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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향기

공정, 정의가 하느님의 저울- 연중 제 26 주일

작성자글라라(풀밭)|작성시간10.10.06|조회수15 목록 댓글 0

   

 

   공정, 정의가 하느님의 저울- 연중 제 26 주일


    ‘정의’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엣센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바른 도리, 바른 의의라고 간단히 나와 있더군요.

  정의란 인간 모두에게는 각자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공평하게 권리가 행사되도록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 때 ‘정의 사회 구현’을 기치로 내건 정권이 있었지요. 겉으로는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안으로는 부정부패로 얼룩진

  파렴치한 정권이었다는 것이 드러났었지요. 정의는 말에 있지 않고 실제로 모든 이에게 더 큰 기회균등과 자유를 보장

  해 주는 더 인간다운 정치, 경제, 사회체제를 이루는 것이고 정의 사회란 모든 이가 실제로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사회

  를 말하겠지요.

 

    요즘 ‘공정’이라는 말이 정치권의 화두가 되었지요. 정말 정의나 공정을 말하기에는 너무나 낯 뜨거울 사람들이 얼굴

  에 철판을 깔고 공정을 말하는 것을 들으며 소가 웃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수재민들은 억장이 무너지는데, ‘왕의 남자’라고 불리는 특임 장관이라는 사람은 추석에 “불광천을 타고 한강까지 갔다

  환상이었다. 불광천에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유유히 놀고 청둥오리 백로들이 여유를 부리고 자전거 타는 사람, 뛰는 사

  람, 걷는 사람, 모처럼 태양 아래 마음껏 즐긴 사람들이 한강변을 가득 채웠다. 포토맥(워싱턴을 흐르는 강)은 저리 가

  라다.”고 말합니다.

   서울에 엄청난 수재민이 생겼는데 수재민을 찾아보기보다 한가롭게 한강변을 산책이나 하면서 자기가 무슨 음유시인

  이라고, 용비어천가를 읊고 있는지,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하긴 대통령이라는 사람도 수해를 입은 서울 양천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 수재민에게 “기왕 (이렇게) 된 거니까 (마음

  을) 편안하게”라고 말합니다. 이에 수재민이 “편안하게 먹을 수가 있어야죠.”라고 말하자, “사람이 살아야지”라고 대답

  했다니, 도대체 수재민의 아픔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이나 있는 것인지, 현실 감각이 있는 사람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습

  니다.

   부과 권력을 지닌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 서민들, 재해를 입은 사람들의 고통을 모릅니다. 그러니 엉뚱한 소리가 나

  오는 것입니다.


    공정이나 정의는 사실 인간에게 사용하기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품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바로 공정하시

  고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느님은 당신의 정의를 인간 공동체와 나누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느

  님이야말로 공정하신분, 정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공의의 하느님’이시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분은 이사야의 입을 빌어 “법이 나의 척도요, 정의가 나의 저울이다”고 하십니다.

  

   또한 오늘 제 1독서에서 우리가 듣는 아모스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다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을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 하느님 당신께 바르게 예배를 드리

  는 일은 다름 아닌 인간 서로에게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아모스는 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부자들에게 경고합니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 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사람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가난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주리는데 자기들은 향락에 빠져 흥청거리는 부자와 지도자들에 대해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리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시골 출신 양치기 목자였던 아모스는 도시의 부유층들의 삶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시골에서 힘들게 농사짓는 사람

  들은 주리는데 부유층은 고래 등 같은 집을 짓고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흥청거립니다. 그것을 보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

  아 전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공평을 뒤엎고 정의에서 소태처럼 쓴 열매를 맺게 하느냐?”


   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부는 하느님 축복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는 서로 나누어야 하

  는데 나누지 않을 때 축복이 오히려 저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의 입을 빌어 말씀하시는 것입니

  다.

 

    오늘 제 2독서인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에서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 (공동 번역에서는 정의로

  옮겼음)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라고 격려합니다. 여러 가지 덕목을 나열하면서 의로움,

  바로 정의를 가장 앞에 놓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오로가 말하는 의로움, 정의는 바로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바오로는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하느

  님을 아는 것이라는 구약의 정신을 잘 알고 있던 분입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도 그를 알

  아보시게 됩니다.

   하느님을 알고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라도 정의를 실천하지 않으면 그는 하느님을 진정으로 모르는 것이고 따라

  서 하느님도 그를 알아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의 아비는 법과 정의를 펴면서도 먹고 마실 것 아쉽지 않게 살지 않았느냐?

  가난한 자의 인권을 세워 주면서도 잘 살기만 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바로 나를 아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정의를 어떻게 보십니까?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었지요. 소수 권력층들은 로

  마의 지배에 협력하면서 부와 권력을 향유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한 농부, 목자들, 어민들이었지요. 사두

  가이나 바리사이와 같은 지식인들은 성전 전통을 고수하거나 철저하게 율법에 매여 있으면서 그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

  하려고 했지요. 예수님께서 그들 중의 하나였습니까? 아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부유층과 집권층을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비리, 권리침해, 수탈행위나 위선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하시면서 반면에 가난하고 수탈당하고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을 가르치시

  고 특히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 들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행하신 회당

  에서의 가르침에서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며 주

  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으로서’ 당신이 바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드러내십

  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들려주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듣습니다. 이 비유에

  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현세에서의 삶과 내세에서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를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화사

  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고 거지 라자로는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었지요. 얼마 뒤에 둘 다 죽었지요. 거지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부자는 세올 이

  라고 부르는 죽음의 세계에 가게 되었지요. 부자가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애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

  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마음에서 나오는 행실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부자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라고 생각하실 분이 있

  지요. 부자에게 잘못된 것이 무엇이기에 그는 세올에서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한 마디로, 그는 나누지 않은 것입니다. 어쩌면 그의 재산은 정당하게 유산을 받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날마다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썼지 이웃과 함께 나누지 않았습니다. 라자로라는 거지가 자기

  집 문간에 와서 자기가 버리는 빵부스러기로 겨우 주린 배를 채우려 할 때도 전혀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손

  으로 빵을 먹었고 부자들은 우선 빵으로 손을 닦고 그것을 버렸습니다.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지는 바로 손을 씻고

   버리는 빵을 말합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거지의 이름을 밝히십니다. 라자로입니다. 라자로는 ‘하느님은 나의 도우심이다.’라는 뜻입

  니다. 이름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입니다. 자

  기 혼자서는 움직일수도 없어 사람들이 그를 부자의 대문간에 들어다 놓았지요. 온전히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요. 참으로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의

  탁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의 처지가 결국은 그를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하였습니다.

 

   온전히 나를 하느님께 맡길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부복하는 행위이고 하느님이 우리

  에게 바라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 없이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는 남의 도움이

  나 남의 신세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요.

 

   사람 人자는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이지요. 사람은 더불어 살도록 지음 받았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웃의 고통이나 어

  려움, 아픔을 모른 척 해서는 안 됩니다. 부자의 잘못은 나쁜 일을 저질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라자로의 종기투성이의 상처를 보고도 닭 먼 산 보듯 했던 것입니다. 개들까지

  몰려와서 종기를 핥아도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그냥 호화스러운 생활만을 즐겼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 안에 사랑이 있는가를 보시고, 그 사랑에 따라 우리를 알아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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