙산과 이쪽의 빙하 사이에 끼인 거야.
멍청하게 일부러 들어온 것은 아니겠지. 그 때는 안전해 보였을 거야.
하지만 배가 들어서자마자 빙산이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빙하와 빙산은 배를 양쪽에서 밀어붙였을 거야. 마치 비틀어 짜내듯
이. 그래서 어느 순간, 배는 격하게 튀어올랐지. 그 때 배의 하중 때
문에 빙하가 무너지며 저렇게 빙하 위로 내동댕이쳐진 거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냐."
이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하 위에 모로 쓰러져있는 배를 바라보았
다.
배는 양쪽 뱃전이 거의 박살난 모습으로 쓰러져있었다. 부러진 돛대
는 멀찌감치 나뒹굴고 있었고 흩어진 배의 의장들과 선구들은 반파되
어 눈 속에 틀어박혀 있거나 빙하 바닥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튕겨져나온 선원들의 시체가 얼음 위에 점점히 흩어져 있
었다. 게중에는 이곳이 고독한 세계가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주는 시체
들도 있었다. 이시도는 다시 의아쩍은 얼굴로 신차이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뭐가……"
"백곰이 한 짓이야."
"그렇군요."
이시도는 오한이 도는 것을 느꼈다. 신차이는 차분한 얼굴로 미를 돌
아보았다.
"내려서 확인해보고 싶겠지요?"
"예."
미의 담담한 얼굴은 신차이를 의아하게 했다. 파랗게 질려있지도, 턱
을 딱딱 부딪히지도 않았다. 분명 슬픈 얼굴이었지만 미에겐 불안감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신차이는 고민을 중단하고는 이시도에게
말했다.
"선원 10 명, 단단히 무장시켜서 보트에 태우도록. 시체를 찾아 백곰
이 되돌아올지도 모르니까. 탐사는 내가 맡을 테니 배의 지휘를 담당
하라."
"선장님께서요?"
"그래. 저 빙하 위로 상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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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4월은 끝났지만, 타자의 마음은 아직도 4월에 매어있는 것 같
군요. 으흐흐.
예? 아아. 이게 뭐냐고요? 퓨쳐 워커라는 소설입니다. …새로 시작하
는데 왜 프롤로그도 하나 없냐고요? 으흑! 새로 시작하는 소설이 아닙
니다. li jin46 해보세요. 이게 연재소설 맞냐고요? …와, 달빛 좋다.번 호 : 19961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5-02 01:54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10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10.
하지만 신차이의 걱정은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보트를 내
릴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할슈타일 후작은 쳉에게 다가가서 몇 마디
이야기를 건네었고, 쳉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자신의 허리에 밧줄을 묶었다. 그리고 후작은 쳉을 들어올려 빙하 위
로 집어던졌다.
레드 서펜트의 갑판원 전원들이 입을 쩍 벌린 가운데, 극지의 하얀
하늘을 우아하게 날아간 쳉은 얼추 60 큐빗 쯤 날아간 다음 눈더미 위
에 떨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쳉이 옷을 툭툭 털며 일어서자 레드 서
펜트의 선원들은 후작에게 보내었던 시선보다 몇 곱절은 더 어처구니
없어하는 표정을 쳉에게 보내었다. 아무리 두터운 방한복이 충격을 완
화시켜주었다 하더라도 60 큐빗의 거리는 목뼈를 부러뜨리기에 적당한
거리였다. 신차이 선장은 신음소리를 토해내었고 이시도의 경우에는
목검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사이록의 수평선의 완성을 기념하기에 적
당한 상대를 드디어 만났군……" 선원들은 졸도하는 표정을 지어보였
고 갑판장 모하메드의 경우에는 잘 안되는 헤게모니아어로 할슈타일
후작에게 말했다.
"한번만 더 수고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번엔 반대쪽으로 말입니
다."
후작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고 극지의 바다에 집어던져질 뻔한 이시
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동안 쳉은 난파된 배로 어슬
렁어슬렁 걸어간 다음 배의 닻에 밧줄을 묶었다. 불안정하나마 계류
장치가 구성되어 레드 서펜트는 빙하 바로 옆에 정선하게 되었다. 후
작은 이시도에게 짧은 요구를 몇 개 더 했고 잠시 후 세 가닥 밧줄이
빙하 위의 쳉에게 던져졌다. 쳉은 그 밧줄 모두를 난파된 배의 곳곳에
묶었다.
그래서 조사대는 밧줄에 매달린 채 안전하게 빙하 위로 내려설 수 있
었다. 선원들인 만큼 밧줄을 타고 바다 위를 지나가는 것을 어려워하
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미의 경우엔 후작의 등에 단단히 묶인 채로
밧줄을 건넜다. 아달탄만은 밧줄을 탈 수 있는 재능이 없었는지라 갑
판에 서서는 슬픈 표정을 지은 채 그의 주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어
야 했다. 모두 빙하 위에 내려선 다음 사람들은 난파선으로 걸어갔다.
난파선 주위에 대한 관찰을 시작하자마자 이시도는 불만족스러운 어
투로 말했다.
"고약하지 않은 죽음도 드물겠지만, 이런 식의 죽음은 정말 고약하
군."
순백의 빙하 위에 펼쳐진 지옥도는 선원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부
서진 배의 목재들에 짓눌린 선원의 몸에서 튀어나온 내장들은 단단하
게 얼어붙어있었다. 간혹 대책없이 앞뒤없어지기도 하는 이시도는 그
내장을 걷어차보았고, 얼어붙은 고깃덩이들이 부서지며 흩어지자 선원
들은 분노의 외침을 토해놓았다. 하지만 걷어찬 이시도 본인의 얼굴이
가장 심하게 헬쓱해져 있었기에 선원들의 질타는 길지 않았다. 그 동
안 이곳저곳을 살피던 쳉은 선체 아래의 바람을 많이 타지 않을 위치
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선원들은 모두 몰려들었다.
흰 눈밭 위에 일정 부분의 눈이 새카맣게 변해있었다. 쳉은 장갑을
벗고는 검게 변한 눈을 한 웅큼 들어올려 자세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로군."
"재?"
이시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쳉은 손을 툭툭 턴 다음 다시 장갑을
끼며 말했다.
"생존자가 있었군요. 혹심한 추위 때문에 그들은 이 설원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작을 태웠습니다. 선체의 파편들이지요. 잠깐……"
쳉은 몇 발자국 걸어간 다음 선체의 부서진 부분을 바라보았다.
"이건 용골 같은데…… 아무리 봐도 커다란 배의 용골일 수는 없군
요. 크기나 뭘 보든. 보트의 용골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부서진 모습
을 보니 절대로 사고로 파괴된 것은 아닙니다. 톱질해서 잘라낸 거죠.
왜 보트를 부순 거지? 보트를 패서 장작으로 삼지 않아도 목재가 많이
있는데. 그것은……"
"썰매군."
신차이 선장이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대답했다. 사람들이 모두 고개
를 돌리자 신차이는 아무 말 없이 땅을 가리켰다. 그곳엔 나무조각과
구부러진 못 몇 개가 흩어져있었다. 하지만 신차이는 그것들 이외에
더 확실한 증거를 드러내어보였다. 신차이가 허리를 숙이고 눈을 조금
걷어내자 설원 위로 두 개의 곧은 선이 나타난 것이다.
"이 눈은 오래된 것이 아니야. 얼어붙지 않은 새 눈이지. 썰매자국
위에 눈이 살짝 덮인 거야. 사막에서 우리들도 간혹 사용하는 거지.
썰매를 만들기로 했다면 커다란 배보다는 보트쪽이 다루기 편했겠지."
이시도는 기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 배의 선원들은 모두 돌았군요. 보트를 타고 남쪽으로
돌아와야 되지 않습니까?"
신차이는 잠시 고민스러운 얼굴로 땅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쳉
을 보았다. 쳉은 무거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를 조사해보겠습니다."
"그래요…… 부탁하지."
쳉은 곧 시체들을 일일이 들여다보았다. 이시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
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신차이에게 다가서서는 자이펀어로 질문했
다.
"무슨 말씀을 나누신 겁니까?"
"이시도 군. 몇몇 시체에서는 사고가 아닌 다른 죽음의 원인이 나타
날지도 몰라."
"예?"
"자네 말마따나 그런 미친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을 선원이 많으니까.
목숨줄인 보트를 부수겠다는데 자네라면 찬성하겠나? 하지만 썰매는
만들어졌어. 나와 쳉은 그런 결정이 내려졌을 때 어떤 폭력적인 사태
가 야기되지 않았을까 의심하네."
이시도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신차이를 보다가 다시 쳉을 보았다. 잠
시 후 쳉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꽤 되는군요. 커다란 싸움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잠시 동안 사람들은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정리해보았다. 배는 비극
적인 사고를 맞이해서 도저히 수리할 수 없는 모습으로 빙하 위에 집
어던져졌다. 사고 당시에 많은 선원들이 죽었겠지만 생존자들도 있었
다. 그들은 불을 피워 몸을 녹이면서 생존 수단을 강구해보았을 것이
다. 거기서, 썰매를 제작하자는 의견과 보트를 이용하자는 의견이 상
충했을 것이다. 싸움이 벌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 죽음을 당한 다
음에 썰매가 제작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배에서 꺼낼 수 있는 것들
을 다 꺼내어 썰매에 실은 다음 이곳을 떠나갔다. 이시도는 그 추리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썰매? 흐응. 이 근처의 지리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썰매를 타
고 대륙으로 건너갈 수 있는 장소가 있나 보지요? 그렇다고 해도 그건
너무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설원에서는 식량을 구할 수 없어요. 보트
를 타고 가야 낚시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북부 뱃사람들은 어떻
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로서는 그런 바보 같은 의견은 도저
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차라리 한정된 보트 승선 인원 때문에 싸움
이 났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걸로 싸움이 난다고요?"
신차이는 이시도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증거는 추론을 뒷받
침하고 있지만 그 추론은 보편적인 이성을 뒷받침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 때 할슈타일 후작이 입을 열었다.
"대륙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보트가 낫겠지."
"뭐요?"
이시도는 불퉁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하지만 이시도는 할슈타일 후작
이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그 대답을 알아차렸다. 이시도는 기막힌 어
투로 말했다.
"아니, 그럼 그들은 북쪽으로의 여정을 계속했다는……?"
"그거라면 썰매가 낫지."
선원들은 잠시 아연한 표정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았다. 이시도
가 그들 모두의 심정을 대표해서 말했다.
"그러고도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할슈타일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후작은 그들은 죽을 리가 없다는
것을, 추위와 기아와 혹한이 그들을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을 선원들에
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후작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신차이는 설원의 지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평선을 향해 뻗어
가고 있을 테지만 눈 아래에 묻혀 보이지는 않는 썰매자국을 추적하듯
이. 잠시 후 신차이는 무겁게 말했다.
"귀함한다."
레드 서펜트로 돌아온 다음 신차이 선장은 할슈타일 후작과 미, 그리
고 쳉을 선장실로 불러들였다. 쳉은 신차이가 어떤 말을 할지 알고 있
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말일지는 떠올리지 못했지
만, 어쨌든 쳉은 신차이가 이대로 돌아간다고 말했을 때도, 미가 배에
서 내리겠다고 말했을 때도 놀라지는 않았다.
신차이는 묵묵히 미를 바라보다가 쳉에게 말했다.
"미 양은 내리면 죽을 겁니다. 미 양 혼자서는 여기서 몇 시간도 버
티지 못할 거라고 전해주시오."
"혼자는 아닐 거야."
신차이는 이 말이 쳉이 아닌 할슈타일 후작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
에 조금 의아한 기분을 받았다. 신차이는 후작을 보기에 앞서 쳉의 얼
굴을 똑바로 보았지만 '당신이 그녀의 연인 아니었소?' 쳉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신차이는 후작을 쳐다보았다.
"당신도 하선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에 대해 감사하겠네."
"그렇다면 말을 바꾸지요. 당신들 두 명은 여기서 몇 시간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신차이는 솔직히 기대하고 있었지만, 쳉은 '두 명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신차이는 더욱 깊
어지는 의아함에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헛기침을 한 번 한 다음,
신차이는 후작을 향해 조용하지만 엄숙한 경고를 담아 말했다.
"나는 승선원의 신변을 책임져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선장입니다.
당신들이 하선한 다음에야 무슨 짓을 하든 마음대로지만, 하선하는 그
시점까지는 당신들의 목숨은 당신들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건 내 책임
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책임에 따라 당신들의 하선 요구를 수락하거
나 거절할 수 있습니다."
고개를 조금 떨구고 있던 쳉의 머리 속으로 하나의 문장이 흘러지나
갔다. 하지만 늦게 내밀어진 그 손길은 오래 가지 못하겠지. 이제
곧…… 쳉은 생각했다. 신차이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쳉은
자신의 생각에 만족했지만, 그 생각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
었기에 곧 불만족스러워졌다.
후작이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 하선하겠습니다."
신차이는 불퉁한 얼굴로 미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미는 잠시 옆을 바
라보았고, 그 다음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오늘 안일지도 모르겠어요."
신차이는 이번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미는 다시 한번
아달탄을 바라본 다음 말했다.
"아니, 조금 후라고 말해야겠네요."
신차이는 저 아가씨는 나를 놀리는 거요? 에 해당하는 말을 쳉에게
할까 생각했다. 바로 그 때 갑판 쪽에서 들려온 이시도의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아니었다면 신차이는 별 무리없이 그 말을 쳉에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차이는 목검을 쥐며 벌떡 일어서다가 미의 얼굴
을 쳐다보았다. 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달탄은 귀가 좋거든요. 이제 마지막 조력자께서 오셨군요. 그림
오세니아, 모든 인간들의 강력한 아버님이여. 감사합니다. 이제 나가
보실까요? 미도 그 분이 누구일지 궁금해요."
엑셀핸드는 이끼 낀 언덕에 앉아 빙해의 바다에 떨어지는 노을을 바
라보고 있었다. 이곳의 바람은 별나다 할 정도로 거칠었고, 그의 수염
한올 한올을 파고드는 바람에 엑셀핸드는 곤혹스러워했다. 앞머리가
제멋대로 날리는 것을 거칠게 쓸어넘긴 다음, 엑셀핸드는 텁텁한 목소
리로 말했다.
"아프나이델은 어떤가, 이루릴."
그의 옆에 서있던 이루릴은 역시 머릿결을 쓸어넘긴 다음 먼 해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돌멩이를 바다에 투척하고 있군요. 저것은 그림 오세니아를 대상으
로 감행하는 폭력인 것일까요? 그가 왜 그림 오세니아에게 비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아냐. 그냥 울적해서 하는 짓일 거야. 별 의미 없는."
"아아, 저기엔 별 의미가 없나요?"
"그래. 저 종족들이 하는 일의 상당 부분이 그러하듯."
엑셀핸드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이루릴을 올려다보았다.
"자넨 알고 있었나?"
엘프에게 질문하는 방식으로는 좀 부족한 방식이었지만 이루릴은 엑
셀핸드의 질문을 이해했다. 더군다나 이루릴은 그 질문에 질문으로 대
답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아프나이델은 그렇게 의심하고 있던가요?"
"흐음. 어떻게 짐작했지?"
"글쎄요. 한 드워프가 한 엘프에게 바람이나 쐬러 언덕에 올라가자고
말한다면, 그 산책이 산책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은 쉽게 짐작
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드워프에게는 산책의 취미가 그렇게 많지 않
고, 엘프와 더불어 행하는 드워프의 산책은 더욱 넌센스라고 여겨지네
요."
엑셀핸드는 끙 하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이루릴은 살폿 웃었다.
"정직하게, 드워프답게 말씀하세요."
"자네 말이 옳아."
"알고 있었냐고 물어보신다면, 아니라고 말하겠습니다. 예감이 있었
냐고 물어보신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겠습니다."
"예감이라. 쳇. 좀 쉽게 말해보겠나."
"그녀는 이 북쪽으로 오며 점점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요. 그
녀는 이 북쪽에 다가왔을 때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불안을 느낀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여정 전부가 거꾸로 보
이더군요."
"거꾸로 보였다고?"
"예. 저는 인간이나 드워프들처럼 시간의 전후에 크게 신경쓰는 종족
은 아니니까요. 드래곤 로드께서 왜 당신들에게 자신의 여식을 맡겼을
까요? 당신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시간순서는 이렇겠지요. 드래곤 아일
페사스는 당신들과 함께 여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신들은 이 북쪽까
지 찾아왔다. 하지만 엘프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북쪽까
지 찾아오기 위해, 드래곤 아일페사스는 당신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아아!"
엑셀핸드는 등 뒤에서 들려온 신음소리에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그들의 등 뒤에 머쓱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제레인트와 에델린,
그리고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그란, 하늘을 쏘아보고 있는
운차이, 방글방글 웃고 있는 네리아, 감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파하
스,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돌맨 등이 주욱 서있는 것을 보고는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다.
"어, 어떻게 너희놈들 전부 다……?"
"산책나온 거야."
운차이는 강철같은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지만 제레인트는 훨씬 정직
했다.
"아, 하하. 예. 음. 이루릴 양도 말씀하셨지만, 드워프가 엘프에게
산책이나 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괴상하게 여겨졌기에 따라와본…… 엑
셀핸드. 그렇다고 그런 표정을 짓지는 마세요. 거짓말이 능숙하지 못
한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엑셀핸드는 벌컥 화를 내며 파이프를 피워물었다. 그 사이에 제레인
트는 이루릴에게 다가섰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드래곤 로드께서는 아일페사스를 보내어 이 사
태에 대처하게끔 하신 건가요?"
"시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존재의 첫번째 이유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께서 모시는 테페리만 해도 그렇겠지요. 테페리께서는 갈림길의
신이십니다. 하지만 갈림길은 시간의 문제이지 않나요? 걸음을 멈췄다
면, 앞에 갈림길이 몇 개가 있든 아무 상관이 없지요."
"그건 이해합니다."
"시간은 모든 신들의 존재의 첫번째 원인이겠지요. 그렇다면 인간이
시간을 멈추려고 마음먹었을 경우, 신들로서는 대처할 방법이 없겠지
요. 가장 강력한 신 그림 오세니아께서 마지막으로 미 양을 도왔지만
그 강력함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이 시점에서 미 양
을 도울 종족은 하나밖에 남지 않아요. 세상에 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의 종족, 아직까지도 자신의 별을 가지고 있는 종족……"
"아아, 드래곤!"
이시도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단어의 무게에 헐떡거렸다. 그 단어를
입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이시도가 기울였던 노력은 가공한 것이었다.
그래서, 불쌍하게도, 이시도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알아차린 이
름을 뒤늦게 말하게 되었다.
"골드 드래곤!"
순백의 빙산과 검푸른 바다 위로, 골드 드래곤의 황금빛 거체가 춤추
며 내려오고 있었다.
================================================================
정말 오래간만에 막걸리 마셨네요. 속이 뒤집어집니다. 윽윽윽. 질문
이라… 흐음.
1. 타자님은 축구 좋아하십니까?
글쎄요. 좋아하는 편입니다.
2. 타자님의 집에는 책이 몇권이나????
얼마 없군요.
3. 타자님의 취미는?(술마시기 빼고요오!)
게임이나 담배피기…?
4. 마지막으로.. 타자님의 몸에 득실거리는 회충의 수를 세어본다면?
…질문도 다른 모든 말처럼, 질문하는 사람의 품위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님, 죄송합니다. 이 시간에 올릴 거라고 말씀드리면 기다
리실 것 같아서.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20395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5-10 01:31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11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11.
승강구를 뛰쳐나온 신차이는 문득 사위가 누르스름하다는 느낌을 받
았다. 온통 흰 북해의 바다에는 눈이나 얼음 때문에 많은 백색 반사광
이 넘쳐난다. 따라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푸르스름한 밝은 빛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주변은 마치 사막에 온 것처럼 누르
스름한 빛으로 가득했다. 하늘을 본 신차이는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백로 같군. 처음 본 순간 신차이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드래곤을 처음 본 것이 아니다. 이제리스의 서펜트와는 직접 싸
워봤고, 블루 드래곤 지골레이드의 강습에 가까운 방문도 받았었다.
하지만 골드 드래곤은 그들과 또 달랐다. 골드 드래곤은 커다란 황금
의 날개를 좌우로 펼쳐 하늘을 가린 채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긴
오른쪽 발은 아래로 뻗고 왼발은 살짝 굽힌 모습이었다. 신차이가 그
모습에서 백로를 떠올린 것도 당연하다. 다만, 지금 저 골드 드래곤에
게 백로의 비유를 덧붙인다면 그 발 아래의 레드 서펜트호에는 종이배
의 비유를 붙여야 된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러나 선원들은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 윤곽을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든 골드 드래곤의 황금빛의 몸에서는 빛이 가득 뿜어져나와 주위의
빙산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드래곤의 발만 닿아도 레드 서펜
트는 간단히 침몰해버리겠지만 선원들은 동공을 파고드는 황금빛의 위
엄에 질려버렸다.
그리고 골드 드래곤의 한쪽 발이 메인 마스트의 꼭대기에 닿았다. 골
드 드래곤은 그렇게 섰고, 배 위의 누구도 사기 같다는 생각은 떠올리
지 못했다.
그리고 드래곤은 느닷없이 사라졌다.
지골레이드의 예를 이미 당했던 선원들은 재빨리 그들의 선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바이서스어로 구성된 비명소리는 그들의 머리
위로부터 들려오게 되었다.
"우어어! 아, 아빠! 우와아! 너무 높아요! 배가 손바닥만 해!"
레드 서펜트 호의 씩씩한 선원들은 씩씩하게 고개를 다시 들어올렸
다. 메인 마스트의 꼭대기에는 조그마한 블론드 소녀가 필사적인 자세
로 돛대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저 높이에 서면 배는 자신의 두 다
리 사이로 조그맣게 흔들리는 나뭇조각처럼 보이지. 이시도는 그런 생
각을 떠올리고는 만족해했다. 저 소녀의 비명소리는 합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시도는 다시 입을 벌렸다. 저 소녀는 뭐지?
그러나 신차이는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골드 드래곤이십니까?"
돛대 위로부터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신차이의 말에 대답했다.
"저는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의 이름을 계승
하는 자, 맙소사, 드래곤 살려!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두번째 목소리
이자, 오아, 말도 안돼! 드래곤들의 첫번째 목소리, 드래곤의 별의 보
호자, 우와, 너무해! 드래곤 로드의 딸 아일페사스야! 살려줘요!"
"……이시도군. 구해드리도록. 내 솔직한 심정으로는 드래곤께서 추
락사하시는 진귀한 광경을 보고싶네만."
이시도의 날렵한 손길에 의해 아일페사스는 안전하게 레드 서펜트의
갑판 위에 서게 되었다. 헐떡거리던 호흡을 간신히 가다듬은 아일페사
스는 주위의 선원들의 면면을 둘러본 다음 위엄있게 행동하는 것을 포
기하게 되었다. 심통스러운 얼굴로 투덜거리던 아일페사스는 선원들
틈에 끼어 서있는 쳉과 미, 아달탄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일페사스는
미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미는 미소띈 얼굴로 아일페사스를 마주보았
다.
"턴빌에서 봤지. 너에요?"
미는 잠깐 머뭇거렸다. 옆에 서있던 쳉이 나직한 목소리로 아일페사
스의 바이서스어를 번역해주자 미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드래곤이시네요.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만."
쳉은 미의 헤게모니아어를 재빨리 바이서스어로 통역했다. 아일페사
스는 눈꺼풀을 크게 깜빡였다.
"당연? 뭐가 당연한데?"
"어렴풋이…… 마법사 아니면 드래곤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미는 마법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어요. 그 때 턴빌에서도 마법사를
보았지요. 그래서 마법사 쪽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감히 드
래곤을 직접 뵐 거라고 믿기는 어려웠거든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네요. 첫번째는 당신이 저에게 뭔가를 설명해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 두번째는 여기 이 청년의 통역 실력이 엉망진
창이라는 것. 어느 쪽이니?"
쳉은 머쓱하게 웃지도 않고 억울하다는 표정도 짓지 않은 채 충실하
게 아일페사스의 말을 통역했다. 미는 커다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두 가지 대답이 있어요. 지금의 이 인연을 설명할 자는 세상에 없다
는 것, 그리고 쳉의 통역 실력은 미로서는 알 수 없다는 것. 미는 바
이서스어를 모르니 쳉이 똑바로 통역하는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네
요."
"흐음…… 알았어요. 자,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미는 고개를 돌려 빙하 위에 쓰러져있는 배와 그 너머 설원을 바라보
며 말했다.
"북으로, 컴퍼스의 바늘이 향하는 그곳으로 갑니다."
레드 서펜트의 선원들은 그들에게 느닷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래곤의 방문은, 그것이 두번째라고 해서 익숙해지는
종류의 사건은 아니었다. 그들은 미나 아일페사스, 혹은 쳉이나 후작
중 누구라도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해주길 원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아일페사스의 방문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
다. 하지만 미는 부지런히 짐을 챙기고 있을 뿐이었고 쳉은 그런 미를
도왔다. 후작의 경우는 뱃전에 걸터앉아 북쪽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
일페사스 역시 미와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입을 다문 채 후작의 옆에
앉아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선원들은 간절한 시선으로 신차이
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신차이는 헛기침을 하며 아일페사스에게 다가섰
다.
"실례하겠습니다.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의
이름을 계승하는 자,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두번째 목소리, 드래곤들
의 첫번째 목소리, 드래곤의 별의 보호자, 드래곤 로드의 딸 아일페사
스 님."
"질투난다."
"네?"
"전 그거 외우는데 사흘 걸렸거든. 그래서 너한테 질투나나봐요."
"그러십니까. 어쩐지 많이 늦은 소개입니다만 저는 본함의 선장인 신
차이 발탄이라 합니다."
"신차이? 운차이 아빠야?"
"아뇨. 그의 사촌형입니……"
싱긋 웃으며 대답하던 신차이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신차이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그를 아십니까?"
"너라면 잊겠어요? 그런 눈에 그런 목소리에 그런 표정에 그런 성질
에 그런 말버릇을 한 사람이라면, 우에에. 한번만 만나도 죽을 때까지
못잊을 거에요. 그런데 저는 몇날며칠을 같이 보내었는지 셀 수도 없
어. 그러니 어떻게 잊겠어?"
"동명이인인 것 같지는 않군요…… 아일페사스 님께서 말씀하시는 자
는 확실히 저의 사촌동생인 듯합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탄느완."
"네?"
아일페사스는 배 밖으로 내놓은 다리를 흔들어대었다. 어느새 신차이
와의 대화에 흥미를 잃어버린 것인지 건성으로 대답하는 기색이 역력
했다."
"너 출발하고 조금 뒤에 우리가 도착했거든요. 탄느완에는 더이상 배
가 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더이상 추적할 수 없었고…… 그리고 저는
폴리모프했어. 내가 하려고 했을 땐 잘 되지도 않았던 폴리모프인데,
어떻게?"
"드래곤의 뜻일 거요."
느닷없이 할슈타일 후작이 입을 열었다. 아일페사스는 동그래진 눈으
로 후작을 보다가 말했다.
"너 말 할 줄 알았어요?"
"그렇소."
"그럼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할 수도 있겠네? 드래곤의 뜻이라니?"
할슈타일 후작은 멍한 얼굴로 북녘 하늘을 바라보다가 대수롭지 않다
는 듯이 말했다.
"나는 드래곤 라자요."
"뭐, 너, 네가 라자라고요? 거짓말! 저는 라자를 알아볼 수 있을 거
야. 드래곤이니……까요."
아일페사스는 말꼬리를 흐렸다. 할슈타일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는 옆에 앉아있던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아일페사스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해츨링이야. 다시 고개 돌려요!"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일페사스가
낮은 소리로 궁시렁거리는 것을 무시하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드래곤 로드의 후계자요. 드래곤의 뜻이 당신을 통해 구현되
는 것은 당연하지. 아일페사스가 폴리모프하려면 불가능할지는 몰라
도, 드래곤이 폴리모프하려 했다면 폴리모프하는 걸 거요."
"난 싫어."
아일페사스는 잔뜩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대화에서 제외되
고 있던 신차이가 놀랄 정도로 시무룩한 목소리였다.
"너 라자니까 제 마음 읽을 수 있지? 내가 해츨링이라고 해도요. 라
자니까, 응? 그렇잖아요?"
"계약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실 테지요."
"그럼 하자. 제 마음 좀 읽어봐줘. 전……"
"잘 모르는 모양이군요. 그건 죽을 때까지의 계약이오."
"어, 뭐, 둘 다 동의하면 계약을 취소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까……"
"말뜻이 잘못 전달되었군. 그건 죽을 때까지의 계약이오. 따라서 나
는 계약할 수 없소. 이미 죽었으니까."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할슈타일 후작의 옆얼굴을 올려다보
았다. 하지만 후작은 얼음으로 깎아만든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북쪽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일페사스는 천연덕스럽게 오른손을 들어올
려 후작의 가슴을 짚었다. 후작의 입매에 약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그
의 심장박동에 집중하고 있던 아일페사스는 보지 못했다. 고개를 갸웃
거리던 아일페사스는 다른 시도를 해보기로 결심하고는 손을 조금 옮
겼다. 그 결과, 할슈타일 후작은 미친듯이 웃어대었고 신차이는 바람
처럼 몸을 날려 후작의 어깨를 붙잡아야 했다. 뱃전 아래로 떨어질 뻔
하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은 후작은 눈물을 찔끔거리며 아일페사스를
쏘아보다가 고함을 빽 질렀다.
"무슨 짓이오!"
"간지럼 타네요, 뭐. 살아있는걸?"
"간지럼 타는 것이 생존의 조건이면 생활의 조건은 뭐요!"
신차이는 아일페사스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 예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아일페사스는 참 이상한 것도 다 물어
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몰라? 웃는 거지. 이렇게. 하하하!"
할슈타일 후작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활짝 웃고있는 아일페사스를 바
라보았다. 갑자기 후작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아일페사스를 바라보던
후작의 얼굴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후작의 입
술 가장자리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 하하, 하하……"
"하하하!"
신차이로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신차이는 도대체 저 둘이 왜
저렇게 미친듯이 웃고 있느냐는 이시도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무지
를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 사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대답을 해보였다.
그는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이건 그 드래곤의 목소리 같은데. 왜 저렇게 웃고있는 거지?"
쳉은 선실 천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미는 어깨를 으쓱이
고는 배낭을 들어올렸다.
"미 짐 다 쌌다. 나가자."
"음…… 내 짐 싸는 것은 안도와줄 생각인가 보군. 알았어. 먼저 나
가. 짐도 별로 없으니 곧 나가지."
"응? 무슨 짐을 챙기겠다는 거야?"
자신의 빈 배낭을 들어올리던 쳉은 미의 말에 동작을 멈추고는 고개
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미가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려 애쓰고 있었다. 쳉은 손끝이 싸늘해지는 기분을 느꼈
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울림도 없었다.
"무슨 의미지?"
쳉의 얼굴이 굳어지자마자 미는 억지표정을 짓는 것을 포기했다. 미
는 혀를 낼름하고는 말했다.
"헤, 잘 안된다. 응. 짐작하는대로."
"같이 가겠어."
"아니. 쳉은 같이 안가."
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미의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미
는 그 시선을 회피하며 벽을 향해 말했다.
"쳉은 아달탄을 데리고 신차이 선장님과 함께 탄느완으로 돌아가는
거야. 미는 후작님과 드래곤과 함께 파를 뒤 아가고."
"싫어."
"떼쓰지마. 쳉은 오늘 저녁도 되기 전에 죽을 거야. 내일 아침까지는
절대로 불가능하지. 잘 알 텐데. 미는 너무너무 관대해서 쳉의 어떤
모습도 수용할 수 있지만 얼어죽어 딱딱해진 모습은 수용 못할 거야.
아달탄도 마찬가지고. 분명히 말해줬지? 쳉은 아무 도움이 안될 거라
고."
쳉은 여전히 아무 움직임도 없이 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지
도, 가로젖지도 않았다. 미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미는 자신의 목 옆에 검을 세워들었다. 마치 자살하려는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미는 자살하는 대신 자신의 머리카락 몇 올을 잘
라내었다. 다시 검을 꽂아넣은 미는 고개를 돌려 쳉의 오른손을 바라
보다가 그것을 잡아올렸다. 쳉의 오른손은 마치 무정물이라도 되는 것
처럼 미에 의해 들어올려졌다. 큼직하고 두꺼운 그 손을 간신히 받쳐
든 미는 잘라낸 자신의 머리카락을 그 손가락에 감아주었다.
"별로 쓸모도 없는 거지만…… 엘프들처럼 활줄을 만들기엔 너무 작
고. 에이, 몰라. 옷 기워야 되는데 실이 모자라면 이어 써라. 말이 안
되나? 음.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눈물 콧물 다 나오려고 하네. 주먹
꼭 쥐어. 풀리려고 하잖아."
미는 쳉의 손가락을 하나씩 굽혀 주먹을 쥐어주었다. 쳉은 입을 열려
고 노력했고, 간신히 잔뜩 쉰 목소리나마 말 같은 것을 만들어내었다.
"미."
"사랑해."
미는 옆에 내려두었던 배낭을 들어올리고는 그대로 쳉의 옆을 지나쳐
문을 향해 걸어갔다. 쳉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서있었다.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고나서, 쳉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그 주먹을 들어올려 힘껏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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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마도사의 김근우 님이 마침내 돌아오셨군요. 기쁜 일입니다.
악랄한 연재지연에도 불구하고 구박 없이 항상 즐거운 메모 남겨주시
는 **님께 감사드립니다.번 호 : 20396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5-10 01:31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12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12.
드래곤 솔져 에카드나는 땅에 세워둔 타워 실드 위에 왼손을 얹고 오
른손에 쥔 거대한 검은 비스듬히 늘어뜨린 채 무관심한 시선으로 전방
을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솔로쳐는 에카드나의 등 뒤에 서있었기에
무관심한 시선 어쩌고 하는 부분은 그의 추측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
서 에카드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의 앞쪽으로
걸어갈 수도 없었다. 그가 앞으로 나설 경우 에카드나는 점잖지만 단
호한 태도로 솔로쳐의 전진을 막을 테니까. 그래서 솔로쳐는 에카드나
의 넓은 어깨 너머로 데스나이트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솔로쳐의 이런 위치 때문에 그뿐만 아니라 데스나이트들도 실
망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데스나이트들은 에카드나의 어깨 너머
로 보일락말락한 솔로쳐와 대화를 나누어야 된다는 것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데스나이트들은 에카드나에게 끔찍한 시선을 보내며
옆으로 비켜서라는 무언의 요구를 보내고 있었지만 에카드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데스나이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용용아아병병. 너너의의 주주인인을을 모모시시는는 태태도도에에
대대해해 지지적적하하고고픈픈 바바가가 있있다다만만."
"말해봐."
"제제대대로로 교교육육된된 아아랫랫사사람람은은 윗윗사사람람이이
대대화화를를 나나누누고고자자 할할 때때 그그 앞앞을을 막막아아서
서지지는는 않않는는 법법이이다다."
"난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어.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서. 그래서 난 나
름대로 너희 흉측스러운 놈들로부터 내 소환자를 보호하는 방법을 궁
리해야 하지. 그리고 이것은 그 궁리의 결과이고."
"우우리리는는 기기사사다다. 불불명명예예스스러러운운 암암습습은
은 선선호호하하지지 않않는는다다."
솔로쳐는 알지 못했지만 에카드나의 얼굴에 표정이 떠올랐다. 에카드
나는 데스나이트를 향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불명예에 대해 말하고 싶다면, 너희들은 거기서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너희들의 그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명예라는 것에 똥칠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겠다."
"무무엄엄한한 놈놈!"
"꺼져라! 더러운 어둠의 기사들. 시무니안의 풍요로운 가슴에 올려진
너희들의 발을 치워라, 이 빛의 땅에 더이상의 불명예를 끼치지 말라,
너희들이 있어야할 저주와 슬픔으로 돌아가라!"
데스나이트들은 진짜 화가 났고, 자신들이 화를 낸다는 사실에 더욱
분노를 느꼈다. 그들을 모욕하고 있는 것은 고작 용아병 한 명에 불과
하다. 그런 하찮은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데스나이트들
을 반쯤 돌아버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100기의 데스나이트가
1명의 용아병을 상대로 검을 들 수는 없었기에 데스나이트의 분노는
무한대로 증폭되고 있었다. 그 때 데스나이트들 중 하나가 오른 주먹
을 들어올렸다. 데스나이트들의 소란이 잦아들자 데스나이트는 에카드
나에게 말했다.
"아아버버지지 드드래래곤곤과과 어어머머니니 시시무무니니안안의의
참참된된 아아들들 드드래래곤곤 솔솔져져여여."
에카드나는 묵묵히 입을 연 데스나이트를 바라보았다.
"네네 소소환환자자와와의의 이이야야기기를를 끝끝내내고고나나서서
너너의의 말말을을 고고려려해해보보겠겠다다. 입입 다다물물고고 있
있도도록록."
솔로쳐는 피식 웃었다. 300년 전, 천공의 기사들을 이끌어 기사도의
전통이 바이서스의 기사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몸소 증명
했던 사나이는 무거운 투구 속에서 암울한 눈빛을 불태우며 마법사를
주시했다.
"계계속속 말말하하시시오오, 솔솔로로쳐쳐."
"아아, 고맙군."
"지금 저 분들은 뭐하고 있는 건가요, 딤라이트 경?"
"미안합니다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레이디 케이트 데솔로. 옛말에
이르기를 마법사가 하는 일에 설명을 요구하지는 말라고 하지 않던가
요?"
"아아, 네. 제 불찰이었어요, 딤라이트 경."
딤라이트 이스트필드와 케이트 데솔로는 그럴 수 없이 우아한 자세
로, 거기다가 그 자세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근심스러운 눈빛을 한 채
데이든 평원 멀리서 벌어지고 있는 솔로쳐와 그레이의 회견을 바라보
고 있었다. 완전무장한 딤라이트의 허벅지밖에 오지 않는 키티 데시의
신장 때문에 키티 데시가 말을 할 때는 고개를 한껏 쳐들어야 된다는
것이 그 둘의 유일한 문제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안타까움이나
근심과는 별개로, 그 둘의 모습이 성벽 위의 사람들에게 일종의 희극
적인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래서 켄턴 성벽 위의 경비대원들과 쥬리오 시장, 히든보리 사집관 등
은 보다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데스나이트들과 솔로쳐의 회담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스타파 하빈스는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무스타파는 흉
벽에 기대어 앉아 아무 말 없이 아이라의 머리를 쓰다듬고만 있었다.
아이라는 성벽 아래에 앉은 채 그 거창한 머리를 갤러리 위에 털썩 올
려놓고 있었고 그래서 무스타파는 별 불편없이 아이라의 눈두덩이를
쓰다듬을 수 있었다. 와이번을 바라보는 시선으로는 대륙의 역사상 다
시는 없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무스타파는 아이라의 날카로운 눈을 들
여다보았다. 아이라 역시 와이번이 인간을 바라볼 때 먹잇감을 바라보
는 시선이 아닌 다른 시선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게으르
게 콧등을 움직여 무스타파의 무릎에 부딪혀갔다. 무스타파는 미소를
지었다.
마법사께서는 그레이가 킨 크라이를 되살려냈다고 하셨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아이라.
무스타파는 허리를 숙여 아이라의 넓은 볼 위에 상체를 얹으며 아이
라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내가 너를 살려낼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도……
말을 마친 솔로쳐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레이를 올려다보았다.
"이해하겠나, 그레이? 이해했을 거라고 믿네."
"떠떠나나겠겠단단 말말이이오오?"
"그럼."
"당당신신이이 떠떠나나면면 켄켄턴턴은은 하하루루도도 버버티티지
지 못못할할 거거요요. 딤딤라라이이트트와와 무무스스타타파파는는
우우리리를를 막막아아낼낼 수수 없없소소. 이이들들이이 아아직직껏
껏 켄켄턴턴의의 성성문문으으로로 돌돌격격할할 엄엄두두를를 내내지
지 못못하하는는 까까닭닭은은 바바로로 당당신신 때때문문이이오오."
"우리야, 이들이야? 한 가지로 정해서 말해."
그레이의 입매가 일그러지는 모습은 솔로쳐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것들은 주기는 싫고 받기는 즐겁지만 조언은 그렇지 않지.
조언은 받으면 짜증나지만 줄 때는 즐거운 거야. 자, 인상 펴고 내가
주는 조언을 받게."
"해해보보시시지지."
"내가 떠나면 얼씨구나 좋다 켄턴으로 돌격할 모양이군. 물론 딤라이
트와 무스타파는 그들의 고귀한 검을 들어 자네에게 대항하겠지. 하지
만 자네의 검에 딤라이트와 무스타파, 그들 중 하나나 둘이 쓰러질 경
우 자네의 마지막 희망과 동시에 그들의 마지막 희망도 쓰러지게 될
걸세. 천공의 기사는 끝장이라고 할까."
"무무슨슨 의의미미인인 거거요요."
"자네는 자네 자신의 죽음에 슬퍼하며 되살아났고, 킨 크라이의 죽음
에 슬퍼하며 그 녀석을 되살렸네. 자네의 형제나 다름없는 딤라이트와
무스타파를 살해할 경우 자네나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자명
하지 않겠나?"
그레이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솔로쳐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가 타
고 있는 괴수는 유황 같은 콧김을 뿜어내며 머리를 뒤채었다. 기수는
꼼작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기수와 한몸이 되어있다시피한 괴수는
기사와 말이 그러하듯 기수의 마음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레이
는 회색으로 물든 손을 천천히 들어올려 턱을 쓰다듬었다.
"말말하하고고픈픈 바바가가 뭔뭔지지."
"글쎄…… 이건 그랑엘베르의 도서관을 통채로 암기하고 엘프의 혀를
빌린 시인이라 할지라도 떠올리기 어려운 지독한 비극이라는 말이지."
