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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과 나눔

[스크랩] 하나님의 권위 - 다비드 리

작성자바실레이아[루하]|작성시간11.02.04|조회수34 목록 댓글 0

2009 4 8 (수)                 다비드 리                    4기 기도사역자훈련학교

 

 

주제 : 하나님의 권위

 #1번째 TIME

 

 

 우리는 하나님을 가진 자이다.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중요하다. 십자가를 모르면 성경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십자가는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라는 것은 옛 자아에게 있는 아주 독특한 죄이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십자가를 모르면 기도를 할 수 없다. 십자가에서 옛 사람이 처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옛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옛 사람은 항상 우리에게 필요하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필요가 채워지면 더 차원 높은 필요가 생긴다. 이 필요를 주님이 채워야 할까? 말아야 할까? 절대 안 채우신다. 그래서 십자가를 갈망해야 한다. 우리는 옛사람의 필요가 내게서 나타날 때 고통해야 한다. 십자가는 우리의 필요의 기도를 죽인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을 죽이심으로 말이 없게 만드신다. 죽이면 절대 필요가 없어진다. 주님은 필요를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이셔서 필요를 없애신다. 저는 이런 주님이 가장 좋다. 이것이 십자가이다.

 

제가 어떤 기도의 책을 읽었었다. 저는 24시간 기도 사역을 일으키는 사람이다. 그런데 저는 기도를 제일 못하는 사람이다. 24시간 사역에는 Night Watch가 있다. 이것은 기도사역의 꽃이다. 11부터 새벽 6까지 7시간을 매일 기도하고 예배한다. 밤에 성소를 향해서 손을 드는 자들이다. 만약에 저보고 Night Watch를 서라고 하면 저는 아마 죽을 것이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이면 되는데, 24시간 매일 기도한다고 한다면 저는 아마 못할 것이다. 그러나 Night Watch로 부르심 받은 자들은 Night Watch를 서지 못하게 하면 죽겠다고 한다. 이 세상에 가장 강력한 고문은 기도 잘 못하는 사람에게 7시간 기도 시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옛 사람에게 7시간 기도시키는 것이다. 옛 사람은 이런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 애초에 자기 필요를 응답 받고 사는 것에 적응되어 있기 때문이다.

 

Night Watch는 십자가를 통과한 가도사역자들이 철저히 주님의 권위 아래서 주님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해 낼 수 없다. 철저하게 주님만 구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과하고 오직 주를 위해 헌신하고, 오직 주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기의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고 오직 부활 생명으로 주님께 헌신한다. 그래서 여기서 나오는 기도는 오직 여호와의 기도만 나온다. 오직 여호와의 갈망을 표현해 내는 기도가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Night Watch이다. Night Watch는 완전히 밤 낮이 바뀐 생활을 한다. 기본 섭리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IHOP에서는 30세 이상은 받지 않는다. 이것은 기본적인 체력의 한계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체질이 완전히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십자가를 진다. 아무리 20대라도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기도가 근본적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변한다. 기도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십자가를 통과시키면 우리는 주님의 생명으로 살게 된다. 그리고 주님의 권위가 회복된다. 이 십자가는 온 세상에 주님의 권위가 회복됨을 가져온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울 나라는 주님의 권위가 다 드러나는 나라이다. 이것은 권위의 문제이다. 오늘 우리가 볼 것은 권위의 문제이다. 십자가를 통한 권위의 문제를 살펴봐야만 우리는 주님의 다시오심을 또한 이해할 수 있다. 주님의 다시오심은 마지막 때 있을 어떤 이벤트가 아니다. 실제 이것이 우리 삶에서 드러나고 나타날 때 이것은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삶으로 나타난다.

 

권위를 먼저 보기 위해서는 구속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구속은 중요하다. 하나님이 세상에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에 헌신이 나오게 되었다. 구속은 헌신을 낳는다. 이 기초가 명확해야 우리는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 헌신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봐야 한다. 헌신은 구속을 통하지 않고는 헌신이 될 수 없다.

