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八福)연속강해(17) 마태복음 5:1~12
긍휼의 마음을 복으로 받은 자(2)
팔복의 다른 복과 마찬가지로 ‘긍휼의 복’은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의 복을 이미 소유한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란 전제가 중요하다. 즉, “남에게 자비를 베풀 줄 알고 남을 긍휼히 여길 줄 안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늘의 복을 받은 믿음의 사람이 틀림없다.” 하는 전제가 이 구절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하늘의 신령한 복을 믿음으로 얻은 사람은, 어떻게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있을까? 간단하다. 먼저 긍휼히 여김을 받은 사람이,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있다. 다시 말해, 남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내면에 긍휼과 자비를 보유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결여됐다면, 절대로 남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 수 없다. 그렇다면 죄인은 남에게 베풀만한 긍휼과 자비를 소유했을까? 마음과 생각이 항상 악으로 향하는 죄인. 또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에, 무정하고 무자비한 짓을 일삼는 죄인. 그런 죄인에게 진정한 긍휼과 무궁한 자비를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세리와 다윗의 기도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도는, 죄악과 불의에 물든 자신의 가난함을 직면하고, 더불어 하나님의 자비와 그 의를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믿음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기도는 진정한 자비와 긍휼의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기에, 신자는 두 사람의 기도와 거기 담긴 정신을 심써 배우고 실천해야 마땅하다. 무엇보다 유념할 사항은 이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죄인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넘치도록 긍휼과 자비를 베푸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자비와 긍휼로 충만하시기 때문이다. 즉, 긍휼과 자비가 하나님 안에 영원 무궁히 들어차 있기에, 그것을 아무리 베풀고 나누실지라도 모자라거나 끊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충족히 받은 사람이, 타인과 세상을 긍휼히 여길 수 있기 마련이다. 즉, 먼저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가, 남을 불쌍히 여길 수 있다. 따라서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긍휼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틀림없다. 반대로, 인간이 이토록 무자비한 짓을 일삼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 바로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고, 그분과 단절된 상태에서 제멋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은혜를 충족히 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포용하는 공동체가 교회임을 명심하자.
그러나 ‘긍휼의 복’에 관한 내용도 이 정도로 끝내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많고, 그만큼 좀 더 살펴볼 내용이 남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매번 강조했다시피, 팔복의 각 구절은 개별적으로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녔기에, 각각의 복에 담긴 영적 의미와 교훈을 심도 있게 살펴봐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팔복의 모든 복은 마치 생명체의 한 몸처럼 긴밀히 연관됐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 해석할 수 있게끔 배치된 것도 간과하면 안 된다. 즉, 여덟 가지 복의 모든 내용은 몸의 각 기관처럼 동시적(同時的)이자 유기적(有機的)인 성격을 지님과 동시에, 각각의 복이 순서대로 배치된 까닭에 단계적(段階的)이자 논리적(論理的) 특징을 지닌다. 우선, “동시적. 혹은, 유기적인 특징을 지닌다.” 하는 말은 “한 가지 복이 분명하게 그 사람에게 임했다면, 그 사람은 나머지 복도 이미 소유한 것이다.” 하는 뜻을 담는다. 그러니까 ‘가난한 마음을 복으로 받은 사람’이 ‘애통의 마음’을 갖지 못하거나, 8절의 ‘청결한 마음’을 복으로 분명하게 받은 사람이 ‘가난한 마음’을 깡그리 상실한 채,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사람들처럼 “나는 풍족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부자이기에(계 3:17),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상관없다.” 하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팔복에 대해 친히 가르치신 예수님의 의도와 상관이 없고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 원리와도 거리가 멀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여덟 가지 복을 한꺼번에 담은 씨앗을 신자의 마음에 심으셨다면, 그 씨앗은 가난함과 애통함과 청결함과 화평함 등의 다양한 모양의 복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단계적. 논리적 성격을 띤다.” 하는 말의 의미는, 기초를 다지고 골격을 세운 후에 벽과 지붕을 만드는 것이 건축의 순서인 것처럼, 여덟 가지 복이 논리적인 순서로 연결된 것은 물론이고, 팔복 전체가 단계적으로 하나하나 쌓여서 완성된 구조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마음의 가난. 