"비비극극?"
솔로쳐는 침착한 태도로 소맷부리의 주름을 폈다. 하지만 그의 치켜
뜬 두 눈에서 뿜어져나오는 눈빛은 그레이의 미간을 향해 날아가는 화
살 같았다. 솔로쳐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딤라이트와 무스타파는 자네를 용서할 수 없을 걸세. 그리고 자네는
이제 그들과 한 하늘을 이고 있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지. 하지만 자
네나 그들 중 누가 상대를 쓰러트리더라도 상대는 다시 부활할 걸세.
자네들은 서로를 영원히 죽이고 영원히 되살려내게 될 거야."
무스타파의 손등이 격렬하게 떨렸다. 아이라는 불안을 느껴지만 무스
타파의 억센 두 팔이 그 머리를 끌어안고 있었기에 얌전히 있었다. 무
스타파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데스나이트가 된 그레이를 물리쳐야 한다. 하지만 그 마음이 내
진심일까. 한 사람을 완전히 증오한다는 것은 말이 안돼지. 더군다나
그는 내 오랜 친구. 그래. 나는 그를 되살릴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의 검에 쓰러져야 할까? 아냐. 반대의 경우도 마찬
가지다. 그레이가 아무리 데스나이트라 하더라도 그는 이미 킨 크라이
를 되살려내었다. 그는 나를 되살려낼 것이다. 그가 아니라면 딤라이
트라도. 그래, 딤라이트가 있군. 우리 둘이 동시에 죽는다 해도 딤라
이트는 우리 둘을 되살려낼 것이다.
정말 그럴까? 단지 인간의 소망이 그렇게 생사의 경계를 제멋대로 희
롱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마법사의 말을 완전히 믿는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닐까?
아냐. 생사의 경계는 이미 깨어졌다. 얼간이 같으니.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너는 누구냐.
솔로쳐는 하고싶은 말을 마친 표정으로 자신의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데스나이트들이 흠칫했지만 솔로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지팡이를 두
손으로 꼭 쥐고는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힘껏 내리꽂았
다.
지팡이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에 단단히 꽂혔다. 충격이 만만찮았
던 듯, 솔로쳐는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말했다.
"자라서 나무가 될 거야."
"나나무무?"
"몇백년 쯤 뒤, 노인은 손자에게 이렇게 말할 걸세. 마법사 솔로쳐가
땅에 꽂은 지팡이에서 가지가 뻗고 잎이 돋아나 이 나무가 된 거란다.
예의바른 손자는 그 이야기를 믿는다는 표정을 지어줄지도 모르지. 물
론 속으로는 전혀 믿지 않겠지. 그 이야기는 사실이었는데도 말이야.
하하하."
그레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솔로쳐가 무슨 의미로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짐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로
쳐는 두 손을 탁탁 털고는 뒷짐을 지으며 말했다.
"가세, 에카드나."
솔로쳐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에카드나는 데스나
이트들을 충분히 견제하면서 서서히 타워실드를 들어올렸다. 그레이는
갑자기 외쳤다.
"솔솔로로쳐쳐!"
솔로쳐는 걸어가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레이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내가 했던 말 명심하게, 에카드나."
에카드나는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데스나이트를 견제하느라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에카드나는 솔로쳐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레이
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솔로쳐는 천천히 희미해지고 있었다.
봄날의 아지랑이, 사막의 신기루, 겨울날 난로 속의 미약한 불꽃을
통해 볼 수 있는 추억들처럼, 뒷짐을 진 채 걸어가는 솔로쳐의 모습
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그레이는 무슨 말이든지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에카드나는 그레이의 기세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는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용아병답지 않게도 적에게 등을
보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때, 희미해지던 솔로쳐가 낮게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곧 말세가 올 거라고 중얼거리던 작자들이 있었지. 하지만 300년 뒤
의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운걸. 그 작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솔솔로로쳐쳐! 나나는는 모모르르겠겠다다. 당당신신은은 지지금
금……."
"잘 있게, 친구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솔로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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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얼 게시물 번호가 20000대가 넘다니…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됩니
다. 물론 실제 게시물 숫자는 그보다 적지만 이 정도면 천일야화에 뒤
지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하.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20515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5-13 01:56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13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13.
딤라이트는 흉벽을 꽉 움켜쥐었다.
켄턴을 향해 걸어오고 있던 솔로쳐는 그야말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키티 데시는 손뼉을 치며 마법사님이 마법을 부리셨다느니 어쩌니 하
고 있었다. 하지만 딤라이트의 귀에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쥬리오
시장이나 히든보리 사집관 역시 눈을 비비거나 주위를 둘러보거나 하
며 솔로쳐를 찾고 있었지만 딤라이트는 데이든 평원만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그는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솔로쳐처럼 죽었다가 살아난 자
였기에. 솔로쳐는 정말 돌아간 것이다.
그 때 딤라이트의 귀로 무스타파의 거칠고 우울한 목소리가 들려왔
다.
"이 시대까지 드리워지고 있던 안타까움의 닻을 끌어올리고, 그는 수
평선 너머를 향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항해를 시작했군."
"무스타파?"
"그림 오세니아께 가야 해. 너무 무거워도, 닻은 나의 것이지. 그것
을 끌어올리고 그림 오세니아께 가야 해."
딤라이트는 입을 다문 채 무스타파를 바라보았다. 그림 오세니아. 우
리의 아버지. 최초의 익사자. 먼저 죽었던 자. 우리가 갈 길을 가장
먼저 갔던 자. 햇빛도 닿지 않는 수백 길의 바다 아래에서 영원을 꿈
꾸는 자. 우리가 따라가야 할 아버지의 길.
무스타파는 고개를 돌려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딤라이트, 나는 말일세."
"응?"
"일스의 백파이프 노랫소리를 듣고 싶네. 자네는 그걸 참 잘 불었지.
자네에게 이야기를 시킬 것인지 백파이프를 불게 할 것인지를 놓고 선
택하라면 난 300년이 지났어도 후자를 선택할 걸세."
무스타파가 말을 마친 순간 딤라이트는 백파이프를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키티 데시는 입을 헤벌리며 감탄사를 토해내었고 딤라이트는 아무 말
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백파이프와 무스타파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그 백파이프를 알고 있었다. 일스의 수도 바란 탄에
있는 이스트필드 가문의 고풍스러운 저택에 황혼이 찾아들 때, 기사
딤라이트는 바다를 향해 열려있는 정원 끄트머리에 서서 그것을 연주
하곤 했었다. 그리고 기사들의 연회가 열릴 때 그는 모자란 이야기 솜
씨 대신 그것을 연주하여 장미의 기사들을 즐겁게 해주곤 했었다. 그
것은 딤라이트의 백파이프였다.
무스타파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런 식이지. 부탁하네. 한번도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난 자
네만큼이나 그 백파이프와 그 소리를 좋아했었네."
"무스타파. 이건 도대체……"
"부탁하네."
딤라이트는 다시 뭐라고 말하려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떨리
는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지관 위에 얹었다. 챈터를 찾는 손가락이 조
금 주춤거렸지만 딤라이트는 곧 익숙한 손놀림을 기억해내었다. 등은
자연스럽게 꼿꼿이 펴졌고 두 팔은 편안하게 백파이프를 안았다. 잠시
후 딤라이트의 손가락이 조용히 움직이며 켄턴의 성벽 위로 백파이프
의 높고 맑은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때까지도 솔로쳐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쥬리오 시장과 히든보리 사
집관, 그리고 켄턴의 경비대원들은 느닷없이 들려오는 백파이프의 청
아한 소리에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다. 무스타파는 짧은 웃음을 지었
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입에선 일스의 오래된 뱃노래가
흘러나왔다. 낮고 구슬프지만 힘있는 노래였다.
수면 아래, 빛은 희박하고 꿈마저 침침해도
무거운 쇠사슬 끝엔 닻이 매달려있지.
뱃사람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
그것은 나의 것. 보이진 않아도.
아름다운 항구라도 나 영원히 머물진 못할테니,
그리움의 저편에는 수평선이 닿아있지.
그림 오세니아의 아들은 누구나 알고 있지.
그것은 아버지의 것. 나 거기로 돌아가리.
솔로쳐가 사라진 자리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던 그레이는 흠칫하며 고
개를 들어올렸다. 에카드나는 갑자기 들려온 음악소리에 당황했지만
그 당황은 다시 용아병의 감각을 되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에카드나는
데스나이트들을 경계하며 주의깊지만 빠른 동작으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레이는 에카드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켄턴의 성벽만
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거운 닻을 끌어올리고 가벼운 돛을 펼쳐라.
내 정든 항구를 떠나 뱃머리를 수평선으로.
별, 내 아버지께의 길을 가르쳐줄 테지.
바람, 나를 그림 오세니아께 데려갈 테지.
나는 항해자.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나는 항해자. 죽을 때까지. 그리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뭐해요, 파하스? 루미너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건가요?"
하프를 뜯으며 노래부르고 있던 파하스는 네리아를 돌아보며 미소지
었다.
해뜨기 직전의 새벽이라 가장 어두울 시간이었지만 북해의 새벽은 의
외로 밝았다. 산등성이마다 뿌려진 눈과 빙산, 그리고 계곡을 타고 흐
르는 장대한 빙하는 루미너스의 빛을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었다. 짙은
먹구름이 낀 낮보다 조금 어두운 정도의 새벽이었다. 그래서 파하스는
네리아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두꺼운 털옷을 몇 개나 껴입은 것
인지 네리아는 뒤뚱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원래 몸놀림이
가볍고 빠른 터라 그 모습은 마치 바람이 잔뜩 들어간 공이 통통 튀는
것처럼 보였다. 파하스는 하프 위에 손가락을 얹어둔 채 말했다.
"아니외다. 네리아. 시인이 항상 그러하듯 나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
주고 있었소이다. 그런데 어쩐 일로?"
"난 일찍 일어나는 편이에요. 여기서 노랫소리가 들리기에 에델린의
옷까지 걸쳐입고 올라와봤죠."
"아아. 프리스티스 에델린의 옷이었군요. 그래서 그렇게 커다랗게 보
이는 것이로군요."
"네. 그런데 걸어오면서 듣다보니 바이서스어라서 조금 놀랐어요. 헤
게모니아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확하게는 일스 노래요. 바이서스와 일스의 말은 같으니."
"일스? 아아. 음…… 구슬프더군요."
"뱃사람들의 노래라 그럴 것이오. 원래는 백파이프로 연주하는 거지
만 하프로 연주하니 색다른 느낌이 있군요. 하긴 이 고요한 밤바다를
향해 백파이프의 우렁찬 음률을 연주했다간 고래들이 발작을 일으킬
테지요."
"고래?"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하필이면 고래를 거론하는 거냐는
네리아의 눈빛에 파하스는 말없이 손을 들어 밤바다를 가리켰다.
네리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파하스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각종
악기를 다루기에 모두 편리해보이는 파하스의 가늘고 긴 손가락은 탄
느완의 항구 바깥의 열린 바다를 가리키고 있었다. 탄느완도 대개의
항구처럼 파도와 바람의 영향을 적게 받는 곶 안쪽에 있었지만 그들이
서있는 언덕에서는 외해쪽이 잘 보였다. 네리아는 의혹이 담긴 눈으로
바다의 검은 표면을 바라보았고, 다시 파하스에게 고개를 돌리기 직전
'그것'을 발견했다.
고래들이었다. 네리아는 처음에 물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잔잔한
바다 위에 생긴 그 언덕들은 물결로 보기에는 너무 단단했고 고정적이
었다. 네리아는 숨소리를 낮추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고래들은 제왕다
운 몸놀림으로 느긋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갑자기 그들 중 하나가 분
수공을 쳐들며 그 거대한 허파에서만이 뿜어낼 수 있는 물보라를 폭발
시켰다. 달빛 아래 튀어오른 물방울들은 은빛으로 빛나며 천천히 비산
했다. 빛이 스러졌을 때, 네리아는 고래의 고요하지만 우렁찬 호흡소
리를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무 먼 거리였지만 네리아는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아무 말 없이 파하스를 돌아보
았다. 파하스 역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안도했
다.
"고래네요."
"예."
"이렇게 가까이서…… 저는 처음 봐요.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이 북쪽의 바다는 피요르드와 빙하 때문에 수로가 좁은 편이기 때문
일 거요. 그래서 사람이든 고래든 비슷한 바다를 이용해야겠지요. 바
다가 훨씬 더 크게 열려있는 땅에서라면 저런 모습은 보기 어렵겠지
요."
"그런가요. 그런데 고래들은 뭘 하고 있는 걸까요?"
"글쎄요.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혹
저들이 그들만이 알고 있는 심원한 바다의 지혜를, 도저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우리들에게 어떻게든 전해주고 싶어서 안타까워
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저들은 그저 기지개
를 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네리아는 파하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고 파하스는 자조적인 미소
를 지어 보였다.
"그건 고래 사정이라는 겁니다. 내가 알 바가 아니고, 설령 내 멋대
로 의미를 붙인다 하더라도 그건 고래로선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요."
"그런데, 안추워요? 나 같으면 손가락이 곱아서 하프현 못만질 거 같
은데."
"싸늘한 날씨이긴 하군요. 잠깐 기다리시지요……"
"됐어요! 망토 벗지 말아요. 내가 뻔뻔스럽게 그걸 받아 입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건 매너가 아니고 날 모욕하는 거네요."
파하스는 머쓱하게 웃으며 망토 조임쇠에서 손을 뗐다.
"확실히 내 알던 시절과는 다르군요. 내 시대의 레이디들이었다면 보
다 세련되고 복잡한 말로 사양했을 테지요. 아, 물론 네리아 양이 무
례하다는 말은 아니오. 그런 솔직함이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의미이오
이다."
"냐암. 좋다는 말인지 싫다는 말인지."
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파하스의 옆에 주저앉았다. 파하스식 표
현을 빌린다면 '신선함이 동반된 솔직함'이라 할만한 동작이었다. 네
리아는 그야말로 철퍼덕 주저앉아버렸기에 파하스는 망토를 벗어 바닥
에 깔아준다거나 하는 행동을 취할 겨를이 없었다.
"계속해봐요."
"계속? 아아. 하프 말입니까. 그러지요. 그렇잖아도 연습해보곤 하는
곡이 있지요. 그날, 아일페사스의 변화와 그 비행을 보았을 때의 감동
을 노래로 옮겨보려고 고심하고 있소이다."
"아아, 근사했어요. 난 그런 것엔 재주가 없어서 표현 못하지만 당신
이라면 틀림없이 멋진 곡을 붙일 수 있을 거에요. 드래곤은 정말 빨리
자라나 봐요. 사람도 그렇게 자라면 재미있을 텐데."
"빠르다고 하셨소이까?"
"예? 어, 제레인트가 그랬잖나요? 저번에는 조그마한 해츨링이었는데
곧장 그렇게 커다란 어덜트 드래곤이 되었다고."
"시간을 뛰어넘었군요."
요즘 들어 항상 이래. '시간'이라는 말만 나오면 가슴이 섬뜩하다니
깐. 네리아는 동그래진 눈으로 파하스를 바라보았다. 파하스는 하프의
현을 애무하듯 천천히 문지르며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니겠지요. 그럴 순 없을 거외다. 투미한 식견으로
부터 나온 추측을 용서하신다면, 현재가 멈춰서 이 과거의 광대가 따
라붙을 지경인데 현재의 무엇이 갑자기 미래로 가버릴 수는 없을 거라
고 주장하겠소이다."
"그럼 왜 갑자기?"
"좋은 질문입니다. 아, 요즘도 이 말은 똑같은 의미로 쓰이겠지요?"
"네. 나도 모르겠다는 뜻 맞아요. 피-"
파하스는 껄껄 웃었다. 그리고 네리아가 꽤나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아직도 하프를 타려는 생각은 별로 없는 것처럼 손가락을 까딱
거리며 말했다.
"아일페사스는 드래곤 로드의 후계자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그녀의
변신은 드래곤의 의지인지도 모르지요."
"드래곤의 의지?"
"아일페사스가 아닌 드래곤의 의지이기 때문에…… 드래곤의 제왕인
골드 드래곤의 어덜트폼으로 폴리모프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 이 광대
의 용감무쌍한 추측입니다."
"다시 한번 말해주세요."
파하스는 못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반복했고 다 듣고 난
네리아는 태연한 표정으로 한번 더 반복할 것을 요구했다. 세번째로
같은 말을 듣고 난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드래곤의 의지가 뭘까요?"
"아, 좋은 질문입니다."
"하프나 타요!"
"잘 알겠습니다."
파하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네리아는 에델
린의 커다란 겉옷 속에서 최대한 몸을 웅크린 다음 두 무릎 위에 턱을
단단히 묻은 채 귀만 쫑긋 세워 파하스의 연주를 들었다.
파하스는 아무 노래없이 하프만을 탔다. 시인에게서는 보기 힘든 모
습이었지만 이 설국의 풍광 속에 언어나 의미를 더하지 않겠다는 파하
스의 결정은 바람직했다. 네리아 역시 파하스가 아무 노랫말 없이 하
프 연주만 하는 것에 만족했다.
북녘 하늘처럼 맑게 시작되었던 하프 소리는 곧 빙하처럼 무겁고 느
리고 강하게 변화되어 유장하게 흐르다가 부드럽게 변화하여 빙산의
허리를 두드리는 파도가 되었다. 잘디잔 화음을 빠르게 탄주하던 파하
스의 손가락들이 교묘하게 고음부쪽으로 옮겨왔다. 높고 급한 음정이
쉴새없이 몰아쳐 네리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북해의 폭풍이었다.
그렇게 계속되던 속주가 어느 순간 폭발하는 듯한 고요함으로 접어들
었다. 급격하게 찾아온 고요함은 갑작스러운 고음만큼이나 경이적이었
다. 네리아가 숨을 내쉬려는 찰라, 다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파
하스의 손가락은 북해의 바다 위를 외롭게 나는 알바트로스를 그려내
었다.
폭풍이 지나간 북해 위로 알바트로스는 추억만큼이나 긴 날개를 편
채 한없이 고요히 날고 있었다. 산봉우리의 만년설은 유구한 세월 동
안 그래왔던 것처럼 고요히 얼어붙어 있었고 그 계곡으로 빙하의 은빛
줄기는 느닷없는 싱커페이션으로 치닫기 위한 도약대가 되었다. 파하
스가 교묘하게 삽입한 불협화음은 얼어붙은 북해의 바다 위로 날아가
는 알바트로스의 고요한 비행에 긴장감을 조장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대감이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만 같은, 조용하지만 힘찬 낮은
음들.
그리고 드래곤이 수평선을 박차고 일어났다.
"배다!"
제레인트의 고함소리에 네리아는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고 하마터면
커다란 옷자락을 밟으며 나뒹굴 뻔했다. 가까스로 일어난 네리아는 멀
리 보이는 해변을 바라보았다. 언제 나온 것인지 제레인트가 해안에
선 채 수평선을 향해 고함지르고 있었다. 잠깐, 저 모습이 어떻게 보
이지? 네리아는 그제서야 어느새 사방이 꽤나 밝아졌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그런데 배라고?
네리아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수평선으로부터 탄느완
의 항구를 향해 다가오는 배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멀리서도 너
무나 뚜렷하게 보이는 붉은 돛. 네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배를 바라
보았다. 배의 거대한 돛에는 온통 붉은 서펜트의 모습이 꿈틀대고 있
었다. 수평선을 박차고 솟아오른 붉은 서펜트.
================================================================
아일페사스가 왜 갑자기 커졌냐는 질문이 많군요. 후작의 대사를 통
해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흠흠… 모자란 글재주는 글쟁이의 발
을 묶는 족쇄였더라. 하하하.
백파이프 음악을 들으며 읽어주시면 좋겠군요. 아, 이 자리를 빌어서
Scottish drinking and pipe songs 를 선물해주신 **님께 감사합니다.
신나게 듣고 있습니다.(과연 이런 노래에 '신나게'라는 말을 쓸 수 있
는진 모르겠지만.)
번 호 : 20516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5-13 01:57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14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14.
시오네는 관에 걸터앉은 채 묵묵히 천막의 천장을 쏘아보고 있었다.
함은 그녀의 등을 바라보는 자세로 앉아있었다. 이것은 함의 의도는
아니었다. 함은 의자에 묶여 있었고, 관에서 나온 시오네는 함을 흘깃
바라본 다음 그에게 등을 돌린 자세로 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은 함에게도 마음 놓이는 상황이었다. 그 음흉한 카알은 시오네의 관
바로 옆에 함을 묶어놓았다. 시오네가 나와서 얼마든지 쳐다볼 수 있
도록. 그리고 뱀파이어가 쳐다본다는 것은 함에게는 수백 가지의 즐거
운 일 다음에라도 맞이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함은 무조건 안심할 수는 없었다. 함은 시오네가 읽고나서 땅
에 던져버린 쪽지를 흘끔 바라보았다. 원래 시오네의 관 위에 놓여있
던 그 쪽지에는 카알의 필체로 몇 마디의 말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함은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시오네 양의 독보적인 능력을 이용하여
함의 머릿속을 적당히 씻고 수선한 다음 자이펀으로 돌려보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내용으로 다름아닌 세뇌요구였다.
등을 보인 채 앉아있던 시오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죽을 수 있는 것이 자랑스럽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지."
함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오네는 여전히 천장을 쏘아보며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지? 너희들이 매일
같이 하는 행동들의 9할 정도는 내일도 살아있기 위해 하는 일 아닌
가. 자가당착도 이 정도면 너무 심한 것 아냐?"
함은 이번에는 대답했다.
"꽤 비율이 높기는 하겠지만 9할은 너무 심하군."
"말꼬리잡지 말아라."
"어쨌든 '전부'라고 하지 않고 '9할'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너 역
시 그 외의 어떤 부분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 모양이군. 생존이 아닌
생활을 위한 어떤 부분 말이야."
"글쎄. 내가 보기에 그 1할의 가소로운 노력은 나머지 9할 동안 바쳐
지는 너희들의 노동에 어떤 근거나 정당성을 주기 위해 이용되는 것
같더군. 이러이러하므로 살아야 한다.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 슬
픈 자기변명을 하기 위해 1할이나 2할 정도를 소모하는 것이 과연 제
대로 된 삶일까. 너희들이 기르는 말이나 소는 그런 1할의 낭비도 없
이 10할 전부를 완전히 자신의 삶에 바치지."
"그건 삶이라기보다는 생존이고, 적어도 인간에겐 자존심 상하는 이
야기로군."
시오네는 함이 말한 단어에 당황했다.
"자존심?"
"그래. 자존심. 최후의 순간에라도 버리지 못하는 것. 인식하지 못하
지만 언제나 내 속에 있는 것. 이런 비굴한 상황에 빠진 나의 마지막
전우.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다른 무엇도 아닌
자존심을 말하는 것이다. 너는 가지지 못한 그것 말이야."
시오네는 뒤로 돌아 앉았다. 함은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존심 때문인가. 그래서 눈을 돌리지 못하는 거야?"
"그렇다."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경배할 수 있는 이유는 뭐지? 어떻게 그렇게
오만한가?"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성전이니까."
"그 성전이 죽음 앞에 무너지기를 바라는 이유는?"
"멸망은 완성의 귀결이야. 나의 성전은 무너졌을 때 완성된다. 책은
마지막 페이지가 있을 때 책이고 노래는 끝맺음이 있어야 노래다. 나
의 성전은 나의 우상은 아니다."
"머저리."
"뭐?"
함은 대답하면서 시오네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시오네가 눈
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함은 어이가 없어졌다. 뱀파이어가
눈물을? 시오네는 두 눈 가득히 고인 눈물 속에서 함을 바라보며 말했
다.
"핸드레이크. 당신은 정말 머저리에요. 얼간이라고요."
핸드레이크? 함은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도 전
에 시오네는 소맷자락을 들어올려 눈물을 닦아내었다. 소맷자락이 치
워지고 다시 메마른 시오네의 얼굴이 나타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시오네는 이제 차분한 얼굴로 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오네를 마주보았다.
정적은 공포가 되었고 함은 입술을 짓씹었다.
"이런, 안돼……!"
함은 다급하게 혀를 빼물었다. 하지만 깨물지는 못했다. 자이펀의 국
방대신은 혀를 길게 빼문 볼품없는 모습으로 뱀파이어를 마주보았다.
시오네의 깊은 두 눈은 미명도 없이 함의 시선을 흡수했다. 그리고 그
깊은 심연 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함은 그것에 집중하
려는 자신을 억누르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불가항력이었다.
함의 입매가 조금씩 올라갔다.
시오네는 이제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얼굴로 함의 미소를 바라보았
다. 함은 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오네가 그를 알게 된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시오네는 그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
았다. 하지만 함의 미소는 점점 더 과장되고 일그러져 끔찍한 모습으
로 바뀌어갔다. 시오네는 눈을 감았다.
함의 머리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시오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함은 의자에 묶인 채 졸고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아무 말 없이 함의 정수리를 바라보던 시오네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시오네는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러나 시오네
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다이가 그려놓은
마법진이 그녀를 완벽하게 포기하고 있었다.
"그래요. 나올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소."
시오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카알을 바라보았
다. 카알은 시오네를 흘깃 바라본 다음 곧장 함에게 다가갔다. 카알은
함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쥐고는 위로 들어올렸다. 함의 머리는 마치
시체의 그것처럼 묵직하고 힘없이 들어올려졌다. 카알은 그것을 다시
내려놓은 다음 시오네에게 질문했다.
"잘 된 겁니까?"
"그래."
카알은 불만족스러운 작품을 바라보는 것처럼 함을 바라보았다.
"이건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것 같은 모습인데. 이거 봐요. 이 자가
자이펀에 돌아갔을 때 자이펀의 누구라도 이 친구가 제정신이 아닐 거
라고 의심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잘 알겠지요?"
"물론 그렇군."
"예?"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함은 이제 트랜스에 빠져버렸을 뿐이야. 아직
암시 같은 것은 주지 않았다. 더 필요한 과정이 있어."
"필요한 과정……? 아아. 혹 그겁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당신은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니 내가 그를 안으로 밀
어넣어드리면 되겠군요. 그럼 당신이…… 그걸 할 수 있겠죠."
흡혈을. 카알은 내뱉지 못한 단어 때문에 입천장이 깔깔해지는 기분
을 느꼈다. 시오네는 아무 대답이 없었고, 카알은 어깨를 으쓱인 다음
함의 밧줄을 풀고 그를 들어올리기 위해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 때 시오네가 말했다.
"네 자존심은 뭐지?"
"예?"
카알은 함을 다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놓은 다음 시오네를 돌아보았
다. 물론 카알은 시오네의 이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자존심은 뭐냐고 물었다. 조금 전 함이 그러더군. 네놈들은 마지
막 순간까지 버리지 못하는 자존심이 있다고. 하지만 넌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친 것 같아 보이는데. 뱀파이어에게 의뢰해서 적국의 국
방대신을 세뇌시킬 정도면 자존심이고 뭐고 없는……"
카알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단어 그대로의 자존심이고 흔히 견습기사들이
말하는 자존심이군요. 똑바로 설명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해봐."
"당신이 보기에 제가 확신에 차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
까?"
"스스로에게 충실하다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그런 건가? 자신을 경배하고, 자신이 믿는 바를 끝까지 믿고, 주위
에서 요구하는 모든 공정함은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것?"
"그렇습니다. 그 공정함이라는 것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니고, 따라서
제 걸음과 일치한다면 따를 수도 있고 일치하지 않는다면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행복한가?"
"천만에요."
카알은 더없이 명쾌하게 말했다. 시오네는 미간을 찌푸린 채 카알을
보았지만 카알은 여전히 그녀의 이마만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행복합니다."
"무슨 의미지?"
"세상이 요구하는 공정함을 따른다는 것은 정체입니다. 같은 방식으
로 생각하고 같은 일에 즐거워하고 같은 일에 슬퍼하며 살면 살기는
편합니다. 누가 그런 자를 꾸짖겠습니까. 그건 완벽한 호인인 걸요.
호인의 즐거움은 정체가 주는 안락함이죠."
"정체…… 시간의 정지?"
카알은 빙긋 웃었다. 시오네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웃음인지라 카알
의 웃음은 조금 불안스럽게 보였다.
"예."
"너희들은 그렇게 시간을 만들어내나?"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넌 지금 정지된 모든 관습과 정의를 깨버리고 새로운 시간과
사건을 만들어내려는 건가? 다시 시간을 흐르게끔 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두지요."
"왜?"
"왜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시오네는 잔뜩 굳은 얼굴로 카알의 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지? 너 스스로도 말했다. 그런 정체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훨씬
즐겁다고. 그런데 왜 그렇게 정지를 거부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지?"
그 순간 카알은 고개를 내렸다.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시오네는 카알
의 시선을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카알은 시오네의 두 눈을 똑
바로 들여다보며 웃었다.
"자존심 때문이지요."
================================================================
세상이 멸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스트라다무스 할아버지의
말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요. 작은 나라(코소보)에서 제 3 차 세계대
전이 일어나고, 그 때 동방으로부터 군대가 움직이고.(중국 대사관 폭
격 때문에 중국이 칼을 갈고 있죠.) 거기다가 방송 중단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저지른 모종교집단을 위시한 일부 사이비 종교단체들을 적당히
안티 크리스트 개념에 대입하면… 그럭저럭 세상이 망할 것도 같군요.
하하하.
물론 머릿속의 장난이지요. 타자는 인류의 자존심을 믿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20797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5-19 00:45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15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15.
시오네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카알은 도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는 한숨을 내쉬고는 끙끙거리며 함의 몸을 들어올렸다. 함의 다리가
질질 끌리고 몇 번 엉덩방아를 찧을 뻔한 위기를 넘기며 카알은 마법
진 안으로 함의 몸을 던져넣을 수 있었다.
"휴우. 죽을 맛이군요. 자, 이제 부탁합니다. 나는 다시 나가겠습니
다."
"부탁이 있는데. 나가기 전에 저 불을 꺼줘. 내겐 필요한 것이 아
냐."
"예? 아아, 네."
카알은 테이블 위에서 타고 있던 촛불을 불어 껐다. 천막 안이 캄캄
해졌다. 카알은 어둠 속을 향해 '수고하십시오.'라고 말하려다가 아무
래도 어울리지 않는 행동인 듯해서 그냥 아무 말 없이 나왔다.
시오네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시오네는 함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함은 땅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로 낮게 코를 골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시오네
는 킥 웃으며 소맷자락을 걷어올렸다. 함의 상체를 붙잡은 시오네는
놀라운 힘으로 그를 끌어올렸다. 조금 전 카알이 낑낑거리던 모습에
비한다면 마치 어린애라도 다루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시오네는 관에
걸터앉은 채 함을 가슴에 안았다. 그의 긴 다리가 시오네의 무릎을 넘
어 축 늘어졌다. 시오네는 흐트러진 함의 머릿결을 정돈했다. 얼굴과
목이 하얗게 드러났다.
시오네는 그렇게 조금 함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포로생활로 초췌해진 함의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엔 명가의 자손다운
풍모가 남아있었다. 무수한 세월 동안 인간의 죽음을 보아온 - 그 중
그녀 자신이 인도한 죽음도 상당수 있었다. - 시오네는 함의 얼굴에서
결코 스러지지 않을 표정을 읽어내었다. 그것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대로 가지고 있을 오만하고 강인한 표정이었다. 겸손해 보일만큼 잘
갈무리되어있지만 뱀파이어의 날카로운 눈을 속일 수는 없는 엄격함이
깃든 얼굴.
함의 목을 끌어안은 시오네는 천천히 얼굴을 아래로 숙였다.
"일어나!"
시오네는 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시오네의 날카로운 음성에 함은
눈을 떴다. 자신의 이상한 자세와 어둠 때문에 아직 상황을 알아차리
지 못한 함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껌뻑였고 그 때 시오네의
손바닥이 재빨리 함의 입을 틀어막았다. 함은 몸부림을 치며 반항하려
했지만 시오네는 뱀파이어의 무서운 힘으로 함을 억누른 채 조용히 말
했다.
"가만히 있어. 반항하지마."
시오네의 제안은 깨끗이 거부되었고 함은 죽을 힘을 다해 반항했다.
틀어막힌 함의 입속에서 무서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웁! 으우읍!"
"닥치고 가만히 있어. 네게 이로운 일이야."
웃기지마! 라고 고함지를 수가 없는 함은 대신 두 눈으로 시오네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시오네의 눈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녀의
눈 속에서 욕망이나 잔인한 즐거움을 찾아보려 했던 함은 의아해해야
했다.
"잠시 후 카알이 들어오면 세뇌당한 척해라. 알았지?"
함의 몸이 굳었다. 말귀를 알아들었다고 판단한 시오네는 함의 입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눈치 빠르게도 함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시오네를 올려다보았다.
"좋아. 착한 아이군."
"설명해."
"어려울 건 없어. 아니, 네게는 몹시 어려울지도 모르겠군. 나를 사
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겸손하게 대하면 그만이다. 알겠지? 말은
적게 하고 되도록 미소를 많이 지어라. 얼빠진 녀석처럼 보이는 것이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바보같이 보일 필요는 없어. 의심당할 테
니. 그저 평소에 짓던대로 미소지으면 돼. 알았나?"
"그걸 설명하라는 말이 아니었어. 목적이 뭐지?"
"카알의 계획은 알겠지. 그 계획을 역이용하는 거야. 너를 자이펀으
로 돌려보내주겠다."
"왜?"
"난 지고하신 하탄의 종복이니까. 하하하……"
함은 아무 말 없이 시오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마음 속엔 이것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고 싶다는 마음과 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자세,
즉 젖먹이 어린애처럼 시오네의 품에 안긴 자세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함의 마
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오네는 손을 들어 함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
했다. 함이 욕지기를 참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카알에게 찬성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지."
"무슨 말이지?"
"나도 그의 의견을 완전히 수용해서 세상의 모든 환경에 대해 반항하
기로 결심했다는…… 것 정도일까. 아니, 됐어. 설명할 시간이 아냐.
잘 들어. 나는 이제 너를 물겠다."
함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하지만 함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시오네는 기특하다는 듯이 함을 바라보았다.
"훌륭하군. 네 목에 아무런 자국이 남지 않는다면 당장 들통나겠지.
그리고 카알이 그것을 조사해보지 않을 위인은 아니고. 그러니 목을
좀 내놓아야겠어."
함은 불신감이 가득 담긴 눈으로 시오네를 쏘아보았지만 시오네는 아
무 말 없이 기다렸다. 그녀의 손이 계속해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지만
않는다면 훨씬 쉽게 진정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함은 이를 악물었
다.
"믿어야겠군. 네가 정말로 나를 마실 생각이었다면 이런 계교를 꾸밀
까닭은 없겠지."
"그래."
함은 목을 옆으로 휙 젖히며 말했다.
"물어."
그리고 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 함은 시오네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시오네는 씁쓸한 표정으로 함의 목을 내려다보다가 한 마디
했다.
"개에게 명령하는 것 같군."
함은 입을 악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오네는 고개를 숙였다.
시오네는 그녀의 차가운 입술이 함의 목에 닿았을 때 함이 소스라치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시오네는 잠시 함의 목에 입술을 가져다댄
채 가만히 있었다. 함의 심장은 그것을 감싸고 있는 늑골을 때려부술
듯이 쿵쾅거렸다. 그러나 시오네가 오랫동안 입술만 댄 채 꼼작도 하
지 않자 함은 의아함을 느꼈다.
"시오네?"
그가 고개를 들어올리려 할 때 시오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함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은 시오네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천천히 이를 드
러내었다. 그녀의 이가 목에 닿는 선뜻함에 함이 경직한 순간 시오네
의 송곳니는 함의 살결을 파고들어갔다.
함은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목에 느껴지
는 축축함은 시오네의 입술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날카로운 아픔은
그 송곳니가 살갗을 꿰뚫었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일 테고. 하지만 그
것은 함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견디기 쉬운 느낌들이었다. 정말
약간의 특별함도 없었다.
"불을 켜라."
잠시 후, 시오네는 함을 놓아주며 말했다. 함은 풀려나자마자 마법진
밖으로 뛰쳐나와서는 자신의 목을 문지르며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하
지만 시오네는 옆으로 돌아앉아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목을 쓰다
듬던 함은 손가락 끝에 작은 상처 두 개가 만져지는 것을 느꼈다. 진
득하게 피가 묻어나왔지만 그것은 상처 때문에 흘러나온 피였다. 시오
네는 마시지 않았다.
"사람이 들어오거든 얌전히 의자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아라. 개를 길
러본 적이 있나?"
"……어릴 때."
"주인을 바라보는 개를 흉내내면 될 거야."
"무슨 속셈이지? 왜 나를 돕는 거지?"
"설명할 시간이 아니라고 했어."
시오네는 몸을 더 옆으로 돌렸다. 함은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가 테이
블로 걸어갔다. 등잔에 불을 붙인 함은 의자에 앉으려다가 바닥에 떨
어져있는 구겨진 종이를 발견했다. 시오네가 읽고 던져버린 쪽지였다.
함은 그것을 주워들었다. 구겨진 종이를 펴는 소리가 들리자 시오네
의 어깨가 조금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앉아있
었다. 함은 카알의 필체로 적혀있는 쪽지를 빠르게 읽었다.
쪽지를 다 읽은 함은 그것을 다시 구겨서 던졌다. 그리고 의자에 앉
아서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으고 얌전히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겸손한 동작과 달리 그 얼굴은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더 참지 못
한 함은 나직하게 말했다.
"나를 살려낸 건가, 시오네?"
시오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함은 조금 전 읽고 던진 쪽지의 내용을
곱씹었다.
"복잡하게 써놨지만, 결국 네가 거절하면 나는 별 필요가 없으니 곧
죽일 거란 말이군. 그런데 넌 나를 살려내고, 또 자유까지 주려는 건
가? 들킬 위험을 감수하고 말이지. 왜지? 내가 널 카알에게 팔아넘긴
것을 잊은 것은 아닐 텐데."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캐묻는 화법을 썼다간 당장 들킬 거야, 함.
노예처럼 행동하는 편이……"
"왜 나를 돕는 거지?"
시오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더이상 참지 못한 함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시오네의 등을 향해 걸어갔다. 그 때 시오네의 목소리
가 들렸다.
"한 가지만 말해두지. 다시 앉아."
마법진을 넘어 시오네의 어깨를 쥐려 하던 함의 손이 공중에서 멎었
다. 시오네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함은 손을 끌어당
겼다. 함이 다시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리자 시오네는 천천히 말했다.
"나는 뱀파이어다."
함은 기다렸다.
"네가 죽고, 네 자손이 죽고, 그 이후로 몇 대가 흘러도 나는 존재할
것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언제까지고 너희들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
다. 너희들 인간이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는 모습을. 너희들이 나를
잊고, 뱀파이어라는 것을 완전히 잊는 그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때도 너희들이 돌아보지 않는 그림자 속, 너희들이 잊었던 물건의
뒤편, 잠든 너희들의 창문 밖에서, 나는 너희들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
다."
함은 시오네의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는 농담을
말하는 것도 굳은 결심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오네가 담담히 말
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될 것들이었다. 반영구적인 생명과
어둠 속의 생활, 그러나 생존 때문에 인간의 곁을 떠날 수는 없는 시
오네에게 감시자의 역할은 오히려 당연했다. 시오네는 끝까지 돌아보
지 않은 채 말을 맺었다.
"너희들이 언제까지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킬 것인지를 감시할 것이
다."
더이상 태양은 지지 않는다. 흰 윤곽만 남아있을 뿐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열기를 잃은 태양은 지평선을 따라 흐르듯 움직일 뿐
결코 땅 아래로 사라지지도, 하늘 위로 올라오지도 않는다. 지평선을
따라 굴러가는 하얀 공처럼 보이는, 하지만 그런 태양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은 드물다. 빙점 이하로 얼마나 낮은 온도인지 상상할
수도 없는 극한의 추위 속에서 불어닥치는 강풍은 사람을 선 채로 갈
갈이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바람소리, 귀 속에서 고막을 찢어낼 것 같은.
차가운 기온 때문에 고압대인 극지의 날씨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롭
다. 하루 종일 걸어도 산들바람 한 점 만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극
지의 날씨다. 하지만 때때로 바람이 불어닥치면 공기 중에서 파박거리
는 불꽃이 튀길 정도의 지독한 블리자드가 일어났다. 어쨌든, 산들바
람은 없는 것이다. 무풍이거나 폭풍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블리자드가 불어닥칠 때 인간의 두 발은 비참할 정도로
무력하다.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필사적으로 썰매에 매달렸다. 거추장스러운 짐
으로 여겨진지 오래된 썰매를 부득불 끌고다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다. 가없는 바람의 횡포 앞에서 썰매는 사람들의 닻 역할을 해주고 있
었다. 자다가 바람에 날아가버리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썰매에 몸을
묶고 잠들었고 걷다가 날아가버리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썰매에 매달
리다시피 한 채로 그것을 밀고 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지독한 폭풍
설 속에서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죽을 힘을 다해 썰매에 매달린 채 폭
풍이 잠들기를 기다려야 했다.
"기론!"
도르네이는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턴빌
에서 조그마한 책방을 경영하고 있었고 책을 모조리 불질러놓겠다는
말을 주정거리를 삼아 학자가 되지 못한 자신을 야유하며 동시에 끝까
지 책을 버리지 못하여 책에 기대어 살고 있는 자신을 동정하던 취미
가 있던 기론은 블리자드의 손아귀에 붙잡혀 날아올랐다. 버둥거리는
두 팔은 속절없이 눈밭을 긁어대었고 온몸은 핑그르르 돌았다. 뜻없는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기론은 폭풍설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도르네이가
그를 볼 수 있었던 시간은 극히 짧았다. 눈바람 때문에 시계가 0에 가
까웠기 때문이다.
"기론!"