 

(2:1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6: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7: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고후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것이 구속이다. 구속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값을 주고 샀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속이라는 것은 말그대로 내가 그 분께 속해있다는 것이다. Belong to이다. 왜냐하면 그 분이 값을 주고 사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구속을 보면 헌신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착각하길 헌신이라는 것은 내가 포기하고 주께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다. 구속된 자는 다 헌신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값으로 샀으면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헌신이다. 헌신된 자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권위가 회복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가 헌신된 자이다. 헌신의 기초를 명확히 본다면 우리는 헌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가서는 사실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사랑은 사실 권위의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권위를 모르면 사랑을 못 한다. 우리가 주님과 사랑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권위가 회복되어야 한다. 아가서 2장에서는 예수님이 나에게 속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에게 속해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가서 6장에서는 나는 예수님에게 속해있다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에게 속해있다고 한다. 그러나 7장에서는 나는 예수님에게 속해 있다고 하는 말만 나온다. 이것이 간단한 문제인 것 같지만 굉장히 영적으로 어려운 단계이다.

 

아가서 2장이라도 무시하면 안 된다. 사실 아가서 1장 정도까지만 해도 교회는 굉장히 영적으로 된다. 아가서 1장만 와도 굉장히 높은 단계이다. 예수님이 나에게 속해 있다는 말은 예수님을 나에게 끊임없이 가져오는 것이다. 예수님을 내 삶 속으로 끊임없이 가져오는 것이다. 예수님을 우주의 통치자로 인정은 하지만, 끊임없는 관심사는 내 삶에서 역사해 달라는 것이다. 우주의 왕을 내 삶으로 구겨 넣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분은 너무 크신 분이다. 그리고 그 분은 대단한 영광을 가지신 분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내 삶에서 역사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엄청난 담대함이 필요하다. 여호와의 아들을 내꺼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주님의 은혜이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와 사랑에 빠지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엄청난 은혜이다. 주님은 이것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또 보는 것이 나는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혼전해 있다. 주님을 내 삶으로 가져오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고 한다. 아가서 3장으로 가면 이 여인이 굉장히 어려운 단계로 접어든다. 예수님을 내 삶으로 가져오는 것은 자기 자아에 갇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여기서 나를 끄집어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자기 삶에 예수님을 가져오기만 한다. 주님은 우리를 처음에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지만, 그 다음 단계는 자아로부터 구원한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 가장 힘들다. 여기서 함부로 끄집어 내면 안 따라온다. 자기 삶을 버리라고 하는 것만큼 사실 충격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의견이 조금만 묵살당해도 우리는 굉장히 힘들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신다. 처음부터 아가서 7장을 주시지 않으신다.

 

제가 훈련시키다 보면 안 믿는 가정은 헌신한다고 하면 막 소동하는 spirit이 일어난다. 적당히 믿으라고 한다. 우리가 믿는 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의 삶을 신에게 가져가냐고 하는 것이다. 믿는 가정도 마찬가지다. 믿음이 적당하게 믿는 가정은 안 믿는 사람과 비슷하다. 그래서 자녀들이 헌신한다고 하면 미쳤다고 손가락질 한다. 주님이 이 과정을 쭉 거치면서 아가서 6장에 오면 드디어 나는 예수님께 속한다고 하는 말이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7장에 오면 나는 예수님께 속해 있다라는 말만 남는다. 구속이 명확해 지면서 이 여인은 진정한 헌신으로 들어간다.

 

