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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책

문학의 최전선, 인문학의 이해와 실천

작성자정암|작성시간26.06.16|조회수35 목록 댓글 0

문학의 최전선, 인문학의 이해와 실천/노창수

 

[문장인문학회] 인문학 심포지엄

2026.6.13. 안동 KSI 한국국악진흥원연수원에서 “문학의 최전선, 인문학의 이해와 실천” 발제

강의를 했습니다. 함께 열열히 호응해주신 모든 분들께 보답 차원에서 강의 일부 내용을 올립니다.

1. 인문학의 의의와 중요성

문학인 여러분, 인문학은 왜 중요한가요? 그건 내 삶의 길을 내다볼 시야를 넓게 해주거나, 아니면 내 일상을 유연하게 해준다는 점이겠지요.

우린 한때 인문학 위기를 말하곤 했습니다만, 이는 삶에 대한 본질적 이해와 더불어 자아 존재감을 높이려는 일환에서 생겨났다고 봅니다. 자본주의 또 물질문명으로 말미암은 상실된 정신적 가치를 발양시키고자 하는, 예컨대 명약과 같은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우린 생활에 쫓기어 자신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나를 돌아볼 틈도 없이 바쁘게 살고 있지만, 그럴수록 인문학 정신은 더욱 필요한 것이지요.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려면 양식이 필수적이듯 말입니다. 인문학에 좀더 가까이 가면, 물질주의가 끼치고 간 스트레스와 상처를 조금씩 다스려 갈 수가 있습니다. 그건 마치 살고 있는 집의 낡은 부분을 리모델링하는 것과도 같지요. 우린 지치고 병들어 병원을 찾는 일이 많습니다만, 달리 보면 인문학을 멀리한 데서 온 한 갈급 현상이라고도 봅니다.

인문학에의 접근, 그것은 문학·역사·철학·예술 등을 통합해 보는 게 그 공부의 첫걸음입니다. 문학은 상상력을 다루는 글 읽기와 글쓰기로 자신의 창조력을 장양함이 첫째 목적입니다. 대저 문학가는 사람의 제반 일을 상상력에 실어 작품으로 표출합니다. 역사학은 과거와 현재를 종합적으로 파악합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미래를 재정립하는 반성적 철학에서 나옵니다. 과거에 있던 사실보다 그 사실이 왜 발생했고, 지금은 어떤 깨달음을 주는가에 대해 고구해 보는 것입니다. 곧 인문학 역사를 탐색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철학은 대상에 대하여 근본의 자질과 이치를 따지는 그 사유와 통찰의 지혜를 다룹니다.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 그리고 사안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데 원천이 되지요.

그렇다면 인문학을 주기적으로 배우고 깨달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린 매일 지친 삶을 살지만 진정 깨달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 필자는 그걸 다음과 같은 아포리즘으로 요약하여 일깨워 봅니다.

1. 塞兌閉門挫銳解粉 和光同塵 (老子의 『道德經』, 56장)

구멍을 막고 문을 닫고, 날카로움을 꺾고, 얽힘을 풀고, 빛을 부드럽게 해서

티끌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2. 虛心實腹 (老子의 『道德經』, 20장)

마음의 욕심은 비우고 배는 채웁니다.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머리가 무거워집니다. 배가 허약하면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지기 쉽습니다.

3. 濯去舊見 以發新知(退溪 李滉의 『퇴계문집』 別集, 25장)

낡은 견해를 씻어내야 새로운 지식이 피어납니다.

인문학은 옛것을 답습하는 게 아니라 옛것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정신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4. 自秋他春 (린 위탕[林語堂]이 발견한 중국 ‘淸代’ 張潮의 『幽夢影』 169장1) )

자신을 다스릴 때는 가을처럼 하고, 남을 대할 때는 봄처럼 해야 합니다.

자신에게는 냉정하게 남에게는 따뜻하게 처신합니다.

2. 고전에서 보인 인문학의 힘

〈시와 이야기의 힘〉

앙투앙 갈랑의 『천일야화』5) 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살려 읽기 쉽게 필자가 재구성하여 제시합니다.

여행을 즐기는 모험가 신드바드는 긴 여행을 하려고 배를 탔습니다. 그런 어느 날, 인도의 한 넓은 바다에 왔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선장이 터번을 벗어 던지며 소리쳤습니다. “지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소용돌이치는 바다로 들어왔소. 모든 여행이 끝장났소. 하느님께 기도나 하시오. 그분의 자비가 아니면 도저히 살아날 수 없소!” 말을 마친 선장이 손을 쓰기도 전에 밧줄은 끊어졌습니다. 순간, 배는 암초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신드바드를 비롯한 몇은 배의 잔해에 의지하여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결국 추위와 굶주림에 나머지 사람도 모두 죽고 식량을 아낀 신드바드만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도 죽을 무덤을 스스로 파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렇게 땅을 파고 있는데, 퍼뜩, 동굴 속으로 더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 땅을 파고 들어가자 과연 강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곧 주변의 나무로 뗏목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타고 강 하구로 내려갔으나 또 표류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시 탈진한 채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 그는 깨어났습니다. 그때, 한 무리의 흑인들이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우선 살았다는 기쁨에 환호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는 아랍 시를 읊었습니다.