도르네이가 썰매를 놓고 일어서는 순간 그의 팔을 잡아당기는 손이
있었다. 쥬블킨은 도르네이를 끌어내리며 고함질렀다.
"미친 짓 하지마! 썰매를 붙잡아!"
"기론, 기론이 저기……"
"놔둬! 그는 살아있다. 살아있다!"
도르네이는 끔찍한 충격 속에서 굳어버렸다. 도르네이가 멍한 얼굴로
비틀거리는 동안 쥬블킨은 간신히 그를 썰매 밑으로 쑤셔박을 수 있었
다. 다시 썰매에 매달리며 도르네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죽지 않는다. 그들이 썰매에 실어왔던 음식물은 더이상 손도 대지 않
고 있었다. 갈무리도 제대로 하지 않아 이미 꽁꽁 얼어붙은 그것들은
본래의 목적을 잃은 채 오로지 무게추의 역할만을 하고 있었다. 썰매
가 날려가지 않게 하기 위한 무게추. 그들은 먹지도 않았고 잠들지도
않았다.
신스라이프가 그들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 있었다. 도르네이가 이미
한번 그러했던 것처럼.
쥬블킨은 도르네이의 머리를 아래로 짓누르듯이 하며 악을 썼다.
"살아있어! 되돌아올 거야. 이 폭풍이 지나가면 되돌아온다. 미안한
듯이 웃으면서 되돌아올 거란 말이다!"
눈더미 속에 머리를 쑤셔박으며 도르네이는 급한 기침을 토했다. 입
으로 눈가루가 날려들어와 숨이 막혔고 얼어붙은 옷은 이제 고행대처
럼 온몸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차가워진 몸은 통증을 느끼지
못했고 금방이라도 폐가 뒤집혀 튀어나올 것 같은 지독한 기침을 하면
서도 도르네이의 정신은 오히려 말짱했다.
돌아오지 않아. 사방은 눈을 멀게 만드는 백색의 천지. 그 어디에도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태양을 보고 방향을 가늠하는 것조
차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죽지 않는다. 기론은 죽지 못한 채 방향도
무엇도 없이 영원히 계속되는 이 설원 위를 방랑해야 할 것이다. 폭풍
이 불어닥칠 때마다 그의 발걸음은 뒤죽박죽이 될 테니 이곳에서 빠져
나가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는 온몸이 찢어져 설원 위에
흩어질 그날까지 이곳을 계속 방황해야 할 것이다.
"기로오온! 크훌럭! 쿨, 쿨럭."
그러고보니 해괴하기 짝이 없는 일. 왜 이 땅 위에서 태양은 지지 않
는 것일까. 이곳은 이미 시간이 정지한 땅인가? 그들이 잠들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밤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람이
없는 동안 계속해서 묵묵히 걸어야 했다. 살을 발라낼 것 같은 바람
속을 묵묵히 걸어오는 동안 더이상 허기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먹지
도 자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유령처럼 걷고 있는 그들이 잠시나마 살
아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이런 지독한 블리자드 속에서라는 것은 아이
러니컬한 일이었다.
이건 말이 안돼. 도르네이는 그렇게 규정지었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
을 느꼈다.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돼.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지금
내 몸 위에 덮이고 있는 이 눈송이들은 사실 눈이 아니야. 내가 매달
려 있는 이 썰매 다리는 사실 썰매가 아니야. 난 온몸에 이불을 휘감
고 침대 기둥에 매달려 있는 거야. 그래. 털옷에 덕지덕지 매달리는
눈덩이를 떼어내며 도르네이는 히죽 웃었다. 이것봐. 차갑지 않아. 이
것이 눈이라면 당연히 차가워야 할 텐데 이 눈덩이는 차갑지 않아.
그래. 다 꿈이야. 모조리 꿈이야……
"바람이 그쳤다."
================================================================
느닷없이 옛날 애니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에어리어88, 초인 로크 천
년왕국…. 특히 로크가 보고 싶군요. 우리나라에서도 슈퍼맨 로키인지
하는 이상한 이름으로 방영되었지요. 근사한 장면들이 많았지요. 기체
고장으로 대기권으로 불시착하는 우주선 위에 서서 우주선을 조종하는
모습이라던지 100 명의 초능력자와 싸우는 모습, 배양기 속에서 웃고
있는 레이디 칸, 인공행성을 통채로 조종하며 타오르는 항성을 관통하
는 모습…
언제 그런 생각이 드냐고요? '최근'의 '국산'애니를 볼 때입니다. 으
으윽.번 호 : 20798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5-19 00:45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16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16.
신스라이프가 일어서서 말했다. 하지만 도르네이는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도르네이는 헤죽 웃으며 신스라이프를 바라보다
가 다시 눈더미 속에 얼굴을 가져다박았다. 차가움은 전혀 느낄 수 없
었다. 눈은 포근했다.
"일어나!"
신스라이프는 도르네이의 뒤통수를 부여잡아 단숨에 끌어올렸다. 머
리가 뽑혀나갈 것 같은 고통을 느껴야 당연하겠지만 도르네이는 짐짝
처럼 끌려올라가는 자신의 몸과 아무 힘 없이 우쭐거리는 자신의 다리
를 보며 킬킬 웃었다. 신스라이프는 기막힌 시선으로 그런 도르네이의
얼굴을 쏘아보다가 옆으로 팽개쳤다. 도르네이는 얼굴에 와 부딪히는
눈더미의 느낌이 너무 아득하다고 생각했다.
신스라이프는 썰매에 주저앉았다.
눈바람이 가라앉자 희미한 연기 덩어리처럼 보이는 태양이 다시 시야
에 들어왔다. 결코 하늘 위쪽으로 오는 일이 없는 태양은 정신착란적
인 모습으로 지평선 위쪽을 게으르게 떠가고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자
신이 원탁 중앙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동그란 지평선, 동그란
태양의 궤적.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썰매를 중심으로 한 눈더미 곳곳
에 파묻혀 꼼짝도 하지 않은 모습으로 있었고, 그 모습이 끝없는 백색
의 벌판에서 유일하게 시선을 사로잡을만한 특이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신스라이프는 분노했다.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었기에 신스라이프는 시간에 신경쓰지 않았
다. 질식해 죽기 알맞은 모습으로 쳐박혀있는 콜리의 프리스트들에게
도 신경쓰지 않았다. 가장 높이 치솟아올라갔던 눈송이 몇 개가 조용
히 떨어진 것을 마지막으로 설원에는 더이상 움직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어졌다.
그래서 신스라이프는 파에게 말했다.
'거기 있느냐.'
'아니오.'
'여기 있느냐.'
'아니오.'
'거기도 아니고 여기도 아니란 말이군. 하긴.'
신스라이프는 발을 조금 움직여보았다. 뽀드득. 높고 둔한 소리와 함
께 발이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신스라이프는 눈의 차가움이 발등에
전달되다가 마침내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발
을 뺐다. 눈덩어리들이 파헤쳐지며 다시 흰 눈 위로 그의 발이 드러났
다.
'당신은 죽을 거에요.'
'사실과 비슷하지도 않은 말이야. 나는 살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을 해
냈다. 그리고 이제 곧 이 모든 일을 완료할 거야.'
"당신은 죽을 거에요."
신스라이프는 자신의 입을 통해 새어나온 파의 말에 당황했다. 그러
나 파는 곧 말했다.
"당신의 입이 아니죠. 제 입이에요."
'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당신의 피조물이 무엇을 원하는지 관찰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창조
자로서 실격이군요."
'원한다고? 넌 아무 것도 원할 수 없어!'
"당신은 무엇을 원하지요?"
신스라이프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파가 자신을 바보
취급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생명이다. 조건없이, 불안없이, 종말없이. 끝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타오르기 때문에 아름다운 생명 그 자체다!'
"그리고?"
'뭐?'
"그리고? 사는 것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닐 걸요. 당신은
본질을 피하고 있군요."
본질이라고? 신스라이프는 당황했지만 그의 당황을 표현할 수 있는
조금의 자유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어느새 그
의 몸은 완전히 파의 지배권 하에 놓여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눈꺼풀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당신은 영원히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사랑?'
"영원히 살기 위해선 영원히 한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 않나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어리석은 처녀 같으니, 소녀의 꿈
같은 걸 말하는 거냐?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고? 사랑만이 무의미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엔 그런 건 없어!'
"당신은 아직도 본질을 회피하고 있군요. 꼭 직접적으로 물어야 하는
건가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파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극히 자연스러웠고 이제 파의 몸은 완
전히 파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울분에 미쳐 날
뛰는 신스라이프를 향해 파는 나직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당신은 영원히 자신을 사랑할 수 있나요?"
신차이는 목검을 지팡이처럼 짚고는 그 위에 두 손을 얹어둔 자세로
보트 위에 똑바로 서있었다. 그리고 탄느완의 부두에 서있던 운차이
역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물결을 헤치던
노들이 정지하고 보트가 부두에 닿자 신차이는 가벼운 동작으로 뛰어
올랐다.
"운차이!"
운차이는 반가운 목소리로 "신차이!" 하고 부르는 대신 재빨리 롱소
드를 뽑아들었다.
칼날이 빠져나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단련된 손놀림은 대단한 것이
었지만 일행들은 몹시 당황해버렸다. 그들은 입항절차를 위해 먼저 내
려온 일등항해사 이시도로부터 이 배의 이름과 신차이와 운차이의 관
계에 대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레인트는 나름대로 추측했다.
"이건 자이펀 전통의 인사법일 거야. 칼을 높이 들어 신차이 만세!
라고 외친다던가……"
그러나 제레인트의 추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운차이는 롱소드를 정확
히 중단겨누기의 자세로 내밀어 신차이를 겨냥했던 것이다. 설령 저런
동작을 인사법으로 채용하고 있는 민족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민족
의 오해를 받아 이미 오래전에 멸망당했을 만한 동작이었다. 그란 하
슬러는 일단 그 자세에 합격점을 준 다음 그 자세를 취한 운차이의 이
유에 대해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신차이는 별로 놀라지 않은 표정이
었다.
"Ahn barkedo."
"Youkchi une ghetta mi fheirja?"
네리아는 고개를 홱 돌린 다음 파하스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파하스
는 곧 숨소리마저 낮춘 채 둘의 대화에 집중하며 그 말들을 통역했다.
"반갑군."
"가문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온 건가?"
"무슨 말이냐."
"내 수급을 가지러 온 거냐고 묻는 거야."
네리아는 기겁하며 파하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이 정확한 통역인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를 보내었지만 파하스는
통역하느라 바빠서 그 시선들에 대해 화를 낼 시간이 없었다.
"수급? 글쎄. 가지고 다니기 귀찮은가? 나도 가끔은 머리를 가지고
다녀야 된다는 것이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말해두겠는데, 난 나를 죽이려드는 모든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아."
파하스는 재빨리 저것은 자이펀식의 관용구로서 상대방을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지 않는다는 뜻임을 설명했다. 설령 자기 자신이라
도 해도 자신을 죽이려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나
신차이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함으로써 파하스의 설명을 무의미한 것으
로 만들어버렸다.
"자살을 거부하겠다는 건가."
"그래.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내 결심을 돌리진 못할 테니 그럴 결심
이라면 포기하시지."
"헤어진지 오래지만, 네 사촌형에겐 꺾을 수 없는 결심이 있을 때 사
용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것을 잊어먹을만큼 오래되지는 않았을 텐
데."
"그 목검이 꺾이지 않는 이상 형의 결심도 꺾이지 않는다는 것은 나
도 잘 들어 알고 있지. 이제리스의 군주에게 특별한 호감은 없지만,
그는 내가 그의 복수를 맡게 된 것에 대해 화를 내지는 않을 거야."
"아주 좋아하겠지. 내가 사촌동생의 손에 쓰러진다면."
"허, 험악한 형제다. 형제가 똑같아."
네리아는 신음을 토하며 낮게 속삭였고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는 동
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길한 예감에 칼자루로 손을 가져가던 그란은
이시도가 태평한 모습임을 발견하고는 의아해했다. 그 때 운차이가 검
을 아래로 내렸다. 운차이는 칼을 다시 꽂아넣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
었다.
"죽일 생각은 없나 보군."
신차이는 부두에 올라선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죽으면 곤란하지. 발탄으로서도, 나로서도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을
바라지는 않네."
그리고 두 사람은 팔을 내밀어 서로를 포옹했다. 희디흰 빙하를 배경
으로 펼쳐진 사촌형제의 상봉은 꽤나 감동적일 수도 있는 모습이었지
만 일행들은 기만당한 느낌 때문에 감동을 느끼기보다는 화를 내고 싶
어졌다. 그 때 그란은 이시도가 태평했던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두 사람에게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란은 쓰게
웃어버렸다.
그들의 닮은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만큼 포옹을 상당히 빨리 해치워
버린 두 사람은 곧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돌아와서 발탄가를 계승해라. 선주연합과 내가 너를 비호하겠다. 몇
년 동안의 유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남해의 별장들 중 하나에서
몇 년 쉬는 걸로 끝내지."
"나는 이미 모든 인연을 끊었어."
"운차이."
"꿈속에서조차 카레한 탑을 본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내
가 돌아간다면 형과 발탄을 곤경에 빠트릴 뿐이야. 죽은 사람으로 취
급해주면 좋겠군."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지." 그리고 신차이는 헤게모니아
어로 말했다. "이곳의 관습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친지들의 대화도 통
역당하는 분위기는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여건은 아니군."
파하스는 붉으락푸르락했지만 네리아는 재빨리 그를 비난하는 눈초리
로 쏘아봄으로써 파하스를 한층 더 깊은 배신감 속에서 좌절하게 만들
었다. 그란이 "가문의 전통이었군." 이라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는
동안, 이루릴은 커다란 배낭을 가볍게 어깨에 걸치며 보트에서 올라오
는 한 키 큰 남자를 발견했다.
"당신이 쳉인가요."
쳉은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을 찾다가 검은 머리의 엘프를 발견하고
는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엘프 아가씨는?"
"이루릴 세레니얼입니다. 잠시 당신과 동행했던 네리아 씨, 운차이
씨, 그란 씨의 친구입니다."
"아, 그러신가요. 말씀 많이 들었다는 말은 못하겠군요."
이루릴은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쳉은 배낭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건 저희들이 잘 나누는 인삿말입니다. 하지만 저 분들과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서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
다."
"그런가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알아보는 것은 쉽더군요."
"쉽다고 하셨습니까?"
"체격과 표정 모두에서 골렘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쳉은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쳉이 벌겋게 변한 네리아
의 얼굴에서 다시 이루릴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이루릴은 차분한 어조
로 질문했다.
"아일페사스를 만나셨나요."
"예."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골드 드래곤께서는 할슈타일 후작과 미와 함께 북으로 가셨습니
다. 저는 도중에 돌아온 것입니다."
"도중에 돌아왔다고요?"
쳉과 이루릴은 고개를 돌렸다. 네리아가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쳉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리아는 재빨리 달려와 쳉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
했다.
"잠깐만요, 쳉!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도중에 돌아왔다니, 헤
어졌단 말인가요?"
"예. 네리아."
"왜, 어째서지요? 왜 그녀를 내버려두고……"
"빙하와 육지 때문에 배가 더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서 미는 하선했
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배와 함께 돌아가라고 하더군요. 저는 상
륙하면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말하면서."
"가, 가라고 해서 왔다는 거에요?"
"예."
"말도 안돼요!"
네리아는 쳉의 셔츠 자락을 거머쥐었다. 그녀는 쳉을 흔들려고 했지
만 쳉의 거대한 체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네리아는 자신의
몸을 흔들며 고함지르게 되었다.
"왜! 당신은 하루도 견디지 못한다고요? 그럼 미는! 미도 마찬가지잖
아요. 왜? 당신들은 헤어지면 안돼요. 돌아오려면 같이 돌아왔어야지
요! 어떻게 혼자 돌아온 거에요. 어떻게!"
네리아는 당신들이 가진 시간은 겨우 4년밖에 없다는 말을 외치려고
했지만 그 때 쳉이 나직하게 말해서 그 말을 삼킬 수 있었다.
"미는 아일페사스라는 그 골드 드래곤이 자신을 도울 거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아일페사스가? 골드 드래곤이니까? 그럼 당신은! 당신은 그녀를 돕
지 않을 건가요?"
"저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하더군요."
네리아는 입을 쩍 벌린 채 쳉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쳉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쳉은 그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네리
아의 어깨를 살짝 잡아 밀어내었고 네리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뒤
로 몇 걸음 물러나게 되었다. 쳉은 천천히 허리를 구부려 발 옆에 던
져둔 배낭을 집어들었다.
"더 할 말이 없다면,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고 싶습니다."
"바쁜 일…… 바쁘다니, 당신에게 무슨 바쁜 일이오?"
쳉은 대답하지 않았다. 쳉은 그대로 배낭을 어깨 위로 거머쥔 채 훌
쩍한 몸을 꼿꼿이 세우고는 일행들 사이를 걸어갔다. 사람들은 그를
위해 비켜주었고 쳉은 그대로 탄느완의 시내를 향해 사라지는 검은 점
이 되었다.
쳉에게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네리아가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쳉은 탄느완의 주민들로부터 삽과 곡괭이, 도끼 등을 빌린 다음 수레
하나에 그것을 싣고는 탄느완의 교외를 주욱 탐사하며 돌아다녔다. 네
리아는 쳉에게 그런 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쳉은 실제로
간단한 몇 마디 말로서 탄느완의 주민들이 자신의 도구들을 기꺼이 내
어놓게 만들었다. 파하스가 고래를 향해 노래를 부르던 언덕 위에 멈
춰선 쳉은 만족하면서 수레를 멈췄다.
그리고 쳉은 무쇠같은 끈질김과 엑셀핸드도 감탄할만한 완력으로 빙
퇴석들 주워모으기 시작했다. 빙하의 흐름이 상류로부터 가져와 빙하
끄트머리에 내려놓는 빙퇴석들은 꽁꽁 얼어붙어있는데다가 거칠고 투
박하다. 물의 흐름과 달리 빙하의 흐름은 돌의 표면을 다듬는 데는 별
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쳉은 묵묵히 그것을 모은 다음 수레
에 싣고 언덕 위로 실어날랐다. 그가 도대체 몇 번이나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때까지도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를 관찰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쳉은 언덕 위에 거대한 돌무더기를 만들어놓은 다음 곧 삽을 들어 언
덕의 얼어붙은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야영자의 지혜가 모두 동원되어 선택된 그 위치는 해풍으로부터 자유
로우면서도 시야가 좋은 근사한 장소였다. 물론 여건이 근사하다는 말
이지 풍광이 근사하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그곳은 횡뎅그레하고 메마
르고 헐벗은 땅이었다.
쳉은 동토를 파낸 다음 거칠고 모난 빙퇴석들을 솜씨좋게 쌓아올렸
다. 말이나 소도 없고 기중기도 없었지만 쳉은 빙퇴석들을 맞물려 튼
튼한 돌벽을 쌓았고 지붕을 올렸다. 돌움막을 완성한 쳉은 다시 언덕
아래로 내려왔고 그 때 쳉의 몰골은 엉망진창이라는 말도 과분할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쳉은 부드럽고 간결한 말씨로 탄느완의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리 어렵지 않게 집기들을 구할 수 있었
다. 취사도구들은 배낭 속에 가지고 다녔기에 쳉이 구한 것은 배낭 속
에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들이었다. 오래된 작은 난로는 원래 배에서
쓰이던 것으로 전직 선장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었다. 대장간의 고철더
미 속에서 아직 쓸만한 연통을 구한 쳉은 잔돈을 조금 지불한 다음 그
것을 수레에 실을 수 있었다. 그외에도 쳉은 쓰레기 취급당하는 많은
물건을 모아들였다. 탄느완의 시민들은 그들이 그렇게 많은 쓰레기들
을 다락방이나 헛간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쳉은 커다란 낡
은 담요를 구했고 우그러진 냄비와 구멍난 주전자와 부서진 책상을 끌
어모았다. 그것은 수레에 실려 언덕 위로 옮겨진 다음 쳉의 손에 의해
이끼로 속을 채운 침대와 잘 펴진 솥과 굴뚝과 선반으로 변했다. 그리
고 쳉 자신도 변해갔다. 그는 제멋대로 자란 수염 때문에 바늘꽂이처
럼 된 턱을 한 채 탄느완의 선원들이 쓰는 두꺼운 방한복을 개량하여
만든 조끼와 바지를 걸치고 맨발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언덕 위에서 발을 다치게 할만한 것들을 세심하게 찾아내어 모두 치워
버린지 오래였다. 쳉은 가지고 있던 것들 중 돈이 될 것을 전부 팔아
치운 다음 그것으로 음식물을 구입했다.
그 시점에서 탄느완의 주민들과 네리아는 그가 무엇을 만드는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흔한 감시 초소 같은 것이 아니었다. 쳉이 잠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 거기에 살 작정을 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
의 눈에도 분명했다.
쳉은 집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를 기다릴 거에요?"
"예."
"만일 그녀가 오지 않는다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그녀에겐 배가 없어요. 못돌아올지도 몰라."
"돌아올 겁니다."
"그렇다면 영원히 이곳에서 기다릴 거에요? 늙어죽을 때까지라도? 아
무 것도 하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고 그저
이곳에서 살며?"
"예."
네리아는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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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우울…
어느 분 말마따나 제목이 '기다림의 해변'이라서 지겹게 느리게 연재
되었던 챕터 9가 끝났습니다. 다음 챕터의 제목은 초인 로크의 추억을
담아 '천년왕국' 정도로 지어볼까 합니다만… 퍼버벅!
좋은 밤 되세요.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09 03:03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1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1.
카알은 말을 세웠다. 그리고 샌슨은 부끄러워졌다. 그의 부끄러움은
언덕 꼭대기에 서있는 한 명의 남자 때문이었다. 길 옆에 말을 세운
채 그 위에 앉아있는 남자는 고삐를 감아쥔 두 손을 안장 위에 얹고서
는 조용히 샌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늬 없는 회색 망토를 걸치고 허
리에는 역시 별 문양이 없는 롱소드를 찬 모습으로 바이서스의 어느
거리를 걷든 행인의 시선을 10초 이상 잡아두기 힘든 모습이었다. 순
간적으로 샌슨은 카알과 일행이 아니게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따위의 고민에 빠져버렸지만 그의 고민은 카알에 의해 해결되었다. 카
알은 남자를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Mil forujh iha eun Karl, de firion ki iha eun Sanson Percival."
물론 샌슨은 자이펀어를 알지 못했지만 그를 가리키며 이름을 부르는
카알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샌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듣고서도 남자는 한참 동안 지긋이 샌슨을 바라보았고 결과적
으로 샌슨은 수치와 동시에 약간의 분노까지 느꼈다. 그러나 샌슨이
입을 막 열려는 순간 '그래요, 잘못했어요!' 남자는 조용히 말했다.
"함이라고 합니다."
깔끔한 바이서스어였다. 카알은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자이펀의 국방
대신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말했다.
"샌슨 씨는 자이퍼어를 이해하십니까?"
샌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함은 카알에게 말했다.
"그럼, 바이서스 어를 사용하기로 합시다."
샌슨이 감사하다고 말해야 되는가에 대해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카알
은 말에서 내려섰고 그 모습을 보자 함 역시 말에서 내려섰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함 씨?"
"아니오.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 오르자마자 두 분이 달려
오시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샌슨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저, 무슨 못된 흉계가 있어 따라온 것은 아닙니다."
함은 그제서야 싱긋 웃었다.
"흉계가 있었다면 이렇게 드러내놓고 카알을 따라오시지는 않았겠지
요. 카알 씨가 걱정되어서 따라오신 것이리라 짐작합니다만."
"……짐작대로입니다. 카알은 검에는 아무런 소질이 없어서, 아, 그
렇다고 해서 제가 뭐 함 씨를 공격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 절대
로 아닙니다."
단독으로 만나기로 한 자리에 따라온 것에 대해 허둥지둥 변명하던
샌슨은 그만 포기하며 입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샌슨은 카알의 말과
자신의 말 고삐를 같이 쥔 채 조용히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취했다.
나는 여기 없는 것으로 취급해주쇼.
내색하진 않았지만, 함은 그런 샌슨을 보며 흥미를 느꼈다. 그는 샌
슨 퍼시발이라는 이름에 대해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함은 지금 샌
슨의 모습에서 지옥에서 방금 데려온 것 같은 부대 하나를 신들린듯
이 운용하여 번견이 양떼를 몰아붙이듯이 자이펀의 최정예부대 네 개
를 꼼짝달싹 못하도록 휘몰아대고 있는 바이서스의 무시무시한 장수의
모습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저게 정말 칼브린 이후 바이서스 최고의
맹장이라는 샌슨 퍼시발인가? 그 공포스럽다는 사내는 카알을 따라나
온 것에 대해 몹시도 미안해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말구종의 역할을 맡
은 채 다소곳이 서있었다.
카알은 길 옆의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실까요?"
함은 카알을 마주보는 자리에 있는 바위에 앉았다. 그렇게 앉은 두
사람은 마치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행객들처럼 보였다. 카알은
숨을 좀 돌리고나서 말했다.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휴전 협정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함은 고개를 갸웃하며 카알을 바라보았다.
"휴전 협정에 대해서는 이틀 뒤에 있을 정식 협약 때 충분히 논의될
수 있겠죠. 그쪽에서도 그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겠지요? 이쪽도 마
찬가지입니다. 나오기 전에 잠시 보니, 법학자들은 전범으로 기소된
귀국의 인사들을, 아, 함 씨도 물론 포함됩니다. 그 인사들을 기소 중
지시킬 것인지 기소 유예시킬 것인지를 놓고 사투를 벌이고 있더군
요."
함은 싱긋 웃었다.
"그게 그들의 일이니까요. 그런데 궁금하군요. 어떻습니까, 저는 천
인공노할 인류의 적으로 규정지어 만인의 이름으로 고발되어 있겠군
요?"
"거의 비슷합니다. 수식어가 좀 더 많은 편입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카알 당신은 자이펀 내에서 어떤 종류의 고
발도 당한 바 없습니다. 이쪽 율법가들은 당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
으니까요."
함은 농담하듯 말하며 카알에 대해 살짝 비꼬았다. 커튼 뒤에 숨어서
바이서스를 조종하신 귀하의 수완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 의미를 충분
히 알아들었지만 카알은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예. 이 휴전 협정에는 그렇듯 많은 분들이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있으
니만큼, 분명히 양국 모두가 만족할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생각됩
니다. 그래서 저는 휴전 협정에 대해서는 큰 우려를 가지지 않습니다.
오늘 함 씨를 이렇게 뵙고자 한 이유는 다른 이유에서지요."
"휴전 협정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면…… 무슨 이유로?"
"그것보다는 더 심각한 문제를 논의하고 싶습니다. 묻겠습니다. 귀국
에서는 안식에 들어야 할 자들이 지상을 배회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
니까?"
함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혹, 귀국이 디바인 웨펀이라 부르는 그 좀비들의 창궐에 대한 이야
기라면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종류의 언급도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만."
"아니오.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실 텐데요."
함은 찌푸린 얼굴 그대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솔로쳐께서도 부활하셨다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해 보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말씀하신대로, 현재 저희 나라에서는 역사가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만나보고 싶어하는 자들이 지상을 걷고 있습니다. 콜로넬 계곡에서는
데스나이트들이 일어섰고 켄턴의 하늘에서는 천공의 3 기사가 춤추고
있습니다."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충분히 가공할만한 것이라면, 말투는 어떠해도
상관없다. 그래서 카알은 단조로울 정도로 평이하게 말했지만 함은 한
참 동안 말문을 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조금 후에야 함은 힘들게
말했다.
"혹, 이유를 아십니까."
"예. 불민한 후손을 위해 선조들은 죽음까지도 뛰어넘어 배려를 남겨
둔다고 하지요. 그건 아시다시피 은유적인 말이지요. 관습이나 문화,
규칙, 건축물…… 하지만 이번 경우엔 그 말 그대로의 일이 일어났습
니다. 솔로쳐께서 해답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직접…… 만나셨습니까?"
"예."
그외에 다른 적합한 행동은 떠오르지 않았기에, 함은 잠시 한숨을 내
쉬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으로는 좀 실망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온갖 무지개가 하늘을
수놓고 땅이 갈라지고 벼락이 치는 가운데 수염소와 사자들이 끄는 수
레를 타고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죠. 솔로쳐께서는 임펠리아의 정문으
로 걸어들어오셨습니다."
함은 쓰게 웃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 분이겠지요.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카알은 잠시 미간을 문지르다가 말했다.
"좀 복잡합니다. 제가 얼마나 설명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만. 일단 이 부활들에는 여러분들이 Hjan이라고 부르는 것이 개입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함은 조금 놀랐다.
"Hjan?"
"예. 혹 제가 자이펀의 단어를 잘못 인용하더라도 용서하십시오. 솔
로쳐께서 가로되, 크나큰 Hjan을 지닌 자는 죽은 그 자신, 혹은 죽은
그의 친구나 가족들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나 그리움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단순한 사랑이었다면 루트에리노 대
왕은 이미 몇 번에 걸쳐 그를 사랑하는 바이서스 국민들에 의해 부활
되었을 거라고도 하셨습니다. 죽은 남편이나 아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요. 저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만."
"그렇……군요. 그래서 라울은 부활하지 않았으나 베이론은 부활한
것이군요."
함이 거론한 이름들은 당연히 카알에겐 낯설었다. 하지만 함은 설명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의 머리
속에서 무언가가 따다닥 소리를 내며 맞아들어가는 기분이 느껴졌다.
신차이와의 결투에서 죽은 자들 중, 라울 트리그로스는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결투에 임했고 남겨진 미련 없이 무사답게 죽었다. 그는 부
활하지 않았다. 그리고 베이론 코다슈는 분노로서 결투에 임했고 그
감정을 추스릴 겨를도 없이 일격에 칼맞은 낙타꼴로 죽었다. 그는 부
활했다.
카알은 함이 생각에 잠겨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부드럽게 말을
꺼내었다.
"저…… 그리고 솔로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이펀보다는 바이
서스에서 더많은 부활이 일어났을 거라고요."
"예? 이유가 뭐죠?"
"우리는 그 Hjan이 뭔지도 모르니까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감정은
추스릴 수 있을 테지만, 그것에 대해 이름도 모르는 감정이라면 보다
쉽게 그 감정에 휘두릴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섬뜩한 말씀이셨
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면서도, 거기에 붙여진 이름이 없다
면 있는지조차 모르는 감정이라는 것은."
"그렇겠군요. 예. 하지만 단순히 감정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는 생각하기 어렵군요."
"예. 물론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 전제 조건이 뭔가요?"
카알은 대답에 앞서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있는 언덕은
들판의 중간 쯤에 잘못 솟아난 것처럼 생긴 야트막한 야산이었고 그래
서 푸른 하늘은 턱없이 넓어보였다. 카알은 그 하늘 어디에선가 자신
이 말하고자 하는 말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공상을 해보았지
만 하늘은 마냥 푸르를 뿐, 카알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카알은
조금 힘들게 말을 꺼내었다.
"시간이 멈췄다는 것이 그 전제 조건입니다."
다행히도 함은 카알을 바보 취급하거나 미치광이를 보는 시선으로 카
알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열렬한 찬동의 의사를 표한
것도 아니지만. 함은 그저 조용히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었다.
카알은 그 스스로도 혼란스러워하는 개념에 대해 말을 해봄으로써 함
의 이해와 더불어 자신의 이해도 높여보고자 했다.
"현재, 시간은 느려지고 있습니다. 사물들의 시간이 느려지고 있습니
다. 봉오리는 꽃으로 피어나지 않고 부패해야 할 것들은 부패하지 않
습니다. 아이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보다 개인적인 것
을 말해볼까요. 흔히들 아이들은 미래의 주인이라고 말하지만 그 주인
들이 태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주위의 친지들 중 자녀를
얻은 친지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함은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그 황당한 가설에 대한 찬성의 증거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이유만으로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
"없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 표정, 이해합니다. 제 말이 우스꽝스럽게 느
껴지지요? 예. 저 자신도 긴가민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 개
인적인 일들을 돌아보았습니다."
"당신의 개인적인 일?"
"함.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미래를 꿈꾸는 사람
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제 취향에 맞는 미래를 꿈꾸지
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 미력하나마 노력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카알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
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는 말이죠."
"예?"
"저는 제가 미래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
다. 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말하지 않
겠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말씀드리죠. 저는 점점 더 사태와 상황들을
고착시키고 있었습니다. 현재를 끌어안아버린 거라고 할 수 있지요."
"무슨 말씀인지?"
카알은 난감함을 느꼈다. 어떻게 말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먼 나라
의 국방대신에게 들려주기에는 상당히 복잡한 내용들이었다.
그가 서커스를 이용하여 귀족들에게 보낸 경고는 결국 귀족들에게 경
계심을 품게 할 것이다. (샌슨이 습격당한 것을 보면 귀족들의 경계심
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거늘, 카알은 깨닫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문화사업이 의외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 카알이 준 - 모직 산업을 다룰 권리를 획득함으로써 얻게될
풍부한 재원을 이용하여 더 많은 문화 사업들을 자신의 손아귀 안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작가, 미술가, 음악가, 조각가, 정치가, 경제학자,
기타 모든 종류의 기술자들. 어쩌면 성직자와 마법사들까지도? 결국,
문화사업은 적절한 안목과 풍부한 재력을 가진 귀족들이 전담할 때 가
장 높은 수준의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이치다.
문화를 장악한 자들은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다. 역시 귀족이 해야
돼. 역시 귀족다워. 이건 귀족이 해야 할 일 아닐까? 고정 관념들. 움
직일 수 없는. 결국, 비귀족들은 귀족들의 문화 소작농이 될 것이다.
카알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외에 샌슨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들, 함에게는 더욱 말할 수 없었던
것들. 그 모든 계획과 비밀 활동을 재검토한 카알은 자기자신에 대해
아찔함까지 느꼈다. 그가 한 행동들은 모두 현재를 요지부동으로 만들
어버리는 것들이었다.
"너무 많습니다…… 대신 당신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저요?"
================================================================
청소년 축구 보고 신경질 부득부득 내며 글 올립니다. 어차피 어딘가
좀 모자란 듯한 그 풋풋함에 청소년 축구를 봅니다만, 골 운이 없어도
그렇게 없을 수가 있나 싶습니다.(아아악! 내가 미쳐! 골대 맞고 나오
고 수비수 다리에 맞고 나오고!)
아, 질문.
크라드메서가 왜 부활하지 않느냐? 글쎄요… 이건 앞으로의 전개에서
는 설명될 부분이 없으니 말을 하긴 해야겠지만, 좀 슬프군요. 나름대
로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글이 모자라니 도리가 없다.) 간단하게 설
명하지요. 크라드메서는 자살했습니다. Hjan이 없습니다. 넥슨? 그 친
구는 조각난 채 사망했습니다. Hjan을 가질 기억이 적을 뿐만 아니라,
그 기억들이 체계적이지도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조각난 넥슨들이 다
부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하하.)
F/W 책으로 나오냐? 나오겠죠. 계약은 오래전에 했으니. 다만 타자가
열심히 두드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요. 시리얼 식구분들과 함께 출
판사 분들께도 죄송. (죽자, 죽어.)번 호 : 18794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09 03:04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2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2.
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굳은 얼굴로 말
했다.
"당신은 휴전을 원하지요?"
함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질문이었으니까. 카알 역시 말을 계속
했다.
"하지만 그것은 고착입니다. 종전이 아닙니다. 휴전은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휴전 협약 이후 양국이 어떻게 될지
대충 말해볼까요? 가장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군비 경쟁입니다.
당신이 휴전 이후 모국에 대해 어떤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은 결국 비대해진 군부의 수장이 될 것입니다. 당
신은 하탄이 될지도 모릅니다."
함의 강직한 성격은 이 대목에서 도저히 인내심이라는 말을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다.
"불경한!"
샌슨의 눈빛 또한 예리해졌다. 하지만 함은 벌떡 일어서거나 칼자루
로 손을 가져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더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억
지로 내리누르며 카알을 쏘아보았다. 카알은 슬프게 말했다.
"당신이 그것을 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위 상황이 당신을 그렇
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거죠."
"말해보시오!"
"군비 경쟁부터 다시 시작하죠. 잠정적 전쟁을 대비한 군수사업의 발
달과 군부의 확장은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폭력의 특징은
그것이 에고 소드와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샌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있는 프
림 블레이드의 칼자루로 내려가 그것을 쓰다듬었다. 카알과 함은 알
수 없었지만 프림 블레이드 역시 숨을 죽인 채 카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에고 소드는 보통 칼과 달리 그 스스로 자연스럽게 주인을 찾아냅니
다. 보통 칼이라면 전사가 쥐거나 암살자가 쥐거나 푸줏간 주인이 쥐
거나 그 용도에 충실히 사용될 겁니다. 하지만 에고 소드는 그 스스로
주인을 찾아냅니다. 물론 착한 에고 소드는 그렇지 않겠지만, 대부분
의 에고 소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주인을 찾아냅니다. 그런데 검의
목적은 무엇이죠? 폭력, 피입니다. 에고 소드는 주인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주인을 택할 뿐입니
다."
함은 갑자기 들려온 고함소리에 놀랐다. 그리고 그 고함소리의 내용
엔 더욱 놀랐다.
"난 아니에요! 메스꺼워요, 피라니!"
함이 떨뜨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곳에서는 샌슨이 허옇게 질린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함과 샌슨의 얼굴과는 반대
로, 카알은 차분한 얼굴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저 프림 블레이드 같은 경우는 좀 독특하죠. 저 에고 소드는 자신의
목적, 즉 세상이 끝날 그 날까지 계속될 수다를 위해 주인을 이용합니
다. 자신에겐 입이 없으니까요. 뭐, 마검보다야 훨씬 보기도 좋고 애
교스럽기도 한 버릇이지만 주인을 이용하는 점에선 다른 에고 소드와
마찬가지입니다."
프림 블레이드가 입을(?) 다물어버린 것 역시 샌슨만이 깨달을 수 있
는 일이었다. 카알은 계속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함을 불러야 했다.
"저, 함 씨? 계속할까요."
"아, 예."
역시 무사인지라 에고 소드라는 말에 감탄하며 샌슨이 쥐고 있는 칼
자루를 감상하고 있던 함은 머쓱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카알은 계속
말했다.
"당신 나라 안에서 자라나고 비대해진 폭력은 결국 자신의 폭력성을
발휘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인을 찾아낼 겁니다. 폭력을 억눌러주기를
바라는 목적이 아닙니다. 에고 소드와 마찬가지로, 폭력이 그런 목적
으로 주인을 찾아내는 일은 드물지요. 그 폭력은 자신을 쥐고 휘둘러
줄 주인을 찾게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주인이 될 가능성이 높
습니다. 다른 명가의 수장들은 군부의 권한에 별로 관심이 없다면서
요? 당신은 자연스럽게 전후 자이펀 최고의 권력자, 군대 통수권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휴전 협정은 파기되는 거지요. 당신은
바라지 않았을지 몰라도 휘하의 병사들과 장군들이 보내오는 압력은
무시할 수 없겠지요. 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함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주위의 상황이 그러해도, 나에겐 자유 의사라는 것이 있습니
다."
"그런데 그 자유 의사라는 것이 현재의 무한한 반복을 바라고 있습니
다.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다른 예?"
"당신은 우리들로 하여금 시오네를 체포하게끔 하셨지요."
함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카알의 설명을 기다렸다. 그가 판단하기로,
눈 앞의 카알은 아무래도 설명을 좋아하는 성격인 듯했다. 과연 카알
은 설명을 시작했다.
"시오네를 체포하게끔 한 것으로 당신은 자신의 휴전 의사가 견고하
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뭐, 우리로서는 칭찬할만한 제스
춰지요. 데밀레노스 바이서스 공주님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별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 내가 그 뱀파이어를 싫어했다는 점도 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런데 그것을 조금만 바꿔 생각해볼까요. 시오네
는 하탄의 날개의 중요인물입니다. 내가 이해하기로 하탄의 날개는 군
부를 견제하는 하탄의 중요수단이지요. 당신은 그것을 꺾었습니다."
함은 자신의 가슴 속 어딘가에서 무엇인가가 덜컹 소리를 내며 떨어
졌다는 기분을 느꼈다. 카알은 시선을 조금 내리깔았다.
"당신 자신도 모르게, 혹 알고 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휴전
이후의 군부 장악을 위한 포석을 깔았습니다. 그 외에도 당신 스스로
관점을 조금 바꿔보면 유사한 목적으로 행한 일들이 있을지도 모르겠
습니다."
함은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떨어져서 그의 가슴 속에서 굴
러다니고 있는 것은 함의 입을 막았다. 함은 입술을 깨문 채 생각했
다.
그는 자이펀 최정예 부대를 바이서스로 파견했다. 휴전 이후에 있을
군벌의 발호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그런데 그 부대들은 저기 있는 바
이서스 건국 이후 두 명밖에 없을 맹장이라는 샌슨 퍼시발에 의해 지
리멸렬하고 있다. 그렇다면?
함은, 샌슨의 손을 빌어, 자신의 라이벌이 될지도 모를 장수들을 제
거해버린 것이 된다.
"이 휴전은 사실은 종전이라 해야 맞습니다. 지금까지의 전쟁, 즉 언
젠가 어느 한쪽의 승리나 패배로 끝나게 될 형태의 전쟁은 끝났습니
다. 그리고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겠지요. 승자도 패자도 결코 나타나
지 않을 영원한 전쟁 말입니다."
"영원한 전쟁이라고요? 그게 가능합니까?"
"죽은 자들이 생사를 넘는 것은 가능합니까?"
함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카알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푸른 새틴처럼 고왔다. 그리고 마른 붓으로 한번 슥 그은 듯한
구름들이 희미한 흉터처럼 하늘 한곳에 멎어 있었다. 카알은 그 구름
을 바라보았다.