(7:10)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예수님에 대한 권위를 완전히 회복한다. 내가 완전히 그 분께 속하게 되면 완전한 헌신이 나온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속했다는 것은 권위가 회복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의 문제는 하나님이 능력을 행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권위를 찾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잃어버린 권위를 찾으면 그 사람을 하나님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그 분의 뜻대로만 움직인다. 온전히 그 분의 뜻대로만 사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열망이 그 위에 쏟아지는 것이다. 모든 그 분의 열망을 여인에게 둔다. 이것이 교회이며 신부이며, 또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사단과 하나님의 싸움은 사실 누구에게 속해있냐는 것이다. 그래서 애굽에서의 마지막 재앙이 장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재앙은 신들을 치시는 것이다. 사단은 장자들이 자기에게 속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것은 그냥 지나가게 하시고, 사단의 것만 죽임을 당하게 하셨다. 이것이 유월절이다. 하나님과 사단의 싸움은 누구에게 속했느냐의 문제이다. 사단과 하나님은 파워경쟁을 할 게임 상대가 아니다. 아무리 파워를 들이대도 속함의 문제는 파워가 해결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 구속이 무엇인지 명확히 봐야 한다. 그래서 주님께 깊이 헌신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END-TIME이라는 것은 시대 전체가 헌신하는 시대이다. 2000년 동안 구속의 빛이 전 지구에 뿌려진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라는 그 빛이 전 지구에 뿌려진다. 전 이방 가운데 비춰진다. 우리에게도 비춰질 것이다. END-TIME이라는 것은 전 지구적으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단의 것을 다 부수신다. END-TIME에는 이 구속에 기초한 헌신자들이 일어난다. 하나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헌신자들이 생기는 것이다. 구속이라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큰 제목이다. 하나님이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 세상은 멸망한 것이다. 단순히 범죄의 문제가 아니다. 멸망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기업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으시면 하나님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

 

탕자가 아무리 성공을 해도 탕자이다. 우리는 이것을 깊이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로 들어가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지 않고는 우리가 아무리 성공해도 소용 없는 것이다.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권위를 회복하는 구속의 역사를 끊임없이 얘기한다. END-TIME 에는 하나님의 권위가 회복되어야 한다. 666시스템이라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권위로 나가는 것을 철저히 봉쇄하려고 하는 사단의 시스템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건드리지 않으신다. 그래서 사단은 이것을 이용해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협박한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막는다. 그래서 순교는 놀라운 축복이다. 사단이 협박해도 소용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어차피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리고 우리는 부활할 것이다. 그런데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순교합시다.”

 

사실 헌신하지 않은 자들은 천년왕국이 오던 안 오던 상관 없다. 헌신한 자는 반드시 권위 아래로 들어간다. 그 권위자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데 열망을 가진다. 헌신을 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마땅히 권위를 행사할 영역에 권위가 행사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한다. 주님이 이것을 다시 되찾으러 오시는 때가 다시 오시는 때이다. 주님은 지금 주님에게 속한 자들에게 권위를 행사하신다. 그래서 세상 나라의 임금이 지금은 사단인 것이다. 주님에게 속한 자들에게 주님은 권위를 행사하신다. 그래서 주님에게 속한 자들은 온 땅이 주님의 권위 아래 들어가야 한다는 부르짖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마지막 때 있게 될 24시간 기도운동의 형태로 폭발하는 것이다. 구속은 우리를 단순히 지옥 안 가도록 구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를 헌신 가운데로 인도한다.

 

(32:25~29)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여기서 금송아지를 만든다. 모세가 내려와서 돌판을 깨어 버린다. 출애굽을 통해서 구속을 했는데, 헌신을 하지 않는 일들이 벌어졌다. 주님께 속한 자가 된 것이 아니다. 주님의 권위 아래로 완전히 내려간 것이 아니다. 그래서 금 송아지를 만들게 된다. 주님은 구속 받은 자 중에 내 실제적인 권위 아래 속한 자가 누구냐라고 묻고 계신다. 그랬더니 레위 지파가 일어난다. 그래서 레위 지파가 여호와께 속한 지파가 된다.

 

(10:34~3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주님은 검을 주러 오셨다고 한다. 이 말은 주님이 구속하시고 헌신된 자들을 얻으시겠다는 것이다.유월절의 칼 뿐만 아니라 레위의 칼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속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실 주님은 출 32장을 명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들에게 레위의 칼을 쥐어 주시겠다고 하신다. 우리는 주님의 권위가 온전히 행사되는 그런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헌신이다. 우리에게 오직 주님밖에 없다고 늘 고백해야 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하겠다고 늘 고백해야 한다. 그래야만 주님께 합당한 것이다.

