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묵상과 나눔

[스크랩] 신부의 패러다임 Ⅰ

작성자바실레이아[루하]|작성시간11.02.05|조회수40 목록 댓글 0

                         신부의 패러다임 Ⅰ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사로잡기를 축복한다. 주님은 신부에 대하여 많이 말씀하신다.

 

(사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열심하고 여러분들을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중매하는 열심과 어떤 면이 같을까?

 

(시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요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주님에게는 주님의 집을 향한 열심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시27: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집에서 산다라는 표현은 결혼에 대한 표현이다. 가장 성경적인 propose는 “같이 살자”이다.

다윗이 얘기하고 있는 것이 단 한 가지 구하는 것이 주님 전에서 같이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도 주님의 집에 대한 열심이 삼켰다. dwelling place. 거주할 곳

 

(시132:13~14)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주님이 시온을 택하신 이유는 영원히 살기 위해서이다.

주님이 인간을 창조한 주요 목적 중 하나는 결혼하기 위함이다. 결혼하기 위한 열심이 주님에게는 가득하다. 이 세상에서 제일 신비한 것 중 하나가 결혼이다.

왜? 첫째는 결혼이라는 것은 결혼을 하면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 다 내 것이 된다. 만물이 여러분 것이다. 만물이 우리 신랑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것은 신비한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 여러분이 만물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결혼 이외의 방법이 없다. 이 세상에 결혼만큼 신비한 제도가 없다. 성경은 사실 결혼 얘기로 덮여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숨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인간과 결혼하기 원하신다.

 

(창17:6~8)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아브라함의 언약은 무조건적 언약으로 유명하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모든 하나님의 역사에 근원이 된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잘해서 해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아브라함에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 바로 아브라함 언약인 것이다.

사실 무조건적인 것이 인간에게는 가장 힘든 것이다. 인간에게는 어떤 일에 조건이 있는 것이 더 편하다. 종교적인 시스템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결혼의 패러다임은 무조건성을 포함한다.

 

(렘31: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주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한 것이 남편이 되고자 함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그들이 깨뜨리고자 해도 또 남편이 되고자 하신다.

 

(호2: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호2:19~20)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신부의 패러다임은 우리를 주님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인도한다. 신부가 되면 두 존재에게 있는 모든 것을 합해 버린다. 이것은 속일 수가 없다. 주님에게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실제적인 결혼관계에 들어갔을 때만이 가능하다.

구원이 라스트 스테이지가 아니다. 구원은 출발이다. 사도바울이 구원 받은 다음에 가장 하나님의 열심으로 주고 싶었던 것이 중매하는 것이었다. 신부가 되어야 우리는 주님과 영원히 같은 집에서 살 수 있다.

사랑과 결혼은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의 독특한 영역은 결혼으로 나가는 사랑이 있다. 결혼으로 나가는 사랑은 두 존재를 하나로 묶어 버린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신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고, 구원자로써의 사랑일 수도 있고, 치유자로써의 사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분과의 사랑에 있어서 주님이 이 시대 가운데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 사랑을 결혼으로까지 가져가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반드시 결혼까지 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가 있다.

결혼 패러다임을 통해서 하나님은 성경에 많은 진리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1. 부활에 대한 진리

 

- 결혼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실질적인 부활의 삶을 약속한다. 우리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누구와” 결혼하냐는 굉장히 중요하다. 결혼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전에는 내가 누구냐가 중요했다. 그러나 결혼 패러다임에 가면 상대편이 더 중요해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화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부의 패러다임이다.

삶이라는 것은 교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여지는 삶으로 배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부는 누군가에게 집중한다.

중요한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누구냐?”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그 분은 100%사람이면서 100%하나님이시다. 결혼이라는 것은 같은 레벨끼리 한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열심을 낸 이유 중에 하나이다. 그리스도는 지금 현재 부활체로 존재하신다. 이 분에게는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도마 이야기가 등장한다. 실제로 만져본다.

 

다니엘이 본 환상 중에 인자가 내려오는 것을 본다. 이 세상에 모든 권세가 여호와께 주어져야 하는데 인자가 내려오는 것을 본 것이다.

