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八福)연속강해(18) 마태복음 5:1~12
긍휼의 마음을 복으로 받은 자(3)
우리는 지난 설교를 통해 산상수훈의 서두에 해당하는 ‘팔복’의 내용이, 몸의 각 기관처럼 동시적(同時的)이자 유기적(有機的)인 성격을 지님과 동시에, 배치된 순서에 따라 단계적(段階的)이자 논리적(論理的)인 특징을 지닌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팔복의 4번째와 5번째 복인 “공의와 자비. 정의와 긍휼”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아 보였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생각하도록 촉구했었다.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는 영원무궁하고, 우리를 향해 쏟으시는 그 사랑도 매한가지다. 또한,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시기에 죄와 악을 미워하고 대적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성경은 “공의와 긍휼. 정의와 자비”의 성품이 물과 기름처럼 부조화하거나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세상과 인간에게 발휘되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무엇보다 “정의와 긍휼”의 상관관계를 비유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한 시편 89편 14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앉은 자리가 공의와 정의를 바탕 위에 세워진 모습과 함께, 사랑과 자비가 하나님을 보필하며 세상에 펼쳐지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따라서 공의와 정의가 나무의 뿌리이자 줄기라면, 자비와 긍휼은 꽃과 열매인 셈이다. 또한, 하나님의 공의가 구심점(求心點)인 셈이고, 그 공의의 구심점으로부터 뻗어 나가는 원심력(遠心力)이 사랑과 자비인 셈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팔복의 순서를 ‘하나님의 의’에 관해 먼저 언급하시고, 긍휼에 관한 내용이 뒤이어지게끔 일부러 배치하신 듯싶다. 기억하라. 무엇이든 다 용납하고, 무슨 짓이든 다 용서하는 게 사랑이 아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다(고전 13:6). 또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배부른 사람에게서 샘물처럼 솟아나는 것이 자비와 긍휼이기에, 사랑과 긍휼을 추구한답시고 정의와 공의를 외면하는 짓은, 현실과 괴리된 이상주의자의 헛꿈이자 철저히 계산된 위선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공의와 사랑. 정의와 자비’은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동전의 양면이나 한 몸처럼 떼려야 뗄 수 없을뿐더러, 더 나아가 공의 없는 사랑은 무질서와 방종을 낳고 사랑 없는 공의는 상처와 파괴만 남기기에, 서로의 조화와 균형을 통해 “상호보완(相互補完)”의 관계를 이뤄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정도 내용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렇다면 6절과 7절의 순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영적 원리와 교훈은 무엇일까?
지난 설교에서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그 자체에 대한 내용보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관한 내용을 좀 더 무게감 있게 다뤘고, 그중에서도 “공의와 정의를 거세한 사랑과 자비. 그 맥 빠진 긍휼의 허무함과 위선”에 관해 주로 살펴봤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악하기는 매한가지다. 공의와 정의만 신나게 부르짖고 긍휼과 자비를 외면하면, 공의와 정의의 가치가 제대로 구현되기는커녕, 도리어 조종과 통제의 살벌한 폭압은 물론이고, 다툼과 전쟁의 열매만 맺어지기 마련이다. 즉,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용납 등을 깡그리 무시한 채, 법과 원칙의 칼만 들이대며 무자비하게 잘라내는 일만 반복되면, 그 역시 공의와 정의를 거세한 사랑과 자비처럼 큰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는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반드시 동반하고, 공의와 정의의 줄기에서 활짝 피어나는 것이 자비와 긍휼의 꽃이다. 또한, 공의의 심장이 힘차게 박동하면 할수록, 자비와 긍휼의 피는 온몸으로 널리 퍼지는 게 원칙이고, 더불어 하나님은 “공의와 자비, 정의와 긍휼”이 어우러진 것을 기뻐하시고 거기에 당신의 영광을 충만히 나타난다. 이쯤에서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에게 조언한 내용을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 4:27)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지난번에는 이 구절을 “공의의 중심을 잡고, 긍휼을 펼쳐라.” 하는 뜻으로 해석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실현하는 방법임을 제시했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다른 각도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다니엘이 공의를 행하게끔 촉구한 대상은 느부갓네살 왕이고, 더불어 왕이 긍휼히 여겨야 할 대상으로 가난한 백성으로 지목했기에, 왕은 자신을 향해 공의를 적용하고, 다른 백성은 긍휼을 적용하게끔 권고하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라.’ 하는 의미와 같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난한 백성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공의를 행하는 일’이라면, 이 말씀은 “가난하고 약한 백성을 자비롭게 대하는 것이, 바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기에, 정의와 공의를 구현하는 방법 중 하나가 “약자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정작 대부분 사람은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엄격하지 않은가? 그래서 남의 조그마한 흠집은 손쉽게 손가락질하지만, 자신의 잘못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마 7:5), 성경은 그런 행태를 정의롭지 못한 거로 평가한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은 공의로 판단하고, 타인에게는 긍휼을 베푸는 것. 또한,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풂으로써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것. 이것이 성경의 교훈과 복음의 정신을 제대로 구현하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생리를 거스르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사람임을 나타내는 명확한 방식 중 하나임을 명심하자.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법과 규칙 등이 결국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임을 자주 간과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오늘날 교회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중이고, 심지어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대표적인 율법의 계명인 ‘안식일 준수의 명령’마저 사람을 옭아매는 족쇄처럼 쓰기 일쑤였던 탓에, 예수님은 율법의 명령이 기록된 본래의 목적과 그 취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가르치셨다.