 

우리가 만약에 보좌 앞에 서게 되면 구원 뿐만 아니라 구속을 보게 된다. 우리가 보좌를 진짜 본다면 헌신하지 않고 견딜 수 없다. 이것이 보좌에 대한 경배이다. 보좌를 보며 하는 경배는 레위의 칼을 쥐게 된다. 보좌 앞에서 드려지는 경배는 내가 완전히 주님께 속했다라는 아가서 7장의 경배를 낳는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레위의 칼이다. 오직 주님만이 움직일 수 있는 오직 보좌에 속한 자들을 원하시는 것이다. 오직 보좌 안에서 주님만을 경배하는 자들을 원하시는 것이다. 왜 이 시대 가운데 계시록이 풀어지는지 아는가? 계시록은 보좌를 낳는다. 보좌경배는 헌신을 낳는다. 우리의 헌신을 낳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열망이 쏟아지게 하고, 우리에게 레위의 칼이 쥐어진다.

 

마지막 때는 보좌의 경배가 가장 핵심이다. 사실 마지막 때 전쟁은 보좌의 전쟁이다. 갈수록 사단도 자기 보좌를 드러낸다. 그래서 24시간 사역에서 보좌를 경배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계시록을 계속 기도하고, 보다 보면 우리에게 깊은 헌신이 나온다. 보좌에게 속한 자가 된다. 이것이 마지막 때 강력한 싸움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신다. 보좌에 속한 자가 온 열방 가운데 있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이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그런 자들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 때 주님은 사단에게 다 넘겨지는 것을 허락하신다. 적그리스도에게 넘겨 준다.

(13: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여기서 권세를 받는다. 이 권세는 적그리스도가 받는 것이다. 주님은 권세를 사단에게 줘 버린다. 왜냐하면 모든 백성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주님을 경배하는 자들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을 사단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한 번 해 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을 보고 무엇을 하고 계시냐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력을 보이시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회복하는데 목적이 있으시다. 우리는 자유의지로 영원히 주님에게 속하기로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사실 한 면에서 테스트이다. 자유의지가 지구상에 출현했다. 자유의지는 어떤 경우에도 주님만이 움직일 수 있는 자유의지이다. 이것에 대한 테스트이다. 사단은 하나님에게 이용 당하다가 무저갱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다 십자가의 역사이다. 모든 주님의 사역을 설명하는 것은 사실 십자가이다. 오늘은 유월절 저녁이다. 우리에게 유월절 칼 뿐만 아니라 레위의 칼이 있게 되기를 축복한다.

 

(25:6~13)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비느하스는 완전히 하나님께 속한 자였다. 저는 오늘 날 비느하스의 창을 지닌 자들이 일어나길 축복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속을 경험은 했지만, 구속의 기초를 명확히 몰랐기 때문에 또 다시 모압 땅에서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여기 또 하나의 비느하스가 나타나게 된다. 그는 하나님께 완전히 속한 자, 하나님을 위하는 자였다. 구원은 죽게 되었다가 살아나는 게 구원이다. 그러나 구속은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아는 것이 구속이다. 구속을 본 사람은 자기 삶을 절대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 전에는 사단의 노예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노예임을 고백한다.

 

우리 삶이 변하는 것은 내가 어떤 능력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명심하라. 우리는 어떤 은사를 가져서 절대 변하지 않는다. 영적인 스킬을 받아서 절대 변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에게 속했느냐에 따라 변화되는 것이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사느냐에 따라 내 삶이 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열정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저는 이전에 구속의 빛이 없을 때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도 많은 일을 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밖에 문제를 처리하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큰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단 하나의 일을 하더라도 주님의 권위 아래서 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헌신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헌신은 당연한 것이다. 헌신은 어렵고 쉬운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셨다. 그리고 나를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그냥 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마음대로 다루려고 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헌신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시면서 우리의 헌신을 보신다. 헌신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 모든 성도는 마땅히 주만 위해서 사는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 우리의 헌신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주님께 헌신한 자입니다. 나는 레위의 칼을 지닌 자입니다.”