가난한 마음”이 팔복의 기초이자 논리적 우선순위로 맨 먼저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살펴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의 위치와 순서다. 본문을 보라. ‘긍휼히 여기는 마음’ 앞에 등장하는 복이 무엇인가? 바로 공의에 굶주리고 정의에 목마른 마음 즉, 공의와 정의에 관한 내용이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 청소년들과 ‘어울리지 않은 조합의 음식’을 주제로 농담 따먹기하며 “초코 된장찌개. 짜장 순댓국” 등을 언급했던 게 생각나는데, 팔복의 4번째와 5번째 복인 “공의와 자비. 정의와 긍휼”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고, 더불어 이 순서는 논리적으로 충돌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팔복의 순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공의와 자비는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동전의 양면처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정의와 긍휼이다.” 동의하는가? 그렇다면 공의와 긍휼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우선은 이 질문에 답해 보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당연히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로 충만하신 분이다. 또한, 그분의 사랑과 긍휼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크고 깊으며 풍성하시다. 게다가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처럼 계산적이거나 경박스럽지 않다(민 23:19). 그래서 그 은혜를 맛본 믿음의 사람들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도다.” 하고 찬송하는 것이다. 그만큼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은 다함이 없고, 우리를 향해 쏟으시는 그 사랑은 인간의 생각과 계산을 초월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처럼 자비를 오용하거나 사랑을 남용할 거로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왜냐하면, 긍휼과 사랑 못지않게 하나님께 자리매김한 성품이 ‘거룩함’과 ‘의로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와 악을 미워하고 대적하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죄인의 불의와 불법을 반드시 심판하신다. 이쯤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긍휼과 정의”를 어떻게 기록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성경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따로 떼놓고 언급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공의와 긍휼의 성품을 한꺼번에 언급한 구절도 성경에 종종 등장한다.
(호 2:19)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렘 9: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공의와 긍휼. 정의와 자비”의 상반된 성품이 물과 기름처럼 부조화하거나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세상과 인간에게 발휘되는 양상을 보라. 즉, 너무 다른 두 성질이 어긋나거나 충돌할 것 같지만, 도리어 하나님 안에서 조화롭게 자리매김한 것은 물론이고, 더불어 그 성품이 죄인을 위해 선하게 펼쳐질 거로 약속하신다. 무엇보다 “정의와 긍휼”의 상관관계를 비유적 표현으로 생생하게 기록한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시편 89편 14절로써, 이 찬양은 서로 다르게 여겨지는 하나님의 두 성품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고 실현되는지 가늠할 수 있게끔 독자들을 돕는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세 가지 번역으로 비교하며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역개정)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표준새번역) 정의와 공정이 주의 보좌를 받들고, 사랑과 신실이 주의 거둥을 인도합니다.
(히브리어직역) 의와 공의가 당신 보좌의 기초며, 인애와 진리가 당신 앞에 갑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인자하심. 또한, 정의와 사랑의 성품을 이토록 생생하게 표현한 성경구절은 드물다. 이 말씀으로 그림을 그려보라. 하나님께서 앉으신 자리를 떠받치는 것이 정의와 공의고, 사랑과 자비와 진리는 그분 앞에 엎드리는 모양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무게중심처럼 정적(靜的)으로 표현했고, 사랑과 자비와 진리는 하나님을 따라다니며 보필하는 시중처럼 동적(動的)으로 표현했다. 즉,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사랑과 자비로 일하시고, 당신의 공의를 사랑과 자비로 나타내시는 하나님. 그래서 만물과 만사를 공명정대하게 다스리시지만, 그 모든 것을 심히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하여 당신을 배반하고 대적했지만, 그런데도 공의의 자리에서 중심을 잡고 그들을 향해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시편 89편 14절은 바로 그 공의와 긍휼의 하나님을 선명한 그림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누차 강조했다시피, 하나님의 성품인 “정의와 긍휼. 공의와 자비”를 칼로 무 자르듯이 정교하게 나눌 수 없을뿐더러, 그 상반된 성품이 항상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앞서 언급한 내용은 시편 89편 통해 끄집어낸 한 가지 유형일 뿐, 하나님의 성품과 그 일하심이 항상 그런 식으로 발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도 위의 시편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 원리에 대한 진실을 담았기에 무시하면 안 된다. 게다가 시편 89편의 원리가 느부갓네살을 향한 다니엘의 권면에 고스란히 담겼다.