“전능자의 이름을 부르라! 그대를 구원해 주리라. 다만 눈을 감고 있으라. 그대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실 터이니!”

그들 가운데는 마침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드바드에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우린 나쁜 사람들이 아니니 염려 마시오. 보아하니 무슨 기막힌 사연이 있는 듯한데, 우리에게 그것을 이야기해 줄 수 없겠소?” 흑인들은 사람들에게 말을 끌고 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정중히 태워 마을로 향해 갔습니다.

〈생각해 보기〉 좋은 시와 이야기(시와 소설)는 위급한 순간에도 생존의 메시지를 주는 일이 있습니다.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도 그러하지요. 우리가 왜 문학 작품을 읽고 감동하게 되는가, 그 감동은 실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이야기를 통하여, 삶의 지혜를 얻음은 물론, 습득한 지혜를 앞으로 실생활에까지 넓혀 활용할 방법을 깨우치기도 합니다. 문학의 효용론적 힘이란 바로 이와 같은 데서 발휘되는 것입니다.

3. 글쓰기에서 보는 인문학의 힘

〈쓰기와 퇴고 –박지원 ‘소단적치 인’(騷壇赤幟 引)〉

글 잘하는 것은 병법(兵法)을 아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글자는 병사고, 뜻은 장수입니다. 제목은 적국(敵國)이고, 전장(典掌)과 고사(故事)는 싸움터의 진지(陣地)입니다. 글자가 묶이어 구절이 되고, 구절이 엮이어 문장을 이룹니다. 이는 부대의 대오(隊伍) 행진과도 같습니다. 운(韻)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써 표현을 빛나게 함은 군대의 나팔, 북, 깃발과 같습니다. 조응(照應)은 봉화(烽火)고, 비유는 유격기병(遊擊騎兵)입니다. 억양(抑揚)의 반복은 적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고, 원제목을 지우고 다시 붙이는 것은 성벽을 올라가 적장(敵將)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함축(含蓄)은, 후일 지혜를 활용하기 위하여 늙은이를 죽이지 않는 것이고, 여음(餘音)은 전쟁에 만만히 개선하는 것입니다. 병법을 아는 자는 버릴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 만한 글자가 없습니다. 훌륭한 장수를 얻는다면 호미, 곰방메 자루로도 용맹한 군대를 이룰 수 있고, 비록 천을 찢어 장대에 매달아도 그 기운이 새롭습니다.

글의 이치를 안다면 집안의 흔한 이야기로도 학관(學官)과 나란히 쓸 수 있고, 어린이의 서툰 말로도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용감하지 않은 장수는, 계책 없이 갑작스레 주어진 제목에 임하니, 아득하기만한 성(城)을 마주함과도 같습니다. 눈앞에 놓인 붓과 먹은 키 큰 나무에 그만 기가 꺾여 버리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기〉 사물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요령은 무엇인가요?

글쓰기는 글자를 부리는 데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글을 퇴고할 때 교정부호는 적치(赤幟)와 어떤 관계일까요?

모름지기 글쓰는 사람은 한 문장을 위해 생각과 논리를 다 짜내야 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글이 있지만 아쉽게도 ‘비문(非文)’이 많습니다. 특히 문예지에 발표되는 유명 교수급 비평가가 쓴 글에 그런 우(愚)가 적잖게 나타난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문장 쓰기를 수련하지 않은 건 물론이고,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퇴고를 거듭하지 않은 채 서둘러 발표하는 까닭이 그렇게 만듭니다. 연암 선생이 지적한 바와 같이 글쓰기는 전쟁과도 같습니다. 전쟁은 살상으로 적을 항복시키지만, 글은 상대를 감동으로 눕혀야 합니다. 비문(非文)의 글은 독자에게 짜증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그 글쓴이를 때려눕히고 싶어 하지요

4. 시에서 보는 인문학의 힘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박철7) 〉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러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꾹쑥꾹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 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고 있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 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 속 깊은 곳에서

쑥꾹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시집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문학동네, 2001)