"우리 나라에는 챠넬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예. 그 분께서 행동과 상황의 관계를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신 것
도 아십니까?"
"상황을 호전시키는 행동은 최상이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행동은 나
쁘지만, 상황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하는 행동은 최악이라고 하셨지
요."
"그 분은 전략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만, 그 때 그 분은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시간의 본질을 말씀하신 듯합니다."
"시간의 본질이오?"
"우리는 흘러야 합니다."
카알은 바위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보이는 황무
지를 바라보았다.
"때론 장려한 강물이 되어 도도하게 흐를 수도 있고, 때론 굽이쳐 꺽
이고 폭포가 되어 산산히 부서질 수도 있습니다. 때론 절벽을 타넘고,
때론 땅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가 되어서라도 우리는 흘러야 합니다.
고여있을 수는 없습니다. 앞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고 해서 영원히
현재를 묶어두는 것은 우리의 자살입니다."
함은 자신도 모르게 카알을 따라 넓은 황무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함과 카알이 보는 것은 서로 다른 황무지였다. 카알은 북받치는 목소
리로 힘들게 말했다.
"우리는 날아야 합니다."
"난다고요……"
"때론 황야를 질타하는 질풍이 되어 날 수도 있고, 때론 산에 부딪혀
갈갈이 찢겨질지언정 우리는 바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증인인 인간, 시간의 장인입니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이
되고 불어닥치는 바람이 되어 시간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알은 갑자기 몸을 돌려 함을 바라보았다.
카알을 마주보던 함은 그의 눈 가득히 담긴 슬픔에 어리둥절해졌다.
카알은, 그야말로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미안합니다."
"예?"
"미안합니다."
카알은 똑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함은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카알은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그
대로 몸을 돌려 샌슨에게 걸어갔다. 함은 제자리에 선 채 카알의 뒷모
습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황무지에서 불어온 바람이 한 올 언덕의 먼지를 피어오르게 만들고나
자 카알은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마상에서 함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카알은 약한 미소
를 지은 채 함에게 말했다.
"이틀 뒤의 휴전 협정 때 뵙겠습니다."
"아, 예…… 그런데……"
"제가 멋진 것을 보여드릴 테니 준비하시고 나오십시오."
"멋진 것?"
카알은 장난이라도 칠 것 같은 익살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 저는 열과 성을 다해 그 협정을 파탄낼 겁니다."
"예?" 라고 되묻지도 못했다. 함은 턱이 빠진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
았다.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
다. 카알은 다시 악동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쪽 율법가들도 이제 할 일이 생길 겁니다. 휴전 협정을 최악의 방
식으로 파탄냄으로써 양국 국민의 평화와 번영의 기틀이 서는 역사적
인 순간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자이펀과 바이서스 양쪽을 진흙탕에 던
져버린 역사의 범죄자로 카알 헬턴트를 기소할 수 있겠군요."
함은 아무 말도 못했다. 카알은 싱겁게 웃었다.
"당신만이라도 내 진심을 알아주시오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해야 어울
릴 것 같지만, 이 장면에 어울릴 법한 문구를 찾아내는 것은 후세의
문필가들에게 맡겨둡시다. 자이펀의 작가일지 바이서스의 작가일지야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멋진 문구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장면으로 만들
어주겠지요."
그리고 카알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평안하기를. 이
라고 말해야 하지만, 함은 아직까지도 굳어버린 입을 어쩌지 못한 채
카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카알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그대
로 몸을 돌렸다. 주춤거리던 샌슨은 함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그대로 슈팅스타에 올라 카알의 뒤를 따랐다.
함은 언덕 위에 못박힌 채 떠나가는 카알과 샌슨을 바라보았다. 황무
지를 가로질러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침내 작은 점과 모래바람이 되
어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그 때까지 그의 입속엔 하나의 문장이 되풀
이되풀이 되고 있었다.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
경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퍼버벅!
음. 그 카피가 마음에 와닿네요.(타자는 파워레이드 판촉요원이 아닙
니다… 윽윽.)
여러분의 경기는 어떻습니까?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8907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11 06:05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3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3.
샌슨은 고개를 돌려 카알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든 걸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라는 프림 블레이드의 조언이 있었다.
'달아나자구, 샌슨. 함 씨는 예의 바르고 품위있는 신사처럼 보이고,
따라서 너완 전혀 다른 인종일 가능성이 높단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상세하게 말해봐.'
'흥. 너처럼 드러내놓고 털래털래 따라올 사람은 아니라는 거지. 함
씨는 이 회견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면 틀림없이 주변에 병사들을 좌
악 깔아놨을 거야.'
'이해했어.'
'카알은 함 씨의 뒤통수를 갈긴 셈이고, 따라서 함 씨가 그 숨어있는
병사들에게 저놈들을 잡아라, 어쩌고 하는 말을 꺼낼 정도로 침착을
되찾기 전에 우린 조금이라도 더 도망가야 한단 말이야.'
'이해했다고 했잖아. 뻔한 말 하지마.'
'와……! 거기까지 짐작했어?'
'윽.'
샌슨은 이 황야 어딘가의 바위에 프림 블레이드를 꽂아놓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몇백년 쯤 뒤에 바위에 꽂힌 명검의 전설을 만들
어낼지도 모르는 샌슨의 계획이 실천되지 않은 까닭은 첫째, 샌슨은
전력으로 도망치고 있었고 둘째, 바위가 안보였다. 그래서 샌슨은 프
림 블레이드와 보다 건설적인 내용의 대화를 나누기로 결심했다.
'카알 말이야. 휴전 협정을 파탄내겠다고 했지?'
'그가 원한다면 뭐든 파탄내지 못할까. 결혼식 정도라면 나도 파탄낼
수 있어.'
'응? 어떻게?'
'응응. 샌슨 네가 결혼식장에 가는 거야. 그리고 내 칼자루를 꽉 움
켜쥐면 돼. 그럼 내가 어떻게 결혼식을 파탄내는지 알 수 있게 될 거
야.'
'끔찍하군…… 어쨌든 말이야. 카알은 왜 파탄낸다고 했을까?'
프림 블레이드는 잠시 침묵했다. 그 사이에 샌슨은 슈팅스타의 고삐
를 조금 느슨하게 한 다음 등 뒤를 돌아보았다. 추격자들의 모습이나
칼의 반사광, 먼지 구름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샌슨은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그 때 프림 블레이드가 말했다.
'너희는 흘러야 하니까.'
'뭐?'
'싸움에 이길지 질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계속 싸워야 하지 멈추
는 것은 너희답지 않으니까. 너희는 바람, 너희는 강물. 움직이고 번
성하고 영원히 행동해야 하겠지.'
'무슨 소리야, 그래서 전쟁을 옹호할 수는……'
'쉽게 말하지마.'
'응?'
'내 모습을 봐, 샌슨. 제기. 칼날에 녹이 덕지덕지 덮이고 칼자루는
낡아 부서지는, 그 광막한 시간이 흐를 때까지 나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해. 그 시간을 생각하다보면 소름끼치다 못해 까무러칠 것 같아. 미
칠 것 같아. 너는 햇수를 년으로 세겠지? 하지만, 아아! 나는 세기로
세어야 한단 말이야! 그 시간 동안, 그 진저리쳐지도록 긴 시간 동안
나는 내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어!'
샌슨은 침묵했다. 조금 후, 안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프림 블레이드는
말했다.
'때론 아버지가 나를 마검으로 만들어주었으면 하고 생각해. 그럼,
그럼 난 적당히 악명을 날리다가 용광로나 화산에 던져지겠지? 차라
리 그게 낫겠지. 그 기막힐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이 식물인간 같은 모
습의 형벌을 참아내는 것보단, 그게 훨씬 나을 거 같아.'
'프림.'
'너희는 움직여야 해.'
프림 블레이드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검의 논리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 아아, 그래. 난 검이야. 검
이 검의 논리를 말하는 것이 뭐 어때? 전쟁의 결과가 무섭다고 해서
아예 전쟁을 그만둘 수는 없어. 끝까지 가야 하는 거야.'
'난…… 모르겠어. 휴전을 하면 최소한 지지는 않는 거야. 게다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고.'
'카알이 말할 때 뭘 들은 거야? 이 상태에서 휴전을 한다면, 그건 현
실과의 타협, 혹은 현실 속의 함몰이야. 그럼 이 전쟁은 계속돼. 이건
혈우병과 마찬가지야. 너희는 영원히 피를 흘리게 될 거란 말이야. 다
친 팔은 낫게 하던가 잘라내던가 해야 돼. 계속 흐르는 피만 막고 있
어선 언젠가는 인간 자체가 죽을 거란 말이야.'
프림 블레이드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아니, 정정할래. 죽지는 않겠군. 이 현실이 계속 된다면, 인간은 죽
지 않겠군. 하지만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은 마찬가지야. 모르겠어.
이 세상은 유령들의 전장이 되는 걸까? 아이도 낳지 못하고, 그렇다고
죽지도 못하니, 그건 유령이야. 유령들이 영원히 싸움을 계속하는 거
지.'
'하지만……'
'싸워야해. 미래가 뭘지 몰라서 주춤거리지마. 휴전은 얄팍한 타협이
야. 그런 건 없어. 아니,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인간 스스
로가 결정해야 돼. 누군가가 고정시킨 현실 때문이 아니라. 일어나서
걸어가. 자손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너희들의 선조들
도 자신을 위해 그들의 인생과 싸웠어. 너희들도 너희들의 인생을 위
해 싸우기만 하면 돼. 너희들의 자손들은 스스로를 위해 싸우겠지. 왜
냐하면, 너희들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 싸움은 노래가 될 수
도 있겠고 탑이 될 수도 있겠고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도 있겠지. 아
침에 일어났을 땐 졸음과 싸우는 거야. 힘껏 일할 땐 게으름과 싸우는
거야. 논쟁을 벌일 땐 상대방과 설전을 하지. 자이펀이 적이라면 검을
들고 일어나 싸워. 뭐가 옳은지는 여가 선용의 시간을 위해 남겨둬.
방해물은 항상 생기고, 싸움은 영원한 것이야. 내 앞에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움직여!'
프림 블레이드의 목소리에 익살맞은 기운이 섞여들어갔다.
'봐, 지금도 방해물이 있어. 위대한 전사 샌슨. 싸워야겠군.'
'뭐?'
그 때 현실의 목소리가 샌슨의 귀에 들어왔다.
"퍼시발군. 말을 잠시 멈춰보게."
샌슨은 당황하며 슈팅스타를 멈췄지만 결국 카알을 한참 지나쳐야 했
다. 샌슨은 말을 돌려 다시 걸어왔고, 그 때문에 카알이 뭣 때문에 멈
추라고 했는지 묻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들이 달려온 언덕쪽에서 뽀얀 먼지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샌슨
은 이를 갈았다.
"함 녀석." 더이상 존칭은 사용되지 않았다. "부대를 매복시켜뒀던
모양이군요. 비겁한 놈!"
카알은 '자네 역시 일대일 회담에 따라나오지 않았는가.'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카알은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말했다.
"물을 테니, 자네나 프림 양 누구라도 좀 대답해주시게. 저 추격대는
함이 직접 지휘하고 있을까?"
"그럴 가능성이 높긴 합니다만 지금까지의 정황에서는 확신을 가질만
한 것들이 없습니다."
"가능성은 높단 말이지?"
"그렇지요.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한 것 아닙니까. 대여섯시간 거
리나 되는 거리를 혼자서 되돌아갈 리는 없을 테고, 저라면 저 부대
와 합류하겠습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샌슨이 바라보는
가운데 그의 품 속에서 나온 것은 작은 스크롤이었다. 카알은 멋적은
얼굴로 샌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겁한 카알 녀석이라고 불러도 할 말 없겠군."
"예?"
카알은 대답 대신 고삐를 놓고는 두 손으로 스크롤을 찢었다.
스크롤이 찢어지자 그 속에서 광선이 튀어올랐다. 위로 솟구쳐오른
광선은 샌슨으로 하여금 레브네인 호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광선
은 까마득한 하늘로 솟아올라 구름을 뚫었고 잠시 후 사라졌다. 샌슨
은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손을 툭툭 털고는 말했다.
"자, 잘 부탁하네."
"방금 그건 일종의 응원 같은 것이었습니까? 예. 그럼 저는 추적대와
용감히 맞서 싸우고 카알은 그 사이에 도망치는 것이군요. 멋진 응원
이었습니다. 비겁하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카알은 달아나셔야……"
"으윽. 아냐. 그건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네, 퍼시발군. 뒤
를 보게."
샌슨은 뒤를 돌아보았다.
전방에서 그들을 추적하는 것과 비슷한 먼지구름들이 일어나고 있었
다. 지평선 곳곳에서 일어나는 그 먼지구름을 보며 샌슨은 숨이 턱 막
히는 희열을 느꼈다. 바람을 타고 가늘게 말발굽소리들이 들려왔다.
두두두두두. 절대의 전투력과 치명적인 돌격력으로 땅 위를 질타하는
말발굽소리.
그리고 힘찬 나팔소리가 울렸다.
나팔소리는 황무지 위를 서슴없이 휘몰아쳤다. 황무지 전체가 진저리
를 치며 들고 일어나는 듯했다. 샌슨은 그 나팔소리를 잘 알고 있었
다.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 속에 샌슨은 프림 블레이드를 천천히 뽑아
들었다. 나의 최고의 경의로서. 말발굽소리는 이제 몸이 흔들릴 지경
으로 커졌다. 그리고 시시각각 커지는 먼지구름들 사이로 갑주의 번득
임이 무지개를 그렸다. 샌슨은 소름이 돋을 듯한 유쾌함을 느꼈다. 그
는 검을 높이 뽑아들고 목이 터져라 고함질렀다.
"장미의 기사여, 오라! 죽음과 삶은 내 알 바 아니다. 칠흑의 땅 위
에 피의 장미 꽃잎을 날릴 뿐!"
샌슨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나팔소리가 다시 울렸다. 금속성의 맑고
날카로운 소리들은 천둥처럼 황무지 위를 치달렸다. 그리고 그들 심장
속에서 용솟음치는 피의 소환에 맞춰 지옥의 노래를 부르는 전사들의
합창이 들려왔다.
장미의 기사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앞으로 내밀어진 일스 기사단의 창검은 흰 무지개를 사방으로 퍼뜨렸
다. 불꽃처럼 휘날리는 말들의 갈기 위로 일스 기사단의 강철 투구가
번득였다. 슬릿 위로 새겨진 장미 문양은 마치 흐르는 피처럼 보였다.
일스의 대장장이들의 손길이 얼마나 가해졌을까, 지독하게 연마된 갑
주의 강철은 로열 블루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선두에 달리던 기사
는 앞으로 내뻗고 있던 거대한 창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창이 아니었
다. 기사는 팔을 휘둘렀고 그러자 거대한 깃발이 펼쳐졌다. 장미와 정
의의 오렘의 문장이 거대한 깃발 가득히 화려한 불꽃을 뿜어내고 있었
다. 기수는 다시 뿔나팔을 들어올렸다. 벽력 같은 나팔 소리가 다시
황무지를 진동시켰다.
빠- 빠바바바- 바-!
빠- 빠바바바- 바-!
저들이 바로 일스 기사단이었다. 그레이, 무스타파, 딤라이트 천공의
기사의 가장 올바른 후계자들, 대륙 최고의 단위 전투력이다. 검과 파
괴의 레티의 아들들이 파괴를 위해 검을 든 프리스트들이라면 저들은
정의를 위해 신에게 몸을 바친 무사들이다. 샌슨은 미친듯이 웃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외쳤다.
"카알! 함을 어떤 상태로 가져다 바칠까요?"
카알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고삐를 당겼다. 일스 기사단의 돌격
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고속력으로 옆으로 비켜나야 할 것이다.
죽을 맛이겠군.
"전쟁의 예법이 요구하는 한 정중하게. 하지만 여의치 않다면 시체라
도 상관없네. 그것이 전쟁의 예법이니."
"알겠습니다! 자, 누가 일스 기사단을 앞지르는지 보십시오!"
그리고 샌슨은 검을 높이 들어올려 휘저었다.
"바이서스, 루트에리노!"
그리고 샌슨은 앞으로 달려갔다. 카알은 싱긋 웃으며 옆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상에서 카알은 일스 기사단의 나팔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슬프고, 아름답고, 격정적인 나팔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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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주신 감상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저, 이왕 있는 게시
판이니 비평, 감상란을 이용해주시면 더 감사하겠습니다. 이 아래쪽에
보이는 M2 통신작가협회의 17번란은 서머란과 시리얼란의 글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을 올릴 수 있는 란입니다. 아직은 활성화되었다고 말하기
어렵겠지만 여러분들이 이용해주시면 활성화되지 않겠습니까?
내일은 청소년 축구 말리 전… 싸워라! 이겨라! 세계 4강이자 월드컵
우승도 했다는 나라에서 나온 팀이 시간 끌기로 상대해야할 정도로 강
력한 우리 청소년들이니, 믿습니다! 오-레! 오레오레오레… 퍼버벅!번 호 : 18908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11 06:05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4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4.
천막의 입구에 쳐져있는 천을 들어 밖을 바라보던 카알은 고개를 끄
덕였다. 야영지 곳곳에 피워둔 화톳불이 불을 밝히고 있을 뿐 주위는
고요했다. 불침번을 서는 병사들 한 두 명이 오갈 뿐, 휴전 협상을 위
한 사절단과 법학자들은 모두 기진맥진한 채 잠든지 오래였다. 그들에
게는 행군이나 다름없었던 며칠 간이었다. 그래도 막중한 임무를 의식
한 그들은 매일 저녁 졸리는 것을 참아가며 휴전 협정서의 초안을 잡
기 위해 상의를 거듭해왔지만, 조금 전 저녁식사 시간에 카알이 행한
선언, 즉 휴전 협상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은 그들 모두를 얼빠지
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들은 황당함과 허탈감에 일찌감치 곯아떨어졌
을 것이다.
카알은 천을 도로 내리고는 고개를 돌려 천막 중앙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커다랗고 묵직해보이는 관이 놓여있었다. 카알은 잠시 관뚜껑
을 노크하고픈 생각을 떠올렸지만 꾹 참으며 말했다.
"시오네. 나와도 좋아요."
관뚜껑이 천천히 움직였다. 텅. 가벼운 소리를 내며 관뚜껑이 옆으로
떨어지자 시오네는 일어났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을 종군 프리
스트들과 허옇게 질린 얼굴의 병사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막사 안에는
카알 뿐이었다. 시오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 혼자 뿐인가?"
카알은 피로한 얼굴이었다. 그는 테이블 대신 사용하고 있던 궤짝 위
에 놓인 두 개의 잔 가운데 하나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지?"
"거기 앉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 관에서 나오는 것은 곤란합니
다. 거기 관 귀퉁이에라도 앉으시지요."
시오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관 주위의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뒤틀리며 예리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관 주위의 땅에는 복잡한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시오네는 그것을 알아볼 수 없었고, 그래서 정
령사의 솜씨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 늙은 정령사 구다이의 솜씨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에 시오네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
다.
"준비가 철저하군."
"저는 소심한 편이거든요."
카알은 빙긋 웃으며 또 하나의 잔을 들어올려서는 관 귀퉁이에 앉은
시오네에게 건네었다. 시오네는 의아한 표정으로 잔을 바라보았고, 받
아든 잔의 내용물을 확인한 시오네는 당황해버렸다.
"와인이…… 아니군?"
"아닙니다."
시오네는 눈을 흡떠 카알을 바라본 채 천천히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나 잔의 내용물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오자 시오네는 더이상 카알
에게 집중하기 어려웠다. 시오네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시오네는 눈
을 감은 채 입 안의 내용물을 음미하다가 아쉬운 듯이 마시고서 말했
다.
"살 것 같은 기분이군."
카알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영원한 시체인 뱀파이어가 살 것
같다고? 하지만 눈을 감고 있던 시오네는 카알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궤짝에 걸터앉아서는 자신의 잔을 마셨다. 카
알의 잔에는 와인이 담겨있었다.
시오네는 길다란 혀로 입술을 핥고서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슴, 수컷, 311년산."
카알은 킬킬거렸다. 시오네에게서 유머 감각을 기대하지는 못했다.
시오네는 눈을 떠 웃고 있는 카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인간? 내가 그걸 어떻게 준비하겠습니까. 그건 취사병이 저녁 식사
에 쓰려고 잡은 사슴을 요리할 때 간신히 구한 겁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군요. 맛을 다 구분합니까?"
"설마. 이 방에 진동하는 사슴고기 냄새로 추측한 거야. 저녁 식사
때 그걸 먹었으니, 네가 사슴에서 이걸 구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
지."
"아아, 그렇군요. 미각이 아니라 후각에 경의를 표시해야 되는 것이
군요."
시오네는 차갑게 웃으며 잔을 만지작거렸다. 오래간만에 충족된 욕망
때문에 시오네는 퍽 즐거운 기분이었다.
"뭘 준비했나."
"예?"
"너는 내게 뭔가 자극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불러낸 거 아닌가?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이렇게 공을 들여가며 준비한 것이겠
지. 그 굉장한 이야기가 뭔지 말해보시지."
카알은 히죽 웃었다.
"이해가 빠르니 대화가 편하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함을 붙
잡았습니다."
시오네의 손이 움찔했다. 하마터면 잔의 내용물이 모두 쏟아질 뻔했
지만 시오네는 가까스로 그것을 붙잡았다. 시오네는 자신의 팔에 흐른
피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카알을 노려보았다.
"함……을?"
"예. 1:1로 회담하자고 하니 나오더군요. 물론 부대를 가득 끌고 나
왔습니다만 퍼시발 군과 일스 기사단이 모두 무찔렀습니다."
시오네는 이를 악물며 카알을 바라보았다. 이 끔찍한 놈이 할 수 없
는 일은 도대체 뭐지. 그 불가사의한 사내가 조금 왜소한 듯한 체격에
평범한 중늙은이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시오네에게 별다른 위안
이 되지 못했다. 아니, 그런 평범함이 시오네를 더욱 압박해왔다. 시
오네는 그 압박감을 뿌리치듯 허리를 펴며 사납게 말했다.
"축하하겠어. 함은 바이서스에 붙잡힌 두번째 국방대신이 되는 건가.
하지만 모국을 배신한 두번째 국방대신이 되기는 어려울걸. 그 놈은
겉보기와는 꽤나 다른 녀석이거든."
"예. 고문은 엄두도 못내겠더군요. 자살하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될
지경이니, 도대체 고문 같은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되더군요."
시오네는 불안한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자살했나?"
"아니오. 이미 혀를 한번 깨물었습니다만 종군 프리스트들이 급히 치
료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손발 다 묶이고 입에는 재갈까지 채워진
상태지요. 조금 있으면 볼 수 있을 겁니다."
"볼 수 있다고?"
"퍼시발 군이 데리러 갔습니다."
시오네는 잔을 들어올려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는 잔을 땅에 집어던
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잔은 떼구르르 굴러갈 뿐이었다.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게 뭔지 알아보려면 직접 발을 들이밀어보는 수밖에 없
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말라고 권하고 싶군요. 구다이 씨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경고했습니다."
시오네는 겁먹은 표정도 짓지 않았다. 다만 사납게 으르렁거렸을 뿐
이다.
"왜 데려오겠다는 거지? 나를 희롱하려는 거냐? 배신자들을 서로 만
나게 하곤 그 모습을 즐기려는 거야!"
"그런 취미는 없습니다. 당신이나 함이나 서로 볼 낯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서로 만나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도리가 없군요."
시오네는 사납게 쉭쉭거렸다.
"도리라니?"
"말씀드렸다시피 함 씨를 고문할 수는 없습니다. 손발이나, 하다못해
입만 자유로와도 당장 자살하려고들 테니까요. 그래서 당신 도움이 필
요합니다."
시오네는 눈을 몇 번 껌뻑였다. 카알은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고 그
모습은 시오네를 더욱 의아하게 했다. 카알은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은 뱀파이어입니다. 이성에 대한 지배력이 있잖습니까?"
깜빡거리던 시오네의 눈이 순간적으로 고정되었다. 시오네는 입을 쩍
벌린 채 카알을 쳐다보았다.
"뭐? 너, 그럼 지금……?"
"예. 함 씨를 트랜스에 빠트려주십시오."
시오네는 벌떡 일어났다. 카알은 흠칫하며 궤짝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으나 곧 멈추었다. 시오네는 관 속에 똑바로 선 채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올 수 없다. 시오네는 핏발 선 눈으로 카알을 쏘아보았다.
"뭣 때문이지?"
"자이펀 사절단의 구성과 방어태세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능
하다면 사절단의 인사들을 모두 잡고 싶거든요."
"뭣 때문에?"
"이기려고 그러는 거죠. 사절단에 뽑힐 정도의 인사들은 전쟁수행에
있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명약관화하지 않습니까."
"뭐야?"
"예?"
"도대체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지? 왜냐! 너희들의 폭발성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짧은 인생, 죽어야할 생명, 그래서 어느 순간
정반대로 바뀌어버리는 모습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
지만 너는 뭐냐. 그렇게 순수하게, 최소한 보여주어야할 가식도 던진
상태로 바뀌어버리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냐? 네가 휴전협상을 미끼로
평화사절단을 잡으려드는 놈이었나? 네가 1:1 회담을 미끼로 적 장수
를 낚으려드는 놈이었나? 네가 뱀파어이를 이용하여 인간을 희롱하려
는 놈이었나? 넌 아니었어!"
카알은 시무룩한 얼굴로 시오네를 바라보다가 다시 궤짝에 앉았다.
"나도 압니다."
시오네는 어깨로 숨을 쉬며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고개를 떨구
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죠?"
"뭐?"
"내게 도대체 뭘 바란 것입니까."
시오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카알은 땅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꼬고 싶진 않지만, 당신은 함을 배신하고, 함은 당신을 배신했습
니다. 이 땅 위를 오가는 당신들은 서로를 마음껏 이용해버리려 들었
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가 바보인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처럼.
나는 당신들이 지키지 못하는 순수성의 우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 역시 당신들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했고. 이
시점에서, 내가 도대체 무슨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카알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눈이
었다.
"나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 전쟁을 끝내어야 합니다. 인류사
에 오욕으로 기록될 전쟁 행위를 끝내어야 합니다. 오물을 치우는 것
에 비단 걸레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정정당당한 싸움? 싸움 어디에
고결함이 있단 말입니까? 서로를 죽여대기 위해 창칼을 든 것에서부터
전쟁은 인간의 오욕입니다. 거기에 금붙이를 달든 보석으로 치장하든
오욕이 가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수십만의 군세를 몰아 정정당당하
고 화려하게 싸워야만 아름다운 것입니까? 수십만의 시체가 쌓여 썩어
가고 있는 전장에서 그렇게 말씀해보시죠. 나는 관심 없습니다. 몇 명
의 인물만 붙잡아 전쟁을 빠르게 끝낼 수 있다면 나는 그쪽을 선택하
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야 어떠하든 상관 없습니다. 그들이
나를 책임져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들은 떠들 뿐입니다. 나를 책임
지는 것은 나 자신 뿐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내 행동들의 댓가가 나
를 겨냥할 때 나는 나 스스로를 책임질 것입니다."
"나도 그 말에 찬성이오."
시오네와 카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막사의 입구에는 밧줄에 꽁
꽁 묶인 함과 샌슨이 서있었다. 찢어지고 흙과 피로 범벅이 된 옷을
걸치고 있어 초췌함을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함은 꼿꼿하게
서있었다. 그리고 카알의 말에 대답한 것은 함이었다. 카알은 당황해
서 말했다.
"아니, 재갈은?"
샌슨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보기 안좋아서…… 그래도 자이펀의 국방대신이시잖습니까. 하탄의
이름에 걸고 자살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았습니다."
"나 이거야 원. 순수성의 우상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겠군."
"예?"
샌슨은 눈을 껌뻑거렸지만 카알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함을 바라
보았다. 함은 시오네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관 주위
의 도안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안좋아보이는군."
"……그쪽도 마찬가지야. 그 얼굴의 멍자국과 말라붙은 피는 아무리
좋게 말해주고 싶어도 지저분하다는 말이 최상일 것 같은데."
"아아, 그래. 그래도 그쪽이 나보단 낫군. 술도 마셨나 보…… 응?"
함은 시오네가 집어던진 잔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오네는 고개를 돌려 함을 외면했고 함은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카
알은 천막 안에 딱 한 개 있던 의자를 끌고와서는 함에게 내밀고는 자
신은 다시 궤짝에 앉았다. 함은 묵묵히 의자에 앉았고 샌슨은 그 뒤에
섰다. 함은 카알에게 말했다.
"나를 왜 데리고 온 겁니까."
"글쎄올시다. 괜히 흥분해 가지고 시오네 양과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았군요. 곤란한데요. 시오네? 어떻습니까. 내 제안은?"
시오네는 그대로 관에 드러누웠다. 관뚜껑이 날아오르더니 요란한 소
리를 내며 닫혔다. 카알은 쓰게 웃었다.
"멋진 대화 거부군요."
함은 그런 카알의 모습을 보다가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당신의 말, 나는 찬성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책
임진다는 말과 내가 생각하는 책임이 서로 좀 다른 것 같기는 하지
만."
"사소한 차이, 혹은 심연이 몇 개 쯤 빠질만한 차이라고 해두죠."
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알을 보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관점의 문제…… 할 말이 없군요."
카알은 미간을 찡그렸다.
"어디 보자, 곤란하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시오네 양을 설득해서 당
신을 트랜스에 빠트려볼까 했습니다. 아아, 눈을 그렇게 뜨시면 저는
무섭습니다. 소심한 편이라서요."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시오네 양이 비협조적이니 어차피 힘들군요."
"당신이 승자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포로가 된 나 자신을 부정하지
도 않아요. 하지만 난 당신을 위해 말하고 싶습니다. 자랑스러운 승리
를 스스로 모욕하지 마시오!"
카알은 물끄러미 함을 바라보았다.
"명예를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닌만큼, 모욕을 두려워하지도 않습
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그리고, 내가 자이펀과 싸우는 줄 아십니까?"
함은 말을 멈추고는 카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카알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아까 오후, 그 언덕 위에서 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시
간은 정말 멈춰가고 있습니다. 내일을 알기 위해선 어제만 보면 충분
할 날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이라는, 그 뭔지 알 수 없어서 가
슴 설레게 하는 단어가 의미를 잃어갈 거란 말입니다. 내가 자이펀과
싸우는 줄 아십니까?"
"그럼 당신은 무엇과 싸우는 거요?"
"현실과 싸우고 있습니다."
함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이런 진부한 대답은 기대하지 못했다.
카알 역시 싱긋 웃었다.
"진부한 말이지만, 지금 내 싸움은 그 말 이외에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군요. 나는 현실은 안정적이라는 모든 믿음에 대항해 싸우고 있
습니다. 현실을 고정시키려는 모든 의지와 싸우고 있지요. 정의, 신
뢰, 우정, 사랑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내 싸움은 그런 것입니다. 함."
================================================================
메일과 메모 남겨주시는 여러분들께 항상 감사하고, 동시에 죄송스럽
습니다. 지독하게 답장 안쓰기로 소문난 타자. 으으윽. 타자의 인형을
만들어 벽에 걸고 옴마니밧메홈와 아브라카다브라를 100번 암송하시고
축복받은 다트를 던진다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종파를 구분할 수가
없군.)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9192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17 01:21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5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5.
쳉은 조용조용한 어투로 말했다. 그의 성격 때문이다.
"죄송합니다만 저희들도 이 배를 크게 신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남
해의 따뜻한 바다를 오가던 배가 북해의 얼음바다 속에서 안전할 수
있다고 믿는 바보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
한 배는 이 배뿐입니다."
이시도 역시 조용조용한 어투로 말했다. 목이 쉬었기 때문이다.
"자, 자유 무역선을 깔보지, 깔보지 마시오. 에취! 이곳에서야 자유
무역선의 전설이, 전설이, 우엣취! 제기랄! 이 빌어먹을 감기라니! 이
날씨에, 이 바다! 으웃체체치아!"
쳉은 온화한 얼굴로 단어보다 기침소리가 더 많은 이시도의 말을 끝
까지 경청했다. 그런대로 들어줄만 하지만 기침소리 때문에 격조가 많
이 떨어지는 헤게모니아어로 이루어진 이시도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이 배는 그 이름 거룩하사 자유무역선 레드 서펜트이며, 우리
선원들은 불가사리보다 질기고 상어보다 사나우며 말향고래만큼이나
강인하므로, 북해의 얼음 바다 쯤은 유람하는 기분으로 항해할 수 있
다.
쳉은 고개를 조금 틀어 레드 서펜트의 선원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판
단으로 레드 서펜트의 선원들은 대합 만큼이나 두껍게 옷을 여며입고
잉어만큼이나 구슬픈 눈을 한 채 해파리만큼이나 흐느적거리고 있었
다. 하지만 쳉은 구태여 그 사실들을 지적하는 대신 자신의 용무에 충
실하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저희들을 태우고 북해로 가주실 수 있습니까."
이시도는 애처로울만큼 기침을 해대고, 자이펀어로 욕설을 좀 해댄
끝에 다시 헤게모니아어로 말했다.
"하, 하지만 우린, 우리 용무가 있소. 훌쩍. 우리는 이곳 탄느완의
상공회의소 대표부와, 와, 와찻치아츄! 에, 대표부와 상의하여, 이곳
에서 탄느완 주재 자이펀 상관(商館) 설립을, 을, 위한 기초 조사를
할 생각이오. 게다가 어, 어차피 우리는 여객 수송은 하지도 않소. 이
잇치!"
이시도는 신차이가 말한 대외적인 목적을 그대로 말했다. 하지만 신
차이는 탄느완 주재 상관이 없다는 것에 착안하여 그런 일거리를 만들
어내었을 뿐 거기에 열심인 것은 아니며, 그런 자신의 속셈을 부하 선
원들에게 숨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현재 신차이와 레드 서펜트의 고급
선원들이 몇몇 탄느완의 상인들과 접촉하고 있긴 있지만 사교적인 만
남 이상으로 진행되지는 않고 있었다. 지금도 신차이는 탄느완의 한
거간꾼과의 점심 식사를 위해 배를 떠나있었기에 이시도가 감기에 걸
린 몸을 이끌고 나와 쳉을 상대해야 했다.
이쯤에서 이시도가 괴로워하고 있는 혹독한 감기에 대한 동정심을 표
해주면 좋으련만, 쳉은 여전히 차분하고 간결한 어조로 자신의 용건에
대해서만 말했다.
"상관 설립을 위한 회견이 목적이라면 배는 필요 없잖습니까. 탄느완
상공회의소와의 회의를 담당할 전담 팀들만이 육상에 남아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일 텐데요. 그 동안 배는 할 일이 없을 테고, 저희들을
태워주실 수도 있을 듯합니다만."
감기 때문에 졸도할 것만 같은 컨디션이었지만, 이시도는 호기심을
느꼈다.
"도대체 부, 북해에는 뭐하러 가시려는 거요? 에취! 얼음과 물밖에
없, 없는데?"
"일주일 전까지는 그랬지요. 하지만 지금은 얼음과 물 이외에 하나가
늘어났습니다. 일주일 전 쯤 약 삼, 사십여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를 싣고 이곳을 떠난 배가 있습니다."
"아아, 나도, 츄! 그 이야기 들었수. 배를 통채로 사서, 사서 출발했
다며?"
이시도는 상륙하자마자 사이록의 수평선에 북방의 검법을 접목시킴으
로서 화룡점정하겠다는 거창한 대외적 목적을 내건 채 탄느완의 술집
을 누볐으며, 그 결과로 다양한 풍문과 숙취와 멍자국과 이 지독한 감
기를 얻었던 참이다. 그래서 이시도는 거금을 쾌척하여 배를 구한 후
화급히 북해로 떠나간 일행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쳉은 고
개를 끄덕였다. 악랄한 감기에도 불구하고 이시도의 상상력은 최고성
능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아아, 그래? 흐음. 음츄! 그 사람들을 추적하, 하겠다는 말이오?"
"예."
"취! 당신은 뱃사람이 아니니, 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에
츄! 하지만 배를 추적하는 것이 들판에서 말 타고 추, 추적하는 그런
일과, 훌쩍, 비슷한 건 줄 아시오? 바다에는 길이 없단 말이오. 추!
게다가 당신이 아무리 뛰어난 추적자라고 해도 바닷물에는 자취가 남
지 않소."
쳉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시도의 말을 들은 다음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건 제가 감당할 문제군요. 그리고 제게는 그 문제들을 처리할 수
단이 있습니다. 한 가지만 빼고. 저는 가이너 카쉬냅처럼 물 위를 걸
을 수는 없습니다."
요약. 추적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너희는 배만 제공해라. 이시도
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보자, 흐음. 아츄! 재미있을 거 같은데. 어, 어쩌면 사이록의
수평선에 극풍의 매서움을 더할 기회일지도, 잇치! 모르겠군." 쳉은
사이록의 수평선이 뭐냐고 묻지 않음으로써 이시도를 좌절시켰다. 하
지만 이시도는 빨리 회복했다. "좋아, 기한은 어느 정도요?"
쳉은 그 대답을 미로부터 들어두었다.
"현재로선 삼주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삼주 동안의 냉해 항해라……" 나는 미쳤어. 이시도는 속으로 생각
했다. 자이펀의 배들 중 어떤 배도 북해의 얼어붙은 바닷물에 몸을 담
궈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어진단 말이야. 그러니 나는 미
친 거지. 그리고 이시도는 자신 내부의 목소리에 항상 성실하게 귀를
기울여왔다.
"솔직히 말해서, 에츄! 나는 하고 싶어지는데."
"……이 배는 원합니다만 당신은 안타셨으면 하는데요."
"뭐요!"
"그 감기 때문입니다. 저 바다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실 수 있을지 걱
정입니다."
쳉은 알지 못했지만 이 말이 결정타였다. 이시도는 씩씩거리며 말했
다.
"아아! 내가 타고 말고는 선장님이 결정할 문제요. 그리고 이 배에
당신네들을 태울 건지 말지도 역시 선장님이 결정할 문제고. 당신의
제안은 선장님에게 전해주겠소. 예정은 3주. 목표는 북해. 맞지요? 대
가는?"
"당신네들의 통상적인 요금 같은 것은 없겠군요. 승객 운송은 안한다
고 하셨으니. 이렇게 합시다. 나는 헤게모니아의 상당히 유력한 상단
에 소속된 사람입니다." 이 대목에서 쳉은 조금 켕기는 기분을 느꼈
다. 그는 지금 POG상단으로부터 장기 무단 결근을 하고 있는 셈이었으
니까. "이 도시에서 자이펀의 상관 건립을 돕겠습니다."
이시도는 머리를 굴려보기 시작했다. 신차이 선장의 목적은 뭐라고
하더라도 그의 사촌동생 운차이의 수색일 것이다. 신차이가 거간꾼들
이나 상인들과 접촉하고 있는 것 역시 본질적으로는 풍문을 듣기 위한
것이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심장마비에 걸리게 할 정도로 재수없는
인간의 소문을 들어보신 적 없으십니까?' 따라서, 이 배와 선원들의
거취는 운차이의 소재지에 따라 결정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함부로
대답해줄 수가 없군.
"좋아요. 훌쩍. 당신의 제안을 선장님에게 전하지요. 하지만 많이 기
대하지는 마슈. 우리 선장님이나 우리들이나 북해를 두려워할 사람은
아니지만, 별 소득이 없을 것 같은 항해는 두려워하니까."
"잘 알겠습니다."
쳉은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작별 인사를 보내었다. 이
시도는 대화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갑판을 가로질러 주승강구에 뛰어
들었고 그 뒷모습을 보던 쳉은 피식 웃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배 좌현
의 난간에 다다른 쳉은 멀리 항구쪽을 향해 신호를 보내었다. 곧 보트
한 척이 빠른 속력으로 바다 위를 미끄러져 왔다. 보트가 뱃전에 닿자
쳉은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가 보트에 승선했다. 보트를 젓고 있던 사
람들은 별 말 없이 그대로 항구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보트 뒤쪽에 앉아 항구에 도달하기를 기다리던 쳉은 잠시 고개를 돌
려 레드 서펜트를 바라보았다. 탄느완의 항구에 내항에 정박해 있는
레드 서펜트의 모습은 이채로왔다. 사방이 하얀 이 땅에서 레드 서펜
트의 붉은 돛은 섬 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그 날씬하고 스피디해보
이는 선체 역시 독특한 것이었지만 현재 항구에는 북양 항해용의 둔중
한 배가 없어서 비교해볼 수는 없었다.
북양 항해용 배는 부빙과의 충돌을 대비한 설계로 흘수선이 낮고 배
바닥이 평평하며 상당히 견고하게 만들어진다. 실제로 북양 항해용 배
는 낮은 흘수선 때문에 급격하게 다가오는 빙산 위로 얹히는 재주를
보인다. 하지만 레드 서펜트는 날씬하고 가볍게 만들어져 있으며 - 북
양 항해용 배에 비춰봐서 그렇다는 말이다. - 흘수선이 꽤 높다. 그래
서 레드 서펜트는 탄느완 부두의 낮은 수심 때문에 부두에 접안하지
못하고 이렇게 내항의 바다에 정박해있었다.
쳉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점점 다가오는 부두를 바라보았다. 탄느완 시
내의 낮은 건물들은 땅바닥을 끌어안은 듯한 모습으로 지면에 찰싹 달
라붙어있었다. 무시무시한 강풍과 집을 무너뜨릴 정도로 쌓이곤 하는
눈 때문에 이곳의 건물들은 모두 단층이었으며 납작하고 단단했다. 흙
과 이끼 뿐인 을씨년스러운 언덕들 사이로 바라보이는 탄느완 시내는
이 혹독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라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백
기처럼 보였다.