 

우리는 오늘 날 주를 섬기는 것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한다. 헌신한 사람이 레위의 칼을 차고 사람을 죽이려고 할 때, 가장 고통스러운 자는 사실 자기 자신이다. 우리는 자꾸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애호가 생긴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자꾸 한다. 자기의 스토리를 자꾸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이제 중단해야 한다. 헌신한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레위의 칼을 찬 사람들이 독특한 특징은 더 이상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사실 교회 안에서 얼마나 헌신이 사라지고 있는가를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자기 이야기가 너무 많다.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에 대한 이야기보다 우리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다. 오늘 우리는 헌신할 때 모든 두려움을 주님이 제거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오직 헌신해야만 주님을 섬길 수 있다. 나는 주님만이 움직일 수 있는 자라고 고백해야 한다.

 

(78:1~2) [아삽의 마스길]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내 백성이 된 것을 전재로 한다. 헌신을 전재로 하면 주님께서 주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주님께서는 다 비유로 말씀하신다. 예로부터 라는 말은 태곳적이라는 뜻이다. 주님이 말씀하시기 시작하면 큰 문제에 부딪힌다. 예로부터라는 말은 케뎀이라는 뜻이다. 케뎀은 창세 전의 이야기이다. 사람은 자기 시간 안에 있는 것을 이해하지 자기 시간 밖에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주님께 헌신했기 때문에 주님의 일을 알리시는 것이다. 이 주님의 일은 창세 전인 첫째 영원에서부터 둘째 영원까지 관련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70년의 인생을 살기 때문에 그것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창세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서는 둘째 영원까지 진행할 모든 일을 케뎀에서 주님이 다 상의하셨다. 다 상의하고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 이끌어 가신다.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겠다는 것이다.

 

수 억년에 걸친 프로젝트를 이야기 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개념에는 없는 것이다. 사실 이 얘기는 특별한 언어를 포함한다. 자기가 사는 만큼의 언어를 지닌다. 그래서 인간은 70년의 언어에 갇혀 있다. 우리의 언어는 70년의 언어이다. 그래서 이 70년 안에서 가능한 일만 사고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케뎀에서는 둘째 영원까지 있을 일들을 다 논의한다. 주님의 스케일은 바로 이것이다. 시간적인 제한이 있으면 시간에 따라서 언어가 달라진다. 또 하나 공간적인 제한이 있으면 또 달라진다. 주님이 우리에게 케뎀의 일을 알리기 시작하면 마치 개미와의 대화 같다. 주님이 새 일을 시작하겠다고 하면, 우리에게 새 일은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개미 생각과 같다. 하나님의 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우리의 언어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은 비유로 말씀하신다.

 

케뎀의 일은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이 비유라는 말은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다. 히브리어로 마샬이라고 한다. 마샬은 우리나라 말로 비유, 속담, 격언, 잠언 등과 같이 번역되는데, 사실 번역하기 힘들다. 이 마샬이라는 것은 주님의 독특한 언어 시스템이다. 이것은 마치 초등학생의 언어와 대학원생의 언어가 다른 것과 같다. 우리가 주님께 헌신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언어를 가르치시기 시작하신다.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마샬의 언어를 가르치신다. 이것은 헌신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독특한 교육 방법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제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알려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숨겨진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헌신하게 되면 이제 비로소 말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주님의 언어를 배우게 된다.

 

주님의 마샬의 언어를 배워야만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케뎀에서의 일을 어떻게 우리의 언어로 이야기하겠는가? 이것은 우리의 언어로 비유해서 이야기한다는 말이 아니다. 아주 고차원적인 언어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마샬로 이야기하신다. 오늘 날 히브리어로 멤샬라라는 말은 수상이라는 뜻이다. 마샬은 통치라는 뜻도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통치의 언어인 것이다. 주님의 일을 알리려면 마샬의 언어 시스템이 필요하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마샬의 언어 시스템을 가르치기 시작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케뎀을 보게 된다. 이제 주님의 일을 이해하게 되고,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기도해 낼 수 있게 된다. 헌신한 자만 주님과 말이 통한다. 그래서 말씀이 풍성해지게 된다. 우리가 헌신하지 않으면 성경책은 아무리 읽어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헌신하지 않으면 주님의 언어 시스템을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마샬의 언어 시스템을 배우면 성경은 그냥 그대로 풀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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