그 분은 사람으로 내려오신다. 그러나 영과 혼과 몸이 불변하는 부활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분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100%사람, 100%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날에 중요한 이슈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중요한 이슈는 내가 저 사람과 같이 결혼할 존재가 되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같은 사람끼리도 레벨이 다르면 결혼하기 힘들다.

 

결혼이라는 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럴진대 그리스도는 아무하고나 해도 되는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을 아무하고나 결혼시키겠는가?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부는 아무나 되지 않는다. 교회 다닌다고 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는 그 길을 주님은 무조건적으로 모든 자에게 다 열어 주신다. 그러나 그 길을 걸어온 자들에게 주님은 신부가 될 수 있도록 하신다.

 

(아4:7~8)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주님은 아가서 4장에 와서야 신부(히-칼라)라고 칭한다. 6절에서 신부가 몰약산으로 올라간다고 고백한다. 몰약산이라는 것은 죽음과 십자가를 이야기한다. 십자가와 부활. 이것이 바로 부활체로 우리를 인도한다. 십자가는 모든 자에게 주는 주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그 가운데서 부활에까지 이르도록 성령님은 우리를 계속적으로 독려 하신다.

사람자체는 위대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100%사람, 100%하나님의 작업의 완성을 “부활”이라고 한다.

우리는 부활에 이르렀을 때 주님과 결혼할 수 있다. 주님의 신부에 대한 열정이 왜 중요한가?

이것은 다른 이야기로 하면 부활에 대한 열정이다.

 

(계20:4~5)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주님과의 결혼에서 포인트는 주님과 천년동안 왕노릇하는 것이다.

첫째 부활은 주님의 신부들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열망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첫째부활 때 부활해야만 주님과 결혼할 수 있다. 마지막 때 나타나는 사건 중 하나는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다. 이 적그리스도가 가장 위협하는 것이 생명이다. 그런데 자기를 경배하는 자들을 살려준다.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부활을 믿는 자는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별로 무섭지 않다. 적그리스도가 3년 반 동안 생명을 위협하게 되어 있다. 부활을 믿는 자는 적그리스도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자들이다. 주님은 역사 가운데 END-TIME을 대비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주셨다. (ex.신사참배)

 

여기에서 부활신앙이 나온다. 주님의 목적은 교회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는 것이 목적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단 한번이라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혼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이다.

END-TIME에 이런 시대가 올 때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신부의 패러다임 속에서 부활을 갈망하는 자들이 교회를 지켜낼 수 있다.

많은 배교하는 무리가 있게 될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살후2:3)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속지 말라.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다시 건축되게 되어 있다. 배교하는 일이 있게 된다.

미국에 마이클빅클 목사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미션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는 믿지 않는 자들을 전도하는 것이며, 믿는 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구원받은 자들을 그리스도께 중매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한다.

신부의 길을 갈망하게 되면 부활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게 된다. 절대로 적그리스도에게 타협해 들어가지 않는다. 신부의 패러다임은 상대편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게 된다. 그래서 내가 어떤 존재가 된다는 것을 정확히 알게 된다.

 

2. 신랑의 삶에 대한 진리

 

- 신랑의 삶에 대한 인식을 증가시킨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서 급격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결혼하고 나서 그리스도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그의 직업이 무엇인가? 어디에 살 것인가?

성경은 어떤 추상적인 것을 얘기하지 않는다. 성경은 실제적이다. 이스라엘이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적이지 않으면 하나님은 별로 파워풀한 분이 아니시다.

 

신부의 패러다임은 신랑의 삶에 대한 인식을 가져온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 분의 다시오심에 대해서 가장 올바르게 인식하게 된다.