보트는 한결같은 속력으로 부두로 다가갔다. 앉아있는 것 이외에 다
른 할 일이 없었던 쳉은 보트 옆으로 갈라지는 하얀 잔물결들과 거울
같은 외해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상념이 밀고들어온 것은 당
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래서 쳉은 생각했다.
'미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쳉은 할슈타일 후작을 생각했다. 후작은 세상에 그것보다 더 당연한
말은 없다는 듯이 파를 죽이겠다는 말을 반복해왔다. 쳉이 판단하기로
후작은 자신의 부활을 야기한 신스라이프/파의 파멸을 통해 부활을 무
효화시키는 것을 지상과제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미는 후작의 그런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 역
시 파의 살해에 동조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후작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일까?
마침내, 쳉은 미와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행이 묵고 있던 여관에 도착한 쳉은 홀의 커다란 벽난로 앞에서 엉
덩이를 나란히 붙인 최대한 밀착한 모습으로 모여앉은 후작 일행의 뒷
모습을 보곤 싱긋 웃었다. 후작과 궤헤른, 사무엘, 니크, 가이버는 체
면불구하고 담요를 뒤집어쓴 채 벽난로 앞에서 무더기가 되어 앉아있
었다. 여관의 주인은 안쓰러운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장작더미를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의 인기척을 알아차린
궤헤른은 고개를 돌려서는 턱을 딱딱 부딪히는 얼굴로 쳉을 맞이했다.
"어떻게 됐소."
"선장이 없더군요. 일등 항해사에게 제안을 전달했습니다. 내일 다시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수, 수고하셨소. 추울 텐데 여기와서 몸 좀 녹이시오."
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벽난로 앞의 조그마한 공간은 다섯 명의 거
한들을 수용하기에도 모자라보였다. 궤헤른 역시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쳉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대신 꼼짝도 하지 않는 후작
의 등을 잠시 바라보았다. 후작은 난로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에 시선
을 고정시킨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쳉은 궤헤른에게 몇 마디
위로를 건네고는 발걸음을 돌려 미의 방을 향했다.
방문 열리는 소리에 침대 가에 앉아있던 아달탄은 귀를 쫑긋 세우며
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들어선 사람이 쳉인 것을 알아차리자 아달탄
은 다시 앞발 위에 머리를 얹고는 졸기 시작했다. 미는 침대 위에 앉
아서는 침대 옆의 창턱에 팔을 고인 채 앉아있었다. 덧창을 열어젖혀
창문 밖으로 탄느완의 얼음바다가 잘 보였다. 멀리 계곡을 타고내려오
는 빙하는 희박한 햇살 아래에서도 신비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쳉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미 비바체 그라시엘."
미는 고개를 돌려 쳉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의아로움이 떠올
라있었다.
"빼먹었잖아."
"응?"
"정식으로 부르고 싶었다면 앞에 '사랑스러운'을 붙여야지."
"미안해."
쳉은 고개를 살짝 숙여보인 다음 방을 가로질러 침대 발치에 앉았다.
미는 무릎을 굽혀 쳉이 앉도록 해주었지만 쳉이 앉자마자 그의 무릎
위에 두 발을 올려놓았다. 쳉은 피식 웃으며 미의 조그마한 발을 내려
다보았다.
"정강이에 살 좀 빼."
"근육이야, 그거."
미는 쳉의 무릎 위에 편안하게 다리를 올려놓고는 허리를 뒤틀어 다
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쳉은 입을 다문 채 미의 발가락을 만지작거
리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들
의 일을 계속했다. 침대 위가 너무 고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달탄
이 머리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별다른 흥밋거리를 발견하지 못
한 아달탄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다음 다시 앞발 속에 머리를 파
묻었다.
미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말하고 싶은 것이 뭐기에 그렇게 분위기 잔뜩 잡으며 부른 거지? 거
기 시원하다. 좀 긁어볼래."
"무좀 아니야?"
"손에는 옮지 않을 테니 긁어봐. 이키키키! 거기 말고. 간지럽잖아.
까르르륵!"
"흐음. 파를 따라잡으면 어쩔 생각이지?"
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눈만 깜빡였다. 미의 옆얼굴을 보던 쳉은
고개를 돌려 아달탄의 갈비뼈 부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내려다보
았다. 미는 조금 후에 말했다.
"그런 질문을 받는 건 처음인 거 같네. 미래에 어쩔 거냐는 식의 질
문."
"퓨쳐 워커잖아."
"그래. 맞아. 미는 퓨쳐 워커. 그러니 그런 질문은 싫은걸. 어떻게
해야 될지 생각해야 된다는 건 미에겐 참 중노동이거든."
"걷는 연습을 해봐."
"해보자…… 음. 하지만 역시 파에게 달린 문제인걸."
"파에게?"
"응. 파에게 달린 문제야. 아니, 그건 모든 사람들에게 마찬가지겠
다. 응. 지금부턴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각자에게 달린 문제가 될 거
야."
쳉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언제의 누구에게든 마찬가지의 말인 것 같은데."
미는 창밖을 향해 흥얼거리듯이 말했다.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걸. 미는 파가 아니고, 파는 미가 아니
고. 미는 미대로. 파는 파대로. 쳉은……"
미는 말끝을 흐뜨러트렸다. 쳉은 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미는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돌려 쳉을 바라보았다.
"혹시 모르니, 할 건 해두자."
"할 거?"
미는 쳉의 무릎 위에 얹어두었던 다리를 오므렸다. 그리곤 침대 위에
두 손을 짚고는 쳉에게 기어와서는 그의 바로 옆에 앉았다. 쳉은 가만
히 앉은 채 미를 바라보았다. 미는 쳉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다가
두 팔을 들어올렸다.
미의 두 팔이 쳉의 목을 감아들어갔다. 그의 목 뒤에서 만난 그녀의
두 손은 서로 조용히 얽혀들었다. 쳉은 눈을 가늘게 떴고, 미는 아예
감아버렸다. 미는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해."
그리고 미의 입술은 쳉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서두르지도 않고,
주저하지도 않는 한결같은 속도로. 쳉은 낭패스러움과 기대감, 조바심
과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으며, 자신의 감정들에 놀라워했다. 그
사이에 미의 입술은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편안함으로 쳉의 입
술과 맞닿았다.
================================================================
이곳 남도에는 이제 슬슬 여름 분위기가 나려고 드는군요. 낮이면 꽤
따뜻하다를 넘어서 조금 더울 정도입니다. 시간들이 데굴데굴 잘도 굴
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도 밤에 창문 열어놓으니 꽤 서
늘하다….)
번 호 : 19193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17 01:22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6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6.
신스라이프는 배 난간을 부여잡은 채 바다 위로 떠가는 빙산을 바라
보았다.
바다도 빙산도 모두 젖빛이다. 선원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바다를 둘
러보았다. 혹시라도 다가와 배에 구멍을 내어버리거나 배를 통채로 수
장시킬 수 있는 빙산의 출몰에 갑판원들은 바짝 긴장해있었다. 하지만
선교 높은 곳에 자리한 선장은 무뚝뚝한 얼굴로 수평선을 바라볼 뿐
옆에 서있는 조타수에게는 눈길도 보내지 않고 있었다. 선장은 조타수
를 믿고 있었고, 조타수는 선장이 자신을 믿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그들이 서로에게 어떤 신뢰감을 표현하는지 알
바가 아닌 상태였다.
그의 속에서 파는 날뛴다는 표현이 적합할만큼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
다. 신스라이프는 어금니를 사려물었다. 이제 파는 거의 자의식을 찾
아가고 있었고 그래서 신스라이프는 초조했다.
'이 차가운 바다가 너를 일깨우는 건가? 아니면 시축인가? 시축일 가
능성이 높군.'
'시간축…… 부른다……'
띄엄띄엄이긴 하지만 파는 이제 대답까지도 하고 있었다. 신스라이프
는 웃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너무 늦었어.'
'나…… 퓨쳐……'
'넌 미래가 아니야. 넌 현재이고, 그것에 만족했어. 지금에 와서 부
정할 생각인가? 넌 내 손을 잡음으로써 현재와 손잡았다. 그것이 네
의지가 아니라고 말할 건가? 웃기는 소리. 나는 네 의지를 구속한 적
이 없다. 그건 네 본심이었어.'
'나…… 퓨쳐 워커……'
'퓨쳐 워커? 흐응. 이젠 더이상 그렇게 주장할 수 없다. 다가오는 시
간축이 너에게 무엇을 줄 거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왜 반항하는가. 넌 내 속에서 영원한 현재를 만끽할 수 있다. 그것이
네가 원한 것 아닌가?'
'나…… 파 라르고 그라시엘…… 퓨쳐 워커……'
"제기랄, 집어쳐!"
신스라이프는 고함을 내질렀다. 메인 마스트 아래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발레드와 쥬블킨은 당황하며 신스라이프의 등을 바라보았
다. 신스라이프는 뱃전을 단단히 움켜쥔 채 상체를 앞으로 크게 내밀
고 있었다. 발레드는 그가 투신하려드는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다음
순간 신스라이프는 상체를 확 쳐들었다. 뒤로 꺾어져라 고개를 치켜든
신스라이프는 하늘을 쏘아보았다.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이냐. 그래! 넌 파 라르고 그라시엘이고, 사
이들랜드의 양치기이고, 23 년 동안 몇 개 쯤의 추억을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여자다. 그래서? 네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
야! 그 외엔 전부 내가 준 것이다. 내 것을 돌려받겠다는 것이다!'
신스라이프의 손가락들은 어느새 하얗게 변한 채 뱃전의 단단한 나무
를 파고들고 있었다. 나무가 부스러지는 소리에 쥬블킨과 발레드는 크
게 놀랐다. 그들이 뭐라고 말하며 다가왔지만 신스라이프는 알아차리
지 못했다. 신스라이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모든 신경을 그 내부로
집중하여 파의 대답을 기다렸다. 파는 조금 느리게 대답했다.
'시간은…… 누가 멈추는가……'
'누가 너로 하여금 시간을 멈출 수 있게 해줬느냐! 누가 너에게 그런
힘을 줬느냐, 추억이 더이상 멀어지지도 잊혀지지도 않게 하고, 보고
싶지 않은 미래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힘을 줬느냐!'
'거절…… 한다. 도로 가져가……'
'의미를 생각하고 말해!'
신스라이프의 거센 분노는 파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가 막 뭐라고
말하려 했을 때, 갑자기 그의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신스라이
프는 홱 뒤로 돌았다. 실수였다. 그의 시야에 쥬블킨과 발레드의 걱정
스러워하는 얼굴이 들어온 순간, 그 얼굴들은 서로 뒤섞여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신스라이프는 균형을 잃고 주춤거렸다. 발레드가 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신스라이프에게는 그 손이 흉기처럼 보였다. 신스라
이프는 비틀거리며 계속 뒤로 물러났다. 빙글빙글 도는 시야 속으로
쥬블킨과 발레드의 얼굴이 서로 반대쪽에서 스며들어왔다가 나갔다를
반복했다. 그 얼굴들은 고함을 지르고 있었지만 신스라이프에게는 아
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신스라이프는 그대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갑판에 쓰러졌다. 갑판에 구겨지듯 쓰러진 신스라이프는 하늘을 보았
다. 회색으로 일렁거리는 하늘. 유백색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서 눈
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사방으로 흩어지는 눈발을 바
라보며 기절했다.
"정신이 드십니까."
신스라이프는 그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으
면 저 질문은 반복될 것이다. 귀찮군. 신스라이프는 조금 전까지 그가
희롱하던 무의식의 세계에 작별을 보내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선실의 거무튀튀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배의 흔들림에 따라 몸이
가볍게 출렁거렸고 신스라이프는 구토감을 느꼈다. 그는 힘없이 고개
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은 침대 옆의
벽이었다. 이런. 감각이 엉망진창이군. 신스라이프는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도르네이의 얼굴이 보였다.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도르네이……"
"예. 그렇습니다. 정신을 차리셨군요. 하루 하고도 반나절 만입니
다."
신스라이프는 뭐가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냐고 물으려다가 주춤했다.
기절? 아아, 기절했었나. 신스라이프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보았다. 그
러자 낯선 감각들이 온몸으로부터 몰려왔다. 이건 뭐지? 신스라이프는
시트 아래로 손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만져보았다. 그리곤 자신이 셔
츠 한 장만 걸친 채 누워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의아쩍은 표정
으로 도르네이를 바라보았다.
도르네이는 계면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 그러니까…… 기절하신 동안 옷수습을 해야 할 일이 좀 있었습
니다."
"똥오줌을 내놓았나."
"……예."
신스라이프는 쓰게 웃었다.
"누구야? 재미 본 녀석이."
도르네이 역시 피식 웃었다.
"저였습니다. 물론 옷을 벗기고 닦기도 했습니다만 특별히 재미있지
는 않았습니다. 아들네미 조그마했을 때 기저귀 수발하던 추억이 잠시
되살아나는 정도였지요."
"알았어. 옷은 준비되지 않았나."
"빨래는 해놓았습니다만 여기선 빨래 말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더
군요." 도르네이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선실 가운데에는 조그마한 화
로가 놓여있었고 그 위에 신스라이프의 바지와 속옷 등이 널려 있었
다. "조금 더 기다리셔야겠습니다."
신스라이프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 간단한 동작을, 신스라
이프는 조각조각내어 시도해야 했다. 팔이 후들거렸고 허리에서는 둔
한 통증이 전해져왔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도르네이는 신스라이프가
침대 옆으로 다리를 내놓자 점잖게 고개를 돌렸다. 신스라이프는 자신
의 다리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다리엔 아직 힘이 안들어가는군. 옷을 건네주겠나? 입고 있으면 마
르겠지."
"그러고 싶으시다면. 거의 다 마른 것 같습니다."
도르네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신스라이프에게 옷가지를 건네고는 다시
벽을 바라보는 자세로 앉았다. 옷을 입던 신스라이프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왜 너 혼자뿐이지?"
"지금은 밤입니다. 다들 자고 있을 겁니다."
"그럼 네가 혼자서 날 간호했다는 말인데, 다른 녀석들이 허락했나?
넌 날 죽이고 싶어할 걸로 짐작하는데."
"그래도 전 콜리의 지팡이입니다."
다부지게 말하던 도르네이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 모르겠군요. 죽은 프리스트라고 해야 할지. 콜리께로 가지
않고 다시 이 지상으로 돌아왔으니 그 분의 지팡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콜리에게 기도하게. 신앙을 달라고. 자네들 신의 몽상가들에게는 퍽
어울리는 일이겠지."
"몽상가?"
"자네들은 꿈의 신을 믿지 않나."
"아, 예……"
도르네이는 대답하긴 했지만 신스라이프의 설명이 어딘지 미흡하다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신스라이프는 더이상 말하고픈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옷을 다 입은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도 가서 눈 좀 붙이게. 난 이제 괜찮으니. 한 숨 더 자겠어."
"그러시겠습니까?"
도르네이는 일어나 테이블 옆에 놓아둔 등불을 들어올린 다음 선실
문을 향했다. 문을 열기 위해 손을 올리던 도르네이는 갑자기 멈춰서
서는 뒤로 돌았다. 신스라이프의 두 눈이 조용히 도르네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르네이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말했다.
"피로하실 텐데 죄송합니다만……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가."
"저는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겁니까?"
"무슨 말이지."
선실은 끝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단조롭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는 삐걱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도르네이는 왠지 서글퍼지는 느낌을 받았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스라이프께서는 아마도 이런 현실에서 깨어나
길 바라시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죽은 자들이 제멋대로 살아나는
현실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부활을 성취하신 당신이 이렇게 이상한
항해를 하시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짐작을 말해보거라."
"이 상황을 타개하시려는 거지요?"
신스라이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도르네이를 바라보았다. 도르
네이는 기대감 섞인 눈빛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그리
고 그 부활에 사용된 의식들과 마법들은 이상한 부작용을 만들어냅니
다. 저 같은 자가 그것이죠. 그럼 당신은 당신이 살아갈 새로운 나날
을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이 이상한 현상들을 타개하시려 하실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치고, 그래서?"
"이 상황이 타개되면, 저는 다시 죽는 겁니까?"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추운 배 위에서 두텁게 옷을 입
고 있건만 도르네이의 모습은 쓸쓸하고 황량해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등불은 작고 가냘프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의 서글픈 눈빛은 잔설 속을
오가는 배고픈 길짐승의 그것과 비슷했다. 신스라이프는 말해줘야겠다
고 결심했다.
"나는 모른다."
"모르신다는 것은……"
"네게 달린 문제다."
"예?"
신스라이프는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눕혔다.
"미안하지만 불 좀 끄고 나가주게."
"신스라이프……"
"그건 자네가 결정할 문제야. 더 이상은 말해봤자 소용없을 걸세. 좋
은 밤 되게."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머리 위까지 시트를 끌어올렸다. 도르네이는 당
혹감과 이유없는 슬픔으로 시트 아래의 신스라이프를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미안하지만이라고 했나? 신스라이프. 당신이 그런 말을……?
도르네이는 테이블로 다가가 등잔의 불을 껐다. 선실은 삽시간에 어
두워졌다. 도르네이는 등불을 들고 선실을 나왔다. 선실의 문을 닫기
전, 도르네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신스라이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르네이는 조용히 선실의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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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사방에 글 두드리는 일만 해도 정신이 없거늘, 타자는 요즘 발
더스 게이트에 미쳐있습니다… 으흐흑! NPC들이 제멋대로 대사를 말하
는 것에 엄청나게 감동…. Kivan! 최고다! 컴포짓 보+1 으로 쏘아대는
애로+1 의 위력에 감격하여 재산을 거덜내어가며 화살을 구입했으나…
퍼버벅! 주인공이 코볼드 코만도의 화살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로드하
시겠습니까? 음음…
???? : 사망이 무슨 색깔인지 아니?
타자 : 아니, 어디서 많이 듣던… 어허헉! 붉은색…
게임은 적당히 합시다.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9426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21 00:38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7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7.
탄느완의 수면은 마치 수은처럼 무겁고 잔잔하게 보였다. 실제로 선
원들이 무거운 물이라고 부르는 바다인 것이다. 이곳의 물고기들은 결
빙되기 직전의 바스락거리는 물을 들이마신다. 얼음장 같은 수면을 바
라보던 할슈타일 후작은 고개를 돌려 신차이 선장을 마주보았다.
"왜 나를 그렇게 보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당신은 산 자가 아니오."
할슈타일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웃은 사람은 그뿐이었다. 이시도는
눈을 크게 떴고 궤헤른은 반대로 눈을 가늘게 떴다. 쳉은 미의 어깨를
감아안은 채 뒤쪽에서 고요한 눈으로 신차이 선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차이는 갑판 위의 덱체어에 앉아서는 긴 외투를 어깨에 걸친 채 팔
짱을 끼고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떨어진 눈송이들이 녹았
다가 다시 얼어붙어 옷은 금속성의 광택을 띄고 있었고 신차이 선장의
얼굴 역시 밀납 빛깔을 띄고 있었다. 궤헤른은 그 얼굴이 이 새하얀
하늘 아래에서 아름다워보인다고 생각했다. 할슈타일은 커다란 망토를
신경질적으로 여미며 말했다.
"콜…… 콜록! 그럼 난 뭐지."
"당신을 설명할 언어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거나 내가 들어보지 못
한 거 같소."
"자네는 누구의 지혜를 잇는 거지."
"바다."
"바다. 감히 그림 오세니아의 지혜를 잇는다고 말하는 건가. 그럼 최
후의 헬카네스에게 묻겠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르겠소."
대답하며 신차이는 부스스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자 쳉은 이 사내가
얼마나 위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우람한 체격도 아니었지만 쳉은 신차이 선장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장신의 쳉에게는 희귀한 일
이었다. 똑바로 일어난 신차이는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시도 군에게 듣기로 당신들은 누군가를 추적하고 싶어한다고 들었
습니다. 누구를 고 있는 겁니까?"
"내 죽음의 열쇠 보관자."
할슈타일 후작은 나직하게 말했고 신차이 선장은 그 대답이 버겁다는
듯이 얼굴을 조금 돌렸다.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아야 간신히 알아차
릴 수 있는 싸락눈이 춤추듯 흩날리고 있었다. 빙하의 기슭에 힘들게
자라난 가문비나무 가지들은 흰 견장을 달고 있었지만 바다는 빨아들
이듯 눈을 흡수하고 있을 뿐 잔물결조차 없이 고요했다. 신차이는 다
시 고개를 돌려 후작을 보았다.
"진정한 죽음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번 죽어봤기에,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아니까."
신차이는 후작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른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
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쳉의 겨드랑이 아래 가냘픈 모습으로 서있
는 미의 얼굴이었다. 신차이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쳉에게로 시선
을 돌렸다.
"당신들은 전부 이 분의 수하들입니까?"
"나와 미는 아닙니다."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기…… 미를 돕는 것입니다."
"그래요?"
신차이는 다시 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쳉을 향하고 있
었다.
"그 아가씨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쳉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자이펀인들의 관습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쳉은 고개를 돌려 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더욱 의아해져버
렸다. 미는 멍한 눈으로 신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홀린 것 같
은 미의 눈빛은 신차이의 온몸을 훑어내리고 있었다. 미는 조금 더듬
거리며 말했다.
"미는…… 몰라요."
모른다고? 쳉과 궤헤른은 다시 놀란 표정으로 미를 바라보았다. 신차
이는 눈썹을 찌푸리다가 다시 쳉에게 말했다.
"저 아가씨는 모르는 것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인지 물어봐주겠습니
까?"
"몰라요." 미는 대답했다. "나는 정말 모르겠어요."
이번엔 후작과 미 자신을 제외한 일행 전부가 당황했다. 미가 저런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일행 전부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차이와 레드 서펜트의 선원들은 눈 앞의 사람들이
왜 놀라는지 알 수 없었다. 신차이는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가 폈다.
탄느완에서는 큰 볼일이 없다. 대충 알아본 바로 상관 설립은 가능할
것 같았다. 일스를 경유하는 중계무역의 항로의 설정, 그리고 탄느완
주재 상관 설립과 그 부대 비용, 유지비 등에 대한 대충의 계획서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신차이는 그것으로 선주나 선주연합에
제출할 항해 성과로는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자이펀으로 돌아
가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신차이의 고민거리였다. 운차이의 소식을
알아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일이었기에 이곳에 체류할 이유
는 되지 못한다. 물론 선원들은 그의 결정을 존중하겠지만……
3주라. 신차이는 생각했다. 3주 동안 북해를 조금 돌며 해도를 작성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다시 탄느완으로 돌아와 운차이
의 소식을 좀 알아본 다음, 그 결과에 따라 차후 행동을 결정하자. 어
쨌든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신차이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 기
간이라면 이 불가사의한 인물에 대한 탐구도 가능하겠지.
"승선을 허가하겠습니다. 출항일은 언제로 하면 좋겠습니까? 추적이
니만큼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듯합니다만."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어떤가."
"오늘 저녁 썰물 때 가능할 겁니다. 저녁식사 시간 후가 되겠군요."
"알았어. 준비는 크게 필요하지 않겠군."
후작은 몸을 돌려 궤헤른과 니크, 가이버, 사무엘 등을 바라보았다.
이 험악한 곳까지 스스로 납득할 수도 없는 이유에 의지하며 그를 따
라와준 사내들. 후작은 조금 쿨럭거린 다음 바이서스어로 말했다.
"너희들의 봉사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니크는 충격받은 얼굴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표현은 덜할지 몰라도
다른 사내들 역시 당황한 얼굴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이대로 하선하도록. 내 말은 너희들 마음대로 처분해라.
내겐 이제 필요없으니. 너희들이 함께 자구책을 찾던지 그냥 헤어지던
지는 너희들이 결정해라. 헤어지기로 결심했다면 궤헤른이 남아있는
돈을 알아서 나누어 주도록. 하지만 되도록이면 함께 턴빌로 돌아가
라. 그리고 신스라이프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라. 어렵긴 하
겠지만, 궤헤른 자네를 믿겠다."
"후, 후작님!"
"따라갈 겁니다. 그리고 후작님과 함께 돌아올 겁니다!"
니크와 사무엘이 동시에 외쳤고 가이버 역시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
었다. 하지만 궤헤른은 조금 슬픈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후작은 일그러진 얼굴로 수하들을 쏘아보다가 갑자
기 외쳤다.
"이 머저리들!"
조금 전까지 쿨럭거리던 사람의 외침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목소리
였다. 이시도는 기겁한 표정으로 후작을 보았다.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뭘 따라오겠다는 거냐!"
"후, 후작님……"
스르렁! 후작에게 다가가려던 니크는 갑자기 튀어나온 칼날에 멈칫했
다. 후작은 검을 똑바로 들어 니크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시도는 잇소
리를 내며 재빨리 목검을 꼬나들었지만 신차이 선장은 손을 들어 이시
도를 제지했다. 후작은 타오르는 눈으로 니크와 가이버, 사무엘을 번
갈아 쳐다보았다.
"이대로 보트를 타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너희들 전부를 베겠다."
니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후작은 농담을 과히 좋아하지 않는다. 그
는 후작의 말이 진심인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니크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가이버와 사무엘 역시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 때 궤헤른이 천
천히 입을 열었다.
"즐거웠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만……"
니크와 가이버, 사무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궤헤른을 바라보
았지만 후작은 차분한 얼굴로 궤헤른을 보았다. 궤헤른은 메마른 목소
리로 말했다.
"당신을 알고 당신과 함께 했다는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을 겁니
다."
궤헤른은 고개를 조금 숙여보였다.
"안녕히, 나의 주인님."
Good bye, my Lord…… 매서운 해풍 속에서도 씁쓸함과 처연함이 가
득한 궤헤른의 바이서스어는 이시도의 귀에도 잘 들려왔다. 이시도는
알 수 없는 슬픈 감정에 눈을 껌뻑거렸다.
궤헤른은 그대로 몸을 돌려 보트를 향해 걸어갔다. 니크는 울음을 터
뜨릴 듯한 얼굴이 되어 다시 한번 후작을 바라보았지만 후작은 엄한
얼굴을 할 뿐 무언으로 그를 쫓아내고 있었다. 니크는 기어코 눈을 거
칠게 비벼대며 보트에 올랐다. 가이버와 사무엘 역시 힘없는 걸음걸이
로 보트에 오르자 궤헤른은 보트의 노잡이들에게 짧게 명령을 보내었
다.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한 보트는 탄느완의 부두를 향해 멀어져갔
다. 후작은 그제서야 검을 꽂아넣었다.
신차이는 후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배 위에서는 선장의 명령 없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후작은 희미하게 웃었다.
"걱정말게, 선장. 내 검을 지금 당장 바다 속에 던져넣지 않는 까닭
은 이것이 단 한번 더 사용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 대상
은 이 배의 그 누구도 아닐세. 부탁인데, 나를 선실로 좀 안내해주겠
나."
"먼저 항로를 가르쳐주십시오."
"그것은 저기 미가 가르쳐줄 거야. 나는 쉬고 싶네. 춥고, 피곤하
군."
후작은 강제로 떠나보낸 부하들 때문에 외롭고 슬프기도 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차이는 후작이 말하지 않은 것을 읽을 수 있었
다. 신차이는 고개를 돌려 이시도에게 말했다.
"그 분을 선실로 안내하라. 프리스트 치터리가 묵던 선실이면 되겠
군."
"알겠습니다."
후작은 옷자락을 여미며 자신의 배낭을 힘없이 들어올렸다. 이시도는
후작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놀랐다. 조금 전 검을 뽑아들고 호령하던
사내는 어디로 간 거지? 후작은 외로운 병자처럼 보였다. 이시도는 후
작을 승강구로 안내하며 부축해드리겠다는 말이 목구멍에서 빙빙 도는
것을 느꼈다.
신차이는 쳉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영문을 몰라하던 쳉은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는 미를 내려다보았다. 미는 낮고도 또박또박한 목소리
로 말했다.
"목적지는 정북. 나침반의 바늘을 그대로 따라 가주시면 되요."
"얼음, 눈, 바람. 전 싫어, 제발 싫어요, 부디 싫어요, 한결 싫어요,
추위가 싫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던 운차이는 음울하게 말했
다.
"그렇게 떠들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다른 사람들을 보시지."
"루리, 추워?"
"아니오…… 별로."
"린, 추워?"
"글쎄요."
"센츄리온, 추워?"
"이힝힝힝."
"저만 추워, 저만 추워. 불공평해. 저는 불공평한 것이 싫어. 엥엥
엥!"
운차이는 아일페사스에게 왜 추위에 크게 개의치 않는 자들에게만 질
문하면서 아프나이델이나 제레인트, 네리아 등에겐 물어보지 않는 거
냐고 윽박지르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래봤자 듣지 못한
척하거나 무시해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차이는 드래곤
로드의 딸에게 재갈을 물릴 경우 드래곤 로드로부터 몇 년 정도 도망
다니면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취향에
퍽 잘 들어맞는 공상이었지만, 그런 행동으로 인해 야기될 결과는 그
의 취향에 별로 맞지 않았다.
이루릴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일페사스. 당신은 날씨에 대한 강력한 면역이 있을 텐데요. 극지
의 블리자드나 화산의 열기도 당신을 침범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일페사스가 대답하기에 앞서 제레인트가 먼저 대답했다.
"다만…… 칭얼거리고 싶은 유혹에 대한 면역은 없는 거겠지요."
제레인트의 목소리에마저 짜증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아일페사스는
눈을 흡뜬 채 제레인트를 쏘아보았지만 갑자기 그녀의 눈 위쪽에서부
터 커다란 천이 내려와 그녀의 눈 앞을 가로막았다. 아일페사스는 천
을 들어올리며 옆을 보았고, 초췌한 모습의 아프나이델이 자신의 망토
를 풀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녀에게 덮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일페사스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나이드, 미쳤어요?"
아프나이델은 셔츠 바람으로 덜덜 떨면서도 히죽 웃었다.
"어, 언젠가는 그렇게 되었다는 이유로 존경, 존경받을 수 있는 직업
에 종사하고 있긴 하, 하지."
"너 돌으셨구나? 빨리 가져가서 입어! 인간 주제에 말이야, 얼어죽으
려고!"
아프나이델은 이를 딱딱 부딪히면서도 애써 아일페사스의 얼굴을 똑
바로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그녀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망토를 거머쥐어 아프나이델에게 내밀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안 떠들면 되시는 거잖아. 너 말이에요, 건방져.
드래곤 로드의 계승자인 아일페사스를 훈계하려는 거야?"
아프나이델은 싱긋이 웃으며 망토를 받아들었다. 아프나이델의 등 뒤
에 앉아서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엑셀핸드는 미소지었지만 풍
성한 수염 때문에 그의 입술 움직임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얼
어붙은 손을 힘들게 놀려 망토의 조임끈을 묶은 아프나이델은 아일페
사스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의 눈꼬리는 여전히 꿈틀거리며 춤을 추고 있는 상태였다.
아프나이델의 눈길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일페사스는 찌푸린
눈으로 센츄리온의 갈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주의깊게 바라본 바에 따르면 이 북쪽의 바
람이 그녀의 어깨에 닿는 순간부터 아일페사스는 모든 것에 대해 불만
스러워하고 있었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별 무리없이 정서불안이라고
말해버리겠지만 아프나이델은 드래곤에 대해서도 그런 진단이 가능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일페사스를 바라보던 아프나이델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이루릴이 표정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
었다. 아프나이델은 왠지 모르게 어깨를 조금 움츠려보였다. 다음 순
간 그의 마음 속에서 어떤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
메시지? 아프나이델은 눈을 조금 크게 뜨며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
루릴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세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신 거죠? 캐스팅하신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건 천천히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아, 예. 미안합니다.'
아프나이델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주제에 마법사라고 관심은 그런
곳으로밖에 가지 않는군. 이루릴은 여전히 앞을 바라보며 메시지를 보
내어왔다.
'저도 걱정하고 있어요. 그녀에게서 불안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인
간 여러분에게는 지독한 날씨임에 분명하지만 사실 이 추위는 그녀에
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을 거에요.'
'물론 그렇겠지요. 왜 저러는지 궁금합니다.'
'그녀는 보호받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보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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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다 마시다 지루해져 앞자리를 바라보니, 술친구가 팔걸이에
기대어 졸고 있기에 의아해서 바라본 손목시계가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을 때, 청춘은 왠지 슬프군요. 출근하는 친구들은 이미 12시 부근에
다 사라졌던 것. 남아있던 친구는 꿈의 세계로 사라졌던 것.
도대체 이 지구라는 곳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고향 친구들이 빨리 우주선을 가지고 찾아와야 할 텐데.번 호 : 19427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21 00:38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8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8.
아프나이델은 의아한 얼굴로 이루릴을 바라보았지만 이루릴은 여전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록수
의 잎들 사이로 부는 칼날 같은 바람은 어둑어둑해지는 고갯길을 더욱
스산하게 만들고 있었고 남색 하늘에 떠다니는 어두운 구름들은 제멋
대로 춤추고 있었다. 보다 온화한 날씨에서는 보기 힘든, 거의 발광이
라고 불러주는 것이 마땅할 구름의 움직임은 바라보는 사람의 정신까
지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고갯길을 일행들은 힘들게, 그러나 변함없는 끈기로 걸어올라가
고 있었다. 선두에 운차이, 그리고 후미에 그란이라는 배치는 일행에
게 강력한 추진력을 선사하고 있었다. 맹수의 으르렁거림 같은 바람
소리는 일행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만들었지만, 제레인트나 아프나이델
마저도 딱딱한 얼굴을 한 채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고갯길을 끈기있
게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갑자기 이루릴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아프나이델. 드래곤 로드는 왜 당신들에게 아일페사스의 후견인의
역할을 부여했을까요?'
'어떤 의미인지……'
'글쎄요. 지금의 이 여정을 보고 있으니 왠지 의아한 생각이 듭니
다.'
'의아하시다고요?'
'아일페사스가 이 북구까지 오게 된 이유가 뭐죠? 그녀에게 이유가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당신들을 따라오고 있는 것이
겠죠?'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이루릴은 잠시 말을 멈췄다. 어둠 속에서 거의 보이지도 않는 그녀의
검은 머릿결을 보려 애쓰던 아프나이델은 이 침묵이 이루릴의 배려임
을 깨달았다. 아프나이델, 생각해보세요. 아프나이델은 다시 아일페사
스를 돌아보았다가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아프나이델은 이루릴을 쳐다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신스라이프를 추적시키기 위해 그녀로 하여금 우리를
따라다니게 한 거란 말씀입니까? 우리는 그녀의 안내자라고요?'
'지금의 현상은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하지만…… 그건 원인과 결과가 잘 연결되지 않는……'
'원인과 결과라고 하셨나요.'
아프나이델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머릿속에서 섬광 같은 것이 지
나쳤다.
시간이 멈춘다면, 원인과 결과의 전후 관계 따위는 아무런 의미를 가
지지 못한다. 아프나이델은 곱아드는 손가락을 힘껏 구부려 주먹을 쥐
었다. 손끝에서 감각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아프나이델은 거세어
지는 심장의 박동을 가라앉혔다.
그 때, 일행의 앞쪽에서 가벼운 술렁거림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아프나이델은 앞쪽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운차이
의 뒷모습을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그가 고갯마루의 정상에 우뚝 서
있다는 것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고개를 다 올
라온 것인가? 아프나이델은 힘겹게 언덕 위로 올라섰다. 그의 등 뒤에
서 엑셀핸드의 지긋지긋해하는 탄성이 들려왔다.
"오오, 카리스 누멘이여. 이 고개를 끝나게 해주신 것에 감사드리나
이다."
마지막으로 그란과 돌맨 할슈타일이 올라선 다음, 일행들은 잠시 언
덕 정상에 모여 선 채 발 아래를 바라보았다. 내리닫는 길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검은 숲과 구불텅거리는 산자
락 사이로 멀리 평평한 어둠이 보였다. 제레인트는 눈을 찌푸린 채 발
아래를 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 바다군요. 그런데 저기 하얀 것은 뭐지요?"
이루릴이 태연스러운 어투로 대답했다.
"빙하군요."
"빙하?"
"얼음의 강…… 산정상에서 쌓인 눈이 얼음이 되어 계곡을 타고 흘러
내리는 것이에요. 마치 강처럼. 물론 강처럼 빠르지는 않습니다. 자신
의 무게로 천천히 미끄러지는 거니까요."
"Afhick, Dotimasir ba ami……"
어둠 속에서 운차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네리아는 킥 웃고 말았
다. 운차이의 목소리는 정나미가 뚝뚝 떨어진다는 투였다. 물론 그 의
미는 알 수 없었지만 운차이가 세상에 빙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에 대해 어처구니없어하며 모종의 욕설을 퍼붓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
게나 확실했다. 이루릴은 조용히 설명을 계속했다.
"그런 빙하들이 바다에 닿았을 때 부서져 빙산이 되는 것입니다. 저
기 밤바다에 흰 덩어리들이 보이시나요."
"테페리여, 저는 저것이 범선의 돛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좀 이상
하게 보이긴 했지만. 저게 얼음 덩어리입니까?"
"그렇습니다."
"불빛이…… 저기가 탄느완인가 보군요. 어두워서 길이 잘 보이지 않
는데, 거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루릴은 잠시 산자락과 검은 숲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빙하가 문제군요. 내려가는 계곡 중간에서 빙하를 잠시 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어두운 밤이라면 여러분들껜 너무 어려운 일일 것
같은데요. 서두르다가 빙하 가운데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 것은 바람
직하지 않으니 내일 오전 중에 닿을 생각을 하고 느긋하게 내려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암흑의 산속에서 엘프의 조언을 무시할만큼 무모한 자는 아무도 없었
기에 일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루릴이 가벼운 목소리
로 "자, 출발할까요." 라고 말했을 때도 일행들은 한숨만 내쉬었을 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일을 주저하지는 않았다.
아래로 향하는 길을 따라내려가며 이루릴은 다시 먼 탄느완의 도시와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때 엘프의 경이적인 시각 속으로 빙산들 사이
로 사라져가는 돛이 보였다. 저것은 범선인가. 이루릴은 잠시 그 범선
에 주목했다. 다크 실버의 바다와 화이트 블루의 빙산 사이로 그 배의
돛은 꽤나 두드러졌다. 붉은 색. 이루릴은 그 범선이 다시 빙산의 그
늘 뒤로 사라지기 직전 돛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거대한 돛 가득히
그려진 것은 붉은 서펜트의 문양이었다. 이 백은의 세계에서 그 범선
의 모습은 충분히 이질적이었지만 이루릴은 가벼운 미소만 지었다.
아름다운 배로구나.
"나는 이제 죽으면 다시는 부활하지 않을 거요. 수도에서 나는 내 속
의 가장 저열한 부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장 끈질기게 남아있던
욕망을 충족받았소."
그레이가 있었다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유곽에라도 다녀오셨습니
까?' 등의 말을 꺼내었겠지만 딤라이트와 무스타파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로쳐는 특별히 자랑스러워하지는 않는 어조로 담담히 자
신을 해부해보였다.
"명예욕이라고 부르는 것이겠지만, 더 본질적인 의미에서 심사라고
해도 좋소. 나 자신의 생을 객관적인 누군가에 의해 심판받고 싶다는
것이지. 수십 세대 후의 필부필부인 후예들이 공정한 심사관들이 되는
지 어떤지는 따지고 싶지 않아요. 어쨌든 그 심사를 받았고 좋은 점수
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당신들도 아마
알 거요. 은빛 갑주로 성장하고 퍼레이드를 해본 경험이 있을 테니."
무스타파는 피식 웃었다.
"짜릿하죠."
무스타파의 눈은 과거를 보고 있었다. 그는 목을 조금 울리며 말했
다.
"오로지 나를 위해 환호하는 사람들의, 서로 잘 구분되지도 않는 얼
굴들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라면, 거의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 들지
요."
"내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소. 늙은이의 주책이지."
솔로쳐는 지팡이를 세워들며 말했다.
"나는 자랑삼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오. 솔직히 말하자면
혼자서 그 기쁨을 그러안고 무덤으로 돌아가고 싶소. 내가 이 이야기
를 꺼내는 까닭은 당신들을 위해서요.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 속에 응
어리진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길 바라오. 난 당신들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지는 못해요. 그리고 이 시대에서, 당신들은 당신들 자신만큼
이나 당신들을 잘 아는 사람을 결코 찾아내지 못할 거요. 그러니 스스
로에게 물어보고, 스스로 찾아내시오. 그럼 당신들은 다시 죽을 수 있
을 거요."
말을 마친 솔로쳐는 딤라이트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딤라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테이블을 쏘아보고 있었다. 솔로쳐는 근심스러웠
다. 저 강직한 성기사는 자신 속에 응어리져 자신이 평생 동안 섬겨온
진리를 거부하게 될 정도로 강력한 안타까움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
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알 수 없는 안타까움 때
문에 나는 기사의 본분도, 오렘의 명예도 저버린 채 이 지상에 다시
돌아왔단 말인가? 딤라이트는 고래고래 고함질러 부정하고 싶을 것이
다. 하지만 딤라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로쳐는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에 앉아있던 네번째 사람을 바라보았
다.
"레티의 검이여."
레틴드롤스는 처연한 얼굴로 솔로쳐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젖어있는
눈가를 못본 척하며 솔로쳐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절대적 위기에서 자신을 파괴한 당신의 결정, 누가 보더라도 과연
그래야 했을까 의심되는 것은 당연하오. 더군다나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라면 더욱 그렇지. 그러니 그렇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소."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부끄럽습니다."
"아니,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소. 그런 결정을 내리면서도 마음 속에
한 점 의혹이나 주저함이 없었다면 그 자야말로 비인간적이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손가락이나 발가락 하나를 희생하라고 해도 우선
거절부터 할 것이오. 당신은 인간적이었고, 인간들 중 그 누구도 당신
을 힐난할 수 없을 거요. 그리고 설령 레티께서 현신하신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변호하겠소."
