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骨董品)과 나의 취미생활(趣味生活)(재)
사람들의 취미생활(趣味生活)은 나이에 따라 변한다. 특히 노년기(老年期)에는 더욱 그러하다. 주위의 지인(知人)들을 보면, 대체로 60대까지는 애완견(愛玩犬)을 기르거나 꽃나무를 가꾸는 등 생물체(生物體)와 관계하면서 여가(餘暇)를 즐기지만, 60대 후반부터는 바짝 말라 보잘것없는 나무 등걸 등 죽은 생물체를 깎고 다듬는데 정성(精誠)을 다한다. 좀 더 나이가 들어 70대 중반에 이르면 도자기나 괴석(怪石)과 같은 무생물체(無生物體)로 취미가 바뀌어 이를 감상(鑑賞)하면서 소일한다. 이는 지난날의 삶을 회고(懷古)하거나, 자신의 노쇠(老衰)함을 투사(透寫)하기에 죽은 생물체나 무생물체가 적격(適格)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희(古稀)를 넘긴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제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보다는 오래되고 희귀(稀貴)한 무생물체에 더 많은 애정(愛情)이 간다. 일요일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골동품(骨董品) 감정 프로그램인 ‘진품명품(眞品 名品)’을 시청하는 것이 하나의 낙(樂)이 되었다. 한편, 생업에 열중하던 중년기(中年 期)에는 별로 신경(神經) 쓰지 않았던 골동품(骨董品)을 매일 같이 쓰다듬고 있지도 않은 먼지를 괜스레 털어내면서 소동(騷動)을 피운다. 특히 내가 애지중지(愛之重之)하는 골동품 고가구는 400여 년생 통 대추나무 뿌리로 만든 응접용 탁자와 18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推定)되는 사방탁자(四方 卓子)이다.
대추나무 뿌리로 만든 응접탁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에 구매(購買)했다. 공직수행 중 강원도 화천군 최북단의 사방거리라는 농촌마을을 방문했을 때다. 허름하기 그지없는 어느 초가(草家)에서 농우(農牛) 한 마리가 볏짚을 한 입 푸짐하게 물고 우적우적 씹어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동안 무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소의 고삐를 동여맨 예사롭지 않은 말목으로 눈길이 갔다. 아름드리나무 둥지의 하단부인 이 말목은 여러 갈래의 뿌리가 땅 위로 얼기설기 뻗어 있었다. 식물 대부분은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지만, 이 말목의 나무뿌리는 대부분 지표면(地表面)에 노출되어 있었다. 상체가 모두 잘려나가고 없었지만, 언뜻 보아 대추나무 뿌리임을 나는 얼른 알아챘다.
때마침 해맑은 아침 햇살이 이 말목을 훤히 비추고 있었다. 오래전에 죽은 나무이기에 대부분의 표피(表皮)가 떨어져 나가 속살이 들여다보였다. 일반 나무와 달리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음에도 반질반질한 속살에서 유난히도 밝은 색이 우러나며, 대추나무 본래의 아름다운 자태(姿態)를 간직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집주인에게 다가가 그 말목의 연유(緣由)를 물어보았다. 집주인은 이 대추나무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과실수(果實樹)였는데 썩은 볏짚과 쇠똥 등 두엄의 독소(毒素)를 견디지 못해 오래전에 괴사한 것이라 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상체(上體)만 잘라내고 뿌리를 포함한 밑 부분은 그대로 남겨 둔 채 소를 매어놓는 말목으로 사용 중이었다.
집주인은 이내 대추나무 뿌리에 군침을 삼키고 있는 나의 흑심(黑心)을 알아차리고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소 사육(飼育)을 위한 필수품(必需品)이야!” 쉽사리 내주지는 않겠다는 심상(心想)이었다. 그러나 말목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체면불구(體面 不拘)하고 그와 흥정했다. 소가 먹다 남긴 볏짚과 잡초 그리고 쇠똥이 섞여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대추나무 뿌리의 아름다움에 도취(陶醉) 되어 있는 나에게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오랜 입씨름 끝에 반영구적(半永久的)인 쇠 말목을 설치해주고 그의 마당 일부도 포장(鋪裝)해주는 조건으로 내가 대추나무 말목을 취(取)하는 거래(去來)에 성공했다.
