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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빛 함께
위령 성월을 맞으며 여러 가지 사념들이 오갑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묵상하고 미리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겠지요. 오래 전에 썼던 강론 다시 읽으며 조금 고쳐 나눕니다.
장자의 아내가 세상을 뜨자 친구 혜자가 조문을 갔답니다. 장자는 죽은 아내 옆에 앉아 장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요. 혜자가 놀라며 말했습니다.
“여보게, 친구. 그대의 아내는 평생을 같이 살았고 그대를 사랑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부인이 세상을 떠났는데 곡을 하지 않고 장구까지 치며 노래를 부르다니 그럴 수 있는가?”
장자가 말했답니다.
“그것은 그대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이네. 아내가 죽었는데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제 내 아내는 천지라는 거대한 방 안에서 편안히 영원히 잠자려는 것이니 내가 시끄럽게 곡을 하는 것보다 즐겁게 축원해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장자에 의하면 죽음과 삶이 마치 밤과 낮이 계속 순환하면서 바뀌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 우리 인간 생명이 원래 無에서 시작해서 다시 무로 돌아가는 것이니 슬프지만 울며 곡할 일이라기보다 오히려 즐겁게 축원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삶이 마냥 허(虛)이고 무(無)일 수 밖에 없다면, 내일에 대한 아무런 희망이 없다면, 오히려 그야말로 죽음은 끝장이고 참으로 무서운 일, 두렵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삶이 마냥 虛이고 無일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죽음 앞에 즐겁게 축원할 수 있는 여유는 도인이나 가능한 일이겠지요.
춘원 이광수가 한 말이 있습니다. 자기 아들이 8살에 패혈증으로 죽었을 때입니다. 삶과 죽음이 모두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고 무(無)라고 하더라도 슬프기는 마찬가지이라고.
우리에게 분명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슬픔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이 슬픈 일이지만 그 슬픔에만 머무르지 않고 위로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죽음으로 우리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삶으로 넘어가는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無)에서 온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서로 사랑을 나누다가 생이 다하면 그분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 그것은 온전히 하느님의 몫입니다. 생명은 온전히 그분 것입니다. 생명은 다만 그분이 주신 것이니, 때가 되면 그분께 돌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거기 어찌 인간적인 슬픔이 없겠습니까?
사랑하던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날 때 우리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사랑한 사람이지만 이제 그분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낫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분께 맡겨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허이고 무인 우주 공간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으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지니며 조용히 슬픔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다시피 시인 천상병은 [귀천]이라는 아름다운 시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그분께 돌아가리라고 노래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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