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유게시판

[사랑, 감사, 겸손..] 한가위 일상

작성자동명항바라기|작성시간26.09.25|조회수59 목록 댓글 0

벗에게,

 

찬미 예수.

 

한가위입니다.

가무(歌舞)와 백희(百戱)가 벌어지는(嘉俳, 가위) 큰(한) 잔칫날이죠. '날 좋은 가을날 저녁'(추석)이라야 하나 하늘은 잿빛입니다.

엊그제 상현달이 뜬 초저녁. 이거라도 찍어두었으니 다행입니다. 어제밤엔 많은 비. 다음주 초까지 계속 비소식이 있군요.

 

추수 전 미리 곡식을 걷어 조상들에게 제사(여기에 더 큰 방점이 찍혔었습니다)를 지내고 풍년을 기원하던 풍습이 1945년 광복 이후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 giving day, 11월 넷째 주 목요일)에 영향을 받아 왜곡되었다죠. 추석을 외국인에게 소개할 때 '한국의 추수감사절'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잘못이라는 겁니다. 음력 8월 중순에 풍년을 감사드린다는 것은 계절적, 절기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미군정과 함께 들어온 미쿡인들이 자기네들 '추수감사절' 명절을 즐기는 것을 본 우리네 부모님 세대들, '우리도 뭐 없나?' 하다가 '아, 추석이 있지...' 하여 갖다 붙인 결과라는 겁니다. 같은 북반구인 미쿡과는 무려 두 달 여의 차이가 있음에도.


 

무튼, 오늘 그 한가위 미사에서 강론하는 주례 사제.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 20)

 

…라는 복음 말씀을 인용하며 이웃과의 '나눔의 정신'을 강조합니다. 주일 미사가 아니므로 봉헌(헌금)이 의무는 아니나 오늘 굳이 봉헌함을 제대 앞에 둔 이유는 '나눔'을 위함이라며. 사도 바오로는 믿음, 희망, 사랑 중에 그 가운데 으뜸은 사랑(1코린, 13,13)이라고 했지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탰는데 그게 '감사'라며. 그러므로 매사에 감사를 드리자며.

한가위 미사. 예년과는 달리 제대 앞이 말끔합니다. ‘지방’과 같은 이미지를 줄 수 있다는 염려(?)로 위령들의 명단과 분향대를 비치하지 않았습니다. 교구 차원의 방침이라며.

 

낮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소곤소곤 읊조리는 영성 깊은 노사제(아마도 은퇴를 앞둔 60대 후반)가 '감사'라는 단어를 정성스레 전하는데 문득 떠오른 단어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겸손'입니다. 엊그제 읽었던 송봉모 (토마스) 신부의 <사도행전 산책 2: 교회의 시련과 성장>(2026) 속의 한 페이지.

"겸손은 자기 비하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과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분명히 알고, 거기에 맞갖은 처신을 하는 것이다."(p.68)

 

송봉모 신부는 여기에 C.S. 루이스의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겸손은 자신을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덜 생각하는 것이다."

 

'겸손'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후밀리타스(humilitas). '흙'이라는 뜻의 후무스(humus)에서 파생되었답니다. 결국 겸손이란 인간이 흙에 불과함을 아는 것,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 진정 겸손하고 싶다면, 보잘것없는 우리 안에 거룩한 영을 불어넣어 고귀한 삶을 살아가도록 해주신 하늘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먼저 자기를 비워야 한다는 것, 모름지기 영성 삶의 기본 요소는 겸손이라는 것을 토마스 신부는 잔잔히 설파합니다.(같은 책 p.68)

 

일상 속 매사에 감사를 드릴 수 있는 바탕은 겸손이라 믿습니다. 절대자에 대한. 인간은 결국 하느님을 향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송봉모 신부(예수회, 서강대 교수)는 (아마도) 타고난 지적 능력과 성서 해석 능력에 대해 하늘에 감사하고 늘 겸손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을 듯합니다. 강의 능력도 출중하시더군요.


 

미사 후.

주중 브롬톤 라이딩 과정에 찰과상을 입은(5일 차) 무릎 치료를 위해 성당 인근 동네 병원을 찾았습니다. 365일 진료를 멈추지 않는 명의로 소문난 의원인지라 늘 대기 환자가 많은 곳이라네요. 하물며 추석 당일인 오늘, 근처에 오픈한 의원은 이곳이 거의 유일한지라 동편 마을의 환자란 환자는 몽땅 여기로 다 모여든 듯합니다. 두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접수 직원의 말에 발걸음을 돌려 약국으로 향했습니다.

 

'뭐, 죽을병도 아니니...'

 

병원이 진료를 하는지라 다행히 약국도 열려있었습니다. 비상 약품을 겸해 몇 가지를 챙겨 구입했겠죠. 집의 오래된 구급함이 조금 충실해 지겠습니다.

성업 중인 동편 마을의 한 의원(위)/응급처치함(first-aid kit)으로 마눌이 조치한 ‘나의 오른발’. 명절날 사고친 아들노미 다루는 기분이 이럴 것이라는.ㅋㅇ(아래)


 

오후에는 투병 중(노환)인 형님께 안부 인사를 올려야겠습니다. 사실 수 있는 그날까지 평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 살도록 창조하셨으니,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우리 마음은 편안하지 않나이다."(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 위 같은 책에서 재인용)

 

덧.

전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형님의 목소리는 힘이 없긴 했으나 비교적 또렷했습니다. 이만하시길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일상 속 소박한 추석 점심. 영랑호 호숫가에 새로 개업한 막국수 전문점. 면발이 일품입니다. 나는 막국수, 너는 육개장. 맛집은 본 메뉴에 늘 정직합니다. 막국수 승.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