(막 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중이었고, 허기졌던 제자들은 밀 이삭을 손으로 잘라 먹으며 배를 채웠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이 일을 빌미로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지만, 예수님은 위와 같은 말씀으로 반박하시며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드셨다. 즉,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너희는 율법의 세칙에 따라 손 하나 까딱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안식일의 명령을 제대로 지킨 것으로 생각하느냐? 착각하지 마라. 배고픈 자를 먹이고, 위험에 빠진 자를 구하는 일은 안식일을 범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안식일의 정신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모습이다.” 하고 꾸짖으셨다. 그리고 마가복음 2장에 등장하는 이 바리새인들의 태도가, 바로 정의와 공의를 앞세워 망나니처럼 무섭게 칼을 휘두를 뿐, 정작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은 깡그리 도려낸 자들의 모습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남에게는 한없이 엄격할 따름인 자들. 굶주린 자들의 서글픈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금을 밟았는지 여부만 따지는 심판자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너희는 불의한 재판관에 불과하고, 율법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거짓 선생들이다.” 하고 판정하셨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이 생각하는 공의와 정의는, 대체로 악을 대적하고 죄를 징계하는 것만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공의와 정의는 사랑과 긍휼을 반드시 요구할 뿐만 아니라, 처단과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회복과 구원이 공의와 정의의 궁극적 목적이다. 그리고 그 공의와 정의의 특징을 잘 나타낸 구절이 바로 잠언 21장 말씀이다.
(잠 21:21) 공의(公義)와 인자(仁慈)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성경은 공의와 인자 즉, 정의와 사랑을 동일한 가치와 개념으로 여기는데, 특히 공의와 사랑을 구하는 자가 얻게 될 것 중 하나가 “생명”임을 주목하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진정으로 공의와 인자를 간절히 사모하고 그것을 힘써 추구하는 사람은, 정의롭고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아가게 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삶으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앞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안식일에 관한 교훈은 잠언 21장 21절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처럼 참된 공의와 정의는 사람을 살리는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 나타나야 마땅하고, 더 나아가 참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이끄는 까닭에, 공의를 빙자하여 기계적으로 심판을 남발하고 맹목적으로 징벌의 칼을 휘두르는 일은,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그의 영혼을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지경까지 나아간다. 그러므로 공의와 정의의 잣대는 우선 자신에게 들이대고, 남을 향해서는 긍휼과 자비를 먼저 베풀라. 이것이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요구되는 숨은 명령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미 수차례 언급했다시피,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 진정한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또 다른 방법임을 명심하라. 설교자의 생각이 아니다. 신약의 서신서 중 하나인 야고보서가 그 진리와 영적 원리를 분명하게 보여주는데,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친동생이자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 사도가 불특정 다수의 신자들을 향해 쓴 편지다. 그리고 그 편지 중에는 오만방자한 부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야고보 사도는 무슨 이유로 부유한 교인들을 비판했을까? 간단하다. 부유한 교인들이 막대한 재산을 통해 쟁취한 사회적 지위와 세속적 권세를, 믿음의 공동체 안까지 끌고 들어와 가난한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부유한 교인이 가난한 교인을 업신여기기 일쑤였고(약 2:6), 믿음의 공동체가 그런 부자들의 행태를 제재하기는커녕, 그들에게 아첨하며 차별을 부추겼던 것이다(약 2:4). 그래서 야고보는 차별을 방관하고 조장하는 교회공동체의 행태와 함께, 가난한 교인을 업신여기는 교만한 부자들을 향해 “율법을 거스르는 불의한 죄를 저질렀다.” 하며 맹렬하게 비판했다(약 2:8~11). 아마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도 오늘날 목사들과 다르지 않게 어느 순간부터 “예배출석 여부. 헌금 액수. 교회 봉사” 등의 겉치레를 기준으로 개인의 믿음을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던 야고보 사도는 부자 교인들의 막대한 헌금과 사회적 지위 등에 휘둘리지 않았고, 가난한 형제를 돌보기는커녕 되레 차별을 일삼으며 무자비하게 하대하는 부자들의 행태를, 다음과 같이 신랄하면서도 매섭게 경고했다.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안식일이나 주일에 모여 규칙적으로 예배하고, 부유한 만큼 막대한 헌금을 구별하여 바쳤으며, 복음 전도를 위해 어깨띠를 둘러메고 노방전도까지 했던 부자 교인들. 그러나 자기들과 다르게 공동체에 물질적으로 전혀 보탬이 안 되는 가난한 형제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 성장을 저해할 것 같은 남루한 옷차림과 궁색한 몰골의 형제들. 그래서 부자 교인들은 가난한 교인들을 “능력과 지혜가 모자란, 인생의 낙오자(loser)”처럼 취급했을뿐더러, 심지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리가 판치는 세상과 다를 바 없이, 가난한 형제와 약한 형제를 짓밟고 그 위에 군림하는 짓이 “정의구현”이나 “공정(公正)”인 줄로 착각했던 게 틀림없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의 관점은 전혀 달랐다. 오히려 그는 차별을 일삼고 왕 노릇하는 부자 교인들을 향해 “긍휼과 자비를 베풀지 않는 너희야말로 불의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긍휼과 자비를 상실한 너희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하고 무섭게 경고했다. 이처럼 돈 많고 힘 있고 높은 자리에 앉은 자가 먼저 자신을 공의로 판단하되, 가난하고 약하고 낮은 자들을 먼저 불쌍히 여기는 것.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신앙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공의의 중심에서 긍휼을 나타내고, 긍휼을 베풂으로 공의를 증명하라!