(단 4:27)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새번역] 성경은 다음과 같이 보다 쉽게 번역했다. “임금님은 저의 조언을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공의를 행하셔서 임금님의 죄를 속하시고, 가난한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죄를 속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면 임금님의 영화가 지속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좀 더 간략하게 정리하면 “왕좌에 앉은 당신이 공의의 중심을 지키고, 백성을 향해서는 긍휼을 베푸십시오.” 하는 뜻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의와 정의가 나무의 뿌리이자 줄기라면, 자비와 긍휼은 꽃과 열매인 셈이다. 또한, 역학적(力學)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성품인 공의는 구심점(求心點)인 셈이고, 그 공의의 구심점으로부터 뻗어 나가는 원심력(遠心力)이 사랑과 자비이며, 사랑과 자비의 원심력이 강해질수록 공의와 정의의 구심력(求心力)도 강해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팔복의 순서도 ‘하나님의 의’에 관한 내용이 먼저 등장하고, 긍휼이 거기에 뒤이어지게끔 배치한 듯싶은데, 그래서 시편 89편과 다니엘 4장의 영적 원리를, 예수께서 팔복의 교훈에 적용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정의와 공의를 추구하면 사랑과 자비가 결여되고, 사랑과 자비를 추구하면 공의와 정의는 무시된다.” 하고 생각한다. 특히, 공의를 외치며 정의 구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어떤 이들은 ‘인정머리 없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라. 오죽하면 “법대로, 원칙대로 합시다. 질서를 지킵시다.” 하는 말을 굉장히 꺼리는 현상까지 나타난다. 그러나 공의의 기초와 정의의 토대가 제대로 서지 않은 사회와 공동체는, 그야말로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사랑과 자비와 자유 등의 선한 것을 잔뜩 쌓아놓을지라도, 공의의 기초와 정의의 골격이 부실한 공동체는, 오래 유지될 수 있기는커녕 얼마 가지 못해 무너지거나 파괴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원리는 인간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상대방에게 무조건 수그리고 희생하는 관계. 맹목적으로 용납하고 일방적으로 베푸는 관계. 옳음과 그름 자체를 따지지 않고 관계의 기본적인 선조차 지키지 않은 채, 사랑을 빙자하여 무엇이든 허용하고 용납하는 관계 등은, 당장 환심을 사고 인기를 얻을 수 있을지언정, 동등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들끼리의 관계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공의와 정의. 원칙과 도리’ 등을 깡그리 무시한 ‘사랑과 긍휼’은, 도리어 관계의 변질과 파괴를 쉬이 부추기고 결국은 서로를 망가뜨리는 독으로 작용하기 일쑤다. 물론, 주인과 애완견의 관계는 그럴 수 있지만, 사람은 개가 아니지 않은가? 그뿐만이 아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를 생각해 보라. 부모가 공의에 입각한 원칙과 도리를 자녀에게 가르치고 본을 보이기 위해 훈육(訓育)의 수고를 감당하기는커녕,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고 못된 짓을 저질러도 무작정 용납하는 부모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괴물을 만들고 싶은가? 자식이 식칼을 들고 사람을 해치는데, 사랑과 자비가 중요하답시고 “더 잘 죽여라.” 하며 격려할 텐가? 또한, 아이가 원하면 다 들어주는 게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더 날카로운 칼을 그의 손에 쥐어줄 텐가? 사악한 습성과 불량한 행실을 전혀 고치지 않은 자식이,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괜찮은 직장에 취업하면 그만인가? 그것을 방치하고 방관하는 것이 더 흉측하고 끔찍한 일 아닐까? 그러므로 공의와 정의를 상실한 사랑과 평화는 공허한 이상에 불과할뿐더러, 시간이 갈수록 개인과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독으로 변질할 따름이다.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국가와 사회. 기관과 조직. 심지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서조차 공의와 원칙을 깡그리 무시하고 인정(人情)과 의리를 우선 앞세우는 현실을 보라. 게다가 알량한 이해관계(利害關係)에 얽혀 부조리한 관행과 편법을 용인하는 사례는 또 얼마나 많은가? 무엇보다 개신교회가 “은혜. 긍휼. 용서. 