레틴드롤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로쳐님. 저는 들었습니다. 제가 죽은 다음에 많은 형제들이 저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하지만 그 형제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
다. 저만이 레티에의 길을 거부하고 이 지상에 미련을……"
"그게 아니오!"
솔로쳐는 거칠게 외쳤다. 레틴드롤스는 입을 다문 채 솔로쳐를 바라
보았다.
"그래요! 그 전투에서, 많은 레티의 검이 당신을 따라 자신을 파괴했
소. 그리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소. 하지만 거기엔 분명히 차이가 있
소! 당신은 다른 누구의 본보기도 없는 상태에서 가장 먼저 그것을 시
도했소. 당신의 불안이 가장 큰 것은 당연하잖소? 다른 형제들은, 제
길. 내 입을 용서하시오. 그 작자들에게는 화려한 군중심리의 응원이
라도 있었을 거요. 네가 하니 나도 한다는 식의.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런 응원도 없었단 말이오. 도대체 뭘 부끄러워하시오? 당신은 힘든
길을 갔고, 혼자서 가야했던 그 여정에서 당신이 받았을 고통은 동정
의 소지는 있어도 결코 경멸받을 수는 없는 것이오!"
레틴드롤스는 고개를 숙였다. 솔로쳐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레티께서 당신들에게 그런 권능을 부여한 것은 스스로의 생존을 경
멸하라는 뜻은 아니실게요. 그 분은 파괴신이시지만…… 아니, 관두겠
소. 성직자와 교리를 논하려드는 것은 마법사의 자세가 아니지. 부탁
이니 스스로를 부정하지 마시오. 당신 역시 스스로를 똑바로 봐야 하
오. 고개돌려 외면해버리기만 똑바로 볼 수 없소. 당신의 hjan이 무엇
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당신을 직시해야 할 거요."
"명심하지요."
할 말은 끝났고, 솔로쳐는 천막의 휘장을 걷어올리며 밖으로 나왔다.
천막 안에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숙고해볼만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야전막사의 바깥에서는 거대한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선 채 조용히
주위를 응시하고 있는 전사가 있었다. 지나가던 켄턴 시민들 모두가
한두번씩 돌아보고 있었지만 전사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솔로
쳐가 나오자 전사는 부드럽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솔로쳐는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에카드나. 거기 그렇게 서있는 것, 힘들지 않나?"
용아병 에카드나(Ekardnah)는 솔로쳐가 그에게 왜 이런 이상한 이름
을 붙였고, 그런 작명을 통해 어떤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가에 대해
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들지 않습니다."
"자네 종족에 대해서 심도있게 연구해본 바가 별로 없어서 내가 잘
모르는 바가 많군. 자네에겐 어떤 욕망이 있지? 만일 내가 자네의 봉
사가 필요없다고 말한다면 자네는 어떻게 되는 건가."
"지금 대답해야 합니까?"
"어렵지 않다면."
에카드나는 솔로쳐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맑고 그 안에
서는 어떤 종류의 감정의 일렁거림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렵군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것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나셨습니까?"
"흐음…… 지내다보면 목적이 생길 거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저는 현재로선 아기와 마찬가지니까요. 세계에
대한 어떤 은원이 생겨난다면 제 목적도 생겨날지 모르지요."
"나는 단수가 아니니까? 하하하."
에카드나는 솔로쳐의 웃음의 이유도 알지 못했지만 별 말을 하지 않
았다. 솔로쳐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좋아. 하지만 한 가지 부탁은 하지."
"말씀하십시오."
"내 복수를 하겠다느니 뭐니 하는 말은 하지 말게. 내가 어떤 방식으
로 죽든. 특별히 말해두는 이유는, 내가 자네의 소환자이기 때문이야.
어쩐지 부모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걸."
에카드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솔로쳐는 허허 웃었다.
"즐거운 인생이 되길 바라네.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는. 남겨진 미련
을 발에 묶고 걷기에 저승길은 너무 길다네. 그런 건 훌훌 털어버리고
걸어야하지."
"솔로쳐?"
솔로쳐는 들고 있던 지팡이를 힘차게 휘두르며 걷기 시작했다. 그는
에카드나의 곁을 지나치며 말했다.
"경험에서 나온 말이야. 명심해."
에카드나는 잠시 솔로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솔로쳐는 인사를 건
네어오는 켄턴의 경비대원들과 시민들에게 미소와 따스한 인삿말들을
건네며 걸어가고 있었다. 지팡이를 쥔 손은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고
햇살 아래 그의 뒷모습은 꼿꼿했다.
루손은 글레이브의 칼날을 붙잡을 뻔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자신의 몸에 익숙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가까스로 손바닥만 조금 베어먹은 루손은 손을 재빨리 입으로 가져가
피를 핥았다. 그리고 루손은 다시 글레이브를 꼬나들었다.
레이저는 담담하려 애쓰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거기서……?"
계곡 바닥에 앉아있던 거인은 피로한 얼굴로 절벽 위의 레이저와 루
손을 바라보았다. 거인이 앉아있던 계곡 바닥은 까마득하게 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인은 레이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기다릴 것이다."
루손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취아악! 누가 그냥 죽게 내버려둘까! 츄, 츄칫!"
목숨을 걸고 발악하듯이 외친 고함소리였지만 거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레이저는 손을 들어 루손을 제지하며 말했다.
"그만, 루손. 복수는 성립될 수 없어. 나크둠은 살아났잖아."
"어? 츄, 그런가?"
루손은 얼떨떨한 얼굴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취치! 하지만 거인이 나크둠을 죽인 건……"
"관두자, 루손."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지만 루손은 입을 다물었다. 레이저는 다시
거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그덴산을 정복하러 돌아온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
거인은 눈을 들어 주위로 펼쳐진 산자락과 계곡의 흐름을 굽어보았
다. 레이저 역시 무의식 중에 거인을 따라 그덴산 주위로 펼쳐진 신록
의 파도를 바라보았다. 대지를 박차고 솟아오른 절벽과 봉우리들, 녹
색의 숲 사이로 우뚝 솟아로는 붉은 암벽과 그 위로 휘감아도는 구름
의 물결. 밀생한 자작나무의 숲 옆으로 켜켜히 쌓인 암석들은 시간의
비망록처럼 그곳에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레이저는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놀라움에 경직했다. 그는 이런 그덴산
을 본 적이 없었다. 바로 이 장소에서 볼 때의 그덴산의 아름다움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레이저는 불현듯 알아차렸다. 거인은
이 장소를 알고 있었겠지. 그는 그덴산의 주인이었으니까. 그는 이 장
소에서 바라보는 그덴산의 이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그래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겠지.
거인은 약간 졸음이 섞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 아름다운 그덴산이 아니면 나는 어디서 최후를 기다리겠는
가."
레이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질투심까지 느꼈다.
방랑자가 촌락의 농부에게 느끼는, 그리고 유목민이 농경민에게 느끼
는 질투심과 비슷한 질투심. 레이저는 일그러진 눈으로 세상 그 어느
곳에, 최후에 그곳에 있고 싶은 장소를 가지고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거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조그마한 자들은 시간의 수원까지 거슬러올라갈 것이라 믿어지
네. 그리고 그들은 막혔던 수원을 뚫고 새로운 시간이 세상에 흐르게
할 것이네. 그 때 세상에 흘러넘칠 시간의 강물은 나를 씻기고 과거로
나를 돌려보내겠지. 과거의 먼지는 씻겨지고, 과거의 추억은 강물 속
에 흩어져 사라지겠지."
거인은 이대로 산이 되고 암석이 될 것이다. 기다림 자체를 뛰어넘어
서. 레이저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먼곳을 바라보던 거인은 보고
싶은 것을 다 보았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무릎에 고개를 떨
구기 직전, 거인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시작되어 영원히 계속될 내 휴식을 방해하지 말아주게."
그리고 거인의 눈꺼풀은 닫혔다. 거인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고, 그리
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은 나뭇잎들을 한웅큼 날
아와 거인의 바위 같은 어깨에 뿌렸다. 그것은 그덴산이 그의 유일하
면서도 진정한 주인에게 보내는 마지막 작별인사였다.
레이저는 목이 메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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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9960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5-02 01:54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9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9.
이시도는 할슈타일 후작을 보고 있었고, 할슈타일 후작은 쳉을 보고
있었고, 쳉은 미를 보고 있었고, 미는 신차이 선장을 바라보고 있었
다. 신차이의 경우, 레드 서펜트의 이물에 서서는 결빙되지 않았을 뿐
얼음이나 다름없는 차가운 북해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은 북해의 바닷물을 닮아있었다.
연쇄의 고리에서 쳉이 조용히 일어나 자신의 자리를 비웠다.
캡스턴 옆에 놓인 물통에 앉아 다리를 조금 흔들고 있는 미에게 다가
선 쳉은 그녀의 오른쪽 갑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오른쪽을 선택
한 이유는 왼쪽에는 아달탄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는 고개를
조금 돌려 쳉의 덥수룩한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빗질 좀 해라. 바람 맞아서 엉망이잖아. 저 사람들처럼 머릿수건을
하는 건 어때?"
"네가 거기 앉아있음으로해서 이 배의 선원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건
아니?"
"응? 무슨 말?"
"이 배의 선원들은 자이펀인들이야. 그래서 목이 마르다는 이유로 네
게 다가와 좀 비켜달라고 말할 사람들은 아니라는 거지."
미는 히죽 웃고서는 물통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들에게 레이디를 상대로 말하는 법을 가르치자. 그들도 세상의 반
을 구성하고 있는 자들을 완전히 무시한 채로 살 수는 없을 텐데?"
"무시하는 건 아닐지도 몰라. 오히려 너무 강하게 인식하고 있는 걸
지도. 난 잘 모르겠어. 음. 언젠가 일스의 술집에서 모래바람 풀풀 풍
기는 상인 친구와 대작하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자이펀인들은 다른 여
자들에게는 눈길도 보내지 않는 만큼 자기 아내에게는 퍽 살갑게 대해
준다는 둥의 이야기를 들었어……"
쳉은 자신의 모자란 이야기 실력을 잘 알고 있었지만 미를 상대로 할
때 그런 것을 신경쓸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쳉은 자신이 들었던 소박
한 이야기들을 천천히 말했고 미는 여러가지 표정을 지었지만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쳉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눌하지만 꾸밈
없이 말하는 쳉과 풍부한 표정을 짓지만 별 참견은 하지 않은 채 이야
기에 귀를 기울이는 미 두 사람의 모습은 삭막한 북해의 바다 위라는
공간 속에서 이질적이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하오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할슈타일 후작은 포마스트 아래에 기대어 서서는 그런 두 사람을 물
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코에서 나오는 숨결이 그대로 하얀 안개가
되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꽉 다물린 입보다는 가슴 앞으로 엇갈린
두 팔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후작은 팔짱을 낀 채 오
른손 검지로 왼쪽 이두근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큼직한 방한 외투
로 몸을 감싸고 눈 바로 위까지 후드를 내려쓰고 있던 이시도는 고물
에 서서 그런 후작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시도는 후작의 손가락이
어떤 낯익은 박자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후작을 한참 동
안 관찰하던 이시도는 갑자기 오른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는 오른
손을 왼쪽 손목으로 가져갔다.
맥박이군.
그 때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시도를 흘깃 보았다. 이시도는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쥔 채 머쓱한 얼굴이 되어 후작의 눈길을 받
아야 했고, 후작은 의아쩍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손가락
을 내려다본 후작은 이시도의 행동을 이해했다. 후작은 팔짱을 풀며
이마를 짚었다. 그의 입술에서 하얀 숨결과 함께 혼잣말 같은 말이 몇
마디 섞여 흘러나왔다.
"부질없군…… 살아있는 척하고 있어."
이시도는 이 바이서스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시도는 그에게 몇 마
디 걸어보아야겠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래서 괜스레 포마스트의 돛줄
을 잡아당겨보기도 하고 갑판원들에게 별 필요도 없는 지시들을 내리
기도 하면서 "단추를 더 단단이 잠궈! 감기들면 어쩌나!" 자연스럽게
후작에게 다가왔다. 후작은 그런 그에게 속아주는 척했다. 이시도는
후작 바로 곁에 다가서서는 후드를 뒤로 넘기며 두 손에 입김을 호호
불며 말했다.
"어이구, 지독한 날씨입니다. 할슈타일 씨. 갑판에 그렇게 서있으셔
도 괜찮으십니까?"
후작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이시도는 벙글진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이서스 분이 어떻게 자이펀의 배를 타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시도를 보았다. 이시도는 먼저 후작과
자신의 거리를 확인한 다음 말을 이었다.
"시비를 걸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아요.
이 배는 자유무역선이고, 게다가 여긴 자이펀의 해역도 아닌 만큼 우
리들이 설령 바이서스의 국왕을 태웠다고 해도 그것이 군사적 목적이
아니라면 자이펀의 군부도 크게 화낼 수는 없거든요. 투덜거리기는 하
겠지만."
이시도는 우쭐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후작은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잠시 후 이시도가 조금 당황하게 되었을 때 후작은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다."
"예?"
"나도 이것이 바다 위를 떠가는 배인 이상 선적이 어딘가 따위는 신
경쓰지 않는다. 대답이 되었는지."
이시도는 잠시 이것이 화를 내어야 되는 일인지에 대해 고려해보았지
만 아무래도 무엇에 대해 화를 내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시도는 어떠한 반응을 보여도 이미 늦어버릴 때까지 아무 반응을 보
이지 못했고, 할슈타일 후작은 그런 이시도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쳉과 미를 바라보았다.
쳉은 이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갑판에 주저앉은 쳉은 물통에
앉은 미의 다리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히 앉아있었고 미는 쳉의 머리
에 손을 얹은 채 그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꼬아대고 빗어대고 하고
있었다. 쳉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미의 턱을 보다가 조금 졸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 신차이 선장을 쳐다보는 거니?"
"이건 질투다. 쳉은 질투를 하고 있어. 미는 이제 비극적인 삼각관계
의 가련한 희생물이 될 거야. 흐음. 한번 쯤 그런 것도 해보고 싶었
어."
"저, 그러니까……"
"잠깐 기다려봐. 멋진 대사를 생각해낼 수 있을 거야. 어디 보자……
먼저 쳉은 질투에 눈이 멀어서 신차이 선장과 결투해라. 알았지? 그럼
미가 쳉의 팔을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할께. 별빛마저 드문드문한 캄캄
한 밤이라도, 그대 설령 내 앞에 있지 않더라도, 미의 두 눈이 멀어버
릴지라도, 미의 눈동자는 언제나 쳉의 모습을 반사할 것을 믿지 못하
니?"
"내가 감동적이라고 말하면 웃을 거지?"
"당연하지. 골렘이 감동 어쩌고 하면 미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웃
어."
"사실, 닭살 돋아."
"그러라고 한 말이야. 자, 이제 계란 낳아봐."
쳉은 묵직한 한숨을 토해내었고 미는 그런 쳉의 머리카락을 더욱 헤
집으며 깔깔거렸다. 잠시 후 미는 쳉의 머리카락에 엉켜버린 소매 단
추를 풀어내느라 조금 투덜거렸고 그 동안 쳉은 눈물을 찔끔거리며 참
아야 했다.
"많이 아팠어? 잘 참네. 착하다."
"상으로 대답이나 해줘."
"대답? 아아, 아까 그 질문. 글쎄다. 미는 왜 신차이 선장을 바라볼
까."
미는 다리를 흔들면서 다시 이물에 서있는 신차이의 등을 바라보았
다.
"저 사람, 바다야."
"바다?"
"응…… 바다야. 신기해. 미가 들판에서 자라나 그런지 몰라도 꽤 신
기하게 느껴지네."
"뭐, 처음으로 본 뱃사람에게 느끼는 신비감을 말하는 거니?"
"그건 아닐 테지. 이 배엔 뱃사람들이 많이 있잖아. 어디, 시무니안
을 보자. 시무니안의 대지엔 계곡이 있고 산이 있고 언덕이 있고 강이
있겠지. 그림 오세니아의 바다는? 그 안에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바다는 평평해. 지금 여기서 파도치는 이야기는 하지 말기."
막 그 이야기를 꺼내려던 쳉은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미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며 말했다.
"땅을 닮은 사람은 그 안에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겉으로 다 드러나
겠지. 그래서 그 사람에겐 풍요로운 과수원 같은 부분도 있을 테고 오
르기 힘든 산 같은 모습도 있을 테지. 마음 속의 깊은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는 계곡 같은 부분도 있을 테고 다져지고 흩어져 황야처럼 바뀐
부분도 있겠지. 그게 땅을 닮은 사람이겠지. 하지만 바다를 닮은 사람
은 일단 모든 부분이 똑같이 평평해."
"평평하다?"
"응. 미 말이 이상하지? 미 머릿속에서도 좀 모호한 개념밖에 없어
서. 그러니 말이 이상하더라도 용서해라. 용서 안하면 때릴 테야.
머…… 이렇게 사람을 나눠보았지만 저 사람에겐 그게 통하지가 않네.
선장님은 완전히 바다 그 자체야."
미는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도망칠 수가 없네.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쳉은 얼굴을 들어 미를 보았지만 앞으로 늘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미
의 눈은 잘 보이지 않았다. 쳉이 볼 수 있는 것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의 입술 뿐이었다. 미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그림 오세니아께서 손을 내미셨으니…… 하긴 그 분밖에 안계신 건
가."
미는 고개를 조금 돌려 후작을 곁눈질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팔짱을
낀 채 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렌차께서도 꼼짝할 수 없게 되었고, 음, 그럼 그덴산의 거인도 포
기하셨겠구나. 그림 오세니아께서도 많은 힘을 쓰시지는 못하겠지. 하
지만 그 과묵하고 고요한 분이 직접 나설 생각을 하셨다는 건 대단해.
그분이니까 이만큼이나 도움을 베푸실 수 있겠지. 워낙 강력한 분이니
까. 하지만 늦게 내밀어진 그 손길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겠지. 이제
곧……."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미는 쳉의 얼굴을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하지만 말이야,"
"응?"
"미가 진짜로 도움받고 싶은 것은 얼간이 쳉이야. 미는 무지무지 바
보라서, 쳉은 아무런 도움이 안될 것을 알면서도 말이지. 메에에에!"
미는 가볍게 말하고 있었지만 쳉은 바로 그 때문에 가슴을 후벼파이
는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쳉은 그 감정을 정의할 수 없었고, 정의될
수 없는 감정에 시달리는 것은 쳉에겐 항상 낯설었다. 그래서 쳉은 한
참 동안이나 굳은 얼굴을 한 채 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미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쳉의 두 볼을 살짝 붙잡은 미는 허리를 굽혀
그의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미가 투정을 너무 심하게 부렸나 보다. 그 얼굴로 울면 보기 흉할
거야. 웃어라."
쳉은 입술 양끝을 힘들게 위로 끌어올렸다. 미는 그 얼굴을 보고는
죽어라고 웃어대다가 그만 물통에서 굴러떨어졌다. 쳉이 당황하여 미
를 부축하기 위해 일어섰을 때 마스트 끝에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Sarle Lo-!"
이시도, 할슈타일 후작, 신차이 선장, 그리고 쳉과 그의 품에 반쯤
안겨 일어서던 미 전부가 마스트 끝을 올려다보았다. 신차이와 이시도
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떠올라있었다. 신차이가 고함질렀다.
"Ir rivhepjan?"
"Rigkeel un borthas! rene……?"
말끝을 잠시 흐리던 감시원은 다시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미는 눈
을 깜빡거리다가 쳉에게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
"잘은 모르겠는데, 배가 보인다고 하는 것 같군."
"와, 배? 다행이네. 그런데 선장님은 왜 저런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
는 거지?"
"그런데 그 배가……" 쳉은 얼굴을 돌렸고 미는 쳉의 옆얼굴을 보며
불안감을 느꼈다. "좌초한 것 같다는데?"
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좌초라고?"
쳉의 자이펀어 번역은 정확하게 맞는 것은 아니었다. 이 주위의 바다
에 암초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으므로 좌초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시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
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배가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군요. 크라켄이 나타나서 배를 붙잡아 집
어던진 걸까요?"
시선을 돌려 주위의 바다와 빙산을 바라보던 신차이는 고개를 가로저
었다.
"낭만적인 상상이지만, 그건 아닐세. 빙산에 끼인 거야."
"예? 빙산이오?"
"저기 저쪽의 빙산을 자세히 보게. 심하게 부서졌지? 그리고 목재들
이 몇 개 보이는군. 배는 저 빙산과 이쪽의 빙하 사이에 끼인 거야.
멍청하게 일부러 들어온 것은 아니겠지. 그 때는 안전해 보였을 거야.
하지만 배가 들어서자마자 빙산이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빙하와 빙산은 배를 양쪽에서 밀어붙였을 거야. 마치 비틀어 짜내듯
이. 그래서 어느 순간, 배는 격하게 튀어올랐지. 그 때 배의 하중 때
문에 빙하가 무너지며 저렇게 빙하 위로 내동댕이쳐진 거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냐."
이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하 위에 모로 쓰러져있는 배를 바라보았
다.
배는 양쪽 뱃전이 거의 박살난 모습으로 쓰러져있었다. 부러진 돛대
는 멀찌감치 나뒹굴고 있었고 흩어진 배의 의장들과 선구들은 반파되
어 눈 속에 틀어박혀 있거나 빙하 바닥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튕겨져나온 선원들의 시체가 얼음 위에 점점히 흩어져 있
었다. 게중에는 이곳이 고독한 세계가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주는 시체
들도 있었다. 이시도는 다시 의아쩍은 얼굴로 신차이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뭐가……"
"백곰이 한 짓이야."
"그렇군요."
이시도는 오한이 도는 것을 느꼈다. 신차이는 차분한 얼굴로 미를 돌
아보았다.
"내려서 확인해보고 싶겠지요?"
"예."
미의 담담한 얼굴은 신차이를 의아하게 했다. 파랗게 질려있지도, 턱
을 딱딱 부딪히지도 않았다. 분명 슬픈 얼굴이었지만 미에겐 불안감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신차이는 고민을 중단하고는 이시도에게
말했다.
"선원 10 명, 단단히 무장시켜서 보트에 태우도록. 시체를 찾아 백곰
이 되돌아올지도 모르니까. 탐사는 내가 맡을 테니 배의 지휘를 담당
하라."
"선장님께서요?"
"그래. 저 빙하 위로 상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군."
================================================================
잔인한 4월은 끝났지만, 타자의 마음은 아직도 4월에 매어있는 것 같
군요. 으흐흐.
예? 아아. 이게 뭐냐고요? 퓨쳐 워커라는 소설입니다. …새로 시작하
는데 왜 프롤로그도 하나 없냐고요? 으흑! 새로 시작하는 소설이 아닙
니다. li jin46 해보세요. 이게 연재소설 맞냐고요? …와, 달빛 좋다.번 호 : 19961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5-02 01:54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10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10.
하지만 신차이의 걱정은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보트를 내
릴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할슈타일 후작은 쳉에게 다가가서 몇 마디
이야기를 건네었고, 쳉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자신의 허리에 밧줄을 묶었다. 그리고 후작은 쳉을 들어올려 빙하 위
로 집어던졌다.
레드 서펜트의 갑판원 전원들이 입을 쩍 벌린 가운데, 극지의 하얀
하늘을 우아하게 날아간 쳉은 얼추 60 큐빗 쯤 날아간 다음 눈더미 위
에 떨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쳉이 옷을 툭툭 털며 일어서자 레드 서
펜트의 선원들은 후작에게 보내었던 시선보다 몇 곱절은 더 어처구니
없어하는 표정을 쳉에게 보내었다. 아무리 두터운 방한복이 충격을 완
화시켜주었다 하더라도 60 큐빗의 거리는 목뼈를 부러뜨리기에 적당한
거리였다. 신차이 선장은 신음소리를 토해내었고 이시도의 경우에는
목검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사이록의 수평선의 완성을 기념하기에 적
당한 상대를 드디어 만났군……" 선원들은 졸도하는 표정을 지어보였
고 갑판장 모하메드의 경우에는 잘 안되는 헤게모니아어로 할슈타일
후작에게 말했다.
"한번만 더 수고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번엔 반대쪽으로 말입니
다."
후작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고 극지의 바다에 집어던져질 뻔한 이시
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동안 쳉은 난파된 배로 어슬
렁어슬렁 걸어간 다음 배의 닻에 밧줄을 묶었다. 불안정하나마 계류
장치가 구성되어 레드 서펜트는 빙하 바로 옆에 정선하게 되었다. 후
작은 이시도에게 짧은 요구를 몇 개 더 했고 잠시 후 세 가닥 밧줄이
빙하 위의 쳉에게 던져졌다. 쳉은 그 밧줄 모두를 난파된 배의 곳곳에
묶었다.
그래서 조사대는 밧줄에 매달린 채 안전하게 빙하 위로 내려설 수 있
었다. 선원들인 만큼 밧줄을 타고 바다 위를 지나가는 것을 어려워하
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미의 경우엔 후작의 등에 단단히 묶인 채로
밧줄을 건넜다. 아달탄만은 밧줄을 탈 수 있는 재능이 없었는지라 갑
판에 서서는 슬픈 표정을 지은 채 그의 주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어
야 했다. 모두 빙하 위에 내려선 다음 사람들은 난파선으로 걸어갔다.
난파선 주위에 대한 관찰을 시작하자마자 이시도는 불만족스러운 어
투로 말했다.
"고약하지 않은 죽음도 드물겠지만, 이런 식의 죽음은 정말 고약하
군."
순백의 빙하 위에 펼쳐진 지옥도는 선원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부
서진 배의 목재들에 짓눌린 선원의 몸에서 튀어나온 내장들은 단단하
게 얼어붙어있었다. 간혹 대책없이 앞뒤없어지기도 하는 이시도는 그
내장을 걷어차보았고, 얼어붙은 고깃덩이들이 부서지며 흩어지자 선원
들은 분노의 외침을 토해놓았다. 하지만 걷어찬 이시도 본인의 얼굴이
가장 심하게 헬쓱해져 있었기에 선원들의 질타는 길지 않았다. 그 동
안 이곳저곳을 살피던 쳉은 선체 아래의 바람을 많이 타지 않을 위치
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선원들은 모두 몰려들었다.
흰 눈밭 위에 일정 부분의 눈이 새카맣게 변해있었다. 쳉은 장갑을
벗고는 검게 변한 눈을 한 웅큼 들어올려 자세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로군."
"재?"
이시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쳉은 손을 툭툭 턴 다음 다시 장갑을
끼며 말했다.
"생존자가 있었군요. 혹심한 추위 때문에 그들은 이 설원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작을 태웠습니다. 선체의 파편들이지요. 잠깐……"
쳉은 몇 발자국 걸어간 다음 선체의 부서진 부분을 바라보았다.
"이건 용골 같은데…… 아무리 봐도 커다란 배의 용골일 수는 없군
요. 크기나 뭘 보든. 보트의 용골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부서진 모습
을 보니 절대로 사고로 파괴된 것은 아닙니다. 톱질해서 잘라낸 거죠.
왜 보트를 부순 거지? 보트를 패서 장작으로 삼지 않아도 목재가 많이
있는데. 그것은……"
"썰매군."
신차이 선장이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대답했다. 사람들이 모두 고개
를 돌리자 신차이는 아무 말 없이 땅을 가리켰다. 그곳엔 나무조각과
구부러진 못 몇 개가 흩어져있었다. 하지만 신차이는 그것들 이외에
더 확실한 증거를 드러내어보였다. 신차이가 허리를 숙이고 눈을 조금
걷어내자 설원 위로 두 개의 곧은 선이 나타난 것이다.
"이 눈은 오래된 것이 아니야. 얼어붙지 않은 새 눈이지. 썰매자국
위에 눈이 살짝 덮인 거야. 사막에서 우리들도 간혹 사용하는 거지.
썰매를 만들기로 했다면 커다란 배보다는 보트쪽이 다루기 편했겠지."
이시도는 기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 배의 선원들은 모두 돌았군요. 보트를 타고 남쪽으로
돌아와야 되지 않습니까?"
신차이는 잠시 고민스러운 얼굴로 땅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쳉
을 보았다. 쳉은 무거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를 조사해보겠습니다."
"그래요…… 부탁하지."
쳉은 곧 시체들을 일일이 들여다보았다. 이시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
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신차이에게 다가서서는 자이펀어로 질문했
다.
"무슨 말씀을 나누신 겁니까?"
"이시도 군. 몇몇 시체에서는 사고가 아닌 다른 죽음의 원인이 나타
날지도 몰라."
"예?"
"자네 말마따나 그런 미친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을 선원이 많으니까.
목숨줄인 보트를 부수겠다는데 자네라면 찬성하겠나? 하지만 썰매는
만들어졌어. 나와 쳉은 그런 결정이 내려졌을 때 어떤 폭력적인 사태
가 야기되지 않았을까 의심하네."
이시도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신차이를 보다가 다시 쳉을 보았다. 잠
시 후 쳉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꽤 되는군요. 커다란 싸움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잠시 동안 사람들은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정리해보았다. 배는 비극
적인 사고를 맞이해서 도저히 수리할 수 없는 모습으로 빙하 위에 집
어던져졌다. 사고 당시에 많은 선원들이 죽었겠지만 생존자들도 있었
다. 그들은 불을 피워 몸을 녹이면서 생존 수단을 강구해보았을 것이
다. 거기서, 썰매를 제작하자는 의견과 보트를 이용하자는 의견이 상
충했을 것이다. 싸움이 벌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 죽음을 당한 다
음에 썰매가 제작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배에서 꺼낼 수 있는 것들
을 다 꺼내어 썰매에 실은 다음 이곳을 떠나갔다. 이시도는 그 추리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썰매? 흐응. 이 근처의 지리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썰매를 타
고 대륙으로 건너갈 수 있는 장소가 있나 보지요? 그렇다고 해도 그건
너무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설원에서는 식량을 구할 수 없어요. 보트
를 타고 가야 낚시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북부 뱃사람들은 어떻
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로서는 그런 바보 같은 의견은 도저
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차라리 한정된 보트 승선 인원 때문에 싸움
이 났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걸로 싸움이 난다고요?"
신차이는 이시도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증거는 추론을 뒷받
침하고 있지만 그 추론은 보편적인 이성을 뒷받침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 때 할슈타일 후작이 입을 열었다.
"대륙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보트가 낫겠지."
"뭐요?"
이시도는 불퉁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하지만 이시도는 할슈타일 후작
이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그 대답을 알아차렸다. 이시도는 기막힌 어
투로 말했다.
"아니, 그럼 그들은 북쪽으로의 여정을 계속했다는……?"
"그거라면 썰매가 낫지."
선원들은 잠시 아연한 표정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았다. 이시도
가 그들 모두의 심정을 대표해서 말했다.
"그러고도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할슈타일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후작은 그들은 죽을 리가 없다는
것을, 추위와 기아와 혹한이 그들을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을 선원들에
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후작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신차이는 설원의 지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평선을 향해 뻗어
가고 있을 테지만 눈 아래에 묻혀 보이지는 않는 썰매자국을 추적하듯
이. 잠시 후 신차이는 무겁게 말했다.
"귀함한다."
레드 서펜트로 돌아온 다음 신차이 선장은 할슈타일 후작과 미, 그리
고 쳉을 선장실로 불러들였다. 쳉은 신차이가 어떤 말을 할지 알고 있
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말일지는 떠올리지 못했지
만, 어쨌든 쳉은 신차이가 이대로 돌아간다고 말했을 때도, 미가 배에
서 내리겠다고 말했을 때도 놀라지는 않았다.
신차이는 묵묵히 미를 바라보다가 쳉에게 말했다.
"미 양은 내리면 죽을 겁니다. 미 양 혼자서는 여기서 몇 시간도 버
티지 못할 거라고 전해주시오."
"혼자는 아닐 거야."
신차이는 이 말이 쳉이 아닌 할슈타일 후작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
에 조금 의아한 기분을 받았다. 신차이는 후작을 보기에 앞서 쳉의 얼
굴을 똑바로 보았지만 '당신이 그녀의 연인 아니었소?' 쳉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신차이는 후작을 쳐다보았다.
"당신도 하선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에 대해 감사하겠네."
"그렇다면 말을 바꾸지요. 당신들 두 명은 여기서 몇 시간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신차이는 솔직히 기대하고 있었지만, 쳉은 '두 명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신차이는 더욱 깊
어지는 의아함에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헛기침을 한 번 한 다음,
신차이는 후작을 향해 조용하지만 엄숙한 경고를 담아 말했다.
"나는 승선원의 신변을 책임져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선장입니다.
당신들이 하선한 다음에야 무슨 짓을 하든 마음대로지만, 하선하는 그
시점까지는 당신들의 목숨은 당신들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건 내 책임
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책임에 따라 당신들의 하선 요구를 수락하거
나 거절할 수 있습니다."
고개를 조금 떨구고 있던 쳉의 머리 속으로 하나의 문장이 흘러지나
갔다. 하지만 늦게 내밀어진 그 손길은 오래 가지 못하겠지. 이제
곧…… 쳉은 생각했다. 신차이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쳉은
자신의 생각에 만족했지만, 그 생각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
었기에 곧 불만족스러워졌다.
후작이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 하선하겠습니다."
신차이는 불퉁한 얼굴로 미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미는 잠시 옆을 바
라보았고, 그 다음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오늘 안일지도 모르겠어요."
신차이는 이번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미는 다시 한번
아달탄을 바라본 다음 말했다.
"아니, 조금 후라고 말해야겠네요."
신차이는 저 아가씨는 나를 놀리는 거요? 에 해당하는 말을 쳉에게
할까 생각했다. 바로 그 때 갑판 쪽에서 들려온 이시도의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아니었다면 신차이는 별 무리없이 그 말을 쳉에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차이는 목검을 쥐며 벌떡 일어서다가 미의 얼굴
을 쳐다보았다. 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달탄은 귀가 좋거든요. 이제 마지막 조력자께서 오셨군요. 그림
오세니아, 모든 인간들의 강력한 아버님이여. 감사합니다. 이제 나가
보실까요? 미도 그 분이 누구일지 궁금해요."
엑셀핸드는 이끼 낀 언덕에 앉아 빙해의 바다에 떨어지는 노을을 바
라보고 있었다. 이곳의 바람은 별나다 할 정도로 거칠었고, 그의 수염
한올 한올을 파고드는 바람에 엑셀핸드는 곤혹스러워했다. 앞머리가
제멋대로 날리는 것을 거칠게 쓸어넘긴 다음, 엑셀핸드는 텁텁한 목소
리로 말했다.
"아프나이델은 어떤가, 이루릴."
그의 옆에 서있던 이루릴은 역시 머릿결을 쓸어넘긴 다음 먼 해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돌멩이를 바다에 투척하고 있군요. 저것은 그림 오세니아를 대상으
로 감행하는 폭력인 것일까요? 그가 왜 그림 오세니아에게 비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아냐. 그냥 울적해서 하는 짓일 거야. 별 의미 없는."
"아아, 저기엔 별 의미가 없나요?"
"그래. 저 종족들이 하는 일의 상당 부분이 그러하듯."
엑셀핸드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이루릴을 올려다보았다.
"자넨 알고 있었나?"
엘프에게 질문하는 방식으로는 좀 부족한 방식이었지만 이루릴은 엑
셀핸드의 질문을 이해했다. 더군다나 이루릴은 그 질문에 질문으로 대
답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아프나이델은 그렇게 의심하고 있던가요?"
"흐음. 어떻게 짐작했지?"
"글쎄요. 한 드워프가 한 엘프에게 바람이나 쐬러 언덕에 올라가자고
말한다면, 그 산책이 산책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은 쉽게 짐작
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드워프에게는 산책의 취미가 그렇게 많지 않
고, 엘프와 더불어 행하는 드워프의 산책은 더욱 넌센스라고 여겨지네
요."
엑셀핸드는 끙 하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이루릴은 살폿 웃었다.
"정직하게, 드워프답게 말씀하세요."
"자네 말이 옳아."
"알고 있었냐고 물어보신다면, 아니라고 말하겠습니다. 예감이 있었
냐고 물어보신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겠습니다."
"예감이라. 쳇. 좀 쉽게 말해보겠나."
"그녀는 이 북쪽으로 오며 점점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요. 그
녀는 이 북쪽에 다가왔을 때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불안을 느낀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여정 전부가 거꾸로 보
이더군요."
"거꾸로 보였다고?"
"예. 저는 인간이나 드워프들처럼 시간의 전후에 크게 신경쓰는 종족
은 아니니까요. 드래곤 로드께서 왜 당신들에게 자신의 여식을 맡겼을
까요? 당신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시간순서는 이렇겠지요. 드래곤 아일
페사스는 당신들과 함께 여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신들은 이 북쪽까
지 찾아왔다. 하지만 엘프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북쪽까
지 찾아오기 위해, 드래곤 아일페사스는 당신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아아!"
엑셀핸드는 등 뒤에서 들려온 신음소리에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그들의 등 뒤에 머쓱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제레인트와 에델린,
그리고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그란, 하늘을 쏘아보고 있는
운차이, 방글방글 웃고 있는 네리아, 감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파하
스,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돌맨 등이 주욱 서있는 것을 보고는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다.
"어, 어떻게 너희놈들 전부 다……?"
"산책나온 거야."
운차이는 강철같은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지만 제레인트는 훨씬 정직
했다.
"아, 하하. 예. 음. 이루릴 양도 말씀하셨지만, 드워프가 엘프에게
산책이나 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괴상하게 여겨졌기에 따라와본…… 엑
셀핸드. 그렇다고 그런 표정을 짓지는 마세요. 거짓말이 능숙하지 못
한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엑셀핸드는 벌컥 화를 내며 파이프를 피워물었다. 그 사이에 제레인
트는 이루릴에게 다가섰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드래곤 로드께서는 아일페사스를 보내어 이 사
태에 대처하게끔 하신 건가요?"
"시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존재의 첫번째 이유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께서 모시는 테페리만 해도 그렇겠지요. 테페리께서는 갈림길의
신이십니다. 하지만 갈림길은 시간의 문제이지 않나요? 걸음을 멈췄다
면, 앞에 갈림길이 몇 개가 있든 아무 상관이 없지요."
"그건 이해합니다."
"시간은 모든 신들의 존재의 첫번째 원인이겠지요. 그렇다면 인간이
시간을 멈추려고 마음먹었을 경우, 신들로서는 대처할 방법이 없겠지
요. 가장 강력한 신 그림 오세니아께서 마지막으로 미 양을 도왔지만
그 강력함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이 시점에서 미 양
을 도울 종족은 하나밖에 남지 않아요. 세상에 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의 종족, 아직까지도 자신의 별을 가지고 있는 종족……"
"아아, 드래곤!"
이시도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단어의 무게에 헐떡거렸다. 그 단어를
입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이시도가 기울였던 노력은 가공한 것이었다.
그래서, 불쌍하게도, 이시도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알아차린 이
름을 뒤늦게 말하게 되었다.
"골드 드래곤!"
순백의 빙산과 검푸른 바다 위로, 골드 드래곤의 황금빛 거체가 춤추
며 내려오고 있었다.
================================================================
정말 오래간만에 막걸리 마셨네요. 속이 뒤집어집니다. 윽윽윽. 질문
이라… 흐음.
1. 타자님은 축구 좋아하십니까?
글쎄요. 좋아하는 편입니다.
2. 타자님의 집에는 책이 몇권이나????
얼마 없군요.
3. 타자님의 취미는?(술마시기 빼고요오!)
게임이나 담배피기…?
4. 마지막으로.. 타자님의 몸에 득실거리는 회충의 수를 세어본다면?
…질문도 다른 모든 말처럼, 질문하는 사람의 품위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님, 죄송합니다. 이 시간에 올릴 거라고 말씀드리면 기다
리실 것 같아서.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20395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5-10 01:31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11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11.
승강구를 뛰쳐나온 신차이는 문득 사위가 누르스름하다는 느낌을 받
았다. 온통 흰 북해의 바다에는 눈이나 얼음 때문에 많은 백색 반사광
이 넘쳐난다. 따라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푸르스름한 밝은 빛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주변은 마치 사막에 온 것처럼 누르
스름한 빛으로 가득했다. 하늘을 본 신차이는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백로 같군. 처음 본 순간 신차이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드래곤을 처음 본 것이 아니다. 이제리스의 서펜트와는 직접 싸
워봤고, 블루 드래곤 지골레이드의 강습에 가까운 방문도 받았었다.
하지만 골드 드래곤은 그들과 또 달랐다. 골드 드래곤은 커다란 황금
의 날개를 좌우로 펼쳐 하늘을 가린 채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긴
오른쪽 발은 아래로 뻗고 왼발은 살짝 굽힌 모습이었다. 신차이가 그
모습에서 백로를 떠올린 것도 당연하다. 다만, 지금 저 골드 드래곤에
게 백로의 비유를 덧붙인다면 그 발 아래의 레드 서펜트호에는 종이배
의 비유를 붙여야 된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러나 선원들은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 윤곽을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든 골드 드래곤의 황금빛의 몸에서는 빛이 가득 뿜어져나와 주위의
빙산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드래곤의 발만 닿아도 레드 서펜
트는 간단히 침몰해버리겠지만 선원들은 동공을 파고드는 황금빛의 위
엄에 질려버렸다.
그리고 골드 드래곤의 한쪽 발이 메인 마스트의 꼭대기에 닿았다. 골
드 드래곤은 그렇게 섰고, 배 위의 누구도 사기 같다는 생각은 떠올리
지 못했다.
그리고 드래곤은 느닷없이 사라졌다.
지골레이드의 예를 이미 당했던 선원들은 재빨리 그들의 선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바이서스어로 구성된 비명소리는 그들의 머리
위로부터 들려오게 되었다.
"우어어! 아, 아빠! 우와아! 너무 높아요! 배가 손바닥만 해!"