그 분이 왜 다시 오시나? 신부가 신랑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다. 신부는 신랑의 비밀스러운 것까지 다 알게 되어 있다. 신부의 삶을 살아내지 않으면 다시 오심은 그냥 하나의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 분이 왜 오시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신부의 패러다임을 단순히 주님과의 친밀감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신부의 패러다임은 그것을 넘어선다. 우리는 주님과 그런 관계가 있어야 한다. 아가서에도 그런 시간들이 있다. 그러나 신부의 패러다임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삶을 어떻게 연합할 것인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어떤 삶이냐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시작하신 분이시다. 시작했다는 것은 그 만물이 어디론가 완성을 향하여 나간다는 것이다. 우리 신랑은 만물을 움직이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왕이시다. 그리고 그 분의 유업이 All Nation이다. 성경에서 신부의 위치는 신랑이 모든 것을 다하고 신부는 그냥 밥만하는 그런 위치가 아니다. 신부의 위치는 왕의 파트너이다. 돕는 자(에제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유업을 다 같이 준다는 것이다.

 

(계2:26~27)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신부의 위치는 아주 독특하다. 신랑의 삶을 인식하지 않으면 돕는 자가 될 수 없다.

아가서2장 7절까지는 “나” 중심이다. 그런데 주님이 결정적으로 7절에 재워버리신다. 자기 자신에게서 구출해 내야 한다. 그래서 아가서 2장 8절부터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구원의 여정이 쓰여 있다. 부활의 주님을 계시하신다. “일어나 함께 가자”라는 단어는 사실 아브라함에게 “가라”라고 명하셨던 그 단어와 같은 의미이다.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나와서 부활의 삶으로 나아가라는 주님의 초청이다. 그래서 이 신부는 십자가를 지고 바위산을 오른다.

3장을 보자. 주님을 찾아도 찾지 못하는 시기를 겪게 된다. 내가 내 만족을 위해서 주님을 찾기 시작할 때 어느 단계가 되면 주님은 사라지신다. 주님이 안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다. 주님은 나의 세계에서부터 나를 끄집어내신다. 그 분의 사라지심으로 나를 끄집어내신다.

 

아가서 4장에 오면 비로소 그런 신부에게 주님이 칭찬을 하신다.

“길르앗 비탈을 내려오는 염소 떼” 나실인이 되면 머리를 깎지 않는다.

머리카락은 어떤 우리의 헌신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길르앗 비탈에서 내려오는 염소 떼는 누구나 볼 수 있다. 주님이 우리가 주님께 나의 삶을 드린 것을 자랑하기 시작하신다. 머리카락은 사랑을 증가시킨다. 우리 몸에 있는 모든 것들은 사랑을 위해서 쓰여진다.

 

헌신된 자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은 놀랍다.

헌신된 머리카락은 주님에게 있어서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칭찬을 주님에게 받고 나서 이 여인은 몰약 산과 유향으로 넘어간다고 고백한다. 주님에게 더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걸어가리라.” 그런 자를 신랑은 신부라고 부르기 시작하신다.

 

자기 세계 속에서 나오게 되면 비로소 신랑의 삶이 보이기 시작한다. 비로소 신랑에 대해서 계시하신다. 계시록은 주님의 다시오심에 대한 계시가 많이 들어 있다. 이 계시를 풀 자는 신부의 길을 걸어가는 자이다. 신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마지막 때 성경을 온전하게 전할 수 있는 메신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메신저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얼마나 신부의 삶을 실제로 살아내고 있느냐가 핵심관건인 것이다.

 

신부만큼 신랑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마지막 때 주님이 얻고자 하시는 메신저는 그런 메신저이다. 화려한 신학적인 체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의 삶을 실제로 살아내면서 신랑을 보여주는 자이다. 그리고 신랑의 갈망이 무엇인지를 온 천하에 알릴 수 있는 자이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교리 때문에 혼란을 겪지 않는다. 모든 이단은 자기중심적인 것을 만들어낸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원받지 못하면 마지막 때는 너무나 혼란스럽다.

 

“나는 쇠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

 

주님이 최초로 신부라고 칭하기 바로 전에 신부가 몰약산으로 간다고 고백한다. 죽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신부의 삶이며, 마지막 때 모든 미혹으로부터 교회를 지켜내는 힘이다.

이것이 미혹적인가 아닌가를 분별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신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삶이 따라오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Life이다.

Life로 주님께 더 가까이 가시기 바랍니다.

 

“주님, 하나님의 열심으로 나를 뒤덮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사도바울과 같은 신부들을 주님께 드리는 열심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대에 신부의 세대들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채수련의 찬양과 시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