〈생각해 보기〉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는 무위(無爲)의 지혜를 다룬 빛나는 시입니다. “문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엔 깊은 연민과 사유가 녹아 있습니다. 그늘의 미학이 스민 그 나무는 현대인의 ‘마음’에 순수한 ‘향기’를 전합니다. 현실이 시를 가둘 수 없듯이, 시 역시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한 사유의 존재입니다. 시 쓰기란 사람과 사물의 마음을 서로 전하고 만져주는 작업입니다. 멀거나 가깝기도 한 것이 시의 뜻이지요. 아내와 어린 자식 앞에서 “그냥” 웃고 서 있는 철없는 시인이 바로 그 ‘시’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가난함과 지상의 낮은 것들을 품는, 그래서 밥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해학 담을 전언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왜 ‘영진설비’에 돈을 갚지 못했을까요? 화자가 지닌 정서는 참 특별합니다. 시에서처럼, 우리에게 인문학은 바쁠 것 없는 슬로시티(slow city)의 그 건강성을 추구하지요. 설사 외상값을 깊아야 하는 빚의 독촉과 같은 날선 욕설 앞에서도 비 맞고 서 있는 “자스민 나무”처럼 다소곳하니까요. 이 시는 무능한 가장의 슬픈 자화상이지만, 자기가 맘먹은 대로 살아가는 시인, 그러니까 진정 자유주의자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추구하는 일이란, 사르트르가 적시했듯이 그 ‘자유에로의 길’이란 사실입니다. 우리 주변엔 이런 사람들이 꽤 많을 듯합니다만, 실은 그 성질을 다 죽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지요. 시는 독자와의 서정 나누기를 즐기려는 듯도 보입니다. 외상에 밀린 돈을 갖다주는 시기를 자꾸 유보하는 화자이지만, 우리는 이 시를 읽는 동안 어느새 이런 사소한 정서에 그만 이끌리게 됩니다. 그게 현대를 살며 바쁘기만한 우리들이지만 자스민 같은 잔깐의 여유를 주게도 됩니다. 유약함 또는 낮아감과 더불어 저변의 공감대를 향해 가는 것이지요. 결국 “영진설비 아저씨”의 거친 독촉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아이의 고정된 일, 즉 설거지와 숙제하기, 그리고 외상값 갚으러 가는 길은 계속됩니다. 화자는 영진설비에 대해 아직도 “멀고 먼 데” 있다고 여깁니다. 언제일까요?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는요. 안타깝지만 그러면 화자의 눈물겨운 서정도 곧 끝나는 날인 듯도 싶습니다. 문학에서 인문학의 정신을 캐내는 일은, 느리지만 이런 진정한 느림의 서정성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나오지요.

5. 음유시인 이야기와 인문학의 깨달음

〈음유 시인 이야기〉

음유시인이 유행했던 18세기에, 시의 시대임을 알렸던 작가이자 낭만주의를 열었던 시인 노발리스(Novalis, 1772~1801)9) 가 쓴 미완성의 소설 『푸른 꽃』10) 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 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낯선 나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는 덕망이 높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고, 보석 또한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를 한눈에 알아본 뱃사람들은 돈만 낸다면 원하는 곳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나섰습니다.

배를 타는 동안 그가 지닌 보석들을 본 뱃사람들은 곧 탐욕에 눈이 멀어졌습니다. 배가 바다 가운데 왔을 때 뱃사람들은 그를 덮쳤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바닷속에 던져버리기로 했으니, 이제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놀란 시인은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며, 보물을 모두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계획대로 자신을 바다에 빠뜨리면 큰 불행을 자초할 것이라고 경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음모가 탄로 날까 두려워 결국 시인을 죽이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음유시인은, 마지막으로 시를 읊고 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시 읊기가 끝나면 스스로 뛰어들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만약 시인의 노래를 듣게 되면, 스스로의 마음이 약해지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부탁을 들어주기는 하되, 그가 노래하는 동안은 귀를 막기로 했습니다. 시인은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음률에 파도가 덩실대고 춤추는 물고기들과 바다 괴물들이 나타났습니다. 뱃사람들은 노래가 끝나기만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시인은 노래를 끝으로, 그의 악기를 가슴에 안고 검은 심연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자, 시인의 노래에 감동받은 괴물이 불쑥 솟아올라 그를 태우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한참 후, 시인을 갈대밭에 내려놓았습니다. 그 후, 시인은 사람들과 함께한 옛 시절을 그리며 홀로 바닷가를 걷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렇게 걸으며 시를 읊고 있을 때, 갑자기 바닷물을 가르며 그를 구해준 괴물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목구멍에서 무엇인가 쏟아냈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빼앗겼던 보물이었습니다.

시인이 바닷속에 뛰어들자마자 뱃사람들이 보물 재산을 나누다 큰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죽었고 배는 좌초되었던 것입니다.