레드 서펜트 호의 씩씩한 선원들은 씩씩하게 고개를 다시 들어올렸
다. 메인 마스트의 꼭대기에는 조그마한 블론드 소녀가 필사적인 자세
로 돛대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저 높이에 서면 배는 자신의 두 다
리 사이로 조그맣게 흔들리는 나뭇조각처럼 보이지. 이시도는 그런 생
각을 떠올리고는 만족해했다. 저 소녀의 비명소리는 합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시도는 다시 입을 벌렸다. 저 소녀는 뭐지?
그러나 신차이는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골드 드래곤이십니까?"
돛대 위로부터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신차이의 말에 대답했다.
"저는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의 이름을 계승
하는 자, 맙소사, 드래곤 살려!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두번째 목소리
이자, 오아, 말도 안돼! 드래곤들의 첫번째 목소리, 드래곤의 별의 보
호자, 우와, 너무해! 드래곤 로드의 딸 아일페사스야! 살려줘요!"
"……이시도군. 구해드리도록. 내 솔직한 심정으로는 드래곤께서 추
락사하시는 진귀한 광경을 보고싶네만."
이시도의 날렵한 손길에 의해 아일페사스는 안전하게 레드 서펜트의
갑판 위에 서게 되었다. 헐떡거리던 호흡을 간신히 가다듬은 아일페사
스는 주위의 선원들의 면면을 둘러본 다음 위엄있게 행동하는 것을 포
기하게 되었다. 심통스러운 얼굴로 투덜거리던 아일페사스는 선원들
틈에 끼어 서있는 쳉과 미, 아달탄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일페사스는
미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미는 미소띈 얼굴로 아일페사스를 마주보았
다.
"턴빌에서 봤지. 너에요?"
미는 잠깐 머뭇거렸다. 옆에 서있던 쳉이 나직한 목소리로 아일페사
스의 바이서스어를 번역해주자 미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드래곤이시네요.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만."
쳉은 미의 헤게모니아어를 재빨리 바이서스어로 통역했다. 아일페사
스는 눈꺼풀을 크게 깜빡였다.
"당연? 뭐가 당연한데?"
"어렴풋이…… 마법사 아니면 드래곤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미는 마법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어요. 그 때 턴빌에서도 마법사를
보았지요. 그래서 마법사 쪽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감히 드
래곤을 직접 뵐 거라고 믿기는 어려웠거든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네요. 첫번째는 당신이 저에게 뭔가를 설명해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 두번째는 여기 이 청년의 통역 실력이 엉망진
창이라는 것. 어느 쪽이니?"
쳉은 머쓱하게 웃지도 않고 억울하다는 표정도 짓지 않은 채 충실하
게 아일페사스의 말을 통역했다. 미는 커다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두 가지 대답이 있어요. 지금의 이 인연을 설명할 자는 세상에 없다
는 것, 그리고 쳉의 통역 실력은 미로서는 알 수 없다는 것. 미는 바
이서스어를 모르니 쳉이 똑바로 통역하는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네
요."
"흐음…… 알았어요. 자,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미는 고개를 돌려 빙하 위에 쓰러져있는 배와 그 너머 설원을 바라보
며 말했다.
"북으로, 컴퍼스의 바늘이 향하는 그곳으로 갑니다."
레드 서펜트의 선원들은 그들에게 느닷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래곤의 방문은, 그것이 두번째라고 해서 익숙해지는
종류의 사건은 아니었다. 그들은 미나 아일페사스, 혹은 쳉이나 후작
중 누구라도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해주길 원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아일페사스의 방문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
다. 하지만 미는 부지런히 짐을 챙기고 있을 뿐이었고 쳉은 그런 미를
도왔다. 후작의 경우는 뱃전에 걸터앉아 북쪽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
일페사스 역시 미와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입을 다문 채 후작의 옆에
앉아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선원들은 간절한 시선으로 신차이
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신차이는 헛기침을 하며 아일페사스에게 다가섰
다.
"실례하겠습니다. 전능한 드래곤의 하나뿐인 지배자 드래곤 로드의
이름을 계승하는 자,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두번째 목소리, 드래곤들
의 첫번째 목소리, 드래곤의 별의 보호자, 드래곤 로드의 딸 아일페사
스 님."
"질투난다."
"네?"
"전 그거 외우는데 사흘 걸렸거든. 그래서 너한테 질투나나봐요."
"그러십니까. 어쩐지 많이 늦은 소개입니다만 저는 본함의 선장인 신
차이 발탄이라 합니다."
"신차이? 운차이 아빠야?"
"아뇨. 그의 사촌형입니……"
싱긋 웃으며 대답하던 신차이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다. 아일페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신차이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그를 아십니까?"
"너라면 잊겠어요? 그런 눈에 그런 목소리에 그런 표정에 그런 성질
에 그런 말버릇을 한 사람이라면, 우에에. 한번만 만나도 죽을 때까지
못잊을 거에요. 그런데 저는 몇날며칠을 같이 보내었는지 셀 수도 없
어. 그러니 어떻게 잊겠어?"
"동명이인인 것 같지는 않군요…… 아일페사스 님께서 말씀하시는 자
는 확실히 저의 사촌동생인 듯합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탄느완."
"네?"
아일페사스는 배 밖으로 내놓은 다리를 흔들어대었다. 어느새 신차이
와의 대화에 흥미를 잃어버린 것인지 건성으로 대답하는 기색이 역력
했다."
"너 출발하고 조금 뒤에 우리가 도착했거든요. 탄느완에는 더이상 배
가 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더이상 추적할 수 없었고…… 그리고 저는
폴리모프했어. 내가 하려고 했을 땐 잘 되지도 않았던 폴리모프인데,
어떻게?"
"드래곤의 뜻일 거요."
느닷없이 할슈타일 후작이 입을 열었다. 아일페사스는 동그래진 눈으
로 후작을 보다가 말했다.
"너 말 할 줄 알았어요?"
"그렇소."
"그럼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할 수도 있겠네? 드래곤의 뜻이라니?"
할슈타일 후작은 멍한 얼굴로 북녘 하늘을 바라보다가 대수롭지 않다
는 듯이 말했다.
"나는 드래곤 라자요."
"뭐, 너, 네가 라자라고요? 거짓말! 저는 라자를 알아볼 수 있을 거
야. 드래곤이니……까요."
아일페사스는 말꼬리를 흐렸다. 할슈타일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는 옆에 앉아있던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아일페사스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해츨링이야. 다시 고개 돌려요!"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일페사스가
낮은 소리로 궁시렁거리는 것을 무시하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드래곤 로드의 후계자요. 드래곤의 뜻이 당신을 통해 구현되
는 것은 당연하지. 아일페사스가 폴리모프하려면 불가능할지는 몰라
도, 드래곤이 폴리모프하려 했다면 폴리모프하는 걸 거요."
"난 싫어."
아일페사스는 잔뜩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대화에서 제외되
고 있던 신차이가 놀랄 정도로 시무룩한 목소리였다.
"너 라자니까 제 마음 읽을 수 있지? 내가 해츨링이라고 해도요. 라
자니까, 응? 그렇잖아요?"
"계약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실 테지요."
"그럼 하자. 제 마음 좀 읽어봐줘. 전……"
"잘 모르는 모양이군요. 그건 죽을 때까지의 계약이오."
"어, 뭐, 둘 다 동의하면 계약을 취소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까……"
"말뜻이 잘못 전달되었군. 그건 죽을 때까지의 계약이오. 따라서 나
는 계약할 수 없소. 이미 죽었으니까."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할슈타일 후작의 옆얼굴을 올려다보
았다. 하지만 후작은 얼음으로 깎아만든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북쪽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일페사스는 천연덕스럽게 오른손을 들어올
려 후작의 가슴을 짚었다. 후작의 입매에 약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그
의 심장박동에 집중하고 있던 아일페사스는 보지 못했다. 고개를 갸웃
거리던 아일페사스는 다른 시도를 해보기로 결심하고는 손을 조금 옮
겼다. 그 결과, 할슈타일 후작은 미친듯이 웃어대었고 신차이는 바람
처럼 몸을 날려 후작의 어깨를 붙잡아야 했다. 뱃전 아래로 떨어질 뻔
하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은 후작은 눈물을 찔끔거리며 아일페사스를
쏘아보다가 고함을 빽 질렀다.
"무슨 짓이오!"
"간지럼 타네요, 뭐. 살아있는걸?"
"간지럼 타는 것이 생존의 조건이면 생활의 조건은 뭐요!"
신차이는 아일페사스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 예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아일페사스는 참 이상한 것도 다 물어
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몰라? 웃는 거지. 이렇게. 하하하!"
할슈타일 후작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활짝 웃고있는 아일페사스를 바
라보았다. 갑자기 후작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아일페사스를 바라보던
후작의 얼굴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후작의 입
술 가장자리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 하하, 하하……"
"하하하!"
신차이로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신차이는 도대체 저 둘이 왜
저렇게 미친듯이 웃고 있느냐는 이시도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무지
를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 사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대답을 해보였다.
그는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이건 그 드래곤의 목소리 같은데. 왜 저렇게 웃고있는 거지?"
쳉은 선실 천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미는 어깨를 으쓱이
고는 배낭을 들어올렸다.
"미 짐 다 쌌다. 나가자."
"음…… 내 짐 싸는 것은 안도와줄 생각인가 보군. 알았어. 먼저 나
가. 짐도 별로 없으니 곧 나가지."
"응? 무슨 짐을 챙기겠다는 거야?"
자신의 빈 배낭을 들어올리던 쳉은 미의 말에 동작을 멈추고는 고개
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미가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려 애쓰고 있었다. 쳉은 손끝이 싸늘해지는 기분을 느꼈
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울림도 없었다.
"무슨 의미지?"
쳉의 얼굴이 굳어지자마자 미는 억지표정을 짓는 것을 포기했다. 미
는 혀를 낼름하고는 말했다.
"헤, 잘 안된다. 응. 짐작하는대로."
"같이 가겠어."
"아니. 쳉은 같이 안가."
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미의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미
는 그 시선을 회피하며 벽을 향해 말했다.
"쳉은 아달탄을 데리고 신차이 선장님과 함께 탄느완으로 돌아가는
거야. 미는 후작님과 드래곤과 함께 파를 뒤 아가고."
"싫어."
"떼쓰지마. 쳉은 오늘 저녁도 되기 전에 죽을 거야. 내일 아침까지는
절대로 불가능하지. 잘 알 텐데. 미는 너무너무 관대해서 쳉의 어떤
모습도 수용할 수 있지만 얼어죽어 딱딱해진 모습은 수용 못할 거야.
아달탄도 마찬가지고. 분명히 말해줬지? 쳉은 아무 도움이 안될 거라
고."
쳉은 여전히 아무 움직임도 없이 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지
도, 가로젖지도 않았다. 미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미는 자신의 목 옆에 검을 세워들었다. 마치 자살하려는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미는 자살하는 대신 자신의 머리카락 몇 올을 잘
라내었다. 다시 검을 꽂아넣은 미는 고개를 돌려 쳉의 오른손을 바라
보다가 그것을 잡아올렸다. 쳉의 오른손은 마치 무정물이라도 되는 것
처럼 미에 의해 들어올려졌다. 큼직하고 두꺼운 그 손을 간신히 받쳐
든 미는 잘라낸 자신의 머리카락을 그 손가락에 감아주었다.
"별로 쓸모도 없는 거지만…… 엘프들처럼 활줄을 만들기엔 너무 작
고. 에이, 몰라. 옷 기워야 되는데 실이 모자라면 이어 써라. 말이 안
되나? 음.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눈물 콧물 다 나오려고 하네. 주먹
꼭 쥐어. 풀리려고 하잖아."
미는 쳉의 손가락을 하나씩 굽혀 주먹을 쥐어주었다. 쳉은 입을 열려
고 노력했고, 간신히 잔뜩 쉰 목소리나마 말 같은 것을 만들어내었다.
"미."
"사랑해."
미는 옆에 내려두었던 배낭을 들어올리고는 그대로 쳉의 옆을 지나쳐
문을 향해 걸어갔다. 쳉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서있었다.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고나서, 쳉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그 주먹을 들어올려 힘껏 깨물었다.
================================================================
바람의 마도사의 김근우 님이 마침내 돌아오셨군요. 기쁜 일입니다.
악랄한 연재지연에도 불구하고 구박 없이 항상 즐거운 메모 남겨주시
는 **님께 감사드립니다.번 호 : 20396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5-10 01:31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12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12.
드래곤 솔져 에카드나는 땅에 세워둔 타워 실드 위에 왼손을 얹고 오
른손에 쥔 거대한 검은 비스듬히 늘어뜨린 채 무관심한 시선으로 전방
을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솔로쳐는 에카드나의 등 뒤에 서있었기에
무관심한 시선 어쩌고 하는 부분은 그의 추측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
서 에카드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의 앞쪽으로
걸어갈 수도 없었다. 그가 앞으로 나설 경우 에카드나는 점잖지만 단
호한 태도로 솔로쳐의 전진을 막을 테니까. 그래서 솔로쳐는 에카드나
의 넓은 어깨 너머로 데스나이트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솔로쳐의 이런 위치 때문에 그뿐만 아니라 데스나이트들도 실
망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데스나이트들은 에카드나의 어깨 너머
로 보일락말락한 솔로쳐와 대화를 나누어야 된다는 것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데스나이트들은 에카드나에게 끔찍한 시선을 보내며
옆으로 비켜서라는 무언의 요구를 보내고 있었지만 에카드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데스나이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용용아아병병. 너너의의 주주인인을을 모모시시는는 태태도도에에
대대해해 지지적적하하고고픈픈 바바가가 있있다다만만."
"말해봐."
"제제대대로로 교교육육된된 아아랫랫사사람람은은 윗윗사사람람이이
대대화화를를 나나누누고고자자 할할 때때 그그 앞앞을을 막막아아서
서지지는는 않않는는 법법이이다다."
"난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어.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서. 그래서 난 나
름대로 너희 흉측스러운 놈들로부터 내 소환자를 보호하는 방법을 궁
리해야 하지. 그리고 이것은 그 궁리의 결과이고."
"우우리리는는 기기사사다다. 불불명명예예스스러러운운 암암습습은
은 선선호호하하지지 않않는는다다."
솔로쳐는 알지 못했지만 에카드나의 얼굴에 표정이 떠올랐다. 에카드
나는 데스나이트를 향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불명예에 대해 말하고 싶다면, 너희들은 거기서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너희들의 그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명예라는 것에 똥칠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겠다."
"무무엄엄한한 놈놈!"
"꺼져라! 더러운 어둠의 기사들. 시무니안의 풍요로운 가슴에 올려진
너희들의 발을 치워라, 이 빛의 땅에 더이상의 불명예를 끼치지 말라,
너희들이 있어야할 저주와 슬픔으로 돌아가라!"
데스나이트들은 진짜 화가 났고, 자신들이 화를 낸다는 사실에 더욱
분노를 느꼈다. 그들을 모욕하고 있는 것은 고작 용아병 한 명에 불과
하다. 그런 하찮은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데스나이트들
을 반쯤 돌아버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100기의 데스나이트가
1명의 용아병을 상대로 검을 들 수는 없었기에 데스나이트의 분노는
무한대로 증폭되고 있었다. 그 때 데스나이트들 중 하나가 오른 주먹
을 들어올렸다. 데스나이트들의 소란이 잦아들자 데스나이트는 에카드
나에게 말했다.
"아아버버지지 드드래래곤곤과과 어어머머니니 시시무무니니안안의의
참참된된 아아들들 드드래래곤곤 솔솔져져여여."
에카드나는 묵묵히 입을 연 데스나이트를 바라보았다.
"네네 소소환환자자와와의의 이이야야기기를를 끝끝내내고고나나서서
너너의의 말말을을 고고려려해해보보겠겠다다. 입입 다다물물고고 있
있도도록록."
솔로쳐는 피식 웃었다. 300년 전, 천공의 기사들을 이끌어 기사도의
전통이 바이서스의 기사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몸소 증명
했던 사나이는 무거운 투구 속에서 암울한 눈빛을 불태우며 마법사를
주시했다.
"계계속속 말말하하시시오오, 솔솔로로쳐쳐."
"아아, 고맙군."
"지금 저 분들은 뭐하고 있는 건가요, 딤라이트 경?"
"미안합니다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레이디 케이트 데솔로. 옛말에
이르기를 마법사가 하는 일에 설명을 요구하지는 말라고 하지 않던가
요?"
"아아, 네. 제 불찰이었어요, 딤라이트 경."
딤라이트 이스트필드와 케이트 데솔로는 그럴 수 없이 우아한 자세
로, 거기다가 그 자세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근심스러운 눈빛을 한 채
데이든 평원 멀리서 벌어지고 있는 솔로쳐와 그레이의 회견을 바라보
고 있었다. 완전무장한 딤라이트의 허벅지밖에 오지 않는 키티 데시의
신장 때문에 키티 데시가 말을 할 때는 고개를 한껏 쳐들어야 된다는
것이 그 둘의 유일한 문제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안타까움이나
근심과는 별개로, 그 둘의 모습이 성벽 위의 사람들에게 일종의 희극
적인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래서 켄턴 성벽 위의 경비대원들과 쥬리오 시장, 히든보리 사집관 등
은 보다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데스나이트들과 솔로쳐의 회담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스타파 하빈스는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무스타파는 흉
벽에 기대어 앉아 아무 말 없이 아이라의 머리를 쓰다듬고만 있었다.
아이라는 성벽 아래에 앉은 채 그 거창한 머리를 갤러리 위에 털썩 올
려놓고 있었고 그래서 무스타파는 별 불편없이 아이라의 눈두덩이를
쓰다듬을 수 있었다. 와이번을 바라보는 시선으로는 대륙의 역사상 다
시는 없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무스타파는 아이라의 날카로운 눈을 들
여다보았다. 아이라 역시 와이번이 인간을 바라볼 때 먹잇감을 바라보
는 시선이 아닌 다른 시선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게으르
게 콧등을 움직여 무스타파의 무릎에 부딪혀갔다. 무스타파는 미소를
지었다.
마법사께서는 그레이가 킨 크라이를 되살려냈다고 하셨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아이라.
무스타파는 허리를 숙여 아이라의 넓은 볼 위에 상체를 얹으며 아이
라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내가 너를 살려낼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도……
말을 마친 솔로쳐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레이를 올려다보았다.
"이해하겠나, 그레이? 이해했을 거라고 믿네."
"떠떠나나겠겠단단 말말이이오오?"
"그럼."
"당당신신이이 떠떠나나면면 켄켄턴턴은은 하하루루도도 버버티티지
지 못못할할 거거요요. 딤딤라라이이트트와와 무무스스타타파파는는
우우리리를를 막막아아낼낼 수수 없없소소. 이이들들이이 아아직직껏
껏 켄켄턴턴의의 성성문문으으로로 돌돌격격할할 엄엄두두를를 내내지
지 못못하하는는 까까닭닭은은 바바로로 당당신신 때때문문이이오오."
"우리야, 이들이야? 한 가지로 정해서 말해."
그레이의 입매가 일그러지는 모습은 솔로쳐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것들은 주기는 싫고 받기는 즐겁지만 조언은 그렇지 않지.
조언은 받으면 짜증나지만 줄 때는 즐거운 거야. 자, 인상 펴고 내가
주는 조언을 받게."
"해해보보시시지지."
"내가 떠나면 얼씨구나 좋다 켄턴으로 돌격할 모양이군. 물론 딤라이
트와 무스타파는 그들의 고귀한 검을 들어 자네에게 대항하겠지. 하지
만 자네의 검에 딤라이트와 무스타파, 그들 중 하나나 둘이 쓰러질 경
우 자네의 마지막 희망과 동시에 그들의 마지막 희망도 쓰러지게 될
걸세. 천공의 기사는 끝장이라고 할까."
"무무슨슨 의의미미인인 거거요요."
"자네는 자네 자신의 죽음에 슬퍼하며 되살아났고, 킨 크라이의 죽음
에 슬퍼하며 그 녀석을 되살렸네. 자네의 형제나 다름없는 딤라이트와
무스타파를 살해할 경우 자네나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자명
하지 않겠나?"
그레이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솔로쳐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가 타
고 있는 괴수는 유황 같은 콧김을 뿜어내며 머리를 뒤채었다. 기수는
꼼작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기수와 한몸이 되어있다시피한 괴수는
기사와 말이 그러하듯 기수의 마음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레이
는 회색으로 물든 손을 천천히 들어올려 턱을 쓰다듬었다.
"말말하하고고픈픈 바바가가 뭔뭔지지."
"글쎄…… 이건 그랑엘베르의 도서관을 통채로 암기하고 엘프의 혀를
빌린 시인이라 할지라도 떠올리기 어려운 지독한 비극이라는 말이지."
"비비극극?"
솔로쳐는 침착한 태도로 소맷부리의 주름을 폈다. 하지만 그의 치켜
뜬 두 눈에서 뿜어져나오는 눈빛은 그레이의 미간을 향해 날아가는 화
살 같았다. 솔로쳐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딤라이트와 무스타파는 자네를 용서할 수 없을 걸세. 그리고 자네는
이제 그들과 한 하늘을 이고 있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지. 하지만 자
네나 그들 중 누가 상대를 쓰러트리더라도 상대는 다시 부활할 걸세.
자네들은 서로를 영원히 죽이고 영원히 되살려내게 될 거야."
무스타파의 손등이 격렬하게 떨렸다. 아이라는 불안을 느껴지만 무스
타파의 억센 두 팔이 그 머리를 끌어안고 있었기에 얌전히 있었다. 무
스타파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데스나이트가 된 그레이를 물리쳐야 한다. 하지만 그 마음이 내
진심일까. 한 사람을 완전히 증오한다는 것은 말이 안돼지. 더군다나
그는 내 오랜 친구. 그래. 나는 그를 되살릴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의 검에 쓰러져야 할까? 아냐. 반대의 경우도 마찬
가지다. 그레이가 아무리 데스나이트라 하더라도 그는 이미 킨 크라이
를 되살려내었다. 그는 나를 되살려낼 것이다. 그가 아니라면 딤라이
트라도. 그래, 딤라이트가 있군. 우리 둘이 동시에 죽는다 해도 딤라
이트는 우리 둘을 되살려낼 것이다.
정말 그럴까? 단지 인간의 소망이 그렇게 생사의 경계를 제멋대로 희
롱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마법사의 말을 완전히 믿는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닐까?
아냐. 생사의 경계는 이미 깨어졌다. 얼간이 같으니.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너는 누구냐.
솔로쳐는 하고싶은 말을 마친 표정으로 자신의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데스나이트들이 흠칫했지만 솔로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지팡이를 두
손으로 꼭 쥐고는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힘껏 내리꽂았
다.
지팡이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에 단단히 꽂혔다. 충격이 만만찮았
던 듯, 솔로쳐는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말했다.
"자라서 나무가 될 거야."
"나나무무?"
"몇백년 쯤 뒤, 노인은 손자에게 이렇게 말할 걸세. 마법사 솔로쳐가
땅에 꽂은 지팡이에서 가지가 뻗고 잎이 돋아나 이 나무가 된 거란다.
예의바른 손자는 그 이야기를 믿는다는 표정을 지어줄지도 모르지. 물
론 속으로는 전혀 믿지 않겠지. 그 이야기는 사실이었는데도 말이야.
하하하."
그레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솔로쳐가 무슨 의미로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짐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로
쳐는 두 손을 탁탁 털고는 뒷짐을 지으며 말했다.
"가세, 에카드나."
솔로쳐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에카드나는 데스나
이트들을 충분히 견제하면서 서서히 타워실드를 들어올렸다. 그레이는
갑자기 외쳤다.
"솔솔로로쳐쳐!"
솔로쳐는 걸어가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레이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내가 했던 말 명심하게, 에카드나."
에카드나는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데스나이트를 견제하느라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에카드나는 솔로쳐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레이
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솔로쳐는 천천히 희미해지고 있었다.
봄날의 아지랑이, 사막의 신기루, 겨울날 난로 속의 미약한 불꽃을
통해 볼 수 있는 추억들처럼, 뒷짐을 진 채 걸어가는 솔로쳐의 모습
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그레이는 무슨 말이든지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에카드나는 그레이의 기세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는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용아병답지 않게도 적에게 등을
보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때, 희미해지던 솔로쳐가 낮게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곧 말세가 올 거라고 중얼거리던 작자들이 있었지. 하지만 300년 뒤
의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운걸. 그 작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솔솔로로쳐쳐! 나나는는 모모르르겠겠다다. 당당신신은은 지지금
금……."
"잘 있게, 친구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솔로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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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얼 게시물 번호가 20000대가 넘다니…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됩니
다. 물론 실제 게시물 숫자는 그보다 적지만 이 정도면 천일야화에 뒤
지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하.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20515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5-13 01:56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13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13.
딤라이트는 흉벽을 꽉 움켜쥐었다.
켄턴을 향해 걸어오고 있던 솔로쳐는 그야말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키티 데시는 손뼉을 치며 마법사님이 마법을 부리셨다느니 어쩌니 하
고 있었다. 하지만 딤라이트의 귀에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쥬리오
시장이나 히든보리 사집관 역시 눈을 비비거나 주위를 둘러보거나 하
며 솔로쳐를 찾고 있었지만 딤라이트는 데이든 평원만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그는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솔로쳐처럼 죽었다가 살아난 자
였기에. 솔로쳐는 정말 돌아간 것이다.
그 때 딤라이트의 귀로 무스타파의 거칠고 우울한 목소리가 들려왔
다.
"이 시대까지 드리워지고 있던 안타까움의 닻을 끌어올리고, 그는 수
평선 너머를 향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항해를 시작했군."
"무스타파?"
"그림 오세니아께 가야 해. 너무 무거워도, 닻은 나의 것이지. 그것
을 끌어올리고 그림 오세니아께 가야 해."
딤라이트는 입을 다문 채 무스타파를 바라보았다. 그림 오세니아. 우
리의 아버지. 최초의 익사자. 먼저 죽었던 자. 우리가 갈 길을 가장
먼저 갔던 자. 햇빛도 닿지 않는 수백 길의 바다 아래에서 영원을 꿈
꾸는 자. 우리가 따라가야 할 아버지의 길.
무스타파는 고개를 돌려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딤라이트, 나는 말일세."
"응?"
"일스의 백파이프 노랫소리를 듣고 싶네. 자네는 그걸 참 잘 불었지.
자네에게 이야기를 시킬 것인지 백파이프를 불게 할 것인지를 놓고 선
택하라면 난 300년이 지났어도 후자를 선택할 걸세."
무스타파가 말을 마친 순간 딤라이트는 백파이프를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키티 데시는 입을 헤벌리며 감탄사를 토해내었고 딤라이트는 아무 말
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백파이프와 무스타파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그 백파이프를 알고 있었다. 일스의 수도 바란 탄에
있는 이스트필드 가문의 고풍스러운 저택에 황혼이 찾아들 때, 기사
딤라이트는 바다를 향해 열려있는 정원 끄트머리에 서서 그것을 연주
하곤 했었다. 그리고 기사들의 연회가 열릴 때 그는 모자란 이야기 솜
씨 대신 그것을 연주하여 장미의 기사들을 즐겁게 해주곤 했었다. 그
것은 딤라이트의 백파이프였다.
무스타파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런 식이지. 부탁하네. 한번도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난 자
네만큼이나 그 백파이프와 그 소리를 좋아했었네."
"무스타파. 이건 도대체……"
"부탁하네."
딤라이트는 다시 뭐라고 말하려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떨리
는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지관 위에 얹었다. 챈터를 찾는 손가락이 조
금 주춤거렸지만 딤라이트는 곧 익숙한 손놀림을 기억해내었다. 등은
자연스럽게 꼿꼿이 펴졌고 두 팔은 편안하게 백파이프를 안았다. 잠시
후 딤라이트의 손가락이 조용히 움직이며 켄턴의 성벽 위로 백파이프
의 높고 맑은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때까지도 솔로쳐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쥬리오 시장과 히든보리 사
집관, 그리고 켄턴의 경비대원들은 느닷없이 들려오는 백파이프의 청
아한 소리에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다. 무스타파는 짧은 웃음을 지었
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입에선 일스의 오래된 뱃노래가
흘러나왔다. 낮고 구슬프지만 힘있는 노래였다.
수면 아래, 빛은 희박하고 꿈마저 침침해도
무거운 쇠사슬 끝엔 닻이 매달려있지.
뱃사람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
그것은 나의 것. 보이진 않아도.
아름다운 항구라도 나 영원히 머물진 못할테니,
그리움의 저편에는 수평선이 닿아있지.
그림 오세니아의 아들은 누구나 알고 있지.
그것은 아버지의 것. 나 거기로 돌아가리.
솔로쳐가 사라진 자리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던 그레이는 흠칫하며 고
개를 들어올렸다. 에카드나는 갑자기 들려온 음악소리에 당황했지만
그 당황은 다시 용아병의 감각을 되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에카드나는
데스나이트들을 경계하며 주의깊지만 빠른 동작으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레이는 에카드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켄턴의 성벽만
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거운 닻을 끌어올리고 가벼운 돛을 펼쳐라.
내 정든 항구를 떠나 뱃머리를 수평선으로.
별, 내 아버지께의 길을 가르쳐줄 테지.
바람, 나를 그림 오세니아께 데려갈 테지.
나는 항해자.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나는 항해자. 죽을 때까지. 그리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뭐해요, 파하스? 루미너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건가요?"
하프를 뜯으며 노래부르고 있던 파하스는 네리아를 돌아보며 미소지
었다.
해뜨기 직전의 새벽이라 가장 어두울 시간이었지만 북해의 새벽은 의
외로 밝았다. 산등성이마다 뿌려진 눈과 빙산, 그리고 계곡을 타고 흐
르는 장대한 빙하는 루미너스의 빛을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었다. 짙은
먹구름이 낀 낮보다 조금 어두운 정도의 새벽이었다. 그래서 파하스는
네리아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두꺼운 털옷을 몇 개나 껴입은 것
인지 네리아는 뒤뚱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원래 몸놀림이
가볍고 빠른 터라 그 모습은 마치 바람이 잔뜩 들어간 공이 통통 튀는
것처럼 보였다. 파하스는 하프 위에 손가락을 얹어둔 채 말했다.
"아니외다. 네리아. 시인이 항상 그러하듯 나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
주고 있었소이다. 그런데 어쩐 일로?"
"난 일찍 일어나는 편이에요. 여기서 노랫소리가 들리기에 에델린의
옷까지 걸쳐입고 올라와봤죠."
"아아. 프리스티스 에델린의 옷이었군요. 그래서 그렇게 커다랗게 보
이는 것이로군요."
"네. 그런데 걸어오면서 듣다보니 바이서스어라서 조금 놀랐어요. 헤
게모니아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확하게는 일스 노래요. 바이서스와 일스의 말은 같으니."
"일스? 아아. 음…… 구슬프더군요."
"뱃사람들의 노래라 그럴 것이오. 원래는 백파이프로 연주하는 거지
만 하프로 연주하니 색다른 느낌이 있군요. 하긴 이 고요한 밤바다를
향해 백파이프의 우렁찬 음률을 연주했다간 고래들이 발작을 일으킬
테지요."
"고래?"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하필이면 고래를 거론하는 거냐는
네리아의 눈빛에 파하스는 말없이 손을 들어 밤바다를 가리켰다.
네리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파하스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각종
악기를 다루기에 모두 편리해보이는 파하스의 가늘고 긴 손가락은 탄
느완의 항구 바깥의 열린 바다를 가리키고 있었다. 탄느완도 대개의
항구처럼 파도와 바람의 영향을 적게 받는 곶 안쪽에 있었지만 그들이
서있는 언덕에서는 외해쪽이 잘 보였다. 네리아는 의혹이 담긴 눈으로
바다의 검은 표면을 바라보았고, 다시 파하스에게 고개를 돌리기 직전
'그것'을 발견했다.
고래들이었다. 네리아는 처음에 물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잔잔한
바다 위에 생긴 그 언덕들은 물결로 보기에는 너무 단단했고 고정적이
었다. 네리아는 숨소리를 낮추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고래들은 제왕다
운 몸놀림으로 느긋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갑자기 그들 중 하나가 분
수공을 쳐들며 그 거대한 허파에서만이 뿜어낼 수 있는 물보라를 폭발
시켰다. 달빛 아래 튀어오른 물방울들은 은빛으로 빛나며 천천히 비산
했다. 빛이 스러졌을 때, 네리아는 고래의 고요하지만 우렁찬 호흡소
리를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무 먼 거리였지만 네리아는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아무 말 없이 파하스를 돌아보
았다. 파하스 역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안도했
다.
"고래네요."
"예."
"이렇게 가까이서…… 저는 처음 봐요.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이 북쪽의 바다는 피요르드와 빙하 때문에 수로가 좁은 편이기 때문
일 거요. 그래서 사람이든 고래든 비슷한 바다를 이용해야겠지요. 바
다가 훨씬 더 크게 열려있는 땅에서라면 저런 모습은 보기 어렵겠지
요."
"그런가요. 그런데 고래들은 뭘 하고 있는 걸까요?"
"글쎄요.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혹
저들이 그들만이 알고 있는 심원한 바다의 지혜를, 도저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우리들에게 어떻게든 전해주고 싶어서 안타까워
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저들은 그저 기지개
를 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네리아는 파하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고 파하스는 자조적인 미소
를 지어 보였다.
"그건 고래 사정이라는 겁니다. 내가 알 바가 아니고, 설령 내 멋대
로 의미를 붙인다 하더라도 그건 고래로선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요."
"그런데, 안추워요? 나 같으면 손가락이 곱아서 하프현 못만질 거 같
은데."
"싸늘한 날씨이긴 하군요. 잠깐 기다리시지요……"
"됐어요! 망토 벗지 말아요. 내가 뻔뻔스럽게 그걸 받아 입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건 매너가 아니고 날 모욕하는 거네요."
파하스는 머쓱하게 웃으며 망토 조임쇠에서 손을 뗐다.
"확실히 내 알던 시절과는 다르군요. 내 시대의 레이디들이었다면 보
다 세련되고 복잡한 말로 사양했을 테지요. 아, 물론 네리아 양이 무
례하다는 말은 아니오. 그런 솔직함이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의미이오
이다."
"냐암. 좋다는 말인지 싫다는 말인지."
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파하스의 옆에 주저앉았다. 파하스식 표
현을 빌린다면 '신선함이 동반된 솔직함'이라 할만한 동작이었다. 네
리아는 그야말로 철퍼덕 주저앉아버렸기에 파하스는 망토를 벗어 바닥
에 깔아준다거나 하는 행동을 취할 겨를이 없었다.
"계속해봐요."
"계속? 아아. 하프 말입니까. 그러지요. 그렇잖아도 연습해보곤 하는
곡이 있지요. 그날, 아일페사스의 변화와 그 비행을 보았을 때의 감동
을 노래로 옮겨보려고 고심하고 있소이다."
"아아, 근사했어요. 난 그런 것엔 재주가 없어서 표현 못하지만 당신
이라면 틀림없이 멋진 곡을 붙일 수 있을 거에요. 드래곤은 정말 빨리
자라나 봐요. 사람도 그렇게 자라면 재미있을 텐데."
"빠르다고 하셨소이까?"
"예? 어, 제레인트가 그랬잖나요? 저번에는 조그마한 해츨링이었는데
곧장 그렇게 커다란 어덜트 드래곤이 되었다고."
"시간을 뛰어넘었군요."
요즘 들어 항상 이래. '시간'이라는 말만 나오면 가슴이 섬뜩하다니
깐. 네리아는 동그래진 눈으로 파하스를 바라보았다. 파하스는 하프의
현을 애무하듯 천천히 문지르며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니겠지요. 그럴 순 없을 거외다. 투미한 식견으로
부터 나온 추측을 용서하신다면, 현재가 멈춰서 이 과거의 광대가 따
라붙을 지경인데 현재의 무엇이 갑자기 미래로 가버릴 수는 없을 거라
고 주장하겠소이다."
"그럼 왜 갑자기?"
"좋은 질문입니다. 아, 요즘도 이 말은 똑같은 의미로 쓰이겠지요?"
"네. 나도 모르겠다는 뜻 맞아요. 피-"
파하스는 껄껄 웃었다. 그리고 네리아가 꽤나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아직도 하프를 타려는 생각은 별로 없는 것처럼 손가락을 까딱
거리며 말했다.
"아일페사스는 드래곤 로드의 후계자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그녀의
변신은 드래곤의 의지인지도 모르지요."
"드래곤의 의지?"
"아일페사스가 아닌 드래곤의 의지이기 때문에…… 드래곤의 제왕인
골드 드래곤의 어덜트폼으로 폴리모프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 이 광대
의 용감무쌍한 추측입니다."
"다시 한번 말해주세요."
파하스는 못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반복했고 다 듣고 난
네리아는 태연한 표정으로 한번 더 반복할 것을 요구했다. 세번째로
같은 말을 듣고 난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드래곤의 의지가 뭘까요?"
"아, 좋은 질문입니다."
"하프나 타요!"
"잘 알겠습니다."
파하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네리아는 에델
린의 커다란 겉옷 속에서 최대한 몸을 웅크린 다음 두 무릎 위에 턱을
단단히 묻은 채 귀만 쫑긋 세워 파하스의 연주를 들었다.
파하스는 아무 노래없이 하프만을 탔다. 시인에게서는 보기 힘든 모
습이었지만 이 설국의 풍광 속에 언어나 의미를 더하지 않겠다는 파하
스의 결정은 바람직했다. 네리아 역시 파하스가 아무 노랫말 없이 하
프 연주만 하는 것에 만족했다.
북녘 하늘처럼 맑게 시작되었던 하프 소리는 곧 빙하처럼 무겁고 느
리고 강하게 변화되어 유장하게 흐르다가 부드럽게 변화하여 빙산의
허리를 두드리는 파도가 되었다. 잘디잔 화음을 빠르게 탄주하던 파하
스의 손가락들이 교묘하게 고음부쪽으로 옮겨왔다. 높고 급한 음정이
쉴새없이 몰아쳐 네리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북해의 폭풍이었다.
그렇게 계속되던 속주가 어느 순간 폭발하는 듯한 고요함으로 접어들
었다. 급격하게 찾아온 고요함은 갑작스러운 고음만큼이나 경이적이었
다. 네리아가 숨을 내쉬려는 찰라, 다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파
하스의 손가락은 북해의 바다 위를 외롭게 나는 알바트로스를 그려내
었다.
폭풍이 지나간 북해 위로 알바트로스는 추억만큼이나 긴 날개를 편
채 한없이 고요히 날고 있었다. 산봉우리의 만년설은 유구한 세월 동
안 그래왔던 것처럼 고요히 얼어붙어 있었고 그 계곡으로 빙하의 은빛
줄기는 느닷없는 싱커페이션으로 치닫기 위한 도약대가 되었다. 파하
스가 교묘하게 삽입한 불협화음은 얼어붙은 북해의 바다 위로 날아가
는 알바트로스의 고요한 비행에 긴장감을 조장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대감이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만 같은, 조용하지만 힘찬 낮은
음들.
그리고 드래곤이 수평선을 박차고 일어났다.
"배다!"
제레인트의 고함소리에 네리아는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고 하마터면
커다란 옷자락을 밟으며 나뒹굴 뻔했다. 가까스로 일어난 네리아는 멀
리 보이는 해변을 바라보았다. 언제 나온 것인지 제레인트가 해안에
선 채 수평선을 향해 고함지르고 있었다. 잠깐, 저 모습이 어떻게 보
이지? 네리아는 그제서야 어느새 사방이 꽤나 밝아졌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그런데 배라고?
네리아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수평선으로부터 탄느완
의 항구를 향해 다가오는 배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멀리서도 너
무나 뚜렷하게 보이는 붉은 돛. 네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배를 바라
보았다. 배의 거대한 돛에는 온통 붉은 서펜트의 모습이 꿈틀대고 있
었다. 수평선을 박차고 솟아오른 붉은 서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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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페사스가 왜 갑자기 커졌냐는 질문이 많군요. 후작의 대사를 통
해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흠흠… 모자란 글재주는 글쟁이의 발
을 묶는 족쇄였더라. 하하하.
백파이프 음악을 들으며 읽어주시면 좋겠군요. 아, 이 자리를 빌어서
Scottish drinking and pipe songs 를 선물해주신 **님께 감사합니다.
신나게 듣고 있습니다.(과연 이런 노래에 '신나게'라는 말을 쓸 수 있
는진 모르겠지만.)
번 호 : 20516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5-13 01:57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14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14.
시오네는 관에 걸터앉은 채 묵묵히 천막의 천장을 쏘아보고 있었다.
함은 그녀의 등을 바라보는 자세로 앉아있었다. 이것은 함의 의도는
아니었다. 함은 의자에 묶여 있었고, 관에서 나온 시오네는 함을 흘깃
바라본 다음 그에게 등을 돌린 자세로 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은 함에게도 마음 놓이는 상황이었다. 그 음흉한 카알은 시오네의 관
바로 옆에 함을 묶어놓았다. 시오네가 나와서 얼마든지 쳐다볼 수 있
도록. 그리고 뱀파이어가 쳐다본다는 것은 함에게는 수백 가지의 즐거
운 일 다음에라도 맞이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함은 무조건 안심할 수는 없었다. 함은 시오네가 읽고나서 땅
에 던져버린 쪽지를 흘끔 바라보았다. 원래 시오네의 관 위에 놓여있
던 그 쪽지에는 카알의 필체로 몇 마디의 말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함은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시오네 양의 독보적인 능력을 이용하여
함의 머릿속을 적당히 씻고 수선한 다음 자이펀으로 돌려보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내용으로 다름아닌 세뇌요구였다.
등을 보인 채 앉아있던 시오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죽을 수 있는 것이 자랑스럽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지."
함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오네는 여전히 천장을 쏘아보며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지? 너희들이 매일
같이 하는 행동들의 9할 정도는 내일도 살아있기 위해 하는 일 아닌
가. 자가당착도 이 정도면 너무 심한 것 아냐?"