대추나무 뿌리를 취득(取得)한 나는 3개월 여간 시냇물에 담가 놓고 틈이 날 때마다 틈새에 박힌 쇠똥을 열심히 닦아냈다. 그리고 목공예(木工藝)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예술적(藝術的)으로 깎고 다듬어 이를 응접탁자로 변모(變貌)시켰다. 그 후 이 응접탁자는 나의 애용품(愛用品)인 동시에 긴요(緊要)한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모 화랑의 감정을 통해 대추나무 뿌리가 400년 정도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소장(所藏)하고 있던 또 하나의 고가구는 약 30여 년 전 강남 삼성동의 한 골목에서 늙수그레한 어느 엿장수로부터 구매한 사방탁자다. 엿장수는 철거 중인 한옥(韓屋)에서 그것을 수집(蒐集)했다고 강변(强辯)하며 적지 않은 금액을 요구했다. 그의 횡설수설하는 말투로 보아 출처에 대한 신빙성은 없어 보였지만, 나는 그가 요구하는 금액을 지급하고 그 물건을 샀다.
탁자의 한 서랍에 녹이 벌겋게 슬어 있는 오래된 두 종류의 열쇠가 들어 있었다. 나는 이 열쇠를 이용하여 1단과 2단 함에 붙어 있는 이상한 모양의 잠글 쇠를 풀고자 진땀을 흘렸다. 1단 함을 열자 여러 개의 쥐똥이 들어 있었다. 아내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귀신(鬼神)이 나올 것 같으니 사방탁자를 당장 내다 버리라고 투덜댔다. 2단과 3단 사이의 서랍에는 1919년생 어느 여인(女人)의 빛바랜 와이 더블유 씨 에이(YWCA) 회원증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상 이 가구는 현대식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매우 오래되고 희귀(稀貴)한 물품 즉 골동품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곧바로 고가구 전문점 화랑(畵廊)을 찾아 수선(修繕) 겸 감정(鑑定)을 의뢰했다. 수선 도중에 사방탁자를 구매하려는 고객(顧客)이 있다며 화랑 직원이 나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왔고, 내가 긍정적으로 응대하지 않자 나를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당시 그것을 처분해야 할 만큼 궁핍(窮乏)하지 않았다.
수선업체는 약 140년~150년 전인 1800년대 중·후반에 제작된 사방탁자라고 감정했다. 재질(材質)은 오동나무와 화류나무의 혼합이며, 도자기나 문방사우(文房四友) 또는 귀중품(貴重品)을 진열하는 고급 치장용(治粧用) 가구라 했다. 그 후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부 지인들은 나의 소중한 사방탁자를 하찮게 여기며 ‘그까짓 것’을 하고 폄하(貶下)했다. 그럴 때마다 매우 서글픈 생각을 금할 수 없었지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생업에서 은퇴한 후부터 한결같이 대추나무 응접탁자와 사방탁자 관리에 정성을 쏟으며 여가를 보낸다. 하지만, 최근에는 나의 관심이 그것들로부터 점점 멀어져 간다. 대신에 응접실 한쪽 모퉁이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왕 바위산 모양의 괴석(怪石)에 자꾸 눈길이 간다. 남산(南山) 같기도 하고 일면 독도(獨島) 같기도 한 이 괴석 또한 대추나무 응접탁자나 오동나무 사방탁자처럼 매우 우연(偶然)한 기회에 나와 인연(因緣)을 맺었다.
휴가차 강원도 화천의 어느 깊은 계곡에서 식구들과 야영하다가 시냇물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그동안 쳐다보지도 않고 내버려두었던 이 무생물체(無生物體)에 마음이 끌리는 것으로 보아 나도 이제 많이 늙었다는 생각이 든다.(사방탁자는 최근 모 화랑과 250~300만원에 양도 양수 절충 중임)
20110417 牛步/朴鳳煥(010-3362-85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