(노발리스, 『숨은 꽃』 제2장, 민음사, 2004)

〈생각해 보기〉 시로 인하여, 위기로부터 구출되는 이 이야기는 「신드바드 바다 모험」에서도 있지만, 이를 적절히 예거한 건 노발리스의 『푸른 꽃』에서입니다. 음유시인의 노래와 연주에 감동을 받은 괴물 이야기에는 여러 상징적 장치가 있어 보입니다. 음유시인의 뛰어난 노래에 귀를 막은 뱃사람들, 그리고 괴물 고기와의 차이는 어떻게 다를까요? 시의 감동은 무지한 인간보다 오히려 괴물에게 더 크게 미칠 수도 있습니다. 음유시인이 보물을 되찾게 된 배경에는 괴물 고기까지 감동으로 이끌어낸 그 ‘노래와 시’에 있습니다. 이처럼 ‘노래와 시’의 위력은 위험에 처한 이를 구제해 주기도 하는 사뭇 미래지향적 인문학, 그 정수(精髓)입니다.

작가나 시인 자신이 애써 창작한 문학 작품이 이 이야기처럼 독자의 감동을 얻으려면 만상의 마음에게 파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7. 인문학의 범주와 정신

인문학의 개념은 인간의 존재, 역사, 정서의 탐구 등을 바탕에 둡니다. 하지만 여기엔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인문학적 삶의 시작은 인간 존재를 긍정하는 것, 인간다운 삶의 질을 높이는바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가치를 훼손하는 요소들을 극복해 나가고, 자신에게 요구되는 삶의 철학과 현재를 재구성해 내는 그 복합의 정신, 또는 그 응용의 정신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인문학의 범주와 정신을 다음과 같이 나름대로 정리해 봅니다.

1. 범주

인문학의 범주는 크게 문학, 사학, 철학(문사철)입니다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다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즉 (1) 그리스·로마 신화, (2) 불교, (3) 성경, (4) 동양철학사, (5)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6) 동양고전문학사, (7) 서양고전문학사, (

현대세계문학사, (9) 현대한국문학사, (10) 서양철학사, (11) 동양고대사, (12) 로마제국사, (13) 영국사, (14) 일본사, (15)한국사, (16) 사회계약론, (17) 신자유주의와 신경제, (18) 국부론, (19) 자본론, (20) 자연과학사 등입니다. 그러나 이 분류는 고정적인 게 아닙니다. 인터넷 카페, 소셜, SNS 등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인문학에 대한 소통의 장을 위하여 더욱 다양한 영역과 채널을 이용하기 위해 더 많은 자료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2. 정신

인문학은 인류가 축적해 놓은 고전들에 담긴 사상을 비롯하여 현대의 예술 문화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으로 접근해 가는 학문입니다. 정신적, 문학적 산물에 대해 폭넓게 연구하고 탐구해 가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문학적 정신에 대하여 논자들은 여러 형태의 재정립할 점 등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필자는 다음과 같은 아포리즘으로 그 기본을 논의하려 합니다.

첫째, 인문학은 사람의 품격을 잃지 않도록 깨우치게 하는 자아 성찰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 품격이란 대나무 마디처럼 곧고 균일하며, 소나무 나이테처럼 치우침이 없이 사안의 중심을 잡고 임해야 한다는 ‘죽균송심(竹筠松心)’의 품격을 지켜가야 합니다. 이는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11) 선생은 말입니다.

둘째, 인문학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인과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그 기본이 됩니다. 이에 대해 나와 당신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라는 타자 배려의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주로 인용합니다. 그러나 ‘역지개연(易地皆然)’ 즉 서로 바꾸어 모두 자연스러운 위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 맹자(孟子)의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셋째, 인문학은 생명 있는 것에 다가가 감동 감화시키는 예술과 같은 감각을 중시합니다. 외교관이던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의 문집 『계원필경(桂園筆耕)』에 보면 ‘접화군생(接化群生)’12)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관심 있는 사물에 다가가 뭇 생명을 살아있게 변화시키는 게 바로 감동 감화의 지름길입니다. 인문학의 실천에 있어서도 왕성한 생명력을 복원하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의 문학 작품이 소재와 대상에 다가감에 있어, 그것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왕성하게 하는 일 또한 그렇습니다.

넷째, 인문학은 개인적 인격 수양에서부터 사회적 인격 확대에로 그 품격을 고양해 가는 길입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사람의 일에 대한 참여 형태를 ‘체험(體驗), 경험(經驗), 징험(徵驗)’13) 등으로 나누었습니다. 처음엔 고되게 몸소 일을 하고(체험), 그 일에 경륜이 쌓이면(경험), 그것을 글로 써서 증명하는 기록(징험)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문학적 글쓰기란 바로 이런 ‘징험’의 과정을 거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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