사랑” 등을 빙자하여 불법과 불의를 방치하는 사례는, 또다시 언급해봤자 입만 아프고 하도 들려오는 탓에 귀에서 피가 날 정도다. 오죽하면 “은혜로 합시다!” 하는 말은 “대충 덮고 넘어갑시다. 그냥 무마합시다.” 하는 상투어로 변질했겠는가? 또한, 한국교회가 힘 있는 자와 돈 있는 자의 시녀로 전락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개인의 풍요와 개교회의 물리적 성장만을 위해 목이 터져라 기도한 결과가, 오늘날 국민 5명 중 4명(75.4%)이 개신교를 불신하는 열매로 나타남과 동시에, 극우 정치세력의 온상(溫床)으로 전락하는 지경까지 낳은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세상 사람들의 오해다.” 하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눈에 낀 비늘을 벗겨내지 못한 사람에 불과하다(행 9:8,18).
설교를 마무리하자.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비유 이야기의 주인공인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강탈하여 먼 나라로 달아나는 죄를 저질렀는데, 그 이야기에서 탕자의 아버지가 어떻게 처신했는지 떠올려 보라.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여 굶어죽게 됐을 때, 아버지가 그를 불쌍히 여겨 또다시 돈을 대주었는가? 또한, 먼 나라로 떠난 그 놈을 무작정 편들며 “좀 더 즐기다 오라.” 하고 응원했는가? 오히려 아버지는 고향 집을 지키며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저 아들이 돌아오기만 간절히 기다렸다. 그리고 그 모양은 ‘공의와 자비’의 관계를 그림처럼 표현한 시편 89편의 고백과도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마치 이 아버지는 공의의 보좌를 떠나지 않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처럼, 배은망덕한 아들을 향한 애끓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고향집으로 그가 돌아올 때까지 오래 참아 기다렸다. 어떤 사람들이 사랑과 헌신을 빙자하여 “널 사랑하는 까닭에, 나도 너처럼 방탕하마.” 하는 식으로 함께 망가지지 않았다.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죄인을 긍휼히 여긴다.” 하는 말.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 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 하는 말을 “하나님은 부정부패를 얼마든지 눈 감아 주시고,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죄를 저지르신다.” 하는 식으로 오해하지 마라!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공의와 정의를 절대로 내동댕이치지 않으신다. 사랑은 무엇이든 다 용납하고 무조건 다 베푸는 게 아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다(고전 13:6).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라.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그러나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사랑. 그 공의와 사랑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으로서, 공의와 정의를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수고해야 마땅하다. 지금 설교자는 탁상공론이나 거대담론(巨大談論)을 논하는 게 아니다. 내 가정, 내 일터, 우리 교회,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공의와 정의의 중심을 잡고, 그것이 타인을 향해 사랑과 자비로 발휘되게끔 연습하라. 무엇보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먼저 채우고 배부른 사람에게서 샘물처럼 솟아나는 것이 자비와 긍휼이기에, 사랑과 긍휼을 추구한답시고 정의와 공의를 외면하는 짓은, 지독한 위선이자 공허한 이상에 불과하고, 거기서 얻을 것이나 유익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의의 기초 위에 긍휼의 집을 세우라. 또한, 사랑의 가지를 드넓게 뻗고, 긍휼의 잎사귀와 꽃을 무성히 피우며, 자비의 열매를 풍성히 맺자. 그러나 먼저 의로운 땅에 심긴 ‘의의 나무’로 서기를 간절히 바란다(사 61:3). 깊이 사랑하고 드넓게 용서하자. 많은 긍휼을 베풀자. 하지만 먼저 하나님의 의로 우리의 심령을 채우자.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긍휼과 자비를 넉넉히 베풀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https://youtu.be/CwP0PQyxKME?si=e4AlV4Fzod4fMwF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