함은 이번에는 대답했다.
"꽤 비율이 높기는 하겠지만 9할은 너무 심하군."
"말꼬리잡지 말아라."
"어쨌든 '전부'라고 하지 않고 '9할'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너 역
시 그 외의 어떤 부분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 모양이군. 생존이 아닌
생활을 위한 어떤 부분 말이야."
"글쎄. 내가 보기에 그 1할의 가소로운 노력은 나머지 9할 동안 바쳐
지는 너희들의 노동에 어떤 근거나 정당성을 주기 위해 이용되는 것
같더군. 이러이러하므로 살아야 한다.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 슬
픈 자기변명을 하기 위해 1할이나 2할 정도를 소모하는 것이 과연 제
대로 된 삶일까. 너희들이 기르는 말이나 소는 그런 1할의 낭비도 없
이 10할 전부를 완전히 자신의 삶에 바치지."
"그건 삶이라기보다는 생존이고, 적어도 인간에겐 자존심 상하는 이
야기로군."
시오네는 함이 말한 단어에 당황했다.
"자존심?"
"그래. 자존심. 최후의 순간에라도 버리지 못하는 것. 인식하지 못하
지만 언제나 내 속에 있는 것. 이런 비굴한 상황에 빠진 나의 마지막
전우.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다른 무엇도 아닌
자존심을 말하는 것이다. 너는 가지지 못한 그것 말이야."
시오네는 뒤로 돌아 앉았다. 함은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존심 때문인가. 그래서 눈을 돌리지 못하는 거야?"
"그렇다."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경배할 수 있는 이유는 뭐지? 어떻게 그렇게
오만한가?"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성전이니까."
"그 성전이 죽음 앞에 무너지기를 바라는 이유는?"
"멸망은 완성의 귀결이야. 나의 성전은 무너졌을 때 완성된다. 책은
마지막 페이지가 있을 때 책이고 노래는 끝맺음이 있어야 노래다. 나
의 성전은 나의 우상은 아니다."
"머저리."
"뭐?"
함은 대답하면서 시오네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시오네가 눈
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함은 어이가 없어졌다. 뱀파이어가
눈물을? 시오네는 두 눈 가득히 고인 눈물 속에서 함을 바라보며 말했
다.
"핸드레이크. 당신은 정말 머저리에요. 얼간이라고요."
핸드레이크? 함은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도 전
에 시오네는 소맷자락을 들어올려 눈물을 닦아내었다. 소맷자락이 치
워지고 다시 메마른 시오네의 얼굴이 나타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시오네는 이제 차분한 얼굴로 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오네를 마주보았다.
정적은 공포가 되었고 함은 입술을 짓씹었다.
"이런, 안돼……!"
함은 다급하게 혀를 빼물었다. 하지만 깨물지는 못했다. 자이펀의 국
방대신은 혀를 길게 빼문 볼품없는 모습으로 뱀파이어를 마주보았다.
시오네의 깊은 두 눈은 미명도 없이 함의 시선을 흡수했다. 그리고 그
깊은 심연 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함은 그것에 집중하
려는 자신을 억누르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불가항력이었다.
함의 입매가 조금씩 올라갔다.
시오네는 이제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얼굴로 함의 미소를 바라보았
다. 함은 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오네가 그를 알게 된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시오네는 그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
았다. 하지만 함의 미소는 점점 더 과장되고 일그러져 끔찍한 모습으
로 바뀌어갔다. 시오네는 눈을 감았다.
함의 머리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시오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함은 의자에 묶인 채 졸고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아무 말 없이 함의 정수리를 바라보던 시오네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시오네는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러나 시오네
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다이가 그려놓은
마법진이 그녀를 완벽하게 포기하고 있었다.
"그래요. 나올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소."
시오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카알을 바라보았
다. 카알은 시오네를 흘깃 바라본 다음 곧장 함에게 다가갔다. 카알은
함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쥐고는 위로 들어올렸다. 함의 머리는 마치
시체의 그것처럼 묵직하고 힘없이 들어올려졌다. 카알은 그것을 다시
내려놓은 다음 시오네에게 질문했다.
"잘 된 겁니까?"
"그래."
카알은 불만족스러운 작품을 바라보는 것처럼 함을 바라보았다.
"이건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것 같은 모습인데. 이거 봐요. 이 자가
자이펀에 돌아갔을 때 자이펀의 누구라도 이 친구가 제정신이 아닐 거
라고 의심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잘 알겠지요?"
"물론 그렇군."
"예?"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함은 이제 트랜스에 빠져버렸을 뿐이야. 아직
암시 같은 것은 주지 않았다. 더 필요한 과정이 있어."
"필요한 과정……? 아아. 혹 그겁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당신은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니 내가 그를 안으로 밀
어넣어드리면 되겠군요. 그럼 당신이…… 그걸 할 수 있겠죠."
흡혈을. 카알은 내뱉지 못한 단어 때문에 입천장이 깔깔해지는 기분
을 느꼈다. 시오네는 아무 대답이 없었고, 카알은 어깨를 으쓱인 다음
함의 밧줄을 풀고 그를 들어올리기 위해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 때 시오네가 말했다.
"네 자존심은 뭐지?"
"예?"
카알은 함을 다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놓은 다음 시오네를 돌아보았
다. 물론 카알은 시오네의 이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자존심은 뭐냐고 물었다. 조금 전 함이 그러더군. 네놈들은 마지
막 순간까지 버리지 못하는 자존심이 있다고. 하지만 넌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친 것 같아 보이는데. 뱀파이어에게 의뢰해서 적국의 국
방대신을 세뇌시킬 정도면 자존심이고 뭐고 없는……"
카알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단어 그대로의 자존심이고 흔히 견습기사들이
말하는 자존심이군요. 똑바로 설명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해봐."
"당신이 보기에 제가 확신에 차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
까?"
"스스로에게 충실하다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그런 건가? 자신을 경배하고, 자신이 믿는 바를 끝까지 믿고, 주위
에서 요구하는 모든 공정함은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것?"
"그렇습니다. 그 공정함이라는 것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니고, 따라서
제 걸음과 일치한다면 따를 수도 있고 일치하지 않는다면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행복한가?"
"천만에요."
카알은 더없이 명쾌하게 말했다. 시오네는 미간을 찌푸린 채 카알을
보았지만 카알은 여전히 그녀의 이마만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행복합니다."
"무슨 의미지?"
"세상이 요구하는 공정함을 따른다는 것은 정체입니다. 같은 방식으
로 생각하고 같은 일에 즐거워하고 같은 일에 슬퍼하며 살면 살기는
편합니다. 누가 그런 자를 꾸짖겠습니까. 그건 완벽한 호인인 걸요.
호인의 즐거움은 정체가 주는 안락함이죠."
"정체…… 시간의 정지?"
카알은 빙긋 웃었다. 시오네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웃음인지라 카알
의 웃음은 조금 불안스럽게 보였다.
"예."
"너희들은 그렇게 시간을 만들어내나?"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넌 지금 정지된 모든 관습과 정의를 깨버리고 새로운 시간과
사건을 만들어내려는 건가? 다시 시간을 흐르게끔 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두지요."
"왜?"
"왜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시오네는 잔뜩 굳은 얼굴로 카알의 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지? 너 스스로도 말했다. 그런 정체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훨씬
즐겁다고. 그런데 왜 그렇게 정지를 거부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지?"
그 순간 카알은 고개를 내렸다.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시오네는 카알
의 시선을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카알은 시오네의 두 눈을 똑
바로 들여다보며 웃었다.
"자존심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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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멸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스트라다무스 할아버지의
말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요. 작은 나라(코소보)에서 제 3 차 세계대
전이 일어나고, 그 때 동방으로부터 군대가 움직이고.(중국 대사관 폭
격 때문에 중국이 칼을 갈고 있죠.) 거기다가 방송 중단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저지른 모종교집단을 위시한 일부 사이비 종교단체들을 적당히
안티 크리스트 개념에 대입하면… 그럭저럭 세상이 망할 것도 같군요.
하하하.
물론 머릿속의 장난이지요. 타자는 인류의 자존심을 믿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20797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5-19 00:45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15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15.
시오네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카알은 도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는 한숨을 내쉬고는 끙끙거리며 함의 몸을 들어올렸다. 함의 다리가
질질 끌리고 몇 번 엉덩방아를 찧을 뻔한 위기를 넘기며 카알은 마법
진 안으로 함의 몸을 던져넣을 수 있었다.
"휴우. 죽을 맛이군요. 자, 이제 부탁합니다. 나는 다시 나가겠습니
다."
"부탁이 있는데. 나가기 전에 저 불을 꺼줘. 내겐 필요한 것이 아
냐."
"예? 아아, 네."
카알은 테이블 위에서 타고 있던 촛불을 불어 껐다. 천막 안이 캄캄
해졌다. 카알은 어둠 속을 향해 '수고하십시오.'라고 말하려다가 아무
래도 어울리지 않는 행동인 듯해서 그냥 아무 말 없이 나왔다.
시오네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시오네는 함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함은 땅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로 낮게 코를 골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시오네
는 킥 웃으며 소맷자락을 걷어올렸다. 함의 상체를 붙잡은 시오네는
놀라운 힘으로 그를 끌어올렸다. 조금 전 카알이 낑낑거리던 모습에
비한다면 마치 어린애라도 다루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시오네는 관에
걸터앉은 채 함을 가슴에 안았다. 그의 긴 다리가 시오네의 무릎을 넘
어 축 늘어졌다. 시오네는 흐트러진 함의 머릿결을 정돈했다. 얼굴과
목이 하얗게 드러났다.
시오네는 그렇게 조금 함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포로생활로 초췌해진 함의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엔 명가의 자손다운
풍모가 남아있었다. 무수한 세월 동안 인간의 죽음을 보아온 - 그 중
그녀 자신이 인도한 죽음도 상당수 있었다. - 시오네는 함의 얼굴에서
결코 스러지지 않을 표정을 읽어내었다. 그것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대로 가지고 있을 오만하고 강인한 표정이었다. 겸손해 보일만큼 잘
갈무리되어있지만 뱀파이어의 날카로운 눈을 속일 수는 없는 엄격함이
깃든 얼굴.
함의 목을 끌어안은 시오네는 천천히 얼굴을 아래로 숙였다.
"일어나!"
시오네는 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시오네의 날카로운 음성에 함은
눈을 떴다. 자신의 이상한 자세와 어둠 때문에 아직 상황을 알아차리
지 못한 함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껌뻑였고 그 때 시오네의
손바닥이 재빨리 함의 입을 틀어막았다. 함은 몸부림을 치며 반항하려
했지만 시오네는 뱀파이어의 무서운 힘으로 함을 억누른 채 조용히 말
했다.
"가만히 있어. 반항하지마."
시오네의 제안은 깨끗이 거부되었고 함은 죽을 힘을 다해 반항했다.
틀어막힌 함의 입속에서 무서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웁! 으우읍!"
"닥치고 가만히 있어. 네게 이로운 일이야."
웃기지마! 라고 고함지를 수가 없는 함은 대신 두 눈으로 시오네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시오네의 눈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녀의
눈 속에서 욕망이나 잔인한 즐거움을 찾아보려 했던 함은 의아해해야
했다.
"잠시 후 카알이 들어오면 세뇌당한 척해라. 알았지?"
함의 몸이 굳었다. 말귀를 알아들었다고 판단한 시오네는 함의 입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눈치 빠르게도 함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시오네를 올려다보았다.
"좋아. 착한 아이군."
"설명해."
"어려울 건 없어. 아니, 네게는 몹시 어려울지도 모르겠군. 나를 사
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겸손하게 대하면 그만이다. 알겠지? 말은
적게 하고 되도록 미소를 많이 지어라. 얼빠진 녀석처럼 보이는 것이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바보같이 보일 필요는 없어. 의심당할 테
니. 그저 평소에 짓던대로 미소지으면 돼. 알았나?"
"그걸 설명하라는 말이 아니었어. 목적이 뭐지?"
"카알의 계획은 알겠지. 그 계획을 역이용하는 거야. 너를 자이펀으
로 돌려보내주겠다."
"왜?"
"난 지고하신 하탄의 종복이니까. 하하하……"
함은 아무 말 없이 시오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마음 속엔 이것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고 싶다는 마음과 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자세,
즉 젖먹이 어린애처럼 시오네의 품에 안긴 자세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함의 마
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오네는 손을 들어 함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
했다. 함이 욕지기를 참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카알에게 찬성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지."
"무슨 말이지?"
"나도 그의 의견을 완전히 수용해서 세상의 모든 환경에 대해 반항하
기로 결심했다는…… 것 정도일까. 아니, 됐어. 설명할 시간이 아냐.
잘 들어. 나는 이제 너를 물겠다."
함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하지만 함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시오네는 기특하다는 듯이 함을 바라보았다.
"훌륭하군. 네 목에 아무런 자국이 남지 않는다면 당장 들통나겠지.
그리고 카알이 그것을 조사해보지 않을 위인은 아니고. 그러니 목을
좀 내놓아야겠어."
함은 불신감이 가득 담긴 눈으로 시오네를 쏘아보았지만 시오네는 아
무 말 없이 기다렸다. 그녀의 손이 계속해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지만
않는다면 훨씬 쉽게 진정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함은 이를 악물었
다.
"믿어야겠군. 네가 정말로 나를 마실 생각이었다면 이런 계교를 꾸밀
까닭은 없겠지."
"그래."
함은 목을 옆으로 휙 젖히며 말했다.
"물어."
그리고 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 함은 시오네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시오네는 씁쓸한 표정으로 함의 목을 내려다보다가 한 마디
했다.
"개에게 명령하는 것 같군."
함은 입을 악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오네는 고개를 숙였다.
시오네는 그녀의 차가운 입술이 함의 목에 닿았을 때 함이 소스라치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시오네는 잠시 함의 목에 입술을 가져다댄
채 가만히 있었다. 함의 심장은 그것을 감싸고 있는 늑골을 때려부술
듯이 쿵쾅거렸다. 그러나 시오네가 오랫동안 입술만 댄 채 꼼작도 하
지 않자 함은 의아함을 느꼈다.
"시오네?"
그가 고개를 들어올리려 할 때 시오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함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은 시오네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천천히 이를 드
러내었다. 그녀의 이가 목에 닿는 선뜻함에 함이 경직한 순간 시오네
의 송곳니는 함의 살결을 파고들어갔다.
함은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목에 느껴지
는 축축함은 시오네의 입술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날카로운 아픔은
그 송곳니가 살갗을 꿰뚫었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일 테고. 하지만 그
것은 함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견디기 쉬운 느낌들이었다. 정말
약간의 특별함도 없었다.
"불을 켜라."
잠시 후, 시오네는 함을 놓아주며 말했다. 함은 풀려나자마자 마법진
밖으로 뛰쳐나와서는 자신의 목을 문지르며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하
지만 시오네는 옆으로 돌아앉아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목을 쓰다
듬던 함은 손가락 끝에 작은 상처 두 개가 만져지는 것을 느꼈다. 진
득하게 피가 묻어나왔지만 그것은 상처 때문에 흘러나온 피였다. 시오
네는 마시지 않았다.
"사람이 들어오거든 얌전히 의자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아라. 개를 길
러본 적이 있나?"
"……어릴 때."
"주인을 바라보는 개를 흉내내면 될 거야."
"무슨 속셈이지? 왜 나를 돕는 거지?"
"설명할 시간이 아니라고 했어."
시오네는 몸을 더 옆으로 돌렸다. 함은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가 테이
블로 걸어갔다. 등잔에 불을 붙인 함은 의자에 앉으려다가 바닥에 떨
어져있는 구겨진 종이를 발견했다. 시오네가 읽고 던져버린 쪽지였다.
함은 그것을 주워들었다. 구겨진 종이를 펴는 소리가 들리자 시오네
의 어깨가 조금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앉아있
었다. 함은 카알의 필체로 적혀있는 쪽지를 빠르게 읽었다.
쪽지를 다 읽은 함은 그것을 다시 구겨서 던졌다. 그리고 의자에 앉
아서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으고 얌전히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겸손한 동작과 달리 그 얼굴은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더 참지 못
한 함은 나직하게 말했다.
"나를 살려낸 건가, 시오네?"
시오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함은 조금 전 읽고 던진 쪽지의 내용을
곱씹었다.
"복잡하게 써놨지만, 결국 네가 거절하면 나는 별 필요가 없으니 곧
죽일 거란 말이군. 그런데 넌 나를 살려내고, 또 자유까지 주려는 건
가? 들킬 위험을 감수하고 말이지. 왜지? 내가 널 카알에게 팔아넘긴
것을 잊은 것은 아닐 텐데."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캐묻는 화법을 썼다간 당장 들킬 거야, 함.
노예처럼 행동하는 편이……"
"왜 나를 돕는 거지?"
시오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더이상 참지 못한 함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시오네의 등을 향해 걸어갔다. 그 때 시오네의 목소리
가 들렸다.
"한 가지만 말해두지. 다시 앉아."
마법진을 넘어 시오네의 어깨를 쥐려 하던 함의 손이 공중에서 멎었
다. 시오네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함은 손을 끌어당
겼다. 함이 다시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리자 시오네는 천천히 말했다.
"나는 뱀파이어다."
함은 기다렸다.
"네가 죽고, 네 자손이 죽고, 그 이후로 몇 대가 흘러도 나는 존재할
것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언제까지고 너희들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
다. 너희들 인간이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는 모습을. 너희들이 나를
잊고, 뱀파이어라는 것을 완전히 잊는 그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때도 너희들이 돌아보지 않는 그림자 속, 너희들이 잊었던 물건의
뒤편, 잠든 너희들의 창문 밖에서, 나는 너희들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
다."
함은 시오네의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는 농담을
말하는 것도 굳은 결심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오네가 담담히 말
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될 것들이었다. 반영구적인 생명과
어둠 속의 생활, 그러나 생존 때문에 인간의 곁을 떠날 수는 없는 시
오네에게 감시자의 역할은 오히려 당연했다. 시오네는 끝까지 돌아보
지 않은 채 말을 맺었다.
"너희들이 언제까지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킬 것인지를 감시할 것이
다."
더이상 태양은 지지 않는다. 흰 윤곽만 남아있을 뿐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열기를 잃은 태양은 지평선을 따라 흐르듯 움직일 뿐
결코 땅 아래로 사라지지도, 하늘 위로 올라오지도 않는다. 지평선을
따라 굴러가는 하얀 공처럼 보이는, 하지만 그런 태양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은 드물다. 빙점 이하로 얼마나 낮은 온도인지 상상할
수도 없는 극한의 추위 속에서 불어닥치는 강풍은 사람을 선 채로 갈
갈이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바람소리, 귀 속에서 고막을 찢어낼 것 같은.
차가운 기온 때문에 고압대인 극지의 날씨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롭
다. 하루 종일 걸어도 산들바람 한 점 만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극
지의 날씨다. 하지만 때때로 바람이 불어닥치면 공기 중에서 파박거리
는 불꽃이 튀길 정도의 지독한 블리자드가 일어났다. 어쨌든, 산들바
람은 없는 것이다. 무풍이거나 폭풍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블리자드가 불어닥칠 때 인간의 두 발은 비참할 정도로
무력하다.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필사적으로 썰매에 매달렸다. 거추장스러운 짐
으로 여겨진지 오래된 썰매를 부득불 끌고다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다. 가없는 바람의 횡포 앞에서 썰매는 사람들의 닻 역할을 해주고 있
었다. 자다가 바람에 날아가버리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썰매에 몸을
묶고 잠들었고 걷다가 날아가버리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썰매에 매달
리다시피 한 채로 그것을 밀고 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지독한 폭풍
설 속에서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죽을 힘을 다해 썰매에 매달린 채 폭
풍이 잠들기를 기다려야 했다.
"기론!"
도르네이는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턴빌
에서 조그마한 책방을 경영하고 있었고 책을 모조리 불질러놓겠다는
말을 주정거리를 삼아 학자가 되지 못한 자신을 야유하며 동시에 끝까
지 책을 버리지 못하여 책에 기대어 살고 있는 자신을 동정하던 취미
가 있던 기론은 블리자드의 손아귀에 붙잡혀 날아올랐다. 버둥거리는
두 팔은 속절없이 눈밭을 긁어대었고 온몸은 핑그르르 돌았다. 뜻없는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기론은 폭풍설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도르네이가
그를 볼 수 있었던 시간은 극히 짧았다. 눈바람 때문에 시계가 0에 가
까웠기 때문이다.
"기론!"
도르네이가 썰매를 놓고 일어서는 순간 그의 팔을 잡아당기는 손이
있었다. 쥬블킨은 도르네이를 끌어내리며 고함질렀다.
"미친 짓 하지마! 썰매를 붙잡아!"
"기론, 기론이 저기……"
"놔둬! 그는 살아있다. 살아있다!"
도르네이는 끔찍한 충격 속에서 굳어버렸다. 도르네이가 멍한 얼굴로
비틀거리는 동안 쥬블킨은 간신히 그를 썰매 밑으로 쑤셔박을 수 있었
다. 다시 썰매에 매달리며 도르네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죽지 않는다. 그들이 썰매에 실어왔던 음식물은 더이상 손도 대지 않
고 있었다. 갈무리도 제대로 하지 않아 이미 꽁꽁 얼어붙은 그것들은
본래의 목적을 잃은 채 오로지 무게추의 역할만을 하고 있었다. 썰매
가 날려가지 않게 하기 위한 무게추. 그들은 먹지도 않았고 잠들지도
않았다.
신스라이프가 그들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 있었다. 도르네이가 이미
한번 그러했던 것처럼.
쥬블킨은 도르네이의 머리를 아래로 짓누르듯이 하며 악을 썼다.
"살아있어! 되돌아올 거야. 이 폭풍이 지나가면 되돌아온다. 미안한
듯이 웃으면서 되돌아올 거란 말이다!"
눈더미 속에 머리를 쑤셔박으며 도르네이는 급한 기침을 토했다. 입
으로 눈가루가 날려들어와 숨이 막혔고 얼어붙은 옷은 이제 고행대처
럼 온몸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차가워진 몸은 통증을 느끼지
못했고 금방이라도 폐가 뒤집혀 튀어나올 것 같은 지독한 기침을 하면
서도 도르네이의 정신은 오히려 말짱했다.
돌아오지 않아. 사방은 눈을 멀게 만드는 백색의 천지. 그 어디에도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태양을 보고 방향을 가늠하는 것조
차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죽지 않는다. 기론은 죽지 못한 채 방향도
무엇도 없이 영원히 계속되는 이 설원 위를 방랑해야 할 것이다. 폭풍
이 불어닥칠 때마다 그의 발걸음은 뒤죽박죽이 될 테니 이곳에서 빠져
나가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는 온몸이 찢어져 설원 위에
흩어질 그날까지 이곳을 계속 방황해야 할 것이다.
"기로오온! 크훌럭! 쿨, 쿨럭."
그러고보니 해괴하기 짝이 없는 일. 왜 이 땅 위에서 태양은 지지 않
는 것일까. 이곳은 이미 시간이 정지한 땅인가? 그들이 잠들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밤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람이
없는 동안 계속해서 묵묵히 걸어야 했다. 살을 발라낼 것 같은 바람
속을 묵묵히 걸어오는 동안 더이상 허기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먹지
도 자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유령처럼 걷고 있는 그들이 잠시나마 살
아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이런 지독한 블리자드 속에서라는 것은 아이
러니컬한 일이었다.
이건 말이 안돼. 도르네이는 그렇게 규정지었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
을 느꼈다.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돼.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지금
내 몸 위에 덮이고 있는 이 눈송이들은 사실 눈이 아니야. 내가 매달
려 있는 이 썰매 다리는 사실 썰매가 아니야. 난 온몸에 이불을 휘감
고 침대 기둥에 매달려 있는 거야. 그래. 털옷에 덕지덕지 매달리는
눈덩이를 떼어내며 도르네이는 히죽 웃었다. 이것봐. 차갑지 않아. 이
것이 눈이라면 당연히 차가워야 할 텐데 이 눈덩이는 차갑지 않아.
그래. 다 꿈이야. 모조리 꿈이야……
"바람이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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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옛날 애니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에어리어88, 초인 로크 천
년왕국…. 특히 로크가 보고 싶군요. 우리나라에서도 슈퍼맨 로키인지
하는 이상한 이름으로 방영되었지요. 근사한 장면들이 많았지요. 기체
고장으로 대기권으로 불시착하는 우주선 위에 서서 우주선을 조종하는
모습이라던지 100 명의 초능력자와 싸우는 모습, 배양기 속에서 웃고
있는 레이디 칸, 인공행성을 통채로 조종하며 타오르는 항성을 관통하
는 모습…
언제 그런 생각이 드냐고요? '최근'의 '국산'애니를 볼 때입니다. 으
으윽.번 호 : 20798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5-19 00:45
제 목 : [F/W] 기다림의 해변.....16
Future Walker
9. 기다림의 해변…………16.
신스라이프가 일어서서 말했다. 하지만 도르네이는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도르네이는 헤죽 웃으며 신스라이프를 바라보다
가 다시 눈더미 속에 얼굴을 가져다박았다. 차가움은 전혀 느낄 수 없
었다. 눈은 포근했다.
"일어나!"
신스라이프는 도르네이의 뒤통수를 부여잡아 단숨에 끌어올렸다. 머
리가 뽑혀나갈 것 같은 고통을 느껴야 당연하겠지만 도르네이는 짐짝
처럼 끌려올라가는 자신의 몸과 아무 힘 없이 우쭐거리는 자신의 다리
를 보며 킬킬 웃었다. 신스라이프는 기막힌 시선으로 그런 도르네이의
얼굴을 쏘아보다가 옆으로 팽개쳤다. 도르네이는 얼굴에 와 부딪히는
눈더미의 느낌이 너무 아득하다고 생각했다.
신스라이프는 썰매에 주저앉았다.
눈바람이 가라앉자 희미한 연기 덩어리처럼 보이는 태양이 다시 시야
에 들어왔다. 결코 하늘 위쪽으로 오는 일이 없는 태양은 정신착란적
인 모습으로 지평선 위쪽을 게으르게 떠가고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자
신이 원탁 중앙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동그란 지평선, 동그란
태양의 궤적.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썰매를 중심으로 한 눈더미 곳곳
에 파묻혀 꼼짝도 하지 않은 모습으로 있었고, 그 모습이 끝없는 백색
의 벌판에서 유일하게 시선을 사로잡을만한 특이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신스라이프는 분노했다.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었기에 신스라이프는 시간에 신경쓰지 않았
다. 질식해 죽기 알맞은 모습으로 쳐박혀있는 콜리의 프리스트들에게
도 신경쓰지 않았다. 가장 높이 치솟아올라갔던 눈송이 몇 개가 조용
히 떨어진 것을 마지막으로 설원에는 더이상 움직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어졌다.
그래서 신스라이프는 파에게 말했다.
'거기 있느냐.'
'아니오.'
'여기 있느냐.'
'아니오.'
'거기도 아니고 여기도 아니란 말이군. 하긴.'
신스라이프는 발을 조금 움직여보았다. 뽀드득. 높고 둔한 소리와 함
께 발이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신스라이프는 눈의 차가움이 발등에
전달되다가 마침내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발
을 뺐다. 눈덩어리들이 파헤쳐지며 다시 흰 눈 위로 그의 발이 드러났
다.
'당신은 죽을 거에요.'
'사실과 비슷하지도 않은 말이야. 나는 살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을 해
냈다. 그리고 이제 곧 이 모든 일을 완료할 거야.'
"당신은 죽을 거에요."
신스라이프는 자신의 입을 통해 새어나온 파의 말에 당황했다. 그러
나 파는 곧 말했다.
"당신의 입이 아니죠. 제 입이에요."
'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당신의 피조물이 무엇을 원하는지 관찰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창조
자로서 실격이군요."
'원한다고? 넌 아무 것도 원할 수 없어!'
"당신은 무엇을 원하지요?"
신스라이프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파가 자신을 바보
취급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생명이다. 조건없이, 불안없이, 종말없이. 끝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타오르기 때문에 아름다운 생명 그 자체다!'
"그리고?"
'뭐?'
"그리고? 사는 것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닐 걸요. 당신은
본질을 피하고 있군요."
본질이라고? 신스라이프는 당황했지만 그의 당황을 표현할 수 있는
조금의 자유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어느새 그
의 몸은 완전히 파의 지배권 하에 놓여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눈꺼풀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당신은 영원히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사랑?'
"영원히 살기 위해선 영원히 한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 않나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어리석은 처녀 같으니, 소녀의 꿈
같은 걸 말하는 거냐?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고? 사랑만이 무의미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엔 그런 건 없어!'
"당신은 아직도 본질을 회피하고 있군요. 꼭 직접적으로 물어야 하는
건가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파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극히 자연스러웠고 이제 파의 몸은 완
전히 파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울분에 미쳐 날
뛰는 신스라이프를 향해 파는 나직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당신은 영원히 자신을 사랑할 수 있나요?"
신차이는 목검을 지팡이처럼 짚고는 그 위에 두 손을 얹어둔 자세로
보트 위에 똑바로 서있었다. 그리고 탄느완의 부두에 서있던 운차이
역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물결을 헤치던
노들이 정지하고 보트가 부두에 닿자 신차이는 가벼운 동작으로 뛰어
올랐다.
"운차이!"
운차이는 반가운 목소리로 "신차이!" 하고 부르는 대신 재빨리 롱소
드를 뽑아들었다.
칼날이 빠져나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단련된 손놀림은 대단한 것이
었지만 일행들은 몹시 당황해버렸다. 그들은 입항절차를 위해 먼저 내
려온 일등항해사 이시도로부터 이 배의 이름과 신차이와 운차이의 관
계에 대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레인트는 나름대로 추측했다.
"이건 자이펀 전통의 인사법일 거야. 칼을 높이 들어 신차이 만세!
라고 외친다던가……"
그러나 제레인트의 추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운차이는 롱소드를 정확
히 중단겨누기의 자세로 내밀어 신차이를 겨냥했던 것이다. 설령 저런
동작을 인사법으로 채용하고 있는 민족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민족
의 오해를 받아 이미 오래전에 멸망당했을 만한 동작이었다. 그란 하
슬러는 일단 그 자세에 합격점을 준 다음 그 자세를 취한 운차이의 이
유에 대해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신차이는 별로 놀라지 않은 표정이
었다.
"Ahn barkedo."
"Youkchi une ghetta mi fheirja?"
네리아는 고개를 홱 돌린 다음 파하스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파하스
는 곧 숨소리마저 낮춘 채 둘의 대화에 집중하며 그 말들을 통역했다.
"반갑군."
"가문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온 건가?"
"무슨 말이냐."
"내 수급을 가지러 온 거냐고 묻는 거야."
네리아는 기겁하며 파하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이 정확한 통역인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를 보내었지만 파하스는
통역하느라 바빠서 그 시선들에 대해 화를 낼 시간이 없었다.
"수급? 글쎄. 가지고 다니기 귀찮은가? 나도 가끔은 머리를 가지고
다녀야 된다는 것이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말해두겠는데, 난 나를 죽이려드는 모든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아."
파하스는 재빨리 저것은 자이펀식의 관용구로서 상대방을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지 않는다는 뜻임을 설명했다. 설령 자기 자신이라
도 해도 자신을 죽이려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나
신차이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함으로써 파하스의 설명을 무의미한 것으
로 만들어버렸다.
"자살을 거부하겠다는 건가."
"그래.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내 결심을 돌리진 못할 테니 그럴 결심
이라면 포기하시지."
"헤어진지 오래지만, 네 사촌형에겐 꺾을 수 없는 결심이 있을 때 사
용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것을 잊어먹을만큼 오래되지는 않았을 텐
데."
"그 목검이 꺾이지 않는 이상 형의 결심도 꺾이지 않는다는 것은 나
도 잘 들어 알고 있지. 이제리스의 군주에게 특별한 호감은 없지만,
그는 내가 그의 복수를 맡게 된 것에 대해 화를 내지는 않을 거야."
"아주 좋아하겠지. 내가 사촌동생의 손에 쓰러진다면."
"허, 험악한 형제다. 형제가 똑같아."
네리아는 신음을 토하며 낮게 속삭였고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는 동
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길한 예감에 칼자루로 손을 가져가던 그란은
이시도가 태평한 모습임을 발견하고는 의아해했다. 그 때 운차이가 검
을 아래로 내렸다. 운차이는 칼을 다시 꽂아넣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
었다.
"죽일 생각은 없나 보군."
신차이는 부두에 올라선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죽으면 곤란하지. 발탄으로서도, 나로서도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을
바라지는 않네."
그리고 두 사람은 팔을 내밀어 서로를 포옹했다. 희디흰 빙하를 배경
으로 펼쳐진 사촌형제의 상봉은 꽤나 감동적일 수도 있는 모습이었지
만 일행들은 기만당한 느낌 때문에 감동을 느끼기보다는 화를 내고 싶
어졌다. 그 때 그란은 이시도가 태평했던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두 사람에게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란은 쓰게
웃어버렸다.
그들의 닮은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만큼 포옹을 상당히 빨리 해치워
버린 두 사람은 곧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돌아와서 발탄가를 계승해라. 선주연합과 내가 너를 비호하겠다. 몇
년 동안의 유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남해의 별장들 중 하나에서
몇 년 쉬는 걸로 끝내지."
"나는 이미 모든 인연을 끊었어."
"운차이."
"꿈속에서조차 카레한 탑을 본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내
가 돌아간다면 형과 발탄을 곤경에 빠트릴 뿐이야. 죽은 사람으로 취
급해주면 좋겠군."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지." 그리고 신차이는 헤게모니아
어로 말했다. "이곳의 관습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친지들의 대화도 통
역당하는 분위기는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여건은 아니군."
파하스는 붉으락푸르락했지만 네리아는 재빨리 그를 비난하는 눈초리
로 쏘아봄으로써 파하스를 한층 더 깊은 배신감 속에서 좌절하게 만들
었다. 그란이 "가문의 전통이었군." 이라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는
동안, 이루릴은 커다란 배낭을 가볍게 어깨에 걸치며 보트에서 올라오
는 한 키 큰 남자를 발견했다.
"당신이 쳉인가요."
쳉은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을 찾다가 검은 머리의 엘프를 발견하고
는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엘프 아가씨는?"
"이루릴 세레니얼입니다. 잠시 당신과 동행했던 네리아 씨, 운차이
씨, 그란 씨의 친구입니다."
"아, 그러신가요. 말씀 많이 들었다는 말은 못하겠군요."
이루릴은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쳉은 배낭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건 저희들이 잘 나누는 인삿말입니다. 하지만 저 분들과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서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
다."
"그런가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알아보는 것은 쉽더군요."
"쉽다고 하셨습니까?"
"체격과 표정 모두에서 골렘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쳉은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쳉이 벌겋게 변한 네리아
의 얼굴에서 다시 이루릴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이루릴은 차분한 어조
로 질문했다.
"아일페사스를 만나셨나요."
"예."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골드 드래곤께서는 할슈타일 후작과 미와 함께 북으로 가셨습니
다. 저는 도중에 돌아온 것입니다."
"도중에 돌아왔다고요?"
쳉과 이루릴은 고개를 돌렸다. 네리아가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쳉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리아는 재빨리 달려와 쳉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
했다.
"잠깐만요, 쳉!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도중에 돌아왔다니, 헤
어졌단 말인가요?"
"예. 네리아."
"왜, 어째서지요? 왜 그녀를 내버려두고……"
"빙하와 육지 때문에 배가 더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서 미는 하선했
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배와 함께 돌아가라고 하더군요. 저는 상
륙하면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말하면서."
"가, 가라고 해서 왔다는 거에요?"
"예."
"말도 안돼요!"
네리아는 쳉의 셔츠 자락을 거머쥐었다. 그녀는 쳉을 흔들려고 했지
만 쳉의 거대한 체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네리아는 자신의
몸을 흔들며 고함지르게 되었다.
"왜! 당신은 하루도 견디지 못한다고요? 그럼 미는! 미도 마찬가지잖
아요. 왜? 당신들은 헤어지면 안돼요. 돌아오려면 같이 돌아왔어야지
요! 어떻게 혼자 돌아온 거에요. 어떻게!"
네리아는 당신들이 가진 시간은 겨우 4년밖에 없다는 말을 외치려고
했지만 그 때 쳉이 나직하게 말해서 그 말을 삼킬 수 있었다.
"미는 아일페사스라는 그 골드 드래곤이 자신을 도울 거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아일페사스가? 골드 드래곤이니까? 그럼 당신은! 당신은 그녀를 돕
지 않을 건가요?"
"저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하더군요."
네리아는 입을 쩍 벌린 채 쳉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쳉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쳉은 그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네리
아의 어깨를 살짝 잡아 밀어내었고 네리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뒤
로 몇 걸음 물러나게 되었다. 쳉은 천천히 허리를 구부려 발 옆에 던
져둔 배낭을 집어들었다.
"더 할 말이 없다면,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고 싶습니다."
"바쁜 일…… 바쁘다니, 당신에게 무슨 바쁜 일이오?"
쳉은 대답하지 않았다. 쳉은 그대로 배낭을 어깨 위로 거머쥔 채 훌
쩍한 몸을 꼿꼿이 세우고는 일행들 사이를 걸어갔다. 사람들은 그를
위해 비켜주었고 쳉은 그대로 탄느완의 시내를 향해 사라지는 검은 점
이 되었다.
쳉에게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네리아가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쳉은 탄느완의 주민들로부터 삽과 곡괭이, 도끼 등을 빌린 다음 수레
하나에 그것을 싣고는 탄느완의 교외를 주욱 탐사하며 돌아다녔다. 네
리아는 쳉에게 그런 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쳉은 실제로
간단한 몇 마디 말로서 탄느완의 주민들이 자신의 도구들을 기꺼이 내
어놓게 만들었다. 파하스가 고래를 향해 노래를 부르던 언덕 위에 멈
춰선 쳉은 만족하면서 수레를 멈췄다.
그리고 쳉은 무쇠같은 끈질김과 엑셀핸드도 감탄할만한 완력으로 빙
퇴석들 주워모으기 시작했다. 빙하의 흐름이 상류로부터 가져와 빙하
끄트머리에 내려놓는 빙퇴석들은 꽁꽁 얼어붙어있는데다가 거칠고 투
박하다. 물의 흐름과 달리 빙하의 흐름은 돌의 표면을 다듬는 데는 별
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쳉은 묵묵히 그것을 모은 다음 수레
에 싣고 언덕 위로 실어날랐다. 그가 도대체 몇 번이나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때까지도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를 관찰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쳉은 언덕 위에 거대한 돌무더기를 만들어놓은 다음 곧 삽을 들어 언
덕의 얼어붙은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야영자의 지혜가 모두 동원되어 선택된 그 위치는 해풍으로부터 자유
로우면서도 시야가 좋은 근사한 장소였다. 물론 여건이 근사하다는 말
이지 풍광이 근사하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그곳은 횡뎅그레하고 메마
르고 헐벗은 땅이었다.
쳉은 동토를 파낸 다음 거칠고 모난 빙퇴석들을 솜씨좋게 쌓아올렸
다. 말이나 소도 없고 기중기도 없었지만 쳉은 빙퇴석들을 맞물려 튼
튼한 돌벽을 쌓았고 지붕을 올렸다. 돌움막을 완성한 쳉은 다시 언덕
아래로 내려왔고 그 때 쳉의 몰골은 엉망진창이라는 말도 과분할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쳉은 부드럽고 간결한 말씨로 탄느완의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리 어렵지 않게 집기들을 구할 수 있었
다. 취사도구들은 배낭 속에 가지고 다녔기에 쳉이 구한 것은 배낭 속
에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들이었다. 오래된 작은 난로는 원래 배에서
쓰이던 것으로 전직 선장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었다. 대장간의 고철더
미 속에서 아직 쓸만한 연통을 구한 쳉은 잔돈을 조금 지불한 다음 그
것을 수레에 실을 수 있었다. 그외에도 쳉은 쓰레기 취급당하는 많은
물건을 모아들였다. 탄느완의 시민들은 그들이 그렇게 많은 쓰레기들
을 다락방이나 헛간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쳉은 커다란 낡
은 담요를 구했고 우그러진 냄비와 구멍난 주전자와 부서진 책상을 끌
어모았다. 그것은 수레에 실려 언덕 위로 옮겨진 다음 쳉의 손에 의해
이끼로 속을 채운 침대와 잘 펴진 솥과 굴뚝과 선반으로 변했다. 그리
고 쳉 자신도 변해갔다. 그는 제멋대로 자란 수염 때문에 바늘꽂이처
럼 된 턱을 한 채 탄느완의 선원들이 쓰는 두꺼운 방한복을 개량하여
만든 조끼와 바지를 걸치고 맨발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언덕 위에서 발을 다치게 할만한 것들을 세심하게 찾아내어 모두 치워
버린지 오래였다. 쳉은 가지고 있던 것들 중 돈이 될 것을 전부 팔아
치운 다음 그것으로 음식물을 구입했다.
그 시점에서 탄느완의 주민들과 네리아는 그가 무엇을 만드는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흔한 감시 초소 같은 것이 아니었다. 쳉이 잠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 거기에 살 작정을 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
의 눈에도 분명했다.
쳉은 집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를 기다릴 거에요?"
"예."
"만일 그녀가 오지 않는다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그녀에겐 배가 없어요. 못돌아올지도 몰라."
"돌아올 겁니다."
"그렇다면 영원히 이곳에서 기다릴 거에요? 늙어죽을 때까지라도? 아
무 것도 하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고 그저
이곳에서 살며?"
"예."
네리아는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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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우울…
어느 분 말마따나 제목이 '기다림의 해변'이라서 지겹게 느리게 연재
되었던 챕터 9가 끝났습니다. 다음 챕터의 제목은 초인 로크의 추억을
담아 '천년왕국' 정도로 지어볼까 합니다만… 퍼버벅!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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