무엇보다 공의의 중심을 잡고 긍휼을 베푸는 삶이 무엇인지, 가장 뚜렷하면서도 너무나 아름답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당신 자신이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죄의 저주에 사로잡힌 죄인들을 향해서는 끝까지 긍휼과 자비를 나타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순간에도 원수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공의의 중심으로 긍휼의 꽃을 피우고 싶은가? 그렇다면 죄인을 대신하여 공의의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끝까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라! 순결하고 죄가 없으시며, 완전한 의로 충만하신 분. 가장 큰 권위와 권세를 지니셨고, 완전한 힘과 지혜로 만물과 만사를 다스리시는 분. 그분이 우리 같은 죄인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공의의 중심으로 긍휼을 베푸셨다. 당신의 공의를 정죄와 심판이 아닌, 먼저 긍휼로 나타내셨다. 공의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자비와 사랑의 피를 흘려 구원의 강을 이루셨다. 즉, 당신께서 가진 힘과 지혜와 순결함으로 죄인들을 정죄하고 짓밟는 대신, 그 우월함과 높음으로 도리어 섬기고 긍휼을 베푸셨다. Noblesse oblige(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을 아는가? 프랑스어로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는 뜻으로써, 초기 로마시대의 왕과 귀족들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을 일컫는 말인데, 영화 ‘스파이더맨 1편’에 등장하여 크게 유행했던 이 말도 비슷한 뜻을 지닌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 2천여 명이 전사했고, 포클랜드전쟁 때는 영국 여왕의 둘째 아들인 앤드루 왕자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했으며, 6·25전쟁 때도 미군 장성의 아들이 142명이나 참전하여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위키백과).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요즘은 예전보다 훨씬 개선된 게 사실이지만, 돈 없고 빽 없는 젊은이들만 현역으로 군대에 가는 현실을 자조적으로 빗댄 ‘신의 아들과 어둠의 자식들’이란 말이 오랫동안 회자될 만큼, 아직도 특권층을 향한 특혜와 우대가 사회전반에 남아 있는 게 사실 아닌가? 큰 힘을 가진 만큼 큰 책임을 지기보다는, 그 큰 힘으로 제 배만 불리는 이들이 이 사회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종교를 여전히 주도하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진정한 공의와 긍휼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아첨과 값싼 동정심만 난무할 따름이다.
설교를 마무리하자. 오늘날 교회들은 공의의 중심을 올바르게 잡고, 이 세상과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있는가? 그리고 죄인을 긍휼히 여겨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의 친구로 오셨고, 더 나아가 죄인의 저주와 심판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처럼,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가? 세상과 이웃의 좋은 친구로 존재하는가? 또한, 교회가 공의와 정의의 중심을 뚝심 있게 지키고, 세상을 향해서는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는가? 안타깝게도 공의와 긍휼을 구현하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르기는커녕,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빙자하여 나와 다른 사람을 마귀나 적으로 간주하고, 종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또한, 세상을 향해서는 정죄와 심판의 칼을 거침없이 휘두르지만, 정작 우리의 불의와 불법과 부조리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한 행태도 마찬가지다. 신자들끼리는 같은 편이랍시고 은혜를 빙자하여 용서를 남발하되, 세상을 향해서는 지독히 무자비하고 냉소적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공의의 땅에 심겨져 긍휼의 꽃을 피우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써 공의를 실현하는 교회를 아직도 꿈꾸고 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교회와 신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목격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야말로 진정한 공의와 긍휼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소식임을 알게 될 것이다. 공의로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끝까지 죄인을 긍휼히 여기셨던 주님을 닮는 믿음의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기쁨이자 세상의 소망이다. 우리와 우리 교회가 공의와 긍휼로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https://youtu.be/QADOjNMtyDE?si=VUKFHXYkw3ogXN8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